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성의 경계와 세 가지 시향
- 윤임수․이재훈․장석원의 시


1.
‘서정시란 무엇인가’, 이것은 시의 본질에 관한 물음이다. ‘서정시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할 때의 ‘서정시’는 무수한 시편들, 즉 현상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서정시는 어떻게 서정시인가’라는 물음이 가능하다면, 본질로서의 서정시(전자)가 현상으로서의 서정시(후자)로 떠오르는 과정을 ‘서정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정성은 서정시의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이자 장(場)이다. 주체, 대상, 의식의 상호 주관성을 통해 서정성은 그 지평을 펼친다. 이 지평 안에서 새롭게 형성된 시적 주체가 주체를 지향할 때 서정성의 원리로서 주관성이 우세하게 작동한다. 같은 방식으로 대상을 지향할 때는 동일성이, 의식을 지향할 때는 본원 회귀라는 서정성의 원리가 지배적으로 작동한다. 이와 같은 연유로 서정성의 원리를 주관성, 동일성, 본원 회귀로 규정하는데 이것은 필자만의 논의는 아니다. 오랫동안 여러 논자들이 두루 논의한 바 있다.
서정성의 원리는 시간성을 통해서 구현된다. 서정시와 서정성이 다른 것처럼 시간과 시간성은 구별되어야함은 물론이다. 시간(본질로서의 시간)과 시간(기계-시간)을 이어주는 의식의 작용을 시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간성이 의식을 지향할 때, 본질적인 시간에 다가설 수 있다. 이 본질적인 시간은 ‘시원’이며 ‘본원’이 숨 쉬는 의식류이다. 시간성이 대상 쪽으로 작용할 때 현실에 가까운 사실적인 시간이 반영된다. 그리고 주체와 맞닿을 때 무시간성의 시간성과 조우할 수 있다. 이들 세 가지의 시향(時向)이 얽히며 교직하며 펼쳐지는 장이 다름 아닌 시적 현재이다.
이 글에서 다룰 세 권의 시집, 윤임수의 이 글에서 다룰 세 권의 시집, 윤임수의 <상처의 집>(실천문학사, 2005년 9월), 이재훈의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2005년 9월), 장석원의 <아나키스트>(문학과지성사, 2005년 11월)는 각각 다른 서정성의 원리가 특별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시편들을 담고 있다. 이와 함께 각기 다른 시향(時向)을 만나는 것은 이들 시편들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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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재훈의 이재훈의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2005년 9월)는 본원, 혹은 시원 회귀라는 서정성의 원리에 관한 ‘보고서’라고 할만 하다. 이 보고서가 작성된 곳은 빌딩 숲이 아니라 ‘공중정원’이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정원은 떠 있는 정원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 그 출렁이는 공중에 가라앉아 있는 정원일 가능성이 높다.

배꼽으로 차가운 톱날이 들어온다 슬금슬금 배를 가르고, 시커먼 내 장들을 걷어올린다 텅 빈 뱃속에 햇살이 들어와 가만히 눕는다 나는 환한 몸으로 세상 이곳저곳을 누빈다 오 따사로운 마음들 어느새 햇살이 누운 자리 꽃망울이 올라와 있다! 꽃은 피어나 온몸에 홀씨를 퍼뜨린다 즐겁게, 내 몸 구석 구석이 피어오른다 사람들이 하나 둘 내게 찾아와 꽃 한 송이씩 꺾어간다 계절이 바뀌고, 꽃들이 떨어진다 떨어진 꽃마저 누군가 주워간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내게 남은 꽃다지 공중으로 날아간다 나는 까맣게 타들어간다 잿빛 몸들이 부르는 거리의 합창 나는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한다
- 「공중 정원」 전문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라는 시에서도 노래하고 있듯이,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으로 걸어’가기 위해서는 ‘내 목을 자르’는 행위가 선행 되어야 한다. 현실은 ‘목줄’을 쥐고 있다. 현실과의 과감한 단절을 결행할 때, 비로소 우리는 시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곧 ‘“눈앞의 이것이 나인가” 되뇌이’는, 지금 여기의 나를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어머니라는 시원과 연결된 통로가 끊기고 세상에 던져진 흔적이 다름 아닌 배꼽이다. 그러므로 배꼽은 원죄의 증좌이자 잃어버린 낙원으로 통하는 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차가운 톱날’을 들이대는 것은 ‘내 목을 자르’는 일이며, 곧 시원으로 향하는 문을 여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렇게 열리는 시원의 세계인 ‘공중정원’은 현실의 세계, 현실의 시간과 무관하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굳이 현실의 시간을 끌어와서 하나의 씨가 꽃이 되고 그 꽃이 시들어 다시 홀씨가 되는 두 계절여의 시간을 상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시는 다만 하나의 자연 현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글에 불과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사태들은 시작에서 또 다른 시작에 걸쳐 있는 서사적인 흐름 위에서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배꼽으로 차가운 톱날이 들어오’는 순간으로 수렴될 때, 그 시적 현재의 지평은 ‘한생’으로까지 넓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시인은 ‘광화문 네거리. 한복판에 우뚝 선 이순신 장군 동상이 흠칫 움직인다. 칼자루를 놓고 싶다 후손들아!’(「햇살의 집」)라고 이순신 장군의 말을 전하고 있다. 언어들은 여전히 감옥이다. 다만 의미를 잡아들여 빗장을 거는 감옥이 아니라 인간들 스스로가 갇히는 감옥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의미의 칼을 쓰고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 칼을 벗고 감옥을 벗어나 이재훈 시인의 시편들을 따라 ‘최초의 말’들 사이를 가르며 ‘말’ 달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세상의 시간으로는 아주 ‘잠시’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잠시가 펼쳐지는 ‘시적 현재’는 만유가 일자로 드는 문인 영혼, 일자가 만유로 펼쳐가는 마음의 거처이기도 하다. 이 시적 현재에서 우리의 최초의 ‘고해성사’를 받아줄 ‘말의 사제(司祭)’로서 이재훈 시인의 활약을 기대한다.

_ 시와정신, 2006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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