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는 이런 말이 있다. “지금 또 여기에 말[言]이 있다고 하자. 그것이 이와 같이 밝은 지혜[明知]인가 이와 같지 않은 것인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같은 것과 같지 않은 것이 모두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곧 궤변(詭辯)과 다를 것이 없다[今且有言於此, 不知其與是類乎, 其與是不類乎, 類與不類, 相與爲類, 則與彼無以異矣].” 인간은 언어 없이는 어떤 이치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언어는 완전하지 않다. 언어는 한정된 세계만을 지시할 뿐이다. 세계 밖으로 누락된 진실에는 도달할 수 없다. 말로써 다른 입장들은 억압되고, 하나의 가능한 의미만이 진실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완전한 소통은 없다. 통상적인 의사소통은 언어의 바깥을 간신히 배제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언어로써 ‘명지(明知)’할 수 없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라캉이 말한 ‘문자’의 개념을 떠오르게 한다. 문자는 하나의 동일하고 안정적인 기원을 투명하게 지닐 수 없다. 문자가 지시하는 대상/의미는 문자의 표면에 머문다. 모든 문자는 은유의 구조와 같다. 문자가 열어 놓은 것은 의미의 전달 가능성이자 불가능성이다. 문자 내부에는 문자화할 수 없는, 억압되고 누락된 것, 즉 ‘그 무엇’이 실재한다. 따라서 아무리 정교한 언어라 해도 의미는 불확정적이며 불명료하다. 라캉의 견지에서 본다면, 문자의 심급(深級)은 바로 이 불가능성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이 문자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자는 의미화할 수 있는 것과 의미화할 수 없는 것을 ‘누빔점(quilting point)’으로 맞물린다. 이를 통해 문자는 의미와 비의미 모두를 흐르도록 한다. 바로 그 점에서 라캉의 언어에 대한 이해가 장자와 만난다. 즉, 언어로써 모든 소통을 대신할 수 있다는 믿음은 곧 환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소통 혹은 소통의 주체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호주관적인 언어에 대한 믿음 역시 그 바탕으로 돌아가 다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통은 문자 내부에 혹은 문자의 바깥으로 누락되거나 망기된 것, 그래서 문자의 이면에 머무는 의미의 실재 혹은 비의미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소통보다 앞서는 것은 모호하고 결코 표현될 수 없는 말의 ‘심급’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에서 더욱 자명하다.
(...)
문자의 심급과 편향성
그러나 나는, 이토록 성급하기만 한 물음들을 뒤로 한 채, 다만 심급이 아닌 심금(心琴)을 이야기하려 한다. 말장난처럼 들릴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고, 지금 내가 심금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심급이 지닌 모호하고 (비)의미에 가까운 어둠을 실제의 삶과 일시적으로나마 누벼 주는 지점이다. 즉, 라캉의 실재이자 장자가 말한 지혜와 지혜 아닌 것 모두를 뛰어넘는 심급에서 시작되는 문자의 은유에도 소통은 ‘있다’.
여기서 문자의 두 번째 중요한 특징이 드러난다. 문자는 보이지 않는 (비)의미를 심급으로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누군가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문자의 진정한 역설이 발생한다. 즉, 문자의 의미를 지탱하는 것은 누락된 (비)의미에 있음이 밝혀진다. 소통이란 불가능한 것들이 전달될 때, 비로소 마음을 움직인다. 문자 그대로의 표면적 의미만으로는 소통의 본질에 다가서지 못한다. 불가능성의 영역은 내가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상호주관적으로 얽힐 가능성의 조건이다. 그것이 문자만으로 시가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이유일 것이다. (불가능한 의미의) 심급이 (의미의) 소통을 보증한다. 그러므로 소통은 관념과 구체, 투명함과 투명함의 문제가 결코 될 수 없다.
이에 나는 소통의 의미를 동일성이 아닌 ‘편향성’에서 찾으려 한다. 그리고 그 논의의 출발점을 “도시”에 대한 시인의 상상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도시는 소통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모두 드러내며, 대부분의 현대 시인들이 도시에 대한 애증을 멈출 수 없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도 좋으리라.
우연히 날아온 화살에 등을 맞았다
뒤를 돌아보니 신비한 빛이 발밑으로 들이쳤다
등이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화살을 등에 꽂고 거리를 지나다녔다
겨울엔 찬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천천히 바람을 가르며
거리 위를 새겨 나간다
길의 감촉도 모른 채 떠남을 탐했다
길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명의 숲에서 충혈된 눈으로
비만한 이미지를 본다
모두 집안에 묘지를 두어 엎드려 절한다
어둠에 잠긴 강은 늘 소리를 낸다
소리의 환각을 타고
긴 여행을 떠난다
살갗을 타고 흐르는
차갑고 낯선 공기
모두 마법에 걸려 있다
복잡한 사람이고 싶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최선은
단 한 가지만 생각하는 삶
―이재훈 〈방랑의 도시〉 전문(《시로 여는 세상》 2011 여름)
근대 이후 시인에게 도시는 영감과 이러한 영감을 구속하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공간이 되었다. 도시에서의 생활은 시인의 삶을 추동하는 동시에 가혹할 정도로 건조시킨다. 모든 혁명을 대체한 기술의 자가발전 능력에 수치를 느끼면서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도시 안에 머문다. 시인은 날마다 이해할 수 없는 군중의 얼굴을 낯설게 마주하는가 하면 그 속에서 같은 감정, 이를테면 고독과 같은 것을 발견하고 안도한다. 우리는 모두 “화살을 등에 꽂고 거리를 지나다”니지만 알지 못한다. 피 흘리고 있다는 것을 감각할 수 없다. 바로 그 점에서 도시인은 절대적으로 동일한 삶을 산다. 따라서 도시는 현대의 시인에게는 꿈의 통로이자 감옥이다. 시인은 도시 어디엔가 살면서 정착하지 못하는 존재들로 남겨진다. 이재훈 시인이 정확히 읽어내고, 또 우리가 공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도시는 딱딱한 건조물로 이루어진 미로이며, 시인은 이 미로 속을 끝없이 헤매 다니는 동안, 의미화할 수 없었던 수많은 (비)의미들로써 시를 쓴다. (이에 대하여 시인은 “여행”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재훈 시인은 에두르지 않는다. 그의 사유는 정직하다. “비만한 이미지”를 뚫고 단 하나의 의미(“소리의 환각”)를 듣고자 한다. 그의 관념에 대한 편애는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나 또한 시인이 말하는 “단 한 가지만 생각하는 삶”을 그렇게 편향되게 상상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소통은 편향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닐까. 이때 편향이란 나르시시즘적 동일화가 아닌 것, 전체화할 수 없는 기우뚱한 기울임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심급에 존재하는 의미의 불가능성이 소통의 장으로 올라올 때 그것이 지니는 진정한 의미는 세계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자기동일성의 무대를 깨트리고 편향과 편애로 흘러가도록 놔두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전체주의적 기획과도 연결되지 않는다. 소통은 그야말로 파열점에서 만들어진다. 심금은 하나의 주제, 하나의 이야기로 번역될 수 없다. 심급의 불가능성이 소통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_ <유심>, 2011년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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