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를 둘러싼 풍경들


이재훈




강을 바랐다.

 

황하. 오래된 동양 문명의 강. 역사의 강. 어머니의 강. 황색의 강. 왜 황하인가. 헤르만 헤세의 <짤막한 자서전>을 읽고 감동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가 <싯다르타>를 썼듯이, 인도를 수행하듯 떠돌았듯이. 황하를 시적인 공간으로 옮겨오고 싶었다. 그렇지만 황하에 가 본 일은 없다. 가보지 않은 공간이지만 가본 공간이며, 경험하지 않은 시간이지만 경험한 시간 속에 ‘황하’가 있었다. 헤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자연의 순수함과 무한함을 찬미하고 싶었으며, 자연이 그칠 줄 모르는 고뇌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와 상극을 이루는 정신에게로 향할 때까지 그 과정을 묘사하고자 했다. 그리고 자연과 정신이라는 양극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삶의 모습은 생생한 무지개처럼 경쾌하고 유희적이며 완벽하게 묘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오페라를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물론, 내 사전에 완성이란 단어는 없다. 완성으로 이르는 과정과 길목만 있을 뿐.

 

누웠다. 스민다. 쏟아지는 모든 것들이 스민다.

 

아마도 스물 살 무렵부터 황하를 상상했을 것이다. 한 평의 고시원에 누워 황하를 떠올렸을 것이다. 용이 하늘로 올라가듯 누렇게 굽이치는 큰 물길을 올려다보고 싶었다. 쿠스코(CUSCO)의 곡 중에 ‘대황하’라는 곡이 있었다. <Apurimac>이란 앨범은 우리나라에서도 꽤 알려졌는데 특이하게 고대 잉카를 테마로 한 Apuricmac으로 시작하여 마야-아즈텍(ApurimacⅡ), 미국인디언(ApurimacⅢ)을 주제로 한 Apurimac 시리즈를 내놓은 연주 밴드이다. 아무튼, 경음악으로 알려져 있는 쿠스코를 지겹도록 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팬플룻과 신디사이저와 타악기의 반복적인 소리는 의외로 주술적이어서 다음날까지 귓가에 맴돌았다. 암스트롱처럼 유유히 우주를 걸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인도의 어느 한적한 지역에서 맨몸으로 고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스무 살 무렵이 어떤 면에서는 내 인생의 절정기였다. 늦은 밤, 친구들과 낯선 곳에 대한 막연한 상상을 하다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즉흥적으로 밤기차를 타고 며칠씩 돌아다녔다. 돈이 떨어지면 잡일을 해서 돈을 모으고, 또 놀았다. 2년 동안 도시의 유목민으로 지냈다. 고시원이나 쪽방에서 기거했다. 몸을 뒤척일 수도 없는, 한 평도 안 되는 고시원. 의자를 책상 위에 올리고 누우면 미이라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미이라가 되어 쿠스코의 음악을 들으면, 황하의 거친 강물 위에 나는 떠있었다. ‘황하’는 그 당시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역동적인 공간이었다.

 

강에 뼛가루를 뿌렸다지.

 

얼마 전 스물 살 무렵 만나 지금까지 늘 곁에 있었던 친구를 물에 묻고 왔다. 서른여섯 해의 생일을 오일 남겨둔 채, 그는 이 세상에 잠시 머물렀다 저 편안한 곳으로 갔다. 함께 있을 땐 그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는 걸 몰랐다. 무엇이라고 규정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아도 되었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친구였기 때문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친구가 마지막 숨을 쉰 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어머니의 물속에서 이 땅에 나와, 비와 함께 물을 따라 가고, 마지막으로 물속에 묻힌 친구. 제 슬픔까지 물처럼 흘려버릴 줄 알았던 친구. 그가 따라간 물길은 하늘로 통하는 비밀계단일 것이다.

 

긴 시간의 강을 젓는 내 굵은 힘줄을 생각한다.

 

황하는 내 존재가 걸어가다 만나는 수많은 풍경 중의 하나이다. 내가 앞으로 만나게 될 풍경이 또 어떤 풍경이 될 지는 아직 나도 모른다.


_ <시와세계>, 2008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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