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욕(無慾)의 명징함을 찾아서

 


조해옥

 

 


1. 이중적 기표로서의 돌

 

돌은 아득히 오랜 시간에 걸쳐 존재해왔고, 멀고 먼 미래에도 변함없이 존재할 것이다. 돌에 축적된 시간의 지속성으로 인하여 돌은 유한한 시간을 사는 인간들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 돌의 불변성과 견고함은 인간이 돌에 신성을 부여하게 된 이유이다. 이재훈 시인의 돌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들을 보면, 그는 돌의 영원한 시간성 외에도 욕망의 권력구조가 주도하는 세상 바깥에서 자신을 초연하게 빛내는 존재라는 점을 발견해내고 그것에 그의 의식을 집중시킨다.
이재훈 시인은 돌에 인간의 욕망을 투사시키고 그 욕망을 실현시킬 대상으로 돌을 대하는 태도를 거부하고, 오히려 돌은 인간 세상과는 무관하게 초월해 있는 하나의 자연물임을 그의 돌 시편들에서 잘 보여준다. 돌은 인간의 욕망의 논리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이라는 것에서 이재훈 시인의 시적 사유가 시작된다. 「돌의 골짜기」, 「돌의 환幻」, 「수난의 돌」, 「돌의 시간」 등 그의 일련의 돌에 관한 시편들에서 돌은 시인이 지향하는 무욕과 자유로움 등이 형상화된 존재로 나타난다.
돌을 매개로 하여 무욕과 탈속을 추구하는 이재훈 시인의 시 의식은 어찌 보면, 세상을 대하는 그의 이분법적 사유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재훈 시인의 시적 자아는 그 자신 역시 세상에 속한 자임을 분명히 인식한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인간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삶의 전제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죽음 제의를 치르는 “주술적 인간”(「주술적 인간」)이 되기도 하고, 돌과 식물과의 동일시를 시도하기도 한다.

 

부러진 돌부리에 채인다
굴러다니는 돌이 아니라
올곧게 서 있다가, 부러진 돌
창과 칼 혹은 바람이
돌의 몸을 반 동강 냈을 것이다
사방이 어둠이었고
나를 길에 내던졌던 사람들의 눈빛만
어둠 속에서 반짝하던 밤들이었을 때
발바닥 돌덩이가 내 존재를 떠받칠 때가 있다
돌이 내 집을 떠받치고,
아버지의 약속을 떠받칠 때
돌 위에 피의 흔적이 있다
돌은 깨져도 죽지 않는다
돌은 썩어갈 육체를 갖고 있지 않아
언제나 채이고 밟히고 놀아난다
돌에 의해 소멸한 것과 태어난 자리가 한 몸이 되는
이 모든 찰나를 지켜본 돌
어둠 속에서 세상이 어지럽게 돌기 시작하면
나는 흔들거리는 운명을 본다
흔적 없이 왔다간
당신의 영혼에 몰래 깃들고 마는 돌
부처의 얼굴도 만들고, 예수의, 마리아의 몸도 만드는
성육신인 돌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
돌로 만들어진 뭇사람 하나
― 「돌의 환幻」 전문

 

시의 화자가 다른 사람에 의해 땅바닥에 내던져졌을 때, 돌덩이가 그의 발바닥을 떠받쳐준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화자가 돌을 알아본다는 것은 의미가 깊은데, 화자와 돌은 세상의 가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자는 왜 버려진 존재가 되었을까? 화자는 “굴러다니는 돌이 아니라/ 올곧게 서 있다가 부러진 돌”과 같은 존재이다. 돌은 화자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며 그가 선택한 삶의 방향의 초석이기도 하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인식의 주체이고, 돌은 인식 대상으로 나타나는데, 화자는 돌과 동일시되는 과정을 거쳐서 돌과 하나가 된다. 각각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인 화자와 돌은 시의 후반부에 이르면,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 돌로 만들어진 뭇사람 하나/ 그 무성한 골짜기의 돌”에서처럼, 주체인 화자와 대상인 돌 사이의 간격이 소멸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의 소멸로 인식 주체인 화자는 대상인 돌과의 동일시를 이룬다. 그것은 버려진 돌, 올곧아서 부러진 돌, 밟히고 차이는 돌에서 화자가 자신의 초상을 발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돌은 그에게 영원한 시간이 무엇인지를, 올곧음이 어떤 것이지를, 다른 존재를 가장 낮은 위치에서 떠받쳐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침묵으로 말하고 있으며, 화자는 그러한 돌에서 숭고함을 발견한다. 돌에 대한 동일시와 숭고한 감정으로 그는 버려짐과 조롱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을 견인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 세상의 논리와 질서 바깥에서 존재하는 돌을 사람들은 온갖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욕망이 투영된 조형물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돌은 사람들의 논리와 관념과는 무관하게 서 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돌,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초월해 있는 돌은 현실에 절망한 한 인간을 무한한 환幻의 세계로 데려다 준다.

 

천 년 전의 시간이 쌓여 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천 년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서서히 시간의 안개가 헤어지고
천 년 아니 이천 년 전의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바람이 굴러다니고 시간이 웅웅댄다
황금도 향수도 없는 땅
돌만 무성하다
옛 책에서는 악마가 산다고도 했다
죽은 이들이 묻혔다고도 했다
아무 냄새도 기척도 없다
그릇된 소문들일 것이다
돌을 밟다보면, 억울한 생각이 든다
밟는 자와 밟히는 자와의 이상야릇한 관계
나는 돌에게 잘못한 적이 없는데
모든 사물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돌이 절벽에 박혀 있다
사람들은 돌 위에 돌을 올려놓고 소원을 빈다
골짜기에 가득한 욕망들
바람은 울고 이따금 새들이 끼룩거린다
― 「돌의 골짜기」 전문

 

천 년 전의 인간들이 쌓아올렸고 현재의 인간들이 여전히 쌓아올리는 행위는 인간 욕망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변함이 없다. 위의 시에서 돌이 켜켜이 쌓아올려진 골짜기는 인간들의 욕망으로 가득 찬 장소라 부를 만하다.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인간은 돌 위에 또 다른 돌을 올려놓으며 기원한다. 그러나 화자는 밟는 자와 밟히는 자의 관계망에 갇힌 인간들의 행위와는 무관한 돌의 본질을 발견한다. 그는 돌에서 유한성과 탐욕과 수직의 논리가 지배하는 인간 세상을 벗어나 존재하는 침묵의 형상을 본다. 욕망의 골짜기에 갇힌 인간 세상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돌은 천 년의 시간을 버텨내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돌은 인간의 욕망을 표현해주는 기표이기도 하지만, 돌의 본질은 인간 세상이 만들어 놓은 궤도와 전혀 무관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무욕의 기표이기도 하다. 시의 화자는 무욕의 기표인 돌을 통해서 인간 세상의 질서 바깥에서 존재하는 생을 꿈꾼다.

 

2. 죽음 제의祭儀로 인간을 이해하다

 

이재훈 시인의 시적 자아는 사람 세상에서 죽음의 제의를 거치고 땅에 묻히고 식물의 세상, 돌의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을 꿈꾼다. 이를 위해 시인은 설화적 시간 속으로 들어가 인간의 질서를 초월하는 주술적 인간을 다음의 작품에서 제시한다.

 

몸에서 흙냄새가 난다
난파된 배에 묶여 귀신들의 비방을 들은 적 있다
바람과 구름은 큰 정적 속으로 빨려 들었다
아이를 잡아먹는 꿈을 꾸고 난 새벽
씨앗이 되고 싶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가
역전에 누워 있는 노숙자들의 눈에 비치고 싶었다
멸시는 인간들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힘
깊은 골짝에 들어가 울며 회개를 하고
다시 인간의 운명을 얘기해도 된다
어떨 수 없이 사악하고
어쩔 수 없이 비겁한 인간에 대해
흉하다 말라
나무와 새들, 구름을 직유하는
언어들은 모두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 것
수난의 권리가 없는 나무들
무책임하게 자라고
때론 무책임하게 시드는 식물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 육체는, 썩으면 파리들과 구더기들의
생명의 성소聖所가 될
내 육체는, 아름다울까
춤이라도 출까
내 육체로 당신의 영혼을 훔칠 수 있을까
듬섬듬성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애써 당신의 운명을 기억한다
― 「주술적 인간」 전문

 

위의 시에서 화자의 내면은 현재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죽음의 시간을 꿈꾼다. 화자는 자신의 “몸에서 흙냄새가 난다”고 자각하는데, 여기에서 화자가 맡는 흙냄새는 매장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을 죽음의 제의 속으로 밀어 넣는다. 스스로 자신의 소멸 혹은 죽음이라는 치명성을 감수하는 화자의 행위는 세상에 대한 그의 부정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화자는 현재 삶에 대한 부정의식을 표출하지만, 죽음 제의를 통하여 인간의 운명적인 삶을 새롭게 인식하고자 한다. 화자가 세상에서 경험했던 인간의 삶은 멸시라는 수직관계의 사회, 사악함과 비겁, 살해 욕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흙에 묻히는 순간은 온갖 부정적이고 혐오스러운 인간 세상으로부터 그가 떨어져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 세상에 대한 화자의 가치 판단을 보여주는데, 죽음은 그에게 염오감으로 가득 찬 세상과의 차단을 뜻한다. 한편으로 화자는 죽음의 제의를 겪으면서 멸시와 사악함과 비겁과 살해 충동은 인간의 운명적 범주에 속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인간 세상을 염오하지만, 세상은 인간에게는 뗄 수 없는 하나의 운명 덩어리이며, 세상이 만들어내는 궤도 안에서 인간은 함께 움직여 나가는 한계적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사람의 세상은 멸시하는 자와 멸시를 받는 자의 수직관계가 주축이 되어 이끌어져 간다. “멸시는 인간들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힘”이라는 것을 시의 화자는 자신의 죽음 제의를 통해 깨닫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인간 세상의 부정적인 질서와 체계를 수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씨앗이 되어 수직의 사회구조에서 최하층에 속하는 노숙자의 눈에 비치는 식물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식물들은 멸시와 권리와 수난과 책임이라는 촘촘한 그물이 쳐진 사람 세상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운명과 분명히 다른 궤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 즉 나무를 비롯한 식물의 세계를 의식적으로 지향한다. “수난의 권리가 없는 나무들”은 수난이 끌고 들어오는 덩굴 줄기들인 고통과 공격과 희생 등의 말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또한 “무책임하게 자라고/ 무책임하게 시드는 식물들”은 무책임의 상대어인 책임이 연상시키는 말들인 의무, 부양, 짐, 회피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보여준다. 따라서 화자가 죽음의 시간 속에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더불어 그가 지향하는 세상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나무 혹은 식물이 상징하는 욕망으로 충돌하지 않는 세상, 자유로운 세상이다. 식물은 인간 세상의 궤도 바깥에서 자라고 시드는 자기의 시간을 자유롭게 누리는 존재들의 세계이다.

 

배에 묶였네. 거친 물결을 헤치는 밤이네. 빛을 따르지 않는 시간들. 어떤 질서도 나를 잡아둘 수 없네. 나는 결박당한 존재로 남고 싶지 않네. 비열하고 음란한 무리들과 거래하고 싶지 않네. 과오를 자랑스레 떠벌리는 사람들. 턱을 괴고 앉아 당신의 이름을 떠올렸네.
…(중략)…
황금지팡이를 들고 죽은 자들의 영혼을 불러 모으고 싶네. 당신을 안으려 했지만, 연기처럼 내 몸을 훑고 떠나갔네. 이제 그림자만 남은 당신의 흔적. 햇살이 돋아야만 기억이 눈에 차오르네. 인간을 떠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삶이라니. 수많은 돌 틈에 내던져진 몸이 있네. 한 천 년 굴러도 이름 없는 몸이 있네.
― 「수난의 돌」 부분

 

위의 시에서 비열함과 음란함과 과오의 과시로 점철되는 사람들의 세상과 자유로운 돌의 세상이 양립해 있다. 자유로움을 얻고자 하는 화자는 ‘∼하고 싶네’ 또는 ‘∼하고 싶지 않네’라는 분명한 어조로 자신의 의지로 사람 세상을 대할 때의 염오감과 자신의 결기를 표현한다. 그는 세상에 대해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그에 따라 판단하고자 한다. 그러한 자신의 선택이 수난을 초래할지라도, 그는 인간 세상을 벗어나 새로운 궤도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인간은 사악하고 비겁하고 탐욕스러움이 만든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 같은 삶의 질곡을 이재훈 시인의 시적 자아는 인간의 운명으로 이해한다. 그는 흙 속에 묻히는 죽음의 제의를 거쳐 인간 세상 바깥에서 존재하는 식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한다. 그는 또한 빛이 나지 않는 존재, 맞고 깨지고 터져도 결코 굴하거나 소멸하지 않는 견고한 존재인 돌과의 동일시를 이룬다. 그는 시인의 시적 자아가 직접 의지에 찬 어조로써 성스러운 육체인 돌의 “이름 없는 몸”이 되기를 희원한다.

 

3. 신성한 땅의 별

 

돌은 문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으며, 파괴의 도구도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돌의 쓰임새들은 돌의 본질과는 무관하다. 돌은 만물의 어머니이고, 아기이고, 집이고 별이다. 다음의 작품에서 시인은 돌에서 만물을 낳은 어머니를 발견해 낸다. 무한시간의 돌에서 인간들이 태어났다면, 인간 역시 신화적인 돌의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아득히 짐승의 울음이 들리는 듯한 돌, 피의 온기가 느껴지는 돌은 지상에 떨어진 별조각이다.

 

돌은 투명하다
그 몸에는 연혁이 없다
돌 위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돌을 욕되게 하는 것
돌은 인간 이전의 사물
기원을 알 수 없는 시간이다
…(중략)…
모든 존재는 돌에서 태어난다
돌을 던지면 울음이 들린다
돌이 땅에 던져지면 마치 아기처럼
온몸이 땅속에 안긴다
돌을 깨고 나온 사람들
돌로 된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돌을 하늘에 던지면 그저
별이 된다
― 「돌의 시간」 부분

 

이재훈 시인은 현대문명 속에서 소멸해버린 신화 속의 돌, 즉 인간을 초월하는 지상의 별인 돌을 통해 삶을 견인하고자 한다. 그에게 돌은 새로운 믿음의 대상인 것이다. 신화가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꿈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탄생하고 생명을 지속하였던 것처럼, 시인은 누구도 알아보지 못 한 돌의 신성을 그의 시에서 되살리고 싶어 한다. 신성한 지상의 별인 돌은 이재훈 시인이 추구하는 무욕의 삶을 명징하게 드러낸 사물일 것이다.

 

_ <시사사>, 2012년 3~4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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