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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17 이재훈의 <Big Bang>
  2. 2010.03.11 석모도
  3. 2010.03.10 우화등선을 꿈꾸는 호랑나비돛배를 타고_ 고진하 시인 대담
  4. 2010.02.07 그저 달콤하기만 한 문명의 정치학_ 신혜정 시집 <라면의 정치학> 해설
  5. 2010.02.07 영원(永遠)의 시인 구상 - 주제로 읽는 현대시 산책 ⑦
  6. 2010.02.07 하루
  7. 2009.12.18 곽명숙_ 일상을 히치하이킹하는 시인들에 대한 안내서
  8. 2009.11.27 이천 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적 원형 구조 연구_ 김병호
  9. 2009.09.29 아가미로 숨쉬는 문명인의 일상
  10. 2009.09.24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9년 10~11월호 선후감
  11. 2009.09.18 지금, 여기 (사진과 글)
  12. 2009.09.18 고독의 시인 김현승 - 주제로 읽는 현대시 산책 ⑥
  13. 2009.07.30 ‘서태지 세대’의 궁지와 난문(難問)_ 김창환
  14. 2009.07.07 서태지 세대
  15. 2009.06.17 소외와 말줄임의 수사학 - 조현석 시집 <울다, 염소> 해설
  16. 2009.06.12 슬픔과 사랑이 자아내는 서정의 원리_ 정호승 대담
  17. 2009.06.12 저항의 시인 김수영 - 주제로 읽는 현대시 산책 ⑤ 1
  18. 2009.06.10 순수의 시인 김종삼 - 주제로 읽는 현대시 산책 ④
  19. 2009.05.15 좌담 / 오늘의 전위 21세기 한국의 시동인
  20. 2009.02.19 메탈지프를 타고 노란 잠수함으로 가라 앉기_ 김태형 대담
  21. 2008.12.30 사과나무 아래로 귀환한 오르페우스의 꿈_ 남진우 대담
  22. 2008.12.26 의지와 생명의 시인 유치환 - 주제로 읽는 현대시 산책 ③
  23. 2008.11.14 [디지털포스트 11월호] 이재훈_ 눈
  24. 2008.11.10 [중앙일보 - 시가 있는 아침] 이재훈_ 남자의 일생
  25. 2008.10.20 [다시 읽는 명시 4] 정현종_ 소리의 심연
  26. 2008.10.17 트릭스터(trickster) 1
  27. 2008.10.08 유성호_ 서정의 옹호
  28. 2008.10.08 [다시 읽는 명시 3] 이승훈_ 너를 본 순간
  29. 2008.10.02 정준영_ 야성의 타자를 향한 러시안 룰렛 게임과 대황하의 변주곡
  30. 2008.10.01 이명연_ 자재에의 욕망

Big Bang


이재훈


태양이 어슷어슷 거리로 내려왔습니다. 쇼윈도우 마네킹들은 땀도 흘리지 않았지요. 누군가가 지나치는 여인에게 양공주 같다고 킬킬거렸습니다. 좌판 아저씨는 제 옷자락을 잡아끌고 빨간 비디오테이프를 꺼내주었습니다. 신문엔 사람들끼리 불총을 쏘아대고 있었습니다. 그런 거리를 걷다보니 어느새 제 겨드랑이에 털이 솟아 있었습니다.
무르팍에 힘이 없었습니다. 숱진 머리칼이 아버지를 닮았다지만 전 야틈한 언덕에서 방황했습니다. 아버지는 언덕을 넘으면 시온이 있다고 했었지요. 그때 태양이 제 몸에 달라붙어 명징한 기억들을 빨아먹고 있던 겁니다.
누구나 안식처를 찾아 세상을 헤매입니다. 눈앞에 솔개그늘이 하나 있었고 그 속에서 저는 RPG게임을 했습니다. 제 몸의 태양열로 세계를 불질렀습니다. 펑펑펑 150억 광년의 우주에 불을 놓습니다. 세상에 불을 지른 자는 신이던가요?

가끔씩 가슴으로 소나기밥을 먹습니다. 온 몸에 자릿내가 풀풀거려도 괜찮습니다.
언덕을 넘으면 시온이 있구요. 그곳에 다가갈수록 수염이 자꾸 굵어집니다. 간간히 제 가슴에 나비물마냥 불덩어리들이 흩어 날아갑니다. 


불의 상상력은 제 몸을 태워서 제 몸을 빛낸다. 끊임없는 타오르는 ‘불의 빅뱅’은 ‘불의 블랙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누구나 꿈꾸는 불, 그러나 불은 위험하다. 영원한 소멸의 거대한 블랙홀이 입을 벌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태양이 굴러다니는 거리가 있다. 한 소년이 성장해온 길바닥이 있다. 오늘도 태양빛이 내리쬐는 이상한 풍경이 있다. ‘소돔성’처럼 병들고 타락한 도시이다. 언제나 그러했던, 인간들은 도시에서 살기 위해서 이곳으로 몰려들지만 사실은 도시에서 죽기 위하여 몰려온 것이다. 이런 허기진 욕망들이 이 도시의 남루하고 비루한 풍경을 이룬다. 시의 화자는 이런 ‘마네킹’과 ‘양공주 같은 여자’와 ‘빨간 비디오테이프’가 있는 풍경을 따라 ‘겨드랑이에 털이 솟’을 만큼 성장해 가는데, ‘기성세대’를 표상하는 ‘아버지’는 자꾸만 나를 속여먹는다. 구원의 땅은 멀고, 안식의 그늘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무수한 ‘아버지들의 아이’는 고작 RPG게임이나 하고, 배터리처럼 충전되는 게임머니로 이 세계를 불지른다. 사이버 공간이라 할지라도 ‘펑펑펑 150억 광년의 우주에 불을 놓’는다. 이는 ‘아버지들의 아이’가 타락한 이 도시의 블랙홀을 견뎌내기 몸부림인 동시에 스스로의 태양열로 이 세계를 불 지르고 싶어 하는 욕망을 표상한다. 스스로 하나의 불덩어리가 되어 세계를 불 지르고 우주에 불을 놓으려는, ‘불의 아이’의 당돌한 모험. 그러나 그 결과는 자명하다. 아카루스의 날개처럼 제 몸이 녹아낼 뿐이다. 따라서 시인은 이토록 음울한 정열의 음화를 우리에게 던져놓는 것일까? 결국, 이 시는 수직으로 내리쬐는 태양빛과 수평으로 걸어가는 시의 화자를 교직시킨 뒤 그 접점을 통해 인간 삶의 비루한 풍경을 보여준다. 가볍게 빗금처럼 긁고 지나가는 풍경을 배경으로 ‘태양 아래의 성장기’를 담아낸다. 여기엔 제 가슴의 불덩어리를 완전히 흩날리지 못한 ‘울울한 욕망’과 아직도 찾지 못한 ‘시온의 땅’이 숨 쉬고 있는데, 그렇다, 태양 아래의 안식은 애당초 없었다. 그런 갈증 때문에 시인의 상상력은 ‘불의 빅뱅’처럼 타오르는 것이리라.  (오정국 시인)

_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10년 3~4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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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모도

시시각각 2010. 3. 11. 11:56
석모도를 다녀왔다.
비만한 갈매기들이 낯선 방문객을 맞아 주었다.
보문사는 여전했고,
섬의 밤은 유쾌했다.
아침의 짙은 안개는 그날을 오래 기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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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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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등선을 꿈꾸는 호랑나비돛배를 타고



고진하․ 이재훈



홀로 산길을 오르다 보니,/가파른 목조계단 위에/호랑나비 날개 한 짝 떨어져 있다./나도 羽化登仙의/가벼움을 꿈꾸는 생인지라/연민이 일어 가만 들여다보고 있는데,/개미 한 마리 어디서 나타나/뻘뻘 기어오더니/호랑나비 날개를 턱, 입에 문다/그리고 나서/제 몸의 몇 배나 되는/호랑나비 날개를 번쩍 쳐드는데/어쭈,/날개는 근사한 돛이다./(암, 날개는 돛이고 말고!)/바람 한 점 없는데/바람을 받는 돛배처럼/기우뚱/기우뚱대며/산길을 가볍게 떠가고 있었다./개미를 태운 호랑나비돛배는!

― <호랑나비돛배> 전문


이를테면 상상력은 이런 것이다. 떨어진 날개에 돛을 달아주기. 몸으로부터 거세된 날개는 더 이상 의욕적인 주체자가 될 수 없다. 이때 황망히 나타난 개미는 호랑나비 날개를 제 몸에 싣는다. 여기서 개미는 유토피아의 길을 인도해 주는 파수꾼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해 열심히 땀흘린 것뿐이다. 결국 저 호랑나비돛배는 무엇인가. 어디로 향하는 배인가. 우화등선(羽化登仙). 말하자면, 누구에게 밟힐 뻔한 처지에서 돛을 달고 산길을 가볍게 떠가고 있으니 번데기가 나비로 화한 것에 비견할 만하다. 호랑나비돛배는 육보시를 하는 것인가. 우화등선은 도도한 꿈이다. “나는 빛인 적이 없다./해의 기생식물 해바라기처럼 나에게 기대어/그대 안의 어둠을 몰아내려 하지 말라.”(<예수>) 라고 절대자를 인식하는 자아의 의지와 단호함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시인은 황폐함과 죽음의 골고다를 노래했고, 땅을 고르는 아낙네의 손이 뚫린 우주를 누비는 광경도 목도했다. 고진하 시인이 신과 인간의 중재자임에도 불구하고 사유의 편재성(遍在性)이 두드러지는 것은 진리의 절대성에 적절한 거리를 두기 때문이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말을 빌리자면(<신화의 힘>중 ‘영원의 가면’ 부분), 적어도 그는 형상을 통하여 신을 경험하지 않는다. 형상을 통하여 신을 경험할 경우, 거기에는 우리의 형상을 짓는 우리의 마음이 신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형상이 없는 존재 혹은 형상을 초월한 존재를 경험한다는 것은 신과 하나되기이다. 신과 하나가 된다면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은 초극되고 형상은 사그라진다. 고진하 시인의 노장에 대한 깊은 관심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시라는 그릇이 진리와 구원에 대한 넓은 긍정을 가능케 하는 가장 적절한 용기라는 것이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는 날, 시인을 만났고 또 빗소리를 들으며 이 글을 쓴다. 이런 비에 대한 친연성은 의욕에서 오는 것이다. 비와 나를 공통분모로 묶어두려는 애정어린 의욕. 인사동 어귀에서 시인을 기다리며 나는 그와의 공통분모를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내게서 오래도록 머물 것 같다는 의욕이 자꾸 북받쳐 올랐다.

이재훈:감리교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시절을 듣고 싶습니다. 강원도에서 계속 성장하셨나요?

고진하:영월 주천이라는 산골짜기에서 자랐는데, 워낙 시골이라 문화적인 혜택을 거의 못 받고 자랐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시집 한 권 가져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 대신 대자연의 품에서 마음껏 산과 강과 들판을 뒹굴며 자랐죠.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시를 쓰는 제겐 큰 축복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고등학교까지 영월에서 보내고 대학 입학하면서 서울로 왔죠.

이재훈:<기독교사상>이라는 월간지에서도 일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저는 그 잡지의 애독자였습니다.

고진하: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에 제주도에 내려갔습니다. 제주도에서 첫 목회를 한 거죠. 그러다 올라와서 다시 신학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했는데 대학원 다니면서 <기독교사상>에 입사해서 잡지 편집 일을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대학원도 졸업했구요. 신학대학원에서는 문학을 이해하는 교수님이 지도교수가 되셔서 허만 멜빌의 <백경>이라는 소설로 논문을 쓰며 문학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재훈:1987년에 등단을 하셨으면 우리나라 나이로 34세잖아요. 한창 목회에 전념하시고 계셨을 텐데요. 어떤 계기가 있으셨을 것 같아요. 사건이라든지 내면적인 어떤 열망이라든지 하는.

고진하:85년도던가요. 당시에 <기독교사상>에 있었는데요. 군부 독재 시절, 잡지에 게재된 글이 보안법에 걸렸는데, 일종의 필화사건인 셈이었죠. 그래서 안기부에 끌려가서 이런저런 곤욕을 치루고 그 뒤에 압력에 의해 사표를 냈습니다. 그 이듬해 곧바로 영월로 낙향을 했죠. 영월에 낡은 고향집이 있었으니까요. 86년도에 고향에 내려가서 칩거하다시피 하면서 열심히 시를 썼습니다.

이재훈:그 후로는 어떻게 지내셨죠?

고진하:그 이듬해, 97년에 다시 홍천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이라는 첫 시집의 세계가 그 홍천 시절을 담고 있습니다. 아주 자그마한 교회인데 가난하고 척박한 곳이었죠. 홍천에서 5년 정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지를 떠나서 출판 일을 1년 정도 했습니다. 어느 기독교 출판사에서 편집주간으로 일을 하다가 다시 그만두고 강릉으로 다시 목회생활을 하러 내려갔죠. 강릉에서 두 번째 세 번째 시집을 냈고 8년 가까이 강릉에서 목회를 하다가 지난해에 지금 있는 원주로 왔습니다.

이재훈:신학을 공부하면서 문학을 한다는 게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문학도 종교와 비슷한 측면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문학도 구원의 욕망이 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요. 문학과 신학 사이의 갈등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고진하:문학에도 혼(魂)이 있다면 저는 20대 초반에 문학에 나의 혼을 빼앗겼고 제주도에 내려갈 때도 목회에 대한 열망 외에 글쓰고 싶은 욕망이 있어서 내려갔었죠. 그 후로도 계속해서 쓰긴 했었는데 집중은 못했던 거 같아요. 문학의 스승도 없었고요. 혼자 읽고 혼자 쓰는 게 고작이었죠. 대학원 다니고 <기독교사상>에 있으면서도 시에 대한 갈망은 계속 있었죠. 그러다가 영월에 내려가서 1년 동안 참 많이 습작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그 이듬해에 등단을 했는데요.

문학작업과 내가 하고 있는 목회, 신학 사이의 갈등이 현실적으로는 늘 존재했죠. 이를테면 단지 종교를 관념으로 갖는 게 아니라 소위 제도적인 현실 속에서 맞부딪혀야 하는 상황이니까 말이죠. 또한 교인들은 성직자에 대한 자기들 나름대로 기대의 울타리가 있는데, 그것이 상상력을 제한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 것 사이의 갈등은 끊임없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면서도 문학을 포기하지 못하는, 뭔가 갈고리에 꿰인 것 같은 그런 정황 속에서 계속 글을 쓰고 했었습니다. 그 세월이 10여년 이상 흘렀죠. 지금은 문학하는 행위와 종교적인 행위 사이에 큰 갈등은 없어요. 우리가 무제한의 자유를 갈망하지만 세상에 사는 인간들 치고 얽매임 없이 사는 존재들이 어디 있습니까.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얽매이지요. 나이 들면서 이런 얽매임을 긍정하고 외적인 자유보다는 내면의 자유가 소중하다고 생각했지요. 적어도 <우주배꼽>이라는 시집부터는 비교적 종교와 문학 사이의 갈등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교우들을 만나면서 목회를 하는 과정들이 글쓰는 것에 도움이 되고, 또한 문학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목회를 하는 것에도 도움이 됩니다. 상호보완적이죠. 저는 목회만 하는 다른 친구들보다는 시야가 조금은 넓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문학적 독서와 글쓰기, 작가들과의 폭넓은 사귐 덕분이죠. 그래서 교인들을 만나면서도 내가 종교적 도그마에 사로잡혀서 사람을 정죄한다든지 그러지 않게 되었죠. 문학의 자유로움과 상상력은 우리가 종교적인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사유와 행동의 폭을 넓혀준다고 생각합니다. 삶이라는 게 갈등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건 불가능한 거고 어떠한 모양의 갈등이든지 있는 거구요. <우주배꼽>부터는 문학과 종교 사이의 갈등이 줄어들고 내 안에서 비교적 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진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죠.

이재훈:지금 강원도 춘천 성암교회에 시무하시는데요. 독자들을 위해 교회에 대해 잠깐 소개해 주세요.

고진하:지금은 담임목회를 그만두고 설교목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주일에만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교회의 행정적인 문제나 교인들을 돌봐야 하는 문제, 이런 것에서는 자유로운 상태죠.

이재훈:선생님의 초기시를 보면 ‘텅 빔’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합니다. 첫 시집의 자서에서도 “푸르른 폐허의 날들. 빈들의 황량함과 텅 비어 있음의 충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텅빈 충만’은 다분히 노장적 사유라고 생각됩니다. 기독교적 사유는 ‘텅 빈’이 없지요. ‘충만’에서 오는 기쁨과 자유라고 해야 더 어울린텐데요. 이 충만은 한없이 낮아지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됩니다. 예수의 생애나 나자로의 생이 그랬듯이 말이죠. 거기에 반해 노장적 사유는 약간 오만한 데가 있습니다. 깨달음의 경지를 빈 것으로 일축해버리는 것을 보면. 하지만 그러한 매력 때문에 어떤 진리나 절대에 도달하려고 하는 시인들은 이런 사상에 매력을 느낍니다. “침묵만으로도 충분히/배부른 항아리들”(<묵언의 날>)의 사유는 어디서 나온 것인지 궁금합니다.

고진하:제 시 속에는 불교적인 이미지도 많이 들어가고 기독교적인 이미지도 들어 있지요. 또한 제 안에는 도교적인 것도 있습니다. 내가 노․장(老莊)을 좋아하니까요. 그러한 것들이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내가 억지로 의도하는 게 아니구요. 저는 예배당 가도 마음이 편하지만 사찰에 가도 마음이 편하거든요. 내 안에 그런 피가 흐르는데 그걸 어떻게 거부하겠습니까. 이번에 발표하는 <연꽃과 십자가>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시입니다. 결국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건데요, 물론 이때 종교는 제도로서의 종교를 말하는 겁니다. 예수가 이 땅에서 기독교를 만든 게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이 나중에 기독교를 만든 것이지요. 종교라고 할 때는 어떤 종교의 제도나 계율보다는 그 종지(宗旨)를 생각해야 합니다. 기독교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우리는 제도로서의 기독교보다는 예수의 삶과 그 가르침에 천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종교적인 관용의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연꽃과 십자가>라는 시에서도 표현되었지만 나보다 크신 분을 의식하게 되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연꽃에 눈을 흘길 이유도 없고 불교인이라고 해서 십자가에 눈을 흘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재훈:아마도 선생님의 직업(?)에 대한 선입관이 작품을 평가하는 데 큰 작용을 한다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고진하:대부분의 많은 비평가들이 내가 성직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내 시를 보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것이 내 페르조나일 수도 있는데요. 그런 면에서는 비평가들에게 다소 불만스러운 점도 있지요.

이재훈:기독교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많은 시인들과 작품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문학이라는 용어가 타당한지는 모르겠지만 기독교 문학이라면 우선 진리에 대한 자기확신이 먼저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요. 그만큼 기독교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 다른 종교에 비해서 강합니다. 구원은 오직 한 길이라는 게 기독교 정신 아닙니까. 즉 하나님을 마음 속에 구주로 영접하는 일입니다.(“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로마서 10장9절) 이러한 구절은 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시는 진리에 대한 확신에 일정한 거리를 둡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많은 기독교 문학과 일정한 변별점이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러면 선생님의 종교관이 문학에 끼치는 영향은 적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는데요.

고진하:소위 불교문학이니 기독교 문학이니 하고 울타리를 치는 것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구요. 그냥 문학이면 되지요. 그걸 기독교문학이니 불교문학이니 그럴 필요가 있는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시를 쓴다고 할 때, 그러면 그 속에 불교적인 것은 없는가, 또 도교적인 건 없는가, 분명 있단 말이죠. 그리고 불교인이면 그 속에 기독교적인 게 없는가, 200년 이상 기독교가 중심인 서양과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고받아 왔다면 분명히 그 속에 기독교적인 게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순수한 기독교, 순수한 불교는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백의민족이라고 하지만, 과연 우리가 순수한 혈통인가, 그런 것은 없단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 기독교, 이건 불교라는 울타리를 쳐서 문학을 가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내가 기독교 목사지만 내 무의식 속에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불교적인 요소도 들어 있고 도교적인 부분도 들어 있단 말입니다.

소위 한국 기독교가 한때 문제시했던, 예수만으로 구원을 얻는다, 라는 부분은 상당히 민감한 부분인데요. 실제로 80년대에는 타종교에 구원이 있는가 없는가 라는 문제로 순교당한 분들도 있지요. 아무튼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배타성. 그러니까 다른 종교를 통해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라는 이런 배타성은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타종교에 대해서 포용적입니다. 내가 기독교 목사니까 예수를 통해서 구도의 길을 간다 할지라도, 다른 종교를 통해서 구도의 길을 가는 분들의 삶을 폄하하거나 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인이지만 된장, 김치만 고집하지 않고 양식도 먹고 일식도 먹듯이, 불교적인 양식도 때로는 내게 도움이 되고, 다른 종교가 지니고 있는 구도의 방편들이 내 삶을 밝게 비춰주는 거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제는 옛날처럼 폐쇄적인 세상이 아니라 개방적인 세상이 되었거든요. 서로 배울 건 배우고 서로 협력할 건 협력하면서 대동세상을 만들어 나가야죠.

이재훈:한국의 기독교 시인들 중에 나름대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누가 있을까요. 저는 윤동주를 좋아하는데요. 윤동주의 시는 교술적이거나 진리에 대한 강요보다는 한 영혼의 ‘부끄러움’ 의식에서 출발하여, 그것에 대한 자각, 그리고 결단의 의지까지 보입니다. 최근에는 구상 선생의 신앙시집을 아주 잘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진하:한국에서의 기독교 문학이라고 할 때는 윤동주, 박두진, 김현승 이런 분들을 들 수 있겠는데 이분들의 기독교적인 상상력은 편협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특히 김현승 선생의 시를 좋아하는 데요. 그분은 시를 통해서 인간 존재의 심연을 탐구하신 분으로 경박해진 우리 시대의 문학도들에게 삶을 깊이의 차원에서 들여다보게 해 주는 데 귀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김현승 선생을 기독교문학이라는 좁은 범주에 가두고 싶지 않습니다. 너무 관념적인 데가 있어서 습작 초기에는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분의 시가 좋아집니다. 특히 <견고한 고독>, <절대고독> 같은 시편들을 즐겨 읽는 편입니다. 그렇게 좋은 관념시도 드물기 때문이죠.

이재훈:선생님의 시에는 “성스러운 노동”에 대한 신념과 관심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노동’중에서도 1차 생산자로서의 노동입니다. 직접 땀 흘려 얻는 노동의 기쁨을 농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은 아마 선생님의 생활에서 나왔을텐데요. 앞으로도 계속 그런 관심이 지속되겠죠?

고진하:제가 농사꾼의 아들이고 농업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농사를 많이 지어본 것은 아니구요. 바라보는 입장이 대부분 많았습니다. 강릉에 살 때는 땅을 좀 마련해서 직접 농사를 지었는데 거의 흉내만 낸 거지요. <우주배꼽>의 <달개비가 향기롭다>같은 시는 풀뽑기를 하다가 나온 체험시이죠. 이러다 보니까 자연이라는 것. 흙을 만지고 흙을 밟고 사는 것은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앞으로 바램은 전문적인 농사꾼을 못되더라도 터밭이라도 가꾸고 싶습니다. 농부들,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은 신성하지요. 오히려 머릿속의 관념만 갖고 있는 종교인들의 진리에 대한 천착보다 땀흘려 사는 농부들의 삶이 더 신성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한 저는 도시에서도 살아봤고 척박한 시골에서도 살아봐서 양쪽을 다 체험했다고 얘기할 수 있죠, 저는 생태시를 의도적으로는 쓰지 않습니다. 만일 제 시에 생태학적 상상력의 범주에 넣을 만한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제 어릴 적의 체험이나 종교적인 사유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으로 봐야겠죠.

이재훈:종교를 가지고 있는 문학지망생들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세요. 저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곤 하거든요.

고진하:저는 종교보다 인간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인본주의자는 아닙니다. 인간이 종교보다 먼저 생긴 것이고 종교보다 신이 먼저 계시는 것이지요. 그런 것들을 염두해 두면 상상력도 열리고 삶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도 생깁니다.

저는 의도하지 않음을 통해서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인 시를 써야겠다든지 무슨 종교적 깨달음이나 진리를 시에 드러내야겠다고 시를 썼을 때는 거의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보죠. 사실은 모든 예술이 그렇습니다. 호교론적(護敎論的)인 목적을 가지고 할 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지요. 그런 예술 작품은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런 목적성이 앞서면 창조성이 발휘될 수 없기 때문이겠죠. 우리 시에 종교적인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있다면 그런 목적성이 개입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육화(肉化)된 작품일 것입니다.

이재훈: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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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달콤하기만 한 문명의 정치학

 

이재훈(시인)

 

 


언제부터인가 신혜정 시인은 채식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까다로운 그들만의 금기를 실천하고 있는 채식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물론 “되어 있었다”라는 말로 짐작했겠지만 그 이전의 신혜정은 채식주의자가 아니었다. 한때 우리의 우상이었던 시인의 말대로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인 시간이었을 것이다. 마음보다 몸으로부터 먼저 오는 허무를 그저 받아들였을 것이다. 시인은 살기 위해 몸이 반응하는 솔직함에 더욱 충실했고, 자신의 영혼과 몸에 대한 신념을 보란듯이 지켜나갔다. 그렇게 신혜정은 몸이 반응하는 사유의 길목을 서성거리며 시의 언어를 타진해왔다. 침묵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그녀의 첫 시집은 반문명과 반육식의 외침이 가득한 의분의 언어로 채워져 있다.
현대문명은 음험한 음모를 거느리고 광장의 질서를 지배하고 있다. 그 질서는 곧잘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들의 음모에 의해 조종되어진다. 눈에 뻔히 보이는 모종의 담합들이 위정자들의 가난한 머릿속에서 실현되어질 때 우리는 그 공분(公憤)을 억누를 수 없게 된다. 최근 들어 자주 제기된 문학과 정치와의 상보적 관계는, 문학의 역할과 창작자들의 태도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하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신혜정은 이번 시집을 통해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구현했다. 그러나 신혜정의 시를 단지 작금의 유행처럼 번지는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진단으로만 파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혜정은 일찍부터 몸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실현해왔기 때문이다. 즉 신혜정의 몸은 사유의 또다른 기관뿐 아니라, 가장 일차적인 육체로서의 몸에 대한 깊은 탐색을 수행해 왔다.
신혜정은 현란한 이미지의 수사를 버리고 자신이 넘나드는 사유의 징검돌을 직접화법의 언어로 성큼성큼 넘는다. 신혜정의 기억술은 공동체적 서사 속에서 희구하는 갈망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선험적으로 감응한 원시적 서사이다. 그렇기에 신혜정의 육체는 문명에 접속한 기계적 감각의 플러그를 빼버리고, 넓은 초원과 대지에 기댄 육신의 기억을 갈망한다. 이것은 많은 시인들이 갈망하고 응시하는 공동선(共同善)의 기저이지만, 신혜정은 원시적 몸의 감각을 이 시간 속에 재소환하여 생태적 정치성으로 포장하려 하지 않는다. 신혜정이 기억하고 있는 육체의 기억은, 문명과 생태의 정치성을 소요하듯 사유하여 이끌어낸 보편적 기억이다. 시에서 자주 보이는 “깍두기와 국물이 뒤섞인 입 속을 왔다갔다”(<숟가락들의 점심식사>)하는 숟가락의 풍경들처럼, 역겹고 느끼하며 불결한 현대사회의 동굴을 탐사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일상의 풍경인 것이다. 신혜정은 자본문명의 일상성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매일 반복하고 있는 음식문화에서부터 찾는다. “21세기 식탁혁명”은 육식을 탐하는 미각뿐 아니라, “엉덩이가 예쁜 아가씨를 보면 따라가고 싶은” 육욕의 욕망에까지 다다른다고 말한다.(<21세기 식탁혁명>) 그러면 우리가 가장 즐겨먹는 라면은 어떠할까. 신혜정이 말하는 ‘라면의 정치학’은 이 시대 문명 진단의 집합소이다.

현대는 엑기스의 시대다
정보의 집합체에 접근하기
혹은 접근 금지의 아고라에 모여들기
농축이 아닌 것들은 천대 받는 시대

젊음은 치기라는 농축 엑기스의 집합체로
술을 마셔도
연애를 해도
미친 듯이,
미칠 듯이
객체와 영혼의 융화를 이루어내는

라면은 현대 식문화의 집대성으로
영양학자와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들이 만들어내는
정치적인 이슈는 스프 속에 감춰진 비밀 레시피
소고기맛 베이스
지미강화육수분말
육개장양념분말
햄맛분말
향미증진제
돈골엑기스……
엄청난 살육의 엑기스를 분말로 만들어내는
물리학의 기적

팔팔 달아오른 냄비는 뜨거운 욕망을 탄생시키고
한 번의 사용을 위해 가지런히 포장된 비닐봉지는
원 나잇 스탠딩
구깃구깃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부패되지 않는 것들을 양산하는 현대의 문명은
한 끼 식사에 30분을 소비하지 않는다
- <라면의 정치학> 부분

현대 문명사회는 가공할만한 엑기스의 시대다. 위의 시는 음모를 꾸미는 배후들로 믹싱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한 데 모아 새로운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문명의 제조법을 소개하고 있다. 라면은 20세기 최고의 음식 발명품이다. 현대문명이 만들어낸 최고의 인스턴트 식품이다. 시인은 이 식품의 “비밀 레시피”를 세세히 들려준다. 라면의 레시피는 배후를 가지고 있다. 라면은 빨리 먹어야 하는 음식이다. 늦게 먹으면 불기 때문이다. 문명사회에서 속도는 새로운 재화를 대량생산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다. 또한 스프의 제조 이면에는 “엄청난 살육의 엑기스”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배후를 만들어내는 이들은 “영양학자와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들”이다. 이 모든 것들이 얽혀진 “현대 식문화의 집대성”인 라면은 그 사용법에 있어서도 철저히 자본주의적이다. 냄비가 발열해내는 “뜨거운 욕망”과 썩지 않는 비닐봉지는 “원나잇 스탠딩”이며 한 끼 식사시간은 아주 짧다. 결국 라면의 정치학은 속도와 인공의 것들을 가공한 최대의 집합소이며, 이는 우리 현대 물질문명 사회와 다를 바 없다. 애초에 시인은 내면의 힘든 시간을 힘들다고 말하기 싫었을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대한 절망이 사회적 희망까지 막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인은 사회의 불합리한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실상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는다.

살상무기를 제조하는 자들이
평화를 이야기하는 이상한 시대

용산 미군기지 안을 보면 이해가 간다

그곳은 평화의 눈

모든 평화의 중심에 핀 꽃

이국의 개들이 사람과 산책을 즐기고
중성화 수술을 마친 고양이들이 한가롭게
창가의 볕을 즐기는 곳

사람들에겐 주님의 평화가 임재하는 곳
- <평화의 눈 1> 전문

시인은 음식문화의 정치학뿐 아니라 현실사회의 일면을 예리한 눈으로 포착한다. 평화가 있는 현실의 공간은 실상 평화가 없다. 이 거대한 아이러니를 시인은 담담하게 보여준다. 용산미군기지 안은 이 땅의 슬픔과 분노에는 관심이 없는 공간이다. “광장의 촛불시위”도 “먼 나라 이야기하듯/하품처럼 넘기는 곳”이다. 그렇지만 그곳의 사람들에겐 주님의 평화가 임재하는 곳으로 비춰진다. 용산기지 안은 이국의 권력이 만들어낸 성역이다. 성역 밖에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시인은 거리에서 추억을 버렸다고 한다.

추억을 버리는 일은 이 도시에서 흔한 일이다
사람들은 무표정하게 하루를 카메라 속에 주워담는다
추억은 땅을 잃은 빗물처럼 아스팔트 위를 떠다니다 결국
바다로 모여들고
바다에 모인 추억들은 뒤엉겨 들치근해진다
순간의 갈증이
콜라 한 페트로 버려지는
플라스틱 사랑
바다 위를 부표처럼 떠돌다
(어쩌면 등푸른 생선은 기억에만 존재하는 과거가 될지도 몰라)

해는 떨어지고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환경호르몬처럼 지독하게
외롭다
멸종 위기 동물은
뉴스 속에서나 존재할 뿐
콘크리트 위에 견고한
문명의 위기는 밥상에 오른 고기덩이만큼이나
무심히 씹히고……
그뿐
질문이 없는 이 도시에서
추억은 버려지기 위해 태어난다
- <이상기후> 전문

오염된 환경은 인간의 정서도 함께 오염시킨다. 이 세계의 이상기후는 정서의 상실 때문에 발생한다. 이제는 “추억을 버리는 일”이 흔한 일인 것이다. 플라스틱 사랑이 부표처럼 떠도는 세계이다. 시인은 “질문이 없는 이 도시”에서 무언가 말 걸고 싶어한다. 추억이 버려지는 것을 보며, 추억이 흔하게 버려지는 세태를 보여주며 반성적 성찰을 기대한다. 오염된 환경에 실천적으로 반응하는 시적 자아의 모습은 다른 여타의 시에서도 자주 목격되는 풍경이다. 풍경이 오래된 기억이 되기 위해서 시인은 근원적 시간을 불가피하게 떠올려야 하는 지 모른다. 저 북방의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기억의 관념적 체험은 시인에게 또 하나의 의미영역에 속한다.

주홍날개꽃매미 유충 한 마리가
아스팔트 위에 선명한 핏자국처럼 멈춰 있었다
검고 날렵한 다리 땅에 붙은 듯, 태곳적 정지 그 고요함 속에
바람이 불었다
발견이 곤충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북태평양의 고온다습한 공기가
고래가 분기(噴氣)한 습기가
붉은 점 위를
점점이,
점점이, 지나
가고 있었다
고요하던
붉은 점, 바람에 휘청하더니
감춰둔 날개 펴고 유유히
바람 속으로 돌진해 버리는 것이었다

바람은 곤충의 등을 기억에 업고
대륙으로, 멀리, 사막을 향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 <대륙의 기억> 전문

대륙의 기억은 바람으로부터 온다. 그 바람은 유충 한 마리에게 도달한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지만, 그 사건을 통해 원시의 기억을 회복한다. 시인은 회복된 기억을 ‘발견’이라고 말한다. 바람은 습기를 머금고 있다. 북태평양의 고온다습한 습기. 즉 기분이 좋을 리 없는 습기이다. 그 바람이 유충 한 마리의 시신을 지나치고 있다. 어찌 유충 한 마리뿐이겠는가. 이 땅의 온갖 생명체들의 죽음 위를 무수히 통과해 나갈 것이다.
유충의 시신은 바람에 그냥 몸을 맡기지 않는다. “붉은 점”으로 남아, 죽음의 흔적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날개를 편다. 감춰둔 날개를 편다는 것이 부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죽음으로 새로운 탄생을 예감하는 동양적 세계관과 닮아 있다. 대륙의 기억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바라보고 싶은 지점이다. 왜 ‘땅’이 아니라 ‘대륙’이라 했을까. 이 땅, 이 흙이 아닌 좀 더 큰 사유의 밑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일까.

차 밑에서
바스락거리는 건 그가
낚아 챈 봉지가 아니라
검은 눈이다
빛을 감지한 동공이
수축하는 소리다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
사냥하지 않는 호랑이
새끼를 돌보지 않는 새장 속의 새
도시의 하수구를 돌아다니는
쥐의 꼬리……

밟힐라
긴 것들이여
문명의 말들이여
사전들이여

짓눌린 것은
아스팔트 밑의 땅
스스로 검은 땅을 자처한
불순한 운명

운행을 멈춘 엔진엔
아직 온기가 감돌고
차 밑에 숨은 고양이는
우주의 검은 점처럼
몸을 웅크린다

비가 온다
 
잘린 꼬리가 아픈 건
비단 고양이만이
아닐 것이다
- <꼬리> 전문

‘불구’는 불구자 자체에서 기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부요인이 불구의 존재를 만든다. 원시의 감각은 본능적인 것이다. 살아있는 생물체는 늘 자신의 본능에 충실해왔다. 그 충실함에 균열을 가한 것은 문명이 주는 불구의 훼손 때문이다.
시인은 고양이의 동공이 수축하는 소리를 듣는다. 동공이 빛을 감지하고 차 밑에 숨어 있는 이유는 꼬리가 잘렸기 때문이다. 잘린 꼬리를 운명처럼 던져준 이 문명세계는 말들이 넘쳐나는 세계다. 밟히는 꼬리와 문명의 말들은 서로 은유의 관계를 이루며 사족의 비만함을 설파한다.
문명의 말들은 수많은 규율과 억압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존재를 지탱하는 땅까지도 “불순한 운명”을 자초한다. “우주의 검은 점”은 고양이를 말한다. 즉 아주 작은 존재를 더 강조하고 있다. 이 작은 존재는 고양이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시는 전해준다.

엄마들은 제 상처에 스스로 반창고를 붙이지 못한다 아프면 시름시름 앓다 일어선다 한겨울 시린 갈증에 달콤한 귤 한 봉지 선뜻, 사지 못한다 아이들은 자라고 로맨스는 이미 너무 멀고, 늘어진 남편의 런닝구 추슬러 입고 새벽 댓바람 교회에 간다 이방의 신 야훼는 엄마들을 어루만져 주신다 옷 한 벌, 과일 한 봉지, 새 속옷, 파마 한 번 어치의 욕망을 차곡차곡 모아 제물로 바친다 넙죽넙죽 잘 드시는 이방의 신 엄마들의 얼굴은 사랑받는 여자의 욕망으로 넘쳐나 우리 아이 학업, 우리 남편 사업 잘, 되게, 해, 주시옵 시, 고……
야매로 일만 원짜리 파마를 하고 촌스런 머리와 독한 파마약 냄새를 받아주시는 야훼 앞에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야훼는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며 부자들의 배를 채워주시는 풍요의 신들을 귀 있는 자에게만 들려주시는 은밀한 신 엄마들의 처진 마음을 탱탱하게 하시는 오르가즘의 신!
오늘도 엄마들은 붉은 루즈 칠 하고 교회에 간다.
- <외로운 엄마들은 교회에 간다> 전문

엄마는 여성과 다른 이름이다. 시에서는 엄마가 교회에 가는 이유로 외로움을 꼽는다. 시에서의 엄마는 희생과 인고의 엄마가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여성성을 잃어버리고 욕망으로 점철된 소욕이 엄마의 모습 속에 가득하다. 엄마에게 이 욕망을 채워주는 것은 “이방의 신” 야훼라고 말한다. 그러면 왜 “신”이 아닌 “이방의 신”이라고 굳이 말했을까. 이 속에 또다른 상징적 의미가 놓여 있다. 이방의 신에 대한 엄마의 태도는 언제나 같다. 정화수를 떠놓고 빌거나 교회로 새벽기도를 가는 엄마의 태도는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기복신앙으로 대표되는 한국적 신앙의 맹종은 “야훼”라는 이방의 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방의 신은 가난한 자도 사랑하시지만, 그 이면에 부자들의 배도 채워주시는 신이다. 은밀한 가운데 임재하여 “풍요의 신”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 은밀한 신은 엄마들에게 영혼의 오르가즘을 선사해준다. 이렇듯 “이방의 신”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속성을 띠고 엄마들의 영혼을 위무한다.
신혜정이 일관되게 지녀온 문명에 대한 시각은 결국 삶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적극적인 노력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노력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번 시집의 후반부에는 순환론적 세계관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무덤이면서 동시에
집인

새는 이제 곧 날 수 있겠다
- <동거> 부분

고양이가 쥐를 뒤집자 바닥에 붙었던 몸에서 눈물처럼 뚝뚝, 구더기 무리가 떨어졌던 것이다 쥐의 내장이 질질, 흐르지도 못하고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꼬물거리는 구더기에게 고양이가 발길질을 했지만 이내 흥미가 사라진 듯하였다 바람이 불었고 고양이는 이제 냄새나는 쥐 따위에게서 관심이 멀어진 듯, 살아 있는 생을 쫓아갈 발톱을 핥는 중이었고 쥐의 몸은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창(窓)> 부분

다음 생을 위해
우주가 움직이는 것은
참 이상도하지
나고 죽는다는 것 말이야
고게 자꾸 입맛을 당겨
- <참 이상도 하지> 부분

인간의 삶이 죽음에 다다르는 시간의 연속이라면, 반대로 죽음은 삶에 닿기 위한 시간이다. 죽음과 삶이 결핍과 단절이 아니라 서로를 위무하고, 희망하는 소생의 힘이 될 수도 있다. 신혜정은 ‘죽음’의 공간인 ‘무덤’과 삶의 공간인 ‘집’을 함께 부려놓는다. “무덤이면서 동시에/집”인 공간은 신혜정이 도달하고 싶은 인식의 지평에 속한다. 시적 자아의 현신처럼 보이는 “새”는 비상을 통해 죽음과 삶이 함께 존재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공존의 순환론적 세계관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통해서도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시 <창(窓)>에서는 죽은 쥐에서 생겨난 구더기를 통해 새로운 시선의 창을 갖고 싶어한다. 고양이는 이미 죽은 쥐의 시체에게 관심이 없지만, 부패된 쥐의 시체 속에서는 우리들이 모르는 새로운 잉태의 순간이 진행되고 있다. ‘추의 미학’을 통해 소생의 가능성을 역설하고 있는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창’이 생기게 될 것이다. 우주의 생존 원리는 파괴와 창조의 반복이다. 신혜정은 “다음 생을 위해/우주가 움직이는 것”의 순리를 “참 이상도하지”라는 독백의 말로 이해하고 있다. 무엇을 더 말할까. 존재하지 않는 희망에 대해서 불가능한 말을 하는 게 아니란 것쯤은 독자들도 눈치를 채셨을 것이다.

만약 낙원이 존재한다면
그곳은 나무가 울창한 숲이겠습니다

서로가 뿌리째 연결되어 있는 그곳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태양이 대지를 덥히고
생의 뿌리 깊은 맛을 알몸으로 느끼는
그 시간을 나는
기적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세월을 견뎌온 나무의 기적을
그저 느끼며 살아도
행복하겠습니다

서양 최초의 사람이 따 먹었다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실과가 있다면
나는 제일 먼저 따서
그대에게 건네겠습니다

달고 쓰고 시큼한
진리의 맛을 느낄 수 있다면
영원을 맹세해도 좋습니다

신령한 나무 아래서
오래도록 그대와 나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 하며
그 실과를 먹겠습니다

그곳은 모든 세상의 말들이 사라지고 고요히
바람 부는 소리만 들릴 것입니다
- <연가(戀歌)> 전문

신혜정이 닿고자하는 지점이 위 시에 등장하는 “낙원”과 같은 곳이라면, 과연 그러한 곳에 닿고자 하는 것이 가능할까. 불가능할 것이다. 시인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연가(戀歌)”라고 하지 않았던가. 울창한 숲속에서 사자와 뱀과 인간이 함께 뛰어노는 그 시간들이 “기적”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낙원”은 종교적 신념에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불가능한 꿈을 꾸는 존재이다. 선악과의 실과를 기꺼이 따먹겠다는 진리에 대한 목마름은 “연가”를 통해 “맹세”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신혜정은 연가의 말미에 “그곳은 모든 세상의 말들이 사라지고 고요히/바람 부는 소리만 들릴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떤 소멸을 의미할까. 까닭은 알 수 없지만 그 소멸에 허무의 냄새를 거느리고 있다는 점은 분명 상기할 수 있다.
“때로 아름다움은 치명적 재앙”(<데드 플라이>)이라고 한 신혜정은 자신이 택한 미학적 결말의 쓸쓸함에 대해 이미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나의 팔은 혀처럼 널름거리며/말라가고 있는 중”이라고 고백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그것은 신의 축복”이라는 보편적 행복의 가능성을 늘 타진해가는 시인이다.
신혜정은 이번 시집에서 “스프링 위를 달리는 말”의 아이러니를 경쾌하게 좇다 허무의 옷자락을 잡아끌고, 피곤에 찌든 거리의 일들을 돌봤다. 문명사회의 허기와 오염된 생산품들에 대한 신념의 언어가 뜨거운 김을 뿜으며 고여 있었지만, 그곳엔 새로운 생성의 기운이 엿보이기도 했다.
하늘은 잊을만하면 자신의 푸른 몸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감동이란 말을 선사해준다. 신혜정 시인은 오래 꿈꾸던 먼 이방의 땅으로 곧 떠난다 한다. 그녀는 이방의 시간 속에서 더 오래오래 하늘을 들여다보며 매혹의 시간을 즐길 것이다. 안개가 가득해 저 앞의 바다가 정말 바다인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혼자 남은 섬은 그 의심으로부터 부여받은 고독의 영광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새로운 사유의 텍스트를 찾아 떠나는 그녀가 어떤 말풍선을 옷자락에 가득 달고 올 지 사뭇 궁금해진다.

_ 신혜정 시집 <라면의 정치학>(2009), 북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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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永遠)의 시인 구상

 

이재훈(시인)

 

 

한 해의 끝자락에 와있다. 해마다 연말이면 그동안 연락이 뜸했던 지인들이 생각나고, 한동안 자주 못만났던 동료들과 친구들이 생각난다. 문득 보고 싶은 사람들이 생기는 것은 한 해 동안 쉼없이 보내온 시간들에 대한 상념때문일 것이다. 무엇을 위해 지금껏 살아왔는가. 나는 지금 행복한가. 순결한 성찰의 시간은 바로 이런 순간이다. 돌아보며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며, 때론 다짐하며 한 해의 마지막 시간들을 보낸다. 이런 즈음이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바로 구상의 <오늘>이다.
구상(具常, 1919년 9월 16일 ~ 2004년 5월 11일) 시인은 작고할 때까지 시와 인간적 품성이 늘 함께 존경받는 이 시대의 스승이었다. 프랑스 문인협회가 선정한 세계 200대 문인 중에 한 분으로 선정될 만큼 큰 시인이었으며 한국 시단에 큰 영향을 끼친 시인이었다. 구상 시인은 문학 분야뿐 아니라 종교계, 교육계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구상 시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시간들 그 자체이며, 격변했던 한국 근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한 삶이었다. 시인은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네 살 때 원산으로 이주하여 유년시절을 보낸다. 시인의 부친이 독일계 신부들이 개설한 원산의 교구에서 교육사업을 하였던 것이다. 이후 원산 덕원 성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 중등과를 수료하고 1941년 일본 니혼대학 전문부 종교과를 졸업한다. 귀국 후 해방이 되고 원산의 작가동맹에서 펴낸 시집 <응향>에 자신의 시를 실었으나, 1946년 응향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북조선 당국으로부터 반동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월남했다. 이후 경북 왜관에 정착하여 20여년을 거주하다 서울 여의도에서 나머지 일생을 마감했다. 현재 경북 칠곡군에는 구상문학관이 설립되어 있다.
구상 시인은 평생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오로지 문학과 종교활동에만 몰두하였다. 효성여자대학, 서강대학교, 서울대학교, 중앙대학교, 하와이대학 등에 재직하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시인은 이때에도 일체의 보직을 사양하였다고 한다. 서라벌 예술대학의 초대 학장과 국민대 총장 자리를 제의했을 때에도 사양했다고 전해진다. 시인에게 정치를 권유한 정치인들은 많았다. 처음 구상 시인에게 정계 입문을 권유한 사람은 해공 신익희 선생이었고 이후에도 장면 총리가 시인이 몸담고 있는 서강대로 찾아와서 간곡히 정계입문을 권유했다.그때마다 시인은 강원도와 제주도 등지에 숨어 정계입문을 간접적으로 거절했다.
구상 시인과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간적 관계는 잘 알려진 것이다. 5 ․ 16 직후 박 대통령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고문으로 구상 시인을 내정해 놓고 시인을 설득했지만 끝내 박 대통령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생전에 구상 시인은 박 전 대통령을 관(官)에 나가 있다는이유로 ‘박 첨지’라고 불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구상 시인은 종교인, 문화예술인들과도 다방면으로 돈독한 친분이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 화가 이중섭, 걸레스님 중광, 장애인 화가 김기창, 아동문학가 마해송 등과의 친분과 수많은 일화들도 우리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일들이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 「오늘」 전문

구상 시인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시인이 작고한 날,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명동성당에서 그의 영결식을 집도하였으며, 수많은 종교인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종교적 인식은 서구의 보편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에 동양적 세계관이 덧입혀진 통합적 인식이다. 그것은 시인이 일찍부터 신화와 유교, 불교, 노장사상 등의 사상을 섭렵해 왔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바탕 위에 다양한 종교적, 철학적 인식이 덧입혀져 더 넓은 영역의 인식적 기반이 된 것이다. 시인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라고 말한다. 즉 오래전 과거와 지금의 현실과 죽음 이후의 내세에 관해서 이를 단절의 시간이 아니라 통합의 시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삶에서 아등바등 발버둥치며 사는 시간들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성찰하게 된다. 시인이 유언처럼 남긴 “영원이라는 것은 저승에 가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이 곧 영원 속의 한 과정”이라는 말은 위의 시를 잘 설명하고 있다.
구상 시인은 생전에 시를 쓸 때 기어(綺語)의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남겼다. 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언령(言靈)이 있으므로 참된 말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묘하게 꾸며 겉과 속이 다른, 진실이 없는 말을 결코 해서 안 된다는 것인데, 이 시대에 가슴 속에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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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산문 2010. 2. 7. 19:39
현대모비스 200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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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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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대적 일상에 대한 순례자의 보고서

이재훈의 시 세 편은 새로운 개성을 시도하고 있다. 현대 도시에 대한 신화적인 발상 속에서 몽상의 새로운 몸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바슐라르가 꿈꾸었던 4원소의 자연친화적인 몽상은 현대 도시의 콘크리트와 네온사인과 TV 앞에서는 맥을 추기 어렵다. 벽난로에 조용히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불과 고양이의 나른한 기지개 속에 부풀어 오르는 공간, 흔들리는 수풀 사이로 나지막이 웅얼거리며 흐르는 시냇물과 같은 몽상을 도시의 어느 곳에서 구할 것인가.

저는 매일 매일 똑같은 무늬를 짰어요.
이 세계의 무력함과 무모함.
제 주위엔 살인도 있고
죽음도 있었지만
제겐 큰 감흥이 없어요.
저는 하늘을 날고 있는 제 모습을 짜고 싶었어요.
저 먼 세계를 비상하는 영혼의 고난함을 짜고 싶었어요.
제겐 낙원도 있었고,
제가 태어나기 전의 고향도 있었어요.
몽상도 죄가 되나요.
― <다정한 재봉사의 재판> 부분

세상 사람들에 의해 갇힌 채 세상의 잔혹함에 대한 똑같은 무늬를 짜도록 강요받던 재봉사는 시인의 입장을 대변한다. 시인은 “태어나기 전의 고향”을 지닌 자, “먼 세계를 비상하는 영혼”이라고 한다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하이데거의 어투와 썩 비슷할 것 같다. 재판을 받고 화살을 등에 맞으며 고난을 겪던 시적 화자는 이제 “문명의 숲”에 들어와 고뇌에 찬 어조로 선언을 한다. 문명의 비만한 이미지들과, 이교도들의 숭배와, 부활의 기적이 일어날 가망이 없음을 말하며, “이제 내 몸이/ 잠자는 자들의 첫 음식이 된다면 좋겠”다고 고백한다. 재판이 아닌 순교를 택하는 것이다.
이재훈의 세 시편은 특정한 캐릭터로서 시적 화자를 내세우고 현대 도시 문명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을 하나의 콩트처럼 구성해낸다. 그 가운데 <다정한 재봉사의 재판>은 현대 문명의 일상에 대한 보고의 첫 장이자, 선언문처럼 읽힌다. 문명의 숲에서 몽상을 꿈꾼 죄로 순교하는 재봉사가 그 선언자이다. <댄디보이>에서는 TV를 보며 브라운관 속 ‘당신’에 빠져 기다리는 ‘댄디보이’가 등장하고, <스토커>에서는 “천사의 눈을 가진 그녀”의 뒤를 밟으며 “마주볼 자신” 없이 숨어 보는 ‘스토커’가 나온다. 시적 화자로 등장하는 이들은 현대 사회 속에 고립되어 타인과 온전히 소통하지 못하는 개인들의 분신이자 작은 자아들이다.

나는 스타일리스트. 당신은 나의 관객.
원두커피를 내려 블랙으로 마시고
잠옷 바람으로 스텝을 밟는다.
― <댄디 보이> 부분

우리가 TV를 보고 그녀가 브라운관에서 연기나 음악을 하는 것일 텐데, 어느 순간 욕망은 모방되고 시선은 전도된다. 그녀가 관객이 되어 나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TV 속에 등장한 행동과 사물들은 실제처럼 느껴지고 나의 현실과 그 가상현실은 뒤섞인다. 다시 그 가상이 현실에 접속될 때까지 “지루한 기다림의 상상”을 하는 시적 화자에게 일상은 “가부좌를 틀고 퍼포먼스”를 하는 시간이 된다.
<스토커>에서도 시적 화자는 그녀의 뒤를 밟으며 “내내 눈동자를 기억”한다. “댄디보이”와 마찬가지로 “스토커”도 대상에 대한 일방적인 관계라는 것은 동일하다. 그 일방적인 관계는 대상에 대한 ‘지루할 만큼의 기다림’과 간절함을 동반한다. 또한 ‘재봉사’의 순교와도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순교도 누군가를 대신하거나 무엇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지만, 정작 그들은 순교자의 희생과 가치에 대하 모르기 마련이다. 역시 일방적인 것이지 교환 관계가 아닌 것이다. 즉 이러한 일방성은 자본주의적인 교환처럼 등가의 교환이거나 더 큰 이익을 남기기 뒤한 잉여의 교환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나의 것을 바치는 헌신이거나 희생의 불균등 교환이다.
<스토커>에서 시적 화자는 그녀가 숨기고 있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을 읽어주고, 그 몸짓을 해석한다. 이 시에서 스토킹은 상대를 괴롭히거나 집착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과 관계 맺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

버스 안에서 그녀를 쓴다.
멀미를 참아 가며
옆에 앉은 아저씨의 눈초리를 받으며.
이제 벨이 울리고 내릴 시간이다.
그녀가 사는 세상 속으로 놀러갈 시간이다.
그녀가 사는 세상을 쓸 시간이다.
― <스토커> 부분

이재훈의 시에서 알게 된, 일상을 히치하이킹하는 두 번째 방식은 분신술이라고 해 두자. 그러나 그 분신들은 진지하기 짝이 없는 캐릭터들이다. 그들의 육체를 통해 시인은 순례자의 보고서를 쓰고자 하는지도 모르겠다.

_ <시현실> 2009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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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적 원형 구조 연구


김병호 (협성대 조교수)

1. 들어가는 글
2. 시적 상상력의 원형적 구조
1) 초월적 인식
2) 이타성
3) 통일성
4) 영혼과 내세
5) 탈주
3. 나오는 글

1. 들어가는 글

자연과학의 태동기였던 17세기, ‘아는 것은 힘’이라고 했던 프란시스 베이컨은 선언(?)은 이후 수백 년간 근대적 사유의 패러다임을 구축해왔다. 합리주의자들은 상상력의 분방함을 억제하고 사유를 냉철한 이성의 법칙에 묶어두려 하였고, 이성의 이름으로 상상력을 배제하고 억압하였다. 그리고 사물과 사물의 결합은 자연스런 연상이 아니라 인과법칙의 사슬에 종속되고 말았다. 데카르트를 비롯한 합리주의자들에게 상상력은 그저 ‘오류와 거짓의 근원’일뿐이었다. 그들은 상상력의 세계를 비합리적인 것, 부조리한 것으로 간주해 왔었다. 그러나 상상력은 인류가 지나온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광대하고 심원한 시공의 세계이다. 인간이 다른 존재와 차별적 존재로서 자신과 우주에 대해 몽상을 시작한 아득한 옛날부터 과학이 종교화되고 있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침투하면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과 신비를 확장시켜 왔다. 1936년 『상상력』이란 단행본을 발표하면서 상상력 연구의 전기를 마련한 사르트르 이후,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와 뒤랑(Gilbert Durand), 융(Carl Gustav Jung), 코르뱅(Henry Corbin), 엘리아데(Eliade, mircea) 등에 의해 상상력은 학문적 체계를 갖추며 새로운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과학철학자인 동시에 현대 문학비평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상상력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객관적 진실의 세계와는 별도로 주관적 진실의 세계가 존재하고, 이성의 가치와는 별도로 무의식 혹은 상상력의 가치가 존재하며, 과학의 세계와는 무관하게 시 혹은 예술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상상력을 인간 활동의 근원적 원천으로까지 혁신적으로 끌어올린 ‘상상력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었다.

상상력은 바슐라르 이후 멀티미디어 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며 문학은 문자 세계를 벗어나 다양한 미디어들과 소통해야 하는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성 중심의 세계는 자신의 감각기관을 총체적으로 사용하여 감성적이고 유희적인 속성을 발휘하는 시대로 급박하게 옮겨가고 있다. 특히 이러한 징후는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주요한 수단이 문자매체에서 영상매체로 옮겨가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관련되어 보인다. 새로운 세대는 이미 문자적 사유가 아니라 이미지적 사유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제 상상은 질료의 별다른 저항 없이 현실로 전화하게 되었다. 바로 현실의 조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상상은 일종의 정신적 놀이다. 그리고 예술가에 있어서 상상력이란 작품을 이루는 중요한 정신적 능력이다. 특히 이러한 능력은 시의 창작과정에서 잘 드러나는데, 시 창작에 있어 이전의 체험이 한순간에 어떤 창조의 힘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시적 상상력은 우리에게 ‘진실로 진실한’ 그 무엇 또는 우주의 구조나 인간 경험의 기초적인 본질, 표면의 뒤에 숨어 있는 실재, 그 밖에 이러한 구절들에 의해 암시되는 그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리고 시인은 이러한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지각과 낡은 체험을 결합하여 직관처럼 순식간에 새로운 체험을 얻고, 다시 계속 반복되는 상상작용을 통하여 이런 체험들을 결합하고 종합하여 한편의 통일체로서 작품을 완성시킨다.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시인의 사유형식으로서의 상상력이 고유한 구조들과 변화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맺는 ‘외부 현실’과의 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공간은 다만 현실의 재조합에 불과하다. 유토피아 역시 인간 사회의 현실적 관계를 구성하는 어떤 요소들을 달리 배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상상력의 세계가 다루는 감성적 소재는 현실의 소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것들은 어떤 특수한 거푸집 속에서 다시 녹여 주조된 것으로 물질이 아니라 중요한 구조들이고, 이 구조들은 일종의 자율성을 의미한다.

본고에서는 상상력의 자율성 혹은 자발성, 그 적극적 능동성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한 이천 년대 젊은 시인들의 작품들을 통해 그들의 시적 상상력과 원형 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천 년대 이후 학계에 보고된 연구논문들의 다수는 불교적 상상력이나 생태학적 상상력 등 분화된 분야의 상상력이거나 특정 시인에 대한 개인 차원의 상상력에 대한 것들이 다수였다. 따라서 이천 년대에 활약하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상상력의 원형 구조를 살펴보는 것은 이후 우리 시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더불어 본 연구에서는 프랑스 신화학자 뤼시앵 보이아가 제시한 원형구조를 그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이러한 구조는 예전에 곰브리치가 설명한 기본적인 기하학적 관계로서, 이전의 연구들에서는 원형적 상상력의 근거로 노드롭 프라이의 사계의 원형을 이용하거나 프레이저의 속죄양 원형, 휠라이트 혹은 융의 원형(신화소) 등을 그 근거로 삼았는데, 이것들은 시공간을 넘어서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 경험을 통해 인간 무의식의 기저를 살피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뤼시앵 보이아 역시 이러한 지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근거는 이전의 원형비평이 가지고 있던 복음주의적 한계와 제한적 체계를 극복하려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뤼시앵 보이아는 다른 원형 비평가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전진이 시작되는 근원에는 상상력의 세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이성과 감성을 포괄하는 상상력의 세계는 인류 역사의 원동력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프로그램화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즉 이러한 원형의 실체는 인간의 정신 속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때 원형 자체는 경험될 수 없으며, 의식에 포착되지도 않는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원형의 재현이다. 잠재적인 원형이 현실화되고 지각이 가능해지고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실체를 개념화하고 그것의 요소들을 분리시키거나 혼합하는 방식은 시선의 다양성에 달려 있다. 카를 그스타브 융이 확인한 원형들이나 가스통 바슐라르가 구분한 네 개의 자연적 요소, 그리고 질베르 뒤랑의 제시한 (대립되는) 두 영역의 상상력 세계 등이 그러하다.

뤼시앵 보이아는 역사적 변화에 적용된 상상력의 세계의 세계가 지닌, 본질을 포함할 수 있는 원형들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상상력의 원형구조는 변화하는 다양한 가치 형태 속에 내재하며, 지속적으로 역사를 이끌어왔다고 주장한다. 뤼시앵 보이아는 상상력의 발현을 하나의 파노라마 속에 결집시켜 상상력의 세계에 고유한 구조들과 역동적 움직임을 규정하고 그리하여 상상력의 세계가 지닌 특수한 법칙을 파악하려고 시도하였다. 바로 이 부분이 이전의 융이나 질베르 뒤랑, 프레이저 등과 달리 뤼시앵 보이아가 고유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지점이다. 실제로 그가 제시한 원형구조는 어떤 초월적 실재에 대한 의식, 이타성, 통일성의 추구, 영혼과 내세, 탈주, 기원의 현재화, 미래의 해독, 대립적인 것들의 투쟁과 보완이라는 형태 등인데, 이것들이 바로 시공을 뛰어넘으며 항구적인 인간 정신의 뼈대를 구성하고, 역사의 날줄과 씨줄을 엮어내는 본질적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인간 정신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으로서, ‘상징’과 ‘상상력’을 결합시켜 인지하게 될 때, 인간의 인식은 좀 도 본질을 향해 전진할 수 있음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그가 제시한 구조 중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초월적 인식’과 ‘이타성’, ‘통일성’, ‘영혼과 내세’, ‘탈주’등의 원형구조를 통해 이천 년대 시인들의 상상력 세계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2. 시적 상상력의 원형적 구조

1) 초월적 인식

먼저 원형구조의 첫 패턴으로 ‘초월적 인식’을 들 수 있다. 초월적 인식에서 실재는 비가시적이고 포착할 수 없지만 명백하고 확실한 실재인 만큼 더욱 의미 있는 것이다. 그것은 초자연의 세계와 현실이 민감하게 발현된 현상들로 이루어진 영역인데, 이 민감한 발현현상들이 경이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신성한 것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초자연의 세계 구조는 내가 내 자신의 의지와는 구분되는 힘, 즉 나와 다른 전체(신성한 것)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는 인간의 의식으로서 성스러운 것이다. 이 실재는 유일하게 세계와 인간조건에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현상은 전통적인 종교들이 누려온 독점의 종말과 신성한 것의 분산이고, 나아가 이 신성한 것의 ‘변질된’ 형태들의 다양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은 일상적인 삶의 평범한 사건들보다 더 진실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초월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진리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경이로운 것들은 저절로 각인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데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동일한 문화 내에서도 극도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하늘을 나는 독수리, 핏빛으로 해석되는 월식 동안의 불그스름한 달빛, 이리떼의 울부짖음 앞에서 물러서는 개들, 탄식 소리를 내는 밤의 새들, 태양의 어슴푸레한 빛 등의 형태로 말이다. 내재적인 것들 속에서 항상 초월적인 것을 읽을 수 있도록 방향이 잡혀진 시선에는 모든 현상이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인류를 이끄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의 작용을 전제로 하고 민족들을 개별화시키고 운명 짓는 민족정신을 전제할 때, 시대와 이데올로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지속적인 원형으로서 초월적 실재는 우주적 힘과 보편적 관념, 또는 어떤 메커니즘이 이끄는 현상들의 의미와 궁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내 스무 살은 노래였다. 거리에서 배운 노래가 목청으로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그것을 먼 이방의 방언이라 여겼다. 천둥소리는 더 크게 들렸고, 몸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단 하나의 권능도 없이 숨소리 없는 거리에 서 있었다. 나는, 가볍게 다른 문을 열 수 있을까. 꿈도 없는 잠을 매일 잘 수 있을까. 내 손가락들이 들러붙어 물갈퀴가 되고 이빨은 사자처럼 송속니만 사납게 솟아난다. 성 꼭대기에 올라 어둠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새의 등에 올라타고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으며 나스카 평원에 새겨놓은 神의 형상을 한눈으로 보고 싶었다. 나는, 어떤 법을 배웠던가. 노래하는 법 말고는 배운 것이 없다. 눈먼 한 마리의 새가 내 머리칼 속에서 둥지를 틀고 있었다. 새의 전생은 자유였다고 평원을 돌보던 파수꾼이었다고, 그 새가 법을 배웠다.
- 이재훈의 「나스카 평원을 떠난 새에 관한 이야기」부분

시적주체가 스무 살에 부른 노래는 바로 나스카 평원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의 몸짓이었다. 새는 근원적인 것에 접근할 수 있는 존재로서 신비로운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설움을 알고 꿈을 잃어버린 후 새는 나는 법을 잊었고, 먹고 살고 죽는 소소한 일상, 즉 “수면을 뛰어오르는 물고기나 굴을 빠져나온 뱀을 낚아챌 때마다” 한 생의 빛이 바래는 순간을 목격해야 했다. 그리고 새는 눈이 멀었다. 새가 날 수 없을 때 시적주체가 배운 것이 바로 노래이다. 이때 노래는 나스카 평원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던 새의 비행을 대신하는 것이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먼 이방의 방언”이라고 여겼다. 결국 시적주체는 세상과 불화했고 고독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다른 전체에 의해 조건 지어진 인간의 의식은 노래로 대변되는 것이다. 신성한 것은 인간 사회와 초월적인 세계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작품에서 새는 신성의 흔적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신성성의 박탈 즉 ‘날지 못하는 새’가 되어버렸을 때에도 이 본질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조건을 초월하려는 시적주체의 영원한 현존적 이상과 꿈은 초자연적 세계에서 한정된 경이로운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결국 선험적 범주에 의하여 구성된 ‘초월적 인식’은 궁극적 근원이며 근거가 되는 것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특성을 가진다. 그러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현상계의 근원이며 그 근거가 되는 신, 영혼, 궁극적 실재와 같은 범주의 것들을 짐작하게 한다. 따라서 실재하기는 하나 우리가 인식하기 어려운 초월적 실재에 대한 의식은 상상력이 태생적으로 지닌 원형구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문학이론가로서 상상력의 개념을 정리한 코울리지는 상상력을 현상 세계가 감추고 있는 초월적 진리를 드러내는 능력이라고 정의했을 정도로, 초월적 인식은 상상력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상력의 원형구조는 이재훈 뿐만이 아니라 김경주, 여태천 등의 시세계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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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시인)

 

 

1. 공분의 시대

뜨거운 여름을 보내는 중이다. 그 몇 달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생각하니, 벌써 너무 덥고 답답하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인한 충격과 서글픔은 더 말해 무엇하랴. 북한에서는 핵실험을 강행했고, 한국은 PSI 전면 참여를 선언하였으며 안보리의 북한에 대한 비난은 더 거세어지고 있다.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6.9 작가선언 ‘이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시국선언을 하기도 했다. 용산참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사회 약자인 서민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란 말인가. 디도스(DDOS)라는 이름의 사이버테러가 한국의 주요 사이트에 침투하기도 했다. 여야 간의 대립 속에 미디어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쌍용차 노조 파업 또한 진행 중이다. 비정규직법은 오리무중이다. 연일 장맛비가 내렸다. 전국적으로 장마로 인한 폭우 피해가 속출하였다. 재난피해는 늘 서민들에게 돌아간다. 그래도 우리의 일상은 늘 똑같이 돌고 돌아간다. 밥먹고, 일하고, 술먹고, 잠잔다. 비정규직이라 늘 불안하고, 자식들의 교육비 때문에 한숨 나온다. 젊은 세대들은 결혼을 미루거나, 아이 낳는 것을 포기한다. 그래도 우리의 일상은 늘 똑같이 돌고 돌아간다. 돌고 돌아가는 게 우리의 일상이지만, 한 가지 남는 게 있다면 ‘분노’다. 분노라도 없다면 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분노라도 없다면, 더 망가지게 될 우리의 삶은 무엇이 될까.

나라에 큰 슬픔이 있던 초여름이었다
연초부터 벼랑으로 몰린 사람들이
망루를 오르다 불에 타 죽고
죽은 몸은 다시 냉동되어 여름까지도
망각의 상자 속에 갇혀 이승에 방치 되어 있었고
경찰과 깡패가 한 개의 방패 뒤에 저희
그림자를 가리고 발맞추어 지나가고 나면
신문은 무기가 된 활자의 볼트와 너트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마구 던졌다
검게 그을린 영혼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하던
신부는 용역들에게 맞아 성체와 함께 나뒹굴었고
신부님이 두들겨 맞았다는 말에
어머니는 묵주를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수백의 시인들이 다시 조시를 쓴다는 말이 들려왔다
부러진 칼을 필통에서 꺼내 연필을 깎으며 나도
흐느껴 우는 나무들에게 몇 줄 편지라도 쓰고 싶었다
― 도종환, <그해 여름> 부분

위의 시와 같이 여름은 지나가고 있다. 서민들을 쫓아내고 투기꾼들을 불러 모아 관청의 창고를 채우는 일에 서민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죽었다. 용산참사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살아가는 서민들 모두의 일이다. 당장 내가 사는 집, 당신이 사는 집도 모두 뉴타운이 될 것이다. 시인은 “숲의 나무들은 진종일 허리를 구부리고 울었다”고 했다. “슬퍼하는 이는 넘쳐났으나/ 잘못했다고 말하는 이는 없이 여름”이 이렇게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망령은 여전히 우리의 주변에 서성거리고 있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정치철학이지만, 문명사회의 일원인 우리의 ‘생명’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벌거벗은 인간’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좀 신랄하게 얘기하면 ‘벌거벗은 인간 쓰레기’가 우리의 모습이다. 너무 자학적인가. ‘우리’의 모습은 신자유주의에 매몰당하여 근근이 생을 버티고 있는 우리 ‘시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무엇이 우리를 범죄자로 몰고 있는가. 촛불 앞에서 숭고하고 간절하게 촛불의 상징을 가장 현실적으로 재현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범죄자의 모습으로 윤색되고 있다. 애초에 희생물은 예정되어 있었다. 권력과 제도가 만든 허상의 신념 앞에서 모두 맹신의 희생물이 되고 있다. 무소부재의 권력은 호모 사케르를 죽이더라도 처벌 받지 않는다. 우리는 늘 호명당한다. 호명하는 주체가 시인이 아니라 주권 권력이던가. 하긴, 역사는 늘 이러한 과정을 되풀이해 왔다. 문학은, 인간은 왜 수없이 되풀이되는 망령을 뒤좇고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용산참사는 뼈아픈 생각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일상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어떤 소설보다 더 허구적으로 진행되고 있지 않는가. “이 냉동고를 열어라/ 거기 너와 내가 갇혀 있다/ 너와 나의 사랑이 갇혀 있다”(송경동, <이 냉동고를 열어라>)고 울부짖는 시인의 목소리가 거리에서 울린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은 겨우 살아가기 급급한 시간들의 연속이다. “딸아이가 4학년이라고 했다/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도우미는/ 탬버린을 잠시 내려놓고 눈치껏 답장 문자를 날린다/ 혼자 있는 딸에게”(윤병무, <노래방 도우미>)라는 구절에 이르면 사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서민들을 내몰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시인은 늘 실패한 혁명가를 꿈꾼다. 문학적인 삶을 꿈꾼다. 진은영은 말했다.(진은영, <문학적인 삶>) “그들은 결정을 서두른다”고. 무엇으로 하여금 결정을 서두르게 하는가. 걸작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노란 조끼를 입은 청년들의 관자놀이에/ 서슴없이 방아쇠를 당기게 할 위대한 한 페이지를” 서둘러 작성해야지만 문학적인 삶이므로. “한 사람의 젊은이가 위대한 예술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젊은이를 비탄으로 몰아갈/ 실업의 총알을, 죽음에 못 이른다면/ 비정규직의 주황색 망토에 뚫릴 동그란 구멍이라도” 필요하거나 피해야 한다. 사실, 시인은 비정규직이다. 시인들의 대부분은(교수나 교사가 아닌 이상) 비정규직이다. 비(非)라는 말이 주는 서글픔은 가슴에 서늘하게 남는다. 그렇기에 “폐병장이 시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발자크식 스타일이 되거나 미국에 살지 않는 이상, “폐병장이 시인”을 소비하고 싶어한다. 이 시대의 폐병장이가 비단 시인뿐이던가.

2. 심미성

사실, 일상성은 광의의 개념이어서 모든 문학에는 기실 일상이 내포되어 있다. 범박하게 말해 일상성의 현대성과 심미성은 ‘지금, 여기’의 현실을 어떠한 방식으로 내면화시켜 새로운 언어의 성채로 만들어내는가 하는 방법론에 방점을 찍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문학의 변용과정은 각 주체가 처한 이성적 토대의 상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현대성과 심미성을 일상의 차원에서 밝혀내기란 요원한 일임에 틀림없다. 광의의 개념으로도 이를 생각해볼 수 있다. 시론에서 오래전부터 지적하고 있듯이 시가 ‘일상적 진실’과 ‘당위적 진실’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면, 대부분의 문학은 ‘진실’의 차원에서 시적 의미를 거론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진실성은 현실을 그대로 노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의해 재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을 어떠한 내면을 통해 동화하거나 투사하여 비춰지느냐에 있다. 또한 이러한 시적 변용이나, 방법적 드러냄을 어떠한 미학적 방식으로 수용하는가가 문제이다. 우리의 일상은 지리멸렬이며 생존을 위한 공간인 돼지 울타리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러한 현대 문명인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시켜 담아내는 풍경은 이제 새롭지 않다. 어차피 문명의 삶은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공간인 문명의 삶은 분명 성찰해야 할 난관인 것이다.
신문을 보며, 그것도 하루 지난 신문을 보며 “분노할 줄도 슬퍼할 줄도 모르는 짐승” 같다고 말하는 일요일의 어느 시간이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다.(김안, <일요일들>) 가난하기 때문에 “천천히 당신을 만난다”라고 생각하며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어느 일요일이 가장 현실과 가까운 일상의 풍경이다. 무기력하고 너저분한 일상의 순간들은 자아의 존재를 무화시켜버린다. 그것은 무서운 결과다. 시인은 “내가 낳은 자식들은 모두 액체”라고 한다. 이 액체는 시인의 말대로 죽은 시체의 즙이다. 제 존재의 시원을 망각하고 있다는 자아의 태도는 일상의 현실에서 더 건조한 이성을 가지겠다는 느낌을 준다. “그 많은 자식들 중 단 한 명의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아버지는 片肉이” 된다. 그리고 시인은 “이제 난 뒤로 말하리라”고 한다.
토요일은 어떠한가. 사실, 월요일이건 수요일이건 중요하지 않다. 일상은 늘 그대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김참은 “수요일엔 술을 마시러 시내에 갔는데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는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불을 덮고 잠을 잤는데 그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모른다”고 한다.(김참, <토요일>) 이유는 습관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잠을 자는 습관 때문이라고 한다. 시에서의 자아는 “달력이 없고 시계도 멈춘 지 오래라”고 말한다. 이미 시간에 대한 개념을 벗어버렸다. 일상은 늘 시간에 쫓기며 사는 순간의 연속이다. 이 쫓기는 시간의 연속선상에 문명인들은 발을 올려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의 이탈자가 되어 불안을 느끼게 된다. 시인은 이탈자이다. 오늘이 혹은 내일이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고 살기 때문이다. “가끔씩 오는 전화도 한 통 없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잠을 잤고 TV만 봤기 때문에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의 공간은 늘 무덤 속에서 숨쉬는 것과 다름없다.(김언, <숨쉬는 무덤>) 문이 열리면 “아무도 없는 마루”가 보이지만 결국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우리의 빈방 체험은 시적 자아가 이 시대의 유령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현대인은 누구나 자신이 유령이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고 있다. 시인은 “내가 유령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김언, <유령-되기>) 중요한 것은, 아니 문제시되는 것은 “내가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느냐”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사람인데 시적 자아는 유령이다. 유령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니라 흘러다닌다. “돌, 나무, 사람들의 데모 행렬”에 슬쩍 몸을 맡기고 흘러다닌다. 공기를 의지해서 “공기가 움직일 때 나도 따라 걷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 자아가 겪는, 혹은 되고 싶은 “유령” 되기이다. 유령인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나도 중요하지 않지만, 이 시대에 유령이 된 시적 자아의 모습은 현재 여기 존재해 있는 것이다.

3. 초월의 세계

언제나 일상을 쉽게 다룬다는 것은 ‘쉬운 시’ 혹은 일상시로서 폄하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은 소재의 차원에서 일상이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일상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실존의 허망함과 존재의 역설을 시적으로 승화한 작품들을 가지고 있다. 이천년대가 넘어서면서 일상이 담지해 줄 수 있는 가능성들이 하나씩 무너지면서, 우리가 일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의미는 허무적일 수밖에 없다. 있다면, ‘나르시시즘’이나 ‘멜랑콜리’ 정도겠지만, 그 또한 비겁한 합리화처럼 자꾸 느껴진다. 그럼에도 일상을 포기하고, 추상적 이상의 공간만을 탐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우리의 일상은 너무 사실적으로 거칠고, 허구를 뛰어넘는 사건의 연속이며, 실존의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계속되는 죽음의 공간이다.
현대인이 살을 부비고 살아가는 도시의 공간은 문명인이 폐허 속에서 건축한 타인의 나라가 아니다. 그 공간은 현대인에게 자연과 똑같은 공간이다. 정재학은 거리에서 태어나고 거리에서 일하는 문명인의 길에 대해 말한다.(정재학, <微分-길>) 시인에게 거리는 자연과 같은 공간이다. 오래 걸었던 길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저 길들은 내게 강줄기와 같아요”라고 한다. 도시의 길도 강줄기가 될 수 있다. 길을 강줄기로 인식하려면 새로운 문명인의 피를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다. 도시에서의 아이들은 “기침이 그치지 않는 점액질의 아이들”이다. 그들은 공기로 숨쉬지 않으려고, “가슴에 칼집을 내어 아가미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세계는 우리에게 다정한 세계일까.(김행숙, <다정함의 세계>) “이곳에서 발이 녹”고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이곳은 다정함의 세계이다. 이곳은 우리 일상의 세계이다. 일상은 거대한 역설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역설을 기정사실로 간주하며 살고 있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이다. 이곳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를 간절히 기다린다면 어떨까. 오은은 이 거리에 넘쳐나고 있는 가짜 어른들의 모습을 신랄하게 보여준다.(오은, <보카 델라 베리타(Bocca della Verita)) 가짜 어른들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학생들이다. 하지만 이 학생은 어른보다 훨씬 성숙하다. 아직은 소녀라고 말하면서도 “차근차근 작은 일부터” 하는 게 순리라는 걸 안다. 착한 학생이다. 느지막이 학교에 가고 “꼰대를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철부지는 아닌 셈이다. 하지만 “연애 말고도 즐거운 일은 많”다는 것을 아는 소녀의 일상은 그다지 행복해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시에 등장하는 소녀에게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요할 순 없다. 소녀는 자신의 성정과 자아가 가진 품격대로 다짐을 하고 살아가는 거리의 또다른 어른이다.
문명인에게 초월은 어떤 의미를 주는가. 먼저 문명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배한봉은 그것은 문명이 먹어치우는 “식욕”이라고 했다.(배한봉, <문명의 식욕>) 마치 오은의 “식충이들”이 물질이건 정신이건 모든 것들을 “처먹는” 모습과도 비견된다. 옷의 식욕은 이제 본능의 것보다 앞서 있다. “성욕보다 수면욕보다 힘이” 센 옷의 식욕은 문명인이 만들어낸 물질의 대표격이다. 물질이 없으면 안 되는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아의 존재를 물질에게 먹혀버린다. 자아는 “살아있는 한 나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끊임없이/ 소비된다”고 한다.
초연한 자리에서 일상으로 내려오면 늘 불편하고 메스꺼워 다시 일상 밖으로 탈출하고 싶어진다. 문명인들에게 탈출과 무관심을 합리화해 줄 대체 공간이 나타난 것 또한 이미 오래전 일이다. 그것은 가상현실의 공간이다.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 빠져나와 있”는 광경은 이제 우리에게 현실이 되어버렸다.(이원, <거리에서>) 이원이 말한 이러한 거리의 공간이 지금은 이미 현실화된 공간이다. 詩에서는 소위 ‘인공육체’라고 불리우는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빠져나와 있”는 몸의 상상력이 등장했다. 이러한 육체는 이미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에얼리언>을 비롯한 영상문화를 통해 시각적 상상력으로 재현되었으며 더 거슬러서는 ‘프랑켄슈타인’의 몸에까지 올라간다.
이러한 몸의 상상력이 지금은 일반화되어 예술뿐 아니라 광고에까지 넓은 영역에 걸쳐 퍼져 있다. 그 동안의 몸이라는 개념은 ‘살아 있는 몸’, ‘피가 나는 몸’이었다. 그러나 이제 플러그를 매단 몸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인공적인 몸의 등장은 자본주의와 컴퓨터가 상징하는 물질문명의 영향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생명의 상징인 살과 피를 가진 몸이 분열되고, 해체, 복제되는 인공의 몸으로 그 상상력이 바뀐 것이다. 지금은 이런 실험이 문학의 언어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 이미 이러한 육체는 지금 현대에 자연스러운 몸의 일종이 된 것이다. 이제 우리의 일기는 “0개의 카테고리와/ 177개의 사이트”를 방황하는 시간, 즉 “계속해서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이원,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하는 시간으로 점철되어 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 가고 있다.(박해람, <낡은 침대>) 우리의 육체를 쉬게 해주는 것은 “낡은 충전기”이다. 우리는 배터리의 힘으로 충전한다. 우리는 안락한 휴식을 침대에서 보낸다. 침대를 충전기로 인식하는 시적 자아는 문명의 발전소에 저당잡힌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상은 욕망하는 장소이다. 먹고 싸고 자고 싸우는 본능적인 공간이 일상이라면, 고매한 정신적 충족의 공간이 초월의 공간이다. 이 두 공간을 서로 왕래하며 우리는 고단한 삶의 시간들을 견디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일상이 본능적인 공간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은 사람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확연한 사실은, 결국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며 먹고 싸고 자기 위해 평생 동족들끼리 싸워야 하는 존재임을 증언한다.

4. 욕망

문명이 인간에게 전해준 것이 인간 본성의 박탈만은 아닐 것이다. 분명, 문명이 전하는 즐거움도 있다. 오로지 생산만하는 인간에서 유희와 휴식을 즐기는 인간이 된 것은 문명 때문이다. 문명으로 인해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주권과 인권을 생각하게도 했다. 그럼에도 문명이 주는 축복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적 자아가 처한 정서적 본연성 때문일 것이다. 시는 과학이나 경제가 아니고 교양도 아니다. 시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에 바쳐지는 구원의 노래이다.
일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과 일상의 순환관계,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순환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와 삶 속에는 바로 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일상의 관성이 내재해 있다. 이 일상의 관성과 힘을 무시하고는 그 어떠한 ‘사건’이나 ‘역사’도 일어날 수 없다.
쉽게 말해 시에서의 일상성은 우리 주변의 흔한 생활사를 시적 공간 안에 끌어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소재로서의 생활사를 탐색하는 일이 어떠한 의미를 갖느냐에 대한 회의에 이르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생활사를 통해 어떠한 근본적인 의미를 도출해내는가가 필요할 것이다. 이에 대한 예증으로 이미 90년대 ‘도시시’라는 개념어가 자리잡히기도 했다. 우리의 일상은 이제 대다수가 도시의 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문명인이기 때문이다. 이제 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아주 특별한 예에 해당한다. 도시시 또한 소재의 문제가 크겠지만, 그 소재를 통해 문명을 소화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주체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일상은 무엇인가. 매일 쳇바퀴 돌듯 흘러가는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탈출하고픈 자의식이 발돋움하여 보려는 곳은 과연 어떤 풍경인가. 그 발돋움은 어떠한 모습과 양상으로 언어의 결에 흠을 내는가. 이러한 두서없는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일상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한 없을지도 모른다.

_ <시인시각>, 2009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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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후감

 

투고된 작품들 중에서 최종심에 오른 이들은 모두 다섯 분이었다. 박병수, 이일옥, 정운희, 예외석, 하미애 제씨들이다. 다섯 분의 작품을 놓고 논의한 결과 비교적 쉽게 당선자를 선할 수 있었다. 예외석과 하미애 씨는 신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새로움과 시적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먼저 제외되었다. 정운희 씨는 기존의 시적 관습에서 일탈하여 새로운 시적 문법을 보여주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그러나 시가 전체적으로 정제되지 않고 풀어져 있었다. 요즘 긴 산문시가 가지고 있는 단점들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어서 선뜻 선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수사력은 만만치 않아 앞으로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선자로 선정된 박병수, 이일옥 씨는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자기만의 시적 세계를 가지고 있는 시인들이었다.

박병수 씨는 선 굵은 진술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상상력의 시공이 크고 행간을 성큼성큼 뛰어넘는 언어의 보폭이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월식의 일종인 반영월식은 달이 빛을 잃어 어두우면서도 부드럽게 보이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짐승”에서 “별들”로, 다시 “물고기”에서 “날아가는 새”로, 또다시 “천사”에서 “새들의 조상”으로 시적 대상을 이동하면서 사유의 폭넓음을 보여준다. 결국 화자의 시선은 “남자”로 시적대상이 이동하면서 자아의 내면을 응시하고, 마지막에 월식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박병수 씨는 시 속에서 언어를 배치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달콤한 칩거」에서 보듯 적재적소에 아포리즘과 감각이 지나간다. 시인의 일상 속으로 “낙타들”과 “악어떼”를 끌어들여 시적 자아와 함께 방목하는 상상력, 「알키투더스 추모기」에서 보이는 우화적 상상력 또한 시인을 신뢰하게 할 만하였다.

이일옥 씨는 사물을 관찰하는 능력이 인상적이었다. 「수화」에서 볼 수 있듯이 모녀가 손짓으로 주고받는 수화를 “손가락으로 말을 뜨고 있다”고 표현하면서 그 이미지를 끝까지 시에서 살려내고 있다. 또한 수화의 이미지를 ‘소통’과 ‘상실’이라는 주제로까지 결합하는 능력은 눈여겨볼 만 했다. 「검은 방문」에서 “수백 마리의 까마귀 떼,/ 검고 앙상한 군집들은 저녁 무렵 죽음을 발라내듯/ 노을 몇 줌 서쪽 허공에 게워내곤 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결코 흔치 않은 이미지이다. ‘흉’의 상징인 까마귀를 묘사하는 게 상투적일 수 있는데 그러한 점을 잘 극복해나가고 있다. 「도둑이 사는 집」에서도 술 취한 한 사내가 골목 입구로 들어가는 이미지를 “어둠의 내부를 따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일옥 씨는 오랜 동안 회화의 영역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표현해왔다. 시인은 이런 점을 잘 진화시켜 자기만의 개성적인 언어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당선자들껜 축하의 말씀을 드리며, 그렇지 못하신 분들껜 다음을 기약하며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본심 심사위원 : 이수익, 원구식, 이재훈(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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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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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의 나날

어머니
저는 당신 물속에서
가득 충전되어
이 세상에 나왔는데
이곳은 너무 건조하군요

어머니
이제 방전된 제 몸에
스위치를 올리렵니다
딸깍 딸깍

들리세요?
제 몸에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하며
날이 갑니다
참, 많이 아픕니다


나는 밤이 없다고 했다
밤이 없으므로 당신을 한 번도 뉘인적 없다고도 했다
어느 날 백야처럼 쉼없는 날들이라며
당신은 내게 밤을 주셨다
오로지 나의 안락으로 밤은 하나씩 채워졌다
내 청춘이 지던 때
당신은 그때 기적을 보여주셨다

헤진 모자를 쓴 당신
내게 밤이라는 단어를 주셨다
눈물이 흐르는 걸 잘 가릴 수 있게
작은 흐느낌도 잘 들을 수 있게

밥이란다
먹고 사는 일이란다
눈물이란다
이젠 어느 입에도 들어갈 수 없는
숟가락들이 모여 등을 맞대고 있다
한때는 수많은 입을 받아냈던 몸
기(氣)만 남아 반짝 빛난다

생각해보면 차갑고 완고했다.
무엇을 물고 늘어지기 위해 온몸은 잔뜩 긴장돼 있었다.
예민하고 민첩한 이성은 없었다.
타인의 무게에 반항했다.
언젠가는 악물었던 입의 힘을 빼야 한다.
모든 것을 풀어놓고 바닥에 몸을 눕힌 사람들.
그 바닥에는 타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상처의 흔적들만 가득하다.


_ 글. 사진 : 이재훈
_ 장소 : DOP 조형예술연구소(조각가 도일 작업장)

_ 출처 : <시와반시>, 2009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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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시인 김현승

 

이재훈(시인)

 


가을이다. 가을을 가리켜 흔히 천고마비의 계절, 혹은 고독의 계절이라고 한다. 산의 나무들은 형형색색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거리의 가로수들은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우리는 가을이 되면 쓸쓸해지고, 인생과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철학자는 아닐지라도 산책자쯤은 되는 것이다. 조락의 계절. 지는 낙엽은 소멸과 죽음이지만, 우리는 그 소멸의 광경을 지켜보며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소멸의 미학이다. 자신이 지나온 삶을 추억하며 존재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는 계절. 가을이다. 가을엔 편지를 쓰고 싶고, 낙엽을 줍고 싶고, 그리워하고 싶고, 거리를 걷고 싶어진다. 그리고 고독해진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시인은 바로 김현승이다. 가을과 고독의 시인으로 불렸던 다형(茶兄) 김현승(1913∼1975) 시인. 김현승은 유독 가을과 고독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또한 그 시들이 유독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대충 짚어 봐도 <가을의 기도>, <가을의 시>, <가을저녁>, <플라타너스>, <절대고독>, <고독>, <고독의 풍속>, <고독의 순금>, <고독의 끝> 등등. 김현승은 전남 광주에서 출생하여, 부친의 사역지를 따라 제주에서 잠시 성장하다가 7세 때부터 다시 광주로 이주해 성장했다. 부친 김창국(金昶國)은 개신교 목사인데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혈연적 전통은 김현승의 시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현재에도 김현승은 기독교적 상상력을 시적으로 승화한 가장 훌륭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광주 소재 미션계 학교인 숭일학교 초등과를 졸업하고 숭실전문대학(숭실대학교)을 졸업했다. 대학 재학중이었던 1934년에 모교의 교수였던 양주동의 추천으로 <동아일보>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1951년 고향 광주에 있는 조선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고, 한국전쟁 와중에서도 <신문학>을 창간 자칫 단절될 뻔했던 광주 문학사의 맥을 이어주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대 재직 시절 지역을 근거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문병란, 이성부, 오규원, 문순태, 이근배, 김종해 등 40여 명을 <현대문학>에 추천하여 후진을 양성했다. 1960년 모교의 후신인 숭실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활발한 문학활동을 펼치다가  1975년 4월 숭실대학교 채플시간에 기도하다가 지병인 고혈압으로 쓰러져 타계했다. 최근에는 탄생 100주년 앞두고 그의 문학적 고향인 광주에서 그의 문학사적 족적과 시 정신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을 활발히 해나가고 있다. 제자들을 중심으로 다형 김현승 시인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다양한 문학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김현승의 대표시는 아무래도 <가을의 기도>나 <플라타너스>일 것이다.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로 이어지는 시 <가을의 기도>는 전국민의 애송시이다. 매년 가을이면 빠짐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현승은 ‘고독의 시인’이라 일컬을 정도로 고독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그중 <견고한 고독>을 읽으며 ‘고독’의 찬란한 순간을 느껴보자.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들의 거대한 정의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는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주며

결정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한 칼날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씁쓸한 자양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 <견고한 고독> 전문

김현승의 고독 시리즈는 관념적인 부분이 있어 다소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가을에 이 시를 읽을 때는 가슴 한복판으로 시어들이 밀려들어올 때가 있다. 시의 모든 사물들은 고독을 향해 수렴되어 있다. 얼굴, 손발, 창끝, 떡, 칼날 등의 시어가 내 모습과 함께 중첩되고 이것은 다시 고독의 공간으로 수렴된다. 세파에 찌든 우리들의 모습은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과 다름 아니다. 그곳에서 가녀린 창끝을 의지해 살아가지만 굶주린 삶의 고난함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고고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다. 고독한 시간들 속에서도, 영어(囹圄)와 같은 삶의 시간들 속에서도 고독한 영혼을 보듬어 안으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무상한 삶의 내력들이 충만한 생명력을 가지게 될 수 있는 힘이 된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삶을 자학하고 훼손해 왔는가.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을 느끼기 위해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노력했는가. 고독을 느끼는 가을의 시간. 고독을 통해 우리 영혼의 소중함을 단 하루만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충만한 시간들을 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

_ <논산문화>, 2009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


서태지 세대


이재훈


아름다운 골목은 없다.
돌고 도는 것이 골목이며
참고 참는 것이 사랑이다.
첫 사랑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때까지
본드를 마시고, 부탄가스를 불었다.
정작 중요한 말이라고 세상에 떠도는 건
모호한 개념 정의들뿐.
됐어 됐어 이젠 그런 가르침은 됐어.*
유치하다 생각한 노래를 목청껏 불렀지만
우리에게 밤문화를 가르쳐준 선생님과
몇 푼의 참고서 값으로 위안을 삼는다.
대학도 회사도 모두 판매왕을 모집하여
고시원과 학원을 전전하였던 아름다운 시절.
희망도 아니고, 욕망도, 진리도 아닌
어수룩한 정당성으로 가득한 신자유주의.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
그리고 나는 불편하다는 것.
정의와 진실이 정치적이라는 걸
한순간 깨달았을 때.
잔혹한 눈망울을 낼 수 없는 나는
숭고한 공간을 꿈꾸었던 나는
이 시대를 매일 버린다.
머릿속 꿈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한 것도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이십일 세기 문명에 무릎을 꿇는다.
내 손으로 만든 옷과 신발과 종이가
하나도 없는 무능한 세대.
조금 일찍 태어났더라면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고
울분으로 노래를 부르고
세상에 욕을 하고
그것으로 명예를 얻고 정치를 하고 돈을 벌고
후배들에게 내 아픔의 젊은 날을 얘기할 텐데.
체게바라의 페데로사를 끌고
동해와 남해를 거쳐 서해의 어귀에서
술을 마시고 낯선 여자를 만나고
모래밭에서 잠드는 낭만놀이를 했을 텐데.
손잡고 싶은 사람 하나 없어
집으로 향하지만
오늘도 우편함엔 밀린 고지서와
광고 전단지만 가득하다.

* 서태지, <교실이데아>



|작품평|


‘서태지 세대’의 궁지와 난문(難問)



김창환
(문학평론가)



지금 쓰고 있는 이것이 <서태지 세대>라는 텍스트에 대한 글이 아니라 허물없는 말이라면, 이것이 지면이 아니라 시인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공간이라면, 혹은 내가 텍스트를 평가하기 위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알량한 자의식을 버릴 수 있다면, 나는 이 시에 대해 따져 물을 것도 풀어 설명할 것도 없다. 한 행, 한 행에 담겨 있는, 심지어 그 행간에 숨어 있는 감정의 값조차 직관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바로 내가 ‘서태지 세대’이기 때문이다. 시인과 시 속 발화자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이 어렵고, 그 발화자와 독자(나)를 구분하는 것도 불편하다. 이 친화력을 떨어내기 위해 애쓰며 「서태지 세대」를 말해야 한다고 스스로 되뇌는 순간, 문득, 이 곤혹스러움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바로 이 시의 고갱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 시는 한국 사회의 한 세대가 직면한 내적, 외적 궁지와 그것이 야기하는 우울과 무력감을 절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혹여 독자가 그 세대에 속한다면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골목은 없다. 돌고 도는 것이 골목이며 참고 참는 것이 사랑이다”로 시작되는 이 시의 전반부는 한 세대의 궤적을 숨 가쁘게 추적한다. 특히 첫 대목에 놓여 있는 ‘골목’은 유년기의 체험부터 성인이 된 이후의 세계인식을 아우르는 긴요한 상징이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황금기인 유년기, 자족적 소우주 안에서 살아가는 그 시절의 ‘골목’은 새로운 공간 체험을 가능케 하는 돌쩌귀이다. 공간들은 구불구불하게 꺾여 있는 골목길을 따라 접혀 있고, 꺾인 골목을 돌아 내달릴 때 경험하는 새로운 공간은 세계체험의 가장 초보적인 형태이다. 그런데, 이 시는 접힌 공간이 펼쳐지며 나타나는 공간이 더 이상 새롭지도 아름답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저 획일적이고 비루한 공간의 반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돌고 도는’이라는 이 말에 담긴 시적 주체의 진저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린 시절의 단순한 탈향의식부터 예민한 정신이 결코 깨끗이 포기할 수 없는 유토피아 동경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익숙한 공간의 피륙을 찢고 새로운 곳으로, 혹은 최소한 이곳과는 다른 곳으로 뛰쳐나가려는 충동을 내장하고 있다. 이러한 강렬한 충동을 인정한다면 ‘돌고 도는 것이 골목’이라고 말하는 자의 끝 모를 좌절, 즉 이 세계에 이곳과 다른 곳이 없다는 사실, 새로움이 없다는 사실이 안기는 좌절을 간취해낼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사춘기의 발달과업을 자아와 세계의 탐색이라고 말한다. 진짜배기 탐색을 시작한 진지한 개인들은 내 삶을 지탱할, 혹은 내가 살아갈 세상을 지시할 말들을 고르고 그것들의 경중을 따져 우선순위를 매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작업의 심층에는, 언어가 실재를 지시하고 있으며(아니면 최소한 언어가 실재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고 있으며), 인간 체험은 언어를 통해 의미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고,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와 관계할 수 있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만약 ‘말’로 나와 세계의 관계를 직조해내지 못한다면 진지한 개인들은 무의미의 심연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적 주체가 ‘서태지 세대’의 우울과 무기력의 한 극단으로 포착해낸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정작 중요한 말이라고 세상에 떠도는 건/ 모호한 개념 정의들뿐”이라고 말할 때 이 짧은 2행은 서태지 세대가 가지고 있는 ‘말’에 대한 불신을 잘 보여준다. ‘말’에 대한 불신은 곧 자기 이해와 세계인식의 불투명성과 연관되며 그것은 이 시의 흐름을 좇아가면 ‘정의’와 ‘진실’의 불가능성과 연관되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사실, ‘서태지 세대’가 어떤 ‘가르침’에 존경심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들이 대학문턱을 밟고 다닐 무렵 대학의 강단은 ‘해머의 철학’이 지배하고 있었다. 전통적 사유, 사유의 축조술은 맛보고 판별하기도 전에 부정해야 할 무엇으로 다루어졌으며 오랫동안 근대세계를 떠받치고 있던 많은 것들이 이미 부서져 있었다. 모든 말들은 그 지시대상이 모호하거나 지시대상과 교묘히 어긋나 있었고, 말은(조금 더 확대해서 언어는) 더 이상 세계를 여는 열쇠라고 추앙받지 않았다. 그런데 ‘서태지 세대’가 지니는 ‘말’에 대한 불신은 해체를 지향하는 교육의 효과가 야기한 지적 승복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감각적으로 체득한 것이다. 이것이 ‘서태지 세대’의 날카로움이다. “됐어 됐어 이젠 그런 가르침은 됐어./ 유치하다 생각한 노래를 목청껏” 부른 세대는 전통적 가치체계나 이데올로기와 그것들을 가장 밑바닥에서 떠받치고 있는 ‘말’에 대한 부정을 감각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말’은 세계 내적 존재인 나를 떠받치는 토대가 되지 못한다. ‘정의와 진실’은 그 절대성을 잃고 그저 ‘정치적’인 맥락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전락했다. 이제 내가 좇아야 할 숭고한 대상들은 다 소멸하고 ‘신자유주의’라는 전지구적 시스템만이 내 삶의 내밀한 영역까지 파고들어 나를 지배한다. 적과 나를 구분하는 것이 본질인 정치의 생리를 체득하지 못한 ‘나’는, 이 바깥 없는 체제를 살아가면서 감히 바깥 혹은 높음을, 다시 말해 ‘숭고의 공간을 꿈꾸었던 나’는 이 시대와 심각한 불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제 ‘나’는 이 시대의 힘을 받아들여 순응하거나 스스로 유폐하는 것 중 하나를 강요당한다. 그리고 ‘나’는 후자를 택한다. ‘정의’와 ‘진실’을, 그리고 ‘머릿속 꿈들’과 ‘선한 것’을 부여잡고 있는 시적 주체에게 이 시대는 복마전을 방불케 한다. ‘조금 일찍’ 태어난 세대에 대한 감정의 본질은 자기 삶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부여할 수 있었던 세대에 대한 부러움이다. 그러나 그 의미부여가 얼마나 허구적(낭만적)이고 자기기만적인지 시적 주체는 잘 알고 있다. 기실 부러워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을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시적 주체의 모습을 바라보는 독자의 입맛은 씁쓸하다. 주체와 세계에 관한 ‘중요한 말’을 갖지 못한 세대의 우울과 무기력이 단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말’의 권위가 사라지면 ‘진실’은 존립할 재간이 없다. ‘진실’이 없는 곳에서는 보편적 ‘정의’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세계 속에서 나 자신의 삶을 긍정하거나 의미를 부여할 어떠한 방법도 없다. 이것이 ‘서태지 세대’가 처한 내적 궁지이다. 그리고, 잠깐 쓰이다 버림받을 노동만을 요구하는 세계 질서의 강고함이 그 세대가 처한 외적 궁지이다. 이 불멸의 궁지 속에서 숭고를 꿈꾸는 자는 필멸 혹은 필패이다. 이것이 ‘서태지 세대’의 우울과 무기력을 낳는다. 자, 이 난경難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난문難問이 시인을 기다리고 있다.

_ <현대시>, 2009년 8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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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세대

시詩 2009. 7. 7. 13:56


서태지 세대

이재훈



아름다운 골목은 없다.
돌고 도는 것이 골목이며
참고 참는 것이 사랑이다.
첫 사랑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때까지
본드를 마시고, 부탄가스를 불었다.
정작 중요한 말이라고 세상에 떠도는 건
모호한 개념 정의들뿐.
됐어 됐어 이젠 그런 가르침은 됐어.*
유치하다 생각한 노래를 목청껏 불렀지만
우리에게 밤문화를 가르쳐준 선생님과
몇 푼의 참고서 값으로 위안을 삼는다.
대학도 회사도 모두 판매왕을 모집하여
고시원과 학원을 전전하였던 아름다운 시절.
희망도 아니고, 욕망도, 진리도 아닌
어수룩한 정당성으로 가득한 신자유주의.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
그리고 나는 불편하다는 것.
정의와 진실이 정치적이라는 걸
한순간 깨달았을 때.
잔혹한 눈망울을 낼 수 없는 나는
숭고한 공간을 꿈꾸었던 나는
이 시대를 매일 버린다.
머릿속 꿈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한 것도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이십일 세기 문명에 무릎을 꿇는다.
내 손으로 만든 옷과 신발과 종이가
하나도 없는 무능한 세대.
조금 일찍 태어났더라면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고
울분으로 노래를 부르고
세상에 욕을 하고
그것으로 명예를 얻고 정치를 하고 돈을 벌고
후배들에게 내 아픔의 젊은 날을 얘기할 텐데.
체게바라의 페데로사를 끌고
동해와 남해를 거쳐 서해의 어귀에서
술을 마시고 낯선 여자를 만나고
모래밭에서 잠드는 낭만놀이를 했을 텐데.
손잡고 싶은 사람 하나 없어
집으로 향하지만
오늘도 우편함엔 밀린 고지서와
광고 전단지만 가득하다.

* 서태지, <교실이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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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메모

나는 서태지와 동갑이다. 그러니까 좀 묵은 서태지 세대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서태지의 모든 노래들을 부르고 다녔다. 고등학교 중퇴, 남들이 가지 않는 새로운 음악의 길. 그의 모든 것이 내 삶과 오버랩되었던 시절. 다 추억이 되었다. 열심히 시를 썼지만 살기 힘들다. 외롭게 버텼지만 불안한 미래가 옥죈다. 누구는 억울하다고 했다. 그래도 시가 있었기에 버텼다고 했다. 우리 세대를 생각했다. 엄살의 시를 한 편 써봤다. 물론 ‘서태지’라는 이름을 꼭 빌리고 싶었다.

_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작가, 201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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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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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와 말줄임의 수사학

 

이재훈
(시인)

 

 

본성 회복을 반증의 어법으로 표출하는 ‘소외의 시인’

소외를 말하는 자에게는 늘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외적 혹은 내적 동인動因의 그물망이 논평의 뒤를 따라다니곤 한다. 가령, 소외의 언어가 거느리고 있는 사회학적 상상력은 늘 자본과 인간의 상하관계 속에서 타진된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오래된 얘기지만, 소외는 결국 물질 획득을 위한 사회적 교류와 유대 속에서 발생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투입한 생산물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가치를 위해 쓰여진다는 것을 안다. 이 객체화 현상(objectification)은 노동하는 인간을 폭력적으로 만든다. 객체화가 주체의 소외를 낳을 때, 시의 언어는 인간 본성에 폭력적으로 가한 권위를 응전의 태도로서 드러낸다. 이것이 소외가 창조를 낳는 순간이다.
그렇기에 소외를 말하는 일련의 언술들은 인간 본성의 회복을 반증의 어법으로 표출한다. 또한 소외의 현상이 발생하는 언어적 파장은 소외 이외의 것들을 생각지 못하게 하는 정서적 자장磁場을 함유含有하고 있다. 그만큼 소외는 절실한 삶을 생각하게 하는 충격적 반응이며, 존재 자체를 무화시킬 수도 있는 강력한 실존의 무기이기도 하다. 다만, 소외의 언어를 바라보고 내면으로 체화하는 과정 속에서 윤리적인 각성으로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한 마디로 말해 조현석은 소외의 시인이다. 그가 구현한 소외의 언어들은 정서적 카오스 상태에서 방금 빠져나와 더운 김을 내며 수런거리고 있다. 수사적 치장을 하지 않은 언어들은 서로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충혈된 눈으로 낯선 말을 중얼거린다. 새벽이슬이 내릴 때까지 사물거리는 감정의 편린들은 너무 큰 무게로 시인에게 연속적으로 떨어져내려, 시인은 끝내 말을 마치지 못하고 또 다른 말을 이어간다. 그의 시편들 대다수에 차지하는 말줄임의 어법은 소외로 얽힌 내적 상황을 증언해주고 있는 방법론이다.
그럼 먼저 소외의 언어를 가지게 된 내면적 상흔과 그 내력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현대사회는 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 관료제를 현대사회의 가장 큰 특징으로 들었다. 즉 합리적 원칙에 의해 조직되는 관료제는 사회의 모든 구조를 원활하게 지탱해나가는 가장 편리한 장치이다. 그러나 이 조직화된 관료제는 개인을 소외시킨다. 굳이 이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문명도시 속에서 개인이 가지는 소외와 고독과 절망은 자본 문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혹독한 정신적 부산물이다.

도시 이방인의 소외와 절망적 인식, 그 외연의 확장

조현석은 혹독함을 이겨내는 힘으로 살아간다. 그 혹독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시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문명인의 운명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억울하다면 인간을 잡아먹는 이 거대한 문명도시를 버리면 그뿐이다. 그의 울분은 문명인이기 이전에 혼돈의 내적 상황을 시로 옮겨 적어야 하는 시인의 운명과도 일부분 결부되어 있다. 조현석은 일찍이 스스로를 ‘불법체류자’라고 지칭하며 도시 속에서 이방인임을 자처해왔다. 또한 1990년대 초 발간한 두 권의 시집을 통해 도시의 현대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을 구체적인 일상의 세목을 통해 표출하였다. 그의 두 번째 시집 <불법, …체류자>는 그러한 시인의 정체성을 ‘서울’이라는 도시 속에서의 삶을 하나의 허구로 인식하는 시적 테마를 통해 표출하였다.
그가 첫 번째 시집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스케치>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 <불법, …체류자>를 통과해 이어져온 도시인의 소외와 절망적 인식은 이번 시집을 통해 더욱 그 외연이 확장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생물학적 나이로 불혹을 넘긴 시인이 이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깨우치면서, 더욱 시인으로서 가지는 본질에 대한 갈망이 큰 실존의 무게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곳저곳,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까지
흩어져 있는, 함부로 뱉은 욕지거리와
근사하게 포장된 칭찬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입술 움찔거린 청탁請託과
떼로 굴러가게 만들었던 밀어密語들이여

화려한 수식어 덕지덕지 늘여 붙이며
공포스러운 백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쩌지 못하고 써내려갔던
마구 갈겨온 단어와 문장들이여

뒤흔들면 한 자도 남김없이 떨어져나갈
비곗덩어리 살점들로
수만의 밤과 낮을 태워도 이젠 쓸모없다

볼펜 쥐어야 할 손에 다시 든
술 한 잔 또 한 잔에 늘어나기만 하는
이 검은 오물들, 냄새나는 말 쓰레기들
― 「지껄이다」 전문

그가 삶 속에서 터득한 것은 지껄임이다. 그 지껄임은 현명한 구실을 하는 방법이 아니라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반성적 도구일 뿐이다. “함부로 뱉은 욕지거리”와 “근사하게 포장된 칭찬들”, “청탁請託”과 “밀어密語들”, “마구 갈겨온 단어와 문장들”은 모두 시인의 내면과 삶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부정적 지껄임의 증거들이다. 시인은 이 “냄새나는 말 쓰레기들”을 태우기 위해 볼펜을 쥐어야 할 손에 ‘술 한 잔’을 든다. 시집 첫머리에 등장하는 이 지껄임에 대한 반성은 시인이 계속해서 시의 언어를 망설이게 만드는 내면적 이유이기도 하다.

줄 세운 바지와 와이셔츠만 입은
한 사내가 담배를 연신 물고
입에서 내뿜는 연기의 꼬리가 잘릴 때마다
용틀임하는 바람의 반대로 뒤틀려 사라지고
덜컹대는 길이 그 끝에 끌려온다
기다리는 버스는 도무지 오지 않는다
시간은 담배를 쥔 손가락에 붙들려 있고
계속 피워대는 담배에 살 없는 볼만 더 패일 뿐
간혹 마른기침 커억, 컥 대고
피 섞인 침을 길바닥에 내뱉는다
버스 정거장 뒤편 대리석 의자에 앉아
신문을 펼쳐들면 끌려온 길이
그리로 꼬깃꼬깃 접혀 들어오고
감옥 같은 오피스텔에서 석방된 사람들은
폐병 걸린 버스에 실려 서울로 나가고
사내가 기다리는 통근버스는 오지 않는다
먼지 쌓인 구두 앞에 필터 끝까지 탄 수북한 꽁초들
해는 어느새 현기증 나는 정수리 위로
또다시 담배를 피워 문 사내의 몸은
신문지 뒤로 길처럼 자꾸 오그라지고
하얀 와이셔츠는 검은 먼지만 들러붙고
아침부터 그림자 길어지는 퇴근 시간까지
곯은 그 사내의 키는 아침보다 작아지고
사내가 앉은 정거장 길 건너로 라이트를 켠 버스들이
쏜살같이 달려간다, 곧 하루가 저물 것이다
통근버스는 언제 오려는지, 사내는 궁금하지 않은 듯
더 넓게 펼쳐진 신문 뒤에서 머리를 내밀거나
애처로운 눈빛도 보여주지 않는다
― 「출근하다」 전문

조현석은 많은 시편에서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적 삶의 모습을 영화를 찍듯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위의 시도 도시의 일상을 살아가는 한 사내의 고독과 소외, 불안을 그리고 있다. 출근하는 모습의 “한 사내”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내의 모습이다. 피로에 찌든 모습의 사내는 결국 일상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범속한 문명인이다.
문명인의 실상은 “계속 피워대는 담배”로 피로를 참으며, “피 섞인 침을 길바닥에 내뱉”는 건강을 지니고 있다. 출근하는 자들은 “감옥 같은 오피스텔”에 갇혀 있다. 버스는 “폐병 걸린” 병든 물건이다. 오지 않는 통근버스도 마찬가지이다. 하루는 곧 저문다. 사내는 통근버스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 즉, 일상으로 다시 매몰될 시간을 벗어나고픈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러설 수 없어… 다가서는 아찔한… 노란 벽
받아들일 수 없어… 긴, 타인에 의한 쉼이라니
지난 이십 몇 년보다 길었던… 오늘… 하루, … 기나긴
회색 손때와 볼펜똥 덕지덕지한 책상 한가운데 덩그라니
던져진 희디흰… 봉투, … 한 일 년쯤, 푹… 쉬라는 말씀
볼썽사나운 불순물처럼 생활 위를 떠다니던 만성…, 피로
언제쯤 푹 쉬어보나 수없이 되뇌이며 쳇바퀴 돌았는데
번개처럼 내려온 강…, 제… 무급휴직

…(중략)…

새벽… 같이, 오래 묵은 습관으로 떠지는
말똥말똥한 눈과 정신…은, 아 어…쩌란 말인가
식은 새벽밥 우겨 넣고 내일도 출근할 거야, 변함없이!
정말 물러날 수 없어… 제일 먼저 사무실 문 열며
출근하는 꿈,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받아들일 수 없어…
지난 이십 몇 년보다 길었던… 오늘… 퇴근하는 하루
― 「아른거리다」 부분

문명사회의 한 개체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직업이 필수적이다. 무직으로 인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는 삶을 더 이상 영위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 특히 우리 사회 중년의 실업은 청년 실업 못지않게 큰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위의 시는 무급휴직으로 불안한 중년의 모습을 신랄하게 담고 있다.
시에서는 중얼거림의 어법을 말줄임의 수사를 통해 표출한다. 끊어지는 말들과 말들 사이에서 불안의 심리적 상태가 더욱 강렬하게 작용되어 느껴진다. 말줄임을 통해 불안한 감정적 편린들이 시 속에 고스란히 모여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출근하다」의 그 사내는 불안한 중년의 삶을 살아가는 이 땅의 평범한 직장인일 것이다. 「아른거리다」는 그러한 평범한 사내가 실직의 과정을 통해 겪는 심리적 불안을 그려내고 있다.
사오정, 오륙도 등의 단어가 이른 나이에 정년을 겪는 중년을 상징하는 신조어가 된 것은 이미 잘 아는 사실이다. 45세에 정년을 하고 56세까지 직장에 다니면 ‘도둑놈’ 소리를 듣는다는 이 말은 지금의 우리 사회가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인정을 받는 한 단면을 반영하고 있다. 위의 시에서도 강제 무급휴직을 당하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소외의 또 다른 원인은 ‘시인으로서 가지는 자의식’

새벽같이 눈이 떠지는 오래된 직장인의 습관을 토로하는 시적 자아의 자의식 속에는 다른 심오한 이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직 정당한 노동을 통해 자기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사실 노동 말고는 먹고 살아가는 재화를 획득할 방법은 없다. 그렇기에 휴직이나 실직은 이 사회 구조에서의 이탈을 의미한다. 사회라는 공동구성체 속에서 이탈된 상황을 의미한다. 이탈된 자가 느끼는 불안과 소외의식은 위의 불안한 심리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실내를 휘젓던 음악마저 죽여 버리면
더욱 커지는 침묵… 웅크렸다가 머리 드는
아니, 고요함을 뛰어넘는 정적
그 무게에 짓눌리기 싫어
30촉짜리 갓등 켜고 앉는다
…(중략)…

남들 출근하는 이 새벽에는
정말이지 갈 곳은 없다는…
생각에… 깊고 깊은 자괴감이 밀려든다
이 우울 어디다 벗어놔야 할까…
사람 붐비는 지하철 역사를 벗어나
지상으로 올라가니
어느새 태양은 머리 위에 있다…
― 「타고 싶다」 부분

시인(시적 자아)은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나날 속에서 침묵을 견뎌야만 한다. 더욱 고독한 내면과 현실로부터의 소외가 현실임을 경험해야 한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고요함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30촉짜리 갓등 켜고 앉는” 일이다. 이번 시에서도 말줄임표와 쉼표들이 반복되면서 혼잣말과 끊지 못하는 언어 사이를 종횡으로 옮겨 다니고 있다. 도시를 살아가는 한 개체의 고독과 우울은 “남들 출근하는 이 새벽”에 “정말이지 갈 곳은 없다는…” 고백을 통해 드러난다. 마지막에 “어느새 태양은 머리 위에 있”는 장면을 통해 한 개인의 소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모든 것은 어제처럼 굴러가는 현실을 반영한다.
출근하는 자도 출근하지 못하는 자도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소외의식이다. 문명사회에서 인간이 자기동일성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이나 세계, 공동체 집단, 사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불안한 상태를 언제든지 느끼는 것이다.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원인과 이유는 문명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겠지만 또 하나의 원인은 시인으로서 가지는 자의식 때문이다.
시인은 출근길처럼 “늘 소화불량”이며 “분주하다”(「뒤틀리다」). 현실은 상황이 어찌되었든 “소화불량은 계속”되는 멈출 수 없는 시간을 제공해준다. 이런 현실 속에서 시인이 맡는 공기는 “비린내가 진하고 역한 도저히 맡을 수 없는 냄새”이다. 시인이 생각하는 현실 또한 “역시 바깥은 치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는 “발을 떼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진한 피비린내”(「덤벼든다」)라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사회에 살아가면서도 종내에는 편입되지 않고 이탈하고 싶은 생각에 휩싸인다. 시인은 한밤내 “세상의 온갖 말”을 듣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뿌리 내리지 못한 공중의 나무들”이 시인이며 “밤이 되어서야” “얼어붙었던 입을 푸는” 나무들 같은 존재이다. 시인이 가진 “해독할 수 없는 지하의 언어들”(「되피우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시인이다.
침묵을 통해 말을 참는 법을 배우지만 긴 침묵은 또 다른 발화의 욕망만을 낳을 뿐이다. 참지 못해 뿜어져 나오는 시인의 발화는 정상적인 문장이 되지 못하고 불편한 문장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방법을 통해 표출된다.

어떻게… 이런 곳에까지
앞뒤가 떠오르지… 않는다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다
천연색 꿈이 꾸어지던… 그날도
검은… 것이… 나를 지배했다
만약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다면
…태양도 검고 …건물도 검고
타들어 가는 피부마저… 검을까
하나밖에 없는… 거울도 검고
거울에 비치는 눈의 흰자위도 온통
검을까… 검은… 슬픔과 고독
검은 비애… 검은 울음은 어떨까
어떻게… 이런 곳에까지
앞뒤가 떠오르지… 않는다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다
숨을 잠시 멈추었던 것뿐인데
머리… 속은 온통 검은 것뿐
검은 과거만… 떠오르고
검은 현실 난데없이 펼쳐지고
돌아갈 수 없는, 아 피할 수 없는
검은 미래만이 여기에서…
― 「검다」 전문

대표적으로 말줄임의 수사를 보여주고 있는 위의 시는 불안하고 절망적인 자아의 심리를 표현한 시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중얼거림은 시적 자아의 분열적이고 황폐화된 정신을 나타내는 것만을 표출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내면의 상흔과 정서를 토로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언어 표출방식이다.
말줄임표 사이에 숨어 있는 행간은 더욱 중요한 시인의 삶의 이력이 될 것이다. 말줄임의 정서가 배태되기까지 구체적 삶의 예증은 시에 나타나지 않는다. 시에는 정서의 드러냄만 보일 뿐이다. 소외가 가져다준 분열적 상황을 극복할 만한 방안이 시 속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외를 극복하고 내면을 치유할 방안을 찾았다면 굳이 시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고통과 우울 계속 진행된다는 암시의 ‘서술형 제목들’

조현석은 이번 시집에서 독특한 시제 짓기의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몇 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로 끝나는 서술형을 시의 제목으로 삼고 있다. 서술의 제목이 시집의 통일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서술형의 제목을 통해 소외를 감싸안는 내면의 고통과 우울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암시이다. 과거에도 진행되었으며 현재에도 앞으로의 미래에도 진행되고 있다는 암시는 시제의 서술형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좀 과장된 해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조현석의 시를 윤리적 해석의 그물망에서 자유롭게 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또한 조현석은 시집의 4부에서 다수의 연시戀詩를 선보이고 있다. 그대에게 보내는 연서 혹은 편지를 날것의 언어를 통해 보여준다. 자칫 4부에 놓인 연시의 시편들이 소외 극복의 방안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연시는 또 다른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적인 아픔과 절망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나 더 보태어지는 것이다. 그가 깨우친 사랑은 이별의 방식을 통해서이다. 즉 기대하지 않는 것, 절망을 일찍 깨우치는 것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대략 짚어보는 것이다.
조현석이 시 속에서 내놓은 소외 극복의 방식을 굳이 말한다면, 그것은 성찰의 방식을 통해서일 것이다. 성찰의 방식은 아주 평범한 일상의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화들짝 놀란다
사방이 겨우 1미터도 안 되는 샤워부스 안
알몸으로 서면 온몸에 닭살이 돋아난다
이제 성수聖水를 맞으며 고백할 시간이다
오늘 안일했지만 무사함에 역시 감사해하며
눈앞을 가리며 사각斜角으로 끊이지 않고
쏟아지는 차디찬 물은 이미 낡은 축복이다
차고 넘치기에, 혹여 분에 넘친 저주일지도 모른다
정수리 끝에 덕지덕지 묻혀온 반나절 동안의 비굴과
머리카락에 껌처럼 매달린, 나머지 반나절의 위선과
조금 살찐 목살에 들러붙은 구역질나던 욕지거리와
토실한 견장뼈 위에 내려앉은 능청스러움 따위가
거품에 스며들어 부풀어 오르다가 하수구로 쓸려갈 것이다
비릿한 장마처럼 퍼붓는 세찬 물줄기에도 등 뒤에 달라붙은
물이끼 같은 치욕은 떨어지지 않아 움찔움찔 사타구니가 지린다
가끔 심장이 멈출 만한 회한이 왼쪽 가슴을 짓누르고
부르르 몸을 끓게 하는 상대를 모를 적대감에 놀라기도 하지만
잠깐 생각을 멈추면 다시 속은 냉랭해진다
물방울 뚝뚝 흐르는 유리문 열고 전신거울 앞에 서면
소화되지 못한 욕정에 불룩해진 뱃살이 건드릴수록
더 출렁거리는 욕심이 가슴을 마구 짓눌러온다
비쩍 말라버린 비정상의 두 다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경건하기도 고통스럽기도 한 샤워로 몸은 말끔해지지만
늘 불안한 마음은 씻어지지 않는다
― 「말끔하다」 전문

조현석에게 반성의 시간은 몸을 닦는 행위를 통해 가시화된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성찰을 느끼는 것으로 시작한다. 샤워 부스에서 쏟아지는 물을 ‘성수聖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지금 현실의 삶을 고백하고 싶은 내면적 욕망 때문이다. 차고 넘치는 샤워기의 물은 “이미 낡은 축복”이라 말한다. 그의 몸에 매달린 것은 무엇인가. “비굴”과 “위선”과 “욕지거리”와 “능청스러움 따위”가 몸 구석구석에 붙어 있다. 잘 떨어지지 않는 “물이끼 같은 치욕”도 벗겨낸다. 그럼에도 “소화되지 못한 욕정”은 남아 있다. 더 출렁거리는 욕심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다.
샤워를 통해 몸을 씻어내는 행위는 시인이 터득한 성찰과 고백의 시간을 마련해준다. 그러나 이것으로 문명인이 가지는 지난한 삶에 대한 모든 죄책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거행한 샤워는 “경건하기도 고통스럽기도 한” 사건이다. “몸은 말끔해지지만/ 늘 불안한 마음은 씻어지지 않는” 굴레 속에 또다시 들어가야 하는 운명을 아는 것이다.

비어 있던 속, 기름기 없던 뱃속으로
푹 삶아진 염소가 갈기갈기 찢겨져 들어왔다
술 몇 잔과 더불어 신선한 공기도 몇 됫박
소독되지 않은 단양 하선암 생수도 몇 컵
해체된 염소 몸이 남긴 갖은 부속물을
소주 반 잔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기어
배 속 깊은 곳에 가두었다
밤새 되새김질하는 염소가 운다
울음이 깊을 때마다 몸이 요동쳤다
속 편해지려고 되지도 않은 되새김질을
나도 여러 번, 하고 또 했지만
날카로운 뿔에 받혀 상처가 난 듯 꾸르르륵…
더부룩했다, 밤새 염소가 풀밭이 아닌
융단 같은 위 속에서 이리저리 뛰어놀았다
낮에 몸 부딪는 축구를 해서인지
왼쪽 어깨가 아파 오른쪽으로 돌아눕고
등이 배겨 배를 깔고 돌아누웠던, 아침이
다가오는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그놈이 울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먼동 무렵에
잠 깨어 물안개 피어오른 계곡을 거닐 때
예전에 잠시 그곳에서 뛰놀던 염소가
세차게 방파제를 때리던 태풍 속 파도처럼 요동쳤다
빠르게 달려간 구식 화장실에 엉덩이를 까고 앉아
시끄럽게 괴롭히던 염소를 끄집어냈다
쫘르르 쏴아아아아아… 자신이 놀던 곳으로 염소는
회오리 물살에 묻혀 돌아가려던 것이다
찬바람 불고 찬비 내리는 단양 하선암 계곡
물가에 자리 잡고 앉아 몇몇이 두런거렸던 그날
― 「울다, 염소」 전문

시집의 시에서 염소는 죽은 고깃덩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인의 상상력은 죽은 고깃덩이에도 영혼이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살아 있는 염소와 음식을 구분하지 않는 시적 자아는 결국 시원始原을 갈구하는 영혼을 지닌 자이다. 시인은 염소의 부속물을 뱃속에 ‘가두었다’고 했다. 그것은 자아가 타자인 염소를 장악하는 방법이다. 좀 더 의미를 넓혀 말하면 시인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여 그것을 음식물로 섭생하는 인간의 폭력성을 스스로의 몸을 통해 느끼고 있다.
이러한 육식의 폭력성은 본능적인 것이다. 그러나 본능적인 것은 인간의 이성 속에서는 늘 불편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죄책감은 인간의 몸을 통해 이성으로 전달된다. 위 속에서 염소는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운다. 염소의 원래 자리는 “풀밭”이며 “물안개 피어오른 계곡”이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시인의 뱃속에 들어찬 염소의 살점을 참지 못해 한다. 결국 배변을 통해 염소를 배출해낸다. 이것은 상징적인 장면이다. ‘배변’은 생리적인 현상을 넘어 본성의 지점,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고픈 시인의 지향점과 욕망을 잘 표현해준다.
조현석은 이번 시집을 통해 문명인으로서 살아가는 자아의 내면을 말줄임의 수사를 통해 보여준다. 눈여겨볼 것은 시집의 후반부로 갈수록 자신을 해부하듯 그려내고 있는 소외의 발화가 점차 사물로 전이된다는 점이다. 말하고 있는 자는 여전히 시인이지만, 말하는 자가 그려내는 대상은 ‘안’에서 ‘바깥’으로 옮겨가고 ‘자아’에서 ‘타자’로 이동된다. 자아가 바라보는 풍경 또한 자아의 심적 상태와 세계관으로 삼투되어 발현하고 있다.
“다디단 잠을 청해야 하는 새벽 4시”(「뒤뚱거리다」)의 시간에 깨지 않고 있는 시인의 뒷모습이 시집의 곳곳에 스며 있다. 시인은 이 거대한 도시를 “허옇게 녹아내린 도시”라고, “그날 얘기는 누구나 할 것이다”고 말한다. 하지만 “숨막힌 연무煙霧 속에서/ 녹아들었던 희망”을 슬쩍 얘기하는 시인은 시 때문에 비로소 꿈꿀 수 있는 것이다.

 _ 조현석 시집, <울다, 염소>(한국문연, 2009) 해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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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사랑이 자아내는 서정의 원리



대담 : 정호승, 이재훈

일시 : 2009년 5월 7일
장소 : 스타벅스 남부터미널 2호점

 


 

2009년 5월 7일 오후 6시 40분. 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 역사 안에서 정호승 시인을 기다렸다. 6시 30분도 7시도 아닌 6시 40분에 약속을 잡은 것으로 미루어 시인의 꼼꼼한 성격을 짐작해보기도 했다. 한강변에 홀로 앉아 담배를 피우는 ‘서울의 예수’를 생각하다, 노래방에 가면 자주 부르는 ‘우리가 어느 별에서’를 흥얼거리다, 최근 시집 <포옹>을 뒤적거리다 전화를 받았다. 이미 정호승 시인은 남부터미널에 도착해 대담을 할 장소를 물색하는 중이라고 했다. 터미널을 나가 예술의 전당 골목 쪽으로 내려가 만난 커피숍 <스타벅스>. 시인은 창가에 자리를 잡아 놓고, 이 자리가 어떠냐고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인다.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 앉자 시인은 늦은 햇살에 눈이 부시겠다며 탁자를 옮기며 자리를 살펴봐 주셨다. 이 시대 사랑과 감성의 파수꾼 정호승 시인과 이러저런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니 시작 전부터 설레였던 것 같다. 창가로 흘러드는 늦은 햇살이 참 따사로운 날이었다.


이재훈 : 늘 선생님의 독자로만 남아 있다가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처음 선생님과의 대담을 제의받고 좀 망설이기도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적 유명세 때문인지 문학지의 대담이나 언론 인터뷰만 해도 너무 많은 양이어서 말입니다. 제가 선생님과의 대담 속에서 뭔가 새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선생님의 작품 세계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또한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직접 뵐 기회도 많지 않다고 생각했고요. 이번 대담은 선생님의 문학과 그 주변의 여러 정황들을 소개하는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먼저 선생님의 출생지가 경남 하동으로 되어 있는 곳이 있고, 대구로 명기된 곳도 있습니다. 어느 곳이 맞는 곳인가요? 그리고 유년 시절의 얘기도 좀 들려주십시오.

정호승 : 원래 하동에서 출생했어요. 출생지와 고향은 좀 다르니까요. 하동에서 태어나 평택으로 다섯 살 정도에 이사를 갔어요. 부친이 은행원이었습니다. 평택 중앙초등학교 1학년 1학기까지 다녔어요. 그리고 대구로 이사 와서 대구에서 성장하게 된 거죠. 아버지의 고향이 대구였습니다. 그래서 하동은 태어난 곳이고, 대구는 성장한 곳이죠. 하동에서 출생하여 대구에서 성장이라고 약력에 쓰니, 하동에서는 제가 잘 아는 고향 사람으로 알아버리고 대구에서는 고향사람인 줄 알았더니 아니네,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대구 출생으로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하동에서 출생하여 대구에서 성장했다고 정확하게 쓰려고 합니다.

이재훈 : 대구 계성중학교와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하셨는데요. 당시 전국을 휩쓰는 고교문사였다고 들었습니다. 대구에서의 학창시절은 어떠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정호승 : 계성중학교는 박목월, 김동리의 모교죠. 대륜고등학교는 이상화, 이육사 등의 문인들이 교직에 있었고요. 육사 선생의 경우, 일제강점기 시대 조선의 학생들은 주먹이라고 강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당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했다고 해요. 참 재밌는 얘기죠. 육사 선생의 시에 나타난 기개가 학생들에게는 권투부로 반영이 된 거죠.(웃음)

이재훈 : 당시 학교 분위기가 문학을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겠네요.

정호승 : 계성중학교가 저에게 문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기독교 계통의 학교였는데, 매월 문예현상모집을 했어요. 부활절, 추수감사절 같은 행사 때만 한 것이 아니라 매달 했었죠. 당시 학교에서 문학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문예현상모집에 뽑히면 교장선생님의 도장이 찍힌 상품권을 주었어요. 학교 구내매점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을요. 일종의 현찰과 같은 거죠. 지금 생각하면 그때 선생님들의 발상이 대단했던 거죠. 당시 삼립팥빵, 크림빵이 30원 할 때거든요. 그러니 천 원하면 무지하게 큰돈이었죠. 빵 사가지고 친구들하고 실컷 먹었지요. 그 재미에 매달 현상모집에 글을 냈었어요.(웃음)

이재훈 : 상품권 타는 재미도 있었겠지만, 그 재미에 쓰면서 저절로 문학공부가 됐겠네요.

정호승 : 그렇죠. 공부가 되죠. 저뿐 아니라 당시 문예반 친구들 중에서도 열심히 쓰려는 친구들이 있었고요. 교장선생님께서 주시는 상금을 받으려는 공통의 목적이 있었겠지만요.(웃음) 또한 선생님들께서 어릴 때 문학의 싹을 틔워야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고요. 아동문학 하시는 김성도 선생님이 계셨고요. 아동문학도 하시고 수필도 쓰시고,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나온 <만선일보>라고 있었는데, 그 신문에 소설 당선되셨던 김진태 선생님도 국어 선생님이셨고요. 그분들께서 늘 문학적으로 성장하게끔 지도해 주셨죠. 칭찬도 많이 해주시고.

이재훈 : 당시에는 고교 문예잡지 <학원>이 있었을 때였죠.

정호승 : 예. 저도 <학원>에서 활동했죠. 중학교 때도 학원문학상에 우수작으로 뽑혔고요. 고등학생 때는 1학년 때 우수작, 3학년 때 최우수작이 되었죠. 학원문단이라는 말도 있었고요. 저도 학원문단 세대죠.

이재훈 : 경희대에 문예특기생으로 입학하셨지요. 경희대에서 주최하는 ‘전국고교생현상문예모집’에서 <고교문예의 성찰>이라는 평론으로 당선되셨는데요. 어떻게 고교생의 신분으로 평론을 쓰실 생각을 하셨는지요?

정호승 : 저는 그때 이미 <현대문학>, <문학춘추> 등의 잡지를 헌책방에서 구해 읽었어요. <현대문학>이 대표적인 잡지였고요. 부모님께서 주시는 용돈을 모아 헌책방에서 과월호를 구입해 다 읽었죠. 잡지에 실린 소설을 읽으면 굉장히 재밌었어요. 어른들의 세계를 알 수 있었으니까요. 평론은 처음엔 잘 모르죠. 그러나 자꾸 읽다 보니까 아, 평론이라는 게 이런 걸 쓰는 거구나 하고 이해하게 된 거죠. 평론은 작품론을 쓰거나 작가론을 쓰거나 둘 중 하나를 이러한 방식의 글로 쓰는 거구나 하고 이해했죠.
제가 고3때 계기가 있었어요. 경희대 문예장학생이 되기 위해서는 경희대 백일장에 장원이 되거나 차하, 차상이 되어야 했어요. 저는 그때 참방이 되었어요. 1967년 9월 28일 경희대에서 백일장이 있었는데요. 참방은 문예장학생으로 입학이 안 돼요. 그래서 저는 입시에 떨어진 기분으로 밤기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왔죠. 속으로 생각했죠. 내가 서울에서 문예장학생으로 다녀야 되는데. 부모님께서 대학 등록금을 대주실 형편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했었죠. 그런데 11월에 ‘전국고교생 문예현상 모집’이 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다시 원고를 보내 도전하자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런데 제 생각에 또 시를 보내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조병화 선생님께서 심사를 하셨는데, 심사평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정군의 시는 상위권으로 입상시키자니 그렇고, 떨어뜨리자니 좀 그렇고 그래서 참방을 준다고 하셨거든요. 그때 알았죠. 내 작품이 문제가 아니고 심사 선생님과 어떤 부분에서 시를 생각하는 영역이 맞지 않는구나 라고요. 그래서 평론을 쓴 거죠. 평론을 할 때 작가론은 무리이고, 작품론을 쓰자고 생각했어요. 당시 고교생 중에는 시집을 낸 친구도 있었고, 전국백일장에서 당선된 작품들이 있었잖아요. 자연스럽게 그 작품들을 다 모아 놓았었고요. ‘고교문예’라는 말은 제가 만들었고, ‘성찰’이라는 말은 평론에 흔히 등장하는 제목이잖아요. 부제는 ‘고교시를 중심으로’로 했죠. 김우종 선생님께서 심사를 하셨는데, 평론 당선작은 처음 나왔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때 제가 쓴 평론이 고등학생이 쓴 게 아닐 거라는 의심도 받았어요. 그런데 그 원고를 보면 한자를 자꾸 틀리게 쓰니까, 이게 고등학생이 쓴 게 맞다고 한 거죠.(웃음)

이재훈 : 당시 평론에서 평을 했거나, 지금 활동하시는 문인들 중에 생각나는 고교문사들이 있나요?

정호승 : 그 원고가 아직 제게 있어요.(웃음) 음… 당시에 이시영, 송기원 씨 등이 같은 학년이었고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전국적인 고교문사였죠.

이재훈 : 대학시절은 어떠셨나요?

정호승 : 맨날 시 썼죠 뭐.(웃음) 문예특기생 총장 장학금이 1년간이었어요. 그래서 입학한 지 1년 안에 문단에 등단을 해야 장학생이 유지되었는데요. 그렇지 못하면 등록금을 내야 했죠. 시를 열심히 쓴다고만 다 되는 건 아닌데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미팅도 한번 못해 보고, 도서관에서 시를 썼어요.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야 하니까요. 제가 68학번인데 69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는데 떨어졌죠. 그래서 등록금 마련을 못해 학교를 휴학하고 경주 외할머니댁에 가서 토함산 자락의 오덕암이라는 암자에서 일 년 내내 읽고 쓰고 했어요. 고시공부하듯이.(웃음) 지금 생각하면 좋은 시절이었죠.
그 다음해 70년도에도 신춘문예에 떨어졌어요. 복학을 할 수도 없고 해서 군대를 갔죠. 군에서도 신춘문예를 계속 투고했죠. 일단은 성공했어요. 1972년 <한국일보>에서 동시가 당선되고, 그 다음해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로 당선되었죠. 1972년 12월 24일 우편배달부가 ‘축 당선 연락바람 대한일보 문화부’라고 적힌 전보를 주었어요. 그 전보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행히 복학해서 총장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전국 대학에서 문예장학생 제도가 있던 곳이 경희대밖에 없었어요.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제도에 의해서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시를 더 열심히 쓸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죠.

이재훈 :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로 당선되었고,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로 당선되셨습니다. 1982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기도 하셨는데요. 시를 쓰시다가 소설로 등단하신 어떤 이유가 있으신지요. 또 등단 이후 소설 작업은 크게 에너지를 쏟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정호승 : 중학교 2학년 때 학원문학상에 산문이 우수작이 되었던 적이 있어요. <흙의 심정>이라는 산문인데 제일 처음 썼던 것은 산문이었어요. 그런데 그 이후 중학교 내내 시를 썼고, 고등학교 때도 선생님부터 시작해 주위에 전부 시 쓰는 사람들만 있었죠. 그렇지만 그 이후 산문에 대한 꿈이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었나 봅니다. 그 꿈을 한번 펼치고 싶었던 거죠. 1982년도 신춘문예에 처음 써본 소설을 <조선일보>에 보냈죠. 당시 황순원, 전광용 선생님께서 심사를 하셨는데요. 황순원 선생님은 제자를 뽑지 않으시는 분이세요. 혹시 심사위원으로 황순원 선생님이면 어떡하나 싶어 제 아들 이름을 필명으로 해서 응모했는데 당선되었습니다.
그렇게 소설을 쓰고 싶다는 갈망으로 시작했는데요. 1982년도가 제가 삼십대 초반이었는데 가정을 꾸리고 직장생활을 할 땐데, 무척 바빴던 시절이었어요. 그때 동아일보 출판국에서 <여성동아> 만들 때였는데요. 일요일도 없이 일만 했어요. 시간이 없으니 도저히 소설은 못쓰겠다 하고, 10년 뒤에나 쓰자고 생각했어요. 그랬더니 어느새 10년이 일 년처럼 지나버리더라구요. 마흔 하나가 되었을 때인데. <월간조선> 만들 때였네요. 그때 직장 그만두고 소설을 쓰자고 생각했어요. 사십대가 굉장히 문학적으로 소중한 시간으로 생각되더라고요.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었어요. 진짜 다른 걸 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게 아니라 소설을 쓰기 위해서 그만두었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소설공부를 하고, 한 오 년 정도의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 뭘 깨달았느냐 하면요. 시간과 경제적인 댓가를 혹독하게 치르면서 말이죠.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 자기의 문학적 기질에 맞는 장르가 있구나, 하는 걸 깨달은 거죠. 나는 역시 시(詩)가 내게 맞는구나. 혹독한 댓가를 치르면서 너무 늦게 깨달은 거죠.(웃음) 1990년에 나온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 이후에 97년에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시집을 냈거든요. 그 시집 출간의 간격 사이에 직장도 없이 뭐했느냐 하면요. 소설 공부한다고 보내면서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다시 시를 잡은 거죠. 잘못하다간 시가 날 버리겠더라구요. 어리석었죠. 그 이후로 게으르지 않게 시를 쓰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재훈 : 등단 이후 가장 먼저 활동하신 것은 1976년부터 김명인, 김창완 등과 함께 한 <반시(反詩)> 동인입니다. <반시>는 현재까지 70년대를 대표하는 시동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인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어떠했나요. 그리고 ‘반시’라는 이름의 느낌과 당시 시대상이 유신으로 인해 억압의 시대였습니다. 그런 것과 동인의 모토가 일정 부분, 영향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정호승 : 60년대에 <현대시>, <신춘시> 동인이 있었다면 70년대에는 <반시>가 있었죠. 그때 ‘1973’이라고 해서 그해 시, 소설로 등단한 문인들끼리 모여 친목처럼 시화전도 하고 놀았죠. 소설에는 지금 기억나는 분이 박범신, 이경자, 최학 등이 있었고요. 시 쪽에는 김명인, 김창완, 김승희, 이동순 등이 있었죠. 3년 정도 시화전도 하고 하다가 어느 시점에 시인들끼리만 내보자 해서 <1973>이라고 동인지를 냈어요. <반시>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이후 1973년에 등단하지 않았더라도 뜻에 맞는 시인들이 참여를 했죠. <반시>의 의미는 서문에도 나오는데 일상의 언어로 오늘의 현실을 노래하는 시를 쓰자는 취지였어요. 그 전의 선배 동인들이 너무 난해한 추상의 영역에 머물렀기 때문에 우리는 좀 다르게 가자고 한 거죠. 당시에는 지금과 다르게 문학적으로 서로 외로웠으니까 <반시>가 각자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됐습니다.

이재훈 : 선생님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1979)와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1982)는 선생님의 시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시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벽편지>(1987)와 <별들은 따뜻하다>(1990)는 첫 번째, 두 번째 시집의 시세계를 좀 더 확장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정갈하고 단아한 언어를 통해 민중들의 삶을 노래하고 있고, 네 번째 시집에서는 ‘무덤’, ‘죽음’, ‘시체’ 등의 시어를 통해 개인의 정서적 상황을 공동체의 삶으로 확장시켜 보여주고 있는데요.

정호승 : 물리적으로 제 문학적 삶을 토막낸다면 1990년에 나온 <별들은 따뜻하다>를 경계로 제 문학이 크게 양분됩니다. 저는 유신시절을 이십대로 보낸 세대인데요. 그 전까지는 시대의 눈물을 닦으면서 시를 쓰려고 노력했었고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고 오만한 생각인데. 내 자신의 눈물도 못 닦으면서 민중의 눈물을 어떻게 닦는다고.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웃음)

이재훈 : 선생님의 초기작에서 스스로 독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기쁨’을 줄 수 있을지, 기쁨과 슬픔을 나눌 것인지 자문하고 있습니다. 첫 시집의 제목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기쁨은 슬픔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즉 ‘슬픔’이 ‘기쁨’에게로. 시집에서도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소재와 상황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습니다. “첫 아이를 사산한 여인”이라든지, “불빛 없는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청년”(<슬픔을 위하여>).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갈 길은 멀고 길을 잃”은 ‘맹인부부가수’, “너의 고향은 아가야/아메리카가 아니다”고 말하고 있는 ‘혼혈아’ 등등을 살펴볼 때 더욱 확연히 드러납니다. 제가 중요한 시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슬픔’이라는 관념과 추상성이 어떻게 독자들에게 ‘아름다움’을 줄 수 있는가 입니다. 즉 ‘슬픔’의 아름다움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현실’의 애환이 담보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이라는 관념어가 삶의 지난한 사연과 어울려 빚어내는 어쩔 수 없는 아픔이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주었습니다. 초기작에서 두드러진 현실에 대한 관심, 사회적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반시> 동인에서의 활동이나 당시 사회적 상황 등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선생님께서 현실에 대한 관심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궁금합니다.

정호승 : 그때 시에 대한 제 생각이 어떠했냐하면요. 장미를 예로 든다면, 저 장미가 인간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장미를 보는 거죠. 장미라는 꽃이 주는 존재의 아름다움이 있을텐데 그런 것보다 장미가 인간의 삶에 무엇을 주고 있는가의 관점으로 시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현실의 삶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는 기본적으로 시대와 동떨어질 수 없겠죠. 그 시대를 산 시인이 장미의 존재성만 노래했다고 하더라도, 그 시대를 살았던 장미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고통을 지니고 있는 장미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죠.

이재훈 : 80년대의 민중시인들과 선생님의 시에 나타나는 민중적 맥락과는 조금 다른 지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되는데요. 민중을 다루고 있더라도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천착보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천착이 강하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정호승 : 그 생각에 긍정을 하고요. 또 어떤 생각이 드는데요. 시라는 장미가 인간이라는 삶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의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러나 결국 시의 본질은 있거든요. 장미는 꽃이라는 본질이 있는 거니까요. 저는 시의 본질이 뭔지 지금까지 완벽히 아는 건 아니지만 시의 본질은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시의 본질이라는 게 서정의 물기 같은 게 아닐까요. 나무의 물관부에 수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나무가 말라죽잖아요. 시는 나무의 물과 같은 정서의 본질을 지니고 있고요. 밥할 때 쌀을 비유로 든다면. 쌀을 넣고 물을 부어야 밥이 되잖아요. 시도 마찬가지지요. 생쌀을 먹느냐, 물을 부어서 밥을 해서 먹느냐인데요. 나는 생쌀을 먹기보다는 서정의 물을 부어서 밥을 해서 먹어야 배가 부르다고 생각했어요. 밥하는 것도 물과 불에 의해서 하게 되잖아요. 시도 영원성, 영속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질도 변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시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시를 썼기 때문에 제 시가 노동시의 갈래로 묶이지 않고 제 나름의 모습을 지니려고 노력해 온 부분이 있는 거에요.

이재훈 :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시집인 <서울의 예수>를 좋아합니다. 첫 시집보다 훨씬 더 처연한 현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즉 ‘슬픔’에서 ‘고통’으로 나아간다고 해야 할까요. 그 변화의 과정엔 역사적 운명도 있지만 가장 큰 중심이 되는 것은 바로 ‘문명’에 대한 자의식을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현재 우리들에게는 역사적 현실보다 훨씬 가깝게 몸에 와닿기 때문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서울의 예수>는 지금 읽어도 섬뜩합니다. 이후로는 문명에 대한 자의식이 비판과 풍자를 통한 것이 아니라(<우리들 서울의 빵과 사랑>, <서울복음> 등의 작품) 역으로 사랑의 예찬을 통해 표출하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문명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문명 속에서 잃어버린 사랑을 찾는 과정으로 보여집니다. 이렇게 이해를 해도 될런지요?

정호승 : <서울의 예수>는 1982년에 출간한 시집인데요. 문명은 끊임없이 변화되기 마련입니다. 긍정적인 의미이든 부정적인 의미이든 발전하기 마련이에요. 한 가지 예로 제가 어릴 때 전화를 하면서 사람 얼굴을 쳐다보면서 전화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것이 현실화되었잖아요. 제 생각에 미래에는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스카이차 같은 게 나오겠죠. 그러한 새로운 문명에 의해서 새로운 문명의 질서가 생기겠죠. 그렇게 문명화되었다고 해서 우리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것은 아니죠. 인간의 가장 중요한 화두와 본질인 ‘사랑’ 때문에 비인간화 될 수 있는 것이죠. 사랑이 결핍되면 비인간화 됩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결국 인간 삶의 가장 큰 문제와 화두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랑 때문에 고통스럽잖아요. 사랑의 문제를 남녀상열지사로 폄하시키면 안 됩니다. 사랑은 고귀한 인간의 화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에 의해서 태어나고 사랑에 의해 고통받다가 사랑에 의해 죽어가는 게 인간의 삶 아닙니까. 한 인간이 죽어갈 때 사랑이 없으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사랑이 있을 때 인간답게 품위를 잃지 않고 죽어갈 수 있어요. 인간에게 문명의 변화나 발전이 인간을 망치는 게 아니고 사랑의 부재나 결핍이 인간을 훼손시킨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시인들이 아마 이렇게 생각하고 시를 쓸 거예요.

이재훈 : 선생님 시의 방법론에 대해 생각해 볼까 합니다. 선생님의 시는 시적 상징이나 메타포 등을 통한 수사보다는 진술에 의존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생님의 산문 중에 이런 말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배고플 때 밥을 먹지 밥그릇을 먹는 게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밥그릇을 먹고 있다. 시는 밥이지 밥그릇이 아니다. 결국은 인간이라는 밥. 사랑이라는 밥…….” 즉 이미지와 시어가 가진 애매성보다는 직선으로 통하는 진술로 심금을 울리는 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의 상징도 누구나 소통할 수 있는 대중적 상징을 주로 씁니다. 가령, 제가 좋아하는 구절은 이런 부분입니다. “나는 오늘 새벽, 슬픔으로 가는 길을 홀로 걸으며/평등과 화해에 대하여 기도하다가/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슬픔을 위하여>). 이런 부분은 선생님께서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의욕이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호승 : 그런데 시는 본질적으로 은유에요. 은유가 없는 진술은 공허할 수밖에 없고요. 시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은유의 품 안에서 진술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어떤 진술적 시라도 하나의 은유성을 띠고 있는 거죠.

이재훈 : <가두낭송을 위한 시> 연작 등은 첫 시집에서부터 써왔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운율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리듬은 언어의 조탁이나 반복을 통한 것보다는 의미와 의미가 만들어가는 리듬이 강합니다. 실제 낭송을 하며 읽으면 가슴에 팍 와닿거든요. 운율에 대한 관심이 평소에도 있으셨는지요.

정호승 : 지금까지도 그 관심이 있죠. 저는 한국시에서 전통적 서정시인입니다. 한국시의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요. 그 전통 속에 운율이 있습니다. 저도 아마 내재적 운율이 내 가슴속에 전통적 운율성으로 부여받게 되어서 나타나게 된 거겠죠. 시의 본질인 노래성을 인정하고 있고요. 저는 요즘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2009년에 시를 공부하면 지금 현재의 시부터 읽지 말고, 소월이나 만해부터 시작해서 오늘의 시까지 읽어오면 한국시의 맥락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시의 맥락을 죽 살펴보면 운율의 문제가 분명 있습니다.

이재훈 : 덧붙여 선생님의 시는 많은 가수들에 의해 노래로 불리워 왔습니다. 최근 가수 안치환 씨가 <안치환, 정호승을 노래하다>라는 9.5집 음반을 내기도해서 화제가 되었는데요. 선생님의 시를 노래화한 것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어느 별에서>가 애창곡 중의 하나입니다.(웃음)

정호승 : 제 시를 가지고 대중가요로 40여곡 정도 작곡되었는데요. 가장 먼저 노래화된 게 이동원의 <이별노래>에요. 이동원의 <이별노래> 이후에 정지용의 <향수>를 만든 거예요. <향수>의 모태적 발판을 마련해준 게 <이별노래>일 거예요. 그 다음에 김광석이 마지막으로 녹음하고 남긴 노래여서 의미가 있는 <부치지 않은 편지>가 있어요. 백창우 씨가 작곡을 했고요. 그 다음에 안치환 씨와의 우정을 들 수 있어요. 우정의 앨범을 냈으니까. 제 시를 가지고 많이 작곡 했어요. 이번 앨범에 작곡된 노래 중에 <풍경 달다>라는 노래가 있어요. 제가 풍경을 달아본 체험을 가지고 쓴 시에요. 운주사의 와불을 보고 풍경을 달았던 기억으로 쓴 시인데요. 노래를 들으니 아, 참 좋더라구요. 제가 노래를 빨리 외우거나 부르지 못하는데, 금방 외워 불렀어요. 지금도 가끔 아무도 듣지 않을 때 혼자 불러 봅니다.(웃음)

이재훈 : 선생님의 후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제5시집부터 7시집까지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시집의 세계가 사회공동체와 고통과 슬픔에 대한 관심에서 관념의 보편적 정서에 관심을 기울이는 곳으로 이동했다고 해야 할까요. 이전의 세계가 산업화 사회 속에서 잃고 지냈던 우리의 공동체, 주변의 약자들과 소외된 자들, 천천히 뒤돌아봐야 할 작은 생명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으로 시적 시선이 가 닿았습니다. <별들은 따뜻하다> 이후 7년만에 출간한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보면 우리 민족의 공동체적 정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느낄 수 있는 보편적 정서가 드러납니다. 하응백 씨는 “과거의 시가 관념적 체험의 픽션의 소산이었다면, 추상적 민중을 향한 노래였다면, 이번 시는 자신을 대상으로 한 시로 변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변화하게 된 특별한 내적, 외적인 계기가 있었을까요?

정호승 : 그때부터 제가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거죠. 그 전에는 우리 속에 있는 나를 생각했는데요. 뭐라고 얘기하면 좋을까요. 섬을 비유해서 얘기하자면 바다에 떠있는 섬은 개인인데 바다 밑의 섬의 뿌리는 다른 섬과 연결되어 있잖아요. 그 전에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섬만 보지 않고 그 밑에 연결된 다른 것을 보려고 했죠. 개인을 통해 전체를 보려고 한 거죠. 그런데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부터는 섬이라는 개인의 개체를 집중적으로 보려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형상하는 삶이라는 게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가장 가치있는 부분인가. 어떻게 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된 거죠.

이재훈 : 이전 시집에서는 기독교적 메타포나 소재가 언뜻 보였는데,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에서는 오히려 불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인상비평에 불과한데요. 타인과의 부대낌 속에서 얻어지는 시적 감성보다 자신에게 향하는 사색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홀로 오래도록 소요하고 명상하여 나온 시어들이 눈에 띄게 보입니다. 시집의 첫 번째 실린 <새>라는 작품에서 “새가 죽었다/참나무 장작으로/다비를 하고 나자/새의 몸에서도 사리가 나왔다/겨울 가야산에/누덕누덕 눈은 내리는데/사리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이/새떼처럼 몰려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음 시에서도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미안하다>)라고 합니다. <수덕사역>에서는 버림의 자세가 보입니다. “꽃을 버리고 기차를 타다/꽃을 버리고 수덕사역에 내리다//중략/해는 저물고/수덕사로 가는 눈길/발은 없고 발자국만 남아 있다//악!”. <국밥>에서는 윤회의 사상을 엿볼 수 있고요. “사람 사는 세상에 살면서/소머리 국밥을 먹는다/소들이 사는 세상에서는/소들이 사람머리 국밥을 먹는다”. <허허바다>에서도 버림의 미학이 있습니다. “찾아가보니 찾아온 곳 없네/돌아와보니 돌아온 곳 없네/다시 떠나가보니 떠나온 곳 없네”
오랜 공력을 쌓아 이를 수 있는 어떤 지점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혹시 그간 다른 내적인 수련을 한 것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정호승 : 선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나이가 좀 드니까 그런 부분도 있구요.(웃음) 저는 기독교문화 속에서 저의 영혼을 성장시켜왔고 지금도 기독교적인 문화가 저의 양식이고 한데요. 그렇다고 해서 불교적 문화를 도외시하는 건 아니거든요. 아까 운주사 얘기도 나왔는데요. 정말 운주사 와불을 뵙고 내려오는데 삼존불이 있어요. 삼존불 중의 한분이 앉아 있는데 얼마나 감동적인지 그 부처상을 보고 진짜 울었어요. 얼굴이 마모될 만큼 마모되고 모든 걸 비우고 있잖아요. 그때부터 부처님의 불가의 세계, 불교적 세계관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 후로 불교적 이미지를 시에 차용해 온 거죠. 삶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욱 크게 가지려고 노력한 결과로 보아주시면 됩니다.

이재훈 : 선생님께서 작품 속에서 말하는 사랑이 인간에 대한 예의뿐 아니라 모든 만물에게까지 통용된다고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인데요. “강가에 초승달 뜬다/연어떼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나그네 한 사람이 술에 취해/강가에 엎드려 있다/연어 한 마리가 나그네의 가슴에/뜨겁게 산란을 하고/고요히 숨을 거둔다”. 동물이나 사물을 통해서 인간을 성찰하는 부분도 불교적 상상력과 연을 닿는다고 생각하는데요.

정호승 : 사물도 나와 동등한 생명체이자 인격체이죠. 절대자가 보기에는 동물이나 인간이나 생명의 가치는 똑같지 않겠어요. 그런데 인간이 오만하기 때문에 개나 돼지 같은 동물의 가치를 하찮게 보는 거죠. 시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얘기하고 싶어서 그렇게 나온 거겠죠.
인간은 자연적 존재죠. 자연의 기본적인 질서와 똑같은 질서를 지니고 있는 존재가 인간이에요. 제 책상에 사진이 한 장 붙어 있는데요. 토성을 중심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그리고 토성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 있어요. 볼펜똥보다 더 작은 점 하나가 있는데 그게 지구에요.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크며 지구가 얼마나 작은가 알 수 있죠. 그 속에 우리가 사는 거예요.

이재훈 :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제7시집에서부터 잡지 지면에 발표하지 않은 신작시를 시집으로 묶고 계십니다. 그 이후 시집들도 잡지의 미발표 신작들을 상당수 시집을 통해 싣고 발표하고 계시는데요. 문단의 매체나 제도, 혹은 평가에 연연하지 않겠다, 독자들과 직접 만나면 된다는 생각으로 비춰집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호승 : 그런 건 절대 아니고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시를 쓰는 저의 방법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 저는 시를 한꺼번에 몰아서 써요. 일년 이년 삼년 정도 메모를 해요. 메모가 두꺼운 노트 한권을 채울 때까지 메모만 하다가 그 노트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써요. 그러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 몇 개월에서 길게는 일 년씩 쓸 수 있어요. 그래서 그 노트의 메모를 가지고 시를 다 쓸 때까지 가는 거예요. 두 번째는 이런 이유 때문에 시가 가장 많이 생산되어 있을 때는 청탁이 없는 거예요. 시를 못 쓰고 메모만 하고 있을 때는 청탁이 들어오고요.(웃음) 저는 문단에서 특별히 큰 교유가 없고 외톨이에요. 어느 부분에서는 혼자인데 시인은 또 혼자 있는 존재잖아요. 저의 이러한 문단의 비사회성 때문에 제 상황을 잘 모르고 청탁이 이루어지니 잘 맞지 않는 거죠. 시를 한꺼번에 쓰니까요. 그래서 한꺼번에 쓰고 청탁을 기다리다가 청탁이 없으니 그냥 시집을 내는 거죠.(웃음)

이재훈 : 8시집에 가서는 이 시대의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의 아픔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이 선생님 방식의 내적 치유의 과정이 아닌가 생각해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9시집의 <포옹>에서는 ‘우리 시대 사랑의 명상가’라는 말처럼 반성과 응시, 침묵 끝에 들려주는 사랑의 언어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세계를 보여주실 계획으로 시집을 준비하고 계신지요.

정호승 : 앞으로 시를 더 열심히 쓸 생각입니다.(웃음) 제 존재의 여러 가치 중에 시인으로서의 가치가 더욱 중요하게 다가오더라구요. 그러면 우선 시인은 시를 쓰고 있어야 시인이니까 열심히 쓰고 있고요. 앞으로도 쓰게 되겠죠.

이재훈 : 선생님의 말씀 중에 “시를 쓰는 사람보다 시를 읽는 사람들이 더 고통받는 시대다”는 말씀이 더 가슴에 와닿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정호승 : 감사합니다. 오랜 시간 저도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_ <열린시학>, 2009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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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시인 김수영



이재훈 _ 시인, <현대시> 편집장




김수영의 대표적인 프로필 사진을 보면 시인은 흰 러닝셔츠 차림이다. 턱을 괴고 앉아 퀭한 눈으로 어딘가 먼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눈에는 독기가 흐르는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어딘가 연민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광기라고 해야 할까. 김수영의 사진을 보면 격식과 형식을 차리지 않고 내면의 자유로운 영혼을 그대로 발산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김수영(1921~1968). 그의 이름 석 자는 한국 현대시사에 가장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지난 2008년은 김수영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지 4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김수영 40주기 추모사업회가 꾸려져 추모학술제가 개최되었으며, 40세 이하 젊은 시인 40명이 김수영에게 바치는 오마주 시집 <거대한 뿌리여 괴기한 청년이여>를 발간하고, 기념 문학제를 열기도 했다. 올해 2009년에는 미발표작을 포함하여 354면의 <육필시고 전집>이 발간되었다. 이처럼 김수영은 당대뿐 아니라 후대에까지도 가장 사랑받는 시인 중의 한 명이다. 이를 가리켜 최두석 시인(한신대)은 “해방 이후 활동한 시인 가운데 김수영만큼 주목을 받은 이는 아직까지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김수영은 후대 연구자들이나 창작자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시인 중 한 명이다.

김수영은 1921년 서울 종로에서 출생했다. 21세 되던 해에 선린상업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일본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 건너간다. 이때 연극학교를 입학하게 되는데 이는 연극계에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서 귀국하여 다시 만주로 가서는 조선 청년들과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도 한다. 해방 이후 서울로 돌아와서는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한다. 가장 가까운 문우이자 애증의 친구인 박인환은 김수영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박인환이 경영하는 고서점 ‘마리서사’에서 김기림, 김광균 등과 만나면서 50년대 문인들과 폭넓은 교유를 가지게 된다. 명동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50년대 문학사에서 김수영은 늘 가장 중심에 있었다. 30세가 되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 후퇴 시 징집되어 북으로 끌려간다. 이후 평남 개천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탈출, 국군 최선봉 부대를 만나 서울까지 갔으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가장 암울한 시기를 보낸다.

신시론 동인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50년대 전후모더니즘을 대표하는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59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춘조사에서 발간하였다. 이후 참여시 문학논쟁 등을 벌이며 한국 현대시의 가장 중심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68년 6월 15일 밤. 마포에 있는 집으로 귀가하던 중 버스에 치어 머리를 다치고 의식을 잃은 채 적십자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의 사후 여러 권의 시선집이 발행되었고 1981년 민음사에서 <김수영 전집>이 발간되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려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夜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겨서있다 絶頂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만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시 <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 전문

김수영의 대표작으로는 늘 <풀>이나 <눈>, <폭포> 등을 떠올리지만 가장 김수영다운 시는 위의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김수영답다는 게 뭘까. 자신의 옹졸함마저도 시적 공간 속에 들여놓고 자신의 윤리적 자아를 배반하는 언어들을 직설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 모습은 김수영만의 모습이 아니고, 바로 나의 모습이며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시인이 선각자나 투사의 이미지로 비춰지는 게 아니라, 설렁탕집에서의 옹졸함과 같은 솔직한 소시민으로 비춰진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모래처럼 작은 존재 또한 시인의 일면이다. 이 시를 읽을 때마나 꼭 나 자신과 같아서 가슴이 서늘해지곤 한다.

김수영은 불온의 시인이며, 반시(反詩)의 시인이다. 또한 “시는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며, 가슴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라는 유명한 전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 전언을 통해 시는 형식과 내용 사이의 긴장을 통한 변증법적 유기체라는 점을 자각케 하기도 하였다. 김수영의 영혼은 늘 자유를 향한 갈급함에 목말라 있었으며, 기존의 관습과 타성을 부숴버리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김수영은 때로는 모더니스트로서, 때로는 현실의 가장 최첨단에 선 참여시인으로서의 역할을 올곧게 수행했다. 김수영이 모더니스트이건 참여시인이건간에 그 중심에는 항상 ‘저항’의 정신이 살아 있었다.

저항의 시인 김수영. 그를 떠올려 본다. 시국이 어수선하다. 만약 김수영이 이 시대에 살아 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_ 논산문화, 2009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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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인 김종삼



이재훈(시인)






우리 한국시에서 “가장 순도 높은 순수시”를 썼다고 평가받는 김종삼 시인(1921~1984). 언제나 말없이 점퍼 차림에 벙거지를 쓰고 술집에 홀로 앉아 술을 즐겼다는 김종삼. 그는 평생 직장다운 직장 한 번 가져본 적 없이 오로지 詩만 바라보며 가난하게 살았다. 김종삼은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꺼려했다. 도깨비, 괴짜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대신 평생 음악과 술을 친구 삼아 고독의 시간을 즐겼다.

김종삼의 술과 음악에 대한 취향은 독특했다고 전해진다. 좀 과장되어 말한다면 그것은 마치 선인들의 수행과정과도 닮았다. 술은 독작(獨酌)이 원칙이었으며, 술을 마실 때에는 안주나 곡기를 전혀 먹지 않았다. 또한 한번 마셨다 하면 오로지 술만 열흘이고 보름이고 마시다 깨다를 반복했다. 술값이 생기면 소주를 사들고 홀로 어디 구석진 공간을 찾아 다녔다는 김종삼 시인.

그의 음악에 대한 사랑 또한 남다르다. 김종삼이 직장이라고 할 만한 일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일한 곳이 바로 동아방송의 음악효과를 담당하는 일이었다. 아마 음악 효과의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종삼은 한번 음악을 들었다 하면 한 곡을 하루 종일 또한 한두 달을 계속해서 들었다. 일종의 편집증 증세처럼 하나의 곡, 혹은 한 음악가를 만나면 고집스럽게 들었다. 김종삼의 증언에 따르면 10대 후반에는 베토벤을 좋아했고, 그 후에 바하와 모차르트를 좋아했으며 세자르 프랑크, 라벨, 드뷔시 같은 음악가를 좋아했다. 그 때문인지 김종삼의 시에는 음악을 소재로 하거나 음악을 들으며 집필했던 것이 분명한 시편들이 상당수 있다. 특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음악가인 프랑크의 음악에 대한 애정을 여러 편의 시를 통해 형상화하기도 했다.

김종삼은 1921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그가 부모와 형제들과 함께 남한에 내려온 것은 해방 이후 1947년이었다. 형제들 중에는 친형인 김종문 시인도 있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전봉래의 자살을 겪은 것은 한국전쟁 피란 때였다. 전봉래는 부산 남포동의 스타다방에서 바하를 들으면서 세코날을 복용하고 자살했다. 이후 김종삼은 서울의 가난한 단칸방에서 평생을 가난과 고독과 함께 살았다.

김종삼에게 술과 음악은 신산한 현실을 지탱할 수 있는 힘과 같은 것이었다. 또한 그의 시에는 종교적 맥락을 환기하는 다수의 시편들이 있다. 그에게 종교는 특정한 교리를 전파하는 역할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을 말하고 싶은 순수의 욕망에서 발원한다. 알 수 없는 원죄의식과 인간으로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희미한

풍금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 시 <물통> 전문

김종삼의 대표작 중에서 「물통」은 미학적 언어의 특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김종삼의 의식세계를 잘 알 수 있는 시이다. 중요한 구절은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고 있는 절대자와 대답을 하는 시적 화자와의 말이다. 시에서 화자는 말하고 있다.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화자의 답변은 자신의 일생을 요약할 수 있는 성찰과 회한의 말이다. “~밖에 없다”는 말의 이면에는 내 삶이 참으로 보잘 것 없음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를 뒤집어 생각하면 “물”이라는 존재의 근원을 따질 때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은연중 전하고 있다. 물은 우리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물질이다. 물을 먹지 않고는 며칠을 버티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을 길어다 주었다는 것은 생명의 원천을 제공해주었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김종삼이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생명의 원천은 바로 ‘詩’일 것이다. 시를 통해 근원과 본질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낮추어 말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근원과 본질의 힘이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는 마지막 연에서 광야의 풍경이 영롱한 날빛으로 가득해지는 땅으로 변화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첫 연에서 음악적 효과를 주었으며, 마지막 연을 통해 정작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적으로 말하고 있다.

김종삼의 여러 대표작 중에 위의 시를 택한 이유는 우리 삶의 본질을 다시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생전에 문학적 영광의 자리에 단 한 번도 오른 적 없이 고독하게 살다간 시인이다. 그러나 그의 사후 많은 후배 문인들과 후학들은 그의 절창들을 다시 노래하고 되새겼다. 김종삼의 노래는 순수를 탐하는 가장 미학적인 언어의 결정체였으며, 그의 삶은 예술가의 전형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사례였다. 자연을 노래하지 않고, 스스로 난해한 길을 걸어갔지만 50년대 그 누구보다도 독특한 시의 숲길을 만든 김종삼. 그의 시와 삶에 축배를 들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_ <논산문화>, 2009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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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 오늘의 전위 21세기 한국의 시동인

전위를 꿈꾸는 주체들의 동거



이재훈(사회)
김근
김언
신동옥


1. 동인 활동의 현주소
2. 동인들의 문학운동과 전략에 대하여
3. 동인 활동을 통해 어떤 새로움을 줄 수 있는가
4. 현 동인들에 대한 비판적 점검과 동인 활동의 허와 실
5. 동인 활동과 창작과의 관계
6. 2000년대 활동하는 시인들의 일상과 시적 향방
7. 2000년대 동인의 의미와 전망


1. 동인 활동의 현주소

이재훈 : 안녕하세요. 저는 사회를 맡은 이재훈입니다. 이번 좌담은 2000년대 이후 시동인들을 전반적으로 점검하고 이를 통해 21세기 새로운 시적 경향을 진단해보는 자리로 마련하였습니다. 애초의 계획으로는 동인 개개인의 시적 경향을 바탕으로 각 동인이 추구하는 지형도를 그려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런 기획이 여러 차례 있었고, 동인 구성원을 통해 동인의 지향점을 찾는다는 것이 단순한 논리로 귀결되는 것 같아 이번 좌담을 마련하였습니다. 좌담을 통해 좀 더 자유롭고 편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현대시]에서 90년대 초반에 이와 비슷한 동인 좌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현대시] 1992년 5월호) 90년대 시동인을 전반적으로 점검하는 자리였는데, 이제 10년을 훌쩍 넘어 2000년대 시동인을 점검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2000년대 이후 시동인의 위상과 가능성을 점쳐보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제가 현재 시동인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등단 이후 90년대 후반부터 <시원>이라는 동인 활동을 한 경험이 있고, 또 전반적으로 좌담을 이끌어 갈 길잡이로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지금 세 분의 시인들께서 각 동인들을 대표하여 좌담에 참석해주셨습니다. <천몽>의 김언, <불편>의 김근, <인스턴트>의 신동옥 시인 반갑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들 가까운 친구들인데 술자리가 아닌 이렇게 진지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어 새롭네요.(웃음) 먼저 각 동인들의 탄생 배경과 현재의 활동 상황 등을 소개해 주십시오.

김언 : 오늘 좌담에 참석하신 <불편>의 김근 시인이나 <인스턴트>의 신동옥 시인과 달리 저는 <천몽>에 초창기부터 참여해온 시인이 아니라서 동인의 탄생 배경과 변모 과정을 살아 있는 육성으로 들려줄 수가 없어서 아쉽네요. 부득이 작년에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열렸던 <천몽> 동인 페스티벌에 소개된 소책자 내용을 간단히 읽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1998년 고찬규, 권혁웅에게 동인 제의. 이장욱, 이영광이 가세하여 90년대 중후반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기 전 시인들 선별 작업 시작.
1999년 2월, 10여 명의 시인에게 편지 보냄. 첫 모임 강혜미, 고찬규, 권혁웅, 박해람, 배영옥, 손택수, 여정, 이영광, 이장욱, 이찬, 유종인, 진수미 참석. 같은 해 이미자 들어옴.
2000년 김행숙, 정재학 들어옴. 이영광 나감.
2001년 이기성 들어옴.
2005년 김언, 배용제, 이근화, 진은영, 황병승 들어옴.”

이렇게 소개가 되어 있는데요, 당시 소책자에 약력과 시가 들어 있는 시인은 모두 18명입니다. 개중엔 현재 동인 활동이 사실상 전무한 몇 사람도 있지만, 일단 소책자에 소개된 시인을 모두 거론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찬규, 권혁웅, 김언, 김행숙, 박해람, 배영옥, 배용제, 손택수, 여정, 이근화, 이기성, 이미자, 이장욱, 정재학, 진수미, 진은영, 황병승. 여기에 지난해 12월 조연호 시인이 마지막으로 동인에 가입된 상태입니다.
보시다시피 <불편>이나 <인스턴트>에 비해서 인원이 조금 많지요? 많기도 하지만, 동인들 각각의 시 스펙트럼과 활동사항은 그보다 훨씬 더 폭넓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 색깔도 다르고 사는 모양새도 다르고 등단 연수와 나이 또한 멀게는 10년 가까이 차이가 나다 보니 언뜻 하나의 동인이라고 이름 붙이기가 곤란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 어수선함과 다양함이 어쩌면 <천몽>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로 <천몽> 내부에 단일한 문학적 지향성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1999년 동인이 결성될 때부터 견지해온 <천몽>의 독특한 성격이라고 알고 있으며 그 고집은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동인은 분명하지만, 각자의 문학적 지향은 하나의 에꼴로 묶이지 않고 산만한 편입니다. 따라서 동인을 통한 일정한 문학 운동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동인 모임’만이 있을 뿐이지요. 어떤 문학적 구심점이 없이 각자의 시세계를 ‘각개 격파’해가는 시인들의 모임은, 나중에 별도로 설명이 더 있겠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가장 2000년대적인 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몽>이 동인인 순간은 아주 가끔 있습니다. 1년에 서너 번 정도 모이는 모임이나 부득이하게 동인의 정체를 드러내야 하는 순간에만 ‘분명히’ 확인되는 동인, 이게 과연 진정한 동인인가 하고 물을 수도 있지만, 그런 질문이나 힐난조차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습니다. 문학적 지향성이나 구심점 같은 동인의 내부를 비워놓았기에 대외적인 시선에서도 자유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나오지 못했던, 아니 하마터면 나올 뻔했던 동인지 서문에도 들어 있는 말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내부’에 있지 않습니다. 내부에 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세계가 모인 것, 그것이 <천몽>입니다. 어느 지면에서 진수미 동인이 얘기한 것처럼 <천몽>은, 음식에 비유하자면, 비빔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선살로 이루어진 모듬 초밥에 가까운 동인입니다. 으깨지고 비벼지고 섞이는 동인이 아니라 함께 진열되어 있지만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상태, 그 상태가 <천몽>이라는 동인입니다.

김근 : <불편> 동인이 시작된 건 2002년 겨울이었습니다. 동인을 처음 제안한 건 저였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등단 후 몇 년 동안 문학적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그 공백기 이후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하면서 저는 소통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 소통이라는 건 문학적 고민에 대한 소통이면서 문제의식의 공유였죠. 제가 처음 동인을 제안한 건 같은 [문학동네] 출신 이영주 시인이었습니다. 만나서 얘기해보니, 그 역시 저와 생각이 비슷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시단에 팽배한 전통적 서정시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것은 전통적 서정시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기보다는 시단의 일방향성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었죠. 그리고 그 시들이 리얼리즘이나 상업주의로 포장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었습니다.
그 뒤 우리는 가까이 지내던 같은 [문학동네] 출신인 안현미 시인에게 전화했고, 안현미 시인도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셋이서 함께 할 시인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김중일 시인을 추천했고, 이영주 시인이 김민정 시인을 추천했고, 안현미 시인은 장이지 시인을 추천했습니다. 이렇게 여섯이서 출발했습니다. 그 뒤 2003년에 하재연 시인이 동인에 합류하게 되었고, 2004년 김경주 시인이 동인을 함께하게 되면서 여덟 명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여덟 명이 동인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초기에 저와 이영주 시인이 가졌던 문제의식과 소통에 대한 필요성은 모두 공유했습니다.
등단 순으로 보면, 저(1998년 [문학동네])와 김민정(1999년 [문예중앙])이 1990년대 말에 등단했고, 이영주(2000년 [문학동네]), 장이지(2000년 [현대문학]), 안현미(2001년 [문학동네]), 김중일(2002년 [동아일보]), 하재연(2002년 [문학과사회]), 김경주(2003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순입니다.
초기에 모임은 2주에 한 번씩 모여 합평을 했습니다. 서로 작품에 대해 합평을 하며 3년 정도를 보냈고 그 이후로는 한 달에 한 번씩 지금까지 모이고 있습니다. 첫 시집들이 나온 뒤에는 각자의 첫 시집들이 가지고 있는 특장과 단점을 토론하며 이후 작품 활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시집들이 나오면서 또 다른 모임의 정체성을 마련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신동옥 : <인스턴트> 같은 경우에는 강성은, 김안, 박장호, 서대경, 신동옥, 황성규 이렇게 여섯 명입니다. 동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2001년에 제가 먼저 등단하게 되면서였습니다. 함께 수업을 들으며 알고 지내던 박장호, 서대경과 함께하면서 틀이 갖추어졌습니다. 황성규는 학교 후배이고 시에 뜻을 두고 있어 2002년부터 합류했습니다. 초기에는 일없이 만나 학교 얘기나 하고 했어요. 그러면서 인터넷 카페활동이나 부정기적으로 술추렴을 하고……. 선후배 시인들의 격려가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싶네요. 그러다가 김안이 들어오면서 합평을 위주로 하는 본격적인 동인 모임이 꼴을 갖추었습니다. 2001년에 모임을 갖기 시작하여 강성은이 2004년 겨울에 마지막으로 들어와 만 3년 만에 여섯 명이 모두 모였습니다. 모임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많으면 일주일에 한 번, 늦어도 두 달에 한 번, 평균 2~3주에 한 번씩 모임을 가져왔어요. 그러면서 한 명씩 한 명씩 등단을 했습니다. 제가 2001년 겨울에 등단했고, 맨 마지막으로 등단한 강성은 시인이 2005년 가을에 등단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계속 우연이 겹쳐지면서 동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마추어 모임으로 시작했으니, 애초부터도 동인이라는 자각은 없었습니다. 동인 이름도 제가 멋대로 붙인 카페 이름을 그대로 따온 거구요. 2006년 여름, 어떤 잡지의 동인 특집에 인스턴트 동인 여섯 명의 신작을 실으면서부터 동인 이름을 인스턴트라 외부에 알린 셈이 되었습니다. 동인의 이름과 존재를 드러낸 셈이죠. 앞으로도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저희 스스로는 만들어진 경위나 활동도 그렇고…… 평소에 해오던 대로, 거의 무의식적으로 계속 해온 것이죠.

이재훈 : 동인 활동의 현주소를 들었는데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천몽>은 10여 년 가까이 동인 활동을 해왔고, 그 다음에는 <불편>이, 그리고 <인스턴트>가 가장 젊은 동인으로 활동해오고 있습니다. <인스턴트> 같은 경우는 등단 전부터 꾸려져서 등단 후까지 이어지는 약간 다른 탄생 배경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 동인들의 문학운동과 전략에 대하여

이재훈 : 우리나라의 시사에서 동인지의 의미는 남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1919년 <창조>에서부터 시작하여 각 문학연대마다 동인지가 시사에 던지는 새로운 문학적 특성은 그 시대를 대변하였습니다. 동인지는 발표지면이 귀했던 시절, 신인들의 새로운 목소리를 수용하는 발표의 장으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비영리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자본의 시스템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이로 인해 동인은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무대가 된 셈입니다. 이러한 성격이 하나의 문학운동으로 발전해나가기도 했으며 새로운 문학담론을 창출했습니다.
동인지는 결국 기존의 권력적인 문학의 장에 새로운 저항의 기운을 불어 넣는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기존의 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전위의 힘이나 개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점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동인의 정체성 중의 하나가 어떤 기획에 의해 발전한 운동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동인들의 문학 활동이 전략을 가지고 수행해야 의미를 갖는다는 말과도 상통합니다. 지금의 동인과는 좀 다른 지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동인이 가지고 있는 문학운동이나 전략, 혹은 동인들이 추구하는 문학적 지향성 등을 자유롭게 얘기해 주십시오.

신동옥 :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많이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 <인스턴트>의 경우 동인이 만들어진 배경이 여타의 동인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동인이 결성되려면 동인을 만든 핵심 멤버들 사이에 어느 정도 문학적인 경향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저희 동인 중에 모난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는 시인은 없었고, 특별히 작품세계에 변화를 보인 동인도 없었어요.
사전을 찾아보니 동인이라는 말이 이렇게 정의되어 있더군요. “어떤 일에 뜻을 같이하여 모인 사람”. 여기서는 ‘사람’은 단수 일반명사이지만, 동인 활동을 한다고 말할 때 이 말 자체가 복수 개인으로서 개체인 동시에 집단을 뜻하게 됩니다. 때문에 동인은 한 집단을 이루면서도 그 안에서 개개의 독립성이 강조됩니다. 동인 활동의 지향성·방향이라는 말은 이런 정의에서 거꾸로 도출됩니다. 두 번째로는 ‘같은 뜻’ 또는 ‘뜻을 같이 해서 활동을 한다’라는 말입니다. 보통 동인 활동, 동인운동, 시운동이라고 이야기할 때 이런 의미의 지향성이 강조됩니다. 동류를 이루는 시인들이 모여서 무엇인가를 획책한다면 그 지향점은 모호한 대로나마 밝혀야 하겠죠. 저는 질문에 포함된 ‘문학활동, 문학운동, 전략’ 이런 말들이 생소하고 무섭기까지 합니다. ‘너희들만의 전망이 무엇이냐’, ‘너희들이 글을 써나가면서 좌절에 부딪혔을 때, 어떤 비극성을 가지고 스스로의 미래를 견지하느냐’ 하는 것일 텐데요. 글쎄요…… 저희 동인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답했느냐 찾아보니, 이런 구절이 있군요. “<인스턴트>는 그럴듯함에 호소하는 오래된 전통에 대해서 항상 의구심을 품는다.” 동인으로서의 인스턴트는 전략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죠(비겁한가요?). 저희 동인들이 함께 원고지 60매 정도의 아포리즘이랄까, 나름의 시론을 쓴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유독 이런 단어들이 눈에 띕니다. ‘언어, 리듬, 음악, 자아, 운율, 세계, 의식….’ 결국 저희 동인은 한 번도 합의하지는 않았지만, 이 단어들이 지칭하는 바, 시 자체를 동인의 문학적 지향성으로 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 대답은 별다른 변별점이 될 수 없다는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김근 : 선배 동인들과의 차이를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동인지 문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문학사에서 동인운동은 근대문학의 태동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50년대 후반기 동인들의 모더니즘 운동이 있었고, 70년대 80년대 <반시>, <오월시>, <삶의문학>, <시와경제> 등은 문학이 이 땅에서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를 제공했습니다. <시운동>은 80년 문학이 낳은 역효과에 대한 대응으로 보여집니다. 그들 역시 그런 방식으로 80년대에 기여했다고 봅니다. <시힘>은 이른바 민중적 서정시로서 우리 문학에서 무척이나 확고히 자리를 잡은 듯합니다. <21세기 전망>은 90년대 이른바 우리 문학의 변화의 시기에 문학의 한 고민을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동인지 운동은 우리 문학의 이론과 이념을 제공하기도 했고 엄혹한 시대에 권력에 의해 매체가 사라진 자리에 매체를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선배들의 동인지 운동은 우리 문학에서 굉장히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동옥 시인이 이야기한 대로, 동인들의 문학운동이나 전략이라는 것이 과연 2000년대 가장 젊은 동인들에게 합당한 용어인가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지금 활동하고 있는 동인들은 어쩌면 운동과 전략을 하지 않기 위한 동인이지 않을까요? 전시대 동인들의 운동과 전략이라는 것은,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상황이 있었지만, 제도에 반발함으로써 제도에 진입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운동과 전략이란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불편>의 경우는 제도와 권력에 대한 경계심이 처음부터 팽배했습니다. 동인 자체가 제도화되고 권력화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심이나 반성을 공유했던 탓인지 ‘하나의 지향성을 가져야 된다’거나 ‘그 지향성을 이론화하고 실천해야 된다’는 개념은 저희에겐 아예 없었습니다.
<인스턴트>도 2006년에 동인특집을 하면서 동인에 대한 자각을 했다는데, ‘불편’이라는 이름도 나중에 붙여지게 된 것입니다. 동인 이름이 ‘불편’이 된 것은 2004년의 일입니다. 함께 동인 모임을 하고 있는 게 문인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이름이 뭐냐고 묻는 일들이 잦아졌고, 그냥 얼버무리기엔 ‘불편’한 지경까지 와버렸습니다. 게다가 그 즈음 동인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결국 동인지는 출판사 사정에 의해 나오지 못했죠.). ‘불편’이라는 이름은 동인 초기에 안현미가 제안했던 이름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 이름을 발음하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인들끼리 여러 이름의 후보를 들고 얘기해본 결과 ‘불편’이 우리 동인 이미지에 가장 적확하다고 결론이 났죠.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저는 한동안 그 이름이 ‘불편’해서 입 밖에 내는 걸 쑥스러워했습니다.(웃음)
생각해보면 ‘불편’이라는 이름은 조금 사적으로 느껴집니다. 세상에 대해 절망의 태도도 아니고 희망의 태도도 아닌 겨우 불편함을 드러내는 정도이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섣부른 희망이나 절망이 세계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알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 불편함은 문학제도에 대한 불편함이기도 합니다. 문학제도 역시 우리를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에겐 다양성과 동인 각자의 개별성이 중요했습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며 각자의 색깔로 시를 쓰는 동인들은 각자가 가진 시적 문제의식의 아주 조금씩의 교집합만을 동인에 두었고, 그 교집합을 통해 동인 안에서 소통하고 있었던 것이죠. 사실 동인으로 뭘 해보겠다는 의지는 전혀 없었습니다. 혹자는 그게 무슨 동인이냐고 반문했었고, 젊은 동인들이 점점 취미집단화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평론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선언이 없습니다. 다만 불편해할 뿐이죠.

김언 : [현대시]로부터 질문지를 받고 나서 동인들끼리 따로 모여서 의논하지는 못하고, 천몽 카페 게시판에 올려놓은 후 댓글을 다는 식으로 의견을 모았더랬습니다. 대체적인 의견은 앞서 동인 활동 상황을 얘기하면서 말씀드렸고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동인 한 분이 전화상으로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문예사조로서의 문학운동 시대는 끝난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듣고 전적으로 공감하고 동의했습니다. 동인을 통한 혹은 유파를 통한 거시적인 문학운동은, 영원히는 아닐지라도 한동안은 끝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앞의 두 동인도 마찬가지지만, 동인이라고 해서 하나의 에꼴로 묶는 것 자체가 시대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사실, <천몽>을 포함하여 2000년대 동인을 이루는 시인들 대부분이 거대담론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성장기를 보낸 시인들입니다. 혹은 아예 거대담론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시를 시작한 시인들입니다. 그들에게 거대담론은 이미 과거이거나, 절실하지 않은 남의 세계입니다. 이들에게 거대담론 혹은 일정한 방향을 지닌 담론과 시를 이어서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어색합니다.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말인데, 그런 점에서 동인의 탄생과 그 모임의 성격도 과거의 동인들과 달리 조금 더 느슨하고 조금 더 개인적이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천몽> 역시 시작할 때부터 그 점을 분명히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천몽>에는 문학적인 합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시에 대한, 문학에 대한 <천몽>의 유일한 합의점은 ‘합의하지 않는 데 있다’ 이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스무 명 가까이 모여서 동인을 하는데 얼마나 그 세계가 넓겠습니까? 넓고 다양한 만큼 동인 각자의 미학적인 새로움을 찾아가는 것이 <천몽>의 특성이면서 또한 시대적인 요청이 아닐까 싶네요. 각자의 문학적 대안은 존재할 수 있지만, 일정한 합의를 끌어내지 못해 고민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2000년대 시동인들은 내면적으로 이미 문학에 대해서 집단적인 ‘방향성을 가지자, 경향성을 가지자’란 구호를 폐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젊은 시인들에게 일정한 문학 운동이 부재한 것을 아쉬워하는 얘기가 들립니다. 운동이 없는 것 자체가 젊은 시인들에게 더 적합한 옷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분들의 우려이겠지요.
일부 비평가들의 경우 젊은 시인들의 시세계를 동인이 아니더라도 굳이 일정한 유파로 묶어서 파악하려고 합니다. 하나로 묶이지 않는 시인들을 하나로 묶어내려니 자꾸 오류가 생길 수밖에요. 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인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서로 다른 속성으로 뭉친 시인들을 하나의 노선이나 경향으로 파악하려면 아마도 판판이 실패할 것입니다.
2~3년간 시단을 뜨겁게 달구었던 미래파 담론도 그런 실패 사례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 명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든 간에 유파로 묶어서 파악하려고 하니 들어맞지 않는 것이고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만 가열되었던 셈이지요. 일부 언론과 비평가들이 미래파를 마치 하나의 유파처럼 묶고 나서 그들의 공통점으로 든 단어가 ‘난해시’였다는 사실은 이 논쟁이 얼마나 시적으로 허약한 토양에서 시작된 논쟁인가를 방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난해시’가 그토록 ‘쉽게’ 하나의 유파를 대변하는 단어가 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여기에 대한 얘기는 또 쓸데없이 길어질 것 같으니 그만두도록 하겠습니다.

3. 동인 활동을 통해 어떤 새로움을 줄 수 있는가

이재훈 : 아마 앞선 질문과 공동선상에 있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이전 세대의 동인 활동을 보면 그 이전 세대와는 다른 새로움을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운동>, <시힘>, <시와경제>의 80년대 시동인이라든지 <21세기 전망>, <슬픈시학>, <오늘의 시> 등의 90년대 시동인들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90년대 시동인을 통해 신서정을 얘기하기도 했고, 키치 세대의 탄생을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시를 통해 새로운 담론을 얘기하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2000년대 동인들의 활동은 어떤 새로움을 줄 수 있을까요? 김언 시인이 이어서 이야기해주시죠.

김언 : 되풀이해서 얘기하지만, 일단 동인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문학적 성취를 거부하는 것이 <천몽>의 분명한 성격입니다. 그리고 동인 내부에서도 자신의 문학적 지향점을 동인 전체의 이름으로 확대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집단적인 문학 운동은 물론이고 문예사조에 육박하는 거시적인 새로움을 노리는 동인들도 저는 없다고 봅니다. 대신 저마다 미시적인 새로움을 찾아서 각자의 시세계를 더 파고들어갈 수 있고 그럴 만한 미학적인 틈이 각자의 시 앞에 분명히 존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시적인 새로움에 자신의 문학인생을 걸고 투신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말도 되지요.
만약 동인 차원에서 새로운 문학 운동을 기획한다면, 단순히 선언뿐만 아니라 동인지가 반드시 필요해집니다. 새로운 문학 운동을 동인들 전체의 시로 일정 부분 증명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은 동인지가 불필요한 시대입니다. 제도권 내부의 시단, 특히 젊은 시인들만 놓고 보자면 분명한 사실이죠. 동인지가 불필요한 이유는, 일단은 제도권 내부의 발표지면이 풍족하기 때문이고, 조금 더 파고들면 시인들 스스로 자기들을 하나로 묶어서 보여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껏 동인지를 내봤자 모래알을 모아놓은 것일 테니까요. 여느 시 전문지의 구성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지요.
한국 근현대 시사詩史에서 ‘동인 문학’은 ‘동인지 문학’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서히 ‘동인 모임’으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 성격의 변화 자체가 어쩌면 2000년대 동인들의 유일한 새로움이 아닐까요? 얼른 눈에 띄는 집단적인 새로움이 아니라, 각자가 다른, 각자가 서로 다르기를 열망하는 2000년대 문학의 지반을 이루는 새로움이 현재 변화해가는 동인들의 성격에 있지 않을까 싶네요.

김근 : 김언 시인이 말한 것처럼 문학적 새로움이라는 것은 결국 각자 추구해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인이라는 하나의 색깔로 묶이기보다는 동인 안에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저희에겐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오히려 동인 각자의 문학적 새로움이 동인의 새로움을 결정짓는다고 할까요?
‘불편’에는 선언이 없다는 말씀은 이미 드렸죠? 선언이 없는 게 선언이죠. 선언은 없지만, 동인 안에서 충분히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 서로 존중되고 소통할 수 있고, 자극 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저희는 중요하게 생각해왔습니다. 문학적 새로움이라는 것도, 그 속에서 각자가 추구해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합평 과정에서 따뜻한 옹호와 생산적 비판은 물론 있었지만, 그것이 동인 이름으로 강요되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동인 각자에게 <불편>의 위상이나 색깔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저희 동인끼리 이미 공유하는 바죠.

신동옥 : 형들의 답과 비슷합니다만, <인스턴트> 역시 비슷한 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답이라는 것이 동인 활동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노출한다 해도요. 사史적으로 <시운동>, <시힘>, <시와경제> 등이 활동한 80년대와 같은 경우에는 동인지시대였고, 동인 활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명백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정치사회적인 여건으로 잡지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점, 발표지면의 부족 자체가 동인 활동을 지탱시할 수 있었다는 점을 먼저 짚을 수 있겠습니다. 동인이 만들어지는 이유도 천차만별입니다. 동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자기 나름의 미적 선언들을 걸고 시작한 경우, 어떤 전문가 집단에서 시를 여기나 집단취미로 표방하고 시작했다가 기성이 된 경우, 가장 절망적인 경우에는 문학적 에꼴을 만들기 위해 시작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앙가주망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시에 이데올로기를 싣고 사회의 부름에 답하려 한 경우도 있지요. 80년대 동인들이 남긴 성과는 극명합니다. 획일화되고 획일화를 지향하는 문학사에, 또 격변의 사회적 상황에 대해 동인 활동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문학적 다양성을 입증했다는 점입니다. 시단도 하나의 사회문화적 공동체이니 말입니다. 90년대 시동인의 경우 80년대 문학에서 종개념으로 후퇴했던 개별적 시적 자아들이 어떻게 표현하고 드러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90년대 동인들이 처음으로 올곧은 ‘개인―개인성’에 눈을 돌립니다. 형들도 90년대 후반에 등단하셨는데, 90년대 후반에 이르면 선배들의 작업을 시단 안팎에서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만개시킨 것 같습니다.
사史적인 연장선에서 2000년대 이르면, 너희들은 어떤 선언을 통해서 동인 활동이란 이름으로 시사에 새로움을 줄 수 있느냐는 물음이 질문 자체로 하나의 답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새로움 자체가 새로움이니, 동인 활동을 통해서 새로움을 줄 수는 없는 상황이 된 거죠. 저희 세 동인에서 이름을 떼고 그냥 A동인, B동인, C동인이라 불러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저는 이 아이러니가 시사에 어떤 안티테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90년대와 연속성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동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반反―동인 활동이라는 점, 즉 복수인칭으로 활동해 나가면서 서로간의 암묵적이고 느슨한 미적인 합의나 연대가 있을 뿐……. 그게 결정적인 차이 같습니다.

이재훈 : 연이어 이야기하면, 저도 좌담을 구성하고 준비하면서 회의적인 생각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이미 이전 동인들과는 태생이나 상황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를 통해 그 ‘다름’을 듣는 기회가 되어서 더욱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의 동인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전과 다른 것을 ‘다르다’고 막연하게 말할 수도 없고, 반대로 역사적인 동인의 맥락이 있기 때문에 그 흐름을 피할 수도 없는 게 사실이죠. 지금까지 각 동인들께서 이전 세대와 다르다는 지점을 짚으면서 지금 현 동인의 정체성을 말해왔습니다. 지금 제기된 정체성은 선언이 없는 동인이나 모임 형식의 동인이 될 텐데요. 이처럼 동인의 정체성을 많이 말해 주시는 것이 그간의 평론가들이나 선배들이 암묵적으로 바라보는 잣대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죠. “쟤들이 모여서 권력화라려고 한다, 에꼴을 만들려고 한다”는 식의 시선과 동시에 “새로운 목소리나 담론을 내야지”란 식의 강요들이죠. 이런 암묵적인 강요들에서 자유롭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현 동인들이 분명 이전 세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4. 현 동인들에 대한 비판적 점검과 동인 활동의 허와 실

이재훈 : 이전 세대의 동인들이 운동의 차원에서 새로운 문학담론의 생산과 세대교체의 역할을 담당했다면 지금의 동인들은 그 역할의 차원이 줄어든 게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굳이 동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필요성이 있는가. 동인의 필요성이 설득력을 잃은 지금의 시점에서 동인 활동은 새로운 섹트주의나 에꼴을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동인 참여자의 개개인도 자신이 활동하는 동인이 친목단체의 역할이라며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시인도 있습니다. 지금의 동인이 한국 시단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나 의미, 기대 등등이 궁금하고요.
하나의 예를 들자면, 2002년 [현대시]에서 동인특집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시원>과 <천몽> 동인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시인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설문조사를 보면 대부분이 동인이라는 집단의 이름이 아닌, 개개인의 이름으로 호명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합니다. 새천년 벽두부터 이전 세대와 다른 이와 같은 생각 때문에 동인 활동의 위축이라든가 하는 용어가 나오기도 한 것이죠. 그럼에도 동인 활동을 계속해나가는 것은 어떤 장점이 있기 때문이고, 동시에 단점 또한 있을 것입니다. 동인 활동을 통해 얻는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죠.

김근 : 과연 그렇다면 동인 활동을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이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요, 전 동인 활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동인을 하는 이유는 이미 문학제도가 너무 공고해 이 문학제도 안에서 소통이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미래파 논쟁을 다 지켜봐서 아시겠지만, 미래파 논쟁은 생산적인 시적 담론을 생산해내지 못한 채 미래파로 거론되는 시인들과 미래파 바깥에 있는 시인들에게 상처만 주고 끝이 났죠. 충분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미래파 논쟁의 한 실패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겠죠. 이처럼 제도 안에서 소통할 수 없다면 동인이라는 모임 안에서 각자의 문학적 지점들을 존중하면서 우리끼리라도 소통하겠다는 것이 저희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런 소통의 성과들이 개개인의 작품으로 드러나게 하겠다는 것이죠. 
단점에 대해서 물어보셨는데, 저희들이 상처받은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불편>이 세간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건 2005년 발발한 미래파 논쟁 이후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과정에서 ‘불편⊂미래파’라는 수식이 암암리에 유포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다. 그러나 <불편>에는, 평론가에 따라 물론 달라지겠지만, 이른바 미래파에 이름이 들어가는 시인도 있고 들어가지 않는 시인도 있습니다. 미래파를 가지고 <불편>을 설명하기에는 폭이 너무 협소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내부에서 상처를 받았죠. 그 덕에 유명해진 시인들도 있긴 한데, 개인적으로 구설에 휘말리거나 상처를 받기도 했죠.
그리고 당시 많은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나왔습니다. 저희 동인들의 첫 시집들도 대부분 그때 출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문단의 태도는 “이 젊은 시인들이 어디서 나왔지?”였습니다. 사실 90년대 후반에 등단해서 계속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소위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주요잡지들이 이 시인들을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죠. 그전까지 거들떠도 보지 않다가 시집이 쏟아져 나오자 마치 새로운 종족이 탄생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러면서 젊은 시인들을 서열화를 하며 분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제는 젊은 시인들 각자의 시세계가 지닌 색깔들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미래파’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색깔인 것처럼 다뤄졌다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젊은 시인들이 유행을 따른다는 비판도 심심찮게 등장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불편>은 우리가 미래파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편>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져서 언급되는 것에 대해 거부합니다. 미래파 이후 저희 동인 이름이 자주 언급되면서 이러저러한 잡지에서 동인 특집을 하자고 제안이 들어왔었는데, 거의 거절했습니다. 몇몇 잡지나 매체에 동인 특집이 게재되었습니다만, 의도와는 달리 <불편>에겐 오히려 상처로 되돌아온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재훈 시인이 앞서 <천몽>과 <시원> 동인의 설문조사에 대해 말했듯 <불편>의 시인들도 동인의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자기만의 작품세계로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바랄 뿐입니다. 동인들이 첫 시집들을 다 냈는데, 시집 약력에 동인 이름을 밝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죠. 저와 김경주 시인이 두 번째 시집을 내면서 약력에 처음 <불편>이라는 이름을 넣었습니다.

김언 : 밝히지 않았다고 다른 동인들이 기분 나빠하지도 않죠?

김근 : 예.

신동옥 : 저희는 안 밝히면 탈퇴해야 해요. 사람도 별로 없잖아요.(웃음)

김근 : 어쨌든 이런 ‘동인’으로 묶이며 받은 상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입니다.

신동옥 : 김근 형이 앞서 개별적인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상황이 젊은 동인들의 시운동을 더 필요로 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잡지나 작품집을 보면 면식도 없고 개인적인 정보도 없는데 꼼꼼하게 읽게 되고, 읽고 나면 은연중에 이런 문제의식으로 작업들을 하고 있구나 하는 공통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점은 이전 세대와는 다른, 변화의 일례입니다.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새로운 징후나 새로운 감성이 나오면 그것을 이론화시키려는 작업들이 뒤따랐고, 시적 합의를 거쳐 정리되었어요. 그러한 작업이 서로의 교조적 입장 차이를 재확인하는 데 그친 것이 금방 말씀하신 미래파 논쟁입니다.(물론 비록 한바탕 소동으로 끝났을지라도 미래파 논쟁은 작금의 시단에 분명 살을 찌운 부분이 있어요) 결과적으로, 어떤 새로운 징후들이 나타났을 때 이를 이론으로 봉합하기가 버거워진 상황, 감성적 공감대를 끌어내는 데에도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죠.
동인 활동은 우리가 전유할 수 없는 개개인의 사적 감성과 징후를 어느 정도 소통하게 만드는 계기 중 하나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동인’이라는 개념은 초기 낭만주의 때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개별자들이 한꺼번에 묶이면서 개체―집단으로 명명되는데, 이들이 살롱 같은 데서 교우하고 서로 쓸거리를 나누고 때로는 마음이 맞으면 함께 쓰기도 하던 초기 낭만주의의 느슨한 집단의식(esprit de corps)을 가진 문학적인 담지자들의 모임이 바로 동인입니다. 백 년이 훨씬 지난 지금 저희들이 하고 있는 활동은 순수한 의미로 이런 의미의 동인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현재와 같은 동인 활동으로 다시 ‘우리’라는 개념을 재정리할 수 있는 활력을 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소박한……. 왜냐하면 지금의 시인들은 유파를 떠나 개별자이며 복수인칭으로 존재하니까요, 안도 없고 밖도 없는 시인 사회에서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들쭉날쭉 견강부회하며 함께―각자 쓰면 종국에 서로 지친다는 단점이 있어요. 어떤 선배님이 제가 동인 활동을 한다니까 말리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시더군요. “나는 내가 피우는 담배와도, 내 자신과도 동인을 못하는데 너희는 여섯이서 몰려다니는구나.”(웃음)

김언 :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저는 문단 체제와 문학 동인의 역학 관계에 대해서 몇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이제까지 한국 문단에서 문학 동인이 융성하던 시기는, 달리 말하면 동인지 문학 운동이 왕성하던 시기는 역으로 한국 문단이 곤경에 처하거나 뿌리가 약했을 때입니다. 즉 문학의 제도화가 정착되지 않았거나 흔들릴 때 동인지 문학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1920년대 근대문학 초창기, 해방 후에서 한국전쟁 직후의 혼란기, 그리고 1980년대 신군부에 의한 언론 통폐합으로 영향력 있는 잡지가 폐간되던 시기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문학의 제도화가 과거 어느 때보다 공고해진 시기입니다. 동인지 문학은 제도권 문학이 약해졌을 때 활성화되는데, 제도권 문학이 강성해진 지금은 동인지 문학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의 필요성조차 절실하지 않지요. 제도권 내부에서의 경쟁, 혹은 제도권 내부로 더 깊숙이 진입하고자 하는 경쟁만 남고, 제도권 자체를 대신할 만한 문학 운동이 힘을 쓸 여력도 필요성도 없어진 시기인 셈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문학 동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얼마나 될까 그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상 할 일이 없죠.
특히 시단의 상황만 놓고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시단의 경우 제도권의 정점에 위치하면서 제도권을 이끌어가는 쌍두마차를 지적할 수 있는데, 하나는 비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입니다. 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등단이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집의 출간입니다. 그런데 자비 출간인 경우를 제외하고 시집을 내는 결정권을 누가 쥐고 있습니까? 바로 메이저 잡지의 편집위원들입니다. 이 편집위원들의 대다수가 비평가이고 동시에 대학교수입니다. 대학교수이면서 비평가인 그들이 호명해줘야 시집을 낼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인이 갑이 아니라 을의 관계에 있다는 말이며, 오히려 을이 되기 위하여 애를 써야 된다는 뜻도 내포합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영광스러운 을이 되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습니까? 외롭게 자비 출간하는 갑이 아니라 누군가 호명해주어 시집을 내게 되는 행복한 을이 되기 위해서 말이죠.
제도권의 정점에 비평가와 대학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 시인들조차 제도권 내부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들 대부분이 대학을 나왔고, 국문과나 문창과를 다녔고, 일부는 석박사 학위까지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비평까지 겸하고 있습니다. 즉 호명을 하는 사람이나 호명을 받는 사람이나 모두 제도권 내부에 있다는 것이죠. 현재의 시인들에게서 대학이나 비평가의 관여를 제외한 흔적을 찾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며, 그들에게 제도권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라는 주문이 불가능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내부에 있으며 내부를 떠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대학이 문학을 점령해버렸고 비평가가 시인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마당에 시인들끼리 모여서 새로운 문학 운동을 기획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그런 기획을 원하는 시인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의문입니다. 그럼에도 시인들은 끊임없이 모입니다. 사소하게는 술자리를 통해서 다르게는 어떤 계기를 갖기 위해서 모임을 만들어내는데, 그중 하나가 동인이라는 형태일 겁니다.
제도적으로 무력한 시인들이 무력하게 모여서 무엇을 모의해야 할까요? 무슨 얘기를 하고 무슨 합의를 끌어내야 할까요? 그것은 합의도 아니고 기획도 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모임은 강단 비평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제도권 문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인들의 생각이 토로되는 자리이며, 그 자리에서 흘러나온 이러저러한 얘기 전부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비록 지면으로 발설될 기회가 없더라도 시인들끼리의 소통, 좀 더 정확하게는 뜻이 맞는 시인들끼리의 소통은 수면 아래서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을 겁니다.
가령, 미래파 담론이 시단을 휩쓸고 있을 때 시인들끼리 만나서 하는 이야기는 분명 달랐습니다. 비평에서 시작하여 비평으로 끝난 담론이고 논쟁이지만, 지면 밖의 시인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분열되는 얘기는 그 자체로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그런 얘기들조차 없다면 언론이나 잡지에서 떠들어대는 담론들만 수동적으로,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겠죠. 비록 제도권 내부에 있더라도 제도권의 정점에서 강조하는 것과는 조금씩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작업이 한국 시단의 또 다른 이면을 형성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런 점에서 2000년대 시인들의 ‘동인 모임’은 한국 시단의 전면이 아니라 이면을 움직이는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5. 동인 활동과 창작과의 관계

이재훈 : 이제 조금 편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죠. 문학 동인이 비슷한 문학적 성향이나 지향점을 가지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동인 활동을 통해서 서로 문학 경향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동인 활동의 시작은 보통 시합평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제 경험으로는 동인 초기에는 시합평을 열심히 하지만, 조금 지나면 시들해지죠. 각자의 길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길을 가게 된다고 할까요. 각 동인들은 시합평을 하고 계신지 궁금하고요, 시합평을 통해서 작품창작에 끼치는 영향은 없으신지 듣고 싶습니다. 아니면 시합평이 아닌 다른 활동을 통해 시적 영향력을 받는지도 알고 싶네요.

김언 : 이제 거의 시합평을 할 시기는 지나가지 않았나요? 적어도 <천몽>의 경우엔, 시집 한두 권씩을 낸 다음부터는 각자의 길이 정해진 것 같습니다. 동인 차원에서 시인 각자의 길을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시적으로 일정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던 2000년대 이전의 동인들도 서로의 시를 구속할 명분이 약했는데, 지금처럼 문학적인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합의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누가 뭘 써도 상관할 바가 아니죠. 그럴 필요도 없고요. 오히려 누군가의 시를 내가 못마땅해 하더라도 또 누군가 나의 시를 못마땅해 하더라도, 그 못마땅함까지 껴안고 더 파고 들어가는 것, 각개 격파해 나가는 것이 <천몽>을 포함하여 지금의 시동인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김근 : 모두에 말씀드렸다시피 제게는 작품 활동의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동인 활동을 하면서 굉장히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다시 문단으로 진입할 때 가지고 있던 불확실성이나 작품에 대한 불안감이 동인들의 따뜻한 옹호와 응원 속에서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할까요. 저희는 합평회를 길게 한 편입니다. 3년을 2주에 한 번씩 만나서 계속 합평을 진행해왔으니까요. 나중에는 지쳐서 그만두었지만, 그 과정에서 자극도 받고 새로운 작품을 쓰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불편>의 다른 동인들도 아마 그랬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은 그런 작품 합평은 하지 않지만, 문학적 소통의 장은 열어두고 있습니다.
요즘은 동인 안에서 다른 고민들을 더러 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불편>에는 시와 다른 장르와의 소통에 주력하는 문화적 작업들을 진행해온 시인들이 몇 명 있습니다. 안현미, 이영주, 김경주, 저는 작가회의에서 ‘항구문학의 밤’이라는 행사를 2년여 동안 기획하고 진행해왔습니다. 이 행사는 우리나라 여러 항구들을 찾아가 시인들의 시에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이 결합해 함께 하는 공연이었습니다. 김경주는 ‘추리닝 바람’이라는 문화집단을 이끌며 문학뿐 아니라 희곡이나 문화공연 등 다방면에서 활동중이죠. 저는 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사무국에서 문학나눔큰잔치나 문학나눔콘서트 같은 공연들을 기획하는 작업들을 한 바 있습니다. <불편>은 앞으로 그런 다른 예술장르와의 소통 쪽에 관심을 두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것은 합의된 것은 아닙니다만,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한 공연 이후로 각자가 자극받은 것도 있고, 동인지를 굳이 책이 아닌 DVD로 내는 건 어떻겠느냐 하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으니까요. 굳이 소통을 문학에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다른 장르와의 소통으로 확대시키는 것은 어떨까 하는 고민들을 내부에서 조심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문학의 새로운 자극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신동옥 : 처음에 이 질문을 받고서 저희한테 직접적으로 하는 질문 같았습니다.(웃음)

이재훈 : <인스턴트>는 지금까지 오래도록 합평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동옥 : 지금 여섯 명 외에도 같이 합평회를 갖던 아마추어 분들도 있었는데, 결국 그만두셨죠. 수준 차이가 많이 나서 따라오지 못하니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두신 것이죠. 개인적인 성격에 따라 합평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것 같습니다. 자기가 얻는 게 있으면 하면 되고, 아니면 그만인 것이죠. 저마다 가진 문제의식을 존중하는 것은 무척 힘이 들더군요. 이미 아마추어도 아니고, 작품집을 묶었거나 묶어야 될 상황에서 남의 이야기는 곧이들리지 않죠. 저는 합평무용론자 중 한 명입니다. 모순이죠.(웃음) 굳이 합평이 아니더라도 함께 모여 있는 순간의 에너지를 어떻게 느끼느냐가 관건이니까요.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공연했을 때 저희는 이제껏 합평했던 모습을 시나리오를 짜서 각자의 캐릭터대로 그대로 관객에게 보여줬습니다. 물론 사이에 미안할 정도로 망했지만요.(웃음) 소설동인이 시동인보다 적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는 짧고 직관적이고 감성적이죠. 또 개개인의 표면적인 기질이나 무의식적 기질까지 보여주죠. 그렇기 때문에 동인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저희 동인이 6~7년 동안 합평을 해왔다는 것은 문제가 심각해도 아주 심각합니다.(웃음)

6. 2000년대 활동하는 시인들의 일상과 시적 향방

이재훈 : 우리 젊은 시인들 삶의 주변을 한번 돌아보죠. 동인 활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큰 것 중의 하나가 시인들과의 개인적인 유대라고 생각합니다. 동인을 통해 동시대 시인들의 일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죠. 지금 제가 봤을 때, 젊은 시인들에게 참 힘든 문제가 생활입니다. 물론 이것이야 시인 개개인이 각각 알아서 헤쳐 나가야 될 문제이긴 하지만, 조금 억울한 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전 세대들은 시단에 순교하고 시에 인생을 바치면 당연히 생활이 따라 갔었죠. 지금은 시에 매진하라는 요구만 있을 뿐 그 누구도 생활을 책임져주지는 않습니다. 시인들의 일상 속에서 시가 가장 크지만 이십대를 지나 삼십대로 넘어가면 삶의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정규직을 갖고 있는 시인이 우리 주변에 없기 때문에 다들 결혼도 미루거나 결혼을 했다고 해도 출산을 미루게 됩니다. 아예 결혼 자체를 생각지 않는 시인들도 많죠. 2000년대 활동하는 우리 주변 시인들의 일상은 어떠한지, 그리고 앞으로 젊은 시인들의 시는 어떠한 양상으로 개진될 것인지에 대한 예견을 나름대로 짚어주셨으면 합니다.

김근 : 다 힘들죠. 그런데, 이전의 선배들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작가회의에서 특히 많이 느꼈는데요, 80년대 주로 활동하고 90년대까지 활동했던 저희 선배 세대들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생업이나 벌이에서 자유로운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정 부분 문학이 그들 삶에 도움이 되기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생활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 같은 것들을 포함해서 말이죠. 문학의 위상이 전에 비해서 높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는 저희 세대는 어쨌든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그 일이 문학으로는 당연히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러니, 소위 아르바이트, 교정이나 교열 같은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죠. 몇 년 전에 김경주 시인이 [한국일보]에 인터뷰한 기사에도 나오는 대필이나 심지어 야설 같은 것이라도 써서 먹고 살아야죠. 아무래도 시 쓰기보다는 먹고 사는 일에 치중하게 되는 게 사실입니다. 동료 시인들을 보면 공부해서 학교에 자리 잡는 친구들이 더러 있지만, 그것도 녹록치만은 않죠. 한국작가회의에서 선배님들이 우리 때는 많이 모였는데 너희들은 왜 모이질 않느냐고 말씀하곤 하시는데, 사실은 열심히 모였습니다. 다만 각자 일이 있을 때는 못 왔을 뿐이죠.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냐고 물으면 사실 저희 자신이 치졸하게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거죠.

신동옥 : 그 각자의 일이라는 게 들춰보면 별 일이 아닌데 본인한테는 긴박한 일이죠. 과외랄지, 학원 강의랄지. 본인에게는 생존과 관련된 것이니까요.

김근 : 그렇죠. 올해 들어 문예지개재우수작품지원사업도 없어졌죠.

이재훈 : 젊은 시인들에게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죠.

김근 : 저야 그 기간 동안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한 탓에 거의 수혜를 못 받았죠.(웃음) 문예지게재우수작품지원사업에 대해, 국가가 시인(그리고 소설가들)들 먹고 사는 것까지 책임져야 하느냐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저는 물음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문학에 대한 국가의 일종의 투자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돈을 받기 위해서 시를 맞춰 쓴다는 식의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말들도 있었는데, 매분기 수혜자가 140여 명 되었는데, 그 140여 명이 그걸 받기 위해서 예심위원을 포함한 수십 명의 심사위원의 성향에 맞는 시를 쓴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어쨌든 갈수록 젊은 시인들에게는 어려워지는 시대가 되는 것 같습니다. 문화나 복지 정책에 대해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정부가 들어선 것도 우려스럽기도 하고요. 앞으로 시를 쓰는 것과 먹고 사는 것을 병행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신동옥 : 이 문제에 대해서 가장 근사치에 가까운 보기가 저희 동인입니다.(웃음) 이 시대의 젊은 시인들의 일상, 어떻게 먹고 사는가를 볼 때는 저희 동인들을 보면 되요. 저희 동인은 삼십대 중반에서 삼십대 후반, 다섯 명이 남자고 한 명이 여자입니다. 여섯 명 중에서 직업을 가지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입니다. 나머지는 어떻게 사는지 저희 서로도 잘 모릅니다. 길게는 7~8년을 보내왔는데도 말이죠. 심지어는 동인 활동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 역시, 서로의 생존―돈 벌이에 관련된 부분이에요.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두 달 동안 번역을 해야 한다, 두 달 동안 대필을 해야 한다, 학원 강의를 해야 한다하면 그 동안은 온전한 동인 모임이 불가능해요. 누군가 지방으로 가게 되면 당연히 동인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데, 저희는 한 명이 지방에 내려가 있어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고 했거든요. 동인 활동의 가장 큰 장애가 다른 사람 돈 벌 때에요. 당장 저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웃음) 뭐 도와줄 방법도 없고요.
가장 곤혹스럽고 짜증나는 질문 중 하나가(오랜만에 만난 사이에 가장 편한 질문일 텐데) “요즘 너 어떻게 사니, 뭐 먹고 사니, 일은 잘 돼?”입니다. 할 말이 없죠. 그렇게 물어보는 분께 “예, 요새 집에서 시 잘 쓰고 있습니다. 한 달에 열 편 써요” 하고 대답할 수는 없는 거죠.(웃음) 눈물이 나는 이야기죠. 시집을 한 권, 두 권 가지게 되고 다른 문학적 지향점을 궁구하게 된다면 동인이 와해될 공산이 큽니다. 아무리 안개 속의 모래알 같은 집단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생존이 동인을 해체할 수 있는 아주 큰 요인 중 하나라는 것은 슬픈 현실입니다.(삶에서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지만요) 나이를 더 먹어 언젠가 상상력으로 시를 쓰는 데 물리적인 임계치가 온다면 또는 다른 세계를 지향하게 된다면 곁에 서서 격려를 해줄 수 있겠지만 이 문제는 피할 수 없는, 피해서도 안 되는 현실이죠.

김언 : 두 분 얘기 듣고 있자니 새로운 천민계층이 출현했다는 느낌이 드네요. 괜히 학력만 높고 사회적으론 전혀 쓸모도 없고 대접도 못 받고 있으니 말이죠. 예전에 어느 시인이 ‘시인은 정신적 귀족’이라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이젠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귀족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진 것 같습니다. 시인이라는 이력 옆에 가장 화려하게 붙을 수 있는 사회적 타이틀이 대학교수일 텐데, 그나마도 지금은 너무 드문 사건(!)입니다. 근근이 다른 직장을 다니기만 해도 대단해 보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시 쓴다는 것 자체가 지식자격증이기 때문에 학교 선생님이라도 되었는데, 지금은 학교 선생님 되기도 얼마나 힘들어요.

신동옥 : 그렇다고 저희 세대가 시를 쓰는 깜냥이나 자존감은 전 세대에 뒤지지 않는다고 봐요. 아마 전업시인이 제일 많은 세대일 겁니다.

김언 : 자존감은 높지만, 그걸 표출할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게 안타깝죠. 전업 시인은 말 그대로 그냥 작품만 생산하는 사람일 뿐이죠. 예인藝人일 뿐이지 지식인 대접을 못 받는다는 거죠. 밥벌이가 안 되니까 당연히 결혼하기도 힘들고,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기가 힘들죠. 예전 같으면 자식들이 시인의 피를 이어가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죠. 혈통 자체가 사멸해가는 열등한 혈통이 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국가 보조금에 의존하거나 기껏해야 자기들끼리 밥벌이를 챙겨주면서 연명해가는……. 새로운 천민 계층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거고요.

이재훈 : 새로운 천민계층의 출현이라는 말이 참 아프네요. 아무튼 젊은 시인들이 지금 고학력이 될 수밖에 없는 것도 구조적인 문제가 있죠. 그나마 학위가 자격증이 되니까요. 제도적으로 전업문인들에게 할 일을 마련해주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타장르에서는 중고등학교의 예술강사 파견 등의 사업도 있던데요.

김근 : 문학큐레이터 제도 같은 것들이 지난 정부에서 논의되었던 것 같은데, 유야무야되었죠.

이재훈 : 그런 사업도 아이디어를 내서 활성화가 되면 젊은 문인들도 좀 더 용기를 갖고 문학에 매진할 텐데요.

7. 2000년대 동인의 의미와 전망

이재훈 : 문지문화원 사이에서는 토요일마다 동인들의 특집을 기획하고, 각 동인들의 이름으로 다양한 공연을 창출해 독자들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인스턴트> 이후 이렇다 할 만한 시동인은 없는 것 같은데요. 굳이 동인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도 이유이겠죠. 지면도 더 늘어났고, 젊은 세대일수록 각자 개성이 뚜렷해서 모이는 것 자체가 싫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동인 활동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갔으면 좋은지, 그리고 덧붙여서 더 젊은 후배 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주세요.

김언 : 새로 등장하는 시인들이 동인을 하든 하지 않든 중요한 것은 각자가 ‘외로운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네요. 혼자 있어도 외롭고 모여 있어도 결국에는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이 반드시 찾아올 테니까요. 단수화된 ‘우리’를 거부하는 대신 복수화된 ‘나’를 선택한 대가로 그들은 필연적으로 외로운 공동체로서의 생활을 감내해야 할 겁니다. 거기서 발견하는 각자의 목소리가 각자의 문학이며, 각자의 문학이 제도권 내부로 불편하게 스며들 때 예기치 못한 균열도 발생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은 당대의 문학 제도도 그렇게 부스러지면서 변해갈 거라 믿습니다.
한마디만 더 추가하자면, ‘동인은 동인으로 남고 시인은 시인으로 남는다’는 사실, 이 사실을 현재의 젊은 시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잘 알고 있고 <천몽> 동인들도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앞으로도 최대한 느슨해지기 위하여 모임을 이어갈 것 같습니다. 느슨함의 끝에 와해가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요. 다만, 서로에게 그리고 각자에게 찾아올 문학적 균열을 충실히 지켜볼 따름입니다.

김근 : 후배들의 각자 입장은 다르겠지만 많은 동인을 만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동인들이 다양한 목소리와 색깔로 우리 시를 풍부하게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문학 제도 안에서 목소리를 내고 우리 문학이 그 풍부한 다양성을 껴안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신동옥 : 형들이 좋은 말씀해 주셨는데, 저는 덧붙일 말이 별로 없네요. 언제나 동시대인들은 동시대인들에게 좋은 심판자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한 세기 이상이 지나야 의미가 어렴풋이 드러나게 마련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김언 형이 말한 ‘복수화된’ 나들이 감내하는 외로운 공동체로서 시詩라는 장, 그 장을 따로 함께 살아내는 한 방편으로 동인 활동은 해결책 중 하나입니다. 자신을 책임지고 서로를 신뢰하는 것은 싸움 중에도 큰 싸움이니까요. 외롭고 처절하게 쓰고, 그 길에서 좋은 도반들 만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재훈 : 말씀 감사합니다. 시인축구단처럼 다양한 모임들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반면 “시인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이형기 선생께서 하신 말의 의미도 함께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좌담에 참여해주신 김언, 김근, 신동옥 시인 감사합니다. 술이나 마시러 가죠.

_ <현대시>, 2009년 3월호 게재.

이재훈 |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김근 | 1998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으로 <뱀소년의 외출>,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김언 | 1998년 <시와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숨쉬는 무덤>, <거인>
신동옥 | 2001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으로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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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지프를 타고 노란 잠수함으로 가라 앉기



김태형 이재훈

 

오직 견뎌 내는 일 견뎌 내면서 서서히

밑으로 더 아득한 심해 속으로 숨차 오르는 일

그래 무겁다는 것은 얼마나 숨 가쁜 일인가

가슴 죄는 일인가 허파를 가지고 있다는 이 사실은

그 얼마나 솟구치는 벅찬 설렘인가 이 고요는

― <노란 잠수함> 중에서

 

청춘에 회복이란 없다. 일시적인 위안은 있어도 다시 그 안락한 안위로의 되돌아감은 없다. 애초에 그런 자리조차 없었다는 듯이 끊임없이 흔들리며 숨가쁘다. 몇 번의 탈주를 경험한 자의식은 이제 어른이 되었다고, 정식으로 현실적인 삶 속으로 편입된 것이라고 스스로를 애써 타이른다.

김태형이 마련한 노란 잠수함은 “아아 이제 이 흔들림은 너무나도 편안하다”라고 말한다. 너무도 어른스러운 말이어서 그가 ‘메탈지프’를 타고 “빗속으로 시속 백구십 이백 어때 숨쉬기조차 힘들지/헉헉 마구 벅차 오르지 그래 달리는 거야”(<메탈지프>)라고 외치며 출렁거리는 젖가슴과 번들거리는 허벅지를 상상했던 그 속도의 탈주와 얼른 겹쳐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대시인이 떠나고 없는 낯선 고장에 여행객들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그 진리와 모순의 교집합(모래 바람이 불었다. 나의 몸은 낮게 석양이 저무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낯선 고장에서의 하루는 흔적도 없이 저물었다. 대시인은 그날 오래도록 집을 떠나 없었고 그에게 대답을 얻고자 기다리며 줄지어 선 여행객들은 계속해서 늘어났지만 누구도 함부로 이곳에 도착한 자는 없었다. - 시집 <로큰놀 헤븐> 자서에서)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그 때문인지 그의 노란 잠수함은 “무겁다는 것은 얼마나 숨 가쁜 일인가”라는 결핍의 고백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허파를 가지고 있다는 보편적 사실을 내내 상기한다. 단순할 것 같은 이 인식은 ‘고요’를 ‘솟구치는 벅찬 설렘’으로 탈색하게 하는 정신적 힘이 되는 것이다.

김태형 시인은 이런 정처없음의 배회 속에서도 지독히 자아의 정체성을 심문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려는 사유의 노력가이다. 어쩌면 시인은 너무 일찍 ‘노란 잠수함’을 알아 버렸는지도 모른다. 피부가 찢어지도록 빠른 속도 속에서 그는 몇 번의 하드코어 외침으로 청춘의 격렬함을 대신했다. 그리고 사유 속에서 자맥질하며 아득한 심해 속으로 숨차오르는 일을 내내 경험하고 있다.

서울 태생의 한때 록음악에 심취했었고 시쓰기와 책읽기로 20대를 보낸, 지금도 여전히 문학에 뜨거운 피가 끓어넘치는 시인. 이제는 아빠가 되고 등단 10년째가 된 젊은 시인의 사유의 흔적이 아래에 빼곡히 적혀 있다.


이재훈:예전부터 시집을 읽고 느낀 것인데요. 김태형 시인에게 어떤 선입관 같은 것들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김태형 시인을 전형적인 모더니스트라고 보는 경우라고 해야 할까요. 시집 <로큰롤 헤븐>에서 록음악과 관련된 시들이 10여 편 정도이고 나머지 시들은 전통적인 시적 방법론을 잘 지킨 서정시 계열의 시들이었는데요. 문제는 선생님의 시를 논할 때 록음악과 관련된 시들만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똑같은 시집이 최근에 나왔다면 오히려 다른 시들이 주목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시집의 제목도 상당한 영향이 된 것 같습니다. 제목이 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얘기하는 것 같거든요.


김태형:처음 시집 원고를 넘겼을 때 시집 제목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시집 출판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다른 원고보다는 뒤로 밀리게 됩니다.

원고를 보내고도 꽤 시간이 지나갔어요. 일단 시인이 한 권의 시집을 정리하고 나면 기존에 자신이 가졌던 언어들을 심화하거나 확장하면서 혹은 버리면서 거듭나려는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그 무렵에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록음악과 관련된 시들을 쓰고 발표했는데 시집의 첫 교정지를 받고 나서 그 시들을 추가하게 되었어요. 시집 제목도 바꾸게 되었고요. 처음 원고를 넘겼을 때는 그런 시를 쓰지도 않았거든요. 그래서 시집 해설에서조차 거론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미 해설이 나온 상태였거든요.

시집이 나오고 난 후에는 대부분의 평자들이 시집 제목에 초점을 맞추어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외의 시들은 제 시세계의 기저를 이루는 층위로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 이후 몇 년까지도 문예지에 신세대 시인들의 특집이 나올 때마다 제가 실험시인으로 분류가 되어서 록음악과 관련된 시들만이 거론이 되었습니다. 1995년에 시집이 나왔으니까 이후 몇 년 동안 제 시에 대한 논의는 조금 편향된 지점에서 이루어졌던 것 같아요. 한동안 ‘실험’, ‘키치’, ‘신세대’, ‘대중문화’ 등의 코드들이 저를 에워싸고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련의 시들은 제 시가 가지고 있는 세계의 극히 일부였습니다. 그 외의 시들에 대한 평가가 거의 전무하다는 점에서 시인으로서는 불행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만큼 그 시들이 갖고 있는 개성이 너무 강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래서 제가 일련의 계열을 잇는 시인으로서 거론되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정확히 말하면 저는 실험의 양식을 취한 것이 아니라 우리 세대의 문학적 고민을 조금 일찍 드러냈던 것뿐입니다.


이재훈:실험시를 쓰는 시인으로 주목을 받았다는 점이 실험시를 계속 쓰게 만드는 이유가 될 법도 한데요. 말하자면 평단이 원하는 것과 시인 자신이 원하는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할까요?


김태형:실험시에 관한 제 생각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우선 읽혀야 그 실험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인데요. 제 시는 형태를 중시하는 방법론적인 태도가 아니라 내용의 문제였다고 생각해요. 전위라는 것은 시대를 미리 앞서가는 것이라기보다 그 당대성을 첨예한 시각으로 뒤집어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만큼 저에게는 현실을 좀 더 직접적으로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언어가 요청되었던 것이지요. 많은 이들이 저를 지나치게 모던한 쪽에 초점을 맞추는 건 90년대의 폭발적인 대중문화와 시 장르를 접목하려는 암묵적인 시각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나름대로는 다양한 시도들을 했어요. 이전에는 록음악에 경도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후에는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던한 시를 발표한 것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데요. 등단작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짙은 서정 계열의 시를 발표했는데 아무래도 모던한 시들이 던져준 인상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저의 다른 일련의 작업들은 상대적으로 낡아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저로서는 좀 아쉬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재훈:첫 시집 이후가 궁금해집니다. 평자들이 주목하는 시와 시인이 주도적으로 쓰는 시의 차이가 그 과도기를 더 격렬하게 했을 것 같은데요. 평자들이나 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첫 시집에서 가졌던 문화적 코드를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또 어떤 문화적 코드를 가지고 나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원하는 부분이 있었다구요. 그런 문단에서 요구하는 새로움과 그 과정 사이에서 오는 시적 행로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김태형:벌써 첫 시집을 내고 7년이 지났고 올해가 데뷔 만 10년째입니다. 시집 이후에 상당히 갈등이 많았습니다. 첫 시집에서 저는 한 권에 담을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섰다고 봅니다. 그 시집에는 상당히 고전적인 설화시들도 있고 연애시, 동물 알레고리를 결합한 시도 있었습니다. 일련의 사막을 배경으로 드리운 시들과 육체와 상처의 이미지, 록을 소재로 다룬 시들, 그리고 숲 연작시 등 다양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시집이었어요. 시집 한 권에 담을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버렸던 거지요. 그때는 제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인지 내 스스로 언어의 한계치를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문학평론가 신철하 선생은 “자기의 생존 조건이 극히 위기의 상황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마지막으로 꽃을 피워올리기 위해 있는 힘을 다 쏟아붓는 한 화초의 환각”(<여보세유!>, <현대시사상>, 1996년 봄호.)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말이 당시의 저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집 이후에 한 단계 거듭나는 시세계를 보여줘야 하는데 나 스스로가 그 부분들에 대해서 만족을 하지 못했고 몇 년간 절필하다시피 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어떤 것일까를 끊임없이 되묻곤 했습니다. 다른 이들이 저에게 바라는 기대 지평에 스스로 함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첨단과 복고의 끊임없는 길항 관계를 체화한 격렬한 시세계를 밀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많은 시간들이 필요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남들이 새로운 것을 내놓으라고 할 때 오히려 고전적인 것들을 풀어놓는 이상한 습관을 보이곤 합니다. 그것이 저의 싸움의 방식입니다. 젊은 시인들에게 새로움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새로움에 대한 요청이 시를 망치고 있다고 봐요. 결국 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한 시인의 그럴 듯한 이미지만 남아서 스스로를 파먹으며 연명하게 만들지요. 그런 경우를 볼 때마다 저는 안쓰러움을 느낍니다. 문화적 코드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것을 ‘문화’라는 틀에서 접근하면 시가 너무 생경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그런 표현을 잘 쓰지는 않습니다. 저에게는 ‘서정적 코드’라고 해야 어울리겠네요. 보통 ‘지적 모험’이라고들 말하는데 저는 거기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서정적 모험’을 중시합니다. ‘서정’이란 결코 고전적이거나 낡은 것이 아니거든요. ‘서정적 코드’를 말하는 위치에 서서 그 ‘문화적 코드’를 바라보게 되면 소위 ‘지적 모험’이 보일 것입니다.


이재훈:일찍이 손진은 선생은 <해체의 새로운 모습과 그 언술적 독법>(<현대시>, 1996년 9월호)이라는 글에서 선생님의 시가 가지고 있는 서정성에 대해 논한 바 있습니다. 내용은 자연에 대한 친연성, 대상과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서정과 밀접하지만 형식 면에서 해체적 코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러한 형식면을 긴 화법을 통해 이미지를 구사하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발표하는 시들에서도 긴 화법을 통한 이미지 구성을 엿볼 수 있고 서정성 또한 더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첫시집과 최근 시들의 방법론 상의 차이 같은 게 있겠지요? 아마 정신적인 면에서 바뀐 부분이 크다고 생각하는데요.


김태형:손진은 선생이 <히말라야시다에게 쓰다>를 분석한 글을 읽고서 제가 시를 너무 못 쓰지는 않았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제가 의도한 것들을 세밀하게 잘 읽어주셨으니까요. 자연과의 친연 관계는, 아마도 저와는 좀 거리가 있을 거예요. 대상과 이미지를 해체해나가는 방법에 관심이 있는데 제가 ‘서정적 모험’이라고 돌려서 말하는 데에는, 실험과 전위라는 말이 담보하고 있는 방법적 태도, 새로움에 대한 빗나간 기존 시각으로부터 제 시쓰기를 가두어두지 않으려는 고통 때문입니다. 이전 시들이 갖고 있었던 호흡은 상당히 긴 편입니다. 보통 짧은 호흡의 시들에서 리듬감이 잘 발휘되곤 합니다. 그러나 제 시는 긴 호흡을 통해서 나오는 거친 리듬을 만들거든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 끊어지지 않는 호흡을 통해 잘 정돈된 리듬이 아니라 보다 격렬한 리듬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래에 발표하는 시들은 그런 긴 호흡을 자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선 시가 상당히 짧아진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지금 연애시를 못 쓰듯이, 제가 다루는 이미지나 호흡마저도 예전과는 어느 정도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이전에는 거친 호흡을 따라갔다면, 이제는 이미지들이 안으로 집중되면서 소용돌이치는 상징의 힘에 제 몸을 맡기는 쪽입니다.


이재훈:선생님의 문학적 질료가 되는 것들 중에 많은 부분들이 문화적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정시 자체도 한 개인의 특수한 경험을 담보로한 시이기보다는 문화적인 체험을 통한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물에 대한 철학적 체험이라고 할까요. 이른 나이에 등단을 하셨는데 젊은 시절의 문화적 체험들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김태형:글쎄요. 다른 나이의 세대와 구별되는 것이 있다면 록에 대한 체험일지도 모르겠네요. 취향이야 세대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세대가 유사한 음악적 교집합을 찾기는 힘들 듯이 분명 다른 부분이 있을 거예요. 음악의 경우에 이 취향의 문제는 어느 정도 특이한 부분인 것 같아요. 90년대에 들어서서 홍대와 신촌을 중심으로 록카페가 부흥기를 맞고 있었어요. 그 전에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이 종로의 작은 공연장 정도였습니다. 신촌과 홍대를 중심으로 좁은 공간에서 춤을 출 수 있는 록카페는 록음악과 맥주와 섹슈얼리티가 공존하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세대는 보다 폭발적인 음악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록음악에 빠져들었지요. 일렉트릭 기타의 한번 긁어내리는 폭음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것은 그 소리를 몸으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의 체질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것 같아요.

덧붙인다면 요즘 어떻게 하면 대중문화를 문학에 접목시킬까 하고 고민하는 게 저는 참 우습게 보여요. 그만큼 문학이 현실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대중문화를 문학에 접목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껴야 하는지 저는 이해가 잘 안되었습니다. 물론 문학은 허구를 통해서 진실에 이르는 장르입니다. 하지만 사실과 현실의 세계를 허구의 폭력으로 가두어두면서부터 문학은 실체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문학에서 말하는 현실의 개념은 실제 우리의 일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현실과 일상이 문학에서는 다른 개념으로 소통되는 느낌이었어요. 대중문화를 소재로 차용하거나 혹은 그 속성 자체를 다루는 작품의 경우라 하더라도 그 본래의 문학과의 싸움이 전제되지 않으면 단순한 소재주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저의 몇몇 시들은 이런 소재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기존 문학이 끊임없이 유포해왔던 ‘반성’의 미학에 대한 거부로서 저의 몇몇 시들은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저의 의도이기도 하고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대중문화를 차용한 작품들이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 정신을 담보로 그 의미를 확장하려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또 다른 ‘거짓’을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뻔히 보이는 ‘반성’과 ‘비판’의 태도야말로 다시 한번 뒤집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저의 세대가 맞이했던 문화적 체험이 있다면 저 허위적인 반성과 비판의 지식으로부터 스스로를 풀어내려는 자세일 것입니다.


이재훈:웹사이트 기획, 제작이 직업이 되었으니까 컴퓨터도 시작(詩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요?


김태형:시를 쓰는 데는 오히려 역효과가 났지요. 먼저 이야기를 하자면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인 매우 소중한 체험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컴퓨터를 시작하고부터는 글을 못 쓰게 되었어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시세계의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시쓰기를 일시적으로 멈추는 방법을 선택했던 이유도 있었지요. 하지만 컴퓨터와 통신, 인터넷 자체가 저에게는 글을 쓸 수 없게 만드는 새로운 환경이었다고 여겨집니다. 문제는 제가 몸담은 그 세계가 저 자신에게 글을 쓰게 만드는 내적 충동을 일으키지 못했던 것이지요. 오직 그 공간에만 신경질적으로 매달리면서 한동안 시를 못 썼어요. 시를 쓰지 않으면서 그간 제가 이루었던 어떤 세계의 일단을 되래 놓치고 있었던 거예요. 어느 정도의 수준을 회복하는 데만도 꽤 많은 날들을 보내야 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 시간이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요즘은 네트워크를 사유화하는 시를 조심스럽게 쓰고 있는데요. 이런 시간들이 내적으로 잠재되어 있었으니까 지금 이렇게 빠져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나 상당히 오랫동안 저로 하여금 글쓰기에 벽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의식과의 싸움은 이제 고작 시작일 뿐입니다.


이재훈:간간히 평론도 발표하시고 계시는데요. 디지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몇 안되는 평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글쓰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디지털하고 친해지기가 힘듭니다. 본능적으로 어떤 선입관인데, 기계적인 것과는 반감 같은 게 있습니다. 한동안 PC통신을 시작하면서부터 전자매체와 문학과의 관계를 논한 글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던 때가 있었는데 그런 글들의 대부분은 뜬구름잡기 식이거나 이왕에 있었던 것들의 반복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인터넷을 안하고는 안될 만큼 우리 삶의 또 다른 한 부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공간이 아직까지 시의 장벽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더 옛날로 돌아가는 듯한 인상까지 받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우리 삶의 한 부분임을 이제 부정할 수 없다면 이런 부분들이 어떻게 시 속으로 들어와 시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지의 문제에 대해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일각에서 하이퍼텍스트 시나 몇몇 시도들을 하고는 있는데요.


김태형:지금 컴퓨터나 인터넷을 다루는 몇몇 시들이 있는데 그런 시들의 대부분이 실험성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결과겠지요. 왜 시와 네트워크 사회가 아직까지 불화를 하고 있는가 생각해봤더니 시가 가지고 있는 서정성이 너무 강해서 그런 것 같아요. 우선 서정에 대한 개념이 바뀌지 않고는 네트워크 사회를 시에서 수용하기는 힘듭니다. 시가 가지고 있는 서정성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전통적이고 복고적인 경향이 두드러지는데요. 그런 서정이 담보했던 수위를 네트워크가 가지고 있는 차갑고 즉물적인 금속성의 서정으로 대체할만한 언어가 우리에게는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시가 실험성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이제는 컴퓨터를 몰라서 못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예전 도스 시절에는 그래도 명령어 몇 개쯤은 알아야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었어요. 게다가 사용자가 직접 네트워크와 접속하기 위해서 모뎀을 사다가 세팅을 해야 하는 등 하드웨어적인 지식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통신회사에 전화만 한 통화하면 바로 인터넷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컴퓨터를 몰라도 되는 사회에 와 있습니다.

이 네트워크 사회가 시로 승화되려면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시절에 시가 소설보다 더 시대를 발빠르게 언어로 담아낼 수 있다는 관점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의 네트워크 사회를 시의 언어로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자기 내부에 잠재되고 체화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미 PC통신이 본격화되면서부터 문예지에 여러 특집들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사실 통신문학은 장르문학에 다름 아니지요. 문단에서의 이러한 관심들은 그다지 성과를 남기지 못하고 유행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온 듯하네요. 그러고도 이제 막 시작 단계에 머물러 있잖아요. 새로움에 대한 광적인 집단 무의식이 현실에 대한 발빠른 적응력을 키워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반면 거짓 문학이 저잣거리의 언어를 들고서 새로움의 포즈를 취하는 것은 결코 막을 수 없을 거예요. 우리는 늘 허상을 붙들고서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이재훈:저는 속도의 차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시를 읽을 때 필요로 하는 시간이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죠. 시를 읽을 때는 침묵이 필요로 합니다. 행간과 행간 사이, 그리고 말과 말 사이의 침묵과 시간이 필요한 데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이러한 시간이 아주 불편한 요소가 되고 있는 거죠. 이제 인터넷에서도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닌가요.


김태형:겉으로 보기에는 실시간을 중시하는 인터넷의 특성상 그렇게 보이기도 하는데요.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의 공간은 결코 지도로 정형화해서 그릴 수 없는 미로의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이 미로의 개념을 속도라는 경제적 사유로 풀어낸다면 그야말로 광대한 전자 시장에 머물 것입니다. 문학은 그 인터넷의 속성을 상징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로와 미로 사이의 굴절, 그 우주적 상징의 기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저 들끓는 말들의 세계를 하나하나 끈질지게 물고늘어지면서 풀어나가면 어떨까 싶어요. 이제 인터넷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서 말과 말의 관계로 이동한다고 봅니다. 이제는 또 다른 언어의 사회로 다시 되돌아온 것 같습니다. 다르다면 말의 무용성이 드러내는 그 상징성이 더 중요할 것 같아요. 미로와 언어와 숨은 자아들의 소통관계, 이러한 관계 속에서 생기는 시간성을 상징화하는 작업이 필요할 듯합니다. 서구의 고대 신화가 말과 말의 풍요로운 상상의 세계를 통해 다이달로스의 미궁을 탄생시켰다면 이제 현대의 테크놀러지 사회가 네트워크라는 스스로 진화하는 미궁의 길을 넓히고 있습니다. 그곳은 거대한 말의 소음들이 우주 먼지처럼 푸른 허공 중에 가득합니다. 그토록 시인들이 찾아 헤매던 우주의 자궁이 아니겠습니까.


이재훈:네트워크의 수많은 말들 중에서 의미성을 담보하고 뱉어내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러한 말들을 어떻게 구별해 내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니면 수많은 말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김태형:저는 인터넷의 쓰레기 언어조차도 오히려 시인들에게는 유용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급화되고 단련되고 정제된 언어들만으로 인터넷을 채운다면 그것은 관리되는 사회입니다. 오히려 퇴화되는 것이지요. 인터넷은 풀어내고 해체되고 열려 있는 공간이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 열림은 스스로의 개념이 정립되는 것조차 거부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소란스럽고 시끄러운 소음의 세계 속에서 침묵을 만들어내는 건 아닐까요. 이런 세계야말로 시인들에게는 매우 잘 어울리는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서정성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저 고전적인 미학의 세계가 인터넷이라는 현대의 신화적 상징으로 재구성되고 다시 해체되는 그런 이미지의 언어라면 어떨까요. 분명한 것은 가능성이라는 희망의 기대 지평만이 무수히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느리지 않게 사유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갖게 되는 것이 당대 시인들의 일이라고 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곧 다른 언어 체계를 갖게 된다는 의미겠지요.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재훈:오랜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밖은 벌써 어둑해졌네요.

_ 현대시 2002년 8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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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 아래로 귀환한 오르페우스의 꿈


남진우  이재훈



그 새벽/나는 사과나무 아래 서 있었다//휘어진 가지마다/붉게 익은 심장이 마악 솟아오른 아침햇살을 받아 번득이고/어둠에서 풀려나온 잎사귀 끝에 맺힌 물방울이 후두둑 내 이마위로 떨어져내렸다/어디에도 과수원지기는 보이지 않았다/반쯤 무너진 황폐한 돌담 옆으로/저 멀리 소실점을 향해 늘어서 있는 사과나무들/거기 두근두근 열린 태양의 과실들//나는 손을 뻗어 붉게 익은 심장 하나를 땄다/내 손바닥 위에서 팔딱이는/붉고/동그란/심장/한 입 가득 그것을 베어물자/어디선가 맹렬히 타종소리가 울려퍼지고/보이지 않던 새들이 깃을 치며 일제히 날아올랐다//그 새벽 내가 서 있는 곳은/우물가였다 나는 마른 우물 바닥 저 밑에서 홀로/붉게 빛나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꿈> 전문

만약 광기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로트레아몽 백작의 꿈이 그러하지 않을까. 백작은 새벽녘 사과나무 아래에 서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붉게 익은 심장 하나를 딴다. 그 팔딱이는 심장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살펴본다. 붉고 동그란 심장. 조용히 그 심장을 한 입 가득 베어문다. 어디선가 타종소리가 울린다. 타종소리는 슬픔의 소리일 것이다. 바람이 불어도, 불지 않아도 살아야겠다던 열망의 심장을 한 입 가득 베어문 그의 얼굴엔 슬픔이 묻어 있다. 슬픔이 무언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그 시간은 광막한 어둠이 아니라 새벽이었다. 젊은 날 18세기 외투를 걸치고 외출한 겨울의 슬픈 꿈이 새벽녘 사과나무 아래로 다시 귀환한 것일까.
시인을 만나러 간 날은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었다. 비 온 뒤에 부는 바람은 몹시도 싸늘해서 내 입술과 정신을 딱딱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나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를 되뇌이면서 빌딩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좀 얼어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남진우 시인은 따뜻한 미소로 나를 맞아주었다.

이재훈 : 우선 등단작인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부터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이 작품은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서 가장 유니크한 시라고 생각하는데요. 특히 ‘우울한 샹송’, ‘헝가리언 랩소디’, ‘십이사도의 주기도문’, ‘러시아의 설해림’ 등의 시어 사용과 ‘방황’으로 요약할 수 있는 낭만적 몽상으로 미루어보아 서구적인 것에서 시의 모티브를 찾고 있습니다. 등단 전후에 탐독했던 작가들이나 사상가들이 궁금합니다.

남진우 : 나의 신춘문예 데뷔작은 전형적인 문청 시절의 습작품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하겠지요. 젊은날의 우울과 방황, 낭만과 좌절, 동경과 환멸 등이 혼숙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뭐랄까, 지상에 발을 딛고 서 있으면서도 자신을 공기의 주민으로 여기고 싶어하는 듯한 감각, 자신의 진정한 삶이 지금 여기가 아닌 어느 먼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이런 것들이 이 시의 저변에 깔려 있다고 봐야겠지요. 이것은 습작시절 내가 프랑스 상징주의나 독일 표현주의 계열의 시인들의 작품을 탐독한데서 기인한 면도 없지 않을 거에요. 지금 와서 보면 이런 세계의 한계가 선명히 드러나 보이고 또 그것에 대해 이러저러한 논리적 설명도 할 수 있겠지만 그 당시엔 이런 세계에 깊숙이 젖어 있었고 그것이 그 나름의 진정성과 진실성을 갖고 있다고 선험적으로 믿고 있었던 듯해요. 그 당시 시단의 주도적 흐름이었던 민중시나 형태파괴적 해체시에 대해선 이렇다할 매력을 느껴보지 못한 편이었어요.

이재훈 : 제가 처음으로 이 질문을 드리게 된 것은 로트레아몽의 시정신과 선생님의 시정신이 맞닿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로트레아몽이라는 인명만 차용해 왔다고 보기에는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거든요. 로트레아몽의 시정신은 극한의 절대성을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말도로르의 노래>는 악이 주제이고 그 악의 성격은 인간성의 부정, 신성모독, 증오, 잔인성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악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일종의 반항정신입니다. 그 반항은 결국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한계와 인간에게 이러한 한계를 덧씌워 준 신에 대한 반항일 겁니다. 그러니까 그 반항의 행위가 불가능한 부분을 끝까지 추구하려고 하는 시정신이라고 한다면 선생님의 시정신도 이러한 맥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로트레아몽의 시정신을 당시에 흠모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으로 질문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의 시적 작업 또한 이런 시정신이 계속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되어지는데요.

남진우 : 그런데 지금와서 보면 20대 초반에 로트레아몽을 비롯해서 외국 시인들의 시를 깊이 이해한 것 같지는 않거든요. 오히려 그 사람들의 시 자체보다는 시를 에워싸고 있는 이미지를 소박하게 변형하는 차원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러니까 내 등단작은 제목이 워낙 거창해서 주목을 받은 것만큼이나 욕도 많이 먹었는데(웃음) 그 시가 정작 로트레아몽과 관련성을 맺고 있는 시라고는 할 수가 없죠.

이재훈 : 등단 후 <시운동> 동인 활동을 활발히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시운동>은 민중시의 대척점에서 새로운 경향의 문학으로 시사에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시운동>이 작품 세계에 준 영향이 있을텐데 그것에 대해 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남진우 : <시운동>의 초기 멤버들은 한마디로 바슐라리언들이었다고 할 수 있죠. 나를 포함해서 대다수 시운동 동인들은 70년대 중후반 김현이나 곽광수 등에 의해 집중적으로 소개된 바슐라르의 시학에 심취한 세대였어요. 상상력의 절대적 힘과 이미지의 마력에 대한 바슐라르의 설명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새로운 시적 수사의 창출에 고민하고 있던 젊은 세대에게 일종의 복음처럼 다가왔어요. 물론 이러한 바슐라르의 시학은 당시의 암울한 정치상황과는 길항하는 면이 있지요.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상상력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바슐라르의 명제는 젊은 시인 지망생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어요. 바슐라르의 사상체계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시야를 획득한 지금도 나는 바슐라르에 매혹을 느낍니다. 단순한 이해와 분석을 넘어서 그만큼 시를 “살게” 해주는 이론가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재훈 : 그러면 아직까지도 바슐라르의 상징론이나 몽상의 시학이 시작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가 있겠네요.

남진우 : 몽상을 현실과 관련없는 공상과 망상하고 혼동하지 않는다면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이 글쓰는 사람에게 주는 이해의 폭은 굉장히 넓은 것 같구요. 바슐라르적인 인간 이해, 단순한 문학론을 넘어서 바슐라르가 보여준 인간에 대한 낙관적이고 호의적인 휴머니즘적인 측면도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소중함을 깨달아가는 것 같아요. 또한 그 시절에 김현, 곽광수, 김화영 선생을 좋아한 것도 그 분들이 바슐라리언들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분들은 텍스트의 쾌락주의자들입니다. 텍스트가 줄 수 있는 쾌락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음미하고자 했죠. 텍스트의 뼈만 발라내는 게 아니고 텍스트의 살아 있는 유기체의 아름다움을 소중하게 재생산해 내는 비평가들이었다고 봅니다. 그러한 것이 나의 비평적인 모범이 되었다고 봐요.

이재훈 : 약력을 보면 전북 전주가 고향입니다. 유년 시절은 어떻게 보냈나요? 시에서는 유년 시절의 원체험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 최근의 시집 <타오르는 책>의 해사문과 시인의 말을 보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드러나거든요.

남진우 : 전주는 내 정신의 원적지입니다. 아름답고 자그마한 도시지요. 사람들도 억세지 않고 이웃간의 인정도 두터웠고…… 물론 이 도시도 지금은 많이 변했지요. 엄청나게 커졌고 고층 아파트와 자동차로 가득찬, 대한민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도시로 변해버렸어요. 하지만 지금도 그 도시는 내 기억 속에선 어린 시절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갔던 빛과 향기와 소리로 물들여져 떠오릅니다. 이른 아침 다가공원의 활터에서 시위를 떠난 화살이 상쾌한 대기를 가르고 날아가 과녘에 꽂힐 때 나던 딱 하는 소리가 지금도 내 귀에 메아리치고 있어요. 불가능한 소망이지만,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전주천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보고 싶어요.

이재훈 : 그것을 자아에 대한 집요한 탐구나 천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자기 주변의 자리나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남진우 : 여유라고 하면 굉장히 긍정적인 쪽이고 오히려 슬픔에 가까운 것 같아요.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자비라고 해야 되나요? 단순한 사랑이기보다는 슬픔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그런 느낌인데요. 그러니까 슬픔을 알게 될 만큼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아요.

이재훈 : <타오르는 책>의 해설을 쓴 김주연 선생의 ‘청년 신비주의자’라는 명명은 선생님의 문학 경향을 잘 표현한 말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신비주의’는 비현실적 신비성을 시의 현실로 붙들어 놓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즉 그 현실은 일반적인 개념의 현실이 아니라는 말로 이해됩니다. 분명 선생님의 시는 발 딛고 살아가는 외부세계의 현실보다 정신 활동에서 배태되어지는 존재론적 고민과 몽상이 더 짙게 나타나 있거든요. 어쩌면 선생님에게는 이러한 사유의 공간이 더 절박한 현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진우 : 이런 말 하기는 조심스러운데 김주연 선생님은 내 석사논문 지도교수고 그래서 나에 대해 잘 알고 계신 한편으로 나에 대해 일정하게 어떤 고정된 판단을 갖고 계신 부분이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분이 이야기하는 신비주의는 매우 포괄적이면서 또 신중심주의라는 것과 항상 대비되어 적용되는 개념인 만큼 그리 단순하게 이야기하기는 힘든 것 같아요. 그분에게 신비주의는 가치중립적 개념이 아니라 신중심주의와 비교해서 분명하게 위계적으로 서열화된 가치론적 개념이거든요. 따라서 신비주의에 대한 그분의 설명은 이 용어에 대한 일반적 용법과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김선생님이 지적한 범주를 떠나 신비주의에 관한 일반적 용법에 입각해서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지금의 나는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로 생각하지 신비주의자로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싶군요. 낭만적 정서와 신화적 상상력이 주조음을 이루고 있는 첫시집과 달리 두 번째 시집부터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 인식과 탐구를 시의 동력으로 삼고자 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그것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 하는 점은 또다른 규명을 필요로 하겠지만 말이죠. 아쉬운 것은 내 시 가운데 정치적 모티프나 일상생활에 바탕을 두고 창작된 작품이 적지 않은데 이들 작품이 대개 논의의 사각지대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죠.

이재훈 : 그럼 정치적 모티브를 가지고 쓴 작품은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남진우 : <타오르는 책>에서 <족장의 가을> 1, 2 같은 시들은 사실 김영삼 정권 말기를 그린 것이거든요. 이것이 비판을 의도했다기보다 정치적 모티브가 되어서 씌여진 것인데요. 꼭 어떤 시가 그렇다라기보다는 그런류의 시들이 상당수 있어요. 어떤 것은 정치적 상상력이고 어떤 것은 신비주의를 바탕에 두고 이렇게 딱 나눈다는 건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설령 신비주의적인 외관을 가지고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결국 출발은 현실이라는거죠. 이걸 사람들이 종종 건너뛰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신비주의가 나쁘다란 것도 아니고요.

이재훈 : ‘죽음’에 대한 천착은 많은 평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죽음에 대한 집착은 죽음이라는 주제가 가져다주는 인식의 한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죽음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풀 수 없는 주제이지 않습니까. 지식사회학이 가져다주는 합리성의 한계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요. 선생님이 주제로 삼은 죽음은 삶과 대극점에 위치해 있는 죽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식의 가장 극한 상황, 혹은 그 극한 상황을 넘어서려는 방법적 자각으로서의 죽음이겠죠. 이것은 분명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처절한 도전을 감행하는 영혼이 시인이니까요. 이것으로 남진우 시인은 이미 너무 멀리 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죽음의 사유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남진우 : 이 자리에서 죽음에 대한 사변적 논의를 펼칠 필요는 없겠지요. 한가지 분명한 점은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찬 두번째 시집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실린 시편들은 그 나름의 실존적 필연성에 기초해 씌어진 작품들이라는 점입니다. 서른 셋을 전후한 시절에 찾아온 시들인데 그 당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극히 황폐하고 아픈 나날을 통과하고 있었거든요. 시를 통한 죽음의 예행연습이랄까. 내면적으로 에우리디케를 찾아 저승을 편력한 오르페우스의 모험을 추체험해보고자 했어요. 극단까지 가보고자 한 의지의 산물이지요. 이 시집에 나오는 어떤 장면들은 지금도 그것을 쓴 당사자인 나를 무섭게 합니다.

이재훈 : 선생님은 <시의 종말, 종말의 시>(1998)라는 평론에서 ‘시의 종말’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은 90년대 이후의 시적 작업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한 것인데요. 이것은 시의 종말 이후에 또 무엇을 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자기 자신의 물음이자 또한 이 땅에 시를 쓰는 이들에게 묻는 물음처럼 들립니다. 그 글을 쓴 지 2년이 지났는데 ‘발전과 성장의 동학’의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남진우 : 내가 시작노트 형식의 글에서 시가 죽었다고 수사적으로 표현해 놓았더니, 어떤 아둔한 작자가, 시가 죽었다고 하는 자가 왜 학교에서 시를 가르치느냐, 당신 기회주의자 아니냐 하는 식의 시비를 걸어와서 아연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반응이 공식선상에서 제기될 정도로, 시의 종말이니 죽음이니 위기니 하는 수사들은 90년대 내내 지속적으로 유행했고 그래서 이젠 수사로서도 진부해진 감이 있죠. 하지만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을 보지 못한 채 진행 중인 공안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지금 이 시대에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시의 죽음이라는 주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이것에 대한 성찰 없이 기계적으로 씌어지는 시가 의미있을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의 죽음이야말로 새로운 시의 탄생을 가능케 하는 최고의 질료일 수 있으니까요.

이재훈 : 많이 받는 질문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선생님은 시인뿐만 아니라 비평가로서도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비평은 상당히 많은 애독자들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저 또한 열렬한 애독자의 한 사람입니다. 비평집 <숲으로 된 성벽>의 책 뒷면 글에서 도정일 선생은 “이 척박한 땅에서 한 젊은 평론가가 어떻게 이처럼 빛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는 그 자체로 미스터리이다.”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선생님의 평론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남진우 : 개인적으로 도정일 선생님의 평가는 과분할 따름이고 그렇게 되도록 더욱 정진할 뿐이라고 말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싶습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한마디 하자면 평론 활동을 시작할 무렵 나는 내 평론이 내 시의 부록이길 바랬는데 최근 보니 거꾸로 내 시를 내 평론의 부록으로 받아들이는 이가 적지 않다는 거죠. 그래서 요즘엔 그럴수록 더 열심히 시를 써야 한다는 내면의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이재훈 : 현재 명지대 문창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잖아요. 글 쓰려는 문학 지망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 몇 가지만 말해 주세요.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남진우 :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찢어버리라는 것, 이것 이상 가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이재훈 : 마지막으로 최근에 읽었거나 읽고 있는 책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남진우 : 식민지 시대 시인들의 시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특히 정지용, 오장환, 백석 같은 시인들의 시를 찬찬히 다시 읽으며 많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이들의 시에 대한 좋은 에세이를 쓰고 싶어요. 읽고 싶은 분야는 많아요. 폴 드 만을 비롯한 예일학파의 저작들, 문화인류학 분야의 고전들, 프로이트의 사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책들. 그러나 역시 최고의 선물은 아름다운 이미지로 가득찬 시집이지요. 김언희 박형준 윤의섭 전동균 이홍섭 이윤학 허혜정 고창환 조용미 김선우 박성우 등등의 시들.

이재훈 : 그럼 이것으로 현대시 대담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귀한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대담이 끝난 후 문학동네 사무실 근처의 한정식 집에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무래도 그때 내가 너무 조잘거린 것 같다. 그리고 헤어지면서 이 무명의 시 쓰는 젊은이에게 보내어주는 미소는 내 마음을 한없이 따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시인의 뒷모습. 더 정확히 말해 시인의 어깨를 보았다. 앞에서 보여지는 남성성이 발현된 어깨가 아니라 뒤에서 보이는 고독한 시인의 어깨… 유유히 사라져가는 시인의 뒷모습과 밤거리의 배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_ 출처 : <현대시> 2001년 1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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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읽는 현대시 산책 ③
― 유치환 편


의지와 생명의 시인 유치환


이재훈(시인)



2008년은 청마 유치환(1908~1967)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나라 시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청마 유치환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청마의 고향인 경남 통영을 중심으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유치환의 대표작인 시 「깃발」의 표제를 딴 ‘깃발 축제’가 개최되었고, 거제에서는 청마기념관이 들어섰다. 청마 유치환의 생가도 복원되었으며, 유치환이 지인들에게 수천통의 편지를 부쳤던 우체국 옛터에 흉상도 세워졌다.
유치환은 한국 시단에 굵직한 소나무 같은 존재이다. 일제 강점기, 대부분의 시인들이 여리고 섬세한 감수성을 아름다운 시어를 통해 드러낸 시편들을 발표하였다. 이른바 초창기 현대시는 여성적 어조를 바탕으로 한 감수성의 전통이 큰 맥을 이루었다. 이러한 시사적 측면에서 유치환은 단연 이채로운 존재였다. 선 굵은 남성적 어조에 거친 이미지와 관념적 시어를 가감없이 사용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치환이 남성적 어조를 가졌다고 해서 그의 시가 마냥 거친 것만은 아니다. 유치환은 사랑편지를 무려 오천여 통이나 남긴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유치환의 작고 후, 시조시인 이영도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오천여 통의 편지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유치환은 시조시인 이영도에 대한 연모의 정을 편지를 통해 전달했고, “사랑 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행복」과 같은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연애시를 남기기도 했다.
유치환의 시에서 무엇보다 가장 유치환다운 시는 「생명의 서(書)」가 아닐까 한다. 「생명의 서」는 유치환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깃발」과 함께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아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생명의 서(書)」 전문

위의 시가 쓰여진 공간적 배경은 북만주이다. 1940년 되던 해에 유치환은 가족들을 이끌고 북만주로 이주한다. 유치환이 국내에서 일제의 핍박을 피해 달아난 곳이 바로 북만주이다.
유치환에게 있어 북만주에서의 생활은 중요한 체험이다. 유치환은 만주에서 농장의 관리인으로 일했다. 그 농장은 유치환의 형인 극작가 유치진의 처가에서 개간한 벌판이었다. 농장 관리인으로 비교적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생활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다른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황막한 벌판에서 조국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죄책감과 끝없이 이어지는 고독과 절망적인 인식 때문이었다.
도피의 공간에서 그 모든 고통이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피한 자신의 모습에서 더 비참한 감정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유치환은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 극복의 공간이 바로 “아라비아의 사막”이다. 시에서 그리고 있는 “아라비아의 사막”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토피아의 공간은 아니다. 그곳은 수행의 공간이며, 새로운 사유를 위해 다시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북만주의 고통을 ‘의지’의 힘으로 다시 이겨내고자 했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발견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이성이 무너졌을 때 감정 또한 함께 무너진다. 그렇기에 매순간이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을 극복하기 위해 만주벌판에서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을 시인은 꿈꾸었던 것이다.
유치환은 삶의 의지를 통해 생명을 희구한 시인이다. 시인은 단독자로서 운명처럼 자신과 마주하고 싶다는 다짐을 한다. 그것은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새로운 생명의 꿈틀거림을 의미한다. 시인은 늘 본질에 대한 탐구의 태도를 보여준다.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워 새로운 ‘나’와 대면하고 싶은 게 시인의 생각이다. 그것을 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다.
나라 안팎의 모든 사회, 경제, 문화의 기반들이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는 요즘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마음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유치환의 「생명의 서」를 읽는다. 이 시를 읽으면 어느새 마음에 강한 삶의 의지가 들어참을 느낄 수 있다.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는 시만큼 더 값진 문학이 또 어디 있겠는가. 다시 한 번 시를 읽으며 마음을 다잡아 보는 겨울밤이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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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머무는 풍경

눈에 대한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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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눈을 밟는다

눈이 시린 풍경을

꾹꾹 밟는다

그러나 눈은

온전히 밟혀지지 않고

자꾸만 발등 위로

심지어 무릎까지

올라온다

제 존재를

떠올리려 한다

덮어야 할

밟혀야 할 운명을

내 발걸음에 의탁한 채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눈이 떠올라

내 발목을 쥐고

너도 나처럼

떠올라라

떠올라라

머리 위까지

눈이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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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고 편하게 드러눕는 가을 들판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해남 땅끝 마을에서 배를 타고 도착하는 노화도는 의외로 큰 섬이지요. 섬의 들판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남다른 정경이 오히려 가슴에 다가옵니다. 노화도를 거쳐 새로 놓인 대교를 건너 보길도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세연정을 만나게 되지요. 인공과 자연의 절묘한 조화가 산뜻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곳, 고산의 이상향이 구현된 공간이지요.

한때 갈급함을 가지고 이재훈 시인이 찾아갔던 곳이기도 하구요.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윤선도가 가꾸었던 보길도 원림. 윤선도 사후에 불만이 극에 달했던 노비들이 보길도 정자를 모두 불태우고 노화도로 도망갔다는 설도 있지요. 그래서 노화도(蘆花島)는 원래 노비들의 섬 또는 노화도(奴火島)로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통과의례처럼 노화도를 반드시 거쳐야 들어갈 수 있는 보길도는 눈앞의 현실입니다. 시인은 보길도에서 며칠을 보내고, 다시 숨 막히는 도시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담담히 한 편의 글로 적은 적이 있지요.

다소 엉뚱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했습니다. 시인에게 다가가는 길을 찾기 위해 한참 에돈 셈이지요.

시인은 결락의 공간을 걷습니다. 눈에 덮인 길, 겨울의 중심을 향해 나아갑니다. 꾹꾹 눈을 밟으며 걷는 길 위에서 시인은 상념에 젖습니다. 아마 시인은 천천히 길을 정독하며 걸었을 겁니다. 바쁘게,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며 쫓기듯 달아나듯 걷는 그런 걸음이 아니지요. 한 걸음 한 걸음 시간의 풍경 위에 마음의 그림자를 길게 늘이며 걷는 걸음이겠지요. 천천히 느리게 걸으면서 삶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는 시인의 지난한 몸짓을 얼핏 엿볼 수 있지요. 느림은 도태나 일탈이 아니라 내적 통찰이요 다른 사물에 조용히 귀 기울이는 일이지요. 숨 막혀 하는 영혼에게 숨통을 터주는 일이기도 하구요.

시인은 걸을 때마다 튀어 오르는 눈송이들을 보고 ‘제 존재를 / 떠올리려 한다’고 말합니다. 한낱 눈뭉치에 지나지 않지만 시인의 눈에 눈뭉치는 예사 사물이 아닙니다. 어엿한 생물이지요. 한없이 하늘을 떠돌다 겨우 지상에 내려앉은 눈송이들이 자꾸 치받고 올라옵니다. 시인은 그것을 ‘조용한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눈송이들이 살아나 말을 합니다. 그 말을 시인은 귀담아 듣습니다.

시인의 영성과 예민한 촉수는 세상 만물의 속삭임과 미세한 몸짓 하나까지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습니다. 어쩌면 시인은 주술사요 어릿광대인지도 모릅니다. 이집트의 왕이나 로마의 황제들은 어릿광대에게 자문을 구하는 일이 있었지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의 황실에는 많은 어릿광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제나 주술사만큼 존중을 받았습니다. 어릿광대는 왕이 습관적 사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거리낌 없는 풍자와 농담을 던졌고, 이들의 조언은 신선한 사고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지요.

오늘날 시인도 독자들의 관습적 사고에 정서적 충격을 가합니다. 이재훈 시인 역시 평범한 일상의 풍경을 뒤집어 새로운 삶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걸을 때마다 튀어 오르는 눈송이들의 ‘조용한 혁명’을 보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눈송이들이 입을 열어 말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너도 나처럼 / 떠올라라 / 떠올라라’

눈송이들은 내면과 사물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없는 현실의 아수라를 차고 올라 떠오르라고 합니다. 현실의 바닥에서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비상하는 삶의 방식이지요. 시인은 첫 시집의 후기에서 “내 말이 간신히 시가 되는 이유는 눈물을 애써 감추기 위해 부족의 동화(童話)를 꿈꾸기 때문이다.”고 말합니다. 시인이 낯선 이방인으로 떠돌며 꿈꾸는 저곳은 어디일까요? 이 가을에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_ 출처 : http://www.digitalpost.or.kr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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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있는 아침

 

‘남자의 일생’ 부분
- 이재훈 (1972~ )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잦아들고
온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양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음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나는 음지를 좋아하는 편이다. 저녁에도 불끄고 있기를 즐겨 한다. 안경도 색이 들어간 안경을 주로 쓴다. 햇빛 알레르기가 없다고 할 수 없다. 햇빛을 싫어하는 마음도 햇빛 알레르기의 일종이다. 이재훈은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 온 생을 바치는 것을 “남자의 일생”이라고 했다. 혹시 여자는 현실주의, 남자는 이상주의(혹은 낭만주의)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낭만주의는 ‘현실로부터의 도피’라는 욕을 그동안 많이 들었다. ‘현실에 대한 적극적 외면’이라고 말하면 점잖은 표현이 된다. 현실주의도 나무랄 생각은 없다. 현실주의가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고 잠을 재웠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법. 나는 요즘 햇빛이 들라치면 차양을 거두어 올린다. 햇볕을 쬐고 싶어서.
<박찬일 시인>
2008. 11. 6일자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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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심연


정현종


1. 귀를 그리워하는 소리

나는 소리의 껍질을 벗긴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 않는다
사랑이 깊은 귀를 아는 소리는
도둑처럼 그 귀를 떼어가서
소리 자신의 귀를 급히 만든다
소리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붙인다
내 떨리는 전신을 그의 귀로 삼는 소리들
모든 소리의 핵 속에 들어 있는 죽음
모든 소리는 소리 자신의 귀를 그리워한다.

2. 명랑한 남자

나는 아 어쩌면 이렇게 명랑한가?
낮이 밤 속으로 태양색의 꼬리를 감추기까지
해님이 걸어가는 방식을 아시나요?
어찔 명랑, 뒤뚱 명랑
정오의 목을 조르기 위해
밥의 바다, 찌개의 바다로 나아가고
그러나 일용할 양식 이외의 양식은 버리며
그러나 일용할 즐거움과 야합하며
그러나 자기의 날개에 더욱 못을 치기 위해
발의 해머, 웃음의 해머, 눈물의 해머를
동원한다. 어찔 명랑……

대낮이 만드는 청명한 공기의 계단을
물론 오르내릴 수 있지만
아시나요 모든 소리가 다 외로워하고 있어요
가령 슬픔에 찬 저 바람의 푸른 눈이
내가 끌어안고 쩔쩔매는 바람 소리를 보네요

3. 소리의 구멍

남자의 몸이 사라지고 문득
몸 형상의 구멍이 빈다
여자의 몸이 사라지고
여자의 몸 형상으로 공기가 잘린다
그들의 소리가 지나간 만큼의
구멍이 공기 속에 뚫려 있다
나의 바깥으로 열린 감각들은 모두 닫혀 있다

공기를 뚫고 지나간 소리의 구멍의 유혹
소리를 통해서 형상이 남는 방식
소리가 남는 쓸쓸한 방식
소리를 잊을 수 없기 위하여
내려가는 계단은 어두우면 좋다
어둠 속에서 들린 소리의 구멍은
어둠이 묻지 않은 공기의 구멍보다
더 뚜렷하고 더 아프기 때문에.
(소리의 주인들인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사랑과 울음으로 뭉쳐 어디로 갔을까)

4. 침묵

나는 피에 젖어 쓰러져 있는
한 무더기의 고요를 본다
고요는 한때 빛이었고 고요 자신이었고
침묵의 사랑하는 전우였다
나는 피에 젖어 쓰러져 있는
한 떼의 침묵을 본다
말은 침묵의 꼬리를
침묵은 말의 꼬리를 물고 서로
기회를 노리고 있다
죽도록 원수처럼 노리고 있다

---------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잠자던
감각이 서서히 찬바람을 맞고 일어선다.
귀를 그리워하는 소리들이 아우성대다가
침묵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감각의 향로(向路)들이
빈 속의 찬소주처럼 몸속으로 싸하게 들어오는 가을이다.(記. 이재훈 시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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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스터(trickster)

시詩 2008. 10. 17. 11:25


트릭스터(trickster)


이재훈


1.

배에 올랐지. 차가운 나라, 먼 끝을 향하는 배. 내릴 수가 없었지. 어리석고 오만한 사람들이 가득한 배. 자신은 소명을 가진 자라고 착각하며. 선구자라고 착각하며. 탐욕스럽게, 모자와 단추에 보석을 주렁주렁 매단 사람들. 침묵이 두려운 사람들. 가장 조용하고 작은 사내를 미워했지. 그의 다리를 붙잡고 머리부터 바다 속으로 처넣었지.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교수들이 그 광경을 기록했지. 선구자가 치르는 희생의 영광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내의 눈빛을 기억하지. 꿈에서 나타나는 그 눈빛을 애써 외면하지. 철학자들은 꿈과 망상의 상관관계에 대해 기록했지. 아, 모두 먼 기억의 일들이었지.

2.

어떤 시인은 자신이 천재라 생각하지. 나는 바보여서 그걸 믿고야 말았지. 어떤 시인은 자신이 순교자라 생각하지. 나는 바보여서 그걸 믿고야 말았지. 나는 부정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인간의 지위와 권력을. 넓은 정원에서 잔치를 벌이는 주인들을 나는 존경했어야 했는데. 그들의 규칙을 탐닉해야 했는데. 화려한 네온사인 속으로 들어가 영혼을 의지했지. 땅바닥에서 가만가만 숨죽인 노란 피부의 족속들을 경멸했지. 하늘에서 보면, 사람들의 정수리는 텅 비어있지. 아, 자존도 없이 교활한 날들이었지.

3.

배가 고파 사치를 하고, 호색한이 되었지. 배에서 내려 밟은 이 땅엔 불이 있어. 토끼가 인디언에게 가져다준 불이 있어. 불로 심판하고, 불로 배를 불렸지. 사랑하는 자에게 불화살을 쏘는 인간들을 동정했어. 단지, 죽지 않기 위해 좀 더 다른 얼굴로 성형을 했지. 나는 아첨꾼이자 장난꾼일 뿐. 대지 같은 사람을 찾아 헤맸지. 이 땅엔 용(龍)도 없고, 심지어 악령도 없는 리얼리티의 숲. 산토끼가 되어 빌딩 사이를 배회하지. 말과 말 사이를 가로채, 새로운 말을 만들어 소문을 내지.


_ 거대한 뿌리여, 괴기한 청년들이여 : 김수영 40주기 기념 시집(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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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의 옹호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1. ‘이후(以後)’의 시학

최근 우리 시에 한 시대를 집약하고 향도하는 시정신의 고갱이가 보이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는 일부 평자들의 견해는, 이성 중심주의에 견고한 토대를 둔 근대주의적 시선일 경우가 많다. 생각해보면 그 ‘고갱이’라는 것은 다분히 중앙 집권적인 ‘중심(이성, 이념, 진정성)’에 대한 향수의 표상일 가능성이 높다. 아닌 게 아니라 ‘계몽-이성’이라는 근대적 판관(判官)의 역할이 현저하게 약화되면서 근대 이성이 몰고 온 여러 징후들에 대한 긍정과 불신 그리고 그것의 재구축(결코 ‘폐기’가 아니다)의 열망이 부단히 교차하고 있는 지금, 그 ‘고갱이’는 그야말로 다양하기 그지없는 원심(遠心)을 형성하면서 확산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시대의 시편들은 미학적 차원에서는 유례없는 다양성을 이루고 있고, 아직까지 대체적 구심(求心)을 암시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시사에서 가장 확연한 이행기적 속성을 견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시대의 시편들은 정보화, 탈(脫)냉전, 생태론 같은 담론들이 숨가쁘게 대두하고 일정하게 소강 상태에 빠져버린 포스트-포스트의 시기 곧 ‘이후(以後)’의 시학을 보여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그동안 출몰했던 근대에 대한 대안 담론들이 과거와의 차별화 전략에는 성공했지만, 새로운 미래적 좌표 설정에는 미흡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속성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국가 사회주의의 현실적 몰락 이후 나타났던 탈근대 담론들은 우리 시로 하여금 엄숙주의와 계몽성을 반성적으로 사유하게끔 하였고, 기존의 언어 권력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게끔 하는 데 일정하게 기여했지만, 동시에 그것들은 우리 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적 자질이었던 ‘전망’과 ‘비극성’을 천천히 지워나갔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비현실적 환상으로 치부되었고, 엄숙한 전망보다는 가벼운 현재형이 선호되었고, 시를 통한 인문적 통찰은 낡은 유적(遺跡)을 더듬는 것으로 등치되었다. 또한 열정의 막다른 곳에서 펼쳐지게 마련인 ‘비극성’ 대신 일상적 ‘권태’가 그 틈을 메웠고, ‘절망’이라는 치열한 실존형 대신 낱낱의 사물을 비유기적으로 바라보는 ‘환멸’이 주된 정조로 자리잡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심화되면서 펼쳐지는 이 같은 미학적 근시성(近視性)의 양상들은, 이제 우리에게 만만찮은 메타적 과제를 부여하고 있다. 가령 그것은 시 장르의 창조적인 대안적 가능성에 대한 사유를 요청하고 있는데, 후기 자본주의의 견고한 시스템 속에서 인간 존재 형식이 개체적 감각과 대중문화적 감염에 의해 규정되는 힘이 점증(漸增)하고 있는 시기인 만큼, 우리가 맞고 있는 메타적 요청의 파고(波高)는 결코 간단치 않다.

2. 우리 시대 ‘서정’의 원리

앞에서도 암시하였듯이, 우리 시대의 주류 미학은 사회 변혁에 대한 회의와 자연으로의 침잠 그리고 감각성과 내면 심리로의 경사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적 시스템으로 세계가 편제되어가고 있는 추세를 감각적 차원으로 반영한 결과이자 일정하게는 철학적 차원의 대응까지를 아우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경향이 공동체 단위의 이념적 지표(指標)까지는 될 수 없는 까닭은, 그것들이 개체적 감각에는 충실하면서도 인간 존재 형식의 보편성까지 환기하는 데는 그 철학적 기반이 허약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른바 탈(脫)중심의 외피를 두르고 있는 우리 시대 시편들의 문제점은, 개체적이고 고립된 단자(單子)들에 의해 목소리가 생성, 소멸한다는 점과 개개 시편들이 상보적으로 소통하면서 한 시대를 표상하는 보편적 공감으로 승화되기에는 현저하게 미학적 에너지가 모자란다는 점에 있다. 그만큼 최근 시편들의 다원화 현상은, 시인들이 타자와 소통하면서 사회적 울림으로 증폭되지 못하고 오히려 소통을 거부하는 유폐감과 난해성의 회로에 스스로를 가둠으로써 미학의 고립을 자초하고 있기 때문에, 다원화라기보다는 오히려 시에서의 규준 상실에 가깝다. 우리 시대의 시를 가장 어둡게 만드는 것은 이 같은 타자와의 소통 상실 그리고 자기 이해와 표상 방법의 고립성에 있다. 이러한 양상은 최근 양적으로 폭증하면서도 규준은 한없이 이완되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징후들과 그대로 대응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시편들이 기획하고 실천하고 있는 ‘서정(성)’의 원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 시대의 시편들이 제기하는 서정의 원리 가운데 하나는 서정의 원리를 실현하는 주체와 관련된 것인데, 우리가 서정을 주체와 대상 사이의 상호연관성 아래서 규정하는 데는 근대적 주체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서정이란 근대적 주체의 대상 인식 원리인 자기 반영성에 의해 발원되고 실현되는 어떤 원리이고, 근대적 주체의 자기 표현을 강조한 서구 근대 낭만주의에서 완성된 일종의 역사적 개념이다. 이는 주체와 세계가 분리되어 있는 경험으로부터 그것의 통합적 국면을 꾀하고자 하는 성격이 서정에 본질적으로 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그것을 인식․수용하는 주체를 이어주는 새로운 결속과 감각의 필요성이 대두한다. 이 감각은 바흐친(M. Bakhtin)이 대화주의를 명명하면서 타자의 의식을 객체가 아니라 동등한 자격과 권리를 가진 주체로 바라본 것과 상통하는 것인데, 세계와 주체가 일정한 연속성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뜻한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상실된 근원적 감각이나 정서를 회복하는 통로를 주체의 신념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사물(세계)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시선과 방법에서 찾는 것이다. 따라서 현저하게 주체의 소거가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단일한 서정적 주체로의 전일적 귀속성은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에, 우리 시대의 시에서 주체의 욕망과 언어가 불화 관계로 공존하는 것 역시 서정의 원리가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시는 주체의 다양하고 풍부한 육성으로 그 불화 양상을 구체적으로 노래함으로써 예술의 본래적인 힘인 불온성을 극대화하고 나아가 오도(誤導)된 근대에 창조적으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인식론적 계기가 우리 시대의 서정의 또 다른 원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동일성 논리가 균열을 보이며 생겨나고 있는 시의 반(反)서정 혹은 비동일성의 경향을 어떻게 서정의 범주 안에 포섭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최근 ‘미래파’라는 담론적 명명(命名) 속에서 해석되고 평가되는 일군의 시인들이 암시하듯, 강렬한 반(反)서정과 비동일성의 경향을 서정과 어떻게 연루시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들은 기억(과거)이나 인식(현재)에 중점을 두지 않고,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언어적 세계를 보여준다. 가령 황병승이 보여주는 비주류 하위 문화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감각의 환유적 나열 그리고 혼성적 문화 의식은 국민국가의 상상력 안에 갇혀 있던 지난 시대와 날카로운 단층(斷層)을 형성한다. 또한 김민정이 보여주는 그로테스크한 하위 문화적 상상력은 이미지의 연쇄적 나열과 충돌을 통해 메타 시학의 한 가능성에 이르고 있다. 이 밖에도 다수의 젊은 시인들에 의해 반미학의 가능성으로서의 시적 움직임은 매우 광범위한 하나의 시적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의 반(反)은유의 환유 원리에 의한 작법은 그동안 서정의 중심 원리로 기능했던 은유 중심의 작법에 대해 방법적 반성을 제기하면서, 자유로운 연상 형식을 통한 말의 난장(亂場)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우리는 동일성 논리에 균열을 내면서 구축되고 있는 이 같은 반(反)서정 혹은 비동일성의 경향이 우리 시대의 서정이 가장 원심적으로 확장된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는 화해와 조화의 세계관보다는 길항과 갈등의 세계관이 녹아 있고, 대중문화적 감염이 일상화됨에 따라 시의 표면에 물질로 구체화되는 속도감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그들의 언어는 환유적 작법을 통해 전통적 서정 원리와 결별하면서, 새로운 서정의 원리를 메타적으로 확장해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같은 두 가지 경향, 곧 주체 소거의 경향과 비동일성과 환유의 경향이 우리 시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곧 집체적 성격의 ‘우리’에 대한 관심이 개체적 성격의 ‘나’로 옮겨가면서 현실에 대한 성찰과 제언이 급감하게 된 상황, ‘나’로의 시선 이동이 시인들의 개별 체험을 절대화하는 미적 편향을 불러온 상황, 규준 부재와 기율 이완을 다원성으로 착시하는 상황을 깊이 우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 자의식, 환유, 환상, 전복, 엽기, 난해성, 실험 의식 등으로 표상되는 젊은 시인들이 시세계에 의해 우리 시의 미래가 부분적으로 개척되리라고 믿지만, 이와 달리 ‘기억’과 ‘현실’의 접면(interface)을 형성하면서 그리고 특정 담론으로의 귀속이나 환원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서정의 원리를 구축해가고 있는 젊은 시인들을 통해 우리 시의 ‘또 다른 미래’를 시사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3. 기억과 사물의 접점에서 발견하는 인간 존재 형식

잘 알다시피, 시의 본래적 권역은 주체의 절실하고도 남다른 자기 확인의 욕망에 있다. 그것이 나르시시즘 차원의 자기 몰입이든, 고통스런 반성을 동반하는 자기 성찰이든, 시의 초점이 시적 주체의 자기 검색과 확인에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주체와 대상 사이의 날카로운 균열이나 갈등 양상을 포착하고 드러내는 이른바 비동일성의 미학까지 포괄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서정의 원리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서정의 근원적 자기 회귀성은 그 비중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 같은 자기 회귀성은 사물에 대한 의미 부여와 함께 그것을 자신의 삶의 국면과 등가적 원리로 결합하는 은유적 속성을 곧잘 구현한다. 물론 그것은 사물과 주체의 긴밀한 조응(照應)을 주체의 시선으로 수렴, 해석하는 측면에서는 가장 가까운 ‘시적인 것’의 원리이지만, 사물을 사물 자체의 본성으로 발견하고 묘사하고 재현하는 측면에서 보면 가장 취약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시의 자기 회귀성이라는 것이 용인된다면, 주체의 시선으로 사물의 고유성을 발견하고 그 응시의 힘으로 자신의 삶의 태도와 자세를 성찰하는 은유적 원리는 포기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응시의 힘으로 다시 사물에게 활력과 생명을 불어넣는 시적 상상의 과정 또한 위축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젊은 시인들이 보여주는 이 같은 회귀와 성찰의 양면성은 우리에게 서정의 원리의 진면목과 이를 통해 확산해가야 할 서정의 몫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데, 여기서는 길상호, 이재훈, 신용목, 김병호 등 1970년대생 시인들의 시세계를 통해 이러한 점을 시사적으로 읽으려 한다.

먼저 길상호는 소멸해가는 시간 속에서 원초적인 인간 존재 형식을 바라보는 시인이다. 또한 그는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바라본다. 결국 그의 시선은 실재와 영혼이 궁극적으로 결속되는 풍경을 향한다.

그 집은 소리를 키우는 집,
늑골의 대문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
마루에 할머니 혼자 나물을 다듬거나
바람과 함께 잠을 자는 집,
그 가벼운 몸이 움직일 때마다 삐이걱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오는 집,
단단하게 박혀 있던 못 몇 개 빠져나가고
헐거워진 허공이 부딪히며 만드는 소리,
사람의 세월도 오래 되면 소리가 된다는 듯
할머니 무릎에서 어깨 가슴팍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바람의 소리들,
아팠던 곳이 삭고 삭아서 만들어낸
관악기의 구멍을 통해 이어지는 가락들,
나의 짧은 생으로는 꾸밀 수 없는
그 소리 듣고 있으면 내가 키워온 옹이
하나씩 빠져나가고 바람 드나들며
나 또한 소리 될 것 같은데
더 기다려야 한다고 틈이 생긴 마음에
촘촘히 못질하고 있는 집

― 길상호 「소리의 집」 전문(<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문학세계사, 2004)

“소리를 키우는 집” 마당에서 시인은 “마루에 할머니 혼자 나물을 다듬거나/바람과 함께 잠을 자는” 풍경을 기억해낸다. 거기에는 기억 속에서 환기되는 몇 개의 소리가 웅크리고 있다. 할머니의 가벼운 몸이 움직일 때마다 나던 가느다란 소리, 단단히 박혀 있던 못이 빠져나가고 난 후 들리던 헐거워진 허공의 소리, 할머니 무릎에서 어깨 가슴팍에서 들려오던 바람의 소리, 이런 것들이 시인의 기억 속에서 낱낱이 혹은 한꺼번에 호명된다. 그런데 시인은 “나의 짧은 생으로는 꾸밀 수 없는/그 소리 듣고 있으면 내가 키워온 옹이/하나씩 빠져나가고 바람 드나들며/나 또한 소리 될 것” 같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길지 않은 생으로는 가 닿을 수 없는 소리의 깊이를 상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길상호는 신생과 소멸의 변증법을 통해 우리의 일상에 편재(遍在)해 있는 불모성과 소통 단절을 치유하고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꿈꾸고 있다. 그것은 신생과 소멸을 존재 양식의 양면성으로 바라보면서, 그 복합성의 시선으로 삶을 관조하고 추동하는 에너지에서 생성되는 어떤 것이다. 자신의 몸 속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소리들을 묘사함으로써, 생명 현상의 감각과 그 묘사를 제일의적 기율로 삼으면서도 그는 우리의 몸 안팎에서 잊혀진 실재와 영혼의 복합적 풍경을 두루 복원하고 있다.

다음으로 이재훈의 시는 도시에서의 생활과 자신의 내면을 유추적으로 결합하면서 한 시대의 쓸쓸한 풍경을 기록하는 유목적 발화(發話)에 의해 구축되고 있다. 하지만 상상적인 유목적 감각에 의해 시편 곳곳에 배치된 사실적․환상적 이미지들은 시인이 궁극적으로 욕망하는 묵시(黙示)적 이미지들로 전이되면서, 그의 시편들을 평범한 환상 시편이나 교조적 종교 시편으로부터 구해내고 있다.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의 머리가 내 발바닥을 찢는 수런거림을 듣는다. 수행자처럼 온 땅을 모두 밟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땅은 너무 넓어. 내 온기가 기댈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 그 사이의 위태로운 희망, 그리고 낯선 꿈들뿐.

내가 밟는 유리의 온기를 기억하고 싶었다. 그 뜨거운 감촉. 두꺼운 군살을 비집고 환한 몸으로 날 찾아오는 신비. 유리를 밟으며 축제를 연다. 붉은 포도주가 흐르는 식탁. 얼굴에 분칠을 하고, 혀에 피어싱을 하고, 히피처럼 연기를 피워올린다. 치렁치렁한 푸른 옷을 입고, 방 안을 빙빙 돈다. 사각사각 유리가 몸 안에서 춤을 춘다. 두려움은 없다. 정작 두려움은 예언자의 눈, 인디언의 귀, 언 고기를 사각거리는 알래스카의 몽골리안을 그리워하는 것. 生의 분노도 잊은 채, 태평하게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하는 내 입술.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가 내 몸을 돌고 돌아 검붉은 내장을 모두 만난다면, 늦은 밤 가냘프게 흔들리는 마음까지 싹둑 잘라버린다면, 나는 백치가 되리. 내 몸이 된 유리. 너의 촉감밖에, 소리밖에 모르므로 나는 불구다. 저기 저쪽, 나처럼 맨발로 유리 밟으러 가는 젊음들. 땡볕 아래 꽃들이 붉은 햇살을 게워내고 있다. 절정이다,

― 이재훈 「순례」 전문(<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2005)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듣고 있는 시인은 그 유리가 발바닥을 찢는 소리를 동시에 듣는다. 그의 몸은 마치 고행을 거듭하는 “수행자”처럼 모든 땅을 다 밟아보고 싶어한다. 하지만 땅이 너무 넓어 그가 겨우 기댈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위태로운 희망 곧 도시의 낯선 꿈들뿐이다. 여기서 ‘유리’는 근원적 고통과 날카로운 깨달음을 동시에 포괄하는 순례의 길을 상징한다. 시인이 밟고 가는 유리에는 온기가 간직되어 있는데, 시인은 그 뜨거운 감촉과 군살을 비집고 들어오는 신비로움을 기억하면서 자신만의 상상적 축제를 연다. 도시의 방 안에서 벌어지는 그 축제에서 유리는 사각사각 몸 안에서 춤을 춘다. 그래서 생의 두려움도 분노도 잊은 채 시인은 “백치”가 되어 자신처럼 맨발로 유리 밟으러 가는 젊음들을 절정의 도시의 유목 속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재훈 시편은 이렇듯 먼 신화적 상상력과 가장 구체적인 사물들을 결합시킴으로써, 회귀와 성찰의 양면성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존재의 내밀한 곳에서 피어나는 영혼의 미동(微動)에 귀기울이면서 꿈과 현실을 쓸쓸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모습은, 그의 시가 “꿈의 사제가 들려준 묵시의 소리들, 로고스의 자기 발현 과정에 대한 응시와 관찰의 기록들”(유성호, 「해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임을 다시 한번 웅변해준다.

그런가 하면 신용목의 시편들에는 자기 자신의 젊은 날의 흔들림에 대한 뼈아픈 기억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의 시에는, 섬세하게 되살려지는 ‘기억’과 따뜻하게 재현되는 ‘사물’이 쓸쓸하고도 아름답게 결합되어 각인되어 있다.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 신용목 「갈대 등본」 전문(<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문학과지성사, 2004)

시인은 이 작품에서 바람의 지층을 몸 속의 뼈로 두고 살아가신 아버지를 선연한 이미지로 그리고 있다. 이때 시인의 ‘기억’은 아버지의 삶 속에서, 마치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유추적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시는 세상에 충일한 ‘바람’ 모티프로 시작되어, 시인이 평생을 두고 그 바람 속을 다 걸어야 한다는 운명적 자의식으로 매듭지어진다. 특히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라고 했을 때, 그러한 고백은 이러한 운명적 자의식을 예감한 시인의 섬세한 감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청년기의 상처의 내력과 그것을 고독하고도 아름다운 비애로 넘어서려는 시인의 의지가 아프게 다가온다. 이처럼 신용목의 언어는 끝없는 ‘기억’으로의 회귀와 그것을 인간 존재 형식에 대한 ‘성찰’로 연결하려는 욕망이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는 사례로 기록할 만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병호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망각의 의지와 기억의 불가항력 속에서 시를 길어올리고 있다. 오래 전에 지워버렸다고 믿었던 흔적이 되살아오는 순간이,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얼굴에서 떠오를 때의 역설(逆說)이 환하게 나타난 다음 시편을 주목해보자.  

 오래 전에 지운 아버지의 얼굴이
 내 아이의 얼굴에 돋는다

밤마다 강 건너에서 손사래를 치던 그 몸짓이
날 물리치던 것이었는지, 부르던 것이었는지

어둔 꿈길을 막니처럼 아릿하게 거스르면
겨울 천정에 얼어붙었던 철새들은
그제야 깊고 낡은 날갯짓을 한다

불온한 全生이 별자리를 밟고 서녘으로 흐르는 소리

달이 지고, 해가 뜨기 전의 至極이
강물에 닿기 전, 문득 시들어버린 내가
잎 진 나무로 강가에 몸을 잠그면
가지 끝에 문신처럼 옮아오는 앙상한 길
내 몸을 빌려 검게 꽃 피는 아버지
모두가 한 물결로 펄럭인다

변방의 밤하늘은 마른 저수지마냥
외롭고 가벼웠다
어둠 저편에서 절벽처럼 빛나는 녹슨 닻

生은 몇 번씩 몸을 바꿔
별이었다가 꽃이었다가 닻이었다가
유곽이었다가 성당이었다가
어제처럼 늙은 내 아이가 되는데

나는, 새벽이 오는 변방의 강가에 기대어
아버지와 아이의 멸망을 지켜볼 뿐
차마 墓石처럼 깜깜하지 못했다

― 김병호 「강가의 墓石」 전문(<달 안을 걷다>, 천년의시작, 2006)

시인은 아이의 얼굴에서 오래 전에 지워버렸던(혹은 지워진) 아버지의 얼굴을 발견한다. 그것이 격세유전의 한 국면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시인은 아이의 얼굴에서 오래 전에 지워진 아버지의 기억을 보고 있는 것일 터이다. 그래서 시인은 아버지와의 거리(距離)를 꿈 속에서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니처럼 아프게 꿈 속을 거스르는 순간 겨울 철새들이 깊고 낡은 날갯짓을 할 때쯤, 시인은 “불온한 全生이 별자리를 밟고 서녘으로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시간이 다시 흘러 여명의 지극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시인은 “문득 시들어버린 내가/잎 진 나무”가 되어 강가로 몸을 잠그는 환각을 경험한다. 그때 “내 몸을 빌려 검게 꽃 피는 아버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아버지는 그렇게 ‘나’의 몸에 ‘아이’의 몸에 선명하게 깃들이고 계셨던 것이다. 그만큼 “生은 몇 번씩 몸을” 바꾸면서 때로는 ‘별’로 ‘꽃’으로 ‘닻’으로 ‘유곽’으로 ‘성당’으로, 말하자면 지상[俗]과 천상[聖]을 숨가쁘게 오가면서 굴러가는 것이었다. 그때 시인의 생은 “어제처럼 늙은 내 아이가” 되고, 그 “늙은 내 아이”는 바로 아버지의 “불온한 全生”을 휘감은 시인의 육신이 되기도 한다. 그 여명에 시인은 “아버지와 아이의 멸망을 지켜볼 뿐/차마 墓石처럼 깜깜하지 못했다”라고 함으로써, 지워지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눈부시게 흔들려갈 자신의 생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김병호는 선명한 기억 속에서 인간 존재 형식의 어둑함을 증언하고 스스로는 묵시적으로 그것을 승인하고 견디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상 우리가 살핀 길상호, 이재훈, 신용목, 김병호 등의 시편은 인위적 담론으로는 도저히 포섭할 수 없는 낱낱의 심미적 완결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기억’ 속에서 인간 존재 형식의 보편성을 수습해낼 뿐만 아니라, 일정하게 서사적 계기에 대한 관심을 통해 우리 시대의 ‘서정’의 원리를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젊은 시인들의 노력은, 우리의 서정이 오랫동안 축적해온 동일성 논리를 뛰어넘으면서, 동시에 우리 삶의 곳곳에 편재하고 있는 혹독한 운명과 맞서는 힘겨운 유한자(有限者)의 모습을 보여준다. 더불어 그 유한자의 눈이 얼마나 깊이 자신의 근원적 기억과 사물들을 동시에 꿰뚫을 수 있는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그들의 시는 지난 시절의 역사 편향과 이념 과잉을 반성적으로 사유하면서도, 시가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억과 성찰 혹은 근원 지향과 현실 연관의 속성을 견고하게 결합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4. 새로운 시학을 위하여

시가 시간적으로 경험을 초월하면서 항구적 심미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미의 형식적 요소가 구체적 경험으로부터 분리되어 성립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경험을 기초로 하면서 이를 초월하는 형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의 존재론적 비밀을 밝히기 위해 우리는 주체와 객체, 영혼과 실재, 내용과 형식, 시인과 독자 사이에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동일성 논리를 서정(성)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시는 더 이상 동일성의 논리를 고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된 동일성 논리를 넘어서면서 세계와의 불화와 긴장을 당당하게 형상화한다. 이는 서정을 ‘세계 파악의 색인’(김준오) 혹은 ‘주체의 세계 투사를 정식화한 개념’(권혁웅)으로 정의했던 관념을 넘어서면서, 대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주체의 다양한 정서 발현 과정으로 설명하게끔 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젊은 시인들은 이 같은 서정의 확장에 기여하면서도, 시에서 주체를 힘겹게 복원하면서 지속적 자기 회귀의 열정과 타자의 음영(陰影)을 성찰하는 자기 동일성의 재구(再構)에 나서고 있다. 속도전의 무모함과 자기 소모적 열정으로부터 감각과 인지 능력을 동시에 복원하면서, 그들은 시간에 대한 시적 체험으로서의 기억과 인간 존재 형식에 대한 궁극적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난 세기말의 커넌(A. Kernan)의 <문학의 죽음>에 이어 최근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근대문학의 종언>이 속속 출간되면서 우리는 근대적 언어 예술로서의 문학의 근본적 위기를 여러 모로 실감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위기 진단은 ‘(근대)소설’이라는 근대문학의 총아를 직접적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근대적 언어 예술 전체의 존재 방식에 대한 유효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렇듯 형이상학과 정전(正典)의 급속한 와해를 실현하면서 다가오는 온갖 종언주의(endism)에 편승하지 않고, 기억과 사물의 접점에서 새로운 대안적 사유를 수행해가는 젊은 시인들의 목소리는 그래서 우리의 새삼스런 주목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들의 언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세대론이 부분적으로 허구임을 알게 되고, 나아가 서정의 옹호를 통한 새로운 시학을 암시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 <시작>, 2006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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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본 순간


이승훈


너를 본 순간
물고기가 뛰고
장미가 피고
너를 본 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를 본 순간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갑자기 걸레였고
갑자기 하아얀 대낮이었다
너를 본 순간
나는 술을 마셨고
나는 깊은 밤에 토했다
뼈저린 외롬 같은 것
너를 본 순간
나를 찾아온 건
하아얀 피
쏟아지는 태양
어려운 아름다움
아무도 밟지 않은
고요한 공기
피로의 물거품을 뚫고
솟아오르던
빛으로 가득한 빵
너를 본 순간
나는 거대한
녹색의 방에 뒹굴고
태양의 가시에 찔리고
침묵의 혀에 싸였다
너를 본 순간
허나 너는 이미
거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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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사랑은 느리게 온다. 몸이 알아챌 무렵,
그 사랑은 이미 거기 없다.
물고기가 뛰고 장미가 피었을 때.
그것이 사랑이 반짝이는 비늘이었음을 알아챌 때는
이미 몸은 저만큼 앞질러 가있다.
투명한 의식만 달랑달랑거린다. (記. 이재훈 시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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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의 타자를 향한 러시안 룰렛 게임과 대황하의 변주곡


정준영




이재훈 시인의 강은 건널 다리도 없는 거친 황톳물 넘실거리는 ‘대황하’다. 그가 스스로 강이 되어 누웠다. 이재훈의 이번 신작시는 <대황하 2~5>와 <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이라는 제목을 가졌다. <대황하 2~5>는 서사적 성격이 보이는 산문시이고 마지막으로 <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까지 붙였으니 그의 이번 신작시를 순차적으로 읽는 것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강물의 흐름처럼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스스로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전주곡과도 같은 <대황하 2> 이후 <대황하 3, 4, 5>는 같은 제목을 가진 시들의 내용을 구성하는 플롯의 성격을 보인다.
이재훈의 신작시 <대황하>는 성(性)에 따른 명사의 구분에 의해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할 듯싶다. 우리나라에는 단어에 성의 구병이란 게 없지만 명사에 남성, 여성 혹은 중성을 붙이는 나라에서 ‘강’은 여성형을 가진 명사로 취급된다. 그리고 가스통 바슐라르가 ‘몽상의 시학’에서 말했듯이 ‘숲’은 남성이고 ‘삼림’은 여성인 것처럼 유사한 단어들은 미묘한 그러나 지대한 차이에 의해 또 다시 남성형과 여성형으로 구분되어진다. ‘강’은 여성형의 명사지만 이재훈의 ‘대황하’는 강은 강이로되 만일 성(性)을 갖는다면 남성형의 명사로서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대황하’라는 시어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시 <대황하 2>에 등장하는 첫 구절은 ‘누웠다’이다. 강은 수직으로 솟은 산과 달리 누워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누웠다’라는 자동사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매일 같은 굴욕과 비방을 얻는다. 누웠다. 고개 숙였다.
― <대황하 2> 부분

눕는다는 행위를 유발한 원인은 앞뒤의 다른 문장들이 나누어 가졌다. 즉, ‘매일 같은 굴욕과 비방’이 그로 하여금 눕게 만드는 원인이고, 눕는다는 말은 ‘고개 숙이다’라는 말과 동의어를 형성한다. 여기서의 강은 일단 수동적이고 저항하지 않으므로 여성형으로서의 강에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눕는 이유는 <대황하 3>에서 설명된다. <대황하 3>에 이르러서 ‘누웠다’는 동사는 ‘바랐다’라는 동사로 바뀌어 있다.

강을 바란 것은 깊이 때문이다. 가늠할 수 없는 저 중심(中心)
― <대황하 3> 부분

여기서 강은 이중적인 상징이 된다. 즉, 외압의 굴욕에 여성적으로 누운 강이기도 하지만 거대한 힘을 가진 외압체로서의 남성적인 강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 시인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대황하의 거친 황톳물처럼 강력한 위세를 가져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듯 범람하고 있다. <대황하 2>에서 세상은 ‘썩은 것’이었지만 그 위력과 위세는 대항하기 어려운 것일 때 물의 혼탁성은 이미 선과 악의 개념에서부터 벗어나 그 자체로 거부할 수 없는 존재의 위엄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강에 뼛가루를 뿌렸다지, (중략) 물속에 묻혔다지
― <대황하 4> 부분

무서운 대황하의 황톳물이 삼키는 뼛가루는 이것이 연습상황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실제 상황임을 뼈저리게 각성시킨다. ‘생은 연습이 없다. 단 한번이면 족하다. 누웠다’(<대황하 2>) 매일 같은 굴욕에 고개 숙이고 누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황하의 황톳물은 뼛가루까지 삼키는 절대존재이다. 죽어서 정말로 강바닥에 뼛가루로 눕는 것보다는 미리 누워 사는 생에 익숙해지는 것, 그러면서 대황하의 힘을 배우는 것이 굴욕에 고개 숙이는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황하의 굽이치는 황토물을 생각한다. 긴 시간의 강을 젓는 내 굵은 힘줄을 생각한다.
― <대황하 5> 부분

이 세상이라는 무시무시한 황톳물은 모든 것을 삼킬 위력을 가졌고 실로 강에 뼛가루를 뿌린 사람의 한마저 휩쓸어 간다. 이렇게 그의 <대황하> 연작시를 서사적으로 생각해보니 이재훈의 ‘강’은 조용히 포용하며 말없이 흐르는 수동적인 여성형의 명사가 아닌 거칠고 호흡이 거센 남성형의 명사로서 적합하다. <대황하 2>에서 ‘누웠다, 고개 숙였다’눈 곳운 다만 그가 현실적으로 취하는 행동의 일면일 뿐이며 실은 거대한 위력을 지닌 대황하의 흐름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나아가 그런 위력을 행사하는 대황하 자체의 힘을 바라는 그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재후늬 시가 완곡한 여성형에 잠시 의탁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장치로서의 선택이고 내용적으로는 완전한 에네르기의 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눕는다는 행위와 고개 숙이는 행위는 여성형의 ‘강’을 잠시 차용한 것이고 그 피난처 안에 피난을 하고 있는 주체는 강한 남성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신작시의 문장이 매우 건조하며 짧은 서술체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도 이재훈이 내면에 지니고 있는 강한 남성성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침묵도 때로는 폭력이 될 수 있다’(<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는 말에서 ‘폭력’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일은 이재훈의 신작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이재훈의 시에서 ‘폭력’은 외부의 것이기도 하고 내부의 것이기도 하다. 폭력이 외부로부터 오는 것일 때 이재훈은 ‘강’과 같은 여성형을 취한다. 그러나 폭력이 내부의 것일 때 ‘강’은 완전한 남성형을 가진 ‘대황하’로 바뀐다는 것이다. 거칠게 흐르는 대황하의 강을 이루는 물이 서로의 몸을 겹쳐가며 거대한 흐름을 이루듯이 자와 타자와의 싸움은 삶을 이루는 핵심적인 문제이다. 야성의 타자를 향한 나의 욕망 역시 야성적일 수밖에 없다. 생이란 야성의 타자에 의한 굴욕과 비방에 나의 얼굴이 뜯기고 너의 팔다리가 뜯겨 결국 한 몸이 되어 엉기는 러시안 룰렛 게임과 대황하의 변주곡과 같은 것이다.

_ <시와세계>, 2008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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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自在)에의 욕망

 

 

이명연

 

 

1. 시작 - 자재에의 욕망?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하이데거의 말이다. 하이데거의 할아버지쯤 되는 니체에게는 매우 익숙했을 이 전복적인 문장의 의미는 (인간) 존재가 언어를 통해 존재가 된다는, 존재가 언어로 인해 존재로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언어를 만든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이 놀라운 정의는 그러나 그리 놀랄 만한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 이와 비슷한 말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요한복음 1장 1절).”라는 말이다. 이 말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존재는 말씀 이후에, 말씀으로부터 태어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무려나, 언저가 존재를 앞서는 것이라 했을 때, 언어가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했을 때,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언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 ‘언어의 감옥(프레드릭 제임슨)’에 갇힌 수인(囚人)의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자연이 아닌, 인공 아니, 언공(言工)으로서의 존재는 하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길 욕망한다. 욕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재훈의 시 제목이기도 하고 마네의 그림 제목이기도 한 <올랭피아>의 하녀처럼, 그 하녀가 빼앗기지 않았으면 하는 ‘내 꽃’인 자유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존재성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기에.
헌데 욕망이란 무엇인가? 지라르나 라깡이 지적하듯, 나의 욕망은 나의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내 욕망의 대상의 욕망이며, 대차자의 욕망일 뿐이다. 즉 그것은 중계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나만의 것, 나의 자유의지가 만들어낸 무엇이 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욕망이건 욕망의 대상이건, 언어화될 수 없는 것들은 욕망이,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욕망은 언어, 정확히는 금지와 금지의 수용을 통해 구성되는 주체로서의 나(라깡)와 그러한 주체들이 만들어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나(지라르)의 욕망이라는 점에서 결국 언어로부터 탄생한 욕망, 언어로써 말해질 수 있는 욕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에의 욕망은 불가능한 욕망일 뿐이며, ‘자재에의 욕망’이란 말은 불가능한 말이 될 수밖에 없다. ‘자유자애(自由自在)의 준말이라도 볼 수 있"는 자재라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구속당하지 않는 상태, ’시공을 넘어서는‘ ’초월적 영역‘을 이르는 말(이명권, <예수 석가를 만나다>, 코나루스, 2006. 34쪽)인데, 우리는 언어의 구속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 욕망을 이룰 수 없는 존재, 이 자재의 상태에 이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욕망을 포기해야 할까? 자재의 존재로서의 나, 자유롱ㄴ 존재로서의 나에의 욕망을 우리는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시는 고개를 젓는다. 시는 언어를 통해 언어를 넘어서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중략)...

3. 진실을 바라보라 - 이재훈의 경우

삶과 세계의 진실을 바라본다는 것은 뼈아픈 일이지만, 자재의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한 첫 단계라는 점에서 더 없이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것이 뼈아픈 일인 이유는 우리의 삶과 세계가 아름답지만은 않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그것이 자재로서의 존재의 첫 단계인 이유는 그것, 곧 삶과 세계의 아름답지만은 않은 진실을 알아야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렷한 밤이었지. 무수히 낭비한 말들을 끌어안고 그 성(城)을 찾았어. 어지럽게 나선형 계단을 올랐지. 두렵지는 않았어. 사람의 눈은 아름다운 무늬만을 본다지. 내가 만난 이의 꿈꾸는 눈빛. 정물처럼 수놓아진 가슴에 꽃잎이 화르르 번졌어. 촛불 사이로 흐르던 눈물과 기도. 가슴으로 잇는 하나의 다리를 오래오래 건넜어. 숨찬 시간이 흘렀지. 붉은 꽃이 만발한 오솔길도 아니었어. 구름과 어우러지는 파란 하늘과 흰 등대로 아니었어. 안개 자욱한 길 끝에, 스스로 몸을 비튼 고행의 소나무들이 가득했어. 사는 것의 원리도 모른 채, 그 캄캄한 숲에 발을 디뎠지. 성 안은 온통 어두웠지만, 따뜻하고 행복했어. 해가 뜨면 오로지 명령만 귀에 가득했지. 애벌레처럼 꿈틀대다 안식향을 피워. 집을 나와 지하철을 타지. 내 몸은 이 땅에 저당잡혀 있어. 말끔한 이미지의 감옥 속으로 나는 들어가지.

위 시, <하얀 성>에서 화자는 ‘무수히 낭비한 말들을 끌어안고’ 성을 찾는다. ‘또렷한 밤’이라는 시어에서 알 수 있듯, 무수히 낭비한 말들은 낮 동안의 말들이다. 이 낮 동안의 말들이 낭비인 이유는 내가 저당잡혀 있는 이 땅이 ‘이미지의 감옥’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실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이미지의 감옥 속에서의 말들은 낭비된 말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밤은 또렷하다는 점에서 실체의 세계라 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스스로 몸을 비튼 고행의 소나무들이 가득’한 공간이지만, 하여 뼈아픈 공간이지만, ‘따뜻하고 행복’한 공간이 된다. 더구나 극 오간은 ‘명령’이 없기에 자유로운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공간은 실재하는 공간이기보다는 오인의 공간, 꿈의 공간이라는 점이 문제이다. 그곳은 화자가 보소 싶어하는 ‘아름다운 무늬’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다 할 때, 성은, 하얀 성은 화자가 보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무늬일 뿐이며, 내 몸이 저당잡혀 있는 세계는 명령만 가득한 이미지의 감옥, 안식향을 피워야만 하는 공간이 된다. 전자가 꿈의 세계라면, 후자는 몸이 살아내는 현실의 세계이다. 그런데 결국 우리가 사는 곳은, 살 수밖에 없는 곳은 후자라는 점에서 하얀 성은 오이느이 공간, 꿈의 공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고, 이 공간 역시 이미지의 감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미지의 감옥에서의 시 혹은 시 쓰기는 어떠한가?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어머니가 없는 공허한 시를 쓴다.
예술가들은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고
머리에 뿔을 단다. 광대의 옷을 입는다.
거친 발걸음으로 거리에 나가 거죽을 벗긴
날짐승을 전시한다.
대중은 환호하고, 예술은 진지하다.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고독한 오만으로 공허한 시를 쓴다.
재주 좋은 시인은
높은 나무에 올라 나뭇잎의 형상을 그린다.
시든 나뭇가지의 슬픔을 노래한다.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사로잡힌 유니콘의 뿔에 대해.
사랑하는 말발굽 소리에 대해.
문명인의 실험에 훼손당한 별의 슬픔에 대해.
스삭스삭 재킷의 말로 쓴다.
실상 외투는 어머니의 살로 만들어진 것.
재킷, 재킷! 하면* 어머니의 뇌와 심장이 실이 되어
올올이 풀려나온다.
재킷을 입고 추위를 견딘 나는
어머니에 대해 쓸 수 없다.
잠자는 숲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재킷을 태우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편의 시가 태어날텐데.
재킷의 재가 나무에 뿌려져
울창한 숲이 되면,
앙상한 내 겨드랑이에 날개가 생길텐데.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너무 추워 재킷을 꼭 껴입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재킷, 재킷 말을 건다.

- <재킷을 입은 시인>


위 시는 <재킷을 입은 시인>이다. 아베 고보의 소설 <시인의 생애>를 시로 다시 쓴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위 시에서 시인은 자신을 이미지로 만든다. 그들은 대중의 환호에 진지한 척 하지만, 공허한 시를 쓸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 시에는 어머니가 없기 때문이다. <시인의 생애>에서 재킷은 어머니의 노동이자 어머니의 육체였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가 없는 시란 노동과 그 노동의 지옥과 그 노동을 하는 육체가 없는 시를 말하고, 이는 역으로 노동과 노동의 지옥과 노동을 하는 육체가 담겨 있을 때 시는 가득 찬 세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노동과 어머니의 노동의 지옥과 어머니의 육체로서의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는 것은 제스처일 뿐이며, 이 제스처를 버릴 때, 이 재킷을 태워버리고 내가 시를 쓸 때, 그 시는 ‘가장 아름다운’ 시, 가득 찬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위 시에서 시인은 재킷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태워버리지 못하고 공허한 시, 제스처의 시만을 쓸 수밖에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하는 공허한 말 걸기일 뿐이다. 시인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재킷을 벗기에 이 세계는 너무 춥기 때문이다. 재킷은 이렇게 볼 때, 화자인 시인을 자재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공허한 삶과 육체가 기댈 수밖에 없는 무엇이면서 동시에 시인이 어머니의 것이 아닌 시인의 것으로서 가져야 할 무엇이 된다.
하지만 시인은 어머니의 재킷을 태워버리고 자신의 재킷을 가질 수 없다. 추위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추위는 무엇일까? ‘공상을 허락하지 않(<만>)’는 시대로서의 추위일까? 그럴 것도 같다. 그럴 것도 같지만, 그것으로는 재킷이 지난 무게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일가. 추위의 정체는.


얼굴 없는 안개의 밤,
죽음의 그림자를 막연하게 살피던 밤,
한밤 내 웃었다.


<만(灣)>의 일부이다. 위 시를 통해 우리는 추위의 온전한 정체와 만날 수 있다. 그것은 두려움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만’이라는 제목은 이 시의 모티프인 천연두 자국과의 형태적 유사성과 배꼽과의 의미론적 유사성(만은 육지의 배꼽이라 할 수 있다)을 담고 있는 은유이다. 위 시의 화자는 어릴 적 천연두를 앓으면서 죽음의 그림자를 확인하고 한밤 내 웃는다. 이때의 웃음은 즐거운 웃음이라기보다는 죽음이라는 뼈아픈 진실을 안 자의 페이소스가 담긴 웃음이라 할 수 있다. 천연두 자국과 유사성을 지닌 만으로부터 그 만에서 연상되는 배꼽을 바라보는 것을 통해 재생되는 이 웃음은 삶의 두려운 진실을 상기하게 하고, <재킷을 입은 시인>의 시인으로 하여금 어머니인 재킷을 벗어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배교의 고백 혹은 돌아온 탕아의 ‘연대기’를 연상시키는 일련의 시들 속에서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해 재킷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시인으로서의 화자는 ‘난삽한 사랑(<할례의 연대기>)’의 삶을 살고, ‘아무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지 못(<귀신과 도둑>)’하는, ‘호명을 두려워(기억의 기술>)’하는 존재의 삶을 산다. 이는 <재킷을 입은 시인>에 표현된 ‘고독한 오만’이라 할 수 있다. 고독하기에 호명을 두려워하고 아무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지 못하며, 오만하기에 난삽한 사랑만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 오만은 ‘유디트의 강한 팔에 붙들려/ 목이 잘리는 환상이 가장 즐거울 때도 있었다.(<기억의 기술>)’는 진술이나 ‘그러나 나는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사랑이 완성(<만신전>)’된다는 진술까지 가능케 한다. 이러한 고독과 오만은 재킷의 시인의 한계이자 삶 옆에 죽음을 달고 사는 인간 존재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을 바라본다는 것, 이것을 안다는 것은 이미지로서의 세계와 삶이 아닌 실체로서의 세계(인간이 만든 것으로서의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것,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앎은 ‘세상과 더불어 있’는 존재로서의 자재를 가능케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고독한 오만을 안다는 것은 그 고독한 오만을 벗어나 죽음이라는 진실과 함께 삶의 진실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첫 단계이기 때문이다.
 

돌 위에 앉아 있으면
저 바닥 아득히 짐승의 울음이 들리는 듯
엉덩이가 뜨끈했다.
숭고한 소리들이 돌 속으로 몰려갔다.
피의 온기를 가진 돌.
깊은 밤 달빛은 제 몸인양 돌 속으로 푹 잠겼다.
나도 모르게 일어서 돌에 머리를 숙였다.

- <돌> 부분


<돌>의 일부이다. ‘매일 다니는 골목길에’ 있는 ‘무심코 지나쳤’던 돌에게 화자는 인사를 한다. 고독과 오만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재킷을 벗어버릴 수 없는 약한 존재, 죽음과 함께 사는 존재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그 고독과 오만을 알았을 때, 재킷의 시인은 자신이 ‘세상과 더불어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이로 인해 ‘돌의 근원’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생각 속에서 돌은 인간의 삶이 잃어버린 짐승의 울음과 숭고가 담겨 있는 것이자, 따뜻한 온기를 담고 있는 자재하는 존재로 변한다. 이처럼 새로운 돌, 자재하는 돌, 돌의 자재를 본다는 것은 곧 나의 자재를 찾아가는 또 다른 단계 혹은 시작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재의 세계란 그저 그렇게 있음, 자유롭게 있음의 존재들, 곧 자재자들이 모여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_ <시현실> 2008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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