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노시스를 향한 열망
- 이재훈 신작시론


김유중
(문학평론가, 한국항공대학교 교수)



나는 포도나무의 가지이다. 나의 가지는 앙상하고 어려서 큰 열매를 많이 매달 수 없다. 다만 한가지 바람은 나 같은 가지에서도 아름다운 열매 하나쯤은 맺을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열매를 맺으면 새로운 가지가 나오고 열매가 없으면 나무에서 거세되기 마련이다. 고통의 연금술은 이 열매를 맺기 위한 담금질이다. 중세의 비술적 지식의 전파자들인 예술가들은 몇 개의 열매를 맺고 갔을까. … (하략) …
- [시인의 말] 중에서


1. 연금술사의 고뇌

이재훈의 시를 훑어보노라면, 이 시인이 지향하는 바가 현저하게 비합리주의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음을 알게 된다. 신비로운 몽환적 언술과 마술적인 이미지들로 가득찬 그의 시들은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겐 하나의 낯설음으로 다가온다. 그러한 낯설음에 대한 인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서양 고대와 중세에 걸쳐 전해내려오던 비교적 인식과 맥이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비교적 인식은 시인에게 끊임 없는 연금술사의 고뇌를 요구한다. 비교가 지향하는 바 비의적 진리 개념, 그노시스 Gnosis 는 결코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추론 과정에 의해 다가설 수 있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언어 속에 내재하는 비의적 힘을 찾아 정처 없이 떠나야 하는 고독한 수행의 길이 그의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성공에 대한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합리가 아닌, 이러한 비의적 힘만으로 진리 세계에 당도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만이 그의 시작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버팀목인 것이다.

너무도 목이 말라
목이 마르다는 걸 알게된 건
내가 광야의 시간을 견뎠기 때문일까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밭을 걷고 있었기 때문일까
뼈 밖에 남지 않은 악어가
모래밭을 걸아간다
나도 따라 걷는다
시간은 뼈까지도 헤인다
뼈가 투명해진다
어리석다, 어리석게도 물을 마셔야하는데
물을 찾아가는 악어의 골수를 마셨다
입 안에 썩은 내가 가득 고였다
말할 줄 모르는 벙어리가 되었다

- [마라의 오아시스] 부분

고뇌하는 자의 표정은 무겁다. 그가 바라는 것은 한편의 진정한 시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해야 거기에 다가갈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앞에 놓인 것이라곤 오로지 한없이 펼쳐진 “광야의 시간”이며,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밭”일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바라는 물, 즉 한 편의 진정한 시를 얻기 위해서는 어디든지 부지런히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막 한가운데를 떠돌며 헤매는 동안 갈증은 극에 달하고, 그 갈증을 이기지 못해 그는 무언가를 마시고 만다. 그러나 그것은 물이 아니라 “악어의 골수”였다. 그가 바란 것은 한 편의 진정한 시였지만, 정작 그에게 주어진 것은 악취가 진동하는 가짜 시였던 것이다. 입 안 가득 썩은 내가 고이면서 그는 결국 “말할 줄 모르는 벙어리”가 되고 만다. 이로써 연금술사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가고, 언어에 간직된 비의적 힘은 그의 앞에 더 이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2. 공중정원, 그 불가사의한 꿈을 쫓아서

비의적 힘을 향한 열망은 많은 경우 꿈 또는 환각의 세계를 찾도록 만든다. 이재훈의 시가 몽환적인 이미지와 비유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비로운 ‘공중정원’의 존재를 그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아주 먼 예전부터 그것은 기록으로만 전해 내려올 뿐, 아무도 실제로 그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보지도 못했고 볼 수도 없는 존재. 그것은 그에겐 영원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 불가사의한 존재로 다가온다.

배꼽으로 차가운 톱날이 들어온다. 슬금슬금 배를 가르고, 시커먼 내장들을 걷어올린다. 텅빈 뱃속에 햇살이 들어와 가만히 눕는다. 나는 환한 몸으로 세상 이곳 저곳을 누빈다. 오 따사로운 마음들. 어느새 햇살이 누운 자리. 꽃망울이 올라와 있다! 꽃은 피어나 온 몸에 홀씨를 퍼뜨린다. 즐겁게, 내 몸 구석구석이 피어오른다. 사람들이 하나 둘 내게 찾아와 꽃 한 송이씩 꺾어간다. 계절이 바뀌고, 꽃들이 떨어진다. 떨어진 꽃마저 누군가 주워간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내게 남은 꽃다지. 공중으로 날아간다. 나는 까맣게 타들어간다. 잿빛 몸들이 부르는 거리의 합창. 나는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한다.

- [공중정원] 전문

공중정원, 그것은 시인에게 영원히 풀 수 없을지도 모르는 난제이며, 동시에 일생을 걸고라도 기필코 풀지 않으면 안될 목표이다. 논리상으로는 도저히 접근 불가능한 미스테리의 세계가 거기에는 펼쳐져 있다. 순간적으로나마 그는 그 세계에 감각적으로 도달하였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 “텅빈 뱃속에 햇살이 들어와 가만히 눕는다. 나는 환한 몸으로 세상 이곳 저곳을 누빈다. 오 따사로운 마음들. 어느새 햇살이 누운 자리. 꽃망울이 올라와 있다! 꽃은 피어나 온 몸에 홀씨를 퍼뜨린다. 즐겁게, 내 몸 구석구석이 피어오른다.” 이 구절 속에서 우리는 시인이 도달한 환희의 극점을 엿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순간의 착각이었음이 드러난다. 순간의 환희가 지나고 나자 정원의 꽃들은 모두 어디론가 떨어져 날아가버리고, 그와 동시에 그는 까맣게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타들어간 잿빛 몸을 이끌고가는 그는 결국 남들처럼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는 이 시대의 많은 시인들 가운데 한 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아직까지 베일에 싸인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기에 공중정원은 우리를 매혹시킨다. 우리가 그것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내부에 불가능을 향한 도전 정신과 부재를 향한 열정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도전했지만 그들 앞에 놓인 것은 매양 까맣게 타들어간 ‘잿빛 몸’의 육체 뿐이다.
환각이란 결코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정녕 우리가 불가사의의 세계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현실의 바깥쪽에 놓여 있는 그노시스의 세계, 오직 환각과 몽상에 의지해서만 잠시 동안이나마 도달할 수 있는 그 비의적인 힘의 세계의 현존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버지가 기타를 연주하신 곳은 거대한 궁전이었다고 합니다 그 궁전의 돌계단이 너무 높았지요 다리가 아파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곤 노래 위를 떠다녔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했던 기억의 꽃잎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립니다 검은 말들이 기타의 현을 먹고 저렇게 아름답게 치장을 하다니, 참 감동스럽습니다.

- [기타가 있는 궁전] 부분

위 인용시의 배경이 되고 있는 ‘기타가 있는 궁전’이란 그러한 비의적 힘이 살아 숨쉬는 공간, 즉 그노시스의 처소라 할 수 있다. 그 곳에서 그는 비의적 힘의 존재를 확인하려 시도한다. 그의 부른 노래는 기타의 선율을 타기 전까지는 어두운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리는 ‘검은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타소리가 궁전 전체에 울려퍼지고 곧이어 따스한 햇살이 그 위에 내리비추자 그것은 곧 아름다운 노래로 변하게 된다. 그렇다면 기타를 연주한 아버지는 과연 누구인가. 아마도 그것은 절대자나 신적인 존재가 아닐까. 탁월한 기타 연주 솜씨로 나의 노래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존재, 그리하여 그것을 궁전 전체에 울려퍼지는 진정한 노래로 만들어준 존재란 이 경우 절대자적인 위치를 차지한 존재이지 않으면 안된다. 신의 기타 선율에 이끌려 그의 노래는 흘러나왔을 뿐이다. 노래를 부른 것은 그지만, 그것을 불러낸 것은 기타의 선율이라 할 것이다. 기타의 선율 속에서만 그의 노래는 노래, 즉 진정한 시일 수가 있다.

3. 그대는 기적을 믿어야만 하지

합리적인 인과 관계에 의해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을 일컬어 우리는 기적이라 부른다. 몽환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 그것은 아마도 기적을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기적을 믿는다는 것은 물론 터무니없는 일이다. 현대는 기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시대이며, 때문에 기적 같은 것은 바래서도, 믿어서도 안되는 시대이다. 더 이상 연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의적인 진리에 도달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고 연금술과 금지된 지식인 그노시스의 비의적 힘을 신봉하는 이단의 무리는 있기 마련이다. 현대에 들어 이러한 이단의 무리는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게 살아 남아 이들 금지된 지식에 다가서기 위해 끊임없는 암중모색을 거듭하고 있는 일군의 무리들이 있으니, 이들이 바로 시인이다. 어리석게도 그들은 기적을 신봉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적에 대한 믿음조차 없다면 그들의 시란, 그리고 그에 앞서 펼쳐지는 시작 활동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오한이 들고 입술이 부르터서 뭄뚱이가 버거울 때였지. 꿈을 꾸었어. 갑자기 뒷덜미가 서늘해져 지나온 것들을 다시 보지 않으려 캄캄한 앞만 보았지. 저 앞의 세상엔 어떤 동물들이 살고 있을까. 한 발자국 내딛을 때, 내 몸에 사박사박 모래알 밟는 소리가 났어. 오 누군가가 내 몸을 질근질근 밟고 있었지.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아침마다 청량리에서 신촌으로 가는 131번 버스를 타지. 어쩌다 예쁜 여인이 옆에 앉으면 주문을 외지. 너는 내 아들을 잉태했다. 새벽에 술에 취해 방문을 열고 불을 켜면 섬칫 놀라. 내 바지에 피가 흘러내리고, 아침에 보았던 예쁜 여인이 아기를 안고 있어.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뒤를 돌아보면 내 목에 십자드라이버를 꽂고 있는 사람이 보여. 당신을 사랑해. 어지러워. 온 몸에 피가 타오르지. 독한 감기약을 먹고 아침이 되면 131번 버스를 타지.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내 몸이 가벼워져 바다 위를 걷는다면, 당신의 손이 내 몸에 닿을 때 흐르는 피가 멎는다면, 그걸 누구에게 고백해야 할까.

-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전문

그노스티즘(Gnostism)의 신자들은 인간을 갇힌 존재로 이해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영혼에 갇혀 있고, 육체에 갇혀 있으며, 시간 속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세계 속에 갇혀 있다. 이들은 인간이 그러한 영어의 상태로부터 풀려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 스스로가 그러한 장막들을 걷어내고 눈앞에 펼쳐진 이 세계에 그들이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믿었다. 세계는 추악하며 우리 인간을 고독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인간은 그 속에서 구원을 기대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인간이 살아 숨쉬는 이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가능성만이 존재한다. 세계 속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 그것은 바로 기적을 불러들여 스스로 체험하는 일이다.
시인은 거듭해서 “기적을 믿지 않지”라고 되뇌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위에 나오는 내용이 한결같이 기적을 바라는 서술들로 꾸며져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는 그가 만일 진짜 기적을 경험하게 되면 “그걸 누구에게 고백해야 할까”라고 스스로에게 묻기조차 한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그의 거듭된 독백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적을, 그것도 아주 강하게, 믿는다는 사실이다.
한 편의 진정한 시를 바라는 마음은 결국 기적을 바라는 마음과 동일하지 않을까. 기적이 인간으로는 이루어내기 어려운 신의 권능의 징표이듯이, 한 편의 완결된 시, 진정한 시란 것도 어디까지나 신적인 영역에 속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인줄 알면서도 그것에 도전하여야만 하는 것이 이 시대 시인의 운명이다. 그노시스란 과연 이 시대에 존재하는가.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것의 현존을 확인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것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꾸준히 한걸음한걸음 거기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나는 이제 이재훈을 향해 주문처럼 다음 말을 외우노니,
“앞으로도 그대는 영원히 기적을 믿어야만 하지.....”

- [시와생명], 2002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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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의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는 환상의 언어, 꿈의 언어, 무의식의 언어를 통해 자아의 의식 세계를 보여준다. 꿈을 매개로 현실의 리얼리티를 표현하는 것은 확실히 매혹적이다. 현실이 허구일 때 꿈(환상)이 실재일 수밖에 없는, 그래서 꿈과 현실의 경계선이 무의미해진 시인의 세계인식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 꿈의 화법일 것이다.
이재훈의 시는 꿈의 화법을 통해 계기성이나 인과성이 탈락된 삶, 곧 시간적 질서나 논리적 과학적 질서가 탈락된 삶을 노래한다. 그것은 ‘꿈’, ‘술’, ‘독한 감기약’을 통해 드러나는 바 그의 시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이런 질서에 대한 부정과 파괴이다. 가령 “예쁜 여인이 옆에 앉으면 주문을 외지. 너는 내 아들을 잉태했다. 새벽에 술에 취해 방문을 열고 불을 켜면 섬칫 놀라. … 아침에 보았던 예쁜 여인이 아기를 안고 있어”와 같은 언술은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주문을 왼다고 현실 속에서 실현되는 것은 아닐 것이며, 하루만에 아기를 출산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결국 꿈꾸기나 술먹기, 독한 감기약을 먹는 행위는 모두 본능적인 행위 혹은 의식이 탈락된 상태에서 파편화되고 불연속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것이 의식의 활동을 억제한다는 점에서 욕망과 무의식과 관련된다.
욕망은 언어적 질서, 상징적 질서를 부정한다. 상징적 질서란 아버지의 이름, 그러니까 현실 원칙을 의미한다. 모든 현실이 상징적 질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질서가 삶의 실체가 아니라 그야말로 상징, 곧 헛것에 지나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가 노리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상되는 상징적 질서와 그런 질서에 억압되는 무의식, 또는 욕망의 관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의식의 허위, 사고의 허위, 그러니까 현실원칙의 허위를 직시한 태도가 바탕이 된다. 꿈과 환상은 이재훈에게 있어 그러한 허위를 극복하기 위해 추구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수용된다. 그의 꿈 속의 세계를 들여다 보자.
이 시에서 꿈 속의 공간은 의식이 태어나기 이전의 전의식 혹은 무의식의 공간이다. 꿈 속의 세계는 이성적 사고에 의해서 분열되기 이전의 거대한 암흑과 같은 곳(“깜깜한 앞만 보았지”)이며,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발견하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의 내면 세계에 나타나는 자아는 극도로 불안한 형상을 하고 있다. 꿈 속에서 나타나는 그는 “누군가가 내 몸을 질근질근 밟고 있”고, 누군가 “목에 십자드라이버를 꽂”고 있으며, “바지에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형상으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이런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그가 지향하는 세계와 현실 세계의 불일치에서 오는 불안이다.
“너는 나의 아이를 잉태했다”라는 언술을 통해 볼 때, 그가 지향하는 세계는 ‘어머니’ ‘아이(나)’가 합일되어 있는 공간을 떠도는 일이다. 그것은 “내 바지에 피가 흐르고”라는 언술에서 알 수 있듯이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서 ‘아버지’가 개입되지 않은 공간, 즉 현실원칙을 표상하는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상상적 공간이다. 상실한 어머니를 되찾고 너와 나가 한몸이 되기를 꿈꾸는 것이 그가 지향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면서 억압된다.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대상에게 투사되어 충족되기를 꿈꾼다. 결국 현실의 자아는 끊임없이 상상적 질서를 꿈꾸는 자아이며, 죽어 있을 수밖에 없는 자아이다. 이 상황을 더욱 애절하게 보여주는 것이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라는 언술이다. 그가 말하는 기적이란 현실 원칙을 부정하는, 의식이 제거된, 그러니까 욕망과 무의식이 지배하는 삶이다. 때문에 그는 “당신의 손이 내 몸에 닿을 때 흐르는 내 피가 멎”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실적 자아와 내면적 자아든, 나와 어머니든, 나와 사랑하는 사람이든 아름다운 합일을 꿈꾸는 것. 이것이 그가 시를 쓰는 원천일 것이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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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회의 그물망 속에 포획된 죽음


오늘날 현대인의 의식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인간의 삶이 이미 단단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 한치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것은 마치 꼼꼼한 그물망처럼 우리의 삶은 철저히 감싸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그 사회가 만들어 놓은 법칙과 질서에 구속되어 있는 수동적 인간으로 변모되고 말았다. 특히 자본주의적 삶의 구조는 인간을 생산과 소비라는 이중 구조 속에 편입시켜 놓음으로써 경제적 문제로부터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비극적 인간형을 만들어 놓았다. 손택수의 [셀러리맨의 죽음], 이재훈의 [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는 이러한 현대인의 자화상을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극단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중략) 손택수가 [세일즈맨의 죽음]을 통해 현대인의 죽음을 매우 사실적이고 직접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면 이재훈은 [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를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성을 환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관을 열었다. 몸뚱이 없이 얼굴만 덩그마니 있었다. 눈을 감았다. 무서워서 누군가를 불렀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떴다. 네 얼굴, 선혈 뚝뚝 흐르는 네 얼굴이 있다. 나는 그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관을 닫았다. 음악이 흘렀다. 관 속의 얼굴이 노래를 불렀다. 나는 몸없는 그 얼굴을 사랑한다. 그리고 일상이라는 지능적인 시나리오에 빼앗긴 네 몸을, 경멸한다.

― [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 부분


우리는 일반적으로 삶이란 항상 현재 속에 있고 죽음은 먼 시간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죽음이란 이미 우리의 삶 속에 공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체의 자각이나 깨어있음을 전재하지 못할 때 그러한 사회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란 어쩌면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재훈의 시는 이처럼 일상에 매몰되어 살 수밖에 없는 세계의 허구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훈이 그리고 있는 죽음은 주로 죽은 자의 얼굴에 대한 묘사에 집중된다. 특히 그가 그리고 있는 얼굴의 모습은 몸과 분리된 얼굴이라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이때 그가 그리고 있는 죽음의 형상은 온전한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변형되고 왜곡된 죽음임을 암시적으로 드러내 준다. “선혈이 뚝뚝 흐르는 네 얼굴/관 속의 얼굴이 노래를 불렀다”와 같은 구절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살아 있는 존재인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즉 관 속에 누워있는 죽은 이의 모습은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자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죽어서까지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무서운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인간의 신체를 집요하게 대상화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비극적 현대인의 모습을 가장 상징적으로 대변해 주는 것이 인간의 신체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오늘의 인간이 더 이상 숭고한 대상이거나 정신적 영역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냉소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즉 “일상이라는 지능적인 시나리오에 빼앗긴 몸”이야말로 온전하고 자족적인 존재가 될 수 없는 현대인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손택수와 이재훈의 시에 나타난 죽음은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내 몰린 자가 극단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짓누르는 폭력적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 강경희, <소멸에 관한 철학적 명상>(리토피아, 2002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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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의 [일식]은 자아의 우주적 확대를 보여주고 있다. 이재훈은 최근의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세계로 나가기를 두려워하며 일상성에 매몰되어 있는 자아를 관찰하며 여기에서 일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특히 일상의 질서와 금기에 갇혀 있는 자아를 바라보며 어느 날 문득 불러본 세계의 모습을 다룬 [일식]([시로 여는 세상], 가을호)은 인상적이다.


태양이여,
나는 이 큰 우주를 목놓아 불러본 적 없다
용기도 없이 컴컴한 방에 앉아
내 미래를 셈하고 오늘의 피로를 불평하고
쓰레기 같은 영상들만 구경했다

어느 날 나는
태양이여, 불러보고 싶었다.
늘 곁불만 쬐며 속으로 옹알거리기만 하며
이 엄살의 통각(痛覺)을 갖게 되었다
태양이여, 부르는 순간
내 항문으로 뱀이 숯머리를 들이밀고 왔다
온몸이 뜨거워져서 태양에게 다가가도 뜨겁지 않았다
불타지도 않았다

뱀이 태양을 갉아먹을 때
아름답다
하나의 꿈틀거리는 숨이 우주를 갉아먹을 때
위대하다
네 소멸이 위대한 미학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어느새 뱀의 뱃속에 태양이 들어가 있다
고요 가운데 입을 열고 들어가
한몸이 된
뜨거운 잉태

나는 큰소리로 태양이여, 불렀다
뱃속에서 울리는 뜨거운 공명

모든 사위는 어둠이 되었다

― 이재훈, [일식] 전문


달과 생물, 인간, 인간사와의 관계는 민중들 속에 이미 뿌리 깊은 속신으로 존재하여 왔다. 예를 들어 집안의 여성들은 대보름에 개에게 밥을 주면 밝은 달의 정기를 빼앗아간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풍요로움의 기원이 개에게 먹혀 좌절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보름에는 굶겼던 것이다. 이렇듯 ‘달의 기를 먹어버리는 개’라는 의식은 우리 일상의 밑바닥에도 존재했다.
이재훈의 [일식]은 속신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자아의 세계에 대한 태도와 관련을 맺고 있다. 시적 화자는 자아가 “이 큰 우주를 목놓아 불러 보지 않고 어둠에 갇히는 유폐의 형식을 취할 때 자신과 우주와의 관계는 상실되고 생명이 결핍된다는 것을 말한다. 컴컴한 방, 미래의 셈, 오늘의 피로, 쓰레기 같은 영상 등의 세목들은 폐쇄적 공간으로 존재하는 자아의 형상이 취하는 모습이다(다만 이런 언어들은 좀더 시적인 언어로 정제될 필요가 있다). 이는 일상 속에 함몰된, 자아 스스로가 만든 ‘곁불’과 ‘엄살의 통각’의 벽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 벽이 호명을 통해 깨어진다고 말한다. 이 때 “태양이여”라는 세계의 부름은 생명력을 통해 몸을 영원으로 확장시켜 우주적 차원으로 이어주는 매개로 작용한다. 이 호명의 순간에 “항문으로 뱀이 숯머리를 들이밀고” 온다. 체내의 구멍인 항문에서 뱀이 나와 태양에게로 가서 태양을 갉아먹는다. 뜨거워진 몸 때문에 태양에게 다가가도 뜨겁지도, 불타지도 않는다. 숯머리의 뱀은 불이면서 물이다. 스스로 탈 뿐 아니라 불순한 불을 연소시키는 피 속의 불은 하나의 커다란 순수성이며 우리 속에 체류하면서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생생한 불이다. 꿈틀거리는 숨이요 불인 뱀이 태양을 갉아먹고, 우주를 갉아먹을 때, 세계를 그 속에 담는 커다란 우주알이 생성된다(“어느새 뱀의 뱃속에 태양이 들어가 있다”). 자아인 몸 생명의 유한성은 우주적인 것으로 확장된다. 몸 속에 도는 피(뱀)의 생명성은 우주로까지 확장되면서 몸은 대지와 육체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우주적인 공간을 한 몸으로 잉태하게 된다. 이 때 몸은 대지와 하늘을 연결시키는 소우주로서의 몸이라는 육체성을 보여준다. “태양이여” 부를 때 “뱃 속에서 울리는 뜨거운 공명”을 듣는 순간, 이미 항문은 영원의 상징으로서의 달을 담는 그릇(우주알)이다. 그러면서 세계가 하나의 몸이 되는 차원이다.
이재훈의 시는 자아인 몸이 “비밀스런 유적인 두려움”([때 이른 유적])에서 벗어나 호명을 통해 세계를 여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몸으로 담고 내 것으로 끌어들이는 모험과 창조행위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때 자아는 질서와 금기의 공간에서 벗어나 무한한 자유의 공간으로 비상하는 것이다.

― 현대시, 2002년 10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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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혹은 할퀴며 키스하기


이승훈
(시인, 한양대 교수)




젊은 시인 이재훈의 <햇살의 집>(정신과 표현, 11 12월호)을 문제 삼는 것은 그의 이름이 나하고 비슷해서가 아니다. 일부에선 친척일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린 친척이 아니다. 글쟁이들은 언어를 먹고 사는 자들이어서 그런지 말들이 많다. 그것도 문학 이야기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뒤에서 헐뜯는 말, 있지도 않은 스캔들 만들기. 그러나 이재훈은 이 시에서 스캔들을 만들지 않는다. 그가 만드는 것은 햇살에 대한 새로운, 산뜻한, 신인다운 감각이다. 시인은 우선 감각이 예민해야 한다. 둔한 감각으론 안 된다. 병적으로 예민한 감각도 문제지만 그래도 둔한 것들보다는 낫다. 너무 예민하면 지나가는 말 한 마디에도 상처를 받고, 가을 햇살에도 상처를 받는다. 상처를 이기는 방법, 상처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방법, 나를 지키는 방법, 그것은 술마시기이다. 얼마나 좋은가? 이 시에서는 햇살도 술을 마신다. 시의 앞부분은


햇살이 술을 마신다. 거리는 방금 목욕을 한 것처럼 뽀얗다. 나는 버스 속에 앉아 술에 취해 이글거리는 햇살을 본다. 한 소녀가 버스에 오르며 묻는다. 이 버스는 천국으로 가나요? 햇살이 일그러지고 사람들이 비틀거린다. 광화문 네거리. 한 복판에 우뚝 선 이순신 장군 동상이 흠씰 움직인다. 칼자루를 놓고 싶다 후손들아! 꽃잎이 비틀거리며 이글거리는 햇살 속으로 날아간다.


와 같다. 햇살이 술을 마시니 햇살은 얼마나 좋겠는가? 이재훈은 버스에 앉아 술에 취한 햇살을 본다. 햇살은 빛이고, 거울도 빛이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 거울을 바라보고, 거울은 술에 취한 빛으로 가득 찬다. 나르시시즘의 황홀. 또한 이 빛은 꽃잎이고, 그러므로 꽃잎도 취하고, 물론 이재훈도 취하고, 이 글을 쓰는 나도 취한다. 버스에 오르는 소녀가 “이 버스는 천국으로 가나요?”라고 묻는 것은 그 소녀도 취했기 때문이다. 취하지 않고 어떻게 환한 대낮에 소녀가 말도 안 되는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소녀가 술에 취한 게 이상하지만 소녀도 인간이다.
광화문 네거리의 이순신 장군이 “후손들아!”라고 소리치는 것도 우습지만 아마 그도 술에 취해(대상 동일시)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고, 한편 이 소리는 정신차리라는 소리인 것 같지만 취한 판에 그런 소리가 들릴 리 없다. 결국 이런 현란한 감각은, 빛의 황홀은 모든 대상이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대상과 나는 매혹의 관계에 있다는 것, 매혹의 변증법과 통한다. 물론 햇살은 집이 없다. 햇살은 빛이고, 빛은 거울이고, 거울이 술을 마신다. 거울을 통해 내가 존재함으로 나도 술을 마신다. 거울, 빛, 반영(reflection)은 반성이고 사유이고 통찰이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나는 다만 내가 빛들의 조각이고, 파편이고, 이 파편들의, 매혹의, 황홀한 테러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안다. 이론가(theorist)는 테러리스트(terrorist)인가? 역시 늙은 감각보다 젊은 감각이 좋다.

― 이승훈, <햇살 혹은 할퀴며 키스하기: 나는 무엇을 아는가?>, 문학사상, 200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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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중앙》 가을호에 실린 이재훈의 두 편의 시 <Big Bang>과 <또 다른 제국>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상상력의 독특한 구조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나는 그가 보여준 시적 상상력의 기본틀이 사물, 혹은 존재의 신성함과 함께 그 내부에 잠재된 무의식적인 인간의 욕망을 한데 아우르려는 태도로부터 출발한다고 진단한다.


    속옷서랍을 열면 쿠스코의 만돌린 소리가 들린다 내 살의 마른 상처에 수슬수슬, 성난 꽃씨를 심고, 포근한 면으로 살짝 덮어, 오 나는 세계를 떠돌며 찡한 소리를 듣네, 벌거벗은 글자 속에서 영상 속에서, 상상의 소리를 거름 주고, 만도린 소리 꽃씨를 움트게 하네, 아 움틈의 소리에 내 몸 비옥한 흙이 되고, 속옷들 사이로 발갛게 충혈된 숯머리 올라오네, 여보세요, 타락한 관념론자씨, 태어남의 고통이 죽고 싶은 쾌감이란 걸 아시네요, 언젠가는 멈춰질 만돌린 소리, 꽃들은 피어나면서 쾌락을 배워, 반드르르 몸에 하나씩 불을 켜고, 아야 속옷들이 뒤엉키네, 언젠가는 죽을 몸부림, 나는 후후 꽃들의 불을 끄네, 생짜로 발기된 내 生저기 숙져가는 꽃들이 속옷 속에서 녹아간다 또 다른 생을 찾아가는 만돌린 소리 기적처럼 울리고, 속옷서랍을 닫는다, 또 열어보고픈, 내 서랍
    - <또 다른 제국> 전문


프로이드가 지적했듯이 무의식이란 의식의 햇빛이 도달하지 않는 지역에 존재하는 알려지지 않은 광활한 원시의 대륙이다. 시인은 무의식의 험로를 따라 이 원시의 대륙을 탐사한다. 원시의 대륙, 그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위한 시인의 몸가짐은 애초 무척이나 섬세하며 경건하다. 그는 마치 ‘속옷 서랍’을 열 듯 조심조심 그리로 향한다. 그 세계의 초입에서 그가 만난 것은 유별나게도 만돌린 소리인데, 그 소리는 고대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여기서 잊혀진 제국, 잉카의 이미지는 무의식의 잠재성과 연결된다. 잠재된 무의식 속에서, 그는 만돌린이 들려주는 천상의 선율을 경험한다. 무의식적 욕망과 신성함이 서로 반향하며 어우러지고, 그것은 다시 존재의 밑거름이 되어 우리의 삶을 더욱 살찌우고 윤택하게 만든다. 이때 무의식은 상상 속에서 천상적인 것과 합치된다. 마른 상처에 심었던 ‘꽃씨’는, 그리하여, 만돌린이 내는 상상의 소리로 인해 움트게 되는 것이다. 관념만으로, 이성만으로는 이러한 세계를 음미하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관념론자는 절대로 ‘태어남의 고통’이 ‘죽고 싶은 쾌감’과 통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천상의 선율을 들려주었던 그의 만돌린 소리도 언젠가는 멈출 것이다. 시인은 신성함이 다한 세계에서는 무의식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숙져가는 꽃들이 속옷 속에 녹아가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속옷 서랍을 닫고 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상상력의 작용도 마감될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언제고 그는 다시 자신의 서럽을 열어보려 할 테니까. “또 열어보고픈, 내 서랍”―그는 그의 상상력의 원천인 이 서럽을 다시 찾을 것이고, 다시 그 속에서 헤맬 것이고, 그러다가 지치면 서랍 닫기를 반복할 것이다. 나는 그러한 반복 속에 그의 삶과 시가 더욱 윤택해지고 성숙해져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텍스트를 읽어내려가면서 나는 문득 리쾨르(P. Ricouer)의 상징론을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리쾨르에 따르면 상징이란 인간이 더 이상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체가 그 주위를 둘러싼 유형, 무형의 제약을 비켜나가면서 우회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신성함과 욕망이 바로 그 전형적인 예에 해당할 것이다. 신성성, 거룩한 존재가 논리적인 설명 방식으로 증명될 리 없으며, 무의식의 원초적 욕망 역시 이성적인 사유에 의해 파악될 까닭이 없다. 이 지점에서 리쾨르는 시야말로 인간 존재를 위와 아래로부터 억누르고 있는 이러한 신성함과 무의식적 욕망을 무리 없이 종합할 수 있는 참된 원리임을 지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새로운 기존의 논리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논리이자, 동시에 논리를 넘어선 논리이다. 시인은 그 속에서 새로운 현실을 넘보며 새로운 논리를 산출한다.
이재훈의 시가 주목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당하는 기존의 현실에 집착하지 않는다. 역으로 그는 그것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스스로가 꿈꾸는 새로운 세계, ‘또 다른 제국’의 이미지를 제시하는데 주력한다. 여기서 우리가 마땅히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보여준 진지한 탐구의 자세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단순한 몽상가적 기질을 넘어선,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인의 진지함 내지 치열함과 대면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시쓰기란 엄연히 현실의 질곡을 넘어선 은총이자 구원이다.

― 김유중, <밀레니엄의 언어>, 《21세기문학》(1999.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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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이란, 말뜻 그대로 새로움을 보일 때 가장 확실한 미덕을 갖추는 것이지만,
새로움이란 말처럼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지도 만나지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자리 나름의 뚜렷한 성격과 목소리를 보여주는 일만으로도
오늘날처럼 유행과 몰개성으로 점철된 세태에서는 값진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재훈의 시들은 젊은 사람답게 풋풋한 감수성이 돋보였다.
그 감수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어서
시인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기 나름의 시를 쓰는 것이다.
거기에 후천적인 노력이 더하여 빛을 발할 때
우리는 한 사람의 시인이 탄생했음을 알게 된다.
그의 시는 한밤중 자기 몸에 대한 욕망과 그 발산을
신화적 상상력을 바탕에 깐 수선화로 형상화하기도 하고,
눈 밟기를 통하여 뜻하지 않은 비상과 초월의 뜻을 새삼 읽어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상상력 또한 시인에겐 덕목이다.
앞으로의 분발과 대성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홍신선, 원구식


출처 : 현대시 199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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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젓가락,스테인레스 스틸, 660*770*570.2006.

 

생명을 가장 아름다운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는 몸




이재훈(시인)





가능하다면 나는 이 글을 사양했어야 했다. 글 쓰는 일을 업(業)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예술작품에 대한 전문적인 글은 아무래도 미술평론가의 몫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좀 문외한인 편이다. 좋아는 하지만 열정적인 전문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각가 도일의 작업에 한 마디 거들기로 마음먹은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한때 도일 兄과 황산벌 아래 작업실에서 머리를 맞대며 예술운운하던 시절을 겪은 인연 때문이다. 그 당시 조각가 도일은 [당위]라는 독특한 예술집단을 이끌며 일명 ‘연산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스스로를 야단(野壇)이라 칭하며 “나(몸)는 가장 광범위한 역사적 실체다”라고 외치던 한 예술가의 눈빛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당시 나는 [당위]의 일원이 되어 당위지에 잡문을 쓰고, 그의 작업장 넌출관에서 장작을 패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며 삶과 예술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의 그늘 속에서 예술에 대한 열정을 수혜받은 사람 중의 하나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작품에 대한 열렬한 관객이자 마니아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저작詛嚼 Chew] 연작은 이전에 비해 한껏 여유로워진 느낌이다. 이전 작품들은 한 마디로 딱딱한 껍질이었다. 그의 예술 철학이 너무 완고해 어떤 반박의 여지가 없는 일방향적 전달에 가까웠다. 물론 이런 부분은 다른 측면에서는 아주 좋은 예에 속하기도 한다. 즉 그의 작품은 비교적 주제가 선명하고 강한, 선 굵은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번 [저작詛嚼 Chew] 연작들은 그 단단한 껍질에 구멍을 열어 숨을 통하게 한 느낌이다.

도일은 근본주의자이다. 그의 관심은 시원(始原)이나 진리의 본질에 가닿아 있다. 그러면서도 그가 발 디디고 있는 삶 또한 중요한 정신적 발판으로 삼는다. 또한 완성된 어른의 눈이 아닌, 정체성 속에서 여전히 흔들리는 자아를 탐구하길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호성 속에 있는 자아가 작품의 빈 공간 안을 자유롭게 유영하도록 방목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공간과 움직임의 연속이 전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통합(Unity)의 정신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 눈에 띠는 것 중의 하나로 질료의 선택을 들 수 있다. 작가, 특히 조각가의 경우 예술가가 선택한 질료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굳이 뒤샹이나 팝아트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현대미술에서 질료 선택이 예술가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은 오래된 역사이다. 도일이 택한 매체는 철이다. 철은 도일의 초창기 작업에서부터 등장하는 재료이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일련의 Gun 연작을 발표해 왔으며 1994년 발행된 [징후SYPTOM] 그룹전에서도 [M-16A1 사격방법]이라는 작품을 통해 숟가락, 젓가락, 나이프, 포크 등으로 제작된 작품을 발표했다. 아상블라쥬 기법을 통해 제작된 이러한 작품들은 식량전쟁에 대한 경고이자 그 위험성을 알레고리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이번 전시회에서 보여준 매체들 또한 일상의 공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숟가락, 젓가락, 포크, 밥그릇이나 국그릇 등이다. 이런 점은 재료의 공공성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작품에 그대로 전달하려는 작가의 시도라고 본다. 숟가락, 젓가락 같은 식도구들의 경우 개인만이 사용하는 개별성의 차원에서보다 가족, 지역, 사회 나아가서는 한 나라의 문화적 공공성을 띠는 특성을 지닌다. 많은 사람들의 몸과 접촉한 경험이 있는, 즉 먹는 것이나 쉬는 것의 용도를 가진 사물들은 기(氣)가 센 재료들이라 하겠다. 작가는 이런 재료들을 고물상이나 폐업하는 가게를 통해 재료를 확보했다고 한다. 이들 재료는 제철소로 가서 또다른 재료의 철로 윤회되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술가 도일이라는 용광로를 만나면서 하나의 예술품으로 환생한 것이다.

이러한 재료, 즉 매체지향을 가진 도일의 작업은 재료가 가진 공공성을 바탕으로 두드리고 붙이고 녹이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꽃으로 탄생한다. 꽃은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또한 생명을 가장 아름다운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는 몸이다. 작가는 꽃을 잉태하고 있는 줄기나 뿌리를 기(器)라는 형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 기(器)의 공간은 막혀 있는 공간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뚫려 있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하나의 그물망처럼 보인다. 그물망은 공(空)과 허(虛)를 담은 순환과 윤회의 세계를 지향한다. 하나의 열려 있는 공(空)에서 꽃으로 화(化)한 모습들은 다양한 파장으로 변주된다. 그것은 스텐을 두드려 만든 나뭇가지로, 혹은 오묘한 색감의 몸을 지닌 넓은 동판으로 확산된다. 순환이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작품은 숟가락, 젓가락과 청주잔으로 제작된 사람의 형상들이 여덟팔자(字) 모양을 그리며 설치된 작품이다. 이 작품 또한 108개의 인간상을 통해 백팔번뇌를 연상케 하고, 마치 메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이어지고 순환하는 무한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번 작품들 속에서 또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은 작품의 디테일한 부분들이다. 예를 들면 스텐을 이용해 나뭇가지를 형상화한 작품에서 숟가락과 찻수저로 만든 작은 나비 같은 것들이다. 그 작은 나비는 자아에 잠깐 스쳐 앉았다 간 존재들을 의미한다. 그 존재들은 건강한 생명력을 얻어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날아가기를 기원하고 있다. 또한 철을 용접하며 얻은 접합점의 반짝임 같은 것들은 작품을 더욱 미적으로 만들어주는 디테일한 부분들이다.

도일의 이번 작품은 여러 사물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는 세계, 즉 전체성에 대한 커다란 상징으로 읽힌다. 그의 작품은 철이라는 매체와 전체성의 의식, 공간과 선과 붙임을 활용한 형태가 모두 조화롭게 이루어낸 세계이다. 그는 언제나 진지한 열정으로 작품을 생산해내는, 오로지 작품 속에 자신의 영혼 전체를 밀어 넣는 예술가이다. 이제 그의 다음 작품은 어떨지를 상상하고 기다리는 관심이 우리들에게 남겨진 몫일 것이다.


인사아트센터 2007.6.27일부터 7.3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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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5일 새벽 4시 47분 예쁜 딸을 얻었다.
참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
어머니는 위대하다, 라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되었던 시간.
좋은 남편은 이미 틀렸지만, 이제 좋은 아빠가 되어야겠지.
태어난 지 이틀째 찍은 사진이다.
보면 볼수록
참, 신비로운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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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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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

시詩 2007. 5. 28. 10:21

메마른 땅에 아카시아 꽃잎 떨어져요. 질긴 가지 끝에서 제 몸을 뜯어내는 소리, 천둥치는 밤. 당신은 그 아픔을 숨기고 투명한 몸으로, 꽃잎처럼 경쾌하게 내려요. 낡은 군화를 신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앙상한 가지를 꺾어 가며 걸었어요. 흙발로 저벅저벅 아스팔트 위를 걷다가 문득, 당신을 봅니다. 사납고 포악한 걸음걸이 사이로 보이는 당신의 알몸. 밤이 되어도, 이별이 지나도, 당신의 몸이 온 사방에 닿는 소리 들려요. 당신이 울고 있다 생각했지만, 실상 당신은 아무 말 없어요. 아무 몸짓도 없어요. 잠시 침묵.

몸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요.
서러운 아픔도 참, 아름다워요.

----------------
⎗ 도시에서 한 시간을 걷더라도 흙을 밟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도시의 도로는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비가 내리는 요즘만큼은 우리가 사는 이곳이 ‘메마른 땅’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어서 위안을 받는다. 도시가 자연과 자연스러운 것들을 쫓아내고 시멘트로 장악해 버렸다 할지라도 봄바람과 비를 따라 내리는 꽃비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 마음의 삭막함을 안아서 달래준다. 이재훈 시인의 「빗소리」는 마치 시멘트 포도에 내리는 꽃비처럼 여겨진다. 이재훈 시인의 「빗소리」를 읽으니, 시를 해석하는 일을 하거나 딱딱한 인식의 시를 쓰는 필자로서는 잠시 부끄러워진다. 시인의 작품이 내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감성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거나 현상을 바라보는 데 서툴다. 내게도 ‘빗소리’를 ‘서러운 아픔’으로 감각하던 때가 있었던가? 이재훈 시인은 「빗소리」에서 의미상의 대구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화자는 자신과 ‘당신’을 대조시켜서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대상인지를 드러낸다. 화자는 낡은 군화를 신었으며, 앙상한 가지를 꺾어들었고, 흙발이고 포악한 걸음걸이를 가진 사람이다. 반면에 ‘당신’은 투명한 몸과 꽃잎의 경쾌함을 지니고 있다. ‘당신’은 연약하고 부드러운 알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아스팔트 위에 내리는 빗방울 같은 이다. 화자가 ‘당신’을 아름답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아픔을 겪으면서도 “아무 말 없”이, “아무 몸짓도 없”이 메마르고 딱딱한 아스팔트를 적시고 안아주기 때문이다. 빗소리는 아스팔트 같은 화자의 가슴과 「빗소리」를 읽는 이의 마음자리에 “서러운 아픔”으로 내려와서 따스하게 안아준다. ‘당신’의 “서러운 아픔”을 아는 자 역시 ‘당신’만큼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겠다.

- 조해옥(문학평론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7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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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사 2007. 3. 15. 11:33

[경남신문 / 시가 있는 간이역 12] 눈-이재훈
 
 
 
 
눈 / 이재훈

눈을 밟는다
눈이 시린 풍경을
꾹꾹 밟는다
그러나 눈은
온전히 밟혀지지 않고
자꾸만 발등 위로
심지어 무릎까지
올라온다
제 존재를
떠올리려 한다
덮어야 할.
밟혀야 할 운명을
내 발걸음에 의탁한 채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눈이 떠올라
내 발목을 쥐고
너도 나처럼
떠올라라
떠올라라
머리 위까지
눈이 날린다

-이재훈. <눈> 전문.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2005)에서

--------------------------
▲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이다. 눈이라도 내려 덮어주었으면 좋겠는데. 눈 내리지 않으니 눈 대신 눈에 대한 시 한 편 읽어보자. 세상길이 아무리 탁류라 해도 멈출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다리 아파도 함부로 쉴 수도 없는 것이 우리네 길 위의 삶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조용한 혁명’이다. 섬세함이다. 시인의 시선을 보라. 내리는 눈이 아니라 쌓여 밟히는 눈을 주목하고 있다. 그리하여 ‘밟혀야 할 운명’을 가진 눈이 밟는 자의 힘 반동을 이용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본다. 아름다운 눈의 혁명. 우리도 가만히 속삭여 보자. 떠올라라. 날아올라라. 머리 위까지! 그러면 우리 삶의 바닥 슬픔이 세상 끌고 가는 힘이란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 배한봉(시인. 《시인시각》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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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

시詩 2007. 3. 2. 13:14



메마른 땅에 아카시아 꽃잎 떨어져요. 질긴 가지 끝에서 제 몸을 뜯어내는 소리, 천둥치는 밤. 당신은 그 아픔을 숨기고 투명한 몸으로, 꽃잎처럼 경쾌하게 내려요. 낡은 군화를 신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앙상한 가지를 꺾어가며 걸었어요. 흙발로 저벅저벅 아스팔트 위를 걷다가 문득, 당신을 봅니다. 사납고 포악한 걸음걸이 사이로 보이는 당신의 알몸. 밤이 되어도, 이별이 지나도, 당신의 몸이 온 사방에 닿는 소리 들려요. 당신이 울고 있다 생각했지만, 실상 당신은 아무 말 없어요. 아무 몸짓도 없어요. 잠시 침묵.

몸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요.
서러운 아픔도 참, 아름다워요.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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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묘지山頂墓地 1

조정권


겨울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뭍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 밑에서 들려주리.

여름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치라.
나의 발 끝에서 머리 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바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산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에 뿌려진 생목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 숲속을 거니는 새벽의 아들

겨울산을 자주 오른 적이 있었다. 그해 겨울 관촉사灌燭寺 반야산般若山을 자주 오르며 무언가 규정할 수 없는 정열과 싸웠던 때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灌燭寺’란 이름처럼 나의 내면을 조용히 밝히는 일이었던 것 같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막연한 정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마치 신열身熱이 난 것처럼 영혼이 아팠기 때문이다. 겨울 산비탈에 얇게 쌓인 눈을 밟으며 혼미하고 어지러운 정신을 가다듬을 때쯤 조정권의 시편들을 만났다. 그 이후로 조정권의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와 [산정묘지], [신성한 숲] 등은 두고두고 읽어가던 내 시집 목록이 되었다. 이 세계에 대한 막연한 저주와 의미없는 자학이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을 배우는 도정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숲속을 거니는 새벽의 아들, 빛의 신랑”은 조정권의 말이다. 그의 시는 새벽 동살을 기다리며 비밀의 숲을 소요하는 단독자單獨者의 언어이다. 고요한 성찰 가운데에 매운 채찍을 휘갈기는 언어이다.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에 서는 것”으로 잠든 정신을 채찍질했고, 방황 속에서 치렀던 긴 망상의 언어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었다. 스스로 도취하지 않기 위해,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지치고 지친 불면의 밤과 나날의 어둠 속에서 영혼의 향기를 느끼기 위해 이 시를 읽었다. 관념이 수사의 치장이 아니라 내면의 고귀한 고백이며, 절박한 물음이며 또한 고통임을 이 시를 통해 희미하게 보였다.
조정권은 얼음 속에 핀 꽃잎의 산책자이다. 그의 정열은 차가운 이성 속에서 시원始原과 본질을 탐하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내게 남아 있다.

- 현대시, 2007년 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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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말

매혹적인 시의 근원을 찾아서


이 재 훈


지난 호에 이어 소통을 주제로 한 두 번째 기획을 준비했다. 지난 호의 기획 의도는 2000년대 전후의 젊은 시인들을 둘러싼 논쟁을 중진 시인들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는지 살펴보는 것이었는데, 이번 기획은 그 역으로 진행되었다. 즉 젊은 시인들이 어떠한 양상으로 중진 시인들의 시를 바라보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오늘의 한국시가 시와 독자와의 소통, 시인들과의 소통, 세대 간의 소통이 잘 안 되고 있다는 지적은 이미 본지 지난 호와 다른 지면들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이러한 소통의 정체는 각 세대가 가진 사회적 경험과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은 자명한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문학 세대들은 이전 세대들의 문학적 성취를 섭렵하고 그 토대 위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젊은 시인들은 매혹적으로 읽은 중진 시인들의 시를 자신의 문학적 자양분으로 삼았으며 그 밑거름이 새로운 언어를 꿈꾸게 하는 힘이 되었다.

이번 기획은 세대 간 소통이 서로의 시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새로운 활로를 열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기획의 방식은 지난 호와 마찬가지로 진행되었다. 먼저 대표적인 젊은 시인들에게 인상깊게 읽은 중진 시인들의 시 한 편을 추천하고, 그 시에 대한 짧은 감상과 함께 다음과 같은 설문을 부탁했다.

1. 젊은 시인들의 시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젊은 시인들의 시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 추천할 만한 중진 시인들의 시집이나 시가 있다면 써주시고, 그 이유를 간단히 써주십시오.
4. 현 한국 시단에는 세대 간 시적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앞으로 중진 시인들과 젊은 시인들 간의 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는 방법이나 의견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써 주십시오.

젊은 시인은 등단 10년 미만, 70년대 이후에 태어난 시인들로 한정지었다. 또한 본지에 최근 작품을 발표했거나 조명을 한 시인들은 필자의 중복으로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그렇게 우리가 청탁한 31명의 시인은 아래와 같으며 원고를 보내온 시인은 16명이다.

김근, 문혜진, 이재훈, 김민정, 류외향, 진은영, 이영주, 최치언, 박성우, 이승원, 이창수, 장이지, 정영, 길상호, 박진성, 신동옥, 신혜정, 안현미, 유형진, 윤성택, 임현정, 오은, 조동범, 최승철, 한용국, 김안, 김경주, 박상수, 박판식, 송승환, 윤석정

당분간 산문청탁을 보류해 달라고 개인적인 부탁을 한 몇 시인들은 청탁목록에서 제외하였다. 원고청탁은 먼저 이메일로 청탁서를 보낸 후 집필여부를 이메일과 전화로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최종으로 전화를 통해 집필여부를 확인하였다. 이렇게 메일을 통해 청탁한 이유는 집필에 대해서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한 원고 집필을 하겠다고 밝힌 몇 시인들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집필을 포기하였다.

원고청탁에 응하지 못한 시인들은 외국에 체류해 있거나 국내 여행 중인 시인들이 많았다. 또한 지난 호에서처럼 산문에 대한 부담감, 다른 지면과의 겹치기 청탁 등으로 집필이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지난 호에서처럼 시인을 선정하는 과정에 대한 부담감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번 기획의 열여섯 시인들의 글을 통해 지금의 한국시가 존재하는 기원을 한 단면으로나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시인들은 중진 시인들의 시를 문학의 교과서로 삼아 읽고 감동하였으며 전파했다. 그 시적 편력과 사연들을 통해 새로움의 원형들을 한 번 예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혜진은 최승호의 「뭉게구름」을 통해 사물의 유연함을 말한다. 구름의 운명과 먹구름처럼 드리워진 인간사의 고통, 생의 덧없음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시를 존재의 자기변신술이라 칭하며 꼼꼼히 읽고 있다. 이재훈은 조정권의 「산정묘지」를 읽었다. 「산정묘지」 연작은 존재의 본질을 상징과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한 시이다. 조정권의 시를 새벽 동살을 기다리며 비밀의 숲을 소요하는 단독자單獨者의 언어이며 고요한 성찰 가운데에 매운 채찍을 휘갈기는 언어라고 말한다. 이승원은 오규원의 「빈약한 상상력 속에서」를 통해 문화적으로 빈약한 상상력에 대해 말한다. 맹물 사랑을 신봉하는 존재들은 자신의 구린내를 대면하고 직관하는 일을 회피한다. 대부분의 미망과 비극은 비좁은 사유가 부른 그릇된 가치부여와 믿음에서 기인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창수는 오탁번의 시 「마늘」을 감상하면서 자기를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방법은 매운 맛을 잃어버린 시인 자신을 비판하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살아오면서 점점 본래의 모습에서 퇴화되거나 변절해 버리는 현대인들을 마늘을 통해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장이지는 귀찮음의 미학을 얘기하고 있다. 김사인의 시 「장마」는 세공의 흔적이 역력해서 거기다가 미학이라는 수식을 더해주고 싶은 귀찮음의 미학을 보여주는 시라 말한다. 속도의 시대 속에서 매력을 찾을 수 있는 시이다. 길상호는 이재무의 「국수」를 읽으며 어린 시절 국수에 대한 기억들을 떠올린다. 길상호는 서민적이고 소박한 음식에 사로 잡히는 것처럼 시 또한 흔하고 일상적인 제재를 통해 깨달음을 주는 시를 좋아한다고 한다. 시인은 이재무의 시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통해 가족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박진성은 송찬호의 찔레꽃에 대한 추억이 있다. 시에 대한 얘기로 통음을 했으며 필사를 했고 눈물을 자아냈던 시가 박진성에게는 송찬호의 시다. 한 개인의 연애담이 찔레꽃과 눈썹과 사기와 뱀을 거쳐 野史로 태어나는 광경을 다시 한 번 시인을 통해 감상해 본다. 박판식은 이문재의 「판화」를 중심으로 80년대 시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특히 강창민의 「아름다운 노래」, 배진성의 「길이 있는 풍경」, 장경린의 「허리 운동」 세 편의 시에 대한 감상을 함께 하며 저물녘의 황혼을 떠올리고 있다.

유형진은 송재학의 「하루 종일」을 읽는다. 시를 읽으며 뿌리째 뽑힌 은행나무 대신으로 벌을 서는 시인을 상상해 본다. 또한 나무의 눈을 빌려 살아 왔던 시인의 마음나무의 눈을 가진 채 짐승의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 와야 했던 시간들을 생각해보고 있다. 윤성택은 김광규의 「좀팽이」를 읽으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 콧물이 된 표정을 애써 감추듯 이렇게 우리는 좀팽이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얘기한다. 그에게는 좋은 시는 시대가 변해도 그 의미와 깊이가 달라지지 않는다. 1980년대의 현실이 2007년에 와서도 뜨겁게 읽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는 말로 이 시의 매력을 표현하고 있다. 임현정은 이하석의 「밥상」을 읽었는데, 이 시를 읽을 때 따뜻한 밥김이 나를 에워싸는 것 같다고 한다. 이하석의 시를 통해 인간에 대한 시인의 따뜻한 시선과 삶을 표현하는 묘사의 힘을 느꼈다고 전한다. 이하석의 시는 임현정에게 한때 치기로 썼던 자신의 시들이 부끄러워지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최승철은 이승훈의 「그녀의 방」에 대한 시적 체험을 전하고 있다. 활발한 시행 전환, 거침없는 시상 전개, 단순한 듯하면서도 복잡한 알레고리 등이 좋아하는 이유의 목록이다. 또한 화려한 단어를 동반하지 않아도 화려해지는 이승훈의 시적 방법론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특히 「그녀의 방」은 이승훈의 시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시라고 한다.

송승환은 이성복의 시를 통해 부정 정신과 산문의 리듬을 말하고 있다. 송승환은 이성복의 시를 처음 읽었던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아버지에게 개새끼 건방진 자식,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라고 말하는 것도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권력에 대한 부정의 정신은 시를 노래로 규정지으려는 전통적 태도를 부정하고 산문이 구가할 수 있는 시적 리듬의 절정을 시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확립한다고 한다. 한용국은 황지우를 통해 재래적인 서정시의 문법이 파편화된 현실에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한 권의 시집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문제적인 시인이라고 말하는 황지우 시인의 시를 통해 존재의 가려움을 해소할 수 있다고 한다. 김안은 장정일의 「삼중당 문고」를 읽으며 스무 살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장정일의 시집을 만나면서 동질감을 느꼈고 당시 많은 양의 시집을 읽었던 추억을 떠올린다. 그 당시 읽었던 시집들이 공룡같이 기괴하고/우주같이 신비로웠고, 시인들의 관, 무덤과 같이 느껴졌다는 장정일의 말처럼 읽는 이들에게 평안한 무덤이 되는 시의 거처가 삼중당 문고라고 전한다. 윤석정은 정양의 「어금니」를 읽는다. 시인은 치통으로 고생했던 기억과 미당 선생께서 돌아가신 날의 사연을 통해 험한 세상을 견디는 쓸쓸한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을 통해 삶에 밀착된 언어, 언어에 밀착된 삶을 살아가는 시인은 삶을 시처럼, 시도 삶시인의 올곧은 시 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이번 기획에 옥고를 보내주신 젊은 시인들께 감사의 말을 드린다.

- 현대시 2007년 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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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뱅이꽃

시詩 2007. 2. 19. 14:34
 

앉은뱅이꽃



이 재 훈



일부러 가부좌를 틀 필요는 없다 당신은 감각의 수행자, 당신의 세상은 불구의 시간이 시작되는 때, 눈을 감아도 또렷이 기억나는 게 있다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반했던 제비꽃 향기처럼 당신, 들릴 듯 말 듯한 냄새 당신의 냄새를 들었다 노란색 코트가 아니라 감미로운 목소리가 아니라 당신의 발자국처럼 저 멀리서부터 두근거리는 냄새 눈을 감아도 또렷이 기억나는 게 있다 그러나 당신의 향기는 잠시 머물렀다 사라졌다 부재(不在)는 그리움의 양식 바이올렛 향기로 내 몸이 건반처럼 울렸지 잠시 뿐이었지만, 덤불 속에서 상채기를 핥다가 취한 당신의 냄새 적어도 당신의 몸에서 육식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다른 꽃으로 환생한다해도 이미 알았던 것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음을*



*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다 :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이리언(Alien)


 

시작메모


향기는 마법의 물질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 감각의 기억은 오래도록 남는다. 향기에 의해 생성된 그 기억은 이전의 시간을 재생시킨다. 또한 그 시간과 함께 나누었던 감정의 세밀한 떨림들까지 느끼게 된다. 이러한 감각의 체험은 주관성에 의존한다. 같은 향기라도 그 향기가 거느렸던 사연과 순간의 각별함으로 인해 범상치 않은 감각체험을 하는 것이다. 앉은뱅이꽃은 제비꽃의 다른 말이다. 금방 날아가버리는 속성으로 귀했던 제비꽃의 향은 매력적인 냄새였다. 바이올렛향을 가진 앉은뱅이꽃의 불구성(不具性)이 감각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하게 했다.

- 2007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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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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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 위쪽 나무들이 고개를 숙여 만들어낸 그늘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오른편에 언덕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있다. 그 길이 바로 그 유명한 할머니 동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할머니 동산, 이라고 가만히 입술을 열어 보면 그날의 풍경과 그날의 목소리와 그날의 어지러움이 함께 떠오른다.

이른 봄날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찬바람이 마지막까지 제 존재를 증명하려는 듯 옷깃으로 파고들었다. 겨울을 무기력하게 보냈고 봄이 오면 새로운 다짐을 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날의 햇살은 더 남다른 데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강의실 창가에까지 보드라운 몸을 기대는 햇살의 감촉을 참을 수 없었다. 세상의 가식된 거짓에서 벗어나라는 진리의 새가 어깨 위로 포르르 날아와 앉는 느낌이었다. 함께 강의를 듣던 친구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자고, 그래 그러자고 합의를 하고 교수님을 졸랐다.

우리는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는 야구부원들의 역동적인 몸놀림을 바라보며 뒷길을 걸었다. 봄날의 햇살 때문인지 모든 풍경이 새롭게 꿈틀거리는 듯 보였다. 친구들 몇은 막걸리를 준비했다. 할머니 동산으로 오르는 길은 소박했고 편안했다. 마치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느낌처럼. 할머니 동산은 작은 정원이었다. 이쪽 저쪽 꽃몽오리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제 곧 꽃이 될 붉고 노란 얼굴들이 동산에 가득했다. 꽃향기를 맡으며 술향기를 맡는 이 신선함. 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준비해온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판이 벌어지면서 자연스레 노래판도 벌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쑥스러움은 쉽게 노래의 열정으로 빠져들지 못했다. 술이 몇 순배 더 돌고나서 한 친구가 노래를 불렀다. 그 친구는 원우들 중에서도 가장 낯을 가리고 수줍음 많은 친구였다. “사랑함에 세심했던 나의 마음은 그렇게도 그대에게 구속이었소. 믿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헤어지는 이유가 됐소……” 구창모의 희나리였다. 나는 그날의 그 노래를 잊지 못한다. 좀 처연하긴 하지만, 할머니의 품에서 위로받으려는 듯 다짐하려는 듯 끊어질 듯 이어지며 불렀던 노래. 희나리는 덜 마른 장작을 말한다. 그때도,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덜 마른 장작이었다. 덜 마른 장작이 내뿜는 매캐한 연기가 할머니 동산에 가득했다. 나는 그 이후로 구창모의 희나리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공간은 안과 밖의 변증법으로 인해 의미를 갖는다. 어디로 도망할 것이며 어디로 피할 것인가. 안은 어디이며 밖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시절. 결국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지만. 할머니 동산은 이곳이 아닌 저 너머의 곳이었다. 도망도 피할 곳도 아닌 위로를 준 동산이었다.

그 뒤로 몇 번을 그 동산에 올랐던가. 가슴이 울렁거릴 것만 같은 그 동산. 내겐 비밀의 화원이었던 그 동산. 할머니의 치마폭처럼 알 수 없는 울분과 고민을 감싸 안아 주었던 그 동산을 다시 한번 오르고 싶다.

(중대대학원신문, 2006, 7.)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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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이 들고 입술이 부르터서 몸뚱이가 버거울 때였지. 꿈을 꾸었어. 갑자기 뒷덜미가 서늘해져 지나온 것들을 보지 않으려 캄캄한 앞만 보았지. 저 앞의 세상엔 어떤 동물들이 살고 있을까. 한 발자국 내딛을 때, 내 몸에 사박사박 모래알 밟는 소리가 났어. 오, 누군가가 내 몸을 질근질근 밟고 있었지.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아침마다 청량리에서 신촌으로 가는 131번 버스를 타지. 어쩌다 예쁜 여인이 옆에 앉으면 주문을 외지. 너는 내 아들을 잉태했다. 새벽에 술에 취해 방문을 열고 불을 켜면 섬뜩 놀라. 내 바지에 피가 흘러내리고, 아침에 보았던 예쁜 여인이 아기를 안고 있어.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뒤를 돌아보면 내 목에 십자드라이버를 꽂고 있는 사람이 보여. 당신을 사랑해. 어지러워, 온 몸에 피가 타오르지. 독한 감기약을 먹고 아침이 되면 131번 버스를 타지.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내 몸이 가벼워져 바다 위를 걷는다면, 당신의 손이 내 몸에 닿을 때 흐르는 피가 멎는다면, 그걸 누구에게 고백해야 할까.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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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곳을 찾았을 때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
가없는 기억의 언덕도 무너지고
또닥또닥,
희미한 발굽 소리만 들렸는데

2.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르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 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

3.
말은 내게 뱃속을 열어 보여준다
건강한 줄기를 먹고 자란 말
빨갛게 화장(化粧)한 말의 뱃속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뱃속에 질서있게 자리잡은 내장의 곡선에
손가락을 갖다 대본다
아프다, 말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뱃속에서 말의 새끼들이 뛰어나온다

4.
말이 쏟아져 내린다 초원에 내려 거칠게 달려나간다 내가 지겹게 머무는 도시의 거리까지 와서 내 머릿속을 후두둑후두둑 내달린다

5.
밤이 되면 나는 시를 쓴다
거리의 곤고함에 대해
꽃이 침묵하며 피는 이유에 대해
아는 척 쓰다가 말다가 결국
“말은 태양을 잉태했다”고 쓰다가

6.
믿음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내가 검은 말을 타고 요정의 검을 차고
맥베스처럼 “눈 앞의 이것이 나인가” 되뇌이며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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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Bang

시詩 2007. 1. 5. 17:22


태양이 어슷어슷 거리로 내려왔습니다. 쇼윈도우 마네킹들은 땀도 흘리지 않았지요. 누군가가 지나치는 여인에게 양공주 같다고 킬킬거렸습니다. 좌판 아저씨는 제 옷자락을 잡아끌고 빨간 비디오테이프를 꺼내주었습니다. 신문엔 사람들끼리 불총을 쏘아대고 있었습니다. 그런 거리를 걷다보니 어느새 제 겨드랑이에 털이 솟아 있었습니다.

무르팍에 힘이 없었습니다. 숱진 머리칼이 아버지를 닮았다지만 전 야틈한 언덕에서 방황했습니다. 아버지는 언덕을 넘으면 시온이 있다고 했었지요. 그때 태양이 제 몸에 달라붙어 명징한 기억들을 빨아먹고 있던 겁니다.

누구나 안식처를 찾아 세상을 헤매입니다. 눈 앞에 솔개그늘이 하나 있었고 그 속에서 저는 RPG게임을 했습니다. 제 몸의 태양열로 세계를 불질렀습니다. 펑펑펑 150억 광년의 우주에 불을 놓습니다. 세상에 불을 지른 자는 신이던가요?

가끔씩 가슴으로 소나기밥을 먹습니다. 온 몸에 자릿내가 풀풀거려도 괜찮습니다.

언덕을 넘으면 시온이 있구요. 그곳에 다가갈수록 수염이 자꾸 굵어집니다. 간간히 제 가슴에 나비물마냥 불덩어리들이 흩어 날아갑니다.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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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연못

시詩 2006. 12. 28. 00:06


내 몸이 뜨겁다
아스팔트가 뒤집혀져서 내 발목을 챈다
나는 문명의 미끼인가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의 바퀴
살이 짓이겨지는 줄도 모른 채
실실 웃고 다닌다
이 불안이 즐겁다
이젠 원시의 기억이 내겐 없다
내 몸의 불은
나무의 몸이 낸 게 아니다
광고 전단지나 두꺼운 여성지
반들반들 윤이 나는 오색의 컬러 잉크지가
매운 냄새를 풍기며 피워낸 불
그러므로 내 불의 풍경은 낭만적이지 않다
습기 많은 푸석한 불
불을 품고 날고 싶다
평생 걸리는 긴 겨울을 건너고 싶다
노동하지 않는 내 몸을 가릴 외투를
꼭 껴입고
유리처럼 선정적인 투명함을
성에로 담금질하고 싶다
그러면 나는 차가운 물의 시간에
발을 갖다 댈 것이다
얼음의 심장을 견딘
차가운 불이 되어
잔잔한 물 위를 떠다닐 것이다
이미 떠난 자들의 얼굴이
물 위에 가득 조각되어 있는
어느 시간의 틈을
고요히 건너갈 것이다
시와시학, 200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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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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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마을은 적요했다. 해남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땅끝마을로 오면서 평원의 등 너머로 온 시야 가득 퍼져 있는 노을을 보았다. 해지는 광경도 장관이었지만 해가 넘어가면서 나의 마음도 새로운 세계에 닿는 듯한 느낌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땅끝마을은 서서히 어둠을 드리우고 등을 하나씩 켜고 있었다. 우중전야(雨中前夜)라 그런지 어떤 축축한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그 쓸쓸함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편안한 감정이었다. 그런 묘한 낭만을 느끼면서 땅끝에서 여행의 첫날밤을 보냈다.

그해 가을. 약 1주일의 시간을 보길도에서 보냈다. 혼자만의 여행에 바쳐진 보길도. 그곳을 찾은 것은 딱히 어떤 이유에서라기보다 먼 동경의 갈급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막연하게 갈 수 있는 먼 곳을 머릿속에 그리다가 해남에서도 1시간을 더 가야 하는 보길도를 생각해낸 것이다. 또한 그곳은 시인 윤선도의 얼이 남아 있는 곳이 아니던가.


도시생활이 갖게 하는 무기력한 일상의 순환이 목까지 차올랐을 때 난 무엇을 간절히 그리워했을까. 대개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어딘가로 떠나 새로운 풍경을 만나는 것으로 그런 답답함을 해소하곤 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정작 풍경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어느 순간 나를 마주하고 마는 것인데, 우리는 그 풍경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가끔씩 무작정 떠나는 것으로 새로운 충전의 시간을 얻곤 한다. 다만 보길도 여행이 다른여행과 다르게 각별히 기억나는 것은 내 배낭에 이우환의 『시간의 여울』(디자인하우스)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길도에 들어가면서 나는 이미 자연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있었다. 내가 일찍 죽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런 자연을 보는 기쁨일 것이다. 돌담이 둘러져 있고, 창호지 여닫이문과 돌쩌귀가 아직도 그대로 있는 민박집에 방을 얻었다. 민박집 방문을 열고 바다를 바라보며 이우환의 글을 음미하듯 읽었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드디어 바람 한 점 없는 우주의 일순이 들이마신 숨결과 딱 겹친다. 무언가가 땀과 함께, 일제히 뿜어 나온다. 몸이, 침대가, 방째로 끝없이 녹아 나가, 이윽고 모든 것이 먼 바다가 되었다.

묵었던 민박집

이우환은 일본 모노파(物派)를 창시한 현대미술의 거장이다. 그는 1936년 경남에서 태어나 유년기 때 시, 서, 화를 배우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56년 일본으로 건너가 가장 성공한 예술가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언젠가 그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여백이 넓은 그의 그림은 글과도 많이 닮아 있다.

보길도는 마음에 평온을 주는 바다였다. 비가 올 듯 말 듯하여 날씨는 우중충했지만 그런 하늘이 더욱 여행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깊은 밤, 갯돌이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내는 자갈 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있을 때는 자연의 감동이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우환은 또 이렇게 쓴다. '자연을 이야기하고 자연을 아낀다고는 말해도, 그것은 자신의 이미지를 부풀리고 거기에 형색을 갖추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라고. 나는 과연 그런 것일까. 우문의 자문자답을 하며 모든 것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이미지에 덧칠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내가 갖고 싶은 이미지의 자연. 그 차이 속에서 숨쉬는 모든 사물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듯했다.

이우환은 결락(缺落)의 세계를 좋아한다고 했다. 시간적인 것이든 공간적인 것이든, 그가 좋아하는 결락의 세계에 나도 동참해 보고 싶었다. 그는 그것은 먼 완성을 향해 만들어가는 여정의 세계이기도 하고, 하염없는 소멸을 향해 무너져가는 과정의 세계라고도 했다. 이러저러한 생각들 속에 지내다가 이틀을 바닷가 근처에서 소요했다.

역동성이 없는 자연 속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금세 지치게 마련일까. 이틀이 지나니 조금 무료해졌다. 다행히 민박집 주인아저씨의 낚싯배를 얻어 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낚싯배를 타고 근해로 나가 난생 처음으로 바다낚시를 해 보았다. 내가 잡은 것은 노래미라는 작은 물고기였다. 파닥거리는 물고기의 역동적인 힘을 느끼는 낚시의 재미에 온종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내가 잡은 물고기를 회를 떠서 맛있게 먹고 또 밤을 맞았다. 그리곤 손끝에 느껴지던 낚시의 손맛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물고기의 가장 마지막 힘을, 자신의 목숨을 다한 힘을 내가 즐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우환의 말처럼 그것도 소멸을 향해 무너져가는 과정일까.

그 후로 민박집에 며칠을 더 머물며 보길도의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중리와 통리의 해변과 고산 윤선도의 세연정, 부용동정원을 돌아보며 풍경의 호흡을 한 숨이라도 더 들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어느덧 지겹던 일상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일상을 피해, 일상을 잊기 위해 떠났던 여행에서 나는 일상의 소중함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우환의 글이 가지고 있는 힘이기도 하다.

그의 글은 이 하찮고 천박한 일상이 얼마나 의미 있고 근사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 준다. 거대한 일상의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었던 일상의 여백을 생각하게 한다. 그의 말대로 '예술가는 공간을 만들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無)의 영역이니까. 공간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우환은 우리가 모르는 눈뜬 공간, 일상의 공간을 점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여는 길을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 날 민박집 들마루에 누워 낮잠을 잤다. 낮잠을 깨고 이우환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꼭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기록해 둔 글처럼 나는 무(無)의 바다에 그렇게 오래도록 가만히 있었다.

눈을 감으면 뭔가가 사라져가는 기척이 있다. 재빠른 풍화의 소리다. 철판이 사각사각 삭아 앉고, 돌이 바삭바삭 증발을 서두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돌도 철판도 그리고 마당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언제쯤인지 눈을 떴을 때에는, 나는 무의 바다 속에 있다.

_ 북새통 2006년11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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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未知


김수영은 <詩人의 精神은 未知>라는 글에서 “그의 모든 관심은 내일의 시에 있다. 그런데 이 내일의 시는 未知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정신은 언제나 미지다. 고기가 물에 들어가야지만 살 수 있듯이 시인의 미지는 시인의 바다다. 그가 속세에서 愚人視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기정사실은 그의 적이다. 기정사실의 정리도 그의 적이다.”라고 했다. 김수영이 말한 적(敵)은 기존에 있어 왔던 것, 기존에 있어 왔던 것의 정리다. 그러나 김수영도 기존의 것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자신의 시에 대해서 규정하고 정리할 필요가 없다 했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시와 당대의 문학적 정체성과의 싸움을 벌였다. 그의 글은 독설이지만 또한 결벽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가. “시인은 영원한 배반자다. 寸秒의 배반자다.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

2. 寸秒의 배반자

시를 생각할 때는 시소를 타고 있는 느낌이다. 때론 방법이 내용을 올라탔다가 내용이 방법을 올라타기도 한다. 방법 때문에 내용이 가벼워지기도 하고 내용 때문에 방법이 가벼워지기도 한다. 방법과 내용이 수평을 유지하는 팽팽한 긴장감은 쓰면 쓸수록 어렵다. 그래서 때론 내용이 있다 하여 낡은 방법을 슬쩍 숨기기도 하고, 방법이 있다 하여 빈한 내용을 숨기기도 한다. 김소월이, 로버트 번즈가 위대한 이유는 이런 긴장감과 다름 아니다.
언어가 형식 속에 스며들어 세계를 지배할 때 한 편의 시는 언어를 뛰어 넘는 그 무엇이 된다. 이런 느낌은 시를 쓸 때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뮤즈가 찾아와 내 오감을 건드려 주술의 언어가 토해지는 시는 이제 아주 가끔이다. 이때 형식과 내용은 이미 시인의 손끝을 떠나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 이후는 무엇인가. 바로 ‘寸秒의 배반자’ 역할을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내 방법을 배반하고 내 세계를 배반하고 지루하다 못해 그 모든 걸 배반한다. 엘리엇이 말한 ‘감수성의 통일’은 이 모든 것을 용광로에 밀어 넣을 때 가능한 일인가.
이럴 때 문득 쓸쓸해진다. 하지만 그 쓸쓸함을 시로 선뜻 옮기지 못한다. 쓸쓸함이 내 삶의 사연보다 못하며 거리의 감동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백지 위에 몇 마디를 긁적이다 그냥 변죽을 울리고 말 뿐이다. 그리고 나는 목적없이 거리를 걷는다.

3. 아주 사소한 거리

요즘 나는 거리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아니 목격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얼마 전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보았다. 샛노란 은행잎이 거리에 흩날렸다. 비둘기들이 간신히 은행잎들을 피해 날아다닐 정도였다. 그 광경은 마치 황혼녘에 결투를 벌이는 서부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장감마저 주었다.
그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모두 쓸쓸한 뒷모습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쓸쓸한 어깨들의 부딪힘과 서늘하게 부는 바람. 그 배경에 눈부실 정도로 노란 은행잎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쓸쓸함의 풍경은 아주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쓸쓸함이 아름다움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4. 가면

대체로 쓸쓸함은 상투적인 가면을 쓰고 찾아온다. 무언가 정확히 말할 수 없는 내면의 결핍이나 부재를 우리는 쓸쓸하다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쓸쓸함’은 뭉뚱그려진 정서이다. 쓸쓸함은 외로움과 적적함의 일상어이다. 그러기에 가장 가까이에서 우리의 정서를 대변해주는 언어이다.
누군가가 ‘쓸쓸하다’고 했을 때 우리에게 가장 먼저 보여지는 건 상투적인 가면이다. 말하는 자도 알고 그것을 듣는 자도 안다. 상투적이란 말 속엔 습관성이란 긴 골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쓸쓸하다’고 습관적으로 얘기한다. 이 습관이 ‘쓸쓸함’이란 말을 상투적인 골 속에 가두어 놓는다.
나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이 쓸쓸함과 직접 만나는 느낌이다. 찬바람이 내 폐부를 훑고 지나가면 내 존재의 밑바닥에 달라붙어 있던, 그동안 모르고 지내왔던 마음들이 떨어져 보풀처럼 흩날리는 것 같다. 입김을 불면 빠져나가는 불편한 관념 덩어리들. 그제서야 나는 차갑고 텅빈 사물이 된다.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
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품어 준다.

그리고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내 손끝에서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보내고 만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아름다운 영원을
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도 없는 나의 손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나의 시와 함께.
― 김현승, <절대고독>

5. 쓸쓸함을 사랑하기까지

날이 추워지면서 잠도 많아진다. 바쁜 일상이 잠을 더 재촉한다. 때론 내 코고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온 몸으로, 온힘을 다해 내뱉는 나의 숨소리를. 내가 살아 있음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표현한 적이 그동안 있었을까.
김현은 “정말 무서운 욕망이란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왜 그런 욕망이 생겨나는가까지 밝히기를 바라는 욕망”이라고 했다. 이 갈급한 ‘채움’의 욕망의 배면에 ‘성찰’과 ‘반성’의 욕망이 숨어서 날 또렷이 쳐다보고 있다. 이 쓸쓸함이라는 관념덩어리가 뜨거운 시로 태어나지 않을 때, 나는 또 가면을 쓴다. ‘유쾌함’이라는 가면을 쓴다. 거리를 걸으며 그 유쾌한 보폭을 따라가다가 어느덧 쓸쓸함을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_시와정신, 2002.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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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숲

시詩 2006. 11. 29. 15:24

― 兄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제야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무표정한 눈으로 거리를 바라보거나
구석진 골목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그
나는 이제 투사(鬪士)도 아니고 수사(修士)도 아니라던 그
훌쩍 겨울숲에 가겠노라고
버스터미널에 우두커니 서 있을 때
나는 오래도록 그의 등뒤를 서성거렸다
언젠가 술 취한 내 등을 두드리며
다 토해라, 있는 것 다 토해라고
그가 말할 때 나는 몰랐다
이미 목숨까지 다 토한 그를
그래서 끝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던 그는

겨울숲이 오히려 더 따뜻하다고 했다
풍성한 사연들이 모두 마른 채
앙상한 뼈들만 모여 서 있는
그곳이 더 뜨겁다고 했다
겨울숲에서 뜨겁게
뼈를 태우겠노라고,
이미 거죽만 남은 몸,
뼈까지도 아깝지 않다고
쓴 술을 들이키던 그를,
묘비도 없이 바람에 존재를 실어버리는 게
가장 행복한 결말이라고,
정말 시적이라고 말하던 그를
찾으러 겨울숲에 간다
신문에도 남지 않았던 그의 결말은
그가 진정 원하던 것이었다

_시로 여는 세상, 200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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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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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시시각각 2006. 11. 19. 14:54

요즘은 공기에 민감해 집니다.
이제 서울의 공기에 대한 내성이 한계에 닿는듯 합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살까요. 나 또한 마찬가지지만.
이런 문명의 위험한 장난에 동참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서 빨리 떠나야 하는데, 마음만 앞설 뿐.
아무 일도, 아무 계획도 아직 없습니다.
어딘가로 멀리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차갑고,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키고 싶습니다.
그러면 먼 곳을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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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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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의 꿈

시詩 2006. 11. 8. 00:43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촛불도 아니고 감나무도 아니다
미끈한 자동차도 아니고
달콤한 솜사탕도 아니다
차갑고 텅 빈 사물에
쇳물을 들이붓고 싶다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이었다
꿈을 꾸면
붉은 별 하나가 내게 떨어지는 사건이었다
손이 데일까 만지지도 못한 별이
마당에 내려와 날 또렷이 노려보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엎드려 울지 않겠다
슬픔을 우스운 몸짓으로 과장하지 않겠다
해거름에 사양(斜陽)을 보며 사흘을 울겠다
그러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

시와세계, 200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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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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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점에 들렀습니다. 종로에서 친구와 약속이 있었는데, 그만 약속시간이 늦춰지게 되어 어디 시간 보낼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서점에 하루가 멀다하고 드나들었습니다. 책을 좋아해 이런저런 책을 구경하고, 심지어 자리를 깔고 책을 읽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는 게 바쁘다보니 예전처럼 책을 많이 읽지 못합니다. 일과 관계된 문학서적만 읽는 편식독서로 바뀐 것이지요. 또한 책을 구입해도 인터넷을 통해 구입하는 경우가 많아 서점은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서점으로 들어갔습니다.
서점의 풍경 중에 놀란 것은 아직도 많은 어린이들이 서가 사이사이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겁니다. 저도 어린 시절 책을 읽던 기억이 났습니다.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서점은 읍내에나 나가야 있었습니다. 대신 아버지의 서재에서 어른들이 읽는 책이나 월부로 구입한 동화책을 읽었지요. 곰팡내가 나는 어두컴컴한 서재 방바닥에 앉아 읽었습니다. 겨울엔 서재에 난방을 하지 않아 늘 추웠습니다. 그래도 저는 책을 읽는다는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차가운 방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책을 읽곤 했습니다. 계몽사판 소년소녀명작동화나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읽었던 세로쓰기판의 카뮈전집,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한국현대문학전집 등을 갉아먹듯이 읽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지금도 책을 열심히 읽는 어린이들이 많다는 걸 보고 내심 흐뭇했습니다.
그러다 한 어머니의 말을 엿듣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할까말까 정도의 아들을 데리고 온 어머니는 서가의 한 귀퉁이에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점은 지혜의 냉장고야. 아무 때나 필요한 것,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서점에 와서 꺼내 먹으면 돼.”
저는 속으로 옳구나, 저렇게 멋진 말을 하는 어머니. 정말 자식을 잘 키우겠다는 확신을 스스로 했습니다.


책은 지혜의 창고입니다. 인류의 오랜 지식과 지혜는 모두 책에 담겨 있습니다. 책을 통해 우리는 태초의 일들을 생각하고 옛 선조들을 생각하며 현재와 미래를 생각합니다.
예로부터 통치자가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옳은 일을 한 자에게는 상을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일을 한 자에게는 벌을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에게 그 옳은 방향이 어떤 것인지 지침을 마련하고 못 배운 사람은 그것을 잘 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는 대부분 잘 배운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많이 배운 사람들이기에 옳은 일은 무엇인지 누구나가 잘 알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전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게 마땅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가요. 소위 명문대 출신들, 좋은 집안 출신들이 부모를 죽이고 사기를 치고 불법행위를 합니다. 위정자들이 법망을 피해 개인의 사리사욕만 채우는 데 급급합니다. 이러한 이유는 바로 제도적인 교육만 잘 받았기 때문입니다. 학교 교과서만으로는 인간의 복잡한 정신세계를 완벽하게 지탱하지 못합니다. 교과서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독서체험이 어릴 때부터 선행되어야 바른 인간형으로 자라납니다.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를 가리켜 흔히들 ‘각박한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각박하다는 걸까요. 회사에서는 조기퇴직을 당하고, 자식들은 말을 안 듣고, 빚은 잔뜩 쌓였고, 이제 인생 볼 거 없다는 생각 속에 사는 현재의 시간들이 그러하겠지요. 세상의 질서는 돈에 의해서만 운영되지 않습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있다는 걸 하나씩 알아가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입니다. 그 소중한 것들, 귀한 인생의 깨달음들을 아는 마음의 그릇을 만드는 가장 쉬운 노력이 바로 독서입니다. 어떤 이는 건강을 잃고, 어떤 이는 돈과 명예를 잃고 인생을 알아갑니다. 그러나 독서는 그런 것을 잃지 않고도 우리의 삶과 생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다른 이들보다 훨씬 나은 삶을 운영하는 특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04년도 문화관광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난 3개월간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비율이 무려 61.7%나 되었습니다.(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천 명 대상) 그리고 읽는 책들도 거의 경제 경영서 같은 직종에 관계되어 어쩔 수 없이 읽는 책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왜 책을 안 읽을까에 대한 대답은 일이 빠쁘고, 습관이 되지 않고, TV나 인터넷을 하느라 시간이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또한 책을 읽은 사람들 중에서도 대부분이 베스트셀러를 읽었습니다. 획일적으로 독서를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 모든 통계들이 지금 우리의 독서습관을 말해 줍니다.
컴퓨터바이러스를 만든 안철수연구소 안철수 사장도 독서광입니다. 심지어 외국도서를 먼저 읽고 우리나라 출판사들에게 번역을 빨리 해줄 것을 의뢰하기도 한답니다. 효성의 조석래 사장이나 태평양의 서경배 사장 등의 CEO들도 독서광들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독서광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다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미국 전 대통령인 빌 클린턴은 재임시절 년간 60-100여권의 책을 읽었으며 이외의 시기에는 년간 200-300권의 책을 읽는다고 합니다. 한국출판연구소가 올초 발표한 자료에 한국 성인들의 1인당 연간 독서량은 11권이라는 점에 비교한다면 놀라운 양입니다. 클린턴은 책이 자신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고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 지침서 역할을 하며 자신을 단단하게 다지는 버팀목 역할도 책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영재학교에 입학한 어린이들도 대부분 독서의 힘으로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독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서의 중요성은 우리가 몸으로 체득할 때 그 중요성을 압니다. 금방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위대함을 우리는 모르고 삽니다. 독서의 중요성을 아는 자에게만 그 달콤한 삶의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흔히 ‘가을을 탄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평소와 다르게 조금 우울해지거나 이유없이 슬픔에 젖을 때 말입니다. 저도 가을을 많이 타는 편입니다. 슬슬 찬바람이 불어 옷깃을 여미게 될 때. 푸른 낙엽이 노란 옷을 갈아입을 채비를 할 때. 하나둘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며 가슴이 물컹 내려앉을 때, 책 한권을 손에 들고 벤치에 앉아 보세요. 정말 근사한 시간이지 않을까요?

글. 이재훈
현대 모비스 사보_2006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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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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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부는 계절입니다.
스산한 저녁 공원을 걷다 보면
서서히 옷을 벗는 나무도, 점점 작아지는 풀벌레 소리도
조금은 안타깝고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그럴 땐 옷깃을 올리고 따뜻한 마음들을 떠올립니다.
찬바람이 불면 모든 존재들이 서로 가까워집니다.
오른손과 왼손이 서로 만나 몸을 부비지요.
모닥불을 가운데에 놓고 사람과 사람이 모여듭니다.
그동안 너무 바쁘게만 살았습니다.
시간을 내어 사랑하는 사람과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습니다.
몸이 따뜻해지면 마음도 따뜻해져
어렵고 불쌍한 이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서로를 가깝게 합니다.
누군가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몸을 더 움직여 보세요.
그것이 추위를 이겨내는 생명의 몸짓입니다.
이제 곧
얼음이 모여 사는 곳, 겨울나라입니다.


                                                                             글,글씨 | 이재훈 | 이롬 2006.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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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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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늘

산문 2006. 11. 5. 23:44

동부그룹 웹진_2006.11
_http://www.dongbu.co.kr/dongbu_web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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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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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이던가요? 6-7년은 넘은 것 같은데...
HTML로 홈페이지를 직접 만들었던 시절 썼던 소개글입니다.
옛 생각이 떠오르면서 풋풋하네요.

:::::::::::::::::::::::::::::::::::::::::::::::::::::::


이재훈은 쥐띠(1972)다. 별자리는 사수좌이고, 나무는 무화과나무이다. 그는 시를 쓴다.
1998년 <현대시> 신인상에서 '수선화'외 4편으로 등단했다.


* 검색어: 방랑, 아름다운 광기, 낯선 자아, 영혼의 피, 그리고 시

나는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다. 내가 살던 곳은 충북 제천, 강원도 횡성, 강원도 인제, 경북 김천,
                                                                                                                        경북 상주, 경북 점촌,
서울 후암동, 대전, 충남 논산이다. 지금은 서울에서 지내고 있다.

                나는 나님을 믿는다. 나는 상가이다. 나는 자 우는 편이다.
                                     나는
를 쓴다.
                                                                       나는 어머니께서 호랑이꿈을 꾼 후에 태어났다.

나는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다. 나는 조울증이다.

나는 보신탕은 먹을 수 있고 닭발은 못먹는다.
                          나는 바다보다 산을 좋아한다. 그러면서 바다를 더 많이 간다.
                 나는 Jeff beck의 원숙함과,
                                                                Roy buchanan, Yngwie malmsteen의 음울하면서도 격정적인
                  일렉기타
의 사운드를 좋아한다. 따분할 때는
                                                                                Deep purple의 리
치 블랙모어의 휭거링을 상상한다.
           
때론
                                 
Ella Fitzgerald나 Agnes Baltsa를 들으며 깊게 가라앉기도 한다. Benny Goodman과 찰리 파커도 좋다. 핑크 플로이드도 좋다. 타미 볼린......
                                   짐 모리슨도, STY
X도 좋고 King crimson도좋다.
             그리고 블랙사바스 시절의 오지 오스번. 우울한 날엔 Sting을 좋아한다.
                                                                             
이상은도 좋고 원일의 타악기 소리도
                             좋다.                 델리 스파이스도 좋아한다. 한국의 제니스 조플린이라 불리
는,
                 
                  음유시인
승희는 젤로 좋아하는 누나이고... 다 거론하기 어려울만큼 많은 소리들.  

나는 비오는 풍경보다 비오는 소리를 좋아한다.
         
          비오는 날, 텐트에서 느끼는 아늑함을 좋아한다. 텐트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좋아한다.
           
비오는 날 영화 보기를 좋아한다.
                                                             
때론 줄거리보다 색깔을 좋아한다.
                           
그린 파파야 향기와 위대한 유산의 색깔을 좋아한다. 나는 곤색을 좋아한다. 카키색도
         좋아한다.                                                                  
나는 노을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순정보다 의리에 목숨을 건다. 나는 혼자서도 잘 논다.
                                                    장난감 없어도 공상을 한다. 나는 추억을 많이 생각한다.

나의 철없는 고독....
그리고 수많은 작가들과의 짝사랑......불면의 나날들...과 잠의 나날들의
반복....

스물 한 살 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런 것도 있나? 싶었다. 그동안 아주 무모하게 시간들을 소비했다. 시집들을 읽어댔다. 갉아먹듯이.....우리나라엔 뛰어난 시인들이 많다....뛰어난 시인들 중에는 무명인 경우가 더 많다. 시인의 운명이란....참...

나는 한때 대인공포증이 있었다. 나는 시를 사랑한다.
                                       
나는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한다.
나는 짜장면보다 짬뽕이 좋다.                                                           나는 매운걸 좋아한다.   나는 잠이 많다.
                         며칠을 잔 적도 있다.
                                                                   나는 노는걸 좋아한다.  
                 나는 뭐 대충 이런 인간이다
             
몇 번의 사랑, 그리고 끊임없는 내 존재의 시원과 일상의 굴레에서 헐떡거리고 있다.


나는 뭐 대충 이런 인간이다.
개코같이 살 때도 많다. 아무 할 일 없이 시간을 소비할 때도 많다. 하루 종일 텔레비젼만 볼 때도 있다.
바보 같을 때도 있다.
                                                   어쩔 땐 모든 것이 다 보일 때도 있다.

나는 뭐 대충 이런 인간이다...............
                       
나는 지금 자동기술법으로 이걸 쓴다. 지금 생각이 안난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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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4일 광화문에서  (2) 2006.06.05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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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에 이끌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무 잎사귀가 더욱 짙어져
제 스스로 지상에 몸을 내립니다.
사람들은 낙엽 지는 모습에 감동합니다.
그 감동은 잎과 나무의 결별이 이루어낸
새로운 만남 때문입니다.
나도 그들처럼 결별의 축복을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 축복이 이루어낸 새로운 만남을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내 맑은 영혼이 그리움에 가 닿을 것 같습니다.

편지지를 사서 가슴에 고인 말들을
한 칸 씩 적어 그대에게 띄우겠습니다.
그대의 품 안쪽까지 배달될 사랑의 말들을 전하겠습니다.
몇 번의 누름으로 전하는 이메일이 아니라
직접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치겠습니다.
흰 구름의 봉투에 푸른 하늘빛과 분홍 마음을 함께 담겠습니다.
그대와 함께 얘기했던 나뭇잎을 우표로 붙이고
우체국 앞 벤치에 오래도록 앉아 있을 겁니다.
내 가슴이 풍요로운 가을의 수확처럼 차오르는 계절입니다.
내 그리움을 배달할 가을 바람이 산들산들 붑니다.

글,글씨 | 이재훈| 이롬 200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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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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