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永遠)의 시인 구상

 

이재훈(시인)

 

 

한 해의 끝자락에 와있다. 해마다 연말이면 그동안 연락이 뜸했던 지인들이 생각나고, 한동안 자주 못만났던 동료들과 친구들이 생각난다. 문득 보고 싶은 사람들이 생기는 것은 한 해 동안 쉼없이 보내온 시간들에 대한 상념때문일 것이다. 무엇을 위해 지금껏 살아왔는가. 나는 지금 행복한가. 순결한 성찰의 시간은 바로 이런 순간이다. 돌아보며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며, 때론 다짐하며 한 해의 마지막 시간들을 보낸다. 이런 즈음이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바로 구상의 <오늘>이다.
구상(具常, 1919년 9월 16일 ~ 2004년 5월 11일) 시인은 작고할 때까지 시와 인간적 품성이 늘 함께 존경받는 이 시대의 스승이었다. 프랑스 문인협회가 선정한 세계 200대 문인 중에 한 분으로 선정될 만큼 큰 시인이었으며 한국 시단에 큰 영향을 끼친 시인이었다. 구상 시인은 문학 분야뿐 아니라 종교계, 교육계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구상 시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시간들 그 자체이며, 격변했던 한국 근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한 삶이었다. 시인은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네 살 때 원산으로 이주하여 유년시절을 보낸다. 시인의 부친이 독일계 신부들이 개설한 원산의 교구에서 교육사업을 하였던 것이다. 이후 원산 덕원 성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 중등과를 수료하고 1941년 일본 니혼대학 전문부 종교과를 졸업한다. 귀국 후 해방이 되고 원산의 작가동맹에서 펴낸 시집 <응향>에 자신의 시를 실었으나, 1946년 응향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북조선 당국으로부터 반동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월남했다. 이후 경북 왜관에 정착하여 20여년을 거주하다 서울 여의도에서 나머지 일생을 마감했다. 현재 경북 칠곡군에는 구상문학관이 설립되어 있다.
구상 시인은 평생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오로지 문학과 종교활동에만 몰두하였다. 효성여자대학, 서강대학교, 서울대학교, 중앙대학교, 하와이대학 등에 재직하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시인은 이때에도 일체의 보직을 사양하였다고 한다. 서라벌 예술대학의 초대 학장과 국민대 총장 자리를 제의했을 때에도 사양했다고 전해진다. 시인에게 정치를 권유한 정치인들은 많았다. 처음 구상 시인에게 정계 입문을 권유한 사람은 해공 신익희 선생이었고 이후에도 장면 총리가 시인이 몸담고 있는 서강대로 찾아와서 간곡히 정계입문을 권유했다.그때마다 시인은 강원도와 제주도 등지에 숨어 정계입문을 간접적으로 거절했다.
구상 시인과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간적 관계는 잘 알려진 것이다. 5 ․ 16 직후 박 대통령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고문으로 구상 시인을 내정해 놓고 시인을 설득했지만 끝내 박 대통령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생전에 구상 시인은 박 전 대통령을 관(官)에 나가 있다는이유로 ‘박 첨지’라고 불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구상 시인은 종교인, 문화예술인들과도 다방면으로 돈독한 친분이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 화가 이중섭, 걸레스님 중광, 장애인 화가 김기창, 아동문학가 마해송 등과의 친분과 수많은 일화들도 우리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일들이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 「오늘」 전문

구상 시인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시인이 작고한 날,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명동성당에서 그의 영결식을 집도하였으며, 수많은 종교인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종교적 인식은 서구의 보편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에 동양적 세계관이 덧입혀진 통합적 인식이다. 그것은 시인이 일찍부터 신화와 유교, 불교, 노장사상 등의 사상을 섭렵해 왔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바탕 위에 다양한 종교적, 철학적 인식이 덧입혀져 더 넓은 영역의 인식적 기반이 된 것이다. 시인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라고 말한다. 즉 오래전 과거와 지금의 현실과 죽음 이후의 내세에 관해서 이를 단절의 시간이 아니라 통합의 시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삶에서 아등바등 발버둥치며 사는 시간들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성찰하게 된다. 시인이 유언처럼 남긴 “영원이라는 것은 저승에 가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이 곧 영원 속의 한 과정”이라는 말은 위의 시를 잘 설명하고 있다.
구상 시인은 생전에 시를 쓸 때 기어(綺語)의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남겼다. 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언령(言靈)이 있으므로 참된 말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묘하게 꾸며 겉과 속이 다른, 진실이 없는 말을 결코 해서 안 된다는 것인데, 이 시대에 가슴 속에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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