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엔 활이 들려져 있었고
다리가 말의 몸에 심겨졌지
말과 나는 한 몸이 되었지
그제야 예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어둠 속엔 많은 별이 있었지
십자가 없는 어둠,
그 불안한 시간 속에서
별을 보며 내 형상을 기억했지
가끔씩 구름에 가려 별이 안보이면
활을 쏘았지 허공 속에서 비명이 들려왔지
꺼지지 않는 촛불의 위태로움을
말 위에서 견디는 삶
그곳엔 조용한 잠도 없었지
열두 밤이 지나자 황도십이궁의 한 모퉁이에
나는 떨어졌지

새벽녘 어머니가 내 머리칼을 만지고 있었지
나는 쭈글해진 어머니 배에 귀를 갖다 댔지
말발굽 소리와 활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지
그 큰 어둠을 품고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가셨지
나는 어머니가 믿는 神의 안부가 궁금해졌지
- 이재훈, <사수자리> 부분

포스트모던 시대에 시인들은 오히려 종교적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다. 가상과 환타지가 난무하는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진부하다고 느끼는 걸까? 아니면 인간의 연약함을 감추는 또다른 몸짓일까? 시인마다 작품 속에서 복잡한 복선을 깔아두는 것은 분명하다. 십자가 없는 어둠, 그 불안한 시간 속에서 그는 자신이 만든 가짜 세상 속에 안주하며 혼자인 그는 한 가지 방법을 찾아낸다. 어머니에 기대는 것이다. 어머니는 인간에게 더없이 확실한 실체인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믿는 신의 안부가 궁금해졌지"라고 내뱉는 행태는 또한 종교에 소극적인 그들의 단면이기도 하다. 신앙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고통스런 현실에 스스로 변화되기를 강요당하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존재들에게는 말이다.
코미디언 제리 루이스는 1960년대 "내게 사실로 존재하는 것은 세 가지다. 바로 하나님, 인간의 어리석음, 그리고 웃음이다. 앞의 두 가지는 우리의 이해 밖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 번째 것과 관련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가짜 세상은 기만이다. 하지만 편안하다. 스스로 자신에 맞춰 재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가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시시때때로 우리는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도피할 수 있는 현실은 현실이 아니다. 어머니가 새벽기도를 가시며 풀고 간 어둠을 시인은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이순간 그는 스스로의 불안에 대해 진실할 수 있는 것이다.

- <유심>, 2007년 봄호 중에서
Posted by 이재훈이
,
신화는 과학이 태어나는 대지이다.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점을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초기의 사상가들로 하여금 철학적으로 사유하도록 강요한 것은 경이로움이었다…신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철학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신화라는 것이 경이로움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형이상학』, A2, 982b). 논리의 분절적 시냅스가 이루어지는 순간 신화는 과학이 된다. 신화는, 눈뜨기 이전의 과학을 품고 있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를 낸 바 있는 이재훈 시인은 서울이라는 공화국의 시민이면서도 사실은 그는 ‘자신의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의 한 주민으로서 살고 있다. 언제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안경 속의 눈빛과 온화한 무표정의 얼굴은 세계적 거대 도시 서울의 권위 있는 시 전문 월간지의 걸음 빠른 편집장이 아니라 아직은 자연과 정신이 분화되기 이전의 신화적 시대에 살고 있는 원시 부족의 자연인이다. 자동차와 전철이 무질서하게 뒤엉켜 운행하는 복잡한 서울의 중심에서 그가 거닐고 있는 곳은 황도십이궁의 한 모퉁이의「사수자리」이거나 혹은 ‘태양을 갉아 먹는 뱀’의 숲 같은 곳이다. 그는 문명의 진화를 건너뛰어 들어온 샤먼의 후예로서 신화적 위상 공간에서 거주하는 서울공화국의 진정한 무정부주의자이다.

언제부턴가 새는 날지 않았다. 나스카 평원을 유유히 날아 광대한 상상의 틀까지도 슬쩍슬쩍 엿보던 새가, 날지 않게 되었다. 사연은 있었다. 가벼운 날갯짓, 그림자 아래에서 즐기는 종종걸음의 시간이 지나자, 설움이 찾아 왔다. 새의 부리와 발톱이 꺾이고, 허기가 지면 온 몸이 숯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새는, 투명한 옷을 입고 전생의 시간 앞을 오갔다. 수면을 뛰어오르는 물고기나 굴을 빠져나온 뱀을 낚아챌 때마다 한 생이 투명하게 빛 바래는 순간을 보았다. 새는, 눈이 멀었고 노래를 배웠다.

내 스무 살은 노래였다. 거리에서 배운 노래가 목청으로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그것을 먼 이방의 방언이라 여겼다……새의 등에 올라타고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으며 나스카 평원에 새겨넣은 神의 형상을 한눈으로 보고 싶었다. 나는, 어떤 법을 배웠던가. 노래하는 법 말고는 배운 것이 없다. 눈 먼 한 마리의 새가 내 머리칼 속에서 둥지를 틀고 있었다. 새의 전생은 자유였다고 평원을 돌보던 파수꾼이었다고……

                                        -「나스카 평원을 떠난 새에 관한 이야기」부분

  융은 의식과 무의식의 해리를 현대의 심각한 정신적 문제로 지적하였지만, 보다 근본적이고 내재적인 문제점은 정신과 육체의 격리적 사고이다. 정신과 육체는 분리되어 있지 않은 하나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정신과 육체의 유리적 상황을 경험한다. 신체에 대한 정신의 격리는 곧 신체기관의 전경화로서 인격의 부재화를 의미하며 인간이 하나의 도구이자 수단으로 전락함을 의미한다.
  한조 시대에 정위라는, 백황기술자는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소량의 물질을 반응용기에 넣어 은으로 변하게 하자 그 비밀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댄다. 하지만 아내가 그것은 운명적으로만 전수될 뿐이라고 하자 정위는 그녀를 위협하여 결국엔 미쳐서 죽게 하고 말았다. 연금술은 영적 본질을 물질계에 구현해 보임으로써 영성을 깨닫게 한다. 그녀가 죽으면서까지 그 기술을 알려줄 수 없었던 건 어떤 영적 가치의 문제와 결합되어 있는 때문이다.
  자신의 영혼에 가하는 모욕만으로도 우리는 신체기관의 주체자로서 정신과 신체의 해리적 공황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체에 대한 체벌이나 가학 행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신체기관의 전경화에 따른 영성 부재 의식은 인간을 인격체가 아닌 하나의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케 한다.
  정신분석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분리한다. 융이 환자를 전인적 인격체로서의 자기 완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과는 달리 프로이트는 환자를 리비도적 신체기관으로 환원한다. 그것은 어떤 경우 견딜 수 없는 치욕이자 고문일 수 있다. 치료를 거부하고 미치광이로 살아가게 한 도라 양의 경우는 초기의 프로이트가 전이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실수였다고 하나, 문제는 보다 근원적인 곳에 있다.
  타인 즉, 영성 부재의 신체기관은 권력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권력이 기록되는 양피지 혹은 신전을 건축하는 한 장의 벽돌 같은 것으로 상징화 된다. 도구화된 인간의 신체기관은 자신의 기호체계 또는 하나의 기표로 인식될 뿐이다. 푸코는 일찌기 ‘몸은 권력을 각인시키는 장소이자 권력의 문화를 새겨 넣는 매체’로 인식하였다.
  사회의 검은 무의식의 휘장 속에 감추어진 신체기관의 전경화 또는 영성 부재 의식은 오늘날 심판, 성전, 민주화 또는 정의, 평등, 규범이라는 이름 등으로 개인과 사회, 국가 간 서슴없이 자행되어지고 있으며 또한 ‘문명의 충돌’ 같은 표제 하에 인류학적 서고의 깊숙이 은폐되어진다.  

- <문학마당>, 2007년 봄호 중에서
Posted by 이재훈이
,
3. 몰록의 기계들

  과열된 기계는 멈추지 못한다. 불타는 제물처럼 우리를 고갈시키고 쓰러뜨리는 기계는 악마적으로 가동된다. 일상의 회전벨트에 실려가며 비명을 지르는 커다란 입은 이 세계의 균열이다. 마치 황량한 패잔병들이 널부러진 전쟁터처럼 지친 술꾼들이 창백하게 널려있는 황량한 대도시를 상상해보라. 버겁게 가동되는 세계를 견뎌내기 위해 우리는 서로에게 치명적인 이방인이 되어가며, 서로를 배신한다. 몰록신은 불가능한 업무를 강요하는 보스의 모습 혹은 의사당과 스타디움 어디든 모습을 감추고 있다. 우리는 이 세계가 주입한 성공의 신화를 위해 상관의 호의를 부적처럼 훔치고, 파멸이 예정되어 있는 사랑의 장소를 받아들인다. 경쟁에 지친 아이들은 유서를 쓰고, 밤마다 기어드는 스크린은 흡혈귀의 칼날을 쏟아낸다. 공포가 오락이 되고, 사랑은 기계인형을 껴안고, 법은 상습적인 부패로 물들어있다. 몰록신은 철저히 시스템 속으로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다. 몰록신의 음성은 시끄러운 메탈음 속으로 스며들고, 악마의 눈은 시뻘건 네온빛으로 번득인다. 심야에 달라붙은 게임모니터들, 아직도 더 받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오만한 계산대들, 진실이 결핍된, 그저 모든 것을 잊고 참아내야 하는 세계에 몰록신은 서 있다.
  이렇게 알 수 없는 악의 기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실한 언어를 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세계는 늘 투명한 ‘유리’처럼 신념과 확신을 흩뿌리지만, 그것은 결코 온전한 진실은 아니다. 이재훈의 시는 이 무서운 세계의 화려함과 그 이면의 어두움을 마주 대하며 자주 어떤 ‘진실’에 대한 갈망을 노래하고 있다. 시 속의 화자는 마치 수난을 앞둔 메시아처럼 혹은 긴즈버그의 <울부짖음>처럼 “북한산 밑에서 밤새도록 통곡의 기도를 하지. 항문에서 시커멓게 멍울진 피가 흘러내리지. 나무를 움켜잡고 소리를 지르지”(이재훈 <순례2>)만 “악령의 창”같이 존재를 찔러대는 통증은 멎지 않는다. 시인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대환란’의 날이다. “수만의 별을 넘어”가도 안전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악의 암운에 뒤덮힌 말세처럼 시 속의 화자는 “나는 눈물도 흘리지 않고 사람을 죽였”(이재훈 <공중정원3>)다는 범죄의 자기증언을 토해놓고 있다. 모호한 악의 기류에 오염되어가는 세계의 초현실적인 위험을 그는 감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편의 시를 읽어보기로 하자.  

  맨발로 유리밟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의 머리가 내 발바닥을 찢는 수런거림을 듣는다. 수행자처럼 온 땅을 모두 밟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땅은 너무 넓어. 내 온기가 기댈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 그 사이의 위태로운 희망, 그리고 낯선 꿈들뿐.

  내가 밟는 유리의 온기를 기억하고 싶었다. 그 뜨거운 감촉. 두꺼운 군살을 비집고 환한 몸으로 날 찾아오는 신비. 유리를 밟으며 축제를 연다. 붉은 포도주가 흐르는 식탁. 얼굴에 분칠을 하고, 혀에 피어싱을 하고, 히피처럼 연기를 피워올린다. 치렁치렁한 푸른 옷을 입고, 방안을 빙빙 돈다. 사각사각 유리가 몸 안에서 춤을 춘다. 두려움은 없다. 정작 두려움은 예언자의 눈, 인디언의 귀, 언고기를 사각거리는 알라스카의 몽골리안을 그리워하는 것. 生의 분노도 잊은 채, 태평하게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하는 내 입술.
(이재훈 <순례> 부분)

  시 속의 순례자는 “온기가 기댈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 그 사이의 위태로운 희망, 그리고 낯선 꿈들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붉은 포도주가 흐르는 식탁. 얼굴에 분칠을 하고, 혀에 피어싱을 하고, 히피처럼 연기를 피워올”리는 광폭한 유희 속에서도 그는 ‘그리움’을 버리지 못한다. 세속도시에 파묻혀 환락과 탕진으로 고갈되어가는 존재에게 “예언자의 눈, 인디언의 귀”같은 것은 너무나 갈망이 지독해서 도리어 두려워지는 꿈이다. 결국 “生의 분노도 잊은 채, 태평하게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하는 내 입술”은 진실의 땅을 어듬어 찾는 ‘순례’를 꿈꾸지만 궁극적으로 ‘관’같은 일상의 공간으로 다시 기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일상이라는 지능적인 시나리오에 빼앗긴 네 몸을, 경멸한다”(이재훈 <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 결국 이 세계가 부여한 장소에서 지능적인 시나리오에 따라 꼭두각시 배역을 고수해야만 하는 일상의 작동자는, 몰록신의 기계요 사이보그(cyborg)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존재의 행동, 사유 모든 것을 세계의 가동모드로 전환시키는 잔혹한 힘의 지배 속에, 존재가 상실한 것은 무엇이고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번뇌로운 질문이 끌려나오는 것이다.

- 현대시, 2007년 3월호 부분
Posted by 이재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