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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2.02 <명왕성 되다>, <재킷을 입은 시인> 영상 2
  2. 2013.12.02 [행사] 젊음, 시로 폭발하다
  3. 2013.12.02 극단 <두목> 특강
  4. 2013.11.27 [행사] 젊음, 시로 폭발하다_ 웹자보
  5. 2013.11.27 <시원> 동인 옛 동지들과
  6. 2013.11.15 황하의 순례자 (이재훈론)_ 김혜영
  7. 2013.10.14 <어쩌다 당신이 좋아서 - 내 생애 최고의 '사랑 고백'을 꿈꾸는 그대에게>, 곰
  8. 2013.10.13 파주북소리 축제 다녀오다~
  9. 2013.10.13 [경향신문] 포토다큐- 강원 영월 모운동 마을
  10. 2013.10.11 키에르케고어, <유혹자의 일기>(황문수 역), 올재
  11. 2013.10.11 기록
  12. 2013.10.11 홍대에서의 기록
  13. 2013.10.02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유영미 역), 갈라파고스
  14. 2013.09.30 요코미쓰 리이치, <문장(紋章)>(이양 역), 문학과지성사.
  15. 2013.09.29 연극 <달무리>
  16. 2013.09.27 힐링에 중독된 시대의 시_ 신진숙
  17. 2013.09.27 어느 술집의 기록
  18. 2013.09.22 잭 케루악, <길 위에서>(이만식역), 민음사
  19. 2013.09.16 휴버트 드레이퍼스, 숀 도런스 켈리, <모든 것은 빛난다>(김동규역), 사월의책
  20. 2013.09.13 파스칼 키냐르, <세상의 모든 아침>(류재화역), 문학과지성사
  21. 2013.09.13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김정숙역), 챕터하우스
  22. 2013.09.13 막스 피카르트, <인간과 말>(배수아역), 봄날의 책
  23. 2013.09.04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난다
  24. 2013.08.31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민음사
  25. 2013.08.26 가관...
  26. 2013.08.19 <수난의 돌> 중에서
  27. 2013.07.16 나를 치유한 나의 시_ 이재훈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28. 2013.07.12 당신의 물체주머니_ 이재훈, 박성준
  29. 2013.07.12 경계에서 쓰기, 혹은 쓰기의 정치학_ 전병준
  30. 2013.06.28 오늘의 시인_ <시작> 2013년 여름호

 

 

<명왕성 되다>. 영상 : 윤형철 감독. 영상 출처 : 유튜브 

 

 

<재킷을 입은 시인>. 영상 : 윤형철 감독. 일러스트 : 우소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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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

11월 21일 서울과기대에서 <젊음, 시로 폭발하다> 행사가 있었다.

최치언 형의 연출과 극단 <두목>이 함께 했다.

이병률, 강정, 김경주, 오은, 조인호, 장수진 시인과 함께 출연했다.

이날 박성훈 배우가 <명왕성 되다>를 낭송했다. 고맙다! 성훈아.

나는 <재킷을 입은 시인>을 낭송했다.

수업을 더 늦출 수 없어 2부를 보지 못해 아쉬웠다.

뒤늦게 뒷풀이 자리에 합류했다.

다시 만난 2인조 밴드 <투명>과 영상작업을 한 윤형철 감독과의 만남은 오래 남을 것이다.

 

 

<명왕성 되다>. 낭송 : 박성훈 배우. 영상 : 윤형철 감독.

 

 

<투명>의 민경준, 정현서 씨와. 정현서 씨와는 동갑내기여서 친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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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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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3일과 17일. 두 차례에 걸려 극단 <두목> 배우들과 수업을 진행했다.

나는 극단 <두목>의 명예단원이다.^^

함께 놀아준 배우들. 오래 함께 만났으면 좋겠다.

11월 17일. 삼선교에 위치한 극단에서 기념 촬영 한 컷.

 

이준혁, 김현, 이재훈, 손인정, 이설, 원인진(오은지)와.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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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

지난 11월 12일. 권현형 누나의 시집 <포옹의 방식>(문예중앙)이 출간되어 축하자리를 마련했다.

<시원> 동인 멤버였던 옛 동지들과 오랜만에 만났다. 대학로 2차 자리에서.

잘 빚어진 포도주처럼. 시간도 진하게 익는다.

몇몇은 일정상 참석을 못했다.

장무령, 권현형, 최치언, 이재훈, 정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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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0) 2013.10.11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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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의 순례자

- 이재훈론

 

 

김혜영

 

 

 

1. 기원을 향한 아득한 향수

 

원시 부족사회는 그 집단을 다스리는 위대한 아버지가 있었고,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법과 심판을 수용해야 하는 윤리적 구속과 그 속박을 끊고 감히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고픈 욕망도 함께 가졌을 것이다. 아버지의 법을 지키는 것과 아버지의 법을 위반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종교든 세속의 정치권력이든지 언제나 의식의 틈새를 비집고 출현하는 사건이다. 가장 작은 집단인 가족 안에서 아버지가 차지했던 권력은 어린 아들에게 전지전능한 아버지의 환상을 품게 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뿐만 아니라 원시 사회의 추장이나 고대 국가의 왕이 소유한 절대 권력이 갖는 아우라가 어쩌면 자연스럽게 전지전능한 그 어떤 절대적 존재에 대한 종교적 사유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고대국가의 왕이 소유한 신성함은 종교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왕의 집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금기와 터부 역시 내포하고 있다. 그 절대적인 아버지가 현대에서는 여러 번 살해되었고 끊임없이 전복되고 있다. 기원으로서의 아버지를 해체한 현대 문명 속에서 고독한 개인들은 현상의 물질적 가치 혹은 생존을 위한 가혹한 경쟁체제에 매몰되어 황하에 익사될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이재훈의 시 세계는 기독교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존재의 기원에 대한 상상과 별을 노래하는 시인의 깊고 푸른 여정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적 공간은 광활하고 존재의 깊은 심연에 대한 탐색을 추구한다. 첫 시집인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는 “말”이라는 상징적 동물과 언어라는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시적 화자는 상상 속의 말을 타고 아득한 존재의 기원을 찾아 중세의 기사처럼 순례를 떠난다.

 

   1

 

   그곳을 찾았을 때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

   가없는 기억의 언덕도 무너지고

   또닥또닥,

   희미한 발굽 소리만 들렸는데

 

   2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

 

   ―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부분[각주:1]

 

세계의 근원을 기독교에서 로고스 즉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거룩한 신의 말씀으로 창조된 우주와 인간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시인은 맹목적으로 신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기원에 대한 역사를 쓸 야심을 갖는다. 이 세상에서 아무도 가지 않는 나만의 시원, 나만의 언어 찾기에 골몰하는 것이다. 그가 타고 가는 말은 고대 토템에서 부족들이 숭상했던 여러 동물들 즉 황소, 사슴, 말, 돼지, 매, 뱀 가운데 하나이다. 시인이 말을 선택한 것은 말을 타고 하늘을 날고픈 비상의 의지와 함께 언어의 연금술사를 꿈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사명은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언어에 자신만의 새로운 언어의 집을 건설해, 커다란 변화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을 지향하는 시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그의 첫 시집이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라고 절연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재훈의 시적 여정에서 이토록 담대한 선언이 또 있겠는가. 자신의 목을 스스로 자른다는 것은 자살의 의미보다는 성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부분이다. 예수의 비범한 능력으로는 죽음의 잔을 피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선포한 진리를 위해 죽음의 길을 스스로 걸어간 예수와의 동일시가 비쳐진다. 예수가 유대교의 모세 신앙을 중심으로 한 유일신 개념과 선택받은 민족에 대한 우월의식을 타파하고 보다 넓은 보편성의 종교로 방향을 전환한 것처럼 이재훈이 시인으로서 지향하는 것은 새로운 자신만의 기원 찾기인 것이다.

인간 존재의 본질과 아득한 시원에 대한 탐색을 지향함에 있어서 아버지를 위반하는 아들의 출현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이다. 중세나 16,17세기의 종교시에는 전능한 하느님에 대한 찬미와 신성한 섭리에 부합되는 삶을 살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의 종교시는 신에 대한 헌신이나 찬미 보다는 신으로부터 이탈한 현대인의 초상이나 신을 전복하려는 시도를 한다. 남성적인 아버지 신에 대한 반기로써 여성시인들은 가부장제의 모태로서의 아버지 신을 거부하고 살해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한다. 이재훈의 시 곳곳에 스며있는 종교적 상징과 이미지는 아버지 신을 살해하고 아들로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보다는 그 어떤 근원에 이르기까지의 혼란스러운 순례의 기록으로 읽혀진다. 첫 시집에서는 낭만주의적 사유의 흔적을 보이면서 아득히 먼 고대의 시공간을 배회하는 영혼의 몸짓을 묘사하고, 둘째 시집인 <명왕성 되다>에서는 자본주의라는 물신 사회의 왜곡된 이미지를 황하의 다양한 풍경 속에 풀어놓는다. 욕망과 자본이라는 이교도의 신을 위해 예수라는 인격신을 살해한 현대 문명의 기괴한 얼룩을 스케치한다. 대도시의 풍경과 중국을 관통해서 흐르는 황하 이미지를 중첩적으로 겹쳐 놓음으로써 고대 문명과 현대 문명의 이질성과 여전히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을 펼쳐 보인다.

모세는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선언함으로써, 절대적 진리가 감각적 대상이 아닌 정신적인 것임을 그의 백성들에게 각성시킨다. 고대 문화에서는 이집트 신화처럼 여러 다양한 동물 신의 형상과 태양신 ‘라’ 의 상징이 지배적이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영원히 존재하고, 무한히 자비와 축복을 베푸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라는 유일신의 개념은 이전의 다신교의 전통을 억압해 버린다. 예수가 죽은 이후에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한 유대인 바울 역시 육체 보다는 정신적 사랑의 우위를 설파한다. 그러나 이재훈은 그러한 가치에 함몰되지 않고 감각의 순수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그의 시「수선화」에서는 한밤중의 몽정인지 자위인지 알 수 없지만 사춘기 소년의 육체에서 꽃피는 생명의 노래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한밤중에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을 잘 무렵이면, 내 몸에 꽃씨 앉는 소리가 들린다. 간지러워, 암술과 수술이 살 부비는 소리가 사물거리며 온몸에 둥지를 틀고, 어머 꽃피네, 마른버짐처럼, 간지러운 꽃이 속옷새로 피어나네, 내 몸에 피는 꽃, 어머 내 몸에 핀 꽃, 나르키소스의 영혼이 노랗게 물든, 수선화가 핀다, 아름다운 내 몸, 노랑 꽃파랑이 쓰다듬으며 어깨에서 가슴을 지나 배꼽으로 핀 꽃과 입맞추고, 시커면 거웃 사이에도 옹골지게 핀 꽃대 잡는다, 아아, 아 에코가 메아리치네, 아름다운 내 몸, 거울에 비추어, 아아아 에코가 흐느끼네, 내 몸이 하분하분 물기에 젖네, 꽃들이 더펄거리며 시들어가네, 나르키소스여 내 몸에 오지 마소서 五慾에 물든 몸 꽃피게 마소서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나

 

   ― 「수선화」 전문[각주:2]

 

사춘기 소년이 겪는 성적 욕망의 발산을 수선화의 이미지를 통해 묘사하면서, 금욕을 미화시키는 종교 사이에서 갈등하는 소년의 내면을 보여준다.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가 자기애에 빠진 모습도 동시에 연상시킨다. 나르키소스가 연못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연못에 빠져드는 모순을 두려워하는 시적화자의 심적 갈등이 구체화되어 있다. 자기애를 지향하는 이드의 폭력적인 충동과 타자에의 사랑을 강조하는 초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심리적 에너지가 예술로 승화된 시이다. 생명으로 충만한 육체의 순수한 욕망과 그것을 억압하려는 윤리 사이에서 고민하는 소년의 긴장과 두려움이 노란 수선화처럼 어둔 밤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시이다.

 

2. 명왕성처럼 퇴출당한 신의 아들들

 

프로이트는 <종교의 기원>에서 종교와 신경증과의 상관성을 흥미롭게 진행하면서 정신적 외상에 대해 설명한다.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라는 논문에서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탈출시키고 새로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려한 모세를 살해한 기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세가 가르쳐준 유일신의 교리가 그들을 너무 억압했기에 모세를 살해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를 죽인 죄의식과 함께 모세의 신앙으로의 회귀를 전승을 통해서 이루어왔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를 죽인 후, 죽은 예수에 대한 사랑을 재확인하고 예수의 성찬식을 되풀이하는 종교적 의식과 유사하다. 이 같은 증상이나 사고의 패턴이 신경증 환자에게도 나타난다고 그는 주장한다. 강박증을 가진 환자들이 무엇인가를 금기시하거나, 강박적으로 특정 행위를 반복하는 것 역시 속죄 혹은 자기 방어의 충동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의 토템 신앙에서 부족의 상징으로 신성시하는 동물을 잡아 서로 나누어 먹는 전통이 기독교에서 예수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는 의식으로 계승되었다고 보고 있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는 현대 종교도 고대 원시 사회의 토템 신앙과 다신교의 여러 이미지들을 계승하고 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로버트슨 스미슨의 토템 이론을 바탕으로,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던 무리는 토템을 받드는 형제를 중심으로 하는 무리로 자리바꿈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아버지로부터 승리를 쟁취한 형제들은 아버지를 죽인 뒤부터 아버지의 소유였던 여자들을 포기하고는 족외혼속을 좇게 되었다. 이로써 아버지의 권능은 붕괴되고 가족은 모권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들의 양가적인 감정 태도는 그 이후의 전 발전 단계에 걸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형제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특수한 동물을 토템으로 세웠다. 이 토템 동물은 형제들의 조상이자 수호령신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다치게 하거나 죽여서는 안되었다. 모듬살이의 남성들은 일년에 한 번씩 한자리에 모여 의례적인 향연을 벌였는데, 그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토템 동물(평소에는 숭배의 대상이던)을 죽이고는 모두 그 고기를 찢어 나누어 먹었다. 모듬살이의 남성이면 어느 누구도 빠질 수 없는 향연은 아버지 살해의 의례적인 반복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사회적인 질서, 윤리적인 규범, 그리고 종교가 시작되었다. 로버트슨 스미스의 토템 향연과 기독교의 최후의 만찬 사이의 유사성은 무수한 내 선배 학자들의 주목을 환기시켰다.[각주:3]

 

기독교의 만찬의식을 고대의 토템 동물을 제사지내고 서로 나누어 먹는 전통과 연관시키는 것은 흥미롭다.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절대적인 아버지의 잔영과 그 아버지를 살해하는 아들들의 이미지는 인간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증상임을 설명하고 있다. 개인의 측면에서는 유아기 때 겪은 외상 같은 것들이 잠복되어 있다가 사춘기나 성인기에 반복되어 출현하는 신경증의 형태로 나타난다. 종교에서도 부친살해와 그에 대한 죄의식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이성의 억압을 피해 은폐되었다가 전승이라는 구술의 방식 혹은 문학이나 예술의 형태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재훈의 시 「할례의 연대기」에서는 어릴 적 경험한 폭력이 어른이 된 이후에도 수족관의 물고기를 보면 반복해서 떠오르는 양상을 볼 수 있다. 동네 형들의 짓궂은 장난에 저항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내면에 증오심을 차곡차곡 쌓지만 한편으로는 그 감정을 억압해버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였던 수족관의 물고기를 풀어주는 행위로 전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네 형들이 내게 침을 뱉던 날,

하얗다며 얼굴에 진흙을 바르던 날,

공중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오줌을 내갈겼다.

붉은 얼굴로 욕하는 연습을 했다.

다행히 집엔 물고기가 있었다.

수족관 유리에 입술을 대고 혀를 내밀었다.

차갑고 막막하여 아름다운 감촉.

침묵을 알아버린 호흡.

나는 방 안에 박혀 물고기와 놀았다.

온 몸이 달아올라 수족관에 다리를 비볐다.

물고기 때문이었다.

악한 아이를 죽이지 못하고

풀밭 위에 누워 한없이 울게 된 것은.

나는 시퍼런 칼을 든 모험의 소년이고 싶었다.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방법쯤은 알고 있었다.

침착하고 고요하게 모두 죽이고 나면,

평정이 온다는 것을.

그것이 운명일지라도.

물고기를 호수에 풀어 주었다.

물에 놓자마자 내 발등을 핥고

허벅지를 핥고 사타구니를 깨물고는

서서히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슬쩍, 물 위에 비치는 내 몸.

온 몸에 비린내가 났다.

가랑이에서 썩은 내가 났다.

난삽한 사랑이 시작되었다.

과분하게 영원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 「할례의 연대기」 부분[각주:4]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신성한 행위이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하는 거세의 의미를 내포한다. 신성한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기가 선행한다. 즉 인류사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근친상간에의 금지일 것이다. 어머니와 자매들에 대한 욕망을 절단하는 의미로서의 거세가 기본적인 의식의 구조로 잠입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갖는 선민의식도 거세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거세의 상징인 할례를 받아들임으로써 거룩한 신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이재훈은 소년의 거세 공포와 함께 거세를 감행하는 절대적인 아버지가 되고픈 욕망을 동시에 표출하고 있다. 그렇지만 감히 폭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풀밭에서 우는 소년은 “나는 시퍼런 칼을 든 모험의 소년이고 싶었다.”라고 독백하면서, 사악한 형들에게 폭력적으로 진압하려는 의지를 강화시킨다. 하지만 이 욕망은 초자아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수면 아래 잠기고 이드의 욕망으로 억압될 뿐이다. 그렇지만 이 억압된 충동이 갑자기 수족관의 물고기를 호숫가에 풀어줘 버린다. 의식의 틈새를 뚫고 나오는 이 무의식적 행동은 욕망의 자유로운 분출과 맞닿아 있다. 지나치게 윤리를 강조하는 삶의 굴레를 벗어나고픈 다양한 충동들, 성적 충동이나 폭력에의 욕구 등을 분출하는 방식에서 오히려 신의 윤리를 전복하고픈 욕망이 불현듯 출현한다. 그리고 그는 과감히 “과분하게 영원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라고 선언한다.

고대의 전지전능한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들이 얻은 자유는 새로운 사회의 틀을 짜면서 공존의 삶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현대의 양상은 아버지의 절대적 자리에 자본이라는 물신이 차지한 듯하다. 형이상학적 사유보다는 감각적 실존에 더 함몰되고, 정신보다는 육체의 가치에 더 매몰되는 듯하다. 그의 시 「만신전(萬神殿)」에서는 구원 같은 개념보다는 대도시에서 출현하는 유령과도 같은 욕망의 흔적이 그려져 있다.

 

저는 오래전 아버지를 죽이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뒤로 수많은 신들이 제 속에 들어와 소리를 지릅니다. 홀짝 홀짝 살들을 빨아 먹습니다. 가슴이 휑뎅그렁해져서 사다리를 타고 허공 위에 올라갔습니다. 십자가가 네온을 켜고 붕붕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오리온을 찾으려고 별자리를 하나씩 짚어 보았습니다. 거인의 눈과 코와 활 오늬의 도톰한 입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 「만신전(萬神殿)」 부분[각주:5]

 

위의 시에서 도시를 배회하는 유령 같은 도시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쓴 연작시인「대황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황하는 고대 중국 문명의 젖줄기로서 생명의 물이었지만 이재훈의 시에 등장하는 황하는 불모의 이미지이다. 마치 엘리엇의 「황무지」처럼 풍요의 물이 아니라 메마른 사막과 같은 느낌이 강하다. 유순하면서도 장대하게 흐르는 물줄기는 동양철학에서는 도의 이미지로서 절대적인 진리의 현현처럼 간주되지만, 그의 시에서는 낙원을 상실한 채 끝없이 질주하는 문명의 속도에 지친 낙오자들이 드나드는 길목처럼 느껴진다. 첫 시집에서 원시 시대의 신성하고 거룩한 별을 동경하던 시적 자아가 척박한 도시 문명의 길바닥을 맨몸으로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왜소화된다. 그래서 결국은 대다수의 시민들은 태양계에서 어느 날 문득 퇴출당한 명왕성처럼 신의 아들의 지위를 상실한 채 서서히 잊혀져가는 익명의 존재들이 되어간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 「명왕성 되다(plutoed)」 전문[각주:6]

 

이재훈의 「명왕성 되다(plutoed)」시편은 최초의 아름다운 말의 부족을 찾아 떠난 시적자아가 팍팍한 도시에서 발견하는 자화상의 한 단면이다. 아름답고 성스러운 별의 영혼임을 인식하는 연금술사가 문득 발견한 것은 초라한 소시민의 일그러진 얼굴이다. 늦은 밤 지하철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익숙한 얼굴들의 피로감이 현대 도시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더 이상 전지전능한 신의 자랑스러운 아들도 아니고 욕망의 극한까지 질주하는 악동도 아니다. 일상의 사소한 의무감에 묶여 묵묵히 달팽이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시인이 발견하는 이 작고 왜소한 자화상이 갖는 위력은 이런 데 있다. 찬란하고 거룩하게 빛나는 별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사라지는 ‘소멸’을 꿰뚫는 시선이 예언자의 눈빛이다. 종교의 환상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허무를 처절할 정도로 직면하는 용기가 빛난다. 유대인처럼 선택받았다는 과잉된 자기 확신도 거부하고, 아버지의 억압적인 거세를 조롱하고 비웃을 수 있는 시인의 말은 하늘을 날아가는 적토마처럼 독자의 인식에 빗금을 지른다. 지나치게 엄격한 윤리 역시 억압이 되어 그 욕망을 대리적으로 분출하게 마련이고, 자유를 탐닉하는 자아 역시 먼지처럼 세상에서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불멸을 꿈꾸는 연금술사의 끈질긴 욕망은 새로운 사건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제물로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연금술사의 꿈」)에서처럼 소멸을 지향하는 찬란한 꿈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가 궁금해진다. 자신의 몸을 죽여 제물이 된 고대의 토템 동물처럼, 혹은 살해된 모세처럼,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처럼 시인은 자신의 말이 아득한 먼지처럼 사라질지라도 누군가의 밥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기억의 흔적처럼 전승을 통해 출현하는 종교적인 사건처럼, 혹은 신경증 환자의 외상처럼 상처로 얼룩진 욕망들이 그의 시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아주 작은 먼지일지라도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별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그의 통찰력이 환한 빛을 비춘다. 연금술사는 자신의 몸을 내어주듯 자신의 내밀한 언어를 내밀어 허무한 생을 건너는 불사조의 깃털이 된다.

 

 


출전 : <시와사상>, 2012년 가을호.

 

 

  1. 이재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2005. p. 19-21. [본문으로]
  2. 이재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2005. p. 18. [본문으로]
  3. 지그문트 프로이트, <종교의 기원>,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7. p. 420-1. [본문으로]
  4. 이재훈, <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p. 2-73. [본문으로]
  5. 이재훈, <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p. 36-7. [본문으로]
  6. 이재훈, <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p. 2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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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20인이 첫사랑에게 쓴 서간문 형태의 에세이.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라는 말처럼 시대의 가치가 아무리 변하고, 유행과 시류가 변해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사랑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하다. 이 사랑은 소통을 통해서 살아 움직이는 것 아닐까.

그래서 우리나라 대표 시인 20인이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한 첫사랑을 호출해 그의 근황과 안부를 묻고, 첫사랑과 시인의 마음을 잇는 뜨겁고 절절한 사연을 문장에 담았다. 사랑이라는 주제로 편지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책에는 시인 개개인의 편지를 '육필'로도 수록하였다.

 

1부 그대는 내 마음의 언더그라운드
추억을 통해 인생은 지나간다 │ 천양희 │ 9
아마도 중얼거림 │ 김경주 │ 17
마음이 즐거워지는 네이밍 │ 이근화 │ 23
먼 그대에게 │ 박정대 │ 31
비밀의 서랍을 열듯, │ 이민하 │ 43
너에게 │ 김언 │ 53
이상하고 외로운 소실점 │ 이제니 │ 63
꿈처럼 오련하게 사레들리네 │ 이재훈 │ 73
나는 안녕하지 않습니다 │ 유형진 │ 81
첫사랑을 향한 연서 │ 박후기 │ 89
봄의 묵서 │ 조용미 │ 99
나의 첫사랑에게 │ 윤성택 │ 109
피와 눈빛과 입술의 일 │ 이혜미 │ 117
잘 지내고 있나요 │ 유희경 │ 125
도망가고 싶었던 마음 │ 이영주 │ 135
당신은 내게 사랑을 말했죠 │ 윤성학 │ 143
공작새가 깃들어 있다지요? │ 조윤희 │ 153
당신은 혹시 내가 아는 모든 사랑이 아니던가 │ 강정 │ 163
하필(何必), 이라는 말 │ 박연준 │ 171
에로 테쿰 │ 김영승 │ 181

2부 우리는 미래에 당도해 있는 연인
스무 통의 손 편지 │ 193

 

 


hoonyletter
최근작 : <어쩌다 당신이 좋아서>,<부재의 수사학>,<명왕성 되다> … 총 7종 (모두보기)
소개 :
1972년 강원 영월 출생.
1998년 <현대시> 신인상으로 등단.
2012년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을 수상.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2005), <명왕성 되다>(민음사, 2011), 지은 책으로 <현대시와 허무의식>(한국학술정보, 2007), <딜레마의 시학>(국학자료원, 2008), 인터뷰집 <나는 시인이다>(팬덤북스, 2011)가 있다. 중앙대, 경기대, 열린사이버대, 숭의여대에서 글쓰기와 문학을 강의했다. 2012년 현재는 건양대, 서울과학기술대에서 강의하면서 <현대시> 부주간, <시와세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줍은 시인은 편지를 쓰고,
고요한 내 마음은 일렁인다!”

지우려 할수록 또렷해지는 첫사랑님께
한국 대표 시인들이 띄우는 스무 통의 러브레터

▣ 누구의 맘속에나 한 번쯤 피어나는 첫사랑님께 한국 대표 시인들이 띄우는 육필 편지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20인이 첫사랑에게 쓴 서간문 형태의 에세이인 『어쩌다 당신이 좋아서』가 웅진문학임프린트 곰에서 출간되었다.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라는 말처럼 시대의 가치가 아무리 변하고, 유행과 시류가 변해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사랑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하다. 이 사랑은 소통을 통해서 살아 움직이는 것 아닐까. 그래서 우리나라 대표 시인 20인이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한 첫사랑을 호출해 그의 근황과 안부를 묻고, 첫사랑과 시인의 마음을 잇는 뜨겁고 절절한 사연을 문장에 담았다. 사랑이라는 주제로 편지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책에는 시인 개개인의 편지를 ‘육필’로도 수록하였다. 디지털 문화의 보편화로 SNS와 채팅 문화는 일상화되고 아날로그적인 접촉은 희박해지고 있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순수한 대상인 첫사랑을 호명하고 그에게 손으로 편지를 쓰는 일은 매우 상징적이면서 호소력 짙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 하필, 어쩌다 당신을 사랑한 ‘나’의 고백
일생에 단 한 번 첫사랑님께 비밀스러운 편지를 쓴다면……


『어쩌다 당신이 좋아서』에 수록된 20편의 편지에는 첫사랑을 향해 열병처럼 타올랐던 마음을 뒤늦게나마 고백하거나, 현 시점에서 느끼는 복잡하고 단호한 심정을 그려내기도 하며, 첫사랑만큼은 여운이 살아남기를 바라는 심정 또한 녹아 있다. 편지에서 시인들은 “당신을 사랑한 것은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박연준)이라 하고, “첫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사레들릴 것 같”(이재훈)다 말한다. 여느 첫사랑처럼 “해마다 오월이 되면 환절기 감기처럼 마음을 앓”(이민하)고, “한때 내 실재에 대한 배고픔이었고, 내 영혼의 창을 흔든 바람”(천양희)이라 떠올리는 시인도 있으며, 여전히 “너는 나와 함께하고 있어. 툭 털어냈는데 도로 와서 앉고는”(이근화) 한다는 고백도 눈에 띈다. 또 그 사람을 생각하면 어떤 곳, 어떤 사물, 어떤 동식물이 노랫말처럼 쉴 새 없이 떠오르기도 한다.

당신은 걷는 걸 좋아했는데, 당신은 늘 큰 눈에 호기심 어린 눈빛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 기억이 맞는다면 나는 당신의 그 큰 눈동자 속으로 떠내려가는 음악 같은 것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만나는 동안 자주 면이 고운 바지에 올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분홍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요. 또한 당신은 고양이를 무척이나 기르고 싶어 했는데 지금은 어떤 색깔과 종류의 고양이를 기르고 있는지, 당신은 맛있는 것을 보면 눈이 커지면서 새근새근 옹알이를 하곤 했는데, 내 말투를 따라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p.21, 김경주, 「아마도 중얼거림」 중에서)

첫사랑의 시작은 자신도 모르게 시나브로 깃든다.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전에 “너의 빛”(김언)으로 생겨나 세상을 비춘다. 아니면 “실제로 당신을 겪었을 수도, 아니었을 수도”(강정) 있는 우두커니 떠올린 사람일는지도 모른다.

얼굴 없는 나의 동행자는 조금씩 조금씩 얼굴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고, 그 얼굴은 순식간에 당신의 얼굴이 되었고, 그것은 거울이 되어 다시 나를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야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었고,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서로의 이름의 의미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p.69, 이제니, 「이상하고 외로운 소실점」 중에서)

▣ 시리지만 뜨겁고, 냉정하지만 두근거리는 시인의 첫사랑
내 생애 최고의 ‘사랑 고백’을 꿈꾸는 그대에게


첫사랑은 여운과 같아서 지우려 할수록 사라지지 못하고 가슴에 남는다. 함께한 날들이 짧았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 더 가까워질 수 없다 해도 강렬하고 애틋하기만 하다. 끝내 미안하고 고맙고, 그 사람이 잘 지내기만을 바라본다.

당신과 함께했던 봄은 단 한 번뿐이었지만 혼자서 보낸 봄들도, 나머지 봄들도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해마다 봄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애틋했습니다.(p.105, 조용미, 「봄의 묵서」 중에서)

아아 나의 가장 먼 곳에 그대는 있으라
그리하여 내 영원히 꿈꾸는 그리움의 실체로 그대는 남으라
그대를 꿈꾸기에 나는 영원히 그대를 사랑할 수 있으리니(p.41, 박정대, 「먼 그대에게」 중에서)

『어쩌다 당신이 좋아서』의 시인이 첫사랑님께 쓴 편지는, 설레고 따뜻하며 안타까우면서도 진한 감동을 자아낸다. 누구의 가슴에나 한 번씩 피어나는 첫사랑의 감정을 다시금 일깨우고, 나아가 우리 시대 사랑의 모습과 그것의 소중함을 한 번쯤 돌아볼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 시인에게 사랑이란

° 천양희에게 사랑이란…… 여운만이라도 살아남기를,
그리고 다시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
° 김경주에게 사랑이란…… 떠나가고 나서야 배우기 시작하는 언어, 아마도 중얼거림.
° 이근화에게 사랑이란……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손으로 만든 상자들처럼 그 미묘한 차이가 만들어주는 틈.
° 박정대에게 사랑이란…… 우리가 알 수 없는 아득한 그 무엇을 서러움 없이 툭, 하고 만졌다가 그리워하고
또 서러워졌다가 후회도 하고 안도도 하며 그렇게 열렬히 자기 마음의 불꽃을 태우는 것.
° 이민하에게 사랑이란…… 우리가 함께 비운 찻잔처럼 어둠 속에 남아 있는 태양의 온기.
° 김 언에게 사랑이란…… 적어도 한 사람의 기억을 붙들고 더도 덜도 말고 그 빛만 기억하라는 것.
° 이제니에게 사랑이란……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는 빛, 둘만의 암호와도 같은 이름을 간직하는 것.
° 이재훈에게 사랑이란…… 사람의 일이며, 살아가는 일이며, 함께 옆에서 호흡하는 일.
° 유형진에게 사랑이란…… 여전히 안녕하지 못한 채 비바람 속에 서 있는 일.
° 박후기에게 사랑이란…… 종말을 예감할 때마다 숨이 턱, 막히지만 뜻대로 멈출 수 없는 것.
° 조용미에게 사랑이란…… 처음 들을 때부터 수백 번, 수천 번 들은 지금까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신선한 공기가 많이 포함된 말.
° 윤성택에게 사랑이란…… 전 생애를 비밀에 걸었을 때에만 이루어지는 것.
° 이혜미에게 사랑이란…… 어떤 서투름도 추레함도 빛나는 무엇이 되어 드리워지는 것.
° 유희경에게 사랑이란…… 바라는 것 하나 없이, 그대로.
° 이영주에게 사랑이란…… 온몸을 휘감는 전율과 뼈의 이동.
° 윤성학에게 사랑이란…… 덜컹이는 눈물 너머 당신에게 오래오래 손을 흔드는 것.
° 조윤희에게 사랑이란…… 아무리 순수한 사랑에도 허영의 공작새가 깃들어 있는 것.
° 강 정에게 사랑이란…… 뫼비우스 띠처럼 안으로 굽어 바깥으로 휘어져 나가는 기억의 표면장력 안에서
여전히 새로 씌어지고, 지워져버리는 것.
° 박연준에게 사랑이란…… 공중에서 부유하는 뿌리를 서로 보듬어주는 일.
누가 사랑을 한곳에 심을 수 있겠어요?
° 김영승에게 사랑이란…… 어쩌면 태어남 그 자체. 살고 싶어서 누군가를 태어나게 했고,
그리고 태어난 그 역시 살고 싶어서 태어난 것. 그 ‘살고 싶음’이 사랑.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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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일. 파주북소리 축제 행사 중 <아시아 작가와 도시>에 참여하고 왔다.

문학콘서트 중에 짝꿍프로젝트라는 행사가 있다.

나는 우즈베키스탄의 에쉬코빌 쉬쿠르 시인과 만남을 갖고 함께

독자와 만났다.

 

에쉬코빌 쉬쿠르((Eshkobil Shuku)

시인이자 방송인. 1962년 쿰쿠르간의 수르한다리야 지역에서 출생. 1979년부터 1984년까지 카쉬겐트 국립대학에서 문헌학을 전공했다. 여러 권의 시집을 펴냈는데, 그의 많은 시들은 우즈벡 민족의 신화와 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인으로서 일찍이 우스몬 노시르 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2008년에는 무흐무드 코쉬카리아 탄생 백주년을 맞이하여 제정된 기념문학상을, 2012년에는 우즈벡공화국 문화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의 시는 러시아, 미국, 터키,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등지에서도 번역 소개된 바 있다. 현재 국립텔레비전 라디오 방송국의 우즈베키스탄어 채널의 주편으로 재직 중이다.

 

쉬쿠르 선생과 상견례를 하며 우즈벡 전통 모자와 작은 도자기인형을 선물받았다.

이현호 시인과 함께 진행했다.

 

 

 

 

문학콘서트 중에 에쉬코빌 쉬쿠르 선생은 <인생>이라는 시를 낭송했다.

시적인 낭송이었고, 한 번 들었는데도 귓가에 계속 남았다.

매연 첫 행의 "아하이 아하하이"의 반복은 얄리얄리 얄라셩 같은 후렴구로 이해하면 된다.

시인은 우즈벡의 구전문학과 신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토테미즘, 조로아스터교, 불교, 이슬람교와 같이

다양한 신앙과 종교의 지혜와 풍습이 작품세계에 들어가 있다.

그와 대화하던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문학은 진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는 말. 본질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문학을 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쓰는 것이 문학이라는 것. 또한 문명이 발달되어 트렉터가 생기기까지 1만년이 걸렸고, 그후 우주선이 만들어지기까지 6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TV, 인터넷 등 문명의 발달은 더 빨리, 더 빨리를 외치고 있다. 이런 문명의 발달에서 인간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책밖에 없다. 문학밖에 없다는 것.

 

 

영혼


에쉬코빌 쉬쿠르


아해 아하 해이 아해 아하 해이
난 꿈에서 새로 보이고 싶어
난 새의 꿈이 되고 싶어

 

아해 아하 해이 아해 아하 해이
단어 중에서 제일 예쁜 꽃이 되고 싶어
꽃 중에서 제일 예쁜 단어가 되고 싶어

 

아해 아하 해이 아해 아하 해이
난 결혼식의 노래가 되고 싶어
난 노래로 결혼식 있고 싶어

 

아해 아하 해이 아해 아하 해이
난 눈에서 언어가 되고 싶어
난 언어의 눈이 되고 싶어
아해 아하 해이 아해 아하 해이

 

 

10월 6일에는 파주북소리를 다시 찾아 글쓰기 대축전에 참가하여 독자들과 만남을 갖고 글쓰기 멘토링을 했다.

함께 참여한 시인들과 홍대에서 뒷풀이를 했다. 짧고 굵게 먹은 날.

윤석정, 박찬세, 임경섭, 이용임, 이재훈, 이현호.

후에 한인준, 석지연 시인이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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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

내가 태어난 곳.

강원도 영월 모운동 마을이 신문에 나왔다.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자꾸 유명해져 간다. 아마 스토리텔링이 있기 때문이리라.

이제는 기억마저 희미한 곳.

영월 모운동.

 

 


 

 

하늘 아래, 구름 위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망경대산 싸리재에서 모운동 마을 주위로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면 ‘구름처럼 모여든다’는 말뜻이 무언지 실감한다.


동화 속 주인공 같다는 마을 이장의 농담에 할머니들이 웃고 있다. 탄광촌 50여년의 흥망성쇠를 지켜온 광부의 아내들이다.


구름도 쉬어가는 첩첩산골에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인생 막장에야 찾아온다는 탄광은 가방끈도 짧고 특별한 기술도 없는 필부들에게 가장 노릇하기 안성맞춤인 직장이었다. 돈을 캐낸다는 소문을 들은 사내들은 해발 1000m가 넘는 망경대산 7부능선 산꼬라데이(산꼭대기)를 넘어왔다. 강원 영월군 김삿갓면 주문2리 옛 탄광촌 모운동 마을이다.

“여기 시집온 색시들은 처음에 네 번 놀래요.”

두 살 때 광부 아버지를 따라 모운동에 온 김흥식 이장(58)이 부인 손복용씨를 보며 웃는다. 부모를 떠나 탄광마을에 시집가는 색시들은 구불구불 굽이치는 험한 산길에 놀라며 눈물을 흘린다. 해질 녘에야 망경대산 싸리재에 오른 여인들은 별빛처럼 반짝이는 광부 마을의 야경에 감탄하며 흘리던 눈물을 훔친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새색시들은 지난 밤 자신이 본 휘황찬란했던 마을이 단지 함석집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짓는다. 이렇게 세 번이나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지아비를 탄광에 배웅했던 아낙들은 마을 집들의 모양새가 모두 똑같아 자기 집을 찾을 수가 없어 망연자실했단다.

“당구장, 사진관, 미장원, 양복점, 병원, 모 없는 게 없었더래요.”

하늘 아래 제일 높은 모운동 탄광마을은 2000여명의 광부들로 시끌벅적했다. ‘별표’ 연탄을 만들던 옥동광업소가 그들의 직장이었다. ‘옥광회관’이라는 극장이 있었는데, 서울 명동에서 개봉한 영화 필름이 두 번째로 도착할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간조(월급)날이면 마을 공터에는 영월읍보다 큰 장이 열렸다. 산길을 달리는 마이크로버스는 물건을 팔러 오는 상인들로 콩나물시루가 됐다. 여관방들도 모자라 한 방에 여러 명이 새우잠을 잤다. 왕대폿집은 밤새 불이 꺼지지 않았고, 거나하게 취한 사내들은 요정집을 기웃거렸다. 첩첩산골에 요정집이 네 개나 됐다고 한다.

어느 광부의 생명을 지켜주던 안전모였을까? 갱도의 받침목인 동발 붕괴사고는 탄광에서 가장 빈번히 일어나는 사고였다. 옥동광업소 목욕탕 탈의실에 빛바랜 안전모 위로 햇살이 비치고 있다.


서울 부럽지 않다던 모운동 마을은 1989년 탄광이 문을 닫으며 쇠락의 길을 걸었다.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마을 사람들이 바람처럼 빠져나가 현재 30여가구만 남았다.

“평생 해로하자 했는데, 나만 두고 떠났지 모야.”

작년에 진폐증으로 남편을 잃었다는 김옥준 할머니(85)가 평상에 앉아 나물을 손질하며 한숨을 짓는다. 탄광 문이 닫히자 남편의 폐병이 심해졌다. 석탄을 캐던 남편을 대신해 할머니는 약초를 캤다. 망경대산 구석구석을 뒤적이며 캐낸 약초는 30여가지. 김 할머니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할아버지가 다른 광부들보다 오래 사셨다며 웃는다.

“썰렁했는데, 벽화 보러 오는 사람들 구경하느라 심심하지 않아 좋지.”

폐광된 후에도 마을을 떠나지 않은 김 이장은 7년 전 부인과 함께 동네 분위기를 바꿀 방법을 생각해냈다. 허름한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는 것. 손재주 많은 이장 부인이 밑그림을 그리고 그림 안에 색깔을 적었다. 마을 노인들도 벽화 색칠작업에 참여시키고자 했던 것. 잿빛 폐광촌은 개미와 베짱이, 백설공주와 난쟁이가 뛰노는 동화마을로 탈바꿈했다. 강원 영월군 김삿갓면 산꼬라데이에 동화마을이 있다는 입소문이 퍼지자 알음알음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렇게 모운동은 다시 사람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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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달무리>  (0) 2013.09.29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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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배후에, 저 멀리 아득한 배경 속에 또 하나의 세계가 있는데 이 세계와 첫째 세계의 관계는 때때로 극장에서 실제 장면의 배후에 보이는 장면이 실제 장면에 대해 갖는 관계와 거의 같은 것이다.

 

*
어떤 사람이 길을 잃은 나그네를 잘못된 길로 인도한 다음 길 잃은 자로서 혼자 놓아두고 돌아온다면 분격할 일이지만, 어떤 사람을 자기 자신 속에서 갈을 잃게 하는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사소한 일인가. 길 잃은 나그네는 어쨌든 주위의 경치가 끊임없이 변하므로 변할 때마다 벗어날 길을 찾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위안을 받는다. 그러나 자기 자신 속에서 길을 잃은 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별로 넓지 못해서 곧 그가 가는 길은 벗어날 수 없는 순환로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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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 벽에는 거울이 걸려 있습니다. 당신은 거울을 무시하지만, 거울은 당신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거울은 얼마나 충실하게 당신의 모습을 비춰주는가. 마치 충실함을 통해 자신의 헌신을 증명하려는 천한 노예처럼. 물론 그에게는 그녀가 의미 있지만, 그녀에겐 그가 아무 의미 없는 노예처럼.
(...)
인간이 거울과 같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우랴.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거울과 같은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마치 그녀가 단 한마디라도 그녀의 마음을 털어놓으려고 하면 그녀의 모습을 잃고 마는 이 거울처럼, 단지 표면만을 파악하고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며 본질이 나타나려고 하면 모든 것을 상실하는 그러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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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로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조차도 이 사건을 거의 은밀하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모든 사랑은, 성실하지 못한 사랑조차도 적당한 미학적 계기를 갖고 있는 한 은밀하다. 나는 함께 알고 있는 사람을 바라거나 나의 모험을 자랑하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컨대 그녀의 집을 알지 못하고 그녀가 가끔 찾아가는 곳만 알고 있다는 것조차도 거의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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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계는 부드럽고 충실한 이해라는 포옹이나 인력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오해라는 반발 작용에 의해 규정된다. 그녀에 대한 나의 관계는 본래 순수한 무(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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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일반적으로 왜 이렇게 둔한가. 남자는 비약해야 할 때가 오면 망설이고 오랜 준비를 하고 거리를 눈으로 재고 몇 번씩 출발을 하지만 무서워서 되돌아온다. 마침내 도약하지만 떨어지고 만다. 젊은 아가씨의 방식은 다르다. 산악 지대에서는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두 개 나란히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두 낭떠러지는 내려다보면 몸이 오싹하는 깊은 협곡으로 갈라져 있다. 남자는 감히 뛰어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지방 주민의 이야기에 의하면 한 젊은 아가씨가 용감하게 뛰어넘었으며 그래서 이곳은 '아가씨의 도약'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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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무서워하는 동안은 미워하게 하라. 이 말에서는 마치 공포와 증오만이 짝을 이루고 공포와 사랑은 서로 아무 관계가 없으며 사랑을 관심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공포가 아닌 것 같지 않은가. 우리가 자연을 포옹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이러한 사랑에는 신비한 불안이, 공포가 있지 않은가. 자연의 조화는 무법칙성과 격렬한 혼란으로부터 자연의 신회성은 불성실로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안이야말로 가장 매혹적인 것이다. 사랑은 관심 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사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배후에는 깊고 불안에 찬 밤이 도사리고 있음에 틀림없고, 이 밤으로부터 사랑의 꽃이 핀다. 예컨대 꽃은 수면 밖에 나와 있으나 뿌리는 생각하기만 해도 섬뜩한 깊은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수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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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는 끊어졌다. 그녀는 동경에 가득 차서 힘차고 대담하게, 거룩하게 날아간다. 마치 방금 날개를 활짝 펼칠 자유를 얻게 된 새처럼. 날아라, 새여. 날아라! 이 왕자와 같은 비상이 정녕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고통을 느낄 것이다. 한없이 깊은 고통을, 피그말리온의 애인처럼 다시 돌이 된다면 그때의 기분은 나의 기분과 같으리라. 나는 그녀를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사상처럼 가볍게.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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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시시각각 2013. 10. 11. 16:59

작년 가을이다. 10월의 어느 날.

합정역 어디쯤.

조혜은의 생일이었고, 이현호의 제대였고, 윤성아의 등단이었고, 또 뭐였지?

근데 나는 없네? 아! 나는 사진을 찍었지.

오은, 이민하, 윤성아, 이이체, 김안, 이현호, 조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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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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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에서의 기록

시시각각 2013. 10. 11. 16:05

2013년 7월의 여름이다.

문학콘서트에 참여한 인연으로 모인 '황새'.

두목은 권대웅 선배님.

홍대 이춘복 참치에서 실컷 먹었던 날.

신혜정, 김선재, 조동범, 박지웅, 이혜미, 이재훈, 권대웅,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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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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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옌데 사건은 현대 중남미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일이고, 아직 종료되지 않고 현재도 진행중인 일련의 흐름속에서, 말하자면 토막중의 가운데 토막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다. 사건만을 놓고 보면 칠레에서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이 대통령궁에서 자국 군인들에게 사살된 사건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청와대에 군인이 쳐들어가 대통령을 지키던 또 다른 군인들을 사살하고, 권총으로 저항하던 경호원과 대통령을 사살한 사건이라고 할수 있다. 물론 이렇게 얘기하면 아주 가난한 나라에서 벌어진 이상한 사건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시에 칠레는 우리나라보다 잘 살았고 국제적인 위상도 훨씬 높았던, 적어도 우리나라보다는 선진국이였다. 
그런데 이사건을 보통은 중남미 민중정부에 대한 군부의 대응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미국의 좋은 대학에서 교육받은 토호(어느 한 지방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양반을 떠세할 만큼 세력이 있는 사람.)들의 2세인 이른바 '시카고 보이'들이 군인들과 결탁하여 민중정부를 붕괴시킨 사건이라고 표현한다. 지금 베네수엘라에서 경제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차베스에게 사람들이 종종하는 말이 "당신은 아옌데 처럼 당하면 안된다"라는 것이라고 한다. 어쨌건 바로 그 사건이다.
사건 자체로만 놓고 보면 특별히 지글러가 우리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 사건을 지글러는 아옌데가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내건 공약중 하나에서 문제의 발단을 해석하기 시작한다. 1970년 칠레의 인민전선은 101가지 행동강령을 발표했는데, 그 첫번째가 바로 15세이하의 모든 어린이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 공약을 보통은 '포퓰리즘'(일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행태를 말하며 종종 소수 집권세력이 권력유지를 위하여 다수의 일반인을 이용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반대되는 개념은 엘리트주의(Elitism)이다.)이라고 치부하지만, 당시 칠레가 처한 높은 유아사망률과 어린이 영양실조라는 문제를 놓고 본다면 어쩌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공약을 내건 아옌데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이 문제에 가장 곤란함을 느꼈던 것이 스위스의 다국적기업인 네슬레였다는 점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다. 커피와 우유를 주품목으로 하는 네슬레에게 칠레정부가 분유를 무상으로 공급한다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칠레에서의 성공사례가 다른 중남미 국가들로 번져갈 경우에는 더욱 큰 골칫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소아과 의사 출신인 아옌데가 내건 이 공약이 벽에 부딪힌 것은 칠레의 농장을 장악한 네슬레가 1971년 협력거부 방침을 결정하면서부터이다. 아옌데 정부는 네슬레에게 우유구매를 요구하였으나. 이 요구는 거부당했다. 이때부터 아옌데 정부는 키신저를 비롯한 미국정부와 네슬레를 축으로 하는 다국적기업에 의해서 고립되고, 결국 CIA와 결탁한 군인들이 대통령궁을 습격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칠레의 어린이들은 다시 영양실조와 배고픔에 시달리게 된다.
지글러의 이러한 설명은 네슬레의 다국적기업 정책와 관련되어 있는데, 스위스 내에서의 네슬레의 사회적 이미지와 중남미 국가에서의 네슬레 그리고 심지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네슬레 코리아의 경영방침같은 것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유식 회사들과 분유회사들이 국제 기아문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윤동기와 그 작동방식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 수퍼마켓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유기농 이유식' 아무거나 들어서 재료의 원산지를 살펴보면, 아옌데의 경우에서 생겨났던 문제와 우리나라의 음식시장 그리고 또 다른 아프리카에서의 기아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해제 : 우석훈)

 

*
서구의 부자 나라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신화가 있어. 그것은 바로 자연도태설이지. 이것은 정말 가혹한 신화가 아닐 수 없어. 이성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류의 6분의 1이 기아에 희생당하는 것을 너무도 안타까워해. 하지만 일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불행에 장점도 있다고 믿고 있단다. 그러니까 점점 높아지는 지구의 인구밀도를 기근이 적당히 조절하고 있다고 보는 거야. 너무 많은 인구가 살아가고 소비하고 활동하다 보면 지구는 점차 질식사의 길을 걷게 될 텐데. 기근으로 인해 인구가 적당하게 조절되고 있다는 얘기지. 그런 사람들은 기아를 자연이 고안해낸 지혜로 여긴단다. 산소 부족과 과잉인구에 따른 치명적인 영향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죽지 않도록 자연 스스로 주기적으로 과잉의 생물을 제거한다는 거야.

 

설마 자연이 그런 일을?

 

이런 설명은 전형적인 유럽적, 백인 우월주의적 ‘정당화’란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논리지. 자신들은 절대로 굶어죽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영양실조로 팔다리가 비쩍 마른 아이를 안고 있는 벵골이나 소말리아, 수단의 엄마들이 그 아이들의 죽음과의 싸움이 ‘자연이 고안해 낸 지혜’라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니?

그런데도 많은 지식인이나 정치가, 국제기구 책임자들은 엉터리 신화, 즉 기근이 지구의 과잉인구를 조절한다고 믿고 있단다.

(...)

자연도태라. 이 말은 정말 얼토당토않은 말이야. 그런데도 이런 표현은 사람들의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등장하지. 아빠는 여러 대학과 제네바에서 열리는 각종 국제회의, 그리고 유엔의 책임자들과 사적인 대화에서 이 말을 무수히 들어보았어. 숙명적인 기아가 지구의 과잉인구를 조절하는 확실한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기아가 산아제한의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는 거야.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죽는다는 자연도태설. 이 개념에는 인종차별주의가 담겨 있어.

 

그런 엉터리 개념을 맨 처음 사용한 건 누구였나요?

 

18세기말 영국교회 성직자였던 토머스 맬서스라는 사람이었어. 맬서스는 1798년 인국 법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어. 이 논문에서 맬서스는 세계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여 25년마다 두 배가 되지만, 식량의 증가는 산술서열을 따르므로, 가난한 가정은 자발적으로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보조나 지원은 중단해야 한다고 했어. 맬서스는 질병과 배고픔은 가슴 아픈 일이긴 해도 이 사회에 필수적인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단다. 지구상의 인구를 줄여주는 자연적인 수단이라는 얘기였지.

 

*

브레히트는 “분노하는 것은 고통이다”고 했다. 제네바의 은행가들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이 이데올로기가 바로 신자유주의(시장원리주의)라는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특히 위험하다. 중심에 자유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규범도 가라. 규제도 가라, 국민국가도 가라, 장애만 될 뿐이다. 선거도 가라, 일치도 가라, 정권교체도 가라, 민족주체성도 가라. 자유! 자본을 위한 자유, 서비스를 위한 자유, 특허를 위한 자유만 남아라. 그것은 관료제나 모든 종류의 제한에 반대하는 것이다. 오직 ‘완전하게 리버럴한 시장’을 추구하는 시장원리주의(신자유주의)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정의를 논할 것인가? 이제 아무도 그럴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손, 세계시장밖에는....... 신자유주의 원리는 자본의 흐름이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그 유동성이 완전하게 용인되면 이윤이 가장 많은 쪽으로 자본이 집중된다는 것, 즉 자유로운 세계시장에 맡기면 진정으로 공평한 사회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런 시장원리주의의 주장은 그야말로 넌센스다. 게다가 더욱 큰 문제는 그런 주장이 자세히 검토되지도 않은 채 세계에 침투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가, 무엇이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가를 따지지 않은 채, 그저 ‘경제 합리성’이라는 구호만이 난무하고 있다.
금융전략가들은 천문학자가 천체 앞에 서 있는 것처럼 경제적 현상 앞에 서 있다. 천문학자는 자기장을 측정하여 별들의 궤도를 계산하고, 학문적 활동을 객관화한다. 오늘날 금융전략가는 천문학자를 빼닮았다. 그들은 자연법칙을 들먹인다. 그들의 눈에는 현실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창조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국가를 헐뜯고, 민족주체성을 헐뜯고, 선거를 통해 확정된 제도, 그리고 영토적인 경계짓기와 인간이 만든 민주주의적 규범을 헐뜯으면서 계몽주의의 유산을 파괴하고 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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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그림자 여기저기에 무늬져 보이는 가늘게 갈아 만든 것 같은 반짝이는 격자무늬, 포장 덮개가 움푹 파이도록 고여 있는 빗물에 젖은 인력거, 그리고 멀리 소나무가 들여다보이는 배의 널조각 담장 사이에 섞여, 메밀국수집과 나란히 가리가네의 창고가 있다. 그날 밤 거의 11시가 되었을 무렵, 야나기바시를 건너, 사미센 소리가 들려오는 빗속을 걸어 가리가네의 창고로 향했다. 고리 모양이 펼펴진 화사한 게다 가게 앞을 돌아서자마자 보이기 시작하는 창고 속을 들여다보니, 가게를 지키고 있는 가리가네의 침울한 얼굴이 보였다. 나는 곧 어디선지 모르게 곰팡이 냄새가 떠돌고 냉기가 도는 운전수실로 들어가 가리가네와 만났다. 그는 내가 미처 꼭 닫지 못한 유리문을 꼭 닫고는, 무릎 위에 양손을 대고 정중히 고개 숙이고 인사를 하며, 아까는 여러모로 걱정을 끼쳐서 죄송했다고 사죄했다. 나는 곧 야마시타 부인의 고백을 그대로 그에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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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우치의 말에 다시 가리가네의 눈은 한층 비범한 광채를 띤 채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정수리가 높고 뾰족한데, 이렇게 실의에 빠졌을 때의 풍모에서 그때까지 감춰져 있던 비범한 힘이 그의 튀어나온 광대뼈 언저리로부터 숨을 내뿜는 듯이 번쩍번쩍 넘쳐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쌀겨로 생선을 누룩으로 만든다고 하면?" 나는 히사우치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생선에는 기름기가 많죠. 그러니까 비린내가 나고 어지간해서는 냄새가 빠지지 않으니까. 분명히 쌀겨에 생선 기름을 흡수시키려고 그러는 게 아닌가 하는데."
"그렇습니다." 가리가네가 옆에서 말했다. 그리고 점차 조용히 미소 지으며 나를 보면서,
"마쓰야마 선생님, 제가 또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확실한 게 아니잖아."
"아니요. 노무라 나오조 씨의 방법은 제 방법과 같습니다. 쌀겨에는 지방을 분해하는 효소도 감화력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네는 가쓰오부시를 끓이고 남은 찌꺼기를 사용하지 않나. 그리고 이왕이면 뼈까지 어떻게 할 수 없을까."
"그렇게 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죠. 저도 마지막에는 뼈까지 간장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었는데, 뼈에는 인산캄슘이 들어 있어서 대단히 왕성하게 발효하기 때문에 뼈까지 간장으로 할 수 있으면 이상적이겠지요."
"그러면 이제 가쓰오부시 찌꺼지 같은 건 치워버리고 강변 어시장에서 생선 찌꺼기를 얻어다 해보면 어떨까? 그거라면 공짜고 거기다 운임비까지 저쪽에서 주지 않나?"
"그렇게 하게 해줄까요? 그렇게 되면 더할 나위 없는데."
가리가네의 지금까지의 실망은 다시 한순간에 맑게 개었다. 그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고 미소를 머굼고 잔 속의 차가워진 술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내가 따라준 술을 한 모금 입에 대고는 말했다.
"자, 드디어 내일부터 제가 그걸 해보겠습니다. 저에게도 생각이 있으니까 잘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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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친구 중에, 이 친구도 역시 간장 발명에 열심인 친군데, 이 남자의 연구는 다른 사람들하고 또 조금 달라서, 뭐라던가, 간장을 액체로 만들지 않고 고체로, 말하자면 환약처럼 만들려고 한다지 뭡니까. 요컨대 항상 가지고 다니기 편하게 가볍고 작게 만들어 적은 양이라도 물만 넣으면 곧바로 많은 양의 간장이 되게끔 한다고 합니다. 더구나 이제부터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식량을 비행기에서 아군 진영으로 고속으로 떨어트리지 않으면 안 될 상황도 생길 수 있으니까. 가령 쌀 같은 걸 비행기에서 떨어트리면 쌀 한 가마니가 지상에 떨어지면 가속도가 붙어 6미터 정도나 땅속에 파묻히게 되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간장도 웬만큼 가볍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6미터씩이나 땅속에 파묻히게 되면 어떤 거라도 식용으로 사용하게는 안 되죠. 이런 건 간장도 마찬가지죠. 확실힌 모르지만 이런 걸 처음 생각해낸 건, 야채류를 건조시켜 고체로 만들어 그걸 떨어트리려고 한 데서 비롯된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야채도 그렇고 간장도 그렇고, 고체로 만들려는 경쟁이 목하 각국에서 진행 중에 있다고 합니다만, 막상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야채나 간장 등을 대량으로 제대로 고체화할 수 있는 나라는 현재로선 일본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건 다시 말해서, 일본은 세계 제일의 양잠국이기 때문에 건조기가 전국 방방곡곡 산간벽지에 이르기까지 퍼져 있기 때문이라던가요.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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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달무리>

시시각각 2013. 9. 29. 00:43

연극 <달무리>를 봤다.

대학로 서완소극장.

최치언 형이 연출하고 강정 형이 배우로 데뷔하는 연극이다.

극작은 대산대학문학상 희곡 당선자인 손유미 씨. 동덕여대 문창과에서 시를 전공한단다.

이미 친숙한 극단 '두목'에서 기획하고 김현, 양말복, 황은후, 이준혁, 박성훈, 손인정이 출연했다.
주인공이기도 한 배우 황은후는 황현산 선생님의 딸이다.

연극을 보러 가서 황현산 선생님을 뵈었다.

공연 전 바람잡을 때. "지성과문학사, 현대사"란 멘트가 너무 재미있었다.

강정 형은 앞으로 배우를 해야 될 것 같았다.

극중 무병을 앓는 여인을 보면서 시인들 또한 무병을 앓는 존재들이라는 생각.

아마,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무당이 되었을 법한 시인들이 꽤 있겠지.

관람 후 강정 형을 비롯한 몇 시인들과 평론가와 함께 간단히 맥주를 한잔 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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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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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에 중독된 시대의 시_ 신진숙

 

 

 

 

 

   세계의 비참 앞에서도 시인들은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시인들이 마주한 가장 강력한 현실이다. 낙관이나 전망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비극과 종말 또한 없으며, 모든 것이 파괴될 수 있지만 어떤 혁명도 추구되지 않는 세계. 모두가 자신이 처한 슬픔과 자신의 가계(家計)만을 염려하는 세계. 타자 없는 삶.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본질이다.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알은 체하지 않는.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타자의 삶에 대한 의무나 책무로부터 배제된, 상처받은 존재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 점에서 용서와 힐링(healing)이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과거 어느 시대에도 힐링이 이토록 중요했던 시대는 없었다. 산업화의 후유증을 앓는 몸을 돌보는 웰빙(well-being) 바람에 이어 힐링이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다. 고대 주술사의 치료 방식을 모방한 것처럼 보이는 힐링은 근대 이후의 인간이 느끼는 정신적 폐허감(廢墟感)은 치료한다. 방송에서는 날마다 눈물과 호소, 애도를 결합한 힐링의 주술이 재연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힐링을 통해 심연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힐링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해방만을 의미함으로써 나와 타자의 삶을 분리시킨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힐링의 순간, 우리는 세계의 비참을 잊는다. 그 속에는 간단하고 명료한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 나는 내 고통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자에게는 타자의 삶과 고통이 존재한다. 힐링은 상처 때문에 무너진 하나의 세계, 즉 나를 중심으로 세워졌던 세계를 다시 재건하도록 돕는다. 힐링과 나르시시즘이 통합된다. 그리고 우리는 힐링에 중독된다. 

   물론 시인들 역시 그 누구보다 치유를 희망한다. 그러나 시인들의 언어는 주술적이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자기 연민이라는 광기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세계의 비참을 눈감을 수 없다. 시인들은 오히려 힐링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타자에 대한 사유를 중지시키는 힐링이야말로 어떤 것도 힐링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힐링에 중독된 시대에 시인은 힐링의 덫을 벗어나, 더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시적 치유가 세계의 비참을 망각하는 것도 근거 없는 행복감도 아니라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이재훈의 시 〈평원의 밤〉을 읽어 보자.

 

   막막해졌네. 타인에게 무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무심해졌네. 모든 감정에 무심해졌네. 가르치는 자들이 내놓는 규율에 무심해졌네. 단순히 어지러움 때문이네. 고개를 숙이다 고개를 들면 어지럽네. 빙빙 돌고 울렁거리네. 앉아도 누워도 빙빙 도네. 과음 때문이네. 두통 때문이네. 내 몸에 잡초들을 태우려 했네. 산화하는 것만이 아름다운 거라 여겼네. 악수도 청하지 않고 떠나는 게 배려라 생각했네. 슬픔이 없는 세계는 없지. 나는 아름답게 슬픈 동물이고 싶었네. 충만한 마음으로 춤을 출 것이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내 옷자락에 배었던 냄새 한 다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 슬픈 밤이네. 천둥이 음악소리를 덮을 무렵. 자정의 달빛이 머리칼을 적실 무렵. 저 우주에 몸을 눕히고 별들을 덮을 것이네. 아무 언어도 없이 심연에 잠길 것이네. 평원에 앉아 바람의 마음을 얻을 것이네.
— 이재훈 〈평원의 밤〉(《유심》 8월호)

 

   자기애(自己愛)에 상처를 입은 존재는 역설적으로 타인의 슬픔에 무감해지곤 한다. 힐링이 주는 위안은 상처받은 이 자기애를 복원하는 것에 집중된다. 핵심은 타인을 어느 정도 무감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슬픔이 제거될 수 있도록 무심(無心)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힐링의 최종 목표다. 그럴 때 우리 모두는 상처받은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 타인과 나의 관계 또는 세계 자체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이 시의 한 구절, “슬픔이 없는 세계는 없지”라고 말하기 이전까지 화자가 처한 삶이기도 하다. 그러나 슬픔이 없는 삶을 꿈꾸는 한, 힐링의 주술은 풀리지 않는다. 힐링이 가져오는 거짓 마법에 빠져든다. 진정한 시적 치유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에 출발하지만, 나 자신의 슬픔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슬픔과 아름다움이 다른 것이 아니듯. 슬픔이라는 심연은 삶의 외곽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다. ‘힐링’에서 ‘치유’로 나아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이다. 그렇다면 이재훈 시인은 어떤 계기 속에서 이러한 깨달음은 얻었는가.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침묵’ 덕분이다. 즉, “천둥이 음악소리마저 덮을 무렵” “자정의 달빛이 머리칼을 적실 무렵”, 그 무렵에서야 발견되는 언어의 심연. 우리 자신은 자신의 언어를 잊을 때 비로소 슬픈 ‘한 사람’의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제 슬픔의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아름다운 슬픈 동물”이 된다.

 

 

_ <유심>, 2013년 9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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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한다.

2013년 약수역의 여름날.

김언 시집 <모두가 움직인다>가 출간된 지 얼마 안 된 날이다.

배경은 저래도 분위기는 엄청 좋았던 날.

 

김언, 이현승, 오은, 정재학,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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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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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관심을 끄는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그랬던 것처럼 휘청거리며 그들을 쫓았다. 왜냐하면 내게는 오로지 미친 사람, 즉 미친 듯이 살고, 미친 듯이 말하고, 미친 듯이 구원받으려 하고, 뭐든지 욕망하고, 절대 하품이나 진부한 말을 하지 않으며, 다만 황금빛의 멋진 로마 꽃불이 솟아올라 하늘의 별을 가로지르며 거미 모영으로 작렬하는 가운데 파란 불꽃이 펑 터지는 것처럼, 모두 "우와!" 하고 감탄할 만큼 활활 타오르는 그런 사람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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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붉게 물들 무렵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은 내 평생 단 한 번밖에 없었던, 아주 독특하고도 묘한 순간이었다. 나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여독에 지쳐 뭔가에 홀린 듯한 상태였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싸구려 호텔 방 안에서, 밖에서 들려오는 증기기관의 씩씩거리는 소리, 호텔의 오래된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 위층의 발소리, 그리고 온갖 종류의 슬픈 소리들을 들으며 금이 간 높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한 십오 초 동안 내가 누군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겁이 나진 않았다. 나는 그저 다른 누군가, 어떤 낯선 사람이 되었고, 나의 삶 전체는 뭔가에 홀린 유령의 삶이 되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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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선택의 자유가 현대의 삶이 이룩한 위대한 진보의 표식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이런 견해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다. 비참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음식을 먹을지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직업 선택의 자유란 것도 극심한 경제 불황으로 일자리가 없을 때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현대 세계의 특징은 우리들 대다수에게 그 이전보다 선택―어떤 사람이 될지, 어떻게 행동할지, 누구 줄에 설지―의 폭이 더 넓어졌다는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실존적 선택에 직면했을 때, 저것 아닌 ‘이것’을 선택하게끔 해주는 참다운 동기가 없다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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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래로 서양의 역사는 어쨌건 진보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계몽주의 시대와 이후 시대야말로 이런 발전의 정점에 이른 시대라고 배워왔다. 자유의 자기충족성, 이성의 투명성, 남김없이 설명되고 통제되는 세계의 안정성, 이 모든 것이 역사의 진보를 가리킨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이 이야기 반대편에는 또 다른 이야기도 존재한다. 즉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탈마법화된 상태야말로 끝없는 쇠퇴와 상실의 결과라고 보는 시각이다. 이 시각은 탈마법화된 오늘의 세계를 거부하고 과거의 마법적인 시대를 지지한다. 자유의 대가로 안게 된 홀로서기의 짐, 이성의 거침없는 행진이 닦아놓은 무미건조하고도 무자비한 길, 남김없이 설명되고 통제되는 세계의 생기 없는 얼굴, 이 모든 것이 역사의 퇴보를 가리킨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그 어떤 이야기도 옳지 않다면? 즉 경이와 매혹이 저 멀리로 사라졌다는 생각이 현대 세계를 오해한 결과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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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세계를 열린 마음으로 대했다. 그것은 우리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세계로서, 우리들 현대인은 내적인 자기응시에만 익숙한 나머지 우리의 정조들을 지극히 사적인 경험으로만 간주한다. 반면 그리스인들은 자기 자신을 내적인 경험과 신념을 통해서 이해하기보다는 널리 공유된 정조들에 휩싸여 사는 존재로 간주했다. 호메로스에게 정조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우리가 함께 처해 있는 상황을 비춰주기 때문이다. 정조는 그 순간 가장 문제시되는 것을 드러내준다. 그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영웅적이고 열정적인 행위를 하도록 유도한다. 이런 정조들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가 바로 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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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세계에서 감사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은 그 인물에게 결함이 있다는 가장 확실한 표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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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가 잠을 묘사한 다양한 방식들은 그의 인간 실존 개념에서 잠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에게 잠은 행동하는 순간과 구분되는 비어 있는 삽화다. 잠들었을 때 우리는 더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잠은 인간의 조건을 축약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따금 신들이 인간을 방문해서 방향과 목표를 제시해주고, 인간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불안을 가라앉혀서 다시 신선한 욕망을 불어넣어주는 것도 바로 잠을 통해서이다. 호메로스에게 있어서 잠은 일종의 계율이다. 왜냐하면 잠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꼭 이룬다는 보장이 없는, 그런 행동의 표준적 사례이기 때문이다. 호메로스가 보기에 잠은 인간을 가장 잘 특징짓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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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궁극적 스토리는 우주가 우리에게 무관심하다는 데 있지 않다. 비록 에이해브가 만난 모비 딕처럼 우리에게 무관심한 신도 있지만 말이다. 어린 선원 핍이 외롭게 버려진 미아처럼 바다에 조난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떠올렸던 생각, 즉 세상은 “그의 신처럼 냉담하다”는 생각을 상기해보자. 하지만 그런 신과 달리 세상에는 또 다른 신들, 즉 즐겁고 성스러운 신들과 사악하고 복수심에 차 있는 신들도 있다. 우주는 번갈아가며 이런 신들의 모습을 띤다. 우주가 그 신들 가운데 궁극적으로 어떤 신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하나의 신도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신들의 만신전(萬神殿)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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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고 지혜로운 스승에게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아온 두 제자가 있었다. 어느 날 스승이 말했다. "제자들아. 너희들은 이제 세상에 나갈 때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너희들의 인생은 복될 것이다."
제자들은 아쉬움과 흥분이 뒤섞인 채 스승을 떠나 각자의 길로 갔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들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다시 만난 것에 행복해했고, 상대방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들으려는 기대감으로 들떴다.
첫 번째 제자가 두 번째 제자에게 시무룩하게 말했다.
"나는 세상에 있는 많은 빛나는 것들을 보는 법을 배웠지. 하지만 여전히 불행하네. 슬프고 실망스러운 것들 역시 많이 보았기에 스승님의 충고를 따를 수 없다고 느낀다네. 아마 나는 결코 행복과 즐거움으로 충만해질 수거 없을 것 같으이. 솔직히 말해서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야."
두 번째 제자는 행복감에 반짝이며 첫 번째 제자에게 말했다.
"모든 것들이 빛나는 건 아니라네. 다만 빛나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지."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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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마지막 수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마레 씨가 갑자기 활기를 띠며 물었다.

“내가 첫 수업을 해도 되겠소?” 생트 콜롱브 씨는 잘 들리지 않는 소리로 대꾸했다.

마레 씨는 고개를 뜨덕였다. 생트 콜롱브 씨는 헛기침을 했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그는 거칠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일세. 음악은 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반드시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음악이 왕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는가?”

“그건 신을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자넨 틀렸네. 신은 말하지 않는가.”

“그럼 귀를 위한 것입니까?”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이 귀를 위한 것은 아니네.”

“그럼 황금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 황금은 들을 수 없지.”

“영광입니까?”

“아니네. 그건 명성에 불과하네.”

“그럼 침묵입니까?”

“그건 언어의 반대말에 불과하네.”

“경쟁하는 음악가입니까?”

“아냐!”

“사랑입니까?”

“아냐.”

“사랑에 대한 회한입니까?”

“아니네.”

“단념을 위한 겁니까?”

“아니냐. 아니야.”

“보이지 않는 자에게 바치는 고프레를 위한 겁니까?”

“그것도 아니네. 고프레가 뭔가? 그건 보이지 않나. 맛이 나고. 그건 먹는 거 아닌가. 그건 아무것도 아니네.”

“더는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죽은 자들에게 한 잔은 남겨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네 자신을 태우게나.”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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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도록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나간 영혼의 과거가 무한한 긴장으로 파닥일 때가 있다.  ?파묻혀 있던 경험이 현재로 온전히 되살아 올 때가 있다. ?리듬이 획일성과 균형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그때는 고통스러운 강박관념에 으레 따르는 공포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죽음이 떠오르며 삶의 절정에서 추락한다. 행복의 극치에서 스치듯 강렬하게 죽음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사랑을 막 느끼기 시작하는 불안한 순간에 사랑이 끝날 순간이나  버림받을 순간을 예감하는 연인들의 심정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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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성이란 자아를 분산시키는 충동이다. 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흥분 상태를 나타태는 것이다. 서정은 깊은 내면의 것이고 농밀한 것이어서 그만큼 외부로 표출하려는 욕구가 절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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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결정적 순간에만 서정적이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맞는 고통의 순간, 지나간 시간이 되살아와 폭포처럼 덮치는 그 순간이 돼서야 서정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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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성은 야만적이다. 서정성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오로지 피와 진정성과 불꽃이라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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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우리들은 사람에 둘러싸여 살고, 죽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 순간에 어떠한 위안을 줄 수 있을까? 감상적인 태도로 꾸미지 말고 혼자 조용히 죽는 편이 낫지 않을까? 고통을 자제하면서 억지로 좋은 인상을 남기려 하는 사람들은 혐오스럽다. 눈물이 뜨거운 것은 고독 속에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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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는 내게는 아무것도 접근하지 못한다. 가장 심오한 죽음, 진정한 죽음은 빛까지도 죽음의 원칙으로 수렴되는 순간의 죽음, 외로운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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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과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의식을 없애버려서가 아니라 용기를 가짐으로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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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형벌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은 삶 속에 이미 내재하므로 삶 전체가 거의 죽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마지막 고통의 시간이란 단지 삶과 죽음의 다춤이 가장 치열해지는 순간, 죽음을 의식적이고 괴롭게 경험하는 순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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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피와 살의 자취를 품고 있는 사고를 원한다. 공허한 추상적 사고보다는 육체적 격정이나 신경의 파탄에서 오는 성찰을 백배 더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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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비극이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제국의 붕괴나 광산 맨 밑바닥 낙반 사고보다 더 심각한-것처럼 느끼면서도, 은연중에 나 자신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존재하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곧게 믿지만, 또한 동시에 나의 존재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느낀다. 더 나아가 만일 세상과 나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세상 모든 빛과 법칙을 없애버리고 홀로 허공을 떠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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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에서는 누구도 잠잘 권리가 없다. 진정으로 절망하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비극을 잠시도 잊지 못한다.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고통스러운 의식에 매 순간 깨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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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불행한 사람은 무의식에 대한 권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의식이 늘 깨어 있어 계속해서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를 정립하는 것, 항상 깨달음의 긴장 속에서 사는 것, 그것은 바로 인생을 망쳤다는 것을 뜻한다. 깨달음은 재앙이며 의식이란 삶의 한가운데 벌어진 상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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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고독감을 느끼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세상 속에서 자신이 고독하다고 느끼는 방식과 세상 자체가 고독하다고 느끼는 방식이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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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인간에게 앞서 주어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과 함께 그에게 앞서 주어진 죽음을 죽는 것이다. 죽음이 미리 주어지지 않았다면, 죽음은 인간을 기습하는, 훨씬 더 격렬한 사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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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말은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말을 전혀 갖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인은 모든 말을 매번 원천으로부터 새로이 퍼올려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신의 흔적에 가까이 있다. 원초적 말에는 신의 흔적이 더욱 선명하므로. 그것이 시인이 얻은 은총이다. 하지만 시인은 원초적 말을 접함으로써 자연적인 것과도 가까이 하게 된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위험도 있다. 시인의 정신이 자연적 요소와 더불어 지나치게 과도하게 움직일 가능성이 있고, 자연적 요소로 정체성을 물들일 수 있고, 특히 자연의 분출, 자연의 경련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분출 활동을 통해 시인으로부터 뿜어져나온 새로운 정신이 말에 도입된다. 이것은 시인에게는 커다란 유혹이자 동시에 위험이다. 그래서 시인은 불안하고 초조하다. 다른 이들보다 신의 흔적에 가까이 있는 시인은, 다른 이들보다 더 깊은 심연을 자신 안에 갖기 때문이다. 시인의 불안은 그 심연으로 굴러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공포심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 안의 심연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심연을 잠재우고, 심연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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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한때 진리가 온전하게 들어 있던 언어로 말한다. 신이 그 언어로 말했기 때문이다. 언어의 슬픔 중 하나는 신이 더 이상 그 안에 없다는 점이다. 이제 언어 속에 있는 것은 절망한 그 무엇이다. 시도했다가 실망하는 것, 앞으로 나서긴 했으나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가버리는 몸짓, 몸을 일으키긴 했으나 다시금 주저앉아버리는 행위가 지금 언어 안에 들어 있다. 언어는 한때 말 속에 깃들어 있던 자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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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는 언어가 절망을 잊은 것처럼 보인다. 신이 비워놓은 공간이 시에 의해서 채워진다. 그러나 시는 공간을 점령하지는 못한다. 시는 공간에 가볍게 떠 있고, 환영처럼 나타나나 싶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 사라져버린다. 시가 사라지고 나면, 그토록 고대하는 말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커진다. 멜랑콜리는 더욱 깊어진다. 시는 언어의 공간이 신의 공간이기도 하다는 기억이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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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학교 교육의 코드를 알아차리는 ‘눈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학생의 생각이나 의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문제와 대답의 각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토론식 수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학생이 질문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드는 토론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되는 것이고, 각본에는 질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드라마가 역사를 앞에 내세울 때는 그 역사의 승리를 되새기고, 그 좌절에서 승리의 약속을 발견하자는 것이다. 하나의 승리 앞에서, 또는 승리의 약속 앞에서 우리는 그 승리가 공정한 것인가를 묻게 된다. 말하자면 주어진 현실의 조건들을 제대로 지켰는지 묻는 것이다. 현실을 현실 아닌 것으로 바꾸고, 역사의 사실을 사실 아닌 것으로 눈가림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상상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비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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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사람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채소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 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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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보다 조금 앞선 자리에 특별하게 가치 있는 어떤 것이 있기를 바랐고, 자신의 끈기로 그것을 증명했다. 특별한 것은 사실 그 끈기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두텁고 불투명한 일상과 비루한 삶의 시간을 헤치고 저마다의 믿음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전리품이었기 때문이다. 아흐레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의 과장에 구절양장을 그린 긴 행렬은 이 삶을 다른 삶과 연결시키려는 사람들의 끈질긴 시위였다.

 

젊은 시인은 이 세상의 모든 어둠을 일시에 밝게 비춰줄 한 광채의 존재를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서 보았으며, 자신이 그 빛을 본 첫번째 사람이 아니란 것도 배워서 안다. 그래서 그는 착하고 진실한 삶이 저기 있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비루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날마다 묻게 된다. 어쩌면 그가 쓰는 시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그는 제가 좋아하는 말을 골라 이리저리 조합했을지 모른다. 제가 무엇을 썼는지 자기로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에 제목을 붙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진지할 것이 없어 보이는 말장난을 할 때조차도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는다. 그는 자기 자신도 누구도 속인 것이 아니다. 그는 벌써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보았기에, 그가 쓰는 말들이 그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늘 새롭게 관계를 맺기에, 그의 시는 이 모욕 속에서, 이 비루함 속에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다고 생각하려던 사람들을 다시 고쳐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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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과거의 상처는 너무 악착스럽고, 미래에 대한 걱정은 갈수록 두터워질 뿐이다. 그래서 현재는 그만큼 줄어들고 삶을 누리는 것이 용서되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가 미래의 걱정거리로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학은 지금 이 자리의 삶에 자신을 자유롭게 바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대학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이 자유의 시간과 공간이 없이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전쟁은 바보짓이다. 분쟁의 해결책 가운데 전쟁보다 더 많은 비용을 치르게 하는 것은 없다. 전쟁은 우리 삶을 파괴하고 인간을 인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어떤 명분도 이 비극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핍박받는 민족의 독립전쟁 같은 것을 거론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핍박하는 일도 실은 전쟁으로부터 시작한다. 전쟁은 단순한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포탄이며, 구덩이에 파묻히는 시체 더미이며, 파괴되는 보금자리이며, 생사를 모른 채 흩어지는 가족이다. 이 오월에 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는 소년들은 어느 골목을 헤맬까. 지금 축제를 벌이는 젊은이들의 소식을 어느 골짜기에서 듣게 될까. 공부하고 일하고 춤추는 아이들은 어디로 갈까. 그들이 훈장을 뽐내며 돌아온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젊은 날의 꿈이 사라진 자리에는 마음의 상처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을 볼 것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민족의 절망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능력을 스스로 멸시하고, 우리가 이 민족이었던 것을 저주할 것이다.

나는 전쟁이 무섭다. 오만과 증오에 눈이 가려 심각한 것을 가볍게 여길 것이 무섭다. 전쟁을 막을 지혜와 역량이 우리에게서 발휘되지 못할 것이 무섭다.

 

역사는 과거와 나누는 대화라고 흔히 말한다. 유령의 역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다. 우리 시대의 편협한 주관성으로 역사의 입을 틀어막고도 대화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더욱 위험한 것은 이번 국사교육 번복 소동에서 보듯이, 역사의 입을 막았다 열었다 하며 그 눈치를 보는 사람들의 이상한 대화법이다.

 

우리 사회에서 시는 대량으로 소비되지만 그 원산지에서 일하는 시인들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진이정의 경우처럼 특별히 독창성이 있는 작업, 그래서 미래의 생산성을 크게 기약할 수 있는 작업에 몰두하는 시인일수록 그 고단함이 더하다. 이 점은 시의 유통 경로가 복잡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사태를 파악해야 할 사람들이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는 잘 만들어진 실패담이다. 성장통과 실패담은 다르다. 두 번 다시 저지르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늘 다시 시작해야 할 일이 있다. 어떤 아름답고 거룩한 일에 제 힘을 다 바쳐 실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 일에 뛰어드는 것을 만류하지 않는다. 그 실패담이 제 능력을 극한까지 발휘하였다는 승리의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봄날은 허망하게 가지 않는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것들은 조금 늦어지더라도 반드시 찾아오라고 말하면서 간다.

 

스위스의 비자금에는 키드의 보물이 누리는 낭만적 깊이 같은 것은 없다. 어떤 농부나 양치기에게 발견된다면 좋고 안 되어도 그만인 키드의 보물은 어떤 풍경을 때로는 윤택하게 한다. 설령 그것이 제 것이라고 하더라도 가난한 서민으로서는 접근도 할 수 없는 스위스의 비자금은 우리의 소박한 삶을 비웃고 우리의 상처를 들쑤시어 우리를 억압한다. 독재권력에 대한 이상한 향수가 역사의 깊이일 수 없듯이 그것은 깊이가 아니다. 그것은 명백하게 깊이의 반대다.

 

맥락을 따진다는 것은 사람과 그 삶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맥락 뒤에는 또다른 맥락이 있다. 이렇듯 삶의 깊이가 거기 있기에 맥락을 따지는 일은 쉽지 않다. 그 일에 시간과 정성을 바치기보다는 행정 규정을 폭력적으로 들이미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다. 한국을 이상사회로 생각한다는 노르웨이의 한 청년이 이런 문제 저런 문제를 깊이 살피기보다 제가 생각한 세계와 맞지 않는 것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려 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나는 이 나라가 진실로 억울한 사람들의 원을 풀어주고,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을 그 고통에서 해방해 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처지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더 나이가 들어, 제도 속에 들어가 어쭙잖게라도 남을 가르치는 자리에 들어섰기에, 그 책임을 어디에 전가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러서도, 젊은 날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굳게 믿는다. 공식적으로 이 나라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고, 또한 지배해온 사람들이 동상이나 기념관을 세워 추앙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그 밑에서 핍박받은 사람들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염원을 버리지 않았고, 그래서 ‘옛날과 많이 달라진’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나라가 그 하늘에 여섯 마리의 용이 날았기 때문이 아니라, 제 나라의 글자를 만든 임금이 있었고, 어떤 도를 실천하려는 선비들이 있었고, 인간답게 살기를 애쓰는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얻었던 것과 같다.

 

현실의 조건이 이러저러하니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까지만 실현하자는 식으로 민주주의에 선을 긋는 것은 현실의 압제를 인정하자는 것이며,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말에는 우리가 어떤 난관에 부딪히고 어떤 나쁜 조건에 처하더라도, 민주주의의 이상에 가장 가깝게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는 뜻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그 뜻이 거기 들어 있는 다른 모든 뜻보다 앞선다. 민주주의에 다른 수식어를 붙일 수 없는 이유가 그와 같다.

 

나는 '풍경다운' 풍경을 얻는답시고, 마치 피난처에만 풍경이 있는 것처럼, 현실을 피해 얼마나 멀리 도망치려 했던가. 거기에 향기가 있다 한들 그것을 진정으로 평화롭게 마신 적이 있던가. 구본창의 시선은 새롭고 용감하다. 구본창의 사실주의는 용감하고 잔인하다. 사실에 관해 말한다면, 그것은 늘 잔인하다. 사실은 그것이 눈에 익을 때까지, 그래서 새로운 시선이 얻어질 때까지 잔인하다.

 

극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금 전까지 삶의 드라마를 구성해 왔으며, 잠시 후에 다시 구성하게 될 것들은 배가 저쪽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사람들의 심중 깊이 내려가 있고, 조용하게 찌푸린 얽굴들은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 그것을 공허라는 말밖에 다른 말로 부르기는 어렵다.

 

아니, 달리 말해야 한다. 덜 끔찍하다는 것은 사실 더 끔찍하다는 말이다. 봉천동의 마지막 작은 집이 허물어지고, 정릉의 고층 아파트들을 둘러싼 원주민촌이 이주를 마저 끝내기 전까지는, 저 빈집의 두터운 빗장이 다 삭기 전까지는, 우리가 제사상 앞에서 올리는 절이 아직 허망하지 않다. 그러나 없는 신에게 절을 하는 것보다 없어질 신에게 절을 하는 것이 덜 끔찍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불안은 슬픔보다 더 끔찍하다.

 

온갖 종류의 대중물과 상업물에는 ‘시’가 충분하게 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를 소비할 뿐 생산하지는 않는다. 시인이 제 몸을 상해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한다는 것이며,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것이며,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저 대중 소비적 ‘시’의 소구력와 성공에 비한다면, 새로운 감수성과 이미지의 생산이 목표인 본격적인 시의 수요는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미미하다. 그러나 시가 생산한 것은 어떤 방법과 경로를 거쳐서든 대중물들 속에 흡수되고 전파된다. 시는 낡았고 댄스 뮤직은 새롭다고 믿는가. 사실을 말한다면 시에서는 한참 낡은 것이 댄스 뮤직의 첨단을 이룬다.

 

현대의 다단한 문명을 만들기까지는 권태에 대한 두려움이 큰 몫을 담당했다. 권태롭다는 것은 삶이 그 의미의 줄기를 얻지 못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감수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유행에 기민한 감각은 사물에 대한 진정한 감수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거기에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온갖 것에 대한 싫증이 있을 뿐이며, 새로운 것의 번쩍거리는 빛으로 시선의 깊이를 대신하려는 나태함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며 마음의 깊은 곳에 그 기억을 간직할 때만 사물도 그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인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이란 자아의 내면에서 그 깊이를 끌어내는 것이며, 그것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나와 세상을 함께 길들이는 것이다. 제 깊이를 지니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은 세상을 살지 않는 것이나 같다.

 

시는 기억술이라는 말이 있다. 비단 시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은 왕성했던 생명과 순결했던 마음을, 좌절과 패배와 분노의 감정을, 마음이 고양된 순간에 품었던 희망을, 내내 기억하고 현재의 순간에 용솟음쳐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방법이다. 기억이 없으면 윤리도 없다고 예술은 말한다. 예술의 윤리는 규범을 만들고 권장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결한 날의 희망과 좌절, 그리고 새롭게 얻어낸 희망을 세세연년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기억만이 현재의 폭을 두껍게 만들어준다. 어떤 사람에게 현재는 눈앞의 보자기만 한 시간이겠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연쇄살인의 그 참혹함이, 유신시대의 압제가, 한국동란의 비극이, 식민지 시대의 몸부림이, 제 양심과 희망 때문에 고통당했던 모든 사람의 이력이, 모두 현재에 속한다. 미학적이건 사회적이건 일체의 감수성과 통찰력은 한 인간이 지닌 현재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에 의해 가름된다.

 

사실,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자각되지 않는 말들이고 진실과 부합되지 않는 말들이고 인습적인 말들이지, 반드시 어려운 말이 아니다. 어려운 말은 쉬워질 수 있지만, 인습적인 말은 더 인습적이 될 뿐이다. 진실은 어렵게 표현될 수도 있고 쉽게 표현될 수도 있다. 진실하지 않은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억압받는 사람들의 진실이야말로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것에 속한다. 장 주네는 "자신이 배반자라고 여겨질 때 마지막 남아 있는 수단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의미하는 바도 아마 이와 관련될 것이다.

 

물질문명의 시대란 역설적이게도 몸이 물질을 누리지 못하는 시대다. 이제 육체가 물질을 접촉하는 순간이란 저 스냅 동작의 짧은 순간 뿐이다. 우리는 어디서나 단추를 누른다. 옷을 입을 때도 옷고름을 매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서도,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도,윗층에 올라가기 위해서도 우리는 단추를 누른다. 우리의 육체가 물질과 교섭할 때 느끼게 되는 다양한 감각들은 이제 누름단추의 탄력으로 통일된다. 물질로부터 듣게 될 모든 소리는 이제 딸가닥에 그치는 경쾌한 금속성의 소리로 통일된다. 흙도 물로 불도 나무도 돌도 모두 손가락에 한 번 튕겨오르는 탄력과 딸가닥으로 추상화된다.

 

나는 누구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시간을,다시 말해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남이 모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식구들에게도 그런 시간을 가지라고 권한다. 애들은 그 시간에 학교 성적과는 아무 관계 없는 소설이나 만화를 보기도 할 것이며,내가 알고는 제지하지 않을 수 없는 난잡한 비디오에 빠져 있기도 할 것이다. 어차피 보게 될 것이라면 마음 편하게 보는 편이 낫다고 본다. 아내는 그런 시간에 노래방에 갈 수도 있고, 옛날 남자친구를 만나 내 흉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늘 되풀이 되는 생활에 활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다. 여름날 왕성한 힘을 자랑하는 호박순도 계속 지켜만보고 있으면 어느 틈에 자랄 것이며, 폭죽처럼 타오르는 꽃이라 한들 감시하는 시선 앞에서 무슨 흥이 나겠는가. 모든 것이 은밀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문학은 영화보다 더 오래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더 낡은 것은 아니다. 양식으로건 기법으로건 영화에서 새롭다고 말하는 것이 문학적 서사에서 완전히 낯선 것인 경우는 드물다. 문학이 손대보지 않은 새것은 거의 없다. 문제는 문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이라는 말에 있으며, 그 말의 함의에 있을 것 같다. 흔히 문학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은 시인이나 소설가 또는 문학연구자들처럼 문학을 제 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문학의 낡은 인습들이며, 문학이라면 필경 그럴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잘못 믿고 있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문학의 키치들일 뿐이며 키치화된 문학일 뿐이다. 문학은 '문학적'인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좋은 문학은 오히려 문학적으로 그럴듯하거나 그럴듯하게 문학적인 것들의 허울을 헤치고 사물의 본색을 보려고 애쓴다. 그래서 문학적인 것은 문학에게도 그 해악이며 그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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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은 온통 거친 바위뿐인 땅이었다. 한 방울 물도 없고 한 가닥 풀도 없다. 아마 방향도 없다. 정체 모를 어슴푸레한 빛과 바닥없는 어둠이 일정한 시간을 두고 교차하며 나타날 뿐이다. 의식이 있는 존재에게 궁극적인 변방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곳은 풍요의 장소이기도 했다. 어슴푸레한 저물녘이면 칼날처럼 날카로운 부리가 돋은 새들이 날아와 그의 살을 사정없이 발라냈다. 그러나 어둠이 땅 위를 엄습하고 새들이 어디론가 사라지면 그 장소는 그의 육체에 생긴 공백을 소리도 없이 새로운 것으로 채워 주었다.
새롭게 몸을 채운 물질이 무엇이든, 쓰쿠루는 그 내용물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인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그림자의 무리로서 그의 몸에 머물고 그림자의 알을 한가득 낳았다. 이윽고 어둠이 사라지고 희미한 빛이 돌아오면 새들은 다시 날아와 그의 몸에 붙은 살을 세차게 쪼아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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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란, 쓰쿠루가 꿈속에서 이해한 바로는,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감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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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건 반드시 틀이란 게 있어요. 사고 역시 마찬가지죠. 틀이란 걸 일일이 두려워해서도 안 되지만, 틀을 깨부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돼요. 사람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틀에 대한 경의와 증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늘 이중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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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평온하고 가지런해 보이는 인생에도 어딘가 반드시 커다란 파탄의 시절이 있는 것 같거든요. 미치기 위한 시기라고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인간에게는 아마도 그런 전환기 같은 게 필요한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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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제각기 자신의 색깔이 있어서 그게 몸의 윤곽을 따라 희미하게 빛나면서 떠올라. 후광처럼. 아니면 백라이트처럼. 내 눈에는 그 색깔이 뚜렷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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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용 없는 텅 빈 인간일지도 모른다. 쓰쿠루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내용이 없기에 설령 일시적이라 해도, 거기서 쉴 자리를 찾아내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밤에 활동하는 고독한 새가 사람이 살지 않는 어느 집 지붕 뒤편에서 한낮의 안전한 휴식처를 구하듯이. 새들은 아마도 그 텅 비고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공간을 마음에 들어한 것이다. 그렇다면, 쓰쿠루는 자신이 공허하다는 것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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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서만 전할 수 있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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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
다자키 쓰쿠르에게는 가야 할 장소가 없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테제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는 가여 할 장소도 없고 돌아갈 장소도 없다. 예전에 그런 게 있었던 적도 없고, 지금도 없다. 그에게 유일한 장소는 '지금, 이 자리'이다.

 

*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긴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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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관...

시시각각 2013. 8. 26. 17:15
요즘 내 모습...
무엇에 그리 심통일까.
아니면 뭘까.
가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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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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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는 후배가 보내준 손글씨 이미지.

늦은 밤 잠들지 못할 때, 불현듯 썼다고 한다.

사소한 것 같지만, 내겐 감동이다.

누군가 내 시를 읽는 순간의 흔적이니.

이 시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

 


 

  수난의 돌

 


   이재훈

 


   배에 묶였네. 거친 물결을 헤치는 밤이네. 빛을 따르지 않는 시간들. 어떤 질서도 나를 잡아둘 수 없네. 나는 결박당한 존재로 남고 싶지 않네. 비열하고 음란한 무리들과 거래하고 싶지 않네. 과오를 자랑스레 떠벌리는 사람들. 턱을 괴고 앉아 당신의 이름을 떠올렸네.
   원숭이의 몸을 먹는 사람들이 있다네. 차라리 아무런 빛이 나지 않는, 딱딱한 존재이고 싶네. 맞고, 깨지고, 터져도 결코 존재가 소멸되지 않는 정적의 존재이고 싶네. 결여가 힘이 된다는 금언을 믿고 싶지 않네. 채찍질당한 몸은 징그러운 흉터가 남네. 흉이 없는 육체이고 싶네. 
   황금지팡이를 들고 죽은 자들의 영혼을 불러 모으고 싶네. 당신을 안으려 했지만, 연기처럼 내 몸을 훑고 떠나갔네. 이제 그림자만 남은 당신의 흔적. 햇살이 돋아야만 기억이 눈에 차오르네. 인간을 떠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삶이라니. 수많은 돌 틈에 내던져진 몸이 있네. 한 천 년 굴러도 이름 없는 몸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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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이재훈

 

 

산책길엔 언덕이 있다.

그날은 이상했다.

오르고 올라도 닿지 않는 거리를 헤맸다.

혼을 빼앗긴 것처럼.

늪에 빠진 것처럼.

뒷덜미를 놓아주지 않는 불빛이 있었다.

사위가 어둠에 둘러싸이면서

상점엔 불이 하나씩 켜졌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어둠이 안겨주는 거대한 정적을,

위대한 침묵을

나는 알지 못했다.

상처받은 한 친구를 생각했고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생각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바쁜 거리의 일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산책길엔 언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길목과 길목이 혀를 내밀어

내 몸을 떠받치고 있을 뿐.

타인의 인격을 규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은,

그 짧은 시간만큼은 황홀하겠지.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

달빛이 있는 골짜기다.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그 햇살의 순간처럼.

 

- 시집 <명왕성 되다>(민음사, 2011) 중에서

 

 


 

골목길 산책자

 

 

 

이재훈

 

 

 

장 그르니에는 산책자의 위의(威儀)를 가장 매력적으로 드러낸 이다. 우리에게 산책이란 그저 평범한 시간을 가장 평온하게 보낼 수 있는 생활의 한 장면이다. 하지만 그르니에에게 산책은 여러 가지 철학적 의미를 담은 고귀한 행위였다. 심지어 그는 산책의 정의와 좌표들을 설정하고 산책의 시간과 산책하는 자의 진귀한 내면을 파헤쳤다.(「산책」, <일상적 삶>, 장 그르니에(권오룡역), 청하, 1988) 즉 산책에도 여러 가지 성격의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강제에 의한 산책, 이성에 의한 산책, 사회성에 의한 산책, 철학적인 산책, 자연과의 융합수단으로서의 산책, 완성된 산책 등이 그것이다.

저 유명한 칸트의 저녁산책은 정기적인 휴식의 산책이다. 그에게 산책은 자신의 작업으로부터 벗어난 유일한 휴식의 시간이었다. 이에 반해 니체의 산책은 자신의 작품을 구상할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의 연속이었다. 루소의 산책은 몽상과 명상을 장려한 산책이었다고 한다. 장 그르니에는 루소의 산책은 타인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도망가게 해주는 산책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대부분 이런 산책을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으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기 위한 산책.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산책했을 당시의 모든 장소를 아주 상세하게 묘사해주는 방식을 택했다. 즉 가시적이고 관조적인 산책의 즐거움을 일깨운 것이다. 하지만 열자(列子)는 산책에서 관찰하는 기쁨을 찾지 않고 명상하는 기쁨을 찾았다고 한다. 이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기쁨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산책이라고 말한다. 열자의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산책하되 완전하게 하라. 완전한 산책자는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걸으며, 그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바라본다…… 나는 네게 어떠한 산책도 금하지 않지만, 완전한 산책을 할 것을 충고한다”고.

한동안 나도 산책을 했다. 아니, 산책을 한다는 자의식 없이 그냥 걸었다. 내려야 할 지하철 한 두역 전에 내려 걸었다. 내가 주로 걸었던 길은 집 주변의 골목길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골목길을 걸으며 내가 욕망하는 것, 놓고 싶은 것, 바라보고 싶은 것, 듣기 싫은 것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런 즈음에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라는 시를 쓰게 되었다. 골목길을 걸으며 나는 언젠가 읽었던 장 그르니에의 산책을 떠올렸다. 그의 책 <지중해의 영감>(청하, 1988)은 내 감성의 세포들을 흔들어 놓았다. 물론 그의 산책과 나의 산책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골목길이 내 삶의 길이 아니라 지중해 도시의 어느 신비한 골목길이길 바랐다. 어떻게 보면 위의 시는 내 산책의 비망록과 같은 시이다. 산책을 통해, 산책을 통한 시를 통해 나는 조금 위로받았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그러다 그렇게 골목길을 걷는 것도 조금 뜸해졌다. 이제는 골목길을 걸으면 가끔씩 눈물이 난다. 한없이 작고 아기자기하고 예쁜 길, 담쟁이와 붉고 노란 꽃들이 담벼락을 타고 넘는 길, 욕망과 욕정이 자욱한 길, 더럽고 추하고 가난한 길, 시끄럽고 위험하고 울퉁불퉁한 길, 소년소녀들이 욕하고 침을 뱉고 담배를 피우는 길, 취객들과 노인들과 부부들의 싸움소리가 새어 나오는 길, 이 모두가 공존하는 길. 그 골목길이 내 삶이기 때문이다.

다시 장 그르니에로 돌아가 보자. 그는 알제리의 오랑에 있는 산타크루즈에서 산책을 한다. 태양의 발자취가 언덕을 휘감는 아름답고 신비한 풍경을 기적이라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을 직시한다. 산책 속에서 만나는 거대한 풍경으로 삶과 존재의 비밀을 언뜻 알게 된다. 이 모든 순간들이 우리를 채워주기 보다는 비워버린다는 깨달음까지도. 그의 일상은 고귀한 산책의 시간을 누리는 것이었다. 여전히 그의 산책은 가장 멋있다. 나의 골목길 산책도 어떻게 변할 지 기대된다.

 

_ <시평>, 201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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