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숲으로 망명한 서정시


임준서
(문학평론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고들 한다. 확실히 지금은 산문의 시대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삶의 터전이 속속들이 도시화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콘크리트에 점령당한 지 이미 오래다. 도시는 우리가 나고 자라 묻히는 거대한 요람이자 무덤이며, 우리의 정신을 딱딱하게 양생하는 공장이다. 곧게 뻗은 마천루와 아스팔트가 말해주듯 도시는 직선적 사고를 강요한다. 도시는 과학의 힘으로 자연을 극복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수학적인 산문언어가 발달하고 감각적인 운문언어는 퇴화하기 마련이다. 자연을 영적교감의 대상으로 삼는 운문의 곡선적 사고는 힘을 잃는다.
산문의 독주는도시의 난개발과도 같이 위험하다. 난개발이 녹지의 소멸을 불러 생태계를 파괴하듯 산문의 범람은 정신의 녹지를 빼앗아 우리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서정시는 우리가 보존해야 할 정신의 그린벨트와 같다. 그렇다고 산문화된 현실, 도시화된 현실을 삶의식에 민첩하게 반응하는 새로운 서정이 필요하다.

(중략)

이재훈의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는 말울음 소리가 진동한다. 이재훈 시의 고향은 초원이다. 그는 말을 타고 광활한 초원을 달리는 유목민의 후예를 꿈꾼다. 시인을 사로잡는 것은 “말이 끄는 수레 소리”와 “대장간에서 들려오는 풀무질 소리” “뻣뻣해진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말발굽 소리”(수레바퀴 지나간 길])이다. 그에게 시쓰기는 곧 야생을 향한 질주이며, 원시적인 힘을 되찾는 주술이다. 그런 맥락에서 시인은 특별히 ‘말’의 이미지를 애호한다. 그 이유는, 말이 야생의 삶과 원시적인 힘을 환기시키는 가장 역동적인 이미지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시인은 왜 그토록 야생의 삶과 원시적인 생명력에 집착하는가. 그것은, 도시의 일상이 시인을 무기력하고 무감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도시의 삶이 시인의 감각을 마비시키면 시킬수록 그는 더욱더 초원을 꿈꾼다. 그런 점에서 이재훈 시가 보여주는 초원의 상상력은 근본적으로 도시의 무기력한 일상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시는 이러한 정황을 잘 보여준다.

그 숲엔 풍경이 없다
나무와 새 온갖 풀벌레가 가득하지만
그들은 소리내지 않는다
사방을 둘러봐도 제자리만 지키고 선
가장 그럴듯한 포즈의 마네킹들
그곳엔 소리가 없다
어머니, 하고 부르면 침묵만 되돌아와
귓가엔 내 목소리만 자욱이 앉아 있다
숲속에서 숨이 막혀 한참을 내달았다
소리를 지르고 실컷 울고는,
그루터기에 앉아 부풀어 오르는 힘줄들을 만졌다
나는 나를 만지고 한없이 그리워져
나무에게로 간다
새에게 말을 건다
자애는 폐허, 라고 되뇌이는 시간들
내 힘줄을 내가 끊어도 고통스럽지 않은 곳,
그곳엔 아무도 없다
있다면, 침묵이 있다
아무도 면회오지 않는 숲에서
나는 이교도가 되었다
― [빌딩나무 숲] 전문

풍경도,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빌딩숲은 생명을 잃은 공간이다. 그 속에서는 인간 역시 “마네킹”처럼 정물이 되어 아무도 서로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다. 서로 소통하지 못하기에 “그곳엔 아무도 없다.” 화자는 그 삭막함이 두려워 숲을 내달리고 소리를 지르고 울어도 보지만 숲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빌딩숲이 야기하는 소외의 감정은 급기야 “나는 나를 만지고 한없이 그리워”하는 도착된 자애를 낳지만, 그조차도 “내 힘줄을 내가 끊어도 고통스럽지 않”을 정도로 화자를 무감각하게 만들 뿐이다. 고립된 자애의 숲에서 끝없는 자기 소외를 거듭하는 이교도의 모습은 곧 빌딩숲에 갇힌 시인의 자화상에 다름아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단절감만 심화시키는 이러한 도시의 일상은 이재훈의 시에서 “인격을 빼놓고 전송”하게 하는 인터넷의 “바다”([바다])로 묘사되거나, “너무도 목이 말라/매일 종이를 씹어먹고/부라운관에서 춤추는 댄서의 옷을 잘라먹”게 하는 “사막”([마라의 오아시스])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급기야 시인으로 하여금 “시대가 없는 거리의 시” “나르시시즘의 시”([거리를 훔치다])를 쓰게 하고, “서럽고 아름다운 자연을 이미 다 해먹고/남은 상상으로 목울대를 울리는” “실패한 서정시인”([쓸쓸한 날의 기록])으로 자조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시인은 “상스런 욕설만 남은 거리”를 내려다보며 “불타는 빌딩 속을 걷다가/얼음의 기억을 불 가운데 던지리라”([세일즈맨의 오후])고 저주를 퍼붓기에 이른다.
이재훈의 말은, 도시의 일상에 대한 이 뿌리 깊은 환멸 속에서 태어난다. 다음의 시는 시인의 말이 상상 속에서 탄생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르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 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

말이 쏟아져 내린다 초원에 내려 거칠게 달려나간다 내가 지겹게 머무는 도시의 거리까지 와서 내 머릿속을 후드득후드득 내달린다


시에서 화자는 알타미라와 같은 선사시대의 동굴 벽화 앞에 서 있다. 벽화를 만지는 순간, 화자는 그림 속의 말이 깨어나 갈기를 휘날리며 야생의 초원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상상하고, 야생마의 잔등에 올라탄 자신의 모습을 그려본다. 화자의 상상은 도시의 거리로까지 이어지고, 말들은 시인의 머릿속에서 뛰쳐나와 거리를 질주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말에 관한 시인의 상상이 초원에서 거리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의 생동적인 이미지를 동원해 시인은 도시의 거리를 야생의 초원으로 변화시키고, 생명 잃은 도시에 생명의 활력을 쏟아놓는다.
그런 점에서 말은 곧 시를 가리키는 비유요, 말 위에 올라탄 추장은 시인 자신을 가리키는 비유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원시적은 충동으로 가득 찬 시쓰기를 통해 신화를 잃은 불임의 도시에 태초의 신화를 회임케 하려는 것이다. 어머니의 배에게 “말발굽 소리와 활이 날아가는 소리”([사수자리])를 듣는 시인의 모습은 이러한 의지를 웅변해준다. 이렇듯 이재훈 시가 빚어내는 초원의 상상력은 종국에는 신화적인 차원으로 나아간다. 아스팔트 위에서 원시의 신화를 찾는 도시 유목민의 순례. 그것이 곧 이재훈식 시쓰기의 정체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시인이 아직 나르시스의 연못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재훈의 시가 감상적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 좀 더 절제되고 원숙한 미의식에 이른다면 그의 말울음 소리는 한층 우렁차게 메아리칠 것이다.

- [문학동네], 2005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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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미래에 관한 몽상


이경수
(문학평론가)



광활한 시공을 끌어들임으로써 시원에 대한 신비한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는 이재훈의 경우는 쉽사리 포섭되지 않는 시적 개성으로 인해 최근의 시에 관한 논의에서 배재되었지만, 오히려 개성적으로 우리 시의 또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2005)는 치밀하게 짜여진 전략에 의해 구성된 시집은 아니지만, 들쑥날쑥하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표제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보여주는 세계는 우리 시의 형이상학의 한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 현대시학, 2006년 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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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을 구원하기 위한 풍장


이성혁
(문학평론가)



   이재훈의 「겨울 숲」은 30대 시인 특유의 감성을 발현하면서 젊음을 보내버린 겨울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할 윤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 특유의 감성이란, 지나가버리고 있는 청춘을 민감하게 의식하는 자가 느끼는 쓸쓸함을 말한다. 30대엔 다른 삶을 향해 나가게 된 지인들과 이별해야 하는 일들을 자주 겪게 된다. 이별은 과거와의 결별을 어쩔 수 없이 이끌어온다. 벅찼던 삶들은 기억으로만 외롭게 현재의 한구석에 버려지기 시작한다. 쓸쓸함의 감성은 겨울에 특히 어울린다. 조숙한 젊은 시인들이 눈의 이미지에 그토록 경도되는 이유는 그것이 이별의 정조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녹고 있는 눈의 이미지와 사라지고 있는 젊은 날들이 교차되면서 섞이기 쉽다. 그래서인지 청장년 시인들은 겨울이라는 상황을 자주 선택하여 젊은 날이 소멸되고 있는 현재에 대해 유장함의 어조로 슬퍼하곤 한다.
   「겨울 숲」에서 시적 화자는 지금 세상에 등을 돌리고 겨울 숲으로 떠난 형인 ‘그’를 생각한다. 해어진 그 형에 대한 기억은 이젠 과거가 되어 버린 방황들을 아프게 떠올리게 할 것이다. 시적 화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그 급격한 낙차를 느끼며 가슴을 쓸어내릴 것이다. 그리하여 과거를 현재의 흐름에 급격하게 끌어당겨올 때 일어나는 유장함이 시를 적신다. 「겨울 숲」 역시 청장년 특유의 어조와 감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칫 감상으로 빠질 수 있는 이 감성의 흐름을 시인은 ‘그’의 삶이 보여주는 윤리의 문제로 끌어올림으로써 적절하게 통제한다. “이제야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며 시인은 시를 시작한다. 시의 물꼬를 미리 이렇게 터놓음으로써 시인은 청장년 시인에게 전형적인 쓸쓸함과 유장함의 어조를 유지하면서도 감정을 발산하는 식으로 나아가지 않고,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시는 ‘그’의 삶의 방식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시적 화자의 세계관적 변동을 토로한다. 겨울 숲으로 떠난 그를 지금은 이해하게 되었으므로 “그를/찾으러 겨울 숲에 간다”고 시의 후미 부분에서 시적 화자는 말한다. 아마 예전엔 투사(鬪士)이자 수사(修士)였을 그, 하지만 그는 “아마 목숨까지 다 토”해버리며 과거를 등지고 겨울 숲으로 떠난 자이다. 그렇게 다 토해버린다는 것, 그리고 은둔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시적 화자는 예전엔 몰랐다고 진술한다. “언젠가 술 취한 내 등을 두드리며/다 토해라, 있는 것 다 토해라고/그가 말할 때 나는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겨울 숲으로 떠나기 직전인 그가 “버스터미널에 우두커니 서 있을 때”, 그의 떠남의 의미를 몰라 “오래도록 그의 등 뒤를 서성거렸”으리라. 하지만 ‘그’와 같이 과거의 ‘풍성한 사연들’이 다 마를 때까지 모두 토해낼 수 있을 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시적 화자는 지금 깨닫고 있다. 이 깨달음이 청장년층이 겪는 쓸쓸함을 넘어 새로운 삶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게 한다. 그것은 “앙상한 뼈들만 모여 서 있는” 겨울 숲이 “더 뜨겁다”는 그의 진술을 이해하게 되는 세계관적 변동이다.
   아직 “겨울 숲이 오히려 더 따듯하다”는 그의 진술을 시적 화자가 진실로써 받아들이는 단계는 아니다. 시적 화자는 그 진술을 받아들이면서 진실인가 확인하고자 그를 찾으러 겨울 숲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그의 말을 전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겨울 숲은 모든 것을 다 토하고 과거와 결별한 자의 내면을 상징할 것이다. 그 숲에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헐벗은 나무들이 겨울바람에 맞서 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뼈만 남은 헐벗은 나무가 그냥 서 있기만 하는 것만은 아니다. “뼈를 태우”고 있다. 아마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에서 온 힘을 다해 삶을 지탱하고 있는 중이다. 모든 것을 다 토해 “이미 거죽만 남은 몸”인 ‘그’ 역시 저 겨울 숲의 나무들처럼 존재하고자 한다. 뼈가 탈 것이니 삶을 지탱하는 마지막 지지대 역시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뼈까지도 아깝지 않다”면서 “묘비도 없이 바람에 존재를 실어버리는 게/가장 행복한 결말이라고,/정말 시적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자신을 풍장하여 “신문에도 남지 않”도록 소멸하는 삶이 겨울 숲에서의 삶이며 그의 삶의 결말이라는 말이다.
   청춘의 끝에서 청춘을 불살라버리는 가장 극한적이고 청춘에 걸 맞는 결말을 ‘그’는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그는 과거와 극한 결별을 시도하면서도 과거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남들과 같이 과거의 분실을 애도하면서 청춘을 끝내려 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 젊은 시절과 이별할 수밖에 없다면, 그는 모든 과거와 결별하면서 청춘의 극단적 에너지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 방도는 거죽만 남은 채로 삶의 공허와 대결하는 것이다. 이 삶의 방식을 선택한 ‘그’를 통해, 시인은 젊은 시절이 점차 과거로 밀려나가고 있는 현재에 맞서 젊은 시절 이후의 삶이 여전히 젊을 수 있는 역설적인 방도와 윤리를 보여주려 한다. 헛된 희망이라는 거짓을 지지대 삼아 살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삶의 상황이 겨울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겨울을 철저히 받아들이고 맞서 살아 나가야지만 봄의 시절도 구원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철저히 절망한 사람만이 희망을 보여줄 수 있다는, 카프카를 읽으며 발터 벤야민이 한 말처럼.

_ <현대시>, 2006년 1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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