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중 문학평론가 허윤진의 말...
<벌레 11호>에서 나타나는 자기 부정의 신학적/존재론적 목소리는 이재훈의 <명왕성 되다>에서도 다른 양태로 나타납니다. 「연금술사의 꿈」 같은 시편에서 시 속의 목소리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곧 소멸한다는 것이죠. 이재훈 시인의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도 그렇지만 이 시집에서도 저는 시인의 정신이 지닌 격格의 미학적 가치를 봅니다. 조정권이나 윤의섭, 정재학의 시에서 제가 감동을 받을 때는 절제된 수사 이면에서 투명하게 빛나는 시인의 인격을 볼 때거든요.
이재훈 시인의 경우에는 시인이 위대한 영광이 아니라 사소한 패배를 인정할 때 그의 인격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시집의 표제작인 「명왕성 되다」는 한때는 태양계의 행성이었으나 태양계에서 이제는 제외된 명왕성에서 파생된 ‘명왕성 되다(plutoed)’라는 표현을 주제화하고 있습니다. 내부에 들어설 수 없는 자, 인정과 부정 사이의 간극을 살아본 자는 명왕성처럼 어둡고 차가운 빛을 발합니다.
- <현대시>, 2011년 12월호 기획좌담 <세파에 흔들리며 세파를 흔들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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