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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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古墳)

 

이재훈

 

 

벽에 귀를 갖다 대면 물소리가 들린다. 아득하다. 눈을 감으면 당신의 소리가 들린다. 나는 늘 아득한 것만을 탐했다. 물소리, 물소리. 축축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 몸이 소리가 된다. 어떤 채비도 없이 탐험은 시작된다. 돌로 된 벽. 사이사이 틈. 틈 사이사이 어둠. 슬며시 그 얇은 어둠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간다. 내 몸은 돌이 되지 못하고, 역사가 되지 못하고, 흐물흐물 유형도 무형도 아닌 정욕의 애액이 되어 돌 속에 분신한다. 돌 속에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 파닥거리며 지느러미를 움직인다. 돌이 흔들거린다. 돌 속에서, 돌 속의 물속에서 노래를 부르자니 숨이 가빴다. 내 몸의 구멍으로 물이 들어왔다. 살갗이 울퉁불퉁하게 딱딱해진다. 온몸이 물이 된다. 물속에서 돌이 되는 순간. 물이 돌이 되는 꿈. 돌이 된 몸속에서 아득한 물결 소리가 철썩인다.

_ <시인동네> 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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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잘 다니지 않는 도로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금은 몇 년 동안 선을 조금씩 더 벌려 그곳에 민들레가 피었다. 고분은 도굴당했거나 오래되어서 텅 비어 있을 것이다. 시적 화자는 물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물이 있는 곳은 늘 축축하기도 하지만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틈은 소우주를 확장시키고 융합하며 또 다른 개별성을 존재하게 한다.

화자는 틈을 만들기 위해 축축함을, 물소리를 끌고 왔다. 그리고 틈을 만들고 어둠의 틈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간다. 다시 돌 속을 축축하게 하고 고체의 개념을 녹여서 물이 되게 한다. 돌 속에 강이 흐른다. "돌 속의 물속에서 노래를 부르자니 숨이 가빴다" 현대의학으로 인해 오래 살고 있는 우리도 하나의 고분이다. 돌 같은 육체 속에 갇혀 다시 물 같은 흐름 속에 갇혀 시의 노래를 부르는 시인은 숨이 가쁠 것이다. 고단할 것이다. 하지만 돌 속에 강물을 만들고 살아가는 시인의 가슴은 행복할 것이다.

돌이 된 몸속에서도 시인은 몸에 새겨진 물무늬를 바라보며 물결소리를 잃지 않는다.

(이인철 시인)

 

_ <시와세계>, 2013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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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시, 함께 늙어가는 아름다운 애인

 

 

 

이재훈 이은규

 

 

 

햇살이 없었다면/ 저물녘이 없었다면/ 늦은 밤 빗소리와/ 시를 긁적이는 펜 소리가 없었다면/ 이 우주에 어쩌다 나의 동경이 되어 버린 숱한 별들과/ 아무도 원치 않던 도시에서의 고독이 없었다면/ 애초부터 방황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이재훈, <명왕성 되다>, 自序에서

 

 

 

● 명상가와 시인 사이

 

이은규: 이번 <시현실> 여름호 대담에는 이재훈 시인을 모셨습니다. 선배님, 잘 지내셨어요. 반갑습니다. 오늘 대담 장소인 쿠스코의 분위기가 이국적이네요. 흐르는 음악도 그렇고요.(^^) 함께 말씀 나누게 될 <명왕성 되다>에 「쿠스코」라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지요?

 

이재훈: 「쿠스코」라는 작품이 있죠. 쿠스코는 페루의 도시인데 잉카제국의 수도였지요. 한때 1백만 명이 거주했다고 해요. 또 세계의 배꼽이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고대문명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 이유로 쿠스코에 대한 열망이 시로 표현되었겠죠.

 

이은규: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오늘 대담 장소와 함께 나누게 될 대화가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을 것 같아 흥미로워요.(^^)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약력에서 고향은 정보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1972년 강원도 영월 출생이신데, 선배님 기억 속에 그곳은 어떤 곳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요. 영월하면 뭔가 아득한 느낌인데 일상은 또 다르겠지요.

 

이재훈: 제가 태어난 곳이 영월 만경대산 아래 첫 동네에요. 영월군 하동면 주문리. 일명 모운동(募雲洞), 구름이 모이는 동네라는 뜻이지요. 예전에는 그곳이 탄광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죠. 폐광된 이후로 인적이 드문 마을이 되었어요. 그곳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때까지 횡성, 인제 등 강원도 곳곳을 떠돌며 살았어요. 이렇게 이사를 자주 다니니까 헤어진 친구들에게 편지를 많이 썼어요. 그래서 그런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어요. 그래도 수줍음이 많아서 새롭게 전학 간 학교에 적응하는 건 늘 시간이 걸렸어요.

사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영월을 떠나서 연고가 없어요. 그런데 약력에는 항상 출생지를 적게 되어 있잖아요.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어른이 돼서 다시 가보니 많이 바뀌어있더라고요. 집집마다 벽화를 그리고 마을을 예쁘게 가꾸어서 캠핑족들에게 인기가 많은 동네가 된 거죠. ‘6시 내고향’ 등 티브이에도 많이 출현을 했다고 해요.(^^)

 

이은규: 구름이 모이는 동네…. 그윽한 이름이 인상적인 곳이네요. 갑자기 이런 말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모범생 이미지가 강하세요.(^^) 학창시절 선배님께서는 어떤 학생이셨는지 궁금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말씀해 주시면 이해가 빠를 것 같아요.

 

이재훈: 이러저러한 상황으로 논산에 계신 부모님과 떨어져 지냈어요. 고1 말부터 혼자 자취를 하게 되었어요. 연탄불 혼자 갈면서 밥 해먹고 고등학교 졸업했는데 자취 시절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어요. 사춘기가 조금 늦게 온 것 같아요.(^^) 대학을 안 가겠다고 선언했죠. 나름 지역의 명문고였기 때문에 꼴등도 대학은 갔었거든요. 일종의 반항심이었는데 남들 다 가는 대학이라서 가고 싶지 않았어요. 당시에는 인도에 가서 명상가가 되고 싶었어요. 자신을 버리고 구도를 하는 삶에 대해 관심이 많았거든요. 고등학교 때까지 나를 지배했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와 실존적 물음 등 때문에 괴로웠던 시절이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과 대전 등지에서 지내면서 방황을 했어요. 그때 집중적으로 난독을 했어요. 특히 서울 용산도서관이 제 문학의 성지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밥값 저렴하고. 당시 우동이 천원, 김밥이 오백 원이었어요. 하루를 지내기엔 좋은 환경이었죠. 희한하게 문예지도 많이 읽었어요. 그러다가 부모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논산에 있는 4년제 대학에 들어가게 된 거죠.

 

● 펼치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이은규: 대학 진학 거부와 명상가를 향한 꿈이 내적 필연성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첫 발성인 등단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지요. 대학 재학 중인 1998년 <현대시>로 등단하셨는데 안팎의 반응이 상당했을 것 같아요.(^^)

 

이재훈: 대학을 간다면 국문과 말고는 생각을 안 했어요. 거기가면 책 읽을 수 있지 않나 하는 막연한 생각 때문에.(^^) 하지만 학교생활도 열심히 못했죠. 부모님께 억지로 끌려간 거라 1년 동안은 적응을 못했죠. 그러다 방위병으로 군대를 다녀온 후 복학해서 본격적으로 학교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문학은 계속 독학으로 했던 거라서 2학년 때부터 각종 문예지에 투고를 했어요. 그때 당시 우리 과에 평론가 우찬제 선생님께서 계셨어요. 작품을 보여드릴 용기가 없어서 연구실 문틈으로 작품을 밀어 넣었던 생각이 많이 나요. 그런 시간을 보내고 4학년 때 등단을 했어요. 학교 설립 이후 최초의 등단자였기 때문에 교문에 플랜카드가 걸렸고 졸업할 때 상도 받았죠.(^^) 막상 등단을 하고 보니 실감이 안 났어요. 삶이 달라진 것도 아니고. 거의 1년 동안 청탁도 없었고요. 하지만 내적 에너지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것 같아요. 문학을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뛰쳐나가 순교할 자세가 되어 있던 거죠. 그렇게 철이 없었어요.

 

이은규: 문청 시절에 시인이 되신 거네요. 얼마나 벅차셨을까요. 현대시와의 인연이 등단지에서 근무지로 이어지고 있는데요.(^^) <현대시>와 관련된 일 또는 사람들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문학과 일상의 경계가 거의 없는 생활을 하고 계신데, 장점도 있지만 어려운 점도 있으실 것 같아요.

 

이재훈: 등단 후 중앙대대학원 문창과를 다니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현대시>에서 일을 하게 되었죠. 현대시에서 학업을 병행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셨어요. 그때부터 쭉 박사과정 진학을 하게 되었고 졸업한 후에는 잡지일과 강의를 하고 있지요. 30대 초반부터는 제 삶의 모든 부분이 문학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은규: 문학이라는 테두리 속에서의 삶…. 이번 기회를 통해 2005년 출간된 선배님의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를 다시 펼쳐 보았는데요. 심플한 표지와 긴 호흡의 표제작이 다시 봐도 신선했어요.(^^) 특히 표제작은 세상에 첫 시집을 내놓는 시인의 선언서처럼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이재훈: 한 권의 시집은 나름 시인이 연출해낸 한 편의 연극이라고 생각한 거죠. 나름대로 기획을 하려고 고심을 했어요. 색깔 있는 시집, 이재훈이라는 텍스트만이 살아 있는 시집을 내고 싶었죠. 시를 통해서 잘 할 수 있는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위주로 묶었어요. 첫 시집이니까 근원과 욕망 등을 탐색하는 시들이 많았고. 일반적으로 첫 시집에는 자기 살점이 뭉텅뭉텅 떨어지는 자의식적인 부분이 있을 수 있는데, 첫 시집으로 많이 아팠죠.

표제작 이야기를 조금 하면 그 작품 제목이 너무 길어서 시집 제목으로는 생각을 못했어요. 당시 추천글을 써주신 조정권 선생님께서 제안을 해주셨어요. 길어서 좀 망설여진다고 하니 그 제목이 시집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 조언으로 다소 긴 제목의 시집을 가지게 되었죠. 제목이 길기 때문에 제 시집의 제목을 외우는가 외우지 못하는가를 기준으로 저에 대한 애정을 판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은규: 참고로 저는 외울 수 있답니다.(^^) 첫 시집 자서에 보면 “문학이 구원 자체는 될 수 없겠지만 구원을 욕망하게 하는 에너지는 되기 때문이”라는 문장이 있는데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신지, 혹은 새로운 생각이 더해지지는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이재훈: 변함이 없다고 봐야겠죠. 시와 완벽히 논다는 개념이 제겐 없어요. 진지하고, 고민이 많죠. 세상에 놀 것들은 많지만, 진지하고 싶은 것들은 없어요. 전 숙연하게 문학을 하고 싶어요.

 

이은규: 문학을 대하는 태도나 자세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말씀이네요. 질문을 계속 이어나가자면, 시원에 대한 물음들이 주가 되어 시집 한 권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표제작인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를 포함하여 <사수자리>, <순례>, <나스카 평원을 떠난 새에 관한 이야기>, <공중정원> 등의 작품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 여행 경험과 상상력은 어떻게 만나고 또 헤어지는지요.(^^)

 

이재훈: 아까 말씀드렸듯이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않은 삶을 살아서 먼 곳에 대한 동경과 상상이 시를 통해 드러난 것 같아요. 대부분의 공간이 실제 가보지 않고 쓴 경험이 많습니다. 가보지 않고 어떻게 체험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단호히 아직 문학을 반쪽밖에 모르시는군요 하고 말하고 싶어요.

초창기에는 내 삶을 쓰는 게 너무 엄살을 떠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시를 썼을 때 마음에 들지 않았죠. 시를 통해 멋있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성향일수도 있고요. 문학을 통해 이상향을 이루자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별이라든지 가볼 수 없는 곳에 대한 상상, 우주 속을 떠도는 것이 저에게는 실존적 고민이었기에 나름대로 치열했어요. 그런 치열함이 더 문학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고요. 선입견을 가지고 생각하듯이 별이 낭만적이지만은 않아요. 제겐 치열한 실존의 대상이죠. 아직 삶을 이야기하기엔 내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을 어떻게 내릴 수 있나라는 생각도 했었고. 지금은 조금 달라졌어요. 체험은 개별성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나온다는 걸 알아요.

 

이은규: 우주와 실존 그리고 시적 치열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어지는 질문이 될 수도 있겠는데요. 여행을 하다보면 마음에 담고 싶은 풍경을 사진에 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익히 알려져 있듯 <현대시>의 표지를 장식하는 수많은 문인들의 사진을 찍으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촬영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이재훈: 에피소드는 아껴두기로 하고요. 대개 시인들은 사진 찍는 것을 즐겨하지 않아요. 사진 찍히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죠. 글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에 익숙하다보니,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밝혀지는 것을 꺼려해요. 그런 부분에 일견 동의합니다. 나또한 그러니까.(^^) 모델을 찍는 것보다 시인을 찍는 것이 훨씬 어렵지 않을까 생각해요. 시인을 스튜디오에 앉혀 놓고 사진을 찍는다고 상상해보세요. 금방 아시겠죠.(^^)

 

시인과 평론가 사이

 

이은규: 선배님, 굉장히 부지런하신 것 같아요.(^^) 2007년에는<현대시와 허무의식>을 출간하셨습니다. 허무의식이 현대시에 보편적인 인식의 방법임을 밝히고, 그 시의식이 어떠한 양상으로 펼쳐졌는지를 고찰한 결과물로 읽혔는데요. 허무의식에 대한 천착의 이유와 특별히 유치환, 박인환, 이형기, 강은교 시인을 호명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재훈: 제 박사논문의 주제입니다. 박사논문을 수정 보완해서 낸 책이에요. 부끄럽고요.(^^) 허무의식이라는 주제론이 많지 않다보니 써보고 싶었어요. 유치환, 박인환, 이형기, 강은교 시인은 모두 허무의식이 가장 주요한 시의식이었어요.

 

이은규: 어쩌면 시인들에게 ‘허무’는 일종의 공통감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허무를 어떻게 내면화시키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양상으로 드러나겠지요. 이번에는 잠시 우회로를 따라 걸어보겠습니다. 지난 3월 시집 <명왕성 되다>와 관련된 ‘북콘서트’가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상상 속 독자를 직접 대면하는 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더불어서 그날 사회자와 게스트로 참석해주신 신혜정, 허연, 김태형, 오은, 김안 시인 등을 보며 문우가 많으실 것 같은 인상을 받았어요.(^^)

 

이재훈: 오로지 저만을 위한 그런 북콘서트는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그런 기회가 있을까 싶네요. 아주 즐거웠던 체험이었어요. 함께 와준 여러 시인들에게 고맙죠. 특히 사진에는 없지만 뒷풀이를 함께 한 시인들에게 고마움을 느낀 날이었어요. 많은 문우가 있을 것 같은 인상이긴 하지만 의외로 외롭기도 하답니다.(^^)

 

이은규: 매체에 보도된 사진을 통해서도 그날의 벅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문우에 대한 말씀을 아끼시는 그 모습이 더 애틋하게 다가오네요. 그런가하면 2008년에는 <딜레마의 시학>이 출간되지요. 부 구성에도 드러나듯이 현대시의 미래에 대한 탐색과 증언, 그리고 풍경들과 마주할 수 있었는데요. 시쓰기와 비평이라는 두 가지 층위의 작업을 함께 하고 계십니다. 즐거움, 괴로움 동시적으로 갖고 계실 것 같아요.(^^)

 

이재훈: 많이 받는 질문입니다. 평론에 대한 자의식에 대해 자꾸 물어보시면 부끄러워요. 시인이 쓴 조금 논리적인 글로 이해를 해주시면 제 마음이 편하죠. 솔직히 말하면 괴로움이 많아요. 이것저것 붙잡다가 이도저도 아닌 게 되는 것 같아서. 시 쓸 때의 모드와 평론 쓸 때의 모드가 다르기 때문에 동시에 쓰지는 못해요. 시 쓸 때는 시만 평론 쓸 때는 평론만 쓰죠.

 

명왕성 되다, 이후

 

이은규: 이번에는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에 관해 말씀 나눠 보겠습니다. 여는 질문 하나드리자면 자서 말미에 등장하는 카프카 독서실은 시편 「카프카 독서실」의 공간과 같은 곳인지요?(^^) 시 속의 “팔뚝 위에 피리를 새겨 넣자/내 몸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는 구절을 통해 바라보면 작품의 산실인 것도 같습니다.

 

이재훈: 카프카 독서실은 제 공부방이에요. 아이들을 재우고 난 뒤에 얻는 저만의 시간은 참 소중하죠. 아무에게도 침해받고 싶지 않은 그 공간에게 제가 이름을 붙여줬어요.(^^)

 

이은규: 누구나 저마다의 카프카 독서실을 꿈꾸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 시집 제목에는 어떤 에피소드가 숨어있는지 궁금합니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그 부분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잖아요.(^^) 더불어 명왕성 등 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첫 시집부터 지속되고 있는 시원에 대한 물음의 연장선상에 있는지요. 그런 추측이 가능하다면 어떤 변화를 염두에 두고 시도하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이재훈: 어떤 변화라기보다는 별이라는 대상이 제 몸에 맞는 거겠죠. 일부러 별에만 집중한 것은 아닌데요. 존재의 시원이나 신화, 도시적 삶에 대한 성찰 등의 주제가 별이라는 대상으로 수렴된다는 게 저도 신기해요.

 

이은규: 그런 현상이 시의 ‘자기운동성’이 아닌가 싶어요. 첫 시집이 도시의 생리와 주체의 내면을 결합하며 한 시대의 쓸쓸한 풍경을 기록했다면 이번 시집은 소재와 착상의 범위가 더욱 넓고 풍요로워졌으며, 다양한 시편들을 통해 호흡과 리듬도 확장되었다는 평이 있습니다. 어떤 시인에게나 첫 시집은 생채기와 같은 느낌이 강한 것 같아요.(^^) 그 시간을 지나온 두 번째 시집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은 어떠신 지요.

 

이재훈: 좋은 평가를 많이 내려주시니 고맙죠. 두 번째 시집에 대해서는 아마 제가 세 번째 시집을 낸다면 더 중요한 말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첫 시집과는 조금 다른 지점에서의 나를 발견하려고 애썼던 시집이었죠. 그 부분에서 공감을 많이 해주시는 것 같고요.

 

이은규: 말씀을 들으니 벌써 세 번째 시집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되는데요. 나를 발견하려는 몸짓이 어떠한 방식으로 시도되고 또 드러날지 궁금해집니다. 문득 김수영 시인 이야기인데요. 김수영은 “시는 나의 닻이다”라는 말을 했지요. 선배님께 시는 무엇일까요. 더불어 이유도 함께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재훈: 제게 시는 무엇일까요란 질문은 너무 어렵고 거창하고요. 저는 시가 함께 늙어가는 애인이었으면 좋겠어요.(^^) 시와 함께 아름답게 늙고 싶어요.(^^)

 

이은규: 오늘 대담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하기’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기’ 사이를 오고간 것 같습니다.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드리며 대담을 마칠게요.(^^) 감사합니다.

 

이재훈: 수고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은규 |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다정한 호칭>이 있음.

 

_ <시현실>, 2012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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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들이 오갔을까요? 3월 28일

<명왕성 되다>의 저자 이재훈 편을

오디오로 중계합니다.

 

수요북콘 7회 제1편(00:00:00~00:13:27)

 

수요북콘 7회 제2편(00:13:27~00:28:18)

 

수요북콘 7회 제3편(00:28:18~00:42:02)

 

수요북콘 7회 제4편(00:42:02~00:56:02)

 

수요북콘 7회 제5편(00:56:02~01:07:35)

 

수요북콘 7회 제6편(01:07:35~01:18:34)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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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추면 우리는 날겠지
― 김참 시인께

 

이재훈

 

 

참 형, 오랜만이네. 지난 8월 부산 광안리에서 허만하 선생님을 함께 뵌 후 아직 보지 못했네. 그날 바다 위를 흐르는 검은 구름은 정말 내 취향이었는데. 나는 비오기 전의 그런 하늘과 구름이 좋네. 날씨는 꾸물꾸물했지만, 함께한 사람들과 축축한 바다 내음으로 인해 가슴이 따스해지는 날이었네. 그날도 집에 간다는 형을 붙잡고 덕천동까지 갔더랬지. 그러고 보니 올해는 두 번 만났네. 올 2월에는 정재학, 오은 시인과 부산과 김해로 놀러갔었지. 그때 형의 보금자리가 있는 김해로 가서 뒷고기를 참 맛있게 먹었네. 뒷고기란 말은 정육업자들이 맛있고 희귀한 부위의 고기를 뒤로 숨겨놓았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형이 말해줬지. 형의 작은 아파트에는 책들로 빼곡하고, 침실에는 LP를 틀 수 있는 전축이 있었네. 늦은 밤까지 LP를 맘껏 들을 수 있어 귀가 호강했지. 그때 들었던 산울림과 정난이, 김지연과 리바이벌크로스는 아직도 귀에 쟁쟁해. 또 다음날에는 계획에도 없었던 거제도로 달려가 해변가 돌멩이를 주웠지.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난蘭을 캐러 다니는 일도, 물고기를 키우는 일도 형에게 모두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네. 참!, 형에겐 음악이 있었지. 아트록의 마니아인 형의 음악취향에 한때 나도 따라간 적이 있었는데 기억나나?
지난호 정재학 시인의 편지를 받고 여러 상념들이 떠올랐네. 뭐랄까, 우정이란 게 어떤 걸까 하는 생각. 이런 친구들이 있어 행복하단 생각이 들기도 했네. 참형과 나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보는 사이지만, 늘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그걸 문학적 동지의식이라고 해둘까. 형의 시를 처음 읽은 건 내가 습작하던 시절이었지. 가장 처음 읽었던 것은 <문학사상>에 발표한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기억은 확실치 않네. 가장 확실한 기억은 <문학지평>이라는 부산에서 발간하던 잡지였네. 정확히 <문학지평> 1997년 가을호(통권 10호). 발행인은 이상개 시인, 편집장은 김형술 시인. 당시에는 열렬한 문청이어서 한국에서 발간하던 모든 문예지들을 다 읽어치울 때였지. 대학시절, 우연히 교수님 방에 들렀다가 구해가지고 온 잡지에서 형의 시를 읽었지. 신작소시집이라는 지면에 「굴뚝」 외 7편의 시가 게재되어 있었네. 그 지면에는 「굴뚝」, 「간빙기의 추억」, 「그렇다」, 「사차원 지구」, 「독버섯 요리」, 「늑대 인간」 등 첫 시집에 수록된 많은 시들이 발표되었지. 그중 나는 「독버섯 요리」라는 작품을 좋아했는데 시를 프린트해 문학동아리에 나눠주며 마구 떠들던 생각이 나네. “시끄러운 비둘기를 마구 두들겨 주었다 비둘기들이 축 늘어졌다 비둘기들을 마당에 집어던졌다 굶주린 개들이 달려들었다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서 내려와 파란 버섯 두 개를 쇠솥에 집어넣으며 노란 버섯 한 조각을 씹어먹었다 머리 속에서 댕댕댕 종소리가 울려퍼졌다”(「독버섯 요리」 부분). 친구들은 쟤가 왜 저래? 하는 표정이었지. 그날 머리 속에서 댕댕댕 종소리가 울리도록 술을 먹었지. 벌써 한참이나 멀찍이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 젊은 시인을 보며 질투라도 났던 걸까. 그 뒤로 나는 형의 애독자였는데, 드디어 등단 이후 형을 만나게 되었지.
1999년 5월 <현대시>가 주최한 대구세미나. 둘째날 오후, 일행은 세미나를 마치고 대구 두류산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지. 형은 부산에서 김경수, 노혜경 시인 등과 함께 행사에 참석했더랬지. 그때 현대시 편집위원이었던 김정란 선생님께서 내 손을 잡아끌고 김참 시인에게 데리고 갔지. 이재훈과 김참이 서로 또래이고 시적으로 통하는 점이 많을 테니 친하게 지내보라는 말씀. 그때는 데면데면하게 인사한 기억이 나네. 나는 쑥스러워 마음속의 반가움을 제대로 표현 못했었지.
곧이어 1999년 6월쯤에 형이 <현대시동인상>을 받았는데, 형은 시단의 가장 촉망받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었지. 소위 모던한 풍을 가지고 있었던 시인들은 모두 김참이라는 젊은 시인의 시를 얘기했으니까. 첫 시집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1999)를 출간하고 이어 <미로여행>(2002), <그림자들>(2006)까지 형은 누구보다 성실히 자기만의 세계를 확장하며 시를 써왔네. 특히 이미지를 통한 시공간의 이동과 역전하는 서사의 구축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시적 방법론은 탁월했지.

네가 잠을 자기 위해 거울로 된 방바닥에 드러누우면 거울 안 깊고 깊은 곳에 있는 그들이 낮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일년이 지나자 달에서 날아온 비행접시들이 쉴새없이 지붕들 위를 날아다녔고 불길한 검은 새들이 들판을 가득 메웠다. 너는 거울 속에 있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바깥에서는 하얀 밤은 계속되었다. 하얀 밤 하얀 밤 하얀 밤들이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좀처럼 잠들 수 없었고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하지만 너는 거울 속에 있는 그들을 하나씩 잡아먹었다. 나는 이빨을 딱딱거렸다. 너에게 잡아먹히는 것이 두려웠다. 마침내 너는 거울의 방에서 걸어나왔다. 그러나 나는 어두운 골방에 틀어박혀 흑백영화를 보며 시간을 죽였다. 그건 길고도 지루한 일이었다. 나는 더 이상 볼 영화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하얀 밤에 자막이 내려왔다. 사람들과 동물들, 나무들과 물고기들의 길고 긴 이름이 천천히 내려왔다.
― 「거울 속으로 들어가다」 부분

우리는 거울 속의 일들이 저 먼 꿈속의 일이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극적인 실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체득했을까. 형을 십년 넘게 보면서 점점 신뢰가 더 쌓여간다는 느낌이 들어. 그건 인간적이며 문학적인 게 모두 교차된 지점에서의 신뢰이겠지. 눈치보지 말고 혼자 가버리라는 말. 우리에겐 그런 것밖에 없잖아. 형은 현재에도 열심히 읽고 쓰고 듣고 생각하겠지. 2002년 <현대시동인상> 시상식 후 새벽 예닐곱 명이 여인숙에 모여 팬티바람으로 무슨 말들을 그리 많이 했을까. 다들 제각각 독고다이 스타일의 시인들이 2004년 청주에 모여 하룻밤을 지내면서 어떤 열정의 잔해들이 재처럼 마음에 남았을까. 그때도 지금 아니면 우리가 언제 또 모이겠어, 하는 말을 했었지. 조금은 게으르고, 무심하고, 데면데면한 우리지만 서로 지켜봐주며 함께 길을 간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날이네.
날씨가 춥네. 참 형, 이 겨울이 가기 전 한번 모이자구. 지금 아니면 또 언제 모이겠어.

_ <현대시>, 2011년 1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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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날의 기록들
― 이재훈 시인께

 

정재학

 

 

자주 그리운 재훈 형,
편지 자체를 정말 오랜만에 써보네. 정보화시대 자체가 편지 쓰기를 방해하고 있으니 나도 그 영향을 받나봐. 나는 스마트폰을 쓰지도 않고 016 구형 핸드폰을 쓰는 사람이지만 말이야. 사람들끼리 접촉은 많아지지만 깊은 교류는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 그래서 형이 나의 깊은 친구라는 것이 항상 든든하고 고마워.

난 모든 것은 결국 ‘우연’의 산물이라고 생각해서 ‘운명’이라든지 ‘필연’이라는 것은 별로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형과의 만남은 ‘좋은 우연’을 넘어 ‘필연’이라는 말을 붙여도 좋을 것 같아. 우리는 드물게, 처음 본 이후 바로 특별한 친구가 되었으니까.
2001년 봄이었지. <현대시> 원고 마감을 넘겨 보내게 되어 미안한 마음으로 형에게 메일로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형의 아름다운 등단작 「수선화」를 비롯해서 발표작들을 감명 깊게 읽었던 터라 형을 보고 싶었어. 찾아보니 그때 내가 보낸 메일은 지워졌는데 형의 답장은 남아 있더군. 우리는 지금도 변함없이 그때와 같은 메일 주소를 가지고 있지. ‘나는 시인이다’와 같은 자부심이 느껴지는 아이디 ipoet, 블루스 기타리스트 ‘로이 뷰캐넌’의 buchanan. 내가 최초로 받은 형의 메일에 “저도 꼭 뵙고 싶군요./ 정 시인의 시를 인상 깊게 읽고 있어서…/ 연락드릴게요” 하고 적힌 것을 보니 10년 전의 봄기운이 느껴지는 듯 해. 메일을 나눈 이후에 약속을 잡고 우리는 종로 대폿집에서 밤늦게까지 정종을 마셨어. 그 이후 나의 20대 후반과 30대는 형 없이는 얘기 할 수 없는 시절이 되었어. 평생 마실 술을 그 시절에 다 마셔버리고 평생 피울 담배도 그때 다 태워버린 것 같아. 2004년 여름밤 종로 어디에선가 막걸리와 파전을 먹고 내가 요즘 너무 무기력하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지. 그때 나는 왜 그렇게 무기력했을까. 실험적인 시에 대한 고민이었을까. 사는 것 자체가 버거웠을까. 복합적이었겠지만 그 말을 했던 순간은 또렷이 기억에 남아. 다시 그 술집에 가도 그때 우리가 마셨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쓸쓸한 날의 기록
― 정재학에게


무기력하다 했던가
마지막 술잔을 남겨놓고
우리가 귀가하는 순간
하늘 아래 어디쯤에선 꽃이 피었을 거다
꽃을 보고도 그걸 표현할 방법을 몰라
그렇게 헤매었던가 우리 한낱
일렉기타의 음률과 철 지난 유행가에
더 감상적이었잖은가
네게도 말했지만
나는 백 년의 무명을 견딜 것이다
그렇게 철없이 살리라
 
더 이상 만질 것도, 들을 것도, 말할 것도 없는 어둠
소주 몇 병 먹고 어둠과 말할 수도 있지만
그만한 자족으로 그 어둠 속
텅 빈 공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옥상 위에 올라가 날아보자
네 몸이 땅에 떨어져 옆구리가 찢어지고
사람들의 입가에 오르내린다 해도
내가 믿는 예수처럼
그 옆구리를 기억할 수 있을까
어느 요절한 시인처럼
흉흉한 소문 속에 네 아픔이 기억될 수 있을까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서정시인이 되고 싶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실패한 서정시인
서럽고 아름다운 자연은 이미 다 해먹고
남은 상상으로 목울대를 울리는,
이제 우리의 가난도 팔지 못하는,
 
거울 속에서 내 눈을 보았다
무얼 견디는지도 모르는
몽롱한 얼굴이 날 바라보고 있다

메타시로도 읽을 수 있는 아름다운 시야. 형이 발표하기 전에 나에게 며칠 전 쓴 시가 있다며 전화로 들려주었는데 그때의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서럽고 아름다운 자연은 이미 다 해먹고/ 남은 상상으로 목울대를 울리는”, 이 구절은 마치 우리 세대의 시인들을 대변하는 것 같아. 무기력했지만 우리의 몸짓과 말이 시가 되는 아름다운 시절이었지. 형의 시만큼 좋은 시는 아니지만 나도 답시를 썼지. 그러고 보니 편지였어.

편지, 영월에서
― 이재훈 兄의 「쓸쓸한 날의 기록」에 부쳐


그때 우리가 있었던 곳은 형의 고향 강원도 영월이었습니다. 형은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더듬거리며 태어난 동네를 찾고 있었어요. 눈 덮인 들판에서 전화도 했었죠. “엄마, 내가 태어난 곳이 어디에요?” 나는 하필 바람과 다투며 지도를 쫓아 들판을 뛰어다녔습니다. 지도가 얼마나 뒹굴었을까. 그때 하늘에서는 새 한 마리 날고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바람이 멀리 데려간 지도를 한참 만에 잡을 수 있었지요. 형이 태어난 곳은 이미 지도상에는 없는 마을이었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폐광촌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름이 없다고 그곳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형은 저에게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서정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물론입니다. 형은 시를 썼을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서정시인입니다. 저에게 ‘서정시’는 늘 이상한 개념입니다. 시 자체가 서정인데 마치 그 말은 동어반복처럼 느껴집니다.
…(하략)…

형이 어머님께 전화를 하는 동안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서, 들고 있던 지도가 날아가서 한참을 지도를 잡으러 뛰어다녔던 기억이 생생해. 형은 고향에 갔지만 고향을 만날 수 없었지. 지도는 그저 현재의 지리적 기록일 뿐 형의 역사를 담을 수는 없어. 시적인 순간을 그대로 옮긴 편지였어. 갑자기 형의 두 번째 시집 중 한 구절이 생각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통각이 없는 시간들./ 모든 사물은 그저 멀리 있는 상징일 뿐입니다.// 요즘은 하루에도 수백 번씩 제 존재가 바뀝니다./ 때론 동물이었다가 때론 식물이고/ 때론 명징했다가 때론 무질서합니다./ 나 또한 상징에 불과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 스스로에게 바라는 것인데, 머리가 맑았으면 좋겠어. 왜 이리 내 머리 속은 항상 구름이 껴 있는지……. 언제 우리 머리가 시리도록 찬바람 부는 산이나 겨울바다로 떠나보자. 우리가 맑아지지 않더라도 우리의 몽롱한 눈동자라도 만나러.

_ <현대시>, 201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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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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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 시인의 <오빠생각> 출간 기념 낭독회.
김안의 게스트로 출연했다. 역시 무대 체질은 타고나야...

자세한 공연 후기는 아래 링크(문학동네 네이버 카페)를 참조.
시인과 게스트들의 시낭송하는 동영상도 볼 수 있다.

cafe.naver.com/mhdn/31887
cafe.naver.com/mhdn/31959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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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 대담

 

빌딩나무 숲을 거니는 비교秘敎의 사제

 

이재훈 ․ 신동옥

 

 


신동옥 : 형과 대담을 하다니! 오늘 나의 주제는 ‘형을 이해하기 위하여’다.(웃음) 최근에 대담집(이재훈, <나는 시인이다>, 팬덤북스, 2011)을 냈다. 형이 인터뷰를 진행한 십여 년, 그 오랜 행간을 좇다가 문득 이건 농축된 이재훈 스스로의 질의응답이 아닐까 여겨지기까지 하더라. 돌아가신 김춘수, 오규원, 박찬 시인과의 인터뷰를 읽고는 뭉클하기도 했다. 대담집 소개 말씀, 더불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들려 달라.

이재훈 : 오랜 문우인 신동옥 시인과 대담을 나누게 되어 더없이 기쁘다. 우리가 만난 지 벌써 10년이 넘어간다. 우리가 독고다이, 언더 스타일이 서로 맞아 이렇게 오래 가는 건가?(웃음) 각설하고,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는 내게 십여 년의 세월이 집적된 문학 일기처럼 느껴진다. 이 대담집은 시인들이 직접 육성으로 풀어놓는 시에 대한 비밀을 알 수 있는 책이다. 각 시인들의 시관詩觀, 창작의 비밀, 창작배경, 성장과정, 문청시절,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문학적 삶 등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시인론을 쓰는 많은 평자들이 내 대담을 귀동냥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시인의 창작배경이나 시적 의도가 큰 참고가 될 테니까. 또한 원로, 중견, 시의 성향, 계파를 가릴 것 없이 많은 수의 시인들을 만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너무나 많다. 시인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한 가지씩의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다. 나는 서면 인터뷰보다는 거의 현장 녹음을 하고 녹취를 푸는 식으로 했다. 당연 품이 많이 든다. 그만큼, 재미난 일화도 많다. 개인적으로 이미 작고하신 김춘수, 오규원, 박찬 선생 같은 시인들을 대담할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김춘수 선생은 김수영이 평생의 라이벌이었다는 얘기와 국회의원을 역임하셨던 사연 등이 기억에 남는다. 오규원 선생과의 대담은 경기도 양평의 서후리라는 동네에서 요양하고 계실 때 했다. 이메일로 대담을 주고받았는데, 대담을 시작한 2004년 여름은 지독히 더웠다.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대담의 진행과정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박찬 선생은 연세에 비해 좀 일찍 작고하셔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대담 당시 일산에 살고 계셨는데, 비가 많이 내렸던 날이다. 직접 차를 몰고와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대담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에피소드를 이 자리에서 다 소개할 수는 없고, 또다른 자리에서 말할 기회가 있겠지. 궁금한 독자 분들은 우선 <나는 시인이다>를 참조하면 될 듯하다.

신동옥 : “1972년 강원도 영월 태생”이라고 약력에 썼다. 그런데 성인이 되기까지 강원도, 경상북도, 충청도까지 이사가 잦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린 시절 겪었다는 폭설에 대한 기억이나, 스무 살의 서울 체험에 대한 기억은 내게 이채롭게 들렸는데.) 자아가 형성되는 예민한 시기에서 막 사회화되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잦은 이사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 궁금하다.

이재훈 : 태어난 곳이 영월이지만, 영월을 고향이라고 말하기엔 내게 고향이 너무 많다. 어쩌면 고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초등학교 때까지의 유년시절은 강원도 일대에서, 중고교 시절은 경북 일대에서, 고교부터 지금까지는 충남 논산이 내가 겪은 공간들이다. 이 지역들은 모두 내 고향이나 다름없다. 그 땅의 산하들이 나를 키웠으니까. 그렇게 어린 시절을 늘 떠돌았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면, 이전 살던 곳을 그리워했고. 적응이 될 만하면 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다. 나는 늘 친구들에게 떠나는 사람이었고, 먼 곳에서 편지를 쓰는 사람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연락이 끊기는 사람인 거지. 말이 없었고, 혼자 많이 놀았고, 누군가 먼저 다가와야만 겨우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신 시인께 언젠가 얘기했던 폭설에 대한 기억은 강원도 인제의 깊은 골짝에 살 때였다. 정확히는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그 동네는 여름과 겨울밖에 없었다. 9월이면 김장을 시작했고, 너무나 추운 동네였다. 심지어 내가 키우던 강아지가 얼어 죽었을 정도였으니까. 눈이 엄청 많이 내렸다. 군인들이 눈을 치워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동네였다. 눈이 많이 왔던 날은 방문을 여니 마루 위까지 쌓였던 적도 있었다. 허리 깊이까지 눈이 내려 갇혔던 기억. 대체로 아이들은 동굴을 만들어 놀았다. 대부분의 유년 시절을 산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재미난 추억들이 많다.
   어릴 때부터 공간에 대한 집착은 없었던 거 같다. 떠나면 슬퍼진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쿨하게 떠났던 거 같다. 오히려 남아 있는 사람들이 더 눈물바람이었고. 나는 이사를 가면 늘 타던 커다란 트럭이 기억에 남는다. 정확하게는 트럭 뒷좌석의 다락방 같은 공간. 이삿짐을 싣던 트럭은 운전석 뒤에 한 사람이 누워 잘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 동생 둘과 함께 덜컹거리며, 평소에 먹지 못했던 맛난 과자를 먹으며 정말 오래도록 차를 타고 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디로 가는 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거 같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던 걸 보면. 이사를 안가겠다고 떼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대충 어디 먼 곳으로 가는구나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사를 간다는 얘기를 들으면, 또 트럭의 뒷좌석에 탈 수 있겠구나 하고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철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인지 뿌리의식이 없고, 정처 없는 유랑의식이 날 지배했다. 나중에 어디 조용한 데로 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가끔씩 하는데, 그곳이 어디인지는 내게 중요치 않다. 내가 가는 그곳이 또 다른 내 고향이 될 테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앉아 있는 자리가 어떤 공간인지가 중요하다. 조용한 다락방 같은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신동옥 : 그래서 그런지 형의 작품에는 공간 내지는 공간성에 대한 예민한 촉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의 경우 그 공간은 첫째 도시와 일상의 공간, 둘째 신성의 거소, 셋째 비밀한 시원始原이 기루어지는 자리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개별 작품들 안에서 시적 공간을 배치하는 스킬이 놀랍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 시인으로서 형의 특장이 아닌가 싶은데.

이재훈 : 시를 쓰면서 시적 공간의 배치를 크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대부분 자연스럽게 한 편의 시속에서 스스로 운용되어진 것 같다. 시적 공간들이 떠오르고 이동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둔 것이지. 그래서 시속의 자아가 많이 날아다닌다.(웃음) 시공간이 광활하다는 얘기를 종종 듣곤 하는데. 이런 부분은 평소 상상하던 버릇 때문일 것이다. 늘 이곳 현실보다는 현실 너머를 많이 생각하고, 상상했다. 예를 들면, 우주로 날아가 외계인을 만나 놀거나, 내가 칠십 넘은 노인이 되어 새로운 사랑을 한다거나 하는 식의 상상들. 사실보다, 기적 같은 사실이 더 매력 있지 않나. 현실보다 믿을 수 없는 현실 혹은 믿고 싶은 현실에 더 강한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 상상들이 현실에 발 디디고 사는 시인의 모습에 투영되어 나온다.
   또한 성인이 될 때까지 잦은 이주와 이별 등의 시간이 유목적 감각을 낳았던 것 같다. 유목적 감각이 묵시적 꿈들이나 환상, 욕망 등과 뒤섞여 내 시적세계를 이룬 것은 아닐까. 신성의 공간이나 시원 등을 탐구하는 시적 세계는 신화나 종교, 고고학 등을 좋아하는 독서습관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관심은 지속될 것이지만, 좀 외롭겠지. 좀 낯선 것일 수 있으니까.


신동옥 : 낭만주의자라는 평가가 있다.(박수연, 「내면적 낭만의 순간」, <현대시>, 2005년 12월호) 첫 시집 시인의 말에는 이렇게 썼는데. “인간에게는 누구나 시원始原의 원대한 물음이 있다. 가령 밤하늘의 별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다소 낭만적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꽤 고통스러운 일이다.”(「흠의 고백」,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시인의 말 중에서)

이재훈 : 과장된 표현으로 읽혀지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내겐 정말 절실했다. “밤하늘의 별을 본다”는 은유적인 표현을 썼지만, 내 존재 이전의 먼 곳을 진지하게 응시하는 일은 내겐 중요한 행위였다. 그런 순간들 속에서 나는 나를 여러 번 죽였다. 운명이란 것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다. 이재훈이란 인간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는, 운명적으로 이렇게 타고나서 생긴 거다. 남자이고, 이런 부모와, 이런 종교와, 이런 생김새와, 이런 교육과, 이런 공간들 모두.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것은 몇 개밖에 없더라.
   존재탐구나 고행, 미지의 동경 등은 오래도록 나를 치기어린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아직도 미완인 걸. 계속 치기어린 사람으로 살아야겠지. 낭만주의자. 멋있지 않나. 끝까지 낭만주의자로 남고 싶다.

신동옥 : 첫 시집 해설에서 유성호 선생은 형의 시세계에서 종교적인 맥락을 소상히 밝힌다. 김유중 선생의 통찰(「그노시스를 향한 열망」, <시와생명>, 2002년 겨울)과 형 스스로의 고백적 아포리아(「숭고한 그노시스와 연금술사」, <시와반시>, 2007 겨울)도 있었다. 모태신앙이지 않나? 형의 기독교적인 상상력은 묵시록적인 비전보다는, 일종의 영지주의靈智主義(Gnosticism)랄까 그런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것 같다. 이런 성향은 첫 시집에서 두 번째 시집으로 건너오는 동안 더 강해진 것 같고. 형 시에서 종교적인 채색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재훈 : 종교적 메타포나 질료가 시속에 그렇게 많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 내가 생각지 않았는데 언어 속에 들어와 있더라.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니까 그런 부분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 중학교 때까지는 집과 교회가 내 인생의 전부였다. 아주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신앙생활에 대한 다짐과 계획 등으로 모든 삶의 울타리가 쳐졌던 때였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자취를 시작했다. 부모님께서 또 이사 가신 거지. <데미안>에 등장하는 싱클레어의 삶이 시작된 거다. 사춘기가 늦게 와서, 전학을 가지 않겠다고 반항을 했다. 그렇게 혼자 떨어져 지냈는데. 문득, 이 모든 주어진 삶의 굴레에서 이탈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격렬하게 몰려왔다. 그리곤 신앙생활과는 동떨어진 난삽한 생활들을 했다. 그때는 신앙생활 이외의 모든 것들은 난삽한 죄의 생활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아무튼, 정통 기독교 외의 것들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에큐메니칼, 해방신학, 중세 비교도, 그노시즘 등등. 기독교의 고집스런 구원관에 대한 회의도 있었고. 그 후로, 성聖과 속俗을 오고가는 철새 신자로 살았다.

신동옥 : 그렇다면, 형을 ‘연금술사’ 내지는 ‘그노시스트Gnosist’라고 불러도 되겠다.

이재훈 : 그렇기도 하다. 그노시스트지. 믿음보다는 앎에 더 관심이 있으니. 하지만 나는 이신론자라기보다는 크리스천이 돼야 한다.

신동옥 : 시에서 상징을 다루는 솜씨가 일품이다! 첫 번째 시집의 ‘황홀한’ 시리즈와 두 번째 시집의 ‘대황하’ 연작은 이런 생각을 단박에 증명하는 역작이다. 시적 상징에 대한 형 나름의 정의 같은 것이 있을 텐데. 참, 대담이 활자화될 쯤 두 번째 시집이 나올 수도 있겠다. 제목은 어떻게 정하셨는지?

이재훈 : 과찬이다. 한 편의 시에서 전달할 수 있는 상징은 미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연작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상징은 여러 편의 시 속에서 반복적으로, 혹은 다양한 변주로 전달되어야만 힘을 갖는다고 본다. 특히 ‘대황하’ 연작은 물에 대한 상징을 제대로 밀고 가본 경우인데, 앞으로도 이러한 스타일의 연작들을 생각 중이다. ‘대황하’ 연작은 우연히 시상이 다가왔다. 이십대 초반 시절 쿠스코Cusco라는 밴드의 「대황하」라는 곡을 지겹게 들었던 때가 있었다. 한 평도 안 되는 고시원에 누워 이어폰으로 그 곡을 들으며, 거대한 황토물의 휘몰아침을 생각하면서 삶을 견디던 때였다. 오래전 그때의 감성이 정말 섬세하게 다가오더라. 내겐 행운인 거지. 두 번째 시집은 아직이다. 해설도 아직 안 나왔고. 때가 되면 나오겠지. 제목도 아직 미정이고.

신동옥 : 두 번째 시집, 기쁘게 기다리겠다.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서정시인이 되고 싶다”(「쓸쓸한 날의 기록」)라고 말했다. 이때의 ‘서정시’, ‘서정시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재훈의 정의를 듣고 싶다. 그거 아는가? 가끔 형이 “나는 실패한 서정시인이지”라고 말할 때나 “나 같은 삼류시인이 무얼”라고 할 때면, 콱 때려주고 싶을 때도 있다는 거.(웃음)

이재훈 : 편하게 읽으면 되지 무얼. 그 시는 정재학 시인과 내 자취방에서 밤새며 나누었던 얘기들을 시화한 것이다. 그래서 부제를 ‘정재학에게’ 라고 붙였다. 감수성 살아 있는 시를 쓰고 싶다는 건데. 그런 면에서 모든 시들은 다 서정시이다. 왜 서정시라 칭하는 것들만 올곧은 정서와 예민한 감수성이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얘기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론에서 흔히 말하는 ‘서정시’에 대한 개념도 새롭게 정립해야 될 시점이지 않을까.
    가끔 입버릇처럼 말하는 ‘자기부정’은 날 채찍질하기 위해서다. 자기비하, 자기부정 등을 통해 최소한 내가 그런 시인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최고의 시인이라고 생각하는 때가 간혹 있는데, 그 순간 아찔하다. 너무 천박하고 유치한 생각이지 않나. 그 생각을 덜기 위해 끝없는 자기부정을 하는 것이다. 자기부정만이 살 길이다.

신동옥 : 동감同感, 상련相戀이다. 첫 번째 시집의 세계가 노래 특히나 영가靈歌의 세계였다면, 두 번째 시집의 가장 특징적인 무늬는 ‘침묵’과 ‘고요’의 깊고 너른 울림이 아닌가 싶다.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이재훈 : 그렇게 읽히는가. 아마도 침묵과 고요의 시간들을 얻고 싶어서겠지. 요즘 도통 침묵과 고요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 수다스러워졌고, 주위는 산만하고 시끄러워졌다. 유폐의 공간과 시간이 부족하다. 그런 열망이 시에 드러나지 않았을까. 또한 첫 번째 시집이 하늘 위에서 부르는 노래였다면, 두 번째 시집은 하늘과 땅의 중간쯤에서 부른 노래이지 않을까. 아마 세 번째 시집은 좀 더 땅으로 내려와 부르는 노래가 될 것이다.

신동옥 : 「新林洞」, 「매일 출근하는 폐인」, 「비비디 바비디 부」,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등등 두 번째 시집에서는 일상의 공간에 대한 재해석이 눈에 띈다. 그 공간을 성찰하는 눈이 깊고 차분해졌고. 청년과 장년, 미혼과 기혼의 차이인가? 시인 이재훈에게 생활인 이재훈의 일상은 어떤 주제인가?

이재훈 : 두 번째 시집의 십여 편 정도는 내 일상 공간들이 시에 직접 드러난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내게 새로운 탐구의 대상이다. 스무 살 때 처음, 서울을 와봤다. 물론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 영락교회에서 초청한 강원도 오지마을 어린이탐방단에 뽑혀 서울에 온 적이 있긴 하다. 그때 국회의사당과 KBS를 견학했었는데. 스무 살 때 본 서울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너무나 큰 한강과 책으로만 보던 63빌딩, 아파트, 수많은 차들. 시골에서 서울로 기차를 타고 올라오면 괜히 도시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멀리 서울의 빌딩 꼭대기가 보이기 시작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땐 알싸한 도시의 매연도 좋았으니까.
   이런 서울이 지금은 부정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숨이 막히고, 날 옥죄는 공간으로. 하지만 어쨌든 내가 발 디디고 살아가야 할 공간이지 않나. 아마 서울에서 인간처럼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통과제의일 것이다. 시에서는 몽상하는 산책자로 남고 싶다. 도시 속의 은둔자로 살아가고픈 욕망 때문이다. 욕망의 서울 속에서 겨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러한 도시성찰이라도 있어야 하니까.
   청년이건 장년이건 별 생각이 없다. 결혼을 했으니, 그저 고맙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에 많은 게 담겨 있다. 가장으로서 책임이 있기 때문에 밥벌이를 해야 하고, 그런 일상들이 시속에 스며들지 않았겠나 생각한다.

신동옥 : 두 번째 시집 원고를 읽으면서, 소재나 착상의 범위가 더욱 넓고 풍요로워진 것을 보았다. 호흡과 리듬이 첫 번째 시집보다 더욱, 점점 더 확장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고. 시 속에서 이재훈은 젊음 쪽으로 역진逆進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재훈 : 정신연령이 낮아서일 거다. 그런 평가가 기분은 좋다. 젊음 쪽으로 역진이라니. 하하. 그런데 나이는 먹어가고 있지 않는가. 올해로 사십이다.(웃음) 두 번째 시집은 첫 번째 시집에 비해 좀 더 다양한 시편들을 묶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동옥 : 난 여전히 형이 사십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각설하고) 현재 월간 <현대시> 부주간이다. 국가대표 편집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텐데. 그만큼 성별과 연령, 시력詩歷을 불문하고 유연한 교우관계를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문학 현장에 있었는데, 그간 어떤 변화를 지켜봐 왔나? 시단이 달라진 점과 형 스스로가 달라진 점은 무얼까?

이재훈 : <현대시> 1999년 12월호부터 편집에 이름을 달고 일했다. 발행인 원구식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대학원 공부와 병행하며 일하기 시작했다. 그새 만 십년이 훌쩍 넘었다. <현대시>에 내 청춘과 삼십대를 고스란히 바쳤다. 억울한 건 없다. 좋아서 한 일이니. 나 같은 시인도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좋은 문학지를 만들기 위해 나름 바닥부터 고생했다. <현대시>는 한국 시단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대표적인 시전문지이다. 많은 시인들이 아끼는 잡지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 또한 가장으로서의 내 생활을 걱정해주는 분들이 많아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최근 시단의 변화는 젊은 편집진들로 세대교체가 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앞으로의 시단을 위해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또한 시단은 아직까지 다른 집단에 비해 권위적인 부분이 남아 있다. 자유로울 것 같지만 위계를 중요시한다. 그런데 젊은 세대의 시인들은 이런 부분을 견디지 못한다. 어른들이 뭘 시키거나 가르치려드는 게 싫은 거지. 또 윗세대들은 달라진 젊은 세대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선생 노릇 안하고, 권위적이지 않고 친구 같은 어른들이 젊은 시인들에게 인기가 좋지 않은가.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런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차이는 언제나 있어 왔던 것 같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랫세대들이 윗세대가 되면 또 이해하겠지. 원래 시인은 제각각 하나의 공화국 아닌가. 이형기 선생은 “시인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고 했다.
   유연한 교우관계는 따지고 보면 외롭다는 말과도 같다. 인간관계는 깊이가 중요하지 않나. 아무래도 시전문 월간지에 있다 보니 대부분의 시인들을 한 번씩은 보게 된다. 신동옥과 같은 시인이 곁에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깊고 청명한 고독 속으로 들어가는 길 위에 영혼의 동반자인 문우들이 있다는 게 고맙고 든든하다.
   내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얼까. 잘 모르겠다. 내 꿈은 멋있게 늙는 것이다. 나잇값 못하고 추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많이 봐서 그런지도.

신동옥 : 이재훈이라는 ‘첫정’ 선배가 있어 든든하다.(웃음) 형은 소문난 독서광이기도 한데. ‘이재훈이 꼽은 책 베스트 3’을 부탁한다면.

이재훈 : 소문났다니 무슨 말인가.(동옥 : 내가 소문냈다) 독서광은 신동옥 시인을 따라갈 자가 없는데. 옛날 말이다. 헌책방을 돌며 책을 모을 땐 좀 읽었었지. 지금은 많이 읽지 못한다. 책 베스트는 통과하자.

신동옥 : 마지막으로, 시인 이재훈으로서 생활인 이재훈으로서, 형 스스로에게 하는 당부와 다짐은 무언가? 이 자리에 명문화시켜서 남겨놓자.

이재훈 : 그러지 말자. 명문화라니. 명문화시켜 놓아도 내일이면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 시인으로서, 생활인으로서의 생각들이 자주 바뀐다. 특히 삶의 무게에 어깨가 무거워지는 요즘은 더욱더. 결국 시인과 생활인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것을 알면서도, 두 마리 토끼를 쫓아가야만 하는 운명 아닌가. 다만 내 시에 등장하는 “나는 백 년의 무명을 견딜 것이다” 같은 철없는 폼은 계속 재고 싶다.

신동옥 : 그 다짐 함께 간직하겠다. 오랜 시간 고생 많으셨다.

이재훈 : 고맙다. 오늘이 기억날 것이다.

2002년 이즈음, ‘현대시동인상’ 시상식장이다. 머리는 삭발을 하고 붉은 티셔츠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나는, 커단 화분에 앉아 호프를 먹었다. 대학로 비어할레 3층 화분 위에서 형과 첫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 돌아가고 술집 불이 꺼지고 보도블록에서 새벽 훈김이 올라오는데, 무슨 열병에 들떴는지 근처에 여관을 잡기로 한다. 함기석, 김태형, 김참, 정재학, 김언, 이재훈 형들 틈에 함께였다. 태형 형이 앞장섰다. 모두들 아스팔트 한 가운데로 스크럼을 짜듯 나란히 허청허청 느릿느릿 폴랑 폴랑 걸었다. 그러고는 서울대병원 뒤쪽 여인숙 2~3인실에 들었다. 재훈 형과 재학 형과 나는 카운터 밑으로 주인 몰래 기어들어간다. 염소 똥만한 방에 장정 일곱이 ‘빤쓰’만 덜렁 입고 앉아 할 말은 무에 그리도 많은지. 새벽 어스름 재훈 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가 막 뜨는 좁은 골목길로 재훈 형이 나서자 ‘빤스’만 입은 장정 몇이, 어디 먼 길 떠나는 사람 보내는 모양 술기운에 아득한 손을 오래 흔들고 섰던 거다. 재훈 형은 이 날의 멤버들을 일러 ‘첫정’이라고 부른다.
내가 형을 처음 만나고 함께 밤을 지새운 다음날, 형은 전농동 시립대 후문 ‘관방’에서 또 어디로 집을 옮긴 거다. 그리하여 내게 남은 형의 첫인상은, 해가 뜰 무렵 혼자 떠나는 사람, 무시로 집을 옮기는 사람, 좁은 어깨에 하늘같은 것을 잔뜩 얹은 사람, 그러고도 내처 흔들리며 걷는 사람…… 형이 좋아하는 헤르만 헤세, 헤세가 쓴 ‘크눌프’ 같은 사람. 형이 어디서 어디로 방을 옮기고 서가를 옮기는 동안 내가 함께 한 셈이 된다. 형은 형대로 아우 녀석이 어디서 어디로 옮겨서 빌빌대는 내내 함께 한 셈이 된다. 세포가 자라고 커서 소멸하는 저 알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시공간 감각으로 그렇게 형은 ‘부동의 포에지’를 짊어지고 또 옮기며 사십 세에 이른 건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와 지난 십년 동안의 형을 돌이킨대도 형의 장난기 가득한 빙그레 웃음 한방이면 내사 와그르르 무너지고 마는 것. 그러니 내편에 실재하는 형이라는 품 넓은 웃음―실재의 포에지를 가만 가만 들여다보는 수밖에. 부디 이재훈이라는 그노시스엔 바닥없이 천공이 깊어라. 이재훈이라는 연금술사에게는 촉매 없이 치환이 자재하라. 기도를 더하며 함께 하는 것. 함께 할 수 있어 내내 고맙고 든든한 것.



신동옥 | 시인. 1977년 전남 고흥 출생. 2001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으로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가 있음.


_ <현대시> 2011년 6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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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햇살을!

 

강동호

 

 


진정성 같은 것 따위는 그야말로 초토화 되어버린 오늘날 시인은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타인의 아픔마저 생중계로 전시되고 교환가치로 변환되는 시대에, 스스로 의식의 최전방에 앞장서면서 세계의 고통을 온몸으로 증언했던 시의 악전고투는 여전히 독자의 폐부에 가닿을 수 있을 것인가.
일상을 도륙하는 악무한의 욕망에 투항하는 현대인의 나날들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재훈의 신작시들은 우리로 하여금 또 한 번 그와 같은 난제 앞에 서게 만든다. 이재훈의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2005)를 읽어본 독자라면 존재의 시원始原의 자리에 가닿고자 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도시 공간 속에서 환상적이고도 동화적인 색채의 공간을 펼쳐놓는 장면들을 기억할 것이다. 이 근대의 도시라는 폐색 지대에서, 시인은 “시대가 없는 거리의 시”(「거리를 훔치다」)를 씀으로서 잘못 태어난 자들의 운명을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아름답게 그려내었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는 현실의 납빛 공간과 모든 존재의 기원의 자리에 가닿으려는 언어의 꿈 같은 운동이 기묘하게 동거하는 장면이 연출되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독자가 읽게 된 신작 시편들은 이러한 상상과 현실의 접경지대에서 보다 현실의 편 쪽으로 당겨져 같다는 인상을 준다. 이를테면 그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하달하는 가르침을 성실하게 익히는 우리들의 일상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중얼거릴 수 없다
뱀이 온몸을 감고 있어 숨쉬기 힘들다
언제나 위기가 아닌 적은 없었다
고통 이후를 생각하는 시간들
늘 속도에 의지했으며
숨 쉬는 것들을 혐오하며 살았다

검은 바닷가 모래 위
구름은 낡았고 파도는 헤졌다
내 고통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멀리서 날 지켜보고 있다
낯설지만 또 낯익은 순간
오직 한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이 비릿한 고통의 풍경

사람들은 대체로 첨단을 잘 견딘다
그는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던가
울며 흐느끼고 있었던가
새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물비린내도 없이
파도소리만 가난하게 들렸다

칼로 내 가죽을 벗기려 한다
아, 이 극악한 자본의 성실함
생살을 찢어 슬금슬금 도려내야
도덕적으로 아름다운 이 땅과 하늘
밤이 되면 일하러 간다
삼인칭으로만 불리는 인생 공부의 완성을 위해
― 「숭고한 셀러던트」 전문

직장인(셀러리맨)과 학생(스튜던트)의 합성어인 ‘셀러던트’라는 표현이 적시하는 것처럼 위 시의 시적 화자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더 일을 잘하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이 시대 일상인들의 공회전과 같은 삶을 보여주고 있다. “삼인칭으로만 불리는 인생 공부의 완성”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화자는 한 번도 자신의 것, 삶을 소유해본 이력이 없다. 그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삶에 기생하면서 목숨이라도 연명하기 위해, “속도에 의지”한 채 어디론가 방향 없이 불철주야 이동중일 뿐이다. “첨단을 잘 견”디는 삶이란 이처럼 빠르게 내 일상을 몰아가는 가운데 현재의 고통에 무심해지고 오로지 “고통 이후를 생각하는 시간”에만 주관의 지향성을 집중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현재를 완벽하게 미래에 저당 잡힌 삶 속에서만 겨우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서 오는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덕분에 자본이 선사하는 아픔, “칼로 내 가죽을 벗기”고 “생살을 찢어 슬금슬금 도려내”는 것 같은 느낌이 더 이상 체험되지 않는 것이다. 아픔이 더 이상 아픔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 마취된 감각은, 병들었으나 고통을 어느새 망각해버린 현대인들의 고장 난 통각을 증언한다.
이재훈의 시에서 현실로 육박해 들어오는 실재는 이처럼 마비된 주체의 피로한 감각의 파노라마에서부터 비롯된다. 하여 “새소리”도 “물비린내”도 없는 삶, 그저 “검은 바닷가”의 가난한 파도소리만 울리는 인공적인 풍경만이 전경화 되는 것이다. 시적 화자의 실존을 ‘현실’과 ‘생존’이라는 이름에 결박시키는 나날들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와 같은 생활의 세계로부터 물러서지 못하고 언제나 삶 속으로 귀환 중이다.

햇살이 창가에 와서 눕는다
우리는 저 찬란한 햇살을 의지하지 못한다
강의실은 학생들로 빼곡하다
사육당하는, 사육당하고 싶은 청년들
먼 대양의 꿈도
격정적인 연애의 꿈도 잊었다
따닥따닥 볼펜이 책상을 찧는 소리
얼굴 모두에 수상한 간판이 붙어 있다
강사는 얘기한다
꽃잎 떨어지는 날들을 탐하지 말라
햇살보다 형광등이 우리에겐 더 소중해
― 「꿈꾸는 강의실」 부분

사정이 이러하거니와, “사육당하는, 사육당하고 싶은” 인간들, 그저 “수상한 간판”만을 달고 활보하는 인간들의 틈에서는 설사 무엇이 씌어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책상을 찧는 소리”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펜의 머리를 눌러야만 중심이 나오는/ 저 결박의 세계/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종이와 펜으로 묶는/ 상생의 세계”라는 표현이 냉소적으로 꼬집고 있듯, 위 시의 화자가 처해 있는 세계는 ‘상생의 세계’라는 미명으로 치장된, 그러나 실상은 모든 이들을 숨 막히게 만드는 결박과 구속의 끈으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공간이다. 이 극도의 강박적인 자기 결박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언제나 “햇살보다 형광등”이다. 꿈마저 사육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저 잔인한 공간, 장밋빛 미래를 인질 삼아 인간의 열정을 삭막한 노동으로 전환시키는 저 끝 모르는 욕망의 세계를 휘감는 근본 기분은 지루함과 무기력함이다.
이러한 권태와 무력함은 일상의 나날들을 파르마콘pharmakon으로 바치는, 거짓된 번제燔祭의 풍경으로도 빚어진다. 이를테면 그의 또 다른 시 「번제燔祭」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내 모독을 치유”하고 “타인을 용서”한다는 명분으로 벌어지는 어떤 속물적이고 반윤리적인 장면이다. 때로 우리는 현실을 위한 알리바이로 신성을 도용하는 법 아니겠는가. 그러니 신앙으로 눈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눈물의 산물”인 것이고,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엄숙해지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숫양을 학대하고 태”울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널브러지고, 피가 솟고, 사나운 개들이 짖고, 젊은 남녀들이 허리를 돌리며 춤을 추”는 시적 광경을 보고 어딘지 모르게 머쓱해진다면, 그것은 저 광기어린 이미지들이 바로 우리의 삶 자체를 저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재훈의 냉소적이고, 다소 비극적인 세계 인식이 온전히 검은 페이지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다. 그의 시편들에는 한낱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던 우리의 죽어 있는 삶을 되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햇살이다.

늘 어두웠다. 구석진 곳으로만 들고 났다. 대지가 아닌, 동굴의 습한 곳이 내가 꿈꾸는 곳. 어스레한 어둠 사이로 햇살 한 줄기. 길게 뻗어 내 눈을 찔렀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터질 것 같은 안압眼壓을 느끼다 이내 평온해졌다. 뒷덜미가 서늘해 만져보니 가늘고 날카로운 칼끝. 한 줄기 칼이 머리를 관통했다. 박힌 칼을 뽑아냈다. 뜨겁고, 살 타는 냄새가 나고, 나는 혼절했다.

다시 절벽. 아래엔 검은 물이 흘렀다. 구름은 빠른 속도로 바위를 훔치고 달아났다. 나는 절벽에 달라붙어 기어올랐다. 저 아래의 검은 물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가기 위해. 등허리가 따끔따끔했다. 먼 산에서 몇 줄기 햇살이 긴 협곡을 빠져나와 내 등에 박혔다. 절벽의 난간에 동굴이 있었다. 나는 패배한 것일까.

온몸에 박힌 햇살을 하나씩 뺐다. 고통스러웠으며 황홀했다. 동굴을 나가 하늘을 봤다. 파란 하늘 가득,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얼른 옷을 벗었다. 알몸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많은 햇살이 내 몸에 박혀 반짝반짝 빛을 냈다.

몸은 뜨겁게 허물어져 갔다. 저 아래 검은 물을 향해 햇살 한 줌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밝고 뜨거운 칼이 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텅 빈 계곡을 날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몸이고 싶었다.
― 「햇칼」 전문

“햇살보다는 형광등”(「꿈꾸는 강의실」)에 길들여진 채 그저 풍경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셀러던트의 감관에 순간 “햇살 한 줄기”가 드리워지자 그야말로 극도의 고통이 수반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저 기계에 지나지 않았던 시적 화자의 마비된 의식을 쪼개는 “한 줄기 칼”과 같은 것이다. 햇볕을 쬐는 ‘나’의 의식이 마치 칼로 관통당한 것 같은 환상통으로 허덕이고, 도처에서는 “뜨겁고, 살 타는 냄새”가 진동하면서 저 무료했던 시적 공간이 일순간 삶과 죽음의 경계로 변모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눈치 채야 하는 것은 이 극심한 감각적 고통을 견디는 과정에서 시적 화자가 일대 존재의 전환을 겪게 된다는 사실이다. “온몸에 박힌 햇살”을 하나씩 빼면서 화자는 “고통스러웠으며 황홀”하다고 고백하는데, 저 고통이 황홀을 동반한다는 것은 이 아픔에 시적 화자의 지향성이 개입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이때의 아픔은 그저 즉자적으로 우리에게 내던져 있는 질료적인 수준의 감각이 아니라, 시적 화자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사태를 파악할 수 있게 만드는 어떤 의식의 계기에 가까운 것이다. 마치 플라톤의 동굴 속 수인囚人이 동굴 밖을 나서는 순간 진리의 태양빛 때문에 고통과 경이를 동시에 느꼈던 것처럼, 오로지 형광등 빛에 의거하여 사태를 파악하던 내가 실재의 풍경을 맞이했을 때 눈멂에 가까운 상태에 처하는 것이다. 이 전환은 나의 전부를 바꾸는 과정에 가까워서, 실로 내 온몸을 태우고 살가죽을 벗기는 작업(“얼른 옷을 벗었다”)으로 느껴진다. 그 경험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이 고통에 의존하여 새로운 내가 될 수 있다는 어떤 희망 또한 비로소 스며들기 시작한다(“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몸이고 싶었다”).
3연을 기점으로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떠받들고 있는 정조에 어떤 반전의 계기가 스며드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일견 기쁨으로 가득해 보이는 이러한 어조에서 우리는 더 이상 죽어 있는 고통이 아니라, 신선하게 살아 날뛰는 고통의 전조를 듣게 된다. 고통이 살아 있다고? 더 정확히 말하면 고통을 온전하게 감각하는 와중에 ‘나’의 존재론적 쇄신이 일어나면서, ‘나’의 있음이 분명하게 인지되기에 이른다. 물론 그러한 고통은 시적 화자는 온전한 행복을 선사하지는 못하지만, 나로 하여금 고통의 주인으로 거듭나게 만든다는 점에서, 자아의 살아 있음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게 만든다. 이 비약에 가까운 긍정으로 인해, 시의 화자는 삶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햇살로 고독하자
햇살과 마주치자
햇살 따라 걸어가면
풀꽃을 만나고
햇살이 몸 누이는 곳에 뒤엉키면
과거를 잊고 슬픔을 잊고
햇살 따다 술 빚어
맑고 투명하게 발효되고 싶다

햇살이 새들의 길목을 마련하고
비쩍 마른 소나무의 몸을 어루만지는
사월의 오후
햇살이 만든 평평한 산 위로
빨간 구두의 여인이 앉아 있다
― 「전위적 풍경」 부분

그러므로 시인에게 ‘햇살’은 우리의 인공적인 삶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자연’을 표상하고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감한 감각 기관 자체를 곤두서게 만드는 모든 ‘충격 체험’(벤야민)들의 총칭을 일컫는 것이다. “햇살로 고독”하고 “햇살과 마주치”며, 그 햇살로 내가 “맑고 투명하게 발효”될 때 비로소 신생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물론 그러한 가능성은 천지가 개벽하는 놀라운 사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일상의 저변에 도사리고 있는 것에 대한 범속한 각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의 눈에 비친 ‘전위적인 풍경’은 햇살이 깃들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적층되어 있는 셈이다. “햇살이 만든 평평한 산 위로/ 빨간 구두의 여인이 않아 있”는 이 기묘하고도 동화적인 풍경 또한 시적 화자의 상상력이 빚어낸, 어떤 환시의 풍경이다. 그의 눈에 이제 세계는 그저 무기력하게 내던져 있는 것이 아니라, 미약한 잠재성을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체의 형상을 지니지 않은 ‘햇살’이 수도 없이 낮게 축적되어 이루어진 “평평한 산”은 실상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감각적 잠재성을 비유하는 이미지가 아니겠는가. 무료한 일상 속에서 어느새 자취를 감춰버린 그와 같은 비가시적인(invisible) 가능성을 감지하고 드러내려는 예민한 시인의 촉수 덕분에 우리의 무딘 일상이 조금이나마 아픔을 되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바라건대 시인이여, 우리에게 조금 더 많은 고통을, 더 많은 햇살을!

_ <현대시> 2011년 6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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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의 나날

어머니
저는 당신 물속에서
가득 충전되어
이 세상에 나왔는데
이곳은 너무 건조하군요

어머니
이제 방전된 제 몸에
스위치를 올리렵니다
딸깍 딸깍

들리세요?
제 몸에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하며
날이 갑니다
참, 많이 아픕니다


나는 밤이 없다고 했다
밤이 없으므로 당신을 한 번도 뉘인적 없다고도 했다
어느 날 백야처럼 쉼없는 날들이라며
당신은 내게 밤을 주셨다
오로지 나의 안락으로 밤은 하나씩 채워졌다
내 청춘이 지던 때
당신은 그때 기적을 보여주셨다

헤진 모자를 쓴 당신
내게 밤이라는 단어를 주셨다
눈물이 흐르는 걸 잘 가릴 수 있게
작은 흐느낌도 잘 들을 수 있게

밥이란다
먹고 사는 일이란다
눈물이란다
이젠 어느 입에도 들어갈 수 없는
숟가락들이 모여 등을 맞대고 있다
한때는 수많은 입을 받아냈던 몸
기(氣)만 남아 반짝 빛난다

생각해보면 차갑고 완고했다.
무엇을 물고 늘어지기 위해 온몸은 잔뜩 긴장돼 있었다.
예민하고 민첩한 이성은 없었다.
타인의 무게에 반항했다.
언젠가는 악물었던 입의 힘을 빼야 한다.
모든 것을 풀어놓고 바닥에 몸을 눕힌 사람들.
그 바닥에는 타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상처의 흔적들만 가득하다.


_ 글. 사진 : 이재훈
_ 장소 : DOP 조형예술연구소(조각가 도일 작업장)

_ 출처 : <시와반시>, 2009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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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와 말줄임의 수사학

 

이재훈
(시인)

 

 

본성 회복을 반증의 어법으로 표출하는 ‘소외의 시인’

소외를 말하는 자에게는 늘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외적 혹은 내적 동인動因의 그물망이 논평의 뒤를 따라다니곤 한다. 가령, 소외의 언어가 거느리고 있는 사회학적 상상력은 늘 자본과 인간의 상하관계 속에서 타진된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오래된 얘기지만, 소외는 결국 물질 획득을 위한 사회적 교류와 유대 속에서 발생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투입한 생산물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가치를 위해 쓰여진다는 것을 안다. 이 객체화 현상(objectification)은 노동하는 인간을 폭력적으로 만든다. 객체화가 주체의 소외를 낳을 때, 시의 언어는 인간 본성에 폭력적으로 가한 권위를 응전의 태도로서 드러낸다. 이것이 소외가 창조를 낳는 순간이다.
그렇기에 소외를 말하는 일련의 언술들은 인간 본성의 회복을 반증의 어법으로 표출한다. 또한 소외의 현상이 발생하는 언어적 파장은 소외 이외의 것들을 생각지 못하게 하는 정서적 자장磁場을 함유含有하고 있다. 그만큼 소외는 절실한 삶을 생각하게 하는 충격적 반응이며, 존재 자체를 무화시킬 수도 있는 강력한 실존의 무기이기도 하다. 다만, 소외의 언어를 바라보고 내면으로 체화하는 과정 속에서 윤리적인 각성으로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한 마디로 말해 조현석은 소외의 시인이다. 그가 구현한 소외의 언어들은 정서적 카오스 상태에서 방금 빠져나와 더운 김을 내며 수런거리고 있다. 수사적 치장을 하지 않은 언어들은 서로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충혈된 눈으로 낯선 말을 중얼거린다. 새벽이슬이 내릴 때까지 사물거리는 감정의 편린들은 너무 큰 무게로 시인에게 연속적으로 떨어져내려, 시인은 끝내 말을 마치지 못하고 또 다른 말을 이어간다. 그의 시편들 대다수에 차지하는 말줄임의 어법은 소외로 얽힌 내적 상황을 증언해주고 있는 방법론이다.
그럼 먼저 소외의 언어를 가지게 된 내면적 상흔과 그 내력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현대사회는 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 관료제를 현대사회의 가장 큰 특징으로 들었다. 즉 합리적 원칙에 의해 조직되는 관료제는 사회의 모든 구조를 원활하게 지탱해나가는 가장 편리한 장치이다. 그러나 이 조직화된 관료제는 개인을 소외시킨다. 굳이 이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문명도시 속에서 개인이 가지는 소외와 고독과 절망은 자본 문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혹독한 정신적 부산물이다.

도시 이방인의 소외와 절망적 인식, 그 외연의 확장

조현석은 혹독함을 이겨내는 힘으로 살아간다. 그 혹독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시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문명인의 운명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억울하다면 인간을 잡아먹는 이 거대한 문명도시를 버리면 그뿐이다. 그의 울분은 문명인이기 이전에 혼돈의 내적 상황을 시로 옮겨 적어야 하는 시인의 운명과도 일부분 결부되어 있다. 조현석은 일찍이 스스로를 ‘불법체류자’라고 지칭하며 도시 속에서 이방인임을 자처해왔다. 또한 1990년대 초 발간한 두 권의 시집을 통해 도시의 현대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을 구체적인 일상의 세목을 통해 표출하였다. 그의 두 번째 시집 <불법, …체류자>는 그러한 시인의 정체성을 ‘서울’이라는 도시 속에서의 삶을 하나의 허구로 인식하는 시적 테마를 통해 표출하였다.
그가 첫 번째 시집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스케치>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 <불법, …체류자>를 통과해 이어져온 도시인의 소외와 절망적 인식은 이번 시집을 통해 더욱 그 외연이 확장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생물학적 나이로 불혹을 넘긴 시인이 이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깨우치면서, 더욱 시인으로서 가지는 본질에 대한 갈망이 큰 실존의 무게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곳저곳,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까지
흩어져 있는, 함부로 뱉은 욕지거리와
근사하게 포장된 칭찬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입술 움찔거린 청탁請託과
떼로 굴러가게 만들었던 밀어密語들이여

화려한 수식어 덕지덕지 늘여 붙이며
공포스러운 백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쩌지 못하고 써내려갔던
마구 갈겨온 단어와 문장들이여

뒤흔들면 한 자도 남김없이 떨어져나갈
비곗덩어리 살점들로
수만의 밤과 낮을 태워도 이젠 쓸모없다

볼펜 쥐어야 할 손에 다시 든
술 한 잔 또 한 잔에 늘어나기만 하는
이 검은 오물들, 냄새나는 말 쓰레기들
― 「지껄이다」 전문

그가 삶 속에서 터득한 것은 지껄임이다. 그 지껄임은 현명한 구실을 하는 방법이 아니라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반성적 도구일 뿐이다. “함부로 뱉은 욕지거리”와 “근사하게 포장된 칭찬들”, “청탁請託”과 “밀어密語들”, “마구 갈겨온 단어와 문장들”은 모두 시인의 내면과 삶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부정적 지껄임의 증거들이다. 시인은 이 “냄새나는 말 쓰레기들”을 태우기 위해 볼펜을 쥐어야 할 손에 ‘술 한 잔’을 든다. 시집 첫머리에 등장하는 이 지껄임에 대한 반성은 시인이 계속해서 시의 언어를 망설이게 만드는 내면적 이유이기도 하다.

줄 세운 바지와 와이셔츠만 입은
한 사내가 담배를 연신 물고
입에서 내뿜는 연기의 꼬리가 잘릴 때마다
용틀임하는 바람의 반대로 뒤틀려 사라지고
덜컹대는 길이 그 끝에 끌려온다
기다리는 버스는 도무지 오지 않는다
시간은 담배를 쥔 손가락에 붙들려 있고
계속 피워대는 담배에 살 없는 볼만 더 패일 뿐
간혹 마른기침 커억, 컥 대고
피 섞인 침을 길바닥에 내뱉는다
버스 정거장 뒤편 대리석 의자에 앉아
신문을 펼쳐들면 끌려온 길이
그리로 꼬깃꼬깃 접혀 들어오고
감옥 같은 오피스텔에서 석방된 사람들은
폐병 걸린 버스에 실려 서울로 나가고
사내가 기다리는 통근버스는 오지 않는다
먼지 쌓인 구두 앞에 필터 끝까지 탄 수북한 꽁초들
해는 어느새 현기증 나는 정수리 위로
또다시 담배를 피워 문 사내의 몸은
신문지 뒤로 길처럼 자꾸 오그라지고
하얀 와이셔츠는 검은 먼지만 들러붙고
아침부터 그림자 길어지는 퇴근 시간까지
곯은 그 사내의 키는 아침보다 작아지고
사내가 앉은 정거장 길 건너로 라이트를 켠 버스들이
쏜살같이 달려간다, 곧 하루가 저물 것이다
통근버스는 언제 오려는지, 사내는 궁금하지 않은 듯
더 넓게 펼쳐진 신문 뒤에서 머리를 내밀거나
애처로운 눈빛도 보여주지 않는다
― 「출근하다」 전문

조현석은 많은 시편에서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적 삶의 모습을 영화를 찍듯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위의 시도 도시의 일상을 살아가는 한 사내의 고독과 소외, 불안을 그리고 있다. 출근하는 모습의 “한 사내”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내의 모습이다. 피로에 찌든 모습의 사내는 결국 일상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범속한 문명인이다.
문명인의 실상은 “계속 피워대는 담배”로 피로를 참으며, “피 섞인 침을 길바닥에 내뱉”는 건강을 지니고 있다. 출근하는 자들은 “감옥 같은 오피스텔”에 갇혀 있다. 버스는 “폐병 걸린” 병든 물건이다. 오지 않는 통근버스도 마찬가지이다. 하루는 곧 저문다. 사내는 통근버스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 즉, 일상으로 다시 매몰될 시간을 벗어나고픈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러설 수 없어… 다가서는 아찔한… 노란 벽
받아들일 수 없어… 긴, 타인에 의한 쉼이라니
지난 이십 몇 년보다 길었던… 오늘… 하루, … 기나긴
회색 손때와 볼펜똥 덕지덕지한 책상 한가운데 덩그라니
던져진 희디흰… 봉투, … 한 일 년쯤, 푹… 쉬라는 말씀
볼썽사나운 불순물처럼 생활 위를 떠다니던 만성…, 피로
언제쯤 푹 쉬어보나 수없이 되뇌이며 쳇바퀴 돌았는데
번개처럼 내려온 강…, 제… 무급휴직

…(중략)…

새벽… 같이, 오래 묵은 습관으로 떠지는
말똥말똥한 눈과 정신…은, 아 어…쩌란 말인가
식은 새벽밥 우겨 넣고 내일도 출근할 거야, 변함없이!
정말 물러날 수 없어… 제일 먼저 사무실 문 열며
출근하는 꿈,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받아들일 수 없어…
지난 이십 몇 년보다 길었던… 오늘… 퇴근하는 하루
― 「아른거리다」 부분

문명사회의 한 개체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직업이 필수적이다. 무직으로 인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는 삶을 더 이상 영위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 특히 우리 사회 중년의 실업은 청년 실업 못지않게 큰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위의 시는 무급휴직으로 불안한 중년의 모습을 신랄하게 담고 있다.
시에서는 중얼거림의 어법을 말줄임의 수사를 통해 표출한다. 끊어지는 말들과 말들 사이에서 불안의 심리적 상태가 더욱 강렬하게 작용되어 느껴진다. 말줄임을 통해 불안한 감정적 편린들이 시 속에 고스란히 모여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출근하다」의 그 사내는 불안한 중년의 삶을 살아가는 이 땅의 평범한 직장인일 것이다. 「아른거리다」는 그러한 평범한 사내가 실직의 과정을 통해 겪는 심리적 불안을 그려내고 있다.
사오정, 오륙도 등의 단어가 이른 나이에 정년을 겪는 중년을 상징하는 신조어가 된 것은 이미 잘 아는 사실이다. 45세에 정년을 하고 56세까지 직장에 다니면 ‘도둑놈’ 소리를 듣는다는 이 말은 지금의 우리 사회가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인정을 받는 한 단면을 반영하고 있다. 위의 시에서도 강제 무급휴직을 당하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소외의 또 다른 원인은 ‘시인으로서 가지는 자의식’

새벽같이 눈이 떠지는 오래된 직장인의 습관을 토로하는 시적 자아의 자의식 속에는 다른 심오한 이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직 정당한 노동을 통해 자기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사실 노동 말고는 먹고 살아가는 재화를 획득할 방법은 없다. 그렇기에 휴직이나 실직은 이 사회 구조에서의 이탈을 의미한다. 사회라는 공동구성체 속에서 이탈된 상황을 의미한다. 이탈된 자가 느끼는 불안과 소외의식은 위의 불안한 심리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실내를 휘젓던 음악마저 죽여 버리면
더욱 커지는 침묵… 웅크렸다가 머리 드는
아니, 고요함을 뛰어넘는 정적
그 무게에 짓눌리기 싫어
30촉짜리 갓등 켜고 앉는다
…(중략)…

남들 출근하는 이 새벽에는
정말이지 갈 곳은 없다는…
생각에… 깊고 깊은 자괴감이 밀려든다
이 우울 어디다 벗어놔야 할까…
사람 붐비는 지하철 역사를 벗어나
지상으로 올라가니
어느새 태양은 머리 위에 있다…
― 「타고 싶다」 부분

시인(시적 자아)은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나날 속에서 침묵을 견뎌야만 한다. 더욱 고독한 내면과 현실로부터의 소외가 현실임을 경험해야 한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고요함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30촉짜리 갓등 켜고 앉는” 일이다. 이번 시에서도 말줄임표와 쉼표들이 반복되면서 혼잣말과 끊지 못하는 언어 사이를 종횡으로 옮겨 다니고 있다. 도시를 살아가는 한 개체의 고독과 우울은 “남들 출근하는 이 새벽”에 “정말이지 갈 곳은 없다는…” 고백을 통해 드러난다. 마지막에 “어느새 태양은 머리 위에 있”는 장면을 통해 한 개인의 소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모든 것은 어제처럼 굴러가는 현실을 반영한다.
출근하는 자도 출근하지 못하는 자도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소외의식이다. 문명사회에서 인간이 자기동일성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이나 세계, 공동체 집단, 사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불안한 상태를 언제든지 느끼는 것이다.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원인과 이유는 문명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겠지만 또 하나의 원인은 시인으로서 가지는 자의식 때문이다.
시인은 출근길처럼 “늘 소화불량”이며 “분주하다”(「뒤틀리다」). 현실은 상황이 어찌되었든 “소화불량은 계속”되는 멈출 수 없는 시간을 제공해준다. 이런 현실 속에서 시인이 맡는 공기는 “비린내가 진하고 역한 도저히 맡을 수 없는 냄새”이다. 시인이 생각하는 현실 또한 “역시 바깥은 치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는 “발을 떼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진한 피비린내”(「덤벼든다」)라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사회에 살아가면서도 종내에는 편입되지 않고 이탈하고 싶은 생각에 휩싸인다. 시인은 한밤내 “세상의 온갖 말”을 듣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뿌리 내리지 못한 공중의 나무들”이 시인이며 “밤이 되어서야” “얼어붙었던 입을 푸는” 나무들 같은 존재이다. 시인이 가진 “해독할 수 없는 지하의 언어들”(「되피우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시인이다.
침묵을 통해 말을 참는 법을 배우지만 긴 침묵은 또 다른 발화의 욕망만을 낳을 뿐이다. 참지 못해 뿜어져 나오는 시인의 발화는 정상적인 문장이 되지 못하고 불편한 문장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방법을 통해 표출된다.

어떻게… 이런 곳에까지
앞뒤가 떠오르지… 않는다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다
천연색 꿈이 꾸어지던… 그날도
검은… 것이… 나를 지배했다
만약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다면
…태양도 검고 …건물도 검고
타들어 가는 피부마저… 검을까
하나밖에 없는… 거울도 검고
거울에 비치는 눈의 흰자위도 온통
검을까… 검은… 슬픔과 고독
검은 비애… 검은 울음은 어떨까
어떻게… 이런 곳에까지
앞뒤가 떠오르지… 않는다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다
숨을 잠시 멈추었던 것뿐인데
머리… 속은 온통 검은 것뿐
검은 과거만… 떠오르고
검은 현실 난데없이 펼쳐지고
돌아갈 수 없는, 아 피할 수 없는
검은 미래만이 여기에서…
― 「검다」 전문

대표적으로 말줄임의 수사를 보여주고 있는 위의 시는 불안하고 절망적인 자아의 심리를 표현한 시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중얼거림은 시적 자아의 분열적이고 황폐화된 정신을 나타내는 것만을 표출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내면의 상흔과 정서를 토로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언어 표출방식이다.
말줄임표 사이에 숨어 있는 행간은 더욱 중요한 시인의 삶의 이력이 될 것이다. 말줄임의 정서가 배태되기까지 구체적 삶의 예증은 시에 나타나지 않는다. 시에는 정서의 드러냄만 보일 뿐이다. 소외가 가져다준 분열적 상황을 극복할 만한 방안이 시 속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외를 극복하고 내면을 치유할 방안을 찾았다면 굳이 시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고통과 우울 계속 진행된다는 암시의 ‘서술형 제목들’

조현석은 이번 시집에서 독특한 시제 짓기의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몇 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로 끝나는 서술형을 시의 제목으로 삼고 있다. 서술의 제목이 시집의 통일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서술형의 제목을 통해 소외를 감싸안는 내면의 고통과 우울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암시이다. 과거에도 진행되었으며 현재에도 앞으로의 미래에도 진행되고 있다는 암시는 시제의 서술형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좀 과장된 해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조현석의 시를 윤리적 해석의 그물망에서 자유롭게 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또한 조현석은 시집의 4부에서 다수의 연시戀詩를 선보이고 있다. 그대에게 보내는 연서 혹은 편지를 날것의 언어를 통해 보여준다. 자칫 4부에 놓인 연시의 시편들이 소외 극복의 방안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연시는 또 다른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적인 아픔과 절망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나 더 보태어지는 것이다. 그가 깨우친 사랑은 이별의 방식을 통해서이다. 즉 기대하지 않는 것, 절망을 일찍 깨우치는 것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대략 짚어보는 것이다.
조현석이 시 속에서 내놓은 소외 극복의 방식을 굳이 말한다면, 그것은 성찰의 방식을 통해서일 것이다. 성찰의 방식은 아주 평범한 일상의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화들짝 놀란다
사방이 겨우 1미터도 안 되는 샤워부스 안
알몸으로 서면 온몸에 닭살이 돋아난다
이제 성수聖水를 맞으며 고백할 시간이다
오늘 안일했지만 무사함에 역시 감사해하며
눈앞을 가리며 사각斜角으로 끊이지 않고
쏟아지는 차디찬 물은 이미 낡은 축복이다
차고 넘치기에, 혹여 분에 넘친 저주일지도 모른다
정수리 끝에 덕지덕지 묻혀온 반나절 동안의 비굴과
머리카락에 껌처럼 매달린, 나머지 반나절의 위선과
조금 살찐 목살에 들러붙은 구역질나던 욕지거리와
토실한 견장뼈 위에 내려앉은 능청스러움 따위가
거품에 스며들어 부풀어 오르다가 하수구로 쓸려갈 것이다
비릿한 장마처럼 퍼붓는 세찬 물줄기에도 등 뒤에 달라붙은
물이끼 같은 치욕은 떨어지지 않아 움찔움찔 사타구니가 지린다
가끔 심장이 멈출 만한 회한이 왼쪽 가슴을 짓누르고
부르르 몸을 끓게 하는 상대를 모를 적대감에 놀라기도 하지만
잠깐 생각을 멈추면 다시 속은 냉랭해진다
물방울 뚝뚝 흐르는 유리문 열고 전신거울 앞에 서면
소화되지 못한 욕정에 불룩해진 뱃살이 건드릴수록
더 출렁거리는 욕심이 가슴을 마구 짓눌러온다
비쩍 말라버린 비정상의 두 다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경건하기도 고통스럽기도 한 샤워로 몸은 말끔해지지만
늘 불안한 마음은 씻어지지 않는다
― 「말끔하다」 전문

조현석에게 반성의 시간은 몸을 닦는 행위를 통해 가시화된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성찰을 느끼는 것으로 시작한다. 샤워 부스에서 쏟아지는 물을 ‘성수聖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지금 현실의 삶을 고백하고 싶은 내면적 욕망 때문이다. 차고 넘치는 샤워기의 물은 “이미 낡은 축복”이라 말한다. 그의 몸에 매달린 것은 무엇인가. “비굴”과 “위선”과 “욕지거리”와 “능청스러움 따위”가 몸 구석구석에 붙어 있다. 잘 떨어지지 않는 “물이끼 같은 치욕”도 벗겨낸다. 그럼에도 “소화되지 못한 욕정”은 남아 있다. 더 출렁거리는 욕심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다.
샤워를 통해 몸을 씻어내는 행위는 시인이 터득한 성찰과 고백의 시간을 마련해준다. 그러나 이것으로 문명인이 가지는 지난한 삶에 대한 모든 죄책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거행한 샤워는 “경건하기도 고통스럽기도 한” 사건이다. “몸은 말끔해지지만/ 늘 불안한 마음은 씻어지지 않는” 굴레 속에 또다시 들어가야 하는 운명을 아는 것이다.

비어 있던 속, 기름기 없던 뱃속으로
푹 삶아진 염소가 갈기갈기 찢겨져 들어왔다
술 몇 잔과 더불어 신선한 공기도 몇 됫박
소독되지 않은 단양 하선암 생수도 몇 컵
해체된 염소 몸이 남긴 갖은 부속물을
소주 반 잔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기어
배 속 깊은 곳에 가두었다
밤새 되새김질하는 염소가 운다
울음이 깊을 때마다 몸이 요동쳤다
속 편해지려고 되지도 않은 되새김질을
나도 여러 번, 하고 또 했지만
날카로운 뿔에 받혀 상처가 난 듯 꾸르르륵…
더부룩했다, 밤새 염소가 풀밭이 아닌
융단 같은 위 속에서 이리저리 뛰어놀았다
낮에 몸 부딪는 축구를 해서인지
왼쪽 어깨가 아파 오른쪽으로 돌아눕고
등이 배겨 배를 깔고 돌아누웠던, 아침이
다가오는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그놈이 울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먼동 무렵에
잠 깨어 물안개 피어오른 계곡을 거닐 때
예전에 잠시 그곳에서 뛰놀던 염소가
세차게 방파제를 때리던 태풍 속 파도처럼 요동쳤다
빠르게 달려간 구식 화장실에 엉덩이를 까고 앉아
시끄럽게 괴롭히던 염소를 끄집어냈다
쫘르르 쏴아아아아아… 자신이 놀던 곳으로 염소는
회오리 물살에 묻혀 돌아가려던 것이다
찬바람 불고 찬비 내리는 단양 하선암 계곡
물가에 자리 잡고 앉아 몇몇이 두런거렸던 그날
― 「울다, 염소」 전문

시집의 시에서 염소는 죽은 고깃덩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인의 상상력은 죽은 고깃덩이에도 영혼이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살아 있는 염소와 음식을 구분하지 않는 시적 자아는 결국 시원始原을 갈구하는 영혼을 지닌 자이다. 시인은 염소의 부속물을 뱃속에 ‘가두었다’고 했다. 그것은 자아가 타자인 염소를 장악하는 방법이다. 좀 더 의미를 넓혀 말하면 시인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여 그것을 음식물로 섭생하는 인간의 폭력성을 스스로의 몸을 통해 느끼고 있다.
이러한 육식의 폭력성은 본능적인 것이다. 그러나 본능적인 것은 인간의 이성 속에서는 늘 불편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죄책감은 인간의 몸을 통해 이성으로 전달된다. 위 속에서 염소는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운다. 염소의 원래 자리는 “풀밭”이며 “물안개 피어오른 계곡”이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시인의 뱃속에 들어찬 염소의 살점을 참지 못해 한다. 결국 배변을 통해 염소를 배출해낸다. 이것은 상징적인 장면이다. ‘배변’은 생리적인 현상을 넘어 본성의 지점,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고픈 시인의 지향점과 욕망을 잘 표현해준다.
조현석은 이번 시집을 통해 문명인으로서 살아가는 자아의 내면을 말줄임의 수사를 통해 보여준다. 눈여겨볼 것은 시집의 후반부로 갈수록 자신을 해부하듯 그려내고 있는 소외의 발화가 점차 사물로 전이된다는 점이다. 말하고 있는 자는 여전히 시인이지만, 말하는 자가 그려내는 대상은 ‘안’에서 ‘바깥’으로 옮겨가고 ‘자아’에서 ‘타자’로 이동된다. 자아가 바라보는 풍경 또한 자아의 심적 상태와 세계관으로 삼투되어 발현하고 있다.
“다디단 잠을 청해야 하는 새벽 4시”(「뒤뚱거리다」)의 시간에 깨지 않고 있는 시인의 뒷모습이 시집의 곳곳에 스며 있다. 시인은 이 거대한 도시를 “허옇게 녹아내린 도시”라고, “그날 얘기는 누구나 할 것이다”고 말한다. 하지만 “숨막힌 연무煙霧 속에서/ 녹아들었던 희망”을 슬쩍 얘기하는 시인은 시 때문에 비로소 꿈꿀 수 있는 것이다.

 _ 조현석 시집, <울다, 염소>(한국문연, 2009) 해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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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사랑이 자아내는 서정의 원리



대담 : 정호승, 이재훈

일시 : 2009년 5월 7일
장소 : 스타벅스 남부터미널 2호점

 


 

2009년 5월 7일 오후 6시 40분. 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 역사 안에서 정호승 시인을 기다렸다. 6시 30분도 7시도 아닌 6시 40분에 약속을 잡은 것으로 미루어 시인의 꼼꼼한 성격을 짐작해보기도 했다. 한강변에 홀로 앉아 담배를 피우는 ‘서울의 예수’를 생각하다, 노래방에 가면 자주 부르는 ‘우리가 어느 별에서’를 흥얼거리다, 최근 시집 <포옹>을 뒤적거리다 전화를 받았다. 이미 정호승 시인은 남부터미널에 도착해 대담을 할 장소를 물색하는 중이라고 했다. 터미널을 나가 예술의 전당 골목 쪽으로 내려가 만난 커피숍 <스타벅스>. 시인은 창가에 자리를 잡아 놓고, 이 자리가 어떠냐고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인다.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 앉자 시인은 늦은 햇살에 눈이 부시겠다며 탁자를 옮기며 자리를 살펴봐 주셨다. 이 시대 사랑과 감성의 파수꾼 정호승 시인과 이러저런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니 시작 전부터 설레였던 것 같다. 창가로 흘러드는 늦은 햇살이 참 따사로운 날이었다.


이재훈 : 늘 선생님의 독자로만 남아 있다가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처음 선생님과의 대담을 제의받고 좀 망설이기도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적 유명세 때문인지 문학지의 대담이나 언론 인터뷰만 해도 너무 많은 양이어서 말입니다. 제가 선생님과의 대담 속에서 뭔가 새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선생님의 작품 세계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또한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직접 뵐 기회도 많지 않다고 생각했고요. 이번 대담은 선생님의 문학과 그 주변의 여러 정황들을 소개하는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먼저 선생님의 출생지가 경남 하동으로 되어 있는 곳이 있고, 대구로 명기된 곳도 있습니다. 어느 곳이 맞는 곳인가요? 그리고 유년 시절의 얘기도 좀 들려주십시오.

정호승 : 원래 하동에서 출생했어요. 출생지와 고향은 좀 다르니까요. 하동에서 태어나 평택으로 다섯 살 정도에 이사를 갔어요. 부친이 은행원이었습니다. 평택 중앙초등학교 1학년 1학기까지 다녔어요. 그리고 대구로 이사 와서 대구에서 성장하게 된 거죠. 아버지의 고향이 대구였습니다. 그래서 하동은 태어난 곳이고, 대구는 성장한 곳이죠. 하동에서 출생하여 대구에서 성장이라고 약력에 쓰니, 하동에서는 제가 잘 아는 고향 사람으로 알아버리고 대구에서는 고향사람인 줄 알았더니 아니네,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대구 출생으로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하동에서 출생하여 대구에서 성장했다고 정확하게 쓰려고 합니다.

이재훈 : 대구 계성중학교와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하셨는데요. 당시 전국을 휩쓰는 고교문사였다고 들었습니다. 대구에서의 학창시절은 어떠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정호승 : 계성중학교는 박목월, 김동리의 모교죠. 대륜고등학교는 이상화, 이육사 등의 문인들이 교직에 있었고요. 육사 선생의 경우, 일제강점기 시대 조선의 학생들은 주먹이라고 강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당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했다고 해요. 참 재밌는 얘기죠. 육사 선생의 시에 나타난 기개가 학생들에게는 권투부로 반영이 된 거죠.(웃음)

이재훈 : 당시 학교 분위기가 문학을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겠네요.

정호승 : 계성중학교가 저에게 문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기독교 계통의 학교였는데, 매월 문예현상모집을 했어요. 부활절, 추수감사절 같은 행사 때만 한 것이 아니라 매달 했었죠. 당시 학교에서 문학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문예현상모집에 뽑히면 교장선생님의 도장이 찍힌 상품권을 주었어요. 학교 구내매점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을요. 일종의 현찰과 같은 거죠. 지금 생각하면 그때 선생님들의 발상이 대단했던 거죠. 당시 삼립팥빵, 크림빵이 30원 할 때거든요. 그러니 천 원하면 무지하게 큰돈이었죠. 빵 사가지고 친구들하고 실컷 먹었지요. 그 재미에 매달 현상모집에 글을 냈었어요.(웃음)

이재훈 : 상품권 타는 재미도 있었겠지만, 그 재미에 쓰면서 저절로 문학공부가 됐겠네요.

정호승 : 그렇죠. 공부가 되죠. 저뿐 아니라 당시 문예반 친구들 중에서도 열심히 쓰려는 친구들이 있었고요. 교장선생님께서 주시는 상금을 받으려는 공통의 목적이 있었겠지만요.(웃음) 또한 선생님들께서 어릴 때 문학의 싹을 틔워야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고요. 아동문학 하시는 김성도 선생님이 계셨고요. 아동문학도 하시고 수필도 쓰시고,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나온 <만선일보>라고 있었는데, 그 신문에 소설 당선되셨던 김진태 선생님도 국어 선생님이셨고요. 그분들께서 늘 문학적으로 성장하게끔 지도해 주셨죠. 칭찬도 많이 해주시고.

이재훈 : 당시에는 고교 문예잡지 <학원>이 있었을 때였죠.

정호승 : 예. 저도 <학원>에서 활동했죠. 중학교 때도 학원문학상에 우수작으로 뽑혔고요. 고등학생 때는 1학년 때 우수작, 3학년 때 최우수작이 되었죠. 학원문단이라는 말도 있었고요. 저도 학원문단 세대죠.

이재훈 : 경희대에 문예특기생으로 입학하셨지요. 경희대에서 주최하는 ‘전국고교생현상문예모집’에서 <고교문예의 성찰>이라는 평론으로 당선되셨는데요. 어떻게 고교생의 신분으로 평론을 쓰실 생각을 하셨는지요?

정호승 : 저는 그때 이미 <현대문학>, <문학춘추> 등의 잡지를 헌책방에서 구해 읽었어요. <현대문학>이 대표적인 잡지였고요. 부모님께서 주시는 용돈을 모아 헌책방에서 과월호를 구입해 다 읽었죠. 잡지에 실린 소설을 읽으면 굉장히 재밌었어요. 어른들의 세계를 알 수 있었으니까요. 평론은 처음엔 잘 모르죠. 그러나 자꾸 읽다 보니까 아, 평론이라는 게 이런 걸 쓰는 거구나 하고 이해하게 된 거죠. 평론은 작품론을 쓰거나 작가론을 쓰거나 둘 중 하나를 이러한 방식의 글로 쓰는 거구나 하고 이해했죠.
제가 고3때 계기가 있었어요. 경희대 문예장학생이 되기 위해서는 경희대 백일장에 장원이 되거나 차하, 차상이 되어야 했어요. 저는 그때 참방이 되었어요. 1967년 9월 28일 경희대에서 백일장이 있었는데요. 참방은 문예장학생으로 입학이 안 돼요. 그래서 저는 입시에 떨어진 기분으로 밤기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왔죠. 속으로 생각했죠. 내가 서울에서 문예장학생으로 다녀야 되는데. 부모님께서 대학 등록금을 대주실 형편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했었죠. 그런데 11월에 ‘전국고교생 문예현상 모집’이 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다시 원고를 보내 도전하자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런데 제 생각에 또 시를 보내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조병화 선생님께서 심사를 하셨는데, 심사평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정군의 시는 상위권으로 입상시키자니 그렇고, 떨어뜨리자니 좀 그렇고 그래서 참방을 준다고 하셨거든요. 그때 알았죠. 내 작품이 문제가 아니고 심사 선생님과 어떤 부분에서 시를 생각하는 영역이 맞지 않는구나 라고요. 그래서 평론을 쓴 거죠. 평론을 할 때 작가론은 무리이고, 작품론을 쓰자고 생각했어요. 당시 고교생 중에는 시집을 낸 친구도 있었고, 전국백일장에서 당선된 작품들이 있었잖아요. 자연스럽게 그 작품들을 다 모아 놓았었고요. ‘고교문예’라는 말은 제가 만들었고, ‘성찰’이라는 말은 평론에 흔히 등장하는 제목이잖아요. 부제는 ‘고교시를 중심으로’로 했죠. 김우종 선생님께서 심사를 하셨는데, 평론 당선작은 처음 나왔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때 제가 쓴 평론이 고등학생이 쓴 게 아닐 거라는 의심도 받았어요. 그런데 그 원고를 보면 한자를 자꾸 틀리게 쓰니까, 이게 고등학생이 쓴 게 맞다고 한 거죠.(웃음)

이재훈 : 당시 평론에서 평을 했거나, 지금 활동하시는 문인들 중에 생각나는 고교문사들이 있나요?

정호승 : 그 원고가 아직 제게 있어요.(웃음) 음… 당시에 이시영, 송기원 씨 등이 같은 학년이었고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전국적인 고교문사였죠.

이재훈 : 대학시절은 어떠셨나요?

정호승 : 맨날 시 썼죠 뭐.(웃음) 문예특기생 총장 장학금이 1년간이었어요. 그래서 입학한 지 1년 안에 문단에 등단을 해야 장학생이 유지되었는데요. 그렇지 못하면 등록금을 내야 했죠. 시를 열심히 쓴다고만 다 되는 건 아닌데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미팅도 한번 못해 보고, 도서관에서 시를 썼어요.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야 하니까요. 제가 68학번인데 69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는데 떨어졌죠. 그래서 등록금 마련을 못해 학교를 휴학하고 경주 외할머니댁에 가서 토함산 자락의 오덕암이라는 암자에서 일 년 내내 읽고 쓰고 했어요. 고시공부하듯이.(웃음) 지금 생각하면 좋은 시절이었죠.
그 다음해 70년도에도 신춘문예에 떨어졌어요. 복학을 할 수도 없고 해서 군대를 갔죠. 군에서도 신춘문예를 계속 투고했죠. 일단은 성공했어요. 1972년 <한국일보>에서 동시가 당선되고, 그 다음해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로 당선되었죠. 1972년 12월 24일 우편배달부가 ‘축 당선 연락바람 대한일보 문화부’라고 적힌 전보를 주었어요. 그 전보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행히 복학해서 총장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전국 대학에서 문예장학생 제도가 있던 곳이 경희대밖에 없었어요.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제도에 의해서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시를 더 열심히 쓸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죠.

이재훈 :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로 당선되었고,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로 당선되셨습니다. 1982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기도 하셨는데요. 시를 쓰시다가 소설로 등단하신 어떤 이유가 있으신지요. 또 등단 이후 소설 작업은 크게 에너지를 쏟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정호승 : 중학교 2학년 때 학원문학상에 산문이 우수작이 되었던 적이 있어요. <흙의 심정>이라는 산문인데 제일 처음 썼던 것은 산문이었어요. 그런데 그 이후 중학교 내내 시를 썼고, 고등학교 때도 선생님부터 시작해 주위에 전부 시 쓰는 사람들만 있었죠. 그렇지만 그 이후 산문에 대한 꿈이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었나 봅니다. 그 꿈을 한번 펼치고 싶었던 거죠. 1982년도 신춘문예에 처음 써본 소설을 <조선일보>에 보냈죠. 당시 황순원, 전광용 선생님께서 심사를 하셨는데요. 황순원 선생님은 제자를 뽑지 않으시는 분이세요. 혹시 심사위원으로 황순원 선생님이면 어떡하나 싶어 제 아들 이름을 필명으로 해서 응모했는데 당선되었습니다.
그렇게 소설을 쓰고 싶다는 갈망으로 시작했는데요. 1982년도가 제가 삼십대 초반이었는데 가정을 꾸리고 직장생활을 할 땐데, 무척 바빴던 시절이었어요. 그때 동아일보 출판국에서 <여성동아> 만들 때였는데요. 일요일도 없이 일만 했어요. 시간이 없으니 도저히 소설은 못쓰겠다 하고, 10년 뒤에나 쓰자고 생각했어요. 그랬더니 어느새 10년이 일 년처럼 지나버리더라구요. 마흔 하나가 되었을 때인데. <월간조선> 만들 때였네요. 그때 직장 그만두고 소설을 쓰자고 생각했어요. 사십대가 굉장히 문학적으로 소중한 시간으로 생각되더라고요.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었어요. 진짜 다른 걸 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게 아니라 소설을 쓰기 위해서 그만두었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소설공부를 하고, 한 오 년 정도의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 뭘 깨달았느냐 하면요. 시간과 경제적인 댓가를 혹독하게 치르면서 말이죠.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 자기의 문학적 기질에 맞는 장르가 있구나, 하는 걸 깨달은 거죠. 나는 역시 시(詩)가 내게 맞는구나. 혹독한 댓가를 치르면서 너무 늦게 깨달은 거죠.(웃음) 1990년에 나온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 이후에 97년에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시집을 냈거든요. 그 시집 출간의 간격 사이에 직장도 없이 뭐했느냐 하면요. 소설 공부한다고 보내면서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다시 시를 잡은 거죠. 잘못하다간 시가 날 버리겠더라구요. 어리석었죠. 그 이후로 게으르지 않게 시를 쓰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재훈 : 등단 이후 가장 먼저 활동하신 것은 1976년부터 김명인, 김창완 등과 함께 한 <반시(反詩)> 동인입니다. <반시>는 현재까지 70년대를 대표하는 시동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인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어떠했나요. 그리고 ‘반시’라는 이름의 느낌과 당시 시대상이 유신으로 인해 억압의 시대였습니다. 그런 것과 동인의 모토가 일정 부분, 영향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정호승 : 60년대에 <현대시>, <신춘시> 동인이 있었다면 70년대에는 <반시>가 있었죠. 그때 ‘1973’이라고 해서 그해 시, 소설로 등단한 문인들끼리 모여 친목처럼 시화전도 하고 놀았죠. 소설에는 지금 기억나는 분이 박범신, 이경자, 최학 등이 있었고요. 시 쪽에는 김명인, 김창완, 김승희, 이동순 등이 있었죠. 3년 정도 시화전도 하고 하다가 어느 시점에 시인들끼리만 내보자 해서 <1973>이라고 동인지를 냈어요. <반시>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이후 1973년에 등단하지 않았더라도 뜻에 맞는 시인들이 참여를 했죠. <반시>의 의미는 서문에도 나오는데 일상의 언어로 오늘의 현실을 노래하는 시를 쓰자는 취지였어요. 그 전의 선배 동인들이 너무 난해한 추상의 영역에 머물렀기 때문에 우리는 좀 다르게 가자고 한 거죠. 당시에는 지금과 다르게 문학적으로 서로 외로웠으니까 <반시>가 각자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됐습니다.

이재훈 : 선생님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1979)와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1982)는 선생님의 시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시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벽편지>(1987)와 <별들은 따뜻하다>(1990)는 첫 번째, 두 번째 시집의 시세계를 좀 더 확장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정갈하고 단아한 언어를 통해 민중들의 삶을 노래하고 있고, 네 번째 시집에서는 ‘무덤’, ‘죽음’, ‘시체’ 등의 시어를 통해 개인의 정서적 상황을 공동체의 삶으로 확장시켜 보여주고 있는데요.

정호승 : 물리적으로 제 문학적 삶을 토막낸다면 1990년에 나온 <별들은 따뜻하다>를 경계로 제 문학이 크게 양분됩니다. 저는 유신시절을 이십대로 보낸 세대인데요. 그 전까지는 시대의 눈물을 닦으면서 시를 쓰려고 노력했었고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고 오만한 생각인데. 내 자신의 눈물도 못 닦으면서 민중의 눈물을 어떻게 닦는다고.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웃음)

이재훈 : 선생님의 초기작에서 스스로 독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기쁨’을 줄 수 있을지, 기쁨과 슬픔을 나눌 것인지 자문하고 있습니다. 첫 시집의 제목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기쁨은 슬픔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즉 ‘슬픔’이 ‘기쁨’에게로. 시집에서도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소재와 상황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습니다. “첫 아이를 사산한 여인”이라든지, “불빛 없는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청년”(<슬픔을 위하여>).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갈 길은 멀고 길을 잃”은 ‘맹인부부가수’, “너의 고향은 아가야/아메리카가 아니다”고 말하고 있는 ‘혼혈아’ 등등을 살펴볼 때 더욱 확연히 드러납니다. 제가 중요한 시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슬픔’이라는 관념과 추상성이 어떻게 독자들에게 ‘아름다움’을 줄 수 있는가 입니다. 즉 ‘슬픔’의 아름다움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현실’의 애환이 담보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이라는 관념어가 삶의 지난한 사연과 어울려 빚어내는 어쩔 수 없는 아픔이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주었습니다. 초기작에서 두드러진 현실에 대한 관심, 사회적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반시> 동인에서의 활동이나 당시 사회적 상황 등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선생님께서 현실에 대한 관심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궁금합니다.

정호승 : 그때 시에 대한 제 생각이 어떠했냐하면요. 장미를 예로 든다면, 저 장미가 인간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장미를 보는 거죠. 장미라는 꽃이 주는 존재의 아름다움이 있을텐데 그런 것보다 장미가 인간의 삶에 무엇을 주고 있는가의 관점으로 시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현실의 삶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는 기본적으로 시대와 동떨어질 수 없겠죠. 그 시대를 산 시인이 장미의 존재성만 노래했다고 하더라도, 그 시대를 살았던 장미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고통을 지니고 있는 장미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죠.

이재훈 : 80년대의 민중시인들과 선생님의 시에 나타나는 민중적 맥락과는 조금 다른 지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되는데요. 민중을 다루고 있더라도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천착보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천착이 강하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정호승 : 그 생각에 긍정을 하고요. 또 어떤 생각이 드는데요. 시라는 장미가 인간이라는 삶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의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러나 결국 시의 본질은 있거든요. 장미는 꽃이라는 본질이 있는 거니까요. 저는 시의 본질이 뭔지 지금까지 완벽히 아는 건 아니지만 시의 본질은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시의 본질이라는 게 서정의 물기 같은 게 아닐까요. 나무의 물관부에 수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나무가 말라죽잖아요. 시는 나무의 물과 같은 정서의 본질을 지니고 있고요. 밥할 때 쌀을 비유로 든다면. 쌀을 넣고 물을 부어야 밥이 되잖아요. 시도 마찬가지지요. 생쌀을 먹느냐, 물을 부어서 밥을 해서 먹느냐인데요. 나는 생쌀을 먹기보다는 서정의 물을 부어서 밥을 해서 먹어야 배가 부르다고 생각했어요. 밥하는 것도 물과 불에 의해서 하게 되잖아요. 시도 영원성, 영속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질도 변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시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시를 썼기 때문에 제 시가 노동시의 갈래로 묶이지 않고 제 나름의 모습을 지니려고 노력해 온 부분이 있는 거에요.

이재훈 :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시집인 <서울의 예수>를 좋아합니다. 첫 시집보다 훨씬 더 처연한 현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즉 ‘슬픔’에서 ‘고통’으로 나아간다고 해야 할까요. 그 변화의 과정엔 역사적 운명도 있지만 가장 큰 중심이 되는 것은 바로 ‘문명’에 대한 자의식을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현재 우리들에게는 역사적 현실보다 훨씬 가깝게 몸에 와닿기 때문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서울의 예수>는 지금 읽어도 섬뜩합니다. 이후로는 문명에 대한 자의식이 비판과 풍자를 통한 것이 아니라(<우리들 서울의 빵과 사랑>, <서울복음> 등의 작품) 역으로 사랑의 예찬을 통해 표출하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문명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문명 속에서 잃어버린 사랑을 찾는 과정으로 보여집니다. 이렇게 이해를 해도 될런지요?

정호승 : <서울의 예수>는 1982년에 출간한 시집인데요. 문명은 끊임없이 변화되기 마련입니다. 긍정적인 의미이든 부정적인 의미이든 발전하기 마련이에요. 한 가지 예로 제가 어릴 때 전화를 하면서 사람 얼굴을 쳐다보면서 전화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것이 현실화되었잖아요. 제 생각에 미래에는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스카이차 같은 게 나오겠죠. 그러한 새로운 문명에 의해서 새로운 문명의 질서가 생기겠죠. 그렇게 문명화되었다고 해서 우리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것은 아니죠. 인간의 가장 중요한 화두와 본질인 ‘사랑’ 때문에 비인간화 될 수 있는 것이죠. 사랑이 결핍되면 비인간화 됩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결국 인간 삶의 가장 큰 문제와 화두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랑 때문에 고통스럽잖아요. 사랑의 문제를 남녀상열지사로 폄하시키면 안 됩니다. 사랑은 고귀한 인간의 화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에 의해서 태어나고 사랑에 의해 고통받다가 사랑에 의해 죽어가는 게 인간의 삶 아닙니까. 한 인간이 죽어갈 때 사랑이 없으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사랑이 있을 때 인간답게 품위를 잃지 않고 죽어갈 수 있어요. 인간에게 문명의 변화나 발전이 인간을 망치는 게 아니고 사랑의 부재나 결핍이 인간을 훼손시킨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시인들이 아마 이렇게 생각하고 시를 쓸 거예요.

이재훈 : 선생님 시의 방법론에 대해 생각해 볼까 합니다. 선생님의 시는 시적 상징이나 메타포 등을 통한 수사보다는 진술에 의존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생님의 산문 중에 이런 말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배고플 때 밥을 먹지 밥그릇을 먹는 게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밥그릇을 먹고 있다. 시는 밥이지 밥그릇이 아니다. 결국은 인간이라는 밥. 사랑이라는 밥…….” 즉 이미지와 시어가 가진 애매성보다는 직선으로 통하는 진술로 심금을 울리는 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의 상징도 누구나 소통할 수 있는 대중적 상징을 주로 씁니다. 가령, 제가 좋아하는 구절은 이런 부분입니다. “나는 오늘 새벽, 슬픔으로 가는 길을 홀로 걸으며/평등과 화해에 대하여 기도하다가/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슬픔을 위하여>). 이런 부분은 선생님께서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의욕이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호승 : 그런데 시는 본질적으로 은유에요. 은유가 없는 진술은 공허할 수밖에 없고요. 시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은유의 품 안에서 진술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어떤 진술적 시라도 하나의 은유성을 띠고 있는 거죠.

이재훈 : <가두낭송을 위한 시> 연작 등은 첫 시집에서부터 써왔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운율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리듬은 언어의 조탁이나 반복을 통한 것보다는 의미와 의미가 만들어가는 리듬이 강합니다. 실제 낭송을 하며 읽으면 가슴에 팍 와닿거든요. 운율에 대한 관심이 평소에도 있으셨는지요.

정호승 : 지금까지도 그 관심이 있죠. 저는 한국시에서 전통적 서정시인입니다. 한국시의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요. 그 전통 속에 운율이 있습니다. 저도 아마 내재적 운율이 내 가슴속에 전통적 운율성으로 부여받게 되어서 나타나게 된 거겠죠. 시의 본질인 노래성을 인정하고 있고요. 저는 요즘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2009년에 시를 공부하면 지금 현재의 시부터 읽지 말고, 소월이나 만해부터 시작해서 오늘의 시까지 읽어오면 한국시의 맥락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시의 맥락을 죽 살펴보면 운율의 문제가 분명 있습니다.

이재훈 : 덧붙여 선생님의 시는 많은 가수들에 의해 노래로 불리워 왔습니다. 최근 가수 안치환 씨가 <안치환, 정호승을 노래하다>라는 9.5집 음반을 내기도해서 화제가 되었는데요. 선생님의 시를 노래화한 것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어느 별에서>가 애창곡 중의 하나입니다.(웃음)

정호승 : 제 시를 가지고 대중가요로 40여곡 정도 작곡되었는데요. 가장 먼저 노래화된 게 이동원의 <이별노래>에요. 이동원의 <이별노래> 이후에 정지용의 <향수>를 만든 거예요. <향수>의 모태적 발판을 마련해준 게 <이별노래>일 거예요. 그 다음에 김광석이 마지막으로 녹음하고 남긴 노래여서 의미가 있는 <부치지 않은 편지>가 있어요. 백창우 씨가 작곡을 했고요. 그 다음에 안치환 씨와의 우정을 들 수 있어요. 우정의 앨범을 냈으니까. 제 시를 가지고 많이 작곡 했어요. 이번 앨범에 작곡된 노래 중에 <풍경 달다>라는 노래가 있어요. 제가 풍경을 달아본 체험을 가지고 쓴 시에요. 운주사의 와불을 보고 풍경을 달았던 기억으로 쓴 시인데요. 노래를 들으니 아, 참 좋더라구요. 제가 노래를 빨리 외우거나 부르지 못하는데, 금방 외워 불렀어요. 지금도 가끔 아무도 듣지 않을 때 혼자 불러 봅니다.(웃음)

이재훈 : 선생님의 후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제5시집부터 7시집까지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시집의 세계가 사회공동체와 고통과 슬픔에 대한 관심에서 관념의 보편적 정서에 관심을 기울이는 곳으로 이동했다고 해야 할까요. 이전의 세계가 산업화 사회 속에서 잃고 지냈던 우리의 공동체, 주변의 약자들과 소외된 자들, 천천히 뒤돌아봐야 할 작은 생명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으로 시적 시선이 가 닿았습니다. <별들은 따뜻하다> 이후 7년만에 출간한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보면 우리 민족의 공동체적 정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느낄 수 있는 보편적 정서가 드러납니다. 하응백 씨는 “과거의 시가 관념적 체험의 픽션의 소산이었다면, 추상적 민중을 향한 노래였다면, 이번 시는 자신을 대상으로 한 시로 변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변화하게 된 특별한 내적, 외적인 계기가 있었을까요?

정호승 : 그때부터 제가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거죠. 그 전에는 우리 속에 있는 나를 생각했는데요. 뭐라고 얘기하면 좋을까요. 섬을 비유해서 얘기하자면 바다에 떠있는 섬은 개인인데 바다 밑의 섬의 뿌리는 다른 섬과 연결되어 있잖아요. 그 전에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섬만 보지 않고 그 밑에 연결된 다른 것을 보려고 했죠. 개인을 통해 전체를 보려고 한 거죠. 그런데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부터는 섬이라는 개인의 개체를 집중적으로 보려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형상하는 삶이라는 게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가장 가치있는 부분인가. 어떻게 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된 거죠.

이재훈 : 이전 시집에서는 기독교적 메타포나 소재가 언뜻 보였는데,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에서는 오히려 불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인상비평에 불과한데요. 타인과의 부대낌 속에서 얻어지는 시적 감성보다 자신에게 향하는 사색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홀로 오래도록 소요하고 명상하여 나온 시어들이 눈에 띄게 보입니다. 시집의 첫 번째 실린 <새>라는 작품에서 “새가 죽었다/참나무 장작으로/다비를 하고 나자/새의 몸에서도 사리가 나왔다/겨울 가야산에/누덕누덕 눈은 내리는데/사리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이/새떼처럼 몰려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음 시에서도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미안하다>)라고 합니다. <수덕사역>에서는 버림의 자세가 보입니다. “꽃을 버리고 기차를 타다/꽃을 버리고 수덕사역에 내리다//중략/해는 저물고/수덕사로 가는 눈길/발은 없고 발자국만 남아 있다//악!”. <국밥>에서는 윤회의 사상을 엿볼 수 있고요. “사람 사는 세상에 살면서/소머리 국밥을 먹는다/소들이 사는 세상에서는/소들이 사람머리 국밥을 먹는다”. <허허바다>에서도 버림의 미학이 있습니다. “찾아가보니 찾아온 곳 없네/돌아와보니 돌아온 곳 없네/다시 떠나가보니 떠나온 곳 없네”
오랜 공력을 쌓아 이를 수 있는 어떤 지점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혹시 그간 다른 내적인 수련을 한 것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정호승 : 선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나이가 좀 드니까 그런 부분도 있구요.(웃음) 저는 기독교문화 속에서 저의 영혼을 성장시켜왔고 지금도 기독교적인 문화가 저의 양식이고 한데요. 그렇다고 해서 불교적 문화를 도외시하는 건 아니거든요. 아까 운주사 얘기도 나왔는데요. 정말 운주사 와불을 뵙고 내려오는데 삼존불이 있어요. 삼존불 중의 한분이 앉아 있는데 얼마나 감동적인지 그 부처상을 보고 진짜 울었어요. 얼굴이 마모될 만큼 마모되고 모든 걸 비우고 있잖아요. 그때부터 부처님의 불가의 세계, 불교적 세계관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 후로 불교적 이미지를 시에 차용해 온 거죠. 삶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욱 크게 가지려고 노력한 결과로 보아주시면 됩니다.

이재훈 : 선생님께서 작품 속에서 말하는 사랑이 인간에 대한 예의뿐 아니라 모든 만물에게까지 통용된다고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인데요. “강가에 초승달 뜬다/연어떼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나그네 한 사람이 술에 취해/강가에 엎드려 있다/연어 한 마리가 나그네의 가슴에/뜨겁게 산란을 하고/고요히 숨을 거둔다”. 동물이나 사물을 통해서 인간을 성찰하는 부분도 불교적 상상력과 연을 닿는다고 생각하는데요.

정호승 : 사물도 나와 동등한 생명체이자 인격체이죠. 절대자가 보기에는 동물이나 인간이나 생명의 가치는 똑같지 않겠어요. 그런데 인간이 오만하기 때문에 개나 돼지 같은 동물의 가치를 하찮게 보는 거죠. 시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얘기하고 싶어서 그렇게 나온 거겠죠.
인간은 자연적 존재죠. 자연의 기본적인 질서와 똑같은 질서를 지니고 있는 존재가 인간이에요. 제 책상에 사진이 한 장 붙어 있는데요. 토성을 중심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그리고 토성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 있어요. 볼펜똥보다 더 작은 점 하나가 있는데 그게 지구에요.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크며 지구가 얼마나 작은가 알 수 있죠. 그 속에 우리가 사는 거예요.

이재훈 :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제7시집에서부터 잡지 지면에 발표하지 않은 신작시를 시집으로 묶고 계십니다. 그 이후 시집들도 잡지의 미발표 신작들을 상당수 시집을 통해 싣고 발표하고 계시는데요. 문단의 매체나 제도, 혹은 평가에 연연하지 않겠다, 독자들과 직접 만나면 된다는 생각으로 비춰집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호승 : 그런 건 절대 아니고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시를 쓰는 저의 방법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 저는 시를 한꺼번에 몰아서 써요. 일년 이년 삼년 정도 메모를 해요. 메모가 두꺼운 노트 한권을 채울 때까지 메모만 하다가 그 노트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써요. 그러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 몇 개월에서 길게는 일 년씩 쓸 수 있어요. 그래서 그 노트의 메모를 가지고 시를 다 쓸 때까지 가는 거예요. 두 번째는 이런 이유 때문에 시가 가장 많이 생산되어 있을 때는 청탁이 없는 거예요. 시를 못 쓰고 메모만 하고 있을 때는 청탁이 들어오고요.(웃음) 저는 문단에서 특별히 큰 교유가 없고 외톨이에요. 어느 부분에서는 혼자인데 시인은 또 혼자 있는 존재잖아요. 저의 이러한 문단의 비사회성 때문에 제 상황을 잘 모르고 청탁이 이루어지니 잘 맞지 않는 거죠. 시를 한꺼번에 쓰니까요. 그래서 한꺼번에 쓰고 청탁을 기다리다가 청탁이 없으니 그냥 시집을 내는 거죠.(웃음)

이재훈 : 8시집에 가서는 이 시대의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의 아픔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이 선생님 방식의 내적 치유의 과정이 아닌가 생각해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9시집의 <포옹>에서는 ‘우리 시대 사랑의 명상가’라는 말처럼 반성과 응시, 침묵 끝에 들려주는 사랑의 언어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세계를 보여주실 계획으로 시집을 준비하고 계신지요.

정호승 : 앞으로 시를 더 열심히 쓸 생각입니다.(웃음) 제 존재의 여러 가치 중에 시인으로서의 가치가 더욱 중요하게 다가오더라구요. 그러면 우선 시인은 시를 쓰고 있어야 시인이니까 열심히 쓰고 있고요. 앞으로도 쓰게 되겠죠.

이재훈 : 선생님의 말씀 중에 “시를 쓰는 사람보다 시를 읽는 사람들이 더 고통받는 시대다”는 말씀이 더 가슴에 와닿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정호승 : 감사합니다. 오랜 시간 저도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_ <열린시학>, 2009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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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 오늘의 전위 21세기 한국의 시동인

전위를 꿈꾸는 주체들의 동거



이재훈(사회)
김근
김언
신동옥


1. 동인 활동의 현주소
2. 동인들의 문학운동과 전략에 대하여
3. 동인 활동을 통해 어떤 새로움을 줄 수 있는가
4. 현 동인들에 대한 비판적 점검과 동인 활동의 허와 실
5. 동인 활동과 창작과의 관계
6. 2000년대 활동하는 시인들의 일상과 시적 향방
7. 2000년대 동인의 의미와 전망


1. 동인 활동의 현주소

이재훈 : 안녕하세요. 저는 사회를 맡은 이재훈입니다. 이번 좌담은 2000년대 이후 시동인들을 전반적으로 점검하고 이를 통해 21세기 새로운 시적 경향을 진단해보는 자리로 마련하였습니다. 애초의 계획으로는 동인 개개인의 시적 경향을 바탕으로 각 동인이 추구하는 지형도를 그려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런 기획이 여러 차례 있었고, 동인 구성원을 통해 동인의 지향점을 찾는다는 것이 단순한 논리로 귀결되는 것 같아 이번 좌담을 마련하였습니다. 좌담을 통해 좀 더 자유롭고 편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현대시]에서 90년대 초반에 이와 비슷한 동인 좌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현대시] 1992년 5월호) 90년대 시동인을 전반적으로 점검하는 자리였는데, 이제 10년을 훌쩍 넘어 2000년대 시동인을 점검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2000년대 이후 시동인의 위상과 가능성을 점쳐보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제가 현재 시동인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등단 이후 90년대 후반부터 <시원>이라는 동인 활동을 한 경험이 있고, 또 전반적으로 좌담을 이끌어 갈 길잡이로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지금 세 분의 시인들께서 각 동인들을 대표하여 좌담에 참석해주셨습니다. <천몽>의 김언, <불편>의 김근, <인스턴트>의 신동옥 시인 반갑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들 가까운 친구들인데 술자리가 아닌 이렇게 진지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어 새롭네요.(웃음) 먼저 각 동인들의 탄생 배경과 현재의 활동 상황 등을 소개해 주십시오.

김언 : 오늘 좌담에 참석하신 <불편>의 김근 시인이나 <인스턴트>의 신동옥 시인과 달리 저는 <천몽>에 초창기부터 참여해온 시인이 아니라서 동인의 탄생 배경과 변모 과정을 살아 있는 육성으로 들려줄 수가 없어서 아쉽네요. 부득이 작년에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열렸던 <천몽> 동인 페스티벌에 소개된 소책자 내용을 간단히 읽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1998년 고찬규, 권혁웅에게 동인 제의. 이장욱, 이영광이 가세하여 90년대 중후반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기 전 시인들 선별 작업 시작.
1999년 2월, 10여 명의 시인에게 편지 보냄. 첫 모임 강혜미, 고찬규, 권혁웅, 박해람, 배영옥, 손택수, 여정, 이영광, 이장욱, 이찬, 유종인, 진수미 참석. 같은 해 이미자 들어옴.
2000년 김행숙, 정재학 들어옴. 이영광 나감.
2001년 이기성 들어옴.
2005년 김언, 배용제, 이근화, 진은영, 황병승 들어옴.”

이렇게 소개가 되어 있는데요, 당시 소책자에 약력과 시가 들어 있는 시인은 모두 18명입니다. 개중엔 현재 동인 활동이 사실상 전무한 몇 사람도 있지만, 일단 소책자에 소개된 시인을 모두 거론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찬규, 권혁웅, 김언, 김행숙, 박해람, 배영옥, 배용제, 손택수, 여정, 이근화, 이기성, 이미자, 이장욱, 정재학, 진수미, 진은영, 황병승. 여기에 지난해 12월 조연호 시인이 마지막으로 동인에 가입된 상태입니다.
보시다시피 <불편>이나 <인스턴트>에 비해서 인원이 조금 많지요? 많기도 하지만, 동인들 각각의 시 스펙트럼과 활동사항은 그보다 훨씬 더 폭넓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 색깔도 다르고 사는 모양새도 다르고 등단 연수와 나이 또한 멀게는 10년 가까이 차이가 나다 보니 언뜻 하나의 동인이라고 이름 붙이기가 곤란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 어수선함과 다양함이 어쩌면 <천몽>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로 <천몽> 내부에 단일한 문학적 지향성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1999년 동인이 결성될 때부터 견지해온 <천몽>의 독특한 성격이라고 알고 있으며 그 고집은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동인은 분명하지만, 각자의 문학적 지향은 하나의 에꼴로 묶이지 않고 산만한 편입니다. 따라서 동인을 통한 일정한 문학 운동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동인 모임’만이 있을 뿐이지요. 어떤 문학적 구심점이 없이 각자의 시세계를 ‘각개 격파’해가는 시인들의 모임은, 나중에 별도로 설명이 더 있겠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가장 2000년대적인 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몽>이 동인인 순간은 아주 가끔 있습니다. 1년에 서너 번 정도 모이는 모임이나 부득이하게 동인의 정체를 드러내야 하는 순간에만 ‘분명히’ 확인되는 동인, 이게 과연 진정한 동인인가 하고 물을 수도 있지만, 그런 질문이나 힐난조차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습니다. 문학적 지향성이나 구심점 같은 동인의 내부를 비워놓았기에 대외적인 시선에서도 자유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나오지 못했던, 아니 하마터면 나올 뻔했던 동인지 서문에도 들어 있는 말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내부’에 있지 않습니다. 내부에 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세계가 모인 것, 그것이 <천몽>입니다. 어느 지면에서 진수미 동인이 얘기한 것처럼 <천몽>은, 음식에 비유하자면, 비빔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선살로 이루어진 모듬 초밥에 가까운 동인입니다. 으깨지고 비벼지고 섞이는 동인이 아니라 함께 진열되어 있지만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상태, 그 상태가 <천몽>이라는 동인입니다.

김근 : <불편> 동인이 시작된 건 2002년 겨울이었습니다. 동인을 처음 제안한 건 저였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등단 후 몇 년 동안 문학적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그 공백기 이후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하면서 저는 소통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 소통이라는 건 문학적 고민에 대한 소통이면서 문제의식의 공유였죠. 제가 처음 동인을 제안한 건 같은 [문학동네] 출신 이영주 시인이었습니다. 만나서 얘기해보니, 그 역시 저와 생각이 비슷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시단에 팽배한 전통적 서정시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것은 전통적 서정시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기보다는 시단의 일방향성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었죠. 그리고 그 시들이 리얼리즘이나 상업주의로 포장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었습니다.
그 뒤 우리는 가까이 지내던 같은 [문학동네] 출신인 안현미 시인에게 전화했고, 안현미 시인도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셋이서 함께 할 시인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김중일 시인을 추천했고, 이영주 시인이 김민정 시인을 추천했고, 안현미 시인은 장이지 시인을 추천했습니다. 이렇게 여섯이서 출발했습니다. 그 뒤 2003년에 하재연 시인이 동인에 합류하게 되었고, 2004년 김경주 시인이 동인을 함께하게 되면서 여덟 명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여덟 명이 동인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초기에 저와 이영주 시인이 가졌던 문제의식과 소통에 대한 필요성은 모두 공유했습니다.
등단 순으로 보면, 저(1998년 [문학동네])와 김민정(1999년 [문예중앙])이 1990년대 말에 등단했고, 이영주(2000년 [문학동네]), 장이지(2000년 [현대문학]), 안현미(2001년 [문학동네]), 김중일(2002년 [동아일보]), 하재연(2002년 [문학과사회]), 김경주(2003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순입니다.
초기에 모임은 2주에 한 번씩 모여 합평을 했습니다. 서로 작품에 대해 합평을 하며 3년 정도를 보냈고 그 이후로는 한 달에 한 번씩 지금까지 모이고 있습니다. 첫 시집들이 나온 뒤에는 각자의 첫 시집들이 가지고 있는 특장과 단점을 토론하며 이후 작품 활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시집들이 나오면서 또 다른 모임의 정체성을 마련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신동옥 : <인스턴트> 같은 경우에는 강성은, 김안, 박장호, 서대경, 신동옥, 황성규 이렇게 여섯 명입니다. 동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2001년에 제가 먼저 등단하게 되면서였습니다. 함께 수업을 들으며 알고 지내던 박장호, 서대경과 함께하면서 틀이 갖추어졌습니다. 황성규는 학교 후배이고 시에 뜻을 두고 있어 2002년부터 합류했습니다. 초기에는 일없이 만나 학교 얘기나 하고 했어요. 그러면서 인터넷 카페활동이나 부정기적으로 술추렴을 하고……. 선후배 시인들의 격려가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싶네요. 그러다가 김안이 들어오면서 합평을 위주로 하는 본격적인 동인 모임이 꼴을 갖추었습니다. 2001년에 모임을 갖기 시작하여 강성은이 2004년 겨울에 마지막으로 들어와 만 3년 만에 여섯 명이 모두 모였습니다. 모임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많으면 일주일에 한 번, 늦어도 두 달에 한 번, 평균 2~3주에 한 번씩 모임을 가져왔어요. 그러면서 한 명씩 한 명씩 등단을 했습니다. 제가 2001년 겨울에 등단했고, 맨 마지막으로 등단한 강성은 시인이 2005년 가을에 등단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계속 우연이 겹쳐지면서 동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마추어 모임으로 시작했으니, 애초부터도 동인이라는 자각은 없었습니다. 동인 이름도 제가 멋대로 붙인 카페 이름을 그대로 따온 거구요. 2006년 여름, 어떤 잡지의 동인 특집에 인스턴트 동인 여섯 명의 신작을 실으면서부터 동인 이름을 인스턴트라 외부에 알린 셈이 되었습니다. 동인의 이름과 존재를 드러낸 셈이죠. 앞으로도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저희 스스로는 만들어진 경위나 활동도 그렇고…… 평소에 해오던 대로, 거의 무의식적으로 계속 해온 것이죠.

이재훈 : 동인 활동의 현주소를 들었는데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천몽>은 10여 년 가까이 동인 활동을 해왔고, 그 다음에는 <불편>이, 그리고 <인스턴트>가 가장 젊은 동인으로 활동해오고 있습니다. <인스턴트> 같은 경우는 등단 전부터 꾸려져서 등단 후까지 이어지는 약간 다른 탄생 배경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 동인들의 문학운동과 전략에 대하여

이재훈 : 우리나라의 시사에서 동인지의 의미는 남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1919년 <창조>에서부터 시작하여 각 문학연대마다 동인지가 시사에 던지는 새로운 문학적 특성은 그 시대를 대변하였습니다. 동인지는 발표지면이 귀했던 시절, 신인들의 새로운 목소리를 수용하는 발표의 장으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비영리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자본의 시스템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이로 인해 동인은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무대가 된 셈입니다. 이러한 성격이 하나의 문학운동으로 발전해나가기도 했으며 새로운 문학담론을 창출했습니다.
동인지는 결국 기존의 권력적인 문학의 장에 새로운 저항의 기운을 불어 넣는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기존의 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전위의 힘이나 개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점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동인의 정체성 중의 하나가 어떤 기획에 의해 발전한 운동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동인들의 문학 활동이 전략을 가지고 수행해야 의미를 갖는다는 말과도 상통합니다. 지금의 동인과는 좀 다른 지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동인이 가지고 있는 문학운동이나 전략, 혹은 동인들이 추구하는 문학적 지향성 등을 자유롭게 얘기해 주십시오.

신동옥 :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많이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 <인스턴트>의 경우 동인이 만들어진 배경이 여타의 동인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동인이 결성되려면 동인을 만든 핵심 멤버들 사이에 어느 정도 문학적인 경향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저희 동인 중에 모난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는 시인은 없었고, 특별히 작품세계에 변화를 보인 동인도 없었어요.
사전을 찾아보니 동인이라는 말이 이렇게 정의되어 있더군요. “어떤 일에 뜻을 같이하여 모인 사람”. 여기서는 ‘사람’은 단수 일반명사이지만, 동인 활동을 한다고 말할 때 이 말 자체가 복수 개인으로서 개체인 동시에 집단을 뜻하게 됩니다. 때문에 동인은 한 집단을 이루면서도 그 안에서 개개의 독립성이 강조됩니다. 동인 활동의 지향성·방향이라는 말은 이런 정의에서 거꾸로 도출됩니다. 두 번째로는 ‘같은 뜻’ 또는 ‘뜻을 같이 해서 활동을 한다’라는 말입니다. 보통 동인 활동, 동인운동, 시운동이라고 이야기할 때 이런 의미의 지향성이 강조됩니다. 동류를 이루는 시인들이 모여서 무엇인가를 획책한다면 그 지향점은 모호한 대로나마 밝혀야 하겠죠. 저는 질문에 포함된 ‘문학활동, 문학운동, 전략’ 이런 말들이 생소하고 무섭기까지 합니다. ‘너희들만의 전망이 무엇이냐’, ‘너희들이 글을 써나가면서 좌절에 부딪혔을 때, 어떤 비극성을 가지고 스스로의 미래를 견지하느냐’ 하는 것일 텐데요. 글쎄요…… 저희 동인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답했느냐 찾아보니, 이런 구절이 있군요. “<인스턴트>는 그럴듯함에 호소하는 오래된 전통에 대해서 항상 의구심을 품는다.” 동인으로서의 인스턴트는 전략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죠(비겁한가요?). 저희 동인들이 함께 원고지 60매 정도의 아포리즘이랄까, 나름의 시론을 쓴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유독 이런 단어들이 눈에 띕니다. ‘언어, 리듬, 음악, 자아, 운율, 세계, 의식….’ 결국 저희 동인은 한 번도 합의하지는 않았지만, 이 단어들이 지칭하는 바, 시 자체를 동인의 문학적 지향성으로 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 대답은 별다른 변별점이 될 수 없다는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김근 : 선배 동인들과의 차이를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동인지 문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문학사에서 동인운동은 근대문학의 태동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50년대 후반기 동인들의 모더니즘 운동이 있었고, 70년대 80년대 <반시>, <오월시>, <삶의문학>, <시와경제> 등은 문학이 이 땅에서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를 제공했습니다. <시운동>은 80년 문학이 낳은 역효과에 대한 대응으로 보여집니다. 그들 역시 그런 방식으로 80년대에 기여했다고 봅니다. <시힘>은 이른바 민중적 서정시로서 우리 문학에서 무척이나 확고히 자리를 잡은 듯합니다. <21세기 전망>은 90년대 이른바 우리 문학의 변화의 시기에 문학의 한 고민을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동인지 운동은 우리 문학의 이론과 이념을 제공하기도 했고 엄혹한 시대에 권력에 의해 매체가 사라진 자리에 매체를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선배들의 동인지 운동은 우리 문학에서 굉장히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동옥 시인이 이야기한 대로, 동인들의 문학운동이나 전략이라는 것이 과연 2000년대 가장 젊은 동인들에게 합당한 용어인가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지금 활동하고 있는 동인들은 어쩌면 운동과 전략을 하지 않기 위한 동인이지 않을까요? 전시대 동인들의 운동과 전략이라는 것은,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상황이 있었지만, 제도에 반발함으로써 제도에 진입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운동과 전략이란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불편>의 경우는 제도와 권력에 대한 경계심이 처음부터 팽배했습니다. 동인 자체가 제도화되고 권력화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심이나 반성을 공유했던 탓인지 ‘하나의 지향성을 가져야 된다’거나 ‘그 지향성을 이론화하고 실천해야 된다’는 개념은 저희에겐 아예 없었습니다.
<인스턴트>도 2006년에 동인특집을 하면서 동인에 대한 자각을 했다는데, ‘불편’이라는 이름도 나중에 붙여지게 된 것입니다. 동인 이름이 ‘불편’이 된 것은 2004년의 일입니다. 함께 동인 모임을 하고 있는 게 문인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이름이 뭐냐고 묻는 일들이 잦아졌고, 그냥 얼버무리기엔 ‘불편’한 지경까지 와버렸습니다. 게다가 그 즈음 동인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결국 동인지는 출판사 사정에 의해 나오지 못했죠.). ‘불편’이라는 이름은 동인 초기에 안현미가 제안했던 이름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 이름을 발음하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인들끼리 여러 이름의 후보를 들고 얘기해본 결과 ‘불편’이 우리 동인 이미지에 가장 적확하다고 결론이 났죠.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저는 한동안 그 이름이 ‘불편’해서 입 밖에 내는 걸 쑥스러워했습니다.(웃음)
생각해보면 ‘불편’이라는 이름은 조금 사적으로 느껴집니다. 세상에 대해 절망의 태도도 아니고 희망의 태도도 아닌 겨우 불편함을 드러내는 정도이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섣부른 희망이나 절망이 세계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알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 불편함은 문학제도에 대한 불편함이기도 합니다. 문학제도 역시 우리를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에겐 다양성과 동인 각자의 개별성이 중요했습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며 각자의 색깔로 시를 쓰는 동인들은 각자가 가진 시적 문제의식의 아주 조금씩의 교집합만을 동인에 두었고, 그 교집합을 통해 동인 안에서 소통하고 있었던 것이죠. 사실 동인으로 뭘 해보겠다는 의지는 전혀 없었습니다. 혹자는 그게 무슨 동인이냐고 반문했었고, 젊은 동인들이 점점 취미집단화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평론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선언이 없습니다. 다만 불편해할 뿐이죠.

김언 : [현대시]로부터 질문지를 받고 나서 동인들끼리 따로 모여서 의논하지는 못하고, 천몽 카페 게시판에 올려놓은 후 댓글을 다는 식으로 의견을 모았더랬습니다. 대체적인 의견은 앞서 동인 활동 상황을 얘기하면서 말씀드렸고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동인 한 분이 전화상으로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문예사조로서의 문학운동 시대는 끝난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듣고 전적으로 공감하고 동의했습니다. 동인을 통한 혹은 유파를 통한 거시적인 문학운동은, 영원히는 아닐지라도 한동안은 끝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앞의 두 동인도 마찬가지지만, 동인이라고 해서 하나의 에꼴로 묶는 것 자체가 시대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사실, <천몽>을 포함하여 2000년대 동인을 이루는 시인들 대부분이 거대담론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성장기를 보낸 시인들입니다. 혹은 아예 거대담론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시를 시작한 시인들입니다. 그들에게 거대담론은 이미 과거이거나, 절실하지 않은 남의 세계입니다. 이들에게 거대담론 혹은 일정한 방향을 지닌 담론과 시를 이어서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어색합니다.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말인데, 그런 점에서 동인의 탄생과 그 모임의 성격도 과거의 동인들과 달리 조금 더 느슨하고 조금 더 개인적이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천몽> 역시 시작할 때부터 그 점을 분명히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천몽>에는 문학적인 합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시에 대한, 문학에 대한 <천몽>의 유일한 합의점은 ‘합의하지 않는 데 있다’ 이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스무 명 가까이 모여서 동인을 하는데 얼마나 그 세계가 넓겠습니까? 넓고 다양한 만큼 동인 각자의 미학적인 새로움을 찾아가는 것이 <천몽>의 특성이면서 또한 시대적인 요청이 아닐까 싶네요. 각자의 문학적 대안은 존재할 수 있지만, 일정한 합의를 끌어내지 못해 고민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2000년대 시동인들은 내면적으로 이미 문학에 대해서 집단적인 ‘방향성을 가지자, 경향성을 가지자’란 구호를 폐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젊은 시인들에게 일정한 문학 운동이 부재한 것을 아쉬워하는 얘기가 들립니다. 운동이 없는 것 자체가 젊은 시인들에게 더 적합한 옷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분들의 우려이겠지요.
일부 비평가들의 경우 젊은 시인들의 시세계를 동인이 아니더라도 굳이 일정한 유파로 묶어서 파악하려고 합니다. 하나로 묶이지 않는 시인들을 하나로 묶어내려니 자꾸 오류가 생길 수밖에요. 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인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서로 다른 속성으로 뭉친 시인들을 하나의 노선이나 경향으로 파악하려면 아마도 판판이 실패할 것입니다.
2~3년간 시단을 뜨겁게 달구었던 미래파 담론도 그런 실패 사례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 명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든 간에 유파로 묶어서 파악하려고 하니 들어맞지 않는 것이고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만 가열되었던 셈이지요. 일부 언론과 비평가들이 미래파를 마치 하나의 유파처럼 묶고 나서 그들의 공통점으로 든 단어가 ‘난해시’였다는 사실은 이 논쟁이 얼마나 시적으로 허약한 토양에서 시작된 논쟁인가를 방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난해시’가 그토록 ‘쉽게’ 하나의 유파를 대변하는 단어가 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여기에 대한 얘기는 또 쓸데없이 길어질 것 같으니 그만두도록 하겠습니다.

3. 동인 활동을 통해 어떤 새로움을 줄 수 있는가

이재훈 : 아마 앞선 질문과 공동선상에 있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이전 세대의 동인 활동을 보면 그 이전 세대와는 다른 새로움을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운동>, <시힘>, <시와경제>의 80년대 시동인이라든지 <21세기 전망>, <슬픈시학>, <오늘의 시> 등의 90년대 시동인들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90년대 시동인을 통해 신서정을 얘기하기도 했고, 키치 세대의 탄생을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시를 통해 새로운 담론을 얘기하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2000년대 동인들의 활동은 어떤 새로움을 줄 수 있을까요? 김언 시인이 이어서 이야기해주시죠.

김언 : 되풀이해서 얘기하지만, 일단 동인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문학적 성취를 거부하는 것이 <천몽>의 분명한 성격입니다. 그리고 동인 내부에서도 자신의 문학적 지향점을 동인 전체의 이름으로 확대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집단적인 문학 운동은 물론이고 문예사조에 육박하는 거시적인 새로움을 노리는 동인들도 저는 없다고 봅니다. 대신 저마다 미시적인 새로움을 찾아서 각자의 시세계를 더 파고들어갈 수 있고 그럴 만한 미학적인 틈이 각자의 시 앞에 분명히 존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시적인 새로움에 자신의 문학인생을 걸고 투신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말도 되지요.
만약 동인 차원에서 새로운 문학 운동을 기획한다면, 단순히 선언뿐만 아니라 동인지가 반드시 필요해집니다. 새로운 문학 운동을 동인들 전체의 시로 일정 부분 증명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은 동인지가 불필요한 시대입니다. 제도권 내부의 시단, 특히 젊은 시인들만 놓고 보자면 분명한 사실이죠. 동인지가 불필요한 이유는, 일단은 제도권 내부의 발표지면이 풍족하기 때문이고, 조금 더 파고들면 시인들 스스로 자기들을 하나로 묶어서 보여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껏 동인지를 내봤자 모래알을 모아놓은 것일 테니까요. 여느 시 전문지의 구성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지요.
한국 근현대 시사詩史에서 ‘동인 문학’은 ‘동인지 문학’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서히 ‘동인 모임’으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 성격의 변화 자체가 어쩌면 2000년대 동인들의 유일한 새로움이 아닐까요? 얼른 눈에 띄는 집단적인 새로움이 아니라, 각자가 다른, 각자가 서로 다르기를 열망하는 2000년대 문학의 지반을 이루는 새로움이 현재 변화해가는 동인들의 성격에 있지 않을까 싶네요.

김근 : 김언 시인이 말한 것처럼 문학적 새로움이라는 것은 결국 각자 추구해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인이라는 하나의 색깔로 묶이기보다는 동인 안에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저희에겐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오히려 동인 각자의 문학적 새로움이 동인의 새로움을 결정짓는다고 할까요?
‘불편’에는 선언이 없다는 말씀은 이미 드렸죠? 선언이 없는 게 선언이죠. 선언은 없지만, 동인 안에서 충분히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 서로 존중되고 소통할 수 있고, 자극 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저희는 중요하게 생각해왔습니다. 문학적 새로움이라는 것도, 그 속에서 각자가 추구해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합평 과정에서 따뜻한 옹호와 생산적 비판은 물론 있었지만, 그것이 동인 이름으로 강요되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동인 각자에게 <불편>의 위상이나 색깔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저희 동인끼리 이미 공유하는 바죠.

신동옥 : 형들의 답과 비슷합니다만, <인스턴트> 역시 비슷한 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답이라는 것이 동인 활동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노출한다 해도요. 사史적으로 <시운동>, <시힘>, <시와경제> 등이 활동한 80년대와 같은 경우에는 동인지시대였고, 동인 활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명백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정치사회적인 여건으로 잡지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점, 발표지면의 부족 자체가 동인 활동을 지탱시할 수 있었다는 점을 먼저 짚을 수 있겠습니다. 동인이 만들어지는 이유도 천차만별입니다. 동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자기 나름의 미적 선언들을 걸고 시작한 경우, 어떤 전문가 집단에서 시를 여기나 집단취미로 표방하고 시작했다가 기성이 된 경우, 가장 절망적인 경우에는 문학적 에꼴을 만들기 위해 시작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앙가주망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시에 이데올로기를 싣고 사회의 부름에 답하려 한 경우도 있지요. 80년대 동인들이 남긴 성과는 극명합니다. 획일화되고 획일화를 지향하는 문학사에, 또 격변의 사회적 상황에 대해 동인 활동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문학적 다양성을 입증했다는 점입니다. 시단도 하나의 사회문화적 공동체이니 말입니다. 90년대 시동인의 경우 80년대 문학에서 종개념으로 후퇴했던 개별적 시적 자아들이 어떻게 표현하고 드러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90년대 동인들이 처음으로 올곧은 ‘개인―개인성’에 눈을 돌립니다. 형들도 90년대 후반에 등단하셨는데, 90년대 후반에 이르면 선배들의 작업을 시단 안팎에서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만개시킨 것 같습니다.
사史적인 연장선에서 2000년대 이르면, 너희들은 어떤 선언을 통해서 동인 활동이란 이름으로 시사에 새로움을 줄 수 있느냐는 물음이 질문 자체로 하나의 답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새로움 자체가 새로움이니, 동인 활동을 통해서 새로움을 줄 수는 없는 상황이 된 거죠. 저희 세 동인에서 이름을 떼고 그냥 A동인, B동인, C동인이라 불러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저는 이 아이러니가 시사에 어떤 안티테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90년대와 연속성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동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반反―동인 활동이라는 점, 즉 복수인칭으로 활동해 나가면서 서로간의 암묵적이고 느슨한 미적인 합의나 연대가 있을 뿐……. 그게 결정적인 차이 같습니다.

이재훈 : 연이어 이야기하면, 저도 좌담을 구성하고 준비하면서 회의적인 생각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이미 이전 동인들과는 태생이나 상황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를 통해 그 ‘다름’을 듣는 기회가 되어서 더욱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의 동인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전과 다른 것을 ‘다르다’고 막연하게 말할 수도 없고, 반대로 역사적인 동인의 맥락이 있기 때문에 그 흐름을 피할 수도 없는 게 사실이죠. 지금까지 각 동인들께서 이전 세대와 다르다는 지점을 짚으면서 지금 현 동인의 정체성을 말해왔습니다. 지금 제기된 정체성은 선언이 없는 동인이나 모임 형식의 동인이 될 텐데요. 이처럼 동인의 정체성을 많이 말해 주시는 것이 그간의 평론가들이나 선배들이 암묵적으로 바라보는 잣대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죠. “쟤들이 모여서 권력화라려고 한다, 에꼴을 만들려고 한다”는 식의 시선과 동시에 “새로운 목소리나 담론을 내야지”란 식의 강요들이죠. 이런 암묵적인 강요들에서 자유롭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현 동인들이 분명 이전 세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4. 현 동인들에 대한 비판적 점검과 동인 활동의 허와 실

이재훈 : 이전 세대의 동인들이 운동의 차원에서 새로운 문학담론의 생산과 세대교체의 역할을 담당했다면 지금의 동인들은 그 역할의 차원이 줄어든 게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굳이 동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필요성이 있는가. 동인의 필요성이 설득력을 잃은 지금의 시점에서 동인 활동은 새로운 섹트주의나 에꼴을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동인 참여자의 개개인도 자신이 활동하는 동인이 친목단체의 역할이라며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시인도 있습니다. 지금의 동인이 한국 시단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나 의미, 기대 등등이 궁금하고요.
하나의 예를 들자면, 2002년 [현대시]에서 동인특집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시원>과 <천몽> 동인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시인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설문조사를 보면 대부분이 동인이라는 집단의 이름이 아닌, 개개인의 이름으로 호명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합니다. 새천년 벽두부터 이전 세대와 다른 이와 같은 생각 때문에 동인 활동의 위축이라든가 하는 용어가 나오기도 한 것이죠. 그럼에도 동인 활동을 계속해나가는 것은 어떤 장점이 있기 때문이고, 동시에 단점 또한 있을 것입니다. 동인 활동을 통해 얻는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죠.

김근 : 과연 그렇다면 동인 활동을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이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요, 전 동인 활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동인을 하는 이유는 이미 문학제도가 너무 공고해 이 문학제도 안에서 소통이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미래파 논쟁을 다 지켜봐서 아시겠지만, 미래파 논쟁은 생산적인 시적 담론을 생산해내지 못한 채 미래파로 거론되는 시인들과 미래파 바깥에 있는 시인들에게 상처만 주고 끝이 났죠. 충분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미래파 논쟁의 한 실패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겠죠. 이처럼 제도 안에서 소통할 수 없다면 동인이라는 모임 안에서 각자의 문학적 지점들을 존중하면서 우리끼리라도 소통하겠다는 것이 저희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런 소통의 성과들이 개개인의 작품으로 드러나게 하겠다는 것이죠. 
단점에 대해서 물어보셨는데, 저희들이 상처받은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불편>이 세간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건 2005년 발발한 미래파 논쟁 이후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과정에서 ‘불편⊂미래파’라는 수식이 암암리에 유포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다. 그러나 <불편>에는, 평론가에 따라 물론 달라지겠지만, 이른바 미래파에 이름이 들어가는 시인도 있고 들어가지 않는 시인도 있습니다. 미래파를 가지고 <불편>을 설명하기에는 폭이 너무 협소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내부에서 상처를 받았죠. 그 덕에 유명해진 시인들도 있긴 한데, 개인적으로 구설에 휘말리거나 상처를 받기도 했죠.
그리고 당시 많은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나왔습니다. 저희 동인들의 첫 시집들도 대부분 그때 출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문단의 태도는 “이 젊은 시인들이 어디서 나왔지?”였습니다. 사실 90년대 후반에 등단해서 계속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소위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주요잡지들이 이 시인들을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죠. 그전까지 거들떠도 보지 않다가 시집이 쏟아져 나오자 마치 새로운 종족이 탄생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러면서 젊은 시인들을 서열화를 하며 분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제는 젊은 시인들 각자의 시세계가 지닌 색깔들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미래파’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색깔인 것처럼 다뤄졌다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젊은 시인들이 유행을 따른다는 비판도 심심찮게 등장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불편>은 우리가 미래파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편>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져서 언급되는 것에 대해 거부합니다. 미래파 이후 저희 동인 이름이 자주 언급되면서 이러저러한 잡지에서 동인 특집을 하자고 제안이 들어왔었는데, 거의 거절했습니다. 몇몇 잡지나 매체에 동인 특집이 게재되었습니다만, 의도와는 달리 <불편>에겐 오히려 상처로 되돌아온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재훈 시인이 앞서 <천몽>과 <시원> 동인의 설문조사에 대해 말했듯 <불편>의 시인들도 동인의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자기만의 작품세계로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바랄 뿐입니다. 동인들이 첫 시집들을 다 냈는데, 시집 약력에 동인 이름을 밝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죠. 저와 김경주 시인이 두 번째 시집을 내면서 약력에 처음 <불편>이라는 이름을 넣었습니다.

김언 : 밝히지 않았다고 다른 동인들이 기분 나빠하지도 않죠?

김근 : 예.

신동옥 : 저희는 안 밝히면 탈퇴해야 해요. 사람도 별로 없잖아요.(웃음)

김근 : 어쨌든 이런 ‘동인’으로 묶이며 받은 상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입니다.

신동옥 : 김근 형이 앞서 개별적인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상황이 젊은 동인들의 시운동을 더 필요로 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잡지나 작품집을 보면 면식도 없고 개인적인 정보도 없는데 꼼꼼하게 읽게 되고, 읽고 나면 은연중에 이런 문제의식으로 작업들을 하고 있구나 하는 공통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점은 이전 세대와는 다른, 변화의 일례입니다.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새로운 징후나 새로운 감성이 나오면 그것을 이론화시키려는 작업들이 뒤따랐고, 시적 합의를 거쳐 정리되었어요. 그러한 작업이 서로의 교조적 입장 차이를 재확인하는 데 그친 것이 금방 말씀하신 미래파 논쟁입니다.(물론 비록 한바탕 소동으로 끝났을지라도 미래파 논쟁은 작금의 시단에 분명 살을 찌운 부분이 있어요) 결과적으로, 어떤 새로운 징후들이 나타났을 때 이를 이론으로 봉합하기가 버거워진 상황, 감성적 공감대를 끌어내는 데에도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죠.
동인 활동은 우리가 전유할 수 없는 개개인의 사적 감성과 징후를 어느 정도 소통하게 만드는 계기 중 하나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동인’이라는 개념은 초기 낭만주의 때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개별자들이 한꺼번에 묶이면서 개체―집단으로 명명되는데, 이들이 살롱 같은 데서 교우하고 서로 쓸거리를 나누고 때로는 마음이 맞으면 함께 쓰기도 하던 초기 낭만주의의 느슨한 집단의식(esprit de corps)을 가진 문학적인 담지자들의 모임이 바로 동인입니다. 백 년이 훨씬 지난 지금 저희들이 하고 있는 활동은 순수한 의미로 이런 의미의 동인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현재와 같은 동인 활동으로 다시 ‘우리’라는 개념을 재정리할 수 있는 활력을 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소박한……. 왜냐하면 지금의 시인들은 유파를 떠나 개별자이며 복수인칭으로 존재하니까요, 안도 없고 밖도 없는 시인 사회에서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들쭉날쭉 견강부회하며 함께―각자 쓰면 종국에 서로 지친다는 단점이 있어요. 어떤 선배님이 제가 동인 활동을 한다니까 말리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시더군요. “나는 내가 피우는 담배와도, 내 자신과도 동인을 못하는데 너희는 여섯이서 몰려다니는구나.”(웃음)

김언 :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저는 문단 체제와 문학 동인의 역학 관계에 대해서 몇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이제까지 한국 문단에서 문학 동인이 융성하던 시기는, 달리 말하면 동인지 문학 운동이 왕성하던 시기는 역으로 한국 문단이 곤경에 처하거나 뿌리가 약했을 때입니다. 즉 문학의 제도화가 정착되지 않았거나 흔들릴 때 동인지 문학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1920년대 근대문학 초창기, 해방 후에서 한국전쟁 직후의 혼란기, 그리고 1980년대 신군부에 의한 언론 통폐합으로 영향력 있는 잡지가 폐간되던 시기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문학의 제도화가 과거 어느 때보다 공고해진 시기입니다. 동인지 문학은 제도권 문학이 약해졌을 때 활성화되는데, 제도권 문학이 강성해진 지금은 동인지 문학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의 필요성조차 절실하지 않지요. 제도권 내부에서의 경쟁, 혹은 제도권 내부로 더 깊숙이 진입하고자 하는 경쟁만 남고, 제도권 자체를 대신할 만한 문학 운동이 힘을 쓸 여력도 필요성도 없어진 시기인 셈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문학 동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얼마나 될까 그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상 할 일이 없죠.
특히 시단의 상황만 놓고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시단의 경우 제도권의 정점에 위치하면서 제도권을 이끌어가는 쌍두마차를 지적할 수 있는데, 하나는 비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입니다. 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등단이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집의 출간입니다. 그런데 자비 출간인 경우를 제외하고 시집을 내는 결정권을 누가 쥐고 있습니까? 바로 메이저 잡지의 편집위원들입니다. 이 편집위원들의 대다수가 비평가이고 동시에 대학교수입니다. 대학교수이면서 비평가인 그들이 호명해줘야 시집을 낼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인이 갑이 아니라 을의 관계에 있다는 말이며, 오히려 을이 되기 위하여 애를 써야 된다는 뜻도 내포합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영광스러운 을이 되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습니까? 외롭게 자비 출간하는 갑이 아니라 누군가 호명해주어 시집을 내게 되는 행복한 을이 되기 위해서 말이죠.
제도권의 정점에 비평가와 대학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 시인들조차 제도권 내부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들 대부분이 대학을 나왔고, 국문과나 문창과를 다녔고, 일부는 석박사 학위까지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비평까지 겸하고 있습니다. 즉 호명을 하는 사람이나 호명을 받는 사람이나 모두 제도권 내부에 있다는 것이죠. 현재의 시인들에게서 대학이나 비평가의 관여를 제외한 흔적을 찾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며, 그들에게 제도권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라는 주문이 불가능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내부에 있으며 내부를 떠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대학이 문학을 점령해버렸고 비평가가 시인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마당에 시인들끼리 모여서 새로운 문학 운동을 기획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그런 기획을 원하는 시인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의문입니다. 그럼에도 시인들은 끊임없이 모입니다. 사소하게는 술자리를 통해서 다르게는 어떤 계기를 갖기 위해서 모임을 만들어내는데, 그중 하나가 동인이라는 형태일 겁니다.
제도적으로 무력한 시인들이 무력하게 모여서 무엇을 모의해야 할까요? 무슨 얘기를 하고 무슨 합의를 끌어내야 할까요? 그것은 합의도 아니고 기획도 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모임은 강단 비평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제도권 문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인들의 생각이 토로되는 자리이며, 그 자리에서 흘러나온 이러저러한 얘기 전부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비록 지면으로 발설될 기회가 없더라도 시인들끼리의 소통, 좀 더 정확하게는 뜻이 맞는 시인들끼리의 소통은 수면 아래서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을 겁니다.
가령, 미래파 담론이 시단을 휩쓸고 있을 때 시인들끼리 만나서 하는 이야기는 분명 달랐습니다. 비평에서 시작하여 비평으로 끝난 담론이고 논쟁이지만, 지면 밖의 시인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분열되는 얘기는 그 자체로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그런 얘기들조차 없다면 언론이나 잡지에서 떠들어대는 담론들만 수동적으로,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겠죠. 비록 제도권 내부에 있더라도 제도권의 정점에서 강조하는 것과는 조금씩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작업이 한국 시단의 또 다른 이면을 형성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런 점에서 2000년대 시인들의 ‘동인 모임’은 한국 시단의 전면이 아니라 이면을 움직이는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5. 동인 활동과 창작과의 관계

이재훈 : 이제 조금 편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죠. 문학 동인이 비슷한 문학적 성향이나 지향점을 가지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동인 활동을 통해서 서로 문학 경향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동인 활동의 시작은 보통 시합평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제 경험으로는 동인 초기에는 시합평을 열심히 하지만, 조금 지나면 시들해지죠. 각자의 길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길을 가게 된다고 할까요. 각 동인들은 시합평을 하고 계신지 궁금하고요, 시합평을 통해서 작품창작에 끼치는 영향은 없으신지 듣고 싶습니다. 아니면 시합평이 아닌 다른 활동을 통해 시적 영향력을 받는지도 알고 싶네요.

김언 : 이제 거의 시합평을 할 시기는 지나가지 않았나요? 적어도 <천몽>의 경우엔, 시집 한두 권씩을 낸 다음부터는 각자의 길이 정해진 것 같습니다. 동인 차원에서 시인 각자의 길을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시적으로 일정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던 2000년대 이전의 동인들도 서로의 시를 구속할 명분이 약했는데, 지금처럼 문학적인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합의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누가 뭘 써도 상관할 바가 아니죠. 그럴 필요도 없고요. 오히려 누군가의 시를 내가 못마땅해 하더라도 또 누군가 나의 시를 못마땅해 하더라도, 그 못마땅함까지 껴안고 더 파고 들어가는 것, 각개 격파해 나가는 것이 <천몽>을 포함하여 지금의 시동인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김근 : 모두에 말씀드렸다시피 제게는 작품 활동의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동인 활동을 하면서 굉장히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다시 문단으로 진입할 때 가지고 있던 불확실성이나 작품에 대한 불안감이 동인들의 따뜻한 옹호와 응원 속에서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할까요. 저희는 합평회를 길게 한 편입니다. 3년을 2주에 한 번씩 만나서 계속 합평을 진행해왔으니까요. 나중에는 지쳐서 그만두었지만, 그 과정에서 자극도 받고 새로운 작품을 쓰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불편>의 다른 동인들도 아마 그랬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은 그런 작품 합평은 하지 않지만, 문학적 소통의 장은 열어두고 있습니다.
요즘은 동인 안에서 다른 고민들을 더러 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불편>에는 시와 다른 장르와의 소통에 주력하는 문화적 작업들을 진행해온 시인들이 몇 명 있습니다. 안현미, 이영주, 김경주, 저는 작가회의에서 ‘항구문학의 밤’이라는 행사를 2년여 동안 기획하고 진행해왔습니다. 이 행사는 우리나라 여러 항구들을 찾아가 시인들의 시에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이 결합해 함께 하는 공연이었습니다. 김경주는 ‘추리닝 바람’이라는 문화집단을 이끌며 문학뿐 아니라 희곡이나 문화공연 등 다방면에서 활동중이죠. 저는 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사무국에서 문학나눔큰잔치나 문학나눔콘서트 같은 공연들을 기획하는 작업들을 한 바 있습니다. <불편>은 앞으로 그런 다른 예술장르와의 소통 쪽에 관심을 두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것은 합의된 것은 아닙니다만,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한 공연 이후로 각자가 자극받은 것도 있고, 동인지를 굳이 책이 아닌 DVD로 내는 건 어떻겠느냐 하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으니까요. 굳이 소통을 문학에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다른 장르와의 소통으로 확대시키는 것은 어떨까 하는 고민들을 내부에서 조심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문학의 새로운 자극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신동옥 : 처음에 이 질문을 받고서 저희한테 직접적으로 하는 질문 같았습니다.(웃음)

이재훈 : <인스턴트>는 지금까지 오래도록 합평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동옥 : 지금 여섯 명 외에도 같이 합평회를 갖던 아마추어 분들도 있었는데, 결국 그만두셨죠. 수준 차이가 많이 나서 따라오지 못하니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두신 것이죠. 개인적인 성격에 따라 합평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것 같습니다. 자기가 얻는 게 있으면 하면 되고, 아니면 그만인 것이죠. 저마다 가진 문제의식을 존중하는 것은 무척 힘이 들더군요. 이미 아마추어도 아니고, 작품집을 묶었거나 묶어야 될 상황에서 남의 이야기는 곧이들리지 않죠. 저는 합평무용론자 중 한 명입니다. 모순이죠.(웃음) 굳이 합평이 아니더라도 함께 모여 있는 순간의 에너지를 어떻게 느끼느냐가 관건이니까요.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공연했을 때 저희는 이제껏 합평했던 모습을 시나리오를 짜서 각자의 캐릭터대로 그대로 관객에게 보여줬습니다. 물론 사이에 미안할 정도로 망했지만요.(웃음) 소설동인이 시동인보다 적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는 짧고 직관적이고 감성적이죠. 또 개개인의 표면적인 기질이나 무의식적 기질까지 보여주죠. 그렇기 때문에 동인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저희 동인이 6~7년 동안 합평을 해왔다는 것은 문제가 심각해도 아주 심각합니다.(웃음)

6. 2000년대 활동하는 시인들의 일상과 시적 향방

이재훈 : 우리 젊은 시인들 삶의 주변을 한번 돌아보죠. 동인 활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큰 것 중의 하나가 시인들과의 개인적인 유대라고 생각합니다. 동인을 통해 동시대 시인들의 일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죠. 지금 제가 봤을 때, 젊은 시인들에게 참 힘든 문제가 생활입니다. 물론 이것이야 시인 개개인이 각각 알아서 헤쳐 나가야 될 문제이긴 하지만, 조금 억울한 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전 세대들은 시단에 순교하고 시에 인생을 바치면 당연히 생활이 따라 갔었죠. 지금은 시에 매진하라는 요구만 있을 뿐 그 누구도 생활을 책임져주지는 않습니다. 시인들의 일상 속에서 시가 가장 크지만 이십대를 지나 삼십대로 넘어가면 삶의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정규직을 갖고 있는 시인이 우리 주변에 없기 때문에 다들 결혼도 미루거나 결혼을 했다고 해도 출산을 미루게 됩니다. 아예 결혼 자체를 생각지 않는 시인들도 많죠. 2000년대 활동하는 우리 주변 시인들의 일상은 어떠한지, 그리고 앞으로 젊은 시인들의 시는 어떠한 양상으로 개진될 것인지에 대한 예견을 나름대로 짚어주셨으면 합니다.

김근 : 다 힘들죠. 그런데, 이전의 선배들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작가회의에서 특히 많이 느꼈는데요, 80년대 주로 활동하고 90년대까지 활동했던 저희 선배 세대들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생업이나 벌이에서 자유로운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정 부분 문학이 그들 삶에 도움이 되기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생활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 같은 것들을 포함해서 말이죠. 문학의 위상이 전에 비해서 높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는 저희 세대는 어쨌든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그 일이 문학으로는 당연히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러니, 소위 아르바이트, 교정이나 교열 같은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죠. 몇 년 전에 김경주 시인이 [한국일보]에 인터뷰한 기사에도 나오는 대필이나 심지어 야설 같은 것이라도 써서 먹고 살아야죠. 아무래도 시 쓰기보다는 먹고 사는 일에 치중하게 되는 게 사실입니다. 동료 시인들을 보면 공부해서 학교에 자리 잡는 친구들이 더러 있지만, 그것도 녹록치만은 않죠. 한국작가회의에서 선배님들이 우리 때는 많이 모였는데 너희들은 왜 모이질 않느냐고 말씀하곤 하시는데, 사실은 열심히 모였습니다. 다만 각자 일이 있을 때는 못 왔을 뿐이죠.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냐고 물으면 사실 저희 자신이 치졸하게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거죠.

신동옥 : 그 각자의 일이라는 게 들춰보면 별 일이 아닌데 본인한테는 긴박한 일이죠. 과외랄지, 학원 강의랄지. 본인에게는 생존과 관련된 것이니까요.

김근 : 그렇죠. 올해 들어 문예지개재우수작품지원사업도 없어졌죠.

이재훈 : 젊은 시인들에게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죠.

김근 : 저야 그 기간 동안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한 탓에 거의 수혜를 못 받았죠.(웃음) 문예지게재우수작품지원사업에 대해, 국가가 시인(그리고 소설가들)들 먹고 사는 것까지 책임져야 하느냐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저는 물음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문학에 대한 국가의 일종의 투자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돈을 받기 위해서 시를 맞춰 쓴다는 식의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말들도 있었는데, 매분기 수혜자가 140여 명 되었는데, 그 140여 명이 그걸 받기 위해서 예심위원을 포함한 수십 명의 심사위원의 성향에 맞는 시를 쓴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어쨌든 갈수록 젊은 시인들에게는 어려워지는 시대가 되는 것 같습니다. 문화나 복지 정책에 대해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정부가 들어선 것도 우려스럽기도 하고요. 앞으로 시를 쓰는 것과 먹고 사는 것을 병행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신동옥 : 이 문제에 대해서 가장 근사치에 가까운 보기가 저희 동인입니다.(웃음) 이 시대의 젊은 시인들의 일상, 어떻게 먹고 사는가를 볼 때는 저희 동인들을 보면 되요. 저희 동인은 삼십대 중반에서 삼십대 후반, 다섯 명이 남자고 한 명이 여자입니다. 여섯 명 중에서 직업을 가지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입니다. 나머지는 어떻게 사는지 저희 서로도 잘 모릅니다. 길게는 7~8년을 보내왔는데도 말이죠. 심지어는 동인 활동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 역시, 서로의 생존―돈 벌이에 관련된 부분이에요.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두 달 동안 번역을 해야 한다, 두 달 동안 대필을 해야 한다, 학원 강의를 해야 한다하면 그 동안은 온전한 동인 모임이 불가능해요. 누군가 지방으로 가게 되면 당연히 동인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데, 저희는 한 명이 지방에 내려가 있어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고 했거든요. 동인 활동의 가장 큰 장애가 다른 사람 돈 벌 때에요. 당장 저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웃음) 뭐 도와줄 방법도 없고요.
가장 곤혹스럽고 짜증나는 질문 중 하나가(오랜만에 만난 사이에 가장 편한 질문일 텐데) “요즘 너 어떻게 사니, 뭐 먹고 사니, 일은 잘 돼?”입니다. 할 말이 없죠. 그렇게 물어보는 분께 “예, 요새 집에서 시 잘 쓰고 있습니다. 한 달에 열 편 써요” 하고 대답할 수는 없는 거죠.(웃음) 눈물이 나는 이야기죠. 시집을 한 권, 두 권 가지게 되고 다른 문학적 지향점을 궁구하게 된다면 동인이 와해될 공산이 큽니다. 아무리 안개 속의 모래알 같은 집단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생존이 동인을 해체할 수 있는 아주 큰 요인 중 하나라는 것은 슬픈 현실입니다.(삶에서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지만요) 나이를 더 먹어 언젠가 상상력으로 시를 쓰는 데 물리적인 임계치가 온다면 또는 다른 세계를 지향하게 된다면 곁에 서서 격려를 해줄 수 있겠지만 이 문제는 피할 수 없는, 피해서도 안 되는 현실이죠.

김언 : 두 분 얘기 듣고 있자니 새로운 천민계층이 출현했다는 느낌이 드네요. 괜히 학력만 높고 사회적으론 전혀 쓸모도 없고 대접도 못 받고 있으니 말이죠. 예전에 어느 시인이 ‘시인은 정신적 귀족’이라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이젠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귀족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진 것 같습니다. 시인이라는 이력 옆에 가장 화려하게 붙을 수 있는 사회적 타이틀이 대학교수일 텐데, 그나마도 지금은 너무 드문 사건(!)입니다. 근근이 다른 직장을 다니기만 해도 대단해 보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시 쓴다는 것 자체가 지식자격증이기 때문에 학교 선생님이라도 되었는데, 지금은 학교 선생님 되기도 얼마나 힘들어요.

신동옥 : 그렇다고 저희 세대가 시를 쓰는 깜냥이나 자존감은 전 세대에 뒤지지 않는다고 봐요. 아마 전업시인이 제일 많은 세대일 겁니다.

김언 : 자존감은 높지만, 그걸 표출할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게 안타깝죠. 전업 시인은 말 그대로 그냥 작품만 생산하는 사람일 뿐이죠. 예인藝人일 뿐이지 지식인 대접을 못 받는다는 거죠. 밥벌이가 안 되니까 당연히 결혼하기도 힘들고,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기가 힘들죠. 예전 같으면 자식들이 시인의 피를 이어가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죠. 혈통 자체가 사멸해가는 열등한 혈통이 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국가 보조금에 의존하거나 기껏해야 자기들끼리 밥벌이를 챙겨주면서 연명해가는……. 새로운 천민 계층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거고요.

이재훈 : 새로운 천민계층의 출현이라는 말이 참 아프네요. 아무튼 젊은 시인들이 지금 고학력이 될 수밖에 없는 것도 구조적인 문제가 있죠. 그나마 학위가 자격증이 되니까요. 제도적으로 전업문인들에게 할 일을 마련해주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타장르에서는 중고등학교의 예술강사 파견 등의 사업도 있던데요.

김근 : 문학큐레이터 제도 같은 것들이 지난 정부에서 논의되었던 것 같은데, 유야무야되었죠.

이재훈 : 그런 사업도 아이디어를 내서 활성화가 되면 젊은 문인들도 좀 더 용기를 갖고 문학에 매진할 텐데요.

7. 2000년대 동인의 의미와 전망

이재훈 : 문지문화원 사이에서는 토요일마다 동인들의 특집을 기획하고, 각 동인들의 이름으로 다양한 공연을 창출해 독자들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인스턴트> 이후 이렇다 할 만한 시동인은 없는 것 같은데요. 굳이 동인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도 이유이겠죠. 지면도 더 늘어났고, 젊은 세대일수록 각자 개성이 뚜렷해서 모이는 것 자체가 싫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동인 활동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갔으면 좋은지, 그리고 덧붙여서 더 젊은 후배 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주세요.

김언 : 새로 등장하는 시인들이 동인을 하든 하지 않든 중요한 것은 각자가 ‘외로운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네요. 혼자 있어도 외롭고 모여 있어도 결국에는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이 반드시 찾아올 테니까요. 단수화된 ‘우리’를 거부하는 대신 복수화된 ‘나’를 선택한 대가로 그들은 필연적으로 외로운 공동체로서의 생활을 감내해야 할 겁니다. 거기서 발견하는 각자의 목소리가 각자의 문학이며, 각자의 문학이 제도권 내부로 불편하게 스며들 때 예기치 못한 균열도 발생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은 당대의 문학 제도도 그렇게 부스러지면서 변해갈 거라 믿습니다.
한마디만 더 추가하자면, ‘동인은 동인으로 남고 시인은 시인으로 남는다’는 사실, 이 사실을 현재의 젊은 시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잘 알고 있고 <천몽> 동인들도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앞으로도 최대한 느슨해지기 위하여 모임을 이어갈 것 같습니다. 느슨함의 끝에 와해가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요. 다만, 서로에게 그리고 각자에게 찾아올 문학적 균열을 충실히 지켜볼 따름입니다.

김근 : 후배들의 각자 입장은 다르겠지만 많은 동인을 만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동인들이 다양한 목소리와 색깔로 우리 시를 풍부하게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문학 제도 안에서 목소리를 내고 우리 문학이 그 풍부한 다양성을 껴안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신동옥 : 형들이 좋은 말씀해 주셨는데, 저는 덧붙일 말이 별로 없네요. 언제나 동시대인들은 동시대인들에게 좋은 심판자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한 세기 이상이 지나야 의미가 어렴풋이 드러나게 마련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김언 형이 말한 ‘복수화된’ 나들이 감내하는 외로운 공동체로서 시詩라는 장, 그 장을 따로 함께 살아내는 한 방편으로 동인 활동은 해결책 중 하나입니다. 자신을 책임지고 서로를 신뢰하는 것은 싸움 중에도 큰 싸움이니까요. 외롭고 처절하게 쓰고, 그 길에서 좋은 도반들 만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재훈 : 말씀 감사합니다. 시인축구단처럼 다양한 모임들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반면 “시인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이형기 선생께서 하신 말의 의미도 함께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좌담에 참여해주신 김언, 김근, 신동옥 시인 감사합니다. 술이나 마시러 가죠.

_ <현대시>, 2009년 3월호 게재.

이재훈 |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김근 | 1998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으로 <뱀소년의 외출>,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김언 | 1998년 <시와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숨쉬는 무덤>, <거인>
신동옥 | 2001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으로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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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있는 아침

 

‘남자의 일생’ 부분
- 이재훈 (1972~ )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잦아들고
온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양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음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나는 음지를 좋아하는 편이다. 저녁에도 불끄고 있기를 즐겨 한다. 안경도 색이 들어간 안경을 주로 쓴다. 햇빛 알레르기가 없다고 할 수 없다. 햇빛을 싫어하는 마음도 햇빛 알레르기의 일종이다. 이재훈은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 온 생을 바치는 것을 “남자의 일생”이라고 했다. 혹시 여자는 현실주의, 남자는 이상주의(혹은 낭만주의)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낭만주의는 ‘현실로부터의 도피’라는 욕을 그동안 많이 들었다. ‘현실에 대한 적극적 외면’이라고 말하면 점잖은 표현이 된다. 현실주의도 나무랄 생각은 없다. 현실주의가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고 잠을 재웠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법. 나는 요즘 햇빛이 들라치면 차양을 거두어 올린다. 햇볕을 쬐고 싶어서.
<박찬일 시인>
2008. 11. 6일자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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