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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9월 28일 초판 발행
* 121*186|112쪽|7,500원
* ISBN 89-546-0046-8 02810
* 문학동네
1998년 『현대시』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명료한 이미지와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들을 선보여온 이재훈 시인의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 실린 총 44편의 시들은 머릿속에 자유로이 떠돌던 혼돈을 지난 기억들에 하나하나 끼워넣는, 독특한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존재의 두려움에 이끌리다
이재훈의 시는 마치 불의 뜨거움을 알고도 그 바알간 빛에 이끌리는 것처럼, 두려움에 대한 내밀한 경험들을 꿈속에 혹은 현실의 어느 곳에 고스란히 드러낸다. “내 영혼이 하루 동안 수십 바퀴의 절망과 환희를 돌아오면, 하얀 꿈이 몇백 년을 지나 내 앞에 멈추곤 한다”(「어느 꿈길」)라고, “밤이 되면 말을 타러 갔었지/잠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는/깊은 동굴이었지”(「사수자리」)라고 고백하는 그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고독한 모습들은 ‘거리’라는 확장된 장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도시의 거리를 걷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내 기억을 훔쳐간 그 거리. 나는 땅바닥에 입술을 갖다대었어. 수많은 발자국들과 친해지고 싶었던 그 거리. 사람들이 뱉어놓은 말들이 거리에 흩날렸지. 말들이 글자가 되고, 무거운 책이 되었어.”(「거리를 훔치다」) 친해지고 싶던 곳이지만 그곳엔 툭 뱉어놓은 말들만이 흩날리고 그것들이 결국 무거운 책이 되어 자신을 힘겹게 만들고 마는 거리. 그 거리를 쏘다닌 발을 부끄럽다고 하는 고독과 나르시시즘에 대한 반성에 대해 문학평론가 유성호는 “그 ‘곤고함’과 ‘견딤’과 ‘비명’ ‘목마름’과 ‘배회’야말로 거리에서의 젊은 날을 함의하는 이재훈의 생의 형식들”이라고 이야기한다.
내면(자신)을 드러내는 또하나의 방법으로서 이재훈은 소리에 집중한다.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을 잘 무렵이면, 내 몸에 꽃씨 앉는 소리가 들린다, (……) 내 몸에 피는 꽃, 어머 내 몸에 핀 꽃, 나르키소스의 영혼이 노랗게 물든, 수선화가 핀다,”(「수선화」)라고 말하는 그는 자기 자신에게, 자신한테서 보여지는 또다른 누군가에게 몰입하는 나르키소스처럼 자신과 또다른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인다. 소리에서 말과 노래로 한 발자국 나아간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이재훈의 시는 세상에 대한 응시와 관찰 그리고 내면의 ‘신성(神聖)경험’에 대한 고백과 보고이다.
어느 순간, 시가 내게로 왔다
시가 ‘사랑의 대상이었다가 고백의 성소였다가 다시 불안의 자리로 옮겨가면서 여전히, 존재를 옥’죈다고 말하는 이재훈 시인은 자신의 시가 ‘반성’이 아닌 ‘고백’이라고 이야기한다.
‘고백’은 생각 이전에 눈물이 앞서는 경험이다. 상징이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 그 무엇의 생각. 내게 그것은 ‘흠’으로부터 출발된다. 어쩌면 내 말은 고백이다. 내 말이 간신히 시가 되는 이유는 눈물을 애써 감추기 위해 다른 부족의 동화(童話)를 꿈꾸기 때문이다. 먼 이방의 부족들 속에 들어가 말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꿈이다. 언제나 이곳에서 저곳을 그리워하기만 한다. ―‘시인의 말’ 중에서 어린 시절 말에 서투르고 머뭇거리는 시간조차 견디지 못해 속으로 말을 되삼키던, 여전히 낯선 이방인이라 자신을 여기는 시인에게 문학에의 욕망, 시원(始原)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고통과 아픔에 비명을 지르며 내달리는 이재훈의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시에 대한 새로운 자유로움과 감동을 던져주고 있다.
하프를 잃어버린 도시의 오르페우스……
우기(雨期)를 견디는 도마뱀의 숨소리처럼 처녀성을 지니고 있는 이재훈의 시는 오늘의 시에 대한 새로운 보고서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이 신선함은 미래의 어디서 훈풍처럼 감지되는 것일까. 시인은 이 도시에서 온몸에 파란 움이 터진 시의 이파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삶을 노래하고 있다. 시 도처에서 발견되고 갈망되고 있는 낙원의식, 오염되지 않은 자신의 부족과 종족언어에 대한 향수. 그가 속해 있는 부족은, 최초의 말이 태어나 번식하는 마을이요, 밤하늘의 사수자리가 대초원을 이루는 곳이다. 그곳에 하프를 잃고 온 그는 이렇게 반문한다. ‘왜 하필, 이 늙은 땅에서 절 잃으셨나요?’ 챙 넓은 솜브레로 모자와 차우를 걸친 현대의 오르페우스처럼 그의 음조는, 도시의 우수와 자연의 웃음과 밤이 낳은 미아, 그리고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이나 거북이처럼 엎드려 살면서 병들어가는 아침의 영광에 바쳐지기도 한다.
이 첫 시집에는 새로운 언어의 처녀성에 처음으로 눈뜬 자의 설렘과 감동을 포획하는 그 최초의 눈이 있다. 조정권(시인)
이재훈 시의 시공은 광대하다. 그 광대함은 ‘겹침의 시학’에서 비롯된다. 이를테면 시인은 ‘빌딩나무 숲’인 이곳에 사막과 우주와 원시의 시공을 겹친다. 그러자 몸의 결핍과 영어(囹圄)는 깊어지고, 영혼의 시공은 광대해진다. 깊음과 광대함은 ‘태양이여’라고 시인이 그 광대함을 부르는 행위, 시인의 시작(詩作)을 통해 시인의 몸 속 깊은 곳에서 겹쳐지고, 만난다. ‘태양이여’ 하고 시인이 외치자 시인의 ‘항문으로 뱀(태양)이 숯머리를’ 깊이, 뜨겁게 ‘들이민’다. 그리하여 광대함에 머리를 둔 시인이 잠자리에서 깨어날 때마다, 우주는 별자리 하나씩을 새로이 탄생시키고, 모세는 다시금 출애굽하며, 시인은 창세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마치 처음인 듯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인 이 시집의 시들을 쓰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김혜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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