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엔 언덕이 있다.
그날은 이상했다.
오르고 올라도 닿지 않는 거리를 헤맸다.
혼을 빼앗긴 것처럼.
늪에 빠진 것처럼.
뒷덜미를 놓아주지 않는 불빛이 있었다.
사위가 어둠에 둘러싸이면서
상점엔 불이 하나씩 켜졌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어둠이 안겨주는 거대한 정적을,
위대한 침묵을
나는 알지 못했다.
상처받은 한 친구를 생각했고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생각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바쁜 거리의 일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산책길엔 언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길목과 길목이 혀를 내밀어
내 몸을 떠받치고 있을 뿐.
타인의 인격을 규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은,
그 짧은 시간만큼은 황홀하겠지.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
달빛이 있는 골짜기다.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그 햇살의 순간처럼.
- 이재훈,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전문
우연의 일치일까. 이 시는 구성의 큰 틀에 있어서 앞의 시와 닮은 점이 적지 않아 보인다. 남진우의 작품에 나오는 ‘그’가 오르막길을 헐떡거리며 걸어가듯이 이재훈 시의 화자인 ‘나’는 언덕이 있는 산책길을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의 세부에 있어서 양자의 차이는 엄존한다. 시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에서 시인과 근접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화자는 어떤 이상한 기운이 감돌던 ‘그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나’는 또 시인은 복잡다단한 심경 속에서 ‘거리’를 헤매다 ‘언덕’이 있는 ‘산책길’을 오르게 된다. 바삐 돌아가는 거리에서 ‘나’는 마치 “혼을 빼앗긴” 듯, “늪에 빠진” 듯 방황한다. 방황의 구체적 이유들로는 ‘상처받은 친구’와 ‘갚아야 할 빚의 액수’ 그리고 ‘타인의 인격’ 등이 제시된다. 화자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자신이 저주스럽다. 그가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나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는 열망을 내비치는 이유는 현재에 쌓인 강한 불만의 심리와 무관할 수 없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어둠’이 ‘사위’에 내릴 때, 거리의 상점엔 ‘불빛’이 하나 둘 켜지고 ‘나’의 종교적 심성은 고양된다. 화자가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 곧 고통 속에 기생하는 황홀한 ‘그 짧은 시간’을 추구하는 까닭은, 그가 ‘근원’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달빛’이 흐르는 골짜기인 이곳 ‘월곡’에서 한없이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그리하여 ‘존재의 비밀’을 깨칠 ‘그런 순간’이 ‘내’게 올지 모른다. 장 그르니에가 지중해의 푸른 물결 속에서 발견한 산타크루즈의 그 빛, ‘그 햇살의 순간’을 시인은 희구하고 있다. ‘그날’은 신이 내 곁에 가장 가까이 내려앉을 수 있는 ‘일요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단 하나의 연에 38행이 담겨 있는 이 시를 가리켜, 삶의 아픔을 보듬어 줄 신성(神聖)의 빛을 향한 수도자의 기나긴 길의 시적 현현(顯現)으로 부르고만 싶다.
- 권온, <시적 시간 혹은 순간에 뿜어져 나오는 영혼의 불꽃>, 시작, 200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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