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인의 이야기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는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유학까지 다녀온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습니다. 수의학을 전공한 농촌운동가였으며 가난한 아이들의 선생님으로 봉사하던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전신 3도 화상을 입게 됩니다. 얼굴은 모두 문드러지고 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으며, 손과 팔은 휘어지고, 한쪽 눈은 시력을 잃었고 남은 눈마저도 시력이 1미터에 불과했습니다. 눈물샘마저 타버려 울 수가 없었습니다. 6개월 동안 스물일곱 번의 수술을 받은 그는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 몸이 말야, 이래뵈도 무지 비싼거야. 수십명이 달려들어 만든 걸작품이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람 손 안 간 데가 없단 말야.” 그리고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의 모태가 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운동을 시작하고, 1986년에는 경기 가평의 두밀리에서 ‘두밀리자연학교’라는 대안학교를 설립합니다. 그의 별명은 ET 할아버지. 주말마다 전국에서 모여든 아이들은 그를 이티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습니다. ‘이티 할아버지’는 ‘이미 타버린 할아버지’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바로 사회사업가이자 교육운동가인 채규철(1937~2006) 할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이티할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

 

현실과 마주한 희망이라는 끈

 

이제 제법 찬바람이 옷깃 속을 파고듭니다. 몸을 움츠리게 되고 더불어 우리의 마음도 서글퍼질 때가 많습니다. 출퇴근 시 교통체증은 짜증나기만 합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겨울 난방 걱정과 치솟는 집값 걱정이 커져만 갑니다. 김장도 해야 되는데 물가는 연일 치솟습니다. 갑자기 추워진 차가운 밤바람이 가슴을 더 서늘하게 합니다. 눈이라도 내리면 더 걱정이 많아지겠지요. 뉴스에서는 정치인들이 나와 연일 서민복지를 부르짖지만, 실제 우리 몸에 와닿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십억이니 백억이니 하는 말들은 그저 뉴스에나 등장하는 허황된 단어들에 불과합니다. 은행잎과 단풍잎들은 아름답게 물들어 가는데 우리의 현실은 어두운 먹구름으로 가득합니다. 도무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여기저기 들립니다.

하지만, 언제나 늘 그렇듯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옵니다. 가랑잎들은 땅에 떨어져 서로 모여 있습니다. 서로 속삭입니다. 모이고 속삭이고 웅성이다 보면 어느새 땅속에 스미고, 새로운 싹을 틔웁니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우주의 질서는 세상일들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정직하게 운행합니다. 그 시간들 속에서 우리들은 서로 아웅다웅하며, 눈을 흘기며 때론 자신을 미워합니다. 이 속에서 서로 용서와 희망을 말들을 속삭이고 나누면서 함께 모여 있다면 어떨까요.

어떤 사람은 그 시간들 속에서 감사하기도 바쁘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감사한 일들이 지천입니다. 유명한 화가 르느아르는 퇴행성 류머티즘으로 몸이 마비됐고, 전쟁 중 아들 둘이 부상을 당하는 불운에 아내까지 잃었습니다. 하지만 마비된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워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르느아르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주변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르느아르가 자신이 불행하다고 자책하며 절망했다면 그 위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요. 불행은 불행을 느끼는 자에게 돌아갑니다. 행복은 행복을 느끼는 자에게만 돌아갑니다.

 

행복이라는 토씨 찾기

 

행복의 반대말은 뭘까요? 불행일까요? 행복의 반대말은 외우지도 입에 올리지도 않는 게 상책입니다. 불행의 반대말을 외워야 할 때입니다. 용서하고 아끼고 이겨내고 참아내는 말들을 가슴에 품고 읊조리면 가슴이 따뜻해 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늘 소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당신은 행복과 희망이라는 말을 하루에 몇 번씩 말하며 살고 있나요. 당신에게, 참 좋은 당신에게, 행복하다고 그래서 희망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저는 매번 이번 가을은 참 특별한 가을이 될거야 라고 혼잣말을 합니다. 이런 말들이 널리널리 퍼져간다면 지금의 현실보다는 훨씬 나은 현실이 오겠죠. 이번 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가을이 되겠죠.

 

 

_ 중앙대학병원 사보 <참좋은 중앙>, 2011년 11~1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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