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시인)

 

 

1. 공분의 시대

뜨거운 여름을 보내는 중이다. 그 몇 달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생각하니, 벌써 너무 덥고 답답하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인한 충격과 서글픔은 더 말해 무엇하랴. 북한에서는 핵실험을 강행했고, 한국은 PSI 전면 참여를 선언하였으며 안보리의 북한에 대한 비난은 더 거세어지고 있다.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6.9 작가선언 ‘이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시국선언을 하기도 했다. 용산참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사회 약자인 서민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란 말인가. 디도스(DDOS)라는 이름의 사이버테러가 한국의 주요 사이트에 침투하기도 했다. 여야 간의 대립 속에 미디어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쌍용차 노조 파업 또한 진행 중이다. 비정규직법은 오리무중이다. 연일 장맛비가 내렸다. 전국적으로 장마로 인한 폭우 피해가 속출하였다. 재난피해는 늘 서민들에게 돌아간다. 그래도 우리의 일상은 늘 똑같이 돌고 돌아간다. 밥먹고, 일하고, 술먹고, 잠잔다. 비정규직이라 늘 불안하고, 자식들의 교육비 때문에 한숨 나온다. 젊은 세대들은 결혼을 미루거나, 아이 낳는 것을 포기한다. 그래도 우리의 일상은 늘 똑같이 돌고 돌아간다. 돌고 돌아가는 게 우리의 일상이지만, 한 가지 남는 게 있다면 ‘분노’다. 분노라도 없다면 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분노라도 없다면, 더 망가지게 될 우리의 삶은 무엇이 될까.

나라에 큰 슬픔이 있던 초여름이었다
연초부터 벼랑으로 몰린 사람들이
망루를 오르다 불에 타 죽고
죽은 몸은 다시 냉동되어 여름까지도
망각의 상자 속에 갇혀 이승에 방치 되어 있었고
경찰과 깡패가 한 개의 방패 뒤에 저희
그림자를 가리고 발맞추어 지나가고 나면
신문은 무기가 된 활자의 볼트와 너트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마구 던졌다
검게 그을린 영혼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하던
신부는 용역들에게 맞아 성체와 함께 나뒹굴었고
신부님이 두들겨 맞았다는 말에
어머니는 묵주를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수백의 시인들이 다시 조시를 쓴다는 말이 들려왔다
부러진 칼을 필통에서 꺼내 연필을 깎으며 나도
흐느껴 우는 나무들에게 몇 줄 편지라도 쓰고 싶었다
― 도종환, <그해 여름> 부분

위의 시와 같이 여름은 지나가고 있다. 서민들을 쫓아내고 투기꾼들을 불러 모아 관청의 창고를 채우는 일에 서민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죽었다. 용산참사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살아가는 서민들 모두의 일이다. 당장 내가 사는 집, 당신이 사는 집도 모두 뉴타운이 될 것이다. 시인은 “숲의 나무들은 진종일 허리를 구부리고 울었다”고 했다. “슬퍼하는 이는 넘쳐났으나/ 잘못했다고 말하는 이는 없이 여름”이 이렇게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망령은 여전히 우리의 주변에 서성거리고 있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정치철학이지만, 문명사회의 일원인 우리의 ‘생명’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벌거벗은 인간’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좀 신랄하게 얘기하면 ‘벌거벗은 인간 쓰레기’가 우리의 모습이다. 너무 자학적인가. ‘우리’의 모습은 신자유주의에 매몰당하여 근근이 생을 버티고 있는 우리 ‘시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무엇이 우리를 범죄자로 몰고 있는가. 촛불 앞에서 숭고하고 간절하게 촛불의 상징을 가장 현실적으로 재현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범죄자의 모습으로 윤색되고 있다. 애초에 희생물은 예정되어 있었다. 권력과 제도가 만든 허상의 신념 앞에서 모두 맹신의 희생물이 되고 있다. 무소부재의 권력은 호모 사케르를 죽이더라도 처벌 받지 않는다. 우리는 늘 호명당한다. 호명하는 주체가 시인이 아니라 주권 권력이던가. 하긴, 역사는 늘 이러한 과정을 되풀이해 왔다. 문학은, 인간은 왜 수없이 되풀이되는 망령을 뒤좇고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용산참사는 뼈아픈 생각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일상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어떤 소설보다 더 허구적으로 진행되고 있지 않는가. “이 냉동고를 열어라/ 거기 너와 내가 갇혀 있다/ 너와 나의 사랑이 갇혀 있다”(송경동, <이 냉동고를 열어라>)고 울부짖는 시인의 목소리가 거리에서 울린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은 겨우 살아가기 급급한 시간들의 연속이다. “딸아이가 4학년이라고 했다/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도우미는/ 탬버린을 잠시 내려놓고 눈치껏 답장 문자를 날린다/ 혼자 있는 딸에게”(윤병무, <노래방 도우미>)라는 구절에 이르면 사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서민들을 내몰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시인은 늘 실패한 혁명가를 꿈꾼다. 문학적인 삶을 꿈꾼다. 진은영은 말했다.(진은영, <문학적인 삶>) “그들은 결정을 서두른다”고. 무엇으로 하여금 결정을 서두르게 하는가. 걸작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노란 조끼를 입은 청년들의 관자놀이에/ 서슴없이 방아쇠를 당기게 할 위대한 한 페이지를” 서둘러 작성해야지만 문학적인 삶이므로. “한 사람의 젊은이가 위대한 예술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젊은이를 비탄으로 몰아갈/ 실업의 총알을, 죽음에 못 이른다면/ 비정규직의 주황색 망토에 뚫릴 동그란 구멍이라도” 필요하거나 피해야 한다. 사실, 시인은 비정규직이다. 시인들의 대부분은(교수나 교사가 아닌 이상) 비정규직이다. 비(非)라는 말이 주는 서글픔은 가슴에 서늘하게 남는다. 그렇기에 “폐병장이 시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발자크식 스타일이 되거나 미국에 살지 않는 이상, “폐병장이 시인”을 소비하고 싶어한다. 이 시대의 폐병장이가 비단 시인뿐이던가.

2. 심미성

사실, 일상성은 광의의 개념이어서 모든 문학에는 기실 일상이 내포되어 있다. 범박하게 말해 일상성의 현대성과 심미성은 ‘지금, 여기’의 현실을 어떠한 방식으로 내면화시켜 새로운 언어의 성채로 만들어내는가 하는 방법론에 방점을 찍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문학의 변용과정은 각 주체가 처한 이성적 토대의 상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현대성과 심미성을 일상의 차원에서 밝혀내기란 요원한 일임에 틀림없다. 광의의 개념으로도 이를 생각해볼 수 있다. 시론에서 오래전부터 지적하고 있듯이 시가 ‘일상적 진실’과 ‘당위적 진실’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면, 대부분의 문학은 ‘진실’의 차원에서 시적 의미를 거론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진실성은 현실을 그대로 노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의해 재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을 어떠한 내면을 통해 동화하거나 투사하여 비춰지느냐에 있다. 또한 이러한 시적 변용이나, 방법적 드러냄을 어떠한 미학적 방식으로 수용하는가가 문제이다. 우리의 일상은 지리멸렬이며 생존을 위한 공간인 돼지 울타리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러한 현대 문명인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시켜 담아내는 풍경은 이제 새롭지 않다. 어차피 문명의 삶은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공간인 문명의 삶은 분명 성찰해야 할 난관인 것이다.
신문을 보며, 그것도 하루 지난 신문을 보며 “분노할 줄도 슬퍼할 줄도 모르는 짐승” 같다고 말하는 일요일의 어느 시간이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다.(김안, <일요일들>) 가난하기 때문에 “천천히 당신을 만난다”라고 생각하며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어느 일요일이 가장 현실과 가까운 일상의 풍경이다. 무기력하고 너저분한 일상의 순간들은 자아의 존재를 무화시켜버린다. 그것은 무서운 결과다. 시인은 “내가 낳은 자식들은 모두 액체”라고 한다. 이 액체는 시인의 말대로 죽은 시체의 즙이다. 제 존재의 시원을 망각하고 있다는 자아의 태도는 일상의 현실에서 더 건조한 이성을 가지겠다는 느낌을 준다. “그 많은 자식들 중 단 한 명의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아버지는 片肉이” 된다. 그리고 시인은 “이제 난 뒤로 말하리라”고 한다.
토요일은 어떠한가. 사실, 월요일이건 수요일이건 중요하지 않다. 일상은 늘 그대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김참은 “수요일엔 술을 마시러 시내에 갔는데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는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불을 덮고 잠을 잤는데 그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모른다”고 한다.(김참, <토요일>) 이유는 습관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잠을 자는 습관 때문이라고 한다. 시에서의 자아는 “달력이 없고 시계도 멈춘 지 오래라”고 말한다. 이미 시간에 대한 개념을 벗어버렸다. 일상은 늘 시간에 쫓기며 사는 순간의 연속이다. 이 쫓기는 시간의 연속선상에 문명인들은 발을 올려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의 이탈자가 되어 불안을 느끼게 된다. 시인은 이탈자이다. 오늘이 혹은 내일이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고 살기 때문이다. “가끔씩 오는 전화도 한 통 없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잠을 잤고 TV만 봤기 때문에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의 공간은 늘 무덤 속에서 숨쉬는 것과 다름없다.(김언, <숨쉬는 무덤>) 문이 열리면 “아무도 없는 마루”가 보이지만 결국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우리의 빈방 체험은 시적 자아가 이 시대의 유령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현대인은 누구나 자신이 유령이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고 있다. 시인은 “내가 유령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김언, <유령-되기>) 중요한 것은, 아니 문제시되는 것은 “내가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느냐”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사람인데 시적 자아는 유령이다. 유령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니라 흘러다닌다. “돌, 나무, 사람들의 데모 행렬”에 슬쩍 몸을 맡기고 흘러다닌다. 공기를 의지해서 “공기가 움직일 때 나도 따라 걷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 자아가 겪는, 혹은 되고 싶은 “유령” 되기이다. 유령인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나도 중요하지 않지만, 이 시대에 유령이 된 시적 자아의 모습은 현재 여기 존재해 있는 것이다.

3. 초월의 세계

언제나 일상을 쉽게 다룬다는 것은 ‘쉬운 시’ 혹은 일상시로서 폄하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은 소재의 차원에서 일상이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일상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실존의 허망함과 존재의 역설을 시적으로 승화한 작품들을 가지고 있다. 이천년대가 넘어서면서 일상이 담지해 줄 수 있는 가능성들이 하나씩 무너지면서, 우리가 일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의미는 허무적일 수밖에 없다. 있다면, ‘나르시시즘’이나 ‘멜랑콜리’ 정도겠지만, 그 또한 비겁한 합리화처럼 자꾸 느껴진다. 그럼에도 일상을 포기하고, 추상적 이상의 공간만을 탐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우리의 일상은 너무 사실적으로 거칠고, 허구를 뛰어넘는 사건의 연속이며, 실존의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계속되는 죽음의 공간이다.
현대인이 살을 부비고 살아가는 도시의 공간은 문명인이 폐허 속에서 건축한 타인의 나라가 아니다. 그 공간은 현대인에게 자연과 똑같은 공간이다. 정재학은 거리에서 태어나고 거리에서 일하는 문명인의 길에 대해 말한다.(정재학, <微分-길>) 시인에게 거리는 자연과 같은 공간이다. 오래 걸었던 길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저 길들은 내게 강줄기와 같아요”라고 한다. 도시의 길도 강줄기가 될 수 있다. 길을 강줄기로 인식하려면 새로운 문명인의 피를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다. 도시에서의 아이들은 “기침이 그치지 않는 점액질의 아이들”이다. 그들은 공기로 숨쉬지 않으려고, “가슴에 칼집을 내어 아가미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세계는 우리에게 다정한 세계일까.(김행숙, <다정함의 세계>) “이곳에서 발이 녹”고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이곳은 다정함의 세계이다. 이곳은 우리 일상의 세계이다. 일상은 거대한 역설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역설을 기정사실로 간주하며 살고 있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이다. 이곳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를 간절히 기다린다면 어떨까. 오은은 이 거리에 넘쳐나고 있는 가짜 어른들의 모습을 신랄하게 보여준다.(오은, <보카 델라 베리타(Bocca della Verita)) 가짜 어른들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학생들이다. 하지만 이 학생은 어른보다 훨씬 성숙하다. 아직은 소녀라고 말하면서도 “차근차근 작은 일부터” 하는 게 순리라는 걸 안다. 착한 학생이다. 느지막이 학교에 가고 “꼰대를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철부지는 아닌 셈이다. 하지만 “연애 말고도 즐거운 일은 많”다는 것을 아는 소녀의 일상은 그다지 행복해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시에 등장하는 소녀에게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요할 순 없다. 소녀는 자신의 성정과 자아가 가진 품격대로 다짐을 하고 살아가는 거리의 또다른 어른이다.
문명인에게 초월은 어떤 의미를 주는가. 먼저 문명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배한봉은 그것은 문명이 먹어치우는 “식욕”이라고 했다.(배한봉, <문명의 식욕>) 마치 오은의 “식충이들”이 물질이건 정신이건 모든 것들을 “처먹는” 모습과도 비견된다. 옷의 식욕은 이제 본능의 것보다 앞서 있다. “성욕보다 수면욕보다 힘이” 센 옷의 식욕은 문명인이 만들어낸 물질의 대표격이다. 물질이 없으면 안 되는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아의 존재를 물질에게 먹혀버린다. 자아는 “살아있는 한 나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끊임없이/ 소비된다”고 한다.
초연한 자리에서 일상으로 내려오면 늘 불편하고 메스꺼워 다시 일상 밖으로 탈출하고 싶어진다. 문명인들에게 탈출과 무관심을 합리화해 줄 대체 공간이 나타난 것 또한 이미 오래전 일이다. 그것은 가상현실의 공간이다.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 빠져나와 있”는 광경은 이제 우리에게 현실이 되어버렸다.(이원, <거리에서>) 이원이 말한 이러한 거리의 공간이 지금은 이미 현실화된 공간이다. 詩에서는 소위 ‘인공육체’라고 불리우는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빠져나와 있”는 몸의 상상력이 등장했다. 이러한 육체는 이미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에얼리언>을 비롯한 영상문화를 통해 시각적 상상력으로 재현되었으며 더 거슬러서는 ‘프랑켄슈타인’의 몸에까지 올라간다.
이러한 몸의 상상력이 지금은 일반화되어 예술뿐 아니라 광고에까지 넓은 영역에 걸쳐 퍼져 있다. 그 동안의 몸이라는 개념은 ‘살아 있는 몸’, ‘피가 나는 몸’이었다. 그러나 이제 플러그를 매단 몸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인공적인 몸의 등장은 자본주의와 컴퓨터가 상징하는 물질문명의 영향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생명의 상징인 살과 피를 가진 몸이 분열되고, 해체, 복제되는 인공의 몸으로 그 상상력이 바뀐 것이다. 지금은 이런 실험이 문학의 언어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 이미 이러한 육체는 지금 현대에 자연스러운 몸의 일종이 된 것이다. 이제 우리의 일기는 “0개의 카테고리와/ 177개의 사이트”를 방황하는 시간, 즉 “계속해서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이원,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하는 시간으로 점철되어 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 가고 있다.(박해람, <낡은 침대>) 우리의 육체를 쉬게 해주는 것은 “낡은 충전기”이다. 우리는 배터리의 힘으로 충전한다. 우리는 안락한 휴식을 침대에서 보낸다. 침대를 충전기로 인식하는 시적 자아는 문명의 발전소에 저당잡힌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상은 욕망하는 장소이다. 먹고 싸고 자고 싸우는 본능적인 공간이 일상이라면, 고매한 정신적 충족의 공간이 초월의 공간이다. 이 두 공간을 서로 왕래하며 우리는 고단한 삶의 시간들을 견디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일상이 본능적인 공간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은 사람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확연한 사실은, 결국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며 먹고 싸고 자기 위해 평생 동족들끼리 싸워야 하는 존재임을 증언한다.

4. 욕망

문명이 인간에게 전해준 것이 인간 본성의 박탈만은 아닐 것이다. 분명, 문명이 전하는 즐거움도 있다. 오로지 생산만하는 인간에서 유희와 휴식을 즐기는 인간이 된 것은 문명 때문이다. 문명으로 인해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주권과 인권을 생각하게도 했다. 그럼에도 문명이 주는 축복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적 자아가 처한 정서적 본연성 때문일 것이다. 시는 과학이나 경제가 아니고 교양도 아니다. 시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에 바쳐지는 구원의 노래이다.
일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과 일상의 순환관계,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순환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와 삶 속에는 바로 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일상의 관성이 내재해 있다. 이 일상의 관성과 힘을 무시하고는 그 어떠한 ‘사건’이나 ‘역사’도 일어날 수 없다.
쉽게 말해 시에서의 일상성은 우리 주변의 흔한 생활사를 시적 공간 안에 끌어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소재로서의 생활사를 탐색하는 일이 어떠한 의미를 갖느냐에 대한 회의에 이르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생활사를 통해 어떠한 근본적인 의미를 도출해내는가가 필요할 것이다. 이에 대한 예증으로 이미 90년대 ‘도시시’라는 개념어가 자리잡히기도 했다. 우리의 일상은 이제 대다수가 도시의 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문명인이기 때문이다. 이제 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아주 특별한 예에 해당한다. 도시시 또한 소재의 문제가 크겠지만, 그 소재를 통해 문명을 소화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주체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일상은 무엇인가. 매일 쳇바퀴 돌듯 흘러가는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탈출하고픈 자의식이 발돋움하여 보려는 곳은 과연 어떤 풍경인가. 그 발돋움은 어떠한 모습과 양상으로 언어의 결에 흠을 내는가. 이러한 두서없는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일상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한 없을지도 모른다.

_ <시인시각>, 2009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