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작품상 이달의 추천작 / 이재훈


숭고한 셀러던트


중얼거릴 수 없다
뱀이 온몸을 감고 있어 숨쉬기 힘들다
언제나 위기가 아닌 적은 없었다
고통 이후를 생각하는 시간들
늘 속도에 의지했으며
숨 쉬는 것들을 혐오하며 살았다

검은 바닷가 모래 위
구름은 낡았고 파도는 헤졌다
내 고통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멀리서 날 지켜보고 있다
낯설지만 또 낯익은 순간
오직 한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이 비릿한 고통의 풍경

사람들은 대체로 첨단을 잘 견딘다
그는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던가
울며 흐느끼고 있었던가
새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물비린내도 없이
파도소리만 가난하게 들렸다

칼로 내 가죽을 벗기려 한다
아, 이 극악한 자본의 성실함
생살을 찢어 슬금슬금 도려내야
도덕적으로 아름다운 이 땅과 하늘
밤이 되면 일하러 간다
삼인칭으로만 불리는 인생 공부의 완성을 위해
― <현대시>, 6월호

 


현대시작품상 추천작을 읽고

 

첨단의 위기 속 우리의 자화상

 

김선주

 

 


배고픔의 시기를 거치면 또 다른 세계가 암울한 공간을 비워놓고 삶의 모든 것들을 견뎌내는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가령 세계가 말하지 않는가?
“무엇을 보고 있니?”
“무엇이 보이니?”
이재훈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마치 맨발로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착취와 억압의 공간에 힘겨운 자존을 투사하고 있다. 이해하는 척 하면서 상대에게 오히려 버거운 도회의 ‘소 공간 점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미래를 잃어버린 세대의 노동현장은 허튼 몇 마디의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지난 시간은 되찾으려 하면할수록 스스로의 권리와 자유는 ‘자살’이라는 극단의 처방으로 이어진다. ‘목숨의 방’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인간이 가지는 참 존재는 ‘꿈’의 공간에서 ‘현실’의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어디에 속해 있는지 방향성과 정체성의 혼란은 이재훈의 시 “숭고한 셀러던트”에 그 의지를 담고 있다.
이재훈의 시에서는 ‘개인의 일상’에 침투하여 마침내 그 영혼까지 잠식해 버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함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각 개인이 자기만의 고유한 색깔과 가치를 발휘하기 어렵다. 개별성이 없는 삶은 획일적이며,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때 프로이트는 노동의 윤리가 지배하는 삶을 ‘현실원칙’에 의해 성립된 삶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억압된 ‘쾌락원칙’의 비극으로 보았다. 자본주의 역사의 상당부분을 노동에 수반된 억압으로 엮고, 모든 문명의 특징이자 인간 충동의 본능적인 ‘쾌락 지향성’에 근원한 필연으로 일반화한 것이다. 또한 노동에 대한 사회적 필요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나 ‘문명화된 조절’의 규칙에 복종하도록 강제되어야 한다고 서술했다.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한 개인을 발견해보자. 그 인생은 초라하지만 어쩌면 가장 소중한 가치의 실재이다. 어느 날 무심코 바라본 자리에서, 형편없이 시들어버린 한 송이 인생이 ‘우리의 자화상’으로 떠오른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시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숭고한 셀러던트(saladent)”는 결국 샐러리맨이 사회 현실에서 겪는 괴리감을 ‘인생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표현하고 있다.
1연의 시작부터 “중얼거릴 수”도 없고 “숨쉬기 힘들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그만큼 고달프다는 것인데, 이는 ‘뱀’이라는 동물이 평소 자신의 몸을 휘감는 모습에 빗대어 현실로부터의 갑갑함을 호소하는 것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 힘든 시기를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었고, 힘든 만큼 이런 현실을 더욱 더 못견뎌하는 모습이 세상의 “속도”와 “숨을 쉬는 것들을 혐오하며 살았다”에서 잘 드러난다.
2연에서도 부정적인 단어들이 보인다. “검은 바닷가”로 시각화하여 현실의 사나움과 비정함 등을 잘 살렸고, “낡고 헤졌다”는 시어를 통해 화자의 현재가 비참할 정도로 너덜너덜함을 보여준다. 그런 화자의 고통을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누구인지 명백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3연에서의 “하모니카를 불고, 울며 흐느끼고 있었던가.”라는 시구로 보았을 때 화자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동반자 내지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 혹은 그런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혈연 정도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첨단’이라는 단어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견디”고 있으나 그것은 기꺼이 견디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버티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화자가 이런 현실에 직면하고 있지만, 별다른 해결책 없이 그냥 그 속에서 살고 있음이 느껴진다.
반면 <이방인>에서의 주인공 뫼르소는 오후 4시에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 뜨거운 태양을 부조리의 대상으로 간주해 보면, 부정의 타파를 위해서 행해지는 가혹한 행위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지난 과오를 돌이켜보면, 인류의 ‘빛나는 이성’은 서로의 상처에 흠집을 내며 전쟁이란 빅 이벤트를 행함에 있었다. 전쟁의 상흔이란 결국 인간 모두에게 치유 할 수없는 고통을 준다. 세상을 사는 방법론은 인간이 추구하는 내면적 가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재훈의 시는 시대를 살아가는 샐러리맨의 비애라기보다는 한 인간이 가지는 삶에 대한 극복 과정이다. 자유와 희망을 품은 “새소리는 들리지 않”고 현실 속에 순응하려해도 돌아오는 것은 짙은 ‘허무’와 마음의 “가난”뿐인 것이다.
4연에서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가난”으로 인해 살이 찢어지고 가죽이 벗겨져 나가는 듯 극심한 고통을 시작으로 하는데 이런 현실을 “극악한 자본의 성실함”으로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철저히 자본주의에 의해 돌아가는 사회구조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서민층을 비롯한 화자 등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 이재훈은 생계를 유지시킬 수 있는 상황을 “생살을 찢어 슬금슬금 도려내야 도덕적으로 아름다운”의 구절을 통해 현 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나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도 아닌 억지로 해야 하는 이 인생의 굴레를 “공부”라고 표현하였고, 그 삶의 주체를 “삼인칭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에서 버텨나가고 있는 화자 자신 그리고 이 시대를 힘겹게 살고 있는 모든 가장들에게 반어법(irony)을 차용하여 “숭고한 셀러던트”로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셀러던트” 참 슬픈 시어로 다가온다. 치열한 삶속에서 서로 경쟁하고 싸워 이겨야 한다. 샐러리맨으로 성공해야 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행복은 곧 성공이라는 불가사의한 등식이 성립하고 있는 요즈음 모두 “인생 공부다, 인생 공부다.”라고 외치지만, 그로 인하여 너와 나는 더 이상 가까울 수 없고 늘 거리를 두며 살아가는 “삼인칭”으로 매번 차갑게 만나야 하는 것이다.
결국 시인 이재훈은 ‘달빛이 비치는 숲의 세계’를 그리며 ‘유토피아’로 향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 도피는 아니며, 한바탕 열정을 다해 나름대로 현실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근원적 낭만주의 기질을 토대로, 현실너머 ‘진실의 세계’를 염원하며 그 안에서 진정한 ‘자기세계’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으리라. 그는 지금 이 순간도 현실 ‘저 너머의 미학’을 조용히 꿈꾸고 있을 것이다.

- <현대시>, 2011년 7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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