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독서실

시詩 2008. 3. 23. 18:01
 

이재훈


   벽이다

엎드려 잘 때마다 이곳은

바닥이 아니라 무른 껍질이라 생각했다

배에 힘을 주면 지그시 열릴 것 같은

그 껍질을 깨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몸을 마음껏

비벼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주장해야 했다

쿵, 말문이 열리면 긴 오솔길이 펼쳐지곤 했다

한참을 걸었을 때 울창한 숲이 보였다

나는 구름을 먹고,

신성한 사랑에 대해 논했다

풀숲에는 소리가 고여 있었다

풀을 헤치니 소리가 서로 밥을 먹고 있다

갑자기 구역질이 나서

나무의 텅 빈 몸에 구름을 토했다

검은 말들이 꿈틀댔다

가련한 밤,

문신을 새기는 꿈을 꾸었다

팔뚝 위에 피리를 새겨 넣자

내 몸에서 노래가 흘러 나왔다

창밖엔 십자가가 흐른다

가로등이 떠다닌다

감정없이 장단만 있는 노래

이 방은 어둠이 몸 푸는 자리,

얼굴도 없고 가슴도 없다

빗방울도 없이

빗소리가 내리는 방

엎드려 자고 있으면

살포시 몸에 감기는

빈 말들의 뼈

   _ <미네르바>, 2007년 겨울호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0) 2008.07.08
백사막  (0) 2008.04.03
붉은 주단의 여관  (0) 2008.03.23
남자의 일생  (1) 2008.03.06
봉숭아  (0) 2008.02.27
Posted by 이재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