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 달린 존재들의 고통


문혜원
(문학평론가)



1. 혼란과 응시, 단절등단작에서 섬세한 감각과 다듬어진 어휘를 보여주었던 이재훈의 신작시는 평면적인 진술에 가까운 형태로 바뀌어 있다. [수선화], [Big Bang]에서 감지되던 개인의 신화적인 공간은 사라지고, 일상 속의 현실적 자아가 직접 얼굴을 내민다. [빌딩나무 숲], [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공복의 새벽에 관하여]에는 문명의 숲에서 살아가는 시인의 피곤과 상실감이 짙게 배어 있다. 관계는 단절되었거나 애초에 맺어져 있지 않다. 그는 잠시 낯선 것들과 함께 하는 관계 속에 놓여보지만(“어둠 속에선 낯선 냄새와/낯선 속삭임이 더 경이로워/아, 백치 곰보라도 함께 노래하는 밤”;[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공복의 새벽에 관하여]), 밤이 지난 후 더욱 허무해진 ‘공복의 새벽’으로 되돌려진다. 그리고 다시 무관계성 속에 홀로 남겨진다. 그것이 나르시소스적인 색깔을 띠고 있는 것은 [수선화]나 마찬가지이지만, 그의 최근의 시는 좀더 건조하고 허무한 세상으로 밀려나온 듯하다.

- 문혜원, <뿔 달린 존재들의 고통>중에서, 현대시 2004년 1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
이재훈의 시 「산책」을 읽고

현대인들의 비극은 고향 상실에 있다. 찌그러지고 가난한 현실적인 고향이 아니라 마음이 돌아가 편히 쉴 고향 말이다. 그러니 외로울 수밖에 없다. 외로운 자는 그림자를 벗삼아 낯선 거리를 걷는다. 레미콘 트럭의 바퀴에 치어 압사하는 햇살. 어부가 되고 싶다는 중얼거림을 졸졸 따라오던 그림자도 압살된다. 그러나 실체가 아닌 것은 생노병사가 없다. 어둠이 오고, 시인의 고독이 마침내 당도하는 닫힌 방문. 자취방 문을 열면 거기 이불이라도 따뜻하게 깔려 있을 것인가.

(배한봉)
Posted by 이재훈이
,
결별의 노래에 대하여


이승하
(시인, 중앙대 교수)



우리는 모두 사회적 동물이다. 60억이 넘는 동물들이 아옹다옹 지지고 볶으며 사는 세상에 던져진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 우리는 중동지방의 연이어지는 테러에 불안해하고 미국의 산불에 상심하지만 내 가족의 안위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아니, 나 자신의 일상적 삶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문학이 ‘일상’의 차원만 다룬다면 가볍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는 풍선 같아지리라.
시 <결별의 노래>에서 말하는 결별이란 이 시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역사적 자아와의 결별을 뜻한다. 그래서 마음이 없는 몸을 질질 끌고 시위대를 지나고 학교를 지나고 걸음을 멈추게 했던 대형전광판을 지나는 것이다. 거대담론들이 죄 무너진 이 시대에 역사적 자아로서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시인은 지금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시인은 역설적인 의미에서 아주 행복하였다. 공격의 대상, 야유의 대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대사회적인 발언을 해본들 그것은 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역사적 자아로서의 역할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런 때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림 속의 화려한 상징’으로 자꾸만 빠지려 하는 시적 자아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다. 오히려 중세시대의 기사들이 행복했던 것이리라. 성배를 찾아 목숨을 건 모험을 하면 되었으니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시적 자아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현상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시인은 해보았던 것이리라. 이 시에서 성배란 절대적인 것, 근원적인 것이다. 그래서 <결별의 노래>는 요즘 시단에서는 아주 드물게 볼 수밖에 없는 형이상학적인 시이다. 근원적인 것을 찾아 나선 시인의 행로가 역정의 길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리려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시안>, 2003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