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 위쪽 나무들이 고개를 숙여 만들어낸 그늘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오른편에 언덕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있다. 그 길이 바로 그 유명한 할머니 동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할머니 동산, 이라고 가만히 입술을 열어 보면 그날의 풍경과 그날의 목소리와 그날의 어지러움이 함께 떠오른다.

이른 봄날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찬바람이 마지막까지 제 존재를 증명하려는 듯 옷깃으로 파고들었다. 겨울을 무기력하게 보냈고 봄이 오면 새로운 다짐을 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날의 햇살은 더 남다른 데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강의실 창가에까지 보드라운 몸을 기대는 햇살의 감촉을 참을 수 없었다. 세상의 가식된 거짓에서 벗어나라는 진리의 새가 어깨 위로 포르르 날아와 앉는 느낌이었다. 함께 강의를 듣던 친구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자고, 그래 그러자고 합의를 하고 교수님을 졸랐다.

우리는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는 야구부원들의 역동적인 몸놀림을 바라보며 뒷길을 걸었다. 봄날의 햇살 때문인지 모든 풍경이 새롭게 꿈틀거리는 듯 보였다. 친구들 몇은 막걸리를 준비했다. 할머니 동산으로 오르는 길은 소박했고 편안했다. 마치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느낌처럼. 할머니 동산은 작은 정원이었다. 이쪽 저쪽 꽃몽오리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제 곧 꽃이 될 붉고 노란 얼굴들이 동산에 가득했다. 꽃향기를 맡으며 술향기를 맡는 이 신선함. 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준비해온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판이 벌어지면서 자연스레 노래판도 벌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쑥스러움은 쉽게 노래의 열정으로 빠져들지 못했다. 술이 몇 순배 더 돌고나서 한 친구가 노래를 불렀다. 그 친구는 원우들 중에서도 가장 낯을 가리고 수줍음 많은 친구였다. “사랑함에 세심했던 나의 마음은 그렇게도 그대에게 구속이었소. 믿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헤어지는 이유가 됐소……” 구창모의 희나리였다. 나는 그날의 그 노래를 잊지 못한다. 좀 처연하긴 하지만, 할머니의 품에서 위로받으려는 듯 다짐하려는 듯 끊어질 듯 이어지며 불렀던 노래. 희나리는 덜 마른 장작을 말한다. 그때도,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덜 마른 장작이었다. 덜 마른 장작이 내뿜는 매캐한 연기가 할머니 동산에 가득했다. 나는 그 이후로 구창모의 희나리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공간은 안과 밖의 변증법으로 인해 의미를 갖는다. 어디로 도망할 것이며 어디로 피할 것인가. 안은 어디이며 밖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시절. 결국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지만. 할머니 동산은 이곳이 아닌 저 너머의 곳이었다. 도망도 피할 곳도 아닌 위로를 준 동산이었다.

그 뒤로 몇 번을 그 동산에 올랐던가. 가슴이 울렁거릴 것만 같은 그 동산. 내겐 비밀의 화원이었던 그 동산. 할머니의 치마폭처럼 알 수 없는 울분과 고민을 감싸 안아 주었던 그 동산을 다시 한번 오르고 싶다.

(중대대학원신문, 2006, 7.)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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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이 들고 입술이 부르터서 몸뚱이가 버거울 때였지. 꿈을 꾸었어. 갑자기 뒷덜미가 서늘해져 지나온 것들을 보지 않으려 캄캄한 앞만 보았지. 저 앞의 세상엔 어떤 동물들이 살고 있을까. 한 발자국 내딛을 때, 내 몸에 사박사박 모래알 밟는 소리가 났어. 오, 누군가가 내 몸을 질근질근 밟고 있었지.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아침마다 청량리에서 신촌으로 가는 131번 버스를 타지. 어쩌다 예쁜 여인이 옆에 앉으면 주문을 외지. 너는 내 아들을 잉태했다. 새벽에 술에 취해 방문을 열고 불을 켜면 섬뜩 놀라. 내 바지에 피가 흘러내리고, 아침에 보았던 예쁜 여인이 아기를 안고 있어.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뒤를 돌아보면 내 목에 십자드라이버를 꽂고 있는 사람이 보여. 당신을 사랑해. 어지러워, 온 몸에 피가 타오르지. 독한 감기약을 먹고 아침이 되면 131번 버스를 타지.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내 몸이 가벼워져 바다 위를 걷는다면, 당신의 손이 내 몸에 닿을 때 흐르는 피가 멎는다면, 그걸 누구에게 고백해야 할까.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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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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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곳을 찾았을 때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
가없는 기억의 언덕도 무너지고
또닥또닥,
희미한 발굽 소리만 들렸는데

2.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르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 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

3.
말은 내게 뱃속을 열어 보여준다
건강한 줄기를 먹고 자란 말
빨갛게 화장(化粧)한 말의 뱃속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뱃속에 질서있게 자리잡은 내장의 곡선에
손가락을 갖다 대본다
아프다, 말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뱃속에서 말의 새끼들이 뛰어나온다

4.
말이 쏟아져 내린다 초원에 내려 거칠게 달려나간다 내가 지겹게 머무는 도시의 거리까지 와서 내 머릿속을 후두둑후두둑 내달린다

5.
밤이 되면 나는 시를 쓴다
거리의 곤고함에 대해
꽃이 침묵하며 피는 이유에 대해
아는 척 쓰다가 말다가 결국
“말은 태양을 잉태했다”고 쓰다가

6.
믿음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내가 검은 말을 타고 요정의 검을 차고
맥베스처럼 “눈 앞의 이것이 나인가” 되뇌이며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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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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