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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8.30 EBS 라디오 <시콘서트> 출연 (DJ 배우 강성연 씨와)
  2. 2012.08.14 대담_ 시, 함께 늙어가는 아름다운 애인(이재훈, 이은규)
  3. 2012.08.07 [시현실 2012년 여름호] 집중조명 이재훈 화보
  4. 2012.07.23 충북 옥천 정지용 향수의 고장
  5. 2012.07.17 문학나눔 패러디백일장_ 시인 이재훈의 「남자의 일생」 패러디 하기
  6. 2012.07.05 명왕성 리얼리티
  7. 2012.06.29 2012년 7월 청소년 인문학 소풍 참가자 모집 안내
  8. 2012.06.29 부재의 수사학_ 광고
  9. 2012.06.29 홍사용문학관 특강 팜플렛 자료
  10. 2012.06.29 화성시 여성백일장 심사
  11. 2012.06.28 <시와세계> 작품상 심사
  12. 2012.06.27 이형기문학제
  13. 2012.06.08 이재훈 평론집_ 부재의 수사학
  14. 2012.05.17 2012 청소년 인문학 탐방 프로그램 <인문학 소풍>
  15. 2012.05.17 <인문학 소풍> 참가신청 안내
  16. 2012.05.03 무욕(無慾)의 명징함을 찾아서 / 조해옥
  17. 2012.05.03 식육과 형벌의 세계를 견디는 날들 / 조동범
  18. 2012.04.20 <포엠포엠> 탐방_ 시인을 만나다
  19. 2012.04.06 시상식~
  20. 2012.04.04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자 발표(현대시학, 2012년 3월호) 2
  21. 2012.03.30 [제6회 수북수북 라디오] <명왕성 되다> 이재훈 편
  22. 2012.03.30 <명왕성 되다>의 시인 이재훈 - 제7회 수요북콘 후기 2(최종)
  23. 2012.03.30 <명왕성 되다>의 시인 이재훈 - 제7회 수요북콘 후기 2
  24. 2012.03.30 <명왕성 되다>의 시인 이재훈 - 제7회 수요북콘 후기 1 1
  25. 2012.03.29 수요북콘_ 이재훈 북콘서트
  26. 2012.03.23 故 김충규 시인을 떠나보내며...
  27. 2012.03.09 유한성의 파토스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_ 박대현
  28. 2012.03.09 유한성과 동일성 너머의 무한_박대현
  29. 2012.02.16 문예지의 현황과 미래 2
  30. 2012.02.09 아만과 회감의 시 / 신동옥

8월 29일(수). EBS 라디오 <시콘서트>에 출연했다.

DJ는 배우 강성연 씨.

시에 감동하는 감성을 지는 배우. 편안했다.

강성연씨는 오프닝으로 <마루>를 낭송했고,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를 낭송했다.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를 읽으며 시가 내 마음과 같아,

낭송할 때 감정몰입이 될 수 있으니 양해해 달라고 했다.

나는 배우의 낭송이 참 좋았다.

나는 <명왕성 되다>와 <카프카 독서실>을 낭송했다.

나의 어눌한 말과 긴장된 톤에 걱정했으나

PD와 작가, DJ는 모두 재밌고 유쾌한 방송이었단다...

그냥 믿기로 했다.~^^

 

다시 듣기 : http://home.ebs.co.kr/reViewLink.jsp?client_id=story&menu_seq=23&page=1

http://home.ebs.co.kr/poem/replay/8/view?courseId=BP0PHPI0000000033&stepId=01BP0PHPI0000000033&prodId=9796&lectId=3118869&lectNm=&bsktPchsYn=&prodDetlId=&oderProdClsCd=&prodFig=&vod=&oderProdDetlClsCd=&pageNo=497

 

 

Posted by 이재훈이
,

대담

 

 

 

시, 함께 늙어가는 아름다운 애인

 

 

 

이재훈 이은규

 

 

 

햇살이 없었다면/ 저물녘이 없었다면/ 늦은 밤 빗소리와/ 시를 긁적이는 펜 소리가 없었다면/ 이 우주에 어쩌다 나의 동경이 되어 버린 숱한 별들과/ 아무도 원치 않던 도시에서의 고독이 없었다면/ 애초부터 방황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이재훈, <명왕성 되다>, 自序에서

 

 

 

● 명상가와 시인 사이

 

이은규: 이번 <시현실> 여름호 대담에는 이재훈 시인을 모셨습니다. 선배님, 잘 지내셨어요. 반갑습니다. 오늘 대담 장소인 쿠스코의 분위기가 이국적이네요. 흐르는 음악도 그렇고요.(^^) 함께 말씀 나누게 될 <명왕성 되다>에 「쿠스코」라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지요?

 

이재훈: 「쿠스코」라는 작품이 있죠. 쿠스코는 페루의 도시인데 잉카제국의 수도였지요. 한때 1백만 명이 거주했다고 해요. 또 세계의 배꼽이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고대문명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 이유로 쿠스코에 대한 열망이 시로 표현되었겠죠.

 

이은규: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오늘 대담 장소와 함께 나누게 될 대화가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을 것 같아 흥미로워요.(^^)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약력에서 고향은 정보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1972년 강원도 영월 출생이신데, 선배님 기억 속에 그곳은 어떤 곳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요. 영월하면 뭔가 아득한 느낌인데 일상은 또 다르겠지요.

 

이재훈: 제가 태어난 곳이 영월 만경대산 아래 첫 동네에요. 영월군 하동면 주문리. 일명 모운동(募雲洞), 구름이 모이는 동네라는 뜻이지요. 예전에는 그곳이 탄광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죠. 폐광된 이후로 인적이 드문 마을이 되었어요. 그곳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때까지 횡성, 인제 등 강원도 곳곳을 떠돌며 살았어요. 이렇게 이사를 자주 다니니까 헤어진 친구들에게 편지를 많이 썼어요. 그래서 그런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어요. 그래도 수줍음이 많아서 새롭게 전학 간 학교에 적응하는 건 늘 시간이 걸렸어요.

사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영월을 떠나서 연고가 없어요. 그런데 약력에는 항상 출생지를 적게 되어 있잖아요.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어른이 돼서 다시 가보니 많이 바뀌어있더라고요. 집집마다 벽화를 그리고 마을을 예쁘게 가꾸어서 캠핑족들에게 인기가 많은 동네가 된 거죠. ‘6시 내고향’ 등 티브이에도 많이 출현을 했다고 해요.(^^)

 

이은규: 구름이 모이는 동네…. 그윽한 이름이 인상적인 곳이네요. 갑자기 이런 말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모범생 이미지가 강하세요.(^^) 학창시절 선배님께서는 어떤 학생이셨는지 궁금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말씀해 주시면 이해가 빠를 것 같아요.

 

이재훈: 이러저러한 상황으로 논산에 계신 부모님과 떨어져 지냈어요. 고1 말부터 혼자 자취를 하게 되었어요. 연탄불 혼자 갈면서 밥 해먹고 고등학교 졸업했는데 자취 시절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어요. 사춘기가 조금 늦게 온 것 같아요.(^^) 대학을 안 가겠다고 선언했죠. 나름 지역의 명문고였기 때문에 꼴등도 대학은 갔었거든요. 일종의 반항심이었는데 남들 다 가는 대학이라서 가고 싶지 않았어요. 당시에는 인도에 가서 명상가가 되고 싶었어요. 자신을 버리고 구도를 하는 삶에 대해 관심이 많았거든요. 고등학교 때까지 나를 지배했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와 실존적 물음 등 때문에 괴로웠던 시절이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과 대전 등지에서 지내면서 방황을 했어요. 그때 집중적으로 난독을 했어요. 특히 서울 용산도서관이 제 문학의 성지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밥값 저렴하고. 당시 우동이 천원, 김밥이 오백 원이었어요. 하루를 지내기엔 좋은 환경이었죠. 희한하게 문예지도 많이 읽었어요. 그러다가 부모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논산에 있는 4년제 대학에 들어가게 된 거죠.

 

● 펼치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이은규: 대학 진학 거부와 명상가를 향한 꿈이 내적 필연성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첫 발성인 등단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지요. 대학 재학 중인 1998년 <현대시>로 등단하셨는데 안팎의 반응이 상당했을 것 같아요.(^^)

 

이재훈: 대학을 간다면 국문과 말고는 생각을 안 했어요. 거기가면 책 읽을 수 있지 않나 하는 막연한 생각 때문에.(^^) 하지만 학교생활도 열심히 못했죠. 부모님께 억지로 끌려간 거라 1년 동안은 적응을 못했죠. 그러다 방위병으로 군대를 다녀온 후 복학해서 본격적으로 학교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문학은 계속 독학으로 했던 거라서 2학년 때부터 각종 문예지에 투고를 했어요. 그때 당시 우리 과에 평론가 우찬제 선생님께서 계셨어요. 작품을 보여드릴 용기가 없어서 연구실 문틈으로 작품을 밀어 넣었던 생각이 많이 나요. 그런 시간을 보내고 4학년 때 등단을 했어요. 학교 설립 이후 최초의 등단자였기 때문에 교문에 플랜카드가 걸렸고 졸업할 때 상도 받았죠.(^^) 막상 등단을 하고 보니 실감이 안 났어요. 삶이 달라진 것도 아니고. 거의 1년 동안 청탁도 없었고요. 하지만 내적 에너지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것 같아요. 문학을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뛰쳐나가 순교할 자세가 되어 있던 거죠. 그렇게 철이 없었어요.

 

이은규: 문청 시절에 시인이 되신 거네요. 얼마나 벅차셨을까요. 현대시와의 인연이 등단지에서 근무지로 이어지고 있는데요.(^^) <현대시>와 관련된 일 또는 사람들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문학과 일상의 경계가 거의 없는 생활을 하고 계신데, 장점도 있지만 어려운 점도 있으실 것 같아요.

 

이재훈: 등단 후 중앙대대학원 문창과를 다니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현대시>에서 일을 하게 되었죠. 현대시에서 학업을 병행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셨어요. 그때부터 쭉 박사과정 진학을 하게 되었고 졸업한 후에는 잡지일과 강의를 하고 있지요. 30대 초반부터는 제 삶의 모든 부분이 문학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은규: 문학이라는 테두리 속에서의 삶…. 이번 기회를 통해 2005년 출간된 선배님의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를 다시 펼쳐 보았는데요. 심플한 표지와 긴 호흡의 표제작이 다시 봐도 신선했어요.(^^) 특히 표제작은 세상에 첫 시집을 내놓는 시인의 선언서처럼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이재훈: 한 권의 시집은 나름 시인이 연출해낸 한 편의 연극이라고 생각한 거죠. 나름대로 기획을 하려고 고심을 했어요. 색깔 있는 시집, 이재훈이라는 텍스트만이 살아 있는 시집을 내고 싶었죠. 시를 통해서 잘 할 수 있는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위주로 묶었어요. 첫 시집이니까 근원과 욕망 등을 탐색하는 시들이 많았고. 일반적으로 첫 시집에는 자기 살점이 뭉텅뭉텅 떨어지는 자의식적인 부분이 있을 수 있는데, 첫 시집으로 많이 아팠죠.

표제작 이야기를 조금 하면 그 작품 제목이 너무 길어서 시집 제목으로는 생각을 못했어요. 당시 추천글을 써주신 조정권 선생님께서 제안을 해주셨어요. 길어서 좀 망설여진다고 하니 그 제목이 시집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 조언으로 다소 긴 제목의 시집을 가지게 되었죠. 제목이 길기 때문에 제 시집의 제목을 외우는가 외우지 못하는가를 기준으로 저에 대한 애정을 판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은규: 참고로 저는 외울 수 있답니다.(^^) 첫 시집 자서에 보면 “문학이 구원 자체는 될 수 없겠지만 구원을 욕망하게 하는 에너지는 되기 때문이”라는 문장이 있는데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신지, 혹은 새로운 생각이 더해지지는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이재훈: 변함이 없다고 봐야겠죠. 시와 완벽히 논다는 개념이 제겐 없어요. 진지하고, 고민이 많죠. 세상에 놀 것들은 많지만, 진지하고 싶은 것들은 없어요. 전 숙연하게 문학을 하고 싶어요.

 

이은규: 문학을 대하는 태도나 자세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말씀이네요. 질문을 계속 이어나가자면, 시원에 대한 물음들이 주가 되어 시집 한 권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표제작인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를 포함하여 <사수자리>, <순례>, <나스카 평원을 떠난 새에 관한 이야기>, <공중정원> 등의 작품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 여행 경험과 상상력은 어떻게 만나고 또 헤어지는지요.(^^)

 

이재훈: 아까 말씀드렸듯이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않은 삶을 살아서 먼 곳에 대한 동경과 상상이 시를 통해 드러난 것 같아요. 대부분의 공간이 실제 가보지 않고 쓴 경험이 많습니다. 가보지 않고 어떻게 체험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단호히 아직 문학을 반쪽밖에 모르시는군요 하고 말하고 싶어요.

초창기에는 내 삶을 쓰는 게 너무 엄살을 떠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시를 썼을 때 마음에 들지 않았죠. 시를 통해 멋있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성향일수도 있고요. 문학을 통해 이상향을 이루자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별이라든지 가볼 수 없는 곳에 대한 상상, 우주 속을 떠도는 것이 저에게는 실존적 고민이었기에 나름대로 치열했어요. 그런 치열함이 더 문학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고요. 선입견을 가지고 생각하듯이 별이 낭만적이지만은 않아요. 제겐 치열한 실존의 대상이죠. 아직 삶을 이야기하기엔 내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을 어떻게 내릴 수 있나라는 생각도 했었고. 지금은 조금 달라졌어요. 체험은 개별성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나온다는 걸 알아요.

 

이은규: 우주와 실존 그리고 시적 치열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어지는 질문이 될 수도 있겠는데요. 여행을 하다보면 마음에 담고 싶은 풍경을 사진에 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익히 알려져 있듯 <현대시>의 표지를 장식하는 수많은 문인들의 사진을 찍으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촬영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이재훈: 에피소드는 아껴두기로 하고요. 대개 시인들은 사진 찍는 것을 즐겨하지 않아요. 사진 찍히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죠. 글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에 익숙하다보니,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밝혀지는 것을 꺼려해요. 그런 부분에 일견 동의합니다. 나또한 그러니까.(^^) 모델을 찍는 것보다 시인을 찍는 것이 훨씬 어렵지 않을까 생각해요. 시인을 스튜디오에 앉혀 놓고 사진을 찍는다고 상상해보세요. 금방 아시겠죠.(^^)

 

시인과 평론가 사이

 

이은규: 선배님, 굉장히 부지런하신 것 같아요.(^^) 2007년에는<현대시와 허무의식>을 출간하셨습니다. 허무의식이 현대시에 보편적인 인식의 방법임을 밝히고, 그 시의식이 어떠한 양상으로 펼쳐졌는지를 고찰한 결과물로 읽혔는데요. 허무의식에 대한 천착의 이유와 특별히 유치환, 박인환, 이형기, 강은교 시인을 호명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재훈: 제 박사논문의 주제입니다. 박사논문을 수정 보완해서 낸 책이에요. 부끄럽고요.(^^) 허무의식이라는 주제론이 많지 않다보니 써보고 싶었어요. 유치환, 박인환, 이형기, 강은교 시인은 모두 허무의식이 가장 주요한 시의식이었어요.

 

이은규: 어쩌면 시인들에게 ‘허무’는 일종의 공통감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허무를 어떻게 내면화시키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양상으로 드러나겠지요. 이번에는 잠시 우회로를 따라 걸어보겠습니다. 지난 3월 시집 <명왕성 되다>와 관련된 ‘북콘서트’가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상상 속 독자를 직접 대면하는 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더불어서 그날 사회자와 게스트로 참석해주신 신혜정, 허연, 김태형, 오은, 김안 시인 등을 보며 문우가 많으실 것 같은 인상을 받았어요.(^^)

 

이재훈: 오로지 저만을 위한 그런 북콘서트는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그런 기회가 있을까 싶네요. 아주 즐거웠던 체험이었어요. 함께 와준 여러 시인들에게 고맙죠. 특히 사진에는 없지만 뒷풀이를 함께 한 시인들에게 고마움을 느낀 날이었어요. 많은 문우가 있을 것 같은 인상이긴 하지만 의외로 외롭기도 하답니다.(^^)

 

이은규: 매체에 보도된 사진을 통해서도 그날의 벅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문우에 대한 말씀을 아끼시는 그 모습이 더 애틋하게 다가오네요. 그런가하면 2008년에는 <딜레마의 시학>이 출간되지요. 부 구성에도 드러나듯이 현대시의 미래에 대한 탐색과 증언, 그리고 풍경들과 마주할 수 있었는데요. 시쓰기와 비평이라는 두 가지 층위의 작업을 함께 하고 계십니다. 즐거움, 괴로움 동시적으로 갖고 계실 것 같아요.(^^)

 

이재훈: 많이 받는 질문입니다. 평론에 대한 자의식에 대해 자꾸 물어보시면 부끄러워요. 시인이 쓴 조금 논리적인 글로 이해를 해주시면 제 마음이 편하죠. 솔직히 말하면 괴로움이 많아요. 이것저것 붙잡다가 이도저도 아닌 게 되는 것 같아서. 시 쓸 때의 모드와 평론 쓸 때의 모드가 다르기 때문에 동시에 쓰지는 못해요. 시 쓸 때는 시만 평론 쓸 때는 평론만 쓰죠.

 

명왕성 되다, 이후

 

이은규: 이번에는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에 관해 말씀 나눠 보겠습니다. 여는 질문 하나드리자면 자서 말미에 등장하는 카프카 독서실은 시편 「카프카 독서실」의 공간과 같은 곳인지요?(^^) 시 속의 “팔뚝 위에 피리를 새겨 넣자/내 몸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는 구절을 통해 바라보면 작품의 산실인 것도 같습니다.

 

이재훈: 카프카 독서실은 제 공부방이에요. 아이들을 재우고 난 뒤에 얻는 저만의 시간은 참 소중하죠. 아무에게도 침해받고 싶지 않은 그 공간에게 제가 이름을 붙여줬어요.(^^)

 

이은규: 누구나 저마다의 카프카 독서실을 꿈꾸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 시집 제목에는 어떤 에피소드가 숨어있는지 궁금합니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그 부분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잖아요.(^^) 더불어 명왕성 등 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첫 시집부터 지속되고 있는 시원에 대한 물음의 연장선상에 있는지요. 그런 추측이 가능하다면 어떤 변화를 염두에 두고 시도하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이재훈: 어떤 변화라기보다는 별이라는 대상이 제 몸에 맞는 거겠죠. 일부러 별에만 집중한 것은 아닌데요. 존재의 시원이나 신화, 도시적 삶에 대한 성찰 등의 주제가 별이라는 대상으로 수렴된다는 게 저도 신기해요.

 

이은규: 그런 현상이 시의 ‘자기운동성’이 아닌가 싶어요. 첫 시집이 도시의 생리와 주체의 내면을 결합하며 한 시대의 쓸쓸한 풍경을 기록했다면 이번 시집은 소재와 착상의 범위가 더욱 넓고 풍요로워졌으며, 다양한 시편들을 통해 호흡과 리듬도 확장되었다는 평이 있습니다. 어떤 시인에게나 첫 시집은 생채기와 같은 느낌이 강한 것 같아요.(^^) 그 시간을 지나온 두 번째 시집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은 어떠신 지요.

 

이재훈: 좋은 평가를 많이 내려주시니 고맙죠. 두 번째 시집에 대해서는 아마 제가 세 번째 시집을 낸다면 더 중요한 말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첫 시집과는 조금 다른 지점에서의 나를 발견하려고 애썼던 시집이었죠. 그 부분에서 공감을 많이 해주시는 것 같고요.

 

이은규: 말씀을 들으니 벌써 세 번째 시집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되는데요. 나를 발견하려는 몸짓이 어떠한 방식으로 시도되고 또 드러날지 궁금해집니다. 문득 김수영 시인 이야기인데요. 김수영은 “시는 나의 닻이다”라는 말을 했지요. 선배님께 시는 무엇일까요. 더불어 이유도 함께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재훈: 제게 시는 무엇일까요란 질문은 너무 어렵고 거창하고요. 저는 시가 함께 늙어가는 애인이었으면 좋겠어요.(^^) 시와 함께 아름답게 늙고 싶어요.(^^)

 

이은규: 오늘 대담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하기’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기’ 사이를 오고간 것 같습니다.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드리며 대담을 마칠게요.(^^) 감사합니다.

 

이재훈: 수고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은규 |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다정한 호칭>이 있음.

 

_ <시현실>, 2012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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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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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에 다녀왔다. 7월 14일, 21일 2회.
국립어린이도서관협회에서 주관하는 인문학소풍 초청강사로 참여했다.
중고등학생들과 정지용문학관을 둘러보고
정지용문학공원인 멋진신세계에서 강연을 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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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for-munhak.or.kr/idx.html?Qy=play_parody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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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왕성 리얼리티

산문 2012. 7. 5. 17:55

명왕성 리얼리티

 

 

이재훈

 

 

 

1.
이 짧은 글은 시에 대한 해설보다는 시 속에 내재된 내 삶의 몇 가지 편린들이다.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에는 삶의 여러 사연들이 녹아 있는 시편들이 많다.

 

 

파릇파릇한 우주에
내 몸을 던지고 싶다.
성난 가시와 붉은 피부를 가진
장미로 태어나고 싶다.
- <비비디 바비디 부> 부분

 

 

늘 이런 식이다. 거대한 우주와 싸우고 싶은 객기. 언제부터 나는 우주의 변신술을 탐했을까. 아마도 이 땅을 너무 사랑해서가 아닐까. “누구의 소유도 아닌 몸”(<비상>)을 일찍부터 알았기 때문일까. 시인이라는 자의식 때문에 괴로웠다. 어디를 가든 ‘나는 시인이지’라는 다소 과장된 자만이 날 옭아맸다. 내 삶은 그저 그런, 퍽퍽한 일상을 겨우 살아내는 시간들에 지나지 않았다. “시인이었다가 일용근로자였다가 백수건달이었다가 독학자”(<비상>)가 되는 일상이었다. 그러한 일상을 하나씩 꺼내어 들여다보는 밤의 시간들을 즐겼다. 나는 밤을 사랑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 공중이 없는 하늘을 준 밤, 사방이 꽃천지를 만들어 준 밤. 불면의 밤들. 숙취의 밤들.
그런 일상 가운데 한 줌 먼지로 돌아갈 내 영혼의 지난함을 생각했다. 오죽하면 “소멸이 내 먹는 밥”이라고 했을까.(<연금술사의 꿈>)

 

 

나는 육십억 분의 일일 뿐.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맥주 캔. 먹다 남긴 컵라면. 참기 힘든 소음. 역겨운 화장 냄새와 비둘기 똥 냄새로부터.

계곡의 하얀 물보라를 헤치고, 난파된 얼음 위에 올라서 저물어 가는 사람들의 삶을 감상하고 싶다. 그러면 아주 쓸쓸하겠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아무도 없이 고독하겠다.
- <매일 출근하는 폐인> 부분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매일 출근을 했다. 2호선은 순환선이었다. 끝없이 돌고 도는 내 삶의 주기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지옥철’ 2호선에서 더 절실한 존재의 간절함을 보았다. “아름다운 눈을 가진 인간들”(<미궁의 열두 번째 통로>)이라는 싯귀는 지하철에서 건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전철이 한강 위를 지날 때면 강을 바라본다. 지하에서 강물 위로 나와 하늘을 볼 수 있는 공간. 그 공간을 보는 눈들은 모두 아름다웠다.
매일 출근하는 폐인으로 살면서, 2호선의 전기문명적 실존을 겪으면서 지하철 무가지 신문에서 ‘명왕성 되다’라는 단어를 만났다. 기사를 찢어 주머니에 넣고, 혼자 중얼거리며 흐뭇해하던 생각이 난다. 명왕성 되다, 명왕성 되다. 참 멋진 말이야. ‘명왕성 되다’는 알려진대로 태양계 행성 지위 박탈을 계기로 ‘격하하다’ ‘추락하다’라는 의미가 추가된 단어 ‘pluto’의 과거분사형 ‘Plutoed’이다. 나는 스스로 명왕성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애걸복걸 자본문명에 의탁하거나, 모른체하면서 생뚱맞게 살아가거나 모두 명왕성 될 테니까.
나의 변신술은 더 남달라졌다. “때론 동물이었다가 때론 식물이고/ 때론 명징했다가 때론 무질서합니다./ 나 또한 상징에 불과합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시간들이었다. 인간에게 욕망은 살아가게끔 하는 동력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무기력에 빠져 지내면서, 제발 내게 찾아와라, 그 어떤 욕망이여, 라고 되뇌었다. 원초적 욕망 이외의 것들이 내겐 필요했다. 그러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한 친구가 이 세상을 등졌다.

 

 

강에 뼛가루를 뿌렸다지. 하얀색 행사용 면장갑을 끼고 만졌지. 뜨거운 그대의 뼛가루. 숨소리가 들린다지. 뼛가루끼리 서로 얽혀 스삭스삭 소리 들린다지. 형, 형아. 아직 따뜻한 형. 그대의 동생이 울다가 나를 보며 웃는다지. 형님, 만져보세요. 아직 형이 따뜻해요. 마지막은 흔적이 이유라지. 귀에 그대의 목소리가 흘러내린다지. 그대 안에 잠든 열망을 찢기로 했다지. 아아 우리는 정탐꾼이었지. 세상을 향해 깃발을 들기로 했는데. 이 애매한 고통이 무언가를 이제 알겠는데. 비가 많이 내린 날. 어머니의 물에서 나온 그대. 비와 함께 물로 가다, 물속에 묻혔다지. 그 물길이 통하는 곳에 햇살이 슬쩍 몸을 뉘였다지.
- <대황하 4> 전문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생각했다. 물에서 나와 물로 간 친구를 생각했다. 십년 전 들었던 쿠스코의 음악을 우연히 다시 들었고, 대황화라는 곡을 다시 들었다. 그때부터 물에 대한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꿈틀댔다. 대황하 연작은 그때부터 10편 이상이 씌어졌다. 누런 황톳물을 통해 나는 무엇을 간절히 바랐던 것일까. 물과 어머니, 시간, 존재, 구원, 그리고 비상. 물의 이미지를 통해 오를 수 있는 상징의 첨탑까지 오르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 나는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다니던 “소음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땅”(<新林洞>) 신림에서 월곡으로 이사왔다. 이제는 6호선을 타고 다닌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어둠이 안겨주는 거대한 정적을,
위대한 침묵을
나는 알지 못했다.
상처받은 한 친구를 생각했고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생각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바쁜 거리의 일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산책길엔 언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길목과 길목이 혀를 내밀어
내 몸을 떠받치고 있을 뿐.
타인의 인격을 규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은,
그 짧은 시간만큼은 황홀하겠지.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
달빛이 있는 골짜기다.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그 햇살의 순간처럼.
-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부분

 

 

월곡으로 이사온 뒤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월곡은 번화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네온사인도 호객꾼도 없었다. 내게 월곡은 장 그르니에가 오르던 아프리카의 산타쿠르즈 언덕과도 같다. 언덕을 오르고, 또 언덕을 오르면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에 당도한다. 그토록 원망했던 “나의 메디나,/ 시인들의 공화국” 서울. 이제 이 땅과 명왕성의 그 긴 침묵을 깨트려야 할 때이다.
아직 십 분의 일도 말을 못했는데. 명왕성 리얼리티는 아직 멀었는데, 원고량은 이미 넘쳐버렸다. 늘 이런 식이다. 아껴두련다. 다음 회 이어지는 리얼리티를 위해.

 

_ <시에>, 2011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

 2012년 청소년 인문학 소풍 7월과 8월 프로그램 참가자 모집을 시작합니다.

 7월 옥천 프로그램은 출발 장소가 기존 강남역에서 종합운동장역 1번 출구로 변경되었고,

 8월 홍대 프로그램의 경우 전세버스를 운영하지 않으니 세부내용을 꼼꼼하게 확인하시고 지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7월, 옥천에서 정지용 되다>, <8월, 홍대에서 장자와 춤추다>

    ※ 전체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은 부커부커 블로그 (http://blog.naver.com/bbooker)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일 시

    - 옥천에서 정지용 되다 : 7월 14일(중학생), 7월 21일(고등학생)

    - 홍대에서 장자와 춤추다 : 8월 11일(중학생), 8월 25일(고등학생)

  ▪ 모집 인원

    - 옥천에서 정지용 되다 : 7월 14일 40명, 7월 21일 40명

    - 홍대에서 장자와 춤추다 : 8월 11일 80명, 8월 25일 80명

      ※ 5명 이상 단체 참가를 원하시는 경우 별도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02-388-5933)

  ▪ 프로그램 시간

    - 옥천에서 정지용 되다 : 오전 8시 서울 출발(지하철2호선 종합운동장역 1번 출구)
    
 / 오후 7시 서울 도착

     ※ 교통 상황에 따라 도착 시간은 변동될 수 있습니다

    - 홍대에서 장자와 춤추다 : 오전 10시 시작(개별 도착) / 오후 5시 종료(개별 귀가)

  ▪ 참가비 : 1만원 (점심식사 및 입장료 / 현장 납부)

  ▪ 주최 :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 주관 : 한국어린이도서관협회

  ▪ 후원 : 국민체육진흥공단


□ 참가 신청

 ▪ 신청 프로그램

 ► 세 번째 소풍 - 옥천에서 정지용 되다   

회차

일 시

참가대상

도   서

강   사

장   소

5

7.14(토)

중학생

정지용 시선

명왕성 되다(이재훈, 민음사)

이재훈 

(시인, 월간 현대시 편집장)

옥천 정지용문학관

멋진신세계(문학공원)

서울 출발(08:00) -> 옥천 도착 -> 정지용생가 및 문학관 관람 -> 점심식사 -> 이재훈 시인 강연 -> 멋진신세계(문학공원)로 이동 -> 조별 프로그램 및 백일장 -> 서울 도착(19:00)

회차

일 시

참가대상

도   서

강   사

장   소

6

7.21(토)

고등학생

정지용 시선

명왕성 되다(이재훈, 민음사)

이재훈 

(시인, 월간 현대시 편집장)

옥천 정지용문학관

멋진신세계(문학공원)

서울 출발(08:00) -> 옥천 도착 -> 정지용생가 및 문학관 관람 -> 점심식사 -> 이재훈 시인 강연 -> 멋진신세계(문학공원)로 이동 -> 조별 프로그램 및 백일장 -> 서울 도착(19:00)

 

출처 : http://www.nlcy.go.kr/section/board/notice_content.asp?board_seq=3381&page=1&BID=A05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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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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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가 주최하는 화성시 여성백일장 수필부문 심사를 했다.
김지현 작가와 함께 수필부문을 맡았다.
아래는 백일장 심사기준을 말하고 있는 모습.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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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세계> 작품상 심사를 했다. <시와세계> 사무실에서.

시와세계 발행인 송준영 선생님과 김영남 선생님과 함께.

논의 끝에 김미정 시인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아래는 심사평이다.

 


 

본질과 현상의 해동점

 


이재훈

 

 


시와세계 작품상은 한 해 <시와세계>에 발표한 등단 만 5년에서 10년 사이 시인들의 시적 스타일을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본심에 오른 10명의 작품들을 일독하니 모두 만만치 않은 시적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각각 3~4명의 시인들을 천거하였고 이들 중에서 다수의 득표를 한 김미정, 최금진의 작품을 놓고 세세한 토의를 이어갔다. 나는 본심에 오른 작품들 중에 최금진, 박장호, 유금옥, 김미정의 작품을 추천하였다.
최금진은 일반의 서정과 다른 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눈길이 갔다. 그의 시에는 문명과 맞서는 현대인의 자아가 치열하게 그려진다. 자못 음울하고 비관적인 그의 세계에 대한 태도는 시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시인은 “나도 늙으면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아프리카에 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현실의 시적 자아는 스스로와 맹렬하게 싸운다. “미친놈, 미친놈, 몽둥이를 들고 내가 나를 쫓아가며” “나는 가시에 찔리고 긁히며 숨는 산짐승”이라고 고백한다.(「송전탑 옆에 서 있었다」) 그러면서도 늙어가는 첫사랑 애인에 대한 만연체의 전언들은 애잔함을 주기도 한다.
박장호는 독특한 주체의 언술을 가지고 있다. 젊은 감각이 빚어내는 환(幻)의 세계는 이 세계를 잊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세계를 열망하는 매개체로 존재한다. 그는 「허공의 개미집」에서 “나에겐 환각이 필요합니다”고 말하는데, 박장호의 시를 여러 편 읽다보면 그의 환각이 절박한 실존의 차원과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된다. 환의 감각을 예리하게 견지해온 그의 작품에 앞으로 더 많은 시선이 가야함을 느낀다.
유금옥의 시는 성찰의 힘이 돋보였다. “우두커니 서서 새소리를 듣는 일”로 대표되는 일상의 사소한 일들을 성실하게 돌본다. 그러한 시적 자아의 행위를 따라가다 보면 읽는 이가 자연스럽게 시와 동화됨을 느낀다. “새소리만 종이배에 태우고 조용히 사라지고 싶은 일”(「나무와 나의 공통점」)이라거나 “나는 주머니 속에 새소리만 가득 넣고/아지랑이를 타려 해”(「매화역」)에 이르면 밑줄을 그어놓고 나도 함께 아지랑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힘은 시인에게 큰 덕목이다.
김미정은 시의 언어가 어떠한 방식으로 운용될 수 있는지를 여러 차원에서 구사하고 있었다. 초기 작품들에 비해 시적 스타일이 많이 바뀐 점도 눈에 띄었다. 김미정의 시는 언어가 환기하는 방법론을 깨치고 스스로의 각성을 통해 시적 갱신을 이루어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시 「투명한 대화」는 대화와 소통의 의미를 유리라는 매개물을 통해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이미지를 통해 제목의 상징성을 예리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하드와 아이스크림」은 하드라는 시적 대상물을 통해 본질과 현상이라는 시적 인식을 이끌어내는 힘이 돋보였다. 딱딱한 하드가 녹는 시간 사이에 주체와 타자의 소통이 개입한다. 서로 손을 잡는 섬세한 행위 속에 바람의 본질을 깨우치고, 이를 하드와 연결시키고 있다. 하드와 아이스크림, 손가락과 태양, 모래와 바람의 이미지들이 서로 얽히고 연결되어 또다른 의미를 발산하고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앞으로의 작품들이 더 기대된다. 수상을 축하드린다.

 

_ <시와세계> 2012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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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문학제

시시각각 2012. 6. 27. 14:57

지난 6월 3일 진주에서 열린 이형기문학제에 참석했다.

나는 발표자로 나서 이형기 시에 나타난 허무의식의 양상을 발표했다.

이형기문학상 뒷풀이를 했던 진주시내 '서울회관7080'의 분위기는 잊혀지지 않는다.

다음 날은 하동 섬진강 하동송림에서 산책을 했고, 토지의 무대인 악양리 최참판댁을 돌았다.

점심으로 재첩국을 먹었다. 마지막 들렀던 쌍계사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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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

 

 

 

 

 

2012년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을 수상하며 시단의 촉망받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재훈 시인의 두 번째 평론집. 자기만의 독특한 상상력으로 시단에 활기를 불어 넣고 있는 이재훈 시인은 시뿐만 아니라 비평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이미 2008년 <딜레마의 시학>이라는 평론집을 통해 시인만이 볼 수 있는 시의 다양한 풍경들을 내밀한 목소리로 표출한 바 있다.

이번 평론집에서는 공분의 시대에 시가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재훈 시인은 이미 여러 평론을 통해 부재의 현실을 타파할 수 있는 성찰의 의미와 가능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한 바 있다. 이번 평론집은 부재의 현실을 넘어서려는 여러 가능성들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는 집적물이라 할 만하다.

저자의 말대로 '부재의 수사학'은 부재의 현실을 통해 우리가 목말라하고 있는 사유와 정서는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개념어이다. 저자는 각기 시인들이 다양한 양상으로 벌이고 있는 유토피아의 꿈, 현실과의 적극적인 싸움, 내면에의 침잠, 사물에 대한 깊은 사유 등을 꼼꼼히 추적하면서 시가 가진 성찰의 다양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책머리에: 저자의 말

<제1부>
시적 현실과 영성의 세계
아가미로 숨쉬는 문명인의 일상
공시적 맥락에서 본 금강의 시적 흐름
몰입과 탕진의 시적 재현

<제2부>
물과 질량의 시학
: 허만하 시집 <바다의 성분>
통찰의 시학
: 임강빈 시집 <이삭줍기>, 마종기 시집 <하늘의 맨살>
고요한 내레이터와 신명나는 퍼포먼스
: 정희성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 신현정 시집 <바보사막>
부재의 시학
: 장석주 시집 <몽해항로>, 최준 시집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
소통의 연애사
: 김요일 시집 <애초의 당신>, 손현숙 시집 <손>,
: 김성대 시집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
극진한 통찰과 결기(決起)
: 손택수 시집 <나무의 수사학>, 이기인 시집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상처의 경제학
: 박진성 시집 <아라리>, 신정민 시집 <꽃들이 딸꾹>
통각을 딛고 일어서는 성찰의 시학
: 고석종 시집 <말단 형사와 낡은 폐선>

<제3부>
소외와 말줄임의 수사학
: 조현석 시집 <울다, 염소>
공중에 풀린 영원성의 시학
: 박남희 시집 <고장 난 아침>
상처받은 꽃말과 몸말의 소리
: 한문석 시집 <바람개비>
관계의 복원에서 상생의 열림으로
: 조혜전 시집 <기린산방>
그리움으로 향하는 꽃길의 시
: 강수완 시집 <꽃, 모여서 산다>
농담의 수사와 할(喝)의 시학
: 황상순 시집 <농담>
그저 달콤하기만 한 문명의 정치학
: 신혜정 시집 <라면의 정치학>
고통을 딛고 일어선 비상의 꿈
: 손계정 시집 <솔개>
신생의 꿈을 향한 시적 순례
: 이민화 시집 <화몽>
역전(逆轉)을 통한 비움의 길 찾기
: 엄혜숙 시집 <도문(道門)>
흔적의 시학
: 하상만 시집 <간장>

인명 찾아보기

 

 

 

5
시인들은 본질에 닿기 위해 이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극복하는가.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이 책은 시작한다. 시인들의 눈에 비치는 현실세계는 극복의 대상이면서 또한 함께 발 딛고 살아가야 할 공존의 대상이다. 시인들은 첨단을 걷고 있는 문명 세계와 어떻게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를 늘 골몰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는 곪을 대로 곪아 우리의 삶을 부박하고, 우울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삶은 가난해졌으며, 인간을 인간답게 유지시킬 도덕과 가치는 땅에 떨어졌다.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노와 갈등의 시간들을 견디고 있다. 한 마디로 공분(公憤)의 시대다. 이러한 부재의 시대에 문학인들은 어떤 목소리들을 내고 있을까.
(책머리에: 저자의 말; 5쪽) - 알라딘
25
시인들은 영적 삶의 구체적 모습들을 시를 통해 고백한다. 기독교라는 종교적 측면이 아니더라도, 시인에게 영적인 삶은 일종의 숙명 같은 것이다. 굳이 종교의 이름을 빌리지 않더라도 영적인 충만을 시로 표출하는 경우를 쉽사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본질로 하는 시적 현실의 다양성이 더 큰 깊이와 만나 한국 시단에 큰 강물을 이루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시적 현실과 영성의 세계; 25쪽) - 알라딘
30
시론에서 오래전부터 지적하고 있듯이 시가 ‘일상적 진실’과 ‘당위적 진실’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면, 대부분의 문학은 ‘진실’의 차원에서 시적 의미를 거론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진실성은 현실을 그대로 노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의해 재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을 어떠한 내면을 통해 동화하거나 투사하여 비춰지느냐에 있다.
(아가미로 숨쉬는 문명인의 일상; 30쪽) - 알라딘
64
요즘 인터넷에는 비틀즈의 'Let It Be'가 댓글로 여기저기서 노래처럼 꼬리를 물고 다닌다. 이유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따른 비판적 목소리 때문이다. 경제살리기의 정치목표가 가장 중요한 점들을 간과한 채 전 국토를 공사장으로 만들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생겨난 말들이다. 이런 현상 때문인지 최근 발표된 시에서는 사회 현실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시편들이 상당수 발표되었다. 그것은 현실이 시인들의 삶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 있다는 현상을 반증한다.
(몰입과 탕진의 시적 재현; 64쪽) - 알라딘
149
현대사회는 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 관료제를 현대사회의 가장 큰 특징으로 들었다. 즉 합리적 원칙에 의해 조직되는 관료제는 사회의 모든 구조를 원활하게 지탱해나가는 가장 편리한 장치이다. 그러나 이 조직화된 관료제는 개인을 소외시킨다. 굳이 이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문명 도시 속에서 개인이 가지는 소외와 고독과 절망은 자본 문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혹독한 정신적 부산물이다.
(소외와 말줄임의 수사학; 149쪽) - 알라딘
233
현대문명은 음험한 음모를 거느리고 광장의 질서를 지배하고 있다. 그 질서는 곧잘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들의 음모에 의해 조종되어진다. 눈에 뻔히 보이는 모종의 담합들이 위정자들의 가난한 머릿속에서 실현되어질 때 우리는 그 공분(公憤)을 억누를 수 없게 된다. 최근 들어 자주 제기된 문학과 정치와의 상보적 관계는, 문학의 역할과 창작자들의 태도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하게 했다.
(그저 달콤하기만 한 문명의 정치학; 233쪽) - 알라딘

 

 

 


hoonyletter
저자 : 이재훈
 

  • 최근작 : <부재의 수사학>,<명왕성 되다>,<나는 시인이다> … 총 6종 (모두보기)
  • 소개 : 1972년 강원 영월 출생.
    1998년 <현대시> 신인상으로 등단.
    2012년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을 수상.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2005), <명왕성 되다>(민음사, 2011), 지은 책으로 <현대시와 허무의식>(한국학술정보, 2007), <딜레마의 시학>(국학자료원, 2008), 인터뷰집 <나는 시인이다>(팬덤북스, 2011)가 있다. 중앙대, 경기대, 열린사이버대, 숭의여대에서 글쓰기와 문학을 강의했다. 2012년 현재는 건양대, 서울과학기술대에서 강의하면서 <현대시> 부주간, <시와세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재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갈급하고 있는 사유와 정서를 탐색하다!


2012년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을 수상하며 시단의 촉망받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재훈 시인이 두 번째 평론집을 출간하였다. 이재훈 시인은 첫 번째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를 통해 자기만의 독특한 상상력으로 시단에 활기를 불어 넣고 있는 시인이다. 이재훈 시인은 시뿐만 아니라 비평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이미 2008년 <딜레마의 시학>이라는 평론집을 통해 시인만이 볼 수 있는 시의 다양한 풍경들을 내밀한 목소리로 표출한 바 있다.
이번 평론집에서는 공분의 시대에 시가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재훈 시인은 이미 여러 평론을 통해 부재의 현실을 타파할 수 있는 성찰의 의미와 가능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한 바 있다. 이번 평론집은 부재의 현실을 넘어서려는 여러 가능성들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는 집적물이라 할 만하다. 필자의 말대로 ‘부재의 수사학’은 부재의 현실을 통해 우리가 목말라하고 있는 사유와 정서는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개념어이다. 필자는 각기 시인들이 다양한 양상으로 벌이고 있는 유토피아의 꿈, 현실과의 적극적인 싸움, 내면에의 침잠, 사물에 대한 깊은 사유 등을 꼼꼼히 추적하면서 시가 가진 성찰의 다양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제1부는 부재의 시적 현실에 대한 나름의 양상들을 담은 글들이다. 현실과 기독교적 영성의 세계가 어떤 접합점으로 모이고 있는 지에 대한 탐구, 문명인으로 살아가는 구체적 삶의 양태가 시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몰입과 탕진의 세계가 현실에서 어떤 자구책을 구하고 있는지에 대한 탐구, 금강을 젖줄로 삼은 충청 지역의 시인들에 대한 비평 등을 담았다.
2부는 다양한 시집에 대한 내밀한 비평서이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출간한 시집들에 대한 나름의 분석적 비평이다. 허만하, 마종기, 정희성, 신현정, 장석주, 김요일, 손택수, 박진성 등의 시집에 대해 시인만이 감각할 수 있는 시의 속살을 읽어내고 있다.
3부는 시집에 수록된 해설들이다. 필자는 최근 출간되는 시집의 해설을 많이 써왔다. 시집의 뒤에 붙는 해설은 일반적인 비평과 다른 성격을 가진다. 시인이 한 권의 시집을 출간하기까지의 시적 여정을 같은 시인의 입장에서 들여다보려고 했다. 시인은 한 권의 시집을 내기까지 지난한 정신적 역경과 파고를 지닌다. 그 흐름을 함께 공유하고, 느끼려 했던 기록물이다. 조현석, 박남희, 신혜정, 하상만 시집 등 11권 시집의 해설을 살펴볼 수 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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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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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소풍> 참가신청 안내


2012 청소년 인문학 탐방 프로그램 <인문학 소풍>의 참가신청 기간 변경을 알려드립니다.

당초 5․6월 프로그램 접수 신청 마감은 4월 30일(월)이었으나 5월 6일(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에 참가 확정자 발표일도 기존 5월 1일(화)에서 5월 7일(월) 오후 17:00로 조정되었으니 착오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프로그램 개최일은 변동 없으며 참가 확정자 발표 직후 개인 메일로 안내문이 발송될 예정입니다)

아울러 현재 5월(12일, 26일), 6월(2일, 9일) 프로그램 모두 신청가능 하오니 아직 신청하지 못하신 분들은 서둘러 신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2012 청소년 인문학 탐방 프로그램 개요

  ▪ 프로그램명 : <인문학 소풍>

  ▪ 프로그램 내용

   - 월별로 선정된 도서와 관련된 지역을 저자 혹은 전문가와 함께 탐방

   - 탐방 실시 전 관련 도서와 강사, 지역을 공지하여 개별 사전학습 진행

   - 교실에서 벗어나 삶과 이야기가 있는 자연체험학습

  ▪ 기 간 : 2012년 5월 ~ 11월

    - 매월 2회 진행 (중학생 1회, 고등학생 1회) / 총 14회

  ▪ 참여 대상 및 인원 : 중고등학생, 매회 40명

  ▪ 프로그램 시간 : 오전 8시 서울 출발 / 오후 7시 서울 도착

    ※ 교통 상황에 따라 도착 시간은 변동될 수 있습니다

  ▪ 참가비 : 1만원 (점심식사 및 입장료 / 현장 납부)

  ▪ 주최 :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 주관 : 한국어린이도서관협회

  ▪ 후원 : 국민체육진흥공단


□ 전체 프로그램

회차

일 시

구 분

주    제

강   사

장   소

도   서

1

5.12

중학생

춘천에서 풀꽃을 찾다

최성각

(소설가,환경운동가)

춘천

(풀꽃평화연구소)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2

5.26

고등학생

3

6.2

중학생

용인에서 인생을 보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

용인(천주교묘원)

안성(대안공간소나무)

인생수업

4

6.9

고등학생

5

7.14

중학생

옥천에서 정지용 되다

이재훈

(시인)

충북 옥천

(정지용 문학관)

정지용 시선 /

명왕성되다 

6

7.21

고등학생

7

8.11

중학생

홍대에서 장자와 춤추다

권순엽

(문화평론가)

서울 홍대

장자 동화

8

8.25

고등학생

우화로 즐기는 장자

9

9.15

중학생

원주에서 토지를 거닐다

황재연

(교사)

원주

(박경리 문학관)

토지

10

9.22

고등학생

11

10.13

중학생

무주에서 건축을 말하다

김병욱

(기용건축 소장)

무주 일대

감응의 건축 /

말하는 건축가(영화)

12

10.27

고등학생

13

11.10

중학생

안산에서 국경을 넘다

박채란

(작가)

안산

(국경없는마을)

국경없는마을

14

11.17

고등학생

□ 참가 신청

 ▪ 신청 프로그램

 ► 첫 번째 소풍 - 춘천에서 풀꽃을 찾다

회차

일 시

참가대상

도   서

강   사

장   소

1

5.12(토)

중학생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최성각 지음, 동녘)

최성각 (소설가, 환경운동가)

춘천(풀꽃평화연구소)

서울 출발(08:00) -> 춘천 도착 -> 풀꽃평화연구소 -> 점심식사 -> 저자 강연 -> 자연 체험 활동 -> 서울 도착(19:00)

회차

일 시

참가대상

도   서

강   사

장   소

2

5.26(토)

고등학생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최성각 지음, 동녘)

최성각 (소설가, 환경운동가)

춘천(풀꽃평화연구소)

서울 출발(08:00) -> 춘천 도착 -> 풀꽃평화연구소 -> 점심식사 -> 저자 강연 -> 자연 체험 활동 ->

서울 도착(19:00)

 ► 두 번째 소풍 - 용인에서 인생을 보다

  

회차

일 시

참가대상

도   서

강   사

장   소

3

6.2(토)

중학생

인생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외, 이레)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

용인(천주교묘원)

안성(대안공간 소나무)

서울 출발(08:00) -> 용인 천주교묘원 도착 -> 강연 및 묘원 둘러보기 -> 점심식사 -> 대안공간 소나무 도착 -> 강연 및 자연미술 작품 감상 -> 자연물 만들기 체험 -> 서울 도착(19:00)

회차

일 시

참가대상

도   서

강   사

장   소

4

6.9(토)

고등학생

인생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외, 이레)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

용인(천주교묘원)

안성(대안공간 소나무)

서울 출발(08:00) -> 용인 천주교묘원 도착 -> 강연 및 묘원 둘러보기 -> 점심식사 -> 대안공간 소나무 도착 -> 강연 및 자연미술 작품 감상 -> 자연물 만들기 체험 -> 서울 도착(19:00)

  ※ 향후 프로그램 신청 일정

   - 7월, 8월 프로그램 : 6월 초 신청

   - 9월, 10월, 11월 프로그램 : 8월 초 신청

 

▪ 신청 기간 : 2012년 4월 18일(수) ~ 5월 6일(일)

▪ 신청 방법

   - 신청서를 다운로드 후 이메일(youthpicnic@gmail.com)로 신청

   - 개인 신청서 다운로드(클릭) / 단체 신청서 다운로드(클릭)

   ※ 개별 및 단체(5인 이하) 신청 가능 / 선착순 40명

   ※ 5월, 6월 프로그램만 신청 가능합니다

 ▪ 참가 확정자 발표 : 5월 7일 월요일 오후 5시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홈페이지 공지

 ▪ 출발 장소 : 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 앞 (전세버스로 이동)

 ▪ 참가비 : 1만원 (점심식사 및 입장료 / 현장 납부)

 ▪ 여행자보험

   - 본 프로그램 참가를 위해서는 개별적으로 여행자보험을 가입하셔야 합니다. 기존에 가입하고 계신 보험

     내역을 확인하시고, 반드시 가입 후 참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 기 타

   - 확정된 참가자들에게는 프로그램에 대한 자세한 안내문이 개인 메일로 발송될 예정입니다.

   - 기타 문의 : 사단법인 한국어린이도서관협회(youthpicnic@gmail.com / 02-388-5933)


출처 국립어린이청소년 도서관 :

http://www.nlcy.go.kr/section/board/notice_content.asp?board_seq=3236&page=1&BID=A05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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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욕(無慾)의 명징함을 찾아서

 


조해옥

 

 


1. 이중적 기표로서의 돌

 

돌은 아득히 오랜 시간에 걸쳐 존재해왔고, 멀고 먼 미래에도 변함없이 존재할 것이다. 돌에 축적된 시간의 지속성으로 인하여 돌은 유한한 시간을 사는 인간들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 돌의 불변성과 견고함은 인간이 돌에 신성을 부여하게 된 이유이다. 이재훈 시인의 돌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들을 보면, 그는 돌의 영원한 시간성 외에도 욕망의 권력구조가 주도하는 세상 바깥에서 자신을 초연하게 빛내는 존재라는 점을 발견해내고 그것에 그의 의식을 집중시킨다.
이재훈 시인은 돌에 인간의 욕망을 투사시키고 그 욕망을 실현시킬 대상으로 돌을 대하는 태도를 거부하고, 오히려 돌은 인간 세상과는 무관하게 초월해 있는 하나의 자연물임을 그의 돌 시편들에서 잘 보여준다. 돌은 인간의 욕망의 논리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이라는 것에서 이재훈 시인의 시적 사유가 시작된다. 「돌의 골짜기」, 「돌의 환幻」, 「수난의 돌」, 「돌의 시간」 등 그의 일련의 돌에 관한 시편들에서 돌은 시인이 지향하는 무욕과 자유로움 등이 형상화된 존재로 나타난다.
돌을 매개로 하여 무욕과 탈속을 추구하는 이재훈 시인의 시 의식은 어찌 보면, 세상을 대하는 그의 이분법적 사유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재훈 시인의 시적 자아는 그 자신 역시 세상에 속한 자임을 분명히 인식한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인간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삶의 전제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죽음 제의를 치르는 “주술적 인간”(「주술적 인간」)이 되기도 하고, 돌과 식물과의 동일시를 시도하기도 한다.

 

부러진 돌부리에 채인다
굴러다니는 돌이 아니라
올곧게 서 있다가, 부러진 돌
창과 칼 혹은 바람이
돌의 몸을 반 동강 냈을 것이다
사방이 어둠이었고
나를 길에 내던졌던 사람들의 눈빛만
어둠 속에서 반짝하던 밤들이었을 때
발바닥 돌덩이가 내 존재를 떠받칠 때가 있다
돌이 내 집을 떠받치고,
아버지의 약속을 떠받칠 때
돌 위에 피의 흔적이 있다
돌은 깨져도 죽지 않는다
돌은 썩어갈 육체를 갖고 있지 않아
언제나 채이고 밟히고 놀아난다
돌에 의해 소멸한 것과 태어난 자리가 한 몸이 되는
이 모든 찰나를 지켜본 돌
어둠 속에서 세상이 어지럽게 돌기 시작하면
나는 흔들거리는 운명을 본다
흔적 없이 왔다간
당신의 영혼에 몰래 깃들고 마는 돌
부처의 얼굴도 만들고, 예수의, 마리아의 몸도 만드는
성육신인 돌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
돌로 만들어진 뭇사람 하나
― 「돌의 환幻」 전문

 

시의 화자가 다른 사람에 의해 땅바닥에 내던져졌을 때, 돌덩이가 그의 발바닥을 떠받쳐준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화자가 돌을 알아본다는 것은 의미가 깊은데, 화자와 돌은 세상의 가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자는 왜 버려진 존재가 되었을까? 화자는 “굴러다니는 돌이 아니라/ 올곧게 서 있다가 부러진 돌”과 같은 존재이다. 돌은 화자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며 그가 선택한 삶의 방향의 초석이기도 하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인식의 주체이고, 돌은 인식 대상으로 나타나는데, 화자는 돌과 동일시되는 과정을 거쳐서 돌과 하나가 된다. 각각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인 화자와 돌은 시의 후반부에 이르면,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 돌로 만들어진 뭇사람 하나/ 그 무성한 골짜기의 돌”에서처럼, 주체인 화자와 대상인 돌 사이의 간격이 소멸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의 소멸로 인식 주체인 화자는 대상인 돌과의 동일시를 이룬다. 그것은 버려진 돌, 올곧아서 부러진 돌, 밟히고 차이는 돌에서 화자가 자신의 초상을 발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돌은 그에게 영원한 시간이 무엇인지를, 올곧음이 어떤 것이지를, 다른 존재를 가장 낮은 위치에서 떠받쳐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침묵으로 말하고 있으며, 화자는 그러한 돌에서 숭고함을 발견한다. 돌에 대한 동일시와 숭고한 감정으로 그는 버려짐과 조롱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을 견인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 세상의 논리와 질서 바깥에서 존재하는 돌을 사람들은 온갖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욕망이 투영된 조형물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돌은 사람들의 논리와 관념과는 무관하게 서 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돌,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초월해 있는 돌은 현실에 절망한 한 인간을 무한한 환幻의 세계로 데려다 준다.

 

천 년 전의 시간이 쌓여 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천 년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서서히 시간의 안개가 헤어지고
천 년 아니 이천 년 전의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바람이 굴러다니고 시간이 웅웅댄다
황금도 향수도 없는 땅
돌만 무성하다
옛 책에서는 악마가 산다고도 했다
죽은 이들이 묻혔다고도 했다
아무 냄새도 기척도 없다
그릇된 소문들일 것이다
돌을 밟다보면, 억울한 생각이 든다
밟는 자와 밟히는 자와의 이상야릇한 관계
나는 돌에게 잘못한 적이 없는데
모든 사물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돌이 절벽에 박혀 있다
사람들은 돌 위에 돌을 올려놓고 소원을 빈다
골짜기에 가득한 욕망들
바람은 울고 이따금 새들이 끼룩거린다
― 「돌의 골짜기」 전문

 

천 년 전의 인간들이 쌓아올렸고 현재의 인간들이 여전히 쌓아올리는 행위는 인간 욕망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변함이 없다. 위의 시에서 돌이 켜켜이 쌓아올려진 골짜기는 인간들의 욕망으로 가득 찬 장소라 부를 만하다.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인간은 돌 위에 또 다른 돌을 올려놓으며 기원한다. 그러나 화자는 밟는 자와 밟히는 자의 관계망에 갇힌 인간들의 행위와는 무관한 돌의 본질을 발견한다. 그는 돌에서 유한성과 탐욕과 수직의 논리가 지배하는 인간 세상을 벗어나 존재하는 침묵의 형상을 본다. 욕망의 골짜기에 갇힌 인간 세상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돌은 천 년의 시간을 버텨내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돌은 인간의 욕망을 표현해주는 기표이기도 하지만, 돌의 본질은 인간 세상이 만들어 놓은 궤도와 전혀 무관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무욕의 기표이기도 하다. 시의 화자는 무욕의 기표인 돌을 통해서 인간 세상의 질서 바깥에서 존재하는 생을 꿈꾼다.

 

2. 죽음 제의祭儀로 인간을 이해하다

 

이재훈 시인의 시적 자아는 사람 세상에서 죽음의 제의를 거치고 땅에 묻히고 식물의 세상, 돌의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을 꿈꾼다. 이를 위해 시인은 설화적 시간 속으로 들어가 인간의 질서를 초월하는 주술적 인간을 다음의 작품에서 제시한다.

 

몸에서 흙냄새가 난다
난파된 배에 묶여 귀신들의 비방을 들은 적 있다
바람과 구름은 큰 정적 속으로 빨려 들었다
아이를 잡아먹는 꿈을 꾸고 난 새벽
씨앗이 되고 싶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가
역전에 누워 있는 노숙자들의 눈에 비치고 싶었다
멸시는 인간들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힘
깊은 골짝에 들어가 울며 회개를 하고
다시 인간의 운명을 얘기해도 된다
어떨 수 없이 사악하고
어쩔 수 없이 비겁한 인간에 대해
흉하다 말라
나무와 새들, 구름을 직유하는
언어들은 모두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 것
수난의 권리가 없는 나무들
무책임하게 자라고
때론 무책임하게 시드는 식물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 육체는, 썩으면 파리들과 구더기들의
생명의 성소聖所가 될
내 육체는, 아름다울까
춤이라도 출까
내 육체로 당신의 영혼을 훔칠 수 있을까
듬섬듬성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애써 당신의 운명을 기억한다
― 「주술적 인간」 전문

 

위의 시에서 화자의 내면은 현재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죽음의 시간을 꿈꾼다. 화자는 자신의 “몸에서 흙냄새가 난다”고 자각하는데, 여기에서 화자가 맡는 흙냄새는 매장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을 죽음의 제의 속으로 밀어 넣는다. 스스로 자신의 소멸 혹은 죽음이라는 치명성을 감수하는 화자의 행위는 세상에 대한 그의 부정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화자는 현재 삶에 대한 부정의식을 표출하지만, 죽음 제의를 통하여 인간의 운명적인 삶을 새롭게 인식하고자 한다. 화자가 세상에서 경험했던 인간의 삶은 멸시라는 수직관계의 사회, 사악함과 비겁, 살해 욕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흙에 묻히는 순간은 온갖 부정적이고 혐오스러운 인간 세상으로부터 그가 떨어져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 세상에 대한 화자의 가치 판단을 보여주는데, 죽음은 그에게 염오감으로 가득 찬 세상과의 차단을 뜻한다. 한편으로 화자는 죽음의 제의를 겪으면서 멸시와 사악함과 비겁과 살해 충동은 인간의 운명적 범주에 속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인간 세상을 염오하지만, 세상은 인간에게는 뗄 수 없는 하나의 운명 덩어리이며, 세상이 만들어내는 궤도 안에서 인간은 함께 움직여 나가는 한계적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사람의 세상은 멸시하는 자와 멸시를 받는 자의 수직관계가 주축이 되어 이끌어져 간다. “멸시는 인간들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힘”이라는 것을 시의 화자는 자신의 죽음 제의를 통해 깨닫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인간 세상의 부정적인 질서와 체계를 수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씨앗이 되어 수직의 사회구조에서 최하층에 속하는 노숙자의 눈에 비치는 식물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식물들은 멸시와 권리와 수난과 책임이라는 촘촘한 그물이 쳐진 사람 세상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운명과 분명히 다른 궤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 즉 나무를 비롯한 식물의 세계를 의식적으로 지향한다. “수난의 권리가 없는 나무들”은 수난이 끌고 들어오는 덩굴 줄기들인 고통과 공격과 희생 등의 말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또한 “무책임하게 자라고/ 무책임하게 시드는 식물들”은 무책임의 상대어인 책임이 연상시키는 말들인 의무, 부양, 짐, 회피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보여준다. 따라서 화자가 죽음의 시간 속에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더불어 그가 지향하는 세상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나무 혹은 식물이 상징하는 욕망으로 충돌하지 않는 세상, 자유로운 세상이다. 식물은 인간 세상의 궤도 바깥에서 자라고 시드는 자기의 시간을 자유롭게 누리는 존재들의 세계이다.

 

배에 묶였네. 거친 물결을 헤치는 밤이네. 빛을 따르지 않는 시간들. 어떤 질서도 나를 잡아둘 수 없네. 나는 결박당한 존재로 남고 싶지 않네. 비열하고 음란한 무리들과 거래하고 싶지 않네. 과오를 자랑스레 떠벌리는 사람들. 턱을 괴고 앉아 당신의 이름을 떠올렸네.
…(중략)…
황금지팡이를 들고 죽은 자들의 영혼을 불러 모으고 싶네. 당신을 안으려 했지만, 연기처럼 내 몸을 훑고 떠나갔네. 이제 그림자만 남은 당신의 흔적. 햇살이 돋아야만 기억이 눈에 차오르네. 인간을 떠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삶이라니. 수많은 돌 틈에 내던져진 몸이 있네. 한 천 년 굴러도 이름 없는 몸이 있네.
― 「수난의 돌」 부분

 

위의 시에서 비열함과 음란함과 과오의 과시로 점철되는 사람들의 세상과 자유로운 돌의 세상이 양립해 있다. 자유로움을 얻고자 하는 화자는 ‘∼하고 싶네’ 또는 ‘∼하고 싶지 않네’라는 분명한 어조로 자신의 의지로 사람 세상을 대할 때의 염오감과 자신의 결기를 표현한다. 그는 세상에 대해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그에 따라 판단하고자 한다. 그러한 자신의 선택이 수난을 초래할지라도, 그는 인간 세상을 벗어나 새로운 궤도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인간은 사악하고 비겁하고 탐욕스러움이 만든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 같은 삶의 질곡을 이재훈 시인의 시적 자아는 인간의 운명으로 이해한다. 그는 흙 속에 묻히는 죽음의 제의를 거쳐 인간 세상 바깥에서 존재하는 식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한다. 그는 또한 빛이 나지 않는 존재, 맞고 깨지고 터져도 결코 굴하거나 소멸하지 않는 견고한 존재인 돌과의 동일시를 이룬다. 그는 시인의 시적 자아가 직접 의지에 찬 어조로써 성스러운 육체인 돌의 “이름 없는 몸”이 되기를 희원한다.

 

3. 신성한 땅의 별

 

돌은 문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으며, 파괴의 도구도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돌의 쓰임새들은 돌의 본질과는 무관하다. 돌은 만물의 어머니이고, 아기이고, 집이고 별이다. 다음의 작품에서 시인은 돌에서 만물을 낳은 어머니를 발견해 낸다. 무한시간의 돌에서 인간들이 태어났다면, 인간 역시 신화적인 돌의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아득히 짐승의 울음이 들리는 듯한 돌, 피의 온기가 느껴지는 돌은 지상에 떨어진 별조각이다.

 

돌은 투명하다
그 몸에는 연혁이 없다
돌 위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돌을 욕되게 하는 것
돌은 인간 이전의 사물
기원을 알 수 없는 시간이다
…(중략)…
모든 존재는 돌에서 태어난다
돌을 던지면 울음이 들린다
돌이 땅에 던져지면 마치 아기처럼
온몸이 땅속에 안긴다
돌을 깨고 나온 사람들
돌로 된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돌을 하늘에 던지면 그저
별이 된다
― 「돌의 시간」 부분

 

이재훈 시인은 현대문명 속에서 소멸해버린 신화 속의 돌, 즉 인간을 초월하는 지상의 별인 돌을 통해 삶을 견인하고자 한다. 그에게 돌은 새로운 믿음의 대상인 것이다. 신화가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꿈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탄생하고 생명을 지속하였던 것처럼, 시인은 누구도 알아보지 못 한 돌의 신성을 그의 시에서 되살리고 싶어 한다. 신성한 지상의 별인 돌은 이재훈 시인이 추구하는 무욕의 삶을 명징하게 드러낸 사물일 것이다.

 

_ <시사사>, 2012년 3~4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

식육과 형벌의 세계를 견디는 날들

 

 

조동범

 

 


1. 실로Shiloh, 팔레스타인 그리고 상징들

 

팔레스타인의 옛 도시인 실로Shiloh의 의미는 ‘평화를 주는 자’, ‘의로운 메시아’이다. 실로는 유대인 정착촌이 있는 곳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의 협약을 통해 실로를 비롯한 유대인 정착촌을 철거하기로 했다. 실로는 불행한 과거의 이야기이자 하나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한다. 이재훈의 실로는 아픈 역사와 공간을 모티프로 삼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보편적인 상징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정치성과 무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정치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도 않는다. 시인은 실로의 아픔과 상처의 이미지를 보편적인 감각으로 전환시킨다.
일단 실로의 의미를 파악한 독자의 마음은 팔레스타인의 옛 도시인 실로에 머물게 되지만 시를 통해 받아들이게 되는 세계는 실로를 포함한 모든 상처와 아픔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작품 안에 펼쳐진 세계는 실로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토로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로의 역사적 의미가 완전히 무화된 것은 아니다. 실로는 제목만으로도 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상처와 아픔에 절심함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상처와 아픔의 절실함을 드러내는 시의 제목은 작품과 결합하여 상징의 깊이와 절실함을 획득한다.

 

스스로 빛을 내는 작은 길. 사연 깃든 머리핀이 떨어진 길. 얼굴에 분칠한 채 누군가를 배웅하는 길. 홀로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사람들.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들은 속되다. 제 몸을 고이 닦고 닦아 원색으로 세상과 마주하는 동물들. 깃털처럼 가벼운 스케치의 존재들. 앉아야 할 자리를 잃고 떠다니는 먼지 같은 마음들. 여러 갈래의 작은 길들이 가득하네. 흐드러진 꽃들이 마음에 툭, 쌓이는 길. 꽃이 혀를 내밀어 길 위를 맛보는 시간. 나는 세상에서 약속한 일들을 생각하네. 밤의 기나긴 뜨락에서 마주친 불빛 한 점. 나방을 혐오하지 마라, 그에겐 불빛이 모든 이유다. 저 길도 그럴까. 어둠 속이 모든 이유라고. 언제부터인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이 좋았네. 언제부터인가 정돈되지 않는 것들만 날 감동시키네. 여러 갈래의 좁은 길이 날 끌어당기네.
― 이재훈, 「실로Shiloh」 전문

 

그곳에 “작은 길”이 있다. 그 길은 “사연이 깃든 머리핀이 떨어진 길”이며 “얼굴에 분칠한 채 누군가를 배웅하는 길”이다. 「실로」의 공간은 “길”이며 그 길은 도달하고 싶은 곳과 연결되어 있다. 시인은 “여러 갈래의 작은 길”이 “흐드러진 꽃들이 마음에 툭, 쌓이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쩌면 실로를 향해 가는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이 호명한 길은 실로로 향해 있는 실제의 길이 아니다. 시인은 실로라는 제목 아래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길을 드러냄으로써 길이 환기하는 아름답고 애틋한 정서를 극대화한다. 「실로」는 이러한 양자의 감정 상태에 놓임으로써 이율배반이 전달하는 시적 감흥과 긴장을 극대화한다.
또한 실로로 향하는 공간인 길에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은 “홀로 자리를 깔고 앉아” 있으며,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럽게 흐느껴야 하는 격한 감정보다 관조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실로의 공간인 길이 비극을 환기하는 길이 아닌 것처럼 길 위의 사람들 역시 세계를 연민의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조적 태도는 길의 이미지와 어우러져, 실로로 대표될 수 있는 비극적 세계까지 끌어안을 수 있게 된다.

 

_ <시사사>, 2012년 3~4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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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포엠포엠> 봄호 VOL53 특집
기획특집 시인을 만나다 36

 

이재훈 시인

 

 

때 : 2012년 1월 2일 6시 30분 합정동 카페 <아이두 IDO>
탐방진 : 김안, 한정원. 정훈

원고 정리 : 한창옥

 

 

요즘은 지나간 흔적을 되살리는 것이 트렌드다. 부드럽지만 도발적인 그의 작품 속으로 조용히 빠져들게 하는 이재훈 시인을 빈티지풍의 카페 지하벙커에서 만난다.
매서운 칼바람은 아니지만 소한을 앞둔 차가운 날씨다. 어둑어둑해지자 부산에서 올라온 본지 편집부 정훈 평론가, 한정원 시인, 그리고 현대시 편집장 김안 시인과 오늘 주인공 이재훈 시인이 들어선다. 모두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난로 불에 몸을 녹인다. 모처럼 서울에 올라온 정훈 평론가가 서두른다.

 

- 이재훈 선생님, 새해를 맞이한 느낌이나 계획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새해 계획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아내 지인의 집에 놀러갔다 마지막 날과 새해를 아이들과 놀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해를 정리하고, 새해에는 어떻게 해야지 하는 계획을 갖지 못하고 지나버렸어요. 지난주에는 연말이라 모임이 많았고요. 이제 좀 천천히 지난 한 해를 돌아봐야겠습니다.(미소)
올해 초에는 평론집을 한 권 낼 계획입니다. 2011년도에 시집 <명왕성 되다>를 냈고, <나는 시인이다>라는 인터뷰집을 출간했습니다. 평론집 원고도 준비가 다 되어 있었는데 한 해 책을 세 권 내는 것은 무리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 미뤄왔죠. 그동안 이리저리 시집 서평이라든가 문예지 계간 평이라든가 기획특집 글들을 시인의 입장에서 써왔습니다. 평론집을 정리하고 2012년 봄학기를 맞아야겠지요. 특별한 삶의 변화가 있지 않는 한 순간순간을 누리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대학에 강의를 나가고, <현대시> 잡지를 만들고 그러한 삶이 반복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평론집은 언제쯤 어느 출판사에서 나옵니까?

 

3월내로 계획 중입니다. 출판사는 아직 정하지 못했고요. 제목도 새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겨울에 수정, 퇴고를 할 생각입니다.

 

- 작년에 출간된 시집은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예도서로 선정되었고, 대담집은 문화관광부 올해의 교양도서가 되었는데요. 옆에서 보면서 이런저런 결실을 많이 맺는 한 해였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특히 대담집을 보니 그 안에 있는 텍스트 하나하나가 오랫동안 시를 쓰면서 지내왔던 형의 삶의 이력같이 느껴졌습니다. 형은 지난 한해를 바라보면서 어떤 느낌이 드는지 궁금합니다.

 

점점 이 일이 작년 일인지 재작년 일인지 3년 전 일인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그런 거 있죠. 크리스마스 때 뭘 했는데 작년에 했던 것인지 재작년에 했던 것인지 헷갈리는 거요. 그래서 작년 한 해가 그 전 해보다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첫 번째 시집을 내고 6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이 나왔는데 두 번째 시집을 출간했다는 것이 의미일 것 같고요.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 같은 경우는 2001년부터 근 10년 동안의 시인들을 만나온 기록이기에 저의 문학적 일기처럼 느껴지죠. 왜냐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났을 당시의 추억이 떠오르고 어떻게 만났고, 어떤 이야기를 했고, 술자리를 어떻게 가졌고 이런 것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거든요. 원고를 모아놓고 나니까, 지난 10년 동안의 문학 활동이 파노라마처럼 스르르 지나가면서 대담집이 제게는 하나의 문학앨범이 되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두 책을 출간한 것이 가장 큰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 창작과 강의, 문학연구 이런 활동을 오랫동안 병행하면서 정신없이 성실하게 살다보니 그런 생각이 드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문학에 빠지다보면 가장이나 남편으로서 역할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 양쪽 다 성실하게 잘 하시는 바람직한 한국의 남자나 아버지의 모습을 제가 잠깐 보게 되었는데요.

 

아니요. 사실 제가 아버지나 남편으로서 점수가 상당히 낮은 편입니다. 집사람에게 미안하죠. 항상 비판을 많이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성실한 가장은 되지 못합니다.

 

-그게 달콤한 비판으로 느껴지는데요.

 

아닙니다.(웃음)

 

- 대담집 말씀하실 때에 10여 년 동안 꾸준히 준비해 오셨다는데 특별한 에피소드나 기억에 남는 게 있습니까?

 

대담집을 내고 제가 인터뷰를 몇 번 했거든요. 이 찻집에서도 대담집을 출간하고 인터뷰를 했어요. MBC DMB의 <내 손 안의 책>이라는 프로그램에서요. 인터뷰할 때 항상 받는 질문인데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다 에피소드 하나 정도는 있을 겁니다. 만난 장소도 다 다르니까요.
찻집에서 우아한 시간을 보내며 만난 분들도 있고, 술부터 먹기 시작해서 대담을 어떻게 했는지 나중에 정리하기 힘들었던 경우도 있고요. 시인들도 직업군이 다양하고, 각각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니까요. 또 시인들이 에고가 세죠. 자기 자존이 센 분들이라 만나면 대립각을 맞추는 게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술을 함께 마시며 긴장을 풀어야 되는 그런 부분이 종종 있어요. 아무튼 시인들마다 하나 정도씩의 에피소드는 다들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대담을 통해 의미있는 대답이 된 것들이 있죠. 이미 돌아가신 선생님들과의 대담이 그러한데요. 지금은 그 선생님들의 육성을 들을 수 없으니까요. 김춘수, 오규원, 박찬 선생님들은 지금 고인이 되셨죠. 이 분들과의 대담에 얽힌 얘기들은 다른 지면에서 많이 얘기를 했어요.

 

- 말씀을 잘 해주셔서 시간가는 줄을 모르겠습니다. 인터뷰어로 많은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인터뷰이로서의 역할도 잘 하시는 것 같습니다.(웃음)

 

왜냐하면 분량을 알거든요. 말을 너무 짧게 하거나 너무 길게 하면 힘듭니다.(웃음) 적당히 한 시간 정도가 좋아요

 

- 인터뷰하는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는 따뜻한 품성의 소유자란 생각이 듭니다. 뻔한   질문이겠지만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2005년도에 나왔고, 지난해 2011년에 <명왕성 되다> 시집이 나왔어요, 6년 정도 시간의 간격이 있는데 첫 시집하고 시세계가 달라진 면이 있다든지 혹은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의 시세계가 변화된 부분이 있나요?

 

달라진 부분이라고 한다면, 전체적인 시세계의 성향은 비슷한 면이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신성에 대한 욕망, 시원에 대한 갈망, 이미지들을 신화적 상상력으로 구현하려는 몸짓. 이런 부분에서는 일맥상통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첫 번째 시집보다 두 번째 시집에서 구체적인 일상인으로서의 자아가 많이 들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까요.
첫 시집에선 제가 가지고 있는 주도적인 시세계를 주로 표출하려고 했죠. 그러다 보니 일상인으로서의 자아가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요. 시집 준비를 오래 하다보니 자기검열이 너무 강해져서 100여 편의 발표작 중에 44편만으로 시집을 묶었어요. 자연스럽게 색깔있는 시들만 묶여지게 되었죠. 두 번째 시집에서는 그런 것들을 이어가되 일상인으로 겪는 자아의 성찰이 첫 시집에 비해서 조금 더 많이 드러났다고 생각해요. 
첫 시집에서는 시적자아가 우주나 공허, 하늘을 유영하는 자아가 많은데 두 번째 시집에서는 도시라는 문명의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일상인의 모습이 많이 투영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조금 달라진 점이 있지 않을까요.

 

- 첫 시집은 우주, 하늘과 같은 높은 데 떠 있었다면, 두 번째 시집은 낮아졌다, 땅으로 내려왔다는 평이 있던데 동의하시는지요?

 

예, 그런 부분이 있죠. 제가 시골 태생인데, 고등학교 때까지 시골에서만 살았어요. 첫 시집 낼 때까지만 해도 도시에 대한 성찰이나 자의식이 그렇게 크지 않았죠. 오히려 도시는 막연한 동경과 환상의 대상이었어요. 그런데 도시에 산 지 20년 가까이 되다 보니 도시의 환상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심하게 겪었죠. 도시에 대한 성찰이 30대 후반에 비로소 생긴 거 같아요.
하지만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다보니 도시를 떠날 수 없는 버거운(?) 삶이 되었죠. 도시는 제가 발 딛고 살아가야만 하는 필연적인 공간이 된 거죠. 예전에는 정신의 휴식을 외적인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으로 해소했다면, 이제는 도시 속에서 어떤 은둔처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보니 도시 속에서 산책자로서의 자아가 자연스럽게 투영이 되었고, 이런 시들이 주변 시인들이나 독자들의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봅니다.

 

- 첫 번째 시집의 시적 화자가 이 거대한 도시를 하릴없이 배회하는 산책자의 모습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의 시적 화자는 <안드로메다 바이러스>에서 보듯 이 피비린내 나는 행성에 불시착한 외계인과 같은 느낌이었어요. 특히 1부에서 이런 시적 화자가 도드라져 보이고, 2부에서는 <대황하> 연작에서 보듯 특유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쓰인 느낌이었어요. 시집의 차례를 구성하는 데 거대한 그림을 그린 것이 느껴집니다.

 

저는 기승전결의 구성보다 3부작이 편해요. 4부가 되면 머리가 복잡해져서 그런 구성을 했는데 김안 시인이 이야기한 것처럼 그런 의도를 가지고 했습니다.

 

-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를 말씀하시니까 생각이 나는데 시를 읽다보면 SF영화도 떠오르는데 영화를 많이 보시는지요?

 

영화를 좋아하지만 많이 보는 편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라는 영화를 본 적은 없어요. 제가 시의 초고를 써 놓고 시의 제목을 어떻게 붙일까 고민하던 중에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라는 용어가 제게 온 거죠. 아주 매력적인 용어였어요. ‘명왕성 되다’ 처럼. (웃음)

 

- 빗나가는 질문인데 외계인이 있다고 믿으세요?

 

있겠죠. 없다면 너무 재미없잖아요.(웃음)

 

- 네. 그렇죠. 이재훈 시인은 믿을 것 같습니다. 종교가 있나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체험 신앙을 갖고 계신 분이어서, 신앙에서만큼은 엄청 엄하셨어요. 그래서 억압이 많았죠. 사춘기때 직접 반항은 못했지만 내적 방황을 많이 겪었어요. 학창 시절에 문학책보다 신학 서적을 더 많이 읽었습니다. 기독교계통의 어린이 잡지도 많이 읽었고요. 지금 우리의 기독교는 상당히 보수적이고 완고한데 그런 부분에 좀 답답함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요.
제 시에서 기독교 성향이 있다고 하는데, 전통적으로 말하는 기독교라기보다 배교적인 느낌을 짙게 깔아놓은 신비주의적인 성향이 많아요.

 

- 시의 표현기법이 상당히 독특한데요. 종교적인 표현에 특별한 기율이 있을 거 같거든요.

 

특별한 기준은 없고 아마 독서체험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학창시절 신앙에 대한 고민이 많아서 고등학교 때부터 20대 전체를 신(神)에 대한 갈등과 방황으로 점철했었죠. 아직 끝난 것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해방신학이 유행되었거든요. 일반 기독교에서는 이단이라고 하는데, 그쪽에도 꽤 깊게 침윤되어 있었구요. 에큐메니칼(Ecumenical)이라고, 구원의 일방성에 반기를 드는 상당히 파격적인 신앙관을 기웃거리기도 했죠. 기독교에서는 인정을 안 해 주는 교리죠. 제가 그동안 체험했던 기독교와 너무 달라서 충격을 받았어요. 호기심이 많았던 거죠. 성경도 장자의 얘기가 아닌 서자의 얘기에 관심이 많았구요. 비교도, 그노시즘에도 관심이 있었죠. 아주 성스러운 신과 악마가 공존하는 세계가 매력적이었어요. 그런 관심들이 언어적으로 내면화된 것 같아요.

 

- 첫 시집에서 크고 광대한 세계를 그려나갔고, 이는 두 번째 시집에서 이어집니다. 이 두 시집에서서 시의 길이가 길어지고, 시의 호흡 역시 빠르게 가지기보단 묵직하면서도 느리게 나가는 것은 형이 말하고자 하는 시적 세계의 스케일 때문이라고 느꼈어요. 요즘 젊은 시인들이 빠른 호흡을 하고 시행과 행 사이의 간극을 벌리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천천히 시선을 옮아가며 크고 무거운 걸음을 한 발 한 발 내딛는 거인의 발자국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래서인지 박수연 선생님은 형의 시세계를 언어적 낙관주의라고 하면서 명징한 상징과 운율을 거느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시의 작법상의 문제와 이 작법이나 스타일들이 시적 세계관과 연관되는 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쓸 때는 작법을 의식 안하고 씁니다. 이런 생각은 하죠. 어떤 세계를 그려내야 된다는 것. 길이나 분량이나 처음에는 의식을 안 하죠. 작법이나 스타일을 정해놓고 쓰는 시인들이 많은데 저는 방목하는 스타일입니다. 시의 스타일은 운명처럼, 그 시에 맞춰 생성되는 것 같아요. 태생적으로 길어야 하는 시가 있고, 짧아야 하는 시가 있는 거죠. 우선 아직까지 컴퓨터에 시를 못 써요. 노트에 시를 쓰고 그것을 컴퓨터로 옮겨 쓰면서 퇴고하는 스타일인데요. 노트에 쓰다보니까 분량에 대한 감이 잘 안 오더라고요.
저는 하나의 대상물을 깊게 파헤쳐서 써내는 인내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하나를 바라보면서 다른 곳으로 자꾸 확장시키고 싶은 시적 욕심이 있어요. 꽃을 봤다면 꽃 속으로 들어가서 우주로 확장되거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거나 확장되는 그런 생각들이죠. 이런 시적 전개가 시의 스타일에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그런 식의 시적 전개가 자연스럽게 몸에 밴 부분도 없지 않겠죠.

 

 

- 첫 시집의 시적 화자는 혼자 배회하며 도시와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시집의 시적 화자는 자신이 보는 것에 대한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안드로메다 바이러스>에서 지금 이곳에 대해 ‘피비린내 나는 행성’이라 지칭하는 것과 같이, 지금 이 도시에 대한 나름의 가치판단들이 보입니다. 이는 어쩌면 세상을 보는 시인의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음 시집에서 이런 부분이 더 강해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저는 <명왕성 되다>라는 시집에서 엄살을 피울 만큼 피웠어요. 문명인으로서 겪는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너무 적대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그런 자기 진술들이 너무 많이 나오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들게 산다고 엄살을 부렸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요.
이제는 이 도시를 사랑할 수는 없어도, 적절한 거리만이라도 유지하자는 생각입니다. 너무 도시에 밀착되어서 도시 속에 푹 파묻혀 살아가기보다 도시를 빠져나와서 바라봐야겠어요. 제 스스로 엄살이 아닌 날 선 시각으로 느껴진다면 되는 거죠.

 

- 제가 보기에는 엄살 부린다기보다 현대인의 도시생활을 대변을 해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면적으로 한 번은 거쳐야 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두 번째 시집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2부입니다. <대황하> 연작과 그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시들에 애착이 있고, 2부의 시를 배열하면서 나름대로 기획을 했어요. 그런데 2부의 시적 세계가 부각이 안 되더라고요. 2부에 있는 시적 부분들을 세 번째 시집에서는 조금 더 확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 첫 시집이 도시라는 미로에 갇힌 느낌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도시를 멀리서 관조하면서 스스로의 시선을 획득했기에 변화의 지점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2부에서 보이는 시인 이재훈만의 광활한 시세계는 첫 시집과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에 대개의 독자들이 1부에서의 변화된 지점에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래도 변화된 지점을 이야기하다보니까 그렇겠죠. 왜냐면 첫 번째 시집을 냈을 때도 세간의 평가가 신성이나 신화적 상상력, 욕망에 대한 얘기, 낯선 낭만주의적 색채 때문에 변별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왔잖아요. 두 번째 시집은 첫 번째와 어떤 변별점이 있을까 찾다보니까 그런 맥락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요.

 

- 주제를 돌려보겠습니다. 시와 평론을 겸하시면서 느꼈던 점이 있을까요? 시를 쓸 때와 평론이나 논문을 쓸 때 갈라지는 부분이 있는지. 행복하게 일치하는 순간이 가장 좋겠지만요. 산문하고 운문하고 다른 점이 있다면요?

 

저는 평론을 간간히 쓰면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시들을 분석적으로 바라볼 때 또다른 시의 모습을 보게 되거든요. 제 가치판단의 흔적들이 정리가 된다는 느낌도 있고요. 하지만 이제 평론을 조금만 쓰려고 합니다. 제 비평언어의 한계도 느껴지고, 시 쓰기에 좀 더 집중하고 싶어서죠.
시의 언어와 평론의 언어는 많이 다르죠. 정서가 지배하는 글과 이성이 지배하는 글의 차이니까요. 평론과 시를 함께 쓰면 이런 글쓰는 주체의 모드를 교체해야 되는 부분이 힘들어요. 그런 부분들 때문에 평론 쓸 때는 시가 잘 안되죠. 우선 저의 정체성은 시인이니까. 시 쓰기에 좀 더 중점을 두어야 되겠지요.

 

- 평론 쪽은 더 확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시군요?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제 지식의 한계를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써봐야 좋은 글이 나오리라는 확신이 안 들어요.

 

- 늘 공부를 하시고 계신데 겸손한 말씀이십니다.

 

아닙니다. 아직 해야 할 공부가 많습니다. 그동안 못 읽었던 책들을 읽으면서 내공을 더 다져야 합니다.(웃음)

 

- 지금까지는 선생님의 시 세계와 시를 바라보는 관점들을 다양하게 말씀해 주셨는데, 시 외부의 객관적인 시 조류라고 할까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요즘 시들이 상당히 어렵거나 시인조차 안 읽는 시가 많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반 독자들은 처음에 감동받았던 서정시 성향의 시를 계속 읽는 경향이 있고 시인들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일관된 색깔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시인들이 시를 쓸 때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독자를 염두할 필요가 있는데요. 시인과 독자들이 행복하게 만나기 위해 일치하는 지점, 그런 부분을 생각한 게 있다면요?

 

모든 시인이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까요. 미래파 이후로 평단에서 근 몇 년 동안 소통과 난해함에 대한 담론들이 오갔는데, 저는 시라는 다양성을 이해한다면 문제될 게 없다고 봐요.
음악에 빗대어 보자면 많은 대중들이 사랑하는 음악이 있는 것이고 소수의 마니아들이 사랑하는 음악이 있어요. 록과 헤비메탈은 다수의 대중들보다는 소수의 대중들이 늘 좋아해 왔죠. 트로트나 발라드는 전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장르이고요. 시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소수의 마니아들이 즐겨 읽는 시가 있어요. 낯선 언어 운용이나 기존의 시관으로는 전혀 해석이 되지 않는 그런 시들을 오히려 더 즐겁게 읽는 소수의 독자들이 있는 거죠. 따뜻한 서정시는 많은 독자들이 읽고 호응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독특한 개성을 가진 시인들이 대중들에게 더 읽히기 위해서 시를 쓸 수는 없죠. 그렇게 되면 자기 예술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잖아요. 자신이 가장 가고 싶은 시의 길을 가다보면 독자들과의 행복한 만남은 언제든 이루어진다고 봐요.

 

- 저 개인적으로는 어려운 시, 난해시, 해석이 안 되는 시, 이런 모든 시조차도 문예사조에 기여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럼요. 시마다 다 운명이 있는 거죠. 시마다 개별적으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지만, 이해 못하는 사람이 당연히 있죠. 모든 사람이 어떻게 다 이해를 해요. 그런 부분들 때문에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시인들의 창작에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지 않나 싶어요. 오히려 일반 대중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는 오만한 태도죠. 대중들은 늘 현명하게 변화합니다. 대중의 눈치를 보는 시는 대중에게 가장 먼저 들킬 겁니다.

 

- 지금까지 말씀해 오신 시의 색깔이라고 할까 지금 상황으로서는 계속 견지해 나갈 것이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네. 계속 가야죠. 제가 바라보는 시적 세계관이 한국 시단에서는 관심이 적은 부분이라고 봐요. 저는 그런 세계가 몸에 맞아요. 하지만 다양하고 새로운 시의 방법론을 통한 변화가 담보되어야겠죠. 개인적으로는 시집의 권수보다 의미있는 시집을 내고 싶습니다.

 

- 혹시 본받고 싶은 시인이 있습니까? 생존시인이든 작고시인이든. 아니면 주목할 만한 시인이라도?

 

그것은 말하기가 곤란하네요.(웃음)

 

- 이런 것일 수도 있나요? 시는 좋은데 실제 행동거지를 보고 너무 실망을 한 거요.

 

그런 경우도 있죠. 그러나 기본적으로 시인들은 다 괜찮은 사람들이에요. 시인들은 워낙 자기세계가 뚜렷하고, 그만큼 욕망이 강해요. 어떠한 세속적인 부를 갖다 주는 장르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작품에 대한 욕망이 더 강한 것 같아요. 좋은 작품에 대한 욕망은 순수한 욕망인데, 그 욕망이 술자리에서 세속적인 형태로 보일 때는 싫어지죠. 하지만 이 사람들이 아니면 누구한테 내 시를 이야기하고 고민을 하겠어요. 시를 버리지 않는 이상, 평생 보고 지낼 사람들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애증의 관계이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시인들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 <재킷을 입은 시인>이라는 시도 있지만 시인이 가져야 할 영혼의 옷, 시인이 입어야 할 옷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너무 피상적이지만 질문이 됐지만)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왜냐면 자칫하다간 상당히 계몽적인 얘기가 될까 봐서. 시인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조심스럽네요.
시인마다 다른 개성을 가져야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아주 소수가 가진 개성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죠. 비평가도 마찬가지이고요. 비슷한 옷을 유행처럼 입고 다니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만 바라보며 거기에 대한 이야기에만 집중하는 것도 문제죠. 촌스럽고 남들이 입고 다니지 않는 옷을 입고 다니는 시인들도 바라봐야 하겠고요. 시인들은 자신의 시에 대해 당당해야 합니다.

 

- 페루나 중국 황하에 가보셨어요?

 

못 가봤어요. 못 가보고 상상으로 쓴 거죠. 그동안 정보로만 알던 곳에 대한 상상. 그리고 너무 큰 자연을 보면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 자연에 압도될 것 같아요.

 

- 2부에 있는 <대황하> 연작에서 그려지는 물은 기존의 물에 대한 상상력을 초월한 것 같아요. 이 물은 생명을 잉태하는 물이 아닌, 파괴되고/하고, 시체가 즐비하고, 무언가를 더럽히는 물이란 느낌이 강해요. <대황하> 연작 앞에 놓인 <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에서 이미 <대황하> 연작의 물이 일반적 속성의 물이 아니라고 언명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대황하>의 물은 수평적으로 흐르는 물이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지고 침잠하는 물이란 느낌이 강해요. 넓게 퍼지는 물이 아닌 더 깊은 곳으로 곤두박질치는 물과 같은 느낌 말이죠. <대황하> 연작을 쓸 때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썼는지 궁금해요.

 

대황하 끝 시편에 물길이 솟구친다고 표현했는데, 물은 아래로 흐르는 게 속성이잖아요. 이유 없이 물길이 솟구칠 수는 없죠. 어떤 압력에 의해서든지 물길이 솟구치는 것은 이유가 있는 거죠. 또 황토물이라도 우리는 그 물을 마시고 살아야 해요. 그 물이 생명을 주고 문명을 이루고 어떻게든 사람에게 정서를 주고 그 속에서 구원자를 만납니다. 더럽지만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물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물에 대한 상상력이 워낙 흔한 거잖아요. 흔한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물이 아닌 누런 물길을 상상한 거예요. 대황하는 문명을 이루는 거대한 물줄기인데, 이 줄기를 통해 내면을 표출해보고 싶었죠. 사람들이 대황하를 엿보면서 어떤 생각들을 할까 궁금하기도 했고요.

 

- 태아 때의 양수를 언급하시는 것 같아요.

 

네. 몇 년 전 친한 대학 동창이 하늘나라로 갔던 일이 떠오릅니다. 친하게 지냈던 몇 동창 중 한 명이었어요. 갑자기 독감으로 병원에 들어갔다가 뇌사상태가 되어 이승을 등졌죠. 그 친구 뼛가루를 인천 바다에 뿌려주었는데, 그 이야기가 대황하 4편에 나와요. 그날 비가 왔거든요.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바닷가에 뼛가루를 뿌리면서 물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이 가장 먼저 만나고 많이 만나는 물질이 물이잖아요. 양수에서부터 물의 질감을 느끼잖아요.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란 말도 생각났고요. 물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오랫동안 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친구의 죽음도 쉽게 떠나지 않았고. 그래서 물에 대한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 2부 마지막 시 <북극의 진화>에서 “거칠게 울고 우는 소리만 가득하다./ 인간의 소리만 가득하다./ 모든 것이 까마득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대황하> 연작의 물들이 가진 황량함과 소멸에 대한 느낌을 정의내리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이런 시선은 1부에서 그려낸 생활이 이루어지는 도시의 속성과 연결되는 것 같아요. 도시와 황하, 이 둘 사이의 연계점들이 보였습니다.

 

마지막 시에는 “소멸이 내 먹는 밥이다”라고 했죠. 해설을 쓴 조강석 선생님이 ‘소멸의 총아’란 말도 썼고, 키에르케고르랑 이재훈을 ‘VS’로 대결시킨 사건이 되기도 했죠. 시를 쓸 당시엔 도시가 육체적 거소라 한다면, 황하는 정신의 거소라고 생각했어요. 규정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소멸은 꼭 말하고 싶었던 거죠. 결국 소멸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말이죠. 소멸이 창조의 에너지를 낸다는 걸, 몰래 말하고 싶었을까요.

 

- 첫 시집이나 두 번째 시집에 존재, 실존에 대한 시들이 유독 많아요. 존재하는 것, 존재 되어지는 것, 구원을 말하는 것은 곧 그것을 잉태한 시원에 가 닿고자하는 몸부림이죠. 그런데 이는 시인이 평생 풀어가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문제를 시의 중심 테마로 선정해 작업해 나아갈 때는 자연스레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 사이에 변화의 지점이 생길 것 같아요. 형 나름대로의 존재의 시원에 가 닿고자하는 것, 혹 구원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무엇일까요?

 

아마 평생 가져가야 할 화두겠죠. 시 쓰는 자아의 삶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관심사가 변하면 다른 형태로 드러나겠지만. 첫 시집이 탐구의 방향을 선언적으로 보여준 시집이었다면, 두 번째는 이런 바탕 속에서 시인의 내면이 등사기처럼 비춰졌던 거고요. 세 번째는 다른 방식으로 이러 질문들이 내면화돼서 표출이 되겠죠. 제가 구원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다면, 벌써 새로운 종교의 교주가 됐겠죠. (웃음)

 

- 선생님이 엄살을 많이 피웠다고 말씀하셨는데 <비비디 바비디 부>에서 ‘블랙데이’, ‘피’ 나중에는 ‘이탈자’, ‘탈락자’ 이런 말로 엄살을 피우지만 결국은 선생님은 살아남은 자, 큰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성공한자가 아닌가.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어요.(웃음)

 

- 저는 남들 경쟁할 때 멀리서 보면서 저러고들 있네 해요.(웃음)

 

그런 생각은 안 해봤고, 저는 경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자죠.

 

- 그거는 한수 위라는 거네요.

 

참여하지 않으면 이탈된 사람이거든요. 시에는 그런 자아가 나오죠. 참여를 해서 어떻게든지 뭘 얻어야만 뭔가 남는 자들보다 나은 자가 되는 건데요. 거기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이탈자 시선이 있죠. 소외되고 이탈된 자이긴 하지만 멋있고 싶었던 거죠. 사실 제가 철이 없어요. 참여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멋있게 보고 싶었고, 참여하지 않는 자의 엄살을 멋있게 떨고 싶었겠죠. 자책하거나 열등의식에 휩싸이는 모습을 내가 스스로 버렸다는 것. 그런 자아가 되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거 같아요.

 

- 경쟁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감이 큰 거죠. 자신감이 없다면 참가하지 않는 것도 실천의 한 방법인데, 자신감이 없다면 그런 실천이 나오지 못했겠죠.

 

그런 건가요? 자신감인지는 몰라도 경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요.(웃음)

 

- <재킷을 입은 시인>은 작가의 어머니의 아련한 모습이 떠올랐어요. 쉽게 읽혀지면서도 내면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더군요. 아픔이 묻어났어요. 어머니는 어떤 분이세요?

 

저는 아직도 엄마라고 불러요.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왜 엄마에 대한 시는 한 편도 없냐고요. 엄마에 대한 시도 좀 써봐라.(웃음) 그런데 쉽지 않아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대상은 너무 어렵죠. <재킷을 입은 시인>은 엄마의 살로 베를 짜서 재킷을 만들어 입는 상상, 내가 엄마의 살로 만든 옷을 입고 다니며 시를 쓰고 다닌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아베 고보의 소설에서 모티브를 잡은 작품이에요.

 

- 아베 고보가 유명한가요?

 

상당히 알려진 작가죠. 아베 고보의 알려진 작품이 많은데 <시인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짧은 단편입니다.

 

- 어머니도 이재훈 시인처럼 조용하신 성품이세요?

 

조용하지 않죠. 여느 아줌마들처럼.(웃음) 지금은 행복하신 것 같아요. 순전히 제 생각이지만. 젊었을 적에는 상당히 수줍음 많은 소녀였다가, 점점 나이 들면서 거칠어진 한국적 여인상이랄까. 따뜻한 부분도 있지만,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하시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시죠.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항상 그렇게 살아오셨어요.

 

- 어느 자리에서 이반 일리치(Ivan Illich) 말을 인용하시며 시인이 이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한 요소 중의 하나로 말씀하셨는데요.

 

계몽적으로 인용하기 좋은 말이에요. ‘이반 일리치’가 인류를 구원할 세 가지가 자전거, 도서관, 시인이래요. 왜냐면 시를 읽으면 아무래도 정서적으로 풍요로워지잖아요. 우리가 시를 낭송하는 사람일 때, 그 자아는 가장 순수한 자아거든요. 시를 읽으면서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김현의 <한국문학의 위상>이라는 책을 보면 문학은 출세하지도 큰돈이 되지도 못하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고 했죠. 그것으로 문학이 억압하는 것의 정체를 밝힐 수 있다고요. 시가 바로 그 중심에 있겠죠. <포엠포엠>

 

_ <포엠포엠>, 2012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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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

시시각각 2012. 4. 6. 14:08

시상식이란 걸 했다.

구경한 게 아니라, 출연자로서.

설렜고, 잠깐 감격했다.

그리고 신나게 마셨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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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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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들이 오갔을까요? 3월 28일

<명왕성 되다>의 저자 이재훈 편을

오디오로 중계합니다.

 

수요북콘 7회 제1편(00:00:00~00:13:27)

 

수요북콘 7회 제2편(00:13:27~00:28:18)

 

수요북콘 7회 제3편(00:28:18~00:42:02)

 

수요북콘 7회 제4편(00:42:02~00:56:02)

 

수요북콘 7회 제5편(00:56:02~01:07:35)

 

수요북콘 7회 제6편(01:07:35~01:18:34)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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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의 질문을 받은 후 이어진 낭독의 시간입니다.

 

 

초대 손님들이 올라오시기 전 이재훈 시인과 진행자 신혜정 시인의 낭독이 있었기에,

허연, 김태형, 오은 시인 순서로 낭독이 이어졌습니다.

좋더군요! 와우.

 










그렇게 객석에도 시의 기운이 감전되고...



행사 후 이어진 사인회 겸 포토타임~

수요북콘의 트레이드 마크 빨간 장미를 한 송이씩 선물하고~!





그리고 여기저기 있는 시인들에게 사인 받으랴 사진찍으랴 바쁩니다.


 

 

 

 

정말 한 자리에 모이기 힘든 시인들이 이렇게 대거 모이다니요~!

놀랍습니다. 그리고 오신 분들도 놀랍고 고맙습니다.

시인에 대한, 시에 대한 사랑이 아직까지 이렇게 뜨겁다는 것에 감동한 밤입니다.

 


진행자와 초대손님의 기념촬영 촬콱~!




민음사 장은수 편집대표님과 허양희 시인과도 한 컷~

 


 

무슨 이미지 사진 같군요. 사진 같군요. 흐흣.

 

마무리 촬.칵.

 

이렇게 제7회 수요북콘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오신 분들께 감사, 모여주신 시인들께 감사, 객석에서 함께해주신 이영주, 김종훈, 강정, 허양희, 신동옥... (아 이름을 제가 놓쳤다면 용서해주세요.~) 시인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저희 수요북콘은 앞으로도 책과 저자의 향기가 향긋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계속해서 관심 갖고 지켜봐주세요.

수요북콘의 행진은 다음주에도 계속됩니다.!

 

 

끝-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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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수요북콘은 '나는 시인이다' 편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재훈 시인과 가깝게 지내는 시인 세 분을 모셨지요.

 

우측부터

신혜정, 이재훈, 허연, 김태형, 오은 시인입니다.

 

 


 

이런 자리에 관객으로도, 게스트로도, 주인공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처음 나와봤다는 허연 시인.

이재훈 시인의 전화 한 통에 바로 수락하셨다고 합니다. 와웃!


 


날카로움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모두 갖추신 분 같았어요!

 

허연 시인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추계예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게이오대학교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현재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로 재직하고 있으며, 중앙대학교와 한국사이버대학교에서 미디어 문장론과 시 창작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불온한 검은 피》, 산문집 《고전 탐닉》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 등이 있다.

 

 

 

말씀을 어찌나 차분하고, 진지하게 하시는지 오신 분들이 김태형 시인의 말에 고개를 계속 끄덕이셨어요.!

 

김태형 시인은...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2년 『현대시세계』에 시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로큰롤 헤븐>,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코끼리 주파수>가 있다.

 

 

 



언어유희가 가득한 시집으로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주신 오은 시인...

오, 시와 시인이 닮았냐는 물음에 재치 센스 만점 입담으로 관객들께 웃음을 선사했지요~

 

오은 시인은...

2002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다. 2012년 현재 작란作亂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2012년, 미술 산문집 <너랑 나랑 노랑>을 출간하였다.

 

참, 이제 막 출간된 따끈한 미술 산문집 <너랑 나랑 노랑>에도 관심 가져주세요. ><





시에 대한 진지한 질문들이 이어집니다.

 

이재훈 시인에게 누구와 가장 친하냐고 물었더니 모두 자기라고 답하시네요. :-)



그리고 시에대한 진지한 물음들이 오갔어요.

 

시가 처음 찾아왔던 그 때의 느낌 말예요.

 

이재훈 : 정말 모든 게 다 시였고, 지나가면 시가 나왔어요.

허연 : 좋은 시 한 편을 써 놓으면 하루종일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안고팠지요...

김태형 : 생각하는 시간이 중요해요. 시를 쓰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문자메시지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줄여보세요~

오은 : 형이 제가 끄적인 걸 문예지들에 응모했는데, 어느날 전화가 왔어요. '등단하셨습니다...' 등단이 뭐죠? 제가 그 때 술이 안 깼거든요. (흣. 이런 귀엽고, 천재 같은 일화가!)




그렇게 '나는 시인이다'의 대화가 이어지고,

 

객석에는 여기저기 숨어 있는(?) 시인들과,

이화여대 이화문학회, 반도문학회 학생들이 화기애애 함께 웃고 박수쳐주셨지요.

 

그리고 곽객들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시적인 것부터 사적인 것까지...^^ 






 

 

열심히 답해주시는 시인들.






- 다음편에 계속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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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에 시작한 수요북콘이 어느덧 7회 행사를 치렀습니다.

제7회 수요일의 정기 북콘서트 '수요북콘'의 주인공은 2012 시인협회 주관 시인상에서 젊은시인상을 수상한 이재훈 시인입니다.  

3월 24일 막 시상식을 마치고 온 시인과,

그의 친구들(?)

'나는 시인이다' 편을 열 준비가 한창입니다.

 

북스리브로 홍대점에 이렇게 매대를 준비해 놓고,,,

시집 단독으로 책을 진열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는데, 매우 새로운 느낌이 드네요. ^^

 


 

아아, 마이크 테스트... 오늘의 행사 전반 음향과 무대 조명을 점검중입니다.



 

카메라는 잘 돌아가고 있나요? (그렇다고 합니다.^^ )

 

관객들이 막 들어오고 있네요.

 

이제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손님들을 맞고 오프닝 낭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화여대에서 온 반도문학회 학생들.. 파릇파릇 생기가 돕니다.

시를 쓰는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눈망울을 반짝반짝..




오늘의 주인공 이재훈 시인을 무대로 모셨습니다.

 

 

 

진지하게 관객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명왕성 되다... 무슨 뜻인가요?

지구의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의 아홉번째 행성인 명왕성이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소행성 134340으로 다시 명명되었죠..

명황성 pluto를 이용해 미국에서는 be plutoed... 라는 수동태로 부르면서,

명왕성 되다.. (나 완전히 x됐어.. 같은?^^) 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2006년 미국 방언협회에서 선정한 그 해의 방언에 be plutoed가 선정되었죠.

명왕성 되다.

아, 소외된 현대인의 고독이 느껴지지 않나요?

시인은 이 말을 캐치해서 끊임없이 도는 서울 순환선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철컥철컥 계기판 없이 흐르는 그 시간을 시로 형상화 했죠.

 

그게 바로 이 시집의 표제작 <명왕성 되다>입니다.

 

 


열심히 설명하는 이재훈 시인.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 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 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 명왕성 되다 전문 


 

계속 시와 시 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오늘의 깜짝 무대는 진행을 맡은 신혜정 시인이 준비해주셨습니다.

 

이재훈 시인과 오래전부터 절친! 사이라고 하네요.




무대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김건모의 <서울의 달>을 열창해 주셨습니다.

 

후후, 노래 끝나고 무척 쑥스러워 하셨습니다. ^^

 

 

- 2편에서 계속 -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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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1일 일곱 번째 주인공은

2012년 시집 <명왕성 되다>(민음사)로 시인협회에서 수여하는 젊은시인상을 수상한 이재훈 시인입니다.

3월의 마지막 주간은 주인공으로 오시는 이재훈 시인을 비롯해, 시인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초대손님

<나쁜 소년이 서 있다>의 시인 허연,

<코끼리 주파수>의 시인 김태형

<호텔 타셀의 돼지들>의 시인 오은

 

모두 '나는 시인이다'로군요.!^^

 

자, 젊은시인상 수상작가 이재훈 시인과

젊은 시인들의 토크토크 톡톡!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어서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이재훈 시인은...

1972년 강원 영월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가 있다. 이밖에도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를 비롯, <딜레마의 시학>, <현대시와 허무의식> 등의 책을 썼다. 2012년 한국시인협회에서 수여하는 '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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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弔詞)


낙타의 시인 김충규.
당신은 낙타의 짐을 홀로 지고 몽상의 숲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순백의 시인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모두 당신의 고통과 삶의 무게와 슬픔에 적잖이 놀랐고, 그 모든 통각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당신의 시를 보며, 뛰어난 시인이 출현했다고 귓속말을 했습니다. 그제서야 시 밑에 적혀 있는 당신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우리들 모두 당신보다 당신의 시를 먼저 만났을 겁니다.
당신은 태어나자마자 얻은 흉터와 같은 언어로 뜨거운 마음을 잠시 식혔겠지만, 당신이 시단에 제출한 언어는 저 막막한 사막을 홀로 걸어가는 고독한 단독자의 발자국 같았습니다.
당신이 온몸으로 발열하여 새긴 오감의 언어들을 이제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안타깝고, 너무도 원통하고, 너무도 화가 났습니다. 더 오래오래 계셔야 할 분인데, 왜 이리 서둘러 저 먼 길을 가셨냐고 따지고 싶었습니다. 남아 있는 가족들의 슬픔을 생각하니 이 참담한 울분을 이루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마지막까지 오로지 시였으며, 시인이었고, 시인으로 남았습니다.
몽상의 숲에서 거둬들인 당신의 마지막 말들은 온통 시 얘기뿐이었습니다. 완전한 시, 완벽한 시라는 불가능을 향해 늘 온몸을 불살랐던 당신의 열정을 우리는 오래오래 기억할 겁니다. 당신의 뜨거운 말이 우리의 가슴으로 밀려들면 축축한 물의 언어가 된다는 신기한 체험을 자꾸만 곱씹어봅니다. 잊지 않으렵니다. 당신의 시와 살냄새 풀풀 풍기는 당신의 문장들을.
당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늘 자상하고, 따뜻한 시인이었습니다. 늘 아내와 자식들을 걱정했던 성실한 가장이었으며, 친구들에게는 의리있는 사내였고, 자신의 시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엄격한 시인이었습니다.
남아 있는 저희들이 부끄러운 밤입니다.
남아 있는 저희들이 서러운 밤입니다.
당신은 끝내 시인이었다는, 아름답고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가장 소중한 추억을 남긴 채
저 먼 나라로 몸을 뉘이셨습니다.
이제 행복한 시만 쓰며
부디, 편안한 곳에서 영면하소서.

남아 있는 시인들의 말을 대신 받아
이재훈 올림.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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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성의 파토스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

 

 


1.

언젠가부터 한국시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주체의 문제로 전이되어왔다. 탈주체 이론 이후 주체의 자리가 ‘빈공간’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면, 이론적으로 주체는 살거나 죽는 주체가 아니라 살거나 죽는다고 오인하는 주체와 다르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때문에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의식을 포함한) 의식 그 자체를 유발하는 주체의 기원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시적 사유의 중대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데, 주체의 기원에 대한 시적 사유 속에서 죽음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파토스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시들이 죽음에서 비롯된 과도한 허무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탈주체의 주체는, 테리 이글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리 자체를 즉흥적으로 다루는 것이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방식”임을 깨달아 “우리 자신의 현존에 근거가 없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죽음과 가깝게 살아”갈 수 있는 주체이다. 하여 탈주체의 주체는 “죽음을 소름끼치게 상상하는” 저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소멸 혹은 죽음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오인’에 의한 주체의 구조를 의식하는 주체라 할지라도 그것은 강력한 현실작용 위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는 원래부터 ‘빈 공간’임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육체에 기반하고 있는 주체로서는 죽음에서 비롯되는 ‘소름’에서 해방되기란 힘든 일이다. 주체의 기원을 사유하고 해체하는 주체는 ‘자아’로서의 강력한 통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탈주체의 주체 역시 원래부터 죽음과 무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죽음’의 유령으로부터 끊임없이 소환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장욱이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상징계를 균열시키는 동시에 주체마저도 하나가 아닌 둘로 균열시키는 나가는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면, 이재훈은 주체의 소멸에서 비롯된 파토스적 세계를 응시한다. 이장욱의 시가 주체와 상징계의 균열을 매우 “드라이한 저음”(함돈균)으로 드러내고 있다면, 이재훈의 시는 균열된 주체 틈새로 새어나오는 습한 신음에 젖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주체의 균열과 죽음에 대한 시적 사유의 시차(視差)를 드러내는데, 이는 최근 시들의 흐름을 바라보는 시각에 선명한 입체성을 제공하기도 한다.

...(중략)...

3.

이재훈의 시집 <명왕성 되다>는 소멸의 감각으로 점철되어 있다. ‘소멸’이라는 저주의 늪에 걸려든 시적 주체는, 그러나 서서히 가라앉는 소멸의 늪에서 이 세계를 응시하는 뜨거운 눈을 가지고 있다. “내 눈은 카메라를 닮았다. 노출을 열고/ 몇 시간 동안 창밖을 보면/ 불빛만 남은 세계./ 칼 맞고 피 흘리는 거룩한 세계.”(「비비디 바비디 부」)라고 했듯이, 그의 시는 소멸의 망막에 비친 세계에 대한 기록이다. 소멸에 대한 예민한 감각으로 말미암아 그의 시에 비친 세계상은 냉철하게 묘사되기보다는 그의 내면의식에 되비친 이미지로 점철된다. “내 눈은 카메라를 닮았다”고 선언했을 때, 그 눈은 ‘카메라 아이’(camera-eye)와 같은 냉철한 기계적 속성이 아니라, “붉은 눈물,/ 가만히 들어와 출렁이”(「대황하11」)는 눈이다.
하여 그의 눈은 이미 소멸과 허무에 익숙한 눈이기도 하다. “소멸을 향해 스스로 전진하는 몸짓.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풍경”(「대황하1」)과 같은 구절이 말해주듯이 그의 시선은 허무와 소멸이라는 감관(感官)을 관통한다. 혹은 “누웠다. 땅이 따뜻했다. 내 등은 늘 따뜻한 곳만을 찾는다. 누웠다. 썩는 냄새가 났다. 옆을 보니 시체가 누워 있다. 시체의 살이 썩고 있다.”(「대황하2」)에서 확인되듯이, ‘대황하’의 물결을 시즙(屍汁)으로 치환시킴으로써 소멸할 수밖에 없는 육체의 치욕과 굴욕을 드러낸다. 그래서 “아무것도 거둘 수 없는 몸./ 냄새나는 몸./ 위로할 것 없는 몸.”(「흠향(歆饗)」)이라거나 “타닥타닥, 누군가 내 몸을 읽는 소리”(「세이렌의 도서관」)와 같은 소멸과 허무 의식은 이재훈의 시를 지배하는 의미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재훈의 시적 사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멸과 허무를 감각하되 그것에 대적하여 싸우는 치열한 의식의 장(場)으로 나아간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촛불도 아니고 감나무도 아니다.
미끈한 자동차도 아니고
달콤한 솜사탕도 아니다.
차갑고 텅 빈 사물에
쇳물을 들이붓고 싶다.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이었다.
꿈을 꾸면
붉은 별 하나가 내게 떨어지는 사건이었다.
손이 델까 만지지도 못한 별이
마당에 내려와 날 또렷이 노려보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엎드려 울지 않겠다.
슬픔을 우스운 몸짓으로 과장하지 않겠다.
해거름에 사양(斜陽)을 보며 사흘을 울겠다.
그러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
-「연금술사의 꿈」 전문

이 ‘연금술사의 꿈’은 유한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주체의 열망과 맞닿는다. 인간의 유한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치열한 고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재훈의 시가 ‘유한성의 파토스’로 가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주체의 ‘결여’에 대한 자각 속에서 소멸과 허무 의식은 들끓는다. 그러나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 혹은 “소멸이/ 내 먹는 밥”이라는 고백 속에서 허무의 세계를 대적하고자 하는 주체의 결연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나’라는 주체의 허무와 소멸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만들어내는 “신명”이기를 간절히 기구(祈求)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신명 속에서 만들어지는 “뜨거운 강철”은 꿈속에서 “내게 떨어지는” “붉은 별”이자 “사건”으로서 재주체화의 과정에 있는 시인이 지향하는 ‘연금술’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주체의 ‘진화’로도 진술된다. “나는 자꾸 진화한다./ 詩人이었다가 일용근로자였다가 백수건달이었다가 독학자가 된다./ 어떤 모습에도 아파하지 않는 내성(耐性)의 몸”은 “누구의 소유도 아닌” “연혁이 없는” “몸”이다. (「비상」) 누구의 소유도 아닌 몸은 자신의 연혁을 지움으로써 탈주체화를 도모한다. 주체의 ‘결여’화를 도모하고 ‘결여’에 직면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주체 이론이 다다른 윤리학의 정점이다.
그러나 지상의 ‘소멸’과 천상의 ‘붉은 별’이 지니고 있는 간극은 너무 크다. 시인이 마주하고 있는 지상은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맥주 캔. 먹다 남긴 컵라면. 참기 힘든 소음. 역겨운 화장 냄새와 비둘기 똥 냄새”(「매일 출근하는 폐인」) 따위로 가득한 현실이다. 급기야 시인은 “육십억 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 왜소한 존재로서의 절망감을 드러낸다. “벌거벗은 육체 사이에서 신음”하거나 “저녁마다 매연을 맡으며 구역질을 하”면서 “허무의 군락 사이를 헤매”(「킬리만자로」)야 하는 현실은 처음부터 혁명 혹은 개조가 불가능한 대상인 것이다. 하여 그의 시는 결국 어떤 ‘근원’의 세계에 의탁하기도 한다. “돌의 근원”.(「돌」) 구체적인 물상(物像)으로 펼쳐진 광활한 세계를 폐기함으로써 드러내는 “짐승도 없고 새도 없고 울음도 없”고 “깊은 밤 달빛”이 “제 몸인 양” “푹 잠”긴 “돌의 근원”을 향한 회귀욕망. 말할 것도 없이 ‘돌’은 추상화된 세계로서의 사물이다. “차갑고 텅 빈 사물에/ 쇳물을 들이부”(「연금술사의 꿈」)음으로써 이 세계를 연금술적으로 해득하고자 했던 시인의 욕망은 잠재성의 차원에서 꿈틀거릴 뿐이다.
문제는 소멸과 허무 의식이다. 인간이 지닌 소멸과 허무의식이야말로 ‘탈주체’가 맞닿은 가장 큰 장벽이기 때문이다. 소멸과 허무 의식은 유한성의 세계관 속에서 강화된다. 일자(一者)로 수렴된 무한은 일종의 ‘유일신’으로서 유한한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대척점에 서게 된다.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연금술사의 꿈」)에 대한 열망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의 형벌”을 견뎌야 하는 “육십억 분의 일”(「매일 출근하는 폐인」)이라는 주체 속에서 들끓는다. 이 양자(兩者)의 간극을 견디면서 “천사와 함께 비탄의 노래를 부르”고 “처형의 시간”((「연옥의 산」)을 기다리는 존재가 바로 이재훈의 시적 주체이며, 이 시적 주체의 발화가 그의 시세계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 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명왕성 되다(plutoed)」 전문

지하철의 시간은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이다. “기계소리”만이 들리는 지하철 속에서 시인은 정주할 힘을 전혀 갖지 못한다. “도시의 生”을 향한 “새로운 문이 자꾸 열리”지만, 도시의 기계적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은 그는 섣불리 지하철의 리듬에 몸을 맡기지 못한다. “男子가 바닥에 구토를 하”거나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지하철에서 “심장은 슬픔을 견디기 위해 존재”(「귀신과 도둑」)할 뿐이다. 도시적 삶의 조건을 수락할 수 없으면서도 도시 ‘내부’에 존재하는 시적 주체는 도시 ‘내부’의 ‘바깥’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 ‘내부’에 거주하고 있으면서도 도시적 삶에 탑승하지 못하는 주체는 그야말로 태양계에서 버림받은 ‘명왕성’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계의 행성과 유사한 궤적을 돌고 있는 명왕성처럼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는 시적 주체는 도시 ‘내부’의 ‘바깥’에서 “푸른 멍자국”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속의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는 고백. 이 ‘허무’는 “도시의 生”을 겨냥한 것이다. “도시의 生”은 바로 허무다. 이재훈은 이 사실을 명확히 직관한다. “도시의 속도에 적응된 발로 허공을 구른다”(「언덕의 아들」)고 했듯이, 도시의 삶은 “허공으로, 바람 속으로 달리”는 것에 불과한 것. 시인의 내면에 들어앉은 소멸과 허무의식은 도시의 삶 전체로 확장되고 있다.
그렇다면 “아무도 모르는 그곳”은 주체의 허무를 관통한 이후의 그 어떤 세계가 아닌가. 그곳은 내 안의 “허무”를 관통하여 ‘결여’의 자리에 정주할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시인은 고백한다. “내 안의 허무로 들어갈 자신이 없다.” 쉽게 뛰어들지 못하는 ‘도시의 생’과 ‘허무’의 사이에서 시인은 배회한다. 그 배회의 실상은 어떠한가? 시인은 내면의 허무로써 “모든 것이 까마득”한 이 세계를 “얼음의 시간”(「북극의 진화」) 속에 감금하는 적멸(寂滅)의 사유로 나아가려함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은유에 머물렀다가/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며 와르르” “무너지”는 “형체 없는 얼굴”(「거울 속의 얼굴」)로 귀착되고 만다. 이처럼 이재훈은 소멸과 허무를 도시의 폐부까지 불어넣는 동시에 멸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 주체의 고통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이러한 고통은 일찍이 진이정이 보여주었던 “나라는 물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각성이/둔한 내 뒷골을 쑤셔야만 하리라 하하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니,/그럼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단 말인가!”(「아트만의 나날들」)와 같은 고통의 공동체를 이룬다.

4.

주체의 기원 형성을 ‘오인’으로 파악하고 주체의 자리를 ‘빈공간’으로 파악하는 사유의 방식은 궁극적으로 아파니시스(aphanisis), 즉 주체의 소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방식은 주체를 지속적으로 재정립하는 윤리의 역능을 발휘한다. 주체의 소멸이 주체의 허무와 죽음으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경유한 새로운 주체로 재탄생하는 과정 자체가 윤리성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 이론과 무관하게 주체의 실상은 매우 복잡다기한 고통으로 가득하다. 그 고통에서 자유롭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주체의 분열과 고통을 마주하는 시인의 태도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이장욱과 이재훈은 주체와 세계 속에 내재한 균열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방식에 있어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장욱이 시의 주체를 선험적으로 파기함으로써 소멸과 죽음에서 발생하는 파토스로부터 자유롭다면 이재훈의 시적 주체는 파기되는 ‘과정’ 내에 존재함으로써 유한성의 파토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때문에 이장욱의 시적 상상력은 매우 자유롭다. 어느 한 시점에 매이지 않고 세계의 구획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주체의 자장과 진폭을 마음껏 넓히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생년월일’을 파괴함으로써 획득하는 새로운 주체의 ‘생년월일’의 복수성(複數性)을 무한하게 추구하고 있다. 이는 주체 기원의 복수화(複數化)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주체의 관성(慣性)을 깨고 있다는 점에서 파토스적 주체마저도 사라질 수밖에 없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에 이재훈은 유한성의 파토스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있다. 이재훈의 시적 주체는 자기 소멸의 사태에 예민하게 감응함으로써 시적 파토스를 더욱 강화한다. 이러한 파토스는 분열의 주체가 아니라 실존적 주체와 강력하게 결합한다는 점에서 매우 현실적이다. 주체의 결여에 선험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결여’를 향해 나아가는 고통의 결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러나 이장욱과 이재훈에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여전히 주체의 기원과 소멸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장욱이 주체와 세계의 ‘생년월일’을 탐색하고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세기”(「생년월일」)로 나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면, 이재훈 역시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연금술사의 꿈」)에 대한 열망을 응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열망은 라캉주의 좌파의 관점에서 보자면 윤리의 원질(原質)에 해당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실재를 경유한 윤리적 주체는 뚜렷한 정치적 주체로서 성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근의 시적 주체들이 대개 실재를 경유하는 데만 골몰할 뿐, 뚜렷한 정치적 윤리를 탐색하는 데 있어서 다소 소극적인 것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주체의 윤리를 정치적 윤리로 확장해나가는 작업이 이루어질 때, 이들의 시가 보다 큰 진폭과 파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_ <시인수첩>, 2011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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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한의 감성과 주체의 공백화

 

 

바디우는 낭만주의적 전통이 오늘날까지 남긴 유일한 정신적 자산이 있다면 유한성에 대한 예민한 자각이라고 정리한 바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유한성에 처해 있다는 자각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죽음에 귀착되게 하는 문제를 발생시켜왔다는 것이다. 열망과 좌절의 간극 속에서 발생하는 유한성의 페이소스는 낭만주의 전통 이후 동일성의 시학이 지니고 있는 감성적 자질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시인은 본질적으로 죽음과 파국이라는 유한성의 예감에 치를 떠는 존재다. 낭만주의적 영원과 신성, 혹은 무한자를 향한 열망은 인간이 자각하는 유한성의 강도를 더해왔던 것이다.
유한의 감성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바디우는 독특하게도 동일성의 대상인 무한을 일자(一者)가 아닌 다자(多者)로 해체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한다. 이른바 무한의 탈신성화. “무한을 아우라 없는 다수성들의 유형학 속에 산포시키기 위해 일자의 지배에서 끄집어내”는 것이다. 주체마저도 일자(一者)가 아닌 이자(二者), 혹은 다자(多者)로 해체되고 빈 공간이 됨으로써, 무한과 주체는 일자가 아닌 오직 “무한한 다수들”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무한한 다수들”은 일자(일자)의 세계가 아니라 ‘빈 공간’ 혹은 공백의 세계이다. 따라서 무한과 주체가 ‘공백’으로 환원되고 그 자체가 “무한의 다수들”이 됨에 따라 주체의 유한성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동일성의 시학(김준오)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시사하는데, 인간 주체(유한)의 공백과 절대자(무한)의 공백이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유한/무한의 대립관계가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디우가 지향하는 주체는 ‘공백’을 감싸는 둘레가 없는 일자(一者)를 폐기한 ‘비-전체’로서의 주체이다. 둘레를 제거한 인간 주체가 발산하는 무한의 공백은 무한자의 공백과 자연스럽게 겹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과 소멸, 즉 유한을 극복하고자 하는 현대시의 한 방향은 주체의 공백을 둘러싼 테두리를 제거함으로써 주체의 자리를 무화(공백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동일성의 시학은 무화되고 만다. 동일성의 시학이 절대․영원과의 분리의식을 해소하고자 유한자의 무한자에 대한 열망에 근거한 것이라면, 바디우의 주체 관점에서 동일성의 욕망은 폐기되어야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성의 시학(김준오)에서 시적 주체는 보다 큰 일자(一者)로 귀속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다. 대립과 적대 관계 속에서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향한 열망을 품게 되는 동일성의 욕망은 서정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내포한다. 에밀 슈타이거가 지적했듯이 서정적인 것은 세계와의 조화로운 상태 그 자체라면, 지금 여기의 세계를 부정하고 다른 세계를 열망하는 동일성은 페이소스를 필연적으로 동반하기 때문이다. 왜소한 존재로서의 주체는 이 세계의 결핍과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영원과 무한의 세계를 동일성의 대상으로 삼는다. 세계의 유한성을 향한 대립과 갈등 속에서 배태된 적대적 감정이 바로 페이소스이며, 영원한 무한자를 향한 동일성의 욕망을 충동하는 배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디우의 철학적 관점에서 동일성의 시학은 극복대상이 되고 만다. 바디우에게 동일성의 시학은 낭만주의적 전통의 유한성의 파토스를 이어받은 일자(一者) 중심의 세계관적 산물이다. 바디우는 유한과 무한의 대립이라는 낭만주의적 유산을 극복하고 주체의 공백 속에 내재한 무한의 공백을 읽어냄으로써 모든 것이 죽음(유한)에 귀착되고 마는 오늘날의 정신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자로서의 주체와 무한에 감금되지 않고 주체와 무한의 감싼 테두리를 제거함으로써 ‘공백’이라는 ‘비-전체’를 발견하는 것. 이로써 유한자로서의 동일성 욕망이 응축하고 있는 유한성의 페이소스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허무주의적 탈주체 이론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주체의 윤리를 가장 극단적으로 정립해 나가고자 하는 정치적 주체이론의 근간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의 시를 읽는 일은 의미 있을 것이다. 90년대 이후 한 흐름을 형성해왔던 주체의 균열과 유한의 감수성은 여전히 한국시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상자된 이재훈과 김영미의 시집 역시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2. 신성(神聖)의 파국과 균열의 기록

이재훈의 시는 신성(神聖)을 욕망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시원(始原)에 대한 원대한 물음”이 있으며, “문학하는 이유가 자기 구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흠의 고백」)는 제1시집(<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2005)의 고백을 환기한다면, 그의 시적 지향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인간 개체와 시원을 연결 짓는 원대한 꿈은 시의 유년을 지배했던 열망이 아닐 수 없다. 시가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발원되고 사회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존재와 우주, 그리고 근원과 시원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했던 물음이기 때문이다. 이재훈의 제1시집은 바로 그런 물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컨대 “새의 등을 올라타고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으며 나스카 평원에 새겨넣은 神의 형상을 한눈으로 보고 싶었다”(「나스카 평원을 떠난 새에 관한 이야기」), 혹은 “나는 어머니가 믿는 神의 안부가 궁금해졌지”(「사수자리」)라는 부분만을 보더라도 그의 시에 내재된 신성에의 욕망이 확인된다.
‘신성’은 자기구원의 언덕이다. 그러니까 이재훈의 시는 자기구원을 위한 ‘신성’에의 탐구에서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이재훈의 첫 시집은 ‘신성’에의 탐색으로 가득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성에의 탐색과 거기서 비롯된 균열의식으로 가득하다. “천 년 동안 날아가고 천 년의 천 년을 날아가지. 아무리 날아도 어딘가로 닿지 않지. 시간을 견디지 못해 몸은 찢어졌지”(「순례2」)처럼 신성은 시인의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신성’의 분리는 인간의 전락(顚落)과도 무관하지 않으므로 시인의 시선은 인간의 깊은 무의식(“잠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깊은 동굴이었지”(「사수자리」)과 드넓은 천공(天空)을 향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서 발원되었던 것이 시인의 ‘말’, 곧 시(詩)이다. 이재훈의 시적 주체는 신성에 가닿은 시원의 언어를 찾아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가” “노래 부르는” 시의 “추장”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내 목을 자르고”서라도 말이다.(「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6년만의 시집 <명왕성 되다>(2011)는 신성에의 동일성 욕망이 결국 파국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제1시집에서도 그 균열과 파국의 징후가 보이긴 했지만, 제2시집만큼 적나라하지는 않았다. 자기구원의 문학적 가능성이 제2시집에서는 여지없이 파국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 구체적 징후는 우선 ‘소멸’에 대한 압도적 감성에서 드러나는데, 「대황하」 연작시편은 인간을 지배하는 소멸의 역사를 형상화한다. 시인은 신성이 떠나간 이 세계를 “소멸을 향해 스스로 전진하는 몸짓.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풍경”(「대황하1」)으로 진술한다. 이 소멸의 세계에는 이제 더 이상의 구원은 없다. 이재훈은 말한다. “당신의 세상은 불구의 시간이 시작되는 때”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으므로 “일부러 가부좌를 틀 필요는 없다.”(「앉은뱅이꽃」) 그렇다면 그토록 갈구했던 신성(神聖)은 어디로 갔는가? 이재훈의 시에서 신성은 이 세계와 회복할 수 없는 간극을 지닌 것으로 그려진다.

밀었다. 저 새. 군무의 몸짓이 궁중을 긋고 지나갈 때. 하늘 귀퉁이 구름을 밀었다. 타인의 몸 몇 개를 밀었다. 늙은 햇살이 들판을 토닥토닥거릴 때. 밀었다. 어둠 속으로 햇살을 밀었다. 이 세계엔 바람이 없다. 밀고 밀린 생들이 서로 겹쳐 희붐히 향기만 가득할 뿐. 잊혀진 고향 땅만 언뜻언뜻 보일 뿐. 지겹다. 밀고 밀었다. 눈을 감았다. 도도록한 마음 가운데 한 머리가 덜컹 떨어졌다. 팔짱만 낀 몸이 잠시 움찔했다. 파릇파릇 새로운 몸이 피어났다. 당신의 형상은 몰라요. 부서진 뼈의 향기는 달콤했다. 어떤 운명을 잠시 밀었다. 물 쪽으로 향한 구름에 몸을 던진다. 저 새.
- 「건기(乾期)의 새」 전문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위 시에서 시인은 회복할 수 없는 신성을 노래한다. 이 세계엔 우주의 저 끝에 있을 신성(神聖)으로 밀어줄 바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밀고 밀린 생들이 서로 겹쳐 희붐히 향기만 가득하”고 “잊혀진 고향 땅만 언뜻언뜻 보일 뿐”이다. “밀고 밀린 생들”이라 했지만, 사실 이들은 모두 ‘밀리고 밀린’ “생들”이다. 신성의 세계는 이제 인간계와 분리되었으며, 그 간극을 극복하기에 너무 메말랐다. ‘건기(乾期)의 새’란 신성을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세계에 처한 인간의 비극을 아련하게 드러낸다. 신성(神聖)이란 이제 이렇게 진술된다. “당신의 형상은 몰라요. 부서진 뼈의 향기는 달콤했다.” 그럼에도 구름에 몸을 던지는 새야말로 인간의 운명을 의미하지 않는가, 라고 말하기에는 신성과 인간의 간극에서 비롯되는 피로도가 역치에 달했다.
그나마 아름답게 형상된 이 비극의 세계는 「만신전(萬神殿)」에 이르러 그 끔찍함이 폭로되고 만다. “저는 오래전 아버지를 죽이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뒤로 수많은 신들이 제 속에 들어와 소리를 지릅니다. 홀짝홀짝 살들을 빨아 먹습니다.”“허공의 사다리엔 긴 목을 가진 시체들이 걸려 있습니다.”(「만신전(萬神殿)」) 신성을 향한 인간의 열망은 숭고함을 잃었다. 이재훈은 숭고함을 상실한 이 결핍의 자리를, 신성이 인간의 살들을 ‘홀짝홀짝’ 빨아먹는 이미지로써 끔찍하게 드러낸다. 신성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힘겹게 건너가는 “허공의 사다리”에는 “긴 목을 가진 시체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성의 세계는 해체되고 만다. “처형의 시간” 이후 도달한 “연옥의 산”에서조차 “그 어떤 존재도 이름이 없다”(「연옥의 산」)는 사실은 ‘신성’을 향한 낭만적 환상이 여지없이 파국을 맞이했음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신성한 사랑에 대해 논”하는 일이란, “구름”과 같은 헛된 것을 먹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구역질이 나서/ 나무의 텅 빈 몸에 구름을 토하”(「카프카 독서실」)는 비루함에 맞먹는다. 그런데, “텅 빈 몸”이라니. 시인은 비로소 주체의 자리를 ‘빈 공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신성과 개체의 영성적 동일성을 추구했던 시인의 세계관은 주체의 ‘결여’ 쪽으로 기우는 것이다.

그동안 숨어 있던 마음의 보풀이
비늘처럼 떨어집니다.
입김을 불면 그대로 내 살들이
냄새를 풍기며 날아갑니다.
비린내가 가득합니다.
-「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 부분

고가도로 아래로 바람이 분다.
땅속으로 분다.
이 세계의 배꼽 속으로 분다.
모든 허공으로 분다.
모든 공허 속에 인다.
-「미궁의 열두 번째 통로」 부분

신성(神聖)을 향한 욕망이 “마음의 보풀이/ 비늘처럼 떨어지듯” 허물어진다. “입김을 불면” 그대로 “냄새를 풍기며 날아가”는 “살들”의 “비린내”. 신성의 확신으로 가득 차 있던 주체는 비로소 악취를 풍기는 것이다. 강한 것은 비리다. 암석처럼 단단한 주체는 허물어질 때 비로소 독한 비린내를 풍긴다. 비린내는 주체의 강도에 비례하리라. 주체가 ‘빈 공간’이라는 자기 파국의 비수는 마침내 신성(神聖)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고가도로 아래” 부는 세속의 “바람”이 “땅속으로”, “이 세계의 배꼽 속으로” 불듯이 말이다. 그런데 “땅속”, “이 세계의 배꼽”, “모든 허공”, “모든 공허”의 병치는 결국 하나의 의미망으로 귀결되지 않는가. 이 병치는 ‘신성’을 담지하고 있을 “세계의 배꼽”이 “허공”이자 “공허”임을 웅변한다. 그렇다면, 신성에 닿고자 했던 주체는 ‘빈 공간’으로서 ‘신성’과 합일을 이룬다. 그러나 이 합일은 절대적 무한으로서의 ‘신성’을 부정하고 주체의 확실성을 부정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합일이다. 이와 같은 주체와 신성(神聖)의 파국 속에서 이재훈의 시적 세계관은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제2시집의 제목이 <명왕성 되다>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태양계의 궤도로부터 이탈된 명왕성은 주체와 신성(神聖)의 궤도를 이탈한 존재의 비유에 다름 아닌 것이다.

거울엔 과녁이 없다.
내가 거울에 입을 맞추면
오히려 그는 없고 내 얼굴만
환하다.
어디를 찔러도 되돌아오는 아픔.
거울은 고요다.
어떤 사연도 담지 않고
내가 볼 때마다 붉게 충혈된
눈만 되돌려 주며
침묵하는 사태.
나는 도시의 은유에 머물렀다가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며 와르르
내 얼굴이 무너짐을 본다.
형체 없는 얼굴,
소실점으로 모이지 못하는 얼굴,
-「거울 속의 얼굴」 부분

겨냥할 과녁이 없는 세계, 욕망의 대상이 사라지고 말아 내 존재만이 홀로 남아 있는 세계 속에서 주체는 결국 ‘나’라는 존재의 “소실점”을 상실하고 만다. 이 “소실점”은 주체의 ‘누빔점’이 아닌가. ‘누빔점’을 상실한 주체의 파국이야말로 이재훈의 시가 새롭게 진입한 세계의 진경(眞境)이다. 하여, 시인에게 ‘시’(詩)란 시원(始原)의 신성(神聖)을 향해 날아가는 ‘자기구원’의 언어가 아니라 “어머니가 없는 공허한 시”에 지나지 않으며, 시인조차도 “재킷을 입고 시를 쓰”(「재킷을 입은 시인」)는 세속화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토록 극적인 세계관의 변화 속에서 상처는 피할 수 없다. 시인은 단지 ‘자기구원’의 “일생을 꿈꾸었을 뿐인데”, “챙, 소리에 놀라 보니 사방에 깨진 파편들이 빤짝”이는 것이다. “깨진 기왓장”의 “천년을 건너온 어떤 눈동자”에 시인은 “스윽” “손을 베이”고 만다.(「동경(銅鏡)」 파국의 과정에서 시인은 깊은 상처를 입는다. 이 상처의 깊이는 ‘신성’(神聖)을 열망했던 시인이 경험한 자기 파국의 강도를 알려준다. 따라서 이재훈의 제2시집은 신성(神聖)을 희구했던 주체가 비로소 맞이한 파국의 세계와 그 안에 새겨진 고통과 균열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_ <시와사상>, 2011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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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의 현황과 미래

 

이재훈
(시인, <현대시> 부주간)

 

 

이천 년대 이후 더욱 가속화된 문예지의 창간은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오랫동안 문예지 편집자로서 일을 해온 필자가 보더라도 현재의 문예지 수는 창작의 양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지금의 상황은 창간한 지 오래된 전통있는 문예지와 대형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종합문예지들을 빼면 가히 문예지들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만하다.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발행하는 <문예연감>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잡지협회와 국립중앙도서관에 납본되는 문학잡지의 수는 289종에 이른다. 물론 납본되지 않는 문예지들도 있으며, 문학에 국한되지 않는 종합지 성격을 가지면서 주요 문학작품의 발표장이 되는 잡지들까지 합친다면 그 수는 더 많아질 것이다. 이를 권수로 따져보면 문예지는 한 해에 1,100권 이상 발행되는 셈이다. 한 권의 잡지에 대략 30~40편의 문학작품이 실린다고 가정하면 1년에 4만 편 가량의 문학작품이 발표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문예지는 가히 대단한 창작품 발표의 마당이라고 할 수 있다.
문예지의 지역편중화 현상도 여전한데 전체 289종 가운데 서울에서 발행되는 것이 무려 181종이며 경기도의 23종까지 합치면 서울 경기권에서 발행되는 문예지가 전체의 70%에 이른다. 그 외에 부산에서 발행되는 24종을 제하면 나머지 지역은 2%대의 미미한 형편이다.
또한 2011년에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우수문예지 발간사업으로 지원하는 잡지의 수는 총 37종이다.(PEN문학, 진보생활문예, 월간문학, 한국소설, 한국수필, 한국희곡, 청소년문학, 작가세계, 청소년 문학잡지 풋(20호를 끝으로 폐간), 실천문학, 시작, 아시아, 다층, 문학과사회, 문학들, 문학사상, 세계의문학, 서정시학, 시로여는세상, 시안, 시와동화, 시와반시, 시와사상, 시와세계, 시조시학, 아동문학평론, 어린이책이야기, 오늘의문예비평, 문예중앙, 창작과비평, 한국문학, 한국문학평론, 솟대문학, 미스터리, 현대문학, 현대시, 현대시학.) 이 37개 잡지는 문화예술위원회에서 발간지원을 받아 전국 국공립 도서관에 배포한다. 말하자면 발간 배포지원이다. 이중에서 기관에서 발행하는 기관지가 10종이며, 아동 청소년 잡지가 5종, 나머지 22종은 종합문예지와 시전문지이다. 이들 문예지들을 통해 한국문단에 새로운 담론과 창작품과 평론들이 발표된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보면 문예지의 출간은 손해보는 장사다. 현장에서 체감되는 문예지의 손익분기점은 월간지의 경우 정기구독자가 3,000명 이상, 계간지는 5,000명 이상이 되어야 겨우 도달한다. 물론 이는 제작비와 인건비를 최저로 산출했을 때의 가능성이며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비용이 발생한다. 지금 상황에서 적자를 보지 않는 문예지는 몇 종을 빼고는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예지들이 꾸준히 발간되는 것은 문예지들마다 각각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대형 문학출판사에서 발행되는 종합문예지들의 경우는 가장 큰 손해를 보며 문예지들을 출간한다. 하지만 장기적인 입장에서 보면 문예지는 안정적인 작가를 확보하기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한다. 문학의 경우, 작가를 확보하기 위해 출판사들마다 경쟁하고 있는 구도다. 이런 경쟁 구도 속에서 출판사가 발행하는 문예지는 작가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예지는 작가에게 작품발표와 연재 등으로 안정적인 원고료 수입을 제공하고, 문예지 발표 이후 출판사는 작가의 단행본 출간을 맡게 된다. 대부분 문예지를 통해 발표한 작품은 그 발행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게 된다. 출판사는 문예지를 통해 작가를 확보하고, 미리 독자들에게 작품을 홍보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대형 문학출판사를 제외한 문예지들의 재정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문예지들이 꾸준히 창간되는 것은 예전에 비해 책 만들기가 경제적, 기술적으로 쉬워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창작자들이 서로 십시일반하여 문예지를 발간하는 경우가 많다. 문예지 발간에 참여한 창작자들은 문예지를 통한 작품발표의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시전문지들의 경우가 그러한데 이런 경우 발행인과 문학동료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희생이 없이는 발간되기 힘들다. 그나마 몇몇 전통 있는 문예지들은 창작자들의 도움과 독자들의 호응을 바탕으로 꾸준히 발행되고 있다. 창작자들은 한국문학에 큰 역할을 한 오래된 문예지들에 적은 고료를 받더라도 양질의 작품을 제공한다. 독자들도 전통있는 문예지의 발행이유와 정당성을 충분히 공감하고 이를 응원한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의 문예지들은 전국의 익명 독자들을 대상으로 발행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안을 들여다보면 문학단체나 문학동인 중심의 차원에서 잡지가 소화되고 있다. 문예지의 특성상 오랫동안 문학현장의 중심에서 역할을 해온 문예지에 대한 독자들의 충성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러므로 새롭게 시작하는 문예지가 문단의 중심에 서서 독자들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많은 문예지들은 소수의 독자층을 미리 마련해두고 동인지 형태의 발간을 한다.
한국의 문예지 역사는 한국 문학의 역사라고 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근대 잡지는 문예지의 창간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근대문학은 문예지를 통해 이루어졌다. 최초의 근대 잡지는 1908년에 최남선이 창간한 <소년(少年)>이다. 이로부터 시작해 본격적인 문예지의 성격을 띤 <조선문단(朝鮮文壇)>(1924)은 현재 문예지의 형태를 그대로 반영한 잡지였다. 대중들의 문예부흥을 주도했으며, 문예지를 통해 120편의 소설과 8백여 편의 시를 발표한 창작의 장이었다. 또한 최서해, 채만식, 박화성, 안수길 등을 신인으로 배출하면서 새로운 문학가를 배출하는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동인지 형태로 발간된 <창조(創造)>, <백조(白潮)>, <폐허(廢墟)>, <장미촌(薔薇村)>, <금성(金星)>, <시인부락(詩人部落)> 등의 문예지는 한국 근대문학의 우물 역할을 하면서 많은 작품과 작가를 배출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문예지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5년 창간되어 오늘날까지 발행되고 있는 <현대문학>은 가장 전통있는 잡지로 한국문학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66년에 창간된 <창작과비평>은 새로운 문예지의 역할을 수행한 잡지였다. 현실참여와 새로운 문학담론을 창출하면서, 한국 지성계에 진보적인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1970년에 창간된 <문학과지성>은 문학의 순수와 자유를 옹호하는 문학성을 강조했다. 이후 두 잡지는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을 대변하는 입장에 서서 한국문학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이뿐 아니라, 1969년에 창간된 <현대시학>, 1972년에 창간된 <문학사상>, 1976년에 창간된 <세계의문학>, 1978년에 창간된 <문예중앙>, 1980년에 창간된 <실천문학>, 1989년에 창간된 <작가세계>, 1990년에 창간된 <현대시>, 1994년에 창간된 <문학동네> 등의 잡지는 한국문학 담론을 생산하고 새로운 문학인을 발굴하여 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친 잡지들이다.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주요 잡지들이 폐간되면서 잠시 문예지들이 주춤거렸지만 동인지와 무크지를 통해 이를 극복하였고, 대부분의 잡지가 다시 복간하여 현재에까지 이른다.
순수 시문예지들이 많아지는 것은 창작하는 입장에서 보면 분명 반겨야 할 상황이지만 곰곰이 따지고 보면 딱히 그렇지도 못하다. 문학의 활성화라는 명분에서는 더 할 말이 없겠지만, 이러한 현상이 오히려 문학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지는 깊이 숙고해봐야 한다. 문예지의 창간이 계속 이어지는 저간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가 어찌 되었든 문예지의 양적 팽창으로 인한 문제점 또한 여기저기 불거져 나오고 있다. 문예지를 감당하는 수요층이 어느 정도 한계에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제 살 갉아먹기식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잡지의 수를 놓고 보더라도, 또 하나의 잡지가 창간되면 또 그렇고 그런 잡지가 하나 더 보태진다는 회의적인 시각으로 비춰질 공산이 크다.
현재 문예지의 팽창으로 인한 여러 문제점들 중에 세 가지 정도만 꼽아 볼 수 있겠다. 먼저 지면확대로 인한 작품의 하향평준화이다. 잡지의 양적 팽창으로 문학인들은 발표할 지면이 많아졌고, 이로 인해 아직 발표할만한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발표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발생한다. 또한 작품을 발표하는 창작자들도 몇 인기있는 문인들로 집중되기 때문에 창작자들의 빈익빈부익부가 더욱 가속화되어 또다른 소외를 낳게 한다. 이것은 출판사, 잡지 편집자, 창작자들간의 인간관계도 큰 이유의 하나라고 봐야 한다. 둘째로, 비슷한 기획의 반복과 재생산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문예지들이 엇비슷한 기획을 반복해서 내보내고 있다. 이러한 점은 담론을 창출하는 잡지 본연의 역할보다는 구색맞추기 식의 지면채우기로 비춰질 공산이 크다. 마지막으로 편집권의 남용이다. 편집권은 권력이 아니라 좋은 필자를 모시기 위해 발로 뛰는 봉사자이다. 잡지를 만들어 또다른 편집권의 위용을 창작자들에게 내보이려는 처사는 심히 딱하기만 하다.
문예지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다. 현재까지 한국문학뿐 아니라 한국의 인문학적 지식을 공유하고 이끌어간 매체가 바로 문예지이다.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 줄어들어 대중들의 관심이 조금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문학의 산파구실을 하는 문예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든 분야가 상업적으로 변질되고, 환금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떠받드는 이 시대에 아무런 댓가도 바라지 않고 묵묵히 문학현장을 책임지는 문예지의 존재는 크기만 하다. 요즘 기업이나 돈 있는 개인들은 메세나(Mecenat) 활동을 한다. 메세나의 대상에 문예지들도 포함된다면 좋겠다. 한 기업이 한 문예지를 후원한다면, 그 후원을 통해 이루어지는 문화적 가치는 상당히 클 것이다. 문학의 가치는 시대가 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올곧게 남아 있을테니 말이다. 한 문예지 후원을 통해 창작자, 작품, 독자 모두를 만족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한국문학을 활성화시키며,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고,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마당이 바로 문예지이다. 국가의 문예지 발간 지원과 발행인들의 새로운 각성, 창작자들의 열의가 더한다면 앞으로 한국문학은 더욱 발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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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 시인. 1972년 강원 영월 출생.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저서로 <현대시와 허무의식>, <딜레마의 시학>, 인터뷰집 <나는 시인이다>가 있다. 현재 몇몇 대학에서 글쓰기와 문학을 강의하며, <현대시> 부주간으로 일하고 있다.

_ <기획회의>, 307호, 2011.11.05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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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만과 회감의 시


신동옥


그런가 하면 이재훈의 시에서는 자기 긍정의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이재훈은 비극의 자기분화가 막 시작되는 지점을 짚어낸다. 이재훈은 선사先史와 인간 이전과 인간 저편을 21세기 지금 이 자리로 불러온다.

포도주를 마신다. 구릿빛 작은 잔들이 찰랑 부딪힌다. 열락으로 빠져드는 시간의 동맥. 당신과 약속한 피를 마시고 당나귀의 행보를 떠올린다. 고향에서는 아들이 아비를 죽였단다. 양식이 없어 굶어 죽는 아이가 창궐한단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살육이 유행이란다. 가뭄이 지나자 폭설이 내려 홍수가 난다. 전염병이 돌고 있다. 근질근질한 시간들. 성스러운 부패의 시간들. 기쁜 병의 시간들. 이곳은 세속적인 거주지가 아니다. 당신, 진리가 도처에 즐비한데 왜 이곳에 오셨는가요. 밤이 되어야 저 바깥의 문을 간신히 열 수 있다. 발정기의 암낙타가 침을 흘리며 내게 온다. 밤을 매도하지 마라. 이 길은 밤이 모든 이유다. 세속의 성전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하는 시간의 길목이다.
― 이재훈, 「유형지」(<시작>, 겨울호) 전문

시는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술잔과 도취와 황홀경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절대화된 무시간은, 자신의 핏줄을 빠르게 피돌이하는 숨 가쁜 피의 순환, 그 고양의 시간이다. 새 피를 뿜어내는 심장의 운동 속에서 “시간의 동맥”을 짚는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포도주는 신의 피를 은유하는 익숙한 상징이고, 당나귀는 인간적인 삶의 시련과 유랑을 표현하는 익숙한 상징이다. 이후에 이어지는 광경들은 처참한 살육의 카타스트로프다. 포도주를 마시는 입이 황홀경을 마주하는 신적인 계시의 시간이, 무잡한 살육과 비인간적인 이해불가능의 폭력의 세례로 변이된다. 포도주를 마시는 신적 계시의 입술은 창세기 11장의 언어 분화의 성서 알레고리를 떠올리게 한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로 시작되는 창세기 11장은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에서처럼 바벨탑을 쌓으며 알레고리의 카타스트로피로 향한다. 이어서 나오는 구절에 11장 9절이다.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홍수 이후에 셈으로부터 이어지는 온갖 세대의 이름이 등장한다. 성서에서 언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입술이다. 구음이라는 표현은 동일한 어휘의 자장 속에 있는 입술들을 이른다. 바벨탑 이후에 비로소 소수의 말이 처하는 자리마다 상징 권력의 소외와 폭압의 역사가 시작된다. 시 속에서 그려지는 처참한 살육은 사육제의 카니발이 아니라 태초의 대재앙과 통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입술이라는 말에서 언어라는 말이 떨어져나가면서 상징과 권력을 소유하는 인간의 역사는 시작된다. “기쁜 병의 시간들”이라는 규정은 다름 아닌 21세기 현재 속에서 이재훈이 발견한 아이러니다. 이재훈은 그것이 근원적이라고 갈파한다. 때문에 “당신, 진리가 도처에 즐비한데 왜 이곳에 오셨는가요”라며 메시아와 가짜 진리와 가짜 믿음을 야유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삶은 구원이 불가능하므로 “밤이 모든 이유”가 되는 길이고, 그 길이 “세속의 성전이다.” 구음이라고 말했을 때 믿음과 몸(입술)과 언표 행위와 인식과 존재가 한몸이라는 말이 된다. 바벨탑 이후에는 이것들이 갈가리 찢겨 분화가 시작된다. 역사 시대로부터 근대 이전까지를 지배한 상징 권력은 언어였다. 근대에 언어에 더해 보태어지는 상징 권력은 언어와 노동과 존재의 분기점에서 태동한다. 이후에는 상징을 실체적인 권력으로 전화하려는 노력이 자본의 자가 발전에 집적된다. 이재훈이 말하는 “세속의 성전”으로서의 길은 때문에 근원으로부터 유리된 공간이다. 성서의 알레고리를 뒤집어서 유형지의 알레고리가 태어나는 것이다. 이재훈의 전언을 받아들이면 모든 시는 유형지에서의 기록이 될 것이다.

_ <현대시>, 2012년 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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