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_관련자료'에 해당되는 글 97건

  1. 2012.03.09 유한성과 동일성 너머의 무한_박대현
  2. 2012.02.09 아만과 회감의 시 / 신동옥
  3. 2011.12.14 <현대시> 2011년 12월호 '올해의 좌담' 내용 중에서
  4. 2011.10.06 장미가 있는 산책길의 메모_ 이운진의 시편지
  5. 2011.09.13 도시의 감각, 글귀들, 귀신들 / 박서영
  6. 2011.09.09 첨단의 위기 속 우리의 자화상 / 김선주
  7. 2011.06.10 작품론_ <더 많은 햇살을!>_ 강동호
  8. 2010.08.18 최치언_ 좀 더 역겹고, 불결하고, 냄새나는 상상력
  9. 2010.08.16 시 <녹샘섬광> 시평
  10. 2010.06.17 김미정_ 나무 부서지는 소리 앵앵, 들린다
  11. 2010.04.14 강성철_ 이재훈의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평
  12. 2010.03.17 이재훈의 <Big Bang>
  13. 2009.12.18 곽명숙_ 일상을 히치하이킹하는 시인들에 대한 안내서
  14. 2009.11.27 이천 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적 원형 구조 연구_ 김병호
  15. 2009.07.30 ‘서태지 세대’의 궁지와 난문(難問)_ 김창환
  16. 2009.05.15 좌담 / 오늘의 전위 21세기 한국의 시동인
  17. 2008.10.08 유성호_ 서정의 옹호
  18. 2008.10.02 정준영_ 야성의 타자를 향한 러시안 룰렛 게임과 대황하의 변주곡
  19. 2008.10.01 이명연_ 자재에의 욕망
  20. 2008.09.17 권온_ 시적 시간 혹은 순간에 뿜어져 나오는 영혼의 불꽃
  21. 2008.09.17 배한봉_ 우포늪의 힘, 시의 힘
  22. 2008.07.31 구원을 향한 로드 포엠_ 김명원
  23. 2008.07.10 박판식, 이재훈 시인 채팅 - <새로운 세대의 시적 전망>
  24. 2008.07.08 그물 속의 시체와 강 건너의 등불_ 김옥성
  25. 2008.06.02 상처를 이기는 두 가지 방식
  26. 2008.04.22 도시의 얼굴_ 금동철
  27. 2008.03.14 '연애편지'와 '멜랑콜리아' 사이에서_ 김백겸
  28. 2008.03.13 포르노그라피와 현대시의 페티시즘_ 허혜정
  29. 2008.03.13 현재를 산다는 것 : 생의 파편 혹은 아날로그_ 김석준
  30. 2007.09.19 서정의 위기, 서정의 확장


1. 유한의 감성과 주체의 공백화

 

 

바디우는 낭만주의적 전통이 오늘날까지 남긴 유일한 정신적 자산이 있다면 유한성에 대한 예민한 자각이라고 정리한 바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유한성에 처해 있다는 자각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죽음에 귀착되게 하는 문제를 발생시켜왔다는 것이다. 열망과 좌절의 간극 속에서 발생하는 유한성의 페이소스는 낭만주의 전통 이후 동일성의 시학이 지니고 있는 감성적 자질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시인은 본질적으로 죽음과 파국이라는 유한성의 예감에 치를 떠는 존재다. 낭만주의적 영원과 신성, 혹은 무한자를 향한 열망은 인간이 자각하는 유한성의 강도를 더해왔던 것이다.
유한의 감성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바디우는 독특하게도 동일성의 대상인 무한을 일자(一者)가 아닌 다자(多者)로 해체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한다. 이른바 무한의 탈신성화. “무한을 아우라 없는 다수성들의 유형학 속에 산포시키기 위해 일자의 지배에서 끄집어내”는 것이다. 주체마저도 일자(一者)가 아닌 이자(二者), 혹은 다자(多者)로 해체되고 빈 공간이 됨으로써, 무한과 주체는 일자가 아닌 오직 “무한한 다수들”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무한한 다수들”은 일자(일자)의 세계가 아니라 ‘빈 공간’ 혹은 공백의 세계이다. 따라서 무한과 주체가 ‘공백’으로 환원되고 그 자체가 “무한의 다수들”이 됨에 따라 주체의 유한성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동일성의 시학(김준오)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시사하는데, 인간 주체(유한)의 공백과 절대자(무한)의 공백이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유한/무한의 대립관계가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디우가 지향하는 주체는 ‘공백’을 감싸는 둘레가 없는 일자(一者)를 폐기한 ‘비-전체’로서의 주체이다. 둘레를 제거한 인간 주체가 발산하는 무한의 공백은 무한자의 공백과 자연스럽게 겹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과 소멸, 즉 유한을 극복하고자 하는 현대시의 한 방향은 주체의 공백을 둘러싼 테두리를 제거함으로써 주체의 자리를 무화(공백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동일성의 시학은 무화되고 만다. 동일성의 시학이 절대․영원과의 분리의식을 해소하고자 유한자의 무한자에 대한 열망에 근거한 것이라면, 바디우의 주체 관점에서 동일성의 욕망은 폐기되어야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성의 시학(김준오)에서 시적 주체는 보다 큰 일자(一者)로 귀속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다. 대립과 적대 관계 속에서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향한 열망을 품게 되는 동일성의 욕망은 서정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내포한다. 에밀 슈타이거가 지적했듯이 서정적인 것은 세계와의 조화로운 상태 그 자체라면, 지금 여기의 세계를 부정하고 다른 세계를 열망하는 동일성은 페이소스를 필연적으로 동반하기 때문이다. 왜소한 존재로서의 주체는 이 세계의 결핍과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영원과 무한의 세계를 동일성의 대상으로 삼는다. 세계의 유한성을 향한 대립과 갈등 속에서 배태된 적대적 감정이 바로 페이소스이며, 영원한 무한자를 향한 동일성의 욕망을 충동하는 배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디우의 철학적 관점에서 동일성의 시학은 극복대상이 되고 만다. 바디우에게 동일성의 시학은 낭만주의적 전통의 유한성의 파토스를 이어받은 일자(一者) 중심의 세계관적 산물이다. 바디우는 유한과 무한의 대립이라는 낭만주의적 유산을 극복하고 주체의 공백 속에 내재한 무한의 공백을 읽어냄으로써 모든 것이 죽음(유한)에 귀착되고 마는 오늘날의 정신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자로서의 주체와 무한에 감금되지 않고 주체와 무한의 감싼 테두리를 제거함으로써 ‘공백’이라는 ‘비-전체’를 발견하는 것. 이로써 유한자로서의 동일성 욕망이 응축하고 있는 유한성의 페이소스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허무주의적 탈주체 이론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주체의 윤리를 가장 극단적으로 정립해 나가고자 하는 정치적 주체이론의 근간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의 시를 읽는 일은 의미 있을 것이다. 90년대 이후 한 흐름을 형성해왔던 주체의 균열과 유한의 감수성은 여전히 한국시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상자된 이재훈과 김영미의 시집 역시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2. 신성(神聖)의 파국과 균열의 기록

이재훈의 시는 신성(神聖)을 욕망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시원(始原)에 대한 원대한 물음”이 있으며, “문학하는 이유가 자기 구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흠의 고백」)는 제1시집(<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2005)의 고백을 환기한다면, 그의 시적 지향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인간 개체와 시원을 연결 짓는 원대한 꿈은 시의 유년을 지배했던 열망이 아닐 수 없다. 시가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발원되고 사회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존재와 우주, 그리고 근원과 시원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했던 물음이기 때문이다. 이재훈의 제1시집은 바로 그런 물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컨대 “새의 등을 올라타고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으며 나스카 평원에 새겨넣은 神의 형상을 한눈으로 보고 싶었다”(「나스카 평원을 떠난 새에 관한 이야기」), 혹은 “나는 어머니가 믿는 神의 안부가 궁금해졌지”(「사수자리」)라는 부분만을 보더라도 그의 시에 내재된 신성에의 욕망이 확인된다.
‘신성’은 자기구원의 언덕이다. 그러니까 이재훈의 시는 자기구원을 위한 ‘신성’에의 탐구에서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이재훈의 첫 시집은 ‘신성’에의 탐색으로 가득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성에의 탐색과 거기서 비롯된 균열의식으로 가득하다. “천 년 동안 날아가고 천 년의 천 년을 날아가지. 아무리 날아도 어딘가로 닿지 않지. 시간을 견디지 못해 몸은 찢어졌지”(「순례2」)처럼 신성은 시인의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신성’의 분리는 인간의 전락(顚落)과도 무관하지 않으므로 시인의 시선은 인간의 깊은 무의식(“잠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깊은 동굴이었지”(「사수자리」)과 드넓은 천공(天空)을 향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서 발원되었던 것이 시인의 ‘말’, 곧 시(詩)이다. 이재훈의 시적 주체는 신성에 가닿은 시원의 언어를 찾아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가” “노래 부르는” 시의 “추장”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내 목을 자르고”서라도 말이다.(「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6년만의 시집 <명왕성 되다>(2011)는 신성에의 동일성 욕망이 결국 파국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제1시집에서도 그 균열과 파국의 징후가 보이긴 했지만, 제2시집만큼 적나라하지는 않았다. 자기구원의 문학적 가능성이 제2시집에서는 여지없이 파국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 구체적 징후는 우선 ‘소멸’에 대한 압도적 감성에서 드러나는데, 「대황하」 연작시편은 인간을 지배하는 소멸의 역사를 형상화한다. 시인은 신성이 떠나간 이 세계를 “소멸을 향해 스스로 전진하는 몸짓.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풍경”(「대황하1」)으로 진술한다. 이 소멸의 세계에는 이제 더 이상의 구원은 없다. 이재훈은 말한다. “당신의 세상은 불구의 시간이 시작되는 때”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으므로 “일부러 가부좌를 틀 필요는 없다.”(「앉은뱅이꽃」) 그렇다면 그토록 갈구했던 신성(神聖)은 어디로 갔는가? 이재훈의 시에서 신성은 이 세계와 회복할 수 없는 간극을 지닌 것으로 그려진다.

밀었다. 저 새. 군무의 몸짓이 궁중을 긋고 지나갈 때. 하늘 귀퉁이 구름을 밀었다. 타인의 몸 몇 개를 밀었다. 늙은 햇살이 들판을 토닥토닥거릴 때. 밀었다. 어둠 속으로 햇살을 밀었다. 이 세계엔 바람이 없다. 밀고 밀린 생들이 서로 겹쳐 희붐히 향기만 가득할 뿐. 잊혀진 고향 땅만 언뜻언뜻 보일 뿐. 지겹다. 밀고 밀었다. 눈을 감았다. 도도록한 마음 가운데 한 머리가 덜컹 떨어졌다. 팔짱만 낀 몸이 잠시 움찔했다. 파릇파릇 새로운 몸이 피어났다. 당신의 형상은 몰라요. 부서진 뼈의 향기는 달콤했다. 어떤 운명을 잠시 밀었다. 물 쪽으로 향한 구름에 몸을 던진다. 저 새.
- 「건기(乾期)의 새」 전문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위 시에서 시인은 회복할 수 없는 신성을 노래한다. 이 세계엔 우주의 저 끝에 있을 신성(神聖)으로 밀어줄 바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밀고 밀린 생들이 서로 겹쳐 희붐히 향기만 가득하”고 “잊혀진 고향 땅만 언뜻언뜻 보일 뿐”이다. “밀고 밀린 생들”이라 했지만, 사실 이들은 모두 ‘밀리고 밀린’ “생들”이다. 신성의 세계는 이제 인간계와 분리되었으며, 그 간극을 극복하기에 너무 메말랐다. ‘건기(乾期)의 새’란 신성을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세계에 처한 인간의 비극을 아련하게 드러낸다. 신성(神聖)이란 이제 이렇게 진술된다. “당신의 형상은 몰라요. 부서진 뼈의 향기는 달콤했다.” 그럼에도 구름에 몸을 던지는 새야말로 인간의 운명을 의미하지 않는가, 라고 말하기에는 신성과 인간의 간극에서 비롯되는 피로도가 역치에 달했다.
그나마 아름답게 형상된 이 비극의 세계는 「만신전(萬神殿)」에 이르러 그 끔찍함이 폭로되고 만다. “저는 오래전 아버지를 죽이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뒤로 수많은 신들이 제 속에 들어와 소리를 지릅니다. 홀짝홀짝 살들을 빨아 먹습니다.”“허공의 사다리엔 긴 목을 가진 시체들이 걸려 있습니다.”(「만신전(萬神殿)」) 신성을 향한 인간의 열망은 숭고함을 잃었다. 이재훈은 숭고함을 상실한 이 결핍의 자리를, 신성이 인간의 살들을 ‘홀짝홀짝’ 빨아먹는 이미지로써 끔찍하게 드러낸다. 신성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힘겹게 건너가는 “허공의 사다리”에는 “긴 목을 가진 시체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성의 세계는 해체되고 만다. “처형의 시간” 이후 도달한 “연옥의 산”에서조차 “그 어떤 존재도 이름이 없다”(「연옥의 산」)는 사실은 ‘신성’을 향한 낭만적 환상이 여지없이 파국을 맞이했음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신성한 사랑에 대해 논”하는 일이란, “구름”과 같은 헛된 것을 먹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구역질이 나서/ 나무의 텅 빈 몸에 구름을 토하”(「카프카 독서실」)는 비루함에 맞먹는다. 그런데, “텅 빈 몸”이라니. 시인은 비로소 주체의 자리를 ‘빈 공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신성과 개체의 영성적 동일성을 추구했던 시인의 세계관은 주체의 ‘결여’ 쪽으로 기우는 것이다.

그동안 숨어 있던 마음의 보풀이
비늘처럼 떨어집니다.
입김을 불면 그대로 내 살들이
냄새를 풍기며 날아갑니다.
비린내가 가득합니다.
-「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 부분

고가도로 아래로 바람이 분다.
땅속으로 분다.
이 세계의 배꼽 속으로 분다.
모든 허공으로 분다.
모든 공허 속에 인다.
-「미궁의 열두 번째 통로」 부분

신성(神聖)을 향한 욕망이 “마음의 보풀이/ 비늘처럼 떨어지듯” 허물어진다. “입김을 불면” 그대로 “냄새를 풍기며 날아가”는 “살들”의 “비린내”. 신성의 확신으로 가득 차 있던 주체는 비로소 악취를 풍기는 것이다. 강한 것은 비리다. 암석처럼 단단한 주체는 허물어질 때 비로소 독한 비린내를 풍긴다. 비린내는 주체의 강도에 비례하리라. 주체가 ‘빈 공간’이라는 자기 파국의 비수는 마침내 신성(神聖)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고가도로 아래” 부는 세속의 “바람”이 “땅속으로”, “이 세계의 배꼽 속으로” 불듯이 말이다. 그런데 “땅속”, “이 세계의 배꼽”, “모든 허공”, “모든 공허”의 병치는 결국 하나의 의미망으로 귀결되지 않는가. 이 병치는 ‘신성’을 담지하고 있을 “세계의 배꼽”이 “허공”이자 “공허”임을 웅변한다. 그렇다면, 신성에 닿고자 했던 주체는 ‘빈 공간’으로서 ‘신성’과 합일을 이룬다. 그러나 이 합일은 절대적 무한으로서의 ‘신성’을 부정하고 주체의 확실성을 부정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합일이다. 이와 같은 주체와 신성(神聖)의 파국 속에서 이재훈의 시적 세계관은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제2시집의 제목이 <명왕성 되다>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태양계의 궤도로부터 이탈된 명왕성은 주체와 신성(神聖)의 궤도를 이탈한 존재의 비유에 다름 아닌 것이다.

거울엔 과녁이 없다.
내가 거울에 입을 맞추면
오히려 그는 없고 내 얼굴만
환하다.
어디를 찔러도 되돌아오는 아픔.
거울은 고요다.
어떤 사연도 담지 않고
내가 볼 때마다 붉게 충혈된
눈만 되돌려 주며
침묵하는 사태.
나는 도시의 은유에 머물렀다가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며 와르르
내 얼굴이 무너짐을 본다.
형체 없는 얼굴,
소실점으로 모이지 못하는 얼굴,
-「거울 속의 얼굴」 부분

겨냥할 과녁이 없는 세계, 욕망의 대상이 사라지고 말아 내 존재만이 홀로 남아 있는 세계 속에서 주체는 결국 ‘나’라는 존재의 “소실점”을 상실하고 만다. 이 “소실점”은 주체의 ‘누빔점’이 아닌가. ‘누빔점’을 상실한 주체의 파국이야말로 이재훈의 시가 새롭게 진입한 세계의 진경(眞境)이다. 하여, 시인에게 ‘시’(詩)란 시원(始原)의 신성(神聖)을 향해 날아가는 ‘자기구원’의 언어가 아니라 “어머니가 없는 공허한 시”에 지나지 않으며, 시인조차도 “재킷을 입고 시를 쓰”(「재킷을 입은 시인」)는 세속화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토록 극적인 세계관의 변화 속에서 상처는 피할 수 없다. 시인은 단지 ‘자기구원’의 “일생을 꿈꾸었을 뿐인데”, “챙, 소리에 놀라 보니 사방에 깨진 파편들이 빤짝”이는 것이다. “깨진 기왓장”의 “천년을 건너온 어떤 눈동자”에 시인은 “스윽” “손을 베이”고 만다.(「동경(銅鏡)」 파국의 과정에서 시인은 깊은 상처를 입는다. 이 상처의 깊이는 ‘신성’(神聖)을 열망했던 시인이 경험한 자기 파국의 강도를 알려준다. 따라서 이재훈의 제2시집은 신성(神聖)을 희구했던 주체가 비로소 맞이한 파국의 세계와 그 안에 새겨진 고통과 균열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_ <시와사상>, 2011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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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만과 회감의 시


신동옥


그런가 하면 이재훈의 시에서는 자기 긍정의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이재훈은 비극의 자기분화가 막 시작되는 지점을 짚어낸다. 이재훈은 선사先史와 인간 이전과 인간 저편을 21세기 지금 이 자리로 불러온다.

포도주를 마신다. 구릿빛 작은 잔들이 찰랑 부딪힌다. 열락으로 빠져드는 시간의 동맥. 당신과 약속한 피를 마시고 당나귀의 행보를 떠올린다. 고향에서는 아들이 아비를 죽였단다. 양식이 없어 굶어 죽는 아이가 창궐한단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살육이 유행이란다. 가뭄이 지나자 폭설이 내려 홍수가 난다. 전염병이 돌고 있다. 근질근질한 시간들. 성스러운 부패의 시간들. 기쁜 병의 시간들. 이곳은 세속적인 거주지가 아니다. 당신, 진리가 도처에 즐비한데 왜 이곳에 오셨는가요. 밤이 되어야 저 바깥의 문을 간신히 열 수 있다. 발정기의 암낙타가 침을 흘리며 내게 온다. 밤을 매도하지 마라. 이 길은 밤이 모든 이유다. 세속의 성전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하는 시간의 길목이다.
― 이재훈, 「유형지」(<시작>, 겨울호) 전문

시는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술잔과 도취와 황홀경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절대화된 무시간은, 자신의 핏줄을 빠르게 피돌이하는 숨 가쁜 피의 순환, 그 고양의 시간이다. 새 피를 뿜어내는 심장의 운동 속에서 “시간의 동맥”을 짚는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포도주는 신의 피를 은유하는 익숙한 상징이고, 당나귀는 인간적인 삶의 시련과 유랑을 표현하는 익숙한 상징이다. 이후에 이어지는 광경들은 처참한 살육의 카타스트로프다. 포도주를 마시는 입이 황홀경을 마주하는 신적인 계시의 시간이, 무잡한 살육과 비인간적인 이해불가능의 폭력의 세례로 변이된다. 포도주를 마시는 신적 계시의 입술은 창세기 11장의 언어 분화의 성서 알레고리를 떠올리게 한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로 시작되는 창세기 11장은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에서처럼 바벨탑을 쌓으며 알레고리의 카타스트로피로 향한다. 이어서 나오는 구절에 11장 9절이다.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홍수 이후에 셈으로부터 이어지는 온갖 세대의 이름이 등장한다. 성서에서 언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입술이다. 구음이라는 표현은 동일한 어휘의 자장 속에 있는 입술들을 이른다. 바벨탑 이후에 비로소 소수의 말이 처하는 자리마다 상징 권력의 소외와 폭압의 역사가 시작된다. 시 속에서 그려지는 처참한 살육은 사육제의 카니발이 아니라 태초의 대재앙과 통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입술이라는 말에서 언어라는 말이 떨어져나가면서 상징과 권력을 소유하는 인간의 역사는 시작된다. “기쁜 병의 시간들”이라는 규정은 다름 아닌 21세기 현재 속에서 이재훈이 발견한 아이러니다. 이재훈은 그것이 근원적이라고 갈파한다. 때문에 “당신, 진리가 도처에 즐비한데 왜 이곳에 오셨는가요”라며 메시아와 가짜 진리와 가짜 믿음을 야유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삶은 구원이 불가능하므로 “밤이 모든 이유”가 되는 길이고, 그 길이 “세속의 성전이다.” 구음이라고 말했을 때 믿음과 몸(입술)과 언표 행위와 인식과 존재가 한몸이라는 말이 된다. 바벨탑 이후에는 이것들이 갈가리 찢겨 분화가 시작된다. 역사 시대로부터 근대 이전까지를 지배한 상징 권력은 언어였다. 근대에 언어에 더해 보태어지는 상징 권력은 언어와 노동과 존재의 분기점에서 태동한다. 이후에는 상징을 실체적인 권력으로 전화하려는 노력이 자본의 자가 발전에 집적된다. 이재훈이 말하는 “세속의 성전”으로서의 길은 때문에 근원으로부터 유리된 공간이다. 성서의 알레고리를 뒤집어서 유형지의 알레고리가 태어나는 것이다. 이재훈의 전언을 받아들이면 모든 시는 유형지에서의 기록이 될 것이다.

_ <현대시>, 2012년 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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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중 문학평론가 허윤진의 말...


<벌레 11호>에서 나타나는 자기 부정의 신학적/존재론적 목소리는 이재훈의 <명왕성 되다>에서도 다른 양태로 나타납니다. 「연금술사의 꿈」 같은 시편에서 시 속의 목소리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곧 소멸한다는 것이죠. 이재훈 시인의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도 그렇지만 이 시집에서도 저는 시인의 정신이 지닌 격格의 미학적 가치를 봅니다. 조정권이나 윤의섭, 정재학의 시에서 제가 감동을 받을 때는 절제된 수사 이면에서 투명하게 빛나는 시인의 인격을 볼 때거든요.

이재훈 시인의 경우에는 시인이 위대한 영광이 아니라 사소한 패배를 인정할 때 그의 인격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시집의 표제작인 「명왕성 되다」는 한때는 태양계의 행성이었으나 태양계에서 이제는 제외된 명왕성에서 파생된 ‘명왕성 되다(plutoed)’라는 표현을 주제화하고 있습니다. 내부에 들어설 수 없는 자, 인정과 부정 사이의 간극을 살아본 자는 명왕성처럼 어둡고 차가운 빛을 발합니다.

- <현대시>, 2011년 12월호 기획좌담 <세파에 흔들리며 세파를 흔들며> 중에서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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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가 있는 산책길의 메모

_이운진

 

 

거리를 걷다 보면 자꾸 온몸이 붕 뜬다

바퀴가 싫어 걷다 보면

빌딩의 키가 커진다

핵폭발처럼 밝은 도시

기하학적인 철구조물로 가득한 낭만의 도시

밤마다 폭죽이 울린다

다리도 아프고, 목이 말라

시냇가로 가면 물이 바짝 말라 있다

차도 없고 집도 없고 양복도 구두도 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도시는 저 멀리 있다

가녀리게 풀벌레 신음하는

시냇가에 앉아 풀피리를 분다

도시에서 흘러나온 검은 물소리가

박자를 맞춘다

도시의 무관심이 차라리 행복하다면

위안이 될까

냄새나는 숲의 향기 때문에 마스크를 쓴다

차라리 예술을 할까

예술을 한다면 이해해줄지도

아주 잠깐 부요해진 듯하다

꼬깃꼬깃 접어놓은 그날들을 펴보는

옛사람의 산책

 

-이재훈,「미적인 궁핍」전문 (『시인시각』2011 여름)

 

  우리는 물질과 문명의 정점이라는 위대한 시대사를 함께 쓰는 영광을 안았지만, 그 영광만큼이나 큰 시대의 병리 또한 가지고 말았습니다. 어떤 자명한 도덕도, 순수함도, 자연도 상실해 버렸습니다. 현실과의 모순이 첨예할수록 정신적 상처는 깊어졌고 도시에서 잃어버린 내면의 깊이가 깊을수록 우리는 더 큰 극빈을 느꼈습니다. 속도와 크기로 짓누르는 도시의 풍경 속에서는 내 것이 아닌 시간들로 하루가 채워지고 그 하루도 모두가 질주 중에 있습니다. 보이는 것 말고는 믿을 것이 없고 믿는 것은 영원함을 잃어버린 그 앞에서 생은 한없이 초라해질 밖에요. 이러한 시대의 노이로제를 앓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이 무거운 구원의 책임을 예술이나 시에게 모두 다 지워도 되는 것일까요? 시인의 마음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도시의 거리는 눈부시고 화려합니다. 그 아름다운 불빛과 아우토반의 속도는 분명 매혹적이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깁니다. 어쩌면 시인의 말대로 핵폭발처럼 밝게 빛나고 사라져야 하는 것이 도시의 최종지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 도시에서 본래의 본성을 지키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지요. 그런 이유 때문이었겠죠. 도시와 욕망의 몰락을 예감한 시인은 아무것도 없이 도시를 벗어나 봅니다. ‘양복도 구두도 없이’ 떠나온 곳에서 조그만 시내를 만나 다리를 쉬며 풀피리를 불어봅니다. 그러나 그곳도 ‘도시에서 흘러나온 검은 물’이 지나고 풀벌레가 신음하는 곳이었습니다. 아, 시인의 안타까운 탄식이 들립니다. 어디에서 위안을 찾아야 하냐고 묻는 간절한 질문이 들립니다. 그 순간 예술을 떠올립니다. 예술이라면, 문학이라면, 시라면 잿빛 장미 곁을 지켜주고 불가능한 회복을 믿게 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정 우리 모두의 소망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다가 나는 미美, 아름다움이라는 말 쪽으로 무게를 실어 생각을 다시 짚어 봅니다. 짧은 경험을 바탕으로 짐작해보건대,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는 우아한, 고귀한, 숭고한, 선한 것의 성질을 다 아우르는 말인 듯싶습니다. 생경한 놀라움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소유나 욕망의 느낌을 배제한 상태에서도 즐기고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에 미적이다라는 말을 허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시인이 자연과 예술에 대해서 ‘미적인 궁핍’을 느꼈을 거라는 확신을 다시 하고선 깊은 공감을 표하는 것입니다.

  시를 덮고나서 나는 불 밝힌 도시의 밤거리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자연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스팔트가 동맥처럼 뻗어 있습니다. 저 핏줄에 힘을 대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생각합니다. 삶에 지친 장미와 시인이 하나의 모습으로 겹쳐집니다. 그것은 나와 당신이기도하고, 별빛과 별빛의 감정이기도 하고, 강물과 물소리이기도 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 둘 사이의 틈새를 채우는 슬픔이 유목의 도시에서 부유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중세의 어느 마을에서 겨울을 맞는 듯한 권태도 가득합니다. 동서남북 어디서나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찾아내는 불행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이 모든 것들을 견디기 위해 나는 장미와 시를 기록할 방식들을 고민해 봅니다. 내가 다시 감성의 풍요를 느낄 수 있는 일이란 몽환이라는 혁명뿐일까, 아니면 정말 꼬깃꼬깃한 옛사람들의 산책로를 펴는 일일까, ‘창조하며 나는 회복될 수 있었고 창조하며 나는 건강해졌노라’는 하이네처럼 창조적 열망에 온 몸을 기대야 하는 것일까? 당신의 대답이 담긴 가을 편지를 장미 꽃잎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_ 계간 <시인시각> 2011 가을 / 이운진의 시편지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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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문(拷問), 나의 주인
대자본의 영웅인 바퀴들
톱니바퀴에 대해서라면 얘기하고 싶어
나는 정치를 모르고 돈을 모르지
감각의 즐거움을 찾아다니는 광대
모호한 질서들이 난무하는 도시의 산책자
- 이재훈 「결락(缺落)」중에서

바람이 분다. 아니나 다를까 목이 다시 아파온다. 고추장을 찍어 한 입 먹다가 창밖을 본다. 누가 고추장 같은 벌건 노을을 하늘에 처발라놓았다. 언젠가는 남해바닷가 끝자락에 가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유보된 삶이 도시변방을 산책 한다. 누가 말한다. 남해 끝자락이라고! 요즘은 그런 곳이 더 비싸! 우리는 매일매일 새로운 각본을 쓴다. 때때로 운명을, 예언을, 고통을 몸에 문지르며 자본주의에서 자꾸 멀어져 가는 일에 대해 쓴다. 다가가면 자꾸 멀어지는 이상한 삶이다. 이 도시의 ‘톱니바퀴’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와 정치와 분배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뜻일 테다. 그 속에서 소외와 고독, 불안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뜻일 테다. 문학행위가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하여, 문학이 노동이 되기 위하여서는 장기적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 계획 속에는‘언젠가는’이라는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 숨겨져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끝없이 마찰을 일으킨다. 제대로 맞물리지 않은 톱니바퀴들은 끝없이 제 살에 상처를 내며 또한 고장이 나고 만다.

이재훈 시인은 톱니바퀴의 세상에서의 불화를 ‘결락’으로 표현하고 있다. 낸시 헤드웨이의 <세계 신화 사전>에 의하면 어리석은 험담꾼과 뇌물을 건네는 자들을 위한 방으로 ‘톱니의 방’이 있다. 시인에게 이 ‘톱니의 방’은 “아주 작은 나사와 구멍들이 얽혀있는 공장”이다. “톱니바퀴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자신의 심리에 대해 거울 속의 자신에게 속삭이듯이 어조는 다정하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누구에게 마음 터놓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인가. 들어갈 수도 빠져나올 수도 없는 ‘톱니바퀴’속에서의 삶은 ‘몸’과 ‘톱니바퀴’를 동일하게 만들어버린다.

톱니바퀴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이 세계는 아주 작은 나사와 구멍들이 얽혀있는 공장
사실 말이야
하늘도 구름도
빛과 공기의 구멍들이
서로 교합한 증거물들
톱니바퀴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쉬지 않고 몸에서 소리가 나지
째깍째깍 죽음을 단축시키는 소리
내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톱니바퀴
- 이재훈,「결락」(<시와표현>, 2011년 창간호) 부분

이재훈 시인에게 도시는 “모호한 질서들이 난무”하는 곳이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모호하게 잘 어울려 돌아가는 곳. 시인은 적응해야 하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 이재훈 시인의 다른 시 「밀랍蜜蠟」을 보자.

나의 기착지는 어디일까
뼈들이 비대하게 자라고
피의 색깔이 변하는 이 도시
스스로의 시간에 묶여
하늘의 목소리는 듣지 못하지
어제는 네 시간을 준비하고
두 시간을 강의하여 차비를 얻어왔지
싸우고 차지하는 법을 배우고 가르치지
내장을 편하게 하는 법칙들
홀로 슬프고, 홀로 애달픈 몸의 성분들
-이재훈,「밀랍 蜜蠟」(<현대문학>, 2011년 6월호) 부분

위 시에서 자본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고통이 배여있음을 알 수 있다. 정작 시인 자신은“싸우고 차지하는 법을”살아내지 못하면서도 누군가에게 그런 삶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 서있다. 두 편의 시에서 만져지는 것은 자아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야하는 이의 고독과 원죄의식이다.「결락缺落」에서 “잉태의 소리가 가득해”라는 문장은「밀랍蜜蠟」에서 다시 “그렇다고 너무 억울해 마오/ 이 땅이 당신에게 어머니를 선사했잖소/어머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이오/당신의 피를 받아 마시는 신비의 여인이오/당신이 체험했던 가장 깊고 따뜻한 말”이라는 문장과 연결된다. 그러나 이 두 문장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 「결락缺落」에서의‘잉태’가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다면 ‘어머니’는 한없이 따뜻한 의미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톱니바퀴’의 몸은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무언가를 잉태하지만 정작 중요한‘어머니’를 잃어버렸다. “당신이 체험했던 가장 깊고 따뜻한 말”인 ‘어머니’에서 시인은 상실한 존재자, 시인 자신을 찾아 방황하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 정치와 노동, 분배의 문제는 언제나 불리하다. 그 어떤 싸움에서도 유리하지 않다. 시인은 “감각의 즐거움”을 찾아다니는 “도시의 산책자”이기에 “정치를 모르고 돈을” 모른다. 그러나 정치와 노동, 분배와 연대에 익숙해져버린 자들과 함께 생존해가야 한다. 몸의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몸이 끈적끈적하게 녹아내리는 곳. 이런 도시의 풍경을 이재훈 시인은“비릿한 고통의 풍경들”이라고 한다.

몸을 만져보면
구멍 난 몸 여기저기서 물컹한 피가 흐르지
아프지않고 따뜻해
추억이라 하기엔 낭만적이지
이미 오래전 언약된 여행
자 이제 갈 때가 되었지
-이재훈,「밀랍蜜蠟」(<현대문학>, 2011년 6월호) 부분

시인의 예언처럼 “이제 갈 때가” 되었다. ‘언젠가는’은 너무 빨리 올 지도 모르겠다. 가까이 있는 이의 얼굴을 몇 번이나 더 보게 될까. 몇 번이나 더 만나 밥과 술을 먹고 남의 험담을 하고 손을 흔들게 될까. 언젠가는 남해끝자락 작은 마을에 가서 살고 싶다가도 이런 생각을 하면 이 도시의 변방에 더 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당신을 향한 증오와 사랑이 아직 많이 남아있기에.

_ <시와경계>, 2011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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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작품상 이달의 추천작 / 이재훈


숭고한 셀러던트


중얼거릴 수 없다
뱀이 온몸을 감고 있어 숨쉬기 힘들다
언제나 위기가 아닌 적은 없었다
고통 이후를 생각하는 시간들
늘 속도에 의지했으며
숨 쉬는 것들을 혐오하며 살았다

검은 바닷가 모래 위
구름은 낡았고 파도는 헤졌다
내 고통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멀리서 날 지켜보고 있다
낯설지만 또 낯익은 순간
오직 한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이 비릿한 고통의 풍경

사람들은 대체로 첨단을 잘 견딘다
그는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던가
울며 흐느끼고 있었던가
새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물비린내도 없이
파도소리만 가난하게 들렸다

칼로 내 가죽을 벗기려 한다
아, 이 극악한 자본의 성실함
생살을 찢어 슬금슬금 도려내야
도덕적으로 아름다운 이 땅과 하늘
밤이 되면 일하러 간다
삼인칭으로만 불리는 인생 공부의 완성을 위해
― <현대시>, 6월호

 


현대시작품상 추천작을 읽고

 

첨단의 위기 속 우리의 자화상

 

김선주

 

 


배고픔의 시기를 거치면 또 다른 세계가 암울한 공간을 비워놓고 삶의 모든 것들을 견뎌내는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가령 세계가 말하지 않는가?
“무엇을 보고 있니?”
“무엇이 보이니?”
이재훈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마치 맨발로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착취와 억압의 공간에 힘겨운 자존을 투사하고 있다. 이해하는 척 하면서 상대에게 오히려 버거운 도회의 ‘소 공간 점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미래를 잃어버린 세대의 노동현장은 허튼 몇 마디의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지난 시간은 되찾으려 하면할수록 스스로의 권리와 자유는 ‘자살’이라는 극단의 처방으로 이어진다. ‘목숨의 방’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인간이 가지는 참 존재는 ‘꿈’의 공간에서 ‘현실’의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어디에 속해 있는지 방향성과 정체성의 혼란은 이재훈의 시 “숭고한 셀러던트”에 그 의지를 담고 있다.
이재훈의 시에서는 ‘개인의 일상’에 침투하여 마침내 그 영혼까지 잠식해 버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함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각 개인이 자기만의 고유한 색깔과 가치를 발휘하기 어렵다. 개별성이 없는 삶은 획일적이며,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때 프로이트는 노동의 윤리가 지배하는 삶을 ‘현실원칙’에 의해 성립된 삶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억압된 ‘쾌락원칙’의 비극으로 보았다. 자본주의 역사의 상당부분을 노동에 수반된 억압으로 엮고, 모든 문명의 특징이자 인간 충동의 본능적인 ‘쾌락 지향성’에 근원한 필연으로 일반화한 것이다. 또한 노동에 대한 사회적 필요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나 ‘문명화된 조절’의 규칙에 복종하도록 강제되어야 한다고 서술했다.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한 개인을 발견해보자. 그 인생은 초라하지만 어쩌면 가장 소중한 가치의 실재이다. 어느 날 무심코 바라본 자리에서, 형편없이 시들어버린 한 송이 인생이 ‘우리의 자화상’으로 떠오른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시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숭고한 셀러던트(saladent)”는 결국 샐러리맨이 사회 현실에서 겪는 괴리감을 ‘인생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표현하고 있다.
1연의 시작부터 “중얼거릴 수”도 없고 “숨쉬기 힘들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그만큼 고달프다는 것인데, 이는 ‘뱀’이라는 동물이 평소 자신의 몸을 휘감는 모습에 빗대어 현실로부터의 갑갑함을 호소하는 것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 힘든 시기를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었고, 힘든 만큼 이런 현실을 더욱 더 못견뎌하는 모습이 세상의 “속도”와 “숨을 쉬는 것들을 혐오하며 살았다”에서 잘 드러난다.
2연에서도 부정적인 단어들이 보인다. “검은 바닷가”로 시각화하여 현실의 사나움과 비정함 등을 잘 살렸고, “낡고 헤졌다”는 시어를 통해 화자의 현재가 비참할 정도로 너덜너덜함을 보여준다. 그런 화자의 고통을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누구인지 명백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3연에서의 “하모니카를 불고, 울며 흐느끼고 있었던가.”라는 시구로 보았을 때 화자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동반자 내지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 혹은 그런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혈연 정도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첨단’이라는 단어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견디”고 있으나 그것은 기꺼이 견디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버티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화자가 이런 현실에 직면하고 있지만, 별다른 해결책 없이 그냥 그 속에서 살고 있음이 느껴진다.
반면 <이방인>에서의 주인공 뫼르소는 오후 4시에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 뜨거운 태양을 부조리의 대상으로 간주해 보면, 부정의 타파를 위해서 행해지는 가혹한 행위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지난 과오를 돌이켜보면, 인류의 ‘빛나는 이성’은 서로의 상처에 흠집을 내며 전쟁이란 빅 이벤트를 행함에 있었다. 전쟁의 상흔이란 결국 인간 모두에게 치유 할 수없는 고통을 준다. 세상을 사는 방법론은 인간이 추구하는 내면적 가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재훈의 시는 시대를 살아가는 샐러리맨의 비애라기보다는 한 인간이 가지는 삶에 대한 극복 과정이다. 자유와 희망을 품은 “새소리는 들리지 않”고 현실 속에 순응하려해도 돌아오는 것은 짙은 ‘허무’와 마음의 “가난”뿐인 것이다.
4연에서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가난”으로 인해 살이 찢어지고 가죽이 벗겨져 나가는 듯 극심한 고통을 시작으로 하는데 이런 현실을 “극악한 자본의 성실함”으로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철저히 자본주의에 의해 돌아가는 사회구조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서민층을 비롯한 화자 등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 이재훈은 생계를 유지시킬 수 있는 상황을 “생살을 찢어 슬금슬금 도려내야 도덕적으로 아름다운”의 구절을 통해 현 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나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도 아닌 억지로 해야 하는 이 인생의 굴레를 “공부”라고 표현하였고, 그 삶의 주체를 “삼인칭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에서 버텨나가고 있는 화자 자신 그리고 이 시대를 힘겹게 살고 있는 모든 가장들에게 반어법(irony)을 차용하여 “숭고한 셀러던트”로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셀러던트” 참 슬픈 시어로 다가온다. 치열한 삶속에서 서로 경쟁하고 싸워 이겨야 한다. 샐러리맨으로 성공해야 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행복은 곧 성공이라는 불가사의한 등식이 성립하고 있는 요즈음 모두 “인생 공부다, 인생 공부다.”라고 외치지만, 그로 인하여 너와 나는 더 이상 가까울 수 없고 늘 거리를 두며 살아가는 “삼인칭”으로 매번 차갑게 만나야 하는 것이다.
결국 시인 이재훈은 ‘달빛이 비치는 숲의 세계’를 그리며 ‘유토피아’로 향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 도피는 아니며, 한바탕 열정을 다해 나름대로 현실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근원적 낭만주의 기질을 토대로, 현실너머 ‘진실의 세계’를 염원하며 그 안에서 진정한 ‘자기세계’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으리라. 그는 지금 이 순간도 현실 ‘저 너머의 미학’을 조용히 꿈꾸고 있을 것이다.

- <현대시>, 2011년 7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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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햇살을!

 

강동호

 

 


진정성 같은 것 따위는 그야말로 초토화 되어버린 오늘날 시인은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타인의 아픔마저 생중계로 전시되고 교환가치로 변환되는 시대에, 스스로 의식의 최전방에 앞장서면서 세계의 고통을 온몸으로 증언했던 시의 악전고투는 여전히 독자의 폐부에 가닿을 수 있을 것인가.
일상을 도륙하는 악무한의 욕망에 투항하는 현대인의 나날들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재훈의 신작시들은 우리로 하여금 또 한 번 그와 같은 난제 앞에 서게 만든다. 이재훈의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2005)를 읽어본 독자라면 존재의 시원始原의 자리에 가닿고자 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도시 공간 속에서 환상적이고도 동화적인 색채의 공간을 펼쳐놓는 장면들을 기억할 것이다. 이 근대의 도시라는 폐색 지대에서, 시인은 “시대가 없는 거리의 시”(「거리를 훔치다」)를 씀으로서 잘못 태어난 자들의 운명을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아름답게 그려내었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는 현실의 납빛 공간과 모든 존재의 기원의 자리에 가닿으려는 언어의 꿈 같은 운동이 기묘하게 동거하는 장면이 연출되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독자가 읽게 된 신작 시편들은 이러한 상상과 현실의 접경지대에서 보다 현실의 편 쪽으로 당겨져 같다는 인상을 준다. 이를테면 그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하달하는 가르침을 성실하게 익히는 우리들의 일상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중얼거릴 수 없다
뱀이 온몸을 감고 있어 숨쉬기 힘들다
언제나 위기가 아닌 적은 없었다
고통 이후를 생각하는 시간들
늘 속도에 의지했으며
숨 쉬는 것들을 혐오하며 살았다

검은 바닷가 모래 위
구름은 낡았고 파도는 헤졌다
내 고통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멀리서 날 지켜보고 있다
낯설지만 또 낯익은 순간
오직 한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이 비릿한 고통의 풍경

사람들은 대체로 첨단을 잘 견딘다
그는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던가
울며 흐느끼고 있었던가
새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물비린내도 없이
파도소리만 가난하게 들렸다

칼로 내 가죽을 벗기려 한다
아, 이 극악한 자본의 성실함
생살을 찢어 슬금슬금 도려내야
도덕적으로 아름다운 이 땅과 하늘
밤이 되면 일하러 간다
삼인칭으로만 불리는 인생 공부의 완성을 위해
― 「숭고한 셀러던트」 전문

직장인(셀러리맨)과 학생(스튜던트)의 합성어인 ‘셀러던트’라는 표현이 적시하는 것처럼 위 시의 시적 화자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더 일을 잘하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이 시대 일상인들의 공회전과 같은 삶을 보여주고 있다. “삼인칭으로만 불리는 인생 공부의 완성”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화자는 한 번도 자신의 것, 삶을 소유해본 이력이 없다. 그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삶에 기생하면서 목숨이라도 연명하기 위해, “속도에 의지”한 채 어디론가 방향 없이 불철주야 이동중일 뿐이다. “첨단을 잘 견”디는 삶이란 이처럼 빠르게 내 일상을 몰아가는 가운데 현재의 고통에 무심해지고 오로지 “고통 이후를 생각하는 시간”에만 주관의 지향성을 집중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현재를 완벽하게 미래에 저당 잡힌 삶 속에서만 겨우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서 오는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덕분에 자본이 선사하는 아픔, “칼로 내 가죽을 벗기”고 “생살을 찢어 슬금슬금 도려내”는 것 같은 느낌이 더 이상 체험되지 않는 것이다. 아픔이 더 이상 아픔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 마취된 감각은, 병들었으나 고통을 어느새 망각해버린 현대인들의 고장 난 통각을 증언한다.
이재훈의 시에서 현실로 육박해 들어오는 실재는 이처럼 마비된 주체의 피로한 감각의 파노라마에서부터 비롯된다. 하여 “새소리”도 “물비린내”도 없는 삶, 그저 “검은 바닷가”의 가난한 파도소리만 울리는 인공적인 풍경만이 전경화 되는 것이다. 시적 화자의 실존을 ‘현실’과 ‘생존’이라는 이름에 결박시키는 나날들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와 같은 생활의 세계로부터 물러서지 못하고 언제나 삶 속으로 귀환 중이다.

햇살이 창가에 와서 눕는다
우리는 저 찬란한 햇살을 의지하지 못한다
강의실은 학생들로 빼곡하다
사육당하는, 사육당하고 싶은 청년들
먼 대양의 꿈도
격정적인 연애의 꿈도 잊었다
따닥따닥 볼펜이 책상을 찧는 소리
얼굴 모두에 수상한 간판이 붙어 있다
강사는 얘기한다
꽃잎 떨어지는 날들을 탐하지 말라
햇살보다 형광등이 우리에겐 더 소중해
― 「꿈꾸는 강의실」 부분

사정이 이러하거니와, “사육당하는, 사육당하고 싶은” 인간들, 그저 “수상한 간판”만을 달고 활보하는 인간들의 틈에서는 설사 무엇이 씌어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책상을 찧는 소리”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펜의 머리를 눌러야만 중심이 나오는/ 저 결박의 세계/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종이와 펜으로 묶는/ 상생의 세계”라는 표현이 냉소적으로 꼬집고 있듯, 위 시의 화자가 처해 있는 세계는 ‘상생의 세계’라는 미명으로 치장된, 그러나 실상은 모든 이들을 숨 막히게 만드는 결박과 구속의 끈으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공간이다. 이 극도의 강박적인 자기 결박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언제나 “햇살보다 형광등”이다. 꿈마저 사육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저 잔인한 공간, 장밋빛 미래를 인질 삼아 인간의 열정을 삭막한 노동으로 전환시키는 저 끝 모르는 욕망의 세계를 휘감는 근본 기분은 지루함과 무기력함이다.
이러한 권태와 무력함은 일상의 나날들을 파르마콘pharmakon으로 바치는, 거짓된 번제燔祭의 풍경으로도 빚어진다. 이를테면 그의 또 다른 시 「번제燔祭」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내 모독을 치유”하고 “타인을 용서”한다는 명분으로 벌어지는 어떤 속물적이고 반윤리적인 장면이다. 때로 우리는 현실을 위한 알리바이로 신성을 도용하는 법 아니겠는가. 그러니 신앙으로 눈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눈물의 산물”인 것이고,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엄숙해지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숫양을 학대하고 태”울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널브러지고, 피가 솟고, 사나운 개들이 짖고, 젊은 남녀들이 허리를 돌리며 춤을 추”는 시적 광경을 보고 어딘지 모르게 머쓱해진다면, 그것은 저 광기어린 이미지들이 바로 우리의 삶 자체를 저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재훈의 냉소적이고, 다소 비극적인 세계 인식이 온전히 검은 페이지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다. 그의 시편들에는 한낱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던 우리의 죽어 있는 삶을 되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햇살이다.

늘 어두웠다. 구석진 곳으로만 들고 났다. 대지가 아닌, 동굴의 습한 곳이 내가 꿈꾸는 곳. 어스레한 어둠 사이로 햇살 한 줄기. 길게 뻗어 내 눈을 찔렀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터질 것 같은 안압眼壓을 느끼다 이내 평온해졌다. 뒷덜미가 서늘해 만져보니 가늘고 날카로운 칼끝. 한 줄기 칼이 머리를 관통했다. 박힌 칼을 뽑아냈다. 뜨겁고, 살 타는 냄새가 나고, 나는 혼절했다.

다시 절벽. 아래엔 검은 물이 흘렀다. 구름은 빠른 속도로 바위를 훔치고 달아났다. 나는 절벽에 달라붙어 기어올랐다. 저 아래의 검은 물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가기 위해. 등허리가 따끔따끔했다. 먼 산에서 몇 줄기 햇살이 긴 협곡을 빠져나와 내 등에 박혔다. 절벽의 난간에 동굴이 있었다. 나는 패배한 것일까.

온몸에 박힌 햇살을 하나씩 뺐다. 고통스러웠으며 황홀했다. 동굴을 나가 하늘을 봤다. 파란 하늘 가득,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얼른 옷을 벗었다. 알몸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많은 햇살이 내 몸에 박혀 반짝반짝 빛을 냈다.

몸은 뜨겁게 허물어져 갔다. 저 아래 검은 물을 향해 햇살 한 줌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밝고 뜨거운 칼이 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텅 빈 계곡을 날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몸이고 싶었다.
― 「햇칼」 전문

“햇살보다는 형광등”(「꿈꾸는 강의실」)에 길들여진 채 그저 풍경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셀러던트의 감관에 순간 “햇살 한 줄기”가 드리워지자 그야말로 극도의 고통이 수반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저 기계에 지나지 않았던 시적 화자의 마비된 의식을 쪼개는 “한 줄기 칼”과 같은 것이다. 햇볕을 쬐는 ‘나’의 의식이 마치 칼로 관통당한 것 같은 환상통으로 허덕이고, 도처에서는 “뜨겁고, 살 타는 냄새”가 진동하면서 저 무료했던 시적 공간이 일순간 삶과 죽음의 경계로 변모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눈치 채야 하는 것은 이 극심한 감각적 고통을 견디는 과정에서 시적 화자가 일대 존재의 전환을 겪게 된다는 사실이다. “온몸에 박힌 햇살”을 하나씩 빼면서 화자는 “고통스러웠으며 황홀”하다고 고백하는데, 저 고통이 황홀을 동반한다는 것은 이 아픔에 시적 화자의 지향성이 개입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이때의 아픔은 그저 즉자적으로 우리에게 내던져 있는 질료적인 수준의 감각이 아니라, 시적 화자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사태를 파악할 수 있게 만드는 어떤 의식의 계기에 가까운 것이다. 마치 플라톤의 동굴 속 수인囚人이 동굴 밖을 나서는 순간 진리의 태양빛 때문에 고통과 경이를 동시에 느꼈던 것처럼, 오로지 형광등 빛에 의거하여 사태를 파악하던 내가 실재의 풍경을 맞이했을 때 눈멂에 가까운 상태에 처하는 것이다. 이 전환은 나의 전부를 바꾸는 과정에 가까워서, 실로 내 온몸을 태우고 살가죽을 벗기는 작업(“얼른 옷을 벗었다”)으로 느껴진다. 그 경험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이 고통에 의존하여 새로운 내가 될 수 있다는 어떤 희망 또한 비로소 스며들기 시작한다(“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몸이고 싶었다”).
3연을 기점으로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떠받들고 있는 정조에 어떤 반전의 계기가 스며드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일견 기쁨으로 가득해 보이는 이러한 어조에서 우리는 더 이상 죽어 있는 고통이 아니라, 신선하게 살아 날뛰는 고통의 전조를 듣게 된다. 고통이 살아 있다고? 더 정확히 말하면 고통을 온전하게 감각하는 와중에 ‘나’의 존재론적 쇄신이 일어나면서, ‘나’의 있음이 분명하게 인지되기에 이른다. 물론 그러한 고통은 시적 화자는 온전한 행복을 선사하지는 못하지만, 나로 하여금 고통의 주인으로 거듭나게 만든다는 점에서, 자아의 살아 있음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게 만든다. 이 비약에 가까운 긍정으로 인해, 시의 화자는 삶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햇살로 고독하자
햇살과 마주치자
햇살 따라 걸어가면
풀꽃을 만나고
햇살이 몸 누이는 곳에 뒤엉키면
과거를 잊고 슬픔을 잊고
햇살 따다 술 빚어
맑고 투명하게 발효되고 싶다

햇살이 새들의 길목을 마련하고
비쩍 마른 소나무의 몸을 어루만지는
사월의 오후
햇살이 만든 평평한 산 위로
빨간 구두의 여인이 앉아 있다
― 「전위적 풍경」 부분

그러므로 시인에게 ‘햇살’은 우리의 인공적인 삶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자연’을 표상하고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감한 감각 기관 자체를 곤두서게 만드는 모든 ‘충격 체험’(벤야민)들의 총칭을 일컫는 것이다. “햇살로 고독”하고 “햇살과 마주치”며, 그 햇살로 내가 “맑고 투명하게 발효”될 때 비로소 신생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물론 그러한 가능성은 천지가 개벽하는 놀라운 사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일상의 저변에 도사리고 있는 것에 대한 범속한 각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의 눈에 비친 ‘전위적인 풍경’은 햇살이 깃들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적층되어 있는 셈이다. “햇살이 만든 평평한 산 위로/ 빨간 구두의 여인이 않아 있”는 이 기묘하고도 동화적인 풍경 또한 시적 화자의 상상력이 빚어낸, 어떤 환시의 풍경이다. 그의 눈에 이제 세계는 그저 무기력하게 내던져 있는 것이 아니라, 미약한 잠재성을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체의 형상을 지니지 않은 ‘햇살’이 수도 없이 낮게 축적되어 이루어진 “평평한 산”은 실상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감각적 잠재성을 비유하는 이미지가 아니겠는가. 무료한 일상 속에서 어느새 자취를 감춰버린 그와 같은 비가시적인(invisible) 가능성을 감지하고 드러내려는 예민한 시인의 촉수 덕분에 우리의 무딘 일상이 조금이나마 아픔을 되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바라건대 시인이여, 우리에게 조금 더 많은 고통을, 더 많은 햇살을!

_ <현대시> 2011년 6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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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메다 바이러스


이재훈


그대들은
나를 외계인이라 불렀지.
난장이라고도 불렀으며
그냥 ‘꽃’이라고도 불렀지.
나는 원래 눈이 하나인 키클롭스를 사랑했고
피부가 검은 육체를 사랑했지.
피비린내 나는 이 행성에
착륙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잔혹한 DNA를 가진 종족들을 보고야 말았어.
내 고향에서 십만 광년이나 떨어진 땅.
처음엔 검은 땅과 푸른 바다와 하늘이 끔찍했지.
왜 지구에 사는 종족들은 땅에 붙어서 다닐까.
마음껏 날고 싶었지만,
이곳에 살기 위해선 참아야 했어.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팔과 다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매일 괴로웠지.
비명과 고통이 반복되었고,
숭배할 대상은 이 땅에 없었어.
몇몇은 돈을 숭배하기도 했지만,
정작 아름다운 살육을 보지는 못했어.
아름다운 역사도 간혹 있었다지만
이곳의 풍습은 선량한 것들만 쓰게 하지.
결국 이 세계는 수학의 아름다움이 지배해.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남겨진 숫자의 아름다움.
그 미학으로 서로의 키를 재고 우쭐거리지.
팔등신은 수로 만들어지는 것.
조화의 아름다움은 방황으로 만들어지는 것.
지구인이라는 종족은 말이야.
가끔씩 약속을 어기고 방사능을 누출하곤 하지.
나는 거대한 건물 속으로 몸을 숨겼어.
하얀 가루가 폭발하고
그 가루가 내 몸에 달라붙었지.
해독크림을 발랐지만 너무 늦었어.
갑자기 사위가 연기로 가득 찼어.
손전등을 빌려 친구들과
살아나갈 도주로를 찾았지.
눈을 뜨니
세상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었어.
아름다운 북극의 얼음 위에서
지혜의 말들을 외울 거야.
그대들은 나를 북극에 핀 꽃이라 하겠지.
외눈박이 육체를 사랑하는 나를 말이야.


*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 DNA가 없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생물체가 전염하는 가상의 바이러스. 공기로 전염되며, 20초 안에 사망. 감염자의 공격성을 극대화하여 자살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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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역겹고, 불결하고, 냄새나는 상상력



최치언
(시인)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란 제목의 이 시는 SF적이고, 퓨전적이고 카툰적이다. 상징들은 적당하게 불친절한데, 서사는 힘이 있고 흥미롭다.
시인의 모든 시가 그렇지는 않지만, 이 시는 나의 영혼을 무례하게(?) 자극하여 좀 더 역겹고, 불결하고, 냄새나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재밌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재밌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상징이나 주제, 의미 따위를 분석해야 되나? 미안하지만 난 남이 쓴 상징이나 주제, 의미를 분석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하여간, 제멋대로 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시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다.

00년00시00분.
핏빛 하늘 위로 거대한 날개를 가진 무엇인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안드로메다에서 날아온 외계생명체들이었다.
지구를 향해 ‘십만 광년’을 날아온 그들의 거대한 날개는 너덜너덜 찢겨져 있었고, 말대가리 같은 길쭉한 얼굴은 돌투성이에 얻어맞은 듯 으깨어져 있었다. 주걱처럼 휜 턱주가리 아래 선과 악을 초월한 당근 맟 같은 그들의 하나 뿐인 눈알이 박혀 있었다.
한편, ‘검은 땅’에선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팔과 다리’로 보기에도 ‘괴로운’ 인간들이 ‘우쭐’대며 걸어 다니고 있었다.
남자라는 인간들은 서로의 성기를 만지며 그 크기와 무게로 서열을 매겨댔고, 여자들은 사소한 질투로 자살을 결행했다. 하여간 그들은 소란과 무질서와 미친 짓거리들로 간신히 안정적인(?) 거리를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못생긴 발가락이 지구를 굴리고 있다는 허무맹항한 감상에도 젖어 있었다. 이미 지구가 무엇 때문에 우울하게 돌고 있는지 뻔히 밝혀졌는데도 말이다. 인간은 그러한 족속들이었다. 우월이 지나쳐 추악의 단계로 진입한 멜랑똘리들이었다.

00시00분.
맨발의 A가 14블록을 걸어간다.
A는 파랑에서 빨강으로 신호등이 점멸하는 것을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걷는다. 그리고 그는 멈춰 서서 실성한 듯 하늘을 쳐다보며 지껄여댄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거대한 날개를 가진 ‘난장이’들, 눈물을 묻히지 않은 눈알로 이곳을 섬뜩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저 ‘꽃’들. 시인의 상징에서만 가능하던 존재들! 우린 너무 늦어버린 게 아닐까? 누군가 피를 토해야 겨우 하나를 알아먹을 수 있다면, 너무 늦어버린 거야.”
A의 뒤로, 털 빠진 비둘기 같은 수명의 B들이 신호등의 빨강을 쳐다보며 멍청하게 구구대고 있다.
A는 뒤돌아 B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한다.
“…왜 저들은 내가 보는 것을 볼 수 없단 말인가? 저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기 전에 시를 가르쳤다면, 저들은 나와 좀 더 각별한 얘기를 나누었을 텐데……”
A가 이처럼 난수표 같은 말을 떠들고 있을 때, 복용시 침을 찍찍 뱉게 되는 신종마약 찍찍을 처먹은 C가 덤프트럭을 몰고 13블록을 빠져 나오고 있다. 그리곤 14블록으로 낭창낭창 달려오더니 순식간에 ‘앗’하는 사이도 없이 인도로 뛰어들며 B들을 모조리 깔아뭉개 버린다.
덤프트럭에서 12인치 몽키스파나처럼 생긴 C가 내린다. C는 덤프트럭에 깔린 B들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기꺼멓게 썩은 이빨들 사이로 침을 찍찍 뱉으며, 갤갤 풀린 눈으로 핏빛 하늘을 올려다본다. 물론 A는 O다리 니퍼처럼 서서 황당하게 C를 보고 있다.

00시00분.
하늘을 날다 지친 외계생명체들이 C의 검은 동공 속으로 내리꽂히듯, ‘검은 땅’ 위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당황한 C는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며 소리 지른다.
“찍찍… 난장이들… 찍찍… 꽃… 찍찍…”
A는 얼른 C에게 다가서며 말한다.
“자네 눈에도 저것들이 ‘난장이’와 ‘꽃’들로 보이는가? 그렇다면 자네하고는 좀 더 각별한 얘기가 필요할 것 같군. 뭐랄까?… 음… 다 뒤집어엎고 다시 시적으로 상상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고나 할까…?… 자네와 내가 지구를 구하는 일말일세… 부디, 이미 저지른 아픔답지 않은 ‘살육’ 따위는 잊어주게. 내 이름은 콩킹박사일세… 자네 이름은?… 찍찍맨이라 해두지…”
C가 A의 얼굴에 찍찍 침을 뱉을 사이도 없이 A는 C를 어둠에 쌓인 구두뒷굽 같은 골목 안으로 잡아끌고 들어간다.
순간, 빗빛 하늘에서 핏방울들이 떨어져 내리고 추락하는 외계생명체의 비명으로 지구가 헐렁헐렁 흔들리기 시작한다.
신호등이 빨강에서 파랑으로 점멸한다.
안드로메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20초 동안에 사망한다던가? 거짓말을 조금 보탠다면 위의 짧은 이야기는 시를 읽고 난 뒤 20초 동안에 제멋대로 떠오른 생각이다.
그렇다면 난 안드로메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 아닐까? 오래전부터 나에게만 유통된 말을 빌려 쓰자면 진정한 상상력은 의식의 죽음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니까. 하여간, 이것이 이 시의 힘이다.

_ [시와사상], 2010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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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섬광


이재훈


폭발하였지
구름이었어
빌딩은 연기를 머금고
도시를 달구었지
사람들은 밤을 숭배했어
큰절을 하며 인육들을 토해내는 소리
어디나 골목은 있어
나뒹굴 가슴을 찾아 헤매
아빠도 엄마도 없이 오빠들만 가득한 저녁
어떤 일몰은 두려웠지
하늘로부터 천천히 내려와 정수리를 누르곤 해
눈동자가 터질듯하고
기침이 나지
이 세계는 깨끗한 것만을 전시해
구더기도, 박쥐도, 검은 피도, 집 잃은 고양이도,
모두 숨겨
지렁이가 나올까 싶어 시멘트를 바르지
신성한 것들만 숨기는 음모들

언 땅에 도끼질을 해
먼 숲을 동경하는 일로 산책을 마무리하지
도끼의 이빨이 땅에 박히는 순간,
빌딩들은 붉은 조명을 켰어
어떤 빌딩은 핏빛으로 깜박이고
어떤 빌딩은 질질 흘러 내려

광석을 모르는 고대인들은 운석을 주웠다지
별의 살껍질을 주워 칼을 만들고
우주의 상상으로 날고기들을 잘랐겠지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자꾸만 믿게 되는
불민의 밤이 몸에 불을 지펴
여기저기 녹색 불이 펑펑 터지고 있어
_ <웹진 문장>, 2010년 6월호


시인이 우리의 손을 잡고 순식간에 데려다 놓은 곳은 종말의 순간이다. 뒷걸음칠수록 더 빨리 다가오는 우리들의 마지막을 소녀의 걸음을 따라 보여주고 있다. 폭발과 연기가 난무하고, 골목마다 나뒹구는 우리들의 사체, 우리가 내려다보고 있는 이 광경은 깰 수 있는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의 죽음을 보며 한없이 울던 스크루지의 회한을 가져보지 못하고 우리는 빅뱅의 세상을 떠나야 할 지도 모른다. 소녀가 맨발로 겪어내는 종말의 걸음이 이렇게 아픈 건 바로 거의 소멸해버린 우리들의 영혼이 저 작은 몸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소녀가 힘겹게 휘두르는 ‘도끼의 이빨이 땅에 박히는 순간’ 빌딩은 괴물이다. 핏빛으로 깜박이고, 질질 흘러내리는 빌딩은 한때 우리가 그토록 숭배하던 문명의 아지트였지 않은가. 우리의 손을 잡아준 것이 스크루지의 천사가 아니라 문명이라는 악마였으므로 우리는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인형을 안고 폐허를 한없이 떠도는 소녀를 남겨둔 채 떠나야 한다. 언 땅을 다 풀어헤쳐도 소녀가 꿈꾸는 별의 살껍질은 찾지 못할 것이다. 너무 오래 전에 우리들이 부셔버린 약속들이 언 땅에서 자결하는 소리만 가득 메아리칠 뿐, 녹색 섬광이 펑펑 터지는 소리들,
_ 정푸른, <시와지역> 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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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벌들


이재훈


물길을 다스리지 않았다
대신 날았다
허공을 향해 매일 목청껏 부르짖었다
붉은 새 한 마리
내 울음을 채간다
햇살이 내린다
가득 내린다
투명한 햇살 사이를 날아다녔다
언제 저렇게 운 적이 있었을까
앵앵,
타인들도 모두 도망갔다
울다 지치면, 낯선 몸을 찾았다
참을 수 없는 모멸을 가득 쏟아놓았다
비가 내렸고 습도가 높았다
높은 곳에서 듣기 싫은 울음이 들렸다
그럴 땐 슬픔을 탐했다
결정적으로 영혼을 판 적도 있다
소금 가득한 물 위를 날아
독침을 질질 흘렸다
황홀하게 죽는 것처럼, 황홀하게
봄바람이 불자 온몸이 노랗게 익었다
영혼까지 맑았다

갈대 사이에 안개가 있었고
안개를 헤치면 꽃이 보인다
달콤한 꿀 위에 알몸으로 누워 있으면
말벌들이 온몸에 달라붙는다
붉은 얼굴,
벌에 잔뜩 쏘여 퉁퉁 부었다
잉잉대는 소리 들린다
나는 증명받고 싶지 않았다
고백은 얼마나 사치스러운 말인가
먼 불빛 먼 창에서
안개 흩어지는 소리
나무 부서지는 소리
앵앵, 들린다

_ 창작과 비평, 2010년 여름호




나무 부서지는 소리 앵앵, 들린다


김미정
 

  언제부턴가 울림이 있는 것들이 좋아졌다. 시도, 사람도……. 아무 맛도, 느낌도 없는 편편하고 딱딱한 관계들 속에 우리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다. 앵~앵 소리가 내 귀를 파고든다. 치명적 독을 품고 사는 너와 나의 앵앵거림이 시 전체를 덮고 주위를 에워싼다.

  “물길을 다스리지 않”기 위해 날아오르는 날개들, 힘겨운 날개짓이며 자유를 향한 뜨거운 몸짓이다. 부조리한 현실의 삶 속에 우리는 때론 울음이 울림이 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벌에 잔뜩 쏘여 퉁퉁 부”은 너와 나의 “붉은 얼굴”은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그 무엇도 증명되지 않는다. 진실은 있기는 한 것일까. 우리는 얼마나 서로에게, 또 자신에게 독침을 날릴 것인가. “달콤한 꿀 위에 알몸으로 누워있으면” 안 되는 것인가. “참을 수 없는 모멸”이 비처럼 내리고 “슬픔을 탐”하며 “영혼을 파”는 말벌들의 세상, 그 세상에서 고백은 사치스러운 일일 것이다.

  고통이 없으면 생의 실감(實感)도 없으리라. 관계에 대한, 자아에 대한 내면의 두려움과 불안의 물결이 행과 행 사이를 천천히 건너며 증폭되고 있다. 모든 상징과 비유는 일그러진 현실로 귀결된다. 현대의 삶속에 내재된 불온성과, 낯설고 혹은 날카로운 징후들을 시의 곳곳에 배치시킨다. 삶이란 상처를 치열하게 끌어안는 것인가. 삶의 이면에 숨겨진 희망의 기미를 찾아내는 시인의 아름다운 귀가 보이는 듯하다. 울음이 울림이 되고 울림이 생의 리듬이 되며 노래가 되는 삶을 꿈꾸어 본다. 한편의 시가 우리의 투명한 뒷모습을 위로한다. 잉~잉 앵~앵 끊어질 듯 이어지는 6월이다.

_ 웹진 시인광장 7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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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메다 바이러스


이재훈


그대들은

나를 외계인이라 불렀지.
난장이라고도 불렀으며
그냥 ‘꽃’이라고도 불렀지.
나는 원래 눈이 하나인 키클롭스를 사랑했고
피부가 검은 육체를 사랑했지.
피비린내 나는 이 행성에
착륙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잔혹한 DNA를 가진 종족들을 보고야 말았어.
내 고향에서 십만 광년이나 떨어진 땅.
처음엔 검은 땅과 푸른 바다와 하늘이 끔찍했지.
왜 지구에 사는 종족들은 땅에 붙어서 다닐까.
마음껏 날고 싶었지만,
이곳에 살기 위해선 참아야 했어.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팔과 다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매일 괴로웠지.
비명과 고통이 반복되었고,
숭배할 대상은 이 땅에 없었어.
몇몇은 돈을 숭배하기도 했지만,
정작 아름다운 살육을 보지는 못했어.
아름다운 역사도 간혹 있었다지만
이곳의 풍습은 선량한 것들만 쓰게 하지.
결국 이 세계는 수학의 아름다움이 지배해.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남겨진 숫자의 아름다움.
그 미학으로 서로의 키를 재고 우쭐거리지.
팔등신은 수로 만들어지는 것.
조화의 아름다움은 방황으로 만들어지는 것.
지구인이라는 종족은 말이야.
가끔씩 약속을 어기고 방사능을 누출하곤 하지.
나는 거대한 건물 속으로 몸을 숨겼어.
하얀 가루가 폭발하고
그 가루가 내 몸에 달라붙었지.
해독크림을 발랐지만 너무 늦었어.
갑자기 사위가 연기로 가득 찼어.
손전등을 빌려 친구들과
살아나갈 도주로를 찾았지.
눈을 뜨니
세상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었어.
아름다운 북극의 얼음 위에서
지혜의 말들을 외울 거야.
그대들은 나를 북극에 핀 꽃이라 하겠지.
외눈박이 육체를 사랑하는 나를 말이야.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로 인해 지구 종말을 앞둔 미래 지구에서 안드로메다 바이러스와 그 퇴치법을 암시한 힌트를 현재 지구로 보내오면서 시작되는 영화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그 힌트를 이진법의 ‘숫자’ 등으로 해석해본 결과, 무언가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의미의 원형 도형과 미래 지구에는 없는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퇴치제인 해저 미생물 이름. 이 해저미생물로 안드로메다 바이러스가 거의 퇴치되어가다가 인간의 탐욕에 의해 퇴치제가 멸종되고, 동시에 누군가의 음모로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샘플은 우주를 통해 미래로 보내져 미래 지구를 멸망으로 이르게 하는데…….
요즘 ‘신종 플루’, ‘아이티 지진’, ‘환경 재해’ 등으로 나타나는 지구 종말론의 일단을 보여주는 이 영화를 모티프 삼아, 이재훈 시인은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라는 시적 화자가 되어 지구의 타락상에 대해 선지자처럼 경고한다. 지구인들이 “눈이 하나(원형 도형을 상징)인 키클롭스를 사랑”하는 자신을, ‘외계인’ 등으로 불렀는데, 착륙하지 말았어야 할 지구라는 행성에 와 “잔혹한 DNA를 가진 종족들을 보고야 말았”다고 한다.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팔과 다리”를 가진 인간들은 왜 땅에 붙어만 다닐까? 괴로움과 비명과 고통이 계속되는 피비린내 나는 이 땅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마음껏 날고 싶었지만, 살기 위해 모든 끔찍한 일들을 참아야만 한다고 한다. 숭배할 대상이 없는 이 행성에서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살육은 있었지만, ‘노아의 방주’나 ‘소돔과 고모라’처럼 아름다고 정의로운 살육은 없었다고도 한다.
“아름다운 역사도 간혹 있었다지만/ 이곳의 풍습은 선량한 것들만 쓰게 하”는 이곳 지구는, 더하고 곱하고 빼는 계산적인 인간들과 ‘수학의 아름다움’만 존재한다고 한다. 바벨탑처럼 빌딩을 높이 쌓고, 서로의 키를 재고 ‘36, 24, 36’의 S라인 성형미인 등 ‘숫자의 아름다움’이 지배하는 곳인 지구라는 행성. 이곳 사람들은 “가끔씩 약속을 어기고 방사능을 누출하곤 하”여, 시적 화자인 ‘안드로메다 바이러스’가 지구를 멸망시키기도 전에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간다고 한다.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는 지구의 몇몇 의인義人인 친구들과 ‘노아의 방주’를 타고 아수라장인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 빙하기가 지배하는 북극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노아처럼 “지혜의 말들을 외”우며 ‘동그란 눈의 외눈박이’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꽃으로 불려질 것이라고 한다. (강성철)

_ 강성철 시평집, <시 읽어주는 은행원>, 한국문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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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Bang


이재훈


태양이 어슷어슷 거리로 내려왔습니다. 쇼윈도우 마네킹들은 땀도 흘리지 않았지요. 누군가가 지나치는 여인에게 양공주 같다고 킬킬거렸습니다. 좌판 아저씨는 제 옷자락을 잡아끌고 빨간 비디오테이프를 꺼내주었습니다. 신문엔 사람들끼리 불총을 쏘아대고 있었습니다. 그런 거리를 걷다보니 어느새 제 겨드랑이에 털이 솟아 있었습니다.
무르팍에 힘이 없었습니다. 숱진 머리칼이 아버지를 닮았다지만 전 야틈한 언덕에서 방황했습니다. 아버지는 언덕을 넘으면 시온이 있다고 했었지요. 그때 태양이 제 몸에 달라붙어 명징한 기억들을 빨아먹고 있던 겁니다.
누구나 안식처를 찾아 세상을 헤매입니다. 눈앞에 솔개그늘이 하나 있었고 그 속에서 저는 RPG게임을 했습니다. 제 몸의 태양열로 세계를 불질렀습니다. 펑펑펑 150억 광년의 우주에 불을 놓습니다. 세상에 불을 지른 자는 신이던가요?

가끔씩 가슴으로 소나기밥을 먹습니다. 온 몸에 자릿내가 풀풀거려도 괜찮습니다.
언덕을 넘으면 시온이 있구요. 그곳에 다가갈수록 수염이 자꾸 굵어집니다. 간간히 제 가슴에 나비물마냥 불덩어리들이 흩어 날아갑니다. 


불의 상상력은 제 몸을 태워서 제 몸을 빛낸다. 끊임없는 타오르는 ‘불의 빅뱅’은 ‘불의 블랙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누구나 꿈꾸는 불, 그러나 불은 위험하다. 영원한 소멸의 거대한 블랙홀이 입을 벌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태양이 굴러다니는 거리가 있다. 한 소년이 성장해온 길바닥이 있다. 오늘도 태양빛이 내리쬐는 이상한 풍경이 있다. ‘소돔성’처럼 병들고 타락한 도시이다. 언제나 그러했던, 인간들은 도시에서 살기 위해서 이곳으로 몰려들지만 사실은 도시에서 죽기 위하여 몰려온 것이다. 이런 허기진 욕망들이 이 도시의 남루하고 비루한 풍경을 이룬다. 시의 화자는 이런 ‘마네킹’과 ‘양공주 같은 여자’와 ‘빨간 비디오테이프’가 있는 풍경을 따라 ‘겨드랑이에 털이 솟’을 만큼 성장해 가는데, ‘기성세대’를 표상하는 ‘아버지’는 자꾸만 나를 속여먹는다. 구원의 땅은 멀고, 안식의 그늘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무수한 ‘아버지들의 아이’는 고작 RPG게임이나 하고, 배터리처럼 충전되는 게임머니로 이 세계를 불지른다. 사이버 공간이라 할지라도 ‘펑펑펑 150억 광년의 우주에 불을 놓’는다. 이는 ‘아버지들의 아이’가 타락한 이 도시의 블랙홀을 견뎌내기 몸부림인 동시에 스스로의 태양열로 이 세계를 불 지르고 싶어 하는 욕망을 표상한다. 스스로 하나의 불덩어리가 되어 세계를 불 지르고 우주에 불을 놓으려는, ‘불의 아이’의 당돌한 모험. 그러나 그 결과는 자명하다. 아카루스의 날개처럼 제 몸이 녹아낼 뿐이다. 따라서 시인은 이토록 음울한 정열의 음화를 우리에게 던져놓는 것일까? 결국, 이 시는 수직으로 내리쬐는 태양빛과 수평으로 걸어가는 시의 화자를 교직시킨 뒤 그 접점을 통해 인간 삶의 비루한 풍경을 보여준다. 가볍게 빗금처럼 긁고 지나가는 풍경을 배경으로 ‘태양 아래의 성장기’를 담아낸다. 여기엔 제 가슴의 불덩어리를 완전히 흩날리지 못한 ‘울울한 욕망’과 아직도 찾지 못한 ‘시온의 땅’이 숨 쉬고 있는데, 그렇다, 태양 아래의 안식은 애당초 없었다. 그런 갈증 때문에 시인의 상상력은 ‘불의 빅뱅’처럼 타오르는 것이리라.  (오정국 시인)

_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10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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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대적 일상에 대한 순례자의 보고서

이재훈의 시 세 편은 새로운 개성을 시도하고 있다. 현대 도시에 대한 신화적인 발상 속에서 몽상의 새로운 몸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바슐라르가 꿈꾸었던 4원소의 자연친화적인 몽상은 현대 도시의 콘크리트와 네온사인과 TV 앞에서는 맥을 추기 어렵다. 벽난로에 조용히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불과 고양이의 나른한 기지개 속에 부풀어 오르는 공간, 흔들리는 수풀 사이로 나지막이 웅얼거리며 흐르는 시냇물과 같은 몽상을 도시의 어느 곳에서 구할 것인가.

저는 매일 매일 똑같은 무늬를 짰어요.
이 세계의 무력함과 무모함.
제 주위엔 살인도 있고
죽음도 있었지만
제겐 큰 감흥이 없어요.
저는 하늘을 날고 있는 제 모습을 짜고 싶었어요.
저 먼 세계를 비상하는 영혼의 고난함을 짜고 싶었어요.
제겐 낙원도 있었고,
제가 태어나기 전의 고향도 있었어요.
몽상도 죄가 되나요.
― <다정한 재봉사의 재판> 부분

세상 사람들에 의해 갇힌 채 세상의 잔혹함에 대한 똑같은 무늬를 짜도록 강요받던 재봉사는 시인의 입장을 대변한다. 시인은 “태어나기 전의 고향”을 지닌 자, “먼 세계를 비상하는 영혼”이라고 한다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하이데거의 어투와 썩 비슷할 것 같다. 재판을 받고 화살을 등에 맞으며 고난을 겪던 시적 화자는 이제 “문명의 숲”에 들어와 고뇌에 찬 어조로 선언을 한다. 문명의 비만한 이미지들과, 이교도들의 숭배와, 부활의 기적이 일어날 가망이 없음을 말하며, “이제 내 몸이/ 잠자는 자들의 첫 음식이 된다면 좋겠”다고 고백한다. 재판이 아닌 순교를 택하는 것이다.
이재훈의 세 시편은 특정한 캐릭터로서 시적 화자를 내세우고 현대 도시 문명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을 하나의 콩트처럼 구성해낸다. 그 가운데 <다정한 재봉사의 재판>은 현대 문명의 일상에 대한 보고의 첫 장이자, 선언문처럼 읽힌다. 문명의 숲에서 몽상을 꿈꾼 죄로 순교하는 재봉사가 그 선언자이다. <댄디보이>에서는 TV를 보며 브라운관 속 ‘당신’에 빠져 기다리는 ‘댄디보이’가 등장하고, <스토커>에서는 “천사의 눈을 가진 그녀”의 뒤를 밟으며 “마주볼 자신” 없이 숨어 보는 ‘스토커’가 나온다. 시적 화자로 등장하는 이들은 현대 사회 속에 고립되어 타인과 온전히 소통하지 못하는 개인들의 분신이자 작은 자아들이다.

나는 스타일리스트. 당신은 나의 관객.
원두커피를 내려 블랙으로 마시고
잠옷 바람으로 스텝을 밟는다.
― <댄디 보이> 부분

우리가 TV를 보고 그녀가 브라운관에서 연기나 음악을 하는 것일 텐데, 어느 순간 욕망은 모방되고 시선은 전도된다. 그녀가 관객이 되어 나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TV 속에 등장한 행동과 사물들은 실제처럼 느껴지고 나의 현실과 그 가상현실은 뒤섞인다. 다시 그 가상이 현실에 접속될 때까지 “지루한 기다림의 상상”을 하는 시적 화자에게 일상은 “가부좌를 틀고 퍼포먼스”를 하는 시간이 된다.
<스토커>에서도 시적 화자는 그녀의 뒤를 밟으며 “내내 눈동자를 기억”한다. “댄디보이”와 마찬가지로 “스토커”도 대상에 대한 일방적인 관계라는 것은 동일하다. 그 일방적인 관계는 대상에 대한 ‘지루할 만큼의 기다림’과 간절함을 동반한다. 또한 ‘재봉사’의 순교와도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순교도 누군가를 대신하거나 무엇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지만, 정작 그들은 순교자의 희생과 가치에 대하 모르기 마련이다. 역시 일방적인 것이지 교환 관계가 아닌 것이다. 즉 이러한 일방성은 자본주의적인 교환처럼 등가의 교환이거나 더 큰 이익을 남기기 뒤한 잉여의 교환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나의 것을 바치는 헌신이거나 희생의 불균등 교환이다.
<스토커>에서 시적 화자는 그녀가 숨기고 있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을 읽어주고, 그 몸짓을 해석한다. 이 시에서 스토킹은 상대를 괴롭히거나 집착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과 관계 맺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

버스 안에서 그녀를 쓴다.
멀미를 참아 가며
옆에 앉은 아저씨의 눈초리를 받으며.
이제 벨이 울리고 내릴 시간이다.
그녀가 사는 세상 속으로 놀러갈 시간이다.
그녀가 사는 세상을 쓸 시간이다.
― <스토커> 부분

이재훈의 시에서 알게 된, 일상을 히치하이킹하는 두 번째 방식은 분신술이라고 해 두자. 그러나 그 분신들은 진지하기 짝이 없는 캐릭터들이다. 그들의 육체를 통해 시인은 순례자의 보고서를 쓰고자 하는지도 모르겠다.

_ <시현실> 200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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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적 원형 구조 연구


김병호 (협성대 조교수)

1. 들어가는 글
2. 시적 상상력의 원형적 구조
1) 초월적 인식
2) 이타성
3) 통일성
4) 영혼과 내세
5) 탈주
3. 나오는 글

1. 들어가는 글

자연과학의 태동기였던 17세기, ‘아는 것은 힘’이라고 했던 프란시스 베이컨은 선언(?)은 이후 수백 년간 근대적 사유의 패러다임을 구축해왔다. 합리주의자들은 상상력의 분방함을 억제하고 사유를 냉철한 이성의 법칙에 묶어두려 하였고, 이성의 이름으로 상상력을 배제하고 억압하였다. 그리고 사물과 사물의 결합은 자연스런 연상이 아니라 인과법칙의 사슬에 종속되고 말았다. 데카르트를 비롯한 합리주의자들에게 상상력은 그저 ‘오류와 거짓의 근원’일뿐이었다. 그들은 상상력의 세계를 비합리적인 것, 부조리한 것으로 간주해 왔었다. 그러나 상상력은 인류가 지나온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광대하고 심원한 시공의 세계이다. 인간이 다른 존재와 차별적 존재로서 자신과 우주에 대해 몽상을 시작한 아득한 옛날부터 과학이 종교화되고 있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침투하면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과 신비를 확장시켜 왔다. 1936년 『상상력』이란 단행본을 발표하면서 상상력 연구의 전기를 마련한 사르트르 이후,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와 뒤랑(Gilbert Durand), 융(Carl Gustav Jung), 코르뱅(Henry Corbin), 엘리아데(Eliade, mircea) 등에 의해 상상력은 학문적 체계를 갖추며 새로운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과학철학자인 동시에 현대 문학비평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상상력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객관적 진실의 세계와는 별도로 주관적 진실의 세계가 존재하고, 이성의 가치와는 별도로 무의식 혹은 상상력의 가치가 존재하며, 과학의 세계와는 무관하게 시 혹은 예술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상상력을 인간 활동의 근원적 원천으로까지 혁신적으로 끌어올린 ‘상상력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었다.

상상력은 바슐라르 이후 멀티미디어 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며 문학은 문자 세계를 벗어나 다양한 미디어들과 소통해야 하는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성 중심의 세계는 자신의 감각기관을 총체적으로 사용하여 감성적이고 유희적인 속성을 발휘하는 시대로 급박하게 옮겨가고 있다. 특히 이러한 징후는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주요한 수단이 문자매체에서 영상매체로 옮겨가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관련되어 보인다. 새로운 세대는 이미 문자적 사유가 아니라 이미지적 사유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제 상상은 질료의 별다른 저항 없이 현실로 전화하게 되었다. 바로 현실의 조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상상은 일종의 정신적 놀이다. 그리고 예술가에 있어서 상상력이란 작품을 이루는 중요한 정신적 능력이다. 특히 이러한 능력은 시의 창작과정에서 잘 드러나는데, 시 창작에 있어 이전의 체험이 한순간에 어떤 창조의 힘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시적 상상력은 우리에게 ‘진실로 진실한’ 그 무엇 또는 우주의 구조나 인간 경험의 기초적인 본질, 표면의 뒤에 숨어 있는 실재, 그 밖에 이러한 구절들에 의해 암시되는 그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리고 시인은 이러한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지각과 낡은 체험을 결합하여 직관처럼 순식간에 새로운 체험을 얻고, 다시 계속 반복되는 상상작용을 통하여 이런 체험들을 결합하고 종합하여 한편의 통일체로서 작품을 완성시킨다.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시인의 사유형식으로서의 상상력이 고유한 구조들과 변화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맺는 ‘외부 현실’과의 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공간은 다만 현실의 재조합에 불과하다. 유토피아 역시 인간 사회의 현실적 관계를 구성하는 어떤 요소들을 달리 배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상상력의 세계가 다루는 감성적 소재는 현실의 소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것들은 어떤 특수한 거푸집 속에서 다시 녹여 주조된 것으로 물질이 아니라 중요한 구조들이고, 이 구조들은 일종의 자율성을 의미한다.

본고에서는 상상력의 자율성 혹은 자발성, 그 적극적 능동성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한 이천 년대 젊은 시인들의 작품들을 통해 그들의 시적 상상력과 원형 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천 년대 이후 학계에 보고된 연구논문들의 다수는 불교적 상상력이나 생태학적 상상력 등 분화된 분야의 상상력이거나 특정 시인에 대한 개인 차원의 상상력에 대한 것들이 다수였다. 따라서 이천 년대에 활약하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상상력의 원형 구조를 살펴보는 것은 이후 우리 시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더불어 본 연구에서는 프랑스 신화학자 뤼시앵 보이아가 제시한 원형구조를 그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이러한 구조는 예전에 곰브리치가 설명한 기본적인 기하학적 관계로서, 이전의 연구들에서는 원형적 상상력의 근거로 노드롭 프라이의 사계의 원형을 이용하거나 프레이저의 속죄양 원형, 휠라이트 혹은 융의 원형(신화소) 등을 그 근거로 삼았는데, 이것들은 시공간을 넘어서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 경험을 통해 인간 무의식의 기저를 살피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뤼시앵 보이아 역시 이러한 지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근거는 이전의 원형비평이 가지고 있던 복음주의적 한계와 제한적 체계를 극복하려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뤼시앵 보이아는 다른 원형 비평가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전진이 시작되는 근원에는 상상력의 세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이성과 감성을 포괄하는 상상력의 세계는 인류 역사의 원동력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프로그램화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즉 이러한 원형의 실체는 인간의 정신 속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때 원형 자체는 경험될 수 없으며, 의식에 포착되지도 않는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원형의 재현이다. 잠재적인 원형이 현실화되고 지각이 가능해지고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실체를 개념화하고 그것의 요소들을 분리시키거나 혼합하는 방식은 시선의 다양성에 달려 있다. 카를 그스타브 융이 확인한 원형들이나 가스통 바슐라르가 구분한 네 개의 자연적 요소, 그리고 질베르 뒤랑의 제시한 (대립되는) 두 영역의 상상력 세계 등이 그러하다.

뤼시앵 보이아는 역사적 변화에 적용된 상상력의 세계의 세계가 지닌, 본질을 포함할 수 있는 원형들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상상력의 원형구조는 변화하는 다양한 가치 형태 속에 내재하며, 지속적으로 역사를 이끌어왔다고 주장한다. 뤼시앵 보이아는 상상력의 발현을 하나의 파노라마 속에 결집시켜 상상력의 세계에 고유한 구조들과 역동적 움직임을 규정하고 그리하여 상상력의 세계가 지닌 특수한 법칙을 파악하려고 시도하였다. 바로 이 부분이 이전의 융이나 질베르 뒤랑, 프레이저 등과 달리 뤼시앵 보이아가 고유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지점이다. 실제로 그가 제시한 원형구조는 어떤 초월적 실재에 대한 의식, 이타성, 통일성의 추구, 영혼과 내세, 탈주, 기원의 현재화, 미래의 해독, 대립적인 것들의 투쟁과 보완이라는 형태 등인데, 이것들이 바로 시공을 뛰어넘으며 항구적인 인간 정신의 뼈대를 구성하고, 역사의 날줄과 씨줄을 엮어내는 본질적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인간 정신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으로서, ‘상징’과 ‘상상력’을 결합시켜 인지하게 될 때, 인간의 인식은 좀 도 본질을 향해 전진할 수 있음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그가 제시한 구조 중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초월적 인식’과 ‘이타성’, ‘통일성’, ‘영혼과 내세’, ‘탈주’등의 원형구조를 통해 이천 년대 시인들의 상상력 세계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2. 시적 상상력의 원형적 구조

1) 초월적 인식

먼저 원형구조의 첫 패턴으로 ‘초월적 인식’을 들 수 있다. 초월적 인식에서 실재는 비가시적이고 포착할 수 없지만 명백하고 확실한 실재인 만큼 더욱 의미 있는 것이다. 그것은 초자연의 세계와 현실이 민감하게 발현된 현상들로 이루어진 영역인데, 이 민감한 발현현상들이 경이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신성한 것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초자연의 세계 구조는 내가 내 자신의 의지와는 구분되는 힘, 즉 나와 다른 전체(신성한 것)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는 인간의 의식으로서 성스러운 것이다. 이 실재는 유일하게 세계와 인간조건에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현상은 전통적인 종교들이 누려온 독점의 종말과 신성한 것의 분산이고, 나아가 이 신성한 것의 ‘변질된’ 형태들의 다양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은 일상적인 삶의 평범한 사건들보다 더 진실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초월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진리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경이로운 것들은 저절로 각인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데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동일한 문화 내에서도 극도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하늘을 나는 독수리, 핏빛으로 해석되는 월식 동안의 불그스름한 달빛, 이리떼의 울부짖음 앞에서 물러서는 개들, 탄식 소리를 내는 밤의 새들, 태양의 어슴푸레한 빛 등의 형태로 말이다. 내재적인 것들 속에서 항상 초월적인 것을 읽을 수 있도록 방향이 잡혀진 시선에는 모든 현상이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인류를 이끄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의 작용을 전제로 하고 민족들을 개별화시키고 운명 짓는 민족정신을 전제할 때, 시대와 이데올로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지속적인 원형으로서 초월적 실재는 우주적 힘과 보편적 관념, 또는 어떤 메커니즘이 이끄는 현상들의 의미와 궁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내 스무 살은 노래였다. 거리에서 배운 노래가 목청으로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그것을 먼 이방의 방언이라 여겼다. 천둥소리는 더 크게 들렸고, 몸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단 하나의 권능도 없이 숨소리 없는 거리에 서 있었다. 나는, 가볍게 다른 문을 열 수 있을까. 꿈도 없는 잠을 매일 잘 수 있을까. 내 손가락들이 들러붙어 물갈퀴가 되고 이빨은 사자처럼 송속니만 사납게 솟아난다. 성 꼭대기에 올라 어둠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새의 등에 올라타고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으며 나스카 평원에 새겨놓은 神의 형상을 한눈으로 보고 싶었다. 나는, 어떤 법을 배웠던가. 노래하는 법 말고는 배운 것이 없다. 눈먼 한 마리의 새가 내 머리칼 속에서 둥지를 틀고 있었다. 새의 전생은 자유였다고 평원을 돌보던 파수꾼이었다고, 그 새가 법을 배웠다.
- 이재훈의 「나스카 평원을 떠난 새에 관한 이야기」부분

시적주체가 스무 살에 부른 노래는 바로 나스카 평원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의 몸짓이었다. 새는 근원적인 것에 접근할 수 있는 존재로서 신비로운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설움을 알고 꿈을 잃어버린 후 새는 나는 법을 잊었고, 먹고 살고 죽는 소소한 일상, 즉 “수면을 뛰어오르는 물고기나 굴을 빠져나온 뱀을 낚아챌 때마다” 한 생의 빛이 바래는 순간을 목격해야 했다. 그리고 새는 눈이 멀었다. 새가 날 수 없을 때 시적주체가 배운 것이 바로 노래이다. 이때 노래는 나스카 평원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던 새의 비행을 대신하는 것이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먼 이방의 방언”이라고 여겼다. 결국 시적주체는 세상과 불화했고 고독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다른 전체에 의해 조건 지어진 인간의 의식은 노래로 대변되는 것이다. 신성한 것은 인간 사회와 초월적인 세계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작품에서 새는 신성의 흔적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신성성의 박탈 즉 ‘날지 못하는 새’가 되어버렸을 때에도 이 본질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조건을 초월하려는 시적주체의 영원한 현존적 이상과 꿈은 초자연적 세계에서 한정된 경이로운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결국 선험적 범주에 의하여 구성된 ‘초월적 인식’은 궁극적 근원이며 근거가 되는 것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특성을 가진다. 그러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현상계의 근원이며 그 근거가 되는 신, 영혼, 궁극적 실재와 같은 범주의 것들을 짐작하게 한다. 따라서 실재하기는 하나 우리가 인식하기 어려운 초월적 실재에 대한 의식은 상상력이 태생적으로 지닌 원형구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문학이론가로서 상상력의 개념을 정리한 코울리지는 상상력을 현상 세계가 감추고 있는 초월적 진리를 드러내는 능력이라고 정의했을 정도로, 초월적 인식은 상상력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상력의 원형구조는 이재훈 뿐만이 아니라 김경주, 여태천 등의 시세계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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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세대


이재훈


아름다운 골목은 없다.
돌고 도는 것이 골목이며
참고 참는 것이 사랑이다.
첫 사랑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때까지
본드를 마시고, 부탄가스를 불었다.
정작 중요한 말이라고 세상에 떠도는 건
모호한 개념 정의들뿐.
됐어 됐어 이젠 그런 가르침은 됐어.*
유치하다 생각한 노래를 목청껏 불렀지만
우리에게 밤문화를 가르쳐준 선생님과
몇 푼의 참고서 값으로 위안을 삼는다.
대학도 회사도 모두 판매왕을 모집하여
고시원과 학원을 전전하였던 아름다운 시절.
희망도 아니고, 욕망도, 진리도 아닌
어수룩한 정당성으로 가득한 신자유주의.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
그리고 나는 불편하다는 것.
정의와 진실이 정치적이라는 걸
한순간 깨달았을 때.
잔혹한 눈망울을 낼 수 없는 나는
숭고한 공간을 꿈꾸었던 나는
이 시대를 매일 버린다.
머릿속 꿈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한 것도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이십일 세기 문명에 무릎을 꿇는다.
내 손으로 만든 옷과 신발과 종이가
하나도 없는 무능한 세대.
조금 일찍 태어났더라면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고
울분으로 노래를 부르고
세상에 욕을 하고
그것으로 명예를 얻고 정치를 하고 돈을 벌고
후배들에게 내 아픔의 젊은 날을 얘기할 텐데.
체게바라의 페데로사를 끌고
동해와 남해를 거쳐 서해의 어귀에서
술을 마시고 낯선 여자를 만나고
모래밭에서 잠드는 낭만놀이를 했을 텐데.
손잡고 싶은 사람 하나 없어
집으로 향하지만
오늘도 우편함엔 밀린 고지서와
광고 전단지만 가득하다.

* 서태지, <교실이데아>



|작품평|


‘서태지 세대’의 궁지와 난문(難問)



김창환
(문학평론가)



지금 쓰고 있는 이것이 <서태지 세대>라는 텍스트에 대한 글이 아니라 허물없는 말이라면, 이것이 지면이 아니라 시인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공간이라면, 혹은 내가 텍스트를 평가하기 위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알량한 자의식을 버릴 수 있다면, 나는 이 시에 대해 따져 물을 것도 풀어 설명할 것도 없다. 한 행, 한 행에 담겨 있는, 심지어 그 행간에 숨어 있는 감정의 값조차 직관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바로 내가 ‘서태지 세대’이기 때문이다. 시인과 시 속 발화자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이 어렵고, 그 발화자와 독자(나)를 구분하는 것도 불편하다. 이 친화력을 떨어내기 위해 애쓰며 「서태지 세대」를 말해야 한다고 스스로 되뇌는 순간, 문득, 이 곤혹스러움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바로 이 시의 고갱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 시는 한국 사회의 한 세대가 직면한 내적, 외적 궁지와 그것이 야기하는 우울과 무력감을 절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혹여 독자가 그 세대에 속한다면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골목은 없다. 돌고 도는 것이 골목이며 참고 참는 것이 사랑이다”로 시작되는 이 시의 전반부는 한 세대의 궤적을 숨 가쁘게 추적한다. 특히 첫 대목에 놓여 있는 ‘골목’은 유년기의 체험부터 성인이 된 이후의 세계인식을 아우르는 긴요한 상징이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황금기인 유년기, 자족적 소우주 안에서 살아가는 그 시절의 ‘골목’은 새로운 공간 체험을 가능케 하는 돌쩌귀이다. 공간들은 구불구불하게 꺾여 있는 골목길을 따라 접혀 있고, 꺾인 골목을 돌아 내달릴 때 경험하는 새로운 공간은 세계체험의 가장 초보적인 형태이다. 그런데, 이 시는 접힌 공간이 펼쳐지며 나타나는 공간이 더 이상 새롭지도 아름답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저 획일적이고 비루한 공간의 반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돌고 도는’이라는 이 말에 담긴 시적 주체의 진저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린 시절의 단순한 탈향의식부터 예민한 정신이 결코 깨끗이 포기할 수 없는 유토피아 동경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익숙한 공간의 피륙을 찢고 새로운 곳으로, 혹은 최소한 이곳과는 다른 곳으로 뛰쳐나가려는 충동을 내장하고 있다. 이러한 강렬한 충동을 인정한다면 ‘돌고 도는 것이 골목’이라고 말하는 자의 끝 모를 좌절, 즉 이 세계에 이곳과 다른 곳이 없다는 사실, 새로움이 없다는 사실이 안기는 좌절을 간취해낼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사춘기의 발달과업을 자아와 세계의 탐색이라고 말한다. 진짜배기 탐색을 시작한 진지한 개인들은 내 삶을 지탱할, 혹은 내가 살아갈 세상을 지시할 말들을 고르고 그것들의 경중을 따져 우선순위를 매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작업의 심층에는, 언어가 실재를 지시하고 있으며(아니면 최소한 언어가 실재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고 있으며), 인간 체험은 언어를 통해 의미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고,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와 관계할 수 있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만약 ‘말’로 나와 세계의 관계를 직조해내지 못한다면 진지한 개인들은 무의미의 심연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적 주체가 ‘서태지 세대’의 우울과 무기력의 한 극단으로 포착해낸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정작 중요한 말이라고 세상에 떠도는 건/ 모호한 개념 정의들뿐”이라고 말할 때 이 짧은 2행은 서태지 세대가 가지고 있는 ‘말’에 대한 불신을 잘 보여준다. ‘말’에 대한 불신은 곧 자기 이해와 세계인식의 불투명성과 연관되며 그것은 이 시의 흐름을 좇아가면 ‘정의’와 ‘진실’의 불가능성과 연관되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사실, ‘서태지 세대’가 어떤 ‘가르침’에 존경심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들이 대학문턱을 밟고 다닐 무렵 대학의 강단은 ‘해머의 철학’이 지배하고 있었다. 전통적 사유, 사유의 축조술은 맛보고 판별하기도 전에 부정해야 할 무엇으로 다루어졌으며 오랫동안 근대세계를 떠받치고 있던 많은 것들이 이미 부서져 있었다. 모든 말들은 그 지시대상이 모호하거나 지시대상과 교묘히 어긋나 있었고, 말은(조금 더 확대해서 언어는) 더 이상 세계를 여는 열쇠라고 추앙받지 않았다. 그런데 ‘서태지 세대’가 지니는 ‘말’에 대한 불신은 해체를 지향하는 교육의 효과가 야기한 지적 승복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감각적으로 체득한 것이다. 이것이 ‘서태지 세대’의 날카로움이다. “됐어 됐어 이젠 그런 가르침은 됐어./ 유치하다 생각한 노래를 목청껏” 부른 세대는 전통적 가치체계나 이데올로기와 그것들을 가장 밑바닥에서 떠받치고 있는 ‘말’에 대한 부정을 감각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말’은 세계 내적 존재인 나를 떠받치는 토대가 되지 못한다. ‘정의와 진실’은 그 절대성을 잃고 그저 ‘정치적’인 맥락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전락했다. 이제 내가 좇아야 할 숭고한 대상들은 다 소멸하고 ‘신자유주의’라는 전지구적 시스템만이 내 삶의 내밀한 영역까지 파고들어 나를 지배한다. 적과 나를 구분하는 것이 본질인 정치의 생리를 체득하지 못한 ‘나’는, 이 바깥 없는 체제를 살아가면서 감히 바깥 혹은 높음을, 다시 말해 ‘숭고의 공간을 꿈꾸었던 나’는 이 시대와 심각한 불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제 ‘나’는 이 시대의 힘을 받아들여 순응하거나 스스로 유폐하는 것 중 하나를 강요당한다. 그리고 ‘나’는 후자를 택한다. ‘정의’와 ‘진실’을, 그리고 ‘머릿속 꿈들’과 ‘선한 것’을 부여잡고 있는 시적 주체에게 이 시대는 복마전을 방불케 한다. ‘조금 일찍’ 태어난 세대에 대한 감정의 본질은 자기 삶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부여할 수 있었던 세대에 대한 부러움이다. 그러나 그 의미부여가 얼마나 허구적(낭만적)이고 자기기만적인지 시적 주체는 잘 알고 있다. 기실 부러워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을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시적 주체의 모습을 바라보는 독자의 입맛은 씁쓸하다. 주체와 세계에 관한 ‘중요한 말’을 갖지 못한 세대의 우울과 무기력이 단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말’의 권위가 사라지면 ‘진실’은 존립할 재간이 없다. ‘진실’이 없는 곳에서는 보편적 ‘정의’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세계 속에서 나 자신의 삶을 긍정하거나 의미를 부여할 어떠한 방법도 없다. 이것이 ‘서태지 세대’가 처한 내적 궁지이다. 그리고, 잠깐 쓰이다 버림받을 노동만을 요구하는 세계 질서의 강고함이 그 세대가 처한 외적 궁지이다. 이 불멸의 궁지 속에서 숭고를 꿈꾸는 자는 필멸 혹은 필패이다. 이것이 ‘서태지 세대’의 우울과 무기력을 낳는다. 자, 이 난경難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난문難問이 시인을 기다리고 있다.

_ <현대시>, 2009년 8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

좌담 / 오늘의 전위 21세기 한국의 시동인

전위를 꿈꾸는 주체들의 동거



이재훈(사회)
김근
김언
신동옥


1. 동인 활동의 현주소
2. 동인들의 문학운동과 전략에 대하여
3. 동인 활동을 통해 어떤 새로움을 줄 수 있는가
4. 현 동인들에 대한 비판적 점검과 동인 활동의 허와 실
5. 동인 활동과 창작과의 관계
6. 2000년대 활동하는 시인들의 일상과 시적 향방
7. 2000년대 동인의 의미와 전망


1. 동인 활동의 현주소

이재훈 : 안녕하세요. 저는 사회를 맡은 이재훈입니다. 이번 좌담은 2000년대 이후 시동인들을 전반적으로 점검하고 이를 통해 21세기 새로운 시적 경향을 진단해보는 자리로 마련하였습니다. 애초의 계획으로는 동인 개개인의 시적 경향을 바탕으로 각 동인이 추구하는 지형도를 그려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런 기획이 여러 차례 있었고, 동인 구성원을 통해 동인의 지향점을 찾는다는 것이 단순한 논리로 귀결되는 것 같아 이번 좌담을 마련하였습니다. 좌담을 통해 좀 더 자유롭고 편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현대시]에서 90년대 초반에 이와 비슷한 동인 좌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현대시] 1992년 5월호) 90년대 시동인을 전반적으로 점검하는 자리였는데, 이제 10년을 훌쩍 넘어 2000년대 시동인을 점검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2000년대 이후 시동인의 위상과 가능성을 점쳐보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제가 현재 시동인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등단 이후 90년대 후반부터 <시원>이라는 동인 활동을 한 경험이 있고, 또 전반적으로 좌담을 이끌어 갈 길잡이로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지금 세 분의 시인들께서 각 동인들을 대표하여 좌담에 참석해주셨습니다. <천몽>의 김언, <불편>의 김근, <인스턴트>의 신동옥 시인 반갑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들 가까운 친구들인데 술자리가 아닌 이렇게 진지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어 새롭네요.(웃음) 먼저 각 동인들의 탄생 배경과 현재의 활동 상황 등을 소개해 주십시오.

김언 : 오늘 좌담에 참석하신 <불편>의 김근 시인이나 <인스턴트>의 신동옥 시인과 달리 저는 <천몽>에 초창기부터 참여해온 시인이 아니라서 동인의 탄생 배경과 변모 과정을 살아 있는 육성으로 들려줄 수가 없어서 아쉽네요. 부득이 작년에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열렸던 <천몽> 동인 페스티벌에 소개된 소책자 내용을 간단히 읽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1998년 고찬규, 권혁웅에게 동인 제의. 이장욱, 이영광이 가세하여 90년대 중후반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기 전 시인들 선별 작업 시작.
1999년 2월, 10여 명의 시인에게 편지 보냄. 첫 모임 강혜미, 고찬규, 권혁웅, 박해람, 배영옥, 손택수, 여정, 이영광, 이장욱, 이찬, 유종인, 진수미 참석. 같은 해 이미자 들어옴.
2000년 김행숙, 정재학 들어옴. 이영광 나감.
2001년 이기성 들어옴.
2005년 김언, 배용제, 이근화, 진은영, 황병승 들어옴.”

이렇게 소개가 되어 있는데요, 당시 소책자에 약력과 시가 들어 있는 시인은 모두 18명입니다. 개중엔 현재 동인 활동이 사실상 전무한 몇 사람도 있지만, 일단 소책자에 소개된 시인을 모두 거론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찬규, 권혁웅, 김언, 김행숙, 박해람, 배영옥, 배용제, 손택수, 여정, 이근화, 이기성, 이미자, 이장욱, 정재학, 진수미, 진은영, 황병승. 여기에 지난해 12월 조연호 시인이 마지막으로 동인에 가입된 상태입니다.
보시다시피 <불편>이나 <인스턴트>에 비해서 인원이 조금 많지요? 많기도 하지만, 동인들 각각의 시 스펙트럼과 활동사항은 그보다 훨씬 더 폭넓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 색깔도 다르고 사는 모양새도 다르고 등단 연수와 나이 또한 멀게는 10년 가까이 차이가 나다 보니 언뜻 하나의 동인이라고 이름 붙이기가 곤란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 어수선함과 다양함이 어쩌면 <천몽>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로 <천몽> 내부에 단일한 문학적 지향성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1999년 동인이 결성될 때부터 견지해온 <천몽>의 독특한 성격이라고 알고 있으며 그 고집은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동인은 분명하지만, 각자의 문학적 지향은 하나의 에꼴로 묶이지 않고 산만한 편입니다. 따라서 동인을 통한 일정한 문학 운동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동인 모임’만이 있을 뿐이지요. 어떤 문학적 구심점이 없이 각자의 시세계를 ‘각개 격파’해가는 시인들의 모임은, 나중에 별도로 설명이 더 있겠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가장 2000년대적인 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몽>이 동인인 순간은 아주 가끔 있습니다. 1년에 서너 번 정도 모이는 모임이나 부득이하게 동인의 정체를 드러내야 하는 순간에만 ‘분명히’ 확인되는 동인, 이게 과연 진정한 동인인가 하고 물을 수도 있지만, 그런 질문이나 힐난조차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습니다. 문학적 지향성이나 구심점 같은 동인의 내부를 비워놓았기에 대외적인 시선에서도 자유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나오지 못했던, 아니 하마터면 나올 뻔했던 동인지 서문에도 들어 있는 말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내부’에 있지 않습니다. 내부에 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세계가 모인 것, 그것이 <천몽>입니다. 어느 지면에서 진수미 동인이 얘기한 것처럼 <천몽>은, 음식에 비유하자면, 비빔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선살로 이루어진 모듬 초밥에 가까운 동인입니다. 으깨지고 비벼지고 섞이는 동인이 아니라 함께 진열되어 있지만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상태, 그 상태가 <천몽>이라는 동인입니다.

김근 : <불편> 동인이 시작된 건 2002년 겨울이었습니다. 동인을 처음 제안한 건 저였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등단 후 몇 년 동안 문학적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그 공백기 이후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하면서 저는 소통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 소통이라는 건 문학적 고민에 대한 소통이면서 문제의식의 공유였죠. 제가 처음 동인을 제안한 건 같은 [문학동네] 출신 이영주 시인이었습니다. 만나서 얘기해보니, 그 역시 저와 생각이 비슷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시단에 팽배한 전통적 서정시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것은 전통적 서정시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기보다는 시단의 일방향성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었죠. 그리고 그 시들이 리얼리즘이나 상업주의로 포장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었습니다.
그 뒤 우리는 가까이 지내던 같은 [문학동네] 출신인 안현미 시인에게 전화했고, 안현미 시인도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셋이서 함께 할 시인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김중일 시인을 추천했고, 이영주 시인이 김민정 시인을 추천했고, 안현미 시인은 장이지 시인을 추천했습니다. 이렇게 여섯이서 출발했습니다. 그 뒤 2003년에 하재연 시인이 동인에 합류하게 되었고, 2004년 김경주 시인이 동인을 함께하게 되면서 여덟 명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여덟 명이 동인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초기에 저와 이영주 시인이 가졌던 문제의식과 소통에 대한 필요성은 모두 공유했습니다.
등단 순으로 보면, 저(1998년 [문학동네])와 김민정(1999년 [문예중앙])이 1990년대 말에 등단했고, 이영주(2000년 [문학동네]), 장이지(2000년 [현대문학]), 안현미(2001년 [문학동네]), 김중일(2002년 [동아일보]), 하재연(2002년 [문학과사회]), 김경주(2003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순입니다.
초기에 모임은 2주에 한 번씩 모여 합평을 했습니다. 서로 작품에 대해 합평을 하며 3년 정도를 보냈고 그 이후로는 한 달에 한 번씩 지금까지 모이고 있습니다. 첫 시집들이 나온 뒤에는 각자의 첫 시집들이 가지고 있는 특장과 단점을 토론하며 이후 작품 활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시집들이 나오면서 또 다른 모임의 정체성을 마련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신동옥 : <인스턴트> 같은 경우에는 강성은, 김안, 박장호, 서대경, 신동옥, 황성규 이렇게 여섯 명입니다. 동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2001년에 제가 먼저 등단하게 되면서였습니다. 함께 수업을 들으며 알고 지내던 박장호, 서대경과 함께하면서 틀이 갖추어졌습니다. 황성규는 학교 후배이고 시에 뜻을 두고 있어 2002년부터 합류했습니다. 초기에는 일없이 만나 학교 얘기나 하고 했어요. 그러면서 인터넷 카페활동이나 부정기적으로 술추렴을 하고……. 선후배 시인들의 격려가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싶네요. 그러다가 김안이 들어오면서 합평을 위주로 하는 본격적인 동인 모임이 꼴을 갖추었습니다. 2001년에 모임을 갖기 시작하여 강성은이 2004년 겨울에 마지막으로 들어와 만 3년 만에 여섯 명이 모두 모였습니다. 모임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많으면 일주일에 한 번, 늦어도 두 달에 한 번, 평균 2~3주에 한 번씩 모임을 가져왔어요. 그러면서 한 명씩 한 명씩 등단을 했습니다. 제가 2001년 겨울에 등단했고, 맨 마지막으로 등단한 강성은 시인이 2005년 가을에 등단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계속 우연이 겹쳐지면서 동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마추어 모임으로 시작했으니, 애초부터도 동인이라는 자각은 없었습니다. 동인 이름도 제가 멋대로 붙인 카페 이름을 그대로 따온 거구요. 2006년 여름, 어떤 잡지의 동인 특집에 인스턴트 동인 여섯 명의 신작을 실으면서부터 동인 이름을 인스턴트라 외부에 알린 셈이 되었습니다. 동인의 이름과 존재를 드러낸 셈이죠. 앞으로도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저희 스스로는 만들어진 경위나 활동도 그렇고…… 평소에 해오던 대로, 거의 무의식적으로 계속 해온 것이죠.

이재훈 : 동인 활동의 현주소를 들었는데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천몽>은 10여 년 가까이 동인 활동을 해왔고, 그 다음에는 <불편>이, 그리고 <인스턴트>가 가장 젊은 동인으로 활동해오고 있습니다. <인스턴트> 같은 경우는 등단 전부터 꾸려져서 등단 후까지 이어지는 약간 다른 탄생 배경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 동인들의 문학운동과 전략에 대하여

이재훈 : 우리나라의 시사에서 동인지의 의미는 남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1919년 <창조>에서부터 시작하여 각 문학연대마다 동인지가 시사에 던지는 새로운 문학적 특성은 그 시대를 대변하였습니다. 동인지는 발표지면이 귀했던 시절, 신인들의 새로운 목소리를 수용하는 발표의 장으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비영리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자본의 시스템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이로 인해 동인은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무대가 된 셈입니다. 이러한 성격이 하나의 문학운동으로 발전해나가기도 했으며 새로운 문학담론을 창출했습니다.
동인지는 결국 기존의 권력적인 문학의 장에 새로운 저항의 기운을 불어 넣는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기존의 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전위의 힘이나 개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점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동인의 정체성 중의 하나가 어떤 기획에 의해 발전한 운동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동인들의 문학 활동이 전략을 가지고 수행해야 의미를 갖는다는 말과도 상통합니다. 지금의 동인과는 좀 다른 지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동인이 가지고 있는 문학운동이나 전략, 혹은 동인들이 추구하는 문학적 지향성 등을 자유롭게 얘기해 주십시오.

신동옥 :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많이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 <인스턴트>의 경우 동인이 만들어진 배경이 여타의 동인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동인이 결성되려면 동인을 만든 핵심 멤버들 사이에 어느 정도 문학적인 경향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저희 동인 중에 모난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는 시인은 없었고, 특별히 작품세계에 변화를 보인 동인도 없었어요.
사전을 찾아보니 동인이라는 말이 이렇게 정의되어 있더군요. “어떤 일에 뜻을 같이하여 모인 사람”. 여기서는 ‘사람’은 단수 일반명사이지만, 동인 활동을 한다고 말할 때 이 말 자체가 복수 개인으로서 개체인 동시에 집단을 뜻하게 됩니다. 때문에 동인은 한 집단을 이루면서도 그 안에서 개개의 독립성이 강조됩니다. 동인 활동의 지향성·방향이라는 말은 이런 정의에서 거꾸로 도출됩니다. 두 번째로는 ‘같은 뜻’ 또는 ‘뜻을 같이 해서 활동을 한다’라는 말입니다. 보통 동인 활동, 동인운동, 시운동이라고 이야기할 때 이런 의미의 지향성이 강조됩니다. 동류를 이루는 시인들이 모여서 무엇인가를 획책한다면 그 지향점은 모호한 대로나마 밝혀야 하겠죠. 저는 질문에 포함된 ‘문학활동, 문학운동, 전략’ 이런 말들이 생소하고 무섭기까지 합니다. ‘너희들만의 전망이 무엇이냐’, ‘너희들이 글을 써나가면서 좌절에 부딪혔을 때, 어떤 비극성을 가지고 스스로의 미래를 견지하느냐’ 하는 것일 텐데요. 글쎄요…… 저희 동인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답했느냐 찾아보니, 이런 구절이 있군요. “<인스턴트>는 그럴듯함에 호소하는 오래된 전통에 대해서 항상 의구심을 품는다.” 동인으로서의 인스턴트는 전략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죠(비겁한가요?). 저희 동인들이 함께 원고지 60매 정도의 아포리즘이랄까, 나름의 시론을 쓴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유독 이런 단어들이 눈에 띕니다. ‘언어, 리듬, 음악, 자아, 운율, 세계, 의식….’ 결국 저희 동인은 한 번도 합의하지는 않았지만, 이 단어들이 지칭하는 바, 시 자체를 동인의 문학적 지향성으로 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 대답은 별다른 변별점이 될 수 없다는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김근 : 선배 동인들과의 차이를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동인지 문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문학사에서 동인운동은 근대문학의 태동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50년대 후반기 동인들의 모더니즘 운동이 있었고, 70년대 80년대 <반시>, <오월시>, <삶의문학>, <시와경제> 등은 문학이 이 땅에서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를 제공했습니다. <시운동>은 80년 문학이 낳은 역효과에 대한 대응으로 보여집니다. 그들 역시 그런 방식으로 80년대에 기여했다고 봅니다. <시힘>은 이른바 민중적 서정시로서 우리 문학에서 무척이나 확고히 자리를 잡은 듯합니다. <21세기 전망>은 90년대 이른바 우리 문학의 변화의 시기에 문학의 한 고민을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동인지 운동은 우리 문학의 이론과 이념을 제공하기도 했고 엄혹한 시대에 권력에 의해 매체가 사라진 자리에 매체를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선배들의 동인지 운동은 우리 문학에서 굉장히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동옥 시인이 이야기한 대로, 동인들의 문학운동이나 전략이라는 것이 과연 2000년대 가장 젊은 동인들에게 합당한 용어인가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지금 활동하고 있는 동인들은 어쩌면 운동과 전략을 하지 않기 위한 동인이지 않을까요? 전시대 동인들의 운동과 전략이라는 것은,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상황이 있었지만, 제도에 반발함으로써 제도에 진입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운동과 전략이란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불편>의 경우는 제도와 권력에 대한 경계심이 처음부터 팽배했습니다. 동인 자체가 제도화되고 권력화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심이나 반성을 공유했던 탓인지 ‘하나의 지향성을 가져야 된다’거나 ‘그 지향성을 이론화하고 실천해야 된다’는 개념은 저희에겐 아예 없었습니다.
<인스턴트>도 2006년에 동인특집을 하면서 동인에 대한 자각을 했다는데, ‘불편’이라는 이름도 나중에 붙여지게 된 것입니다. 동인 이름이 ‘불편’이 된 것은 2004년의 일입니다. 함께 동인 모임을 하고 있는 게 문인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이름이 뭐냐고 묻는 일들이 잦아졌고, 그냥 얼버무리기엔 ‘불편’한 지경까지 와버렸습니다. 게다가 그 즈음 동인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결국 동인지는 출판사 사정에 의해 나오지 못했죠.). ‘불편’이라는 이름은 동인 초기에 안현미가 제안했던 이름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 이름을 발음하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인들끼리 여러 이름의 후보를 들고 얘기해본 결과 ‘불편’이 우리 동인 이미지에 가장 적확하다고 결론이 났죠.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저는 한동안 그 이름이 ‘불편’해서 입 밖에 내는 걸 쑥스러워했습니다.(웃음)
생각해보면 ‘불편’이라는 이름은 조금 사적으로 느껴집니다. 세상에 대해 절망의 태도도 아니고 희망의 태도도 아닌 겨우 불편함을 드러내는 정도이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섣부른 희망이나 절망이 세계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알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 불편함은 문학제도에 대한 불편함이기도 합니다. 문학제도 역시 우리를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에겐 다양성과 동인 각자의 개별성이 중요했습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며 각자의 색깔로 시를 쓰는 동인들은 각자가 가진 시적 문제의식의 아주 조금씩의 교집합만을 동인에 두었고, 그 교집합을 통해 동인 안에서 소통하고 있었던 것이죠. 사실 동인으로 뭘 해보겠다는 의지는 전혀 없었습니다. 혹자는 그게 무슨 동인이냐고 반문했었고, 젊은 동인들이 점점 취미집단화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평론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선언이 없습니다. 다만 불편해할 뿐이죠.

김언 : [현대시]로부터 질문지를 받고 나서 동인들끼리 따로 모여서 의논하지는 못하고, 천몽 카페 게시판에 올려놓은 후 댓글을 다는 식으로 의견을 모았더랬습니다. 대체적인 의견은 앞서 동인 활동 상황을 얘기하면서 말씀드렸고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동인 한 분이 전화상으로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문예사조로서의 문학운동 시대는 끝난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듣고 전적으로 공감하고 동의했습니다. 동인을 통한 혹은 유파를 통한 거시적인 문학운동은, 영원히는 아닐지라도 한동안은 끝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앞의 두 동인도 마찬가지지만, 동인이라고 해서 하나의 에꼴로 묶는 것 자체가 시대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사실, <천몽>을 포함하여 2000년대 동인을 이루는 시인들 대부분이 거대담론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성장기를 보낸 시인들입니다. 혹은 아예 거대담론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시를 시작한 시인들입니다. 그들에게 거대담론은 이미 과거이거나, 절실하지 않은 남의 세계입니다. 이들에게 거대담론 혹은 일정한 방향을 지닌 담론과 시를 이어서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어색합니다.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말인데, 그런 점에서 동인의 탄생과 그 모임의 성격도 과거의 동인들과 달리 조금 더 느슨하고 조금 더 개인적이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천몽> 역시 시작할 때부터 그 점을 분명히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천몽>에는 문학적인 합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시에 대한, 문학에 대한 <천몽>의 유일한 합의점은 ‘합의하지 않는 데 있다’ 이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스무 명 가까이 모여서 동인을 하는데 얼마나 그 세계가 넓겠습니까? 넓고 다양한 만큼 동인 각자의 미학적인 새로움을 찾아가는 것이 <천몽>의 특성이면서 또한 시대적인 요청이 아닐까 싶네요. 각자의 문학적 대안은 존재할 수 있지만, 일정한 합의를 끌어내지 못해 고민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2000년대 시동인들은 내면적으로 이미 문학에 대해서 집단적인 ‘방향성을 가지자, 경향성을 가지자’란 구호를 폐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젊은 시인들에게 일정한 문학 운동이 부재한 것을 아쉬워하는 얘기가 들립니다. 운동이 없는 것 자체가 젊은 시인들에게 더 적합한 옷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분들의 우려이겠지요.
일부 비평가들의 경우 젊은 시인들의 시세계를 동인이 아니더라도 굳이 일정한 유파로 묶어서 파악하려고 합니다. 하나로 묶이지 않는 시인들을 하나로 묶어내려니 자꾸 오류가 생길 수밖에요. 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인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서로 다른 속성으로 뭉친 시인들을 하나의 노선이나 경향으로 파악하려면 아마도 판판이 실패할 것입니다.
2~3년간 시단을 뜨겁게 달구었던 미래파 담론도 그런 실패 사례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 명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든 간에 유파로 묶어서 파악하려고 하니 들어맞지 않는 것이고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만 가열되었던 셈이지요. 일부 언론과 비평가들이 미래파를 마치 하나의 유파처럼 묶고 나서 그들의 공통점으로 든 단어가 ‘난해시’였다는 사실은 이 논쟁이 얼마나 시적으로 허약한 토양에서 시작된 논쟁인가를 방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난해시’가 그토록 ‘쉽게’ 하나의 유파를 대변하는 단어가 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여기에 대한 얘기는 또 쓸데없이 길어질 것 같으니 그만두도록 하겠습니다.

3. 동인 활동을 통해 어떤 새로움을 줄 수 있는가

이재훈 : 아마 앞선 질문과 공동선상에 있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이전 세대의 동인 활동을 보면 그 이전 세대와는 다른 새로움을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운동>, <시힘>, <시와경제>의 80년대 시동인이라든지 <21세기 전망>, <슬픈시학>, <오늘의 시> 등의 90년대 시동인들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90년대 시동인을 통해 신서정을 얘기하기도 했고, 키치 세대의 탄생을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시를 통해 새로운 담론을 얘기하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2000년대 동인들의 활동은 어떤 새로움을 줄 수 있을까요? 김언 시인이 이어서 이야기해주시죠.

김언 : 되풀이해서 얘기하지만, 일단 동인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문학적 성취를 거부하는 것이 <천몽>의 분명한 성격입니다. 그리고 동인 내부에서도 자신의 문학적 지향점을 동인 전체의 이름으로 확대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집단적인 문학 운동은 물론이고 문예사조에 육박하는 거시적인 새로움을 노리는 동인들도 저는 없다고 봅니다. 대신 저마다 미시적인 새로움을 찾아서 각자의 시세계를 더 파고들어갈 수 있고 그럴 만한 미학적인 틈이 각자의 시 앞에 분명히 존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시적인 새로움에 자신의 문학인생을 걸고 투신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말도 되지요.
만약 동인 차원에서 새로운 문학 운동을 기획한다면, 단순히 선언뿐만 아니라 동인지가 반드시 필요해집니다. 새로운 문학 운동을 동인들 전체의 시로 일정 부분 증명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은 동인지가 불필요한 시대입니다. 제도권 내부의 시단, 특히 젊은 시인들만 놓고 보자면 분명한 사실이죠. 동인지가 불필요한 이유는, 일단은 제도권 내부의 발표지면이 풍족하기 때문이고, 조금 더 파고들면 시인들 스스로 자기들을 하나로 묶어서 보여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껏 동인지를 내봤자 모래알을 모아놓은 것일 테니까요. 여느 시 전문지의 구성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지요.
한국 근현대 시사詩史에서 ‘동인 문학’은 ‘동인지 문학’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서히 ‘동인 모임’으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 성격의 변화 자체가 어쩌면 2000년대 동인들의 유일한 새로움이 아닐까요? 얼른 눈에 띄는 집단적인 새로움이 아니라, 각자가 다른, 각자가 서로 다르기를 열망하는 2000년대 문학의 지반을 이루는 새로움이 현재 변화해가는 동인들의 성격에 있지 않을까 싶네요.

김근 : 김언 시인이 말한 것처럼 문학적 새로움이라는 것은 결국 각자 추구해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인이라는 하나의 색깔로 묶이기보다는 동인 안에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저희에겐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오히려 동인 각자의 문학적 새로움이 동인의 새로움을 결정짓는다고 할까요?
‘불편’에는 선언이 없다는 말씀은 이미 드렸죠? 선언이 없는 게 선언이죠. 선언은 없지만, 동인 안에서 충분히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 서로 존중되고 소통할 수 있고, 자극 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저희는 중요하게 생각해왔습니다. 문학적 새로움이라는 것도, 그 속에서 각자가 추구해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합평 과정에서 따뜻한 옹호와 생산적 비판은 물론 있었지만, 그것이 동인 이름으로 강요되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동인 각자에게 <불편>의 위상이나 색깔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저희 동인끼리 이미 공유하는 바죠.

신동옥 : 형들의 답과 비슷합니다만, <인스턴트> 역시 비슷한 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답이라는 것이 동인 활동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노출한다 해도요. 사史적으로 <시운동>, <시힘>, <시와경제> 등이 활동한 80년대와 같은 경우에는 동인지시대였고, 동인 활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명백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정치사회적인 여건으로 잡지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점, 발표지면의 부족 자체가 동인 활동을 지탱시할 수 있었다는 점을 먼저 짚을 수 있겠습니다. 동인이 만들어지는 이유도 천차만별입니다. 동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자기 나름의 미적 선언들을 걸고 시작한 경우, 어떤 전문가 집단에서 시를 여기나 집단취미로 표방하고 시작했다가 기성이 된 경우, 가장 절망적인 경우에는 문학적 에꼴을 만들기 위해 시작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앙가주망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시에 이데올로기를 싣고 사회의 부름에 답하려 한 경우도 있지요. 80년대 동인들이 남긴 성과는 극명합니다. 획일화되고 획일화를 지향하는 문학사에, 또 격변의 사회적 상황에 대해 동인 활동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문학적 다양성을 입증했다는 점입니다. 시단도 하나의 사회문화적 공동체이니 말입니다. 90년대 시동인의 경우 80년대 문학에서 종개념으로 후퇴했던 개별적 시적 자아들이 어떻게 표현하고 드러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90년대 동인들이 처음으로 올곧은 ‘개인―개인성’에 눈을 돌립니다. 형들도 90년대 후반에 등단하셨는데, 90년대 후반에 이르면 선배들의 작업을 시단 안팎에서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만개시킨 것 같습니다.
사史적인 연장선에서 2000년대 이르면, 너희들은 어떤 선언을 통해서 동인 활동이란 이름으로 시사에 새로움을 줄 수 있느냐는 물음이 질문 자체로 하나의 답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새로움 자체가 새로움이니, 동인 활동을 통해서 새로움을 줄 수는 없는 상황이 된 거죠. 저희 세 동인에서 이름을 떼고 그냥 A동인, B동인, C동인이라 불러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저는 이 아이러니가 시사에 어떤 안티테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90년대와 연속성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동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반反―동인 활동이라는 점, 즉 복수인칭으로 활동해 나가면서 서로간의 암묵적이고 느슨한 미적인 합의나 연대가 있을 뿐……. 그게 결정적인 차이 같습니다.

이재훈 : 연이어 이야기하면, 저도 좌담을 구성하고 준비하면서 회의적인 생각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이미 이전 동인들과는 태생이나 상황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를 통해 그 ‘다름’을 듣는 기회가 되어서 더욱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의 동인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전과 다른 것을 ‘다르다’고 막연하게 말할 수도 없고, 반대로 역사적인 동인의 맥락이 있기 때문에 그 흐름을 피할 수도 없는 게 사실이죠. 지금까지 각 동인들께서 이전 세대와 다르다는 지점을 짚으면서 지금 현 동인의 정체성을 말해왔습니다. 지금 제기된 정체성은 선언이 없는 동인이나 모임 형식의 동인이 될 텐데요. 이처럼 동인의 정체성을 많이 말해 주시는 것이 그간의 평론가들이나 선배들이 암묵적으로 바라보는 잣대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죠. “쟤들이 모여서 권력화라려고 한다, 에꼴을 만들려고 한다”는 식의 시선과 동시에 “새로운 목소리나 담론을 내야지”란 식의 강요들이죠. 이런 암묵적인 강요들에서 자유롭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현 동인들이 분명 이전 세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4. 현 동인들에 대한 비판적 점검과 동인 활동의 허와 실

이재훈 : 이전 세대의 동인들이 운동의 차원에서 새로운 문학담론의 생산과 세대교체의 역할을 담당했다면 지금의 동인들은 그 역할의 차원이 줄어든 게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굳이 동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필요성이 있는가. 동인의 필요성이 설득력을 잃은 지금의 시점에서 동인 활동은 새로운 섹트주의나 에꼴을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동인 참여자의 개개인도 자신이 활동하는 동인이 친목단체의 역할이라며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시인도 있습니다. 지금의 동인이 한국 시단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나 의미, 기대 등등이 궁금하고요.
하나의 예를 들자면, 2002년 [현대시]에서 동인특집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시원>과 <천몽> 동인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시인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설문조사를 보면 대부분이 동인이라는 집단의 이름이 아닌, 개개인의 이름으로 호명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합니다. 새천년 벽두부터 이전 세대와 다른 이와 같은 생각 때문에 동인 활동의 위축이라든가 하는 용어가 나오기도 한 것이죠. 그럼에도 동인 활동을 계속해나가는 것은 어떤 장점이 있기 때문이고, 동시에 단점 또한 있을 것입니다. 동인 활동을 통해 얻는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죠.

김근 : 과연 그렇다면 동인 활동을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이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요, 전 동인 활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동인을 하는 이유는 이미 문학제도가 너무 공고해 이 문학제도 안에서 소통이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미래파 논쟁을 다 지켜봐서 아시겠지만, 미래파 논쟁은 생산적인 시적 담론을 생산해내지 못한 채 미래파로 거론되는 시인들과 미래파 바깥에 있는 시인들에게 상처만 주고 끝이 났죠. 충분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미래파 논쟁의 한 실패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겠죠. 이처럼 제도 안에서 소통할 수 없다면 동인이라는 모임 안에서 각자의 문학적 지점들을 존중하면서 우리끼리라도 소통하겠다는 것이 저희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런 소통의 성과들이 개개인의 작품으로 드러나게 하겠다는 것이죠. 
단점에 대해서 물어보셨는데, 저희들이 상처받은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불편>이 세간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건 2005년 발발한 미래파 논쟁 이후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과정에서 ‘불편⊂미래파’라는 수식이 암암리에 유포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다. 그러나 <불편>에는, 평론가에 따라 물론 달라지겠지만, 이른바 미래파에 이름이 들어가는 시인도 있고 들어가지 않는 시인도 있습니다. 미래파를 가지고 <불편>을 설명하기에는 폭이 너무 협소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내부에서 상처를 받았죠. 그 덕에 유명해진 시인들도 있긴 한데, 개인적으로 구설에 휘말리거나 상처를 받기도 했죠.
그리고 당시 많은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나왔습니다. 저희 동인들의 첫 시집들도 대부분 그때 출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문단의 태도는 “이 젊은 시인들이 어디서 나왔지?”였습니다. 사실 90년대 후반에 등단해서 계속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소위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주요잡지들이 이 시인들을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죠. 그전까지 거들떠도 보지 않다가 시집이 쏟아져 나오자 마치 새로운 종족이 탄생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러면서 젊은 시인들을 서열화를 하며 분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제는 젊은 시인들 각자의 시세계가 지닌 색깔들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미래파’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색깔인 것처럼 다뤄졌다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젊은 시인들이 유행을 따른다는 비판도 심심찮게 등장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불편>은 우리가 미래파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편>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져서 언급되는 것에 대해 거부합니다. 미래파 이후 저희 동인 이름이 자주 언급되면서 이러저러한 잡지에서 동인 특집을 하자고 제안이 들어왔었는데, 거의 거절했습니다. 몇몇 잡지나 매체에 동인 특집이 게재되었습니다만, 의도와는 달리 <불편>에겐 오히려 상처로 되돌아온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재훈 시인이 앞서 <천몽>과 <시원> 동인의 설문조사에 대해 말했듯 <불편>의 시인들도 동인의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자기만의 작품세계로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바랄 뿐입니다. 동인들이 첫 시집들을 다 냈는데, 시집 약력에 동인 이름을 밝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죠. 저와 김경주 시인이 두 번째 시집을 내면서 약력에 처음 <불편>이라는 이름을 넣었습니다.

김언 : 밝히지 않았다고 다른 동인들이 기분 나빠하지도 않죠?

김근 : 예.

신동옥 : 저희는 안 밝히면 탈퇴해야 해요. 사람도 별로 없잖아요.(웃음)

김근 : 어쨌든 이런 ‘동인’으로 묶이며 받은 상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입니다.

신동옥 : 김근 형이 앞서 개별적인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상황이 젊은 동인들의 시운동을 더 필요로 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잡지나 작품집을 보면 면식도 없고 개인적인 정보도 없는데 꼼꼼하게 읽게 되고, 읽고 나면 은연중에 이런 문제의식으로 작업들을 하고 있구나 하는 공통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점은 이전 세대와는 다른, 변화의 일례입니다.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새로운 징후나 새로운 감성이 나오면 그것을 이론화시키려는 작업들이 뒤따랐고, 시적 합의를 거쳐 정리되었어요. 그러한 작업이 서로의 교조적 입장 차이를 재확인하는 데 그친 것이 금방 말씀하신 미래파 논쟁입니다.(물론 비록 한바탕 소동으로 끝났을지라도 미래파 논쟁은 작금의 시단에 분명 살을 찌운 부분이 있어요) 결과적으로, 어떤 새로운 징후들이 나타났을 때 이를 이론으로 봉합하기가 버거워진 상황, 감성적 공감대를 끌어내는 데에도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죠.
동인 활동은 우리가 전유할 수 없는 개개인의 사적 감성과 징후를 어느 정도 소통하게 만드는 계기 중 하나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동인’이라는 개념은 초기 낭만주의 때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개별자들이 한꺼번에 묶이면서 개체―집단으로 명명되는데, 이들이 살롱 같은 데서 교우하고 서로 쓸거리를 나누고 때로는 마음이 맞으면 함께 쓰기도 하던 초기 낭만주의의 느슨한 집단의식(esprit de corps)을 가진 문학적인 담지자들의 모임이 바로 동인입니다. 백 년이 훨씬 지난 지금 저희들이 하고 있는 활동은 순수한 의미로 이런 의미의 동인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현재와 같은 동인 활동으로 다시 ‘우리’라는 개념을 재정리할 수 있는 활력을 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소박한……. 왜냐하면 지금의 시인들은 유파를 떠나 개별자이며 복수인칭으로 존재하니까요, 안도 없고 밖도 없는 시인 사회에서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들쭉날쭉 견강부회하며 함께―각자 쓰면 종국에 서로 지친다는 단점이 있어요. 어떤 선배님이 제가 동인 활동을 한다니까 말리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시더군요. “나는 내가 피우는 담배와도, 내 자신과도 동인을 못하는데 너희는 여섯이서 몰려다니는구나.”(웃음)

김언 :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저는 문단 체제와 문학 동인의 역학 관계에 대해서 몇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이제까지 한국 문단에서 문학 동인이 융성하던 시기는, 달리 말하면 동인지 문학 운동이 왕성하던 시기는 역으로 한국 문단이 곤경에 처하거나 뿌리가 약했을 때입니다. 즉 문학의 제도화가 정착되지 않았거나 흔들릴 때 동인지 문학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1920년대 근대문학 초창기, 해방 후에서 한국전쟁 직후의 혼란기, 그리고 1980년대 신군부에 의한 언론 통폐합으로 영향력 있는 잡지가 폐간되던 시기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문학의 제도화가 과거 어느 때보다 공고해진 시기입니다. 동인지 문학은 제도권 문학이 약해졌을 때 활성화되는데, 제도권 문학이 강성해진 지금은 동인지 문학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의 필요성조차 절실하지 않지요. 제도권 내부에서의 경쟁, 혹은 제도권 내부로 더 깊숙이 진입하고자 하는 경쟁만 남고, 제도권 자체를 대신할 만한 문학 운동이 힘을 쓸 여력도 필요성도 없어진 시기인 셈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문학 동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얼마나 될까 그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상 할 일이 없죠.
특히 시단의 상황만 놓고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시단의 경우 제도권의 정점에 위치하면서 제도권을 이끌어가는 쌍두마차를 지적할 수 있는데, 하나는 비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입니다. 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등단이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집의 출간입니다. 그런데 자비 출간인 경우를 제외하고 시집을 내는 결정권을 누가 쥐고 있습니까? 바로 메이저 잡지의 편집위원들입니다. 이 편집위원들의 대다수가 비평가이고 동시에 대학교수입니다. 대학교수이면서 비평가인 그들이 호명해줘야 시집을 낼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인이 갑이 아니라 을의 관계에 있다는 말이며, 오히려 을이 되기 위하여 애를 써야 된다는 뜻도 내포합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영광스러운 을이 되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습니까? 외롭게 자비 출간하는 갑이 아니라 누군가 호명해주어 시집을 내게 되는 행복한 을이 되기 위해서 말이죠.
제도권의 정점에 비평가와 대학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 시인들조차 제도권 내부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들 대부분이 대학을 나왔고, 국문과나 문창과를 다녔고, 일부는 석박사 학위까지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비평까지 겸하고 있습니다. 즉 호명을 하는 사람이나 호명을 받는 사람이나 모두 제도권 내부에 있다는 것이죠. 현재의 시인들에게서 대학이나 비평가의 관여를 제외한 흔적을 찾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며, 그들에게 제도권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라는 주문이 불가능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내부에 있으며 내부를 떠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대학이 문학을 점령해버렸고 비평가가 시인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마당에 시인들끼리 모여서 새로운 문학 운동을 기획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그런 기획을 원하는 시인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의문입니다. 그럼에도 시인들은 끊임없이 모입니다. 사소하게는 술자리를 통해서 다르게는 어떤 계기를 갖기 위해서 모임을 만들어내는데, 그중 하나가 동인이라는 형태일 겁니다.
제도적으로 무력한 시인들이 무력하게 모여서 무엇을 모의해야 할까요? 무슨 얘기를 하고 무슨 합의를 끌어내야 할까요? 그것은 합의도 아니고 기획도 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모임은 강단 비평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제도권 문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인들의 생각이 토로되는 자리이며, 그 자리에서 흘러나온 이러저러한 얘기 전부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비록 지면으로 발설될 기회가 없더라도 시인들끼리의 소통, 좀 더 정확하게는 뜻이 맞는 시인들끼리의 소통은 수면 아래서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을 겁니다.
가령, 미래파 담론이 시단을 휩쓸고 있을 때 시인들끼리 만나서 하는 이야기는 분명 달랐습니다. 비평에서 시작하여 비평으로 끝난 담론이고 논쟁이지만, 지면 밖의 시인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분열되는 얘기는 그 자체로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그런 얘기들조차 없다면 언론이나 잡지에서 떠들어대는 담론들만 수동적으로,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겠죠. 비록 제도권 내부에 있더라도 제도권의 정점에서 강조하는 것과는 조금씩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작업이 한국 시단의 또 다른 이면을 형성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런 점에서 2000년대 시인들의 ‘동인 모임’은 한국 시단의 전면이 아니라 이면을 움직이는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5. 동인 활동과 창작과의 관계

이재훈 : 이제 조금 편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죠. 문학 동인이 비슷한 문학적 성향이나 지향점을 가지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동인 활동을 통해서 서로 문학 경향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동인 활동의 시작은 보통 시합평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제 경험으로는 동인 초기에는 시합평을 열심히 하지만, 조금 지나면 시들해지죠. 각자의 길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길을 가게 된다고 할까요. 각 동인들은 시합평을 하고 계신지 궁금하고요, 시합평을 통해서 작품창작에 끼치는 영향은 없으신지 듣고 싶습니다. 아니면 시합평이 아닌 다른 활동을 통해 시적 영향력을 받는지도 알고 싶네요.

김언 : 이제 거의 시합평을 할 시기는 지나가지 않았나요? 적어도 <천몽>의 경우엔, 시집 한두 권씩을 낸 다음부터는 각자의 길이 정해진 것 같습니다. 동인 차원에서 시인 각자의 길을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시적으로 일정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던 2000년대 이전의 동인들도 서로의 시를 구속할 명분이 약했는데, 지금처럼 문학적인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합의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누가 뭘 써도 상관할 바가 아니죠. 그럴 필요도 없고요. 오히려 누군가의 시를 내가 못마땅해 하더라도 또 누군가 나의 시를 못마땅해 하더라도, 그 못마땅함까지 껴안고 더 파고 들어가는 것, 각개 격파해 나가는 것이 <천몽>을 포함하여 지금의 시동인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김근 : 모두에 말씀드렸다시피 제게는 작품 활동의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동인 활동을 하면서 굉장히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다시 문단으로 진입할 때 가지고 있던 불확실성이나 작품에 대한 불안감이 동인들의 따뜻한 옹호와 응원 속에서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할까요. 저희는 합평회를 길게 한 편입니다. 3년을 2주에 한 번씩 만나서 계속 합평을 진행해왔으니까요. 나중에는 지쳐서 그만두었지만, 그 과정에서 자극도 받고 새로운 작품을 쓰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불편>의 다른 동인들도 아마 그랬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은 그런 작품 합평은 하지 않지만, 문학적 소통의 장은 열어두고 있습니다.
요즘은 동인 안에서 다른 고민들을 더러 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불편>에는 시와 다른 장르와의 소통에 주력하는 문화적 작업들을 진행해온 시인들이 몇 명 있습니다. 안현미, 이영주, 김경주, 저는 작가회의에서 ‘항구문학의 밤’이라는 행사를 2년여 동안 기획하고 진행해왔습니다. 이 행사는 우리나라 여러 항구들을 찾아가 시인들의 시에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이 결합해 함께 하는 공연이었습니다. 김경주는 ‘추리닝 바람’이라는 문화집단을 이끌며 문학뿐 아니라 희곡이나 문화공연 등 다방면에서 활동중이죠. 저는 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사무국에서 문학나눔큰잔치나 문학나눔콘서트 같은 공연들을 기획하는 작업들을 한 바 있습니다. <불편>은 앞으로 그런 다른 예술장르와의 소통 쪽에 관심을 두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것은 합의된 것은 아닙니다만,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한 공연 이후로 각자가 자극받은 것도 있고, 동인지를 굳이 책이 아닌 DVD로 내는 건 어떻겠느냐 하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으니까요. 굳이 소통을 문학에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다른 장르와의 소통으로 확대시키는 것은 어떨까 하는 고민들을 내부에서 조심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문학의 새로운 자극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신동옥 : 처음에 이 질문을 받고서 저희한테 직접적으로 하는 질문 같았습니다.(웃음)

이재훈 : <인스턴트>는 지금까지 오래도록 합평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동옥 : 지금 여섯 명 외에도 같이 합평회를 갖던 아마추어 분들도 있었는데, 결국 그만두셨죠. 수준 차이가 많이 나서 따라오지 못하니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두신 것이죠. 개인적인 성격에 따라 합평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것 같습니다. 자기가 얻는 게 있으면 하면 되고, 아니면 그만인 것이죠. 저마다 가진 문제의식을 존중하는 것은 무척 힘이 들더군요. 이미 아마추어도 아니고, 작품집을 묶었거나 묶어야 될 상황에서 남의 이야기는 곧이들리지 않죠. 저는 합평무용론자 중 한 명입니다. 모순이죠.(웃음) 굳이 합평이 아니더라도 함께 모여 있는 순간의 에너지를 어떻게 느끼느냐가 관건이니까요.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공연했을 때 저희는 이제껏 합평했던 모습을 시나리오를 짜서 각자의 캐릭터대로 그대로 관객에게 보여줬습니다. 물론 사이에 미안할 정도로 망했지만요.(웃음) 소설동인이 시동인보다 적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는 짧고 직관적이고 감성적이죠. 또 개개인의 표면적인 기질이나 무의식적 기질까지 보여주죠. 그렇기 때문에 동인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저희 동인이 6~7년 동안 합평을 해왔다는 것은 문제가 심각해도 아주 심각합니다.(웃음)

6. 2000년대 활동하는 시인들의 일상과 시적 향방

이재훈 : 우리 젊은 시인들 삶의 주변을 한번 돌아보죠. 동인 활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큰 것 중의 하나가 시인들과의 개인적인 유대라고 생각합니다. 동인을 통해 동시대 시인들의 일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죠. 지금 제가 봤을 때, 젊은 시인들에게 참 힘든 문제가 생활입니다. 물론 이것이야 시인 개개인이 각각 알아서 헤쳐 나가야 될 문제이긴 하지만, 조금 억울한 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전 세대들은 시단에 순교하고 시에 인생을 바치면 당연히 생활이 따라 갔었죠. 지금은 시에 매진하라는 요구만 있을 뿐 그 누구도 생활을 책임져주지는 않습니다. 시인들의 일상 속에서 시가 가장 크지만 이십대를 지나 삼십대로 넘어가면 삶의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정규직을 갖고 있는 시인이 우리 주변에 없기 때문에 다들 결혼도 미루거나 결혼을 했다고 해도 출산을 미루게 됩니다. 아예 결혼 자체를 생각지 않는 시인들도 많죠. 2000년대 활동하는 우리 주변 시인들의 일상은 어떠한지, 그리고 앞으로 젊은 시인들의 시는 어떠한 양상으로 개진될 것인지에 대한 예견을 나름대로 짚어주셨으면 합니다.

김근 : 다 힘들죠. 그런데, 이전의 선배들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작가회의에서 특히 많이 느꼈는데요, 80년대 주로 활동하고 90년대까지 활동했던 저희 선배 세대들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생업이나 벌이에서 자유로운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정 부분 문학이 그들 삶에 도움이 되기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생활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 같은 것들을 포함해서 말이죠. 문학의 위상이 전에 비해서 높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는 저희 세대는 어쨌든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그 일이 문학으로는 당연히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러니, 소위 아르바이트, 교정이나 교열 같은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죠. 몇 년 전에 김경주 시인이 [한국일보]에 인터뷰한 기사에도 나오는 대필이나 심지어 야설 같은 것이라도 써서 먹고 살아야죠. 아무래도 시 쓰기보다는 먹고 사는 일에 치중하게 되는 게 사실입니다. 동료 시인들을 보면 공부해서 학교에 자리 잡는 친구들이 더러 있지만, 그것도 녹록치만은 않죠. 한국작가회의에서 선배님들이 우리 때는 많이 모였는데 너희들은 왜 모이질 않느냐고 말씀하곤 하시는데, 사실은 열심히 모였습니다. 다만 각자 일이 있을 때는 못 왔을 뿐이죠.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냐고 물으면 사실 저희 자신이 치졸하게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거죠.

신동옥 : 그 각자의 일이라는 게 들춰보면 별 일이 아닌데 본인한테는 긴박한 일이죠. 과외랄지, 학원 강의랄지. 본인에게는 생존과 관련된 것이니까요.

김근 : 그렇죠. 올해 들어 문예지개재우수작품지원사업도 없어졌죠.

이재훈 : 젊은 시인들에게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죠.

김근 : 저야 그 기간 동안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한 탓에 거의 수혜를 못 받았죠.(웃음) 문예지게재우수작품지원사업에 대해, 국가가 시인(그리고 소설가들)들 먹고 사는 것까지 책임져야 하느냐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저는 물음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문학에 대한 국가의 일종의 투자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돈을 받기 위해서 시를 맞춰 쓴다는 식의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말들도 있었는데, 매분기 수혜자가 140여 명 되었는데, 그 140여 명이 그걸 받기 위해서 예심위원을 포함한 수십 명의 심사위원의 성향에 맞는 시를 쓴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어쨌든 갈수록 젊은 시인들에게는 어려워지는 시대가 되는 것 같습니다. 문화나 복지 정책에 대해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정부가 들어선 것도 우려스럽기도 하고요. 앞으로 시를 쓰는 것과 먹고 사는 것을 병행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신동옥 : 이 문제에 대해서 가장 근사치에 가까운 보기가 저희 동인입니다.(웃음) 이 시대의 젊은 시인들의 일상, 어떻게 먹고 사는가를 볼 때는 저희 동인들을 보면 되요. 저희 동인은 삼십대 중반에서 삼십대 후반, 다섯 명이 남자고 한 명이 여자입니다. 여섯 명 중에서 직업을 가지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입니다. 나머지는 어떻게 사는지 저희 서로도 잘 모릅니다. 길게는 7~8년을 보내왔는데도 말이죠. 심지어는 동인 활동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 역시, 서로의 생존―돈 벌이에 관련된 부분이에요.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두 달 동안 번역을 해야 한다, 두 달 동안 대필을 해야 한다, 학원 강의를 해야 한다하면 그 동안은 온전한 동인 모임이 불가능해요. 누군가 지방으로 가게 되면 당연히 동인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데, 저희는 한 명이 지방에 내려가 있어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고 했거든요. 동인 활동의 가장 큰 장애가 다른 사람 돈 벌 때에요. 당장 저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웃음) 뭐 도와줄 방법도 없고요.
가장 곤혹스럽고 짜증나는 질문 중 하나가(오랜만에 만난 사이에 가장 편한 질문일 텐데) “요즘 너 어떻게 사니, 뭐 먹고 사니, 일은 잘 돼?”입니다. 할 말이 없죠. 그렇게 물어보는 분께 “예, 요새 집에서 시 잘 쓰고 있습니다. 한 달에 열 편 써요” 하고 대답할 수는 없는 거죠.(웃음) 눈물이 나는 이야기죠. 시집을 한 권, 두 권 가지게 되고 다른 문학적 지향점을 궁구하게 된다면 동인이 와해될 공산이 큽니다. 아무리 안개 속의 모래알 같은 집단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생존이 동인을 해체할 수 있는 아주 큰 요인 중 하나라는 것은 슬픈 현실입니다.(삶에서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지만요) 나이를 더 먹어 언젠가 상상력으로 시를 쓰는 데 물리적인 임계치가 온다면 또는 다른 세계를 지향하게 된다면 곁에 서서 격려를 해줄 수 있겠지만 이 문제는 피할 수 없는, 피해서도 안 되는 현실이죠.

김언 : 두 분 얘기 듣고 있자니 새로운 천민계층이 출현했다는 느낌이 드네요. 괜히 학력만 높고 사회적으론 전혀 쓸모도 없고 대접도 못 받고 있으니 말이죠. 예전에 어느 시인이 ‘시인은 정신적 귀족’이라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이젠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귀족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진 것 같습니다. 시인이라는 이력 옆에 가장 화려하게 붙을 수 있는 사회적 타이틀이 대학교수일 텐데, 그나마도 지금은 너무 드문 사건(!)입니다. 근근이 다른 직장을 다니기만 해도 대단해 보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시 쓴다는 것 자체가 지식자격증이기 때문에 학교 선생님이라도 되었는데, 지금은 학교 선생님 되기도 얼마나 힘들어요.

신동옥 : 그렇다고 저희 세대가 시를 쓰는 깜냥이나 자존감은 전 세대에 뒤지지 않는다고 봐요. 아마 전업시인이 제일 많은 세대일 겁니다.

김언 : 자존감은 높지만, 그걸 표출할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게 안타깝죠. 전업 시인은 말 그대로 그냥 작품만 생산하는 사람일 뿐이죠. 예인藝人일 뿐이지 지식인 대접을 못 받는다는 거죠. 밥벌이가 안 되니까 당연히 결혼하기도 힘들고,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기가 힘들죠. 예전 같으면 자식들이 시인의 피를 이어가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죠. 혈통 자체가 사멸해가는 열등한 혈통이 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국가 보조금에 의존하거나 기껏해야 자기들끼리 밥벌이를 챙겨주면서 연명해가는……. 새로운 천민 계층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거고요.

이재훈 : 새로운 천민계층의 출현이라는 말이 참 아프네요. 아무튼 젊은 시인들이 지금 고학력이 될 수밖에 없는 것도 구조적인 문제가 있죠. 그나마 학위가 자격증이 되니까요. 제도적으로 전업문인들에게 할 일을 마련해주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타장르에서는 중고등학교의 예술강사 파견 등의 사업도 있던데요.

김근 : 문학큐레이터 제도 같은 것들이 지난 정부에서 논의되었던 것 같은데, 유야무야되었죠.

이재훈 : 그런 사업도 아이디어를 내서 활성화가 되면 젊은 문인들도 좀 더 용기를 갖고 문학에 매진할 텐데요.

7. 2000년대 동인의 의미와 전망

이재훈 : 문지문화원 사이에서는 토요일마다 동인들의 특집을 기획하고, 각 동인들의 이름으로 다양한 공연을 창출해 독자들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인스턴트> 이후 이렇다 할 만한 시동인은 없는 것 같은데요. 굳이 동인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도 이유이겠죠. 지면도 더 늘어났고, 젊은 세대일수록 각자 개성이 뚜렷해서 모이는 것 자체가 싫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동인 활동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갔으면 좋은지, 그리고 덧붙여서 더 젊은 후배 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주세요.

김언 : 새로 등장하는 시인들이 동인을 하든 하지 않든 중요한 것은 각자가 ‘외로운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네요. 혼자 있어도 외롭고 모여 있어도 결국에는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이 반드시 찾아올 테니까요. 단수화된 ‘우리’를 거부하는 대신 복수화된 ‘나’를 선택한 대가로 그들은 필연적으로 외로운 공동체로서의 생활을 감내해야 할 겁니다. 거기서 발견하는 각자의 목소리가 각자의 문학이며, 각자의 문학이 제도권 내부로 불편하게 스며들 때 예기치 못한 균열도 발생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은 당대의 문학 제도도 그렇게 부스러지면서 변해갈 거라 믿습니다.
한마디만 더 추가하자면, ‘동인은 동인으로 남고 시인은 시인으로 남는다’는 사실, 이 사실을 현재의 젊은 시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잘 알고 있고 <천몽> 동인들도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앞으로도 최대한 느슨해지기 위하여 모임을 이어갈 것 같습니다. 느슨함의 끝에 와해가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요. 다만, 서로에게 그리고 각자에게 찾아올 문학적 균열을 충실히 지켜볼 따름입니다.

김근 : 후배들의 각자 입장은 다르겠지만 많은 동인을 만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동인들이 다양한 목소리와 색깔로 우리 시를 풍부하게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문학 제도 안에서 목소리를 내고 우리 문학이 그 풍부한 다양성을 껴안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신동옥 : 형들이 좋은 말씀해 주셨는데, 저는 덧붙일 말이 별로 없네요. 언제나 동시대인들은 동시대인들에게 좋은 심판자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한 세기 이상이 지나야 의미가 어렴풋이 드러나게 마련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김언 형이 말한 ‘복수화된’ 나들이 감내하는 외로운 공동체로서 시詩라는 장, 그 장을 따로 함께 살아내는 한 방편으로 동인 활동은 해결책 중 하나입니다. 자신을 책임지고 서로를 신뢰하는 것은 싸움 중에도 큰 싸움이니까요. 외롭고 처절하게 쓰고, 그 길에서 좋은 도반들 만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재훈 : 말씀 감사합니다. 시인축구단처럼 다양한 모임들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반면 “시인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이형기 선생께서 하신 말의 의미도 함께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좌담에 참여해주신 김언, 김근, 신동옥 시인 감사합니다. 술이나 마시러 가죠.

_ <현대시>, 2009년 3월호 게재.

이재훈 |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김근 | 1998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으로 <뱀소년의 외출>,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김언 | 1998년 <시와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숨쉬는 무덤>, <거인>
신동옥 | 2001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으로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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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의 옹호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1. ‘이후(以後)’의 시학

최근 우리 시에 한 시대를 집약하고 향도하는 시정신의 고갱이가 보이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는 일부 평자들의 견해는, 이성 중심주의에 견고한 토대를 둔 근대주의적 시선일 경우가 많다. 생각해보면 그 ‘고갱이’라는 것은 다분히 중앙 집권적인 ‘중심(이성, 이념, 진정성)’에 대한 향수의 표상일 가능성이 높다. 아닌 게 아니라 ‘계몽-이성’이라는 근대적 판관(判官)의 역할이 현저하게 약화되면서 근대 이성이 몰고 온 여러 징후들에 대한 긍정과 불신 그리고 그것의 재구축(결코 ‘폐기’가 아니다)의 열망이 부단히 교차하고 있는 지금, 그 ‘고갱이’는 그야말로 다양하기 그지없는 원심(遠心)을 형성하면서 확산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시대의 시편들은 미학적 차원에서는 유례없는 다양성을 이루고 있고, 아직까지 대체적 구심(求心)을 암시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시사에서 가장 확연한 이행기적 속성을 견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시대의 시편들은 정보화, 탈(脫)냉전, 생태론 같은 담론들이 숨가쁘게 대두하고 일정하게 소강 상태에 빠져버린 포스트-포스트의 시기 곧 ‘이후(以後)’의 시학을 보여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그동안 출몰했던 근대에 대한 대안 담론들이 과거와의 차별화 전략에는 성공했지만, 새로운 미래적 좌표 설정에는 미흡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속성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국가 사회주의의 현실적 몰락 이후 나타났던 탈근대 담론들은 우리 시로 하여금 엄숙주의와 계몽성을 반성적으로 사유하게끔 하였고, 기존의 언어 권력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게끔 하는 데 일정하게 기여했지만, 동시에 그것들은 우리 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적 자질이었던 ‘전망’과 ‘비극성’을 천천히 지워나갔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비현실적 환상으로 치부되었고, 엄숙한 전망보다는 가벼운 현재형이 선호되었고, 시를 통한 인문적 통찰은 낡은 유적(遺跡)을 더듬는 것으로 등치되었다. 또한 열정의 막다른 곳에서 펼쳐지게 마련인 ‘비극성’ 대신 일상적 ‘권태’가 그 틈을 메웠고, ‘절망’이라는 치열한 실존형 대신 낱낱의 사물을 비유기적으로 바라보는 ‘환멸’이 주된 정조로 자리잡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심화되면서 펼쳐지는 이 같은 미학적 근시성(近視性)의 양상들은, 이제 우리에게 만만찮은 메타적 과제를 부여하고 있다. 가령 그것은 시 장르의 창조적인 대안적 가능성에 대한 사유를 요청하고 있는데, 후기 자본주의의 견고한 시스템 속에서 인간 존재 형식이 개체적 감각과 대중문화적 감염에 의해 규정되는 힘이 점증(漸增)하고 있는 시기인 만큼, 우리가 맞고 있는 메타적 요청의 파고(波高)는 결코 간단치 않다.

2. 우리 시대 ‘서정’의 원리

앞에서도 암시하였듯이, 우리 시대의 주류 미학은 사회 변혁에 대한 회의와 자연으로의 침잠 그리고 감각성과 내면 심리로의 경사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적 시스템으로 세계가 편제되어가고 있는 추세를 감각적 차원으로 반영한 결과이자 일정하게는 철학적 차원의 대응까지를 아우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경향이 공동체 단위의 이념적 지표(指標)까지는 될 수 없는 까닭은, 그것들이 개체적 감각에는 충실하면서도 인간 존재 형식의 보편성까지 환기하는 데는 그 철학적 기반이 허약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른바 탈(脫)중심의 외피를 두르고 있는 우리 시대 시편들의 문제점은, 개체적이고 고립된 단자(單子)들에 의해 목소리가 생성, 소멸한다는 점과 개개 시편들이 상보적으로 소통하면서 한 시대를 표상하는 보편적 공감으로 승화되기에는 현저하게 미학적 에너지가 모자란다는 점에 있다. 그만큼 최근 시편들의 다원화 현상은, 시인들이 타자와 소통하면서 사회적 울림으로 증폭되지 못하고 오히려 소통을 거부하는 유폐감과 난해성의 회로에 스스로를 가둠으로써 미학의 고립을 자초하고 있기 때문에, 다원화라기보다는 오히려 시에서의 규준 상실에 가깝다. 우리 시대의 시를 가장 어둡게 만드는 것은 이 같은 타자와의 소통 상실 그리고 자기 이해와 표상 방법의 고립성에 있다. 이러한 양상은 최근 양적으로 폭증하면서도 규준은 한없이 이완되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징후들과 그대로 대응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시편들이 기획하고 실천하고 있는 ‘서정(성)’의 원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 시대의 시편들이 제기하는 서정의 원리 가운데 하나는 서정의 원리를 실현하는 주체와 관련된 것인데, 우리가 서정을 주체와 대상 사이의 상호연관성 아래서 규정하는 데는 근대적 주체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서정이란 근대적 주체의 대상 인식 원리인 자기 반영성에 의해 발원되고 실현되는 어떤 원리이고, 근대적 주체의 자기 표현을 강조한 서구 근대 낭만주의에서 완성된 일종의 역사적 개념이다. 이는 주체와 세계가 분리되어 있는 경험으로부터 그것의 통합적 국면을 꾀하고자 하는 성격이 서정에 본질적으로 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그것을 인식․수용하는 주체를 이어주는 새로운 결속과 감각의 필요성이 대두한다. 이 감각은 바흐친(M. Bakhtin)이 대화주의를 명명하면서 타자의 의식을 객체가 아니라 동등한 자격과 권리를 가진 주체로 바라본 것과 상통하는 것인데, 세계와 주체가 일정한 연속성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뜻한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상실된 근원적 감각이나 정서를 회복하는 통로를 주체의 신념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사물(세계)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시선과 방법에서 찾는 것이다. 따라서 현저하게 주체의 소거가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단일한 서정적 주체로의 전일적 귀속성은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에, 우리 시대의 시에서 주체의 욕망과 언어가 불화 관계로 공존하는 것 역시 서정의 원리가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시는 주체의 다양하고 풍부한 육성으로 그 불화 양상을 구체적으로 노래함으로써 예술의 본래적인 힘인 불온성을 극대화하고 나아가 오도(誤導)된 근대에 창조적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인식론적 계기가 우리 시대의 서정의 또 다른 원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동일성 논리가 균열을 보이며 생겨나고 있는 시의 반(反)서정 혹은 비동일성의 경향을 어떻게 서정의 범주 안에 포섭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최근 ‘미래파’라는 담론적 명명(命名) 속에서 해석되고 평가되는 일군의 시인들이 암시하듯, 강렬한 반(反)서정과 비동일성의 경향을 서정과 어떻게 연루시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들은 기억(과거)이나 인식(현재)에 중점을 두지 않고,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언어적 세계를 보여준다. 가령 황병승이 보여주는 비주류 하위 문화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감각의 환유적 나열 그리고 혼성적 문화 의식은 국민국가의 상상력 안에 갇혀 있던 지난 시대와 날카로운 단층(斷層)을 형성한다. 또한 김민정이 보여주는 그로테스크한 하위 문화적 상상력은 이미지의 연쇄적 나열과 충돌을 통해 메타 시학의 한 가능성에 이르고 있다. 이 밖에도 다수의 젊은 시인들에 의해 반미학의 가능성으로서의 시적 움직임은 매우 광범위한 하나의 시적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의 반(反)은유의 환유 원리에 의한 작법은 그동안 서정의 중심 원리로 기능했던 은유 중심의 작법에 대해 방법적 반성을 제기하면서, 자유로운 연상 형식을 통한 말의 난장(亂場)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우리는 동일성 논리에 균열을 내면서 구축되고 있는 이 같은 반(反)서정 혹은 비동일성의 경향이 우리 시대의 서정이 가장 원심적으로 확장된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는 화해와 조화의 세계관보다는 길항과 갈등의 세계관이 녹아 있고, 대중문화적 감염이 일상화됨에 따라 시의 표면에 물질로 구체화되는 속도감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그들의 언어는 환유적 작법을 통해 전통적 서정 원리와 결별하면서, 새로운 서정의 원리를 메타적으로 확장해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같은 두 가지 경향, 곧 주체 소거의 경향과 비동일성과 환유의 경향이 우리 시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곧 집체적 성격의 ‘우리’에 대한 관심이 개체적 성격의 ‘나’로 옮겨가면서 현실에 대한 성찰과 제언이 급감하게 된 상황, ‘나’로의 시선 이동이 시인들의 개별 체험을 절대화하는 미적 편향을 불러온 상황, 규준 부재와 기율 이완을 다원성으로 착시하는 상황을 깊이 우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 자의식, 환유, 환상, 전복, 엽기, 난해성, 실험 의식 등으로 표상되는 젊은 시인들이 시세계에 의해 우리 시의 미래가 부분적으로 개척되리라고 믿지만, 이와 달리 ‘기억’과 ‘현실’의 접면(interface)을 형성하면서 그리고 특정 담론으로의 귀속이나 환원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서정의 원리를 구축해가고 있는 젊은 시인들을 통해 우리 시의 ‘또 다른 미래’를 시사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3. 기억과 사물의 접점에서 발견하는 인간 존재 형식

잘 알다시피, 시의 본래적 권역은 주체의 절실하고도 남다른 자기 확인의 욕망에 있다. 그것이 나르시시즘 차원의 자기 몰입이든, 고통스런 반성을 동반하는 자기 성찰이든, 시의 초점이 시적 주체의 자기 검색과 확인에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주체와 대상 사이의 날카로운 균열이나 갈등 양상을 포착하고 드러내는 이른바 비동일성의 미학까지 포괄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서정의 원리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서정의 근원적 자기 회귀성은 그 비중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 같은 자기 회귀성은 사물에 대한 의미 부여와 함께 그것을 자신의 삶의 국면과 등가적 원리로 결합하는 은유적 속성을 곧잘 구현한다. 물론 그것은 사물과 주체의 긴밀한 조응(照應)을 주체의 시선으로 수렴, 해석하는 측면에서는 가장 가까운 ‘시적인 것’의 원리이지만, 사물을 사물 자체의 본성으로 발견하고 묘사하고 재현하는 측면에서 보면 가장 취약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시의 자기 회귀성이라는 것이 용인된다면, 주체의 시선으로 사물의 고유성을 발견하고 그 응시의 힘으로 자신의 삶의 태도와 자세를 성찰하는 은유적 원리는 포기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응시의 힘으로 다시 사물에게 활력과 생명을 불어넣는 시적 상상의 과정 또한 위축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젊은 시인들이 보여주는 이 같은 회귀와 성찰의 양면성은 우리에게 서정의 원리의 진면목과 이를 통해 확산해가야 할 서정의 몫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데, 여기서는 길상호, 이재훈, 신용목, 김병호 등 1970년대생 시인들의 시세계를 통해 이러한 점을 시사적으로 읽으려 한다.

먼저 길상호는 소멸해가는 시간 속에서 원초적인 인간 존재 형식을 바라보는 시인이다. 또한 그는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바라본다. 결국 그의 시선은 실재와 영혼이 궁극적으로 결속되는 풍경을 향한다.

그 집은 소리를 키우는 집,
늑골의 대문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
마루에 할머니 혼자 나물을 다듬거나
바람과 함께 잠을 자는 집,
그 가벼운 몸이 움직일 때마다 삐이걱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오는 집,
단단하게 박혀 있던 못 몇 개 빠져나가고
헐거워진 허공이 부딪히며 만드는 소리,
사람의 세월도 오래 되면 소리가 된다는 듯
할머니 무릎에서 어깨 가슴팍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바람의 소리들,
아팠던 곳이 삭고 삭아서 만들어낸
관악기의 구멍을 통해 이어지는 가락들,
나의 짧은 생으로는 꾸밀 수 없는
그 소리 듣고 있으면 내가 키워온 옹이
하나씩 빠져나가고 바람 드나들며
나 또한 소리 될 것 같은데
더 기다려야 한다고 틈이 생긴 마음에
촘촘히 못질하고 있는 집

― 길상호 「소리의 집」 전문(<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문학세계사, 2004)

“소리를 키우는 집” 마당에서 시인은 “마루에 할머니 혼자 나물을 다듬거나/바람과 함께 잠을 자는” 풍경을 기억해낸다. 거기에는 기억 속에서 환기되는 몇 개의 소리가 웅크리고 있다. 할머니의 가벼운 몸이 움직일 때마다 나던 가느다란 소리, 단단히 박혀 있던 못이 빠져나가고 난 후 들리던 헐거워진 허공의 소리, 할머니 무릎에서 어깨 가슴팍에서 들려오던 바람의 소리, 이런 것들이 시인의 기억 속에서 낱낱이 혹은 한꺼번에 호명된다. 그런데 시인은 “나의 짧은 생으로는 꾸밀 수 없는/그 소리 듣고 있으면 내가 키워온 옹이/하나씩 빠져나가고 바람 드나들며/나 또한 소리 될 것” 같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길지 않은 생으로는 가 닿을 수 없는 소리의 깊이를 상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길상호는 신생과 소멸의 변증법을 통해 우리의 일상에 편재(遍在)해 있는 불모성과 소통 단절을 치유하고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꿈꾸고 있다. 그것은 신생과 소멸을 존재 양식의 양면성으로 바라보면서, 그 복합성의 시선으로 삶을 관조하고 추동하는 에너지에서 생성되는 어떤 것이다. 자신의 몸 속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소리들을 묘사함으로써, 생명 현상의 감각과 그 묘사를 제일의적 기율로 삼으면서도 그는 우리의 몸 안팎에서 잊혀진 실재와 영혼의 복합적 풍경을 두루 복원하고 있다.

다음으로 이재훈의 시는 도시에서의 생활과 자신의 내면을 유추적으로 결합하면서 한 시대의 쓸쓸한 풍경을 기록하는 유목적 발화(發話)에 의해 구축되고 있다. 하지만 상상적인 유목적 감각에 의해 시편 곳곳에 배치된 사실적․환상적 이미지들은 시인이 궁극적으로 욕망하는 묵시(黙示)적 이미지들로 전이되면서, 그의 시편들을 평범한 환상 시편이나 교조적 종교 시편으로부터 구해내고 있다.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의 머리가 내 발바닥을 찢는 수런거림을 듣는다. 수행자처럼 온 땅을 모두 밟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땅은 너무 넓어. 내 온기가 기댈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 그 사이의 위태로운 희망, 그리고 낯선 꿈들뿐.

내가 밟는 유리의 온기를 기억하고 싶었다. 그 뜨거운 감촉. 두꺼운 군살을 비집고 환한 몸으로 날 찾아오는 신비. 유리를 밟으며 축제를 연다. 붉은 포도주가 흐르는 식탁. 얼굴에 분칠을 하고, 혀에 피어싱을 하고, 히피처럼 연기를 피워올린다. 치렁치렁한 푸른 옷을 입고, 방 안을 빙빙 돈다. 사각사각 유리가 몸 안에서 춤을 춘다. 두려움은 없다. 정작 두려움은 예언자의 눈, 인디언의 귀, 언 고기를 사각거리는 알래스카의 몽골리안을 그리워하는 것. 生의 분노도 잊은 채, 태평하게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하는 내 입술.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가 내 몸을 돌고 돌아 검붉은 내장을 모두 만난다면, 늦은 밤 가냘프게 흔들리는 마음까지 싹둑 잘라버린다면, 나는 백치가 되리. 내 몸이 된 유리. 너의 촉감밖에, 소리밖에 모르므로 나는 불구다. 저기 저쪽, 나처럼 맨발로 유리 밟으러 가는 젊음들. 땡볕 아래 꽃들이 붉은 햇살을 게워내고 있다. 절정이다,

― 이재훈 「순례」 전문(<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2005)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듣고 있는 시인은 그 유리가 발바닥을 찢는 소리를 동시에 듣는다. 그의 몸은 마치 고행을 거듭하는 “수행자”처럼 모든 땅을 다 밟아보고 싶어한다. 하지만 땅이 너무 넓어 그가 겨우 기댈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위태로운 희망 곧 도시의 낯선 꿈들뿐이다. 여기서 ‘유리’는 근원적 고통과 날카로운 깨달음을 동시에 포괄하는 순례의 길을 상징한다. 시인이 밟고 가는 유리에는 온기가 간직되어 있는데, 시인은 그 뜨거운 감촉과 군살을 비집고 들어오는 신비로움을 기억하면서 자신만의 상상적 축제를 연다. 도시의 방 안에서 벌어지는 그 축제에서 유리는 사각사각 몸 안에서 춤을 춘다. 그래서 생의 두려움도 분노도 잊은 채 시인은 “백치”가 되어 자신처럼 맨발로 유리 밟으러 가는 젊음들을 절정의 도시의 유목 속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재훈 시편은 이렇듯 먼 신화적 상상력과 가장 구체적인 사물들을 결합시킴으로써, 회귀와 성찰의 양면성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존재의 내밀한 곳에서 피어나는 영혼의 미동(微動)에 귀기울이면서 꿈과 현실을 쓸쓸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모습은, 그의 시가 “꿈의 사제가 들려준 묵시의 소리들, 로고스의 자기 발현 과정에 대한 응시와 관찰의 기록들”(유성호, 「해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임을 다시 한번 웅변해준다.

그런가 하면 신용목의 시편들에는 자기 자신의 젊은 날의 흔들림에 대한 뼈아픈 기억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의 시에는, 섬세하게 되살려지는 ‘기억’과 따뜻하게 재현되는 ‘사물’이 쓸쓸하고도 아름답게 결합되어 각인되어 있다.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 신용목 「갈대 등본」 전문(<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문학과지성사, 2004)

시인은 이 작품에서 바람의 지층을 몸 속의 뼈로 두고 살아가신 아버지를 선연한 이미지로 그리고 있다. 이때 시인의 ‘기억’은 아버지의 삶 속에서, 마치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유추적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시는 세상에 충일한 ‘바람’ 모티프로 시작되어, 시인이 평생을 두고 그 바람 속을 다 걸어야 한다는 운명적 자의식으로 매듭지어진다. 특히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라고 했을 때, 그러한 고백은 이러한 운명적 자의식을 예감한 시인의 섬세한 감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청년기의 상처의 내력과 그것을 고독하고도 아름다운 비애로 넘어서려는 시인의 의지가 아프게 다가온다. 이처럼 신용목의 언어는 끝없는 ‘기억’으로의 회귀와 그것을 인간 존재 형식에 대한 ‘성찰’로 연결하려는 욕망이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는 사례로 기록할 만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병호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망각의 의지와 기억의 불가항력 속에서 시를 길어올리고 있다. 오래 전에 지워버렸다고 믿었던 흔적이 되살아오는 순간이,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얼굴에서 떠오를 때의 역설(逆說)이 환하게 나타난 다음 시편을 주목해보자.  

 오래 전에 지운 아버지의 얼굴이
 내 아이의 얼굴에 돋는다

밤마다 강 건너에서 손사래를 치던 그 몸짓이
날 물리치던 것이었는지, 부르던 것이었는지

어둔 꿈길을 막니처럼 아릿하게 거스르면
겨울 천정에 얼어붙었던 철새들은
그제야 깊고 낡은 날갯짓을 한다

불온한 全生이 별자리를 밟고 서녘으로 흐르는 소리

달이 지고, 해가 뜨기 전의 至極이
강물에 닿기 전, 문득 시들어버린 내가
잎 진 나무로 강가에 몸을 잠그면
가지 끝에 문신처럼 옮아오는 앙상한 길
내 몸을 빌려 검게 꽃 피는 아버지
모두가 한 물결로 펄럭인다

변방의 밤하늘은 마른 저수지마냥
외롭고 가벼웠다
어둠 저편에서 절벽처럼 빛나는 녹슨 닻

生은 몇 번씩 몸을 바꿔
별이었다가 꽃이었다가 닻이었다가
유곽이었다가 성당이었다가
어제처럼 늙은 내 아이가 되는데

나는, 새벽이 오는 변방의 강가에 기대어
아버지와 아이의 멸망을 지켜볼 뿐
차마 墓石처럼 깜깜하지 못했다

― 김병호 「강가의 墓石」 전문(<달 안을 걷다>, 천년의시작, 2006)

시인은 아이의 얼굴에서 오래 전에 지워버렸던(혹은 지워진) 아버지의 얼굴을 발견한다. 그것이 격세유전의 한 국면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시인은 아이의 얼굴에서 오래 전에 지워진 아버지의 기억을 보고 있는 것일 터이다. 그래서 시인은 아버지와의 거리(距離)를 꿈 속에서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니처럼 아프게 꿈 속을 거스르는 순간 겨울 철새들이 깊고 낡은 날갯짓을 할 때쯤, 시인은 “불온한 全生이 별자리를 밟고 서녘으로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시간이 다시 흘러 여명의 지극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시인은 “문득 시들어버린 내가/잎 진 나무”가 되어 강가로 몸을 잠그는 환각을 경험한다. 그때 “내 몸을 빌려 검게 꽃 피는 아버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아버지는 그렇게 ‘나’의 몸에 ‘아이’의 몸에 선명하게 깃들이고 계셨던 것이다. 그만큼 “生은 몇 번씩 몸을” 바꾸면서 때로는 ‘별’로 ‘꽃’으로 ‘닻’으로 ‘유곽’으로 ‘성당’으로, 말하자면 지상[俗]과 천상[聖]을 숨가쁘게 오가면서 굴러가는 것이었다. 그때 시인의 생은 “어제처럼 늙은 내 아이가” 되고, 그 “늙은 내 아이”는 바로 아버지의 “불온한 全生”을 휘감은 시인의 육신이 되기도 한다. 그 여명에 시인은 “아버지와 아이의 멸망을 지켜볼 뿐/차마 墓石처럼 깜깜하지 못했다”라고 함으로써, 지워지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눈부시게 흔들려갈 자신의 생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김병호는 선명한 기억 속에서 인간 존재 형식의 어둑함을 증언하고 스스로는 묵시적으로 그것을 승인하고 견디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상 우리가 살핀 길상호, 이재훈, 신용목, 김병호 등의 시편은 인위적 담론으로는 도저히 포섭할 수 없는 낱낱의 심미적 완결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기억’ 속에서 인간 존재 형식의 보편성을 수습해낼 뿐만 아니라, 일정하게 서사적 계기에 대한 관심을 통해 우리 시대의 ‘서정’의 원리를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젊은 시인들의 노력은, 우리의 서정이 오랫동안 축적해온 동일성 논리를 뛰어넘으면서, 동시에 우리 삶의 곳곳에 편재하고 있는 혹독한 운명과 맞서는 힘겨운 유한자(有限者)의 모습을 보여준다. 더불어 그 유한자의 눈이 얼마나 깊이 자신의 근원적 기억과 사물들을 동시에 꿰뚫을 수 있는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그들의 시는 지난 시절의 역사 편향과 이념 과잉을 반성적으로 사유하면서도, 시가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억과 성찰 혹은 근원 지향과 현실 연관의 속성을 견고하게 결합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4. 새로운 시학을 위하여

시가 시간적으로 경험을 초월하면서 항구적 심미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미의 형식적 요소가 구체적 경험으로부터 분리되어 성립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경험을 기초로 하면서 이를 초월하는 형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의 존재론적 비밀을 밝히기 위해 우리는 주체와 객체, 영혼과 실재, 내용과 형식, 시인과 독자 사이에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동일성 논리를 서정(성)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시는 더 이상 동일성의 논리를 고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된 동일성 논리를 넘어서면서 세계와의 불화와 긴장을 당당하게 형상화한다. 이는 서정을 ‘세계 파악의 색인’(김준오) 혹은 ‘주체의 세계 투사를 정식화한 개념’(권혁웅)으로 정의했던 관념을 넘어서면서, 대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주체의 다양한 정서 발현 과정으로 설명하게끔 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젊은 시인들은 이 같은 서정의 확장에 기여하면서도, 시에서 주체를 힘겹게 복원하면서 지속적 자기 회귀의 열정과 타자의 음영(陰影)을 성찰하는 자기 동일성의 재구(再構)에 나서고 있다. 속도전의 무모함과 자기 소모적 열정으로부터 감각과 인지 능력을 동시에 복원하면서, 그들은 시간에 대한 시적 체험으로서의 기억과 인간 존재 형식에 대한 궁극적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난 세기말의 커넌(A. Kernan)의 <문학의 죽음>에 이어 최근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근대문학의 종언>이 속속 출간되면서 우리는 근대적 언어 예술로서의 문학의 근본적 위기를 여러 모로 실감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위기 진단은 ‘(근대)소설’이라는 근대문학의 총아를 직접적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근대적 언어 예술 전체의 존재 방식에 대한 유효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렇듯 형이상학과 정전(正典)의 급속한 와해를 실현하면서 다가오는 온갖 종언주의(endism)에 편승하지 않고, 기억과 사물의 접점에서 새로운 대안적 사유를 수행해가는 젊은 시인들의 목소리는 그래서 우리의 새삼스런 주목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들의 언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세대론이 부분적으로 허구임을 알게 되고, 나아가 서정의 옹호를 통한 새로운 시학을 암시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 <시작>, 2006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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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의 타자를 향한 러시안 룰렛 게임과 대황하의 변주곡


정준영




이재훈 시인의 강은 건널 다리도 없는 거친 황톳물 넘실거리는 ‘대황하’다. 그가 스스로 강이 되어 누웠다. 이재훈의 이번 신작시는 <대황하 2~5>와 <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이라는 제목을 가졌다. <대황하 2~5>는 서사적 성격이 보이는 산문시이고 마지막으로 <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까지 붙였으니 그의 이번 신작시를 순차적으로 읽는 것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강물의 흐름처럼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스스로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전주곡과도 같은 <대황하 2> 이후 <대황하 3, 4, 5>는 같은 제목을 가진 시들의 내용을 구성하는 플롯의 성격을 보인다.
이재훈의 신작시 <대황하>는 성(性)에 따른 명사의 구분에 의해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할 듯싶다. 우리나라에는 단어에 성의 구병이란 게 없지만 명사에 남성, 여성 혹은 중성을 붙이는 나라에서 ‘강’은 여성형을 가진 명사로 취급된다. 그리고 가스통 바슐라르가 ‘몽상의 시학’에서 말했듯이 ‘숲’은 남성이고 ‘삼림’은 여성인 것처럼 유사한 단어들은 미묘한 그러나 지대한 차이에 의해 또 다시 남성형과 여성형으로 구분되어진다. ‘강’은 여성형의 명사지만 이재훈의 ‘대황하’는 강은 강이로되 만일 성(性)을 갖는다면 남성형의 명사로서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대황하’라는 시어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시 <대황하 2>에 등장하는 첫 구절은 ‘누웠다’이다. 강은 수직으로 솟은 산과 달리 누워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누웠다’라는 자동사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매일 같은 굴욕과 비방을 얻는다. 누웠다. 고개 숙였다.
― <대황하 2> 부분

눕는다는 행위를 유발한 원인은 앞뒤의 다른 문장들이 나누어 가졌다. 즉, ‘매일 같은 굴욕과 비방’이 그로 하여금 눕게 만드는 원인이고, 눕는다는 말은 ‘고개 숙이다’라는 말과 동의어를 형성한다. 여기서의 강은 일단 수동적이고 저항하지 않으므로 여성형으로서의 강에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눕는 이유는 <대황하 3>에서 설명된다. <대황하 3>에 이르러서 ‘누웠다’는 동사는 ‘바랐다’라는 동사로 바뀌어 있다.

강을 바란 것은 깊이 때문이다. 가늠할 수 없는 저 중심(中心)
― <대황하 3> 부분

여기서 강은 이중적인 상징이 된다. 즉, 외압의 굴욕에 여성적으로 누운 강이기도 하지만 거대한 힘을 가진 외압체로서의 남성적인 강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 시인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대황하의 거친 황톳물처럼 강력한 위세를 가져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듯 범람하고 있다. <대황하 2>에서 세상은 ‘썩은 것’이었지만 그 위력과 위세는 대항하기 어려운 것일 때 물의 혼탁성은 이미 선과 악의 개념에서부터 벗어나 그 자체로 거부할 수 없는 존재의 위엄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강에 뼛가루를 뿌렸다지, (중략) 물속에 묻혔다지
― <대황하 4> 부분

무서운 대황하의 황톳물이 삼키는 뼛가루는 이것이 연습상황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실제 상황임을 뼈저리게 각성시킨다. ‘생은 연습이 없다. 단 한번이면 족하다. 누웠다’(<대황하 2>) 매일 같은 굴욕에 고개 숙이고 누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황하의 황톳물은 뼛가루까지 삼키는 절대존재이다. 죽어서 정말로 강바닥에 뼛가루로 눕는 것보다는 미리 누워 사는 생에 익숙해지는 것, 그러면서 대황하의 힘을 배우는 것이 굴욕에 고개 숙이는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황하의 굽이치는 황토물을 생각한다. 긴 시간의 강을 젓는 내 굵은 힘줄을 생각한다.
― <대황하 5> 부분

이 세상이라는 무시무시한 황톳물은 모든 것을 삼킬 위력을 가졌고 실로 강에 뼛가루를 뿌린 사람의 한마저 휩쓸어 간다. 이렇게 그의 <대황하> 연작시를 서사적으로 생각해보니 이재훈의 ‘강’은 조용히 포용하며 말없이 흐르는 수동적인 여성형의 명사가 아닌 거칠고 호흡이 거센 남성형의 명사로서 적합하다. <대황하 2>에서 ‘누웠다, 고개 숙였다’눈 곳운 다만 그가 현실적으로 취하는 행동의 일면일 뿐이며 실은 거대한 위력을 지닌 대황하의 흐름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나아가 그런 위력을 행사하는 대황하 자체의 힘을 바라는 그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재후늬 시가 완곡한 여성형에 잠시 의탁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장치로서의 선택이고 내용적으로는 완전한 에네르기의 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눕는다는 행위와 고개 숙이는 행위는 여성형의 ‘강’을 잠시 차용한 것이고 그 피난처 안에 피난을 하고 있는 주체는 강한 남성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신작시의 문장이 매우 건조하며 짧은 서술체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도 이재훈이 내면에 지니고 있는 강한 남성성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침묵도 때로는 폭력이 될 수 있다’(<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는 말에서 ‘폭력’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일은 이재훈의 신작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이재훈의 시에서 ‘폭력’은 외부의 것이기도 하고 내부의 것이기도 하다. 폭력이 외부로부터 오는 것일 때 이재훈은 ‘강’과 같은 여성형을 취한다. 그러나 폭력이 내부의 것일 때 ‘강’은 완전한 남성형을 가진 ‘대황하’로 바뀐다는 것이다. 거칠게 흐르는 대황하의 강을 이루는 물이 서로의 몸을 겹쳐가며 거대한 흐름을 이루듯이 자와 타자와의 싸움은 삶을 이루는 핵심적인 문제이다. 야성의 타자를 향한 나의 욕망 역시 야성적일 수밖에 없다. 생이란 야성의 타자에 의한 굴욕과 비방에 나의 얼굴이 뜯기고 너의 팔다리가 뜯겨 결국 한 몸이 되어 엉기는 러시안 룰렛 게임과 대황하의 변주곡과 같은 것이다.

_ <시와세계>, 2008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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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自在)에의 욕망

 

 

이명연

 

 

1. 시작 - 자재에의 욕망?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하이데거의 말이다. 하이데거의 할아버지쯤 되는 니체에게는 매우 익숙했을 이 전복적인 문장의 의미는 (인간) 존재가 언어를 통해 존재가 된다는, 존재가 언어로 인해 존재로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언어를 만든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이 놀라운 정의는 그러나 그리 놀랄 만한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 이와 비슷한 말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요한복음 1장 1절).”라는 말이다. 이 말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존재는 말씀 이후에, 말씀으로부터 태어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무려나, 언저가 존재를 앞서는 것이라 했을 때, 언어가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했을 때,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언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 ‘언어의 감옥(프레드릭 제임슨)’에 갇힌 수인(囚人)의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자연이 아닌, 인공 아니, 언공(言工)으로서의 존재는 하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길 욕망한다. 욕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재훈의 시 제목이기도 하고 마네의 그림 제목이기도 한 <올랭피아>의 하녀처럼, 그 하녀가 빼앗기지 않았으면 하는 ‘내 꽃’인 자유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존재성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기에.
헌데 욕망이란 무엇인가? 지라르나 라깡이 지적하듯, 나의 욕망은 나의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내 욕망의 대상의 욕망이며, 대차자의 욕망일 뿐이다. 즉 그것은 중계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나만의 것, 나의 자유의지가 만들어낸 무엇이 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욕망이건 욕망의 대상이건, 언어화될 수 없는 것들은 욕망이,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욕망은 언어, 정확히는 금지와 금지의 수용을 통해 구성되는 주체로서의 나(라깡)와 그러한 주체들이 만들어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나(지라르)의 욕망이라는 점에서 결국 언어로부터 탄생한 욕망, 언어로써 말해질 수 있는 욕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에의 욕망은 불가능한 욕망일 뿐이며, ‘자재에의 욕망’이란 말은 불가능한 말이 될 수밖에 없다. ‘자유자애(自由自在)의 준말이라도 볼 수 있"는 자재라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구속당하지 않는 상태, ’시공을 넘어서는‘ ’초월적 영역‘을 이르는 말(이명권, <예수 석가를 만나다>, 코나루스, 2006. 34쪽)인데, 우리는 언어의 구속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 욕망을 이룰 수 없는 존재, 이 자재의 상태에 이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욕망을 포기해야 할까? 자재의 존재로서의 나, 자유롱ㄴ 존재로서의 나에의 욕망을 우리는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시는 고개를 젓는다. 시는 언어를 통해 언어를 넘어서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중략)...

3. 진실을 바라보라 - 이재훈의 경우

삶과 세계의 진실을 바라본다는 것은 뼈아픈 일이지만, 자재의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한 첫 단계라는 점에서 더 없이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것이 뼈아픈 일인 이유는 우리의 삶과 세계가 아름답지만은 않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그것이 자재로서의 존재의 첫 단계인 이유는 그것, 곧 삶과 세계의 아름답지만은 않은 진실을 알아야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렷한 밤이었지. 무수히 낭비한 말들을 끌어안고 그 성(城)을 찾았어. 어지럽게 나선형 계단을 올랐지. 두렵지는 않았어. 사람의 눈은 아름다운 무늬만을 본다지. 내가 만난 이의 꿈꾸는 눈빛. 정물처럼 수놓아진 가슴에 꽃잎이 화르르 번졌어. 촛불 사이로 흐르던 눈물과 기도. 가슴으로 잇는 하나의 다리를 오래오래 건넜어. 숨찬 시간이 흘렀지. 붉은 꽃이 만발한 오솔길도 아니었어. 구름과 어우러지는 파란 하늘과 흰 등대로 아니었어. 안개 자욱한 길 끝에, 스스로 몸을 비튼 고행의 소나무들이 가득했어. 사는 것의 원리도 모른 채, 그 캄캄한 숲에 발을 디뎠지. 성 안은 온통 어두웠지만, 따뜻하고 행복했어. 해가 뜨면 오로지 명령만 귀에 가득했지. 애벌레처럼 꿈틀대다 안식향을 피워. 집을 나와 지하철을 타지. 내 몸은 이 땅에 저당잡혀 있어. 말끔한 이미지의 감옥 속으로 나는 들어가지.

위 시, <하얀 성>에서 화자는 ‘무수히 낭비한 말들을 끌어안고’ 성을 찾는다. ‘또렷한 밤’이라는 시어에서 알 수 있듯, 무수히 낭비한 말들은 낮 동안의 말들이다. 이 낮 동안의 말들이 낭비인 이유는 내가 저당잡혀 있는 이 땅이 ‘이미지의 감옥’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실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이미지의 감옥 속에서의 말들은 낭비된 말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밤은 또렷하다는 점에서 실체의 세계라 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스스로 몸을 비튼 고행의 소나무들이 가득’한 공간이지만, 하여 뼈아픈 공간이지만, ‘따뜻하고 행복’한 공간이 된다. 더구나 극 오간은 ‘명령’이 없기에 자유로운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공간은 실재하는 공간이기보다는 오인의 공간, 꿈의 공간이라는 점이 문제이다. 그곳은 화자가 보소 싶어하는 ‘아름다운 무늬’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다 할 때, 성은, 하얀 성은 화자가 보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무늬일 뿐이며, 내 몸이 저당잡혀 있는 세계는 명령만 가득한 이미지의 감옥, 안식향을 피워야만 하는 공간이 된다. 전자가 꿈의 세계라면, 후자는 몸이 살아내는 현실의 세계이다. 그런데 결국 우리가 사는 곳은, 살 수밖에 없는 곳은 후자라는 점에서 하얀 성은 오이느이 공간, 꿈의 공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고, 이 공간 역시 이미지의 감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미지의 감옥에서의 시 혹은 시 쓰기는 어떠한가?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어머니가 없는 공허한 시를 쓴다.
예술가들은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고
머리에 뿔을 단다. 광대의 옷을 입는다.
거친 발걸음으로 거리에 나가 거죽을 벗긴
날짐승을 전시한다.
대중은 환호하고, 예술은 진지하다.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고독한 오만으로 공허한 시를 쓴다.
재주 좋은 시인은
높은 나무에 올라 나뭇잎의 형상을 그린다.
시든 나뭇가지의 슬픔을 노래한다.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사로잡힌 유니콘의 뿔에 대해.
사랑하는 말발굽 소리에 대해.
문명인의 실험에 훼손당한 별의 슬픔에 대해.
스삭스삭 재킷의 말로 쓴다.
실상 외투는 어머니의 살로 만들어진 것.
재킷, 재킷! 하면* 어머니의 뇌와 심장이 실이 되어
올올이 풀려나온다.
재킷을 입고 추위를 견딘 나는
어머니에 대해 쓸 수 없다.
잠자는 숲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재킷을 태우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편의 시가 태어날텐데.
재킷의 재가 나무에 뿌려져
울창한 숲이 되면,
앙상한 내 겨드랑이에 날개가 생길텐데.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너무 추워 재킷을 꼭 껴입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재킷, 재킷 말을 건다.

- <재킷을 입은 시인>


위 시는 <재킷을 입은 시인>이다. 아베 고보의 소설 <시인의 생애>를 시로 다시 쓴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위 시에서 시인은 자신을 이미지로 만든다. 그들은 대중의 환호에 진지한 척 하지만, 공허한 시를 쓸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 시에는 어머니가 없기 때문이다. <시인의 생애>에서 재킷은 어머니의 노동이자 어머니의 육체였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가 없는 시란 노동과 그 노동의 지옥과 그 노동을 하는 육체가 없는 시를 말하고, 이는 역으로 노동과 노동의 지옥과 노동을 하는 육체가 담겨 있을 때 시는 가득 찬 세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노동과 어머니의 노동의 지옥과 어머니의 육체로서의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는 것은 제스처일 뿐이며, 이 제스처를 버릴 때, 이 재킷을 태워버리고 내가 시를 쓸 때, 그 시는 ‘가장 아름다운’ 시, 가득 찬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위 시에서 시인은 재킷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태워버리지 못하고 공허한 시, 제스처의 시만을 쓸 수밖에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하는 공허한 말 걸기일 뿐이다. 시인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재킷을 벗기에 이 세계는 너무 춥기 때문이다. 재킷은 이렇게 볼 때, 화자인 시인을 자재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공허한 삶과 육체가 기댈 수밖에 없는 무엇이면서 동시에 시인이 어머니의 것이 아닌 시인의 것으로서 가져야 할 무엇이 된다.
하지만 시인은 어머니의 재킷을 태워버리고 자신의 재킷을 가질 수 없다. 추위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추위는 무엇일까? ‘공상을 허락하지 않(<만>)’는 시대로서의 추위일까? 그럴 것도 같다. 그럴 것도 같지만, 그것으로는 재킷이 지난 무게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일가. 추위의 정체는.


얼굴 없는 안개의 밤,
죽음의 그림자를 막연하게 살피던 밤,
한밤 내 웃었다.


<만(灣)>의 일부이다. 위 시를 통해 우리는 추위의 온전한 정체와 만날 수 있다. 그것은 두려움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만’이라는 제목은 이 시의 모티프인 천연두 자국과의 형태적 유사성과 배꼽과의 의미론적 유사성(만은 육지의 배꼽이라 할 수 있다)을 담고 있는 은유이다. 위 시의 화자는 어릴 적 천연두를 앓으면서 죽음의 그림자를 확인하고 한밤 내 웃는다. 이때의 웃음은 즐거운 웃음이라기보다는 죽음이라는 뼈아픈 진실을 안 자의 페이소스가 담긴 웃음이라 할 수 있다. 천연두 자국과 유사성을 지닌 만으로부터 그 만에서 연상되는 배꼽을 바라보는 것을 통해 재생되는 이 웃음은 삶의 두려운 진실을 상기하게 하고, <재킷을 입은 시인>의 시인으로 하여금 어머니인 재킷을 벗어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배교의 고백 혹은 돌아온 탕아의 ‘연대기’를 연상시키는 일련의 시들 속에서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해 재킷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시인으로서의 화자는 ‘난삽한 사랑(<할례의 연대기>)’의 삶을 살고, ‘아무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지 못(<귀신과 도둑>)’하는, ‘호명을 두려워(기억의 기술>)’하는 존재의 삶을 산다. 이는 <재킷을 입은 시인>에 표현된 ‘고독한 오만’이라 할 수 있다. 고독하기에 호명을 두려워하고 아무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지 못하며, 오만하기에 난삽한 사랑만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 오만은 ‘유디트의 강한 팔에 붙들려/ 목이 잘리는 환상이 가장 즐거울 때도 있었다.(<기억의 기술>)’는 진술이나 ‘그러나 나는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사랑이 완성(<만신전>)’된다는 진술까지 가능케 한다. 이러한 고독과 오만은 재킷의 시인의 한계이자 삶 옆에 죽음을 달고 사는 인간 존재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을 바라본다는 것, 이것을 안다는 것은 이미지로서의 세계와 삶이 아닌 실체로서의 세계(인간이 만든 것으로서의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것,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앎은 ‘세상과 더불어 있’는 존재로서의 자재를 가능케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고독한 오만을 안다는 것은 그 고독한 오만을 벗어나 죽음이라는 진실과 함께 삶의 진실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첫 단계이기 때문이다.
 

돌 위에 앉아 있으면
저 바닥 아득히 짐승의 울음이 들리는 듯
엉덩이가 뜨끈했다.
숭고한 소리들이 돌 속으로 몰려갔다.
피의 온기를 가진 돌.
깊은 밤 달빛은 제 몸인양 돌 속으로 푹 잠겼다.
나도 모르게 일어서 돌에 머리를 숙였다.

- <돌> 부분


<돌>의 일부이다. ‘매일 다니는 골목길에’ 있는 ‘무심코 지나쳤’던 돌에게 화자는 인사를 한다. 고독과 오만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재킷을 벗어버릴 수 없는 약한 존재, 죽음과 함께 사는 존재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그 고독과 오만을 알았을 때, 재킷의 시인은 자신이 ‘세상과 더불어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이로 인해 ‘돌의 근원’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생각 속에서 돌은 인간의 삶이 잃어버린 짐승의 울음과 숭고가 담겨 있는 것이자, 따뜻한 온기를 담고 있는 자재하는 존재로 변한다. 이처럼 새로운 돌, 자재하는 돌, 돌의 자재를 본다는 것은 곧 나의 자재를 찾아가는 또 다른 단계 혹은 시작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재의 세계란 그저 그렇게 있음, 자유롭게 있음의 존재들, 곧 자재자들이 모여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_ <시현실> 2008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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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엔 언덕이 있다.
그날은 이상했다.
오르고 올라도 닿지 않는 거리를 헤맸다.
혼을 빼앗긴 것처럼.
늪에 빠진 것처럼.
뒷덜미를 놓아주지 않는 불빛이 있었다.
사위가 어둠에 둘러싸이면서
상점엔 불이 하나씩 켜졌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어둠이 안겨주는 거대한 정적을,
위대한 침묵을
나는 알지 못했다.
상처받은 한 친구를 생각했고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생각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바쁜 거리의 일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산책길엔 언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길목과 길목이 혀를 내밀어
몸을 떠받치고 있을 뿐.
타인의 인격을 규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은,
그 짧은 시간만큼은 황홀하겠지.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
달빛이 있는 골짜기다.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그 햇살의 순간처럼.

- 이재훈,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전문


우연의 일치일까. 이 시는 구성의 큰 틀에 있어서 앞의 시와 닮은 점이 적지 않아 보인다. 남진우의 작품에 나오는 ‘그’가 오르막길을 헐떡거리며 걸어가듯이 이재훈 시의 화자인 ‘나’는 언덕이 있는 산책길을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의 세부에 있어서 양자의 차이는 엄존한다. 시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에서 시인과 근접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화자는 어떤 이상한 기운이 감돌던 ‘그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나’는 또 시인은 복잡다단한 심경 속에서 ‘거리’를 헤매다 ‘언덕’이 있는 ‘산책길’을 오르게 된다. 바삐 돌아가는 거리에서 ‘나’는 마치 “혼을 빼앗긴” 듯, “늪에 빠진” 듯 방황한다. 방황의 구체적 이유들로는 ‘상처받은 친구’와 ‘갚아야 할 빚의 액수’ 그리고 ‘타인의 인격’ 등이 제시된다. 화자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자신이 저주스럽다. 그가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나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는 열망을 내비치는 이유는 현재에 쌓인 강한 불만의 심리와 무관할 수 없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어둠’이 ‘사위’에 내릴 때, 거리의 상점엔 ‘불빛’이 하나 둘 켜지고 ‘나’의 종교적 심성은 고양된다. 화자가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 곧 고통 속에 기생하는 황홀한 ‘그 짧은 시간’을 추구하는 까닭은, 그가 ‘근원’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달빛’이 흐르는 골짜기인 이곳 ‘월곡’에서 한없이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그리하여 ‘존재의 비밀’을 깨칠 ‘그런 순간’이 ‘내’게 올지 모른다. 장 그르니에가 지중해의 푸른 물결 속에서 발견한 산타크루즈의 그 빛, ‘그 햇살의 순간’을 시인은 희구하고 있다. ‘그날’은 신이 내 곁에 가장 가까이 내려앉을 수 있는 ‘일요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단 하나의 연에 38행이 담겨 있는 이 시를 가리켜, 삶의 아픔을 보듬어 줄 신성(神聖)의 빛을 향한 수도자의 기나긴 길의 시적 현현(顯現)으로 부르고만 싶다.

- 권온, <시적 시간 혹은 순간에 뿜어져 나오는 영혼의 불꽃>, 시작, 2008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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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과 동, 우포늪의 육성을 듣다

아무 말도 없는 밤. 모든 진실은 추악해졌고, 냄새는 역겨워졌다. 잠에서 깬 설익은 밤. 당신의 지느러미가 물의 품에서 파닥거리는 소리. 아무 것도 믿지 않는 밤. 정작 내세울 것이라곤 뜨거운 마음뿐. 침묵을 거느린 그대의 말과 말 사이. 그 행간으로 여명은 왔다. 뜨거운 마음 하나가 붉은 햇살을 따라 간다.

저 홀로 빛나는 존재들이 있다. 오만 가득한 몸. 축복에 싸인 아름다운 몸. 다른 시선들을 의식하며, 가장 완전한 자신을 드러낼 때. 아픈 밤의 시간이 흘렀다. 빈 가지를 부여잡고 깊은 잠을 잤다. 하늘에서 달콤한 사과향기가 났다. 그리고 오랜 폭우가 내렸다.

신열로 뜨거웠던 밤. 길섶에 엎드려 고요한 늪을 지켜보았다. 가슴은 차가워졌고 달그락대며 나사가 굴러다녔다. 검붉은 연기가 머릿속에서 뿜어나왔다. 당신의 비늘 부딪히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렸다. 설익은 달밤이었다.

― 이재훈, <가시연꽃>

이재훈은 식물적 상상력으로 내면의 역동성을 찾아낸다. 추악한 진실과 역겨운 냄새가 있는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아름답고 고귀한 꽃을 피우는 연의 생태를 화자의 내면에 투영하는 저력을 보여주는 시편이다. 삶의 근거에 기원하는 감성은 자연의 원초적 생명성을 인간과 조응하고 호응하는 구체성으로 끌어올린다. 아픈 밤을 보낸 뜨거운 마음이 온몸에 가시를 단 핏빛 가시연꽃으로 피어 햇살을 따라가는 힘찬 움직임은 극기의 미학을 함의한다.

― 배한봉, <우포늪의 힘, 시의 힘>, 시인시각, 2008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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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향한 로드 포엠


김명원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 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 장 그르니에



꿈꾸는 자는 머물지 않는다. 꿈꾸는 자는 늘 떠난다. 지혜를 구하여 자신이 열망하였던 이상향에 진입하려는 의지로 시간을 추동시키는 자, 항시 꿈꾸기 때문이다. 이곳에서의 추억과 사랑에 묶이지 않으려는 자, 이곳 너머의 세상에서 새로운 꿈을 꾸려 꿈꾸기 때문이다. 꿈꾸는 자, 그에게 있어 지나 간 과거는 휘발되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아득하며, 오로지 길 위에서의 여정만이 생생한 삶의 실체가 될 뿐이다. 그러기에 꿈꾸는 자에게는 길이 신앙적 도구가 된다. 길 위에서 사색하고, 길 위에서 잠이 들며, 길 위에서 시를 쓴다.

이재훈의 시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에서 시적 자아인 ‘나’는 길을 헤맨다. 꿈꾸기 위해 오르는 ‘산책길’에는 ‘언덕’이 있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오르고 올라도 닿지 않는 거리”에서 “혼을 빼앗긴 것처럼” “늪에 빠진 것처럼” 헤매는 것이다. 그날은 생의 근본적 에너지 원천인 태양을 기리는 날, 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사건을 매주 기념하는 날, ‘일요일’이고,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그는 산책길을 찾고자 하는 행위가 실존에 대한 자각의 장소라기보다는 ‘근원’을 바라는 ‘꿈꾸는 장소’였음을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꿈이 실현될 수 있는 공간인 산책길과 언덕을 헤매다 놓침으로서 인식론적 전환을 꾀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상징들이 개입하게 된다.

상징이란 하나의 단어나 사물이 지향하는 암시적이면서도 다의성을 띤, 두터운 입체감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신비하고 유기적인 존재로 부상한다.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시 전체를 아우르며 문맥 구석구석까지 고루 비춰주는 상징들을 통해 이재훈은 자신 내면에 집적된 고통과 방황의 세월과 꿈의 색채를 드러나게 하고 있다. 여기에는 ‘어둠’과 ‘산책길’, 그리고 ‘빛’이라는 세 가지 상징어가 출연한다.

1. 어둠

길을 잃고 헤매는 화자에게 엄습하는 것은 ‘어둠’이다. 어둠은 빛이 소실된 상태를 일컫지만, 시에서는 어둠이 내장하고 있는 상징으로서의 존재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어둠이 안겨주는 거대한 정적”과 “위대한 침묵”의 지반인 ‘근원’이다. 어둠은 빛의 바탕이며, 빛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등장할 ‘빛’과 현존의 짝을 이룰 것이지만, 어둠 자체에 깊이 드리워진 상징적 의미로서의 심연을 시인은 독자들에게 각인케 하는 것이다. 어둠의 세례를 숙연하게 받는 자, 어둠의 이치를 엄중히 깨달아 숙고한 자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통과하여 빛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리라.

입사 초입 단계인 어둠의 지점에서, 시적 자아는 어둠이라는 묵언의 진리를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알지 못했다/ 상처받은 한 친구를 생각했고/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생각했다”고 자책하고 있다. 결국은 일상적 현실에 묶임으로 진정한 꿈꾸기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조건으로서의 임무를 그르치게 된 셈인데,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바쁜 거리의 일들을 떠올렸”던 연유이다. 어둠에 오롯이 전념하지 못하고, 어둠이 전언하는 메시지를 인지하지 못하였으므로, 이제부터 꿈꾸기 위한 ‘길’을 상실하는 데서 오는 슬픔과 회의가 시작된다.

2. 산책길(언덕)

우리는 무수한 ‘길’의 상징을 기억한다. 인생의 험한 세파를 함의해서 진한 감동을 주었던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의 「길(La Strada)」, 시대적 인식이 처절했던 윤동주의 「길」, 예수가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십자가를 지고 시련을 겪었던 비아돌로로사, 수난의 상징인 ‘십자가의 길’ 등에서 나타난 길들은 자신이 운명처럼 구현하려는 세계로 향하는 노정이며 피할 수 없는 통로임이 드러난다. 모든 길에는 한숨과 비통과 피눈물이, 그리고 환희의 땀 내음이 얼룩져 있다.

이재훈은 길 위에서 방황한다. 언덕에 오르는 산책길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둠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으므로 꿈꾸는 실현의 장소인 언덕에 끝내 이르지 못할 것임이 자명한데도, “산책길엔 언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위로한다. 또한 “길목과 길목이 혀를 내밀어/ 내 몸을 떠받치고 있을 뿐”이라고 길을 놓친 경위를 길에게 전가한다. 이는 당도하지 못한 자의 궁색한 변명이자 모호한 회의인 셈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 있으며, 누구를 막론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길이지만, 아무나 그 길 입구에 들어서서 가고자 열망하는 곳까지 성공하여 가는 것은 아니다. 준비되어 있는 사람만을, 길에 연하여 있는 길을 통하여 끝없는 열망의 정수리까지 걷고자 하는 사람만을 길은 받아들인다. 바로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 않는다”는 신경림의 「길」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제 뜻대로 허락한 사람만을 받아들이는 길 끝, 언덕에는 빛이 있을 것이다. 이 빛은 근원을 비추는 빛이며, 본질을 천착하게 해주는 구원의 빛일 터이다.

3. 빛(불빛, 햇빛, 달빛)

이제 ‘빛’이다. 화자가 길 위에서 헤맨 이유는 빛을 꿈꾸기 위한 제대祭臺로서의 장소에 이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고, 마니케이즘에서 주장하듯이 인간 영혼은 타락해서 악의 물질과 섞여 있지만, 지혜가 이를 해방시킨다는 것처럼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고, 그리하여 빛이 상징하고 있는 생명력을 분출하며 생명을 전도하는 빛의 사제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이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던 자신의 한계와 비루에서 벗어나, 빛을 영접하여 빛으로 현현되는 순간을 꿈 꾼 이유가 된다. 생명을 생명답게 영위해 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이면서, 아름다움을 직접적으로 느끼며 일상에서 야기되는 사물이나 사건들에 환호하거나 분노하는 동적 에너지로 충일되기를 갈망하는 이중 감정을 내재하는 것이다.

빛을 둘러싸고 있는 둥근 상징성의 매체는 세 가지이다. 시의 초반에서 켜져 있었던 상점의 ‘불빛’,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장 그르니에가 쬔 ‘햇빛’, 그리고 언덕이 있는 월곡月谷에 비추고 있는 ‘달빛’이다. 상점의 불빛은 생활의 인접성에서 이루어지는 빛으로 ‘나’에게 ‘빛’을 인지시키는 원인을 제공한다면, 여기서 유추해 내는 ‘햇빛’은 언덕과 연상되어 중첩되는 산타크루즈의 장 그르니에에게 향한 경외를 나타내며, ‘달빛’은 부활과 재생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신을 향한 구원의 메시지를 채록한다.

이재훈은 이 시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려면 어둠의 세계에서 길을 몸소 자기화하여 고행을 실행하는 자, 빛에 들 수 있음을 우수 어린 어조로 눈부시게 노래하고 있다. 언제인가는 현실의 무게에서 헤매는 시적 자아가 진정으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꿈꾸던 바로 그것,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을 반드시 만나게 되길 바란다.

_ <현대시>, 2008년 8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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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훈(dreamjam)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김경락 ▶ 엇
사회자 ▶ 어서오세요 이재훈 시인님
박판식 ▶ 안녕하세요, 이재훈 형
푸른저녁 ▶ 안녕하세요, 이재훈 시인님.
문옥진 ▶ 안녕하세요
푸른저녁 ▶ ㅎㅎ
사회자 ▶ 드디어 오셨습니다.
김경락 ▶ 재훈형이다..
김경락 ▶ 술먹자고 전화할려고 했더니
이현미 ▶ 안녕하세요.. 시인님
김경락 ▶ ;;
이재훈 ▶ 안녕하세요..~`
리브카 ▶ 반갑습니다
사회자 ▶ 이재훈 시인님
사회자 ▶ 글자색 변경 부탁 드립니다.
이재훈 ▶ 반갑슨니다
사회자 ▶ 그리고 한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사회자 ▶ 개인적인 호칭은 잠시 아껴 두시고 오늘은 공식적인 호칭으로
사회자 ▶ 시인님으로 호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리브카 ▶ 동의합니당
♤ 곽성진(acepens)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동호 ▶ 넵
박판식 ▶ 네, ^^
사회자 ▶ 그리고 오늘 체팅은 어려운 시를 이미지를 통해서 감각적으로 써 내듯이
이재훈 ▶ 네~~
김경락 ▶ 넵
박판식 ▶ 곽성진님 안녕하세요..
사회자 ▶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쉽고 재밌게 풀어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채효석(bornfre)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곽성진 ▶ 반갑습니다.
사회자 ▶ 그럼 인사하는 시간으로 좀더 쓰겠습니다.
박판식 ▶ 네, 반가워요 곽성진님
이재훈 ▶ 안녕하세요...
사회자 ▶ 이재훈 시인님은 지금 막 들어오셨으니 한번 훌훌 둘러보시고
사회자 ▶ 인사들 나누십시요
채효석 ▶ 안녕하세요..
사회자 ▶ 아!~
사회자 ▶ 제 인사가 빠졌습니다.
이재훈 ▶ 반갑고..박판식시인도 오랜만이고..~^^
사회자 ▶ 저는 오늘 사회를 맡은 조용숙입니다.
김경락 ▶ 짝짝짝
사회자 ▶ 참고로 제가 오타를 엄청 많이 칩니다. 너그러운 이해를 구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이재훈 ▶ 반갑습니다..조용숙 선생님~
사회자 ▶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시이님 ^.~
박판식 ▶ 네 잘 부탁드립니다, 조용숙 선생님^^
♤ 이재훈 (dreamjam)님께서 퇴장하셨습니다.
♤ 푸른저녁 (poetone)님께서 퇴장하셨습니다.
사회자 ▶ ^.^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박시인님
사회자 ▶ 윽!~
♤ 푸른저녁(poetone)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사회자 ▶ 이시인님께서 당황하셨나 바로 나가버리시네요
사회자 ▶ ㅎㅎㅎ
♤ 이재훈(dreamjam)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사회자 ▶ 다시 환영합니다.
이현미 ▶ ㅋㅋㅋ
사회자 ▶ 푸른 저녁님도 환영합니다.
이재훈 ▶ 죄송합니다..긴장해서
사회자 ▶ 그 모습이 더 아름다워서
박판식 ▶ 그러게 저처럼 미리 와서 시험해보시지,
사회자 ▶ 100점 추가로 드립니다. ^^
사회자 ▶ 하하하
사회자 ▶ 오늘 느낌 아주 좋습니다.
이재훈 ▶ 감사감사~
사회자 ▶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오늘 기대되지 않나요?
박판식 ▶ 채팅 한 이후로 처음 손바닥에서 땀나네요,
사회자 ▶ 한마디씩 안하시면 수업 시작 안합니다.
이재훈 ▶ 하이텔 통신 이후로 채팅이 처음이라
사회자 ▶ 오늘 오신 회원님들은 필히 한마디씩 신고식을 해 주십시요 ^^
이재훈 ▶ 이제 좀 괜찮습니다
사회자 ▶ ^^
옥매듭 ▶ 안녕하세요 두분 시인님 반갑습니다 ^&^
이재훈 ▶ 반갑습니다..옥매듭님~
김경락 ▶ 안녕하세요...저는 이재훈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입니다
푸른저녁 ▶ 아, 저는 대전에서 시를 쓰고 있는 박진성이라고 합니다. 두 분 시인 만나뵙게 되어 너무 반갑습니다. ^^;
리브카 ▶ ㅋㅋ
이재훈 ▶ 감사합니다~
리브카 ▶ 모두 반갑습니당
이재훈 ▶ 하하 박진성 시인님~
김경락 ▶ (아..박진성 시인도 좋아합니다..)
김경락 ▶ ;;
동호 ▶ ㅋㅋ
푸른저녁 ▶ ㅎㅎ
추워요ㅠㅠ ▶ 시를 좋아하는, 그러나 현대시는 좀 어려워하는 독자입니다
추워요ㅠㅠ ▶ 꾸벅
추워요ㅠㅠ ▶ 현대시라고 하면 너무 포괄적이지만...^^;
♤ 설국(poempark)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푸른저녁 ▶
사회자 ▶ 와~ 오늘 성적 팍팍 올라갑니다. ^^
사회자 ▶ 어서오세요 설국님
푸른저녁 ▶ 소주 한잔씩 드시고 긴장 푸시지요.
푸른저녁 ▶ ㅎㅎ
은빛날개 ▶ 벌써부터 술을...
사회자 ▶ 푸른저녁님!~
은빛날개 ▶ 하하
추워요ㅠㅠ ▶ ㅋ
사회자 ▶ 술값 넉넉하신가 봅니다.^^
이현미 ▶ ㅎㅎㅎㅎ
푸른저녁 ▶ ㅎㅎㅎ
박판식 ▶ 설국님 안녕하세요, 닉네임에 시가 들어간 예사롭지 않은 분^^
이재훈 ▶ 술마시고 싶네요
사회자 ▶ 이방은 안주발 세우는 방입니다.
추워요ㅠㅠ ▶ 근데 소주병뚜껑이 붉은 색... 그 옛날 진로처럼..
설국 ▶ 헉
푸른저녁 ▶ 설국님 소개 부탁드려요~
설국 ▶ 반갑습니다.
푸른저녁 ▶ ㅎㅎ
사회자 ▶ 안주는 오징어와 땅콩 순대 이런거 말고 크리스마스 케익으로 넣어 주십시요
박판식 ▶ 글자색도 못바꿔서 저는 쩔쩔맸는데, 박진성 시인의 개인기를 보니^^
사회자 ▶ 잠시 후에 공식적인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리브카 ▶
사회자 ▶ 와!~
푸른저녁 ▶ 큭. 저는 글자색을 바꾸면 안됩니다.
박판식 ▶ 리브카님까지!
푸른저녁 ▶ ㅡ.ㅡ;
사회자 ▶ 리브카님 촛불이 부족해요
사회자 ▶ ^^
김경락 ▶ (저 술은..빼갈 같다는..)
리브카 ▶ v
사회자 ▶ 두분 시인님!~
이재훈 ▶ 제 글자색이 좀 튀는 것 같은데..
푸른저녁 ▶ 설국님은 부끄러움이 많으셔서... 설국님은 시를 쓰는 박정석, 이라는 분입니다.
설국 ▶ 아닌데요...
사회자 ▶ 혹 준비하신 강의 내용이 있으신지요?
설국 ▶ ㅋㄷ
박판식 ▶ 반가워요, 박정석 시인..
이재훈 ▶ 박정석 시인님~
이재훈 ▶ 반갑네요
설국 ▶ 아...네 방갑습니다
설국 ▶ 지송해요..속일려는 뜻은 절대 없었씀다
박판식 ▶ 속이고 있어도 괜찮은데, 좋잖아요, 재밌고
이재훈 ▶ 준비한 강의보다 그냥 편안한 분위기가 좋을 것 같아서요
설국 ▶ 푸른저녁땜시 들통났네요.
사회자 ▶ 그럼 편안한 대화 형식으로 가는것으로 하겠습니다.
푸른저녁 ▶ 오늘 강의 기대가 많이 됩니다.
이재훈 ▶ 강의를 하라면 하겠지만서도..^^
사회자 ▶ 수업에 앞서 진지한 질문은 용광로에서 녹여서 솜사탕처럼 해 주시고
사회자 ▶ 대답과 질문은 중학교 수준으로 맞춰 주실것을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사회자 ▶ 그리고 참석하신 회원님들께서는 자판이 쉬지 않도록
이재훈 ▶ 알겠습니다~~ㅎ헤
사회자 ▶ 꼭 한마디씩은 해 주실 것을 부탁들비낟.
푸른저녁 ▶ 두 분 다 박사이십니다!
사회자 ▶ 부탁드립니다.
박판식 ▶ 아닙니다, 박사과정입니다, 그것도 무늬만,
이재훈 ▶ 괜한 말을..거참~
사회자 ▶ 그럼 오늘은 박판식시인님과, 이재훈 시인님을 모시고 독자와의 만남 시간을 시작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 ▶ 궁금했던 질문들 아낌없이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재훈 ▶ 안녕하세요. 저는 시 쓰는 이재훈입니다.모두들 반갑습니다~
문옥진 ▶ 네.. 반갑습니다.
♤ 블새(kmrsky8018)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김경락 ▶ 네...짝짝짝
이현미 ▶ 방가방가
박판식 ▶ 안녕하세요 블새님, 불새 아니죠?
이현미 ▶ ㅋㅋㅋ
블새 ▶ 네 ..반갑습니다
이재훈 ▶ 제가 입출력이 좀 늦으니 이해 부탁드려요~
이현미 ▶ 입출력이라고 하니 꼭 기계같아요..^^
김경락 ▶ 질문해도 되나요?
사회자 ▶ 네에 하십시요 김경락님!~
김경락 ▶ 두 분께...음..술 먹고 시 쓰신적 있으신지..;;;;;
리브카 ▶ zz
리브카 ▶ ㅋ
김경락 ▶ (죄송합니다.~);;;
이재훈 ▶ 술 먹고 많이 씁니다..써먹지 못해서 그렇지..^^
박판식 ▶ 저도 술 먹고 자주 씁니다, 솔직히
박판식 ▶ 지금도 입술이 근질근질
동호 ▶ 그럼 또 다음날 부끄럽고 그러신지.. ㅎㅎ
김경락 ▶ 아휴...솔직한 답변 감사합니다..ㅎ
이재훈 ▶ 다음날 지우거나 버리거나..
이재훈 ▶ 어쩔땐 이걸 내가 썼나,,의심들 때도
사회자 ▶ ^^
이재훈 ▶ 있지만, 몇 구절들은 남겨두기도..
박판식 ▶ 저는 일기나, 낙서로 시 쓰기 때문에 버리진 않구, 그냥 냅둡니다
박판식 ▶ 늘 부끄럽죠,
김경락 ▶ 아..그렇군요..
푸른저녁 ▶ '새로운 세대'라고 하면 대략 범주를 어떻게 잡아야하는지요?
이재훈 ▶ 헉~낙서이기엔 범상치 않던걸요~
사회자 ▶ ^^
이재훈 ▶ 딱히 범주는 없다고 봐야 할 것 같네요
이재훈 ▶ 세대론으로 규정할만한 틀이 현재 무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호 ▶ 박판식 시인 시의 종결어미는 대개 -였다, -다, 로 끝나는데, 언뜻 딱딱하고 차가운 느낌도 들어요. 실제 말투는 어떠신지?
박판식 ▶ 박진성 시인께 물어보면 압니다..
이재훈 ▶ 나이보다는 작품의 새로움으로 봐야할 듯 싶습니다
박판식 ▶ 여자 대할 때와 남자 대할 때가 다르답니다.
푸른저녁 ▶ ㅎㅎㅎ
사회자 ▶ 와!~
리브카 ▶ 하하
김경락 ▶ ㅎ
사회자 ▶ 정답
이재훈 ▶ 저도..~^^
리브카 ▶ 그럼 시를 쓸 땐 남자를 대하듯이? ㅋ
박판식 ▶ 전 아닌 것 같은데, 뭐 박진성시인이 그러니 맞을지도_._
사회자 ▶ 그럼 혹시 일기나 낙서를 한다고 하셨는데, 간혹 연애 편지도 쓰시는지?
푸른저녁 ▶ 궁금하면, 제가 만나서 재연을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리브카 ▶ ㅋㅋ]
사회자 ▶ ^^
박판식 ▶ 늘 씁니다, 부칠 수 있는 것도 부칠 수 없는 것으로 분류도 하고
사회자 ▶ 혹 제 멜 주소 알려 드림 안될까요? ㅋㅋㅋ
사회자 ▶ 잠시 엉뚱 버전이었습니다.
이재훈 ▶ 저도 최근까진 썼습니다만.
박판식 ▶ 펜으로 쓴 지 참 오래됐네요,
리브카 ▶ 연애편지라는 단어, 참 오랜만에 듣는 듯...
사회자 ▶ 학창시절에
사회자 ▶ 펜팔 왕이었는데
리브카 ▶ ㅋㅋ 그랬을 것 같아요
리브카 ▶ 대필 전문
사회자 ▶ 그 시절이 엄청시리 그리워질라 그럽니다
사회자 ▶ 어떻게 알았죠 리브카님
사회자 ▶ ^^
리브카 ▶ ㅋㅋ
사회자 ▶ 그럼 잠시 한단계 올라가서 질문을 드립니다.
사회자 ▶ 두분 시의 근원지는 어디인지
사회자 ▶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박판식 ▶ 저는 한 단계 못올라 가겠는데요, 연애 감정에서 나오기 땜에
이재훈 ▶ 어려워요~
사회자 ▶ 아!~ 제 질문을 한단계 올렸다는 말이었는데
사회자 ▶ 오독이 있으셨던것 같습니다.
사회자 ▶ 연애 감정이야 말로 가장 높은 경지겠지요
사회자 ▶ 다른분 질문 해 주십시요
이재훈 ▶ 맞습니다~
박판식 ▶ 네~ 오독이 제 전문분야에요, 들켰네요..
이재훈 ▶ 예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이재훈 ▶ 어쩔땐 내가 시를 쓰는 게 아니고 누가 찾아오는 것 같다고~^^
사회자 ▶ 그분이요? ^^
이재훈 ▶ 네.
사회자 ▶ 시마
사회자 ▶ ^^
사회자 ▶ 은빛날개님!~
이재훈 ▶ 시마.뮤즈...등등
사회자 ▶ 이름이 참 고우십니다.
사회자 ▶ 질문 하나 해 주시지요?
사회자 ▶ 불새님!~
블새 ▶ 넵
사회자 ▶ 자꾸 쳐다보면 개구리 눈 되거든요
블새 ▶ ㅎㅎㅎ
사회자 ▶ 질문 하나만 해 주시지요
사회자 ▶ 가령 교생선생님이 첫 부임해 오시면 하는 질문 있잖아요
이재훈 ▶ 박시인님~피씨방은 채팅할만한가요?
박판식 ▶ 너무 강요 마세요? 땀 흘릴듯..
사회자 ▶ ^^
박판식 ▶ 네 좋아요, 공기도 좋고 소음도 좋고 예쁜 카운터 아가씨까지,
사회자 ▶ 윽!~
이재훈 ▶ 저보다 좋네요..
문옥진 ▶ ㅎㅎㅎ
푸른저녁 ▶ 에이~ 설마 신혼집보다 피씨방이 좋겠어요?
푸른저녁 ▶ ㅎㅎ
사회자 ▶ ^^
은빛날개 ▶ 어디가 신혼집인가요?
이재훈 ▶ 무슨 소릴~~
푸른저녁 ▶ 이재훈 시인 결혼한지 두 달 되셨습니다.
은빛날개 ▶ 으아
사회자 ▶ 와!~
추워요ㅠㅠ ▶ 부럽..
사회자 ▶ 꿈결같겠습니다.
추워요ㅠㅠ ▶ ㅋㅋ
사회자 ▶ 그럼 박시인님은?
푸른저녁 ▶ 박판식 시인 장가가세요~
이재훈 ▶ 부끄럽다..에고~
박판식 ▶ 축하드려야할지, 위로드려야할지, 훗 ^^
사회자 ▶ ㅎㅎㅎ
리브카 ▶ 이시인님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신다 들었는데, 어떤 강의를 하시나요?
이재훈 ▶ 아, 예.그냥 교양과 시론을 합니다~
이재훈 ▶ 참고로 날나리 강사입니다.
사회자 ▶ 전 특히 교양이 부족한데, 교양충전 받으러 가야겠습니다.
리브카 ▶ 날나리 강사가 가장 사랑받는 법인데...
사회자 ▶ 예로부터 날라리 강사를 최고로 치던데요
사회자 ▶ ^^
리브카 ▶ 시론 수업에 교재도 있나요?
이재훈 ▶ 뭐..사랑은 아니고, 매니아는 있습니다.
사회자 ▶ 직업정신을 발휘해서 그럼 두분 시인님께서 시를 쓰게 된 계기가 있을것 같은데
사회자 ▶ 차근 차근 말씀을 풀어 주십시요
이재훈 ▶ 교재 있고요~
이재훈 ▶ 방황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박판식 ▶ 전 재수했는데, 대학와서 이성복, 기형도 읽고 충격받아서 시작했어요
푸른저녁 ▶ (이재훈 시인 등단작이 '수선화'라고 알고 있는데, 그 시를 아주 잘 읽었습니다. 이번 시집에서요.)
이재훈 ▶ 아, 감사..합니다~
김경락 ▶ 질문입니다..
김경락 ▶ 이재훈 시인에게..
김경락 ▶ 전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김경락 ▶ 일반독자에게
설국 ▶ 전 박판식 시인의 '하관'과 '장지'란 시를 좋아합니다.(개인취향)
푸른저녁 ▶ 박판식 시인 석사논문이 이성복 선생에 관한 것으로 아는데, 이성복 시인에 대해 남다르시겠네요.
김경락 ▶ (짤렸군요..)ㅎ
사회자 ▶ ^^
리브카 ▶ (계속 말씀하세요^^)
사회자 ▶ 계속 하시죠 김경락님
박판식 ▶ 큿 김경락님 얘기부터 듣죠, 시인님들..^^*
김경락 ▶ 아...동료중에..기독교 신자가 있어서..
김경락 ▶ 제가 아는 시인중에 기독교 신자인데..
김경락 ▶ 시집을 냈다고
김경락 ▶ 순례라는 시를 읽어보라고 권했더니
김경락 ▶ 그 사람 하는 말이
김경락 ▶ 아..이 사람 정말 기독교인 맞나..
김경락 ▶ 라고 하더라구요
김경락 ▶ 시인에게..종교와..시는..어떤 것인지..
김경락 ▶ 궁급합니다
이재훈 ▶ 저는...날나리 기독교인입니다.~^^
사회자 ▶ ^^
김경락 ▶ 날라리라면..부정할수도 있다는?
이재훈 ▶ 신의 존재를 부정하진 않습니다~다만,
사회자 ▶ 겸손하게 표현하신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경락님
김경락 ▶ 네
김경락 ▶ ㅎ
이재훈 ▶ 아직 더 방황하고 싶은 것 같아요..제가,
박판식 ▶ 저는 종교는 없는데, 신은 믿습니다, 온갖 잡신들이 지금도 주위에 가득하지 않나요^^
이재훈 ▶ ^^~
사회자 ▶ 저도 그런디
박판식 ▶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큰 슬픔이 오면, 신이 내린다더군요
사회자 ▶ 윽!!~
사회자 ▶ 감동멘트 입니다.
박판식 ▶ 저는 주변에 신 내린 사람이 몇 있어서..
이재훈 ▶ 저도 기도원에서 귀신들린 자를 직접 봤습니다..
사회자 ▶ 으악!~
사회자 ▶ 그럴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이재훈 ▶ 너무 무서웠죠~^^
사회자 ▶ 그럼 두분 시인님들께서는 습작기때 어떤 부분이
사회자 ▶ 가장 힘들었는지 말씀해 주십시요
사회자 ▶ 또 힘들때 어떤 힘으로 견뎌냈는지도 궁금합니다.
이재훈 ▶ 그때 제 주변은,
이재훈 ▶ 이태원 밤무대나가는 친구의 자취방과
이재훈 ▶ 백수건달의 시절이어서
이재훈 ▶ 문학을 얘기하고 고민할 친구가 없었다는..외로웠다는..헤헤
사회자 ▶ ^^
박판식 ▶ 큿, 시는 제 삶의 잉여물 같은 거라, 위로만 됐지 저한테 해를 끼친 적이 없어서
설국 ▶ 친구들도 외로웠을 거예요, 재훈형
설국 ▶ ㅋㅋ
사회자 ▶ 와!~
사회자 ▶ 해를 끼친 적이 없다라는 말이
사회자 ▶ 참 멀게만 느껴집니다.
이재훈 ▶ 맞아요~..그래서 눈물나게 그립죠
박판식 ▶ 노래와 춤이 그렇듯이요, 슬퍼도 기뻐도 좋지 않나요..
사회자 ▶ 일차적으로는 주량을 대폭 증가시켜 놓은 점이
사회자 ▶ 저에게 가장 해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
이재훈 ▶ 하하..인정~
사회자 ▶ 혹 두분 고향은 도심이신지, 아님 시골쪽이신지 궁금합니다.
이재훈 ▶ 산간오지였습니다.~강원도 영월
블새 ▶ 박시인님 함양?
박판식 ▶ 저는 함양 산골에서 부산 변두리를 거쳐, 서울 산동네에 삽니다.. 비탈진 곳을 벗어나질 못하는 중
사회자 ▶ 와!~ 블새님
블새 ▶ 불새입니다 ,,잘못해서
사회자 ▶ 하하하
김경락 ▶ ㅎ
블새 ▶ ㅎㅎㅎ
박판식 ▶ 설마, 드라마 불새 매니아는 아니죠^^
사회자 ▶ ㅎㅎㅎ
블새 ▶ 맞아요
사회자 ▶ 제가 듣기로 박시인님 팬이라고 들었습니다.
사회자 ▶ ^^
블새 ▶ 심장의 타종,,,좋습니다
박판식 ▶ 저는 드라마에서 인생을 배웁니다.. 불새에서도 많은 걸 배웠죠
사회자 ▶ 공감
블새 ▶ 불새노래도 좋아요
푸른저녁 ▶ 저는 박판식 시인의 <그리운 가족>을 좋아합니다.
사회자 ▶ ^^ 전 부부클리닉에서 가정은 골치아픈 것이라고 배웁니다.
사회자 ▶ ㅋㅋㅋ
박판식 ▶ 너무 띄우지 마시압, 떨어질려는 중
블새 ▶ ㅎㅎㅎ
사회자 ▶ 이재훈 시인님!~
푸른저녁 ▶ 이재훈 시인의 시를 보면 도시 이미지가 많이 나오는데, 아까 말씀하신 '방황기'의 영향 탓이라고 봐도 될까요.
이재훈 ▶ 예
사회자 ▶ 앞으로 꼭 써 보고 싶은 시가 있다면?
사회자 ▶ 혹은 시외에 다른 장르에 대한 관심이 있으신지?
이재훈 ▶ 방황기의 영향 맞습니다~
이재훈 ▶ 뭐..그게 다는 아니지만~
박판식 ▶ 갑자기 티브이를 친구로 삼은 신동욱 시인 생각나네요..
사회자 ▶ 진행이 좀 수동적인 느낌으로 흘러 가는것 같습니다.
박판식 ▶ 신동옥인데, 또 욕먹겠다
이재훈 ▶ 꼭 써보고 싶은 시는 아직, 또 뭐가 쓰고 싶어질지
김경락 ▶ ㅎ
사회자 ▶ 두분 시인님들께서 하고 싶은 이야기 술 먹었다 생각하시고
사회자 ▶ 한번 확 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리브카 ▶ ㅎㅎ
김경락 ▶ 두 분은..주로 시집만 읽으시는지..
옥매듭 ▶ 두분시인님 말씀 감사합니다 ^^
푸른저녁 ▶ 도시속의 순례자, 라고 해야하나, 박수연 선생께서는 이재훈 시인의 시를 '낭만성'으로 보시더군요.
사회자 ▶ 술주정은 절대 다음날 발설하지 않는다는 금기가 있습니다.
김경락 ▶ 궁금합니다
♤ 옥매듭 (leeoanna)님께서 퇴장하셨습니다.
이재훈 ▶ 술을 안먹어서~^^
김경락 ▶ 한국 문학에서..
김경락 ▶ 시는 소설보다 낫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계시는지
사회자 ▶ 윽!~ 제가 졌습니다. 이시인님 ^^
김경락 ▶ 예전에는..문인들이..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했었는데..
김경락 ▶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이재훈 ▶ 저도 소설쓰고는 싶은데,,
김경락 ▶ 장르의 구별 탓인가요..아니면..수준 탓인지...
김경락 ▶ 궁금합니다
이재훈 ▶ 둘 다 잘 쓴다면 가장 좋겠죠
김경락 ▶ ㅎ
사회자 ▶ 그럼 내가 시인이 되서 참 잘했다고 생각 됐을때가 있었다면? 언제였는지
이재훈 ▶ 집중력의 분산이 그런 경우를 낳을 거에요
박판식 ▶ (느리게 흘러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흠, 옥매드님의 퇴장에 상처받고 치유중)
사회자 ▶ 하하하
블새 ▶ ㅎㅎㅎ
리브카 ▶ ㅋㅋ
사회자 ▶ 박시인님!~
이재훈 ▶ ㅎㅎ
사회자 ▶ 개의치 마세요
김경락 ▶ ㅎ
사회자 ▶ 아마도 화장실이 급해 나갔을 겁니다.
박판식 ▶ 장르론이 제일 어렵지 않나요,
박판식 ▶ 전 카프카 보면 소설이 아니라 시 같고,
푸른저녁 ▶ (김록 시인의 장편, '악담'이 나왔더군요.)
박판식 ▶ 병승이 형 시보면 소설 같고, 훗
이재훈 ▶ 그렇군요
김경락 ▶ 네..
박판식 ▶ 김록 시인께 위로 문자 보냈습니다..
푸른저녁 ▶ 흐흐.
리브카 ▶ ㅋ
박판식 ▶ 대화보다 필담을 좋아하시는 분이라, 훗
리브카 ▶ (김록, 김근, 김언, 김현 ... 또 있나 ㅋ)
이재훈 ▶ 저는 시인들이 소설쓰는 거,
이재훈 ▶ 좋아합니다
김경락 ▶ 왜요?
김경락 ▶ ㅎ
사회자 ▶ 요즘 시인들 보면 어떤 사상 혹은 철학쪽에 많이 기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혹 두분도 그런측면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푸른저녁 ▶ 생각에 그치지 않고 말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것을 알기 위한 것이며, 진보적인 차원에서 사회적인 기능을 지지하는 것이다." , 김록 시인 소설집 첫 구절이라고 하더군요.
박판식 ▶ (김참, 김민, 김안...)
리브카 ▶ 이장욱 시인은 평론도 쓰고 소설도 쓰지요.
리브카 ▶ (맞아요 ㅋ)
사회자 ▶ 시를 쓰다가 소설을 쓰면 언어가 우선 감각적일 수 있으니까요 시쓰다가 소설 쓰시는 분들은 꽤 많은 편이죠
김경락 ▶ 네에..
이재훈 ▶ 서사의 욕구를 시라는 장르가 못채워줄 때
박판식 ▶ 부럽죠, 소설 언젠간 쓰고 싶은, 그런데 강도 높은 노동을 요구하잖아요
박판식 ▶ 게으른 시인에겐 고통이죠
이재훈 ▶ 해볼만하다 생각드는데..
사회자 ▶ 한마디로
사회자 ▶ 중노동이라고 하던데요
사회자 ▶ 노가대
리브카 ▶ 중노동이죠;
푸른저녁 ▶ 어제, 김언 시인과 채팅을 하면서 잠깐 얘기가 나왔었는데, 대학원 공부가 실제 시 쓰시는데 도움이 되시는지요?
이재훈 ▶ 엉덩이가 가벼워, 못쓰죠~
사회자 ▶ ^^
박판식 ▶ 내겐 너무나 가벼운 엉덩이^^
사회자 ▶ 이시인님!~ 갈수록 제 취향인것 같습니다.
사회자 ▶ ㅋㅋㅋ
이재훈 ▶ 친해봅시다~
사회자 ▶ 두분다
사회자 ▶ ^^
사회자 ▶ 가벼운 엉덩이라는 말이 오늘은 포인트 인것 같습니다.
사회자 ▶ 오늘의
이재훈 ▶ 공부는 공부고 시는 시인데
블새 ▶ 사회자님 엉덩이 무거운데 ...ㅎㅎ
사회자 ▶ 하하하
사회자 ▶ 쉿!~
블새 ▶ ㅎㅎㅎ
김경락 ▶ ㅎ
사회자 ▶ 블새님 비밀 누설하면
사회자 ▶ 알죠?
이재훈 ▶ 그런 비밀이..
블새 ▶ 죄송합니다 제가 거짓말을 못합니다
사회자 ▶ ㅎㅎㅎㅎ
사회자 ▶ 리브카님
사회자 ▶ 제편좀 들어 주심 안될까요?
사회자 ▶ ^^
리브카 ▶ ㅋㅋㅋ
이재훈 ▶ 참, 말하다 말았네.
사회자 ▶ 아무리 둘러봐도 가볍다고 변론해 주실 분이 한분도 안계신듯 하여 다음 대화로 페이지 넘깁니다.
이재훈 ▶ 대학원 공부 시 쓰는데 많이 방해됩니다.
이재훈 ▶ 노력중입니다~^^
사회자 ▶ 그럼 이시인님을 여행을 즐기시나요?
푸른저녁 ▶ 네... ^^;
사회자 ▶ 아님 장구경?
사회자 ▶ ^^
이재훈 ▶ 즐기는데, 많이 즐기는데, 엉덩이가 무거워 잘 못떠납니다~
사회자 ▶ ^^
사회자 ▶ 처음 체팅손님으로 오셨던 이원규 시인님이 족필로 쓴다고 했던
이재훈 ▶ 예전엔 훌쩍 잘도 다녔는데..
사회자 ▶ 말이 자꾸 생각나서 질문을 드려 봤습니다.
김경락 ▶ 어떤 작가는...아침 아홉시부터 열두시까지..줄곧..쓴다고 합니다...매일 아마 소설가라 그럴테지만..
이재훈 ▶ 족필로?
김경락 ▶ 시인은 도대체 언제 쓰는지..
사회자 ▶ 네에
김경락 ▶ 시간을 정해두고 쓰나요..
김경락 ▶ 아니면 뮤즈가 휙~ 오나요?
이재훈 ▶ 그때 그때 달라요~
김경락 ▶ ㅎ
사회자 ▶ 박시인님!~
박판식 ▶ (저는 지금 질문들이 많이 겹쳐서 하나씩 다 대답하려는 중인데^^)
사회자 ▶ 하하하
사회자 ▶ 저는 다이어트 하신줄 알았습니다.
이재훈 ▶ 그러면 잊어먹잖아요~
김경락 ▶ 혹..뮤즈를 믿는지..열정이 뮤즈인지..
사회자 ▶ 안보이실만큼 작게
박판식 ▶ '현대시시상'이나 '시와 사상'이라는 잡지가 있는 거 보면 시와 사상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하고
박판식 ▶ 대학원 생활은 대학원생 하기 나름이라, 시쓰는데 거의 방해 안되고
박판식 ▶ 여행은 먼 곳보다는 가까운 나 자신부터 들여다보느라 지쳐서 갈 얼두도 못내고
박판식 ▶ ^^잠시 휴식 중
사회자 ▶ ㅎㅎㅎㅎ
블새 ▶ ㅎㅎ
사회자 ▶ 우와!~
김경락 ▶ ~
이재훈 ▶ 수고하셨습니다~
사회자 ▶ 암튼 박시인님 재치가 만만치 않습니다.
박판식 ▶ (거의 강박증이죠, 훗, 건망증까지 겹쳐서 가끔 볼만해요..)
사회자 ▶ 하하하
♤ 은수(bubwoo)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사회자 ▶ 어서오세요 은수님!~
사회자 ▶ 은수(언니)님 ㅋㅋ
이재훈 ▶ 반갑습니다.은수님~
사회자 ▶ ^^
박판식 ▶ 안녕하세요, 은수님. 반가워요
은수 ▶ 분위기 파악까지 조용~~
푸른저녁 ▶ 2000년대도 어느 새 중반인데, 올해는 유난히 첫시집이 많이 쏟아졌습니다. 이런 일군의 시인들이 전 시대와 대비되는 특징 같은 것이 있다면 어떤 걸 꼽을 수 있을까요?
박판식 ▶ (수동적이고 피동적이고 느리고 답답하지만, 나름대로 즐기는 중^^)
이재훈 ▶ 박판식 시인이 정리해서 말씀해주시겠습니다~
사회자 ▶ 우와!~
사회자 ▶ ㅎㅎㅎㅎㅎㅎ
푸른저녁 ▶ 이재훈 시인께 여쭙고 싶습니다.
푸른저녁 ▶ ㅎㅎㅎ
사회자 ▶ 오늘 두분 호흡이 거의 환상적입니다.
박판식 ▶ (역시 진지한 박진성 시인, 귓속말로 그렇게 진지해지지 말라고 했건만^^)
사회자 ▶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푸른저녁 ▶ 현대시 편집장으로 계시니까 아무래도 시단의 흐름이랄까, 이런것을 잘 느끼실 것 같다는 생각인데요.
푸른저녁 ▶ ㅎㅎㅎ
이재훈 ▶ 특징이 있긴 합니다. 선배 시인들이 못 알아먹겠다고 하니깐~^^
사회자 ▶ ㅋㅋㅋ
김경락 ▶ ㅎ
이재훈 ▶ 얘기하자면 너무 긴데..
박판식 ▶ 좋지 않나요, 일단 다양해서, 골라 읽는 재미가
박판식 ▶ 경직되었던 예전 보다 시가 뭔지 처음부터 다시 묻는 시인부터 막 노는 시인까지..
이재훈 ▶ 가장 큰 다른 점이라 한다면, '언어'겠지요.
이재훈 ▶ '시적 언어'라는 고정관념이 깨졌으니깐.
이재훈 ▶ '고정'이라는 말은 뺄게요~
♤ 귀뜸(flowon)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박판식 ▶ 귀뜸님 안녕하세요..^^
♤ 사회자 (whdydtnr)님께서 퇴장하셨습니다.
이재훈 ▶ 안녕하세요. 귀뜸님~
귀뜸 ▶ 많이 늦엇습니다.실례^^*
박판식 ▶ 앗! 사회자님께서 드디어 침묵을 참지 못하시고
♤ 사회자(whdydtnr)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김경락 ▶ 몸은 다 나으셨습니까
김경락 ▶ (박진성 시인께..뜬금없다는;;;;)
김경락 ▶ ㅎ
김경락 ▶ 죄송;;
푸른저녁 ▶ (경락님... 무슨 말씀? ^^)
김경락 ▶ 시집을 보면..
김경락 ▶ 많이..것두 아주 많이
김경락 ▶ 아프신것 같았다는
김경락 ▶ ;;
푸른저녁 ▶ 왔다리갔다리 합니다.
푸른저녁 ▶ ^^;
김경락 ▶ 네^^;;
푸른저녁 ▶ 이재훈 시인의 말씀을 계속 듣고 싶은데요~
사회자 ▶ 제가 진지한 질문 하지 말라고 한 부분에 대해서 반성문 쓰고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질문에 무게를 달지 않겠습니다. 맘껏 질문해 주십시요
박판식 ▶ (큿, 박진성 시인 병은 술먹으면 잠시 나았다가 술 끊으면 심해지는 병!)
사회자 ▶ 밖에 끌려나가 된통 혼나고 왔거든요 ^^
리브카 ▶ 사회자님 추운데 고생하셨습니다
김경락 ▶ 그렇군요^^;;
사회자 ▶ ^^
푸른저녁 ▶ ^^
리브카 ▶ 그나저나 시간이 또 이렇게 빨리 흘러서
리브카 ▶ 벌써 10시 반이 다 되어 가네요
사회자 ▶ 오늘은 특별히 12시까지 하면 안될까요?
이재훈 ▶ 시간가는 줄 모르겠습니다
사회자 ▶ ^^
박판식 ▶ 이제 손가락이 좀 풀릴려고 하는데,
리브카 ▶ 원래 셔터내리고 안에서 마시는 술이 진짜
사회자 ▶ 공식적인 시간은 11시로 정하고
사회자 ▶ 2부 행사로 12시까지 하겠습니다.
동호 ▶ ㅋㅋ
블새 ▶ 리브카님 말씀 동감 .
리브카 ▶ ^^
박판식 ▶ 글이 남는다고 생각하니까 뻣뻣해져서 그래요
리브카 ▶ 원하시면 부분 편집도 가능합니다 ㅋㅋ
사회자 ▶ 그럼 신나는 음악을 좀 틀까요 박시인님?
이재훈 ▶ 이 글이 남나요?
김경락 ▶ !
박판식 ▶ 큿, 말의 즐거움..공기처럼 사라지는
리브카 ▶ 하하
사회자 ▶ 뻣뻣한 글이 좀 풀리게 시리
박판식 ▶ 안 그래도 옆자리에서 디스코 음악 막 나옵니다
사회자 ▶ ㅎㅎㅎㅎㅎㅎㅎ
김경락 ▶ (이름을 삭제 하고 싶다..)
사회자 ▶ 아무래도 오늘 체팅은 역사에 오래 남을것 같습니다.
리브카 ▶ 음...
이재훈 ▶ 글이 남는다는 걸 잊고 있었네요~^^
리브카 ▶ ㅎㅎ
리브카 ▶ 11시 되면 셔터 내리니까, 그때까지만 진중하게 버티고
박판식 ▶ 이상 생각나네요 (검열자를 염두에 두고도 자유로웠던)
리브카 ▶ 그 뒤로 뒤집어집시다
박판식 ▶ 그럼 더 느리게 느리게 갑시당!
동호 ▶ ㅋㅋㅋ
이재훈 ▶ 화장실도 좀 가고..
박판식 ▶ 커피도 한 잔 하고,,
리브카 ▶ 커피 좋지요.
사회자 ▶ 아!~
사회자 ▶ 커피 배달 오다가
사회자 ▶ 오토바이가 뒤집어 졌다고 합니다.
푸른저녁 ▶ 담배 한대씩 피우죠.
리브카 ▶
사회자 ▶ 윽!~
푸른저녁 ▶ 오늘 근데, 박판식 시인 너무 부드럽습니다. 적응 안됩니다.
푸른저녁 ▶ 진면목을 보여주세요~
푸른저녁 ▶ ㅎㅎㅎ
사회자 ▶ 그럼 원래 박시인님이 카리스마
리브카 ▶ 여성을 만났다고 생각하시고...
사회자 ▶ 스타일이신가요?
박판식 ▶ 클, 저도 때론 부드러운 남잡니다..^^
사회자 ▶ 하하하
블새 ▶ 박시인님 안경 쓰시나요?
박판식 ▶ (제발 한 번만 봐줘요, 박형..)
사회자 ▶ ^^
박판식 ▶ 귓속말로 공포분위기 그만 조성하구-.-
사회자 ▶ 하하하
푸른저녁 ▶ ㅡㅡ;
사회자 ▶ 귓속말 많이하면
푸른저녁 ▶ 저는 좋은 말씀을 듣고 싶어서요~
사회자 ▶ 귀지도 많이 쌓이나요?
박판식 ▶ 박진성 시인과 저는 오래된 필담 친구입니다
사회자 ▶ 귀뜸님!~
귀뜸 ▶ 아, 넵!
사회자 ▶ 귓속말 말고
사회자 ▶ 목소리 한번 냉큼 들려주시지요?
사회자 ▶ ^^
푸른저녁 ▶ 제가 늘 배우고 있습니다.
귀뜸 ▶ 저는 저 위의 커피향에 취해서리 그만~~~
사회자 ▶ ^^
푸른저녁 ▶
사회자 ▶ 으악!~
푸른저녁 ▶ 한잔 하시죠~
귀뜸 ▶ 크아 더 취합니다
사회자 ▶ 우린 맥주 아니고
사회자 ▶ 막걸리 마시고 왔는데요
사회자 ▶ ^^
블새 ▶ 내꺼다 ㅎㅎ
귀뜸 ▶ 병 부셔집니다
사회자 ▶ 은수(언니)님
사회자 ▶ 옆에 낑겨 앉으세요 알고 보면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요 ^^
은수 ▶ 네
사회자 ▶ 이시인님!~
사회자 ▶ 이재훈 시인님!~
이재훈 ▶ 예.
사회자 ▶ 지금 이순간 생각하는 책 한권만
사회자 ▶ 소개해 주십시요
사회자 ▶ 생각하지 말고 바로 답변을
이재훈 ▶ 끼냐르, 은밀한 생. 두고두고 읽을수있어요
사회자 ▶ 서적에 주문 들어갑니다. ^^
사회자 ▶ 서점
사회자 ▶ 이제 공식적인 시간 30여분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이재훈 ▶ 참, 밤의 피치카토도 추가합니다~
사회자 ▶ 네에 감사
박판식 ▶ (큿 죽여주시압)
사회자 ▶ ㅎㅎㅎㅎ
리브카 ▶ 두고두고 읽을 수 있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잘 안 읽혀서 - -;;)
은수 ▶ ㅎㅎㅎ
사회자 ▶ 박시이님!~
귀뜸 ▶ ㅋㅋ
푸른저녁 ▶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추천합니다. ㅎㅎㅎ
김경락 ▶ ㅎ
사회자 ▶ 혹 직업을 바꿀 의향이 있으신지 여쭤봅니다.?
푸른저녁 ▶ 드디어 외웠습니다. 이재훈 시인님~
푸른저녁 ▶ ㅎㅎㅎ
리브카 ▶ 줄임말로 뭐라 부르시나요?
이재훈 ▶ 참, 고생많으셨습니다
푸른저녁 ▶ ㅡㅡ;
김경락 ▶ 내.사.보
김경락 ▶ ;;;
리브카 ▶ 헉
푸른저녁 ▶ 헐
사회자 ▶ ㅎㅎㅎ
박판식 ▶ (^^*)
리브카 ▶ 책은 좀 팔리십니까!
이재훈 ▶ 오늘 지어주시는대로, 가죠.
리브카 ▶ 아 난 왜 이게 계속 궁금하지? - -
사회자 ▶ ^^
김경락 ▶ (저도 궁금했는데 쪽팔려서 못 물어봤습니다..)
블새 ▶ ㅎㅎㅎ
사회자 ▶ ^^
리브카 ▶ ㅎㅎ
김경락 ▶ ;;
이재훈 ▶ 모르는 게 약이죠..^^
리브카 ▶ 주말에 신촌에서 가장 크다는 홍익문고에 들러서
이재훈 ▶ 혼자 무척 많이 팔리고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곤합니다
리브카 ▶ 이번 행사에 참여하시는 시인 열 분의 시집을 보려 했는데
리브카 ▶ 몇몇 책만 확인할 수 있었어요
푸른저녁 ▶ 어, 대부분 서점에 있을텐데?
리브카 ▶ 교보 같은 데가 아닌 이상, 참 시집 자리는 인색해요
사회자 ▶ 리브카님
사회자 ▶ 서점 사장을 바꿔버려요
박판식 ▶ (키에르케고르가 자기 책 팔리는 것보다 경악했다는데, 저도 그 사람처럼 부자였으면 좋겠어요)
사회자 ▶ 그럼 간단히 해결될텐데요
리브카 ▶ 제가 꼼꼼하게 못 봤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시집 코너 자체가 좁더라구요
귀뜸 ▶ 으아
리브카 ▶ 손 좀 볼까요?
사회자 ▶ 확실히
사회자 ▶ 쓰다듬어 줘요
사회자 ▶ ㅎㅎㅎ
리브카 ▶ ㅋㅋ
리브카 ▶ 그 비좁은 코너 안에서도
박판식 ▶ (죽을 때까지 부자로 살다가 마지막 은행 잔금 빼오다 죽은 키에르케고르!)
리브카 ▶ 사랑시집이 잔뜩 차지하고 있어서
리브카 ▶ 여하간 살짝 분노하고 되돌아왔습니다
김경락 ▶ 근데 이재훈은..가수 이재훈이랑 겹쳐서 쪼끔 불이익이..;;
이재훈 ▶ (불쌍한 케에르케고르)
사회자 ▶ 역시 우리에게 빵은 사랑밖에 없는가 봅니다. ^^
푸른저녁 ▶ (헐, 키에르케고르에게 그런 일이 있었나요? ㅠㅠ)
박판식 ▶ 프로토스 유저이기도!
사회자 ▶ 설국님!~
사회자 ▶ 질문좀 해 주세요
사회자 ▶ 오늘 좀 많이 조용하신듯 하여
사회자 ▶ 자리에 계신지 확인차 ^^
이재훈 ▶ 프로게이머 이재훈도 있습니다.
김경락 ▶ ㅎ
푸른저녁 ▶ 고등학교때 돈 빌려 가서 안 갚은 제 친구 이재훈도 있습니다.
푸른저녁 ▶ ㅡㅡ;
김경락 ▶ ㅎㅎㅎㅎ
블새 ▶ ㅎㅎ
사회자 ▶ ^^
김경락 ▶ 얼마?
김경락 ▶ ;;;
사회자 ▶ 확실히 잊어버려야 할 이름이군요
김경락 ▶ 죄송;
푸른저녁 ▶ 3만원으로 기억합니다.
이재훈 ▶ 싸이월드에서 검색 못합니다. 너무 많아서~^^
푸른저녁 ▶ ^^;
김경락 ▶ ㅎ
김경락 ▶ 속이 좁으시다는
김경락 ▶ ㅎㅎㅎㅎㅎ
김경락 ▶ ;
푸른저녁 ▶ 이재훈 시인께서는 올해가 의미 있는 한해겠네요. 첫 시집을 내시고, 장가 가시고......
사회자 ▶ 시를 쓰고자 하는 후배들한테 한말씀 아낌없이 해 주신다면요?
이재훈 ▶ 대신 제가 박시인님께 3만원 정도의 음주는 제공하지 않았을까...싶은데
푸른저녁 ▶ ^^;
사회자 ▶ ^^
박판식 ▶ 쓸 사람은 어차피 말려도 쓸테고 안 쓸 사람은 괜히 끌어들이면 나중에 욕먹기 쉽상
사회자 ▶ ^^
사회자 ▶ 오늘 말씀들은 그야말로 명언록에 기록되어야 할것 같습니다.
블새 ▶ 맞아요 ..말려도 쓰겠지요
박판식 ▶ 누가 기형도 시집 읽고 이게 대체 뭐냐고 했던데,
박판식 ▶ 삶이 밝고 건강하다면
박판식 ▶ 그것도 좋지 않은지..
박판식 ▶ 시 안 쓰고 사는 행복도 좋고 시 쓰고 사는 불행도 좋고
김경락 ▶ 오~
사회자 ▶ 크!~
블새 ▶ 와
사회자 ▶ 밑줄 쫙쫙!~~~~~
귀뜸 ▶ 명언록!
사회자 ▶ ^^
박판식 ▶ (얼굴 붉어지고 있습니다^^ 좀 말이 많죠)
사회자 ▶ 전 술드시고 오신줄 알았습니다. ^^
블새 ▶ 술은 사회자님이 ㅎㅎ
사회자 ▶ 쉿!~
박판식 ▶ (네, 연짝 마시다가 오늘만 잠시 휴식중) 끝마치고 마셔야죠, 혼자라도
귀뜸 ▶ 따릅니다, 받으세요.ㅎㅎㅎ
사회자 ▶ ㅎㅎㅎ
사회자 ▶ 귀뜸님!~ 불새님...
푸른저녁 ▶ 그러지 마세요. 맘 약해서 또 택시 타고 갑니다.
블새 ▶ 네
사회자 ▶ 아까 마신 술 아직 깼죠?
사회자 ▶ ^^
김경락 ▶ 판식이라는 이름은..솔직히 참 촌스럽다고 생각하는데...본인은?
김경락 ▶ ;;
귀뜸 ▶ 당신은 누구?
블새 ▶ 머리아퍼요
박판식 ▶ 무지 마음에 듭니다, 내가 아닌 것 같아서
사회자 ▶ ㅎㅎ
김경락 ▶ (저도 제 이름..짜증이..)
박판식 ▶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사는 것 같아서
박판식 ▶ 박판식이 누굽니까? 전 잘 모르겠는데요
김경락 ▶ ^^;;;
박판식 ▶ 박진성 시인은 워낙 의리파에 즉흥파라
사회자 ▶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사는 것 같다. 웬지 의미 심장합니다.
박판식 ▶ 아마 조르면 택시타고 대전에서 올라올겁니다 당장..
푸른저녁 ▶ ㅡㅡ;
사회자 ▶ 푸하하하
박판식 ▶ (오늘은 시험에 빠뜨리지 말아야죠..)
푸른저녁 ▶ 저는 이재훈 형의 신혼방으로 가겠습니다!
귀뜸 ▶ ^^
사회자 ▶ 박시인님!~ 서울로 직행하시죠
사회자 ▶ 박진성시인님!~
박판식 ▶ 신동욱 시인이 질투할겁니다 아마
이재훈 ▶ 헉~~
푸른저녁 ▶ 헉~~
김경락 ▶ 이재훈 시인께...
사회자 ▶ 하하하
김경락 ▶ 이번 시집에서..가장 아끼는 시가 뭔지..
김경락 ▶ 궁금합니다
박판식 ▶ 신동옥(크..프로이트 말에 실수엔 의미가 있다는데)
김경락 ▶ 이유도 함께
김경락 ▶ ;;
사회자 ▶ 실수에 의미가 있다
푸른저녁 ▶ 신동옥 시인은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오해 마시길~
사회자 ▶ 검색해보기 전에
사회자 ▶ 풀어놔 보시지요
푸른저녁 ▶ 독자들이 먼저 얘기해보는 것도 어떨까요?
이재훈 ▶ 순위를 매기고 싶진 않구요..많은 편수 중에 고른거라..
박판식 ▶ (둘이 사귑니다. 이성보다 도 더 간절히)
사회자 ▶ 하하하하
김경락 ▶ 그래도 고른다면?
리브카 ▶ ㅎㅎ
이재훈 ▶ 깨물면 안아픈 손가락없다는 말이..^^
김경락 ▶ 빠져나가려는..솜씨..
김경락 ▶ ;;
푸른저녁 ▶ 저는 이재훈 시인의 시집 중에서는, <쓸쓸한 날의 기록>, 박판식 시인의 <하관>을 아껴가며 읽고 있습니다.
푸른저녁 ▶ 두 분 시인의 시적 성향을 잘 드러내주는 시라 생각합니다.
사회자 ▶ 공식적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것 같아 오신 분들의 출석을 한번씩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이쁜 사람만 대답한 걸로 알겠습니다.
김경락 ▶ 네
이재훈 ▶ 말 그대로, 기록, 일기 같은 시인데..
박판식 ▶ 크 (저는 이재훈 시인의 말에 관한 사랑이 너무 마음에 들던데요..)
사회자 ▶ 나수희님, 오스틴님, 리브카님, 은수님, 김경락님, 장규석님, 이현미님.
박판식 ▶ 또 마루 같은 서정적인 시도 좋고
박판식 ▶ 서정시인 아니라더니, 태생적으로 서정시인..
김경락 ▶ 아..저도 마루..좋아요;;
사회자 ▶ 문옥진님, 은빛날개님, 추워요님, 동호님, 곽성진님, 채효석님, 불새님, 설국님, 귀뜸님
박판식 ▶ (불러도 소리 없는 이름이요, 부끄러우시면 귓속말로 사회자님께 답하세요)
사회자 ▶ 하하하
사회자 ▶ 박시인님
사회자 ▶ 회원님들은 귓속말이 허용 되지 않습니다.
사회자 ▶ 오늘 오신 분들은 다 결석처리 하겠습니다. ^^
블새 ▶ 네
푸른저녁 ▶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서정시인이 되고 싶다> 라는 구절은 어떤 메타포처럼 들립니다, 이재훈 시인님,
사회자 ▶ 대답이 없었던 이유로 해서 이의신청은 아카데미로 해 주십시요
박판식 ▶ (무섭다..*)
이재훈 ▶ 예..좀 답답한 게 있었지요~
김경락 ▶ 사회자 결석 처리에 동의하시는 분들 거수!
김경락 ▶ ;;
사회자 ▶ ^^
김경락 ▶ ;;ㅎ
박판식 ▶ 이재훈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 어떻게 변해갈지 저도 궁금..
귀뜸 ▶ 좀 무섭지만 귀여운 사회자님
푸른저녁 ▶ 다음번에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서정시인이 되고 싶은데, 왜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이라는 전구가 나오는지요.
설국 ▶ 자리비워서 죄송합니다...이제야..컴백
사회자 ▶ 귀뜸님!~ ^.~
사회자 ▶ 설국님께서 오시니 방에 꽃향기 그득합니다.
설국 ▶ 지금 갈무리로 훑는 중입니다..
사회자 ▶ 공식적인 시간이 끝나기 전에 마무리 질문들 해 주십시요
설국 ▶ 여자랑 있다 왔냐는 물음같네요..
사회자 ▶ 하하하
박판식 ▶ (하하)
사회자 ▶ 설국님 눈치도 빠르셔^^
귀뜸 ▶ ㅋㅋ
박판식 ▶ 그래도 오늘 주제에 한 마디 답은 해야 않을까요, 이재훈 형?
♤ 이현미 (hyunmi3)님께서 퇴장하셨습니다.
추워요ㅠㅠ ▶ (출석 체크 늦었슴다. 화장실^^;)
은빛날개 ▶ 벌써 끝날 시간이 다 되었나요...
사회자 ▶ 출석부에 지우개 똥이 그득해 졌습니다.
사회자 ▶ ^^
이재훈 ▶ 판식 형이 해주세요~
설국 ▶ 기다리던 중입니다.
사회자 ▶ 두분 시인님께서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신다고 하니
사회자 ▶ 잠시 경청해 주십시요
설국 ▶ (이 한순간을 위해 허리통증을 견디며..ㅜㅜ)
동호 ▶ ㅎㅎ
박판식 ▶ (주제가 뭐였죠^^이러면 뒤집어 질듯)
김경락 ▶ ㅎ
사회자 ▶ 하하하
푸른저녁 ▶ 헐
블새 ▶ ㅎㅎ
리브카 ▶ ㅋ
푸른저녁 ▶ 이 산이 아닌가벼
설국 ▶ (헉, 너무해요!)
박판식 ▶ 분명히 새로운 세대가 등장한 것은 우선 사실인듯
박판식 ▶ 서정시도 90년대의 서정시가 아니고
박판식 ▶ 실험시도 90년대의 실험시가 아니고
박판식 ▶ 다양한 경험과 다양한 사상과 다양한 상상력이
박판식 ▶ 다양한 시공간과 교류하면서
박판식 ▶ 지평을 넓혀 갈듯..
박판식 ▶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인 시인들이 너무 많이 등장하고 있어요
박판식 ▶ 독자로서 너무 즐거운 일
김경락 ▶ (그래도 열거 해주지..;;)
박판식 ▶ 그들과 같이 호흡하며 동시대에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박판식 ▶ 저는 너무 좋아요
이재훈 ▶ 어렵지 않은 시대가 없었지만
이재훈 ▶ 지금 시 쓰기 가장 어려운 시대가 아닐까 생각듭니다.
이재훈 ▶ '시'가 할 수 있는 새로움이라는 의미에서 보자면요.
박판식 ▶ (심란한 말씀이군요..이재훈 시인님, 좋네요^^)
사회자 ▶ ^^
귀뜸 ▶ 갑자기 지금 내 발은 어디쯤에 있을까 생각이듭니다^^*
설국 ▶ 짝짝짝!~
이재훈 ▶ '새로움'이라는 '억압'에 지금 세대 시인들은 살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박판식 ▶ (새로움이라는 강박증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새로워집니다, 우리)
사회자 ▶ 또다른 이 시대의 형틀
리브카 ▶ 전위에 대한 강박은 어느 시대에나 있지 않을까요
귀뜸 ▶ 판식, 재훈, 진성 등등 시인짱
사회자 ▶ 하하하
사회자 ▶ 역시 귀뜸 짱!~
푸른저녁 ▶ ('새롭다'라는 말에 저는 약간의 거부반응이 있는데요, '새로움'이라는 이름 아래 시가 너무 자기독백이 되고 장광설이 되는 현상은 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재훈 시인 말씀대로, 그 어느 시대보다 시를 쓰기 어려운 시대이겠지만, 말이죠.)
블새 ▶ 푸른저녁님 말씀에 동감
사회자 ▶ 저도 공감 ^^
이재훈 ▶ 그 새로움의 억압 때문에 시 장르 자체에 대한 회의가 새로운 방법론으로 나오고 있죠
은수 ▶ 저는 감탄
사회자 ▶ 오늘 말씀들이 한결같이 공감되는 말입니다.
이재훈 ▶ 예전 전통 시학에서 보면 절대로 시가 될 수 없는 시.
설국 ▶ 저는 '새롭다'는 말에 시인들이 얽매일때 시가 일종의 '강박'이 된다고 봅니다.
푸른저녁 ▶ (제 자신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지만, 시인들이 너무 파편화된 단상에 매몰되는 현상은 제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 설국님 공감^^
이재훈 ▶ 윗 세대 시인들께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이걸 시라고 할 수 있을까..
설국 ▶ (그럼 안되겠죠)
사회자 ▶ 시인은 자유로울 이유가 있다
사회자 ▶ ^^
박판식 ▶ (시를 써서 조금씩 자유로워져야하는데 시가 뭔지, 시적인 게 뭔지 과도하게 고민하다보니)
이재훈 ▶ 중요한 건, 이제 새로운 시학이 나올 때가 되었다는~~..
사회자 ▶ 시를 쓰고자 함도 결국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함일진데 오히려 관념을 엮어가고 있지는 않나 하는 반성이 들기도 합니다.
이재훈 ▶ 그래서 산고를 겪고 있는 게 지금 세대 시인들이 아닐까.
사회자 ▶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역시 주님밖에 없는것 같습니다. ^^
박판식 ▶ (하지만 썩어 거름이 되겠죠^^)
귀뜸 ▶ 이거 이거 분위기가 수우울술
블새 ▶ ㅎㅎㅎ
이재훈 ▶ 거름이 되었음 합니다..정말로.
사회자 ▶ 귀뜸님!~ 눈치도 빠르셔
사회자 ▶ ^^
블새 ▶ 사회자님 아멘 ..
사회자 ▶ ㅎㅎㅎ
귀뜸 ▶ ㅋㅋ
은수 ▶ 酒님?
사회자 ▶ 네에 은수언니
김경락 ▶ ㅎ
사회자 ▶ ^^
동호 ▶ 시간이 늦어 먼저 일어섭니다. 오늘 즐거웠구요,
동호 ▶ 모두 건강하시길....
박판식 ▶ (아, 따뜻한 술국에 소주 한 잔이 그리운 시간!)
사회자 ▶ 네에 동호님
사회자 ▶ 편안한 밤 되십시요
동호 ▶ 꾸벅
푸른저녁 ▶ 11시가 넘어버렸네요.
♤ 동호 (ehdgh)님께서 퇴장하셨습니다.
김경락 ▶ (시간이 일러 아직도 개기는...)
김경락 ▶ ;;
푸른저녁 ▶ ^^;
이재훈 ▶ 모두들 감사합니다~
은수 ▶ 눈도 오는데 酒님이 필요한 밤
설국 ▶ 재훈형, 나중 놀러 갈게요
사회자 ▶ 공식적인 채팅 수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채효석 ▶ 수고하셨습니다
♤ 채효석 (bornfre)님께서 퇴장하셨습니다.
박판식 ▶ (감사,,감사^^)
김경락 ▶ 짝짝짝

Posted by 이재훈이
,

- 한국 현대시의 기독교적 시학


김옥성

 

1. 서론

21세기로의 전환기에 우리는 종교와 관련된 수많은 갈등과 분쟁을 겪어야 했다. 인류는 1990년대 발칸반도의 분쟁과 일본의 옴진리교 사건, 그리고 2000년대의 9.11 참사와 그 연장선에서 진행된 세계 각지의 폭탄테러 등을 경험하면서 종교에 대해 많은 회의를 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20세기 후반 휴거소동을 경험하면서,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관심이 점차적으로 증가하였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는 개신교와 그 선교정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부쩍 부풀려놓기도 하였다. 특히, 최근의 미국과 이슬람권의 첨예한 갈등과 대결은 문화의 심층으로서 종교적 모순에서 비롯된 기독교 대 이슬람의 종교전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세기를 건너는 과정에서 일어난 많은 사건들은 국내외적으로 종교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샘 해리스의 <종교의 종말>,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등은 종교에 대한 인류의 회의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저술들은 강한 어조로 종교를 비판하면서, 종교 무용론 나아가 종교 해악론을 전개하고 있다. 세기의 전환기에 팽배해진 종교에 대한 대중의 혐오감이나 염증과 맞물리면서 이들 저술들은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세 저서에서 공격하는 종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과 같은 유일신교, 특히 기독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이들의 논리가 샤머니즘과 같은 고대 종교나 불교나 유교, 도교 등과 같은 동양의 종교에는 적용되기 어렵다.

히친스는 “동방의 해법은 없다”라고 못을 박으면서 동양의 종교까지도 비판하고 있지만, 충분한 논증이 이루어지지 않아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동양의 지혜”가 종교(유일신교)를 대체할 수 있다는 해리스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 해리스는 유불도와 같은 동양의 특정 종교가 아니라 그러한 종교들의 저변을 관류하는 신비주의적이고 영적인 지혜가 ‘종교’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해리스의 견해가 옳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과연 동양에만 지혜가 있고 서양에는 없었을까? 일련의 국제정세를 돌이켜보면, 표면적으로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대변되는 유일신교가 ‘지금-여기’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를 품지 않기는 어렵다. 그러ㅏ 과연 유일신교가 인류에게 해악인가? 하는 의문 또한 제기될 필요가 있다.

동서를 불문하고 역사상 종교는 많은 악행을 저질러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만큼의 선행을 쌓아온 사실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최근의 미국과 아랍권의 갈등과 충돌은 물론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제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이라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서구권과 아랍권의 충돌은 종교적 이념의 충돌이라기보다는 소수의 정치가와 자본가의 헤게모니 투쟁과 보다 깊이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종교가 저지른 악행들의 대부분도 종교 자체의 모순이 아니라 소수 권력자의 정치, 경제적인 패권 투쟁의 산물이었다.

종교는 일종의 문화이자 전통이다. 문화와 전통은 ‘지금-여기’의 정황에 맞게 끊임없이 변화하며 진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종말’이란 있을 수 없다. 문화와 전통으로서 종교는 과거나 지금이나 인류의 정신적 삶을 윤택하게 해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신이 ‘만들어진 신’인가. “신이 위대하지 않다”든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경험과 믿음이다. 우리가 어머니를 경험할 때, 어머니의 학식과 외모와 경제력을 따지지 않는다. 우리의 어머니가 어떠한 존재이든지, 어머니는 모든 면에서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존재로 경험되고 기억된다. 믿음과 사랑은 사실관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주관에 의하여 가치가 결정된다.

  (중략)

6. 세속 도시와 신화 사이의 순례

이재훈의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풍성하다. 그의 넓고 깊은 신화적 상상력의 영토 한 가운데에는 기독교 신화가 중심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재훈의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오래 전에 적어본 것이라며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몽상가이다. 나는 혼자서 우는 편이다. 나는 시를 쓴다. 나는 어머니께서 호랑이꿈을 꾼 후에 태어났다. 나는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다. 나는 조울증이다.

그렇다. 그는 모태신앙을 가진 기독교 신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목회자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재훈 시에는 기독교가 내면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재훈은 기독교의 추상적인 사상이나 관념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성서에서 신화적 이미지를 추려낸다. 성서의 신화적 이미지를 딛고서 이교도의 신화를 수용하면서 그의 신화적 상상력은 광활하게 펼쳐진다.

  이재훈의 홈페이지에서 자신에 대하여 “별자리를 사수좌이고, 나무는 무화과나무이다”라고 적어 놓고 있다. 별자리는 신화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시적 주체는 자신의 선험적인 고향을 신화의 영역으로 사수자리로 설정해 놓고 있다. 이교의 신화에 속하는 사수자리 이미지는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예언”, “십자가” 등과 같은 성서적인 요소들에 에워싸이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기독교적인 것과 이교적인 것이 뒤섞인 신화의 세계는, 작품의 후반부에 오면 현실로 이어진다. “그 큰 어둠을 품고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가셨지”라는 대목은 현실로의 귀환을 암시해준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이야기들은 신화에 속한다. 어떤 시각에서 보면 신화란 종교의 추상적인 사상과 관념을 구체화시킨 이야기들이라 할 수 있다. 이재훈은 기독교 신화와 이방의 신화, 그리고 현실을 접목시킨다. 시적 주체는 신화와 현실을 넘나드는 여정을 “순례”로 규정한다.

이재훈 시에서 “순례”는 견고한 현실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시적 주체는 현실에 괄호를 치지 않고, 정면으로 노려본다. 세속 도시의 거리를 거닐며 거기에서 신화의 파편들을 발견한다. 그 파편들을 통해 시적 주체는 선험적인 근원으로서 신화의 세계와 교신을 한다. 세속 도시를 거닐며, 거기에서 신화에서 흘러나오는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과정이 이재훈 시의 “순례”인 것이다.

이재훈 시는 세속도시의 현실을 딛고서, 우리를 구약과 신약의 신화시대로 이끈다. 그는 세속 도시 곳곳에 박혀 있는 신화시대의 파편들을 보여준다. 그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우리는 신화적 세계를 어렴풋이 건너다 볼 수가 있다. 신화 세계의 체험은 세속 도시의 일상에 갇혀 사는 우리의 경직된 영혼을 부드럽게 풀어헤쳐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잠시나마 꿈을 꾸듯 자유로운 영혼의 상태를 맛볼 수 있다.

_ <딩아돌하>, 2008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

노철



사람은 살아가면서 상처를 받게 마련이고,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다만 그 상처의 크기와 깊이에 따라 상처를 다스려 병을 낫게 하는 일에 쏟아야 하는 힘의 양이 정해진다. 하지만 사람마다 상처를 다스려 병을 낫게 하는 방식은 다르다. 이런 점에서 이재훈 시인의 시는 상처를 거듭 늘리고 상처 속으로 뛰어들어서 상처를 넘어서 스스로가 힘차고 튼튼해지는 데 힘을 쏟는다.

…(중략)…

2. 상처를 뛰어 넘어 스스로를 치세우는 방식

이재훈 시인의 시는 중세의 기사 이야기를 닮아 있다. 믿음을 고갱이로 하여 온갖 어려움을 스스로 찾아가고 헤쳐 나가는 힘이 있다. 바깥의 자극에 찔린 상처를 바로 되받아치지 않고 안으로 끌어들여, 그 상처를 거듭 늘려 키운다. 그의 몸은 늘 슬프고 번거로운 일로 만신창이가 된다. 그러므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츠슬러 이겨내는 힘을 키우기 위해 다시 몸과 싸운다.

늘 공허하다

낯선 여관을 즐기던 시간도

빈 방에 누워 수음하던 시간도

기억만 자꾸 엉켜 잠 못 드는 밤들,

혀가 뽑히는 꿈을 자주 꾼다

한밤에 일어나 허겁지겁 찬밥을 먹는다

- <어떤 날> 부분

어떤 일에 온 힘을 다 써버리고 나서 밀려오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때 텅 빈 가슴은 쓰라리다. 꽉 차인 일에서 벗어나던 즐거움이나 숨 막히는 긴장이 풀리는 몸의 황홀조차 어떤 뜻도 맛도 없어진다. 이런 때는 온갖 기억을 떠 올려 뜻과 맛을 만들려고 하기도 하지만 아무 것도 만들 수 없다. 오히려 몸이 갈라지는 두려움만 가득 밀려온다. 이재훈 시인은 이러한 두려움을 더욱 늘려 키운다. 그는 아르토의 잔혹극처럼 누르고 가로막는 것들을 떼어내어 뿔리 깊은 힘이 솟구치도록 하기 위해 애쓴다.

아무도 날 바라보지 않는다. 칼을 꺼내 손목을 그었다. 나는 칼을 의지하며 살았어요.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무도 날 바라보지 않았다. 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가슴을 그으며 지나갔다.

- <귀신과 도둑> 부분

어미의 젖 빠는 법을 배우지 말았어야 했다. 영원히 잠들어야 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존재만 사랑해야 했다. 그 이후로 아무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다.

- <귀신과 도둑> 부분

여기에는 몸을 찢어 가르고, 끙끙거리거나 울부짖는 소리만 가득하다. 이러한 꾸밈은 사람이란 이름에 갇힌 몸과 마음을 토막내고, 그 틈에서 흘러나오는 뿌리 깊은 힘의 움직임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다. 이처럼 몸이란 이름 아래 꼼짝 못하고 갇힌 힘, 이것을 시인은 귀신이라 부르고 있다. 아니 시인은 귀신이 되어 바동거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의 온갖 삶의 방식을 편안하게 즐길 수가 없다. 이재훈 시인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서 ‘역겨운 냄새’를 맡고 토악질을 하며, ‘쓰레기 냄새’를 맡으며, ‘시체 썩는 냄새’를 맡는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사람으로서 ‘어미 젖을 빠는 법’을 배운 것이나 ‘흔적’이 남는 존재에 대한 사랑이 거추장스럽다. 뿐만 아니라 지금 삶의 방식이 빚어낸 이름붙이기에 함께 뒤섞일 수가 없다. 시인에게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늘 세계를 굳고 단단하게 가두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름을 따라 겹겹이 쌓인 울타리를 하나 하나를 뚫고 나아가는 것을 운명으로 여긴다.

<고행>에서 시인이 사람들이 믿음으로 떠받치는 ‘사원’을 찾아 나서고, 사원에서 몇 개의 문을 지나가는 일도 이런 운명을 그대로 보여준다. 문을 지나는 것은 책장을 넘기듯 이름 없는, 바꾸어 말해 흔적을 남기지 않는 영원한 것을 찾으려는 몸짓이다. 그러나 목수의 문설주 짜는 일이나 이라가 날뛰는 일이나, 선남선녀의 결혼식은 모두 신림동 전철역 네거리의 서툰 화장을 하는 소녀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가 다 울타리를 만드는 일일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겹겹의 울타리를 지나고 ‘작은 샘’을 만난다. 샘물은 무언가 새로운 힘을 다시 얻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도 고행의 길 가운데 잠깐 땀을 닦는 일일 것이다. 이런 그의 몸짓이 어떤 모습인지 시인은 알고 있다.

꼬부라진 나의 변명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지팡이로 이곳저곳을 쳐댔다. 살기 위해 기적을 꿈꾸었다. 물결 위에 놓으면 뱀으로 변할 막대기. 하늘로 던지면 검은 매가 될 막대기. 더듬거리며 어둠 속을 걸었다. 환란 일을 기다리며, 깜깜한 타인의 얼굴을 매만지며, 검은 꽃의 향기를 들이켰다. 요긴한 건 한 줄기 빛인데, 내겐 지팡이뿐. 이제 서른다섯 살이 넘었다. 중년처럼 배가 불룩 나왔다. 어느새 또 다른 지팡이를 끼고 있다. 배만 꽉 찬 몸으로 더듬거려보지만, 날 권면하는 건, 어떤 증오. 신호등 앞에서 한 남자를 보았다. 모두들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는데, 그 남자만 빈들에 솟대처럼 서 있다.

- <지팡이> 부분

이재훈 시인은 자신의 몸짓을 성경 속에 나오는 순례자에 견주고 있다. 하나님을 찾아서 떠도는 순례자의 지팡이를 지녔다고 여긴다. “물결 위에 놓으면 뱀으로 변할 막대기”, “하늘로 던지면 검은 매가 될 막대기”를 꿈꾼다. 그것은 ‘기적’을 바라는 일이다. 그것은 ‘환란’이 일어나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환란이 일어나지 않는 캄캄한 시대에 스스로에게 순례를 권하고 격려하는 힘은 ‘증오’다. 여기서 증오를 일으키는 본디는 알 수 없지만 상처가 깊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너무 깊고 큰 상처를 벗어나기 위해 시인이 스스로 상처를 키우고 자신을 해체하여 자신에게 새겨진 상처를 지우려해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킬리만자로>는 이재훈 시인이 상처를 지우고 새로 세우고 싶은 ‘나’의 본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큰 호수를 만났을 때는

열망하던 일들이 모두 잠잠했다

위대한 숲의 시를 쓰고 싶었다

숲 속에 한 평짜리 오두막을 짓고

밤마다 호랑이의 배고픈 소리를 들으며

늘 지저귀고, 사분거리고, 비벼대는 숲을

노래하고 싶었다

그 싱그러움의 머리맡에서

토닥토닥 바람을 잠재우고

풀잎의 향기에 취해 혼절하고 싶었다

- <킬리만자로> 부분

위 구절로 보면 이재훈 시인은 ‘열망’의 몸부림에서 빚어진 상처들을 잠재우고 만물이 자연 그대로 서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태초의 세계를 꿈꾸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것은 누구나 꿈꾸지만 누구도 이룰 수 없어, 인류의 영원한 꿈일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을 찾아나서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이재훈 시인의 시는 새삼 본디의 꿈을 되살리는 주술이라 할만하다.

- <시와사상> 2007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

금동철




1. 가면, 그리고…

현대인들이 영위하는 대부분의 삶은 도시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도시적인 삶의 구조 가운데, 도시적인 사고방식으로, 도시적인 생활을 영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도시 속에서의 삶에 대한 본질적인 두려움을 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도시가 주는 편리함과 안락함, 풍요로움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절대로 놓지 않을 만큼 크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온전한 평안이나 안식을 얻기에는 불가능한 것임을 은연중에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스스로 인식하든 못하든, 생명의 근원인 자연 속에서 자연과 교감하면서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삶에 대한 갈망을 내면 깊숙한 곳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많은 시인들이 도시적인 삶의 방식이 지니는 비인간적이고 파괴적인 속성들을 노래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호에 실린 이재훈의 시들이 내포하고 있는 함의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특히 문제삼고 싶은 것이 바로 이러한 도시적 삶의 공간에 관한 시인의 시선이다. 도시라는 공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시인에게 다가오고 있는지를 시인은 보여준다. 도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느끼는 도시의 얼굴 앞에 시인은 사실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서 있다. 관계의 단편성이나 박제화된 인간관계, 끝없이 추락하는 삶들을 강요하는 도시의 모습 속에서 시인은 우울하게 떠도는 것이다. 이 시들에서 어둡고 암울한 정서가 지배하는 이유도 시인의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이러한 시인이 은연중에 드러내고자 하는 도시의 얼굴 중 하나는 가면이다.

술렁거리는 거리를 걸어간다
소음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땅
스모그가 밀려오고 사방에 경적이 울리면
떨어뜨린 성냥처럼 사람들로 뒤엉킨다
르네상스 쇼핑몰 사이키 조명 아래
댄서들이 아슬한 옷을 걸친 채 춤을 춘다
사람들은 모두 가면 하나씩 쓰고 걷는다
발바닥이 쿵쿵 울린다
지하 카바레로 들어가는 입구
모자 쓴 청년은 내게 노래방에 가자고 꼬인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오래전 이곳은 나무들이 울창했을 것이다
나무의 교훈으로 맨얼굴을 들이대도
부끄럽지 않은 숲
어둡고 고요한 밤, 나무들이 서로 몸 부비는
소리만 잠깐씩 들렸을 것이다
자정 녘 소음으로 숨이 막히는 시간
술에 취해 얼굴을 만져보니
이상한 가죽이 씌워져 있다
여기저기 나무들의 곡소리가 들려온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알고 보면 모두 선량한 사람들
따뜻한 방문을 열기 전 서둘러 가죽을 벗겨냈다
이곳은 新林이다
― <新林洞> 전문

가면은 자신과는 다른 모습이면서 또 다른 자신이기도 하다. 도시적인 삶이 가면을 요구하는 이유는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갖는 단편성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도시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는 언제나 필요한 일이나 요구에 얽매이게 되고, 그것은 그 사람 전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분적인 측면만을 요구하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정과 직업과 사회가 거의 일치하는 공간을 형성함으로써 전인격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관계 형성 방법인 것이다. 이러한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만남은 언제나 그 만남에 가장 합당한 부분적인 얼굴을 요구하는데, 그것이 곧 자아에게 가면을 쓸 것을 강요하는 이유가 된다.
시인이 “사람들은 모두 가면 하나씩 쓰고 있다”고 우울한 시선으로 말하는 장면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인 요구와 관련된다. 사람들은 가면에 대한 사회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신의 본질적인 자아와는 다른 가면을 쓸 수밖에 없는 바, 이 시가 보여주는 바가 바로 그러한 현대이들의 사람의 방식에 대한 서글픈 인식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시에서, 보다 진솔한 방식의 만남을 지향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밤의 술자리까지 가면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가면을 벗을 수 있는 공간이 시인에게는 “따뜻한 방문”을 여는 순간, 다시 말해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순간뿐인 것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도시 공간에서 경험하는 이러한 가면의 삶과 ‘신림’이라는 지명이 불러일으키는 ‘울창했을’ 나무숲과 대조시킨다. “소음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땅”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 소음의 땅과 선명하게 대조되는 것이 바로 “오래전 이곳”에 있었을 나무들의 숲이다. 시인이 그리는 오래전의 이 숲에는, 지금의 도시와 같은 “발바닥을 쿵쿵 울이는” 지하 캬바레의 소음이나 사방에서 들려오는 “숨막히는” 소음은 없었다. 단지 “어둡고 고요한 밤, 나무들이 서로 몸 부비는/소리만 잠깐씩 들렸을” 뿐인 조용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숲은 또한 “맨얼굴을 들이대도/부끄럽지 않는” 공간이기도 하다. 시인이 마지막 행에서 “이곳은 新林이다”고 노래하는 이유는 그런 면에서 의미를 지닌다. ‘신림’의 ‘新’이 의미하는 바가 결코 긍정적이지 않은 것이다. 과거의 고요하고 차분하면서도 존재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도 오히려 아름다울 수 있는 “오래전 이곳”이라는 공간과 “소음으로 숨이 막히는” 현대의 도시 공간 사이의 간극을 이 ‘新’이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가면을 강요하는 현대 도시적 삶의 속석은 사람들 사이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주말의 식사>는 일 주일 동안 그렇게 만나기를 기다리는 “낯익은 그대”와의 관계의 문제를 통해 사람들 사이의 사랑이 얼마나 박제화되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낯익은 그대”는 “브라운관 속 투명한 색조화장을 한 얼굴”, 다시 말해 화면 속의 얼굴이다. 이 얼굴과 창가에 놓인 “화분”의 꽃이 동일시되는 과정을 통해 자아가 사랑하는 “그대”의 실상이 드러난다.
창가의 화분에 놓인 꽃에 대한 시인의 수사는 자못 찬란하다. “감동스러운 꽃, 모든 수사에도 화려하게 어울리는 꽃, 볕 잘 드는 곳에서 햇살을 쬐고” 있는 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꽃은 자연 자체가 가진 야생의 생명력을 가지지 못하고, “저녁 연기가 꽃모가지에 걸리면” 그냥 툭 떨어지는 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어느새 다른 사연의 꽃이 꽃병에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자아에게 의미있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하룻밤에 불과한 존재, 그래서 언제든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꽃인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브라운관을 통해 만나는 “그대”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주말 저녁 식사를 하면서 잠시 쳐다보고 마는 존재. 삶의 자리 깊은 곳까지 내려와 뿌리 내리는 만남이 아니라, “정말 그럴듯하게, 주말드라마에서”만 만나는 존재일 뿐이다. 이런 박제화된 사랑이고 만남이기에, “꽃은 시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꽃은 당연히 시들어야 하고, 그래야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운관에서 만나는 “그대”라는 꽃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니라 박제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현대인이 써야 하는 가면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본래적인 자아를 그대로 드러낸 채 상대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브라운관이라는 매개를 통해 박제화된 상태로 만나는 인관관계, 도시라는 공간은 이러한 관계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전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순간적이고 부분적인 관계만으로 형성되는 관계는, 그래서 언제나 가면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2. 허무의 밑바닥

도시적 삶의 또 한 가지 특징으로 시인이 제시하는 것은 바로 삶의 허무이다. 자연의 살아있는 생명력을 지니고 존재의 본질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다면 부딪히지 않을 문제들을 도시적인 삶은 날마다 경험하게 만든다. 거기에는 존재의 본질까지 허물어뜨릴 파괴적인 힘들까지 존재한다.

바닥을 가지지 않은 삶도 있다
하늘 위의 독수리
그의 날개치는 소리를 듣고 싶다면, 그냥
가볍게 그곳으로 올라가면 된다
들쥐가 썩은 뼈에 이를 갈고 있을 때
올빼미의 울음은 더 우렁차고
밤 사이 구름이 움직이는 소리 들린다
그의 경험은 어디든 닿을 수 있다
솟구치지 못하고 바닥을 치는 마음이
비상을 꿈꿀 때
홀연히 찾아드는 어떤 소리
그러나
조용한 삶은 일찍 소멸한다
깔끔하고, 경건하게
굳어지기 전의 말랑한 영혼을
간직한 채
한 떨기 꽃대궁,
뿌리까지 잠방잠방 건너가는 물의 감촉,
그 종종거리는 발자국 소리
때론 뿌리 밑바닥까지 갔다가
제 몸 누일 자리 없어 뿌리를 빠져나와
땅 속으로 스미는 이주의 수런거림,
고통스럽다고 하지 마라
소리는 바닥이 없다
대신 소멸의 기록이 담긴
문장들이 네 몸에 새겨져 있다
- <소리무덤> 전문

도시의 삶은 끝없이 이주하는 삶이기도 하다. 어느 한 곳에 붙박이로 붙어 살면서 그곳을 고향으로 삼는 삶은 전근대적인 전통적 삶의 방식 중의 하나이지, 도시 공간에서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삶의 방식과는 멀다. 언제든지 직장을 따라, 집값의 추이에 따라, 생활 형편에 따라 옮겨앉아야 하는 삶이 바로 도시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끝없는 이주의 흔적들을 자신의 내면에 새겨나가는 삶, 그래서 “소멸의 기록이 담긴 무장들”을 몸에 새기고 다니는 삶이 바로 도시적인 삶인 것이다.
그런데 이 이주의 삶 중에서 시인은 “바닥을 가지지 않은” 삶을 그린다. 사람들은 언제나 비상을 꿈꾸지만 그것이 허무하게 꿈으로만 끝나고마는, 그래서 한없이 추락하는 삶들도 많이 있다. 이 시에 나타나는 바 “깔끔하고, 경건하게/굳어지기 전의 말랑한 영혼을 간직한” “한 떨기 꽃대궁”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특히 “깔끔하고 경건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영혼의 몰락은, 도시적 삶의 부정적 단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살아남기 위해 온갖 부정과 비리, 죄악들로 얼룩져 있는 도시적 삶 속에서, “깔끔하고 경건한 영혼”이 살아가기란 쉽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영혼에게 주어지는 현실의 삶의 “뿌리 밑바닥까지 갔다가/제 몸 누일 자리 없어 뿌리를 빠져나와/땅 속으로 스미는” 데까지 이른다. 그 삶을 시인은 소리 무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도시에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허무의 한 양상이다.
이러한 허무는 삶에서 가장 열정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일상의 기원>에서 시인은 삶 전체를 던지는 사랑마저 한 순간의 ‘잠’일 뿐이라는 인식을 드러낸다. 들장미가 흐드러진 동산에 누워 장미를 생각하는 소녀에게 장미는 가시가 되고 독이 된다. 그 독을 즐기기까지 하면서 미소를 만들어내는 소녀의 삶은 자신의 죽음까지도 거는 사랑의 한 방식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을 그저 ‘긴 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 과정을 거치는 시간 자체가 단지 “주름살 하나가 늘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적인 박제화된 삶이 가져다주는 삶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 삶이 지니고 있는 허무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일상’이라는 것의 본질이 어떠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허무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아에게 잠이 사라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수면장에>는 사랑도 희망도 잃어버린 삶의 자리에서 경험하는 고통의 순간을 보여준다. 시인은 오히려 잠을 “뱀처럼 차갑다”고 표현한다. 자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으나, 시인에게 잠은 차갑게 미끌어져 나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차가운 미끄러움 앞에 사랑도 희망도 가차없이 사라진다. “페가수으와 카시오페아” 사이의 사랑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먼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차가운 잠 앞에서는 “그리움”도 멎고 만다. 뿐만 아니라 “빈 들에서 돌베개를 찾다가/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다리를 찾다가” “여윈잠”이 들고마는 자아의 모습은 하늘을 찾고 싶은 시인의 희망마저 이 잠앞에 미끄러질 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도시는 무엇일까. 각 사람들마나 그것의 의미는 다르겠지만, 결코 긍정적인 것으로만 채워진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도시가 제공하는 편리함과 경제적인 풍요로움은, 역으로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려야 할 많은 것들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시인의 표현대로 언제나 가면을 써야 하고, 숨막히는 소음에 시달려야 하며, 밑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삶을 경험하기도 하고, 잠도 잘 자지 못해 방황하기도 해야 하는 허무한 삶도 있는 것이다.
도시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시인에게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의미가 있는 이유는, 도시가 가진 본질적인 특징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수준으로 우리 인간들의 일상적인 삶을 내리누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시에 살면서도 자연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생명력이 충일한 삶, “맨얼굴”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자리를 꿈꾸는 시인의 꿈이 우리 시대에 의미있는 것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_ <시인시각>, 2006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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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잦아들고
온 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을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 이재훈, <남자의 일생>, 시사사 2008.1.2월호

어려운 시들만 감상하지 말고 쉬운 시들도 감상해보자. 쉬운 시이면서도 좋은 시가 얼마나 많은가. 이재훈은 "남자의 일생"을 타자인 풀잎의 몸에서 떨어진 애벌레의 생으로 은유했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데/ 온 생을 바쳤다."라는 진술처럼 인생은 '그늘'이라는 유토피아를 찾아 뱃가죽이 뜯어지고 온 몸이 딱딱해지는 고투이다. 고진감래 끝에 脫却을 이룬 나비가(정신 혹은 영혼)가 날아가니 어머니이자 타자인 "풀잎이 몸을 연다"로 마쳤는데 이야기구조가 좋다.

_ 김백겸, <정신과표현>, 2008년 3-4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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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혜정

부분과 파편과의 결함 외엔 아무 것도 아닌 물화된 관계는, 에로틱하다기보다는 포르노그래픽하다. 일찍이 우리 시단에서 이 물화된 관계의 불구성에 대한 시적 담론을 가장 의미있게 생산한 시인은 단연코 채호기이다. 사랑과 생식이 가능한 성이 아니라, 에리히 프롬이 ‘소도(sodomy)’라 언급한 불구적 성이 그의 시에는 가로놓여 있다. 영혼과 정신, 육체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찢겨진 채 달리고 있으며, 번성하는 자본주의는 무한히 소비될 수 있는 쾌락의 파편을 생산한다. 인위적으로 성적 상상을 자극하는 광고, 영화, 사진 등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시스템은 거의 방류의 수준으로 성의 기표들을 쏟아놓는다. ‘충동’의 문법을 따라 현대인은 철저히 물질을 좇아간다. 갈증과 매혹이라는 에로틱한 유인력은 잔혹하게 파괴되고, 오로지 감각의 교환에 다름 아닌 음란에 우리는 길들여져 있다. 이러한 시대의 무의식을 재현하는 젊은 시인들의 스타일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기로 하자.

너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이미 네 기억은 삭제되었구나
푸른 물에서
살점들이 떨어져 내리고 빛나는 은빛
강철이 널 휘감을 때
나는 붉은 주단이 깔려 있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지

기억하지
거리에서 넌 바퀴에 깔려있었지
창자가 사람들의 발 밑에 널브러지고
너의 남은 뼈에서 벌레가 기어나왔지
흰 가운입은 자들에게 둘러싸여
앰뷸런스에 넌 실려가고
조간신문에 네 얼굴은 관념적으로
인쇄되어 나왔지
수술실로 향하는 침대 바퀴소리를
들으며 넌 깊은 잠을 잤지

붉은 주단이 깔려있는 낭하를 지날 때
방문엔 은빛 케이블이 탯줄처럼
흘러나와 있었지
방 안에선 딸각 딸각
숨 쉬는 소리가 들렸지

너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이미 네 몸은 차가워졌구나
사람들은 너의 피로 물든
붉은 주단의 여관을
딸각 딸각
클릭하고 있었지

― 이재훈, <붉은 주단의 여관> 전문

위의 시는 ‘붉은 주단의 여관’으로 비유되는 성적 공간, 어쩌면 ‘은빛 케이블이 탯줄’처럼 늘어져 있는 인터넷 속의 가상공간에서 넘실거리는 것일지도 모를 쾌락을 노래하고 있다. 이미 죽어버리고 삭제되어버린 ‘너’는 이상한 성적 교살의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그녀는 단순히 차갑게 이미지로 응결된 쾌락의 이미작 아니다. “푸른 물에서/살점들이 떨어져 내리”는 풍경, “사람들의 발 밑에 널브러”진 ‘창자’, “너의 피로 물든/붉은 주단의 여관”을 통해 보면, 그녀는 ‘관념’ 저 너머에 저장되어 있는 욕망, 궁극적으로는 대중의 꿈으로 불려나온 잔혹의 기표이다. 이 불모화된 쾌락, 섹스와 죽음의 감각은 원초적인 상흔처럼 현대 예술 속에 흐릿하게 남겨져 있다.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는 심리분석용어가 말해주듯이, 난폭한 광기와 욕망의 이미지는 현대시에서 대단히 빈번하게 분출한다. 이러한 포르노그라피의 전략은 인식과 지시의 언어에 대한 광범위한 회의와 연관되어 있다. 즉 점점 더 증가하는 감각적인 언어, 명징한 의미로 분석되길 거부하는 시적 스타일은 극단적인 잔혹으로 돌변할 수 있는 충동과 감각을 좇아간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탈정치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잔혹해진 쾌락은 현대문화의 거울효과 혹은 일종의 마취증을 영사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정치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렇듯 비이성적인고 ‘장소 없는’ 욕망의 담화는, 실제로 현대문화의 풍경과도 상당히 흡사한 바가 있다. 하이힐과 미니스커트로 도시를 휘젓고 남성의 시야를 ‘공격’하는 마네킨같은 여자들처럼 그들의 시는 인공적이고 도시적이며 가학적이다. 마치 포르노그라피처럼 현대시 속에서도 육체는 다리, 얼굴, 배꼽 등으로 다자인되어 독자의 욕망을 공격한다. 더 나아가, 육체의 기관성을 금속성으로 바뀐다. 날카롭게 조각나고 분해된 기계성, 금속성의 이미지는 자아의 심리적 육체의 파편성을 ‘전시’한다. 인공적으로 복제된 육체, 부품으로 잘려나간 기관들, 광택질의 머리칼, 뻣뻣한 동작으로 움직이는 앤드로이드의 이미지들은 꿈의 스크린 속에서 끝없이, 조각과 부분으로 흩어져 방류된다. ‘딸깍딸깍’ 손가락이 선택하는 이미지처럼, 끝없이 옷을 바꿔 입듯, 기호적 소비를 요구하는(혹은 연출된) 육체는, 파트너의 미끄러짐, 즉 끝없이 환유를 따라가는 포르노그라피와 유사한 원리에 지배받는다. 극단적으로 분해된 기표들의 조합들은 현대인의 지적인 병증과 자의식의 파산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파편화는 끝없는 주체/세계의 틈을 벌림으로써 공포의 나락으로 바뀌기도 한다.
사회적 관계를 전복하고 사유의 형식을 공격하는 포르노그라피의 전략을 우리는, 하드코어적인 감각을 통해 현대인의 딱딱하고 차가운 심장의 공포를 노래하는 현대시 속에서 익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감각의 악귀’와도 같은 잔혹한 육체숭배는 현대시의 곳곳에서 출몰한다. 공적인 자아, 정체성을 무시하는 포르노그라피가 근대의 미학에 승리한 현대의 미학을 대변하듯, 인격적 전체성을 호명하는 사랑이 아니느 부분과 파편, 대체를 요구하는 페티시즘은 오늘날의 젊은 시인들의 감수성을 요약한다.

- 허혜정, <딩아돌하>, 2008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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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잦아들고
온 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으로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 이재훈, <남자의 일생> 전문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이다. 울고 웃고 부대끼는 삶. 언뜻 언뜻 비추는 따스한 햇살 같은 행복감이 삶의 순간을 채우고 있기는 하지만, 삶은 지난한 불행과 고통을 경유할 때만 생의 화려한 날개 짓을 허락한다. 언구렁청에 빠져 허우적이는 삶. 아스팔트 위를 기어가야 하는 삶. 생은 고통의 극한을 체험한 자에게만 혹은 생에의 의지가 꺾이지 않는 자에게만 삶을 비약시켜 한 차원 높은 세계로 이입시킨다. 살아남기. 기고 또 기어 뱃가죽이 다 헤지고 뜯어져도 생을 부여안고 살아남기. 애벌레에서 고치로의 변성. 고치 속에서 우화를 꿈꾸기. 화려한 날개 짓으로 공중으로 날아오르기.

이재훈의 「남자의 일생」은 나비의 우화과정을 시적 모티브로 하여 이 시대에 남자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지치고 고단한가를 우회적으로 묘파하고 있다. 아니 시인은 나비 알레고리 속에 생에의 과정 전체를 담아내고 있는데, 그것은 처절한 생존게임과 유사하다. 풀잎에서 아스팔트로 떨어지기. 안온한 세계에서 나락으로 추락하기. 떨어져 추락한다는 것은 한 세계(좋은 환경)에서 또 다른 세계(열악한 환경)로 던져지는 순간인데, 시인 이재훈은 추락하는 것들 속에는 항상 날개가 있다는 것을 예증하고 있다. 추락하는 것은 아름답다. 추락하는 것은 비상이다. 추락은 존재의 심연에 이르는 아름다운 영혼의 몸짓인데, 그것은 생살 뜯어가며 극한의 고통을 인내한 연후에 찾아지는 안식이다. 몸 편안히 쉴 안식처인 그늘을 찾아 평생을 기고 옮겨 다니다가 생은 의미를 찾고 안식을 찾는다. 이제 더 이상 언구렁청을 기어 다니지 않아도 된다. 고난과 시련을 견딘 후 비로소 꿈꾸는 우화. 고지가 바로 저기다. 몸의 변성과 견고한 의지. 고치 속에서 변태變態. 돋아나는 날개. 한 마리 화려한 나비가 하늘로 자유롭게 비상 중이다.

인간의 삶도 나비의 그것과 같지 않겠는가. 생이란 진창 속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는 연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기다리고 또 기다린 후 고통에 고통이 더해진 후 인내하고 또 인내한 후 생의 날개 짓은 더 높고 더 아름답고 더 숭고하지 않겠는가. 이재훈의 「남자의 일생」은 생에의 형식과 삶을 소중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의식을 치밀하게 내파시키고 있다. 밀랍으로 만든 이카로스의 허망한 날개 아니라, 추락하는 고통 속에서 견고한 생에의 의지로 키워낸 날개로 하늘 저 높이 날아오르고 있다.

-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8년 3-4월호에서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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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들의 서정성 변모를 중심으로


김지선


1. 서정성 논란과 서정의 변화 

2006년의 시단은 서정시 논란으로 뜨거웠다. 환유적, 환상적, 언어 분절의 심화 등의 키워드를 특징으로 하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다른 서정"으로 지칭하며 시의 지평을 넓힌 시로 지지하는 쪽과 이들의 시에 회의적 시선을 드리우며 전통을 잇는 서정시를 옹호하는 쪽의 열띤 논쟁이 오고 갔다. 서정시에 대한 논란은 서정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담론을 통해 우리의 시대성을 담아내는 장르로써 서정시의 지평과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현재 우리 시가 배태한 서정의 질에 대한 회의가 담긴 문제이다.
"다른 서정"에 쏟아지는 부정의 시선은 무엇보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의식이 없으며, 놀이, 유희에만 경주하는 기법의 시라는 점에 집중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 시는 중심부재의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자기 정체를 회의하고 고민하는 시대성을 담지한 시로서의 의의를 지닌다는 평가 또한 받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상당부분 시에 접근하는 독법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새로운 서정"의 가능성에 대한 성급한 판단에 앞서 우리의 시단은 시의 독법간의 단절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반시적이며 혁신적 언어의 사용과 기법이 이들 시의 성취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들 시의 일부는 팽팽한 시적 긴장감을 찾을 수 없으며 도식성과 반복성에서 오는 지루함이 상투성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서정과 반서정의 대립이야말로 문학사에서 되풀이 되어온 쟁점이다. 이러한 시의 반성과 전망의 모색을 통해 문학사는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논쟁은 서정과 반서정의 논란이라기보다는 서정의 확장이라는 변화의 지점에서 나타나는 충돌의 양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논란이 재래적 서정성의 재구축을 위한 노력으로 환원된다면 이는 다원화된 시의 양상을 획일화하고 단순화시킬 위험을 안게 될 것이다. 새로운 시의 화법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논의가 전통 서정시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촉발되어서는 안 된다. 시가 시다움을 잃어버리지 않을까라는 우려의 목소리에 서정의 질에 대한 고민이 실려야지 기존 시에 대한 권위와 고집이 담겨서는 위험하다.
장르는 무소불위의 권위나 고정불변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는 굳건한 실체가 아니다. 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사회와 역사의 장에 부딪히며 각개전투를 해 나가는 사이에 마모되고 잘려나가며 새롭게 형성해나가는 과정의 산물인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고정불변의 정체성이야말로 서정시가 지닌 고질적인 병폐가 될 것이며 관습적 틀에 안주하려는 안일함이 될 것이다. 이들의 논의가 재래적 서정으로의 후퇴라는 퇴보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는 작품 하나 하나에 대한 질의 반성과 더불어 현대적 삶과 조우하여 빚어내는 시적 주체의 다각적인 삶의 양상과 반응, 그에 따른 시적 변화를 감지하고 살펴보려는 노력이 불가결하다.


  2. 풍경, 주체, 시선의 변화

풍경은 오래도록 서정의 원천이었다. 시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자아소멸의 시점에서 시작되어 세계와의 균열된 틈이 없는 조화와 화합의 계기가 되거나, 인간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해석된 자연이었다. 박라연의 시에 자연은 적극적으로 해석된 자연으로 나타난다.
 
매 순간 태어나고 죽는
뗏장 묻을 시간도 문상의 시간도 없는
지상에서 가장 단명한 목숨인
물, 속에 어룽대는
얼굴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며
어이! 이 사람아!
오래 사는
몸값으로 죄조차 짓지 않는다면
어찌 산목숨이겠는가?

내 몸 위에서 반짝이는 저 햇살들은
대쪽같이 살겠다며 저를 분질러버린 이들이
세상 그리워
눈부시게 다시 한번 왔다
가는
혼불이라네
아무렴!
―박라연, [영산호湖 생각], [우주 돌아가셨다], 랜덤하우스 중앙)

위 시의 발원지는 인간과 자연의 전도된 시선이다. 완전무결한 우주적 존재가 사유하는 인간은 찰나라는 순간을 통해 영원으로 회귀하지 못하는 연민의 대상이다. 우리는 이 무한한 너그러움 속에서 위안을 받을 뿐 아니라 불완전함마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겉으로 완전무결해 보이는 이 시선은 인간적 해석에 의해 가능할 뿐이다. 이 거시적 시선이 우리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이분법적 대립이라는 몇 가지 고정된 전제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인간은 하잘 것 없는 존재이며 대자연은 영원하고 완전무결하다. 찰라라는 짧은 순간과 영원은 같은 차원으로 통하는 시간의 겹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주적 차원의 거시적 시선이 시적인 울림을 일으키기에 시적 사유의 주체인 시인의 담론이 너무 거대하고 관념적이다. 지나치게 초연한 자세는 미적 거리의 소멸을 일으키며 때로 미적 거리의 소멸은 미적 교감의 소멸로 나타나기도 한다.
김선우의 시 역시 풍경을 주된 시적 제재로 삼아 해석된 자연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의 풍경은 익숙한 듯하면서도 어쩐지 묘한 인상을 남긴다. 

하루가 저물어간다, 참 잘 곰삭은 저 저녁 풍경이 실은 천연스레 뒤를 보이고 앉아 볼일을 보는 크낙한 엉덩이라면 저물녘 저 태양이 문이라면
금빛 항문 ― 어슴푸레 열리는 새벽으로부터 한낮 지나 저물녘에 이른 우리의 하루가 뒤를 보이고 앉아 시름없이 일을 보는 크낙한 엉덩이의 한 오분 시원한 용변과 같다면
수성이랄지 목성은 그녀의 젖가슴쯤 명황성이랄지 천왕성은 쌔근거리는 정수리 문쯤이 될까
금빛 거웃 바람결에 흔들려 드문드문 하늘자리 젖는 저 풍경이 우리가 셈하지 못하는 어떤 하루의 한 오분 마지막 순간이라면
저물어간다, 허방지방 거미줄 치고 있는 목마른 나의 하루는 긴가 너무 짧은가 아득한 물병자리 옆얼굴이 슬몃 보였는데 뭉게구름 느릿느릿 금빛 항문을 닦아주며 흐르는데
―김선우, [어느날 석양이], [도화 아래 잠들다], 창비)

시는 완전히 인간적으로 해석된 자연임에도 낯선 인상을 준다. 그녀의 시를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보기에는 적극적 판단의 개입이 애매하며, 에로틱하게 보기에는 지나치게 질펀하다. 시인의 상상력으로 포착되는 석양무렵의 풍경은 여성의 몸이다. 여기까지는 다른 시들과 비교해 그다지 다를 게 없는 듯하지만 이때의 여성은 관습적으로 우주와 여성을 신성시하고 신비화하는 여타의 상상력과는 차별화된다. 석양 무렵 번지는 노을을 두고 몸이 배출하는 용변을 떠올리는 시인의 연상도 범상치 않지만 그보다는 배출의 순간을 '저 풍경이 우리가 셈하지 못하는 어떤 하루의 한 오분 마지막 순간이라면'이라는 시구로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몸과 세계를 동시에 긍정하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이 긍정은 딱 오분이라는 시간으로 제한된다. 뒤를 이어 흐르는 정서는 모호하고 허무하게 흔들림으로써 세계를 주체가 판단할 수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 연기한다. 여기서의 풍경은 완전하게 의인화되어 인간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대상도 아니며 주체와의 거리를 소멸시키고 대타자에 이입되는 존재로써의 자연도 아니다. 김선우의 시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은 풍경에 닿을 수  없는 일정한 거리를 견지한다. 이 거리야말로 그녀의 시를 투명하게 의미화할 수 없는 해석의 모호한 지점으로 데려가지만 동시에 그녀 시의 매혹적인 면모로 작용한다.  
문태준의 시는 정감있는 문체와 수려한 언어로 뛰어난 미학적 성취를 이루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가재미][맨발]과 같은 구조적으로 안정적이며 미학적으로 매끄러운 휴머니즘의 시편들보다는 풍경과 주체가 만나는 애매한 거리의 지점을 형상화한 시가 더 좋다.  

배꽃이거나 석류꽃이 내려오는 길이 따로 있어
오디가 익듯 마을에 천천히 여럿 빛깔이 내려오는 길이 있어서
가난한 집의 밥 짓는 연기가 벌판까지 나가보기도 하는 그런 길이 분명코 있어서
그 길이 이 세상 어디에 어떻게 나 있나 쓸쓸함이 생기기도 하여서
그때 걸어가본 논두렁길이나 소소한 산길에서 봄 여름 다 가고
아, 서리가 올 때쯤이면 알게 될는지
독사에 물린 것처럼 굳어진 길의 몸을
―문태준, [길],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여타의 서정시에서 동일성이 가능해지는 것은 대상과 일체가 된 시적 자아가 풍경의 안을 사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시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은 정직한 거리를 확보한다. 시적 주체는 풍경의 바깥에서 균열이나 틈을 바라본다. 풍경은 바깥의 타자로써 존재하지만 동경의 대상이나 닮고 싶은 존재는 아니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전원을 그려내는 듯 싶던 시는 후반부 문득'독사에 물린 것처럼 굳어진 길의 몸'이라는 뜻하지 않은 세계의 낯선 풍경으로 귀결된다.

장대비 속을/멧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彈丸처럼 빠르다/너무 빠른 것은 슬프다/갈 곳이 멀리/마음이 멀리에 있기 때문이다/…/저 全速力의 힘/그리움의 힘으로/멧새는 어디에 가 닿을까/집으로?/오동잎같이 넓고 고요한 집으로/中心으로?/아, /다시 생각해도/나는/너무 먼/바깥까지 왔다
―문태준, [바깥],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바깥]의 시적 주체는 바깥을 서성이는 존재다. 세계의 중심, 세계의 근원을 알 수 없는 바깥의 존재로서 그리움의 실체에 가닿기는 요원해 보인다.
전통을 잇는 서정시의 문제는 해석된 자연을 묘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해석이 상투적이고 관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데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위 시들은 전통을 잇는 서정시 장르의 관습적 장점을 고스란히 취하면서도 달라진 세계 인식의 어느 지점을 사유하게 한다. 특히 중심을 향한 의지와 동일성의 희구가 자동화된 인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중심을 향한 갈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사유할 수 없는 주체의 위치를 직시하기 때문이라는 게 적절할 것이다. 시를 정서의 투사로만 바라보는 시는 낭만성의 과잉으로 흘러가기 쉽고, 서정적 주체와 현실 간의 갈등이 우주적 차원의 포월을 통해 비현실적으로 해소되고 있는 시의 구조는 후기현대의 다차원적이고 복잡다단한 실을 비추기에는 너무 소박하다. 김선우와 문태준의 위의 시들은 주체 중심의 권력적 시선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대성을 성취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내면의 풍경, 타자성을 복기하는 서정적 주체

서정의 변화는 20~30대의 젊은 시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들의 시에는 비동일성의 원리와 반서정의 원리가 적극적으로 시에 내재되고 있다. 그러나 김경주, 박상수, 이재훈, 박진성, 안현미 등의 시인들을'다른 서정'계열의 시를 쓰는 시인으로만 범주화하기 모호한 점이 있으며 동시에 전통적 서정 계열의 시를 쓰는 시인으로 구분하기도 힘들다. 사실 이들 시인들을 굳이 하나의 계열로 범주화할 필요는 없다. 반서정과 서정의 원리가 얼마만큼 적절하게 녹아들어 시적 미학으로 승화되고 있는가하는 미적 성취의 문제가 보다 중요하다.  
젊은 시인들의 서정이 이전의 서정과 달라지는 확연한 지점은 우리 사회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시의 모티프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무엇보다 단일 주체에서 벗어나 복합 주체로서의 자아를 인식한다는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시적 자아의 내면 속에서 주체가 인식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타자성)을 끄집어낸다. 이재훈의 시에서 주체가 환기하려는 것은 세계와 불화하기 이전의 순수한 시적 언어이다.

…말은 내게 뱃속을 열어 보여준다
건강한 줄기를 먹고 자란 말
빨갛게 화장(化粧)한 말의 뱃속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뱃속에 질서 있게 자리잡은 내장의 곡선에
손가락을 갖다대본다
아프다, 말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뱃속에서 말의 새끼들이 뛰어나온다

…말이 쏟아져내린다 초원에 내려 거칠게 달려나간다 내가 지겹게 머무는 도시의 거리까지 와서 내 머릿속을 후드득후드득 내달린다

…믿음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내가 검은 말을 타고 요정의 검을 차고
맥베스처럼 "눈앞의 이것이 나인가" 되뇌이며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 이재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부분

이재훈의 시는 존재의 시원에 대한 물음과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그에게 풍경은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복원된 시원의 풍경이며 내면 깊숙이에 가라앉아 있는 선험적 기억의 흔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시적 언어에 대한 믿음이며 완전무결한 태초의 언어를 복기해내고자 하는 시인의 욕망의 발화이다. 낭만적이며 비현실적인 풍경은 동시에 시적 언어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말의 중의적인 의미는 시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근간이면서 동시에 시 인식을 파악하는 중요한 실마리로 작용한다. 맥박이 요동치는 야생의 말이 지닌 생기가 고스란히 말(언어)의 메타포가 되어 말은 생명력을 부여받게 된다. 말은 순수한 약동의 에너지가 되어 시적 자아에게서 도시적 삶을 베어버리고 오롯이 태초의 말이 뛰노는 세계로 시적 자아를 데려간다. 시적 언어는 현실을 재현하려 하지 않는 투명한 질료로서의 언어로 짐작된다. 현실의 언어는 분절의 틈을 지닌 불완전한 기호이다. 실용성을 목적으로 한 현실의 언어는 우리 사회의 원리만큼이나 자본화되고, 경제적 가치로 운영되는 것이기에 존재의 동질성을 재현할 수 없으며 타자와의 완전한 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시인이 꿈꾸는 언어는 이와는 다른 언어, 꿈을 생성하는 언어,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언어, 펄펄 살아 날뛰는 태초의 생명력을 지닌 언어이다. 그러나 이재훈의 시는 시의 인식을 언어 실험을 통해 형식화하기보다는 낭만적이며 목가적인 서정으로 그려내는 데에 경주한다.       
김경주의 시 역시 형식은 전통적 서정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가 구사하는 시적 언어의 의미는 앞의 이재훈의 시만큼 투명하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서정성을 획득하는 것은 비전 없는 세계에 대한 체념과 허무의 정서가 낭만적 정조를 자아내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시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귀기 어린 묘한 매혹이 있어 이를 낭만이라는 추상으로 획일화하고 끝내기 어려운 지점에 가 닿는다.'나를 조금씩 인용하고 있는 이 침묵은/바닥에 널브러진 말들의 독해처럼/나에게 있는 또 하나의 육체, 이미지인 것이다'는 그의 표현처럼 그의 시는 육체, 이미지라서 말로 해석할 수 없는 구체적 몸을 감각하게 한다.     

오늘 밤은 취한 말들만 생각하기로 한다
잠든 말들을 깨워서
추위를 이겨낼 수 있도록 술을 먹인다
구유를 당겨 물 안에 차가운 술을 부어준다
무시무시한 바람과 산맥이 있는 국경을 넘기 위해
나는 말의 잔등을 쓸어주며
시간의 체위(體位)를 바라본다
암환자들이 새벽에 병실을 빠져나와
수돗가에서 고개를 박은 채
엉덩이를 들고 물을 마시고 있듯
갈증은, 이미지 하나 육체로
무시무시하게 넘어오는 거다

말들이 거품을 뱉어내며 고원을 넘는다
눈 속에 빨간 김이 피어오른다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취한 말들이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이 말들의 고삐를 놓치면
전속력으로 취해버릴 것을 알기에
나는 잠시 설원 위에 나의 말을 눕힌다
말들의 뱃살에 머리를 베고
(우리는 몇 가지 호흡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둥둥둥 북을 울리듯 고동치는 말의 염통!
말의 배 안에서 또 다른 개인들이 숨쉬는 소리
들려오는 것이다
밤하늘, 동굴의 내벽에서 들려오는 바람의 연령
나를 조금씩 인용하고 있는 이 침묵은
바닥에 널브러진 말들의 독해처럼
나에게 있는 또 하나의 육체, 이미지인 것이다
나는 말의 등에서 몇 개의 짐들을 떼어내준다

말들이 다시 눈 덮인 고비 사막을 넘기 시작한다
그중엔 터벅터벅 내가 아는 말들도 있고
터벅터벅 내가 모르는 말들도 있다
그렇지만 오늘 밤엔 취한 말들만 생각하기로 한다
음악 속으로 날아가는 태어날 때부터
바퀴가 없는 비행기랄지
본능으로 초행을 떠난 내감(內感) 같은 거, 말이
비틀거리고 쓰러져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분만을 시작하려는 것인지
의식을 향해 말은 제 깊은 성기를 꺼낸다
기미(機微)란 얼마나 육체의 슬픈 메아리던가

그 사랑은 인간에게 갇힌 세계였다
  ― 김경주,[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 이 말들을 타고 모든 음악의 출생지로 가볼 수는 없을까],([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램덤하우스중앙)
 
혹한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취한 말을 끄는 풍경은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라는 시집의 제목처럼 이 세상에는 없는 공간의 형상화이다. 시적 자아의 내면 깊숙이 묻혀있는 풍경은 몹시도 황량하고 스산하다. 그것은 이미 황폐한 정신의 내부지만 시적 주체의 집념은 강하다. 그에게 취한 말을 타고 달리는 시간은 순수의 결정체인 음악에 도달하는 수단이기에 깊고 무서운 집중의 순간이다. 여기서의 말을 말(馬)이지만 동시에 말(言)로 해석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끝없이 깊은 나락을 거침없이 미끌어져가는 시인의 언어는 삶의 어떤 비전도 꿈꾸지 않으며 여기에서 어떤 휴머니즘의 감정도 찾아보기 힘들다. 낯선 자신의 세계를 떠도는 유령처럼 그의 언어는 외로움을 견디며 아무도 닿은 적 없는 주체의 정신의 영역을 홀로 떠돌아다닐 뿐이다.   
 

4. 서정의 확장과 서정의 질

서정시는 고도의 산업사회인 후기 현대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우리의 복잡한 삶의 면모를 담아낼 수 있는 장르인가? 전근대적이며 현실과 괴리된 낡은 세계관의 복사는 아닌가? 서정의 원리를 주체와 대상간의 합일에 의한 동일성의 시학에 한정한다면 이러한 의문은 고스란히 서정시에 대한 회의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서정시는 이미 동일성의 원리로 환원할 수 없는 복잡하고 다성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서정의 원리인 동일성은 대상의 자아화와 일체감을 통해 세계를 소외시키지 않고 연속시킨다. 그러나 절대이성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시대에 서정적 주체의 불완전성을 사유하고 주체와 현실의 길항이 시적 동기로 나타나는 것은 이미 일반화된 서정의 원리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시에서 동일성의 구조를 나타내는 은유만큼이나 환유적 비유가 일반화된 것 또한 서정 장르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특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준오는 90년대의 여성주의시, 도시시, 일상시 등을 신서정으로 명명한다. 여성주의시는 비판적 시쓰기로서의 반서정주의 경향을 보이며 전통적 시 문법을 파괴하고 일상 회화체를 도입하여 탈중심화된 서정적 자아의 통제와 간섭없이 순간적 충동에 맡겨버리는 경향을 드러낸다. 또한 도시시는 도시라는 일상적 삶 속에서 새로운 서정을 찾았으며 일상시는 희극적 가벼움을 통해 90년대의 변모한 서정적 자아의 탄생을 알린다. 이들 시에서 서정적 자아가 과거와는 달리 탈중심화되는 징후(인격분열-자아분열)을 보이며 선, 악, 미, 추, 이성과 충동 등이 공존하는 인간성의 양면성에서 신서정을 발견하게 한다. 자학과 자기연민의 서정이 융합되어 있고 우리 시대의 문제성의 책임을 자신과 세계쪽에 공평하게 분할하는 모순된 서정을 찾아볼 수 있다. (김준오, [서정, 반(反)서정, 신서정],[현대시의 환유성과 메타성], 살림, 1997) 이들 서정은 반서정과 재래적 서정이 모호하게 겹쳐진 지점에서 사유된다. 비교적 쉽게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서정시 본래의 장점을 잃지 않으면서 낯설고 참신한 감각을 끌어들이고 있는 시들이 시적 성취를 얻고 있는 현상은 현재의 우리 시에서 서정의 확장이 얼마만큼 진행되고 있는가하는 사실을 목도하게 한다. 2000년대의 서정시는 90년대의 서정시의 연장선상에 있다.
따라서 문제는 서정과 반서정의 대립각의 심화가 아니라 시가 일반화, 보편화되며 양식화, 고착화되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자연과 주관적 내면의 동일화 구조가 많은 시인들에게서 자동화되고 있으며 반시의 기법과 세계인식마저 관습화되는 현상이야말로 시에의 교감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가? 계간지의 확대로 인해 매 계절마다 배출되는 시의 양이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개성적인 시를 찾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반면 세계 인식이나 감수성이 일반화를 넘어 상투화되어 가고 있는 시는 쉽게 눈에 띤다. 가령 생태시는 늘 자연을 모성이라는 가두리에 가두고 둥근 것, 조화로운 것, 삶의 이치와 깨달음을 주는 닮아가야 하는 존재로 그리고 있으며, 여성시는 남성의 권력과 횡포하에 희생당하는 여성의 아픔을 그려낸다. 선시가 가진 문제점도 인식의 단순화와 알레고리화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승호, 정일근, 차창룡 등의 시에 이르기까지 불교적 색채를 띤 시들은 대체로 피안/차안의 이분적 대립의 방식으로 세계를 나누고, 피안이라는 초월적 세계를 지향해왔다. 소박한 휴머니즘이 추구하는 따뜻한 인간애와 대자연의 부드러운 모성이 비인간화된 산업사회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은 시에서 하나의 교조주의로 굳어져 버린 것은 아닌가?  
서정의 확장은 현대시에서 이미 오래전에 진행된 현상이다. 시적 경향이 다른 시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와 고집스럽게 시의 전통적 원리만을 고집하기보다 타장르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포에시스의 확장과 변화를 적극적으로 이끌어가는 태도야말로 지금 이 자리의 서정시보다 나은 서정시를 배출해내는 데 필수불가결한 시인의 자세일 것이다.

_ [시인시각], 2007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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