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노시스를 향한 열망
- 이재훈 신작시론


김유중
(문학평론가, 한국항공대학교 교수)



나는 포도나무의 가지이다. 나의 가지는 앙상하고 어려서 큰 열매를 많이 매달 수 없다. 다만 한가지 바람은 나 같은 가지에서도 아름다운 열매 하나쯤은 맺을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열매를 맺으면 새로운 가지가 나오고 열매가 없으면 나무에서 거세되기 마련이다. 고통의 연금술은 이 열매를 맺기 위한 담금질이다. 중세의 비술적 지식의 전파자들인 예술가들은 몇 개의 열매를 맺고 갔을까. … (하략) …
- [시인의 말] 중에서


1. 연금술사의 고뇌

이재훈의 시를 훑어보노라면, 이 시인이 지향하는 바가 현저하게 비합리주의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음을 알게 된다. 신비로운 몽환적 언술과 마술적인 이미지들로 가득찬 그의 시들은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겐 하나의 낯설음으로 다가온다. 그러한 낯설음에 대한 인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서양 고대와 중세에 걸쳐 전해내려오던 비교적 인식과 맥이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비교적 인식은 시인에게 끊임 없는 연금술사의 고뇌를 요구한다. 비교가 지향하는 바 비의적 진리 개념, 그노시스 Gnosis 는 결코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추론 과정에 의해 다가설 수 있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언어 속에 내재하는 비의적 힘을 찾아 정처 없이 떠나야 하는 고독한 수행의 길이 그의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성공에 대한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합리가 아닌, 이러한 비의적 힘만으로 진리 세계에 당도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만이 그의 시작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버팀목인 것이다.

너무도 목이 말라
목이 마르다는 걸 알게된 건
내가 광야의 시간을 견뎠기 때문일까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밭을 걷고 있었기 때문일까
뼈 밖에 남지 않은 악어가
모래밭을 걸아간다
나도 따라 걷는다
시간은 뼈까지도 헤인다
뼈가 투명해진다
어리석다, 어리석게도 물을 마셔야하는데
물을 찾아가는 악어의 골수를 마셨다
입 안에 썩은 내가 가득 고였다
말할 줄 모르는 벙어리가 되었다

- [마라의 오아시스] 부분

고뇌하는 자의 표정은 무겁다. 그가 바라는 것은 한편의 진정한 시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해야 거기에 다가갈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앞에 놓인 것이라곤 오로지 한없이 펼쳐진 “광야의 시간”이며,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밭”일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바라는 물, 즉 한 편의 진정한 시를 얻기 위해서는 어디든지 부지런히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막 한가운데를 떠돌며 헤매는 동안 갈증은 극에 달하고, 그 갈증을 이기지 못해 그는 무언가를 마시고 만다. 그러나 그것은 물이 아니라 “악어의 골수”였다. 그가 바란 것은 한 편의 진정한 시였지만, 정작 그에게 주어진 것은 악취가 진동하는 가짜 시였던 것이다. 입 안 가득 썩은 내가 고이면서 그는 결국 “말할 줄 모르는 벙어리”가 되고 만다. 이로써 연금술사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가고, 언어에 간직된 비의적 힘은 그의 앞에 더 이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2. 공중정원, 그 불가사의한 꿈을 쫓아서

비의적 힘을 향한 열망은 많은 경우 꿈 또는 환각의 세계를 찾도록 만든다. 이재훈의 시가 몽환적인 이미지와 비유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비로운 ‘공중정원’의 존재를 그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아주 먼 예전부터 그것은 기록으로만 전해 내려올 뿐, 아무도 실제로 그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보지도 못했고 볼 수도 없는 존재. 그것은 그에겐 영원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 불가사의한 존재로 다가온다.

배꼽으로 차가운 톱날이 들어온다. 슬금슬금 배를 가르고, 시커먼 내장들을 걷어올린다. 텅빈 뱃속에 햇살이 들어와 가만히 눕는다. 나는 환한 몸으로 세상 이곳 저곳을 누빈다. 오 따사로운 마음들. 어느새 햇살이 누운 자리. 꽃망울이 올라와 있다! 꽃은 피어나 온 몸에 홀씨를 퍼뜨린다. 즐겁게, 내 몸 구석구석이 피어오른다. 사람들이 하나 둘 내게 찾아와 꽃 한 송이씩 꺾어간다. 계절이 바뀌고, 꽃들이 떨어진다. 떨어진 꽃마저 누군가 주워간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내게 남은 꽃다지. 공중으로 날아간다. 나는 까맣게 타들어간다. 잿빛 몸들이 부르는 거리의 합창. 나는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한다.

- [공중정원] 전문

공중정원, 그것은 시인에게 영원히 풀 수 없을지도 모르는 난제이며, 동시에 일생을 걸고라도 기필코 풀지 않으면 안될 목표이다. 논리상으로는 도저히 접근 불가능한 미스테리의 세계가 거기에는 펼쳐져 있다. 순간적으로나마 그는 그 세계에 감각적으로 도달하였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 “텅빈 뱃속에 햇살이 들어와 가만히 눕는다. 나는 환한 몸으로 세상 이곳 저곳을 누빈다. 오 따사로운 마음들. 어느새 햇살이 누운 자리. 꽃망울이 올라와 있다! 꽃은 피어나 온 몸에 홀씨를 퍼뜨린다. 즐겁게, 내 몸 구석구석이 피어오른다.” 이 구절 속에서 우리는 시인이 도달한 환희의 극점을 엿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순간의 착각이었음이 드러난다. 순간의 환희가 지나고 나자 정원의 꽃들은 모두 어디론가 떨어져 날아가버리고, 그와 동시에 그는 까맣게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타들어간 잿빛 몸을 이끌고가는 그는 결국 남들처럼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는 이 시대의 많은 시인들 가운데 한 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아직까지 베일에 싸인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기에 공중정원은 우리를 매혹시킨다. 우리가 그것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내부에 불가능을 향한 도전 정신과 부재를 향한 열정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도전했지만 그들 앞에 놓인 것은 매양 까맣게 타들어간 ‘잿빛 몸’의 육체 뿐이다.
환각이란 결코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정녕 우리가 불가사의의 세계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현실의 바깥쪽에 놓여 있는 그노시스의 세계, 오직 환각과 몽상에 의지해서만 잠시 동안이나마 도달할 수 있는 그 비의적인 힘의 세계의 현존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버지가 기타를 연주하신 곳은 거대한 궁전이었다고 합니다 그 궁전의 돌계단이 너무 높았지요 다리가 아파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곤 노래 위를 떠다녔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했던 기억의 꽃잎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립니다 검은 말들이 기타의 현을 먹고 저렇게 아름답게 치장을 하다니, 참 감동스럽습니다.

- [기타가 있는 궁전] 부분

위 인용시의 배경이 되고 있는 ‘기타가 있는 궁전’이란 그러한 비의적 힘이 살아 숨쉬는 공간, 즉 그노시스의 처소라 할 수 있다. 그 곳에서 그는 비의적 힘의 존재를 확인하려 시도한다. 그의 부른 노래는 기타의 선율을 타기 전까지는 어두운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리는 ‘검은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타소리가 궁전 전체에 울려퍼지고 곧이어 따스한 햇살이 그 위에 내리비추자 그것은 곧 아름다운 노래로 변하게 된다. 그렇다면 기타를 연주한 아버지는 과연 누구인가. 아마도 그것은 절대자나 신적인 존재가 아닐까. 탁월한 기타 연주 솜씨로 나의 노래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존재, 그리하여 그것을 궁전 전체에 울려퍼지는 진정한 노래로 만들어준 존재란 이 경우 절대자적인 위치를 차지한 존재이지 않으면 안된다. 신의 기타 선율에 이끌려 그의 노래는 흘러나왔을 뿐이다. 노래를 부른 것은 그지만, 그것을 불러낸 것은 기타의 선율이라 할 것이다. 기타의 선율 속에서만 그의 노래는 노래, 즉 진정한 시일 수가 있다.

3. 그대는 기적을 믿어야만 하지

합리적인 인과 관계에 의해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을 일컬어 우리는 기적이라 부른다. 몽환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 그것은 아마도 기적을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기적을 믿는다는 것은 물론 터무니없는 일이다. 현대는 기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시대이며, 때문에 기적 같은 것은 바래서도, 믿어서도 안되는 시대이다. 더 이상 연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의적인 진리에 도달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고 연금술과 금지된 지식인 그노시스의 비의적 힘을 신봉하는 이단의 무리는 있기 마련이다. 현대에 들어 이러한 이단의 무리는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게 살아 남아 이들 금지된 지식에 다가서기 위해 끊임없는 암중모색을 거듭하고 있는 일군의 무리들이 있으니, 이들이 바로 시인이다. 어리석게도 그들은 기적을 신봉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적에 대한 믿음조차 없다면 그들의 시란, 그리고 그에 앞서 펼쳐지는 시작 활동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오한이 들고 입술이 부르터서 뭄뚱이가 버거울 때였지. 꿈을 꾸었어. 갑자기 뒷덜미가 서늘해져 지나온 것들을 다시 보지 않으려 캄캄한 앞만 보았지. 저 앞의 세상엔 어떤 동물들이 살고 있을까. 한 발자국 내딛을 때, 내 몸에 사박사박 모래알 밟는 소리가 났어. 오 누군가가 내 몸을 질근질근 밟고 있었지.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아침마다 청량리에서 신촌으로 가는 131번 버스를 타지. 어쩌다 예쁜 여인이 옆에 앉으면 주문을 외지. 너는 내 아들을 잉태했다. 새벽에 술에 취해 방문을 열고 불을 켜면 섬칫 놀라. 내 바지에 피가 흘러내리고, 아침에 보았던 예쁜 여인이 아기를 안고 있어.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뒤를 돌아보면 내 목에 십자드라이버를 꽂고 있는 사람이 보여. 당신을 사랑해. 어지러워. 온 몸에 피가 타오르지. 독한 감기약을 먹고 아침이 되면 131번 버스를 타지.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내 몸이 가벼워져 바다 위를 걷는다면, 당신의 손이 내 몸에 닿을 때 흐르는 피가 멎는다면, 그걸 누구에게 고백해야 할까.

-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전문

그노스티즘(Gnostism)의 신자들은 인간을 갇힌 존재로 이해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영혼에 갇혀 있고, 육체에 갇혀 있으며, 시간 속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세계 속에 갇혀 있다. 이들은 인간이 그러한 영어의 상태로부터 풀려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 스스로가 그러한 장막들을 걷어내고 눈앞에 펼쳐진 이 세계에 그들이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믿었다. 세계는 추악하며 우리 인간을 고독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인간은 그 속에서 구원을 기대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인간이 살아 숨쉬는 이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가능성만이 존재한다. 세계 속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 그것은 바로 기적을 불러들여 스스로 체험하는 일이다.
시인은 거듭해서 “기적을 믿지 않지”라고 되뇌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위에 나오는 내용이 한결같이 기적을 바라는 서술들로 꾸며져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는 그가 만일 진짜 기적을 경험하게 되면 “그걸 누구에게 고백해야 할까”라고 스스로에게 묻기조차 한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그의 거듭된 독백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적을, 그것도 아주 강하게, 믿는다는 사실이다.
한 편의 진정한 시를 바라는 마음은 결국 기적을 바라는 마음과 동일하지 않을까. 기적이 인간으로는 이루어내기 어려운 신의 권능의 징표이듯이, 한 편의 완결된 시, 진정한 시란 것도 어디까지나 신적인 영역에 속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인줄 알면서도 그것에 도전하여야만 하는 것이 이 시대 시인의 운명이다. 그노시스란 과연 이 시대에 존재하는가.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것의 현존을 확인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것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꾸준히 한걸음한걸음 거기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나는 이제 이재훈을 향해 주문처럼 다음 말을 외우노니,
“앞으로도 그대는 영원히 기적을 믿어야만 하지.....”

- [시와생명], 2002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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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의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는 환상의 언어, 꿈의 언어, 무의식의 언어를 통해 자아의 의식 세계를 보여준다. 꿈을 매개로 현실의 리얼리티를 표현하는 것은 확실히 매혹적이다. 현실이 허구일 때 꿈(환상)이 실재일 수밖에 없는, 그래서 꿈과 현실의 경계선이 무의미해진 시인의 세계인식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 꿈의 화법일 것이다.
이재훈의 시는 꿈의 화법을 통해 계기성이나 인과성이 탈락된 삶, 곧 시간적 질서나 논리적 과학적 질서가 탈락된 삶을 노래한다. 그것은 ‘꿈’, ‘술’, ‘독한 감기약’을 통해 드러나는 바 그의 시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이런 질서에 대한 부정과 파괴이다. 가령 “예쁜 여인이 옆에 앉으면 주문을 외지. 너는 내 아들을 잉태했다. 새벽에 술에 취해 방문을 열고 불을 켜면 섬칫 놀라. … 아침에 보았던 예쁜 여인이 아기를 안고 있어”와 같은 언술은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주문을 왼다고 현실 속에서 실현되는 것은 아닐 것이며, 하루만에 아기를 출산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결국 꿈꾸기나 술먹기, 독한 감기약을 먹는 행위는 모두 본능적인 행위 혹은 의식이 탈락된 상태에서 파편화되고 불연속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것이 의식의 활동을 억제한다는 점에서 욕망과 무의식과 관련된다.
욕망은 언어적 질서, 상징적 질서를 부정한다. 상징적 질서란 아버지의 이름, 그러니까 현실 원칙을 의미한다. 모든 현실이 상징적 질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질서가 삶의 실체가 아니라 그야말로 상징, 곧 헛것에 지나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가 노리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상되는 상징적 질서와 그런 질서에 억압되는 무의식, 또는 욕망의 관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의식의 허위, 사고의 허위, 그러니까 현실원칙의 허위를 직시한 태도가 바탕이 된다. 꿈과 환상은 이재훈에게 있어 그러한 허위를 극복하기 위해 추구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수용된다. 그의 꿈 속의 세계를 들여다 보자.
이 시에서 꿈 속의 공간은 의식이 태어나기 이전의 전의식 혹은 무의식의 공간이다. 꿈 속의 세계는 이성적 사고에 의해서 분열되기 이전의 거대한 암흑과 같은 곳(“깜깜한 앞만 보았지”)이며,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발견하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의 내면 세계에 나타나는 자아는 극도로 불안한 형상을 하고 있다. 꿈 속에서 나타나는 그는 “누군가가 내 몸을 질근질근 밟고 있”고, 누군가 “목에 십자드라이버를 꽂”고 있으며, “바지에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형상으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이런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그가 지향하는 세계와 현실 세계의 불일치에서 오는 불안이다.
“너는 나의 아이를 잉태했다”라는 언술을 통해 볼 때, 그가 지향하는 세계는 ‘어머니’ ‘아이(나)’가 합일되어 있는 공간을 떠도는 일이다. 그것은 “내 바지에 피가 흐르고”라는 언술에서 알 수 있듯이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서 ‘아버지’가 개입되지 않은 공간, 즉 현실원칙을 표상하는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상상적 공간이다. 상실한 어머니를 되찾고 너와 나가 한몸이 되기를 꿈꾸는 것이 그가 지향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면서 억압된다.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대상에게 투사되어 충족되기를 꿈꾼다. 결국 현실의 자아는 끊임없이 상상적 질서를 꿈꾸는 자아이며, 죽어 있을 수밖에 없는 자아이다. 이 상황을 더욱 애절하게 보여주는 것이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라는 언술이다. 그가 말하는 기적이란 현실 원칙을 부정하는, 의식이 제거된, 그러니까 욕망과 무의식이 지배하는 삶이다. 때문에 그는 “당신의 손이 내 몸에 닿을 때 흐르는 내 피가 멎”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실적 자아와 내면적 자아든, 나와 어머니든, 나와 사랑하는 사람이든 아름다운 합일을 꿈꾸는 것. 이것이 그가 시를 쓰는 원천일 것이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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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회의 그물망 속에 포획된 죽음


오늘날 현대인의 의식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인간의 삶이 이미 단단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 한치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것은 마치 꼼꼼한 그물망처럼 우리의 삶은 철저히 감싸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그 사회가 만들어 놓은 법칙과 질서에 구속되어 있는 수동적 인간으로 변모되고 말았다. 특히 자본주의적 삶의 구조는 인간을 생산과 소비라는 이중 구조 속에 편입시켜 놓음으로써 경제적 문제로부터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비극적 인간형을 만들어 놓았다. 손택수의 [셀러리맨의 죽음], 이재훈의 [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는 이러한 현대인의 자화상을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극단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중략) 손택수가 [세일즈맨의 죽음]을 통해 현대인의 죽음을 매우 사실적이고 직접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면 이재훈은 [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를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성을 환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관을 열었다. 몸뚱이 없이 얼굴만 덩그마니 있었다. 눈을 감았다. 무서워서 누군가를 불렀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떴다. 네 얼굴, 선혈 뚝뚝 흐르는 네 얼굴이 있다. 나는 그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관을 닫았다. 음악이 흘렀다. 관 속의 얼굴이 노래를 불렀다. 나는 몸없는 그 얼굴을 사랑한다. 그리고 일상이라는 지능적인 시나리오에 빼앗긴 네 몸을, 경멸한다.

― [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 부분


우리는 일반적으로 삶이란 항상 현재 속에 있고 죽음은 먼 시간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죽음이란 이미 우리의 삶 속에 공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체의 자각이나 깨어있음을 전재하지 못할 때 그러한 사회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란 어쩌면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재훈의 시는 이처럼 일상에 매몰되어 살 수밖에 없는 세계의 허구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훈이 그리고 있는 죽음은 주로 죽은 자의 얼굴에 대한 묘사에 집중된다. 특히 그가 그리고 있는 얼굴의 모습은 몸과 분리된 얼굴이라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이때 그가 그리고 있는 죽음의 형상은 온전한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변형되고 왜곡된 죽음임을 암시적으로 드러내 준다. “선혈이 뚝뚝 흐르는 네 얼굴/관 속의 얼굴이 노래를 불렀다”와 같은 구절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살아 있는 존재인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즉 관 속에 누워있는 죽은 이의 모습은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자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죽어서까지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무서운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인간의 신체를 집요하게 대상화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비극적 현대인의 모습을 가장 상징적으로 대변해 주는 것이 인간의 신체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오늘의 인간이 더 이상 숭고한 대상이거나 정신적 영역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냉소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즉 “일상이라는 지능적인 시나리오에 빼앗긴 몸”이야말로 온전하고 자족적인 존재가 될 수 없는 현대인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손택수와 이재훈의 시에 나타난 죽음은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내 몰린 자가 극단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짓누르는 폭력적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 강경희, <소멸에 관한 철학적 명상>(리토피아, 2002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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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의 [일식]은 자아의 우주적 확대를 보여주고 있다. 이재훈은 최근의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세계로 나가기를 두려워하며 일상성에 매몰되어 있는 자아를 관찰하며 여기에서 일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특히 일상의 질서와 금기에 갇혀 있는 자아를 바라보며 어느 날 문득 불러본 세계의 모습을 다룬 [일식]([시로 여는 세상], 가을호)은 인상적이다.


태양이여,
나는 이 큰 우주를 목놓아 불러본 적 없다
용기도 없이 컴컴한 방에 앉아
내 미래를 셈하고 오늘의 피로를 불평하고
쓰레기 같은 영상들만 구경했다

어느 날 나는
태양이여, 불러보고 싶었다.
늘 곁불만 쬐며 속으로 옹알거리기만 하며
이 엄살의 통각(痛覺)을 갖게 되었다
태양이여, 부르는 순간
내 항문으로 뱀이 숯머리를 들이밀고 왔다
온몸이 뜨거워져서 태양에게 다가가도 뜨겁지 않았다
불타지도 않았다

뱀이 태양을 갉아먹을 때
아름답다
하나의 꿈틀거리는 숨이 우주를 갉아먹을 때
위대하다
네 소멸이 위대한 미학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어느새 뱀의 뱃속에 태양이 들어가 있다
고요 가운데 입을 열고 들어가
한몸이 된
뜨거운 잉태

나는 큰소리로 태양이여, 불렀다
뱃속에서 울리는 뜨거운 공명

모든 사위는 어둠이 되었다

― 이재훈, [일식] 전문


달과 생물, 인간, 인간사와의 관계는 민중들 속에 이미 뿌리 깊은 속신으로 존재하여 왔다. 예를 들어 집안의 여성들은 대보름에 개에게 밥을 주면 밝은 달의 정기를 빼앗아간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풍요로움의 기원이 개에게 먹혀 좌절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보름에는 굶겼던 것이다. 이렇듯 ‘달의 기를 먹어버리는 개’라는 의식은 우리 일상의 밑바닥에도 존재했다.
이재훈의 [일식]은 속신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자아의 세계에 대한 태도와 관련을 맺고 있다. 시적 화자는 자아가 “이 큰 우주를 목놓아 불러 보지 않고 어둠에 갇히는 유폐의 형식을 취할 때 자신과 우주와의 관계는 상실되고 생명이 결핍된다는 것을 말한다. 컴컴한 방, 미래의 셈, 오늘의 피로, 쓰레기 같은 영상 등의 세목들은 폐쇄적 공간으로 존재하는 자아의 형상이 취하는 모습이다(다만 이런 언어들은 좀더 시적인 언어로 정제될 필요가 있다). 이는 일상 속에 함몰된, 자아 스스로가 만든 ‘곁불’과 ‘엄살의 통각’의 벽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 벽이 호명을 통해 깨어진다고 말한다. 이 때 “태양이여”라는 세계의 부름은 생명력을 통해 몸을 영원으로 확장시켜 우주적 차원으로 이어주는 매개로 작용한다. 이 호명의 순간에 “항문으로 뱀이 숯머리를 들이밀고” 온다. 체내의 구멍인 항문에서 뱀이 나와 태양에게로 가서 태양을 갉아먹는다. 뜨거워진 몸 때문에 태양에게 다가가도 뜨겁지도, 불타지도 않는다. 숯머리의 뱀은 불이면서 물이다. 스스로 탈 뿐 아니라 불순한 불을 연소시키는 피 속의 불은 하나의 커다란 순수성이며 우리 속에 체류하면서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생생한 불이다. 꿈틀거리는 숨이요 불인 뱀이 태양을 갉아먹고, 우주를 갉아먹을 때, 세계를 그 속에 담는 커다란 우주알이 생성된다(“어느새 뱀의 뱃속에 태양이 들어가 있다”). 자아인 몸 생명의 유한성은 우주적인 것으로 확장된다. 몸 속에 도는 피(뱀)의 생명성은 우주로까지 확장되면서 몸은 대지와 육체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우주적인 공간을 한 몸으로 잉태하게 된다. 이 때 몸은 대지와 하늘을 연결시키는 소우주로서의 몸이라는 육체성을 보여준다. “태양이여” 부를 때 “뱃 속에서 울리는 뜨거운 공명”을 듣는 순간, 이미 항문은 영원의 상징으로서의 달을 담는 그릇(우주알)이다. 그러면서 세계가 하나의 몸이 되는 차원이다.
이재훈의 시는 자아인 몸이 “비밀스런 유적인 두려움”([때 이른 유적])에서 벗어나 호명을 통해 세계를 여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몸으로 담고 내 것으로 끌어들이는 모험과 창조행위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때 자아는 질서와 금기의 공간에서 벗어나 무한한 자유의 공간으로 비상하는 것이다.

― 현대시, 2002년 10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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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혹은 할퀴며 키스하기


이승훈
(시인, 한양대 교수)




젊은 시인 이재훈의 <햇살의 집>(정신과 표현, 11 12월호)을 문제 삼는 것은 그의 이름이 나하고 비슷해서가 아니다. 일부에선 친척일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린 친척이 아니다. 글쟁이들은 언어를 먹고 사는 자들이어서 그런지 말들이 많다. 그것도 문학 이야기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뒤에서 헐뜯는 말, 있지도 않은 스캔들 만들기. 그러나 이재훈은 이 시에서 스캔들을 만들지 않는다. 그가 만드는 것은 햇살에 대한 새로운, 산뜻한, 신인다운 감각이다. 시인은 우선 감각이 예민해야 한다. 둔한 감각으론 안 된다. 병적으로 예민한 감각도 문제지만 그래도 둔한 것들보다는 낫다. 너무 예민하면 지나가는 말 한 마디에도 상처를 받고, 가을 햇살에도 상처를 받는다. 상처를 이기는 방법, 상처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방법, 나를 지키는 방법, 그것은 술마시기이다. 얼마나 좋은가? 이 시에서는 햇살도 술을 마신다. 시의 앞부분은


햇살이 술을 마신다. 거리는 방금 목욕을 한 것처럼 뽀얗다. 나는 버스 속에 앉아 술에 취해 이글거리는 햇살을 본다. 한 소녀가 버스에 오르며 묻는다. 이 버스는 천국으로 가나요? 햇살이 일그러지고 사람들이 비틀거린다. 광화문 네거리. 한 복판에 우뚝 선 이순신 장군 동상이 흠씰 움직인다. 칼자루를 놓고 싶다 후손들아! 꽃잎이 비틀거리며 이글거리는 햇살 속으로 날아간다.


와 같다. 햇살이 술을 마시니 햇살은 얼마나 좋겠는가? 이재훈은 버스에 앉아 술에 취한 햇살을 본다. 햇살은 빛이고, 거울도 빛이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 거울을 바라보고, 거울은 술에 취한 빛으로 가득 찬다. 나르시시즘의 황홀. 또한 이 빛은 꽃잎이고, 그러므로 꽃잎도 취하고, 물론 이재훈도 취하고, 이 글을 쓰는 나도 취한다. 버스에 오르는 소녀가 “이 버스는 천국으로 가나요?”라고 묻는 것은 그 소녀도 취했기 때문이다. 취하지 않고 어떻게 환한 대낮에 소녀가 말도 안 되는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소녀가 술에 취한 게 이상하지만 소녀도 인간이다.
광화문 네거리의 이순신 장군이 “후손들아!”라고 소리치는 것도 우습지만 아마 그도 술에 취해(대상 동일시)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고, 한편 이 소리는 정신차리라는 소리인 것 같지만 취한 판에 그런 소리가 들릴 리 없다. 결국 이런 현란한 감각은, 빛의 황홀은 모든 대상이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대상과 나는 매혹의 관계에 있다는 것, 매혹의 변증법과 통한다. 물론 햇살은 집이 없다. 햇살은 빛이고, 빛은 거울이고, 거울이 술을 마신다. 거울을 통해 내가 존재함으로 나도 술을 마신다. 거울, 빛, 반영(reflection)은 반성이고 사유이고 통찰이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나는 다만 내가 빛들의 조각이고, 파편이고, 이 파편들의, 매혹의, 황홀한 테러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안다. 이론가(theorist)는 테러리스트(terrorist)인가? 역시 늙은 감각보다 젊은 감각이 좋다.

― 이승훈, <햇살 혹은 할퀴며 키스하기: 나는 무엇을 아는가?>, 문학사상, 2000년 1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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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중앙》 가을호에 실린 이재훈의 두 편의 시 <Big Bang>과 <또 다른 제국>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상상력의 독특한 구조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나는 그가 보여준 시적 상상력의 기본틀이 사물, 혹은 존재의 신성함과 함께 그 내부에 잠재된 무의식적인 인간의 욕망을 한데 아우르려는 태도로부터 출발한다고 진단한다.


    속옷서랍을 열면 쿠스코의 만돌린 소리가 들린다 내 살의 마른 상처에 수슬수슬, 성난 꽃씨를 심고, 포근한 면으로 살짝 덮어, 오 나는 세계를 떠돌며 찡한 소리를 듣네, 벌거벗은 글자 속에서 영상 속에서, 상상의 소리를 거름 주고, 만도린 소리 꽃씨를 움트게 하네, 아 움틈의 소리에 내 몸 비옥한 흙이 되고, 속옷들 사이로 발갛게 충혈된 숯머리 올라오네, 여보세요, 타락한 관념론자씨, 태어남의 고통이 죽고 싶은 쾌감이란 걸 아시네요, 언젠가는 멈춰질 만돌린 소리, 꽃들은 피어나면서 쾌락을 배워, 반드르르 몸에 하나씩 불을 켜고, 아야 속옷들이 뒤엉키네, 언젠가는 죽을 몸부림, 나는 후후 꽃들의 불을 끄네, 생짜로 발기된 내 生저기 숙져가는 꽃들이 속옷 속에서 녹아간다 또 다른 생을 찾아가는 만돌린 소리 기적처럼 울리고, 속옷서랍을 닫는다, 또 열어보고픈, 내 서랍
    - <또 다른 제국> 전문


프로이드가 지적했듯이 무의식이란 의식의 햇빛이 도달하지 않는 지역에 존재하는 알려지지 않은 광활한 원시의 대륙이다. 시인은 무의식의 험로를 따라 이 원시의 대륙을 탐사한다. 원시의 대륙, 그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위한 시인의 몸가짐은 애초 무척이나 섬세하며 경건하다. 그는 마치 ‘속옷 서랍’을 열 듯 조심조심 그리로 향한다. 그 세계의 초입에서 그가 만난 것은 유별나게도 만돌린 소리인데, 그 소리는 고대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여기서 잊혀진 제국, 잉카의 이미지는 무의식의 잠재성과 연결된다. 잠재된 무의식 속에서, 그는 만돌린이 들려주는 천상의 선율을 경험한다. 무의식적 욕망과 신성함이 서로 반향하며 어우러지고, 그것은 다시 존재의 밑거름이 되어 우리의 삶을 더욱 살찌우고 윤택하게 만든다. 이때 무의식은 상상 속에서 천상적인 것과 합치된다. 마른 상처에 심었던 ‘꽃씨’는, 그리하여, 만돌린이 내는 상상의 소리로 인해 움트게 되는 것이다. 관념만으로, 이성만으로는 이러한 세계를 음미하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관념론자는 절대로 ‘태어남의 고통’이 ‘죽고 싶은 쾌감’과 통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천상의 선율을 들려주었던 그의 만돌린 소리도 언젠가는 멈출 것이다. 시인은 신성함이 다한 세계에서는 무의식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숙져가는 꽃들이 속옷 속에 녹아가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속옷 서랍을 닫고 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상상력의 작용도 마감될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언제고 그는 다시 자신의 서럽을 열어보려 할 테니까. “또 열어보고픈, 내 서랍”―그는 그의 상상력의 원천인 이 서럽을 다시 찾을 것이고, 다시 그 속에서 헤맬 것이고, 그러다가 지치면 서랍 닫기를 반복할 것이다. 나는 그러한 반복 속에 그의 삶과 시가 더욱 윤택해지고 성숙해져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텍스트를 읽어내려가면서 나는 문득 리쾨르(P. Ricouer)의 상징론을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리쾨르에 따르면 상징이란 인간이 더 이상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체가 그 주위를 둘러싼 유형, 무형의 제약을 비켜나가면서 우회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신성함과 욕망이 바로 그 전형적인 예에 해당할 것이다. 신성성, 거룩한 존재가 논리적인 설명 방식으로 증명될 리 없으며, 무의식의 원초적 욕망 역시 이성적인 사유에 의해 파악될 까닭이 없다. 이 지점에서 리쾨르는 시야말로 인간 존재를 위와 아래로부터 억누르고 있는 이러한 신성함과 무의식적 욕망을 무리 없이 종합할 수 있는 참된 원리임을 지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새로운 기존의 논리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논리이자, 동시에 논리를 넘어선 논리이다. 시인은 그 속에서 새로운 현실을 넘보며 새로운 논리를 산출한다.
이재훈의 시가 주목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당하는 기존의 현실에 집착하지 않는다. 역으로 그는 그것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스스로가 꿈꾸는 새로운 세계, ‘또 다른 제국’의 이미지를 제시하는데 주력한다. 여기서 우리가 마땅히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보여준 진지한 탐구의 자세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단순한 몽상가적 기질을 넘어선,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인의 진지함 내지 치열함과 대면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시쓰기란 엄연히 현실의 질곡을 넘어선 은총이자 구원이다.

― 김유중, <밀레니엄의 언어>, 《21세기문학》(1999. 겨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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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이란, 말뜻 그대로 새로움을 보일 때 가장 확실한 미덕을 갖추는 것이지만,
새로움이란 말처럼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지도 만나지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자리 나름의 뚜렷한 성격과 목소리를 보여주는 일만으로도
오늘날처럼 유행과 몰개성으로 점철된 세태에서는 값진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재훈의 시들은 젊은 사람답게 풋풋한 감수성이 돋보였다.
그 감수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어서
시인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기 나름의 시를 쓰는 것이다.
거기에 후천적인 노력이 더하여 빛을 발할 때
우리는 한 사람의 시인이 탄생했음을 알게 된다.
그의 시는 한밤중 자기 몸에 대한 욕망과 그 발산을
신화적 상상력을 바탕에 깐 수선화로 형상화하기도 하고,
눈 밟기를 통하여 뜻하지 않은 비상과 초월의 뜻을 새삼 읽어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상상력 또한 시인에겐 덕목이다.
앞으로의 분발과 대성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홍신선, 원구식


출처 : 현대시 1998년 3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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