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옛말은 본다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 가를 웅변한다. 이 말이 어떤 상황에서 비롯하였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크게 상관하지 않지만 그 뜻하는 바는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보기 전에는 들은 내용을 믿을 수 없다거나 듣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말의 내용이 충분히 시각적 이미지로 변형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시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말이 단지 신뢰와 설득에 관련되어 실제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시각 능력은 이미 있었던 것을 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보지 못한 것, 혹은 지금 없는 것을 상상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부재라는 견디기 힘든 상황을 ‘포르트(fort)-다(da)’라는 언어 놀이로 견딜 수 있었던 자신의 손자의 일화를 통해 프로이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언어를 통해 대상을 통제하고자 하는 의식의 성장과정일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가지고 노는, 실을 매단 실패는 언어 경험과 시각 경험의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실패를 던져서 눈 앞에서 사라지면 어머니가 가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실을 잡아당겨 실패가 나타나면 어머니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긴 이 아이의 예에서 우리는 시각적 인상이 언어의 성숙 혹은 의식의 성숙과 얼마나 크게 관계 맺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사실 언어는 시각에 많은 부분 빚지고 있다. 이것은 증명을 필요로 하는 명제가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거나 말하고 행동할 때를 가만히 떠올려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인체가 수용할 수 있는 감각의 70퍼센트 정도가 눈에 모여 있다는 사실은 시각의 중요성을 과학적으로 추인하는 수치(數値)일 뿐이다. 모든 언어와 논리를 그림으로 단순화하여 나타낼 수 있다고 믿었던 어떤 철학자의 생각 또한 시각이 우리의 언어와 사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진단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시는 시각, 혹은 본다는 행위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을까. 어떻게 보면 시란 본다는 행위와 떨어질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일상적인 시선으로는 좀처럼 간파할 수 없는 사물의 비밀스러운 유사성을 발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함을 은유와 상징이라는 수사학으로 표현하는 시에 바라봄의 행위가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각 활동이 시작되는 눈은 우리 신체의 일부분일 뿐이지만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고 어딘가로 향한다. 그러나 시각의 활동이 가시적 대상에만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시각은 때로 가시적 대상 너머로, 가시성 자체가 소멸되는 곳까지 나아간다. 그 방향은 때로 의식의 바깥이 될 수도 있고, 때로 의식의 내면일 수도 있다. 나의 의식과 세계가 만나는 지점, 바로 거기서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나고, 그 어름에서 또한 시가 탄생할 것이다.


(...)

생명이 절정에 다다를 때가 있으면 또한 몰락에 이르게 될 때가 있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어떤 초인간도 영원한 생명을 지닌 채 살지 못하였다. 산 자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서 자라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삶에서 잠시 피었다가 시드는 국화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시인은 시드는 꽃에서 어둠과 상처를 발견한다. 꽃이 시드는 것처럼 자신도 나이들고 있다는 데 대한 애처로움의 고백일까, 아니면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옛사랑에 대한 서글픈 감정의 표현일까. 그러나 시인은 이 쓸쓸한 낙화에 대해,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반복하는 존재론적 순환에 대해 “눈에 밟히지 마라/끝없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있음과 동시에 생성과 소멸로 이어지는 존재의 무한한 반복에 대한 단호한 긍정이 있다.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두려움과 존재론적 숙명을 받아들이는 담담함 사이에서 시인은 진동하고 있는지 모른다.

일부러 가부좌를 틀 필요는 없다 당신은 감각의 수행자, 당신의 세상은 불구의 시간이 시작되는 때, 눈을 감아도 또렷이 기억나는게 있다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반했던 제비꽃 향기처럼 당신, 들릴 듯 말 듯한 냄새 당신의 냄새를 들었다 노란색 코트가 아니라 감미로운 목소리가 아니라 당신의 발자국처럼 저 멀리서부터 두근거리는 냄새 눈을 감아도 또렷이 기억나는 게 있다 그러나 당신의 향기는 잠시 머물렀다 사라졌다 부재(不在)는 그리움의 양식 바이올렛 향기로 내 몸이 건반처럼 울렸지 잠시 뿐이었지만, 덤불 속에서 상채기를 핥다가 취한 당신의 냄새 적어도 당신의 몸에서 육식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다른 꽃으로 환생한다해도 이미 알았던 것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음을*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다 :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이리언(Alien)>
― 이재훈, 「앉은뱅이꽃」(서정시학, 봄호) 전문

봄이면 산과 들에 자줏빛 꽃을 피우는 키작은 꽃을 부르는 이름이 있다. 앉은뱅이꽃. 어딘가 앙증맞으면서도 안쓰러운 감정을 자극하는 별명을 지닌 이 꽃은 달리 제비꽃으로도, 혹은 오랑캐꽃으로도 불린다. 줄기가 없어 높이 자라지 못하는 탓에 붙여졌을 별명뿐 아니라 원래 이름에서도 이 조그마한 꽃의 비극적인 운명을 눈치챌 수 있다. “당신의 세상은 불구의 시간이 시작되는 때”라고 시인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꽃의 겉모습뿐 아니라 겉모습을 따라 사람들이 불렀을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기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앉은뱅이 꽃에서 “가부좌를 튼” 듯한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고,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반했던 제비꽃 향기”를 기억해낼 수도 하지만 시인은 “눈을 감아도 또렷이 기억나는” 냄새에 이끌린다. 그것은 그저 지나치는 발걸음을 지닌 자에게는 감지될 수 없는 것이다. 땅에 붙박혀 있는 꽃에 눈길을 보낼 수 있는 이에게만 꽃은 향기를 허락하는 것인지 모른다. 가만히 꽃을 들여다보는 시인에게 꽃의 향기가 “멀리서부터 두근거리는” 듯 다가오는 소리로 느껴진다. 고요히 꽃을 바라보며 꽃의 향기를 맡는 시인에게 꽃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 것이다. 다만 꽃을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향기를 맡고 꽃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만큼 시인이 꽃에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꽃의 향기는 이내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쉽게 자극에 익숙해지는 후각의 특성 때문일 수도 있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의 운명 때문일 수도 있다. 향기는 사라졌지만 시인은 부재(不在)에 대해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지는 않는다. 또한 부재를 현존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다만 사라진 것을 사라진 대로 내버려둘 뿐이다. 존재의 부재가 곧 존재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한다고 시인은 믿지 않기에 꽃의 변화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그 누구도 소리를 들어주지 않은 꽃의 소리를 들으면서.

_ <현대시>, 2006년 5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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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국망명자와 생활세계적 가능성의 지형

홍용희
                                       
                
    1. ‘새로움’과 ‘오래된 새로움’

신진 시인들의 첫 시집들이 비 온 뒤의 대나무 순처럼 일군의 무성한 숲을 일구고 있다. 시단의 중심부에 새로운 세대 군이 성큼 진입해 들어온 것이다. 2005년을 분기점으로 신진시인들의 등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직접적인 배경은 <천년의시작>, <렌덤하우스중앙> 등의 출판사들이 기성 시인들의 명망에 의존하는 관행보다, 새로운 세대의 목소리를 제도권으로 수용하기 위한 출판 기획을, 과감하게 추진한 데에서 찾아진다. 그러나 이보다 더 원천적인 배경은 이천년 대에 진입한 지 5년여가 지났으나, 1990년대 시단과 변별되는 뚜렷한 새로운 변모의 단층을 보여주지 못하던 상황에서, 내부에 적재되어 있었던 이천 년대의 새얼굴의 시인과 시적 감각이 표층을 뚫고 돌연히 출현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보면, 그동안 우리 시사가 비교적 10년 단위로 뚜렷한 전환의 마디절을 보여주었던 것에 비춰볼 때, 2005년에 이르러서야 신진 세대의 새로운 목소리가 전면에 표출된 것은 시차적으로 지체된 감이 없지 않다. 이것은 1990년대와 2000년대 간에 사회역사적인 층위에서의 변화의 단층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이를테면, 1980년대 말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와해로 상징되는 탈냉전 시대의 개막과 전 지구적 시장화라는 지각변동이 일어나면서, 시사에 있어서도 리얼리즘의 현격한 퇴조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 및 생태주의 시편이 주류로 나타나는 변화가 있었지만, 1990년대와 2000년대는 이에 상응하는 시대사적 전환의 단층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 시단의 이른바 기득권층이 과거 어느 때보다 두텁고 견고해서 신진들의 출현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환경이라는 점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안팎의 여건 속에서 다소 지체된 감은 있으나 근자에 들어 그 어느 때보다 첫 시집의 발간과 더불어 제각기 개성적인 목소리로 출사표를 던지고 있는 시인들이 활발하게 대두되고 있다.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이민하, 『환상수족』, 이승원, 『어둠과 설탕』, 김이듬, 『별 모양의 얼룩』, 김언, 『거인』, 신해욱, 『간결한 배치』, 고영,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박진성, 『목숨』, 이세기, 『먹염바다』, 박후기, 『나는 종이의 유전자를 알고 있다』, 이재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윤성학, 『당랑권 전성시대』, 김근, 『뱀소년의 외출』, 조동범, 『심야 베스킨라빈스 살인사건』, 박판식, 『밤의 피치카토』, 진수미, 『달의 코르크 마개가 열릴 때까지』, 안현미, 『곰곰』, 이영주, 『108번째 사내』 등 신진 시인들의 첫 시집만도 실로 많이 간행되었다.
이들 시집들을 편의상 유형화하면, ‘새로움’과 낯익은 ‘오래된 새로움’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유형화는 우리 시단에 제 3 인류형의 탄생으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낯선 문법과 감각의 ‘새로움’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시적 전통의 계승에 해당하는 ‘오래된 새로움’의 지칭은 ‘새로움’에 대한 대타적 관계 속에서 성립된다.  
  어느 시대에나 그래왔듯이 새롭게 등장한 세대는 기왕의 시단에 우려와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며 순식간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근자에도 역시 새롭게 등장한 젊은 세대군에 대한 평자들의 논의가 활발하게 개진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논점은 주로 신진들 중에서도 불연속적이고 이색적인 ‘새로움’의 진영에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불연속적인 ‘새로움’과 더불어 ‘오래된 새로움’ 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신진 시인들 전반의 이해를 위한 균형감각의 필요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새로움’이 더욱 시대사적 진정성과 미래적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인식에 바탕 한다.
  특히, 1990년대 이래 지속된 가치의 다원화와 해체적 상상력이 한편으로, 지나치게 개별적 단절과 파편화를 가속화시킴으로써, 고립, 소외, 혼돈, 불안을 야기시켰음을 주목할 때, 이천 년대의 시대정신은 이를 초극할 수 있는 창조적 보편을 요구한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찾아내고 의미화 하는 작업이 이천 년대 시 창작이 견지해야 할 과제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 발표되는 신진 시인들의 창작활동은 이러한 시대사적 소명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그러나 ‘새로움’의 시편은 숨은 차원의 새로운 질서가 전면에 표출되고 있음을 선언적으로 충격하고 있으나, 이를 구체적으로 의미화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문화주의적으로 추상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 시편의 시인들은 스스로 소통불능의 자기 방어적 성채 속에 들어가서, 자폐적인 언술을 일방적으로 전개하는 일종의 내국망명자의 길을 가고 있다. 이것은 현실세계에 대한  반영일수는 있으나 대안일수는 없다. 오히려 시대적 전환의 전복과 변혁의 에너지를 생산적으로 규명하기 보다는 일과성으로 소모시키기 쉽기 때문이다.  
한편, ‘오래된 새로움’은 구체적인 생활세계에서의 실천적 삶을 통해 이에 적응하고 부정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체험적 삶에서 터득되는 생활 세계적 이성(하버마스)은 현실에 대한 ‘부정성의 계기’가 되는 미래지향적 예지로 작용한다. 생활세계속의 실천적 삶은 현실상황에 규정받으면서 동시에 이를 주체적으로 구조화하는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오래된 새로움’이 구체적인 시대정신의 발견과 미래적 가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감당하기에 용이하다고 파악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점을 염두해 두고 ‘새로움’의 시편에 대한 성찰적 개관과 함께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의 성격, 의미, 미래적 가능성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새로움’ 혹은 내국망명자들

2000년대 중반이 기존의 질서와 새로운 질서의 ‘두 날’이 팽팽한 긴장관계를 이룬 민감한 임계상태라는 점을 집약적으로 선명하게 표출시킨 시편들은 단절적인 ‘새로움’의 진영이다. 이들의 시편들은 제3 인류형이라고 지칭할 수밖에 없는 소통 불능의 화법과 분방한 상상력으로 넘쳐흐른다. 낮선 문법을 통해 환상, 엽기, 섹스 등의 상상력을 가학적으로 탐닉하는 이들 시편은 현실 사회가 극심한 소외와 사물화에 시달리고 있음을 절규처럼 드러내 주고 있다. 마치 혼돈스런 현대사회에 대응하는 시적 화법으로는 비선형적인 혼돈 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들 시인들의 시편에 대해 시집 전반을 헤짚으면서 상징과 이미지의 기호론적 분석을 시도한다면 나름대로의 의미체계를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은 중요하지 않다. 이들 시편들은 상징적인 메시지의 전달 보다 시적 형식론 그 자체의 강렬한 자기 투척을 통해 불협화음의 실재를 환기시키고자하는 전략이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다음의 시편을 읽어보기로 하자.

  지하에 계신 淫父와 淫母 가 침봉으로 내 얼굴에 난 털
을 벗긴다 나는야 털북숭이 라푼젤, 짜다 푼 목도리의 털
실같이 꼬불꼬불한 털을 발끝까지 내려뜨린 채 울고 있다
울음을 짜보지만 눈물은 흐르자마자 냄새나게 덩어리지는
冷 일 뿐, 에이 더러운 년 킁킁거리며 내 얼굴을 냄새 맡던
淫父가 빨간 포대기처럼 늘어진 혀로 내 털 한 가닥 한 가닥
을 싸매 핦는다 조스바를 빨던 입처럼 淫父의 혀끝에서
검은 색소가 뚝뚝 떨어진다. 이제부터 이게 네 머리칼
이야. 알았어? 淫母가 스트레이트용 파마약을 이제부터 내 머리칼인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부분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모두 서른두 개
나는 나의 아름다운 두 귀를 어디에 두었나
유리병 속에 갇힌 말벌의 리듬으로 입맞추던 시간들을.
오른손이 왼쪽 겨드랑이를 긁는다 애정도 없이
계단 속에 갇힌 시체는 모두 서른두 구
나는 나의 뾰족한 두 눈을 어디에 두었나
호수를 들어올리던 뿔의 날들이여.
새엄마가 죽어서 오늘은 모두 슬프다
밤의 늙은 여왕은 부드러움을 잃고
호위하던 별들의 목이 떨어진다
                                                 -황병승, 「검은바지의 밤」 부분

  시적 상상력이 매우 생경하고 도발적이다. 행과 연 구분의 절도와 간격은 물론이거니와 의미의 일관성과 상관성이 무화되고 있다. 첫 행에서부터 시제와 인과적 관계가 무화된 비문임은 물론이고, 엽기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들이 서로 뒤엉킨 채 자기 재생산을 지속하고 있다. 시의 길이는 여기에서 그칠 수도 있지만 무한대로 늘여도 무방하다. 어차피 청자를 배려하지 않은 자폐적 발화인 탓에 시상의 형식과 전개 역시 화자의 자의적인 의지에 따라 결정하면 그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시편들이 무의미한 잡답이나 잡음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시상의 기반을 이루는 엽기와 환상성은 그 자체로 우리 시의 새로운 범주를 개척하고 돌파하는 충동적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시의 시인 이외에도 이민하, 이승원, 진수미, 신해욱, 이영주 등의 시 세계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유사한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엽기란 기본적으로 공포스럽지만 매혹적이라는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잔혹성이 쾌감을 부채질하고 쾌감은 다시 잔혹성의 공포를 상기시킨다. 공포스러움은 불온하고 발칙하고 어처구니없는 도발과 전복에서 비롯된다. 한편, 매혹적인 쾌감은 공적인 장소에서는 결코 발설되거나 공개될 수 없었던 지점들이 공개될 때, 지배질서의 남용과정의 전모가 누설되고 전복되는 데에서 생성한다.
엽기의 유행과 관련하여 우리시대 자체가 엽기적이기 때문이라는 식의 반영론적 지적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충실한 것도 아니다. 이런 식의 반영론은 문제를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덮어버린다. 엽기적 상상력에 대해 우리가 고민하고 찾아야 할 핵심 문제는 현대사회에 대한 도저한 성찰, 전복의 에너지를 감지하고 이를 생산적으로 의미화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자에 발표되는 신진 시인들의 시편에 창궐하고 있는 엽기는 세계와의 불협화음 자체에 그치는, 현실 반영론의 차원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은 엽기가 유행하는 불온한 사회에 내장된 발칙한 공격과 저항의 에너지를 봉인하거나 일회적으로 소모시켜 버리기 쉽다.
한편, 환상은 현실과 완전히 차원이 다른 시공간을 향한다. 환상은 일상의 시공간을 혁명적 파괴력을 통해 모험의 시공간으로 대체시키고 있는 것이다. 환상의 가장 표준적인 해석은 배제당하거나 소실된 것들을 호출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식이다. 캐서린 흄이 “나는 환상을 사실적이고 정상적인 것들이 갖는 제약에 대한 의도적인 일탈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할 때, 환상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체계에 의해 억압된 신화적이고 자연적인 세계를 가리킨다. 보이는 세계의 재현으로서의 미메시스와 그러한 “사실적이고 정상적인”세계가 포괄할 수 없는 빈자리, 즉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심연이 환상 속에서 재생될 수 있다. 따라서 환상성은 현대 세계의 일상성에 대한 위반과 전복을 통해 미분성의 몽환적이고 신화적인 상상력의 영토를 개척하고 수용할 때 그 본래의 소임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시편에서 환상성은 권태로운 일상에 대한 조소와 일탈의 차원에 머무는 경향을 보인다. 치명적인 비약의 상상이 엽기적 상상력의 보조적 수단으로만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엽기와 환상성이 시적 대화의 상상력을 돌파해내지 못하고 오히려 비유와 상징의 빽빽한 그물망으로 구성된 성채를 높이 쌓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리고 그 닫힌 성채 안에서 시인들은 스스로 불안한 매혹의 내국망명자로서의 삶을 구가하고 있는 형국이다. 망명자의 속출은 사회 현실의 불온성을 극명하게 선언하는 충격을 던져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혁신과 변화의 출구를 직접 마련하는 데에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내국망명정부의 성채를 허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먼저, 앞에서 제기한 엽기와 환상성이 지닌 부정과 혁신의 창조성을 생산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환상성은 ‘치명적 비약’의 상상을 통해 일상 속에서 우리 자신의 기원의 시간과 소통함으로써 우리들 스스로도 망각하고 있었던 우리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는 동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엽기 역시 이점은 마찬가지이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추사 김정희가 자신의 문체를 향한 괴기성(怪奇性)이라는 비난 앞에서 ‘괴(怪)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숭고하고 심오한 지혜의 세계, 지극한 예술의 땅을 밟을 것인가’라고 응답했던 것처럼, 숭고를 향한 추의 미학의 심연으로 매진해나가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시적 형식 미학에서 시적 언술과 이미지의 과잉에 대한 성찰을 통해 절제와 생략의 여백을 추구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본 바대로, 이들 시편에는 대체로 온통 환유, 제유, 상징 등의 이미지가  범벅을 이루고 있다.  시적 양식이 전통적으로 견지하는 압축과 생략의 미의식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시적 장르의 ‘말하지 않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명제는 여기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말의 절제와 비움이 아니라 말들의 성찬을  즐기고 있다. 시적 화자의 언술만이 시상의 비선형적인 혼돈의 흐름을 타고 일방적으로 발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의 창조적 상상력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차라리 그 비어 있음을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多言數窮 不如守中)는 고전(노자 『도덕경』)의 가르침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여기에서 비어 있음을 가리키는 중(中)은 도(道)에 다름 아니다. 말의 풍요는 오히려 그 풍요로움으로 인해 길(道)을 잃게 되고 도(道)의 소통을 막게 된다.)
  실제로 시적 양식은 나르시즘의 성채가 아니라 이타적으로 열린 창조적 대화의 장이다. 주지하듯, 옥타비오 파스는 시 창작에서 ‘타자의 의지의 침투’를 강조한다. 시를 쓰는 행위는 상반되는 힘들의 얽힘, 즉 나의 목소리와 타자의 목소리가 합쳐져 하나가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도 이러한 점을 읽을 수 있다. 그가 시적 창조를 자연의 모방이라고 할 때, 자연은 혼으로 가득한 것, 살아있는 유기체에 해당하는 물활론적 대상이다. 따라서 그의 논지에서 시는 ‘시 자체가 자신의 주인이며 혼이 깃 들인 자연과 시인의 영혼이 만나서 얻어지는 열매이다.’
  이렇게 보면, 시에서 비움과 절제의 여백은 초월적인 ‘타자의 의지가 습합’되는 소통의 공간이다. 시의 형식미학에서 말의 ‘자발적 가난’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발적 가난’의 시적 형식은 타자의 목소리의 동참과 소통을 향한, 시의 우주적 형식화로 정리된다. 여기에 이르면, 시 창작의 주체란 나르시즘적 자아가 아니라 공동체적 자아라고 말해 볼 수 있다. 한편의 시가 집단적, 민족적 차원의 예언적 지성으로 떠오르기도 하는 것은 이러한 문면에서 이해된다. 이렇게 보면, 내국망명자들의 본국 환수의 전략은 형식미학의 자기 갱신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것이다.    

3. ‘오래된 새로움’ 혹은 생활세계적 가능성

  물론, 오늘날 신진시인들로부터 내국망명자들의 이방인적인 발성만이 들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도 이색적인 탓에 도드라지게 느껴질 따름이다. 사실은 생활세계에서의 고생살이에 시달리면서 이로부터 살림살이의 방향을 찾아서 가로질러 나가는 ‘오래된 새로움’의 시 편이 더욱 활발하게 발표되고 있다.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은 이를테면, 메를리-퐁티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의식과 신체가 하나로 통일된 ‘살아있는 신체’로서의 인간 실존을, 시적 주체로 설정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살아있는 신체’는  세계 속에 결박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세계를 재구성해 낸다. 다시 말해, 인간 존재는 자신의 상황에 규정 받으면서 동시에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구조화해 나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체험적 삶을 통해 절망과 상처의 길을 걸으면서, 동시에 스스로 이를 초극하고자 하는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에서,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을 감지하는 것이 더욱 용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에서 우리는 절망과 상처의 생활세계에 직접 부대끼면서 그 신생의 출구를 향한 탄력적인 움직임을 읽어내는 것이 요구된다.
여기에서는 우선 윤성학, 박후기, 박진성, 이세기의 시 세계를 중심으로 생활 세계적 가능성에 대한 체험적 현장의 언어를 만나 보기로 하자. 이들의 시적 출발은 생의 허기와 결핍이다. 그 주된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물적 풍요와 문명의 이기를 자랑하는 오늘날에도 치명적인 결핍, 가난, 소외, 질병의 그림자가 우리 주변을 침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여기에서 더 나아가 지배 권력의 자동 조절 메카니즘이 고도로 발전한 오늘날에는 적당한 결핍과 고통의 강요가 조장되고 관리되기도 한다.  적당한 “허기”의 강요가 현대사회의 지배질서에 충실한 구성원을 생성해내는 효율적인 지배전략이기 때문이다. 윤성학의 시집 『당랑권 전성시대』의 첫 번째에 수록된 다음 시편은 이러한 점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매받이는 사냥을 나가기 한 달 전부터
가죽 장갑을 낀 손에 나를 앉히고
낯을 익혔다
조금씩 먹이를 줄였고
사냥의 전야
나는 주려, 눈이 사납다
그는 안다
적당히 배가 고파야 꿩을 잡는다
배가 부르면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꿩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날아 도망갈 수 없을 만큼의 힘
매받이는 안다
결국 돌아와야 하는 나의 운명과
돌아서지 못하게 하는 야성이 만나는
바로 그곳에서
꿩이 튀어 오른다
                                                             -윤성학, 「매」 전문

적당한 “허기”는 문명과 야성의 가파른 긴장관계를 지탱시키는 지점이다. 이때, 사냥꾼의 기질이 가장 민감하게 발휘된다. “꿩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그러나 절대 “날아 도망갈 수 없을 만큼의 힘” 만이 주어지는 지점이다. 그래서 “매받이”는 나에게 “적당히 배가 고”픈 허기를 지속적으로 강요하고 관리한다. 이러한 상황을 다른 시각에서 정리하면, 나는 강요되고 관리되는 문명과 야성, 안주와 고통의 접점을 이탈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는 “꿩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먹이”마저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적당한 “허기”마저도 고마운 은총이다. 이 허구적 은총의 수혜를 계속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윤성학은 “당랑권”의 권법을 내보인다. “이곳에는 사람 수만큼의 권법이 있”지만,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고/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당랑권이다”(「당랑권 전성시대」) 이와 같이, 당랑권의 처세술을 익혀야 낙오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바로 현대사회가 획일화와 자기 정체성의 상실을 강요하는 사회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래서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보다/누군가 내가 나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더 참에 가까운 명제였다니/그러므로 나는 말하지 못한다/이 구두의 주름이 왜 나인지/말하지 못한다”(「구두를 위한 삼단논법」)는 상황은 예고된 것이다. 이처럼, 심각한 자기 정체성의 상실은 자연스럽게 자기 정체성 회복을 위한 갈망을 증폭시킨다. 마치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면 물을 찾게 되는 몸의 반응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윤성학이 “다산이 나고 죽은 여유당 햇빛 속에서/하루를 보내며/촘촘한 그 이의 정신을 읽고 오는 길”에 “철길을 바라보며 그때 알았습니다/물이 그러하듯 쇠가 또 그러하듯/어딘가를 향하는 동안에만/강물이고 철길인 것이었습니다” 라는 전언 역시 자연스럽게 들린다. 윤성학은 첫 시집에서 생활세계의 실천적 삶을 통해 “당랑권 전성시대” 로부터 “다산이 나고 죽은 여유당”을 찾아 “그때 알았습니다”라고 탄성하는 넓은 음역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한편, 박후기의 시집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역시 기본적으로 “생의 허기”에서 출발하고 생성되는 특성을 보인다. 다음 시편은 허기진 사람들의 허름한 모습에 대한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묘파이다.
 
  장대비 맞고 차양이 내려앚은 국밥집
  바지춤을 추켜올리듯 바람은
  흘러내린 천막의 갈피를 움켜지었다, 놓아버린다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
바지를 흘러내리게 하는 생의 허기
고개 숙인 채 밥집의 허름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배고픈 사람의 뒷모습이 식은 국밥의 기름기처럼
흐린 내 시선에 엉겨붙는다
   (중 략)
사슴 박제처럼
벽에 목만 내걸린 선풍기가
두 평 남짓한 밥집에 철철 바람을 쏟아붓는다
바람은 라디오 속에도 들어 있어
무뚝뚝한 얼굴에 나뭇잎처럼 달라붙은
인부들의 귀를 간질인다

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르러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행복의 나라로」 부분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바지를 흘러내리게 하는 생의 허기”를 달래며 “허름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배고픈 사람의 뒷모습이” 넓고 푸른 “행복의 나라”로 가는 정서적 틈새를 마련하고 있다. “두 평 남짓한 밥집”에 내걸린 선풍기의 바람이 라디오의 “행복의 나라”라는 노래를 전파시키는 촉매로 작용하고 있다. 이처럼, 가난과 절망 속에서 풍요와 희망을 향한 추구는 너무도 식상한 계몽적 서사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또한 지속적인 생활세계의 실상이다. 비록 낮고 느리고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생활세계 속에서 스스로 부대끼는 삶이 자신을 초극의 길로 인도하는 방법론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뱃속에”서부터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열 개/발가락이 열 개 그리고/바위의 안부를 묻는 빗방울처럼/쉬지 않고 내세를 두드리는/희망이라는 유전자”(「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밥집의 허름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일상은 스스로를 “희망”으로 구원하는 과정과 연관된다.  
   박후기의 시 세계가 대부분 “산란(産卵)의 공장지대”처럼 결핍과 고통의 풍경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그러나 차갑거나 건조하지 않고 그 내부에서부터 자루 속의 감자들이 싹을 틔우듯(“울타리 아래 버려진 자루 속에서/썩은 감자들은 싹을 틔웠고”(「뒤란의 봄」), 따뜻한 희망의 정조가 번져 나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편, 박진성의 시 세계는 질병의 구심력과 원심력의 상상력을 절박한 체험적 언어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질병의 구심력적 상상력이란 공황발작, 불안, 자살충동, 상습불면 등을 앓는 자신의 증세에 대한 핍진한 묘사이고, 원심력적 상상력이란 타인의 아픔과 “애옥한 삶”(「슬픈 바코드」)에 대한 연민의 정감을 가리킨다. 몸속에 침투한 질병은 역설적으로 온몸의 신경 조직과 감각기관을 날카롭게 깨운다. 그래서 질병을 앓을 때, 날씨와 기온의 변화, 바람소리, 지각의 움직임 등을 섬세하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박진성의 시 세계가 누구보다  절박하면서도 예민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질병의 신경 조직이 시의 촉수를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병동 복도를 걷는다 밤이면 적나라해지는 고통들……
형광불빛 쏟아지면 신경은 휘어진 척추처럼 길에 달라 붙
는다(오늘 검사에서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창문 열면
후려치는 바람, 바람이 부는 것이다 십일 층에서부터 내가
밟고 내려온 건 울분이 아니다 긴 낭하에서 술렁이는 고요의
낱알들은 중력으로 비틀거린다 고요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현기증
어지러운 공기를 가득채운 내 몸은 몇 개 불빛을 집어 삼킬
것이다(내려가고 싶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새벽이면 철제문이
열리겠지 어두운 낭하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불빛, 출구가 없는데
바람아, 물체의 몸에서 튕겨나온 빛의 알갱이들아, 아프러 오는가
                                                                    -「봄밤」 부분

“적나라해지는 고통”에 시달리는 시적 주체의 정서와 몸의 감각이 그려지고 있다. 바람이 “후려치”는 각도는 물론이고, 고요와 빛들이 각각 “낱알”과 “알갱이”의 형상으로까지 보이고 느껴진다. 질병의 깊은 고통이 온몸의 감각을 푸른 칼날처럼 날카롭게 살려 놓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질병은 또한 “살고 싶은” 생의 의지에 “목숨을 걸(「목숨을 걸다」)게 한다. 목숨과 건강의 소중함 역시 질병의 상상력이 더욱 깊이 환기시킨다. 몸을 훼손하는 질병이 역설적으로 몸의 가능성을 깨우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박진성의 몸의 고통은 스스로를 외부세계를 향해 원심력적으로 열어 놓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가 “낮은 카바이드 불빛 아래 쭈그려 앉은 여자, 느린 자전거 한 대만 쓰러져도 모두가 다칠 것 같은 밤의 시장길 모퉁이에 이마 주름살 따라 흔들리고 있는 여자”(「슬픈 바코드」) 의 슬픔을 내밀하게 감지하고 느끼는 것은 질병으로 인해 가장 민감해진 몸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는 시집 『목숨』에서 “목숨”을 거는 질병과의 처연한 싸움을 통해, 한편으로, “산다는 일이 숨결 곳곳에 구멍을 내어 설움도 가난도/비루함도 숨쉬게 해줘야 하는”(「목숨-금강에서」)것이라는 “목숨”의 이치를 성찰적으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세기는 우리 시사에서는 매우 낯설게 바다의 교향시가 아니라 ‘바다의 산문’을 읽어주고 있다(최원식). 바닷가의 질척한 삶의 내력과 흔적이 평명한 언어를 통해 기록되고 있다.
 
   늘그막 함석집에 누군가 걸어온다
   
   막배도 끊기어 올 이도 없는데
   저녁밥상이 차려지고
   흰쌀밥에

  컴컴한 밤이 내어온다

  오리와 고양이와 흰둥이 강아지가 있는 빈 마당이
  쓸쓸하니 텅 비어

  이런 날이면 지리산 갈가그메 게발 물어 던진디끼
나 혼자 떨어졌다며 울었다는 할아배와
   이작도 굴업도 섬그늘을 떠돌다
   불귀의 몸이 되었다는 대고모와 뺑덕어멈을 닮았다
는 할머니가 절로 생각나는

   환한 저녁이 온다
                                                              -「애저녁」 전문
                            
어촌의 “늘그막 함석집”이 맞이하는 저녁 풍경이 종요롭게 그려지고 있다. “올 이도 없”고, “쓸쓸하니 텅 비어”있는 “빈 마당” 이 있을 뿐이지만, 시적 화자에게 그곳은 이미 이승을 떠난 “할아베”, “할머니”, “대고모”의 삶의 내력들로 홍성스럽다.  “늘그막 함석집”은 어느새 이들의 삶의 설화로 술렁인다. 어촌마을의 저녁은 이와 같이 죽어 사라졌어도 잊혀지지 않는 삶의 곡절과 사연들로 언제나 수런거린다. 굳이 “조깃배를 타던 쌍둥이 아들이/월경을 하였다는/소문”(「당너머집」)과 같은 어둠의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섬마을은 제각기의 삶의 곡절들이 도처에 소금처럼 서려있다. 이를테면, “바다의 잔주름”을 닮은 “옷장수 이수본 씨”(「이수본 씨」), “내 애비의 이 가는 소리와 코곪과 술주정을/보고 돌아왔던 바다”(「백령도에서」), “여인숙 할아배가/화투장을 두드”리는 “옹진여인숙”(「옹진여인숙」) 등이 섬마을의 풍속의 역사를 증거한다. “여기까지 온 길이 생간처럼 뜨"(「먹염바다」)거웠음을 생생한 표정으로 보여주는 섬마을은 또한 그 속에서 “상수리 숲 위 만월”(「애비」)을 퍼올리기도 한다. 어두운 한과 그늘이 “환한 저녁”의 빛을 반사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의 “밤바다”가 “슬프”면서도 “아름다운”(「밤물 때」)까닭이 여기에 있다. 어둠 속에서 어둠이 정화되어 약하고 미미하지만 밝은 기운으로 퍼지고 있는 현상이다.  
물론,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생의 그늘이란 위에서 든, 윤성학, 박후기, 박진성, 이세기의 경우처럼 허기, 질병, 고난 등의 항목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보다 거대 인공도시 속에서의 막막한 단절과 소외의식이 더욱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그 숲엔 풍경이 없다
나무와 새 온갖 풀벌레가 가득하지만
그들은 소리내지 않는다
사방을 둘러봐도 제자리만 지키고 선
가장 그럴듯한 포즈의 마네킹들
그곳엔 소리가 없다
                                                  -이재훈,「빌딩 나무 숲」 부분

이와 같이 몰인격화, 익명화된 도회지적 삶의 일상에 대한 회의는 조동범, 고영, 박판식, 안현미 등의 시편에서도 빈번하게 변주되어 반사된다. 그러나 이들 시편 역시 앞에서 살펴 본 이른바, ‘내국망명자들’의 경우와 달리, 소통 가능한 전통적인 시적 문법을 통해 대화적 상상력의 장을 열어놓는다. 외부 세계와의 불협화음에 대해 자폐적 공간으로의 퇴행이 아니라 외부 세계에 대한 열린 교감의 장을 견지한다. 또한, 이와 동시에 현실 초극의 자기고투의 과정을 지속적으로 추구한다. 이를테면, 실어증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해, “벙어리의 옹아리”(이재훈, 「마리의 오아시스」)나마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메를리-퐁티가  지적했듯이  인간 실존은 현실 세계에 대해 부정성의 계기(완전한 자유에의 계기)만을 갖는 것도 현실을 완전히 수긍하는 계기(결정론적인 계기)만을 갖는 것도 아니다.  구체적인 인간 존재는 외부 상황과 상호 교환적인 작용을 하는 가운데 상황에 의존해 있으면서 항상 미래로 열려있는 성향을 지닌다.  아직 높은 성과를 이루어내지는 못했지만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의 미래적 가능성을 특히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4. 맺음말 : 창조적 보편의 질서를 위한 단상

이천 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신진 시인들의 목소리가 비약적으로 쏟아져 나왔다는 것은 우리사회에 적재된 숨은 차원의 새로운 질서가 표출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징후이다. 따라서  어느 시 편이 이러한 징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게 대두된다. 신진 시인들의 시집을 살펴보면, 크게 ‘새로움’과 ‘오래된 새로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의 기준은 물론 매우 이색적인 ‘새로움’의 시편이 출몰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엽기와 환상, 비유와 상징의 이미지가 뒤얽힌 ‘새로움’의 시적 유형은 사회적 질서가 전환의 극점에 도달했음을 충격적으로 선언하고 있으나, 그러한 사실을 추상적으로 일반화시키는 데 그치고 있다. 시인들 스스로 소통불능의 자폐적 성채로 들어가는, 일종의 내국망명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현실세계에 대한 반영의 한 형식일 수는 있으나 대안일 수는 없다. 오히려 사회 현실의 전복과 변혁의 생산적 에너지를 덮어버리거나 일과적으로 소모시켜버릴 가능성이 있다.
한편,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들은 구체적인 생활세계로부터의 체험적 삶을 통해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스스로 존재의 결정과 선택을 열어나가는 가능성을 지닌다. 그래서 ‘오래된 새로움’이 아직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미래적 가능성을 감당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하기에 용이하다. 특히, 좀더 자각적인 형식미학에 대한 인식이 요구되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형식미의 계승은 ‘타자의 목소리’와 교감하고 공명할 수 있는 열린 소통의 형식과 가깝다는 측면에서 더욱 고무적이다. 물론, 21세기의 미래지향적인 시대정신의 감지가 신진시인들의 몫만은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시인군에 한정해서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을 따름이며, 그것이 또한 다가오는 새로운 질서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기대도 한 몫을 했다.
  분명, 1990년대 이래 우리 사회는 가치의 다원성과 해체를 해방과 가치의 민주주의라는 미덕으로 추구해왔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과 외부세계의 연속성을 와해하고 단절시켜 개별적 파편화와 소외감의 심화를 몰고 온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다채로움의 무질서로부터의 질서, 즉 창조적 보편의 양식이 요구된다고 파악된다. 물론, 이때의 창조적 보편은 무질서의 엔트로피를 스스로 수용하면서 나오는 질서일 것이다. 열역학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프리고진은 물질과 에너지의 출입이 가능한 열린계가 평형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미시적 요동의 결과로 무질서하게 흐트러져 있는 주위에서 에너지를 흡수하여 엔트로피를 오히려 감소(무산,霧散)시키면서, 거시적으로 안정한 새로운 구조가 출현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무산 구조 혹은 자생적 조직화로서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를 오늘날의 우리 시단에서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창조적 보편의 실체에 대한 논의는 오늘날의 사회, 정치,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와 함께 진척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생활세계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이 내국망명자의 속성을 지닌 ‘새로움’의 시편보다 창조적 보편의 질서를 담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크다는 점에 대해 거듭 강조하고자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국망명주의에 상응하는 ‘새로움’의 시편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평형으로 나아가기 위한 비평형 현상은 그 자체로 과도기적인 동역학으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시작, 06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
무모한, 희망의 원리

이경수



1. 폐허를 걷는 법

최근 논의되고 있는 ‘미래파’에 관한 논의를 바탕으로 현대시의 문제와 방향에 대해 논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솔직히 좀 난감했다. 우리 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건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찬사든 비판이든 논의의 초점이 한쪽에 집중된다는 건 논의의 대상이 된 당사자들에게나 논의로부터 소외된 시인들에게나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 대부분이 이제 막 첫 시집을 낸 시인들이었으니 말이다. 여름호 계간지들의 상당수가 ‘미래파’로 지칭되었던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 논의에 할애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나로선 어떻게 하면 우리 시의 미래에 대한 좀더 생산적인 논의를 끌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됐든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 담론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의 하나로서 언제까지고 동어반복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섣불리 다른 지도를 그려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일전에 발표한 「‘다른’ 미래에 관한 몽상」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에 대해 나 역시 얼마간 매혹을 느끼고 있고, 어찌 됐든 이들과 함께 우리 시의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편 가르기 식으로 이들의 시를 매도하거나 또 다른 이분법의 함정에 빠져 ‘전부 아니면 전무’,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으로 논의를 이끌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다른’ 미래에 관한 몽상」에서 제기한 의문과 비판에 대해서는 지금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다만, 비판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 글에서는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방향에서 논의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마침 서정성의 계보를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보이는 개성 있는 시집들이 최근 몇 달 사이에 출간되어, 아직은 막연한 내 생각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최근 우리 시단의 논의를 지켜보면서 ‘다른’ 미래를 열어갈 새로운 담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작품이 받쳐주지 않는 담론이란 공허한 것임을 다시 한번 절감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록 소설을 중심으로 한 담론이기는 하지만, 가라따니 고진은 ꡔ근대문학의 종언ꡕ에서 사회 비판적 기능을 잃어버리고 사소해진 근대문학에 대해 죽음을 선언했다. 일본의 근대문학은 1980년대에 이미 종언을 고했다고 단호하게 선언하면서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국문학에 대해서는 희망이 있다고 말했던 그가 이제 한국문학도 미래가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태도를 정정한 것이 내게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나 역시 우리 문학이 일본문학이 걸어간 것과 비슷한 행보를 걷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발언을 우리의 사정을 잘 모르는 이웃나라 비평가의 발언으로 가볍게 넘겨 버릴 수 없었다.
90년대 들어 80년대 문학의 공과에 대해 평가하면서 공보다는 과에 주목하여 근대적 이분법의 한계에 사로잡힌 파시즘의 문학으로 80년대 문학을 평가하는 시선이 널리 퍼졌던 것이 사실이다. 느린 행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사람살이에 대한 관심을 철회하지 않으면서 80년대 문학의 과오에 대해 자기반성하는 시들도 씌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을 온몸으로 느끼며 우리의 문학은 사회와 역사와 윤리라는 무거운 짐을 이제 문학으로부터 덜어주고 싶어했고,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문학은 그동안 억눌러온 욕망을 발산하고자 했다. ‘문학의 위기와 죽음’에 관한 담론이 널리 퍼지며 ‘디지털 문학’과 ‘대중문화’에 대한 담론이 이전의 문학의 자리를 대신했고, 사회․역사적 상상력이나 리얼리즘, 문학의 윤리에 관한 논의는 낡은 것으로 사회적 살해를 당해 버린다. 그 와중에 신자유주의의 옷을 입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전 지구적으로 세를 확장해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졌지만, 개인의 욕망에 관한 수많은 담론들은 ‘지금, 여기’가 마치 굉장히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인양 또 다른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문학 역시 최근 담론의 추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녕 이제 문학에서 시대를 앞서나가는 새로운 전위의 역할은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인가? ‘지금, 여기’가 자유롭고 민주적이라는 환상이야말로 신자유주의가 퍼뜨린 환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학 역시 그에 대한 비판적 담론을 이끌어내기는커녕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추종하거나 그것을 조장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문제는 과거와는 달리, 이제 문학조차 그런 환상이 거짓이며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문학은 사회․역사적 상상력을 철회하면서 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마저 놓아 버린다. 이미 문화의 전위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문학에 대해 누구도 그런 역할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기능을 문학에 기대하던 독자들이 오늘의 문학에 실망하고 하나둘씩 문학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었다. 문학의 위기를 과장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최근에 제기되는 위기 담론은 문학이 언제 위기 아닌 적이 있었냐는 식으로 낙관적이면서도 다소 무심하게 받아치기에는 좀더 근원적으로 보이며, 문학의 위상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학이 여전히 사람살이에 대해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사람과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에게, ‘지금, 여기’의 문학이 위기로 다가오고 더 나아가 폐허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문학이 다른 대중문화와 차별 없이 재미와 새로움을 추구하는 스타일의 경쟁을 펼치게 된다면 솔직히 문학의 미래가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문학보다 훨씬 재미있고 새로운 스타일을 수용하기에 더 유리한 대중문화가 널려 있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 중에는 스타일의 새로움으로 시라는 장르가 가진 한계를 극복해 보려는 시도가 보이기도 하지만, 그 새로움이라는 것도 장르의 한계를 넘어서면 그리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유행하는 탈근대적 담론이 더 이상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이제 고민이 필요한 시점에 도달한 듯하다. 이 새로움이 담론을 추종하는 것은 아닌지, 새로움의 포즈만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좀더 냉정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많은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지금, 여기’는 사막이거나 폐허로 등장한다. 그들이 그리는 미래나 환상은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어찌 됐든 이 폐허를 견뎌야 할 때 폐허를 걷는 법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절망을 과장하며 냉소와 환멸의 시선으로 폐허를 걷는 자도 있을 것이며, 희망을 강요하며 또 다른 환상을 심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폐허를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묵묵히 폐허를 걸어 나가는 것일 게다. 미리 절망하여 걷기를 포기해 버리거나 오아시스라는 또 다른 환상에 사로잡혀서는 결코 폐허를 벗어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유행을 추종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세계를 담담히 개척해 가고 있는 몇몇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다른’ 미래를 구성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디디려 한다.


2. 리얼리즘과 서정성의 행복한 결합 가능성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새로움에 대한 추구가 확연히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가운데 리얼리즘과 서정성의 행복한 결합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전망하게 하는 시집들이 최근에 출간되어 주목을 요한다. 김진완의 ꡔ기찬 딸ꡕ, 이승희의 ꡔ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ꡕ, 고영민의 ꡔ악어ꡕ는 각기 다른 개성을 빛내며 리얼리즘이 아직 낡아빠진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첫 시집이다. 물론 이들의 경우 공교롭게도 1960년대 후반 출생으로 비록 끄트머리나마 386세대에 속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점을 눈여겨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세대 구분이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386세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미 오래 전에 서정의 한 축을 단단히 구축하고 있는 문태준 시인도 있고, 역시 세대적인 구분에서는 벗어나지만 서정의 계보에 세울 수 있는 손택수, 신용목, 박성우 시인도 있다. 반면 김록, 장석원 등 세대적 구분과는 무관하게 오히려 새로운 시의 첨단을 달리는 시인들도 있으니 말이다.
리얼리즘과 서정성의 결합 가능성은 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90년대 시의 특성을 ‘신서정’에서 찾는 논의들은 80년대를 풍미한 리얼리즘 시가 90년대 들어 몸 바꾸기를 시도하던 중 서정성과 결합하면서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랑말랑한 서정으로 인해 상업주의와 결탁했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90년대에 유행한 생태주의 시 역시 윤리적 정당성이 문학적 성취를 앞서면서 자연에 대한 체험이 적은 젊은 세대에게 반감을 가져오기도 했다. 유형진의 「모니터킨트」나 「피터래빗 저격사건」 연작시는 디지털 세대로서의 세대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자연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보여준다. 자연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자연이 없었다고 이들이 인식하고 있다거나 기억을 사서 유년의 고향에 대한 기억을 갖게 된 이후로 오히려 혼란스러워지고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고백이 바로 그것이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이들 세대 나름의 정직한 고백이자 자연과 서정을 특권화해 온 기존의 시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생태주의 시들이 그 담론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한계 안에 시를 가두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맥락이 이러한 자기 고백의 배후에 작동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리얼리즘과 서정성의 결합이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해서 모두가 판을 걷어치우듯 생활현실의 문제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작품은 대개 유행과 무관한 곳에서 나오는 법이니 말이다.
최근에 나온 김진완의 첫 시집 ꡔ기찬 딸ꡕ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동시대 시인들의 요란한 유행과는 무관하게 이 시집이 전통 서정의 미학을 계승하면서도 거기에 삶의 체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바탕이 된 사람살이에 대한 신뢰가 접목된 형식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등단 후 13년 만에 나온 첫 시집다운 내공을 보여주고 있는 시집인 셈이다.
김진완의 시는 「기찬 딸」, 「그 어느 잠결에」, 「굳은 살」, 「아픈 딸」 등에서 살아있는 인물 형상을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는데, 그것은 에밀 슈타이거가 말한 회감의 원리에 충실하면서도 사람살이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화자의 따뜻하고도 유머 어린 시선으로 각 인물에 세월의 깊이를 불어넣는 힘에서 오는 것이다. 기차 안에서 여러 사람의 은혜를 입어 태어났다고 해서 “多惠子”라는 이름을 얻게 된 화자의 어머니는 여러 사람의 성원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잘 살아보려 했지만, 그런 “마음은 맘에만 가득할 뿐” “빌린 돈 이자에 치여 / 만성두통에 시달”리는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화자의 어머니 다혜자씨는 “칙칙폭폭 칙칙폭폭 끓어오르는 부아를 소주 한잔으로 다스릴 줄도 알아/ “암만 그렇다캐도 문디, 베라묵을 것 몸만 건강하모 희망은 있다!””라는 말을 화자에게, 또 자신에게 건넬 줄 아는 “여장부”이다. 그의 표현대로 정말이지 “기찬, / 기-차-안 딸”(「기찬 딸」)인 것이다. 화자의 어머니 다혜자 씨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어려움도 꿋꿋하게 이겨내는 생활력 강한 어머니의 모습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형상화해낸다. 외할아버지를 통해 전해 들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어머니가 태어나던 순간의 기억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구어체를 활용함으로써 형성되는 리듬감과 의성어․의태어의 사용, 적절한 대화의 삽입 등을 통해 생생하게 장면화된다.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백석 시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걸쭉한 경남 진주 사투리가 더해져 백석 시와는 또 다른 좀더 해학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반복의 미학을 잘 살리고 있는 점도 김진완 시의 장점이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시에서 잊혀져 가던 전통적인 해학의 정서를 계승해 인물과 장면에 끈끈한 화해의 힘을 불어넣는 것은 김진완 시가 가진 특별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의 시의 매력이 여기서 멈추었다면 유행을 추종하지 않는 뚝심은 있지만 새로울 건 없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과 삶에 대한 따뜻한 애착을 보여주고 있는 그의 시는 실은 세상에 대한 아주 특별하고 날카로운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동생의 손에 백인 굳은살을 보며 남의 살이 아파서 울먹이던 시절의 자신을 기억해내는 「굳은 살」에서는 “삼팔육이고 사팔육이고 있는 것들이 더 지독해”라는 동생의 말을 빌려, 이제는 남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는 노회한 사람들이 되어버린 “삼팔육 꼬라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거기서 “그저 거품뿐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달라진 세상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인연설화 혹은,」에 오면 그 변화의 근원을 추적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주기도 한다. 100년 전 화자의 아내와 피붙이들과 전답을 강제로 빼앗고 화자를 죽이기까지 했던 악랄한 도적은 다름 아닌 ‘자본’이었음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밝혀진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다고 말해야 할” 자본은 시인의 표현대로 악연을 이어나가는 “독한 놈”인 것이다.
각기 살아 있는 개성을 지닌 사람에 대한 시인의 애정은 시집에 따뜻한 해학의 정서를 불어넣는다. 그러나 그것은 무차별적 화해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오히려 끊임없이 몸을 바꾸며 생명력을 이어가는 자본에 의해 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시인이 품게 되는 세상에 대한 근원적인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시는 리얼리즘이 폐기처분되어야 할 가치가 아니라 시인들의 각성에 의해 새롭게 실험되고 구축될 수 있는 가치임을 하나의 예로서 실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리얼리즘은 아직도 힘이 세다. 다만, 그것을 시와 접목시키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을 뿐이다.
올 1월에 출간된 이승희의 첫 시집 ꡔ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ꡕ는 386세대가 시로 쓰는 일종의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는 시집이다. 그 후일담은 벽제라는 공간을 빌려 전해진다. 벽제는 가난하던 시절 시인이 살던 곳으로 아직도 그의 누님이 혼자 노동하며 외롭게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벽제 가는 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여러 편의 시에서 이승희는 가방공장에서 일하는 누님이 살고 있는 벽제라는 장소에 대해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어려서 자신을 희생하며 시인을 “업고 키웠다는 누님”(「벽제 가는 길」)에 대한 부채의식이기도 한데, 시를 읽어갈수록 그것이 전부는 아님을 짐작하게 된다. 벽제는 시인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 누님이 지금도 힘겹게 노동하며 살아가고 있는 곳이자, 민주화투쟁에 몸 바친 투사들의 화장터가 가까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벽제에 간다는 것은 좀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젊음을 바쳤던 지난 80년대의 기억을 떠올리는 행위를 동반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80년대적인 삶의 방식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진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시인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벽제 가는 길은 단지 벽제를 향해 다가가는 물리적인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잊혀진 과거를 망각의 늪에서 끌어올리는 행위를 의미하게 된다.
가난하고 팍팍했던 그 시절을 시인은 잊고 싶을 만큼 끔찍해 하지만, 누님을 모른 척할 수 없는 것처럼 지난 시절을 잊고 살 수는 없음을 깨닫는다. 공장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소풍가자고 누님을 조르면서도 그가 누님이 사는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승희의 시에서 ‘누님’은 벽제라는 장소에 현재 살고 있는 실존하는 누님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존재로 겹쳐 읽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누님은 이승희 시인의 누님이자 그 시절을 어렵게 살아 온 우리네 누님들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누님을 향한 시인의 발언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시인의 넋두리이자 독백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는데, 그 때문에 누님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 벽제 화장터에 묻혀 있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들게 한다.
그것은 누님을 만나러 벽제 가는 길이 바로 시인에게 386 세대로서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지난 시간을 기억함으로써 찾는 행위와 겹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승희 시인의 자기 고백적 시 쓰기가 의미하는 바이다. 「벽제 가는 길」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일은 가난하다는 것인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그 순간 돌이 될 것이다.”와 같이 설의적 의문형과 명령형 어미가 쓰여 청자를 상정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화자의 독백으로 들린다.
이승희의 첫 시집에는 청승맞은 가락과 어조가 눈에 띈다. 그의 이런 어조 상의 특징을 가리켜 너무 감상적인 것이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자기 고백적 행위이기 때문에 청승맞아 보이는 어조를 동반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어머니 같은 누님 앞에 앉아-혹은 누님의 무덤 앞에 앉아- 혼자 넋두리하듯이, 이승희 시의 화자는 가난하고 고생스럽던 지난 시절이 지나가버린 과거의 시간으로 잊혀지지 않고 현재에도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누님이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이 아닐까 싶다.
둥근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그의 시에서 둥긂은 날카로움과 단단함을 품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오랜 세월 삭혀 온 날카로운 분노의 칼을 품고 있는 단단한 둥긂. 그의 시가 너그러워 보여도 슬픔을 유발하고 청승맞은 듯싶다가도 너그러운 연민의 웃음을 짓는 것은, 바로 이 단단한 둥긂, “각진 세월이 파랗게 날 세우고 있”(「돌멩이를 쥐고」)는 둥긂 때문이다. 이승희의 시는 가난했지만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이 살아 있던 지난 시대에 대한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난 시절에 대한 감상적인 향수에 젖어 그 시절을 무조건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섣불리 부정하거나 모멸하지도 않는다. 이승희의 시에서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하는 힘은 가난의 체험으로부터 온다. 그의 시에서 가난은 징글징글한 과거의 기억에 머물지 않고 시인의 현재를 끊임없이 간섭해 오는 윤리적 척도가 된다. 그의 시가 타인에 대한 유대와 연민의 시선을 획득하는 것도 바로 이 가난의 체험으로부터이다. 이승희의 시에서 그것은 도덕적 한계에 갇히지 않는데, 그의 시에서 가난이 핍진한 서사를 동반하기보다는 1인칭 화자의 고백적 어조에 기대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체험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서정적 색채를 통해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밖에도 농경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해학의 정서를 계승하고 있는 고영민의 ꡔ악어ꡕ를 주목할 만하다. 고영민 시인의 세상에 대한 태도는 시집의 맨 앞에 수록되어 있는 「즐거운 소음」이라는 시에서 잘 드러난다. 한밤중에 시인은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 건물 전체가 울”리는 소음을 듣는다. 매우 짜증나는 상황일 텐데, 그로부터 시인은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 만들기 위해 /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주는 삶의 방식을 발견한다. 나 아닌 타인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조금씩 자기의 욕심을 줄이고 자신의 자리를 내주는 태도가 필요한 법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에게 좀더 나눠 줄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이 자발적으로 가능하기만 하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만, 대개는 힘을 동원해 빼앗고 힘이 없어 뺏길 뿐, 모두가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내주어 다른 존재가 들어설 틈을 마련해주는 일이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영민이 제시하고 희구하는 삶의 태도는 너무 이상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이런 생각이 가능한 것은 그의 현실 인식이 부족하거나 낭만적이어서라기보다는 농경문화에 익숙한 그의 천성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조화롭게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꿈꾸는 시인은 모두가 자신의 자리를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 타인을 받아들여 더불어 살아가는 일이 가능함을 이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한다. “저 한밤중의 소음을” “웃으면서 참는” 것이야말로 시인이 제시하는,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태도이다.
고영민의 시에는 평생을 살면서 큰소리 한번 심각하게 내지 않은 부모가 주름진 얼굴로 따뜻한 웃음을 짓고 있다. 오래 세파를 겪어 오면서 고난조차 웃음으로 넘길 줄 아는 여유를 획득하게 된 노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미소가 그의 시에는 퍼져 있다. 그는 “마르고 닳도록 외치다 / 인이 박여 생긴 생계의 운율 / 계란 한 판의 리듬”(「계란 한 판」) 같은 시를 쓰고 싶어한다. 날마다 동네에 울려 퍼지는 “계란 사세요” 소리에는 생계의 운율이 깃들어 있게 마련이다. 고영민은 자신의 시가 책상 앞에서 씌어지는 시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땀방울과 헐떡이는 목소리를 담아 씌어지는 시이기를 바란다.
그의 시는 넉넉한 웃음을 품을 줄 안다. 아마도 그것은 농경문화적 정서에 익숙한 시인에게서 체화되어 나오는 것일 게다. 세상을 따뜻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가 늘 공감을 자아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시에서의 단절된 삶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그의 시는 자칫 안일하게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재단하려 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시는 긍정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담담히 그려 보여줌으로써 온기를 서서히 전염시키는 방법을 따를 줄 안다. 새로운 서정이라고 부르기에 고영민의 시는 아직 미흡하지만, 그럼에도 신뢰가 가는 까닭은 그가 가진 느긋함 뒤에는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섬세하게 읽어내고 요란한 포즈 없이 위로할 줄 아는 예민함과 따뜻함이 동시에 숨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밖에도 이미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중견 시인이지만, 김신용 시인이 「도장골 시편」 연작시를 통해 최근에 보여주고 있는 행보는 새로운 서정을 개척해나간다는 맥락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의 시는 도장골이라는 인적이 드문 마을의 풍경, 자연현상,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느리게 관찰함으로써 그로부터 깊이 있는 인식과 사유에 도달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들은 감성적 차원의 주관화에 그칠 위험을 안고 있는 서정성에 사색의 깊이를 부여함으로써 서정성을 확장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빠른 속도의 시대에 홀로 느리고 깊게 사유하며 생의 의미를 통찰하고자 하는 김신용 시인의 시작(詩作)은, 새로움은 발 빠른 행보만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예로서도 기억할 만한 것이다.


3. 시인의 몽상과 구원으로서의 영성(靈性)

앞서 살펴본 시인들이 리얼리즘과 서정성의 결합을 시도함으로써 새로운 서정을 개척해 나간 시인들이라면, 이 장에서 살펴볼 시인들은 자유로운 몽상을 펼쳐 보이면서도 그것이 환상을 통해 ‘지금, 여기’에 대한 환멸로 흐르지 않고 구원으로서의 영성에 이를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인들이다. 이들의 시는 ‘미래파’, 또는 ‘미래형 시’라는 범주에 포함되어 논의되기도 했지만, 특권화된 서정으로부터의 일탈을 시도하는 듯 보이면서도 궁극적으로 영성을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환멸을 유발하는 시들과는 다른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관점이다. 다시 말해 탈주체적이라거나 탈근대적이라는 수식어가 이들의 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서정을 확장했다거나 ‘다른’ 서정의 길을 개척해 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좀더 사실에 근접한 판단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함께 논해 볼 만한 시인으로는 이재훈, 박판식, 김병호 등이 있다.
이재훈의 첫 시집 ꡔ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ꡕ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몽상을 통해 그가 펼쳐 보이는 공간은 말을 타고 달리는 드넓은 평야, 즉 태초의 공간으로서의 대지라고 할 수 있다. ‘말(馬)/말(言)’의 이중성을 통해 이재훈의 시는 태초의 공간을 거침없이 달리는 활달한 상상력의 현신(現身)으로서의 말(馬)과 태초의 언어로서의 말(言)을 겹쳐 놓는다. 말의 현신을 통해 태초의 언어에 다가가고자 하는 그의 시는 자기애로부터 출발하고 있지만, 근원에 다가서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낸다. 그것은 이재훈의 시에서 종교적인 연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종교시로 귀착하지 않으면서 시원에 대한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 이것은 우리 시에서는 낯선 풍경으로, 이재훈 시인의 시가 기대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몽상을 통해 활력 있는 새로운 공간의 창출에 성공하고 있는 이 시인의 시도 자기 상처를 들여다보고 아파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나르키소스여 내 몸에 오지 마소서”(「수선화」)라는 고백을 통해 시를 쓰는 행위가 시인에게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는 시간임을 짐작하게 하지만, 태초의 공간과 언어에 다가서려 하는 시원에 대한 갈망이 그의 시가 나르시시즘에 발목을 잡히지 않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적 상상력을 활용하면서도 종교시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그의 시에서 종종 순례자의 태도가 연상되는 것은 아마도 그런 까닭에서일 것이다.
박판식의 첫 시집 ꡔ밤의 피치카토ꡕ는 한 시인을 지나간 유년의 상처와 어둠과 불치와 피로의 병력으로 빼곡한 몽상의 기록이다. 그곳에는 한밤중에 흐느끼는 어머니가 근원적 상처로 새겨져 있다. 세상으로 가는 고행의 길을 “온몸으로 채찍 받으며” “타박타박”(「화남풍경」) 걸어가고 있는 어머니의 아픔과 슬픔은 시인에게로 고스란히 유전된다. 그는 슬픔과 우울과 고뇌가 자신의 천성임을 예감한다. 그것은 마치 몸의 일부가 붙어서 어쩔 수 없이 한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샴쌍둥이의 운명을 닮았다. 지독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써봤겠지만, 결국 시인은 공존의 방법을 터득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운명애야말로 박판식 시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박판식 시인이 선택한 길이다. 이제 결과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 바로 그 과정이 시가 된다.
그는 엄살을 부리지 않고 자신에게 드리워진 운명의 어두운 그림자를 담담히 감당하면서도 만만치 않은 안간힘으로 거기에 맞선다. 그것은 박판식의 시에서 “구름의 부력”(「샴쌍둥이」), 혹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손에서 튀어 오른 “새의 반발력”(「인생의 전진」)으로 표현된다. 이 세계가, 또는 우리의 삶이 “더러운 샘”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서 “지진 같은 굉음의 푸른 줄기 하나”(「밤의 피치카토」)를 보고자 하는 의지가 그의 시에 구원의 가능성을 마련한다.
김병호는 최근에 출간된 첫 시집 ꡔ달 안을 걷다ꡕ에서 어둡고 음울한 몽상의 날개를 펼쳐 보인다. 시인의 몽상을 촉발하는 것은 어둔 밤에 떠오르는 시간이다. 검은 싹이 돋고 검은 꽃이 피는 숲에서 검고 우울한 시인의 몽상은 시작된다. “불탄 묵시록 같은 검은 숲”에는 청맹과니 마술사인 아버지와 아버지의 마지막 주문을 외워 기괴한 짐승들―“얼룩 코끼리와 혹 뗀 낙타 / 털 빠진 늙은 거위와 죽지 부러진 타조떼”―을 불러 모으는 누이, 누이를 범한 눈먼 짐승들이 살고 있고, 불탄 나무와 검은 싹과 “불길한 예언” 같은 “검은 꽃”이 피어나고, “죽은 짐승들의 피가 흐르고”(「아버지의 화원」) 있다.
생명력이 넘치는 짙은 초록의 숲이 아니라, 봄을 기억하지 못하는 숯이 된 뿌리들로 가득한, 불탄 묵시록 같은 검은 숲을 그가 몽상의 공간으로 선택한 이유는 ‘지금, 여기’에서는 더 이상 평화로운 마음의 안식처로서의 고향이나 숲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여전히, 임신한 아내와 잎 푸른 감나무가 교감하고, 아이의 생명의 기운이 가족과 친지들에게 태몽으로 미리 전해지는(「환한 길 하나」), 생명세계의 신비로움에 설렐 줄 아는 가슴을 가졌지만, ‘지금, 여기’는 봄에 관한 기억을 잃어버린 죽은 생명들로 가득하다. 그가 믿어왔고 또한 여전히 갈망하는 세계와 ‘지금, 여기’ 사이의 깊은 불화가 김병호의 시에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게 한다. 그는 아이의 태동에서 “겨울 언 강 밑을 가지런히 헤엄치는 피라미의 꼬리지느러미 같은” 생명의 기미를 느끼고, 그 “기미가 이 별을 움직인다”(「幾微」)는 깨달음에 이를 줄 아는 시인이다. 그러나 이 어둡고 암울한 세계가 시인의 감수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검은 숲이라는 몽상의 공간은 그 불화의 틈새에서 발견된 것이다.
묵시록적 전망과 생명과 일상에 대한 따뜻한 감성이 충돌하는 김병호의 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멸과 냉소에 빠져들지 않는다. “오래 전에 지운 아버지의 얼굴이 / 내 아이의 얼굴에 돋는”(「강가의 墓石」) 것을 보며, 시인은 그 시간의 유장한 흐름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어두운 검은 숲의 세계가 점점 침몰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겨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김병호 시인은 “아름다운 순장의 형식으로”(「雪害林, 그 아름다운 순장의 형식으로」) 몰락의 시간을 함께 하고자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이재훈, 박판식, 김병호 등의 시는 어둡고 우울하고 검은 몽상의 시간을 펼쳐 보이지만, 최근에 유행하는 탈근대나 탈주체적 지향의 시들과는 다른 흐름을 형성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90년대적 ‘신서정’이나 최근의 ‘환상’과도 다르고 앞장에서 살펴본 리얼리즘과 서정성이 결합한 시들과도 다른 이 시인들의 행보가 주목되는 까닭은, 자기 상처를 들여다보는 데서 출발해 어두운 운명에 절망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환멸에 발목을 잡히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며 살아가는 힘을 이 시인들이 발견할 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겨우 첫 시집을 낸 시인들이지만, 유행에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개성적인 시세계를 열어가 주기를 기대해 본다.


4. 오래된 미래

이 글에서 논한 내 생각은 시대착오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시대추수적인 시보다는 차라리 시대의 변화에 발 빠르게 따라가는 것을 거부하는 느린 시로부터 ‘다른’ 미래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근대라는 시기가 열릴 때 노래하는 시, 읊는 시로부터 읽는 시로의 커다란 변화가 있었듯이, 다시 한번 문학에 커다란 변화의 시기가 왔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시든 소설이든 문학의 위상 자체에도 변화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더 이상 시인이나 소설가는 지식인이자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지니지 않게 되었으며 비평가라고 해서 그리 다르지도 않다. 사회에서도 더 이상 그들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신문의 칼럼이나 문화 잡지의 칼럼 한 자리를 시인이나 소설가가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관례에 의한 것일 뿐 그만큼의 사회적 존경의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졌다. 그러나 문학이 새로움과 재미, 언어적 마력만으로 승부를 건다고 했을 때, 그것은 궁극적으로 만화나 영화, TV 드라마, 게임 시나리오 등과 다를 바가 없어질 것이다. 문학의 특권은 놓으려 하지 않으면서 대중문화의 상상력을 추종하거나 기존의 담론을 추종하는 것은 이미 대중문화의 상상력과 담론의 우위를 시인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이대로라면 머잖아 우리 문학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대중문화와 서로 재미와 새로움을 견준다면, 상대적으로 시는 훨씬 불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생활인의 현실은 그렇게 많이 변한 것은 아니다.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세상을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피가 돌고 웃고 울고 분노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세상의 속도에 발맞춰 가야겠지만, 그런 세상에서 느끼는 상실감과 소외감은 당연히 더 클 수밖에 없다. 기계의 부품처럼 단자화 되어 가는 세상을 살아가며 상대적으로 느리고 공들여 읽어야 하는 문학을 선택해 읽는 사람들이 문학에 기대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해서도 이제 좀더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 그렇게 거창할 필요까지도 없을 것이다. 시인 개개인이 느꼈을 상처가 좀더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학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과도한 짐을 질 필요도 없겠지만, 너무 개인적이고 사소한 상처에만 집착하는 것도 바람직한 미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문학의 상품화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이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문학이 열어가는 미래는 최소한의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기능을 지켜내는 데 위치해야 하는 건 아닐까? 물론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은 다양하게 나타나야 할 것이다. 개개의 시인이 지닌 개성적인 목소리들이 더 자기 색깔로 빛날 때 우리 시는 죽음이라는 눈앞의 현실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ꡔ근대문학의 종언ꡕ에서 가라따니 고진이 한 말은 우리 문학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게 한다. 그의 발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절망을 과장해서도 안 될 것이고, 그렇다고 우리의 사정을 모르는 남의 나라 비평가의 발언이라고 무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근대 문학의 종언에 관한 그의 발언은 많은 부분 진실을 담고 있다. 다만, 그를 따라 문학의 장을 떠나 실천의 장으로 나아갈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죽음’의 현실을 인정하고 끌어안은 상태에서 우리의 고민은 다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 시에 나타난 실험 과잉으로 보이기도 하는 징후를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찬양할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첫 시집으로 새로운 목소리를 얻고자 고민하고 있는 그들의 시를 죽음의 징후로 과잉 해석하고 싶지도 않다. 우리 시의 ‘르네상스’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는 판단이 세대론을 등에 업은 다소 과장된 욕망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분명히 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는 이들의 시를 섬세하게 읽는 것을 거부하고 싸잡아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 역시 또 다른 욕망을 숨기고 있기 쉬울 것이다. 우리 시가 오래 지속되어 온 낡은 이분법의 투쟁 속에 다시 휘말리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서로를 할퀴고 상처 내는 방식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으로 빛을 발하며, 신자유주의라는 또 다른 제국주의 논리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사회에서 숨죽인 개인이 되어가는 우리의 삶에, 그리고 예전의 위상과 빛을 잃은 채 좁은 영역에 갇혀 가는 우리 문학에 예측 불가의 이질적인 흐름을 만들어가길 바랄 뿐이다.
문학이 예전의 위상을 잃어가고 있는 지금, 그런 흐름이 떠나버린 독자들을 되돌리고 경직된 우리 삶에 균열을 내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까지는 솔직히 이 글에서 논하기 어렵다. 다만, 근대소설이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과 시가 관계 맺는 방식이 다르고, 애초에 소설에 비해 장르의 성격 자체가 좀더 주관적이고 사적인 장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면에서 근대적인 장르의 바깥, 혹은 적어도 경계에 놓여 있는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점이 어쩌면 시의 미래를 다르게 열어갈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중에 한 길은 느리고 오래된 천착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발견하는 길로 열릴 것이다. 문학의 경우, 낡음과 새로움은 결코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가장 새로워 보이는 것이 오히려 낡은 것일 수 있고, 낡아 보이는 것이 새로운 것일 수 있는 아이러니가 가능해지는 일이 묘하게도 문학의 장에서는 가능하다. 우리 문학이 다른 미래를 열어갈 가능성 중 하나는 분명 오래된 미래를 개척하는 방향에서 열릴 것이다. 다만, 그것이 적당한 서정과 적당한 온기와 적당한 화해의 포즈에 안주하는 방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어쩌면 서정성을 포기하지 않는 길을 선택한 시인들에게는 더 치열한 싸움이 필요해 보인다. 세상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분명 치열한 싸움이기도 하다. 어느 하나가 자기를 완전히 죽이고 다른 하나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바람직한 의미의 사랑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개성이 치열하게 부딪히며 공존하는 법을 터득해 가는 것이야말로 생명을 지닌 것이 다른 생명을 지닌 것을 일방적으로 해하지 않는 방식의 사랑이 아닐까. 이제 우리 시도 이러한 사랑법을 터득해 가야 할지 모른다. 아마도 그럴 수 있을 때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희망의 원리를 논한다는 것은 다소 무모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모한 희망이라도 품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으로 이 시대를 견뎌나갈 수 있을 것인가? 환멸에 중독된 우리를 구원해 줄 가능성은 무모해 보이는 희망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우리는 이미 여러 번 보아오지 않았던가? 무모해 보이는 길을 고집스럽게 가는 사람이 마침내 열어가는 길 아닌 길을 말이다.

이경수
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반년간 ≪작가와비평≫ 편집동인.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저서 ꡔ불온한 상상의 축제ꡕ ꡔ한국 현대시와 반복의 미학ꡕ 등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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