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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06 <나는 시인이다>_ <라이브러리&리브로> 5월호 인터뷰 기사
  2. 2011.04.27 이재훈 대담집_ 나는 시인이다_ 광고
  3. 2011.04.15 <북극의 진화>(Evolution of the North pole by Lee, Jae-Hoon) 영역시
  4. 2011.04.08 [매일경제] 김춘수가 김수영을 질투한 까닭 / 이재훈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_ 정아영 기자
  5. 2011.04.08 [부산일보] 시인이게 시란? / 이재훈 대담집_ 김상훈 기자
  6. 2011.04.04 곰을 보다
  7. 2011.04.04 이재훈 대담집_ 나는 시인이다
  8. 2011.03.24 이재훈 대담집_ 나는 시인이다
  9. 2011.03.03 억지 표정~ 1
  10. 2011.01.03 꽃의 시인 김춘수 - 주제로 읽는 현대시 산책 10
  11. 2010.12.06 인터뷰
  12. 2010.12.06 낭독회 사회 보다~ 2
  13. 2010.11.26 목요낭독극장_ 살구꽃 A
  14. 2010.11.14 경남문학관 특강 1
  15. 2010.11.10 작가(시인) 한글트위터 주소 모음
  16. 2010.10.20 고 신현정 시인 1주기 추모 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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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2010.06.17 김미정_ 나무 부서지는 소리 앵앵, 들린다
  27. 2010.06.09 육필시_ 웹진 문장 2010년 6월호
  28. 2010.04.14 강성철_ 이재훈의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평
  29. 2010.04.04 차 안에서의 하룻밤
  30. 2010.04.04 혼(魂)의 시인 서정주 - 주제로 읽는 현대시 산책 ⑧

<라이브러리&리브로> 5월호 인터뷰 기사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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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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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의 진화


이재훈

 
툭, 떨어진다, 얼음이다.
지구는 돌고, 얼음덩어리는 각을 세운 채
조금씩, 때론 한 움큼씩
때론 한 마을과 한 세대가 제 몸을 허문다.
곶과 곶, 섬과 섬, 만과 만, 길과 길이 허물어진다.
지도는 늘 변했다.
그속엔 울음이 있고 해체가 있다.
인간의 눈물이 북쪽을 흔든다.
언젠가 인간의 시계는 멈추겠지만
얼음의 시간은 멈추지 않겠지.
질질흐르고 흘러
땅을 감싸고, 머금고, 토한다.
최초의 물은 멈추지 않고 질퍽대면서
어느새 허벅지까지 올라온다.
솔직히 나는 진화했다.
물이건, 얼음이건 간에
먹고 버리고 회피하면서 몸뚱이를 지켜왔다.
상점에 들어오면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기억을 소환해
이 도시를 담금질한다.
한 달 새 교차로엔 거대한 빌딩이 들어섰다.
대형 마트와 옷가게가 들어서고 그 위에 사람들이 산다.
지도는 또 바뀔 것이다.
대륙의 한 점이, 또 한 점이 되고,
다시 한 점이 덧입혀져 거대한 점이 될 때까지.
저 멀리 철새는 날아오르고
꽃잎은 몽우리를 틔울 것이다.
내 숨은 어느 산맥을 따라 이동할까.
밤이 되면 지도의 소리는 막힌다.
거칠게 울고 우는 소리만 가득하다.
인간의 소리만 가득하다.
모든 것이 까마득하다.

- 『시와 사상』 2010년 여름호 발표

   

Evolution of the North pole


by Lee, Jae-Hoon

 
The ice drops, suddenly,
The earth revolves, the ice cube builds the angles
little by little, sometimes by the lump
Now and then a village, a generation demolishes its body.
Cape and cape, island and island, gulf and gulf, street and street collapse.
The map has always changed.
There are crying and dismantling in there.
Human tears shake the North.
Human clock will stop someday
but never the time of ice.
Flowing and dragging
it wraps, nurses and vomits the earth.
The earliest sloppy water never stops
suddenly filling up to the thigh.
Honestly, I evolved.
Whether water or ice,
I preserved my body eating, deserting and evading.
Water sounds somewhere in the shop.
And anneals this city
summoning the blueish memories.
In a month a gigantic building appeared at the crossroad.
People live upon the large marts and new boutiques.
The map will change again.
A continental dot will become another dot,
to be a gigantic blot.
Far away the birds migrate flying over
and petals will bud out.
Which mountain range will my breadths move along.
At night the sound of the map is blocked.
Filled with rough weeping and weeping.
Filled with human voices.
All things are so far and far away.

-Quaterly 『Poetry and thought』 2010 summer 

[출처] 시인광장 국내시 英譯 【61】이성렬의 국내시 영역
[31]Evolution of the North pole by Lee, Jae-Hoon(북극의 진화 - 이재훈)


 

번역: 이성렬 시인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및 KAIST를 졸업.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 수여받음. 시집으로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모아드림, 2003)와  『비밀요원』(서정시학, 2007) 가 있음. 현재 경희대학교 교수. 웹진 『시인광장』 부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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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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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가 김수영을 질투한 까닭
이재훈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 출간
기사입력 2011.03.31 17:01:10 | 최종수정 2011.03.31 19:47:50
http://news.mk.co.kr/v3/view.php?year=2011&no=20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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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詩人)은 詩(시)이기도 하고 人(사람)이기도 하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이재훈의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팬덤북스 펴냄)는 시인들의 이 두 가지 면모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2001년부터 2011년까지 모두 35명의 시인을 만나 그들의 시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만난 시인은 김춘수 오규원 박찬 등 이미 세상을 떠난 시인부터 이승훈 정호승 남진우 김소연 강정 김태형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까지 연령별로 다양하다.

"김수영의 `풀` 같은 작품을 보면서 내가 써보고 싶었던 것을 벌써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종의 라이벌 의식, 질투가 생긴 거지요. 나보다 선수를 쳤구나 하는 생각. 그래서 의식적으로 더 내면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고(故) 김춘수 시인은 "내 본래 의식은 역사허무주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1960년대 김수영이 참여의 길을 가게 되었기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그 반대 진영 쪽이라 할 수 있는 내면세계로 더 침잠한 것은 아닌가"라는 저자의 질문에는 "그 말이 옳다"며 수긍한다.

"현실에 부딪히면 현실에 대한 울분 같은 것도 또 있는 것"이지만 김수영이 이미 그런 시들을 썼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더 내면으로 들어오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내 생애에 시인으로서 라이벌 의식을 가진 시인은 그 사람(김수영)뿐"이라고 고백한다.

그런 김춘수 시인은 이승훈 오규원과 더불어 우리 시사(詩史)에서 독창적인 시적 방법론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김춘수의 무의미시와 이승훈의 비대상시, 오규원의 날이미지시는 각각 고유한 방법론을 가진 독특한 시론.

하지만 각 시론의 차이와 특성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어렵기만 하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시인의 시론을 당사자의 육성을 통해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고(故) 오규원 시인은 김춘수의 무의미시론과 비교하며 자신의 날이미지시론을 설명한다.

"무의미시는 `무의미를 지향`하고, 날이미지시는 `의미를 지향`하는 시입니다. (무의미시에서는) 시의 내용이 무의미하니까 시인은 시의 형태에서 그 아름다움을 찾습니다. (반면) 날이미지시는 사변화되거나 개념화되기 이전의 의미, 즉 관념화되기 이전의 의미를 존재의 현상에서 찾아내 이미지화하는 시입니다."

대담을 진행한 저자가 시인이라는 점은 독자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시와 시인의 관계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그는 꼭 물어야 할 것을 묻고, 꼭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 그 덕분에 독자들은 시인들의 일상부터 유년 시절, 시인의 시 세계까지 폭넓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승훈 시인은 자아 탐구, 모더니즘과 해체 그리고 선(禪)에 이르기까지의 삶과 문학 여정을 밝히고, 유안진 시인은 시를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든 유년 시절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고교 문사에서 문학청년 시절을 거쳐 등단하기까지의 과정을 풀어놓는 정호승 시인과 쇳물은 물도 불도 아니라는 연금술적 상상력을 보이는 노동자 시인 최종천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 밖에 30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로 찬사를 받은 허만하 시인, 독특한 자유주의자의 길을 걷고 있는 김정환 시인, 시인이자 명기타리스트로 문학적 순교를 꿈꾸는 원구식 시인, 사과나무 아래로 귀환한 오르페우스의 꿈을 꾸는 남진우 시인, 사물보다는 사물과 사물 사이 어떤 한 세계보다는 세계와 세계 사이에 자꾸 시선이 간다는 김소연 시인 등 그들이 밝히는 독특한 사유와 시론을 만나보는 것도 흥미롭고 의미 있다.

또한 1992년 `현대시세계`로 같이 등단해 우리 시의 확장성을 선보이는 동년배 시인 강정과 김태형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시는 시인에게서 나오고, 시인은 시로 세상을 산다. 그래서 시인의 머리와 가슴을 직접 열어보이는 이 책을 읽다보면 어렵게만 느껴졌던 시가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자리 잡고 앉는다.

[정아영 기자]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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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나는 시인이다 / 이재훈
시인에게 시란?
김상훈 기자 icon다른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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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인이다 / 이재훈
김춘수(1922~2004) 시인은 "김수영(1921~1968) 시인이 평생의 라이벌이었다"고 했다. 그는 실제 김수영과 만난 적은 없었다. 서울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김수영 집으로 전화를 했던 김춘수. 김수영은 당시 집에 있었지만 만취해서 전화를 도저히 받을 수 없었다. 두 라이벌의 만남은 그렇게 미완으로 끝났다.

김춘수는 왜 김수영을 라이벌로 생각했을까.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몸소 겪어야 했던 김춘수는 이데올로기, 사상, 역사에 대한 회의감을 많이 느꼈다. 그것은 그가 평생 역사허무주의자란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이유였다. 물론 현실에 대한 울분으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란 시를 쓰기도 했지만 그의 본래 의식은 역사허무주의였다.


고 김춘수·허만하 등 35명 대담
'시론·개인사' 생생한 육성 담아

김춘수 시인은 라이벌로 여겼던 김수영 시인(오른쪽 작은 사진)이 참여 시인의 길을 걷자 내면세계를 더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부산일보DB

역사와 현실의 문제에 등을 돌렸던 김춘수는 1968년 김수영의 '풀'을 보게 됐다. '풀'은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풀에 빗대어 쓴 시로 김수영을 대표적인 참여 시인으로 만든 작품. 김춘수는 '풀'을 보며 '내가 써보고 싶었던 것을 벌써 썼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라이벌 의식과 질투심을 느꼈다. '나보다 선수를 쳤구나' 하는 생각에 김춘수는 더 의식적으로 내면세계에 침잠하게 됐다. 김수영은 '풀'을 쓰고 나서 보름 만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짧지만 강렬한 삶을 살았던 김수영은 김춘수의 작품 세계에 가장 큰 자극을 줬다.

1999년 허만하 시인이 30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를 들고 문단에 다시 나왔을 때 한국 시단은 경탄의 눈빛을 보냈다. "어설픈 사고와 감상의 대중적 푸닥거리와 쉬운 위안이 유행하는 시대에 이만큼 깊이 생각하고 끈질기게 생각하는 시인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김우창)" "지난 천 년의 막바지에 마치 스톤헨지의 유적처럼 발굴되었다(정과리)" 등 호평이 이어졌다.

부산 고신대 의대교수를 지내며 병리학자와 시인의 길을 걸어온 허만하 시인. 그는 두 가지 길을 어떻게 조화롭게 이끌어왔을까. 그는 "내가 시를 지켜주기도 했지만, 시 또한 나를 지켜 주었다"고 했다. 그는 생활인과 예술인의 길이 공존했던 30년 간 삶의 궤적을 데리다의 말로 압축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독립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의지해서 존재하는 상관적 존재'라는 사실!

유안진 시인은 대학 2학년 때 시작 노트를 들고 박목월 시인을 찾았다. 그는 박 시인과 설렁탕 집에서 점심 식사를 하게 됐다, 소금 그릇이 박 시인 그릇 옆에 있자 유 시인은 그것을 가져올 용기가 없어 설렁탕을 맹탕으로 먹었단다. 그 과정을 알고 있었던 박 시인은 그 일을 훗날 수필로 썼다. 유 시인에 대해 '저렇게 숙맥인 걸 보니까 시는 제대로 쓰겠구나'라는 평가를 남겼다. 그 뒤 유안진 시인은 박목월 시인이 '현대문학'에 추천한 10명 안팎의 시인에 드는 영예를 누렸다.

'나는 시인이다'는 월간 '현대시' 부주간인 저자가 2001년부터 10년간 시인들과 나눈 이야기를 묶은 대담집이다. 저자는 이미 작고한 김춘수, 오규원, 박찬 시인을 포함해 허만하, 서규정, 배한봉, 성선경과 같은 부산·경남지역 시인 등 35명을 인터뷰했다. '현대시', '유심' '열린시학' 등 문학잡지에 실렸던 원고들을 모았다. 시인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시와 시론, 내밀한 개인사를 접하고 나니 그들의 시들이 새롭게 보인다. 이재훈 지음/팬덤북스/570쪽/1만8천 원.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newsId=20110401000193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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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을 보다

시시각각 2011. 4. 4. 01:27
주말 어린이대공원에 갔다.
백곰을 봤다.
내 생애 곰발바닥을 가장 오래도록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곰이 발바닥을 내놓고 낮잠을 잤으므로.
정말 컸다. 저렇게 큰 것이 예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
곤하게 자고 있는 곰을 보니,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졌다.
곰의 식사 시간이었다.
사육사가 주는 물고기를 받아 먹었다.
정말 느릿느릿 물고기를 받아 먹었다.
먼곳에서 보면 움직인다고 생각지 않을 수도.
그렇게 귀찮으면 차라리 먹지나 말지.
먹는 게 신성하다는 건 자유를 아는 자들에게나 어울리는 격언이겠지.
갑자기 한없이 쓸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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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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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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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인이다


우리시대 시인 서른다섯 명의 내밀한 고백

 

           지은이  이재훈

              판  형  140*210/ 무선

              발행일  2011년 4월 15일

              페이지 576페이지

              분  야  문학 > 비소설

              ISBN  978-89-94792-14-9  13810

              가  격  18,000원

 

 

서른다섯 명의 시인이 고백하는 육성은 그들의 시를 더욱 풍성하고 적확하게 읽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저자의 말대로 시인은 특별하다. ‘이율배반적인 인간형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며 어느새 시인의 머릿속으로, 가슴속으로 들어가는 행복한 경험을 할 것이다.

시인은 시 안으로 숨는다. 비의(秘義)다.
그 비의를 읽기 위해 시인과 시인의 대화를 엿듣는다.
다시 시(詩)의 시대는 오는가?

어떻게 쓸 것인가? 시인의 고민이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독자의 고민이다. ‘어떻게’라는 화두는 같지만, 시인은 쓰고, 독자는 읽는다. 최근의 시들은 그 시인과 독자 사이가 너무 멀게 느껴지게 한다.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우주적 깊이라고 할 만하다.
1980년대를 문단에서는 시의 시대라 했다. 1990년대 소설의 시대를 거쳐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한때 문학의 위기, 시의 죽음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참여와 비참여를 떠난 지점에서 무의미시, 비대상시, 날이미지시, 해체시 등의 방법론적 분류가 난립했다. 그러다 느닷없이(과연?) 미래파가 등장했다. 미래파는 창작론적으로, 의미론적으로, 정서적으로 새로웠다. 문단은 새로워하면서도 내심 당황했다. 내부로의 침잠, 암호화된 정서, 독특한 상상력, 극단으로 치닫는 표현과 형식, 낯선 은유 등은 새롭지만 해독이 어렵다는 독자들의 불평을 들어야 했다. 미래파라는 용어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아직도 유효한 가운데, 문제는 시 독자들의 수가 반토막되었다는 상황은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 책임이 소위 미래파라 불리는 시인들에게 있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미래파에 맞서 극서정시를 주창하며 최근 조정권, 이하석, 최동호 시인들이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결과는 두고 볼 일이다. 시인도, 독자도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중이라 해야겠다.
와중에 문학 전문 출판사들은 새로운 시집 출간에 열을 올린다. 문학동네 출판사는 획기적인 판형의 시집을 선보였고, 잠시 주춤하던 민음사와 문예중앙 등의 출판사 들도 새로운 기획을 펼치고 있다. 시 전문 문예지들도 의욕적이다. 다시 시의 시대가 올 것인가?
마침 의미 있는 책이 하나 나왔다. 월간《현대시》부주간인 이재훈 시인이 다른 시인들과 만나 나눈 이야기를 묶어 대담집을 펴냈다. 대담은 멀리 2001년부터 올해 봄에 걸쳐 이루어졌다. <현대시>, <유심>, <열린시학> 등에 실렸던 원고를 모았다. 이미 작고한 김춘수, 오규원, 박찬 시인을 포함한 서른다섯 명이다. 시인들이 직접 말하는 자신의 시와 시론(詩論), 그리고 내밀한 개인사를 읽고 나면 새삼 시들이 다시 읽힌다.
시인 인터뷰는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인터뷰 대상에 대해 상당히 많은 준비를 요한다. 최대한 그 시인의 시를 읽어야 하고, 그에 대한 평론도 꼼꼼히 찾아야 한다. 이전의 인터뷰도 챙긴 후에 적절한 질문을 만들어야 한다. 모르면 시인의 답변에 대응을 못해 대담이 산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이 책의 장점은 인터뷰어인 이재훈 시인이 꼼꼼한 시/시인 읽기를 통해 유효적절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에 있다. 시인의 일상으로 들어가 마음을 열기도 하고, 유년 또는 문청 시절에 겪은 여러 경험들을 통해 시인의 시관, 시 세계를 엿보기도 한다. 그러다 시인의 시에 대해 전격적으로 공격한다. 질문하는 시인과 답변하는 시인 사이에 긴장이 흐르는 순간이다. 아마도 독자는 그 긴장이 즐거우리라.
서른다섯 명의 시인이 고백하는 육성은 그들의 시를 더욱 풍성하고 적확하게 읽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저자의 말대로 시인은 특별하다. ‘이율배반적인 인간형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며 어느새 시인의 머릿속으로, 가슴속으로 들어가는 행복한 경험을 할 것이다.

월간《현대시》부주간인 이재훈 시인이 다른 시인들과 만나 나눈 이야기를 묶어 대담집을 펴냈다. 이미 작고한 김춘수, 오규원, 박찬 시인을 포함한 서른다섯 명이다. 시인들이 직접 말하는 자신의 시와 시론(詩論), 그리고 내밀한 개인사를 읽고 나면 새삼 시들이 다시 읽힌다.

평소 다방식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고 김춘수 시인이 평생의 라이벌로 여긴 시인은 김수영뿐이었다. 역사허무주의자였지만 현실에 대한 울분 같은 것도 가지고 있던 시인은 ‘김수영의〈풀〉같은 작품을 보면서 내가 써보고 싶었던 것을 벌써 썼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일종의 라이벌 의식, 질투’를 느꼈고, ‘그래서 의식적으로 더 내면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시인이 역사허무주의자가 된 일본에서의 경험과 후배 시인들에게 주문하는 ‘큰 시인’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30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시집《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로 ‘지난 천 년의 막바지에 마치 스톤헨지의 유적처럼 발굴되었다(정과리)’는 찬사를 받은 허만하 시인. 그가 밝히는 독특한 사유와 시론은 30년간 묵묵히 시인의 길을 걸어온 내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나는 끝까지 시인입니다”라는 그의 말에서 이 대담집의 제목《나는 시인이다》가 나왔다.

이승훈 시인은 자아 탐구, 모더니즘과 해체, 그리고 선(禪)에 이르기까지의 삶과 문학 여정을 밝힌다. 시인은 ‘삶과 시의 경계뿐만 아니라 시와 비시의 경계도 깨야’ 한다고 말한다. 시인은 이제 ‘삶에서도 시에서도 한결 자유’를 느낄 경지의 깨달음에 이르렀다.

고 오규원 시인은 김춘수의 무의미시론과 자신의 날이미지시론을 서로 비교하며 설명하여 독자의 눈을 밝게 만든다. 그에 의하면 무의미시는 ‘심리적, 주관적 묘사의 세계’이다. 반면 날이미지시는 ‘관념화되기 이전의 의미’여서 ‘존재의 현상을 날것 그대로’ 묘사한다. 사실적, 발견적, 직관적 세 가지로 구분하는 날이미지는 시인 자신의 시를 빌려 설명해 이해를 돕는다.

시를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든 유년 시절과 목월의 제자가 된 사연을 들려주는 유안진 시인. 고교 문사에서 문학청년 시절을 거쳐 등단하기까지의 이야기와 그만의 세계관, 인간에 대한 애정을 말하는 정호승 시인. 쇳물은 물도 불도 아니라는 연금술적 상상력을 보이는 노동자 시인 최종천. 서른다섯 명의 시인이 고백하는 육성은 그들의 시를 더욱 풍성하고 적확하게 읽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한편 1992년《현대시세계》로 같이 등단하여 우리 시의 확장성을 선보이는 동년배 시인 강정과 김태형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저자의 말대로 시인은 특별하다. 특별한 시인도 역시 한 사람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독자는 시인의 머릿속으로, 가슴속으로 들어가는 행복한 경험을 할 것이다.



이 책의 구성은…….


* 내 생애에 시인으로서 라이벌 의식을 가진 시인은 김수영뿐입니다. - 김춘수

* 나는 끝까지 시인입니다.  - 허만하

* 자아 탐구에서 자아가 없다는 인식에 도달하기까지 30년이 걸린 셈입니다. - 이승훈

* 시인은 모국어의 창조자이니까 시어까지도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 유안진

* 날이미지시는 관념화되기 이전의 의미를 존재의 현상에서 찾아내어 이미지화하는 시입니다.       - 오규원

* 시의 본질이라는 게 서정의 물기 같은 게 아닐까요. - 정호승

* 나이가 드니까 시를 투명하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 한영옥

* 살아 숨 쉬는 정신주의는 육체성이 깃들어야 합니다. - 최동호

* 주변 장르로 전락한 시의 화려한 부활 혹은 변모를 꿈꿔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어요. - 원구식

* 자연이든 사회든, 서정시든 서사시든 본질적인 것은 인간이고, 인간의 관계고, 인간의 태도입      니다. - 김정환

* 시의 죽음이야말로 새로운 시의 탄생을 가능케 하는 최고의 질료. - 남진우

* 두 번째 은유, 곧 은유를 은유한 언어가 시가 되는 것이지요. - 이사라

* 굳이 저의 이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휴머니즘밖에 없다고 말할 겁      니다. - 박찬

* 존재론적 성찰을 통해 내 안의 적들과 싸우는 관계가 성립되는 거죠. - 이재무

* 시인은 일종의 물(物)에 최면을 거는 샤먼. - 김명리

* 저는 시를 절대로 작위적으로 쓰지 않습니다. ……즉발적으로 나올 때 씁니다. - 서지월

* 쇳물은 물도 아니고 불도 아닙니다. 물인 동시에 불이고, 불인 동시에 물입니다. - 최종천

*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폐해지고 황폐해진 내 삶을 다시 구원해 준 건 시였습니다.

  - 이진영

* 저는 의도하지 않음을 통해서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고진하

* 저의 언어가 가장 반발하는 것은 의미 과잉 내지는 주도의 언어이지요. - 손진은

*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바로 물속이고 아틀란티스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 성선경

* 상징이니 은유니 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백병전으로 몸과 싸워 보고자 했습니다. - 서규정

* 내 시의 말들이 통각의 말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장대송

* 내가 꿈꾸는 나의 궁극은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날이죠. - 허연

* 저는 되레 더 큰 배반과 더 예리한 당착을 추구합니다. - 강정

* 이제는 이미지들이 안으로 집중되면서 소용돌이치는 상징의 힘에 제 몸을 맡기는 쪽입니다.       - 김태형

* 저는 밝고, 화려하고, 강한 것보다는 어둡고, 쓸쓸하고, 약한 것들에 천성적으로 마음이 가닿      는 쪽이거든요. - 김선태

 * 사물보다는 사물과 사물 사이, 어떤 한 세계보다는 세계와 세계 사이, 그곳에 자꾸 시선이       갑니다. - 김소연

* 한 편의 시가 교란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존재할 수 있나요. - 이수명

* 결국 일상이 만들어 내는 파장에 제 귀는 쏠려 있습니다. - 유종인

* 저는 기본적으로 ‘시란 내 사고가 만들어 내는 상품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 김영남

* 경험 과학이나 실증 과학의 언어로 말할 수 없으니까 상징적 언어(시적 언어)로 말하는 거 아      닌가요? - 김점용

* 방법론이지만 전 영화를 만들 듯이 시를 씁니다. - 배용제

* 시인은 창조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 배한봉

* 의미를 사유하는 문장보다는 이미지를 사유하는 문장이 더 구체적 언어에 가깝지 않을까요.       - 여정


저자의 말


시인들은 특별한 인간들이다. 한없이 천진난만하다가도 독선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 있고, 무(無)와 유(有), 욕망과 버림의 사이에서 늘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면서도, 누구보다 자기 세계가 확고하다. 하지만 안주하는 법은 없다. 남들이 가지 않았던 또 다른 세계를 넘보려 기를 쓰는 족속들이다. 질서보다 혼돈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고요한 침묵을 즐길 줄 안다. 자본 문명의 시대에 가장 이율배반적인 인간형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담이란 핑계로 시인들과 나눈 말과 시간들. 내 문학적 청춘의 가장 잊지 못할 추억거리로 남았다. 대담을 진행하면서 아주 즐거웠다. 내가 만난 시인들은 문청 시절 내 문학 공부의 텍스트가 되었던 장본인들이었다. 그들의 시를 읽고 평하면서 문학 수련의 담금질을 했던 내가 그들과 직접 만나 육성을 듣는다는 것은 대단히 흥분되는 일이었다.”


본문 내용


<김춘수 시인>

이재훈 : 60년대 김수영이 참여의 길을 가게 되었기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그 반대 진영 쪽이라 할 수 있는 내면세계로 더 침잠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김춘수 : 그 말이 옳기는 옳은 말입니다. 저는 아까 말했다시피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상과 역사라는 것에 대한 회의가 생겼습니다. 지금도 이 역사허무주의자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부딪히면 현실에 대한 울분 같은 것도 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같은 시도 썼지만, 내 본래 의식은 역사허무주의였습니다. 역사나 현실의 문제에 대해 등을 돌리고 있었지요. 그때 김수영의 〈풀〉 같은 작품을 보면서 내가 써보고 싶었던 것을 벌써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종의 라이벌 의식, 질투가 생긴 거지요. 나보다 선수를 쳤구나, 하는 생각. 그래서 의식적으로 더 내면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재훈 : 선생님은 김수영을 가장 큰 라이벌로 생각하셨나요?

김춘수 : 했지. 그때뿐만 아니라 내 생애에 시인으로서 라이벌 의식을 가진 시인은 그 사람뿐입니다. 미당 같은 시인도 있었지만, 나와는 시적 세계관이 너무 다르니까 그런 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었지요.


<이승훈 시인>

김춘수의 무의미시론은 관념의 제거를 노리는, 이른바 묘사적 이미지에서 자유연상, 통사 해체로 발전합니다. 오규원의 날이미지시론은 말 그대로 관념의 흔적이 없는 날이미지를 추구하고, 그런 점에서 김춘수의 묘사적 이미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합니다. 내가 주장한 비대상시론은 김춘수의 자유연상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지만, 나는 자유연상보다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의 논리, 곧 억압된 무의식의 투사를 강조했습니다. 김춘수가 대상의 재구성, 대상과 이미지의 거리를 강조하고, 이때 대상의 의미, 곧 지시적 의미의 소멸을 강조한다면, 오규원 역시 이런 재구성, 곧 대상의 날이미지를 계속 추구하고, 나는 이런 대상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요컨대 김춘수, 오규원은 대상을 전제로 무의미, 날이미지를 추구하지만, 난 출발부터 그런 대상이 없고, 따라서 나의 내면, 무의식이 문제였습니다. 시의 경우엔 김춘수는 이상과 정지용 사이에 있고, 오규원은 이상과 김수영 또는 김수영과 김춘수 사이에 있고, 나는 이상과 김춘수 사이에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

시는 본질적으로 은유에요. 은유가 없는 진술은 공허할 수밖에 없고요. 시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은유의 품 안에서 진술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어떤 진술적 시라도 하나의 은유성을 띠고 있는 거죠.



지은이 


이재훈

1972년 강원 영월 출생.

1998년 《현대시》로 등단하여 시를 쓰기 시작했다.

국문학과 문예창작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현대시》 부주간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지은 책으로 《현대시와 허무의식》, 《딜레마의 시학》이 있다.


ipoet@hanmail.net

http://ipoet.tistory.com 

http://twitter.com/hoonyletter



차례 


의미와 무의미의 변증법을 찾아서 _ 김춘수

풍경과 실존과 시인 _ 허만하

비대상에서 선(禪)까지 _ 이승훈

‘봄비 한 주머니’ 들고 온 세상의 누이 _ 유안진

날이미지시와 무의미시 그리고 예술 _ 오규원

슬픔과 사랑이 자아내는 서정의 원리 _ 정호승

적극적 마술로 잉태한 마음사람 _ 한영옥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에 대한 명상 _ 최동호

시인, 名기타리스트 그리고 순교자 _ 원구식

황색예수 이후, 또 다른 서시(序詩)를 찾아서 _ 김정환

사과나무 아래로 귀환한 오르페우스의 꿈 _ 남진우

‘미학적 슬픔’의 참된 모습과 조우하며 _ 이사라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의 미학 _ 박찬

몸에 피는 추억, 그 보폭을 따라서 _ 이재무

고통과 즐거움이 상생하는 귓속말 _ 김명리

햇살 나리는 산모롱이에 핀 서정의 꽃 _ 서지월

수렵의 시인에서 관능의 시인까지 _ 이진영

문화에서 건져 올린 한 노동자 시인의 인간학 _ 최종천

우화등선을 꿈꾸는 호랑나비돛배를 타고 _ 고진하

숲을 설레게 하는 두 힘을 생각하며 _ 손진은

물속에서 비상하는 고래에 대하여 _ 성선경

상채기 많은 진눈깨비의 아름다움 _ 서규정

검은빛 기억을 날아다니는 새 _ 장대송

일찍이 허무를 알아 버린 푸른 낭만주의자 _ 허연

처형극장에서 세상을 보다 _ 강정

메탈 지프를 타고 노란 잠수함으로 가라앉기 _ 김태형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성찰 _ 김선태

세상의 변죽들에게 바치는 매혹의 언어 _ 김소연

투명한 착란과 자유로운 공황의 미학 _ 이수명

‘미친 누이’에게 보내는 아득하고 근사한 기다림 _ 유종인

오브제 올라타기, 혹은 감싸 안기 _ 김영남

벗겨지지 않는 시의 ‘빤쭈’ 벗기기 _ 김점용

이 달콤한 감각의 세계에서 _ 배용제

신령스런 은자의 맑고 투명한 저 힘 _ 배한봉

지금도 21C 콜로세움에서 꿈틀대는 벌레 11호 _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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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 표정~

시시각각 2011. 3. 3. 15:58
무슨 무슨 모임이면,
꼭 노래를 시킬 때가 있다.
제발 노래 좀 안시켰으면 좋겠다.
노래 좀 혼자 부르면 안되나.
노래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돌아다니길래
기록한다.
참말, 가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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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시인 김춘수


이재훈
(시인, 현대시 부주간)




꽃의 시인 김춘수(1922~2004). 일반적으로 ‘꽃’이라고 하면 예쁘고 아름다운 감성적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춘수에게 ‘꽃’은 이러한 의미가 아니다. 김춘수 시인이 말하는 꽃은 존재의 대상이다. 전국민에게 사랑받는 시 <꽃>으로 인해 김춘수는 꽃의 시인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김춘수 시인은 한국 시단에 아주 독특한 시세계를 가진 시인이다. 그의 시세계는 ‘관념시’와 ‘무의미시’, 그리고 이 둘의 변증법적 지양을 거친 ‘의미’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거치며 진화해왔다. 그로 인해 시인의 문학적 역정은 언제나 문제적이었으며 또한 가장 독특한 경지에 있었다.

김춘수 시인은 1922년 경남 통영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시인은 유복한 가정환경과 개방적 사고를 가진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호주 선교사가 운영하는 유치원에서의 경험은 시인에게 이그조티즘(이국취향)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 체험이 독특한 시적 세계관과 미적 관심에 대한 최초의 자각이다.

시인은 통영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경기중학에 입학한다. 이후 일본대학 시절 천황비판으로 옥살이를 한 경험도 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대학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추방되어 퇴학당하고 한국으로 건너온다. 통영중학교와 마산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65년 경북대학교 교수, 1978년 영남대학교 문리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특이한 이력은 1981년 제11대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한 것이다.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은 시인으로서의 삶과 너무나 다른 일이었다. 이후 작고하기 전까지 김춘수 시인은 정치활동 경험에 대해 많은 후회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6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시와 시론을 묶은 <김춘수 전집>(현대문학)이 2004년 출간되었다.

김춘수 시인은 1948년에 첫 시집 <구름과 장미> 이후 한국 시단에서 가장 독특하고 모던한 시의 경향을 보이게 된다. 196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시적 실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김춘수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무의미시’이다. 대상과의 거리가 상실된다는 것. 대상을 지울 때에 대상의 구속으로부터 시인은 해방되고, 어떤 의미부여의 행위로부터도 해방된다. 그러나 무의미시가 가지고 있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에서 이미지는 의도하지 않아도 의미를 띄게 된다. 이 의미를 지우기 위해 탈이미지로 가게 된다. 탈이미지는 리듬만으로 시를 쓴다는 것인데 이것은 시인이 고백한대로 언어도단의 세계이다.

무의미시의 막다른 골목에서 시인은 다시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시인은 다시 의미의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 이 의미의 세계는 이전의 관념시와는 다른 변증법적 지양을 거친 세계이다. 이 관념시와 무의미시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형성된 시집들이 후기의 <들림, 도스토예프스키>, <거울 속의 천사>, <쉰 한 편의 비가> 등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꽃> 전문

김춘수의 시 <꽃>은 전국민이 모두 아는 시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비교적 초기작품이긴 하지만, 김춘수가 가진 존재의 의미를 마음 깊이 새기게 하는 시이다. 어떠한 대상이든지 불러주기 전에는 아무런 이름이 없다. 산의 이름 모를 들풀도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이름을 가진 존재로서 의미를 띄는 것이다. 그 의미가 바로 시에 말하는 ‘꽃’으로 상징할 수 있다. 이름이 불리워지지 않은 존재는 늘 불안하다. 그리고 너와 나 모두 무엇이 되고 싶은 열망과 소망이 있다. 어떤 의미로든지 타인과 이 세계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간절함이 있다. 시에서는 그것을 가리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고 전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서로간의 존재에 대한 가치가 희박하다. 인터넷 공간과 블로그, 미니홈피, 트위터, 그외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 디지털미디어 기기, 스마트폰 등으로 대화가 단절되고 타인에 대한 관심이 더욱 적어진다. 가상공간에서 포장된 나와 타인이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춘수의 <꽃>을 읽고 있으면 타인을 가만히 불러보고 싶게 한다.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어떤 의미라고 속삭이고 싶게 한다. 찬바람이 분다. 외롭다고 인터넷과 스마트폰만 쳐다볼 게 아니라, 그동안 잊고 지냈던 지인들에게 전화라도 한 통 한다면 어떨까. 따스한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까. 그동안 잊었던 내 존재가 그에게로 가서 새로운 존재로 남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참 포근하고 훈훈한 날들이 될 것이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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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시시각각 2010. 12. 6. 00:24

12월 2일. 건국대 국문과 학생들이 인터뷰를 하기 위해 찾아 왔다.
인터뷰는 나는 이렇게 시를 쓰게 되었고로 시작해서 이런 시를 써왔다로 끝났다.
가장 어려운 질문은 '시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였다.^^
학생들로부터 나의 몰골이 담긴 사진이 왔다.
역시 가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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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5일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연희목요낭독극장'이 있었다.
이른바 <살구꽃, A>. 연출은 시인이자 극작가인 최치언 형.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난 사회를 봤다.
하성란 작가와 정우영 시인과 짧은 대담을 했다.
소설집 <A>와 시집 <살구꽃 그림자>와 놀기.
역시 사회 체질은 아님을 실감.
배우들과 라이브 밴드들의 공연이 인상적이었다.
끝나고 삼겹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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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문학관 특강

시시각각 2010. 11. 14. 23:00
지난 여름 휴가때 함양에서 머물렀다.
그때 배한봉 시인의 요청으로 경남문학관에서 특강을 했다.
당시 배한봉 시인은 경남문학관에서 시창작반을 꾸려 강의중이었다.
특강 제목은 '2000년대 한국시단과 미래'.
메일로 받은 사진이 있어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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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혜 소설가 :: http://twtkr.com/faddishjay

한차현 소설가 :: http://twtkr.com/handda

허연 시인 :: http://twitter.com/heoyeonism

황석영 소설가 :: http://twtkr.com/Hsokyong

황인철 시인 :: http://twtkr.com/hwangincheol

황지우의 명작읽기 :: http://twtkr.com/jiwooclassic

 

 

* 출판/도서, 국내작가/시인 관련 트위터 정리 

    http://delius.egloos.com/4371928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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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신현정 시인 1주기 추모 시제>가 10월 15일 출판문화회관에서 있었다.
나는 시낭송으로 참여했다.
시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자전거 도둑>을 낭송했다.
정진규, 윤석산, 김종해, 조정권, 이명수, 문인수 선생님들의 회고담을
들을 수 있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추억의 회고담들이 꽤 있었다.
앉아 있는 모습과 낭송하는 모습이 찍혔다.
뒷풀이에는 참석치 못하고, 인사동에서 신씨, 박씨, 박씨를 만났고
밤늦게 다른 모임의 배씨, 김씨, 강씨 등등과 조우했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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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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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태백을 다녀왔다.
현대시 가을세미나 행사였다.
늘 그렇듯 관광버스 안은 곤혹스러웠고,
급기야 관광버스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고장으로 멈춘다.
4시간을 기다렸고, 저녁 어스름이 되서야 태백에 도착했다.
역시 고산지대.
산허리를 감싸고 도는 운무는 잊혀지지 않았다.
나는 황홀한 구름을 보면, 무언가 한껏 들뜬다.
구름으로 가득한 땅에서 태어나서인가.
다음날은 광산지역 태백의 역사를 돌아다니며 보았고
막히는 고속도로의 긴 시간을 건너왔다.
세미나 때, 말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다.
세미나의 주제는 '2000년대 한국시의 쟁점과 전망' 이었고
황현산, 이성혁 평론가가 주제발표를 했다.
나는 토론자로 참여하였다.
말을 할 때면 꼭 저런 입과 표정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가관이다~


아래 사진은 태백 <오투리조트>에 전시된 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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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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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후감

산문 2010. 10. 11. 14:52

|선후감選後感|

2010년 신인추천작품상 하반기에는 약 150여명 정도가 응모해 왔다. 눈에 띄는 것은 응모 작품의 편수가 이전에 비해 상당 부분 줄었다는 점이다. 응모 작품의 수가 줄어든 이유가 무엇인지 여러 각도를 통해 진단해 보았다. 먼저, 그동안 투고해 왔던 당선권 내의 응모자들이 이미 당선되었을 경우이다. 예비 시인의 인프라가 예전에 비해 얇아졌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시 잡지의 증가로 등단 경로가 훨씬 넓어졌다는 점이다. 몇 잡지에 집중적으로 응모가 되었던 것과는 달리 응모자들이 분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가장 문제시되는 것은 젊은 응모자들의 수가 줄었으며, 시적 역량 또한 부족하다는 점이다. 젊은 세대의 응모자들은 문창과나 국문과 출신의 학부와 대학원생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창작 교육을 통한 ‘잘 만들어진 시’라는 한계점을 노출하고 있다.

이번 심사에서는 응모 작품의 편수뿐 아니라 작품 수준도 예년에 비해 낮았다. 자기만의 개성과 언어감각을 지닌 응모자들이 적었으며, 새로운 시적 인식과 타고난 시인의 감수성을 가진 응모자들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편집부에서는 본심에 올릴만한 작품으로 김혜숙, 남궁선, 서종현, 이서영의 작품을 주목했다. 이들 중에 우리는 특히 남궁선 씨의 작품에 주목했다. 「오랫동안 자라나는 아이들」 외 9편을 응모한 남씨의 시는 참신한 이미지가 돋보였다. 또한 시적 대상과 시적 자아와의 관계에 묘한 긴장이 생성되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시 「가을의 탄생」과 같은 이미지와 시적 인식의 조화는 눈여겨 볼만 했다. 문제는 남궁선의 시가 가진 세계관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모호했으며, 시의 군데군데에서 발견되는 시적 언어의 습관화와 기성 시들의 답습, 인유의 식상함 등이 눈에 띄었다.

결론 지어 말하자면, 이들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간다 하더라도 당선권에 들 만한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오랜 논의 끝에 이번 심사에서는 본심을 따로 열지 않고, 당선자를 배출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상반기 심사에서도 당선자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오랜 고민을 하였으나, 그것과 달리 좋은 신인을 뽑자는 취지 하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 했다.

본지 신인추천작품상에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당선자를 찾지 못했다는 죄송한 말씀과 함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_ 현대시, 201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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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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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후감

산문 2010. 10. 11. 14:51

선후감

투고된 작품의 수는 많지 않았다. 그 중에서 우리는 이난희, 김대성 씨의 작품들에 주목했다.

이난희 씨는 다양한 성격의 시편들을 보여주었다. 풍경을 꼼꼼히 묘사하는 시에서부터 세태 풍자의 시까지 다양한 시를 응모해 왔다. 그중에서 풍경을 묘사하는 시편들이 가장 눈에 띄었다. 어떤 시의 언어는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작위적이었으며 젊은 시인들의 언어를 따라하려는 인상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시를 조형하는 능력과 말을 사용하는 감각은 충분히 오랜 숙련을 겪은 듯 보였다. 특히 시 「얼음호수」는 하나의 풍경이 한 편의 훌륭한 시가 되는 사례를 보여준다. 시에서는 풍경을 묘사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풍경 속에서 “단단히 영근 물집 하나를 기어이 톡, 터트리”는 시적 순간을 감지하고, 이것을 풍경 속에서 사건화 한다. 시에서 모든 대상물들이 서로 관계를 가지며 의미를 찾다가 시적 순간을 발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난희 씨가 자신과 잘 맞는 언어와 시적 세계를 만나 올곧게 걸어간다면 충분히 좋은 시인이 되리라 믿는다.

_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10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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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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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메다 바이러스


이재훈


그대들은
나를 외계인이라 불렀지.
난장이라고도 불렀으며
그냥 ‘꽃’이라고도 불렀지.
나는 원래 눈이 하나인 키클롭스를 사랑했고
피부가 검은 육체를 사랑했지.
피비린내 나는 이 행성에
착륙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잔혹한 DNA를 가진 종족들을 보고야 말았어.
내 고향에서 십만 광년이나 떨어진 땅.
처음엔 검은 땅과 푸른 바다와 하늘이 끔찍했지.
왜 지구에 사는 종족들은 땅에 붙어서 다닐까.
마음껏 날고 싶었지만,
이곳에 살기 위해선 참아야 했어.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팔과 다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매일 괴로웠지.
비명과 고통이 반복되었고,
숭배할 대상은 이 땅에 없었어.
몇몇은 돈을 숭배하기도 했지만,
정작 아름다운 살육을 보지는 못했어.
아름다운 역사도 간혹 있었다지만
이곳의 풍습은 선량한 것들만 쓰게 하지.
결국 이 세계는 수학의 아름다움이 지배해.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남겨진 숫자의 아름다움.
그 미학으로 서로의 키를 재고 우쭐거리지.
팔등신은 수로 만들어지는 것.
조화의 아름다움은 방황으로 만들어지는 것.
지구인이라는 종족은 말이야.
가끔씩 약속을 어기고 방사능을 누출하곤 하지.
나는 거대한 건물 속으로 몸을 숨겼어.
하얀 가루가 폭발하고
그 가루가 내 몸에 달라붙었지.
해독크림을 발랐지만 너무 늦었어.
갑자기 사위가 연기로 가득 찼어.
손전등을 빌려 친구들과
살아나갈 도주로를 찾았지.
눈을 뜨니
세상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었어.
아름다운 북극의 얼음 위에서
지혜의 말들을 외울 거야.
그대들은 나를 북극에 핀 꽃이라 하겠지.
외눈박이 육체를 사랑하는 나를 말이야.


*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 DNA가 없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생물체가 전염하는 가상의 바이러스. 공기로 전염되며, 20초 안에 사망. 감염자의 공격성을 극대화하여 자살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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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역겹고, 불결하고, 냄새나는 상상력



최치언
(시인)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란 제목의 이 시는 SF적이고, 퓨전적이고 카툰적이다. 상징들은 적당하게 불친절한데, 서사는 힘이 있고 흥미롭다.
시인의 모든 시가 그렇지는 않지만, 이 시는 나의 영혼을 무례하게(?) 자극하여 좀 더 역겹고, 불결하고, 냄새나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재밌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재밌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상징이나 주제, 의미 따위를 분석해야 되나? 미안하지만 난 남이 쓴 상징이나 주제, 의미를 분석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하여간, 제멋대로 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시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다.

00년00시00분.
핏빛 하늘 위로 거대한 날개를 가진 무엇인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안드로메다에서 날아온 외계생명체들이었다.
지구를 향해 ‘십만 광년’을 날아온 그들의 거대한 날개는 너덜너덜 찢겨져 있었고, 말대가리 같은 길쭉한 얼굴은 돌투성이에 얻어맞은 듯 으깨어져 있었다. 주걱처럼 휜 턱주가리 아래 선과 악을 초월한 당근 맟 같은 그들의 하나 뿐인 눈알이 박혀 있었다.
한편, ‘검은 땅’에선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팔과 다리’로 보기에도 ‘괴로운’ 인간들이 ‘우쭐’대며 걸어 다니고 있었다.
남자라는 인간들은 서로의 성기를 만지며 그 크기와 무게로 서열을 매겨댔고, 여자들은 사소한 질투로 자살을 결행했다. 하여간 그들은 소란과 무질서와 미친 짓거리들로 간신히 안정적인(?) 거리를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못생긴 발가락이 지구를 굴리고 있다는 허무맹항한 감상에도 젖어 있었다. 이미 지구가 무엇 때문에 우울하게 돌고 있는지 뻔히 밝혀졌는데도 말이다. 인간은 그러한 족속들이었다. 우월이 지나쳐 추악의 단계로 진입한 멜랑똘리들이었다.

00시00분.
맨발의 A가 14블록을 걸어간다.
A는 파랑에서 빨강으로 신호등이 점멸하는 것을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걷는다. 그리고 그는 멈춰 서서 실성한 듯 하늘을 쳐다보며 지껄여댄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거대한 날개를 가진 ‘난장이’들, 눈물을 묻히지 않은 눈알로 이곳을 섬뜩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저 ‘꽃’들. 시인의 상징에서만 가능하던 존재들! 우린 너무 늦어버린 게 아닐까? 누군가 피를 토해야 겨우 하나를 알아먹을 수 있다면, 너무 늦어버린 거야.”
A의 뒤로, 털 빠진 비둘기 같은 수명의 B들이 신호등의 빨강을 쳐다보며 멍청하게 구구대고 있다.
A는 뒤돌아 B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한다.
“…왜 저들은 내가 보는 것을 볼 수 없단 말인가? 저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기 전에 시를 가르쳤다면, 저들은 나와 좀 더 각별한 얘기를 나누었을 텐데……”
A가 이처럼 난수표 같은 말을 떠들고 있을 때, 복용시 침을 찍찍 뱉게 되는 신종마약 찍찍을 처먹은 C가 덤프트럭을 몰고 13블록을 빠져 나오고 있다. 그리곤 14블록으로 낭창낭창 달려오더니 순식간에 ‘앗’하는 사이도 없이 인도로 뛰어들며 B들을 모조리 깔아뭉개 버린다.
덤프트럭에서 12인치 몽키스파나처럼 생긴 C가 내린다. C는 덤프트럭에 깔린 B들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기꺼멓게 썩은 이빨들 사이로 침을 찍찍 뱉으며, 갤갤 풀린 눈으로 핏빛 하늘을 올려다본다. 물론 A는 O다리 니퍼처럼 서서 황당하게 C를 보고 있다.

00시00분.
하늘을 날다 지친 외계생명체들이 C의 검은 동공 속으로 내리꽂히듯, ‘검은 땅’ 위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당황한 C는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며 소리 지른다.
“찍찍… 난장이들… 찍찍… 꽃… 찍찍…”
A는 얼른 C에게 다가서며 말한다.
“자네 눈에도 저것들이 ‘난장이’와 ‘꽃’들로 보이는가? 그렇다면 자네하고는 좀 더 각별한 얘기가 필요할 것 같군. 뭐랄까?… 음… 다 뒤집어엎고 다시 시적으로 상상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고나 할까…?… 자네와 내가 지구를 구하는 일말일세… 부디, 이미 저지른 아픔답지 않은 ‘살육’ 따위는 잊어주게. 내 이름은 콩킹박사일세… 자네 이름은?… 찍찍맨이라 해두지…”
C가 A의 얼굴에 찍찍 침을 뱉을 사이도 없이 A는 C를 어둠에 쌓인 구두뒷굽 같은 골목 안으로 잡아끌고 들어간다.
순간, 빗빛 하늘에서 핏방울들이 떨어져 내리고 추락하는 외계생명체의 비명으로 지구가 헐렁헐렁 흔들리기 시작한다.
신호등이 빨강에서 파랑으로 점멸한다.
안드로메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20초 동안에 사망한다던가? 거짓말을 조금 보탠다면 위의 짧은 이야기는 시를 읽고 난 뒤 20초 동안에 제멋대로 떠오른 생각이다.
그렇다면 난 안드로메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 아닐까? 오래전부터 나에게만 유통된 말을 빌려 쓰자면 진정한 상상력은 의식의 죽음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니까. 하여간, 이것이 이 시의 힘이다.

_ [시와사상], 2010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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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극장에서 세상을 보다



강정, 이재훈

 

 

“당신의 용서는 내 핏줄 속에 숨은 바람을 뽑아 하늘로 되돌려 보내는 것, 살아서 죽음을 보여주는 것,//죽음을 살아낼 테야”
― <당신을 만난 이후로> 중에서

 

죽음을 살아낸다고 하는 젊은 시인의 목소리는 자뭇 신선하다. 젊기 때문에 가능한 이 말 속엔 강한 정신적 자장의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 그것은 인식의 경험에 대한 솔직함이다. 1970년산 시인의 삶 속에 인식의 경험은 그 어떤 실제적 경험보다 크다. 그러기에 시인은 마치 주술에 걸린 듯 언어의 마력에 휩싸인 채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김열규 교수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한국인의 죽음론’에 관해 다룬 유일한 책이다. 김열규 교수는 한국인의 죽음론을 위한 서설로서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삶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생각한다. 그것은 생물학을 벗어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삶 그 자체를 죽음에서 버림받지 않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생물학을 벗어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삶도 생물학적인 테두리에서 자유롭게 풀어놓으려 들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죽음에 대한 천착은 반대로 삶에 대한 천착에서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강정의 죽음은 현실 이후의 죽음, 다시 말하면 영생의 세계이거나 새로운 유토피아의 세계를 꿈꾸는 죽음이 아니다. 그러한 죽음이라면 그 죽음에는 기쁨이 있거나 나르시즘이 있을 것이다. 강정 시의 죽음은 현실의 죽음이다. 현실 속에서의 죽음이다. 우리는 삶을 위하여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한다. 살아내기 위하여 죽음을 택하는 것. 살아내기 위하여 죽임을 택하는 것. 강정 시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시인은 말한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수천 번 죽음을 노래했건만/내가 아직 살아 있는 게 이상하다”(<불안스런 것들>)고.


이재훈:반갑습니다. 첫 시집 이후로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많을 듯 합니다. 문예지에서도 시인의 시를 만나기가 여간 쉽지 않았습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강정:그동안 발표를 많이 못했습니다. 99년부터 조금씩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를 써야지 하는 강박도 없었고 시를 쓰지 말아야지 하는 강박도 없었지요. 시에 대해서도 인생에 대해서도 딱 그런 자세였습니다.(웃음)

이재훈:등단 후 첫 시집 발간될 때까지가 궁금합니다.

강정:시집에 있는 시들 중에는 절반 이상이 군대 가기 전에 쓴 것이구요. 제대하고 시골에 있으면서 시를 많이 썼습니다. 집에 286구닥다리 컴퓨터가 있었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아마 군대에 있으면서 묵혀둔 에너지가 있었나봐요. 군대에서 읽었던 여러 책들도 크게 도움이 되었구요. 그때 50-60편 정도 썼던 거 같아요. 사우나한 것처럼 내적 에너지를 쏟아냈었죠.

이재훈:시를 읽으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참을 수 없는 내적 에너지의 폭발에 의해 시가 나온 듯합니다. 쏟아냈다는 말이 마치 강신무의 사연처럼 들립니다.(웃음)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언어에 대한 생각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강정:시란, '끝없이 변전하는, 죽은 자의 무덤의 단 한 차례의 묘비명'이라고 감히 정의 내릴 수 있겠는데요. 시의 본령이 바로 그러한 인식에서 촉발되는 것이지요. 언어는 부르는 동시에 사라지는 신기루거나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적 형식'이라 명한 것처럼, 세계의 구조를 쉼없이 모방, 전이시키는 나 자신에 대한 '변종의 자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언어는 나 자신의 도구이자 살해자이며 동반자이자 영원한 적입니다. 나는 즉, 언어와 살을 섞어 나 자신에 배리되는 존재와 우주의 쌍생아, 그것도 돌연변이들의 세계를 한없이 지향하고 있는 겁니다.

이재훈:오늘은 '죽음'이라는 얘기를 안할 수 없겠네요. 좀 뻔하고 재미없는 질문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만. 죽음의 문제야말로 가장 큰 화두가 아니겠습니까.

강정:시를 가지고 어떤 경지에 이르겠다 그런 마음이 제게는 없는 거 같아요, 제게 시는 나를 곧추세우고 정신적으로 단련시켜주는 것은 있는데 저는 연애하는 것처럼 시를 써요. 애정의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죠. 시가 항상 자발적인 의사표현은 아니잖아요. 어떤 힘이 나를 눌러서 써질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 뱉어놓고 나를 놀라게 할 때도 있구요. 이런 식으로 무의식적으로 나를 드러내고 있는 거구나 하구요.

이재훈:시가 안될 때 안 되는대로 그대로 두는 경우를 보면 자신에게 솔직하신 것 같아요. 어떤 경우에는 시를 이대로 안쓰면 큰일나겠다 라는 중압감이나 불길함 때문에 시를 계속 쓰는 경우도 많은데요.

강정:내식대로 말해 본다면 그런 중압감은 저에게도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맞서느냐 하는 태도의 문제라고 합니다. 갑자기 이대로 계속 시를 쓰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중압감이 있습니다. 낭떠러지에 있는 느낌이랄까요. 그런 시간들도 시가 나오기 위한 하나의 단계인 것 같기도 해요.

이재훈:시집 <처형극장>은 90년대 들어 젊은 시인들이 천착하는 ‘죽음’의 문제에 꼭 거론되는 시집입니다. 많은 평자들은 90년대 후반 들어 생겨난 죽음의 시학에 관한 일반적인 평가를 이데올로기의 부재에서 찾는 듯 합니다. 현실세계 속에서 더 이상 싸울 근거지를 잃은 시인들의 정신적 촉수가 인식의 끝간 지점인 죽음을 향하는 것이지요. 시인들은 이성으로 결론 내릴 수 없는 극한의 정서에 매력을 느끼는 존재들 아닙니까. ‘죽음’을 생각하게 된 특별한 연유라도 있을까요.

강정:실제로 그런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고 문제가 있는 가정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해서 실제적인 큰 경험은 없습니다. 솔직히 저도 잘 몰라요. 왜 그렇게 죽음에 몰입하게 되었는지. 당연히 죽고 싶지 않죠. 길거리에서 차가 오면 피하게 되고 죽음을 회피하려는 것은 본능인 것 같아요. 죽음에 대해서 늘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런데 아까 극한이라고 하셨는데요. 가령 내가 뭘 하고 싶은데 못하면 저는 죽고 싶어요. 단순하게 말해서 가장 근본적으로 거기에서 발단이 되고 있지 않나 봅니다. 뭔가 하고 싶다라는 게 그 자체가 죽음일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못 죽죠. 삶의 순간들마다 그런 죽음들이 도처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삶의 행간일 것 같기도 하구요. 물론 문학적으로 뻔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요.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그런 쪽으로 갔던 거고 버튼을 누르면 마구 쏟아져 나오듯이 시가 쏟아져 나온 것 같아요. 제 시가 어떤 형식의 틀 속에 들어가기도 전에 쏟아져나왔던 거죠.

이재훈:죽음을 얘기한 선배 시인들의 영향은 없었는지요?

강정:선배 시인들의 죽음에 대한 시들은 솔직히 어둡잖아요. 선배 시인들에서는 형식만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게 영향을 받았겠죠. 어떻게보면 첫 시집은 내용은 없고 말만 많았던 시집인 것 같습니다. 말이라는 게 폭포처럼 쏟아질 때 나 스스로도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겠고 그런 말들이 나를 처형시켜 버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록음악을 좋아했는데 그런 음악들의 테마가 어둡고 침울하잖아요. 또 제 성격도 굉장히 침울한 성격이거든요. 조울증도 심하구요. 그런 것들도 이유가 된 것 같아요. 내 몸 속에 죽음이 꽉 차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답답했는데 말로 그것을 풀어냈던 것 같습니다. 죽음의 춤을 추고 싶었던 본능이 있었나봐요. (웃음)

이재훈:시집이 나올 당시 25세이셨는데 20대 중반의 나이에 바라보는 죽음은 중년 이상의 연대를 살아온 사람들과 다른 변별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적은 삶을 살았다는 게 체험의 빈약도를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강한 체험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삶의 성찰을 통한 죽음의 인식이 아니라 성찰을 통과하지 않은 죽음에 대한 인식일 겁니다. 그러므로 자칫하면 그 나이에 죽음의 세계에 몰입하는 것은 인식의 치장일 수도 있습니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극단이면서도 그럴듯한 가면이 아닐까요?

강정:제가 쓴 시에서 빠져나와 멀리서 볼 때가 있잖아요. 그게 다 맞는 말인 거 같아요. 당연한 말들 같구요. 기분 나쁜 부분이 있다면 너무 당연한 말인 게 나쁘죠. 치장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치장 맞아요. 치장하면 왜 안되나요?(웃음) 살면서 치장만큼 삶을 본질적이고 역으로 드러내 주는 게 뭐가 있나 이런 생각도 들구요.

이재훈:언어가 무척 화려합니다. 화자의 캐릭터를 만들고 있다. 스스로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규정하는 것인데요. 강하게 또박또박 말하는 것. 그것은 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또는 그만큼 삶에 대해 큰 목소리로 말하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요.

강정:캐릭터를 말씀하셨는데 제 시는 사람을 무척 불편하게 하는 시에요. 어떤 괴상한 놈을 하나 떡 세워놓고 볼 테면 봐라, 싫으면 말아라 하는 거죠. 성숙하지 못한 생각이긴 한데 그게 나의 방식인 거니까요. 이야기가 무척 장황하긴 합니다. 문법의 혼돈과 사유의 혼돈, 그리고 확정된 것에 기대지 못하고, 불연속적인 삶의 리듬에 쉬이 휘둘리는 연약함이 행간마다 읽는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 생각들이 정리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완결성도 저는 믿지 않습니다. 또는, 저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 모든 이들의 생각들에 동의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것은 단선적 불신이나 배반당하지 않으려는 웅크림은 아닙니다. 저는 되려 더 큰 배반과 더 예리한 당착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배리의 과정이 더 극악한 과오들을 이끌어내길 바랄 뿐입니다. 앞으로도 보다 점증된 의견과 보다 가파른 추락의 낙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재훈:죽음이라는 테마가 패러다임의 과도기에서 생산된 정신적 산물로 말해지는 경우도 많은데요.

강정:어떤 패러다임을 옮겨다니며 시를 쓰는 것들이 많지요. 그런 것에 연연하지는 않구요. 사람들이 많이 관심을 갖는 것에는 오히려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재미가 없어요.

이재훈:예. 그 말씀을 들으니 “시를 왜 쓰는가?”는 문제와도 직결되는 것 같습니다만.

강정:요컨대 '시란 무엇인가?' '작금의 시대에 시가 작용할 수 있는 역할과 그 반경은 어떤 것인가?'하는 정도의 물음이 내 스스로에게도 간헐적으로 들곤 하는 것인데, 그건 결국 '내가 왜 시를 쓰는가?'하는 문제와도 직결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나는 거기에 대한 여러가지 가능한 변설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도 속일 수 없고 스스로 조차도 수긍할 수 없는 궁색한 변명이겠지요.
  사실, 그런 문제를 고민한다는 건 여러모로 필연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합니다. '내가 왜 이것을 하느냐?'하는 물음은 결국에는 자기동일성 문제로 귀착되기 마련이고, 그것에 대한 대답은 또 반드시 자기존재증명의 형태로 연결되니까요. 그리고 그 대답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식의 후체험적인 귀결보다는 내가 설명할 수 없는, 설명하면 할수록 내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느끼게끔 만드는 어떤 미지의 선험성 쪽으로 대답을 지연시키는 걸 더 좋아합니다. 좋아한다고 말한 것만큼 그것은 분명 어떤 요령부득한 취향을 드러내는 것임에 분명하지만, 내가 도라지 담배를 피는 이유를 도라지 특유의 성질을 들어 설명할 수 있는 것과는 또 다른, 취향 이전의 문제인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런 질문들은 항시적입니다. 시를 쓰면 쓸수록 그 질문의 범위는 확대되고 대답은 갈수록 요원해지면서, 종국에는 질문 자체가 대답이 되어버린 듯한 상태에 다다르기도 하는데요.
  이 때, 모든 질문들은 그 자체로 무화되면서 다른 질문들 사이를 옮겨다니거나, 다른 질문 자체가 되기도 합니다. 요컨대 내가 무엇을 받아들이거나 수긍할 때(그리고, 아주 자주 반대할 때), 그것의 내용은 이미 내 안에 흡수되어 있거나 다른 형태로 표출된 내 의견의 일부로 벌써부터 존재했던 것입니다. 즉, 아무도 나와 같이 얘기하진 않지만, 그 누구도 나와 다른 걸 얘기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누군가에 의해(그가 아마도 현대의 신, 나를 활동하게 하면서, 내가 활동하는 만큼 내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신성의 뮤즈(?!)일지 모른다) 벌써부터 주입되어 있다는 사실이지요. 지금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무슨 짓, 무슨 생각을 하고 살든 그 모든 것들이 모종의 시적 회로 속으로 녹아들어가 그 안에서 본능적으로 타당하게 운영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왜? 일단 세계에 접속이 되었고, 코드가 잘려지거나 불타 없어지지 않는 한, 그것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 같은 예감만이 내 유일한 삶의 양식인 까닭이지요.

이재훈: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비가 그치지 않네요.

_ 출전 : [현대시], 2002년 10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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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섬광


이재훈


폭발하였지
구름이었어
빌딩은 연기를 머금고
도시를 달구었지
사람들은 밤을 숭배했어
큰절을 하며 인육들을 토해내는 소리
어디나 골목은 있어
나뒹굴 가슴을 찾아 헤매
아빠도 엄마도 없이 오빠들만 가득한 저녁
어떤 일몰은 두려웠지
하늘로부터 천천히 내려와 정수리를 누르곤 해
눈동자가 터질듯하고
기침이 나지
이 세계는 깨끗한 것만을 전시해
구더기도, 박쥐도, 검은 피도, 집 잃은 고양이도,
모두 숨겨
지렁이가 나올까 싶어 시멘트를 바르지
신성한 것들만 숨기는 음모들

언 땅에 도끼질을 해
먼 숲을 동경하는 일로 산책을 마무리하지
도끼의 이빨이 땅에 박히는 순간,
빌딩들은 붉은 조명을 켰어
어떤 빌딩은 핏빛으로 깜박이고
어떤 빌딩은 질질 흘러 내려

광석을 모르는 고대인들은 운석을 주웠다지
별의 살껍질을 주워 칼을 만들고
우주의 상상으로 날고기들을 잘랐겠지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자꾸만 믿게 되는
불민의 밤이 몸에 불을 지펴
여기저기 녹색 불이 펑펑 터지고 있어
_ <웹진 문장>, 2010년 6월호


시인이 우리의 손을 잡고 순식간에 데려다 놓은 곳은 종말의 순간이다. 뒷걸음칠수록 더 빨리 다가오는 우리들의 마지막을 소녀의 걸음을 따라 보여주고 있다. 폭발과 연기가 난무하고, 골목마다 나뒹구는 우리들의 사체, 우리가 내려다보고 있는 이 광경은 깰 수 있는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의 죽음을 보며 한없이 울던 스크루지의 회한을 가져보지 못하고 우리는 빅뱅의 세상을 떠나야 할 지도 모른다. 소녀가 맨발로 겪어내는 종말의 걸음이 이렇게 아픈 건 바로 거의 소멸해버린 우리들의 영혼이 저 작은 몸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소녀가 힘겹게 휘두르는 ‘도끼의 이빨이 땅에 박히는 순간’ 빌딩은 괴물이다. 핏빛으로 깜박이고, 질질 흘러내리는 빌딩은 한때 우리가 그토록 숭배하던 문명의 아지트였지 않은가. 우리의 손을 잡아준 것이 스크루지의 천사가 아니라 문명이라는 악마였으므로 우리는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인형을 안고 폐허를 한없이 떠도는 소녀를 남겨둔 채 떠나야 한다. 언 땅을 다 풀어헤쳐도 소녀가 꿈꾸는 별의 살껍질은 찾지 못할 것이다. 너무 오래 전에 우리들이 부셔버린 약속들이 언 땅에서 자결하는 소리만 가득 메아리칠 뿐, 녹색 섬광이 펑펑 터지는 소리들,
_ 정푸른, <시와지역> 2010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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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피는 추억, 그 보폭을 따라서

 

이재무, 이재훈

 

 

늦잠 자던 가로등/투덜대며 눈을 뜨고/건넛집 옥상 위/개운하게 팔다리를 흔들며/옥수수 잎새/낮 동안 이고 있던 햇살을 턴다/놀이에 지친 아이들 잠들고/한강을 건너온 달빛/젖은 얼굴로/불 꺼진 창들만 골라/기웃거리다 안간힘으로 구름을 밀며/바람이 불고/일터에서 돌아오는 남도의 사투리들/거리를 가득 메운다/하나둘 창마다 불이 켜지고/소스라쳐 빨개진 얼굴로/달빛 뒷걸음친다/비로소 가는 비 맞은 풀잎처럼/생기가 돈다, 마포 산동네
― <마포 산동네> 전문

가로등이 늦잠을 자고 옥수수 잎새가 옥상 위에서 햇살을 턴다. 한강을 건너온 달빛은 창들을 기웃거리다 구름을 밀고 창에 불이 켜지자 뒷걸음친다. 이 시는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화 같은 느낌을 준다. 정물적인 풍경이 아니라 살아 꿈틀거리는 풍경이다. 이 살아 꿈틀거리는 풍경 속에 사람이 있다. 일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풍경 속에 참여했을 때 마포의 산동네는 비로소 생기가 돈다. 마포 산동네를 생기의 현장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하나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긍정적인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을 의인화시키는 방법론이다. 이것이 서로 엮어져 피로와 애환의 사연이 가득한 마포 산동네는 숨을 쉰다.
이렇듯 이재무 시인의 시에는 의인관적 세계관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직접적인 시적 대상이 되는 소재뿐만 아니라 관념까지도 의인화의 그물이 드리워진다. 세계와 한 몸이 되는 이 방법론은 시인이 천부적으로 가진 감수성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대담을 하면서 시인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의인법을 통해 들려준다. 나도 산골마을에서 지냈던 추억을 떠올리며 그 시간의 너머로 함께 빠져든다.
시인을 만나는 날은 봄비가 내렸다. 가물었던 땅이 숨을 쉴 소중한 비였다. 비가 내리는 찻집의 창가에서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래의 대담은 이재무 시인의 초기시부터 지금까지의 시적 역정과 삶의 역정이 같은 보폭으로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소상하게 밝혀줄 수 있을 것이다.

이재훈: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시창작 강의를 많이 하시던데 요즘은 어디에서 강의를 하십니까. 인터넷 온라인 상에서도 강의를 하시던데요. 소개 좀 해 주세요.

이재무:온라인 상으로 하는 강의는 디지털예술아카데미(Art & Study)라고 해서 국가에서 지원하는 사단법인입니다. 신경림, 김지하 선생이 관여하고 있고 주요 강사로는 소설가이자 신화학자인 이윤기, 소설은 박범신, 최인석, 시는 임동확, 강형철 시인과 함께 맡고 있습니다. 온라인 강의는 굉장한 노동력을 필요로 합니다. 수강생들마다 하나씩 시평을 달아줘야 하니까요. 지금은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힌 상태입니다.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토론하고 의욕적으로 공부하기 때문에 좋습니다. 오프라인에서도 가끔씩 만나고 그렇습니다. 지금 대학에서는 세 군데 정도 시창작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재훈:선생님의 초기시의 경우 구체적인 삶의 경험에 기대어 있습니다. 고향인 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난한 유년의 추억이 구체적인 체험과 함께 시로 형상화되어 있는데요. 시의 소재를 봐도 농촌에서 볼 수 있는 꽃이거나 작은 동물이거나 혹은 가족사거나 농촌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자연과 친화해 온 시인의 경험이 시적 대상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그 구체적인 농촌 체험의 정서는 기쁨에 대한 애정보다는 슬픔과 회한의 정서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유년 시절의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재무:지금까지의 제 시를 이야기한다면 통상적으로 3단계에 걸쳐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5권의 시집이 있는데요. 초기시 [섣달그믐]부터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벌초]까지가 고향 유년 체험과 가난의 울분과 설움을 시의 질료로 많이 삼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유년을 보냈던 곳이 산간마을이어서 자연적 소재가 많이 차용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에는 그것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기억은 언제나 굴절되게 마련인데 그 굴절이 바로 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 볼 때 자연은 제게 생의 아버지였던 것 같아요. 비유의 어머니였기도 했구요. 자연에게 참 많은 것을 배웁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제가 초등학교 때 일인데요. 그때 아이들에게 유일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이 근처 저수지였습니다. 저수지 갈 때 소쿠리를 가져가요. 소쿠리에다가 된장주머니를 넣고 갈참나무 가지를 소쿠리 위에 얼키설키 엮어 놓습니다. 그리고 새끼줄을 묶어서 저수지 가장자리에 담궈 놓지요. 미역을 감고 나서 배가 출출해지면 건져올립니다. 그러면 민물새우들이 새까맣게 몰려 있습니다. 그것을 주전자에 담아 오지요. 오면서 남의 집 담장 애호박을 꼭지를 비틀어서 땁니다. 일종의 도둑질이죠.(웃음) 집에 들어서면 뜰방에서 어머니가 저녁준비를 하시다가 제 모습을 보고 욕을 하십니다. 남의 집 물건을 훔쳐오면 어떡하냐고요. 그런데 어머니 표정이 무척 밝습니다. 저녁 식사 때 제가 잡아온 민물새우가 특찬이 돼요. 마당 멍석에서 저녁을 먹는데 반찬이라고 해봐야 김치 일색이죠. 유일한 특찬이 된장넣어 끓인 민물새우입니다. 그곳에 가만히 보면 천상의 많은 존재들이 다녀갑니다. 숨을 헐떡거리며 능선을 타고 기어가는 초승달이 물김치에다 팔을 뻗기도 하고 저녁 무렵 뽕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개구리 울음도 반찬 속에 뛰어들어요. 풀벌레 울음소리는 반쯤 허물어진 담장을 넘어뜨리며 달려와서 냉수 사발을 들이킵니다. 이런 반찬을 먹었는데 이것이 바로 우주의 반찬입니다. 이런 식사를 시로 쓴 일이 있습니다. <위대한 식사>라고. 도회지 생활이라는 게 가축생활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 구성원들조차도 함께 식사하기가 힘들 만큼 다른 시간대를 살게 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린 시절의 저녁만찬이 그리운 추억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민물새우도 당장의 이익을 추구하다가 자기 목숨을 담보로 바친 것 아닙니까. 그것을 보면 게이트 사건도 생각나구요. 생리면에서 다를 바 없지요.(웃음) 그런 게 자연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겁니다. 삶의 지혜와 원리를 가르치는 거죠.

이재훈:개인적으로는 시집 [몸에 피는 꽃]을 아주 감동적으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 시집도 앞의 시집과 마찬가지로 농촌이 배경이 되는 시들도 있지만 도시생활에서 느낀 정서가 주된 시들도 많습니다. 이 시집의 자서에서 “추상화된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은 아름답지만 그것에는 자기기만과 자기연민의 위험이 따르기도 한다. 지난날 나의 시는 이러한 함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일면이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이를 “이 겨울, 내 몸의 묵은 가지에/새잎 돋는 아픔”(<삶>)과 비슷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시적 변환의 이유 같은 것.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왔을 때의 새로운 정서 혹은 괴로움 같은 것들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재무:[몸에 피는 꽃]은 서울상경 10년 이후에 씌어진 시들이거든요. 제 시의 체질은 시의 보폭과 삶의 보폭이 같이 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가증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시인들의 허위의식입니다. 시인들이 자기 삶에 비해서 과장되게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 면에서 제게 가장 교훈으로 다가오는 시인이 김수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수영은 그 어떤 시인보다도 자기의 허위의식과 치열하게 싸웠던 시인 중의 하나인데요. 자기의 치부도 과감하게 드러내는 결단과 용기가 있었지요. 요즘 많은 시인들이 생태시를 씁니다. 생태시의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지나치게 과장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길 모티브가 많고 너도나도 득도한 도인들이 많다는 겁니다. 일종의 포즈죠. 그것이 허위의식이 아닐까요. 자기가 깨달은 것 이상으로 얘기를 하거든요. [몸에 피는 꽃]은 도시생활을 하면서도 느낀 정서를 담아낸 시집입니다. 도시생활이 주는 염증, 우울, 불안, 소외감, 타자와의 소통 장애 등이 시의 모티브로 등장을 한 것이지요. 아까 이 시인이 말씀하신 것처럼 제 시에 의인관적 세계관이 많이 등장한다고 했죠. 의인관적 세계관이란 것이 근대 이전의 주술적 세계관입니다. 애니미즘 사상인데요. 그것이 근대적 합리주의와 계몽이성논리에 의해서 배제됐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애니미즘 사상이 시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죠. 바람직한 것이죠. 제가 서울에 살면서 초기에 보였던 시경향을 말하는 것은 자기기만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자신의 허위의식에 빠지지 말자. 내 삶의 토대는 도시공간이기에 여기서 겪는 이야기를 쓰고자 한 것이지요. 제가 [삶의 문학] 동인이었지 않습니까. 제 삶과 같이 시가 간 것이죠.

이재훈:생태주의가 아직까지 주류적 담론이고 평단에서도 많은 평가와 비판이 있었습니다. 생태학은 다 함께 공생하자는 보편성으로 보여집니다. 이것은 질서로 세계를 지탱해 온 인류의 이기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질서를 지키는 쪽에 있는 것보다는 기존의 질서를 깨부수는 쪽에 더 많이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런 몸짓을 통해 기존 질서를 올바른 방향으로 갱생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지요. 지금의 생태주의가 공동체적 대안을 말하고자 하는데요. 저는 시 속에서 대안을 말하는 방식이 한 개인의 실존을 통해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재무: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근원적 생태주의를 부정합니다. 그것은 실현가능성이 없어요.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당장에 자동차를 버릴 수 있습니까. 지금 현재 아파트를 버릴 수는 없죠. 현실가능성이 있는 생태주의를 지향하자는 것이죠. 이분법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과 자연의 분리된 세계관이 사실 인간의 제불평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녀의 불평등, 신분의 불평등, 지역의 갈등, 남북의 갈등 등이 결국 확대된 것이 인간과 자연의 불평등으로 간 것입니다. 인간의 제불평등을 도외시하고 그 초점을 자연에게만 맞춘다면 그건 하나의 이상주의에 불과한 것이죠. 그래서 머레이 북친의 사회주의 생태학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실 가능한 생태주의를 주장한 것이죠. 또한 지금의 생태주의가 자본가들이 상업논리로 차용하고 이용하는 것도 눈여겨 봐야 할 겁니다. 신문이나 TV광고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죠. 녹색을 강조하면서 그 이미지를 통해서 자신의 상품을 무의식적으로 광고하는 것인데요. 생태주의도 그 안에 있는 함정과 모순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재훈:서울에 올라온 후 실제적 삶의 상황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시와 삶의 보폭이 함께 가니까 독자들이 시를 이해하는 데 많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이재무:제가 처음에 서울에서 출판사에 취직을 한 것은 8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강남에 있는 출판사 어문각이란 곳인데 거기서 오래 못 있고 나왔습니다. 또 사실 독자들이 대부분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제가 대학시절에 필화사건을 겪었습니다. 민중교육지 사건이라고. 대학 3학년때 학생 신분으로 글을 썼거든요. 그 당시 민중교육지에 글을 쓴 사람들은 대개 전교조로 갔죠. 그래서 당시 불운하게도 나는 블랙리스트에 올랐어요. 그래서 교사자격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사되는 게 어려웠습니다. 교사되는 게 꿈이었는데 하는 수 없이 궤도수정을 한 것이죠. 다음에 지방에 내려가 있다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간사 제의를 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요. 올라와서 마포 산동네에 살림을 꾸렸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서울살이가 시작된 거죠. 작가회의 그만두고 청사출판사 편집장으로 있다가 정민사에서 주간을 맡고 그러다가 결혼하고 첫애를 낳았습니다. 그때 다시 실업자 생활에 들어갔는데 단칸 지하셋방에 살 때거든요. 생활이 많이 어려워서 고통스러웠을 땐데 입시학원에서 제의가 왔지요. 꽤 큰 학원 종합반에서 일했는데 수입이 좀 되니까 그때부터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렇게 만 5년 넘게 학원강사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늘 괴로웠습니다. 마음은 시단에 가 있었거든요. 그때 사이드 인생이 시작된 거죠. 학원에 있으면 시인 취급을 당하고 시단에 나오면 학원강사 취급을 하니까 고통스럽더라구요. 또 청탁도 많이 끊어졌었고 시단으로부터 많이 잊혀졌지요. 그래도 제가 그나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학원강사 시절에도 시집을 꾸준히 발간했다는 점입니다. 그 시절에 [벌초], [몸에 피는 꽃], [시간의 그물]까지 내고 나서 존재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러다가는 내가 물질적으로는 윤택한 생활을 할지 모르겠지만 시인으로서의 생은 접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강사생활을 그만두었는데요. 학원강사를 그만두는 것은 마치 마약을 끊는 것처럼 힘든 일이었습니다. 왜냐면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었으니까요. 그렇게 학원강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입학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 다시 시단으로 돌아와 열심히 시를 쓰고 있는 건데요. 다시 처음의 심정으로 시를 쓰고 있습니다.

이재훈:지난 연대 시에서 보이는 농촌이 변질되어가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보여졌다면 지금의 농촌은 문명시대의 대안으로 보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구체적 체험으로부터 촉발되어 모든 정서들이 용해되어 나온 시입니다. 그 체험에는 가난과 한 개인의 가족사와 농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한 개인이기도 하지만 지난 세대 우리들로 볼 수도 있거든요. 공감의 차원에서 말이죠. 신경림 선생의 시적 위상이 이런 곳에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그러니까 한 개인, 혹은 자아의 경험을 통해서 시대의 아픔이나 사회의 모순까지 즉 보편적인 자리까지 확대되어지는 걸 말하지요. 선생님의 시는 이런 자리에서 말하는 것이 온당할 듯싶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런 지난 세대의 체험 가지고는 공감이 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체험은 살로 부대끼어 할 수 있는 체험보다는 보다 간접적인 체험일 것입니다. 그 체험은 더 관념적이 되겠죠. 이 시대에서 농촌을 통해 공감할 수 있는 체험이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재무:제 시 중에 <가재잡기>란 시가 있습니다. 저는 늘 자연에 가더라도 생활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 아들을 데리고 고향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누리던 자연체험을 보여주기 위해서지요. 거기에 같은 또래의 외사촌들이 살아서 쉽게 체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죠, 그런데 그들도 컴퓨터에 중독이 되어 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반협박과 회유를 해서 놀러를 갔죠. 산골짜기에 가서 자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저보다 시력이 나쁘거든요. 안경도 쓰고요. 시력이 저보다 나쁜데도 가재를 저보다 잘 잡더란 말입니다. 제 눈에는 가재가 잘 안 띄는데 아들은 연방 가재잡았다고 탄성을 지릅니다. 혼자 생각을 해봤습니다. 가재잡기는 시력과 상관이 없는 것 같다구요. 아이가 저보다 생활의 때가 덜 묻은 겁니다. 가재는 일급수에 살지 않습니까. 아이는 때가 덜 묻어서 일급수에 가깝고 저는 4, 5급수에 해당되지 않을까요.(웃음) 그러니 가재가 눈에 안 띄는 거죠. 비록 우리가 농촌이나 자연을 떠나 살지만 과거 그 시절의 온정이나 넉넉함을 잃지 않고 도시문명 속에서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몸으로 살아내지 못할지라도 자연의 일부로 살았던 그때의 그 넉넉한 심성을 되살려 각박한 오늘의 현실을 살아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들을 데리고 자연학습을 실행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재훈:체험과 경험의 차원에서 현재는 존재론적인 차원으로 시가 변모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즉 이전의 시에서 보이는 사물들이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관계되어졌다면 지금의 사물들은 깊은 관조를 통해 그 사물의 본질을 탐색하려는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선생님의 시적 방향에 대해 짤막하게 말씀해 주시죠.

이재무:제가 [시간의 그물] 자서에 짤막하게 언급을 했습니다만, 80년대에 제가 적으로 규정했던 것들은 모두 외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자신을 돌아보니 제가 적으로 규정했던 모든 성격들이 제 내부에 다 들어와 있는 겁니다. 김수영 시인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만, 적이라는 것은 잘 보이지도 않고 부드럽기조차도 하고 때론 친구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80년대 거대담론 속에서는 적이 외부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싸우기 더 편리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적에 대해서 강렬한 분노였으면 됐으니까요. 문제는 오늘의 적들의 성격이 이전의 적들에 비해 성격도 불분명하고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더더구나 적들의 전술방식이 교묘하고 다양화되고 중층화되어서인지 싸우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존재론적 성찰을 통해 내 안의 적들과 싸우는 관계가 성립되는 거죠. 이 싸움이 더 치열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보는데요. 아직 말만큼 그것을 실행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이미 자본화에 많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못 삽니다. 북한에는 노래방이 없거든요.(웃음) 그만큼 저는 자본에 중독돼 있습니다. 생활 근거지를 옮겨라 하면 자신없습니다. 도시생활을 떠날 자신이 없는데 있는 것처럼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서울이 사실 즐거운 지옥 아닙니까. 우리가 지옥이라고 말들은 하지만 서울에서 또 즐거운 것을 얼마나 많이 찾아요. 솔직히 그걸 인정하자는 겁니다. 거기서부터 성찰이 시작돼야 하는데 서울이 지옥이고 농촌이나 자연이 선이다 라는 이분법도 문제라고 봅니다. 우리가 이미 자본의 중독자들이고 또 이 즐거운 지옥의 존재자다 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자기성찰이 있을 때 더디지만 그 싸움의 길이 보이는 것이지요.
  제가 이번에 발표한 <도꼬마리>라는 시를 주요 전략으로 삼고 싶은데요. 시의 전략이 필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도꼬마리의 생태를 보면 제가 어렸을 때는 달라붙어서 귀찮은 존재였습니다. 도꼬마리는 자기를 다녀간 것들에 집착하고 붙어서 번식을 하죠. 어떻게 보면 유목민적 성격을 담고 있죠. 말하자면 도꼬마리를 다녀가는 새의 깃털, 짐승의 장딴지 그리고 고리똥바지 등속이 그들의 생의 운송 수단인 셈이죠. 그들은 그렇게 생을 이동하고 부려진 곳에서 다시 일가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컨대 그들의 삶의 방식을 거칠게 추상화시킨다면 집중과 해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문화 예술 현실은 해체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해체만이 능사이고 대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해체와 집중을 반복하는 도꼬마리에서 저는 삶의 지혜를 익히기도 합니다.

이재훈: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현대시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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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착란과 자유로운 공황의 미학

 

이수명, 이재훈


 

“모더니즘의 역사는 자살의 역사다”(이승훈)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문학적 담론이나 양식은 이전의 문학적 전통이나 질서를 파괴한 자리에서 세워진다. 아무리 완벽한 미학적 준거들도 시간이 지나면 훈육되고 재생된다. 하나의 작품이 사적(史的)으로 의미화되기 위해서는 그 당대의 시간과 그 시간을 잇는 결절 지점의 가치와 관계되어야 한다. 우리의 문학은 오래도록 전통적 질서의 억압 속에서 갑갑해 왔다. 새로운 문학은 늘 청춘의 치기였으며, 담론의 구호였다. 세대마다 타진되어 왔던 새로움의 길은 이전 아방가르드의 재확인이었고, 실험을 위한 실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수명 시인의 세계는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알리는 하나의 길이었다. 이수명 시인은 한국 시단에 몇 안 되는 스타일리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가 지금까지 보여준 시적 세계와 방법론은 늘 문제적이었으며 가장 극단에 서 있는 전위였다. 그곳엔 환호도 많은 독자도 없었지만 시인은 늘 그 방향에서 스스로의 길을 걸어갔다. 이제는 마니아라 불리는 독자들이 그녀의 시를 다양한 방법으로 감상하고 있다. 후배 시인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녀의 독특한 세계는 시를 읽는 후배들에게 충격적인 정서적 체험을 주었다. 소위 ‘모던한’ 시를 쓰는 젊은 시인들은 대개 이수명이라는 시적 텍스트를 한 번씩 심호흡하며 넘어 왔을 것이다.
이수명 시인의 남다른 시적 세계에 대한 깊은 탐색은 나의 몫이 아니고 명민한 평론가들의 몫이다. 다만, 이수명 시인의 근처를 맴돌았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라는 점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발탁된 것일 게다. 이수명 시인은 말한다. 자신의 시의 토대는 “일종의 공황 상태” 즉 지각, 감각, 기억, 연상 등을 잃고 사라져 버리는 일이라고. 정신이 무장 해제되는 것, 바로 이것이 시인의 시의 토대라고 말한다.(<시학>, <시와사상>, 2002년 여름호) 그 시학의 원천을 함께 따라가 보는 것이 대담을 하며 내가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기도 할 것이다.

이재훈  : <시학>, <시론> 등 당신의 시론을 아주 인상 깊게 읽었다. 이 글이 발표되었을 때 여러 시 쓰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기존의 평론과 다르게 시인이 쓸 수 있는 이러한 메타적 시론에 조금 목말라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반가웠고, 재미있었고, 좀 외람된 말이지만 당신의 시에 대한 신뢰가 산문으로 인해 더 공고해졌다고나 할까. 요즘 젊은 시인들은 산문 쓰기를 좀 꺼려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시인이 산문 쓰는 것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다. 시인이 쓰는 산문이 매력적인 부분이 많으니까. 오히려 비평가의 막연한 추측을 불식시키고 제2의 비평적 텍스트가 되는 게 또한 산문이 아닌가. 김춘수, 허만하, 이승훈, 오규원 등의 시인들이 예가 될 수 있겠는데 산문이 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당신의 시론은 자신의 시에 대한 분석적 시론이기보다 시 전반의 아포리즘에 가까운데 이상하게도 자꾸 당신의 시를 텍스트로 해서 읽게 된다. 당신이 발표한 산문이 시 장르 보편의 시론이 아니라 당신의 시에 대한 독자적 시론으로 읽어도 무방할까? 즉 당신의 시에 대한 개괄적인 해설로 읽어도 되는가?

이수명 : 시론이란 시의 주변을 얼쩡거리는 부랑자 같은 것이다. 주변에 있기에 보고 느낀 것에 대해 몇 마디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말을 그렇게 신뢰하지는 않는다. 신뢰되기를 바라지도 않고. 시론은 기본적으로 시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기에 시에 대한 자신의 매혹을 보여주는 것이다. 매혹은 아주 자유로운 것이다. 부랑자는 때로 자신의 매혹에 어떤 형식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이 형식도 자유의 한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자유는 줄어들지 않는다. 매혹 자체를 즐기는 것, 이것이 시론의 특별한 입지가 되는 것이다.
시론이 시의 정체를 밝힌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다. 시라는 것이 정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시론은 시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에워싸는 것인 까닭이다. 시론이 어떠한 체계를 세워 시를 해명하려고 한다면 그 순간 그것은 시를 벗어나게 된다. 시와 멀어진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론이라는 것은 시를 말한다기보다 시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많은 시인들이 시론을 썼지만 그 글들이 훌륭한 안내가 되어 준다 해도 우리는 한 편의 시를 읽을 때 시론에 의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되지도 않을뿐더러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대로 시를 읽을 뿐이다. 그것은 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시론에 의지해 시를 쓰지 않는다. 시인이 쓴 시론은 그것이 훌륭한 것일수록, 시론으로부터 시를 해방시킬 것임이 분명하다. 시에 대한 생각과 단상들을 통해 시론은 시가 가진 이 본연의 힘을, 시의 벗어나는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시론이 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고유한 일이다.
나는 시론을 몇 편 썼는데, 시론은 무력할수록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론은 비어 있는 그물이다. 비어 있는 그물로 물고기를 상상하는 것.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는 이미 물고기가 아니라 생선이다. 나는 시를 생선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재훈 : “시를 쓰는 일은 무엇을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눈앞에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 사물들, 현실의 이름들을 거부하고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기를 계속해야 한다”(<시학>)는 말은 기존의 전통적인 시론에 대한 반대적 의미로 이해된다. 동일성, 유사성을 시의 질서로 삼는 시론과 달리 동일성과의 결별을 꾀하고 상징, 은유와 같은 시적 수사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것 같다. 이런 ‘차이’의 시학이 당신이 방법적으로 의도하는 부분인가.

이수명 : “무엇을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일”이라는 것은 현실의 상징 질서와 의미들로부터의 거리 두기를 말한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과부하가 걸려 있다. 관련의 과부하 말이다. 시간, 공간, 사물들 모두가 체계와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시는 이 관련을 해지하는 것이다. 벤은 ‘관련의 돌파’라는 보다 역동적인 용어를 썼지만. 그는 현실의 붕괴라고도 했다.
관련의 과부하가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모든 일들이 돌발적으로 출현하게 된다. 다시 표현해 보자. 모든 운명의 돌발성이 전면화된다. 시는 의미 사슬의 상징체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사물이 갑자기 튀어나와야 한다. 아무 것도 뒤집어쓰지 않고 맨 얼굴로 말이다. 검은 비닐봉지, 벽돌, 사과 따위가 우리를 압도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사물이 튀어나와 있는 시를 쓰고자, 매일 “멀어지기를 계속”한다.
관련의 해지는 한편 사물들의 새로운 관련으로 응수된다. 사물들은 우리를 놀리는 듯이 이상한 관련을 맺는다. 기형적인 짝짓기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최초의 관련이라는 것은 이렇게 괴상한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다. 시는 이 최초의 관련을 기록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재훈 : 당신은 <시는 쓰여질 수 없는 시의 징후이다>(<시와반시>, 2002년 봄호)라는 산문에서 “좋은 시는 세계관이나 창작의 원리, 시를 구성하는 형식을 날카롭게 자각하고 있기에 관심을 끌 만한 시론을 형성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시론의 중요성에 대한 얘기로 받아들여진다. 당신의 <시학>에서는 일종의 공황 상태, 정신이 무장 해제되는 것, 앞에서 흔들어 버리는 교란의 상태가 시의 토대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것은 착란, 카오스의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당신은 그러한 카오스의 세계를 정돈된 질서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당신의 시적 방법과 일정 부분 관계가 있는데, 당신은 혼돈의 세계를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자아가 시에 가담하여 질서의 언어로 만드는 방법으로 읽혀진다. 즉 시의 세계는 착란과 공황이지만, 그 표출 방법은 이성적 자아에 기대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이해가 가능한가?

이수명 : 한 편의 시가 교란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존재할 수 있나. 시는 지배하려는 장르이다. 그것은 대화와 타협이 아니다. 설득도 아니다. 교란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란은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 우리의 정신이 의존하는 녹슨 무기들을 해제하고 우리를 그 지배 아래서 충일하고 강력하게 만들어 주는 까닭이다.
교란의 형식은 어느 한 가지일 수 없다. 나는 언젠가 탁자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물 컵을 보고 “우리를 불안증 환자가 되게 하는데 세계가 동원될 필요는 없다”고 말한 어느 지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지기 직전의 물 컵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동요된다. 이때 흔들리는 물 컵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 정돈된 질서이며, 이성적 자아일까? 그렇다면 산산이 깨진 컵과 어지러운 바닥을 보여주는 것은 그 반대일까?
현대시는 혼돈 속에 있다. 질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질서라기보다 질서 자체의 표류에 불과하다. 얼음덩어리가 통째로 떠내려가면서 녹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잡아 보는 조각들은 벌써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갈 만큼 흔적도 없다. 우리는 어디로 밀려가는지 알지 못한 채 첨벙인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시쓰기라고 생각한다. 잠수복을 입고 있는 시인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재훈 : 나는 시의 방법론을 취향의 문제로 생각할 때가 많다. 혼돈의 세계를 그대로 방치하여 드러내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주워 들고 새로운 정돈된 형태로 내놓는 경우도 있다. 당신은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모두 초현실주의에 속하지만 인위적으로 형태를 늘리거나 비약시킨 달리보다는, 차갑고 구상적인 마그리트를 더 좋아한다는 인터뷰를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취향이 당신의 시적 언어와 겹쳐진다는 생각을 했다. 시인의 성정과 취향이 언어와 영향 관계에 있다는 추측인데, 당신이 좋아하는 미적 취향은 어떤지 묻고 싶다. 예를 들면 음악, 그림, 영화 등에 관해서.

이수명 : 지면 관계상 미술만 짧게 예를 들겠다. 나는 존재가 완전히 무너지고 형체가 사라진 추상(뜨거운 추상, 차가운 추상 가릴 것 없이)보다 구상적인 존재의 실마리가 남아 있는 쪽에 더 끌리는 편이다. 예컨대 호안 미로가 입체파를 부정하면서 “내 그들의 기타를 부수리라” 하고 실재로 사물들을 완전히 해체시켜 음악에 가까운 경지로 나아갔지만, 나는 피카소는 말할 것도 없고, 브라크, 그리스, 들로네가 사물의 재구성에서 보인 존재에의 경의를 아끼는 편이다. 입체파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 사물들을 보려 한 것이다.
이런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볼까?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극성 속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소위 절대 자유라 불리는 상황을 구가하며 우리를 인간 존재의 위대함에 동참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그 탁월한 예술가들 덕분에, 구체적으로는 미로로 인해 기쁨과 놀라움과 리듬을, 달리로 인해 막다른 동경을, 에른스트로 인해 우리 안의 신경증과 과잉을 알게 되었다. 이 대가들 외에도 이 세계에 속한 많은 예술가들이 우리의 상상력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렇지만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대개가 자신의 신화를 창조하는 데 몰입해 있었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초현실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키리코를 보자. 카라, 모란디와 더불어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회화는 구상과 현실에 바탕하고 있다. 이들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사물과 존재들의 정지와 끝없는 변주는 가히 우주적이다. 소박한 정물화에서 이런 폭풍을 느낄 때 나는 존재란 그 자체로, 가장 ‘많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 존재에 기대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존재를 다 지워 버리기보다는 존재에 의해 내가 변용되는 것을 즐긴다고 하겠다.

이재훈 : 첫 시집의 몇 편을 제외한다면, 완벽하게 시에 일상인으로서의 자아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첫 시집에서도 구체적인 모습보다 개인적인 정서와 열망만을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시를 쓰면서 일상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는 없었는가?

이수명 :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재미있어 하는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에는 내 직접적인 삶의 이야기보다 다른 것이 재미있는 경우였다. 그리고 정보가 담긴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일상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숨기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별로 그런 의식이 없이 살아 간다.

이재훈 : 시집 전체를 두고 보면 시에서 정확하게 마침표나 쉼표 등을 찍고 있다. 당신은 산문시에서도 마침표를 정확히 찍고 있는데, 요즘은 안 찍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이것은 시가 몽환 속에서 자동 기술되거나 천성적인 힘에 의해 언어가 밀려가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구두점의 사용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

이수명 : 주로 마침표다. 다른 것은 거의 없다. 마침표는 나에게 침묵을 의미한다. 물론 언어는 모두 침묵을 낳게 마련이지만, 그보다는 직접적인 침묵, 시간과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침묵을 좋아한다. 마침표는 또한 분리를 만들어 낸다. 미쇼는 언젠가 “자연에는 아직도 경건한 분리가 남아 있다”는 말을 했다. 분리란 기표들의 소통이다. 분리가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한데 뒤엉켜 몰려다니는 건 전체성이다. 이 속에서 추구되는 언어의 해방과 유토피아를 나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분리를 하는 건 대단히 중요한 미덕이다.

이재훈 : 나는 개인적으로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를 제일 좋아한다. 언어의 쓰임이 이후의 시집보다 좀 거친 대신 활달한 느낌이다. 시에 등장하는 사물들과 그 사물들의 사건을 통해서 전달받는 정서가 가장 오래 남는다. 두 번째에서 세 번째 네 번째 시집으로 갈수록 달라진 게 있다면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수명 : 내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사물을 보는 것’이다. 사물들은 여러 곳에 있다. 현실이 괄호 친, 현실의 코드 속으로 합류하지 못한, 비가시적 세계 속의 사물들이 있을 수 있다. 시적 자아는 현실 속에서 그 괄호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다른 대칭도 가능하다. 현실의 한 지점, 기표의 고정점에 있는 사물(말)을 보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자아는 투명하고, 괄호 속의 자아이다.
전자의 경우는 사물들이 현실로부터 일탈되어 있기에 시간과 공간의 논리적 맥락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사물들은 우리의 무의식의 편린들을 가지고 있기에 낯선 소음들을 들려준다. 후자의 경우 사물은 문득 안정된, 한 순간의 현실의 표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안정은 표류와 궤멸의 스타카토 같은 것이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왜가리>와 <붉은 담장>은 전자의 경우가 많이 수록되어 있고, <고양이>에 와서는 <포장품>과 같이 후자의 성향을 보이는 시들이 눈에 띄고 있다고나 할까. 물론 재미있는 분류는 되지 못한다.
그들이 놓여 있는 곳이 어디가 되었든 사물들은 탈주 상태에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언가를, 괄호를, 혹은 괄호를 흔들고 있는 자신을 흔들어 버리는 것으로 보인다. 탈주극이라는 점에서 보면 시집들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

이재훈 : <붉은 담장의 커브>에서 <트럼펫>, <케익>, <살인자들>, <가든파티>,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 <민들레 총> 등의 시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상상 속에서 사물들이 서로 생장하며 사건을 만드는 것은 의식 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 같다. 대상과 대상이 결합하여 이미지를 얻고 사건을 만들고 있다. 시의 착상은 어떻게 하는지? 일상의 삶 속에서 특별한 사건이나 상황을 수집하는지 아니면, 상상 속에서 그러한 시적 상황이 오도록 기다리는지?

이수명 : 네루다가 그랬던가? 어느 날 시가 왔다고. 누구든지 시가 와도 모를 수 있다. 무엇이 오고, 그것을 알고 맞이하는 일치의 순간들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사실은 아무 것도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은 아주 오래 지루한 시간을 지내는 사람들이다. 물론 뒤샹이나 워홀처럼 한순간 변기나 자전거 바퀴, 수프 깡통을 예술로 둔갑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어느 날 에른스트가 한 호텔의 마룻바닥에 종이를 대고 문질러 본 것이 프로타주가 되어 예술의 새로운 한 장을 열게 된 것을 그럴 듯하게 생각한다. 예술이란 이렇게 무위와 허위에서 오는 것이다. 무얼 알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실은 뒤샹이나 워홀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그냥 이렇게 저렇게 해 본 것이다.
시나 시적 상황이 온다는 것은 어떤 이데아를 가정하는 것과 같다. 혹은 하나의 관습이다. 예술은 무언가 오는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헛된 동작을 하는 것. 예술이 원래 헛것 아닌가? 화가가 선을 하나 그어 보듯이, 그저 말을 하나 던지는 것, 이 말이 어떤 뒤범벅이 되고 낯선 운명을 겪게 되는 것, 이것을 지켜보는 것, 이것이 시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이렇게 난폭하고 무절제한 순간을 지니고 있으므로, 시의 정교한 이율배반은 설득력이 있다. 난데없는 우연의 고리들로 치밀하게 짜이는 것이 우리의 세계이다.

이재훈 : 당신의 산문을 보면 외국시에서 감흥을 많이 받는 것 같다. 외국시의 어떤 측면에서 감흥을 받는지? 이것은 내 상상인데, 혹시 원서로 시를 읽는 건 아닌가? 언어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매력을 말해 달라. 또한 이것이 시의 현대성과도 관련이 있을까? 우리시와 외국시의 차이점에서 오는 생각이 시의 현대성과 맞물리지는 않을까 한다.

이수명 : 외국시 국내시 가리지 않고 읽는다. 하지만 다독형은 아니다. 좋은 시인이라고 한 번 생각하면, 시집을 가까이 두고 오래 오래 들여다보는 편이다. 20대 때 좋아했던 시인들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지금도 그들을 내 명상과 상상의 동반자로 여긴다. 동반자가 그렇게 많을 필요는 없다.
시의 현대성이란 사실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현대적이지 않은 주제인 것 같다. 현대시는 이제 자신을 어떤 식으로 진지하게 설명하거나 정의하기에는 너무 많이 차출되었다. 그 잠재성은 모두 노출되었고, 새로운 가능성은 고갈된 듯이 보이기만 한다. 도대체 시에서의 현대성이란 것이 이제 있을 법한 일일까.
이렇게 이야기를 둘러가 보자. 들뢰즈가 ‘기관 없는 신체’라는 말을 썼을 때 지젝의 응수는 ‘신체 없는 기관’이었다. 현대의 삶에는 ‘신체’도 ‘기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기체가 되기 이전의 알과 같은 생명 그 자체의 신체가 우리에게 가능하며, 눈, 귀, 혀와 같은 기관들이 기관으로 작동되는지? 우리가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들은 모두 우리의 기관이 벌이는 일들이 아니며, 기관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분열되고 낱낱이 해체되어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조차 없게 되어 있다. 사랑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벌써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귀 기울일 내면이 없다. 우리는 항상 어떤 다른 것이다. 다른 것의 또 다른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시는 부재의 기록이다. 다른 것의 다른 것의 또 다른 것을 쫓아다닐 뿐이다. 그림자의 그림자의 그림자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지만 끝나지도 않는다. 부단히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알아볼 수 없다. 현대시는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그리는 것이다. 이미지, 정서, 인식 모두 알아보기가 힘이 든다. 누구의 것인지, 어떻게 결성된 것인지, 어떤 배합인지 모르게 되어 있다. 어디서 온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주체의 얼굴을 어떻게 그릴까. 현대시는 이 모든 가능과 불가능의 교차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누구도 이 교차로를 피할 수는 없다.

이재훈 :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앞으로의 이수명은 어떤 세계를 보여줄 것인가이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전개되었던 ‘이수명만의’ 시적 스타일을 더 심화시켜 드러낼 생각인가? 아니면 어떠한 방식이든지 변화를 꾀할 생각인지?

이수명 : 사람이란 별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라캉에 의하면 꿈이나 다른 곳에 나타나는 수많은 이미지들의 이면에는 항상 하나의 무의식적인 기본적 환상이 있다. 다채로운 이미지들은 이것의 변용이다. 사람들은 같은 곳에 걸려 넘어지게 마련이다. 변화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나도 내가 걸려 넘어지는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반복과 재생산의 리듬이 찾고 있는 전부라는 것이다. 무얼 찾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이재훈 : 요즘 2000년대 전후로 등단한 젊은 시인들의 시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얘기가 많다. 새로운 언어와 문법을 가지고 시를 쓰는 젊은 시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기억에 남는 시인이 있다면?

이수명 : 공석, 사석을 막론하고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받은 것 같다. 이 질문도 유행하는 담론이 되었나 보다. 워홀이 한 이야기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다.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다르게 대답한다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내가 그랬던 것 같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젊고 새로운 시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란 젊고 새로워야 하겠지. 젊고 새로운 시를 쓰려 무던히 애쓰는 친구들에게 애정을 보낸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 시가 그렇게 새롭고 앞질러야 하는 것일까를 말이다.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를 말이다. 이 부분에서 하이데거가 “선각자란 미래로 앞질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찾아드는 것”이라 한 말을 생각해 보고 싶다. 미래를 향해 쳐들어가는 것은 미래를 상정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와 사뭇 다른, 제3의 지대가 존재하리라 여기는 것이다. 새로운 어떤 지대를 향해 포문을 여는, 저 앞을 향해 무기를 쳐드는, 이러한 시들이 미래로 침입하는 시들이다.
하지만 앞질러 가야 할 미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우리가 미래라는 말을 많이 쓰기는 하지만, 있는 것은 지금 여기의 심연뿐이다. 무기는 밖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조준되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조준되지 않는 조준을 시행해야 한다. 심연에 들어야 한다. 시인에게는 쏠 화살이 여러 개 있지 않다. 단 하나의 화살로 지나가야 한다. 세계를 잉태해야 한다. 이것이 미래가 찾아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미래는, 현재다. 발아래 있는 것이다.

이재훈 : 당신의 시가 난해하다고 생각하는가? 독자들, 평론가들이 말하는 난해한 평가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당신 시를 더 잘 읽을 수 있는 노하우를 살짝 귀띔해 달라.

이수명 : 김구용은 “우리가 처한 현실보다 난해한 것은 없다”는 말을 했다. 난해성 운운만큼 상투적인 태도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시에 적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시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난해하다는 판단은 이미지를 해석하려 드는 태도에서 나온다. 이미지란 확고한 것이면서 이상하게도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출몰하는 이미지들을 재빨리 그리는가, 상세히 그리는가, 섞어서 그리는가, 혹은 순서 없이 그리는가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을 난해성으로 묶는 것은 투박한 태도이다.
나는 내 시를 읽는 특별한 독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 욕망대로 읽을 따름이다. 물론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시인과 작품, 텍스트와 독자, 시인과 독자는 욕망으로 서로 비껴갈 뿐이다. 비껴가는 만남인 셈이다. 시인이라고 해서 자신의 작품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쩌면 누구보다 모를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내 시의 변방에 있으며, 그것이 내가 시를 쓸 수 있는 이유이다.

이재훈 : 김구용의 작품으로 박사논문을 집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시사의 난해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렵지는 않은지? 앞으로의 활동 계획도 알고 싶다.

이수명 : 김구용은 우리의 시문학사가 아직 발굴하지 않은 자원이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의 40여 페이지에 이르는 중편 산문시 <소인(消印)>과 <꿈의 이상(理想)>은 현대문학의 패러다임을 고스란히 내장한 채 햇빛 한 번 보지 않은 상태이다. 나는 이 작품들에서 한국 문학의 절정을 보고 있다. 우리는 또 하나의 고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마무리 단계에 있는데 김구용 시인이 많은 사람들에게 연구되고 상상력을 행복하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앞으로의 활동도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시 쓰고, 시 읽고, 틈내서 산문도, 논문도 쓰고, 가르치고, 그런 것이겠지. 비누방울들을 계속 만들고 있겠지.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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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시인 이상



이재훈
(시인, 현대시 부주간)




시인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 1910~1937). 만 26년 7개월을 살다 요절한 천재 시인. 시인 이상의 이름 앞에는 늘 천재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이상의 시는 늘 가장 문제적이었으며, 지금 현재에도 가장 문제적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또한 아방가르드, 초현실주의, 탈장르, 새로운 실험과 전위 미학 등의 말들이 등장할 때마다 가장 최전방에 서 있던 시인이다. 이미 한 세기 일찍 모든 문학적 실험들을 가장 개성적인 문학적 태도와 신념을 가지고 구현해 나간 시인이다.

2010년은 시인 이상이 탄생한 지 100주년 되는 해이다. 많은 문학 단체와 지자체와 예술 각 방면에서 이상을 추모하고 기리는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교하아트센터에서는 이상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상이 문을 열어 가게를 시작했던 ‘제비다방’을 모티브로 한 작품전을 갖는다. 이상이 차렸던 ‘제비다방’은 2년여 만에 문을 닫아 실패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당시 김유정, 박태원 같은 문화 예술인들이 문우의 정을 나누고 문학과 예술을 논하던 장소였다. 그런 의미에서 제비다방은 유럽의 살롱과 같이 중요한 문학적 생산처였으며, 문인들의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장소였다. 더불어 이상의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연내 마련된다고 한다. 이상 100주기를 추모하는 학술행사나 출판 등도 활발하게 진행될 예정이다. 이미 출간된 이상 전집뿐 아니라 이상 관련 서적이 출간을 준비 중에 있다. 가수 조용남도 이상 시 해설서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를 최근 출간했다.
이상을 추모하고 기리는 행사는 외국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유럽과 한국의 예술가 20여명이 프랑스 파리와 서울에서 다양한 장르의 예술로 이상을 기리는 행사를 연다고 한다. 문화예술기획모임인 ‘랩 201’은 파리시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복합문화공간 라 제네랄과 공동으로 ‘2010 파리/서울 이상-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그만큼 이상은 시뿐만 아니라 소설, 건축가, 예술 곳곳에서도 후대에 큰 영향력을 끼친 문인이다.
이상의 삶은 괴팍하기로 소문나 있다. 평생 폐결핵을 앓았으며, 지독한 가난과 싸워야 했다. 이상은 이발업에 종사하던 부친을 이른 나이에 떠나 백부 밑에서 성장했다.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취직하였지만, 적응을 하지 못해 곧 그만두었다.
1931년 처녀시 <이상한가역반응>, <오감도(烏瞰圖)>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고,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1934년 <구인회>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다. 그러나 이 연재시는 한국 문단을 통틀어 가장 문제적인 독자들의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상은 이천 점의 작품 중에서 삼십 편을 고르느라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문법 파괴, 띄어쓰기 무시, 이해 불가능한 수사 등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이상의 시에 당황했다. “무슨 미친놈의 잠꼬대냐”, “무슨 개수작이냐”, “당장 신문사로 가서 원고를 불사르자”, “작가를 죽여야 한다” 등의 격한 반응들이 쏟아졌다. 이상의 시를 연재하기로 한 작가 이태준은 항상 사직서를 품고 다녀야만 했다. 이태준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오감도>는 30회 연재를 마저 채우지 못하고 15회로 끝나고 만다.
1937년에는 사상불온 혐의로 동경 니시칸다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한다. 그러나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향년 만 26년 7개월에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이상의 대표적인 시는 역시 <오감도>이지만, 이 시가 가지고 있는 난해함으로 인해 시의 유명세에 비해 독자들에게 두루 읽혀지지는 않았다. 대신 이상의 시 <거울>은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시가 아닐까 한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몰으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만은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 이상, <거울> 전문

위의 시 <거울>은 식민지 시절 지식인의 고뇌를 초현실적인 기법과 무의식의 언어로 표출해내고 있는 시이다. 거울은 소리가 없으며, 거울 속에 비춰지는 나는 악수를 할 수 없는 이미지의 형상이다. 이러한 사실을 반복적으로 재확인하고, 그것을 인지함으로 인해 지식인으로서 느낄 수 있는 의식의 분열과 착란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를 잘 표현하기 위해 시인은 의도적으로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있다. 이 시가 착란의 언어라고 하지만, 시의 구조를 볼 때 이성적으로 잘 질서화된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시에서 보여주는 거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읽는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거울 속의 나와 현실의 나를 대비해서 보여줌으로 인해 분열된 자아를 재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거울이라는 연결매개체를 통해 자신의 본모습을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된다. 이상의 성찰이 개성적인 까닭은 거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개성적인 주체를 서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보편적인 감성과 보편적인 깨달음을 줄곧 받아왔다. 하지만 이상과 같이 전혀 낯설고, 다소 충격적인 자아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또다른 자신을 반추하고 비춰보게 된다. 이것으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성찰을 넘어 미학적 체험의 즐거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한여름 이상의 시를 읽으며 ‘이상한 가역반응’을 느끼며, ‘무한건축육면각체’의 비밀들을 탐사하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

 _ 논산문화, 2010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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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벌들


이재훈


물길을 다스리지 않았다
대신 날았다
허공을 향해 매일 목청껏 부르짖었다
붉은 새 한 마리
내 울음을 채간다
햇살이 내린다
가득 내린다
투명한 햇살 사이를 날아다녔다
언제 저렇게 운 적이 있었을까
앵앵,
타인들도 모두 도망갔다
울다 지치면, 낯선 몸을 찾았다
참을 수 없는 모멸을 가득 쏟아놓았다
비가 내렸고 습도가 높았다
높은 곳에서 듣기 싫은 울음이 들렸다
그럴 땐 슬픔을 탐했다
결정적으로 영혼을 판 적도 있다
소금 가득한 물 위를 날아
독침을 질질 흘렸다
황홀하게 죽는 것처럼, 황홀하게
봄바람이 불자 온몸이 노랗게 익었다
영혼까지 맑았다

갈대 사이에 안개가 있었고
안개를 헤치면 꽃이 보인다
달콤한 꿀 위에 알몸으로 누워 있으면
말벌들이 온몸에 달라붙는다
붉은 얼굴,
벌에 잔뜩 쏘여 퉁퉁 부었다
잉잉대는 소리 들린다
나는 증명받고 싶지 않았다
고백은 얼마나 사치스러운 말인가
먼 불빛 먼 창에서
안개 흩어지는 소리
나무 부서지는 소리
앵앵, 들린다

_ 창작과 비평, 2010년 여름호




나무 부서지는 소리 앵앵, 들린다


김미정
 

  언제부턴가 울림이 있는 것들이 좋아졌다. 시도, 사람도……. 아무 맛도, 느낌도 없는 편편하고 딱딱한 관계들 속에 우리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다. 앵~앵 소리가 내 귀를 파고든다. 치명적 독을 품고 사는 너와 나의 앵앵거림이 시 전체를 덮고 주위를 에워싼다.

  “물길을 다스리지 않”기 위해 날아오르는 날개들, 힘겨운 날개짓이며 자유를 향한 뜨거운 몸짓이다. 부조리한 현실의 삶 속에 우리는 때론 울음이 울림이 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벌에 잔뜩 쏘여 퉁퉁 부”은 너와 나의 “붉은 얼굴”은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그 무엇도 증명되지 않는다. 진실은 있기는 한 것일까. 우리는 얼마나 서로에게, 또 자신에게 독침을 날릴 것인가. “달콤한 꿀 위에 알몸으로 누워있으면” 안 되는 것인가. “참을 수 없는 모멸”이 비처럼 내리고 “슬픔을 탐”하며 “영혼을 파”는 말벌들의 세상, 그 세상에서 고백은 사치스러운 일일 것이다.

  고통이 없으면 생의 실감(實感)도 없으리라. 관계에 대한, 자아에 대한 내면의 두려움과 불안의 물결이 행과 행 사이를 천천히 건너며 증폭되고 있다. 모든 상징과 비유는 일그러진 현실로 귀결된다. 현대의 삶속에 내재된 불온성과, 낯설고 혹은 날카로운 징후들을 시의 곳곳에 배치시킨다. 삶이란 상처를 치열하게 끌어안는 것인가. 삶의 이면에 숨겨진 희망의 기미를 찾아내는 시인의 아름다운 귀가 보이는 듯하다. 울음이 울림이 되고 울림이 생의 리듬이 되며 노래가 되는 삶을 꿈꾸어 본다. 한편의 시가 우리의 투명한 뒷모습을 위로한다. 잉~잉 앵~앵 끊어질 듯 이어지는 6월이다.

_ 웹진 시인광장 7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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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웹진 문장 2010년 6월호 http://www.munjang.or.kr

시 : 녹색섬광 / 옛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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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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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메다 바이러스


이재훈


그대들은

나를 외계인이라 불렀지.
난장이라고도 불렀으며
그냥 ‘꽃’이라고도 불렀지.
나는 원래 눈이 하나인 키클롭스를 사랑했고
피부가 검은 육체를 사랑했지.
피비린내 나는 이 행성에
착륙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잔혹한 DNA를 가진 종족들을 보고야 말았어.
내 고향에서 십만 광년이나 떨어진 땅.
처음엔 검은 땅과 푸른 바다와 하늘이 끔찍했지.
왜 지구에 사는 종족들은 땅에 붙어서 다닐까.
마음껏 날고 싶었지만,
이곳에 살기 위해선 참아야 했어.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팔과 다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매일 괴로웠지.
비명과 고통이 반복되었고,
숭배할 대상은 이 땅에 없었어.
몇몇은 돈을 숭배하기도 했지만,
정작 아름다운 살육을 보지는 못했어.
아름다운 역사도 간혹 있었다지만
이곳의 풍습은 선량한 것들만 쓰게 하지.
결국 이 세계는 수학의 아름다움이 지배해.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남겨진 숫자의 아름다움.
그 미학으로 서로의 키를 재고 우쭐거리지.
팔등신은 수로 만들어지는 것.
조화의 아름다움은 방황으로 만들어지는 것.
지구인이라는 종족은 말이야.
가끔씩 약속을 어기고 방사능을 누출하곤 하지.
나는 거대한 건물 속으로 몸을 숨겼어.
하얀 가루가 폭발하고
그 가루가 내 몸에 달라붙었지.
해독크림을 발랐지만 너무 늦었어.
갑자기 사위가 연기로 가득 찼어.
손전등을 빌려 친구들과
살아나갈 도주로를 찾았지.
눈을 뜨니
세상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었어.
아름다운 북극의 얼음 위에서
지혜의 말들을 외울 거야.
그대들은 나를 북극에 핀 꽃이라 하겠지.
외눈박이 육체를 사랑하는 나를 말이야.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로 인해 지구 종말을 앞둔 미래 지구에서 안드로메다 바이러스와 그 퇴치법을 암시한 힌트를 현재 지구로 보내오면서 시작되는 영화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그 힌트를 이진법의 ‘숫자’ 등으로 해석해본 결과, 무언가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의미의 원형 도형과 미래 지구에는 없는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퇴치제인 해저 미생물 이름. 이 해저미생물로 안드로메다 바이러스가 거의 퇴치되어가다가 인간의 탐욕에 의해 퇴치제가 멸종되고, 동시에 누군가의 음모로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샘플은 우주를 통해 미래로 보내져 미래 지구를 멸망으로 이르게 하는데…….
요즘 ‘신종 플루’, ‘아이티 지진’, ‘환경 재해’ 등으로 나타나는 지구 종말론의 일단을 보여주는 이 영화를 모티프 삼아, 이재훈 시인은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라는 시적 화자가 되어 지구의 타락상에 대해 선지자처럼 경고한다. 지구인들이 “눈이 하나(원형 도형을 상징)인 키클롭스를 사랑”하는 자신을, ‘외계인’ 등으로 불렀는데, 착륙하지 말았어야 할 지구라는 행성에 와 “잔혹한 DNA를 가진 종족들을 보고야 말았”다고 한다.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팔과 다리”를 가진 인간들은 왜 땅에 붙어만 다닐까? 괴로움과 비명과 고통이 계속되는 피비린내 나는 이 땅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마음껏 날고 싶었지만, 살기 위해 모든 끔찍한 일들을 참아야만 한다고 한다. 숭배할 대상이 없는 이 행성에서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살육은 있었지만, ‘노아의 방주’나 ‘소돔과 고모라’처럼 아름다고 정의로운 살육은 없었다고도 한다.
“아름다운 역사도 간혹 있었다지만/ 이곳의 풍습은 선량한 것들만 쓰게 하”는 이곳 지구는, 더하고 곱하고 빼는 계산적인 인간들과 ‘수학의 아름다움’만 존재한다고 한다. 바벨탑처럼 빌딩을 높이 쌓고, 서로의 키를 재고 ‘36, 24, 36’의 S라인 성형미인 등 ‘숫자의 아름다움’이 지배하는 곳인 지구라는 행성. 이곳 사람들은 “가끔씩 약속을 어기고 방사능을 누출하곤 하”여, 시적 화자인 ‘안드로메다 바이러스’가 지구를 멸망시키기도 전에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간다고 한다.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는 지구의 몇몇 의인義人인 친구들과 ‘노아의 방주’를 타고 아수라장인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 빙하기가 지배하는 북극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노아처럼 “지혜의 말들을 외”우며 ‘동그란 눈의 외눈박이’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꽃으로 불려질 것이라고 한다. (강성철)

_ 강성철 시평집, <시 읽어주는 은행원>, 한국문연, 2010.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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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에서의 하룻밤



이재훈

헤아려보니 내가 운전을 시작한 지도 8년이 넘어 간다. 그러고 보면 난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다. 8년의 시간 동안 큰 교통사고 한번 나지 않고 별탈없이 지냈으니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참 감사하다. 운전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고 운전을 하면서도 사고 한번 나지 않고 무고한 것 또한 감사하다.
아마 지금까지 차 때문에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을 꼽으라면 단연 주차문제일 것이다. 서울살이를 시작할 무렵, 당시 별도로 주차공간이 없었던 집에 세를 들어 살았다. 그러다보니 저녁마다 주차로 인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동네를 몇 바퀴 돌다가 다행히 자리를 찾아 주차를 하고 들어오면 여지없이 전화가 온다. “차 좀 빼주세요.” 그러면 하던 일을 멈추고 나가야 했다. 전화라도 받지 못한 날에는 갖은 욕설과 원망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내가 집을 옮긴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주차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차로 인해 생긴 몇 가지 추억할만한 사건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자동차가 내게 귀중한 잠자리 역할을 해준 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일이다. 대부분 차를 잠자리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장기 운전을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예를 들면 트럭 기사나 택시 기사들이 그러하다. 자동차에서 자는 잠은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 허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다리도 불편하다.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잠자리가 없었을 때 차안은 그야말로 따뜻한 보금자리 역할을 한다.
대학시절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충남 대천해수욕장에 바다를 보러 갔었다. 때가 겨울이었는데 당시 문학동아리를 같이 하던 친구들은 모두 겨울바다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넷이서  한 차에 타고 들뜬 기분으로 대천으로 향했다. 바닷가에 가서 차가운 바람과 무섭게 넘실대는 겨울바다를 마음껏 느끼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되돌아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문제는 시작되었다. 자동차에 휘발유가 부족했던 것이다. 우리에겐 돈이 없었고 시간은 이미 자정을 지나 있었다. 자동차에 연료부족을 알리는 경고등이 계속 켜지고 이 상태로 집까지 가기에는 무리였다. 우리는 고심한 끝에 직불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은행부스 앞에서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아침 8시가 되면 직불카드를 사용할 수 있어서 연료를 보충하고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 안에서의 하룻밤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더불어 우리의 고통도 시작되었다. 히터를 틀어서 추위는 면할 수 있었지만 넷이 차 안에서 밤을 새우는 건 고통이었다. 잠은 오지 않고 다리와 허리는 불편했다. 한 겨울 밖은 그야말로 매서운 추위로 창문조차 열 수 없었다. 밤을 지새우는 동안 우리는 라디오를 듣다가 얘기도 했다가 시간을 보냈다.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느끼며 우리는 설핏 잠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붉게 충혈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한없이 웃었다.
그렇게 차 안에서의 하룻밤은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중 생각하니 차가 없었다면 그 매서운 겨울밤을 어떻게 보냈을까 싶다. 또한 그 사건 이후로 친구들과 더 깊이 든 정(情)은 하룻밤 고통의 기억을 한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_ <자동차생활>, 200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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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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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읽는 현대시 산책 ⑧
― 서정주 편


혼(魂)의 시인 서정주

 

이재훈(시인)

 


2010년은 미당 서정주가 타계한 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올 해에는 미당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을 중심으로 미당기념사업회(회장 : 홍기삼)가 창립되었다. 미당기념사업회에서는 미당의 시를 낭송하는 월례 행사와 서울 관악구 남현동의 미당 자택을 복원하여 ‘미당 서정주의 집’으로 개관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미당의 고향인 전북 고창에서는 매년 미당문학제가 열리고 있으며, 올 해에는 4월부터 동백꽃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미당 서정주(1915~2000). 미당(未堂)은 한국 시사에서 가장 영예를 많이 받은 이름이다. 미당 서정주를 부르는 이름 또한 만만치 않다. 시의 정부(政府), 시의 귀신, 시의 학교, 시인 중의 시인, 한국 부족 언어의 주술사, 시선(詩仙) 등등. 미당 서정주는 시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들을 받았다. 시인으로서의 찬사만큼이나 그의 시적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일찍부터 예술관련단체의 굵직굵직한 자리를 역임했으며, 신춘문예와 문예지를 통해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해 냈다. 또한 서라벌예술대, 중앙대, 동국대 등에 재직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死後), 과거 친일 행적과 독재정권과의 영합 때문에 명예롭지 못한 비판을 받아 왔다. 아직까지 미당의 평가에 대한 후학들의 입장은 논란 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당 서정주가 가진 문학적 업적과 자산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근대 이후 우리의 시문학은 미당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정도로 그는 한국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념의 상징주의, 한국적 정한의 토속세계, 불교적 세계, 신화적 세계, 동서양을 넘나드는 역사의 시적 형상화 등등. 그가 도달하지 못한 시적 세계관은 없을 정도이며, 그가 닿고자하는 시적 지향점에서 뚜렷한 시적 완성품을 문학사에 제출하였다. 그 중에서도 <자화상>은 전국민이 애송하는 미당의 대표작이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어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자화상> 전문

시 <자화상>은 언제 읽어도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운명이란 어떤 것인가. 애비는 집으로 오지 않는다는 결핍의 운명. 부모의 연이 단절된 이유가 “종이었다”는 운명론적 감수성은 우리 민족 저변에 깔린 한(恨)을 잘 드러내준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는 유명한 싯귀는 시련을 그대로 받아내고 참아내는 인고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또는 아버지 없는 운명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선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시인은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운명에 구속되어 오히려 피해자인 자신이 죄책감을 느껴야만 하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살아온 삶일지라도 부끄러워하지는 않겠다는 각오도 서려 있다.
죄인과 천치를 읽고 가는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에는 어떤 문제가 없는가. 시에서는 가장 밑바닥의 운명적 실체를 보여준다. 할머니는 너무 늙었고, 집안은 어머니가 풋살구 하나도 못 먹을 정도였으며,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서 살 정도로 가난했다. 그 집안의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손톱이 까맣다. 자신은 그런 가족사에 편입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부재했던 외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가르친 것은 저 들판의 바람뿐이었으리라.
이 시는 현재의 관점에서 읽어도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인간 이기주의, 날로 발달해가는 자본 문명, 이러한 모든 것들이 마치 문명인의 운명처럼 경쟁적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 당시와 달라진 건 없다. 가난의 대물림은 오히려 현재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지경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악착같이 버텨내기 위해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자화상은 자신의 모습을 비춘 형상이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어떤 가치관으로 자신을 실패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서정주의 시를 읽으며 다시 한 번 닥친 운명에 대해 뉘우치지 않는 각오를 해본다. 이 각오가 새로운 희망으로 변주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_ <논산문화>, 2010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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