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만과 회감의 시
신동옥
그런가 하면 이재훈의 시에서는 자기 긍정의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이재훈은 비극의 자기분화가 막 시작되는 지점을 짚어낸다. 이재훈은 선사先史와 인간 이전과 인간 저편을 21세기 지금 이 자리로 불러온다.
포도주를 마신다. 구릿빛 작은 잔들이 찰랑 부딪힌다. 열락으로 빠져드는 시간의 동맥. 당신과 약속한 피를 마시고 당나귀의 행보를 떠올린다. 고향에서는 아들이 아비를 죽였단다. 양식이 없어 굶어 죽는 아이가 창궐한단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살육이 유행이란다. 가뭄이 지나자 폭설이 내려 홍수가 난다. 전염병이 돌고 있다. 근질근질한 시간들. 성스러운 부패의 시간들. 기쁜 병의 시간들. 이곳은 세속적인 거주지가 아니다. 당신, 진리가 도처에 즐비한데 왜 이곳에 오셨는가요. 밤이 되어야 저 바깥의 문을 간신히 열 수 있다. 발정기의 암낙타가 침을 흘리며 내게 온다. 밤을 매도하지 마라. 이 길은 밤이 모든 이유다. 세속의 성전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하는 시간의 길목이다.
― 이재훈, 「유형지」(<시작>, 겨울호) 전문
시는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술잔과 도취와 황홀경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절대화된 무시간은, 자신의 핏줄을 빠르게 피돌이하는 숨 가쁜 피의 순환, 그 고양의 시간이다. 새 피를 뿜어내는 심장의 운동 속에서 “시간의 동맥”을 짚는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포도주는 신의 피를 은유하는 익숙한 상징이고, 당나귀는 인간적인 삶의 시련과 유랑을 표현하는 익숙한 상징이다. 이후에 이어지는 광경들은 처참한 살육의 카타스트로프다. 포도주를 마시는 입이 황홀경을 마주하는 신적인 계시의 시간이, 무잡한 살육과 비인간적인 이해불가능의 폭력의 세례로 변이된다. 포도주를 마시는 신적 계시의 입술은 창세기 11장의 언어 분화의 성서 알레고리를 떠올리게 한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로 시작되는 창세기 11장은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에서처럼 바벨탑을 쌓으며 알레고리의 카타스트로피로 향한다. 이어서 나오는 구절에 11장 9절이다.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홍수 이후에 셈으로부터 이어지는 온갖 세대의 이름이 등장한다. 성서에서 언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입술이다. 구음이라는 표현은 동일한 어휘의 자장 속에 있는 입술들을 이른다. 바벨탑 이후에 비로소 소수의 말이 처하는 자리마다 상징 권력의 소외와 폭압의 역사가 시작된다. 시 속에서 그려지는 처참한 살육은 사육제의 카니발이 아니라 태초의 대재앙과 통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입술이라는 말에서 언어라는 말이 떨어져나가면서 상징과 권력을 소유하는 인간의 역사는 시작된다. “기쁜 병의 시간들”이라는 규정은 다름 아닌 21세기 현재 속에서 이재훈이 발견한 아이러니다. 이재훈은 그것이 근원적이라고 갈파한다. 때문에 “당신, 진리가 도처에 즐비한데 왜 이곳에 오셨는가요”라며 메시아와 가짜 진리와 가짜 믿음을 야유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삶은 구원이 불가능하므로 “밤이 모든 이유”가 되는 길이고, 그 길이 “세속의 성전이다.” 구음이라고 말했을 때 믿음과 몸(입술)과 언표 행위와 인식과 존재가 한몸이라는 말이 된다. 바벨탑 이후에는 이것들이 갈가리 찢겨 분화가 시작된다. 역사 시대로부터 근대 이전까지를 지배한 상징 권력은 언어였다. 근대에 언어에 더해 보태어지는 상징 권력은 언어와 노동과 존재의 분기점에서 태동한다. 이후에는 상징을 실체적인 권력으로 전화하려는 노력이 자본의 자가 발전에 집적된다. 이재훈이 말하는 “세속의 성전”으로서의 길은 때문에 근원으로부터 유리된 공간이다. 성서의 알레고리를 뒤집어서 유형지의 알레고리가 태어나는 것이다. 이재훈의 전언을 받아들이면 모든 시는 유형지에서의 기록이 될 것이다.
_ <현대시>, 2012년 2월호
'이재훈_관련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한성의 파토스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_ 박대현 (0) | 2012.03.09 |
---|---|
유한성과 동일성 너머의 무한_박대현 (0) | 2012.03.09 |
<현대시> 2011년 12월호 '올해의 좌담' 내용 중에서 (0) | 2011.12.14 |
장미가 있는 산책길의 메모_ 이운진의 시편지 (0) | 2011.10.06 |
도시의 감각, 글귀들, 귀신들 / 박서영 (0) | 2011.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