《문예중앙》 가을호에 실린 이재훈의 두 편의 시 <Big Bang>과 <또 다른 제국>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상상력의 독특한 구조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나는 그가 보여준 시적 상상력의 기본틀이 사물, 혹은 존재의 신성함과 함께 그 내부에 잠재된 무의식적인 인간의 욕망을 한데 아우르려는 태도로부터 출발한다고 진단한다.


    속옷서랍을 열면 쿠스코의 만돌린 소리가 들린다 내 살의 마른 상처에 수슬수슬, 성난 꽃씨를 심고, 포근한 면으로 살짝 덮어, 오 나는 세계를 떠돌며 찡한 소리를 듣네, 벌거벗은 글자 속에서 영상 속에서, 상상의 소리를 거름 주고, 만도린 소리 꽃씨를 움트게 하네, 아 움틈의 소리에 내 몸 비옥한 흙이 되고, 속옷들 사이로 발갛게 충혈된 숯머리 올라오네, 여보세요, 타락한 관념론자씨, 태어남의 고통이 죽고 싶은 쾌감이란 걸 아시네요, 언젠가는 멈춰질 만돌린 소리, 꽃들은 피어나면서 쾌락을 배워, 반드르르 몸에 하나씩 불을 켜고, 아야 속옷들이 뒤엉키네, 언젠가는 죽을 몸부림, 나는 후후 꽃들의 불을 끄네, 생짜로 발기된 내 生저기 숙져가는 꽃들이 속옷 속에서 녹아간다 또 다른 생을 찾아가는 만돌린 소리 기적처럼 울리고, 속옷서랍을 닫는다, 또 열어보고픈, 내 서랍
    - <또 다른 제국> 전문


프로이드가 지적했듯이 무의식이란 의식의 햇빛이 도달하지 않는 지역에 존재하는 알려지지 않은 광활한 원시의 대륙이다. 시인은 무의식의 험로를 따라 이 원시의 대륙을 탐사한다. 원시의 대륙, 그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위한 시인의 몸가짐은 애초 무척이나 섬세하며 경건하다. 그는 마치 ‘속옷 서랍’을 열 듯 조심조심 그리로 향한다. 그 세계의 초입에서 그가 만난 것은 유별나게도 만돌린 소리인데, 그 소리는 고대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여기서 잊혀진 제국, 잉카의 이미지는 무의식의 잠재성과 연결된다. 잠재된 무의식 속에서, 그는 만돌린이 들려주는 천상의 선율을 경험한다. 무의식적 욕망과 신성함이 서로 반향하며 어우러지고, 그것은 다시 존재의 밑거름이 되어 우리의 삶을 더욱 살찌우고 윤택하게 만든다. 이때 무의식은 상상 속에서 천상적인 것과 합치된다. 마른 상처에 심었던 ‘꽃씨’는, 그리하여, 만돌린이 내는 상상의 소리로 인해 움트게 되는 것이다. 관념만으로, 이성만으로는 이러한 세계를 음미하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관념론자는 절대로 ‘태어남의 고통’이 ‘죽고 싶은 쾌감’과 통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천상의 선율을 들려주었던 그의 만돌린 소리도 언젠가는 멈출 것이다. 시인은 신성함이 다한 세계에서는 무의식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숙져가는 꽃들이 속옷 속에 녹아가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속옷 서랍을 닫고 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상상력의 작용도 마감될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언제고 그는 다시 자신의 서럽을 열어보려 할 테니까. “또 열어보고픈, 내 서랍”―그는 그의 상상력의 원천인 이 서럽을 다시 찾을 것이고, 다시 그 속에서 헤맬 것이고, 그러다가 지치면 서랍 닫기를 반복할 것이다. 나는 그러한 반복 속에 그의 삶과 시가 더욱 윤택해지고 성숙해져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텍스트를 읽어내려가면서 나는 문득 리쾨르(P. Ricouer)의 상징론을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리쾨르에 따르면 상징이란 인간이 더 이상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체가 그 주위를 둘러싼 유형, 무형의 제약을 비켜나가면서 우회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신성함과 욕망이 바로 그 전형적인 예에 해당할 것이다. 신성성, 거룩한 존재가 논리적인 설명 방식으로 증명될 리 없으며, 무의식의 원초적 욕망 역시 이성적인 사유에 의해 파악될 까닭이 없다. 이 지점에서 리쾨르는 시야말로 인간 존재를 위와 아래로부터 억누르고 있는 이러한 신성함과 무의식적 욕망을 무리 없이 종합할 수 있는 참된 원리임을 지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새로운 기존의 논리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논리이자, 동시에 논리를 넘어선 논리이다. 시인은 그 속에서 새로운 현실을 넘보며 새로운 논리를 산출한다.
이재훈의 시가 주목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당하는 기존의 현실에 집착하지 않는다. 역으로 그는 그것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스스로가 꿈꾸는 새로운 세계, ‘또 다른 제국’의 이미지를 제시하는데 주력한다. 여기서 우리가 마땅히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보여준 진지한 탐구의 자세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단순한 몽상가적 기질을 넘어선,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인의 진지함 내지 치열함과 대면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시쓰기란 엄연히 현실의 질곡을 넘어선 은총이자 구원이다.

― 김유중, <밀레니엄의 언어>, 《21세기문학》(1999. 겨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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