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훈 신작시론
김유중
(문학평론가, 한국항공대학교 교수)
나는 포도나무의 가지이다. 나의 가지는 앙상하고 어려서 큰 열매를 많이 매달 수 없다. 다만 한가지 바람은 나 같은 가지에서도 아름다운 열매 하나쯤은 맺을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열매를 맺으면 새로운 가지가 나오고 열매가 없으면 나무에서 거세되기 마련이다. 고통의 연금술은 이 열매를 맺기 위한 담금질이다. 중세의 비술적 지식의 전파자들인 예술가들은 몇 개의 열매를 맺고 갔을까. … (하략) …
- [시인의 말] 중에서
1. 연금술사의 고뇌
이재훈의 시를 훑어보노라면, 이 시인이 지향하는 바가 현저하게 비합리주의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음을 알게 된다. 신비로운 몽환적 언술과 마술적인 이미지들로 가득찬 그의 시들은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겐 하나의 낯설음으로 다가온다. 그러한 낯설음에 대한 인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서양 고대와 중세에 걸쳐 전해내려오던 비교적 인식과 맥이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비교적 인식은 시인에게 끊임 없는 연금술사의 고뇌를 요구한다. 비교가 지향하는 바 비의적 진리 개념, 그노시스 Gnosis 는 결코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추론 과정에 의해 다가설 수 있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언어 속에 내재하는 비의적 힘을 찾아 정처 없이 떠나야 하는 고독한 수행의 길이 그의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성공에 대한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합리가 아닌, 이러한 비의적 힘만으로 진리 세계에 당도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만이 그의 시작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버팀목인 것이다.
너무도 목이 말라
목이 마르다는 걸 알게된 건
내가 광야의 시간을 견뎠기 때문일까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밭을 걷고 있었기 때문일까
뼈 밖에 남지 않은 악어가
모래밭을 걸아간다
나도 따라 걷는다
시간은 뼈까지도 헤인다
뼈가 투명해진다
어리석다, 어리석게도 물을 마셔야하는데
물을 찾아가는 악어의 골수를 마셨다
입 안에 썩은 내가 가득 고였다
말할 줄 모르는 벙어리가 되었다
- [마라의 오아시스] 부분
고뇌하는 자의 표정은 무겁다. 그가 바라는 것은 한편의 진정한 시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해야 거기에 다가갈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앞에 놓인 것이라곤 오로지 한없이 펼쳐진 “광야의 시간”이며,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밭”일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바라는 물, 즉 한 편의 진정한 시를 얻기 위해서는 어디든지 부지런히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막 한가운데를 떠돌며 헤매는 동안 갈증은 극에 달하고, 그 갈증을 이기지 못해 그는 무언가를 마시고 만다. 그러나 그것은 물이 아니라 “악어의 골수”였다. 그가 바란 것은 한 편의 진정한 시였지만, 정작 그에게 주어진 것은 악취가 진동하는 가짜 시였던 것이다. 입 안 가득 썩은 내가 고이면서 그는 결국 “말할 줄 모르는 벙어리”가 되고 만다. 이로써 연금술사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가고, 언어에 간직된 비의적 힘은 그의 앞에 더 이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2. 공중정원, 그 불가사의한 꿈을 쫓아서
비의적 힘을 향한 열망은 많은 경우 꿈 또는 환각의 세계를 찾도록 만든다. 이재훈의 시가 몽환적인 이미지와 비유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비로운 ‘공중정원’의 존재를 그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아주 먼 예전부터 그것은 기록으로만 전해 내려올 뿐, 아무도 실제로 그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보지도 못했고 볼 수도 없는 존재. 그것은 그에겐 영원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 불가사의한 존재로 다가온다.
배꼽으로 차가운 톱날이 들어온다. 슬금슬금 배를 가르고, 시커먼 내장들을 걷어올린다. 텅빈 뱃속에 햇살이 들어와 가만히 눕는다. 나는 환한 몸으로 세상 이곳 저곳을 누빈다. 오 따사로운 마음들. 어느새 햇살이 누운 자리. 꽃망울이 올라와 있다! 꽃은 피어나 온 몸에 홀씨를 퍼뜨린다. 즐겁게, 내 몸 구석구석이 피어오른다. 사람들이 하나 둘 내게 찾아와 꽃 한 송이씩 꺾어간다. 계절이 바뀌고, 꽃들이 떨어진다. 떨어진 꽃마저 누군가 주워간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내게 남은 꽃다지. 공중으로 날아간다. 나는 까맣게 타들어간다. 잿빛 몸들이 부르는 거리의 합창. 나는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한다.
- [공중정원] 전문
공중정원, 그것은 시인에게 영원히 풀 수 없을지도 모르는 난제이며, 동시에 일생을 걸고라도 기필코 풀지 않으면 안될 목표이다. 논리상으로는 도저히 접근 불가능한 미스테리의 세계가 거기에는 펼쳐져 있다. 순간적으로나마 그는 그 세계에 감각적으로 도달하였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 “텅빈 뱃속에 햇살이 들어와 가만히 눕는다. 나는 환한 몸으로 세상 이곳 저곳을 누빈다. 오 따사로운 마음들. 어느새 햇살이 누운 자리. 꽃망울이 올라와 있다! 꽃은 피어나 온 몸에 홀씨를 퍼뜨린다. 즐겁게, 내 몸 구석구석이 피어오른다.” 이 구절 속에서 우리는 시인이 도달한 환희의 극점을 엿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순간의 착각이었음이 드러난다. 순간의 환희가 지나고 나자 정원의 꽃들은 모두 어디론가 떨어져 날아가버리고, 그와 동시에 그는 까맣게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타들어간 잿빛 몸을 이끌고가는 그는 결국 남들처럼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는 이 시대의 많은 시인들 가운데 한 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아직까지 베일에 싸인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기에 공중정원은 우리를 매혹시킨다. 우리가 그것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내부에 불가능을 향한 도전 정신과 부재를 향한 열정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도전했지만 그들 앞에 놓인 것은 매양 까맣게 타들어간 ‘잿빛 몸’의 육체 뿐이다.
환각이란 결코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정녕 우리가 불가사의의 세계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현실의 바깥쪽에 놓여 있는 그노시스의 세계, 오직 환각과 몽상에 의지해서만 잠시 동안이나마 도달할 수 있는 그 비의적인 힘의 세계의 현존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버지가 기타를 연주하신 곳은 거대한 궁전이었다고 합니다 그 궁전의 돌계단이 너무 높았지요 다리가 아파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곤 노래 위를 떠다녔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했던 기억의 꽃잎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립니다 검은 말들이 기타의 현을 먹고 저렇게 아름답게 치장을 하다니, 참 감동스럽습니다.
- [기타가 있는 궁전] 부분
위 인용시의 배경이 되고 있는 ‘기타가 있는 궁전’이란 그러한 비의적 힘이 살아 숨쉬는 공간, 즉 그노시스의 처소라 할 수 있다. 그 곳에서 그는 비의적 힘의 존재를 확인하려 시도한다. 그의 부른 노래는 기타의 선율을 타기 전까지는 어두운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리는 ‘검은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타소리가 궁전 전체에 울려퍼지고 곧이어 따스한 햇살이 그 위에 내리비추자 그것은 곧 아름다운 노래로 변하게 된다. 그렇다면 기타를 연주한 아버지는 과연 누구인가. 아마도 그것은 절대자나 신적인 존재가 아닐까. 탁월한 기타 연주 솜씨로 나의 노래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존재, 그리하여 그것을 궁전 전체에 울려퍼지는 진정한 노래로 만들어준 존재란 이 경우 절대자적인 위치를 차지한 존재이지 않으면 안된다. 신의 기타 선율에 이끌려 그의 노래는 흘러나왔을 뿐이다. 노래를 부른 것은 그지만, 그것을 불러낸 것은 기타의 선율이라 할 것이다. 기타의 선율 속에서만 그의 노래는 노래, 즉 진정한 시일 수가 있다.
3. 그대는 기적을 믿어야만 하지
합리적인 인과 관계에 의해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을 일컬어 우리는 기적이라 부른다. 몽환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 그것은 아마도 기적을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기적을 믿는다는 것은 물론 터무니없는 일이다. 현대는 기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시대이며, 때문에 기적 같은 것은 바래서도, 믿어서도 안되는 시대이다. 더 이상 연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의적인 진리에 도달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고 연금술과 금지된 지식인 그노시스의 비의적 힘을 신봉하는 이단의 무리는 있기 마련이다. 현대에 들어 이러한 이단의 무리는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게 살아 남아 이들 금지된 지식에 다가서기 위해 끊임없는 암중모색을 거듭하고 있는 일군의 무리들이 있으니, 이들이 바로 시인이다. 어리석게도 그들은 기적을 신봉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적에 대한 믿음조차 없다면 그들의 시란, 그리고 그에 앞서 펼쳐지는 시작 활동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오한이 들고 입술이 부르터서 뭄뚱이가 버거울 때였지. 꿈을 꾸었어. 갑자기 뒷덜미가 서늘해져 지나온 것들을 다시 보지 않으려 캄캄한 앞만 보았지. 저 앞의 세상엔 어떤 동물들이 살고 있을까. 한 발자국 내딛을 때, 내 몸에 사박사박 모래알 밟는 소리가 났어. 오 누군가가 내 몸을 질근질근 밟고 있었지.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아침마다 청량리에서 신촌으로 가는 131번 버스를 타지. 어쩌다 예쁜 여인이 옆에 앉으면 주문을 외지. 너는 내 아들을 잉태했다. 새벽에 술에 취해 방문을 열고 불을 켜면 섬칫 놀라. 내 바지에 피가 흘러내리고, 아침에 보았던 예쁜 여인이 아기를 안고 있어.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뒤를 돌아보면 내 목에 십자드라이버를 꽂고 있는 사람이 보여. 당신을 사랑해. 어지러워. 온 몸에 피가 타오르지. 독한 감기약을 먹고 아침이 되면 131번 버스를 타지.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내 몸이 가벼워져 바다 위를 걷는다면, 당신의 손이 내 몸에 닿을 때 흐르는 피가 멎는다면, 그걸 누구에게 고백해야 할까.
-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전문
그노스티즘(Gnostism)의 신자들은 인간을 갇힌 존재로 이해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영혼에 갇혀 있고, 육체에 갇혀 있으며, 시간 속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세계 속에 갇혀 있다. 이들은 인간이 그러한 영어의 상태로부터 풀려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 스스로가 그러한 장막들을 걷어내고 눈앞에 펼쳐진 이 세계에 그들이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믿었다. 세계는 추악하며 우리 인간을 고독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인간은 그 속에서 구원을 기대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인간이 살아 숨쉬는 이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가능성만이 존재한다. 세계 속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 그것은 바로 기적을 불러들여 스스로 체험하는 일이다.
시인은 거듭해서 “기적을 믿지 않지”라고 되뇌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위에 나오는 내용이 한결같이 기적을 바라는 서술들로 꾸며져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는 그가 만일 진짜 기적을 경험하게 되면 “그걸 누구에게 고백해야 할까”라고 스스로에게 묻기조차 한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그의 거듭된 독백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적을, 그것도 아주 강하게, 믿는다는 사실이다.
한 편의 진정한 시를 바라는 마음은 결국 기적을 바라는 마음과 동일하지 않을까. 기적이 인간으로는 이루어내기 어려운 신의 권능의 징표이듯이, 한 편의 완결된 시, 진정한 시란 것도 어디까지나 신적인 영역에 속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인줄 알면서도 그것에 도전하여야만 하는 것이 이 시대 시인의 운명이다. 그노시스란 과연 이 시대에 존재하는가.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것의 현존을 확인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것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꾸준히 한걸음한걸음 거기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나는 이제 이재훈을 향해 주문처럼 다음 말을 외우노니,
“앞으로도 그대는 영원히 기적을 믿어야만 하지.....”
- [시와생명], 200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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