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한의 감성과 주체의 공백화

 

 

바디우는 낭만주의적 전통이 오늘날까지 남긴 유일한 정신적 자산이 있다면 유한성에 대한 예민한 자각이라고 정리한 바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유한성에 처해 있다는 자각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죽음에 귀착되게 하는 문제를 발생시켜왔다는 것이다. 열망과 좌절의 간극 속에서 발생하는 유한성의 페이소스는 낭만주의 전통 이후 동일성의 시학이 지니고 있는 감성적 자질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시인은 본질적으로 죽음과 파국이라는 유한성의 예감에 치를 떠는 존재다. 낭만주의적 영원과 신성, 혹은 무한자를 향한 열망은 인간이 자각하는 유한성의 강도를 더해왔던 것이다.
유한의 감성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바디우는 독특하게도 동일성의 대상인 무한을 일자(一者)가 아닌 다자(多者)로 해체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한다. 이른바 무한의 탈신성화. “무한을 아우라 없는 다수성들의 유형학 속에 산포시키기 위해 일자의 지배에서 끄집어내”는 것이다. 주체마저도 일자(一者)가 아닌 이자(二者), 혹은 다자(多者)로 해체되고 빈 공간이 됨으로써, 무한과 주체는 일자가 아닌 오직 “무한한 다수들”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무한한 다수들”은 일자(일자)의 세계가 아니라 ‘빈 공간’ 혹은 공백의 세계이다. 따라서 무한과 주체가 ‘공백’으로 환원되고 그 자체가 “무한의 다수들”이 됨에 따라 주체의 유한성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동일성의 시학(김준오)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시사하는데, 인간 주체(유한)의 공백과 절대자(무한)의 공백이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유한/무한의 대립관계가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디우가 지향하는 주체는 ‘공백’을 감싸는 둘레가 없는 일자(一者)를 폐기한 ‘비-전체’로서의 주체이다. 둘레를 제거한 인간 주체가 발산하는 무한의 공백은 무한자의 공백과 자연스럽게 겹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과 소멸, 즉 유한을 극복하고자 하는 현대시의 한 방향은 주체의 공백을 둘러싼 테두리를 제거함으로써 주체의 자리를 무화(공백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동일성의 시학은 무화되고 만다. 동일성의 시학이 절대․영원과의 분리의식을 해소하고자 유한자의 무한자에 대한 열망에 근거한 것이라면, 바디우의 주체 관점에서 동일성의 욕망은 폐기되어야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성의 시학(김준오)에서 시적 주체는 보다 큰 일자(一者)로 귀속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다. 대립과 적대 관계 속에서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향한 열망을 품게 되는 동일성의 욕망은 서정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내포한다. 에밀 슈타이거가 지적했듯이 서정적인 것은 세계와의 조화로운 상태 그 자체라면, 지금 여기의 세계를 부정하고 다른 세계를 열망하는 동일성은 페이소스를 필연적으로 동반하기 때문이다. 왜소한 존재로서의 주체는 이 세계의 결핍과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영원과 무한의 세계를 동일성의 대상으로 삼는다. 세계의 유한성을 향한 대립과 갈등 속에서 배태된 적대적 감정이 바로 페이소스이며, 영원한 무한자를 향한 동일성의 욕망을 충동하는 배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디우의 철학적 관점에서 동일성의 시학은 극복대상이 되고 만다. 바디우에게 동일성의 시학은 낭만주의적 전통의 유한성의 파토스를 이어받은 일자(一者) 중심의 세계관적 산물이다. 바디우는 유한과 무한의 대립이라는 낭만주의적 유산을 극복하고 주체의 공백 속에 내재한 무한의 공백을 읽어냄으로써 모든 것이 죽음(유한)에 귀착되고 마는 오늘날의 정신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자로서의 주체와 무한에 감금되지 않고 주체와 무한의 감싼 테두리를 제거함으로써 ‘공백’이라는 ‘비-전체’를 발견하는 것. 이로써 유한자로서의 동일성 욕망이 응축하고 있는 유한성의 페이소스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허무주의적 탈주체 이론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주체의 윤리를 가장 극단적으로 정립해 나가고자 하는 정치적 주체이론의 근간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의 시를 읽는 일은 의미 있을 것이다. 90년대 이후 한 흐름을 형성해왔던 주체의 균열과 유한의 감수성은 여전히 한국시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상자된 이재훈과 김영미의 시집 역시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2. 신성(神聖)의 파국과 균열의 기록

이재훈의 시는 신성(神聖)을 욕망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시원(始原)에 대한 원대한 물음”이 있으며, “문학하는 이유가 자기 구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흠의 고백」)는 제1시집(<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2005)의 고백을 환기한다면, 그의 시적 지향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인간 개체와 시원을 연결 짓는 원대한 꿈은 시의 유년을 지배했던 열망이 아닐 수 없다. 시가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발원되고 사회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존재와 우주, 그리고 근원과 시원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했던 물음이기 때문이다. 이재훈의 제1시집은 바로 그런 물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컨대 “새의 등을 올라타고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으며 나스카 평원에 새겨넣은 神의 형상을 한눈으로 보고 싶었다”(「나스카 평원을 떠난 새에 관한 이야기」), 혹은 “나는 어머니가 믿는 神의 안부가 궁금해졌지”(「사수자리」)라는 부분만을 보더라도 그의 시에 내재된 신성에의 욕망이 확인된다.
‘신성’은 자기구원의 언덕이다. 그러니까 이재훈의 시는 자기구원을 위한 ‘신성’에의 탐구에서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이재훈의 첫 시집은 ‘신성’에의 탐색으로 가득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성에의 탐색과 거기서 비롯된 균열의식으로 가득하다. “천 년 동안 날아가고 천 년의 천 년을 날아가지. 아무리 날아도 어딘가로 닿지 않지. 시간을 견디지 못해 몸은 찢어졌지”(「순례2」)처럼 신성은 시인의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신성’의 분리는 인간의 전락(顚落)과도 무관하지 않으므로 시인의 시선은 인간의 깊은 무의식(“잠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깊은 동굴이었지”(「사수자리」)과 드넓은 천공(天空)을 향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서 발원되었던 것이 시인의 ‘말’, 곧 시(詩)이다. 이재훈의 시적 주체는 신성에 가닿은 시원의 언어를 찾아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가” “노래 부르는” 시의 “추장”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내 목을 자르고”서라도 말이다.(「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6년만의 시집 <명왕성 되다>(2011)는 신성에의 동일성 욕망이 결국 파국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제1시집에서도 그 균열과 파국의 징후가 보이긴 했지만, 제2시집만큼 적나라하지는 않았다. 자기구원의 문학적 가능성이 제2시집에서는 여지없이 파국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 구체적 징후는 우선 ‘소멸’에 대한 압도적 감성에서 드러나는데, 「대황하」 연작시편은 인간을 지배하는 소멸의 역사를 형상화한다. 시인은 신성이 떠나간 이 세계를 “소멸을 향해 스스로 전진하는 몸짓.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풍경”(「대황하1」)으로 진술한다. 이 소멸의 세계에는 이제 더 이상의 구원은 없다. 이재훈은 말한다. “당신의 세상은 불구의 시간이 시작되는 때”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으므로 “일부러 가부좌를 틀 필요는 없다.”(「앉은뱅이꽃」) 그렇다면 그토록 갈구했던 신성(神聖)은 어디로 갔는가? 이재훈의 시에서 신성은 이 세계와 회복할 수 없는 간극을 지닌 것으로 그려진다.

밀었다. 저 새. 군무의 몸짓이 궁중을 긋고 지나갈 때. 하늘 귀퉁이 구름을 밀었다. 타인의 몸 몇 개를 밀었다. 늙은 햇살이 들판을 토닥토닥거릴 때. 밀었다. 어둠 속으로 햇살을 밀었다. 이 세계엔 바람이 없다. 밀고 밀린 생들이 서로 겹쳐 희붐히 향기만 가득할 뿐. 잊혀진 고향 땅만 언뜻언뜻 보일 뿐. 지겹다. 밀고 밀었다. 눈을 감았다. 도도록한 마음 가운데 한 머리가 덜컹 떨어졌다. 팔짱만 낀 몸이 잠시 움찔했다. 파릇파릇 새로운 몸이 피어났다. 당신의 형상은 몰라요. 부서진 뼈의 향기는 달콤했다. 어떤 운명을 잠시 밀었다. 물 쪽으로 향한 구름에 몸을 던진다. 저 새.
- 「건기(乾期)의 새」 전문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위 시에서 시인은 회복할 수 없는 신성을 노래한다. 이 세계엔 우주의 저 끝에 있을 신성(神聖)으로 밀어줄 바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밀고 밀린 생들이 서로 겹쳐 희붐히 향기만 가득하”고 “잊혀진 고향 땅만 언뜻언뜻 보일 뿐”이다. “밀고 밀린 생들”이라 했지만, 사실 이들은 모두 ‘밀리고 밀린’ “생들”이다. 신성의 세계는 이제 인간계와 분리되었으며, 그 간극을 극복하기에 너무 메말랐다. ‘건기(乾期)의 새’란 신성을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세계에 처한 인간의 비극을 아련하게 드러낸다. 신성(神聖)이란 이제 이렇게 진술된다. “당신의 형상은 몰라요. 부서진 뼈의 향기는 달콤했다.” 그럼에도 구름에 몸을 던지는 새야말로 인간의 운명을 의미하지 않는가, 라고 말하기에는 신성과 인간의 간극에서 비롯되는 피로도가 역치에 달했다.
그나마 아름답게 형상된 이 비극의 세계는 「만신전(萬神殿)」에 이르러 그 끔찍함이 폭로되고 만다. “저는 오래전 아버지를 죽이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뒤로 수많은 신들이 제 속에 들어와 소리를 지릅니다. 홀짝홀짝 살들을 빨아 먹습니다.”“허공의 사다리엔 긴 목을 가진 시체들이 걸려 있습니다.”(「만신전(萬神殿)」) 신성을 향한 인간의 열망은 숭고함을 잃었다. 이재훈은 숭고함을 상실한 이 결핍의 자리를, 신성이 인간의 살들을 ‘홀짝홀짝’ 빨아먹는 이미지로써 끔찍하게 드러낸다. 신성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힘겹게 건너가는 “허공의 사다리”에는 “긴 목을 가진 시체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성의 세계는 해체되고 만다. “처형의 시간” 이후 도달한 “연옥의 산”에서조차 “그 어떤 존재도 이름이 없다”(「연옥의 산」)는 사실은 ‘신성’을 향한 낭만적 환상이 여지없이 파국을 맞이했음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신성한 사랑에 대해 논”하는 일이란, “구름”과 같은 헛된 것을 먹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구역질이 나서/ 나무의 텅 빈 몸에 구름을 토하”(「카프카 독서실」)는 비루함에 맞먹는다. 그런데, “텅 빈 몸”이라니. 시인은 비로소 주체의 자리를 ‘빈 공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신성과 개체의 영성적 동일성을 추구했던 시인의 세계관은 주체의 ‘결여’ 쪽으로 기우는 것이다.

그동안 숨어 있던 마음의 보풀이
비늘처럼 떨어집니다.
입김을 불면 그대로 내 살들이
냄새를 풍기며 날아갑니다.
비린내가 가득합니다.
-「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 부분

고가도로 아래로 바람이 분다.
땅속으로 분다.
이 세계의 배꼽 속으로 분다.
모든 허공으로 분다.
모든 공허 속에 인다.
-「미궁의 열두 번째 통로」 부분

신성(神聖)을 향한 욕망이 “마음의 보풀이/ 비늘처럼 떨어지듯” 허물어진다. “입김을 불면” 그대로 “냄새를 풍기며 날아가”는 “살들”의 “비린내”. 신성의 확신으로 가득 차 있던 주체는 비로소 악취를 풍기는 것이다. 강한 것은 비리다. 암석처럼 단단한 주체는 허물어질 때 비로소 독한 비린내를 풍긴다. 비린내는 주체의 강도에 비례하리라. 주체가 ‘빈 공간’이라는 자기 파국의 비수는 마침내 신성(神聖)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고가도로 아래” 부는 세속의 “바람”이 “땅속으로”, “이 세계의 배꼽 속으로” 불듯이 말이다. 그런데 “땅속”, “이 세계의 배꼽”, “모든 허공”, “모든 공허”의 병치는 결국 하나의 의미망으로 귀결되지 않는가. 이 병치는 ‘신성’을 담지하고 있을 “세계의 배꼽”이 “허공”이자 “공허”임을 웅변한다. 그렇다면, 신성에 닿고자 했던 주체는 ‘빈 공간’으로서 ‘신성’과 합일을 이룬다. 그러나 이 합일은 절대적 무한으로서의 ‘신성’을 부정하고 주체의 확실성을 부정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합일이다. 이와 같은 주체와 신성(神聖)의 파국 속에서 이재훈의 시적 세계관은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제2시집의 제목이 <명왕성 되다>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태양계의 궤도로부터 이탈된 명왕성은 주체와 신성(神聖)의 궤도를 이탈한 존재의 비유에 다름 아닌 것이다.

거울엔 과녁이 없다.
내가 거울에 입을 맞추면
오히려 그는 없고 내 얼굴만
환하다.
어디를 찔러도 되돌아오는 아픔.
거울은 고요다.
어떤 사연도 담지 않고
내가 볼 때마다 붉게 충혈된
눈만 되돌려 주며
침묵하는 사태.
나는 도시의 은유에 머물렀다가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며 와르르
내 얼굴이 무너짐을 본다.
형체 없는 얼굴,
소실점으로 모이지 못하는 얼굴,
-「거울 속의 얼굴」 부분

겨냥할 과녁이 없는 세계, 욕망의 대상이 사라지고 말아 내 존재만이 홀로 남아 있는 세계 속에서 주체는 결국 ‘나’라는 존재의 “소실점”을 상실하고 만다. 이 “소실점”은 주체의 ‘누빔점’이 아닌가. ‘누빔점’을 상실한 주체의 파국이야말로 이재훈의 시가 새롭게 진입한 세계의 진경(眞境)이다. 하여, 시인에게 ‘시’(詩)란 시원(始原)의 신성(神聖)을 향해 날아가는 ‘자기구원’의 언어가 아니라 “어머니가 없는 공허한 시”에 지나지 않으며, 시인조차도 “재킷을 입고 시를 쓰”(「재킷을 입은 시인」)는 세속화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토록 극적인 세계관의 변화 속에서 상처는 피할 수 없다. 시인은 단지 ‘자기구원’의 “일생을 꿈꾸었을 뿐인데”, “챙, 소리에 놀라 보니 사방에 깨진 파편들이 빤짝”이는 것이다. “깨진 기왓장”의 “천년을 건너온 어떤 눈동자”에 시인은 “스윽” “손을 베이”고 만다.(「동경(銅鏡)」 파국의 과정에서 시인은 깊은 상처를 입는다. 이 상처의 깊이는 ‘신성’(神聖)을 열망했던 시인이 경험한 자기 파국의 강도를 알려준다. 따라서 이재훈의 제2시집은 신성(神聖)을 희구했던 주체가 비로소 맞이한 파국의 세계와 그 안에 새겨진 고통과 균열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_ <시와사상>, 2011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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