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적 낭만의 순간


  박수연



  시집은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로 마무리된다. 이 말은 서정시의 보편적인 발화방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재훈의 시집은 그의 실제 삶과 분리된 또다른 삶을 “나”의 정처로 삼은 말들의 저수지이다. “나”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그의 시가 고정성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시에 대한 옳은 이해가 아니다.
  말은 본디 뛰노는 것이다. 말(馬)도 그렇고 말(言語)도 그렇다. 전자의 말은 이미 만들어진 길을 가로질러 넘어다니는 실제적 생명체이며 후자의 말은 지금까지 소비된 적이 없었던 의미를 끄집어내어 세계의 비약을 이루어내는 기호이다. 이것들은 그러므로 논리화되거나 체계화되기 이전의 어떤 마음들에 대해 최초로 활성적 힘을 부여하는 존재들이라고 해야 한다. 이것이 지속적으로 움직이며 탄생하는 존재들의 최초의 이유이다. 그리고, 시의 존재 이유가 그럴 것이다. 잘 만들어진(혹은 솟아나온) 시는 세계와 최초로 만나는 존재들의 육성이다. 이렇다는 점에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시적 계기에 대한 보고서이다. 이 점을 알아보기 위해 몇 개의 계단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재훈은 시적 정황들에 대한 낭만적 구성의 재능을 이 시집 하나로 일약 보여준다. 이는 특히 시의 언어들을 수려하게 배열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이 시행과 시행 사이의 간격을 넓게 벌려 놓고 일반적인 언어 논리로 규정되지 않는 의미들을 다차원적으로 부려놓는다는 사실에 대해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낯선 언어들 때문에 일견 난해해보이기도 하는 이런 경향들에 대해서는 되도록이면 상식적인 선에서 그 작업의 의미를 파악해보는 일이 필요하다. 일반론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작업의 특이성 또한 소통되기 힘든 개체성으로만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별체들의 특이성이란 일반성의 차원 위에서만 작동하는 힘의 운동으로 구성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젊은 시인들의 독특한 언어사용 방식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혹은 성공한 것이든 실패한 것이든, 기존의 언어 체계를 교란시킴으로써 새 세계의 환기에 도달하려는 의도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시의 무게 있는 경향은, 90년대 이후 인문사회학계의 언어학적 문제설정과 강하게 연동되면서 시적 언어의 의미와 존재방식에 대해 발본적으로 질문하도록 하는 효과를 갖는다. 이것을 의사소통의 난항이라는 이유를 들어 평가절하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닐 것이다. 모든 언어 사용 방식에는 각각 제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 새로운 언어 사용이 얼마나 애초의 의도를 실현하고 있는가 하는 점임에 틀림없다. 이재훈의 시는 그런데 그 새로운 시의 경향에서 일정하게 비켜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 모습이 낭만적이라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시의 주제면에서 도드라진다.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의 머리가 내 발바닥을 찢는 수런거림을 듣는다. 수행자처럼 온 땅을 모두 밟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땅은 너무 넓어. 내 온기가 기댈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 그 사이의 위태로운 희망, 그리고 낯선 꿈들뿐.

  내가 밟는 유리의 온기를 기억하고 싶었다. 그 뜨거운 감촉. 두꺼운 군살을 비집고 환한 몸으로 날 찾아오는 신비. 유리를 밟으며 축제를 연다. 붉은 포도주가 흐르는 식탁. 얼굴을 분칠을 하고, 혀에 피어싱을 하고, 히피처럼 연기를 피워 올린다. 치렁치렁한 푸른 옷을 입고, 방 안을 빙빙 돈다. 사각사각 유리가 몸 안에서 춤을 춘다. 두려움은 없다. 정작 두려움은 예언자의 눈, 인디언의 귀, 언 고기를 사각거리는 알래스카의 몽골리안을 그리워하는 것. 生의 분노도 잊은 채, 태평하게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하는 내 입술.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가 내 몸을 돌고 돌아 검붉은 내장을 모두 만난다면, 늦은 밤 가냘프게 흔들리는 마음까지 싹둑 잘라버린다면, 나는 백치가 되리. 내 몸이 된 유리. 너의 촉감밖에, 소리밖에 모르므로 나는 불구다. 저기 저쪽, 나처럼 맨발로 유리 밟으러 가는 젊음들. 땡볕 아래 꽃들이 붉은 햇살을 게워내고 있다. 절정이다.
                                     ―「순례」 전문

  삶이 고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만 그 고행을 실체로 감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령, 유리를 밟는 소리는 그것의 감각만으로도 소름끼치는 반응을 이끌어내게 되는 것이다. 이 감각은 그러나 대상에 직핍해 들어가도록 하는 매개물이기도 한데, 이재훈에게는 그것이 “희망” “전설” “절정”의 맥락 아래 배열된다. 이를테면, 끔찍한 기억의 감각은 절정에 도달하는 교두보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감각의 기억으로부터 시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도록 하자. 모든 시에 대한 것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어떤 시는 애초에 세계의 부재와 결여에 대한 기록으로 출발한다. 언어가 세계의 압도적인 숭고함에 대면하는 인간의 보잘것없는 행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또한 인간은 그 언어에 주술성을 부여함으로써 삶의 초라함을 벗어나려 한 존재였다. 이 벗어남의 행위가 은유를 구성할 때 표현될 수 없는 세계가 언어에 포함될 수 있다고 믿은 것도 언어를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요컨대 감각은 여전히 세계의 두려움에 기인하는 고통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의미가 은유적 확장에 의해 언어에 도입된다. 세상은 여전히 압도적인데도 그 세상을 표현하려 하는 언어가 위로의 힘을 부릴 줄 아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의 은유는 무엇보다도 대상의 감각에 대한 언어적 표현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시는 생각하기 이전에 듣고 보는 행위이며 감각하고 지각하는 행위이다. 인식은 그 이후의 문제이다.
  「순례」는 “유리 밟는 소리”의 끔찍한 감각에서 출발하여 “절정이다”라는 간명한 진술로 끝난다. 시는 이를테면 감각으로 시작되고 인식으로 마무리된다. 이렇다는 의미에서 이 시는 시적 탄생의 보편적 경로를 개별적 시의 계기와 겹쳐 놓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감각에서 인식으로 나아가는 통로의 기본적인 동력은 “위태로운 희망” “낯선 꿈” “이방의 전설”을 거쳐 “저기 저쪽, 나처럼 맨발로 유리 밟으러 가는 젊음들”로 표상되는, 현실 저편에 대한 간절한 희구이다. 희구 이전에는 생의 고통을 시적 탐구의 미려한 정황으로 환원한다는 사실도 지적해두기로 하자. 언어도 그럴뿐더러 정황도 마찬가지인 이 미려함이야말로 이재훈의 시집 전체에 펼쳐져서 그의 시적 기율을 알게 해주는 요인인데, 「순례」는 그것을 “땡볕아래 꽃들이 붉은 햇살을 게워내고 있다”는 진술로 압축한다. 고통의 미적 전환이라고 할 만한 움직임이 여기에는 있다.
  이 전환이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를 낭만적 유미주의의 육성으로 읽도록 한다. 시편들의 대부분은 현실 저편에 대한 지향을 보여주며 그 틈틈이 낭만적 지향을 촉발시키는 비정한 현실이 배경처럼 깔린다. 「빌딩나무 숲」이나 「마라의 오아시스」 「거리를 훔치다」에서 표현되는 삶은 도시의 거리에서 상처받은 채 숨가빠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존재의 비망록이다. 이것이 배경이기 때문에 현실 저편은 열렬히 탐구되거나 지향되어야 하는 세계가 될 것이다. 그 세계의 온전성이 이재훈 시의 형식적 정결성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러므로 감각적 고통을 가져다주는 현실을 낭만적 극복의 미적 정결성으로 바꾸어 놓는 전형적인 예라 할 만하다.
  현실의 결여를 넘어서도록 하는 언어적 탐구가 아름다움의 정결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현실의 고통을 시로 보상받으려 한다는 사실을 뜻할 것이다. 이것은 따라서 현재적 고통의 대가를 미래적 보상으로 유예시킨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래로 유예된 보상이란 그러나 시의 내부 혹은 시인의 내면에서만 근거가 확보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시인의 외부에 있는 바로 그 결여된 현실이란 실제로는 어떤 것도 보증해 줄 수 없는 부정성의 세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시인이 택할 수 있는 것이 내면으로의 침잠이며 내면의 광휘에 녹아드는 일이다. 이재훈의 시가 현실 너머의 저편을 지향하되 그 지향운동의 장소를 나르시스적 탐구로 채워넣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수선화」는 지금 이 순간의 결여와 부재를 “한밤중”이라는 충만한 시간의 생성으로 전환시키고 보상받는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아아, 아 에코가 메아리치네, 아름다운 내 몸, 거울에 비추어, 아아아 에코가 흐느끼네, 내 몸이 하분하분 물기에 젖네”(「수선화」)라는 말로 부각시키는 자기애는 결국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는 사건의 구체화에 답한다.
  시인에게 내부로 침잠하는 사건이란 동시에 시 내부로의 집중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재훈 시의 미려함은 여기에서 또하나의 계기를 부여받는다. 이 계기는 언어에 대한 집중이기도 할 터인데, 그것이 그의 시 속에서 고통과 함께 하여 지속적 생성의 국면에 대응하는 “말”의 이중 의미이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어찌되었든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시인의 삶에 대한 보고서이다. “말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뱃속에서 말의 새끼들이 뛰어나온다”는 진술이 말(馬)의 생태를 지시한다면 “밤이되면 나는 시를 쓴다/거리의 곤고함에 대해/꽃이 침묵하며 피는 이유에 대해/아는 척 쓰다가 말다가 결국/”말은 태양을 잉태했다“고 쓰다가”는 또다른 말(言語)의 생태를 알려준다. 이 두 가지 말의 생태가 모두 “뱃속”과 “잉태”라는 언어를 이용해 그 생태의 정황적 요인을 환기한다는 점과 관련시켜 보면, 이재훈에게 시란 내부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에 대한 언어적 집중이라고 할 만하다. 이를테면, 시인은 내부에 집중하면서 사건을 펼치는 언어의 주인이다. 이것을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비난할 근거는 없다. 오히려 이재훈의 시에서는,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와 비교해본다면, 언어적 낙관주의라고 할 만한 것이 눈에 띄는데 이는 그의 시가 그의 상상세계에 대한 분명한 은유적 효과를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서 도드라진다. 이 은유적 기율이야말로 그의 시에 낭만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의 시는 세계에 대해 어떤 순간의 압축적 동일시를 표현하는, 최근의 시단에서는 흔치 않은, 영역을 건설하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도 그렇다.  
 
  흰 눈을 만나기 위해
  폭염을 견디었는지 모른다
  먼 기억으로 터져나오는 울음소리,
  도시의 거리와 거리,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엉켜 태연히 입 맞추는 소리,
  이 땅은 풀벌레 소리도 서러움이다
  마음이 없는 몸을 질질 끌고
  미술관으로 가서 꽃 가득한 정물화를 본다
  지지 않는 꽃, 수없이 그리워하고 약속했던 꽃
  나는 그림 속의 화려한 상징에만 골몰했다
  마음이 없는 몸을 질질 끌고
  시위대를 지나고 학교를 지나고
  걸음을 멈추게 했던 대현 전광판을 지난다
  역사도 없고 분노도 없는 권태로운 시간을
  홑날로 벼리는 젊은 어깨의 그림자
  그림자들이 서로 만나 어둠을 만들고
  어둠을 지키기 위해 네온사인이 하나 둘 켜진다
  어제의 일이 까마득하다
  하룻밤 새
  이마 위에 주름이 깊어 눈이 감기고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차가운 결정(結晶),
  그 위에 금빛 새가 발자국을 찍고
  푸드득 날아오른다
         ―「결별의 노래-성배(聖杯)를 찾아서」 전문

  “울음소리”가 있고 “서러움”이 있는 반면에 “마음이 없는 몸”이 있고 “권태로운 시간”이 있다. 그러니까, 심한 정서적 굴곡이 한꺼번에 배열되어 있는 세계가 눈앞에 있다면, 이것은 시인의 내부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의 파노라마에 다름아닐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역설적으로,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솟아오른다. 그것은 시의 마지막 네 행에서 표현되는 것과 같은 신생의 사건이다. 이것이 결정적인 것은 비정한 세계의 결정(結晶)인 눈보라가 금빛 새의 비상으로 전환되는 일이 갑자기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재훈의 시적 은유는 이런 방식으로 세계의 파노라마 속에 배열된 대상들을 한순간 압축하는 동일시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이렇게 삶의 비루함 이면을 순간의 황홀함으로 역전시키는 내면의 보고서를 만들어낸다. 이 보고서는 근래에 보기 힘든 낭만적 정신의 고투라고 할 만하다.

- 현대시, 2005년 1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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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후예
― 이재훈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김태형
(시인)



천일 동안의 무수한 밤이 이어지고 또 하루의 새로운 시작이 거듭되는 곳에서 “잃어버린 기억”(「시인 세헤라자데」)을 하나하나 더듬어나가는 이가 있다. 물의 기억 속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펄떡펄떡” 고통스러운 몸을 꿈틀거리는 자의 밤은 격렬하다. 하루하루 또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새겨야 할 새로운 기억들이 끝없이 반복되거나 변주되고 아득한 후렴구를 거느리면서 숨결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노래가 비롯된다. 섣불리 노래가 끝나서는 안 된다. “완벽한 미완성”이 되어야 한다. 아직 날이 밝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의해 사로잡힌 자, 그래서 “불 켜진 창”(「까마귀 속에 나의 시간이 있다」)에 갇혀 있는 자의 노래는 밤의 언어로 가득하다. 날이 밝으면 밤하늘 너머 시간의 허방을 날아오르던 새의 죽음을 다시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 좌절의 연대기가 첫 장을 열기도 전에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밤이 되어서야 먼 기억의 세계로 떠나는 초시간성의 상상 세계가 시인의 목숨을 담보로 펼쳐진다. 그 환한 밤의 시작을 알리듯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방안을 들여다본다. 까마귀는 어둠 속에서 태어난 태양의 새다. 어둠의 휘장을 펄럭이며 낮의 일광 속을 날아다녀야 하지만, 이 태양의 새는 정작 밝은 빛 속에 깃을 치지 못하고 밤의 창가에 내려앉는 추방된 자의 비애를 삼킨다. 이 까마귀와 마주하는 시인은 어딘가 까마귀가 날아왔을 또 다른 세계를 들여다본다.

그곳에는 황소가 억센 뿔을 세우고 있으며 긴 허리를 둥글게 구부려 가볍게 숲속을 뛰어다니는 사슴의 무리로 가득하다. 밤의 동굴 속에는 오래 된 벽화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원시의 시간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어둠의 자궁이 활짝 벌어진 동굴의 깊은 곳으로부터 대초원이 시작되고 야생의 거친 말 위에 올라탄 추장의 노래 소리가 북소리처럼 웅장하게 울려 퍼진다. 급기야 이 말은 도시의 음습한 거리까지 뛰쳐나와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한다.

동굴은 “불 켜진 창”을 가진 유폐된 자의 거처이며, 동시에 “말과 나는 한몸”(「사수자리」)이라고 인식하는 황홀한 꿈의 자리이다. “쭈글쭈글해진 어머니 배”로 불려지는, 바로 시인이 태어난 성소이다. 시인은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지상에 유폐되기 이전의 “그 불안한 시간”을 다시 살아보고자 한다. 별빛을 통해 나를 인식할 수 있었던 곳,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허공을 양해 활을 쏘아 올리던 그곳으로 시인은 귀를 바짝 갖다 댄다.

그래서 시집 곳곳에는 종교적 인유(引喩)나 자기동일성의 신화적 재현, 탈역사적인 신비로운 상상으로 가득하다. 혼돈(Babel)의 탯줄을 끊고 첫 울음 울던 태초의 풍경은 도시의 빌딩 속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곳엔 소리가 없다”(「빌딩나무 숲」). “어머니, 하고 부르면 침묵만 되돌아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목소리만 공허하게 울리는 도시의 중심에는 콘크리트 빌딩나무가 자라고 있을 뿐이다. 울림도 없이 되돌아오고야 마는 자기중심적인 세계야말로 바로 ‘폐허’를 재생산하는 곳임에 틀림없다. 그에게 남은 믿음은 ‘현대’라는 맹목적인 종교를 거부하는 이교도의 삶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현대’를 무작정 이탈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찾아가는 일은 자기 목소리에 매달리는 일이 아니라는 도시거주자의 꽤나 의미심한 전언을 시인은 남겨놓는다.

나르키소스처럼 폐허가 된 죽음의 자리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다. 자기의 목소리만 자기 안에 울려 퍼지는 빌딩나무의 완강한 숲을 지나 급기야 자기 몸에 수선화의 꽃씨가 내려앉는 밤의 긴 침묵을 마주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 도시를 한순간 부정해버릴 방법이 없다.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그가 찾아가야 할 성소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거침없이 내달릴 초원도, 언덕을 하나 넘으면 펼쳐질 시원도 그에게는 멀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그의 순례는 제프리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처럼 위트와 해학, 무용담으로 넘쳐나는 이야기 사슬을 엮어나가지 않는다. “건물과 건물 사이, 그 사이의 위태로운 희망, 그리고 낯선 꿈”(「순례」)을 찾아가는 순례의 여정은 도둑이 들끓고, 마차 바퀴가 빠지는 진흙탕의 먼 길이 아니라 “방 안을 빙빙” 도는 제의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질베르 뒤랑의 말을 풀어내면, 제의는 부재(不在)를 재현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상징 자체를 새로운 구체적인 의미로 생성하는 독자성을 가진다.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들으며 그 유리조각이 살을 찢고 흘러내리는 피로써 거행되는 밤의 제의는 “불 켜진 창”에 유폐된 자의 유일한 몸짓이다. 역설적이게도 자기가 발 딛고 있는 도시 문명의 현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일탈의 꿈을 이루려는 행위이다.

섣불리 자연에 귀의하지 않고, 작위적인 환몽 속에서 현실을 되레 왜곡하는 거짓된 부정의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대상을 왜곡하면서까지 이루어지는 부정의 방식은 또 다른 부정을 부를 뿐이다. 진정한 부정의 발화는 자기 목소리만을 듣는 닫힌 귀를 갖고 있지 않다. 새로운 말은 그것을 다시 부정하는 순간 태어난다.

생명의 샘(「마라의 오아시스」), 마른 목을 축여줄 정원의 샘(「공중정원2」)을 찾아가기 위해서 불을 타고 오르거나 허공에 발을 내미는(「공중정원3」) 이 영원한 꿈의 시민(市民)은 먼 길을 걸어가는 그 어떤 순례자의 고단한 하루보다 긴, ‘무너진 시간’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새로운 공중의 시민은 금빛 새가 날아오르는(「결별의 노래」) 곳으로 우리를 이끌며 잃어버린 노래를 다시 기억해내어 들려줄 것이다. 그가 열어 보여주는 최초의 말들을 여전히 나는 어둔 귀로 더듬더듬 따라가게 될 것이다. 신성한 별들이 떨어지는 쭈글쭈글한 동굴 속의 어둠을 향해 누군가 또 바짝 귀를 대어볼 것이다.

(『시평』, 2006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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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호흡과 비전
-이재훈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손진은(시인, 경주대 교수)



  1.

  최근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출현으로 한국 시의 지형도가 재편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젊은 시인이자 평론가인 권혁웅이 ‘미래파’라고 명명한 이 경향은 한국시의 물줄기에 새로움으로 수혈될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 문학판의 변화로까지 어어질 수 있는 문화적 감성에서 배태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다만 이들의 움직임이 60년대의 김수영, 80년대의 이성복, 황지우가 감당했던 에너지로까지 승화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고서 말이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문단은 그 주류적 흐름으로 ‘생태시’를 꼽는 데 주저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생태시의 부상에는 인간우위적 가치관의 붕괴와 대안을 마련하려는 입지점이 놓여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생태시, 에코페미니즘적 경향은 이제는 별다른 문제의식도 없이 삶의 체험이나 철학도 없이 누구나가 시도하고 있는 시적 관행으로 굳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90년대부터 큰 흐름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이제 완연히 자리를 잡은 서정시 본연의 위력과 광휘를 보여주는, ‘부드러운 서정’이리고 일컬을 수 있는 시적 맥락이 있다. 그런 시인들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야 없겠지만, 여기에 포괄될 수 있는 시인들은 대체로 나희덕, 장석남, 이정록, 박형준, 문태준, 이윤학 등이고, 이전 세대들인 천양희, 이시영 등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겠다. 이들 세계와는 변별되는 지점에서 존재의 깊이와 서정을 보여주는 시인들이 있다. 김명인, 이성복, 오규원, 최하림, 김사인, 고재종, 조용미, 김기택, 송찬호, 최정례 등의 시인들이다. 이들은 많은 시인들이 생태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그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내면 성찰이라 존재의 깊이 쪽으로 물꼬를 틀어 한국시가 철학과 사상을 내면에 거느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흔해빠진 비유를 통해 흔해빠진 우리들 삶의 모습, 그 허망과 음험함을 비극적 정서로 탁월하게 드러낸 이성복의 『아, 입이 없는 것들』 같은 시는 한국시가 이를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지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과거 민중문학이 가지고 있는 현실성은 담지하되 부족한 부분이었던 깊이를 확보하는 시적인 경향으로 김신용, 이기인 등의 현장을 다룬 시들을 꼽고 있는 평자들도 있다.    
  그러나 ‘미래파’들은 이런 문화적 지형도를 바꾸려하고 있다. 그들은 세계와 자아의 행복한 일치를 기조로 하는 서정시 본연의 문법이 못마땅한 것이다. 이성과 관념 이전의 원초적인 시어로, 이 세대의 문화감각으로, 이미지의 분열적 분방함과 해체적 언술로 시단의 앙팡테리블로 불려지길 희망하고 있다.


  2.
 
  이재훈도 그런 일군의 무리들에 해당하는 시인이다. 그 역시 무의식과 환상과 분열적 내면의 풍경을 다루는 사유의 혼종성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이들 시인들과의 변별점은 이재훈이 시원의 언어를 향한 순례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그는 기원에 대한 탐구로 시작의 실마리를 연다. 이 글은 우리 시단의 새 목소리라고 명명되는 이재훈의 시가 어떤 지점을 거느리며 자신의 세계관을 열어가고 있는가를 고찰한 기록이다.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
말은 내게 뱃속을 열어 보여준다
건강한 줄기를 먹고 자란 말
(……)
아프다, 말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뱃속에서 말의 새끼들이 뛰어나온다
(……)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부분

  이성적인 사유체계로 길든 독법으로는 쉽사리 읽을 수 없는 시이다. 어떤 점에서 이 시는 결여와 부재의 언어 사이에서 최초로 태어나는 말에 대한 이재훈의 사유를 보여준다. 보이는 질서와 체계는 이미 없다.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 주체가 기댈 “기억의 언덕도 무너지고” 없다. 이재훈은 기원이 사라진 시대에서 말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지난한 작업을 자신의 시 창작의 첫 번째 질료로 삼고 있다. 여기서 말은 말(馬)이면서 말(言)이고, 또한 그 가치의 신념체계를 넘어선다. 그러기에 발굽 소리가 들리고 벽에 붙어 있기도 하며, 그것으로 한정되지는 않는다. 만지면 황소가 되고, 사슴이 되고, 초월을 가로지르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탄 추장이 된다. 마침내 그 뱃속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이재훈에게 ‘말’은 말이라는 시니피앙에 대한 수많은 인접혼란을 겪어 새로이 태어나는 어떤 힘이요, 빛이나 공기 입자의 산란처럼 의미의 비좁은 틈을 뚫고, 그 사유의 혼종성 속에 태어나는 생명이다. 이는 소통을 위주로 하는 언어 체계에 대한 신선한 위반이요, 경계 넓히기이다. 그러나 이재훈은 의미 없는 교란에 머물지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환기의 표지로 언어를 이끌어간다. 마침내 자신의 목마저 자르고 자신의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의 추장이 된다. 이는 이재훈의 시가 이성보다는 감각과 정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재훈의 이런 시적 경험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그가 “거리의 곤고함”으로 표상되는 이 시대의 삶과 문화를 외면하지 않고 있다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거리의 곤고함이 그를 이러한 세계로 이끈 내적 동인이 되는 것이다. 시집의 첫 작품이 「사수자리」라는 사실은 이런 그의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거니와 ‘평원을 떠난 새’, ‘기적’, ‘공중정원’, ‘도시의 물관’, ‘마라의 오아시스’ 등 그의 시 제목이 환기하는 정서는 환멸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정치문화적 함의를 짐작하게 하는 다양한 기호들로 가득차 있다. 말하자면 ‘사수자리’, ‘마라’와 같은 천문학적인, 성서적인 공간의 인유는 그가 이 시대를 바라보는 표지가 환멸이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 “아무도 면회 오지 않는 숲에서/나는 이교도가 되었다”(「빌딩나무 숲」)가 시인은 말한다.

밤이 되면 말을 타러 갔었지
잠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깊은 동굴이었지
(……)
나는 편자를 갈고 있었지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같았지
빛이 어둠을 갉아먹기 시작할 때
하늘에서 별이 하나씩 떨어졌지
말이 내 앞에 와서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지
(……)
열두 밤이 지나자 황도십이궁의 한 모퉁이에
나는 떨어졌지

새벽녘 어머니가 내 머리칼을 만지고 있었지
나는 쭈글해진 어머니의 배에 귀를 갖다댔지
말발굽 소리와 활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지
그 큰 어둠을 품고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가셨지
나는 어머니가 믿는 神의 안부가 궁금해졌지
-「사수자리」부분

  화자인 나는 사수로 설정되어 있다. 이 사수는 떨어지는 별에 맞을까 두려워 말을 타고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심정으로 가고 있다. 이는 꺼지지 않는 촛불의 위태로움을 말 위에서 견디는 삶이다. 말하자면 묵시론적인 비전과 상황으로 환치되어 있다.   아울러 이 모든 상황이 밤과 잠이라는 설정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잠이라는 게 무엇인가. 현실에서 비전을 가질 수 없을 때 육체의 호흡에 기대는 형식이 아닌가. 현실에 억압과 환멸이 밤과 잠을 부르게 했지만, 이 밤과 잠의 세계는 육체가 가동하는 통로가 된다. 열두 밤이 지나자 황도십이궁에 떨어진 ‘나’가 쭈글해진 어머니의 배에서 말발굽 소리와 활이 날아가는 소리를 듣는 것은 이 같은 맥락이다. 말하자면 이재훈의 시에서 육체는 모든 비전을 함의하는 영혼의 형식이면서 우주의 무한한 팽창과 맞먹는 힘을 가진 것이다. 황도십이궁에서 화살을 쏘던 시적 자아의 잠과 꿈의 무한배경은 기실 어머니의 쭈글해진 배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재훈의 시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무한팽창과 축소를 거듭하는 시적 연동방식이며 육체 속에 담겼다가 새로운 길을 찾아나가는 시적 행로이다. 우주의 무한팽창과 축소를 육체의 호흡의 수준으로 규정하는 시인의 개성은 예술지상주의적 인식에 가깝다. 또 위의 시에서 보았듯이 나의 육체만이 그 통로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육체의 기반은 넓기까지 하다. 물론 위의 시에서의 육체는 생명의 통로가 되었던 모체이므로 그 모성성, 여성성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이재훈의 시는 페미니즘의 좁은 영역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이재훈에게 육체는 자신을 분할하여 세계로 진입하는 통로(“내 목을 자리고/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이면서도 끊임없이 소생하는 질료이다. 이는 맥베스의 “눈앞의 이것이 나인가”라는 화두에서처럼 규정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기호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끊임없는 갱신을 향한 고투의 흔적으로도 독법이 가능하게 한다. 이재훈에게 예술은 정신의 표현이자 육체의 조화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이재훈에게 육체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넘어서고, 교란하며 갱신하는 에너지가 된다. 이는 ‘나’를 포괄하는 ‘개인으로 세계를 끌어안으려 하는 기획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일식」은 이재훈의 ’최초의 말‘이 가지는 위력과 육체의 호흡을 보여주는 시편이다.

태양이여,
나는 이 큰 우주를 목놓아 불러본 적 없다
용기도 없이 컴컴한 방에 앉아
창틀에 놓인 꽃병들만 바라봤다
어느 날 나는
태양이여, 불러보고 싶었다
늘 곁불만 쬐며 속으로 옹알거리기만 하며
이 엄살의 통각(痛覺)을 갖게 되었다
태양이여, 부른 순간
내 항문으로 뱀이 숯진 머리를 들이밀고 왔다
온몸이 뜨거워져서 태양에게 다가가도
뜨겁지 않았다
불타지 않았다

뱀이 태양을 갉아먹을 때,
하나의 꿈틀거리는 숨이 우주를 갉아먹을 때,
네 소멸이 위대한 미학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어느새 뱀의 뱃속에 태양이 들어가 있다
고요 가운데 입을 열고 들어가
한 몸이 된
뜨거운 잉태

나는 큰 소리로 태양이여, 불렀다
뱃속에서 울리는 뜨거운 공명

모든 사위는 어둠이 되었다
-「일식」 전문

  “엄살의 통각”만이라고 말하는 시적 화자의 수줍음을 보아라. 그러면서도 이 호명에 육체와 세계가 합치는 순간의 뜨거운 감각적 파동과 전일적 세계의 움직임을 보라. “컴컴한 방에 앉아” 있을 때의 자아와 호명하는 순간의 자아는 차이가 크다. 부르는 순간 세계는 내게로 온다. 이 변화와 실감 속에 언어의 사제로서의 시인이 가지는 주술성이 놓인다. 이재훈에게 언어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허물어버리는 도구이면서 육체와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통로가 된다. “태양이여, 부르는 순간/내 항문으로 뱀이 숯진 머리를 들이밀고 왔다”고 하지 않는가. 서정주의 「화사」에서 “스며라 배암” 할 때 우리는 순네와의 성행위를 떠올릴 수밖에 없듯 이재훈의 시에서 우리는 세계가 내 육체에게로 와서 스며든다는 실감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서정주의 그 행위는 육체적 충동에 무게 중심이 놓여 있는 심리적 수준이라 할 수 있지만, 이재훈에게 세계에 대한 발화는 실상 통각의 실감으로 육체에 그려지는 것이라서 호명의 순간에 나의 육체는 완벽한 우주의 통로가 되고 우주 그 자체가 되어 달라붙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전일적 감각의 합치를 시인은 “뜨겁지 않았다”, “불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거니와,  이 합치를 말하는 데 뱀만한 상징이 또 어디 있겠는가. 세계를 호명하고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이 합치의 순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2연에서 육체의 호흡의 위력을 보여준다. “꿈틀거리는 숨이 우주를 갉아먹”어, 우주를 소멸시켜버리고, 내 기운(뱀) 속에 태양이 들어앉아 버리는, 달리 말하면 우주를 내 육체 속에 가두어버리는 주술을 행하게 된다. 혈액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들숨과 날숨을 거듭하는 육체의 호흡과 고동은 우주를 육체의 힘의 조화로까지 만들어버린다. 더욱 언어의 주술과 육체의 호흡을 통해 육체는 우주를 새롭게 잉태할 수 있게 되고 사위는 어둠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언어의 탄생과 육체의 호흡의 비전을 획득한 이재훈 시의 특장을 살필 수 있었거니와, 여전히 눈여겨 볼 것은 “뱃속에서 울리는 뜨거운 공명”이라는 시인의 발화이다. 기존의 시인들이 태양을 신화적 비유로 끌어다 쓰거나 관찰자적 입장을 견지하는 데 반하여, 이재훈의 육체는 세계를 끌어안아 버리는 통로가 된다. 말하자면 일식이라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가 동원되는 수사의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3.

   이재훈에게 육체는 “(그 속에) 한밤중이 되면 수선화가” 피고 (「수선화」)  하분하분 물기에 젖다가, “잘 익은 돌을 낳”고(「예쁜 똥」), 수레바퀴가 지나가는 통로가 되며(「수레바퀴 지나간 길」), 마침내 그 숨으로 우주를 삼키기까지 하는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재훈은 이성과 관념 이전의 원초적인 ‘말’들의 회복으로 개성의 터전을 마련하고, 이를 육체의 호흡이라는 비전을 통해 결정시킨 우리 시단의 새 목소리다. 문학적 감성의 변화를 보여주면서도 분열적 내면의 풍경 속으로만 탐닉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슐라르와 신화적 상상력을 자신의 몸으로 체화해내면서 자신의 어법으로 완성해가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육체의 호흡의 낭만성이 도시의 우수에서 발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성의 거점을 마련하고 있고, 우리 시단의 형이상학적 밀도와 부피를 수혈해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재훈을 비롯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문화적, 문학적 감성이 깊이를 더해 우리 시사의 새로운 광맥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 [시와세계], 2005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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