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의 [일식]은 자아의 우주적 확대를 보여주고 있다. 이재훈은 최근의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세계로 나가기를 두려워하며 일상성에 매몰되어 있는 자아를 관찰하며 여기에서 일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특히 일상의 질서와 금기에 갇혀 있는 자아를 바라보며 어느 날 문득 불러본 세계의 모습을 다룬 [일식]([시로 여는 세상], 가을호)은 인상적이다.


태양이여,
나는 이 큰 우주를 목놓아 불러본 적 없다
용기도 없이 컴컴한 방에 앉아
내 미래를 셈하고 오늘의 피로를 불평하고
쓰레기 같은 영상들만 구경했다

어느 날 나는
태양이여, 불러보고 싶었다.
늘 곁불만 쬐며 속으로 옹알거리기만 하며
이 엄살의 통각(痛覺)을 갖게 되었다
태양이여, 부르는 순간
내 항문으로 뱀이 숯머리를 들이밀고 왔다
온몸이 뜨거워져서 태양에게 다가가도 뜨겁지 않았다
불타지도 않았다

뱀이 태양을 갉아먹을 때
아름답다
하나의 꿈틀거리는 숨이 우주를 갉아먹을 때
위대하다
네 소멸이 위대한 미학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어느새 뱀의 뱃속에 태양이 들어가 있다
고요 가운데 입을 열고 들어가
한몸이 된
뜨거운 잉태

나는 큰소리로 태양이여, 불렀다
뱃속에서 울리는 뜨거운 공명

모든 사위는 어둠이 되었다

― 이재훈, [일식] 전문


달과 생물, 인간, 인간사와의 관계는 민중들 속에 이미 뿌리 깊은 속신으로 존재하여 왔다. 예를 들어 집안의 여성들은 대보름에 개에게 밥을 주면 밝은 달의 정기를 빼앗아간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풍요로움의 기원이 개에게 먹혀 좌절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보름에는 굶겼던 것이다. 이렇듯 ‘달의 기를 먹어버리는 개’라는 의식은 우리 일상의 밑바닥에도 존재했다.
이재훈의 [일식]은 속신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자아의 세계에 대한 태도와 관련을 맺고 있다. 시적 화자는 자아가 “이 큰 우주를 목놓아 불러 보지 않고 어둠에 갇히는 유폐의 형식을 취할 때 자신과 우주와의 관계는 상실되고 생명이 결핍된다는 것을 말한다. 컴컴한 방, 미래의 셈, 오늘의 피로, 쓰레기 같은 영상 등의 세목들은 폐쇄적 공간으로 존재하는 자아의 형상이 취하는 모습이다(다만 이런 언어들은 좀더 시적인 언어로 정제될 필요가 있다). 이는 일상 속에 함몰된, 자아 스스로가 만든 ‘곁불’과 ‘엄살의 통각’의 벽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 벽이 호명을 통해 깨어진다고 말한다. 이 때 “태양이여”라는 세계의 부름은 생명력을 통해 몸을 영원으로 확장시켜 우주적 차원으로 이어주는 매개로 작용한다. 이 호명의 순간에 “항문으로 뱀이 숯머리를 들이밀고” 온다. 체내의 구멍인 항문에서 뱀이 나와 태양에게로 가서 태양을 갉아먹는다. 뜨거워진 몸 때문에 태양에게 다가가도 뜨겁지도, 불타지도 않는다. 숯머리의 뱀은 불이면서 물이다. 스스로 탈 뿐 아니라 불순한 불을 연소시키는 피 속의 불은 하나의 커다란 순수성이며 우리 속에 체류하면서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생생한 불이다. 꿈틀거리는 숨이요 불인 뱀이 태양을 갉아먹고, 우주를 갉아먹을 때, 세계를 그 속에 담는 커다란 우주알이 생성된다(“어느새 뱀의 뱃속에 태양이 들어가 있다”). 자아인 몸 생명의 유한성은 우주적인 것으로 확장된다. 몸 속에 도는 피(뱀)의 생명성은 우주로까지 확장되면서 몸은 대지와 육체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우주적인 공간을 한 몸으로 잉태하게 된다. 이 때 몸은 대지와 하늘을 연결시키는 소우주로서의 몸이라는 육체성을 보여준다. “태양이여” 부를 때 “뱃 속에서 울리는 뜨거운 공명”을 듣는 순간, 이미 항문은 영원의 상징으로서의 달을 담는 그릇(우주알)이다. 그러면서 세계가 하나의 몸이 되는 차원이다.
이재훈의 시는 자아인 몸이 “비밀스런 유적인 두려움”([때 이른 유적])에서 벗어나 호명을 통해 세계를 여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몸으로 담고 내 것으로 끌어들이는 모험과 창조행위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때 자아는 질서와 금기의 공간에서 벗어나 무한한 자유의 공간으로 비상하는 것이다.

― 현대시, 2002년 10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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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혹은 할퀴며 키스하기


이승훈
(시인, 한양대 교수)




젊은 시인 이재훈의 <햇살의 집>(정신과 표현, 11 12월호)을 문제 삼는 것은 그의 이름이 나하고 비슷해서가 아니다. 일부에선 친척일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린 친척이 아니다. 글쟁이들은 언어를 먹고 사는 자들이어서 그런지 말들이 많다. 그것도 문학 이야기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뒤에서 헐뜯는 말, 있지도 않은 스캔들 만들기. 그러나 이재훈은 이 시에서 스캔들을 만들지 않는다. 그가 만드는 것은 햇살에 대한 새로운, 산뜻한, 신인다운 감각이다. 시인은 우선 감각이 예민해야 한다. 둔한 감각으론 안 된다. 병적으로 예민한 감각도 문제지만 그래도 둔한 것들보다는 낫다. 너무 예민하면 지나가는 말 한 마디에도 상처를 받고, 가을 햇살에도 상처를 받는다. 상처를 이기는 방법, 상처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방법, 나를 지키는 방법, 그것은 술마시기이다. 얼마나 좋은가? 이 시에서는 햇살도 술을 마신다. 시의 앞부분은


햇살이 술을 마신다. 거리는 방금 목욕을 한 것처럼 뽀얗다. 나는 버스 속에 앉아 술에 취해 이글거리는 햇살을 본다. 한 소녀가 버스에 오르며 묻는다. 이 버스는 천국으로 가나요? 햇살이 일그러지고 사람들이 비틀거린다. 광화문 네거리. 한 복판에 우뚝 선 이순신 장군 동상이 흠씰 움직인다. 칼자루를 놓고 싶다 후손들아! 꽃잎이 비틀거리며 이글거리는 햇살 속으로 날아간다.


와 같다. 햇살이 술을 마시니 햇살은 얼마나 좋겠는가? 이재훈은 버스에 앉아 술에 취한 햇살을 본다. 햇살은 빛이고, 거울도 빛이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 거울을 바라보고, 거울은 술에 취한 빛으로 가득 찬다. 나르시시즘의 황홀. 또한 이 빛은 꽃잎이고, 그러므로 꽃잎도 취하고, 물론 이재훈도 취하고, 이 글을 쓰는 나도 취한다. 버스에 오르는 소녀가 “이 버스는 천국으로 가나요?”라고 묻는 것은 그 소녀도 취했기 때문이다. 취하지 않고 어떻게 환한 대낮에 소녀가 말도 안 되는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소녀가 술에 취한 게 이상하지만 소녀도 인간이다.
광화문 네거리의 이순신 장군이 “후손들아!”라고 소리치는 것도 우습지만 아마 그도 술에 취해(대상 동일시)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고, 한편 이 소리는 정신차리라는 소리인 것 같지만 취한 판에 그런 소리가 들릴 리 없다. 결국 이런 현란한 감각은, 빛의 황홀은 모든 대상이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대상과 나는 매혹의 관계에 있다는 것, 매혹의 변증법과 통한다. 물론 햇살은 집이 없다. 햇살은 빛이고, 빛은 거울이고, 거울이 술을 마신다. 거울을 통해 내가 존재함으로 나도 술을 마신다. 거울, 빛, 반영(reflection)은 반성이고 사유이고 통찰이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나는 다만 내가 빛들의 조각이고, 파편이고, 이 파편들의, 매혹의, 황홀한 테러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안다. 이론가(theorist)는 테러리스트(terrorist)인가? 역시 늙은 감각보다 젊은 감각이 좋다.

― 이승훈, <햇살 혹은 할퀴며 키스하기: 나는 무엇을 아는가?>, 문학사상, 2000년 1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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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중앙》 가을호에 실린 이재훈의 두 편의 시 <Big Bang>과 <또 다른 제국>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상상력의 독특한 구조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나는 그가 보여준 시적 상상력의 기본틀이 사물, 혹은 존재의 신성함과 함께 그 내부에 잠재된 무의식적인 인간의 욕망을 한데 아우르려는 태도로부터 출발한다고 진단한다.


    속옷서랍을 열면 쿠스코의 만돌린 소리가 들린다 내 살의 마른 상처에 수슬수슬, 성난 꽃씨를 심고, 포근한 면으로 살짝 덮어, 오 나는 세계를 떠돌며 찡한 소리를 듣네, 벌거벗은 글자 속에서 영상 속에서, 상상의 소리를 거름 주고, 만도린 소리 꽃씨를 움트게 하네, 아 움틈의 소리에 내 몸 비옥한 흙이 되고, 속옷들 사이로 발갛게 충혈된 숯머리 올라오네, 여보세요, 타락한 관념론자씨, 태어남의 고통이 죽고 싶은 쾌감이란 걸 아시네요, 언젠가는 멈춰질 만돌린 소리, 꽃들은 피어나면서 쾌락을 배워, 반드르르 몸에 하나씩 불을 켜고, 아야 속옷들이 뒤엉키네, 언젠가는 죽을 몸부림, 나는 후후 꽃들의 불을 끄네, 생짜로 발기된 내 生저기 숙져가는 꽃들이 속옷 속에서 녹아간다 또 다른 생을 찾아가는 만돌린 소리 기적처럼 울리고, 속옷서랍을 닫는다, 또 열어보고픈, 내 서랍
    - <또 다른 제국> 전문


프로이드가 지적했듯이 무의식이란 의식의 햇빛이 도달하지 않는 지역에 존재하는 알려지지 않은 광활한 원시의 대륙이다. 시인은 무의식의 험로를 따라 이 원시의 대륙을 탐사한다. 원시의 대륙, 그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위한 시인의 몸가짐은 애초 무척이나 섬세하며 경건하다. 그는 마치 ‘속옷 서랍’을 열 듯 조심조심 그리로 향한다. 그 세계의 초입에서 그가 만난 것은 유별나게도 만돌린 소리인데, 그 소리는 고대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여기서 잊혀진 제국, 잉카의 이미지는 무의식의 잠재성과 연결된다. 잠재된 무의식 속에서, 그는 만돌린이 들려주는 천상의 선율을 경험한다. 무의식적 욕망과 신성함이 서로 반향하며 어우러지고, 그것은 다시 존재의 밑거름이 되어 우리의 삶을 더욱 살찌우고 윤택하게 만든다. 이때 무의식은 상상 속에서 천상적인 것과 합치된다. 마른 상처에 심었던 ‘꽃씨’는, 그리하여, 만돌린이 내는 상상의 소리로 인해 움트게 되는 것이다. 관념만으로, 이성만으로는 이러한 세계를 음미하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관념론자는 절대로 ‘태어남의 고통’이 ‘죽고 싶은 쾌감’과 통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천상의 선율을 들려주었던 그의 만돌린 소리도 언젠가는 멈출 것이다. 시인은 신성함이 다한 세계에서는 무의식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숙져가는 꽃들이 속옷 속에 녹아가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속옷 서랍을 닫고 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상상력의 작용도 마감될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언제고 그는 다시 자신의 서럽을 열어보려 할 테니까. “또 열어보고픈, 내 서랍”―그는 그의 상상력의 원천인 이 서럽을 다시 찾을 것이고, 다시 그 속에서 헤맬 것이고, 그러다가 지치면 서랍 닫기를 반복할 것이다. 나는 그러한 반복 속에 그의 삶과 시가 더욱 윤택해지고 성숙해져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텍스트를 읽어내려가면서 나는 문득 리쾨르(P. Ricouer)의 상징론을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리쾨르에 따르면 상징이란 인간이 더 이상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체가 그 주위를 둘러싼 유형, 무형의 제약을 비켜나가면서 우회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신성함과 욕망이 바로 그 전형적인 예에 해당할 것이다. 신성성, 거룩한 존재가 논리적인 설명 방식으로 증명될 리 없으며, 무의식의 원초적 욕망 역시 이성적인 사유에 의해 파악될 까닭이 없다. 이 지점에서 리쾨르는 시야말로 인간 존재를 위와 아래로부터 억누르고 있는 이러한 신성함과 무의식적 욕망을 무리 없이 종합할 수 있는 참된 원리임을 지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새로운 기존의 논리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논리이자, 동시에 논리를 넘어선 논리이다. 시인은 그 속에서 새로운 현실을 넘보며 새로운 논리를 산출한다.
이재훈의 시가 주목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당하는 기존의 현실에 집착하지 않는다. 역으로 그는 그것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스스로가 꿈꾸는 새로운 세계, ‘또 다른 제국’의 이미지를 제시하는데 주력한다. 여기서 우리가 마땅히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보여준 진지한 탐구의 자세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단순한 몽상가적 기질을 넘어선,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인의 진지함 내지 치열함과 대면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시쓰기란 엄연히 현실의 질곡을 넘어선 은총이자 구원이다.

― 김유중, <밀레니엄의 언어>, 《21세기문학》(1999. 겨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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