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가 머무는 풍경
눈에 대한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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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이재훈
눈을 밟는다
눈이 시린 풍경을
꾹꾹 밟는다
그러나 눈은
온전히 밟혀지지 않고
자꾸만 발등 위로
심지어 무릎까지
올라온다
제 존재를
떠올리려 한다
덮어야 할
밟혀야 할 운명을
내 발걸음에 의탁한 채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눈이 떠올라
내 발목을 쥐고
너도 나처럼
떠올라라
떠올라라
머리 위까지
눈이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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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고 편하게 드러눕는 가을 들판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해남 땅끝 마을에서 배를 타고 도착하는 노화도는 의외로 큰 섬이지요. 섬의 들판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남다른 정경이 오히려 가슴에 다가옵니다. 노화도를 거쳐 새로 놓인 대교를 건너 보길도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세연정을 만나게 되지요. 인공과 자연의 절묘한 조화가 산뜻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곳, 고산의 이상향이 구현된 공간이지요.
한때 갈급함을 가지고 이재훈 시인이 찾아갔던 곳이기도 하구요.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윤선도가 가꾸었던 보길도 원림. 윤선도 사후에 불만이 극에 달했던 노비들이 보길도 정자를 모두 불태우고 노화도로 도망갔다는 설도 있지요. 그래서 노화도(蘆花島)는 원래 노비들의 섬 또는 노화도(奴火島)로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통과의례처럼 노화도를 반드시 거쳐야 들어갈 수 있는 보길도는 눈앞의 현실입니다. 시인은 보길도에서 며칠을 보내고, 다시 숨 막히는 도시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담담히 한 편의 글로 적은 적이 있지요.
다소 엉뚱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했습니다. 시인에게 다가가는 길을 찾기 위해 한참 에돈 셈이지요.
시인은 결락의 공간을 걷습니다. 눈에 덮인 길, 겨울의 중심을 향해 나아갑니다. 꾹꾹 눈을 밟으며 걷는 길 위에서 시인은 상념에 젖습니다. 아마 시인은 천천히 길을 정독하며 걸었을 겁니다. 바쁘게,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며 쫓기듯 달아나듯 걷는 그런 걸음이 아니지요. 한 걸음 한 걸음 시간의 풍경 위에 마음의 그림자를 길게 늘이며 걷는 걸음이겠지요. 천천히 느리게 걸으면서 삶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는 시인의 지난한 몸짓을 얼핏 엿볼 수 있지요. 느림은 도태나 일탈이 아니라 내적 통찰이요 다른 사물에 조용히 귀 기울이는 일이지요. 숨 막혀 하는 영혼에게 숨통을 터주는 일이기도 하구요.
시인은 걸을 때마다 튀어 오르는 눈송이들을 보고 ‘제 존재를 / 떠올리려 한다’고 말합니다. 한낱 눈뭉치에 지나지 않지만 시인의 눈에 눈뭉치는 예사 사물이 아닙니다. 어엿한 생물이지요. 한없이 하늘을 떠돌다 겨우 지상에 내려앉은 눈송이들이 자꾸 치받고 올라옵니다. 시인은 그것을 ‘조용한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눈송이들이 살아나 말을 합니다. 그 말을 시인은 귀담아 듣습니다.
시인의 영성과 예민한 촉수는 세상 만물의 속삭임과 미세한 몸짓 하나까지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습니다. 어쩌면 시인은 주술사요 어릿광대인지도 모릅니다. 이집트의 왕이나 로마의 황제들은 어릿광대에게 자문을 구하는 일이 있었지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의 황실에는 많은 어릿광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제나 주술사만큼 존중을 받았습니다. 어릿광대는 왕이 습관적 사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거리낌 없는 풍자와 농담을 던졌고, 이들의 조언은 신선한 사고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지요.
오늘날 시인도 독자들의 관습적 사고에 정서적 충격을 가합니다. 이재훈 시인 역시 평범한 일상의 풍경을 뒤집어 새로운 삶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걸을 때마다 튀어 오르는 눈송이들의 ‘조용한 혁명’을 보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눈송이들이 입을 열어 말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너도 나처럼 / 떠올라라 / 떠올라라’
눈송이들은 내면과 사물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없는 현실의 아수라를 차고 올라 떠오르라고 합니다. 현실의 바닥에서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비상하는 삶의 방식이지요. 시인은 첫 시집의 후기에서 “내 말이 간신히 시가 되는 이유는 눈물을 애써 감추기 위해 부족의 동화(童話)를 꿈꾸기 때문이다.”고 말합니다. 시인이 낯선 이방인으로 떠돌며 꿈꾸는 저곳은 어디일까요? 이 가을에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_ 출처 : http://www.digitalpost.or.kr'언론기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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