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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1.22 [시가 있는 월요일] 스스로의 온기로 사는 나이
  2. 2019.01.22 [매일경제] 고통을 대하는 자세…이재훈 시집 `벌레 신화` 출간
  3. 2019.01.22 [시인의 집] ‘스스로의 온기’로 고통을 견디는 시인_이재훈 시인 ‘벌레 신화’
  4. 2019.01.22 한국서정시문학상 수상소감
  5. 2019.01.22 고통의 수신기(이재훈 작품론)_ 남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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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8.09.28 어떤 하루 - 시인의 아케이드 1
  8. 2018.07.10 몽골에 잘 다녀왔습니다.
  9. 2018.05.20 [아시아경제] 귀가
  10. 2018.05.13 이재훈 시집 <벌레 신화> 광고
  11. 2018.05.13 불혹_세계일보(2016년 12월 26일)
  12. 2018.05.13 벌레_경기신문(2016년 12월 28일)
  13. 2018.05.13 악행극_아시아경제
  14. 2018.01.29 편지
  15. 2018.01.26 [대담] 시원에 대한 원대한 물음을 던지는 고백록
  16. 2018.01.15 조정권 선생님 추모 산문
  17. 2017.10.26
  18. 2017.09.12 스무 살이 되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19. 2017.07.18 서툰 사랑 1
  20. 2016.08.11 속초에 간 약수파_ 오은
  21. 2016.08.11 팟캐스트_ 책방에서 문학하다 2회 이재훈 시인 초청 저자와의 만남
  22. 2016.08.11 최초의, 최후의 노래들- 현대시와 신화적 상상력_ 김진희
  23. 2016.08.11 신과 함께_ 송종원
  24. 2016.08.11 돌의 시로, 물의 시로_ 장석원
  25. 2016.03.28 [문정희의 문학집배원] 이재훈, 남자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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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2015.05.12 저 멀리 있는 시에 관한 짤막한 단상들
  28. 2015.02.17 평원의 밤_ 영역
  29. 2015.02.06 사회 보다...
  30. 2015.02.06 2014년 가을날

[시가 있는 월요일] 스스로의 온기로 사는 나이

  • 허연 
  • 입력 : 2018.11.26 0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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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란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제 소년을 간신히 넘었을 뿐인데.
눈물을 참아야 하고 그리움도 참아야 하고
홀로 식당 문을 들어서는 서글픔도
지루한 술자리도 참아야 한다.
아직도 쓸쓸함을 사랑할 수 없나.
차가운 거리를 헤매다 방 안에 들어와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할 때.
내 몸에 남아 있는 허약한 온기.
엎드려 시를 쓰는 사람.
엎드려 생각하는 사람.
엎드리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라지만
엎드리는 일은 자신을 잊는 일.
엎드려 이제
스스로의 온기로 인해 나는 살겠다.
- 이재훈作 `불혹` 중


중년이 된다는 건 눈물도 참고 그리움도 참는 일일까.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고, 그리움이 밀려올 때 마음껏 그리워할 수 있는 건 젊음만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불혹을 넘겨 중년이 되는 건 `스스로의 온기로 사는 것`이라는 시인의 말이 가슴을 친다.누구나 거치는 통과의례겠지만 젊음과 헤어지는 순간은 언제나 쓸쓸하다.

그래도 그 시절 눈물과 그리움을 실컷 앓았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눈물과 그리움이 나를 키웠을 테니 말이다. 삶은 여전히 계속된다.

[허연 문화전문기자(시인)]


출처 :  http://opinion.mk.co.kr/view.php?year=2018&no=737477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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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고통을 대하는 자세…이재훈 시집 `벌레 신화` 출간

  • 김유태 기자
  • 입력 : 2016.08.19 15:43:30   수정 : 2016.08.19 17: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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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도 못 사는 인간으로만 살다 가는 인간이 있고 억겁의 시간에 자기를 올려두고 삶을 구경하다 가는 인간이 있다. 혹자는 후자를 시인이라 부른다.

이재훈(44)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벌레 신화`(민음사)가 출간됐다. 시인은 이번에도 어떤 분리주의적 시각을 유지한다.
몸에서 영혼을 떼어내 나를 구경하는 `자기 분리`랄까. 떨어져서 보니 꽃 속에 갇힌 벌레 한 마리가 보인다. `꽃 속에 산다./웅덩이에 잠겨/달콤함에 취해/먹고 싸며 늙는다.`(`벌레` 부분)

벌레로의 변신은 자기비하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삶이 닮았기에 등가를 이룬다. 더 주목할 건 내부 풍경이다. 벌레는 `기근보다 더한 맨살의 고통`(`뿔` 부분)을 겪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육체`(`벌레 신화` 부분)가 되길 희망한다.

원시를 현시하는 환시로 쓰인 작품들이 눈에 띈다. 아주 먼 과거에서 왔다는 신화적 상상력이 독특하다.

`우리는 어디에서 짐승처럼 왔을까.(중략)기억이란 늘 중심이 다를 텐데.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검은 밤의 시간을 가로질러 왔지.`(`짐승의 피` 부분)

`광석을 모르는 고대인들은 운석을 주웠다지. 별의 살 껍질을 주워 칼을 만들고.`(`녹색섬광` 부분)

현재에서 과거를 보는 시인의 발상이 시집 한 권에 가득하다.

장은수 문학평론가는 시집 해설에서 시인에게 "세계의 쏟아지는 폭력을 웅크리고 엎드린 채 등으로 견디면서 자신의 소리를 듣는 식물적 능동"이라는 평을 헌사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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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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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스스로의 온기’로 고통을 견디는 시인

<68> 이재훈 시인 ‘벌레 신화’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입력 : 2016.10.01 03:08|조회 : 5261

  

     


꽃 속에 산다. 
웅덩이에 잠겨 
달콤함에 취해 
먹고 싸며 늙는다. 

그곳이 지옥인 줄 알고 
기어 나올 때 

지옥을 보려고 온 사람들 
예쁘다고 기념할 때 

벌레들끼리 서로 눈 마주쳐 
징그러워 깜짝 놀랄 때 

마지막 계절은 
툭 떨어진다. 
- '벌레' 전문
 

오래 전,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다.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났더니 흉측한 벌레로 변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 그가 벌레로 변한 이후, 가족과 직장 등 지금까지의 일상적인 관계가 완전히 변한다는, 사람에서 비천한 벌레로 변하자 기존의 관계조차 비천해졌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 1998년 ‘현대시’로 등단한 이재훈 시인(1972년~ )의 세 번째 시집 ‘벌레 신화’에 수록된 여러 시편들은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시킨다. 

스스로, 혹은 타의에 의해 벌레가 된 시인이 “바닥 여기저기 팔랑거리는”(‘벌레 신화’) 처지에 놓인 것은 도시의 삶과 무관치 않다. “아무도 도시에서 살라 이르지 않았”(‘향연饗宴’)지만 시인은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도시에서 살고 있다. 정글 같은 대도시에서 먹고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차도 없고 집도 없고 양복도 구두도 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도시는 저 멀리 있”(‘미적인 궁핍’)지만 시인은 도시를 떠나지 못한다. 차, 집, 양복 그리고 구두가 없다는 것은 실직했음을 뜻한다. 도시에서 월급생활자는 실직하는 순간 벌레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 고통스럽게 환멸을 견뎌야 한다. 벗어나려 날개를 파닥거릴수록 삶은 점점 더 구차해진다.

도시를 떠나 자연 속에 산다고 하여 행복한 것도 아니다. 표제시 ‘벌레’에서 보듯, 꽃 속 “웅덩이에 잠겨/ 달콤함에 취해/ 먹고 싸며 늙”어가지만 거기가 천국은 아니다. 장소에 상관없이 벌레의 삶은 벌레의 삶일 뿐이다. ‘세이렌의 노래’와 같은 꽃의 아름다움에 나를 망각하고 있다가 “그곳이 지옥인 줄 알고/ 기어 나”오지만 “마지막 계절은/ 툭 떨어”지고 만다. “벌레들끼리 서로 눈 마주쳐/ 징그러워 깜짝 놀라”는 장면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언제나 고개만 숙였습니다. 변명은 늘 부끄러우니까요. 아프면 그냥 아파야 합니다. 견딜 수 없어도 견뎌야 한다죠. 게으름을 좋아하는 저는, 참는 것이 제일 쉬운 저는, 겨우겨우 살아갑니다. 다만 구걸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꽃이라는 말, 약속이라는 말을 참 좋아했던 때가 떠오릅니다. - ‘악행극’ 부분

“채찍이 내 피부에 감겨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가시가 박혀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갈라”(‘벌레 신화’)질 만큼 고통스러워도 시인은 도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참고 견딘다. 변명도 하지 않는다. “아프면 그냥 아파”하며 견딘다. “참는 것이 제일” 쉽다는, “다만 구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구절에서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려는 시인의 섬약한 마음이 느껴져 시위가 붉어진다. 시인은 꽃과 “약속이라는 말을 참 좋아했던 때”, 즉 도시의 삶 이전이나 궁핍하지 않았던 시절이 그립다.

어른은 큰소리 내지 않는단다. 
마음에 상채기를 남기고 비겁한 자가 되겠지. 
담배 연기만 뿜어 대며, 다 안다는 듯 
끄덕끄덕 대기만 하겠지. 
날 어른이라 부르는 손가락들. 
그 모든 비겁도 눈 감고 
어떠한 격정에도 미혹되지 않는 
어른들의 세계. 
이미 네 앞의 시간들은 결정된 것. 
가르치려 드는 꼰대들에게 
다리를 까딱거리고 딴지를 걸고 싶더라도 
어른이란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제 소년을 간신히 넘었을 뿐인데. 
눈물을 참아야 하고 그리움도 참아야 하고 
홀로 식당 문을 들어서는 서글픔도 
지루한 술자리도 참아야 한다. 
아직도 쓸쓸함을 사랑할 수 없나. 
차가운 거리를 헤매다 방안에 들어와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할 때. 
내 몸에 남아 있는 허약한 온기. 
엎드려 시를 쓰는 사람. 
엎드려 생각하는 사람. 
엎드리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라지만 
엎드리는 일은 자신을 잊는 일. 
엎드려 이제 
스스로의 온기로 인해 나는 살겠다. 
- ‘불혹’ 전문
 

시인은 “이제 소년을 간신히 넘”(이하 ‘불혹’)었을 뿐인데, “눈물을 참아야 하고 그리움도 참아야 하고/ 홀로 식당 문을 들어서는 서글픔도/ 지루한 술자리도 참아야” 하는 “어른들의 세계”에 발을 들려놓았다. 아직 어른이 될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지만 “가르치려 드는 꼰대들”은 “마음에 상채기를 남기고 비겁한 자가 되”라고 훈수를 둔다.  

세상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된 마음 약한 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벌레처럼 바닥에 “엎드려 시를 쓰는” 일이다. “자신을 잊”고 “스스로의 온기로” 고통을 견디는 일이다. 그 고통이 생생히 느껴져 더 고통스럽긴 하지만 시인은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 벌레 신화=이재훈 지음 민음사 펴냄. 116쪽/ 9000원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에 2016년 9월 30일 (15:08)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출처 : http://news.mt.co.kr/mtview.php?no=2016092811524779885&outlink=1&ref=http%3A%2F%2Fsearch.naver.com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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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서정시문학상 수상소감 |

 

크고 비밀한 일을 꿈꾸는 시를 위해

 

이재훈

 

비가 온 날입니다. 바싹 말라붙었던 온 대지가 촉촉해졌고 공기는 더욱 청명해졌습니다. 한바탕 쏟아지고 나니 모든 사물들이 상쾌합니다. 이런 느낌을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늘 꿉꿉하고 답답하고 풀이 죽은 모습만 눈에 보였습니다. 제 문학도 그런 날이 많았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답답한 날이 많았습니다. 이번 수상 소식은 이런 날 한바탕 내린 단비와도 같습니다. 큰 위안이자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늘 제가 생성하는 언어가 어떤 의미가 될까, 제가 짓는 언어의 방법들이 어떤 쓸모가 있을까 고심했습니다. 질서도 없이 범람하는 글자들 속에서 방황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습니다. 산을 오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저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산에 오르는 것만 같았습니다. 오르는 산을 잘못 택한 것은 아닌지 회의한 적도 여러 번입니다.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지는 알겠지만 어떻게 올라야 할지는 모르는 자의 안타까움으로 늘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럴 때 힘을 내서 올라보라고 부추겨주시는 시간이 바로 지금인 것 같습니다. 외롭지만 더 힘을 내서 올라보겠습니다. 아니, 이제 외롭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 외롭고 싶습니다. 외롭지 않으면 자꾸 기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시의 길은 어차피 고독한 외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에서 손 내밀고 힘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신께서는 제게 어떤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비밀한 일이 무엇인지 여전히 궁금해 하며 시를 씁니다. 그 비밀이 무엇인지 깨치는 날이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시를 계속 쓸 수밖에 없는 힘은 깨치는 그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책상에 앉아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가 보겠습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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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한국서정시문학상 특집 | 평론

 

고통의 수신기

 

남승원

 

 

 

미국을 대표하는 프리마돈나 르네 플레밍이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모든 예술은 결국 문학적으로 전달된다.”는 말을 듣고 깊은 공감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스스로를 풀 리릭 소프라노full lyric soprano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화려한 콜로라투라가 넘쳐나는 오페라의 세계에서 개성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풍부한 감수성과 남달리 깊이 있는 호소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다른 오페라 가수와 달리 TV쇼 출연 같은 대중적 활동도 마다하지 않는 것 역시 어쩌면 같은 차원에서 이해해볼 수 있겠다.

이재훈 시인의 <벌레 신화>를 앞두고 단번에 르네 플레밍이 떠올랐던 이유는, 그의 시작품들이 의미관계에서 자유로워진 기표들의 발산에서 빚어지는 다채로운 기교들을 앞세운 최근의 우리 시문학에서 보기 드물게 선명한 주체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기교와 함께 독자들에게 스며들 수 있는 길을 찾기보다, 시를 읽는 독자들 내면에 잠재된 고유의 목소리와 어떤 방식으로든 충돌의 길을 걷게 된다. , 이재훈 시세계의 의미들은 독자들의 내면과 부딪히고 얽히는 움직임의 장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움직임을 일관되게 만드는 운동성이 <벌레 신화>를 관통하고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르네 플레밍의 말을 떠올려보면서, “모든 시문학은 결국 서정적으로 전달된다.”고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재훈의 시작품들은 대상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주제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가장 적극적인 차원에서 독자와의 반응을 기대하면서 서정적으로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서정의 본질이나 시와의 관계, 또는 그 관계의 범주와 의미에 대한 논의는 곧 우리 현대시 백여 년의 역사와 흐름을 같이 한다. 그만큼 서정의 문제는 시문학 내부에서 명확히 한정되어 있는 어떤 특성이라기보다, 장르의 전반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본질적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서정의 기존 인식에 균열을 일으키려는 의미 있는 시도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정=서정시라는 인식이 여전히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면, 그만큼 서정과 시문학이 그 특질에 있어서 최대치를 공유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서정이 시에 의미를 부여하는 핵심이라는 절대적 관점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서정과의 길항을 통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새로운 시적 현실, 즉 시와 시가 아닌 것(非詩)들 간의 경계 확장이 요구되는 현실에서 다시 한 번 시의 영역을 도약시킬 수 있을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재훈의 <벌레 신화>에 특징적으로 감지되는 시적 운동성을 우리 시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역시, 그의 시세계가 특정 가치를 재현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다양한 대상들과 일으키는 반응 때문이며, 나아가 시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에까지 확대 적용되는 이 반응이야말로 그 자체로 서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서정의 가장 중요한 특질은 시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이 반응하는 접점에 의미를 결절시키는 데에서가 아니라, 의미를 생성시키는 힘에 대한 모든 의심이 끊임없이 발현되도록 만드는 데에서 나온다.

을 보면 이것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해볼 수 있다. 진화의 흔적을 보여주는 인간의 신체 기관에 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시집의 첫 부분에 배치됨으로써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충돌의 움직임을 이끄는 역할도 하고 있다. 특히, 두 개의 연으로 나누어진 구성은 이 상상력을 둘러싸고 있는 대립적 요소들, 기원과 현재또는 희망과 고통’, ‘이상과 현실등의 충돌을 보다 적극적으로 일으킨다. 이를 통해 우리가 그토록 애써가면서 유지하고자 했던 평범한 일상이 사실은 현실과의 타협을 강요하면서 고유한 가치들을 기꺼이 스스로 퇴화시키게 만드는 폭력성을 감추고 있었다는 진실이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어 끝까지 퇴화를 거부함으로써 현실의 고통 위로 두드러지고 있는 을 시적 상상력의 범주에 포함시켜 작품을 통해 드러난 폭력적인 일상 속에서도 어느 정도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로 나아간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재훈의 작품이 시문학을 둘러싼 요소들의 충돌이라는 일관된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충돌이 빚어내는 어떤 결과물이어서는 안된다. 결과물에 주목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은 그것을 만들어내던 힘이 소멸되는 순간과 정확히 겹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서 우리는 이 힘의 중심이자 충돌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고, 그곳에서 결국 수난이 없는 몸은 역사가 없다는 시인의 인식과 만난다. 이를 통해 수난이 언제나 하나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것을 피할 수도 없고, 또 그렇기에 우리의 일상이 곧 고통그 자체인 현실이 밝혀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같은 사실이 그대로 압축된 대상으로서 이 내세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화 속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우리에게도 은 일상을 지속시키는 힘인 동시에 우리에게 가해지는 일상적 고통을 수신하는 안테나의 기능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표제작을 비롯하여, 시집의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벌레에서 시인이 지옥과도 같은 일상을 흘리며 기어가는 삶을 보여줄 때에도 의 상징과 겹쳐지면서 보다 명백하게 전달된다.

을 통해 드러난, 고통으로 직조된 우리의 일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이델베르크에서 시인은 성 밑의 마을로 표현된 일상의 모습을 특히 오래된 성과 대비시켜 잘 보여주고 있다. “희롱과 진노의 말들만 더펄거리는 곳으로 압축된 일상의 공간은 책망이 없화답이 존재하는 곳과의 위상학적 배치, 오래된 성을 찾아 떠나는 시적 주인공의 행위와 더불어 우리에게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처럼 시인이 만들어 둔 우리 일상의 모습은 우리를 문득 K, 카프카의 바로 그 K가 마주했던 상황과 고스란히 겹쳐진다.(시인은, 다소 익살스럽게, 그곳을 가보지 않은 어느 누구라도 지명을 듣는 순간 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독일의 소도시를 제목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시에 드러나 있는 것처럼, ‘마을을 벗어나 에 오르는 일은 결국 저 마을의 시간과 분리되지 않고 반복될 수밖에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카프카를 경험해본 사람들이라면 중차대한 법적 소송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그 이유조차 전혀 알 수 없다거나, 또는 오랫동안 기대해왔던 목표 바로 앞에서 달성이 무기한 지연되는 상황을 맞닥뜨린 적이 있을 것이다. 카프카는 이처럼 일상이 갑작스럽게 무너지는 데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그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오히려 그 상황을 지속시키는 유일한 원인이 되는 이해 불가능한 상황에 우리를 몰아넣는다. 카프카가 꼼꼼히 만들어둔 일종의 미로와도 같은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처럼, 이재훈의 시세계를 관통하고 난 우리 역시 평안했던 일상 전체를 의심하고 스스로에게 끝없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처럼 시 안에서 던져진 질문과 그것을 읽는 독자 내부의 질문이 충돌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시가 가진 힘이 발산되고 있다.

<벌레 신화> 전반에 걸쳐 있는 동굴이미지 역시 이와 관련되어 있다. 햇칼, 빙하의 고고학, 구렁등에서 직접적인 소재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작품들에서 구멍-(어두운)숲속-(어둠에 잠긴)-(깊은)등의 이미저리들로 확산되면서 동굴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어둠과 밝음, 안과 밖등을 구분 짓는 경계인 동시에 그 둘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충돌을 일으키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햇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동굴은 바깥의 햇살이 가득한 공간과 쉽게 대조를 이루고, 또 그 때문에 황홀하게만 보이는 바깥의 세계를 꿈꾸게 만든다. 하지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바깥의 세계는 동굴 속 에게 그대로 로 작용하면서 고통과 희생을 통하지 않고서는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만든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끝이 보이지 않는 텅 빈 계곡을 날고 싶다.”는 바람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물론이지만, 이재훈의 시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언제나 이면에서 그것을 발생시키는 고통스러운 순간과의 충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속적으로 충돌을 발생시키는 이재훈의 시는 독자들을 수동적인 상태에 머무르지 않게 만들고 필연적으로 적극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를 위해 그는 우리의 일상 속으로 고통을 끌어들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할 것은 그가 고통에 직접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는 오해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물질적 환경과 지적·감정적 반응을 하며 이것이 결국 시를 만들어내고, 이렇게 만들어진 시작품이 다시 독자와의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시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했던 오든(W.H. Auden)의 말대로, 이재훈에게 고통은 독자들에게 능동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일종의 장치인 셈이다.

나쁜 병에서 그가 고통은 존재와 다른 물질이라고 말할 때 이는 보다 분명해진다. ‘고통을 끌어들인 이유가 평범한 일상 뒤에 가려진 폭력적이고도 비인간적인 얼굴을 폭로하기 위함이라면,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맞아들인 고통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과 반응하는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고통의 전제가 우리의 존재와 동등한 독립적 차원이라는 사실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만이 어느 한 쪽의 일방적 영향력이나, 또는 그 둘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일종의 결과물에 관심을 두기보다, ‘일상고통이 동등한 차원에서 만나 벌어지는 반응들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양하게 벌어지는 이 반응들에 참여하게 되면서 때로 자신의 삶과 고통을 견주어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시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민해보는 일도 가능해진다.

이재훈 시인이 만들어둔 길을 따라가는 일은 목적과 무관한, 반응 그 자체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반응이 결과로 이어지는 보편적 상식의 세계에서라면 이는 어쩌면 막연한 두려움을 동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반응안에는 최대한의 고통이라는 범주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은 살이 찌는데, 풀잎은 쪼그라들기만 하는, 그래서 소망(벌레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면 어느 한쪽을 반드시 포기해야만 하는 제로-섬 사회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언제나 고통을 남의 몫으로 미루어왔다. 결국, <벌레 신화>를 통해 고통마저 적극적으로 포함할 수밖에 없는 반응을 경험하게 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장면을 만나게 된다.

 

비밀을 말하지 않아도 맛보면 다 아는 것이지. 꿈을 맛보고, 슬픔을 맛보고, 춥고 서글픈 때를 맛보는 사람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약속을 맛본다네. 그 어떤 약속도 폐기할 수 없다고 쓴다네. 어느새 입 안이 까끌하고 씁쓸한 봄이 성큼 와 있다네.

― 「맛보는 공동체부분

 

맛을 본다는 것은 그 어떤 이해의 방식과도 전혀 다르다. 같이 눈물을 흘리거나, 혹은 안아 주거나 손을 잡아 줄 때조차, 냉정하게 말해서 타인의 고통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맛을 본다는 것은 우선 나의 감각을 직접 참여시키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또한 맛보는 행위에는 자신이 싫어하는 특정 맛이 그 대상에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단 맛을 보게 된다면, 자신의 의도가 전혀 없었던 순간에조차 맛보는 사람들과 동일한 공동체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꿈을 맛보는 것과 같은 순간이거나 춥고 서글픈 때처럼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달콤한 희망보다 입 안이 까끌하고 씁쓸한 봄을 노래하는 이재훈의 시세계가 더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전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사사>, 2017년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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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승원 | 문학평론가.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계간 <포지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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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마지막 음악이 기도라면

 

이재훈

 

 

우울한 음악을 좋아했다. 한때는 병적으로 좋아했다. 남들은 사춘기에 겪는 우울을 늦게서야 앓기 시작했다. 까닭 모를 우울을 친구로 삼았다. 늘 땅만 보며 걸었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용인하지 못했다.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우울한 곡들이 되레 위로가 되던 시절이었다. 요절한 유재하를 그리워했고, 김현식이 사망한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이었다. 나중 김광석이 자살하리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우울하고 거칠고 처절한 곡들만 탐하면서 스스로 유폐된 채 말도 안 되는 문학의 성채를 쌓아가던 때, 여러 음악들을 만났다.

<글루미 선데이>는 위험한 곡이라고 했다. 이 곡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자살했다고 한다. 음악이 가지는 전설이나 풍문은 자주 김을 빼게 만든다. 막연한 기대는 막연한 느낌만을 남기고, 우월한 기대는 부정적인 느낌을 만들기 마련이다. 글루미 선데이가 내겐 그랬다. 너무 대단한 곡이었지만, 죽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곡이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조금 우울했고, 조금은 편안했다. 빌리 홀리데이가 부르는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좋아서 미치겠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레이 찰스가 부르는 글루미 선데이는 낭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 노래 때문에 일요일이 조금 우울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렇게 우울해지지는 않았다. 일요일은 원래 그런 날이니까.

사랑은 내 생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누가 이 우울하고 폐쇄적이고 백수인 스무 살의 청년을 좋아할 것인가. 하지만 우울한 백수 청년에게 감지되는 모성적 연민을 사랑의 느낌으로 착각하는 친구들도 간혹 있었다. 잠깐씩 연애도 아닌 연애 비슷한 것을 하기도 했다. 손을 잡았던가. 눈빛을 마주 했던가. 입을 맞추기에는 내가 너무 초라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연애를 하며 우울한 음악을 많이 들려주었던 기억이 난다. 우울한 음악을 들으며 세상의 모든 우울이 나라는 필터를 통해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영혼의 기품으로 변화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사랑이라는 마음을 건드릴 수도 있을까 바랐다. 참으로 치기어린 마음이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위로였다. 음악이 나를 위로할 때, 한없이 자유로운 공기를 느꼈다.

무슨 음악들이 있었을까. 개빈 브라이어스의 <Jesus'Blood Never Failed Me Yet>. 나중 탐 웨이츠도 불렀다. 음악이 너무 길었지만, 긴 음악이 가지는 오기가 느껴져서 좋았다. 약물과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싱어송라이터 엘리엇 스미스의 <Between The Bars><Miss Misery>는 한때 어둠이 밀려올 때마다 듣고 싶었던 곡이었다. 존 서먼의 바리톤 섹소폰은 압권이다. 존 서먼의 <Private City> 앨범을 틀어놓으면 시가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내게 가장 처절하고 우울한 곡은 마우로 펠로시였다. 마우로 펠로시의 <suicidio><Al Mercato Degli Uomini Piccoli>는 한없이 가라앉고 끝도 없이 침울해진다. 매번 술을 마시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였다.

우울한 음악들을 예전처럼 많이 듣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경쾌함보다는 우울함 쪽이 훨씬 좋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우울한 음악들을 통해 더 우울해지려는 것보다는 그 우울함을 즐기며 견디려했던 것 같다. 음악이 주는 덕목 중에 성찰이 있다면, 우울한 음악은 그 덕목을 가장 잘 실천할 수 있는 경우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죽기 전이라면? 아무리 우울해도 죽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죽음은 용기와 태도와 실존의 자긍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므로.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면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옆에 함께 있었던 강도의 심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영혼의 구원과 용서와 감사와 회개가 점철된 가장 나약한 자의 고백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문득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자주 내 입에서 흥얼대는 노래다. <Amazing grace>. 우리나라에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가로 번안되어 있다. 마할리아 잭슨이 불렀던 Amazing grace, 사랑과평화가 불렀던 Amazing grace, 윤복희와 인순이가 불렀던 Amazing grace, 박정현이나 소향이 불렀던 Amazing grace. 그 모든 Amazing grace가 내게는 모두 뜨거운 벅참이다. 전주 부분에 파이프 오르간이 깔리는 마할리아 잭슨의 곡이라면 더욱 좋겠다.

- <더 멀리> 마지막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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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하루

 

이재훈

 

하루

 

<멋진 하루>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은 하정우와 전도연. 둘은 연인이었다가 1년 전에 헤어진 관계이다. 전도연은 하정우를 일 년 만에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 빌려준 돈은 350만원. 헤어진 사이에 좀 야박하다 싶지만 사정을 들어보면 둘 다 딱하다. 지금 이들은 자신의 찌질하고 쪼잔함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돈이 급하니까. 이후 영화는 빌려준 돈을 받으려는 전도연이 돈을 갚는다는 하정우를 따라다니는 과정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특별히 기억나는 어떤 하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우리에겐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온다. 결혼도 사업도 실패하고 경마장이나 전전하는 하정우를 따라다니다 보니 그렇게 밉지만은 않은 것이다. 일상 속에 존재하는 미묘한 감정선이 아주 섬세하게 그려진다.

<멋진 하루>는 일상의 힘이 가진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인간의 일상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어떤 나름의 이유와 변명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이유와 변명들이 하찮거나 심오하거나 하는 문제는 개인이 바라보는 입장차이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공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은 고백에 가깝다. 고백은 늘 부끄러운 것이다. 자랑스러운 고백은 그다지 재미가 없다. 늘 반복되는 일상. 그 일상의 몇 순간을 고백하려고 한다.

 

빈 강의실

 

나는 강의를 한다. 구체적으로는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강의하고, 내가 운영하는 창작반에서 시창작을 강의한다. 일주일에 하루는 잡지사로 출근해 일을 본다. 강의를 한 지는 15년 정도 되었다. 가능하다면 한국의 마지막 시간강사가 되고 싶다. 그만큼 끝까지 하고 싶다는 말이다.

나는 강의가 끝나고 난 후, 강의실에서의 텅 빈 침묵을 좋아한다. 모두 떠나고 아무도 없는 빈 강의실에서 몇 분 동안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있다. 빈 강의실에는 알 수 없는 흔적들이 존재한다. 파장 이후에 오는 쓸쓸함과 안도감, 그리고 허전함이 빈 강의실에는 존재한다.

학교 다닐 때에도 빈 강의실을 주로 애용했다. 도서관보다 빈 강의실을 찾아다니며 공부하면 집중이 더 잘 되었다. 비밀이지만 빈 강의실에서 밀애를 즐기기도 했다. 빈 강의실에 슬그머니 들어오는 햇살을 마주하면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다. 그 햇살에 자꾸 손을 갖다 대보는 것이다.

 

버스

 

일 때문에 일주일에 몇 번은 버스를 탄다. 내가 사는 곳은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꼭 마을버스를 타야 한다. 마을버스는 대개 거칠다. 작은 버스이지만 만만히 보면 안 된다. 손잡이를 꼭 잡고 타야 한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면 잠시 버스에서는 낭만을 즐길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시간이 자주 오지는 않는다. 버스에서 나는 주로 팟캐스트를 듣거나 시집을 읽는다.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에는 시집을 읽고, 서서 갈 때에는 팟캐스트를 듣는다.

일주일에 한번은 고속버스를 탄다. 지방강의 때문이다.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지방행 고속버스를 탄다. 두 시간 정도 걸린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 버스에서는 주로 잠을 잔다. 어떤 음악이 내 잠에 도움을 줄까를 고민하며 버스에 오른다. 잠을 자다가 깨기도 하고, 잠을 자다가 차창 밖을 구경하기도 한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에서도 잠을 잔다. 어떤 날은 음악을 듣기도 하고, 어떤 날은 영화를 보기도 한다. 어떤 날은 책을 읽기도 한다. 그리고 간혹 어떤 날은 시를 쓰기도 한다. 버스에서 쓴 시는 내게 몇 안 되는 생활시이기도 하다. 아래는 최근 발표한 버스에서 쓴 시.

 

차창 밖으로 비가 내린다.

버스를 타기 전에는 맑았던 하늘인데

집으로 가는 길에 비가 내린다.

지방 소도시의 대학에서 시간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갈 때면 늘 가혹하게 막힌다.

모두 저마다 집으로 가거나

외로움을 달랠 사람들을 찾아가거나

저녁 일터로 가는 길일 것이다.

휑한 마음 한구석에 빗방울이 또르륵 떨어진다.

매일 보따리를 들고 어딘가로 나서는

장돌뱅이의 저녁이 궁금하다.

언제쯤 집으로 당도할까.

쉬어야 할 집은 멀고

목은 더 컬컬해진다.

버스 뒷자리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연유인지 생각하다

뒤로 가서 가녀린 등을 토닥거려주고 싶지만

모른 척 그냥 눈을 감는다.

도착할 집은 멀고 잠은 오지 않는다.

버스가 도착할 무렵이면

가까운 막걸리집부터 찾을 것이다.

컬컬한 목이 바짝 마른다.

― 「귀가전문

 

프로야구

 

매일 하는 일상 중 하나는 프로야구 하이라이트를 보는 일이다. 전 구단의 하이라이트 및 경기 영상을 다 본다. 시간이 있는 날은 야구중계를 저녁 내내 본다. 함께 사는 가족들의 원성을 들으면서 꿋꿋하게 본다. 가끔씩 MLBPARKSTATIZFoulball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눈팅을 하곤 한다. 일면에 몇 번씩 경기장을 찾기도 한다. 그런 날은 맥주를 마시다가 경기에 집중을 못하지만. 나는 한화 이글스 팬이다. 요즘 야구보는 게 많이 즐겁다. 그 이유는 야구를 좋아하는 분들은 모두 알 것이다.

 

카프카독서실

 

책은 늘 읽는 것이므로. 늘 일주일에 몇 권의 시집을 읽는다. 그리고 다른 책들도 읽는다. 누워서 읽거나 기대어서 읽는다. 요즘 읽던 그 책이 어디 갔는지를 자주 찾아다닌다.

카프카독서실에 관한 얘기는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내 방이 카프카독서실이다. 하지만 지금 내 방을 초등학교 2학년 아들에게 빼앗길 위험에 처해 있다.

지금 내 책상에 쌓여져 있는 책들은 다음과 같다. 십여 권의 문예지. 최근 배달된 십여 권의 시집. 무라카미 하루키의 <버스데이 걸>, 기욤 뮈소의 <파리의 아파트>, 헤르만 헤세의 <최초의 모험>, 김은상 시인이 쓴 소설 <빨강 모자를 쓴 아이들>, 박영규의 <조선전쟁실록>.

지금 이 글을 쓰는 일요일 오후. 읽던 책을 덮고 프로야구 중계를 본다. 읽던 책을 덮고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일상이다.

 

- <시현실> 201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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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 잘 다녀왔습니다.
거기엔 사막이 있었고, 별이 있었고,
모래바람이 있었고, 끝없는 지평선이 있었습니다.
바람을 입고 별을 덮고 느릿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종일 지평선만 바라보며 달리기도 했습니다.
무엇을 바라고 간 것이 아니기에
아무것도 얻어 온 것이 없습니다.
그냥 긴 꿈을 꾼 것처럼 몽롱하기만 합니다.
여기에도 별이 있고, 사막이 있고, 바람이 있을텐데.
이곳에도 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가끔씩 하늘을 올려봐야겠습니다.

사진을 엄청 찍어왔는데요.
심심할 때마다 하나씩 풀어놓겠습니다.
물론 몽골의 몽골몽골한 이야기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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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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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귀가/이재훈

최종수정 2017.09.20 08:48 기사입력 2017.09.20 08:48

  
 차창 밖으로 비가 내린다. 
 버스를 타기 전에는 맑았던 하늘인데 
 집으로 가는 길에 비가 내린다. 
 지방 소도시의 대학에서 시간 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갈 때면 늘 가혹하게 막힌다. 
 모두 저마다 집으로 가거나 
 외로움을 달랠 사람들을 찾아가거나 
 저녁 일터로 가는 길일 것이다. 
 휑한 마음 한구석에 빗방울이 또르륵 떨어진다.

 

 매일 보따리를 들고 어딘가로 나서는 
 장돌뱅이의 저녁이 궁금하다. 
 언제쯤 집으로 당도할까. 
 쉬어야 할 집은 멀고 
 목은 더 컬컬해진다. 
 버스 뒷자리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연유인지 생각하다 
 뒤로 가서 가녀린 등을 토닥거려 주고 싶지만
 모른 척 그냥 눈을 감는다. 
 도착할 집은 멀고 잠은 오지 않는다. 
 버스가 도착할 무렵이면 
 가까운 막걸리집부터 찾을 것이다. 
 컬컬한 목이 바짝 마른다. 

  
■참 이상한 일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매번 멀기만 하다. 아마도 집에 빨리 도착했으면 그래서 따뜻한 물에 씻고 누웠으면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이제 세 정거장 남았구나, 저기 마트를 돌면 꼬마붕어빵 파는 아저씨가 보이겠지, 두 개만 먼저 먹어도 될까… 혼자 정겨운 셈을 하면서 차곡차곡 밟아 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은, 그런데 정말 희한하게도 왜 이렇게 퍽퍽하고 고달프기만 한지 그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어디 생맥주 한잔 같이할 사람은 없나 싶은 생각만 간절하다. 왜 그럴까?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다만 지금은 장돌뱅이처럼 좀 서성이다 아무 데나 들어가 아무렇게나 자고 싶고 그러다 좀 울고 싶을 뿐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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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산문 2018. 1. 29. 23:30

편지

이재훈

 

1.

내가 편지를 처음 쓰기 시작한 때는 중학교 1학년 즈음이다. 나는 낯설고 먼 동네에서 전학온 이방인이었다. 당시에는 전학온 학생이 드문 시절이었다. 친구들은 타향에서 온 얼굴이 희고 키가 작은 전학생을 놀려주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이상한 별명을 만들어 내어 놀려대곤 했다. 짓궂은 친구들은 뒤에서 돌을 던지고 도망가기도 했다. 누가 별명을 지어냈으며 누가 돌을 던졌고 누가 그러지 말라고 말렸는지 모두 알 수 있는 작은 동네였다. 학교에서부터 집까지 논둑길을 걸으며 한없이 외로워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엄마가 사서 입혀준 멜빵바지가 창피했다. 친구들처럼 털털하게 아무 거나 입고 함께 풀피리를 불며 소 풀뜯기러 가고 싶었다. 뚝방에서는 늘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피어올랐다. 집에 가다 말고 뚝방에 앉아 소를 몰고 다니는 친구들을 오래도록 보는 날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얘기지만 당시엔 또래집단에 편입되지 못한 외로움 때문에 너무나도 힘들었다. 나는 편지를 썼다. 떠나온 곳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혹시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나처럼 너희들도 전학간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동갑내기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던 교회 누나에게도 편지를 썼다. 어쩌면 그 편지들이 내 문학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애들은 시간이 지나면 친해지게 마련이다. 나를 놀려대던 친구들은 친해지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친해지고 싶었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놀려댔던 것이다. 나를 괴롭히는 줄로만 알았던 게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였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무장해제되었다. 몇 달 동안 외로움에 지쳐있던 나에게 친구들은 샘물처럼 달았다. 친구들과 개울가에서 미역을 감았고 함께 소 풀을 뜯겼다. 저녁나절엔 친구집 사랑방 아궁이에서 쇠죽이 끓는 구수한 냄새를 오래도록 맡았다. 억센 경상도 욕을 배웠고 친구들처럼 아무 옷이나 입고 동네를 쏘다녔다. 때론 범죄에 가까운 대량 서리를 하러 다니기도 하였다. 편지는 더 이상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사춘기가 찾아왔다. 밤늦게까지 라디오를 켜놓고 멍하게 있는 날이 많았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유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잡히지 않는 방송이었다. 나는 김희애의 인기가요를 들었다. 늦은 밤에는 팝음악 방송을 들었다. 공테이프를 걸어 놓고 좋은 음악이 나오면 녹음을 했다. 그리고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번엔 방송국에 편지를 썼다. 다시 불을 지피기 시작한 내 그리움은 대상이 없는 막연한 것이었다. 방송국은 그런 내 그리움을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편지지에 썼고, 노트에 썼고, 엽서에 썼고, 은행잎에 썼고, 티슈에 썼다. 내 그리움을 전할 수 있는 모든 사물이 나의 편지지였다. 펜이 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글씨체를 실험하며 썼다. 어쩌면 그 편지들이 내 문학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나는 또다시 전학을 갔다. 그리고 또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 편지는 그리움뿐만 아니라 존재의 궁금증에 대한 갈망을 담은 것이었다. 친구들은 답장을 쓰느라 곤혹을 치렀을 것이다. 밑도 끝도 없는 허황된 질문들과 존재론적 고민들에 대해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망설였을 것이다. 대답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편지를 쓰는 게 중요했다. 어쩌면 그 편지들이 내 문학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편지를 쓰는 일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되었다. 아마 이십대까지는 계속 편지를 썼을 것이다. 그 편지들은 몇 개의 상자 속에 오래도록 보관되어 있었다. 시골집 책상 아래 깊숙이 보관되어 있었다. 가끔씩 시골집에 들르면 그 편지들을 꺼내 보곤 했다. 아직 설익은 감정을 어찌할 바 몰라 서성대는 문장들이, 열망에 차서 흥분된 문장들이, 열등감에 휩싸여 자책하는 불안한 문장들이, 구원을 꿈꾸는 불가해한 내면의 문장들이 스멀스멀 기어다니고 있었다. 어쩌면 그 편지를 꺼내 읽는 일들이 내 문학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2.

 

스물 하고도 몇 해가 넘어갔다. 문학을 한다고 폼을 잡으며 허둥대던 시절이었다. 문학 쫌 할 것 같은 친구들이나 여학생들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 시를 썼고 시가 어떻냐고 물었다. 편지에 치기어린 문학론을 펼쳤고 문학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객기를 부렸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등단을 했다. 등단을 했다고 편지를 썼으며, 등단을 하니 더 괴롭다고 편지를 썼다. 시가 내 미래를 무엇 하나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시에 투정을 부렸다. 시 때문에 내가 이꼴이 되었다는 투정을 편지에 썼다. 어쩌면 괜찮다는 위로의 대답을 듣기 위해 투정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보관한 편지상자가 불태워진 것은 이십대의 마지막이 끝나가고 있을 때였다. 명절에도 들르지 않았던 시골집에 오랜만에 들렀다. 그런데 편지상자가 없어졌다. 늘 책상 밑 깊숙이 놓여 있던 편지상자가 없어졌다.

엄마. 내 편지상자 못 봤어요?”

그거 다 태워버렸다.”

뭐라고요? 아니. 그걸. 제게 말도 안하시고 태우다니요.”

. 너무 오래 돼서. 필요 없는 건줄 알고 태워버렸지. 중요한 건지 몰랐구나.”

어머니는 그 편지들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내 일기까지도 훔쳐보시는 분인데 그 편지를 안 읽었을 리가 없었다. 아마 과거의 일들에 목매인 나의 모습이 보기 싫었으리라. 옛 추억에 젖어 찔끔거리는 아들의 모습이 안타까우셨으리라. 그리고 어머니의 병적일 만큼 깔끔한 성격도 한몫 했다. 누렇게 바랜 종이상자를 빨리 치워버리고 싶으셨을 것이다. 아무튼 편지를 잃어버린 그날의 사건은 꽤 오랫동안 나를 옥죄었다. 내 추억의 대부분이 뭉텅 잘려나간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편지를 계속 썼다. 아직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고, 편지를 쓰는 사람들이 꽤 남아 있었다.

 

내 스무 살은 노래였다. 거리에서 배운 노래가 목청으로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그것을 먼 이방의 방언이라 여겼다. 천둥소리는 더 크게 들렸고, 몸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단 하나의 권능도 없이 숨소리 없는 거리에 서 있었다. 나는, 가볍게 다른 문을 열 수 있을까. 꿈도 없는 잠을 매일 잘 수 있을까. 내 손가락들이 들러붙어 물갈퀴가 되고 이빨은 사자처럼 송곳니만 사납게 솟아난다. 성 꼭대기에 올라 어둠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새의 등에 올라타고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으며 나스카 평원에 새겨넣은 의 형상을 한눈으로 보고 싶었다. 나는, 어떤 법을 배웠던가. 노래하는 법 말고는 배운 것이 없다. 눈 먼 한 마리의 새가 내 머리칼 속에서 둥지를 틀고 있었다. 새의 전생은 자유였다고 평원을 돌보던 파수꾼이었다고, 그 새가 법을 배웠다.

 

법을 배우는 순간, 나는 풀이 되었다.
  
하늘을 날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는
 
,

나는 오래 전 풀의 고독을 기억하고 있다.

이재훈, 나스카 평원을 떠난 새에 관한 이야기부분(<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나의 노래는 편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성전에서 배운 노래를 편지에 옮겨 적었고, 거리에서 배운 노래를 편지에 옮겨 적었다. 내 존재의 고민과 환상의 빛깔과 삶의 고통들을 편지에 옮겨 적었다.

서른이 넘어가면서 편지 쓰는 일이 뜸해졌다. 이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성탄절 카드도 신년 카드도 서서히 사라졌다. 이제 편지는 내 스무 살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지금은 사라진 어떤 흔적이 편지의 기억을 통해 내 청춘을 증언해주는 것만 같다. 편지로 주고받았던 오랜 기다림과 떨림은 이제 없을 것이다. 봄날 비가 오는 밤이 되면 정말 오랜만에 손편지를 써봐야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끄러워 부치지 못할 정념의 말들을 맘껏 써봐야겠다. 펜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부끄러운 문장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 기다림의 문장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빗소리를 들어야겠다.

출처 : <문학사상>, 2016년 4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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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한국서정시문학상 특집 | 대담

 

이재훈

_시원에 대한 원대한 물음을 던지는 고백록

 

대담 : 이재훈 이성혁

 

   

내면으로의 속삭임

이성혁 : 안녕하세요? 이재훈 시인, 반갑습니다. 사실 평소 이재훈 시인에게 말 놓고 지내지만 많은 독자가 보는 지면에 실리는 인터뷰이니만큼 말을 올릴게요. 이렇게 만난 게 오랜만은 아니네요. 어쩌다가 이곳저곳에서 만나곤 하니까요. 우선 2017년 한국서정시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한국서정시문학상은 백석대학교와 <시사사>가 공동주관한 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번이 제3회째죠? 재작년에는 조정권 시인이, 작년에는 김명인 시인께서 수상하셨습니다. 올해는 그보다는 비교적 젊은 시인인 이재훈 시인이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보니까 지난 1년 동안 출간된 시집에 상을 주는 것 같은데요. 좀 어색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소감을 말씀해주시겠어요?

 

이재훈 : . 반갑습니다. 이성혁 선생님. 저도 이 자리에서는 형이 아닌 문학평론가 선생님으로 말씀 올리겠습니다.(웃음) 또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지요? 학기가 끝이 나고 이렇게 마주하니 마음도 더 편하고 좋습니다. 이성혁 선생님은 특별한 비평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시단의 중요한 평론가입니다. 이렇게 대담을 함께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국서정시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서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서정은 무엇일까. 모든 시인들은 서정을 갖고 있을 텐데요. 제 시에서 서정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상이라는 기쁘고 즐거우면서도 다소 부담스러운, 뭔가 복잡한 심사가 얽혀 있는 그런 마음이 들었고요. 이전 수상하셨던 선생님들과 비교할 때 문학적 이력이 일천하여 부끄럽고 황망하기 그지없습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오래 간직할지 생각했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올해부터는 시집에 상을 주는 것은 아니고 시집 속의 작품에 상을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해서 제 수상작은 동화의 세계6편이 되었습니다.

 

이성혁 : , 그렇군요. 작품상 개념이군요. 한 편이 아니라 여러 편에 상을 주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리고 한국서정시문학상이라는 명칭이 인상적입니다. 시의 본령은 서정에 있다는 말은 많이들 하는 말이지만, 2000년대 한국 시단에서 서정이라는 장르 개념에 대해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었죠. 그래서 서정시로부터 일부러 일탈하는 시들이 많이 등장했고요. 2010년대 중반에 한국서정시문학상이란 명칭의 상이 제정된 것은 최첨단의 21세기에 다소 천대(?)받게 된 서정을 다시 아끼고 보듬자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봅니다.
이재훈 시인이 이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달받았을 때, ‘아 받을 사람이 받았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한창 새로운 시에 대한 담론이 시단을 들썩일 때인 2005년에 첫 시집을 냈죠. 이 시집은 전통적인 서정시는 아닐지라도, 첫 시집 해설을 쓰신 유성호 선생님의 말씀대로 형이상학적 전율을 보여주는 시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전율로부터 농도 짙은 서정이 뿜어져 나오는 시집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격렬한 낭만주의적 충동이 느껴지는 시집입니다. 당시 시단의 흐름 한복판에서 젊은 시인의 첫 시집으로 이러한 서정시집이 나왔다는 것이 주목할 만합니다.
이재훈 시인은 데뷔부터 지금까지 줄곧 서정시의 본령이랄까 그것을 붙잡고 시를 썼다는 생각입니다. 첫 시집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네요. “어쩌면, 내 말은 고백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시원의 원대한 물음이 있다.” “좀 치기로 들리겠지만, 문학하는 이유가 자기 구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문학이 구원 자체는 될 수 없겠지만 구원을 욕망하게 하는 에너지는 되기 때문이다.” 쓸쓸한 날의 기록정재학에게에서는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서정시인이 되고 싶다라고도 쓰고 있고요. 이 문장들을 보면서 이재훈 시인은 정말 서정 시인이 되고자 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나요? 여전히 시인에게 시와 문학은 고백이자 구원의 에너지, 시원에 대한 원대한 물음인가요?

 

이재훈 : 선생님께서 한국서정시문학상의 취지를 아주 잘 설명해주신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는데요. 다시 한 번 찾아보니 한국서정시문학상이 추구하는 서정시는 과거의 낡은 서정시가 아니라 미래의 새로운 서정시이고, 미학적 모더니티의 영역을 새롭게 개척하는 서정시를 찾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 시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통서정시의 범주가 아니라 좀 다른 서정시 쪽에 속한다는 지점 때문에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은 것이겠지요.
어떻게 보면 모든 시는 서정시에 속합니다. 시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담지 않은 시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서정시는 시법과 전통을 모범적으로 계승한 시를 말하는 것이겠죠. 지금의 우리시는 전통을 모범적으로 계승한 시보다는 자기 나름대로 창조적으로 변용한 시편들이 훨씬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서정시의 범주는 아주 넓게 확장됩니다. 제 시도 모범적으로 계승한 측면보다는 나름대로 비껴나간 시에 해당될 것입니다. 제 시는 정서와 생각이 솔직히 드러난, 파토스가 너무 강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 왔거든요. 그런 이유로 내 시는 서정성이 너무 과잉된 시라고 농담처럼 얘기해 왔습니다. “나는 서정시인이 되고 싶다는 그런 의미에서 나온 말이기도 합니다. 또한 제가 동료 시인들에게 실제로 했던 말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세간의 평가는 복잡하게 얽혀 있었어요. 서정적인 시인으로, 모더니즘 시인으로 이쪽저쪽에서 제 이름을 부르곤 했죠. 다만 제 시가 결단보다는 망설임을, 외침보다는 내면으로의 속삭임을 더 택했기에 기존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습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방법적 고민보다 주제적 고민이 훨씬 더 많이 두드러진 시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한 고민과 탐구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어요. 제가 방법적 고민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주제에 대한 제 의지가 너무 도드라진 면이 있거든요. 누구나 알겠지만 좋은 시는 내용과 형식이 일체가 되어야 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계속 실패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유성호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형이상학적 전율이라는 말은 제게 과분한 단어이지만, 정말 힘이 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저 세간의 평가에 귀 기울이지 말고 자신이 가고 싶은 시의 길을 혼자서 가거라 하는 말처럼 들렸거든요.
저는 아직도 고전적인 문학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시를 종교적인 구원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구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시가 고백이자 구원의 에너지, 시원에 대한 원대한 물음이라는 말은 아직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제게 계속 유효한 말입니다. 첫 시집의 시인의 말은 앞으로 이런 시를 쓰고 싶다는 포부와도 같은데요. 시를 쓰면 쓸수록 어려운 길을 택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웃음)

 

난독의 시간들

이성혁 : 한 마디 덧붙이자면 제 생각으로는 문학에서는 고전적인 것이 모던한 것이라고 봅니다. 고전이란 당대에 가장 치열하게 대응함으로써 얻게 된 위상이라고 본다면 말이죠. 초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말이 든든하게 느껴집니다. 어떻게 문학과 만나게 되었는지 물어봐야겠어요. 방금 인용한 시인의 말의 제목은 흥미롭게도 흠의 고백입니다. 이 글을 보니, 어린 시절 말에 서툴렀으며 잦은 이사로 이사 간 동네의 방언들을 새로 익혔어야 했다고요. 그래서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의식을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 이 이재훈 시인을 시로 이끌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말과 사물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니 말입니다. 그 후, 네루다의 에서처럼 시가 시인에게 왔다고 고백하고 있는데요, 이 글이 무척 짧은 글이라서 어떻게 이재훈 시인이 시를 영접(?)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힘드네요. 이 기회에 이재훈 시인이 어떻게 시와 만나게 되었는지 시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마 적지 않은 시간을 습작에 바쳤을 것인데 습작기의 생활도 알고 싶고요. 제가 언제 이재훈 시인이 무척 고독한 청년 시절을 보냈다는 말을 직접 들은 것 같은데요. 아주 오래전 술 마시면서 들은 것이라 구체적인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청춘의 대부분 시간을 방에 홀로 있으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보냈다는 말이 기억에 남아 있는데 맞습니까? <벌레 신화>에 실린 불혹의 한 구절인 엎드려 시를 쓰는 사람이 바로 청춘 시절의 이재훈 시인 자신을 말하는 거겠죠? 말이 좀 엉켰습니다. 질문을 정리하자면, 등단 이전 이재훈 시인이 어떻게 시와 만나게 되었고 습작기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듣고 싶습니다.

 

이재훈 : 어린 시절은 전학을 많이 다녔습니다. 전학을 간 그곳에서는 늘 이방인이었죠.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로 다녔습니다. 늘 이전에 살았던 곳을 그리워했고, 늘 이전에 살았던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는 적응을 못하고, 늘 이전의 곳을 생각했던 거죠. 그리움이라는 병에 걸렸던 것 같아요. 제게 시는 예기치 않게 찾아 왔습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거의 시를 읽지 않았어요. 책을 많이 읽기는 했지만, 시를 읽지는 못했는데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갈 때까지의 몇 년의 백수 시절 동안 시를 많이 읽었습니다. 저는 그때 존재론적 고민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종일 도서관에 가서 아무 책이나 찾아 읽는 난독의 시간들이 이어졌어요. 한동안 소설에 빠져 지냈습니다. 그러다 시를 만난 것입니다. 시를 읽으니 마치 운명처럼 시가 널 구원해주리라, 라고 말하는 것 같았죠. 이때부터 이 땅에 있는 모든 시집들을 읽어보겠다고 덤벼들었습니다. 시병, 시마에 들린 거죠. 그 이후로 시를 읽는 나날들로 이십 대를 가득 채웠죠. 그 당시의 추억과 얘기들은 대하실록 정도의 분량이 되기 때문에 이쯤에서 말을 거두겠습니다.(웃음)

 

이성혁 : . 언제 소설 형식의 청춘기를 써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재밌을 것 같은데요? 이제 이재훈 시인의 이력을 보겠습니다. 시인은 1998<현대시> 신인상을 받으면서 시단에 등단합니다. 1972년생이니 스물일곱에 등단을 했네요. 요즘 추세로는 꽤 빨리 등단한 셈입니다.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2005년에,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2011년에, 세 번째 시집 <벌레 신화>2016년에 출간됩니다. 등단한 지 20년이 다 되었는데 시집을 세 권 내었군요. 다작은 아니네요. 요즘 시인들은 삼 년에 한 권씩 내곤 하던데요.
그런데 세 권의 시집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어요. 어떤 의도가 있는지 궁금하더군요. 보통 4부로 구성하는 경우가 많은데 왜 3부로 구성했을까. 이재훈 시인의 성격이 엿보이는 것 같기도 하구요. 또한 세 시집 모두 처음 시와 마지막 시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수미상관이라고 할까요. 그래서인지 시집 한 권이 어떤 시적 영혼의 모험을 드라마틱하게 전개하고 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 역시 시인의 의도에 따른 것일 텐데, 시집 편집할 때 어떤 원칙이나 습벽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해요.

 

이재훈 : 습벽이 있거나 원칙을 정해 놓은 것은 아니고요. 제 시집이 한 편의 격정적인 영혼의 드라마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첫 시와 마지막 시의 배치와 중간 중간 시의 배치를 많이 고심했었죠. 그렇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3부로 짜여진 것이고요. 질문으로 시작되어 떠남과 방황과 탐험과 회귀의 드라마인 것이죠. 마치 원탁의 기사가 성배를 찾아 나서는 모험처럼 읽힐 수 있다면 하고 과욕을 부린 것인데, 시에서 그런 바람은 요원한 일이었지요. 나중에 단테의 <신곡같은 작품을 한번 써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등단 햇수에 비해서 시집이 적다고들 말씀하시는데요. 그건 시집 출간 시스템이나 저의 게으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데요. 시집의 권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얼마나 의미 있는 시집을 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로 스스로 위안을 삼고는 합니다. 제가 등단했던 때에는 시를 발표하기도 시집을 출간하기도 어려웠을 때였습니다. 원고료도 없이 시를 발표한 게 훨씬 더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가장 열정적인 때였습니다. 이십 대이기도 했고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까지 시를 쓰는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앞으로도 제 바람은 가늘고 길게 오래오래 시를 쓰는 것입니다.(웃음)

 

이성혁 : 그리 될 것 같아요. 시를 쓰지 않으면 못살 것 같은 사람이 있는 데 이재훈 시인이 꼭 그렇습니다. 지금부터는 세 시집의 시세계에 대해서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은 예전에 읽었습니다. 두 번째 시집에 대해서는 <현대시>에 평론을 쓰기도 했지요. <벌레 신화>는 이번 기회에 정독했습니다. 물론 이전의 두 시집 역시 다시 정독했어요. 첫 시집부터 질문을 드릴까요. 이재훈 시인의 첫 시집을 다시 읽으면서 , 뜨거운 시집이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시인의 표현을 따르면 시원에 대한 열망이 불타오르는 시집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시집 해설에서 유성호 선생님께서는 종교적 경험을 읽어내고 계시는데, 해설을 읽기 전에 전 신화의 인유가 참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헬레니즘적일뿐만 아니라 헤브라이즘적인 신화가 다방면에서 인유되고 있어요.
이 신화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열망의 표현이 이재훈 시인의 서정을 독특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정시는 서정을 이끄는 어떤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재훈 시인의 초기 서정시에는 이 신화적 상상력이 뒷받침되고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상상력이 신화적이니, 표사에서 김혜순 시인이 말씀하시듯 이재훈 시의 시공은 광대해지게 됩니다. 이재훈 시인에게 종교적 상상력 또는 신화적 상상력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물어보고 싶었어요. 이러한 상상력이 키워진 것은 젊은 시기의 독서 체험이나 실제 경험과 관계가 크겠는데, 이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이재훈 : 제 시에서 종교적 기표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신화적 기표가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접했으니까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신학을 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종교 관련 서적을 많이 읽었어요. 그러니까 시집을 읽기 전부터 종교서적을 읽었던 거죠. 초등학교 시절에는 산골에서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놀기만 했어요. 동화책이나 위인전이 있기는 했지만 전혀 읽지 않았죠. 산골에서 동화책을 읽는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기억나는 것은 어린이 잡지를 좋아했어요. 어깨동무, 새소년, 소년중앙을 자주 구입해서 보았죠. 송년호나 신년호는 부록선물 때문에 빼놓지 않고 용돈을 모아 샀어요. 용돈은 동네 개울에서 민물고기를 잡거나 산에 가서 도토리를 주워 내다 팔아 모았는데요. 지금 그런 얘기를 하면 믿지를 않아요. 제가 워낙 산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윗세대들의 경험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검정고무신까지 신어봤거든요.(웃음) 특히 집에서 새벗이란 잡지를 구독했었어요. 아마 기독교잡지여서 아버지께서 구독을 한 것은 아닌가 합니다. 아버지는 월부 책장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객 중 한 명이었습니다. 월부 책 때문에 어머니와 많이 싸우셨죠. 살림이 궁핍해서 산에서 나무를 해왔던 시절에 책이라니요.(웃음) 어깨동무가 박근혜의 육영재단에서 발행했다는 것과 새벗을 발행한 분이 한국시협 이사이자 성서원 회장으로 있는 김영진 시인이란 것은 나중에 안 사실이었습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교회를 다녔으니까 어린 시절의 종교적 체험과 성경의 언어들이 내면화되어 있었겠죠. 사춘기 시절부터 제 존재와 세상의 이치와 비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요. 집에 있는 책들 대부분이 신학이나 종교와 관련된 책이어서 자연스럽게 읽게 되었죠. 라인홀드 니이버, 워치만 니 등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 저희 집에서 기독교사상이란 잡지를 구독했는데요. 그 잡지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나요. 종교문제연구소 탁명환의 책도 신기하고 궁금해서 많이 읽었죠. 문학책으로는 보들레르의 시집과 까뮈 전집이 있었어요. 세로판으로 된 양장본인데요. 보들레르의 시집은 아직도 본가에 있을 겁니다. 그 책들도 독파했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무슨 뜻인지 알고 읽었을까 싶습니다. 그저 그때 존재의 갈망으로 무엇이라도 읽어야 했던 시절, 그 언어들이 내면화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 이후에는 헤르만 헤세, 단테, 파스칼, 몽테뉴, 조셉 캠벨, 엘리아데, 샤르뎅, 폴 리쾨르 등은 제가 자주 펼치는 목록들입니다. 그 중에서 헤르만 헤세를 무척 좋아했어요. 그의 구도자적 삶과 운명적 슬픔에 대해 깊이 공감했어요. 헤세의 모든 주인공에게 감정이입되어 제가 마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읽었죠. 첫 번째 시집을 내던 시절에는 북유럽 신화나 성배와 연금술에 관련된 책들을 많이 들쳐보았습니다. 요즘에는 미술사학자 노성두 선생님이 번역하신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배를 흥미롭게 들춰보고 있어요. 이런 독서에 대한 수다는 나중 뒤풀이에서 많이 말씀드리도록 할게요.(웃음) 아마 이런 독서 경험들이 제 언어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성혁 : 이재훈 시인도 대단한 독서가였군요. 시인들의 독서담을 들으면 주눅들더라구요. 내가 안 읽은 책들이 많이 언급되어서. 질문을 한 내가 잘못이지.(웃음) 시 세계로 돌아가겠습니다. 첫 시집에서 보여준 신화적 상상력은 <벌레 신화>에 이르기까지 변주되어 나타납니다만, 첫 시집은 도시적 서정 또한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재훈 시인은 도시적 상상력과 신화적 상상력을 결합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이재훈 시인 시의 독특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재훈 시인은 도시 시인중 한 명이라고 할 만큼 도시에서의 삶에 대한 시를 최근 시집에까지 남겨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 공간은 웅장한 신화로 각색이 되어 환몽 속에서 도시적 서정이 표현됩니다. 이를 김혜순 시인은, 아까 인용한 표사에서 “‘빌딩나무 숲인 이곳에 사막과 우주와 원시의 시공을 겹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재훈 시인은 서울 생은 아니지만 서울에서 지금까지 오랜 기간 살아왔잖아요. <벌레 신화>에도 도시에 대한 묵시적인 상상이 보이지만 이 첫 시집에도 도시는 부정적이고 초월해야 할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젊은 시절 이재훈 시인에게 도시에서의 생활은 어떠한 곳이었는지 궁금해집니다. 또한 도시를 이렇게 신화적 공간으로 변모시킨다는 시작詩作의 발상이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도 궁금하고요.

 

이재훈 : 저는 강원도에서 초등학교 때까지 보냈습니다. 영월, 횡성, 인제 등지에서 보냈는데요. 아주 척박한 산골 오지에서 보냈어요. 그곳의 기억과 체험이 시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거의 등장하지는 않죠. 제게 강원도의 유년 시절은 가장 그리운 원형적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곳에서의 경험은 제 기억에서 아주 아름답게 남아 있어요. 냇물을 직접 마시고, 밭의 작물을 캐 먹고, 들의 과일을 따 먹으며 돌아다녔는데요. 어쩌면 유토피아의 세계와 같은 곳이 제가 태어나고 유년시절까지 자란 강원도이죠.
도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체험했는데요. 처음엔 도시가 너무 좋았어요. 심지어 자동차의 매연을 일부러 맡으러 다녔어요. 세련된 도시 냄새 같았기 때문이죠. 고등학교를 졸업하니 경상도를 거쳐 충남 논산에서 제가 살고 있었어요. 호남선을 타고 서울로 올라와 한강철교를 지날 때면 가슴이 두근거렸죠. 하지만 도시의 생활은 그런 낭만적인 곳이 아니죠. 비애의 공간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였는데요. 이제는 도시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 삶이 되었죠
이런 도시의 경험은 애증이 점철된 아주 복잡한 마음입니다. 버릴 수도 없지만 사랑할 수도 없는 그런 대상이 도시가 되어버린 것이죠. 그렇기에 도시 공간이 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도시에 신화의 공간이 겹쳐지는 것은 의도한 것이라기보다 제 의지가 그리로 향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신화는 원형의 공간이며, 꿈들이 실제로 현현하는 경험의 공간인데요. 도시에서 꾸는 꿈이 바로 신화의 공간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반면에 시골의 경험은 시로 쓰기 힘들어요. 시골의 경험은 혐오가 없기 때문이죠. 실제 경험한 공간이 이상향의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으니까, 시골에 대해 시를 쓰면 찬미의 형태로 나오더라구요.(웃음)

 

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순간

이성혁 : 그 점이 이재훈의 시가 미학적 모더니티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만들지 않았나 합니다. 도시는 모더니티의 공간이라고 할 때 이재훈의 서정시는 모더니티의 현장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재훈의 서정시에는 모더니즘적인 것과 낭만주의적인 것이 결합되어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이재훈 시인은 이 모더니티의 공간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화하면서 시에 수용하고, 나아가 비판하고 초월해야 할 공간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미학적 모더니티의 시적 태도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미학적 모더니티를 달성하는 거리화의 방법이 이재훈의 시에서는 도시의 일상과 신화적 세계를 겹쳐놓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어요.
그런데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는 신화적 상상력보다는 도시적 삶에서 얻게 된 감수성이 더욱 농후해진 것 같아요. 이 시집에서도 역시 우주적 시야를 통해 도시적 삶이 포착되고 있습니다만, 표제작에서 시인이 도시에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태양계 행성 지위를 박탈당한 명왕성에 비유하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소외의식, 이방인 의식이 특히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안드로메다 바이러스에서의 그대들은/ 나를 외계인이라고 불렀지라는 표현에서도 그러한 의식을 볼 수 있고요. 외계인인 자신이 유폐되어 있는 도시 공간과 문명에 대해서 다소 직접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이 시집에서 그러한 소외의식은 자기 부정으로, 나아가 니힐리즘으로 이재훈 시인을 이끌고 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혹시 2005년에서 2011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 기간에 박사 논문도 제출한 걸로 아는데, 한국 근대시에서 허무의식에 대한 연구였지요? 책으로도 출간했구요.(<현대시와 허무의식>, 국학자료원, 2007) 이렇게 부정적인 의식이 심화된 이유가 실제의 삶과 연관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또 허무의식을 박사 논문 주제로 삼을 만큼 니힐리즘에 대해 파고든 이유도 알고 싶고, 시에서의 허무의식에 대한 이재훈 시인의 생각을 듣고 싶기도 합니다. 자세한 것은 <현대시와 허무의식>을 읽어봐야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잠깐이라도 시인의 허무의식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재훈 : 제 시의 시공간이 아주 넓은 편인데요. 그건 제가 골몰한 창작 방법론 때문이기도 합니다. 시의 주제를 어떻게 하면 잘 담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니 그렇게 넓은 시공간을 사용하게 되었어요. 그게 제 언어 호흡에도 맞고 재미도 있으니까 반복해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가령 도시 속에서의 자아와 우주 속에서의 자아가 만나고 사라지고, 다시 만나고 관계를 맺는 상상이 실존 속에서 아주 고통스러운 형국으로 진행되었다고 할까요. 선생님께서 얘기한 이 우주적 시야는 앞으로도 계속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니힐리즘에 관해서는 실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박사논문 주제가 허무의식입니다. 30년대부터 60년대 시인까지 허무의식을 구현한 시인들 네 명을 분석한 것이 제 논문 주제였습니다. 유치환, 박인환, 이형기, 강은교를 중심으로 그들의 허무의식을 분석했어요. 이들은 모두 허무의식이 자신의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시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인들입니다. 허무의식을 연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니체와 같은 니힐리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요. 이들 시인의 허무의식은 시대적 체험과 문명체험, 개인의 인식 체험으로부터 배태되어 시로써 구현됩니다. 한국의 문학은 시대와 문명과 굴곡진 개인사를 벗어날 수 없는 환경을 갖고 있잖아요. 그렇기에 한국의 문학에서 허무는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문학에서 허무는 보편적인 주제가 되어 버렸어요. 현대시에 나타난 허무의식을 따라간 공부가 제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석사도 이형기를 연구했고 박사에서도 이형기 시인을 살펴보았는데요. 그런 이유로 이번에 이형기 시전집을 편저하게 되었어요. 곧 현대시에서 출간하게 될 텐데요. 이형기 시전집이 앞으로 이형기 시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텍스트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성혁 : , 기대됩니다. <이형기 시전집>이 출간되는군요. 출간되면 한 권 주실 거죠?(웃음) 두 번째 시집에 대해 더 듣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시집에서 제가 주목했던 시는 대황하연작시입니다. 시집의 중추를 이루는 2부에 집중적으로 실려 있는 연작시이지요. 11편으로 이루어져 있고요. 여기서 황하는 중국 대륙의 황하가 아니라 사막의 바다를 의미하는 것이죠? 사막은 바로 문명의 공간을 의미하고요. 아니 황하는 도시라는 사막을 일차적으로 비유하는 데 그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중층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황하는 모래의 강이자 시체들의 진물에서 나온 누런 황토물이 범람하는 강입니다. 이 연작시는 이재훈 시인이 가지고 있는 도시 문명 세계에 대한 지독한 환멸을 강렬한 언어로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재훈 시인의 시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시이며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미지가 근대적 삶에 대한 극한의 부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재훈 시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시를 썼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물론 이 시가 그러한 부정성에 그치면서 끝나지는 않습니다. 이 연작의 마지막 편인 대황하 11의 마지막 연에서 당신은 붉은 눈물,/ 가만히 들어와 출렁인다./ 거리를 걷고 있으면/ 온몸이 하늘로 붕 뜬다./ 병든 몸 위에 새들이 날고 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누런 진물은 붉은 눈물로 전이되고 몸은 병들었지만 새는 날아갑니다. 이러한 긍정적 전환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집의 마지막 시인 연금술사의 꿈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인이 말하고 있듯이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는 죽음의 생성적 계기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말이 또 길어졌습니다만, 대황하연작에 대한 이재훈 시인의 구상이라든지 작시 의도 등을 듣고 싶습니다.

 

이재훈 : 이거 너무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대황하연작에 대해서는 저도 공들인 시편들인데, 평단에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습니다. 시인들 사이에서는 많이들 얘기가 되었었는데요. 선생님의 대황하에 대한 해석은 제가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이 적확한 것입니다. 물론 또 다른 여러 해석도 가능합니다. 제가 대황하에 대한 해석을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고요. 다만 몇 가지 체험에 대해서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이십 대 초반에 서울의 고시원에서 살았어요. 그때 쿠스코라는 밴드의 대황하라는 곡과 소지로의 대황하를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반복해서 들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고시원의 어두운 지하 골방에서 이어폰을 귀에 꼽고 대황하 연주곡을 들었던 시간들이 제게는 유일한 위안의 시간이었죠. 음악의 리듬과 음표를 따라다니며 누런 황톳물이 굽이치는 곳에서 제가 서 있는 상상을 했죠. 그럴 때면 제 존재가 전혀 다른 세계로 잠시 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십수 년이 훨씬 지난 후에 아주 선명하고 절절하게 다시 떠올랐어요. 모든 걸 다 우연이라고 말하면 너무 무책임하겠지만, 정말 우연히 그런 생각이 스톤헨지의 유적처럼 떠올랐지요.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보면서도 비슷한 감정의 들끓음이 있었고요. 숭고의 개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었죠. 그런 상상이 당시 물에서 목도한 죽음의 체험과 제 존재의 체험, 일상의 체험 등과 엮이면서 연작시가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왔어요. 모두 물이라는 매체를 통한 것인데요. 물에 대한 상상력을 극한으로 밀고 가고 싶었습니다.

 

이성혁 :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이었군요. 전 주로 도시 문명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보았는데 말이죠. 그럼, 이제 작년에 출간된 <벌레 신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참 독특한 제목이에요. 여기서 벌레는 무엇을 의미할지 궁금했어요. 시집 해설자인 장은수 평론가가 포착했듯이 뿔을 잃고 난 존재가 벌레인가요? 은 이 시집에서 많은 주목을 받은 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나도 그 시를 어떤 문예지에 실린 것으로 전에 읽었어요. ‘은 시적 영혼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하는 뼈대와 같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뿔을 잃었다고 당신은 그 시에서 말하고 있어요.
여하튼, 뿔을 잃은 시인의 존재가 벌레로 비유되고 있다고 보는데, 이때 벌레는 우리가 통상 남을 비하할 때 쓰는 그 벌레의 의미인가요? 양가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긴 합니다. 바로 그 비하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표제작에서 시인이 말하듯이 그 벌레는 대지의 증인인 흙 위를 꿈틀대며 다니고 있으니까요. 벌레는 비상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우리의 시체흙의 몸위를 겨우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다니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벌레로 비유되고 있는 시인은 이제 낭만적 비상을 꿈꾸는 존재는 아니겠지요. 하지만 한편으로 땅을 호령하는 지배자들에게맞서서 흙을 증언하는 존재로서 벌레-시인이 강하게 긍정되고 있기도 합니다. ‘벌레가 의미하는 바를 얘기해주시면서 지금 생각하고 있는 시인이란 존재의 위상에 대해 들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재훈 : 아주 잘 읽어주셨습니다. 뿔과 벌레에 대해서 제가 더 보탤 말이 없습니다.(웃음) 벌레는 이 땅에 살아가는 아주 작은 존재들입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아주 쉽고 간단하게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존재이죠. 이런 존재는 현대를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과도 흡사합니다. 시인도 마찬가지인데요. 그런데 제가 끝까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그러한 벌레의 존재도 긍지를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긍지를 표상하는 상징이 시인이 아닐까 생각했죠. 시인은 이 세계를 좀 다르게, 혹은 특별하게 생각하고 싶은 존재들이니까요. 또한 시인은 이 세계와 세계의 모든 관계를 다르게 살아보고 싶은 자들이며,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자들이니까요. 우리도 먼 우주에서 보면 그런 존재들이죠. 인간이 벌레를 보는 것처럼 아주 작은 존재들이겠죠. 한 그늘에서 또 다른 그늘로 제 몸을 옮기는데 평생을 바치는 존재. 이 존재가 긍지를 갖는 순간,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이죠. 벌레에게는 한 번쯤 희망의 순간도 있다는 것입니다. 벌레는 탈피를 하면 날개를 가진 나비가 될 수 있으니까요. 벌레는 너덜너덜해진 육체를 벗어던지고 날개를 가진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행운을 얻기도 합니다. 우리의 영혼도 그런 희망의 순간을 찾아 매번 순례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매 순간 아주 짧지만 그런 순례의 순간을 찾아 이 삶을 견디는 것은 아닐까요. 신화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순간. 우리의 영혼이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순간. 지금 이 땅의 삶 너머를 생각하는 순간. 신화의 시간이 찾아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속적으로 시 속에서 그려내었던 신화적 상상력이 벌레를 통해 발현한 사건이 그러한 시편들이 아닐까 합니다.

 

 

 이성혁 : , 잘 들었습니다. 비상에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해주셨네요. 난 좀 더 암울한 세계를 이 시집이 보여주고 있지 않나 생각했습니다만. 이 시집에 대해 더 얘기해보지요. 이 시집의 1-2부를 보면 두 번째 시집, 특히 대황하연작에서 보여준 이 문명 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전혀 바뀐 것 같지가 않습니다. 신화적 소재를 통해 현대 문명을 극히 부정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은 몇몇 시에서도 여전합니다. 맘몬과 달과 비라든지 스틱스같은 시가 그러하죠. 특히 후자의 시에서는 높은 건물을 지어 벽을 만들고/ 지폐를 만들어 불행을 깁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스틱스 강에서 스스로 얼음을 깨고 몸을 넣는이들로 나타납니다. 도시인들은 끔찍하게도 스스로 죽음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이들로 등장하는 것이죠. 이를 보면 이 시집에는 묵시적 상상력이 더욱 짙어졌다고도 느껴집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3부에서는 이러한 묵시적 장면이 거의 사라집니다. 동화의 세계를 읽어봅니다. 예전에는 이재훈 시가 전개되는 시간이 주로 환상의 세계가 펼쳐지는 밤이었다면, 이 시는 저녁의 시간에 스며들어 있는 동화의 세계를 포착하고자 하는 것 같아요 이 시를 읽고는 이재훈 시인이 무시무시한 묵시론적 신화의 세계가 아닌 천진난만한 동화의 세계에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이 동화의 세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3부는 이재훈의 시세계에서 근본적인 전환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당신의 시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당신이나 우리가 이 3부의 시편들에 등장하는 것을 봐도요. 이재훈 시인의 시는 거의 독백 아니었나요? 열정과 희구, 환멸과 고통 속에 있는 영혼의 들뜬 말들이 그간 이재훈의 시를 만들었다고 생각되거든요. 희구는 시원에의 희구여서 타인이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황금의 입과 같은 시에 당신은 제 몸속 나비 한 마리가 다른 몸을 찾아가는 기적이라는 멋진 시구를 남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맛보는 공동체라면서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약속을 맛본다네. 그 어떤 약속도 폐기할 수 없다고 쓴다네”(맛보는 공동체)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고요. 당신은 엎드려 이제/ 스스로의 온기로 인해 나는 살겠다”(불혹)라고도 쓰고 이제 혼자만 중얼거리지 않겠다라고도 쓰고 있습니다. 이재훈의 시세계에 정말 어떤 전환이 이루어진 건가요? 아니면 원래 이재훈의 시에는 이러한 긍정성이 녹아들어가 있었는데 내가 읽지 못한 건가요?

 

이재훈 : 뭔가 들킨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너무 꼼꼼히 읽으셔서요.(웃음) 시집의 3부와 같은 시는 예전에도 종종 써오던 세계였습니다. 문예지에 발표할 때는 종종 선보이던 세계였지요. 제가 쓰는 시는 이렇게 천차만별입니다.(웃음) 대신 그 전 시집에는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얘기한 동화의 세계를 못 보여준 것이죠. 왜냐하면 제가 한 100여 편 정도 시를 발표했을 때 비로소 시집을 묶어볼까 하고 생각하거든요. 그중에서 시집에 들어갈 시를 선하다 보면 꼭 얘기하고 싶은 시들을 먼저 넣다 보니 빠진 시들이 많았던 거죠. 그러니까 시집이 추구하는 방향을 정하고 시를 꾸리다 보니 그 방향성과 조금 다른 지점에 놓인 시들은 자연스레 빠지게 되곤 합니다. 시인들은 이런 경험을 많이 할 겁니다. 저도 그런 경우인데요. 이번 세 번째 시집의 3부는 시적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동화의 세계가 끼어들어갈 여지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시집을 출간하고 다시 보니까 시집의 균형도 맞는 것 같아 이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분법을 넘어서는 언어를 위해

 

이성혁 : 그렇군요. 시집을 놓고 이재훈 시인의 시세계를 생각하다 보니까 두루두루 살피질 못했어요. 시집 편집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네요. 그런데 3부 시에서 보여주는 우리에의 지향이 나쁜 정치 아래 놓여 있었던 한국의 상황, 그리고 그 정치에 저항했던 많은 움직임들, 특히 세월호 참사 이후의 움직임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벌레 신화>의 맨 마지막 바로 앞에 있는 시인 악행극에서 시인은 당신은 물었습니다. 가슴에 촛불을 켜고 저 이글거리는 광장에 나가지 않았느냐고.”라는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을 옮겨놓고 있습니다. 그간 이재훈 시인의 시에서 거리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동반하면서 숱하게 등장하지만 광장이 등장하는 건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시집을 통해 이재훈 시를 읽어서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집이 출간된 이후입니다만, 작년 116일자 경향신문에 이재훈 시인의 광화문 촛불 집회 현장 기사가 실려 놀랐습니다. 이렇게 대통령 퇴진이라는 정치적 요구를 위해 이재훈 시인이 일간지에 글을 쓰고 실었다는 사실이 뜻밖이었습니다. 작년 말부터 일어나 대통령 탄핵 때까지 지속되었던 들불 같은 촛불이 이재훈 시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재훈 : 먼저 얘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집 출간 이후 악행극을 작년 광장의 일과 유비해서 읽고 감명을 받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시입니다. 그런데 더 정확히 얘기하면 악행극2016년 탄핵으로 인한 광화문에서의 광장이 아니라 그 전에 광우병 때 광화문에 있었던 촛불시위의 체험으로 쓴 것입니다. 촛불과 광장의 체험은 같지만 그 시기가 달랐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악행극은 몇 년 전에 쓴 시이거든요. 경향신문에 쓴 광화문 촛불집회 참관기는 문인이면서 일반 시민의 자격으로 참석했기에 그런 청탁이 들어온 것은 아닌가 합니다. 제가 115일 첫 번째 광화문 촛불집회 때 참석했는데요. 처음으로 백만 명의 인파가 모였던 날이죠. 그때 초등학생인 제 딸, 아들과 함께 광장에 나갔습니다. 문인이면서 동시에 가족을 데리고 나온 시민의 입장이었기에 글을 쓸 기회가 주어진 것이죠.
저도 세월호 이후 많은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 사회에 대한 생각과 판단들이 시민의 윤리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작품과 미학적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런 고민들을 수반한 작품들을 몇 작품 쓰기도 했고요. 이 부분은 저뿐만 아니라 많은 시인들이 고민하고 있겠죠. 아마 앞으로 지금 우리 공동체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가 조금 더 나올 것 같습니다.

 

이성혁 : <벌레 신화>는 작년 촛불 시위 이전에 출간되었죠. 그런데 악행극이 몇 년 전에 쓴 시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시세계의 변화가 와서 쓴 것이라고 추측했기 때문에요. <경향신문>에 실은 글은 청탁에 의해 쓴 것이었군요. 난 시인이 투고한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시인이 생각하고 있는 서정시의 미래에 대해서 물을까 합니다. 서정시가 구태의연한 것이 아니고 언제나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나간다고 할 때, 과연 한국의 서정시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가야 할까요? 한국 서정시의 미래 운운하는 것이 너무 거창해서 답하기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어요. 그렇다면 세 번째 시집 이후 이재훈 시인이 구상하고 있는 자신의 서정시가 나갈 방향 등에 대해 자유롭게 말해주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재훈 : 서정시의 미래나 시의 미래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제게는 없습니다. 다만 서정시의 미래가 아니라 시의 미래에 대해 희망하는 것은 있습니다. 지금의 한국시는 아주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스펙트럼도 못마땅합니다. 더 다양하고 넓은 스펙트럼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를 들면 영화는 컬트, 멜로, 코미디, 액션, 공포, 환타지, 공상과학, 미래, 미스테리, 서부극, 느와르, 스릴러, 전쟁, 탐정, 인권, 퀴어, 포르노, 종교, 다큐 등등 너무나 많은 스펙트럼과 장르적 언어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는 아직도 전통과 실험, 보수와 진보, 농촌과 도시, 순수와 대중, 형식과 내용 등의 이분법적 시각과 해석과 평가에 의존해 있습니다. 모두 어떤 극단에 서 있으라고 합니다. 전통의 극단, 실험의 극단에 서 있어야 관심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명민한 시인들은 극단의 언어를 만들기에 공을 들입니다. 어떤 곳이나 극단은 예외적이죠. 그 예외는 운명처럼 우연히 나오게 됩니다. 마치 그 예외의 삶이 아니면 존재증명이 안 되는 시인들에 의해서 나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운명이 아니라 방법으로 극단에 다가가려고 합니다. 자신의 몸은 그쪽이 아닌데 언어를 과장되게 극단으로 가져가는 것이죠. 왜냐하면 외롭기 때문입니다. 시단에서 다양하고 이상하고 특별한 세계를 탐하는 시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고, 더욱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준다면 우리의 시가 더 풍요롭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의 유파는 꼭 몇 명이 비슷한 시를 써야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단 한 시인으로도 유파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선례가 나올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 전에 제가 관심 가졌던 세계를 계속 탐구할 생각입니다. 그쪽의 공부는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시집을 구상하게 될지 확언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일단 조금만 더 써보면 일단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요. 그 모습이 보이면 그다음 시집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이성혁 : 이분법을 넘어야 한다는 말, 흥미롭네요. 한 시인으로도 유파를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도 의미 깊게 느껴집니다. 긴 시간, 성의 있는 답변 고마웠습니다. 이 인터뷰 덕분으로 이재훈 시인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저와 같은 생각일 거라고 믿습니다. 그럼, 여름 건강하게 보내시고 건필하시길 빌어요!

 

 

이재훈 : . 감사합니다. 제겐 더할 나위 없이 멋진 대담자이셨습니다. 과분하고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현문우답을 받아 주시느라 오랜 시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건강한 여름을 보내는 일이 남았습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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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묘지(山頂墓地) 1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 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물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을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 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 명령을 내리라.

좀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에 뿌려진 생목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

  조정권 선생님은 내게 그 무엇보다 산정묘지의 시인이다. 시가 거느린 본질과 이상에의 갈망이 가장 고독한 절연의 풍경으로 보여주는 시적세계는 단연 눈에 띄었다. 산정을 이리저리 오가며 탄성과 다짐과 고백의 말들을 얼음처럼 쏟아낼 때 느껴지는 전율은 오래 내 감각에 남았다. 그 후로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에 신기해했고, <하늘이불>에 눈이 반짝했으며, <신성한 숲>을 가로질러 <떠도는 몸들>에 이르러 우수어린 도시산책자의 본면을 바라보다 <고요로의 초대>에서 위안을 얻었다.

평단에 선생의 시세계를 지칭하는 정신주의라는 개념은 조정권의 시를 위해 만들어진 개념과도 같았다. 정신주의를 대변할만한 시가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저 물음이 나에겐 큰 도전처럼 느껴졌다. 빽빽한 나무숲 사이에서 아주 좁고 희미한 길 하나가 슬쩍 보이는 기분이었다. 때론 나는 정신주의가 될 것이다라는 다소 거칠고 객기어린 말을 노트에 적어 넣기도 했다. 하지만 내겐 선생과 같은 염결이 없다. 선생과 같은 시적 인내가 없으며, 철학도 사상도 미비하고, 미적인 것에 대한 심미안도 부족하다. 그렇기에 선생의 시는 내게 늘 위안이었다.

나는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를 묶으면서 조정권 선생님의 의견에 많이 의지했음을 고백해야 한다. 첫 시집을 묶어놓고 조정권 선생님과 김혜순 선생님께 추천글을 부탁드렸다. 두 분 선생님 모두 큰 인연은 없지만 추천글을 받고 싶은 선생님이었다. 조정권 선생님께 무작정 원고를 보내놓고 알아서 책임지시라는 생각으로 판단만을 기다렸다. 시집을 읽고 쓸 만하면 써주시고 그렇지 않다면 하등의 부담도 하지마시고 거절해주십사는 말을 첨언한 터였다. 며칠 후 선생께서는 친히 전화를 주셨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내 첫 시집의 세계와 가능성에 대해 오랫동안 말씀해주셨다.

그때의 전화 통화는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덧붙여 이런 말씀도 해주셨다. “이 시인. 시집 제목을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로 하는 게 어때요? 길다고? 좀 길면 어때. 이 시 제목이 이 시인의 첫 시집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제목인데. 내 첫 시집도 제목이 엄청 길다고.” 그렇게 하여 내 첫 시집 제목은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 저 제목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저 제목이어서 참 다행이다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나는 그 후로 선생의 곁에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이제 영면하셨다. 나는 지금도 시가 안 풀릴 때마다 선생의 시를 읽는다. 그러면 뜨겁고 강한 시적 에너지가 전해지기도 하고, 고요하게 침잠하기도 한다. 의미 사이의 긴장을 숨찰 정도로 멋들어지고 단호하게 읽다가 어느 순간에 다시 고요해진다. 특히 산정묘지는 소리 내어 읽어야 하는 시다.

가을밤이던가. 문학행사를 마치고 선생과 집이 같은 방향이라 택시를 함께 탔다. 선생은 이 시인. 맥주나 한잔 더 하고 갈까고 넌지시 물으셨다.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월곡역에서 내려 새벽까지 선생과 통음을 했다. 그때 무슨 얘기를 했던가. 오로지 시 얘기였다. 시 하나로 오롯하여, 모든 예술과 철학의 사유가 시를 위한 말들이었다. 은둔은 도시 속에서 하는 게 가장 처절하고 적절하다고 말씀하셨던가. 오로지 시로 만난 선생님이 보고 싶은 그런 날이다. 첫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_ <현대시학>, 2017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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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_관련자료 2017. 10. 26. 14:29

 

이재훈 

 

찬바람이 옷깃을 연다

궁핍도 잊고 지체한 일들을 잊고

언덕을 오른다

바람의 체온을 오래 안으면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붉게 물들어 간다.

물들어 간다는 건 고통스러운 것인데

물들어간다는 건 소멸하는 것인데

이 아름답고 황홀한 속마음을 어디에 둘까.

악인이 넘치는 세계에서

무엇을 붙들고 물들고 잠들까.

무력한 사람들에게 간청할 목록을 적고 나면

소리 내어 울고 싶어진다.

무엇을 위해 우린 목소리를 놓지 못했을까.

지난여름 온몸을 물로 가득 채웠지.

물의 힘으로 당신을 기억했다.

이제 서서히 내 몸에 물이 빠져나간다.

잎들은 모두 붉고 노랗게 늙는다.

언덕의 세상과 당신과 내가 온통 물들다가

툭 다른 계절로 사라지는 순간

푸석한 내 몸에서 당신이 툭 떨어져 나가는 순간

툭 툭 빗방울이 가슴을 두드리는 절명의 순간

 

―《시와표현, 201611월호

 


 

은 의성어(擬聲語)이다. 사물의 소리를 흉내내는 말이다. 이 소리만 들어도 무엇인가 벌어지는 사건들을 사실 그대로 실감할 수 있게 한다. 또는 이란 본래의 하나 된 어떤 사물이 분리되어질 때 나는 소리이기도 하다. 하나를 이루는 순간이 둘로 분리되어 완전한 개체를 형성하는 순간 하는 소리는 절로 일어난다. 이 화자에게는 하나의 소멸이요, ‘고통이 된다.

화자는 찬바람이 옷깃을 연다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순간을 맞는다. 따라서 찬바람은 곧 궁핍이요, ‘지체한 일로서 옷깃을열듯 언덕을 오른다’. 또한 바람의 체온을 오래 안으면서 붉게 물들어감으로써 바람의 체온이 안기는 하나를 이룬다. 그리고 마침내 소멸된다. 완전한 개체의 분리다. 소리의 원형을 이룬다. ‘물들어 간다는 건 고통스러운 것인데/물들어간다는 건 소멸하는 것인데/이 아름답고 황홀한 속마음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찬바람 궁핍 지체한 일 고통 소멸 악인이 넘치는 세계 간청할 목록 로부터 옷깃을 열고 언덕을 오르고 붉게 물들어 간 붙들고 물들고 잠들까 빠져나간다 붉고 노랗게 늙음으로써 하는 세상에 이른다. 그것은 곧 언덕의 세상과 당신과 내가 온통 물들다가/툭 다른 계절로 사라지는 순간/푸석한 내 몸에서 당신의 툭 떨어져 나가는 순간/툭 툭 빗방울이 가슴을 두드리는 절명의 순간이 된다. 결국 이 시작품은 삶의 온갖 노정에서 만나는 숱한 언덕의 세상과 당신과 내가 온통 물들다가끝내 하며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거니와. 이를 이라는 의성어를 통하여 시동성(示同性시차성(示差性)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삶의 다양한 상징적 체계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추천 구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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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이 되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재훈

 

우리는 그때 김광석을 광석이형이라고 불렀다. 스무 살이 되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짐을 싸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갈 데가 없었다. 친구의 자취방에 얹혀살았다. 나와 처지가 비슷한 친구들도 몇 있었다.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자취방에 모여 술이나 마시며 시간을 축내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에는 무협지나 비디오를 빌려보는 게 최고의 재미였다. 자취방에는 비디오기기가 없었기에 비디오테이프를 플레이할 수 있는 비디오기기까지 빌려주던 시절이었다. 하루 이틀 동안 열편이 넘는 비디오를 보고나면 머리가 아팠다. 대부분 홍콩영화나 헐리우드 액션영화였는데 줄거리나 영화 제목이 겹쳐서 무엇을 보았는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러다 할 일이 없으면 음악을 들었다. 우리에게 김광석의 음악은 마치 우리의 삶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김광석을 듣고 있으면 그때의 일들이 떠올려진다.

배가 고팠던 시절이었다. 라면만 먹어 자주 설사를 했다. 밥은 먹어야 했기에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저마다 학원으로 업소로 공장으로 식당으로 나다녔다. 밤이 되면 두더지처럼 한 사람씩 자취방의 소굴로 기어들어왔다. 모두 지쳐있었다. 아무런 기술도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외로웠다. 그 외로움은 혼자라는 외로움이 아니라 삶의 고단함 속에서 나오는 외로움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복잡한 심사가 서로 얽혀 마음을 힘들게 했다. 아무런 낙관도 없는 미래의 일들이 눈앞에 뻔히 보였다. 친구들끼리 점점 말수가 줄었다. 무협지를 읽는 일도 비디오를 보는 일도 심드렁해졌다. 그러다 밤이 깊어지면 술을 찾았다. 스무 살은 누구나 술을 물처럼 마실 나이였다. 항상 술이 부족했던 나이였다. 안주는 새우깡이나 생라면 몇 개면 그만이었다. 술을 마시면 김광석을 들었다. 왜 김광석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누구도 김광석의 노래를 바꾸라고 한 일은 없었다. 술을 마실 때는 무조건 김광석이어야만 했다. 누구라도 김광석을 틀어놓는 것에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김광석을 들으며 옛 애인을 생각했다. 무료한 날들을 생각했고, 댓가없는 날들을 생각했으며, 사람은 왜 이렇게 외롭게 살아야하는가를 생각했다. 김광석을 들으며 노래가 주는 쓸쓸함을 사랑하게 되었다. 김광석의 노래가 왜 쓸쓸하게 들리는지에 대해서는 서로의 의견들이 달랐다. 그의 목소리 때문이라는 친구도 있었고 그의 노랫말 때문이라는 친구도 있었다. 어떤 친구는 그의 포크적인 음악성향 때문이라고도 했다. 어느 이유에서건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술을 찾게 되고 쓸쓸해지게 된다는 사실에서는 모두 수긍했다.

나는 김광석의 노래 중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특히 좋아했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는 그 노랫말이 꼭 내 얘기 같았다. 실제로 유리창에 이별한 애인의 이름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술을 마시면 꼭 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진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울고 싶을 때 듣는 노래이다. 살다 보면 이유 없이 울고 싶을 때가 많다. 남자라는 무의식적 관행 때문에 울음을 많이 참는다. 혼자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세상 모든 일들을 다 이해할 것만 같다. 또한 세상 모든 일들이 애처롭고 고맙고 미안해지게 되는 노래이다. 김광석은 김목경의 이 노래를 버스에서 듣다가 그 자리에서 울고 말았다고 한다. 내가 60대가 되더라도 아직 철이 들지 못한 늙은 어린애일 테지만 이 노래만큼은 아는 척하며 꼰대짓을 하고 싶어진다.

<마루>는 어머니와 슬픔에 관한 시이다. 이 시는 그 시절을 통과해 쓴 시이다. 어쩌면 김광석과 함께한 깊은 밤의 수많은 술추렴이 이 시를 도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루


이재훈


이별은 순간이다
그 순간을 이겨낸 자만이
슬픔을 바닥에 깔고 앉을 수 있다
나는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생을 버텨왔다 그러나
멀리서 새벽 종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어머니가 마루에 앉아 뜨개질을 하신다
엉덩이 밑에서 건져 올린 슬픔을
한 올 한 올 뜨고 계신다

 

_ 출처 : <이럴 땐 쓸쓸해도 돼>(천년의 상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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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사랑

산문 2017. 7. 18. 17:38

서툰 사랑

 

이재훈

 

 

나는 사랑에 대해 서툴다. 사랑하는 데에는 자격이 없다. 누구든지 사랑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사랑에 서툴고, 힘들다. 매번 도망다니다가 끝나버린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에게 사랑은 형벌에 가깝다. 그들에게 사랑은 감정적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 전해주는 감정적 격동을 이겨내지 못한다. 쉽게 아파하고 쉽게 의심하며 쉽게 좌절하고 쉽게 파탄난다. 사랑이 주는 기쁨과 행복은 짧지만 사랑이 주는 고통은 길다. 긴 고통과 짧은 행복을 맞바꾸어야 하는 사랑의 운명 앞에서 늘 울부짖는 일. 사랑은 그런 일이다. 사랑하는 자는 늘 울부짖는다. 저녁의 쓸쓸함을 아침의 허망함을 오후의 무력함을 모두 사랑의 일로 여긴다. 그런 사랑에 대해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내게 있는가. 관념적인 사랑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한데 사랑의 실상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여전히 나는 사랑에 대해서 서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사랑에 서툴지 않는 사람이 있기라도 한 걸까.

소년의 사랑이라고 말할까. 그녀는 동갑내기 친구였다. 옆집에 살았다. 게다가 같은 교회에 다녔다. 그녀가 아침에 밥 먹는 소리까지 들렸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인사도 들을 수 있었다. 저녁이 되면 자연스레 우리는 교회에 모였다. 당시 교회는 공식적인 남녀 모임의 장소였다. 그곳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곳이었다. 교회가 아니라면 어디서 여학생들을 볼 수 있었을까. 빵집은 너무 닭살 돋았고, 롤라장은 너무 번잡했으며, 뒷동산은 너무 위태로웠다. 예배당 옆에 지어진 작은 집이 있었다. 누구나 그 집을 교육실이라 불렀다. 실제 많은 교육이 이루어졌다. 교육실에서 돌려가며 기타를 치고, 이문세나 김현식을 들었다. 때론 015B나 푸른하늘, 봄여름가을겨울을 듣기도 했다. 물론 <실로암>과 같은 복음성가도 불렀다. 교회는 인기가 많았다. 절에 다니는 애들도 교회에 왔다. 싸움하는 애들도 교회에 왔다. 노는 여자애들도 노는 남자애들도 왔고, 공부만하는 애들도 왔으며, 대체로 놀다가 간혹 공부도 하는 숨은 날라리들도 왔다.

그곳에서 그녀는 어린 주모의 역할을 했다. 우는 애들을 달랬고, 보채는 애들을 혼냈으며 까부는 애들을 조용히 시켰다. 우리는 늘 진지했다. 세상에 버려진 십대들의 청춘을 낭만적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매년 교회에서 열리는 문학의 밤은 낭만의 하이라이트였다. 교복에 넥타이를 매고 주찬양과 홍삼트리오를 부를 때면 모든 여학생들이 우리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 즈음부터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옆집 친구인 그녀가 옆집 여인으로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라고 해야겠다. 한밤중이 되면 김희애의 인기가요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 놓고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때론 그녀와 손을 잡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내 키가 십 센치만 더 컸더라면 하는 생각도 했다. 그녀는 나보다 키가 컸다. 그녀 옆에 서면 늘 까치발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편지를 쓴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들은 모두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우리들 중 거의 대부분이 그녀에게 답장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어느 누구도 그녀의 손을 잡아본 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털어놓는 게 우정의 일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편지는 늘 편안했다. 나는 늘 편지에 대고 하소연했다. 십대의 불안함과 고독함과 원인을 알 수 없는 무기력함에 대해. 그리고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그녀의 고마움에 대해.

그녀와의 편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계속 이어졌다. 물론 나만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은 게 아니었다. 내 옆의 친구도 또다른 친구도 그녀와 가끔씩 편지를 주고받았다. 때론 서로 편지의 내용에 대해 캐묻기도 했다.

어느 날. 그녀가 대학에 들어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 중 누구도 그녀의 애인은 아니었으니까. 우리들 중 누구도 그녀에게 고백한 적은 없었으니까. 고백으로 인해 점점 복잡해지는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해 우리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어쩌면 아무도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애인을 만든 것일 지도 모른다. 그녀는 우리들 중 어느 한 사람의 고백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마음에 품고 있었던 그 한 사람이 바로 나라고 모두 같은 생각을 했던 시간들.

그녀는 스무 살이 넘고 스물한 살이 되는 1월의 추운 겨울날, 이 세상을 떠났다. 교통사고였다. 마치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일처럼. 애인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 변사를 당했다고 한다. 우리는 태어나 처음으로 맞이하는 죽음의 일 앞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허둥지둥 그녀와 제대로 작별하지 못한 채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다. 아무도 마음속에서 그녀를 보내주지 않았다. 한동안 서로 연락을 안했으며 그렇게 또 시간은 흘러갔다.

그때 무언가 선뜻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사랑할 자격이 없는 거라고. 어쩌면 그게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에 대해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막연하지만 무언가 알 것도 같은 그런 어렴풋한 사랑이 잠시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_ <시와 표현>, 201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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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송종원

 

 

 

 

 

낮은 목소리로

 

강물엔 사람들이 허우적대고 있다

스스로 얼음을 깨고 몸을 넣는다

숨이 끊어진 사람들이 둥둥 떠다닌다

노래도 없는 시간들이 사는 강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강물에 뛰어들어 허우적대는 사람들

― 「스틱스, 서울」 부분

 

이재훈의 시에는 잊지 못하는 자의 비극적 투쟁이 기록되어 있다. 시의 목소리는 느리고 또 느리게 허공에 울려 퍼지는데, 이는 마치 시간의 흐름과 동시에 형성되는 망각의 강의 유속에 저항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투쟁하는 자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보통 재빠르고 활기찬 상태를 기대하지만 이재훈의 시는 그 기대를 뭉갠다. 그는 되도록 느리고 처연하게 노래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상대하는 대상은 안달난 시간 속에 마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싸우는 대상은 ‘삶’이며, 그가 잊지 못하는 것은 ‘삶이 빚어내는 치욕’이다. 당연히 이 싸움은 단번에 승부가 결정되는 형태가 아니라 오래오래 지속되는 형국일 수밖에 없다. 이 지난한 싸움을 대하는 시인의 전략은 싸움의 구도 자체를 해체하는 듯한 느린 속도로 전투력을 상실한 자의 목소리를 전면화하는 방식이다. 시인은 처음부터 우리가 기대하는 싸움이 아니라 우리가 기대할 수 없는 싸움을 벌이려 했던 것일까.

느리고 나지막한 시의 목소리에는 사실 어딘가 체념과 후회의 분위기가 묻어 있기도 하다. 이재훈이 시에서 자주 활용하는 ‘~지’, ‘~네’라는 어미가 특히 그런 효과를 만든다. 이와 같은 어미의 조형에는 시인의 특별한 전략과 기호가 작용했을 테지만, 동시에 시인 자신 또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개입했을 것이다. 시의 언어는 시인이 쓰지만 시인을 넘어선 힘의 작용이 시어를 형성하기도 한다. 즉, 시인은 시의 전부를 결정하지 못한다. 시를 쓰는 순간 시인은 결정할 수 없는 일을 결정해야 할 때와 마주하게 된다. 이를 테면 시의 언어에 작용하는 시대적 정황의 압력이 그러하리라. 이 압력과 관련해서 특히나 주목해야 지켜보아야 할 지점은 이재훈의 시가 이전에 비해 현실에 대한 발언의 선명도가 높아진 것은 물론이고, 분열된 자아의 내적 혼돈의 목소리보다 외적 세계와의 교통이 원활해진 자아의 형상을 그려내는 시점에서 저 어조들의 조형이 활기를 더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의 끝에 이른 거와 같은 묵시록적 상황을 유모와 격앙된 어조를 섞어 희극적으로 상대하는 시적 전략이 익숙한 요즘에 이재훈 시의 어조는 확실히 특이한 데가 있다. 시인은 그 어조를 빌어 자신의 발언을 확보한 비극성을 더 진지한 것으로 만드는 중이다. 투박하게나마 저 목소리가 발언하는 내용과 관련한 시대적 분위기를 이름 붙여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확언 불가능한 시대 또는 희망 불가능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한 시에서 작금의 시적 현실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예언도 사라지고

초월도 사라지고

왜소한 지식을 입에 문 기사騎士들만 즐비한 곳

― 「녹색기사」 부분

 

[言]을 적절히 운용하는 기사(아마도 시인일 것이다) 대신에 마치 말[馬]처럼 재갈이 물린 기사만 있다. 게다가 이 기사가 물고 있는 재갈은 왜소한 지식이다. 그러니까 이 시의 언어는 지금, 시인이 시인을 부끄러워하는 중임을 증언한다. 확언이 불가능한 시대에 또는 희망이 불가능한 시대에 시인은 할 소임은 왜소한 지식의 대변이 아니라 불명료한 언어들 속에서 빛과 같은 명료한 초월성을 발견하는 일이고, 희망 불가능을 선포하는 말들 속에서 불가능을 능가하는 가능성을 예언하는 내기를 실험하는 일일 테니 말이다. 지식을 넘어서려는 내기와 그에 따른 발견이 전무한 시의 현실을 목격하며 시인은 시의 위상과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 번 되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이재훈은 특정 감정의 선언을 자신의 시의 자리로 몰아갔다.

 

부끄러움의 왕

 

바람이 불면 이별하겠다

바람이 온 몸을 휘젓고 나가야

간신히 나지막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황금의 입」 부분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 적은 윤동주의 시는 역사적 정황 안에서 파악할 맥락을 지니지만 그것은 또한 예술 일반이 특정한 시대를 넘어 보편적 가치로 상정할만한 정서적 내용을 포함한다(참고로 종교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시를 구원의 매개로 여겼던 윤동주의 시적 태도는 이재훈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다. 이재훈의 시를 근현대 한국문학사의 흐름에 위치시킬 경우 아마도 그것은 윤동주를 시작으로 한 시적 계열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부끄러운 자가 시를 쓴다. 달리 말해 시는 성찰한 사람의 목소리를 요구한다. 시와 성찰이라니, 웬 고리타분한 이야기인가라는 반응이 따를 만하다. 시라는 장르의 언어는 성찰의 여유를 통과하기 이전에 단말마와 같은 비명이며, 성찰이 불가능한 고통의 현시라는 이야기가 종종 전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생각은 시가 언어의 작용의 일종이라는 점을 철저히 무시한 태도에 불과하다. 시는 투명한 신의 얼굴처럼 우리의 얼굴을 다시 매만지게 한다. 시의 언어가 아무리 남다른 속도감을 지닌다하더라도 그것이 언어의 일종인 이상 시는 쓰는 자로 하여금 자신의 뜻과 감정을 되비쳐보게 만든다. 물론 이 언어라는 거울은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쓰는 자의 얼굴을 되비추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하지만 오히려 그와 같은 상태가 쓰는 자를 더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이 예민한 집중은 정신의 힘을 더 높이는 데 기여한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자각이 불투명한 언어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수치심이란 도덕적 과오가 야기하는 감정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감추고 싶어 하지만 은폐할 수 없는 모든 것’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다. 왜 특별히 나체에 구토 혹은 뱃속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꼬르륵 소리 등이 부끄러운가? 그것은 수치가, 우리 자신이 오직 우리 자신으로서 혹은 우리의 몸으로서 환하게 비춰지는 그 생리적 현현의 순간에 발생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수치 속에서 나는 그저 나의 몸일 뿐이다. 나는 나의 정신이 아니며, 나의 염원이나 이상도 아니며 단지 위장과 성기와 머리칼을 갖고 있는 생리에 불과하다. 이 분석을 뒤집으면, 수치심은 오직 자신의 동물성을 자각하는 인간, 스스로의 동물적 한계와 대면하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사실이 도출된다. 부끄러움을 통하여 인간은 스스로이 비인간성과 대면하고 이 관계를 인간적으로 성찰하는 주체 즉 개인으로 성립하는 것이다.”(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66~67쪽)

 

 

 

인용에서 말하는 ‘수치심’의 상태는 이재훈의 시가 표현하는 ‘부끄러움’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재훈은 「거리의 왕 노릇」이라는 시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꾼다고 적은 바 있지만 그의 시가 실제로 내는 목소리는 저 꿈과는 조금 다르다. 독자들이 그의 시를 통해 전해 받는 것은 부끄러움이 없는 세계의 모습이 아니라 부끄러움이 가득한 음색이다. 이재훈 시의 화자는 “언제부터인가 그리워하는 시간이 내게 없”다고 고백을 하고, 사람들이 군집한 광장에서 “죄와 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머리들”을 바라본다. 시선에도 음성에도 가득한 건 부끄러움이다. 도대체 이 많은 부끄러움은 어디로부터 왔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그것은 숨길 수 없는 몸으로부터 왔다. 아니 그 몸을 드러내는 정직한 시선에서 왔다.

 

졸고 있는 오후. 몸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이리저리 펄럭이네. 나를 부르는 소리, 내게 명령하는 소리, 멀리서 풍겨오는 몸 썩는 소리. 푹 썩어 물컹한 몸으로 의자에 파묻히네. 저녁이 되면 식탁에 앉아 뱃속에 고기를 우겨넣지. 육즙을 맛본 혀가, 살 씹는 맛을 아는 혀가 쉬지 않고 날름거리네.

― 「치미는 몸」 부분

 

의미의 끈으로 잇거나 봉합하지 않을 경우 몸은 조각이 난 상태로 펄럭인다. 멀쩡한 한 덩어리의 몸이 조각나 있다니 무슨 말인가 되물을 수도 있지만, 몸이 일정하게 통일적 형태로 기능한다는 생각만큼 관념적인 것이 또 없다. 조각난 몸의 통합 내지 몸에 통일성을 부여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적 담론에 조금 기대어 이야기하자면 우리의 몸은 다양한 부분충동들이 어지럽게 난립하는 지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저 충동들의 방향은 제각각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일정한 도덕적 틀을 적용하여 인간의 행위를 정향시키는 일은 애초부터 일정한 폭력성을 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폭력적이다 하여 거부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인간의 충동에 내재한 공격성이 스스로를 혹은 타인을 파괴할 가능성이 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천편일률적인 도덕적 틀은 문제적이지만 스스로가 자신의 욕망과 관련한 윤리를 정립하는 일은 자신을 위해서나 공동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어쩌면 욕망의 허기란 무언가를 취하기를 바라는 허기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무언가를 취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일러주는 법에 대한 허기일 수도 있다. 그것을 부끄러움을 거부하는 몸의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와 같은 몸의 이중성은 이재훈 시의 아포리아이자 시적 기미의 발생지이다.

 

피부가 구멍을 닫으면 우리는 작은 관에 갇히지. 몸을 붙잡고 통곡하는 소리. 통곡하다 울다 지쳐가는 한숨 소리. 뜨거운 몸뚱이는 차가운 쇳덩이에 들어가지. 화염으로 가루가 되지. 가루가 되어 땅속에 파묻히거나 서랍에 들어가지. 가루가 될 몸들끼리, 서로 숭배하고, 경멸하고, 질투하는 가녀린 몸. 몸 때문에 죄를 짓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어리석은 몸.

― 「디스diss」 부분

 

죽음에 이른 몸을 화장火葬하는 과정으로 읽을 수 있는 구절이다. 흥미롭게도 시인이 인간의 몸을 관으로도 파악하고 또 관으로도 인식한다. 인간의 몸은 스스로를 가둘 수 있는 족쇄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자신의 외부와 공명을 일으킬 수도 있는 물질인 셈이다. 이와 같은 몸에 대한 이중적 인식이 시인에게 몸을 거듭해서 사유할 대상으로 만든다. 부끄러움의 잠재적 거처로서의 몸을 절단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있는 대로의 모습에 대한 순수한 인정 속에 시적인 비약을 거쳐 몸이 새로운 가능성의 지대로 거듭나게 하려는 시인은 고민하고 관찰하고 기록한다. 몸은 형성이 완료된 물질이 아니라 늘 구성중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의 관찰하고 기록하고 생각하는 사이 몸에 잠재한 수많은 역사들이 자연스럽게 시 속에 스민다.

 

나는 거친 아버지의 세계만 알았지 어머니의 세계는 몰랐다네.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과 도덕에만 관심있었지.

하지만 날 구원해주는 것은 언어가 없는 원시의 감각이었네.

그럴 때쯤 마치 마술처럼, 성애의 욕망과

죽음과 예술의 열정이 한꺼번에 찾아왔네.

― 「나르치스」 부분

 

아버지의 세계와 어머니의 세계를 이분하는 방식과 원시의 감각이라는 관념 또한 상투적인 데가 없지 않지만, 시의 목소리가 우리의 몸과 언어 속에 뒤엉켜 있는, 성애의 욕망과 죽음 그리고 예술의 열정을 동시다발로 맞닥뜨리는 상황은 진실하다. 이 다양한 실재의 어떤 것에도 주도권을 내주지 않고 그것들의 난립과 갈등을 균형감 있게 제시하려는 이재훈의 노력에는 시를 향한 순례자를 순결함이 깃들어 있다. 시인은 몸의 혼란조차도 ‘몸의 무늬’로 만들 수 있다고 하였던가. 이재훈의 시는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신들이 사는 세계

 

고난을 마주하는 사람이 없어

신에 대해 물을 데가 없어

저 허공에 통곡을 합니다.

이유도 모르고 운명도 모른 채

웃고 노래를 부릅니다.

선한 사람이 없어 울어 봅니다.

눈에 보이는 당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신을 사랑한다 말했습니다.

― 「기복祈福」 부분

 

시가 신을 모신다는 말은 일견 시의 자리를 위축시키는 의미로 들린다. 시가 쓰이는 곳은 모든 신을 거부해야 하는 자리라고 여기는 태도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한 시인의 시구처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는 것이,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는 일이 시의 지향이라고 우리는 믿어왔다. 하지만 믿음과 진실은 늘 일치하지 않는다. 신을 모시지 않는 시가 과연 존재할까.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 자주 무감하며 때때로 의식하지 못한 채 신적인 것에 기대어 시의 깊이와 활기를 더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정작 중요한 문제는 신에 대한 시의 거부가 아니라 어떤 신을 시가 믿는지에 대한 명증한 확인일지도 모른다.

 

선량한 바람을 맞는다. 해가 지기 전의 결기처럼 무엇을 사로잡혔을까. 무엇에 놀랐을까. 산속에서 만난 한 사람. 흰 옷을 입고, 울고 있는 한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났을까. 머리를 숙이니 나를 빤히 보고 있는 풀 한 포기. 하늘거리며 바람 속으로 제 피를 흘리고 있다.

― 「풀이 던진 질문」 부분

 

“산속에서 만난 한 사람. 흰 옷을 입고, 울고 있는 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도 그러하고, “머리를 숙이니 나를 빤히 보고 있는 풀 한 포기. 하늘거리며 바람 속으로 제 피를 흘리고 있”는 이미지 또한 우리를 붙들어 세운다. 저 이미지는 연약함과 처연함이 어떤 강인함 못지않게 읽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는 신비로운 사실을 우리에게 경험하도록 한다. 해서 자기 방어적인 무장이 해제된 마음이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저 영롱한 유약함을 들여다본다. 이 이미지를 보며 나는 장-뤽 낭시가 한 그림을 가지고 보편적 아름다움과 관련한 이미지에 대해 설명한 언급을 떠올릴 수 있었다.

 

“보여지는 형태를 통해서 우리를 초월하는 그 이상으로 향하는 무언가에 사로잡히는 것 때문에 우리는 그 이미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게 됩니다. 잡지 속의 이미지와는 다른 것입니다. 잡지의 이미지들은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서 제작되었죠. 카를라 부르니를 보고, 다음 페이지에서는 나오미 캠벨을 보고, 페이지를 넘기고, 계속 반복하죠. 또한 아름다운 풍경사진들이나 헬리콥터로 내려다보이는 대지를 봅니다. 이 사진들도 매혹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여러분은 다시 페이지를 넘기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회화작품들이나, 예술작품을 목적으로 한 사린들을 보면서 페이지를 넘길 수는 없습니다. 반복해서 그 화폭에 집중해야 합니다.” (장-뤽 낭시, 이영선 역,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갈무리, 2012, 192쪽)

 

우리를 사로잡는 이미지를 반복해서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쾌감을 넘어서는 불편함을 감수하게 된다. 저 이미지는 취향이나 기호로서 좋음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우리의 불안과 불완전함을 자극하며 어떤 너머로 우리의 몸을 정향시키도록 추동한다. 왜냐하면 ‘선’적인 무엇인가가 그리고 ‘진(眞)’에 가까운 어떤 것이 저 선혈이 선명한 이미지 너머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탁월한 빛”이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 우리에게 흘러들어 “선량한 바람”처럼 부드럽게 접촉하는 체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탁월한 빛과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이재훈의 시가 모시는 신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그 신은 우리를 그렇게 빤히 바라보고 있지만, 또한 탁월하다와 가장 아름답다와 같은 인간의 말이 특별한 수사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전하지 않으며 스스로 흔들림 없이 유약함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우리를 동요하도록 이끈다. 그러므로 이 신은 전지전능한 종류의 신이라기보다 순연한 모습으로 순정의 빛을 발산하는 사소한 존재에 가깝다. 이재훈에게 신은 저 푸르고 연약한 풀과 같은 존재이다. 이와 같은 발견은 그의 시에 새로운 활기를 더한다. 우선 그의 시는 신의 거처를 지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의 자리에 위치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돌보게 하도록 유도한다. 신이 인간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보호하는 상황의 아이러니함. 이 역설로 인해 지상은 신들의 사는 세계가 되고 또한 이 역설을 통해 신은 인간과 같은 혼돈의 몸을 얻는다. 결국 시가 신을 모실 뿐 아니라 신이 모시는 것 또한 시가 되는 역설까지 나아가는 일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이재훈은 「저자의 말」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

 

“사제의 방엔 말이 죽는다. 말이 죽는 법을 연습한다. 침묵이란 말도 필요없이 생각이 달린다.”

 

시의 사제인 시인은 말[言]을 죽인다. 이는 말이 말을 타고 넘어가는 기예를 차단하기 훈련으로 보인다. 시인은 말이 말의 부름을 받을 뿐 아니라 말을 넘어서는 무언가의 부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무언가의 자리에 ‘시’를 놓아도 어색하지 않다. 아니 이재훈은 그곳에 오직 시가 놓여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시가 저만치 앞서 달려가 시를 기다리고 있다. 오직 시만이 시를 부를 수 있다. 시 아닌 것이 시를 부를 때 그것은 시가 아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망각하는 것일까. 이재훈의 시가 이 기다림의 훈련으로부터 더 많은 시와 기다림을 구원하기를 기원한다.

Posted by 이재훈이
,

제15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 평론

 

 

 

돌의 시로, 물의 시로

― 시여, 새로운 무기가 되어라

 

 

장석원

 

 

 

 

 

 

세계를 향한 시인의 뜨거운 발화가, 힘찬 육성이 여기에 있다. 그는 불이 되려 한다. 그는 불 이후의 재에 대해 묵상한다. 그는 자신을 처형한다.

나는 시가 우리의 이 땅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시가 역사의 변혁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미망을 증오한다. 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시인은 무력한 시민에 불과하다. 시는 언어의 혁명이라는, 시는 영혼의 등불이라는, 시는 모국어의 수호자라는, 시는 인간 정신의 극점에서 터져 나오는 고결한 것이라는 말을 부정한다. 시는 더 이상 순수 예술도 아니고, 혁명의 무기도 아니다. 시는 이 세계에 상품이 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기적 같은 신기루의―그래서 소중하고 아름답고 유일한―상징에 불과하다. 시여, 그대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시여, 그대의 종말을 만인에게 알려라.

이재훈은 나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한다. 그의 수상 작품을 읽어보자. “막막해졌네. 타인에게 무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무심해졌네. 모든 감정에 무심해졌네. 가르치는 자들이 내놓는 규율에 무심해졌네.”(「평원의 밤」) 이 구절은 정확하다. 내가 이렇다. 그가 살고 있는 ‘「스틱스, 서울」’의 풍경. “시청에서 개선가가 울리고/ 교회에서는 장송곡이 울린다/ 강으로부터 날아온 비명이 가득하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 이승과 저승을 가로지르는 ‘한강’의 시체들, 우리들. 학생들의 학교 폭력을 응시하면서 언어폭력이라는 살인무기에 대해 고발하는 「디스Diss」에서 이재훈은 우리의 외면 뒤에 묻힌 죽음을 까발린다. “결국 가루가 될 아이들. 울음이 될 아이들. 빌딩에서 썩어가는 아이들”의 “뜨거운 몸뚱이는 차가운 쇳덩이에 들어가”고 “화염으로 가루고 되”고 “가루가 되어 땅속에 묻히거나 서랍에 들어가”고 있다. 나도 알고 있다. 나는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직시하려고 하지 않았다. 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재훈이 울면서 말한다. “나르치스. 사십은 늙은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네./ 사랑도 예술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라고 고백한다.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나무의 짐을 나눠지고 새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삶의 거룩함 따위는 없다고, 오늘의 세상과 살았던 자신의 과거가 전부 거짓이라고, 깨달으며, 이재훈은 “침묵하며 자꾸 울고만 싶”다고 고해한다. 그가 “이제 순례를 떠날 때가 되었”(「나르치스」)다고, 다시 시를 써야 한다고 독백한다. 그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 결단하는 ‘나’의 눈물이 죽음의 전후를 매개한다. 이재훈은 새로 태어난다.

 

내 몸이 썩고 썩어 문드러지면 폴폴 날리는 꽃잎으로 남을까. 신비한 탄생의 시간을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리네. 꽃잎은 늘 가벼운 죽음이지만 난 그런 죽음이 좋네. 꽃잎은 가장 장중하게 땅에 안착하겠지. 그리곤 온 대지가 울리고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는 첫 경험을 주겠지.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땅과 함께 밤새 울 것이네.

― 「치미는 몸」 부분

 

다시 태어난 시인이 몸이 있다. “썩고 썩어 문드러지면” ‘나’에게 자유가 찾아오겠지, “폴폴 날리는 꽃잎”이 ‘나’의 죽음의 유일한 흔적이겠지, “온 대지가 울리고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는 첫 경험”의 황홀이 ‘나’를 맞이하겠지. 이재훈이 읊조린다.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증오와 자신을 처단하고 싶은 욕망의 강도는 비례한다. 「풀이 던진 질문」에서 이재훈이 찾아낸 것. “노을은 경계도 없이 제 몸을 허”물고, “그 몸 아래 조그맣게 엎드려 졸고 있는 풀 한 포기” 앞에서 그는 “선량한 바람을 맞는다.” “머리를 숙이”자 “나를 빤히 보고 있는 풀 한 포기”를 발견한다. 풀처럼 순교하는 시인. “하늘거리며 바람 속으로 제 피를 흘리고 있”는 풀 한 포기, 이재훈. 직정直情의 언어가 일어선다. 세상의 어둠 속에서 시인이 우리에게 건네는 노래가 들려온다.

 

어둠 속에서 오직 나무만이 황금빛으로 발하고 있었지

모든 사람들은 희미한 실루엣으로만 존재할 뿐

나 또한 한낱 이 세계의 배경일 텐데

배경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란

매일 동화 쓰는 시간을 맞이하지

희미한 달이 낡은 뱃전을 어루만지며 다가오는데

 

밤이 환상의 세계라면

저녁은 동화의 세계

 

저녁이 되면 광장에 사람들이 모이지

광장의 사람들은 어떤 저녁을 매일 그리고 있을까

하얀 치자꽃을 꺾어 어두워가는 책상 위에 두고

달금하고 앳된 향기와 함께 조금씩 늙어가는 시간

풀어진 눈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는 시간

늘어진 삶에 끼어든 늙은 햇살이 온몸을 휘감지

나무에 몸을 기댄 자는 고독해지지

― 「동화의 세계」 부분

 

어둠 속에서 “황금빛으로 발하고 있”는 나무가 다가온다. “모든 사람들은 희미한 실루엣으로만 존재”하는 저녁이 찾아온다. 이재훈은 “나 또한 한낱 이 세계의 배경”임에 불과하다고 자인한다. 그가 타인을 응시한다. ‘나’와 ‘너’를, ‘우리’를, “배경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을 주목한다. 저녁이다. 세상이 밤길 밝힐 등을 켜는 시간, 하루의 광휘가 사그라든다. 피로와 우울의 왼손과 안도와 평화의 오른손을 합장한다. “희미한 달이 낡은 뱃전을 어루만지며 다가오는” 광경이 ‘동화처럼’ 펼쳐지는 시간. “저녁이 되면 광장에 사람들이 모”인다. 그곳의 사람들은 “어떤 저녁을 매일” 그려낸다. 우리가 살아나는 시간, 우리의 삶에 안식이 찾아오는 시간. “하얀 치자꽃을 꺾어 어두워가는 책상 위”의 어둠을 살며시 밀어내는 시간이다. “달금하고 앳된 향기와 함께 조금씩” 하루의 삶이 소멸하는, “늙어가는”, 사라지는 것들이 잠깐 숨을 뿜어 올리지만 포르르 다시 삼키고 마는, 여린 등불의 시간이다. “풀어진 눈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는” 사람들의 “늘어진 삶에 끼어든 늙은 햇살이” ‘나’의 “온몸을 휘감”는다. “나무에 몸을 기댄 자”가 “고독해지”는 시간이다. 저녁이 찾아왔다. 이재훈은 애련에 물들어버린다. 떠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시인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무서운 사랑 때문에 그는 조금 ‘울면서’ 광장을, 그곳의 사람을, 오늘을 살아낸 우리들을 껴안는다. 생기生氣의 감정이 직핍直逼한다. 시인의 살을, 살의 온기를, 온기 속의 방향芳香을 느낄 수 있다. 이재훈의 사랑을 체험한다.

 

바람이 불면 이별하겠다

바람이 온몸을 휘젓고 나가야

간신히 나지막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꽃이 피는 것엔 이유가 없고

너의 욕망도 이유가 없다

배려는 늘 사람을 고뇌하게 만든다

그대와 나 사이

팽팽한 거리만 있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했을 텐데

언제부턴가 몸속에 나비를 키우며 산다

싱그럽고 건강한 몸 내음에 취한 나비떼가

몸속에서 팔랑거린다

제 몸속 나비 한 마리가 다른 몸을 찾아 가는 일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 몸에 한 마리의 나비만 남을 무렵

그 퀭한 광야를 품고 다니는 저녁

 

움직임 없는 구름의 속도를

무슨 까닭으로 이리저리 책망할까

숲의 교훈도 무력하고 늦은 햇살의 위로도

눈이 따갑기만 하다

겨울이 넘어가고 있었고

신비한 그림자만 남았다

침묵하는 입술만 씰룩대었다

― 「황금의 입」 전문

 

제목 ‘황금의 입’은 마지막 행 “침묵하는 입술”로 귀결된다. ‘황금의 입’에서 ‘침묵의 입’으로 여행이 시작된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온몸을 휘젓고 나”갔다. “간신히 나지막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것이 이재훈의 노래이다. 우리는 ‘작은’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의 노랫말이다. “꽃이 피는 것엔 이유가 없”고, 우리의 “욕망도 이유가 없”다. ‘나’와 ‘그대’ 사이에 “팽팽한 거리만 있었다면” ‘나’는 사랑에 빠졌을 텐데, ‘나’와 ‘당신’은 ‘배려’로 엮인, 공동의 타자였으므로, ‘우리’ 사이에 사랑이 기거할 공간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배려가 뿌리 내릴 자리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배려를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배려’하지 않고, ‘사랑’에 자신의 존재를 함몰시킨다. 사랑은 배려를 뽑아내고, 희생을 싹틔운다. 이재훈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이다. 인식이 실재로 전환된다. 앎이 세계를 움직인다. 그렇다, 사랑과 희생이다. 이것을 알게 되었던 “언제부턴가 몸속에 나비”가 들어왔다. ‘나’의 몸은 ‘나비’의 집이다. 사랑의 빛이 가득 찬 “싱그럽고 건강한 몸 내음에 취한 나비떼”가 이재훈의 “몸속에서 팔랑거”린다. 이재훈이 말한다. “제 몸속 나비 한 마리가 다른 몸을 찾아가는 일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할까. 아름다움이라고 말할까. 이재훈이 우리의 질문에 답을 내놓는다. “내 몸에 한 마리의 나비만 남을 무렵/ 그 퀭한 광야를 품고 다니는 저녁”의 먹먹함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동화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넘실거리던 이재훈의 사랑이, 사랑의 나비가 우리들 어깨와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시인에게 남겨진 것은 “한 마리”뿐. 자신의 사랑을 전부 나눠준, 전부 희생한 시인의 빈 육신에 저녁의 어둠이 차오른다. 그는 “움직임 없는 구름”이 되었다. “늦은 햇살의 위로”에도 그의 눈은 “따갑기만 하다”. 그는 지쳤다. 자신의 사랑을 다 내어주었을 때, 그의 육신은 “겨울”이 되었고, 마침내 단 한 마리의 나비마저 얼어붙어 눈발로 흩어졌을 때, 이재훈의 빈 몸이 부서져 내렸을 때, “신비한 그림자만 남”겨졌다. 이재훈의 “침묵하는 입술만 씰룩대”고 있다. 그 입이 ‘황금의 입’이다. 이재훈의 입술 사이에서 나비가 날아오른다. 우리에게 사랑이 도달했다. 이재훈의 시가 반짝이는 순간이다. 저녁에 도달하여 사랑을 발견하기까지 이재훈이 지나온 한낮의 거리와 광장으로 돌아가보자.

 

플래카드엔 권유와 명령만 있을 뿐

전투력 가진 말들이 길거리 여기저기서 뽐을 내지

문명의 한 구석에 제 이름을 새기려는 영혼들

왕 노릇하려고, 서로 왕 노릇하려고

생명을 능가하고, 죽음을 능가하는 이웃들

나는 왕의 언어가 없고

법의 언어가 없고

왕을 심판하는 언어가 없지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꿀 뿐이지

이 세계에 없던 언어를 찾아 나설 뿐이지

아름다운 운율은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지지

― 「거리의 왕 노릇」 부분

 

한낮의 거리에 내걸린 “플래카드엔 권유와 명령만 있을 뿐”이다. “전투력 가진 말들이 길거리 여기저기서 뽐을 내”고 있다. “서로 왕 노릇하려고/ 생명을 능가하고, 죽음을 능가하는 이웃들”이 “문명의 한 구석에 제 이름을 새기려” 한다. 시인의 언어는 무력하다. 그에게는 “왕의 언어가 없고/ 법의 언어가 없고/ 왕을 심판하는 언어가 없”다. 시인의 언어는 왕의 언어가 아니고, 법의 언어가 아니고, 왕을 심판하는 언어가 될 수 없다. 시인의 언어는 왕과 법과 심판의 언어가 결단코 아니라고 이재훈이 말한다. 권력에 복종하는 언어들의 질서를 부정한다. 시인의 언어는 권력을 거부한다. 시인의 언어는 권력을 파괴한다.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꾸기에 시인의 언어는 무기가 된다. 정해진 것, 기존의 모든 것, 이념과 권력의 시녀를 증오하는 시인의 언어는 “이 세계에 없던 언어”가 된다. 아름다운 시의 노래는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진다. 시인의 언어가 ‘나비’가 되어 입술 사이에서 날아오른다. 이재훈은 “중얼거리는 입술로 거리의 왕”이 된다.

시인이 거리의 왕이 되었다. 거리의 왕, 이재훈이 지닌 무기가 그의 시이다. 이재훈이 뿔을 세우고 달려온다. 대안對岸의 사랑에 당도하기까지 이재훈이 지나온 거리를 다시 돌아본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변하지 않았”다. “구름도 흔들리고 새들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한낮의 풍경”(「악령」)은 달라지지 않았다. “타인의 영혼을 훔치면 왜 안 되”(「기이한 탄생들」)냐는 말이 횡행한다. “예언도 사라지고/ 초월도 사라지고/ 왜소한 지식을 입에 문 기사騎士들만 즐비한” 거리에 “자기 경험을 강요하는 꼰대들/ 침을 질질 흘리며 풋풋한 냄새를 킁킁거리는 꼰대들”(「녹색기사」)이 행진한다. 그들은 “트럭 짐칸에 가득 실인 돼지의 말을 뱉어내며 생을 즐긴다”. 이재훈은 “시가 삶의 전부라고 과장되게 눙쳤”던 자들을 떠올린다. 자신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저자를 돌아다니며 뜨거운 밥의 말을 말아 먹고” 이재훈은 “책상에 앉아” ‘꼰대들’의 언어를 살해하고, “고통의 소리 가득한 늦가을. 비에 맞아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나뭇잎 하나. 핏물을 머금은 말 한 덩이”로 새로운 ‘저자의 말’을 쓰기 위해 진력한다. 그는 “말이 죽는 법을 연습한다.”(「저자의 말」) 타락한 언어, 더러운 질서, 악령의 시를 죽이고 “머리에서 흐르는 피로 글자를 쓰겠”(「벌레신화」)다고 다짐한다. 세계를 찌를 수 있는 “변하지 않는 뼈”의 언어를 곧추세운다. 창에 옆구리를 찔리고, “꼬리는 빠져 시큰하고/ 벌건 불속에서 갈비뼈를 드러낸 채/ 울고 있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재훈은 “너덜너덜해진 빈 육체가 되어 울고 있”다. “뱀이 몸을 휘감아 숨을 쉴 수가 없”다. “일상이 일상을 읽는 밤”에, “내 몸이 불어 터져 고통을 읽는 밤”에, “뿔을 잃고 읊조리는 밤”에, “오직 죽기 위해 춤추는 날”들의 밤에 이재훈은 결의한다. 고통은 두렵지 않다. 고통이 없다면, 고통을 응시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고통에 몸을 열지 않는다면 시와 시인은 죽을 수밖에 없다. “수난이 없는 몸은 역사가 없”(「뿔」)다. 이재훈은 자문한다. 자신을 의심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짐승처럼 왔을까” “그때 우리는 참담했을까”라는 물음 앞에서 그는 “무엇을 요구할 수 없는 사십대가 된 것 뿐이”라고, “텅 빈 마음이 들어온 거”(「짐승의 피」)라고 말한다. 그리고 “허공에 통곡”을 한다. 울음이 자신을 소진시킨 후에 얻은 결의. “세계와 불화하는 가장 극적인 방법은/ 사랑임을 알지 못했”다는 후회. 이재훈은 “부패한 말들이 냄새를 피우”(「기복祈福」)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재훈은 “채찍이 내 피부에 감기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가시가 박혀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갈라지고/ 뱃가죽이 찢어지고 창자가 흘러내려도/ 나는 기쁘겠”다고 자신을 저주한다. “내 몸이 곪아 칼로 피부를 도려내는 기쁨”에 젖어버리겠다고 다짐한다. “풍습을 거스르고 바람을 거스르고/ 스승을 거스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선언한다. 세계를 향해 웅변한다. “우리는 다시 이 땅으로 올 거예요/ 새로 태어난 우상들/ 땅을 호령하는 권력들에게 말하겠어요/ 대지의 증인은 우리들이며/ 흙의 몸은 바로 우리들이라고”(「벌레신화」) 외친다. 과거의 ‘나’를 처형한 후 이재훈은 눈을 뜬다. 「돌의 환」을 발견한다

 

부러진 돌부리에 채인다

굴러다니는 돌이 아니라

올곧게 서 있다가, 부러진 돌

창과 칼 혹은 바람이

돌의 몸을 반동강 냈을 것이다

사방이 어둠이었고

나를 길에 내던졌던 사람들의 눈빛만

어둠 속에서 반짝하던 밤들이었을 때

발바닥 돌덩이가 내 존재를 떠받칠 때가 있다

돌이 내 집을 떠받치고,

아버지의 약속을 떠받칠 때

돌 위에 피의 흔적이 있다

돌은 깨져도 죽지 않는다

돌은 썩어갈 육체를 갖고 있지 않아

언제나 채이고 밟히고 놀아난다

돌에 의해 소멸한 것과 태어난 자리가 한 몸이 되는

이 모든 찰나를 지켜본 돌

어둠 속에서 세상이 어지럽게 돌기 시작하면

나는 흔들거리는 운명을 본다

흔적 없이 왔다간

당신의 영혼에 몰래 깃들고 마는 돌

부처의 얼굴도 만들고, 예수의, 마리아의 몸도 만드는

성육신인 돌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

돌로 만들어진 뭇사람 하나

그 무성한 골짜기의 돌

― 「돌의 환」 전문

 

이재훈을 ‘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돌이 된 이재훈, 돌이 된 그의 시가 획득한 염결한 의지. “이 세계를 말하지 말고 써야 하네. 가르치는 언어가 아니라 감각을 일깨우는 글자들. 피부에 달라붙어 생채기를 내고 콧속으로 들어가 온몸을 서늘하게 만드는 단 한 줄의 시를 써야 하네.”(「대리자代理者」) 우리가 경험했던 이재훈의 사랑의 경로가 이러하다. 그의 시는 세상을 향해 던져진 돌이다. 그 돌이 세상에 균열을 낸다. 절망에 젖어 시의 발화發火를 부정하는 나를 불태운다. 어제의 죽은 내가 보인다.

 

벽에 귀를 갖다 대면 물소리가 들린다. 아득하다. 눈을 감으면 당신의 소리가 들린다. 나는 늘 아득한 것만을 탐했다. 물소리, 물소리. 축축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 몸이 소리가 된다. 어떤 채비도 없이 탐험은 시작된다. 돌로 된 벽. 사이사이 틈. 틈 사이사이 어둠. 슬며시 그 얇은 어둠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간다. 내 몸은 돌이 되지 못하고, 역사가 되지 못하고, 흐물흐물 유형도 무형도 아닌 정욕의 애액이 되어 돌 속에 분신한다. 돌 속에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 파닥거리며 지느러미를 움직인다. 돌이 흔들거린다. 돌 속에서, 돌 속의 물속에서 노래를 부르자니 숨이 가빴다. 내 몸의 구멍으로 물이 들어왔다. 살갗이 울퉁불퉁하게 딱딱해진다. 온몸이 물이 된다. 물속에서 돌이 되는 순간. 물이 돌이 되는 꿈. 돌이 된 몸속에서 아득한 물결 소리가 철썩인다.

― 「고분古墳」 전문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이재훈에 의해 무덤 ‘안’에서 나는 깨어났다. “벽에 귀를 갖다 대”자 “물소리가 들린다.” “눈을 감으면 당신의 소리가 들린다.” 당신이 나를 깨어나게 했다. 당신의 소리가 나를 되살아나게 했다. 당신의 소리가 나를 부활시켰기에 “어떤 채비도 없이 탐험은 시작된다.” “돌로 된 벽. 사이사이 틈. 틈 사이사이 어둠”을 지나 나는 간다. “내 몸은 돌이 되지 못하고, 역사가 되지 못하고, 흐물흐물 유형도 무형도 아닌 정욕의 애액이 되어 돌 속에 분신”했다. 무덤 안에서 내가 사라진 후에, 당신이 어제의 나를 멸실시킨 후에, 나는 “돌 속에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가 되었다. “파닥거리며 지느러미를 움직”이자 “돌이 흔들거린다.” “숨이 가빴다.” 기적처럼 “내 몸의 구멍으로 물이 들어왔다.” “살갗이 울퉁불퉁하게 딱딱해”졌다. “온몸이 물이 되”었다. 나는 돌 속의 물이다. 나는 살갗이 딱딱한 물이다. “물이 돌이 되는 꿈”을 꾼다. 나는 곧 “물속에서 돌이 되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나는 물이자 돌이 될 것이다. “돌이 된 몸속에서 아득한 물결 소리가 철썩”이는 꿈이 이재훈에 의해 실현되었다. 나는 물이고 돌인 시를 읽었다. 나는 이재훈의 시에 의해 시의 진실과 가능성을 다시 믿게 되었다. 그의 자성自省이 나를 데운다. 그의 시는 개안開眼으로 이끈다. 부정否定과 갱신으로 나를 이끈다. 이재훈의 수상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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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남자의 일생」

 

이재훈, 「남자의 일생」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찾아들고
온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으로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시·낭송 _ 이재훈 – 1972년 강원 영월 출생. 1998년 《현대시》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등이 있다.

 

배달하며

한밤중이 되면 몸에서 수선화가 피어난다는 시인. 깊은 동굴로 들어가 서둘러 어둠을 껴입고 찰박찰박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을 분다는 시인.
애벌레-나비-남자들은 낮에는 실존적인 제약과 필연 속에 넥타이를 매고 아스팔트를 달려 “매일 출근하는 폐인”이다.
나비는 시인이요, 일용근로자, 백수, 독학자이다.
그늘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 아스팔트 위에서 뱃가죽이 뜯어지는 무력한 생명의 순환과 만다라를 읽는다. 「남자의 일생」이라는 제목에 그만 몇 편의 페미니즘 시가 움찔하다가 풀잎처럼 몸을 연다.

문학집배원 문정희

▶ 출전_『명왕성 되다』(민음사)

▶ 음악_ 권재욱

▶ 애니메이션_ 김은미

▶ 프로듀서_ 김태형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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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찬, 「시베리아의 들꽃」

 

 
 


누가 내게 사랑을 물어 온다면
시베리아로 달려가 반란처럼 피어난
보랏빛 엉겅퀴 한 송이 보여주리
 
 
벌판에 십 개월 동안 눈이 쌓이고
자작나무 숲에 안개가 덮여도
원색의 야생화는 피어난다
 
 
유형의 길 떠나던 임을 따르다
눈밭에 나뒹굴던 여인처럼
길가에 맨발로 피어난 양귀비
 
 
여름은 짧고 길은 어두어도
그대에게 가야 만 하는 먼 길
사랑은 들꽃처럼 붉어지고
 
 
누가 내게 사랑을 물어온다면
그냥 시베리아로 달려가
엉겅퀴 한 송이 가슴에 물들여주리

 
 
 
 
_ 송종찬 – 1966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성장했다. 1992년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1993년 시문학에 '내가 사랑한 겨울나무'외 9편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그리운 막차』, 『손끝으로 달을 만지다』 등이 있다.
 
 
낭송_ 이재훈 – 시인.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가 있음.
 
 
 
배달하며

    시베리아라는 시어는 호랑이와 횡단열차와 함께 달려온다.
    자본론을 읽고 있는 유리창에 추운 입김이 서리고, 이념의 가죽 군화 소리가 저 멀리서 메아리처럼 들려올 것 같은 시베리아. 가장 단단한 영혼과 가장 순결한 바람소리로 소스라치게 잠든 의식을 깨우고야 말 것 같은 시베리아! 광활한 대지와 그 대지가 품은 보랏빛 이념들을 떠올려본다.
    유형지를 따라 나선 맨발의 엉겅퀴와 양귀비! 들꽃이지만 지독한 사랑과 파멸을 동시에 품은 것 같아 슬며시 두려워지는 들꽃들이다.

문학집배원 문정희

 
 
 

▶ 출전_

▶ 음악_ 권재욱

▶ 애니메이션_ 박지영

▶ 프로듀서_ 김태형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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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있는 시에 관한 짤막한 단상들

 

 

이재훈

 

   

 

 

*

무엇을 쓸 것인가 라는 질문은 시가 늘 거느리고 있어야 하는 화두와도 같다. 내가 쓰고 싶은 시는 영성, 숭고, 신화, 악마와 천사, 선과 악, 광기, 공동체, 도시, 문명, 미디어, 돌과 같은 주제나 소재의 것들이다. 이런 주제는 지금의 생각이지 내일이 되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때론 다른 주제어가 속속들이 추가될 것이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미래에 씌여질 내 시는 어떤 내용과 스타일일지는 나도 궁금하다. 시는 마치 운명처럼 태어나는 것이므로.

 

*

연금술사와 대장장이는 ‘불의 지배자’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어떤 물질을 다른 물질로 변화시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은 ‘불’에 의해서 가능하다. 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연금술사의 능력이다. 어떤 온도에서 어떤 시간을 통해 다른 물질을 만들어내느냐가 연금술사와 대장장이의 가장 큰 관심일 것이다. 그들은 불을 잘 만지기 위해 샤먼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때론 스스로 샤먼이 되기도 한다. 불을 지배한다는 것은 영혼을 지배한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시도 연금술사가 이르려고 하는 샤먼의 지위에까지 다다르려는 욕망을 간직하고 있다. 대체 좋은 시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읽고 평가하는 시가 좋은 시일까. 좋은 시란 불가능한 가치이다. 다른 시가 있을 뿐이다. 어쩌면 시인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시인은 한 편의 시를 만들기 위해, 전혀 다른 인식의 물질을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골몰한다. 마치 불을 만지는 것처럼 언어의 온도와 시간과 기다림과 섞음과 난데없음을 오랜 경험치를 통해 실험해보는 것이다. 좋은 시인지 아닌 시인지는 시인의 몸이 즉각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시 한 편으로 뜨거워지는 몸이 된다면 시인은 벅찰 것이다. 시 한 편으로 뜨거운 몸을 갖고 싶다. 이런 시라면 매일 쓰고 싶다.

 

*

하늘은 돌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상상하던 때가 있었다. 가끔씩 하늘에서 돌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의 운석을 그리 생각했던 것이다. 돌은 인간과 가장 가까이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가장 오래된 물질이다. 많은 신화에서는 최초의 인간이 돌에서 나왔다고 한다. 돌이 간직한 원시의 시간성은 지금 현재에까지도 그 실물로 남아 있다. 돌에 비하면 인간의 시간은 너무나 짧다. 그렇기 때문인가. 인간은 돌에게 절을 하고, 돌로 신의 형상을 만든다. 이 돌의 상상력은 한동안 계속 내 시의 언저리를 떠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생각들이 다음과 같은 졸시를 낳기도 했다.

 

돌은 투명하다.
그 몸에는 연혁이 없다.
돌 위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돌을 욕되게 하는 것.
돌은 인간 이전의 사물.
기원을 알 수 없는 시간이다.
돌에 절을 하는 사람들.
돌 속에 병(病)의 영혼과 천사의 영혼이 깃든다 했다.
가끔씩 하늘에서 돌이 떨어졌다.
외계의 시간까지도 이승의 시간과 섞이는
무한의 돌.
그 돌로 촉(鏃)을 만들고 도끼를 만들었다.
동물을 죽여 몸을 취했고
같은 종족을 죽여 또 다른 몸을 취했다.
어머니의 뼈를 땅속에 묻고
뼈가 돌이 되어 땅 위에 솟았다.
처음은 모르나 몇 천 년이 지나면
모든 존재는 돌에서 태어난다.
돌을 던지면 울음이 들린다.
돌이 땅에 던져지면 마치 아기처럼
온몸이 땅속에 안긴다.
돌을 깨고 나온 사람들.
돌로 된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돌을 하늘에 던지면 그저
별이 된다.

 

- 졸시 「돌의 시간」 전문

 

*

‘반지의 제왕’과 ‘호빗’ 시리즈는 결국 선과 악의 싸움이다. 선악의 구도에서 악한은 오로지 악한일 뿐이다. 선인의 그룹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우정’이다. 우정은 공동의 싸움에서 더욱 빛을 발하며 역경과 고난을 통해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가치는 우정인 셈이다. ‘우정’의 시가 있다면 나는 ‘우정의 시’를 쓰고 싶다.

 

*

데이빗 핀처 감독의 <나를 찾아줘, Gone Girl>는 사라진 아내를 찾아나서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 아내 에이미(로자먼드 파이크)는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소름 돋는 악녀이다. 에이미의 허영과 사회적 욕망과 대중에게 비치는 미디어적 욕망과 끊임없이 자기를 봐달라는 대중 노출증과 통제하지 못하는 감정선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뜨겁게 다가왔다. 소름 돋는 악녀를 이해하고 싶었다.

어쩌면 시인들은 이런 복잡하고 미련하고 위태로운 내면을 모두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 속에는 이런 복잡하고 미련하고 위태로운 것들이 다 들어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욕망과 허영과 부질없음의 극단에 내 시의 감수성이 슬쩍 가닿는다면 좋겠다.

 

*

어느 술자리. 삶의 변화가 없다면 시의 변화도 없다는 말을 들었다. 시의 변화를 위해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 하지만 삶의 변화를 실행해본 시인들은 모두 말린다. 자칫 삶이 시를 초라하고 궁색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인으로서의 자존을 지킬 수 있는 삶의 자리는 누구에게나 제각각 있을 것이다. 자기가 아는 그 자리를 찾으면 된다.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자리에서 매일 노을을 맞으며 시를 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내가 있어야 할 시의 자리. 시인으로서 자존을 지킬 수 있는 삶의 자리. 그 자리를 찾아 지금도 방황하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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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극찬을 믿지 못한다. 글쟁이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독약은 극찬이다. 특히 시인에게 극찬은 친분의 또다른 말일 뿐이다. 저마다 자기 언어가 살 가장 알맞은 집을 짓고 있을 뿐이다. 겸손과 열등감을 자만과 자존을 구분하지 못하고 늘 괴로워하는 정신 파탄자들. 나또한 그 파탄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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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성으로는 그 무엇도 설명할 수 없다. 지금의 이런 축축한 마음도. 마른 하늘에 눈이 내리는 이 기막힌 풍경도. 시가 무엇을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지금 이 기막힌 시간을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러기에 내 언어는 너무도 짧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내 시에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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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시라. 당신의 신발은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 그리고 당신의 펜은 모든 거짓을 알고 있다. 완벽하게 진실한 글은 이 세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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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인은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었다. 이게 모두 페이스북과 트위터 때문이다. 누구나 자발적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누구도 훔쳐보는 말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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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부과된 권리는 외로울 권리이다. 외로움을 즐기며 청승떨 권리가 시인에게는 있다. 이 권리를 오로지 지켜내고, 그 권리를 옹호할 시를 써야겠다. 외로울 권리에 대한 장전은 시에 빼곡히 들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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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노래가 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 마시라. 랩도 처음에는 노래가 아니었다. 나는 노래를 하는 것일까. 앞으로 노래가 될 말을 하는 것일까. 어떤 방식이든지 노래가 된다면 행복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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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얼거림, 짜깁기, 단상의 나열, 긴장 없는 토로, 현학적 자랑, 철학 베끼기, 상투적인 감상성 등을 시라고, 더군다나 훌륭한 시라고 말하는데 동의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아무리 유행 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라지만. 가급적 유행과는 저 먼 곳에서 이상하지만 전혀 촌스럽지 않은 옷을 입고 싶다. 그 옷을 좋아해주는 마니아들이 있다면 더욱 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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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적으로 언어에 대한 순결함을 가진 시인들을 보면 결국 오래오래 시를 쓴다. 시의 언어에 대해서는 병이 들어야 한다. 병든 시, 순결한 언어는 한낱 이상일 뿐이겠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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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앙상한 나뭇가지는 비바람과 눈보라를 기다린다. 비바람에 온몸이 흔들리고 물기를 가득 머금은 나무는 생기가 돈다. 눈보라에 휘날리고 눈을 맞아 눈꽃을 피운 나무는 아름답다. 아름다움을 시로 쓸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까지 너무 추한 것만을 찾아 다녔다. 추한 몸들만 느끼고 좋아했다. 아름다움을 느낄 나이가 된다면 시도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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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시를 쓴지 이십년이 넘어서야 겨우 김소월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내가 너무 오만했던 것일까. 평소에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김소월이 가끔씩 머릿속에서 튀어나올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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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도 근육이 있다면 그것은 어조일 것이다. 어조의 힘으로 끌고나가는 시가 있다. 유치환과 김수영이 그렇다. 어조의 힘. 힘의 어조. 배는 자꾸 나오고 근육은 자꾸 느슨해진다. 이렇게 나이 먹지는 말자. 차라리 나온 배에라도 근육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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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이 스타일을 만들 수 있을까. 반복은 주술의 힘이 아니라면 지겨울 뿐이거나 노래의 후렴일 뿐이다. 스타일은 반복을 지탱하는 질서에서 나온다. 질서가 바탕에 있어야 반복이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훈은 몇 안 되는 진정한 스타일리스트이다. 스타일리스트가 되려면 얼마나 지독해야 할까. 더 지독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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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주체에 대해서 자꾸 골몰하면 길을 잘못 들 수 있다. 주체가 목소리의 내면이라고 한다면 대부분 시인의 장난에 말려든다. 주체는 어쩔 수 없이 택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라고 치부해야 한다. 참여시나 노동시에서는 주체를 잘 얘기하지 않는다. 사회적 자아를 배면에 내세우니까. 하지만 이런 시들의 주체는 모두 제각각 다른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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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을 떠나 시를 읽기란 쉽지 않다. 시를 읽으면 자연스레 그 시인의 얼굴이 떠올려진다. 혹은 그 시인이라서 그 시를 읽을 때도 많다. 그 시인이 싫어서 시가 싫거나, 아예 시를 폄하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결국 읽어야 할 시는 읽게 되고 남을 시는 남게 된다. 누군가가 내 시를 읽었을 때 내 얼굴이 떠올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얼굴을 떠올리며 시를 읽는다 생각하면 도저히 시를 쓸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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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원 더 싼 곳을 찾기 위해 인터넷의 바다를 몇 시간 동안 헤맨다. 결제하고 나니 더 싼 곳이 보인다. 그러한 허망함. 더 싼 곳을 찾기 위해 벌이는 바보 같은 사투. 욕망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아주 저렴한 나를 발견했을 때. 꼭 그런 저렴한 시를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시가 이런 것까지 허락할까. 500원 할인을 위해 충혈된 눈이 부끄러워 시를 쳐다볼 수 없을 때가 있다. 시를 읽다가 눈이 충혈된 때가 언제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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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늘 가능성을 염두하기보다는 이상을 꿈꾸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가능성에 대한 책임은 그 누구도 지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문학은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가능성 없는 자에게 하는 덕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로 인해 당신은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시의 이상도 그럴 것이다. 문학적 가능성에 가장 적절하면서도 무책임한 답변일 것이다. 스스로 자꾸 되뇌인다. 내 시는 가능성이 있다고. 그리고 시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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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그리고 싶다. 숲을 말하고 싶다. 꽃과 열매가 가득한 숲. 밤마다 땅 밑의 전설이 얘기되는 곳. 숲의 상상이 우주를 가로질러 또다른 세상에까지 가닿는 순간을 체험하는 곳. 도란도란 사랑의 밀어가 뜨겁게 속삭이는 곳. 이 도시가 숲이 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의 공동체는 어떤 숲을 조성하고 있을까. 시는 이 지구의 숲속에서 어떤 말들을 뱉어내고 있을까. 밤이 깊다. 고민하는 밤이 깊다. 쓰는 밤이 깊다. 쓰고 싶은 말들이 허공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밤이 깊다.

 

- <시와 표현>, 2015년 5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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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의 밤_ 영역

시詩 2015. 2. 17. 10:52

Plain’s Night


Lee Jaehoon

번역 홍은택



It’s become desolate. I’ve become detached from others, and unconcerned for their deaths. I’ve become detached from all emotions. I’ve become indifferent to the disciplines taught by those who teach. It’s simply because of vertigo. It’s dizzying when I drop by head and lift it back up. It spins and throbs. It spins whether I sit or lie down. It’s because of excessive drinking. It’s because of a migraine. I attempted to burn the weeds in my body. I considered that dying a glorious death is the only beauty. I thought leaving without a handshake to be considerate. A world without sadness doesn’t exist. I wanted to be a beautifully sad animal. I’ll dance with an abundant heart. What I can show is a whiff of a scent set in my clothes. It’s a sad night because I can’t say that I love. When thunder dwarfs the sound of music. When the midnight moonlight wets the hair. I’ll lie my body down on that universe and cover myself with the stars. Without any language I will be immersed in the abyss. I will sit on the plain and realize the wind’s heart.





평원의 밤


이재훈




막막해졌네. 타인에게 무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무심해졌네. 모든 감정에 무심해졌네. 가르치는 자들이 내놓는 규율에 무심해졌네. 단순히 어지러움 때문이네. 고개를 숙이다 고개를 들면 어지럽네. 빙빙 돌고 울렁거리네. 앉아도 누워도 빙빙 도네. 과음 때문이네. 두통 때문이네. 내 몸에 잡초들을 태우려했네. 산화하는 것만이 아름다운 거라 여겼네. 악수도 청하지 않고 떠나는 게 배려라 생각했네. 슬픔이 없는 세계는 없지. 나는 아름답게 슬픈 동물이고 싶었네. 충만한 마음으로 춤을 출 것이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내 옷자락에 배였던 냄새 한 다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 슬픈 밤이네. 천둥이 음악소리를 덮을 무렵. 자정의 달빛이 머리칼을 적실 무렵. 저 우주에 몸을 눕히고 별들을 덮을 것이네. 아무 언어도 없이 심연에 잠길 것이네. 평원에 앉아 바람의 마음을 얻을 것이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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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보다...

시시각각 2015. 2. 6. 16:08

퀭한 몰골로 신년회 사회를 보다.

사회는 늘 처음보는 것처럼 늘 뭔가 그러함.

도산 안창호 선생 밑에서 무실역행 옆에서 저런 몰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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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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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가을날

시시각각 2015. 2. 6. 15:32

2014년 가을 어느 날 합정역.

같은 지면 출신의 후배들 틈에 슬쩍 꼽사리 끼어서 먹음.

 

(좌부터) 이이체, 서윤후, 최세운, 정선율, 이현호, 김제욱, 윤성아, 조혜은, 이소호, 오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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