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성(聖)



김종태
(시인, 문학평론가)



우리가 현재 목도하는 세상은 생명과 성으로 가득 차 있는 싱싱한 공간이 되지 못하고 있다. 위에서 중견 시인 두 사람은 삶에 가담하고 삶을 관조하는 넉넉한 시선으로 세상을 포용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젊은 시인들은 생명과 성이 사라진 어두운 세상에서 절망의 노래만을 부르고 있다. 그러나 생명과 성에 대한 화해의 양식이나 이들에 대한 절망의 양식이나 모두 다 마찬가지로 생명과 성이 이 세상에 아름답게 현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다음에 인용될 이재훈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배꼽으로 차가운 톱날이 들어온다. 슬금슬금 배를 가르고, 시커먼 내장들을 걷어올린다. 텅 빈 뱃속에 햇살이 들어와 가만히 눕는다. 나는 환한 몸으로 세상 이곳 저곳을 누빈다. 오 따사로운 마음들. 어느새 햇살이 누운 자리. 꽃망울이 올라와 있다! 꽃은 피어나 온몸에 홀씨를 퍼뜨린다. 즐겁게, 내 몸 구석구석이 피어오른다. 사람들이 하나 둘 내게 찾아와 꽃 한 송이씩 꺾어 간다. 계절이 바뀌고, 꽃들이 떨어진다. 떨어진 꽃마저 누군가 주워간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내게 남은 꽃다지. 공중으로 날아간다. 나는 까맣게 타 들어간다. 잿빛 몸들이 부르는 거리의 합창. 나는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한다.

이재훈 「공중정원」 전문([시와생명] 2002년 봄호)

이재훈이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몽환적 구조를 근간으로 삼는다. 이 시에 나오는 체험은 현실이 아니라 꿈의 세계 즉 악몽의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서사 형식을 지닌다. 시인은 이 섬뜩한 경험의 상상을 통하여 생명의 의미에 대하여 진지한 물음을 던져 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시는 “배꼽”과 “꽃망울”이 주는 상징을 통하여 동물적 이미지와 식물적 이미지의 교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이색적이다.
시인은 꿈속에서 배꼽으로 칼날이 들어오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 배꼽은 생명 탄생을 가능하게 한 목숨의 뿌리이며 포유류 동물이 가진 몸의 중심이다. 그러나 이 배꼽은 육체적 기관으로서는 뚜렷하게 돌출되어 있지 않은 채 탄생의 흔적만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시인이 이러한 배꼽의 상징성을 문제삼은 것은 생명의 근원적인 의미를 반추해 보면서 이것에 힘입어 반생명적인 외압을 의식적으로 견디어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이 곳으로 들어오는 칼날은 인간 생명의 원형적 가치를 송두리째 파괴하려는 음모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인이 칼날의 형상에 역설의 일격을 가하면서 이 시의 서사는 반전된다. 그는 오히려 이 칼이 자신의 내부에 있는 오염된 내장을 말끔히 씻어내 준다고 말한다. 내장이 잘려지는 고통이 오히려 신비로운 생명의 확산을 가능하게 한 것일까. 내장이 걷어진 복부는 햇살들로 인하여 환해지고 그 곳에는 꽃망울이 오르고 꽃이 피고 홀씨가 생겨나면서 동물적 이미지와 식물적 이미지의 아름다운 교합의 공간으로 변용된다. 내부를 잃어버린 불구의 몸이 역설적이게도 그 상실로 인하여 오히려 ‘제의적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이한 생명의 향연 역시 오래 가지 못한다. 사람들이 내 몸의 꽃을 꺾어 갔으며 계절이 변화하면서 꽃들이 지고 그 떨어진 꽃마저 행인들이 주어가면서 그 몸에 피어난 생명의 꿈은 다시금 좌절의 길을 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생명의 축제를 유지하기란 이처럼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시인은 마지막 남은 “꽃다지”를 보며 다시금 타들어 가는 몸의 고통을 느낀다. 검게 탄 잿빛 몸이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시의 말미는 매우 음울한 상징을 낳는다. 이를 ‘비극적인 아이러니’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생명과 초월적 세계에 대한 관심은 문학의 오랜 주제가 되었다. 시인들은 때로는 그 화해로운 세계의 도래를 갈등 없는 언어로 형상화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그 곳에 대한 끊임없는 노스텔지어를 간절한 기다림의 언어로 표현하기도 하였으며 한편 이와는 달리 반생명적인 악의 세계를 그로테스크한 언어의 비수로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그러한 생명과 성의 세계가 우리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공히 인정할 터이다. 근대의 물질 문명은 이들 성스러운 가치를 자본과 물건의 위세에 종속시키려 하고 있다.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오늘날의 삶 속에서도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더욱 반생명적이고 세속적인 경험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세계에 대한 갈망의 끈을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된다. 첨단 기술 문명의 시대에도 생명과 초월을 꿈꾸는 언어의 주술사가 필요한 이유가 참으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 [문학의 미로], 하늘연못, 2003.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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