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출간된 이재훈의 시집 <명왕성 되다>에는 육성(肉聲)이 담겨 있다. 많은 젊은 시인들의 시가 현란하긴 하지만 그들의 시에서 삶의 무게가 직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재훈의 시집에는 2000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환멸과 고뇌가 격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재훈의 시는 ‘나’로부터 벗어나지 않지만 그 ‘나’는 사회로부터 오는 자극에 대해 격렬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그만큼 시대의 인장이 찍혀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더욱 지독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전형적인 영혼을 살펴볼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 영혼은 시대에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만 반응하지 않는다. 세계로부터 고통 받는 그 감수성 짙은 영혼은 어떤 도주로를 뚫고자 한다. 그래서 영혼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시집을 여는 시인 「비비디 바비디 부」는 시인이 처한 현재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눈은 카메라를 닮았다.

노출을 열고

몇 시간 동안 창밖을 보면

불빛만 남은 세계.

칼 맞고 피 흘리는 거룩한 세계.

지친 육체는 허공이 가져 가고

영혼만 달랑달랑 소란하다.

 

이재훈 시인의 눈에 비치는 세계는 어떠한 곳인가? 세계엔 불빛만 남아 있다. 그 불빛은 현란한 도시의 야경을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시인의 눈에는 폭력으로 인한 희생의 피가 묻어 있는 핏빛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폭력적인 세계는 희생자로 가득 찬 ‘거룩한 세계’다. 핏빛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시인의 육체는 지칠 대로 지치고 영혼은 “달랑달랑 소란”해질 정도로 빈곤해진다. 파괴된 영혼이 일으키는 소란은 도시의 소란과 관련된다. 이재훈 시인에게 서울이란 도시는 “나의 메디나,/ 시인들의 공화국”(위의 시)이다. 하지만 시인은 「만신전(萬神殿)」에서 “도시는 너무 시끄럽습니다. 가슴속에서 귀신들이 포식하고 구역질하는 소리 들립니다”고 하여 도시에 대한 구토감을 드러낸다. 시인에게 서울은 시인들의 공화국이자 귀신들이 시끄럽게 토하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도시에 대한 이러한 양가적인 태도는 보들레르 이후 현대 시인의 전형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재훈 시인은 그러한 태도를 직접적으로 격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포식하고 토하는 귀신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시인은 언제나 비상을 꿈꾸는 존재이다. 하지만 도시에서 사는 시인은 “마음껏 날고 싶었지만,/ 이곳에 살기 위해선 참아야 했”(「안드로메다 바이러스」)다고 한다. 이재훈 시인은 그러한 시인에 대해 ‘외계인’이라고 명명한다. 그 외계인―시인은 지구에 유폐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탈출을 꿈꾼다. 즉, “서로의 키를 재고 우쭐거리”는 수학의 미학이 지배하는 지구에서 다시 날고 싶어 하는 이 외계인은 “살아 나갈 도주로를 찾”(같은 시)는다. 그 도주로란 “아름다운 북극의 얼음 위에서/ 지혜의 말들을”(같은 시) 얻는 데로 나아가는 길이다. 하지만 그를 묶어 놓은 이 세계의 밧줄은 쉽게 풀리지 않을 테다.

이 세계에서 사는 삶이란 “육십억 분의 일일 뿐”으로 사는 것이며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맥주 캔. 먹다 남긴 컵라면.”(「매일 출근하는 폐인」)과 같은 폐품으로 버려진 채 사는 것이다. 시인은 “하루하루를 버티다” “외치고 울부짖”(같은 시)을 수 있을 뿐이다. 지구에 유폐된 외계인의 삶은 이렇듯 쓰레기가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환멸과 구토 속에서 외치고 울부짖는 그는 언제나 ‘거대한 허무’에 맞닥뜨린다. 시인은 대부분의 도시인들이 그렇듯이 하루하루 버티는 삶을 살아나간다. 그는 시끄러운 도시 생활 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여유도 가지지 못하고 갖가지 노동에 파묻혀 살아가야 한다. 「명왕성 되다」를 보면, 시인은 몽상에 잠기고 영혼을 비상시키기 위한 시간을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겨우 얻는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 시인만이 아는 내밀한 기억들로 가기 위해서 시인은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는다. 눈을 감은 시인은 자유로운 연상에 들어서고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면서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몽상은 지하철의 기계소리에 방해받고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런 리듬”은 시인의 몽상에 지속적으로 개입해서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한 현실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리듬은 시인을 옥죄는 오랏줄이다. 도시의 일상에 묶인 시인으로서는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들어갈 자신이 없”으며 “신성한 모험”도 의심스럽기만 하다.

「다정한 재봉사의 재판」을 보면, 이 세상은 “유리로 만든 방”이며 몽상하는 시인을 죄인 취급하기도 한다. 이 세계는 재봉사로 비유된 시인을 ‘유리방’에 가두고는 유리를 통해 보이는 세상을 보고 “그대로 옷감을 짜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몽상하는 시인으로서는 그러한 명령을 따라야 하는 일이 고통이다. 그는 “하늘을 날고 있는 제 모습을 짜고 싶었”으며 “저 먼 세계를 비상하는 영혼의 고난함을 짜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만한 이미지”만을 보여주는 세계―“문명의 숲”―는 시인이 “매일매일 똑같은 무늬를” 짜도록 강요할 뿐이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시인은 탈출을 더욱 더 열망하게 될 터,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다./ 열대를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킬리만자로」)라는 담담한 진술은 이러한 열망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고 하겠다. 시인이 원하는 것은 문명의 숲으로부터 벗어나 “위대한 숲의 시를 쓰”(같은 시)는 것이다. 그 숲은 열대와는 멀리 떨어진 겨울 숲이다. 겨울 숲은 “목숨까지 다 토한”(「겨울 숲」) 어떤 兄이 먼저 떠나간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문명의 숲’에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시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도시 생활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상황과 도주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시인의 말이 빚어진다. 하지만 ‘형’처럼 겨울 숲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던 자책감이 어떤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내 입술은 봉인되지 못하고/ 부끄러운 고백들을 나불댔네”(「진흙의 봉인」)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인의 시는 “결국 슬픔이 되고 공허가 될 말들”이였으며 “징그러운 말들의 시체”(같은 시)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시인은 이 말들이 “반성의 포즈로 모두를 속일 수 있었”(「침묵의 세계」)다고도 말한다. 이러한 자기 부정은 또 하나의 반성으로도 볼 수 있겠으나 한편으로 어떠한 도주로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모색으로서도 읽을 수 있다. 위대한 숲의 시를 쓰고 싶었다는 고백만으로는 이 문명의 숲에서 겨울 숲으로 통하는 도주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는 우선 “혀를 깨무는 연습”(같은 시)부터 하여 ‘침묵의 시민’이 되는 데서부터 다시 출발하고자 한다. 왜 혀를 깨물고 침묵하고자 하는가? 침묵 속에서 소멸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소멸은 또 다른 생성으로의 길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촛불도 아니고 감나무도 아니다.

미끈한 자동차도 아니고

달콤한 솜사탕도 아니다.

차갑고 텅 빈 사물에

쇳물을 들이붓고 싶다.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이었다.

꿈을 꾸면

붉은 별 하나가 내게 떨어지는 사건이었다.

손이 델까 만지지도 못한 별이

마당에 내려와 날 또렷이 노려보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엎드려 울지 않겠다.

슬픔을 우스운 몸짓으로 과장하기 않겠다.

해거름에 사양(斜陽)을 보며 사흘을 울겠다.

그러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

― 「연금술사의 꿈」 전문

 

이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이 시는 앞으로의 시작(詩作)에 대한 시인의 각오를 보여준다. 슬픔을 과장하지 않겠다는 각오는 앞에서 언급한 “혀를 깨무는 연습”과 통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그 침묵의 연습은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시를 통해 드러난다. 그 침묵은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는 작업이다. 그 작업을 통해, 시는 에밀레종처럼 몸을 녹여 소멸시키고는 “에밀레 에밀레”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무엇이 될 수 있을 터이다. 그리하여 시의 목소리에는 몸이 녹아 들어가 있게 된다. 시는 육성(肉聲)을 내게 되는 것이다. 소멸을 통과하여 육성을 드러내는 시. 말의 연금술사가 되고자 하는 시인은 이 경지에 다다르고자 꿈꾼다. 이때 “차갑고 텅 빈 사물”은 시의 내밀한 세계―쇳물이 출렁대는 비밀의 성소―속으로 용해되고는 새로이 탄생할 것이다. 세계와의 지독한 불화와 이에 따른 자기비판은 이렇게 단단한 영혼의 다짐으로 나아간다. 이 시집의 첫 번째 시는 철저히 공허하기만 한 세계 속에서 “달랑달랑 소란”하기만 한 영혼을 보여주었다면, 이 시집의 마지막 시에서는 “빛나는/ 뜨거운 강철”의 영혼이 등장한다. 이렇듯 이 시집은 공허에서 단단함으로 나아가는 영혼의 드라마를 엮어내고 있다.

그런데 위의 시의 자기 다짐이 손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시집의 중추를 이루는 2부는 「대황하」 연작이 실려 있는데, 이 연작시는 불모의 세계 속에서 시인이 겪어야 하는 환멸과 고통을 뜨겁게 그려내고 있는 역작이다. 강렬한 이미지의 연쇄로 전개되는 이 연작시는 시인과 환멸스러운 세계와 뒤섞임을 환몽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세계는 모래의 강과 같은 황하로 비유된다. 「대황하 1」을 보면 “작열하는 사막에서 기다리고 기다”리고 있는 시인은 누런 모래의 세계 속에 빠지고 있다. 그런데 그 모래는 흡혈귀와 같이 시인의 피를 빨아먹는다. 시인은 “서서히 내 몸이 모래에 잠기지. 모래가 살갗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지. 물과 피가 다 빨려 가죽만 남았지. 모래가 사각사각 살가죽까지 갉아먹”는다고 진술한다. 시인의 기다림은 아마도 하늘로의 비상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이 사막은 그에게 비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막의 모래는 그의 몸에 달라붙어 그의 피를 빨아먹고는 결국 가죽만 남은 시인을 쓰레기처럼 폐기해버릴 것이다. 이 사막에서 비정한 현 한국 사회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시인이 현 한국 사회가 가하는 압력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한편, 시인은 더 나아가 “끝없이 깊은 모래 밑으로 물소리가” 들린다고 말한다. 사막은 역설적으로 강이었다는 것이다.

 

손가락 하나가 툭 꺽였다. 만져 보니 문드러져 툭 떨어져 나간다. 배를 만지니 손가락이 푹 들어가 내장이 만져졌다. 누웠다.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생은 연습이 없다. 단 한 번이면 족하다. 누웠다. 온몸에서 진물이 흘렀다. 누런 물이 땅으로 스민다. 누웠다. 스민다. 쏟아지는 모든 것들이 스민다.

― 「대황하 2」 부분

 

피를 빨아먹는 사막은 육체를 부패시키는 누런 황하임이 드러난다. 시체들이 누워 있는 이 세계에서 시적 화자의 육체 역시 부패하면서 누런 물을 흘린다. 즉 황하는 시체들의 진물로 이루어진 강이다. 「대황하 3」의 “누런 황토물이 거리에 솟구친다.”라는 구절을 보면 황하란 바로 도시의 거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시는 부패해가는 시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얼굴을 가린 채 눈빛만 쏘아 대는 사람들”(「대황하 3」)이다. 자신의 마음을 가리고 상대방에게 가하는 공격적인 눈빛은 삶의 부패를 드러낸다. 그 눈빛이 바로 ‘진물’일 것이며 ‘황토물’일 터, 「대황하 7」에서는 그 시체와 같은 얼굴 가린 사람들이 제법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음은 이 시의 후반부다.

 

뜨거운 김을 쐬고 퇴근 무렵 자동차에 몸을 싣는다. 내 얼굴에 붉은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사람들은 이미 죽음 직전의 표정을 연습하고 있다. 나는 두통을 이기기 위해 투구를 쓴다. 도도한 웃음을 연습한다. 열기를 보았다. 빛이 열기 속에서 반짝반짝 드러났다. 시장(市場)이다. 죽음의 얼굴을 파는 시장이다. 뜨거운 빛 속이다.

 

도시의 거리인 황하는 또한 시장이기도 하다. 그들은 얼굴을 가리고 “죽음 직전의 표정을 연습”한다. 시인 역시 투구를 쓰고 얼굴을 가린 채 “도도한 웃음을 연습”하고 있다. 그 웃음이란 아마도 시장에 팔리기 위한 웃음일 것이며 결국 진실한 삶을 죽이는 웃음일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 직전의 표정 짓기를 연습하면서 살아나가야 한다. 팔리기 위해 사는 이들은 경쟁자인 상대방을 공격적인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 “뜨거운 빛”이 사막―황하의 열기를 만들어낸다. 시인은 이들 삶 속의 죽음을 ‘붉은 물줄기’로 상징화한다. 죽음의 표정을 짓는 이들의 얼굴엔 죽음을 가리키는 붉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그리하여 이 죽어가는 삶에는 언제나 시체 냄새가 날 것이다. 시인은 “몸 가죽을 슬쩍 잡아 찢는다. 온몸에 누런 물 내음이 가득 퍼진다”(「대황하 8」)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런 물이란 물론 부패해가는 육체가 흘리는 진물이다. 그러므로 마실 수 없는 물이다. 죽음의 삶, 거짓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황하에서는 “실체는 없고, 허상만 가득”해서 “바닥이 보이지 않”(「대황하 9」)는다. 그곳에서는 “강물에서 물을 먹지 못”하며 “재갈을 물린 입으로 소리를 질러”야 하고, 그래서 “갑판에 비명이 가득”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생수 위에서 목말라 죽어”(같은 시)가야 한다.

「황하」 연작은 이 세계에 대한 시인의 지독한 환멸을 보여준다. 그 세계는 구체적으로 서울을 가리킨다. 서울은 “한여름에도 눈이 내리고/ 한겨울에도 태풍이 오는 곳”으로서 “일찍 배운 증오로/ 뼈와 살을 태우는 곳”(「비상」)이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 나타나곤 하는 이상 기온 현상이 수시로 닥치는 도시, 증오 속에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도시가 서울이다. “죽는 법을 배우지 못”하여 죽지 못한 시인은 이 속에서 “새들의 노래를” 부르는 자다. 그러나 어떻게 이 시체들로 가득 차 있는 공간에서 비상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대황하」 연작을 마무리하는 시인 「대황하 11」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쓴다. 다음은 이 시의 마지막 연이다.

 

붉은 눈물,

가만히 들어와 출렁인다.

거리를 걷고 있으면

온몸이 하늘로 붕 뜬다.

병든 몸 위에 새들이 날고 있다.

 

죽은 삶을 상징하는 ‘붉은 물줄기’가 이 시에서는 ‘붉은 눈물’로 변환되어 나타난다. 죽어가는 삶에서 비롯되는 슬픔, 그 슬픔이 ‘붉은 눈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인은 이 슬픔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비상의 힘을 마련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죽음 속에서 슬픔으로 마음이 출렁이게 될 때, “온몸이 하늘로 붕” 뜨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병든 몸 위에 새들이 날고 있”음을 발견한다. 더 나아가 시인은 날아가고 있는 저 새들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 역시 발견한다. 「건기(乾期)의 새」에 따르면, 새들은 “하늘 귀퉁이 구름을” 밀고 있다. 그런데 그 행위는 “어떤 운명을 잠시” 미는 것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구름을 미는 행위는 “물 쪽으로 향한 구름에 몸을 던”지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물이란 황하에서와 같은 누런 물이 아니라 “이슬의 영롱함과 풀잎의 생명”과 같은 맑은 물일 터이다. 이 맑은 물을 함유하고 있을 구름 쪽으로 몸을 미는 행위는 황하 같은 세상에서 삶의 운명을 바꾸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꿈꾸는 비상이란 맑은 삶에의 의지를 의미한다.

시인이 북극을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최초의 물”이 결빙되어 이루어진 북극의 얼음이야말로 ‘맑음’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그 맑음은 인간의 세계를 넘어선 어떤 세계다. “언젠가 인간의 시간은 멈추겠지만/ 얼음의 시간은 멈추지 않겠지.”(「북극의 진화」)라고 시인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얼음의 시간대에서 인간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시인은 좀 더 광활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시인의 인식에 따르면, 대자연의 순수성이라고 할 북극의 얼음은 인간 세계 밑바탕에서 세계를 세우고 허문다. 「북극의 진화」는 인간 세계 바깥의 시야에서 “인간의 소리”를 인식하고 있는 대작이다. 이 시의 후반부를 다시 읽으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최초의 물은 멈추지 않고 질퍽대면서

어느새 허벅지까지 올라온다.

솔직히 나는 진화했다.

물이건, 얼음이건 간에

먹고 버리고 회피하면서 몸뚱이를 지켜왔다.

상점에 들어오면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기억을 소환해

이 도시를 담금질한다.

한 달 새 교차로엔 거대한 빌딩이 들어섰다.

대형 마트와 옷가게가 들어서고 그 위에 사람들이 산다.

지도는 또 바뀔 것이다.

대륙의 한 점이, 또 한 점이 되고,

다시 한 점이 덧입혀져 거대한 점이 될 때까지.

저 멀리 철새는 날아오르고

꽃잎은 몽우리를 틔울 것이다.

내 숨은 어느 산맥을 따라 이동할까.

밤이 되면 지도의 소리는 막힌다.

거칠게 울고 우는 소리만 가득하다.

인간의 소리만 가득하다.

모든 것이 까마득하다.

 

 

_ <현대시>, 2011년 9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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