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이방의 전설을 말하는 내 입술

송 승 환

이재훈의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2005)는 잃어버린 始原의 언어를 회복하고 다시 시원으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는 시인의 내적 고백이다. 그 중에서도 「순례」는 시집의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시원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시인이 적는 도시에서의 巡禮記이다.

고대의 순례가 낙타를 타고 모래 바람 휘날리는 사막을 가로질러 聖地를 향하던 것이었다면 현대의 순례는 바닥과 벽과 지붕을 온통 유리로 덮은 백화점 아케이드 거리와 쇼윈도우의 유리 사이를 거니는 것이다. 맑고 깨끗한 흰모래가 태양의 불을 만나 유리가 된 것처럼 순례의 연금술도 이뤄진 것이다. 맨발로 유리를 밟는 행위는 현대 도시에서의 순례이자 시원의 성지로 향하는 순례인 것이다. 「순례」는 유리의 투명한 흰빛과 핏빛 붉음의 시각적 이미지가 유리를 밟을 때마다 소리나는 청각적 이미지와 발끝에 닿는 촉각적 이미지로 전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시각적 이미지의 청각과 촉각 이미지로의 전이 과정은 시원의 매개체인 유리를 내면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발을 찢고 들어와 몸 속을 헤집고 모든 내장과 마음을 찢어놓는 유리를 통해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이 세계 너머의 시원을 엿보는 것이다. 동시에 유리는 컨텍스트로서의 지명(地名)도 함축하고 있다.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 년 오줌 누듯 여덟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羑里)로도 모인다.

유리에서는 그러나, 가슴에 불을 지피고는, 누구라도 사십 일을 살기가 용이치는 않다. 사십 일을 살기 위해서는 아무튼 누구라도, 가슴의 불을 끄고, 헤매려는 미친 혼을 바랑 속에 처넣어, 일단은 노랗게 곰을 띄워내든가, 아니면 일단은 장례를 치러놓고 홀아비로 지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또 아니면, 사막을 사는 약대나, 바다밑을 천년 한하고 사는 거북이나처럼, 업(業) 속에 유리를 사는 힘과 인내로써, 운산이나 눈뫼나 비골을 또한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인데, 이리의 무리는 눈벌판에서 짖으며 사는 것이고, 지렁이는 흙밑 습습한 곳에서라야 세상은 안온하다고 하는 것이고, 신들은 그렇지, 그들은 어째도 구름 한자락 휘감아 덮지 않으면 잠을 설피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기에게 마땅스런 장소를 물색하겠다고 여기저기로 싸돌아 다니다가, 찾기는커녕 마음에 진공만 키워 버린 뒤, 타성에 의해서 그 진공 속을 몸 가지고 밖으로 한없이 구르고 있는 듯이 보이는, 아흔 살은 되었음직한 그 중의 얘기대로 하자면, 그러하다, 즉슨, 모든 고장들이 다 그곳대로의 아름다움과 그곳대로의 고통을 지니고 있었다.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의 제1장 제1일 첫 부분에서 밝히고 있는 유리(羑里)에 대한 묘사이다. 유리는 마른 늪에서 물고기를 낚아야 하는 운명에 놓인 육조 혜능이 찾아가는 곳이다. 유리는 수행(修行)을 통해 구원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장소이자 일종의 성소(聖所)이다. 이재훈의 「순례」는 현대 도시의 주요한 질료인 유리와 함께 박상륭 소설의 羑里를 겹쳐놓음으로써 삶의 비의(秘意)와 신화가 사라진 ‘마른 늪과 같은 도시-유리’에서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삶의 의미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삶은 매일같이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마른 늪과 같은 도시-유리를 밟으며 살아야 하는 삶이다. 도시-유리 너머로의 출구는 쉽게 보이지 않으며 도시-유리 안에서 떠돌며 유폐된 삶을 살다가 生을 마쳐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이재훈은 도시-유리에서의 삶을 도피하듯 초월함으로써 <저기 저쪽>에 닿으려는 것이 아니라 유리를 밟으며 <두꺼운 군살을 비집고 환한 몸으로 찾아오는 신비>를 느끼려 하는 수행자의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시대의 삶을 외면하지 않고 마른 늪에서 물고기를 낚으려는 삶의 자세를 견지한다. 유리를 밟는 수행자는 <유리의 머리가 내 발바닥을 찢는 수런거림>을 듣고 <유리가 내 몸을 돌고 돌아 검붉은 내장을 모두 만>나 유리 자체가 내 몸 전체가 되도록 유리를 밟으면서도 고행을 멈추지 않는다. 순례를 통해 죽음을 맞으면서 나는,

그 뜨거운 감촉. 두꺼운 군살을 비집고 환한 몸으로 날 찾아오는 신비. 유리를 밟으며 축제를 연다. 붉은 포도주가 흐르는 식탁. 얼굴에 분칠을 하고, 혀에 피어싱을 하고, 히피처럼 연기를 피워올린다. 치렁치렁한 푸른 옷을 입고, 방 안을 빙빙 돈다. 사각사각 유리가 몸 안에서 춤을 춘다. 두려움은 없다. 정작 두려움은 예언자의 눈, 인디언의 귀, 언 고기를 사각거리는 알래스카의 몽골리안을 그리워하는

生의 원시성(原始性)과 시원과의 조우를 희구하며 <生의 분노도 잊은 채, 태평하게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한다. 도시-유리-羑里의 순례를 통해 나의 온몸과 마음이 갈가리 찢기고 유리가 내 몸 전체가 되고 내가 백치가 되어도 <유리―너의 촉감>과 <유리―너의 소리>와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죽어가면서도 <나처럼 맨발로 유리 밟으러 가는 젊음들>과 함께 유리에서의 순례는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땡볕 아래 고행하는 꽃들이 핏빛 붉은 햇살을 게워내듯 우리들의 지상에서의 삶은, 이재훈의 <순례>처럼 고통스럽게 아름다운 <절정>인 것이다. 사각사각.

_ <현대시학>, 2005년 1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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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된 구원과 작은 희망


송기한
(문학평론가, 대전대 교수)



이재훈의 [빌딩나무 숲] 또한 생명과 그 근원이 소멸하여 모든 존재가 사물이 되고 죽음에 의해 점령당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 숲엔 풍경이 없다
나무와 새 온갖 풀벌레가 가득하지만
그들은 소리내지 않는다
사방을 둘러봐도 제자리만 지키고 선
가장 그럴듯한 포즈의 마네킹들
그곳엔 소리가 없다
어머니, 하고 부르면 침묵만 되돌아와
귓가엔 내 목소리만 자욱히 앉아 있다
숲속에서 숨이 막혀 한참을 내달았다
소리를 지르고 실컷 울고는,
그루터기에 앉아 부풀어 오르는 힘줄들을 만졌다
나는 나를 만지고 한없이 그리워져
나무에게로 간다
새에게 말을 건다
자애는 폐허, 라고 되뇌이는 시간들
내 힘줄을 내가 끊어도 고통스럽지 않은 곳,
그곳엔 아무도 없다
있다면, 침묵이 있다
아무도 면회오지 않는 숲에서
나는 이교도가 되었다
― 이재훈, [빌딩나무 숲](현대시, 1월호)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물화(物化)를 통해 인간이 고독과 소외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양상을 그리고 있다.
“나무와 새 온갖 풀벌레가 가득하지만 소리내지 않는 풍경”이라든가 그것이 “그럴듯한 포즈의 마네킹”과 겹치는 상황, 혹은 ‘어머니’하는 외침이 “침묵으로 돌아오”거나 “자애가 곧 폐허”가 되는 상황들은 환경의 물화와 인간의 소외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생명을 잃고 사물이 되어 버린 ‘나무’나 ‘새’, “아무도 면회오지 않는 숲”에서는 죽음이 예사롭지 않게 찾아든다. “내 힘줄을 내가 끊어도 고통스럽지 않다”는 진술에서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이 같은 상황을 ‘빌딩나무 숲’이라 명명함으로써 환경의 사물화에 대한 근거로 근대라는 패러다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이처럼 생명이 상실되고 죽음이 만연한 곳에서는 어떠한 구원도 손쉽게 찾아들 수 없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어머니’라는 근원적인 힘이나 ‘자애’와 같은 미덕들은 결코 응답받지 못하게 되는 바, 시인이 “나는 이교도가 되었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곧 인간을 구원하고 세상에 빛과 희망을 주어야 할 종교조차 이런 소외된 상황에서는 그 구실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 송기한, [좌절된 구원과 작은 희망]중에서, 현대시 2004년 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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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열된 연대의 시적 기록


정과리
(문학평론가, 연세대 교수)



앞에서 이재훈의 짧은 시구를 인용하면서 “과거에 미련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단순히, 예전의 시들이 기원의 신화 속에서 태어났음을 가리킨 것일 뿐이다. 그러나 발설된 말은 발설자를 떠나 혼자 놀기 시작한다. 저 과거는 어떤 과거인가? 시를 태어나게 한 현실을 가리키는 것인가(왜냐하면, 지금의 논리 속에서 시는 현실 다음에 오니까)? 아니면, 시라는 것의 별도의 맥락(‘한국현대시사’ 같은 표현이 지시하는 것처럼)을 환기하는 것인가? 이재훈의 시는 소박하나마 하나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곳에 살기 위하여”가 아니라 “이교도”로 살기 위하여. 실상 시는 “나는 이교도가 되었다”고 했지 “이교도로 살기 위하여”라고 적지 않았다. 그런데 시를 읽어 보면, 시의 화자는 이교도가 되지 않았다. 그는 빌딩 속에서 살면서 자연을 그리워한다. 빌딩에는 가짜 자연들만이 있다. 빌딩과 자연의 대위법은, 그러나, 빌딩을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빌딩을 재생산한다.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야만 빌딩은 거듭 솟아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빌딩의 종교이다. 화자의 종교도 같은 종교다. 이교도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를 만지고 한없이 그리워져
나무에게로 간다
― 이재훈, [빌딩나무 숲] 부분

이 시구의 앞 행에 드리워진 성적 암시를 제거하고 읽으면 이교도로 사는 방식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빌딩의 종교 의식은 대상의 성물화를 통해서 나타난다. 그런데 화자의 그리움은 자위를 통해 솟구친다. 자위의 끝에서 그는 몰아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죽음의 예행연습), 오히려 대상에 대한 그리움으로 타오른다. 그래서 저 가짜 나무, 가짜 새에게로 가 “말을 건다.” 가짜가 진짜를 온전히 대행하는 순간이다. 그러니까 이 시구가 암시하는 것은 화자가 빌딩의 종교이기도 한 자신의 종교를 절대자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자기의 이름으로 행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이단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단이라고 말하기가 화자는 께름칙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류를 가리키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그 꺼림한 감정이 ‘이단’ 대신 ‘이교도’를 선택하게 한다. 그는 이교도인 체 함으로써 이단을 사는 것이다. 그러한 방식의 최종적인 명제가 ‘이교도로 살기 위하여’이다.
엘뤼아르의 시이기도 하고 김지하의 시 제목이기도 한 “이곳에 살기 위하여”에서 ‘이곳에’는 의미론적으로는 무의미한 췌사이다. 사는 것은 언제나 여기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다른 곳에서 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당연히 ‘저곳에 살기 위하여’라고 써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살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이곳에’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단지 리듬의 조화를 위해서만 기능한다. 따라서 의미론적으로는 ‘살기 위하여’만이 작동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그것은 무언가 부족하다. 문자 그대로의 그것은 모든 존재들의 한결같은 소망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부족한가? 바로 그 소망의 방식이 부족한 것이다. 가령, 용감히 살기 위하여, 떳떳이 살기 위하여, 멋지게 살기 위하여, 반항아로 살기 위하여, 음메 기죽어로 살기 위하여, 죽어서 살기 위하여, 이교도로 살기 위하여, 기타 등등.

- 정과리, [파열된 연대의 시적 기록]중에서, 현대시 2004년 1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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