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성의 파토스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

 

 


1.

언젠가부터 한국시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주체의 문제로 전이되어왔다. 탈주체 이론 이후 주체의 자리가 ‘빈공간’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면, 이론적으로 주체는 살거나 죽는 주체가 아니라 살거나 죽는다고 오인하는 주체와 다르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때문에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의식을 포함한) 의식 그 자체를 유발하는 주체의 기원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시적 사유의 중대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데, 주체의 기원에 대한 시적 사유 속에서 죽음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파토스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시들이 죽음에서 비롯된 과도한 허무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탈주체의 주체는, 테리 이글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리 자체를 즉흥적으로 다루는 것이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방식”임을 깨달아 “우리 자신의 현존에 근거가 없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죽음과 가깝게 살아”갈 수 있는 주체이다. 하여 탈주체의 주체는 “죽음을 소름끼치게 상상하는” 저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소멸 혹은 죽음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오인’에 의한 주체의 구조를 의식하는 주체라 할지라도 그것은 강력한 현실작용 위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는 원래부터 ‘빈 공간’임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육체에 기반하고 있는 주체로서는 죽음에서 비롯되는 ‘소름’에서 해방되기란 힘든 일이다. 주체의 기원을 사유하고 해체하는 주체는 ‘자아’로서의 강력한 통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탈주체의 주체 역시 원래부터 죽음과 무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죽음’의 유령으로부터 끊임없이 소환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장욱이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상징계를 균열시키는 동시에 주체마저도 하나가 아닌 둘로 균열시키는 나가는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면, 이재훈은 주체의 소멸에서 비롯된 파토스적 세계를 응시한다. 이장욱의 시가 주체와 상징계의 균열을 매우 “드라이한 저음”(함돈균)으로 드러내고 있다면, 이재훈의 시는 균열된 주체 틈새로 새어나오는 습한 신음에 젖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주체의 균열과 죽음에 대한 시적 사유의 시차(視差)를 드러내는데, 이는 최근 시들의 흐름을 바라보는 시각에 선명한 입체성을 제공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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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재훈의 시집 <명왕성 되다>는 소멸의 감각으로 점철되어 있다. ‘소멸’이라는 저주의 늪에 걸려든 시적 주체는, 그러나 서서히 가라앉는 소멸의 늪에서 이 세계를 응시하는 뜨거운 눈을 가지고 있다. “내 눈은 카메라를 닮았다. 노출을 열고/ 몇 시간 동안 창밖을 보면/ 불빛만 남은 세계./ 칼 맞고 피 흘리는 거룩한 세계.”(「비비디 바비디 부」)라고 했듯이, 그의 시는 소멸의 망막에 비친 세계에 대한 기록이다. 소멸에 대한 예민한 감각으로 말미암아 그의 시에 비친 세계상은 냉철하게 묘사되기보다는 그의 내면의식에 되비친 이미지로 점철된다. “내 눈은 카메라를 닮았다”고 선언했을 때, 그 눈은 ‘카메라 아이’(camera-eye)와 같은 냉철한 기계적 속성이 아니라, “붉은 눈물,/ 가만히 들어와 출렁이”(「대황하11」)는 눈이다.
하여 그의 눈은 이미 소멸과 허무에 익숙한 눈이기도 하다. “소멸을 향해 스스로 전진하는 몸짓.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풍경”(「대황하1」)과 같은 구절이 말해주듯이 그의 시선은 허무와 소멸이라는 감관(感官)을 관통한다. 혹은 “누웠다. 땅이 따뜻했다. 내 등은 늘 따뜻한 곳만을 찾는다. 누웠다. 썩는 냄새가 났다. 옆을 보니 시체가 누워 있다. 시체의 살이 썩고 있다.”(「대황하2」)에서 확인되듯이, ‘대황하’의 물결을 시즙(屍汁)으로 치환시킴으로써 소멸할 수밖에 없는 육체의 치욕과 굴욕을 드러낸다. 그래서 “아무것도 거둘 수 없는 몸./ 냄새나는 몸./ 위로할 것 없는 몸.”(「흠향(歆饗)」)이라거나 “타닥타닥, 누군가 내 몸을 읽는 소리”(「세이렌의 도서관」)와 같은 소멸과 허무 의식은 이재훈의 시를 지배하는 의미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재훈의 시적 사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멸과 허무를 감각하되 그것에 대적하여 싸우는 치열한 의식의 장(場)으로 나아간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촛불도 아니고 감나무도 아니다.
미끈한 자동차도 아니고
달콤한 솜사탕도 아니다.
차갑고 텅 빈 사물에
쇳물을 들이붓고 싶다.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이었다.
꿈을 꾸면
붉은 별 하나가 내게 떨어지는 사건이었다.
손이 델까 만지지도 못한 별이
마당에 내려와 날 또렷이 노려보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엎드려 울지 않겠다.
슬픔을 우스운 몸짓으로 과장하지 않겠다.
해거름에 사양(斜陽)을 보며 사흘을 울겠다.
그러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
-「연금술사의 꿈」 전문

이 ‘연금술사의 꿈’은 유한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주체의 열망과 맞닿는다. 인간의 유한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치열한 고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재훈의 시가 ‘유한성의 파토스’로 가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주체의 ‘결여’에 대한 자각 속에서 소멸과 허무 의식은 들끓는다. 그러나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 혹은 “소멸이/ 내 먹는 밥”이라는 고백 속에서 허무의 세계를 대적하고자 하는 주체의 결연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나’라는 주체의 허무와 소멸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만들어내는 “신명”이기를 간절히 기구(祈求)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신명 속에서 만들어지는 “뜨거운 강철”은 꿈속에서 “내게 떨어지는” “붉은 별”이자 “사건”으로서 재주체화의 과정에 있는 시인이 지향하는 ‘연금술’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주체의 ‘진화’로도 진술된다. “나는 자꾸 진화한다./ 詩人이었다가 일용근로자였다가 백수건달이었다가 독학자가 된다./ 어떤 모습에도 아파하지 않는 내성(耐性)의 몸”은 “누구의 소유도 아닌” “연혁이 없는” “몸”이다. (「비상」) 누구의 소유도 아닌 몸은 자신의 연혁을 지움으로써 탈주체화를 도모한다. 주체의 ‘결여’화를 도모하고 ‘결여’에 직면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주체 이론이 다다른 윤리학의 정점이다.
그러나 지상의 ‘소멸’과 천상의 ‘붉은 별’이 지니고 있는 간극은 너무 크다. 시인이 마주하고 있는 지상은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맥주 캔. 먹다 남긴 컵라면. 참기 힘든 소음. 역겨운 화장 냄새와 비둘기 똥 냄새”(「매일 출근하는 폐인」) 따위로 가득한 현실이다. 급기야 시인은 “육십억 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 왜소한 존재로서의 절망감을 드러낸다. “벌거벗은 육체 사이에서 신음”하거나 “저녁마다 매연을 맡으며 구역질을 하”면서 “허무의 군락 사이를 헤매”(「킬리만자로」)야 하는 현실은 처음부터 혁명 혹은 개조가 불가능한 대상인 것이다. 하여 그의 시는 결국 어떤 ‘근원’의 세계에 의탁하기도 한다. “돌의 근원”.(「돌」) 구체적인 물상(物像)으로 펼쳐진 광활한 세계를 폐기함으로써 드러내는 “짐승도 없고 새도 없고 울음도 없”고 “깊은 밤 달빛”이 “제 몸인 양” “푹 잠”긴 “돌의 근원”을 향한 회귀욕망. 말할 것도 없이 ‘돌’은 추상화된 세계로서의 사물이다. “차갑고 텅 빈 사물에/ 쇳물을 들이부”(「연금술사의 꿈」)음으로써 이 세계를 연금술적으로 해득하고자 했던 시인의 욕망은 잠재성의 차원에서 꿈틀거릴 뿐이다.
문제는 소멸과 허무 의식이다. 인간이 지닌 소멸과 허무의식이야말로 ‘탈주체’가 맞닿은 가장 큰 장벽이기 때문이다. 소멸과 허무 의식은 유한성의 세계관 속에서 강화된다. 일자(一者)로 수렴된 무한은 일종의 ‘유일신’으로서 유한한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대척점에 서게 된다.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연금술사의 꿈」)에 대한 열망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의 형벌”을 견뎌야 하는 “육십억 분의 일”(「매일 출근하는 폐인」)이라는 주체 속에서 들끓는다. 이 양자(兩者)의 간극을 견디면서 “천사와 함께 비탄의 노래를 부르”고 “처형의 시간”((「연옥의 산」)을 기다리는 존재가 바로 이재훈의 시적 주체이며, 이 시적 주체의 발화가 그의 시세계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 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명왕성 되다(plutoed)」 전문

지하철의 시간은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이다. “기계소리”만이 들리는 지하철 속에서 시인은 정주할 힘을 전혀 갖지 못한다. “도시의 生”을 향한 “새로운 문이 자꾸 열리”지만, 도시의 기계적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은 그는 섣불리 지하철의 리듬에 몸을 맡기지 못한다. “男子가 바닥에 구토를 하”거나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지하철에서 “심장은 슬픔을 견디기 위해 존재”(「귀신과 도둑」)할 뿐이다. 도시적 삶의 조건을 수락할 수 없으면서도 도시 ‘내부’에 존재하는 시적 주체는 도시 ‘내부’의 ‘바깥’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 ‘내부’에 거주하고 있으면서도 도시적 삶에 탑승하지 못하는 주체는 그야말로 태양계에서 버림받은 ‘명왕성’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계의 행성과 유사한 궤적을 돌고 있는 명왕성처럼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는 시적 주체는 도시 ‘내부’의 ‘바깥’에서 “푸른 멍자국”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속의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는 고백. 이 ‘허무’는 “도시의 生”을 겨냥한 것이다. “도시의 生”은 바로 허무다. 이재훈은 이 사실을 명확히 직관한다. “도시의 속도에 적응된 발로 허공을 구른다”(「언덕의 아들」)고 했듯이, 도시의 삶은 “허공으로, 바람 속으로 달리”는 것에 불과한 것. 시인의 내면에 들어앉은 소멸과 허무의식은 도시의 삶 전체로 확장되고 있다.
그렇다면 “아무도 모르는 그곳”은 주체의 허무를 관통한 이후의 그 어떤 세계가 아닌가. 그곳은 내 안의 “허무”를 관통하여 ‘결여’의 자리에 정주할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시인은 고백한다. “내 안의 허무로 들어갈 자신이 없다.” 쉽게 뛰어들지 못하는 ‘도시의 생’과 ‘허무’의 사이에서 시인은 배회한다. 그 배회의 실상은 어떠한가? 시인은 내면의 허무로써 “모든 것이 까마득”한 이 세계를 “얼음의 시간”(「북극의 진화」) 속에 감금하는 적멸(寂滅)의 사유로 나아가려함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은유에 머물렀다가/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며 와르르” “무너지”는 “형체 없는 얼굴”(「거울 속의 얼굴」)로 귀착되고 만다. 이처럼 이재훈은 소멸과 허무를 도시의 폐부까지 불어넣는 동시에 멸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 주체의 고통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이러한 고통은 일찍이 진이정이 보여주었던 “나라는 물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각성이/둔한 내 뒷골을 쑤셔야만 하리라 하하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니,/그럼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단 말인가!”(「아트만의 나날들」)와 같은 고통의 공동체를 이룬다.

4.

주체의 기원 형성을 ‘오인’으로 파악하고 주체의 자리를 ‘빈공간’으로 파악하는 사유의 방식은 궁극적으로 아파니시스(aphanisis), 즉 주체의 소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방식은 주체를 지속적으로 재정립하는 윤리의 역능을 발휘한다. 주체의 소멸이 주체의 허무와 죽음으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경유한 새로운 주체로 재탄생하는 과정 자체가 윤리성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 이론과 무관하게 주체의 실상은 매우 복잡다기한 고통으로 가득하다. 그 고통에서 자유롭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주체의 분열과 고통을 마주하는 시인의 태도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이장욱과 이재훈은 주체와 세계 속에 내재한 균열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방식에 있어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장욱이 시의 주체를 선험적으로 파기함으로써 소멸과 죽음에서 발생하는 파토스로부터 자유롭다면 이재훈의 시적 주체는 파기되는 ‘과정’ 내에 존재함으로써 유한성의 파토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때문에 이장욱의 시적 상상력은 매우 자유롭다. 어느 한 시점에 매이지 않고 세계의 구획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주체의 자장과 진폭을 마음껏 넓히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생년월일’을 파괴함으로써 획득하는 새로운 주체의 ‘생년월일’의 복수성(複數性)을 무한하게 추구하고 있다. 이는 주체 기원의 복수화(複數化)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주체의 관성(慣性)을 깨고 있다는 점에서 파토스적 주체마저도 사라질 수밖에 없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에 이재훈은 유한성의 파토스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있다. 이재훈의 시적 주체는 자기 소멸의 사태에 예민하게 감응함으로써 시적 파토스를 더욱 강화한다. 이러한 파토스는 분열의 주체가 아니라 실존적 주체와 강력하게 결합한다는 점에서 매우 현실적이다. 주체의 결여에 선험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결여’를 향해 나아가는 고통의 결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러나 이장욱과 이재훈에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여전히 주체의 기원과 소멸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장욱이 주체와 세계의 ‘생년월일’을 탐색하고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세기”(「생년월일」)로 나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면, 이재훈 역시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연금술사의 꿈」)에 대한 열망을 응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열망은 라캉주의 좌파의 관점에서 보자면 윤리의 원질(原質)에 해당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실재를 경유한 윤리적 주체는 뚜렷한 정치적 주체로서 성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근의 시적 주체들이 대개 실재를 경유하는 데만 골몰할 뿐, 뚜렷한 정치적 윤리를 탐색하는 데 있어서 다소 소극적인 것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주체의 윤리를 정치적 윤리로 확장해나가는 작업이 이루어질 때, 이들의 시가 보다 큰 진폭과 파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_ <시인수첩>, 2011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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