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영혼의 순례자



김유중
(문학평론가, 항공대 교수)



5. 젊은 날의 아픈 기억, 쉽게 지워질 수 없는

상실의 감정은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 특히 모든 것을 바쳐 몰두했던 무언가를 잃었을 때의 그 아픔이란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이겨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이성적으로야 몇 번이고 털고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일 뿐, 현실에 있어서 그것이 실제 그대로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의 어려움을 시적으로 성공적으로 표현한 두 편의 시를 여기서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이재훈의 「때 이른 유적」(시로 여는 세상, 2002. 가을호)은 그러한 상황을 운명론적인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다.

너를 보다 보니
너는 안보이고 내 경험이 보인다
나는 너를 때 이른 경험으로 만지작거리다가
급기야 너를 훼손하고 만다

…(중략)…

저기 담벼락에 꽃 한 송이가 안간힘으로 피어 있다
꽃이 떨어지면 그 꽃을 지켜보던 풀잎 하나는
평생 간직할 유적 하나를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작고 예쁜 그 꽃이 언젠가는 떨어질 것을 알고 있다
누구나 아는 이 사실을 알기까지
나는 내 젊음을 모두 소진했다

마음은 가장 무거운 유적이다

이 텍스트에서 상실에의 두려움은 처음 탄생과 만남의 순간부터 어차피 예비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우리는 그러한 두려움을 원천적으로 떠안은 채 살아간다. 우리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러한 원천적인 상실에의 두려움을 시인은 ‘때 이른 유적’이라 칭한다. ‘너’를 보면서도, 정작 ‘나’는 ‘너’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나’의 내부에 가로놓인 ‘너’에 대한 상실에의 두려움만을 응시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두려움은 대개 ‘내’ 삶에 파고든 실체로서의 ‘너’의 의미를 왜곡하고 훼손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의 지난 경험이 그에게 끊임없이 그러한 위험성에 대해 귓속말로 귀띔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알고 있다. “꽃이 떨어지면 그 꽃을 지켜보던 잡초 하나는/평생 간직할 유적 하나를/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시인의 영혼은 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앞에 두고 여전히 엉거주춤 망설이고 있을 뿐이다. 그의 표현대로 “마음은 가장 무거운 유적”이기에.

- <시와정신> 2002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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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물관(管)


물이 흐른다
어제까지도 길이었던 곳에
도둑처럼 물이 넘어 든다

사람들은 물길을 튼다
배설과 오물의 길
그 위에 서성이는 사람들
트르륵트르륵 한 세기 동안
콘크리트 덮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발길을 멈춘다
가고 싶지 않은 길
집과 집 사이엔 수평선처럼
악수할 수 없는 긴 부정법이 놓여 있다
어제를 부인하고
어제의 그 집을 부인하고
어제의 그 집까지 향해 있던 길을 부인한다
발밑의 물소리는 늘 고요하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말을 뱉고 침을 뱉고
그 말과 침이 화간(和姦)하여
발밑으로 스며들었다
물을 기억하게 될 때
사방은 모두 가라앉는다
누란(樓蘭)은 물 속의 집
오래된 말들의 집
누란은 오아시스다
말들이 목마름으로 남아 있는 곳

물이 흐른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네가 버린 물과 네가 뱉은 말이
파이프를 타고 수화기를 타고
물결치며 이집 저집을 들락거린다
이 무시무시한 동력(動力)

나는 썩은 물로 컸다
발밑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내 속에서만 고여 있는 말로 컸다

- <서정시학>, 2003년 여름호

이 시를 읽고 나니 ‘조울’, ‘비애’와 같은 단어들이 나를 찾아온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내부에 곧 터질 듯한 위태로운 물관 하나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이다. 시인은 길을 걷다 물관(管)이 터진 현장을 만난다. 쏟아진 물과 오물이 뒤범벅 된, 별로 유쾌하지 못한 현장이다. “한 세기 동안/콘크리트 덮는 소리를 듣다가/문득 발길을 멈춘” 것은 이재훈이기도 하고 물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나’인 이재훈은 곧 현대 문명인의 모습이고, ‘물’은 그들의 내면이다. 온통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육체)에서 물관이 터진 그 길(운명)은 어떤 불행을 예고하는 징조 같다. 거기다 온갖 오물까지 합세했으니 길을 걷던 이재훈이나 콘크리트 아래 물관을 타고 흐르던 물이나 그 길은 그다지 “가고 싶지 않은 길”인 것이고, 그러나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다. 그러므로 “긴 부정법이 놓여”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처럼 “어제를 부인하고/어제의 그 집을 부인하고/어제의 그 집까지 향해 있던 길을 부인”하게 된다. 이재훈에게는 도시 문명이 만든 사막 같은 길(운명)이 슬프고, 물은 땅속 지류를 버리고 인위적으로 만든 물관을 따라 흘러야하는 운명이 슬프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뱉은 “말과 침이 화간하여/발 밑으로 스며”든 ‘물 속의 집, 누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비밀처럼 땅 속에 숨겨진 ‘파이프’같은 “무시무시한 동력”이 있을 뿐이다. 콘크리트 길 위로 흘러 넘친 물은 땅 속으로 스며들지도 못하고 증발한다. 현대인들, 즉 이 시 속의 ‘나’는 “도시의 물관”과 자기를 동일화시킨다. 물관 속에 고인 물처럼 “내 속에서만 고여 있는 말”로 세상을 읽으며 살아왔다는 자기 한탄이 너무 우울하고 고통스럽다.
아, 꿀물 흐르는 샘 하나, 어디 없을까?

- <시선>, 2003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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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성(聖)



김종태
(시인, 문학평론가)



우리가 현재 목도하는 세상은 생명과 성으로 가득 차 있는 싱싱한 공간이 되지 못하고 있다. 위에서 중견 시인 두 사람은 삶에 가담하고 삶을 관조하는 넉넉한 시선으로 세상을 포용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젊은 시인들은 생명과 성이 사라진 어두운 세상에서 절망의 노래만을 부르고 있다. 그러나 생명과 성에 대한 화해의 양식이나 이들에 대한 절망의 양식이나 모두 다 마찬가지로 생명과 성이 이 세상에 아름답게 현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다음에 인용될 이재훈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배꼽으로 차가운 톱날이 들어온다. 슬금슬금 배를 가르고, 시커먼 내장들을 걷어올린다. 텅 빈 뱃속에 햇살이 들어와 가만히 눕는다. 나는 환한 몸으로 세상 이곳 저곳을 누빈다. 오 따사로운 마음들. 어느새 햇살이 누운 자리. 꽃망울이 올라와 있다! 꽃은 피어나 온몸에 홀씨를 퍼뜨린다. 즐겁게, 내 몸 구석구석이 피어오른다. 사람들이 하나 둘 내게 찾아와 꽃 한 송이씩 꺾어 간다. 계절이 바뀌고, 꽃들이 떨어진다. 떨어진 꽃마저 누군가 주워간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내게 남은 꽃다지. 공중으로 날아간다. 나는 까맣게 타 들어간다. 잿빛 몸들이 부르는 거리의 합창. 나는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한다.

이재훈 「공중정원」 전문([시와생명] 2002년 봄호)

이재훈이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몽환적 구조를 근간으로 삼는다. 이 시에 나오는 체험은 현실이 아니라 꿈의 세계 즉 악몽의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서사 형식을 지닌다. 시인은 이 섬뜩한 경험의 상상을 통하여 생명의 의미에 대하여 진지한 물음을 던져 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시는 “배꼽”과 “꽃망울”이 주는 상징을 통하여 동물적 이미지와 식물적 이미지의 교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이색적이다.
시인은 꿈속에서 배꼽으로 칼날이 들어오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 배꼽은 생명 탄생을 가능하게 한 목숨의 뿌리이며 포유류 동물이 가진 몸의 중심이다. 그러나 이 배꼽은 육체적 기관으로서는 뚜렷하게 돌출되어 있지 않은 채 탄생의 흔적만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시인이 이러한 배꼽의 상징성을 문제삼은 것은 생명의 근원적인 의미를 반추해 보면서 이것에 힘입어 반생명적인 외압을 의식적으로 견디어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이 곳으로 들어오는 칼날은 인간 생명의 원형적 가치를 송두리째 파괴하려는 음모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인이 칼날의 형상에 역설의 일격을 가하면서 이 시의 서사는 반전된다. 그는 오히려 이 칼이 자신의 내부에 있는 오염된 내장을 말끔히 씻어내 준다고 말한다. 내장이 잘려지는 고통이 오히려 신비로운 생명의 확산을 가능하게 한 것일까. 내장이 걷어진 복부는 햇살들로 인하여 환해지고 그 곳에는 꽃망울이 오르고 꽃이 피고 홀씨가 생겨나면서 동물적 이미지와 식물적 이미지의 아름다운 교합의 공간으로 변용된다. 내부를 잃어버린 불구의 몸이 역설적이게도 그 상실로 인하여 오히려 ‘제의적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이한 생명의 향연 역시 오래 가지 못한다. 사람들이 내 몸의 꽃을 꺾어 갔으며 계절이 변화하면서 꽃들이 지고 그 떨어진 꽃마저 행인들이 주어가면서 그 몸에 피어난 생명의 꿈은 다시금 좌절의 길을 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생명의 축제를 유지하기란 이처럼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시인은 마지막 남은 “꽃다지”를 보며 다시금 타들어 가는 몸의 고통을 느낀다. 검게 탄 잿빛 몸이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시의 말미는 매우 음울한 상징을 낳는다. 이를 ‘비극적인 아이러니’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생명과 초월적 세계에 대한 관심은 문학의 오랜 주제가 되었다. 시인들은 때로는 그 화해로운 세계의 도래를 갈등 없는 언어로 형상화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그 곳에 대한 끊임없는 노스텔지어를 간절한 기다림의 언어로 표현하기도 하였으며 한편 이와는 달리 반생명적인 악의 세계를 그로테스크한 언어의 비수로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그러한 생명과 성의 세계가 우리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공히 인정할 터이다. 근대의 물질 문명은 이들 성스러운 가치를 자본과 물건의 위세에 종속시키려 하고 있다.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오늘날의 삶 속에서도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더욱 반생명적이고 세속적인 경험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세계에 대한 갈망의 끈을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된다. 첨단 기술 문명의 시대에도 생명과 초월을 꿈꾸는 언어의 주술사가 필요한 이유가 참으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 [문학의 미로], 하늘연못, 2003.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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