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원시의 시간, 라다크(Ladakh)

 

 

 

이재훈

 

 

 

 

 

모르는 시간

 

풍경은 시간을 앞선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풍경은 이전의 기억을 지워버린다. 마치 구름처럼 하늘과 지상의 일을 슬쩍 가리고 무감하게 한다. 내게는 라다크로 가는 하늘 위가 그랬다.

값싼 여행을 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비행기를 갈아타는 것이다. 우리는 배고픈 여행객들이었다. 서울에서 홍콩으로, 홍콩에서 델리로, 델리에서 다시 라다크의 주도인 레(Leh)로 이동하는 경로였다. 하지만 델리에서 이미 지쳐있었다. 비행기를 타는 시간만큼 환승 시간도 길었다. 인천공항에서부터 꼬박 하루를 견뎠다. 델리에서 라다크로 가는 비행기를 탄 시간은 다음날 아침이 밝기 전이었다.





라다크로 가는 하늘 위에서 여명이 밝아 왔다. 피곤에 지쳐 눈꺼풀이 반쯤 감겨 있을 때였다. 그날의 첫 햇살이 눈가를 살살 간질였다. 눈을 뜨니 저 멀리 구름에 살짝 걸린 햇귀가 보였다. “죽인다.” 그 말밖에는 할 수 없는 일출 장면이었다. 노랗게 익은 햇살이었다. 햇살 아래로 양털 구름이 양탄자처럼 깔려 있었다. 하늘과 구름이 풍경의 전부였다. 그러다 이내 강렬한 빛이 창안으로 쏘아들었다. 창밖을 볼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이었다. 온 얼굴이 아침햇살로 뜨끈했다. 기내식 커피를 한 잔 하고 나니 햇살은 수그러들었다. 구름과 파란 하늘만이 모든 풍경을 감쌌다. 햇살은 어느새 저 하늘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아침이 찬란하게 푸르렀다. 도시에서 보았던 수직과 직선의 완고함이 이 높은 하늘에서는 무력했다. 선이 아닌 면으로 뒤덮인 구름과 하늘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러다 비행기가 낮게 깔리며 내려갔다. 산맥이 나타났다. 눈을 이고 있는 산봉우리가 서로를 맞잡고 있었다. 저 밑이 바로 히말라야다. 낮게 비행하며 바라보는 산맥은 장관이었다.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키를 재듯 머리를 내밀었다. 산맥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다른 산맥의 몸에 길게 드리워졌다. 그런 그림자들은 서로의 산맥에 검은 덧칠을 하며 묘한 명암을 만들어냈다. 힘차면서 부드럽게 감싸는 그림자가 긴장하듯 햇살의 몸에 담겨 있었다. 원시의 경이가 있다면 이런 순간일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가 저 밑의 산맥을 달리고 휘돌아가면서 울렁울렁했다는 것을. 저 원시의 시간들. 내가 모르는 시간들 앞에 설 생각에 마음이 달떴다. 자꾸만 숨이 가빠왔다.



 

오래된 사원


라다크에서 가장 먼저 둘러본 곳은 레 근처에 있는 사원들이었다. 헤미스(Hemis), 틱세(Thiksey), 쉐이(Shey), 스톡(Stock) 사원들을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라다크는 티벳 불교를 믿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인도의 힌두인들과 다르게 라다크는 대부분 불교인들이다. 라다크의 곰파들은 모두 몇 천 년 전의 건물처럼 오래돼 보였다. 돌을 쌓고 진흙을 비비고 발라 만든 사원들은 히말라야의 고원에서도 몇 백 년을 견뎠다. 대부분의 곰파는 그 지역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졌다. 그렇기에 곰파에 가기 위해서는 늘 올라야 한다. 마치 하늘 위로 오르는 것처럼. 모든 계단과 길들이 하늘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사원의 곳곳에는 낮잠을 자는 개들이 유독 많았다. 이곳에서 개는 아무도 소유하려 하지 않는 가장 미천한 동물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향불을 피우고 식사를 준비하는 어린 스님들의 모습은 진지하면서도 천진했다.





석양이 지는 어스름. 사원으로 전해지는 사양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저물어간다는 것은 쓸쓸하거나 때론 아름다운 일인데, 이곳에서는 성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저물어가는 사양은 대지와 숲이 아니어도 근원을 향할 수 있었다. 사원으로 오르느라 지친 얼굴에 저문 햇살의 감촉이 다가왔다. 서서히 누그러지고 넘어져가는 석양을 마음에 담느라 일행들은 모두 저마다의 시간 속에 홀로 서 있었다. 햇살이 수직에서 사선으로 제 몸을 허물다가 스스로 스러지는 일. 매일 가장 꼭대기에서부터 가장 아래로의 소멸을 겪는 일. 우리는 스러질 때에야 비로소 평온해진다. 스러지고 소멸될 즈음에야 평온해진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실로 오랜만에 저물어가는 일의 감동과 흐뭇함을 천천히 음미했다. 이곳에서의 모든 소멸에게 온 맘으로 경이를 보내고 싶었다.

나는 어쩌면 몇 천 년 전의 사람들과 만나고 온 것인지도 모른다. 먼 기억을 소환하는 공간에 열흘 동안 있다 온 셈이다. 작은 도랑물 소리. 바람이 발바닥을 간질이는 나긋함. 마당을 쓰는 빗질 소리. 멀리서 들리는 야크의 울음. 옆 호텔에서 두런거리는 이방의 방언들. 나는 먼 기억으로부터 왔다. 저 우주의 행성에서 지구의 어느 땅을 밟는다면 가장 먼저 이곳을 밟으리라.

 




느림

 

레에 도착해 우리는 숙소에서 하루를 온전히 쉬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거나 소요했다. 고산증 때문이다. 어지러웠고 메스꺼웠고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렇기에 느릴 수밖에 없다. 방심하여 조금이라도 뛰면 곧바로 머리가 아프고 뒷목이 당기고 어지럽고 숨이 가빴다. 느리게 걷고 느리게 말하고 느리게 움직이기. 그것이 라다크에 적응하는 첫 번째 일이다. 세수를 할 때도 느릿하게 얼굴 한 번 문지르고 숨 한 번 쉬어야 한다. 몸을 씻을 때도 느릿하게 물 한 번 끼얹고 숨 한 번 크게 쉬고 비누칠 한 번 하고 숨 한 번 쉬어야 한다. 말도 천천히, 걷는 것도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것도 천천히. 천천히 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온몸으로 느꼈다. 마치 슬로우비디오를 찍는 것처럼. 생각해보면 내 말과 움직임이 그동안 얼마나 빨랐던 것일까. 빠르게 움직이는 몸의 감각들을 느린 감각으로 되돌려놓기. 그 느림의 시간들이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라다크에서는 이렇게 오래도록 생각할 수 있는 몸을 저절로 만들게 된다. 밤에는 옥상에 올라 오래도록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최초의 시간

 

판공초(Pangong Tso)는 해발 4,350미터에 위치한 가장 높은 소금호수이다. 판공초는 마법의 호수라는 뜻이다. 이 높은 곳에 염호가 있다는 사실은 믿기지 않는다. 판공초는 빙하기 시대 대륙의 판들이 솟아오르고 히말라야가 융기하면서 바닷물이 높은 곳에 고여 그대로 호수가 되었다. 소금호수이기 때문에 이곳에는 갈매기가 날아다닌다. 판공초는 인도와 티벳에 걸쳐져 130km나 뻗어 있는 어마하게 큰 호수이다. 우리가 본 곳은 그 일부분일 뿐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도 영화 <세 얼간이>의 끝부분에 판공초가 배경이 되기도 한다. 보통은 기대를 많이 하면 실망을 하기 마련인데, 판공초는 기대 이상이었다.





레에서 판공초로 가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고개 창 라(Chang La)를 넘어야 한다. 창 라는 5,360미터이다. 레에서 점심 도시락을 싸들고 온종일 히말라야의 가장 높은 곳을 넘고 북쪽으로 달려야 닿는 곳이 판공초이다.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물은 얼음처럼 차갑고 공기는 더욱 희박해져 갔다. 빙하가 흘러내리는 물에 잠시 발을 담그고 저 먼 시간의 흔적을 생각하기도 했다.

판공초의 끝 언저리에 닿자 긴장했던 모든 마음이 허물어지고 에머랄드빛 호수의 색깔에 눈이 멀어 버렸다. 그저 마음을 풀어 놓고 누워 있고 싶었다. 저 호수 가까이에 가서 바람을 맘껏 쐬고 싶었다. 멍하니 넋 놓고 한참 앉아보고 싶은 곳. 내게는 그러한 장소가 또하나 생긴 것이다.





원하는 마음이 아무 것도 들지 않는 곳이었다. 혹시라도 소리 지르면 죄를 짓는 것 같은 곳이었다. 그립다는 말이 소용없는 곳이었으며 자꾸만 침묵 속으로 잦아들어가는 곳이었다. 나도 모르게 원시의 기억을 하나씩 헤집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각자 물과 바람과 시간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 시간이 무엇을 주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오래도록 그 시간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어둠이 깔리자 추위가 몰려들었다. 해발 4천 미터가 넘는 곳의 호수바람은 매서운 겨울바람보다 더 사나웠다. 8월의 여름이었지만 판공초의 밤은 겨울이었다. 준비해간 겨울점퍼를 입고 달을 보았고, 장작불을 피웠다. 이전의 기억은 자꾸만 스러져갔고 추위는 점점 더 몰려왔다. 어쩌면 이곳에서 만나 함께 불을 쬐고 있는 록산과 우리는 몇 천 년 전 이곳에서 만났을 지도 모른다.

 

 

동지들

 

생각하면 열흘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먼저 동행했던 여행 동지들. 어쩌다 저쩌다 이러다 저러다 만나게 되었다. 세상에 계획된 일은 늘 계획과는 무관하게 흘러가게 되며 우연한 인연이 동지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세상에 천재시인은 많지만 그중 천재시인이자 여행전문작가인 김선생. 혼자 떠나는 여행의 달인이며 외국인들의 이성적 로망인 신시인. 늘 감동할 줄 아는 화가이자 시적 감성이 넘쳐흐르는 송작가. 인도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믿기지 않았지만 이십대 꽃청춘이었던 현지 라다키 가이드 록산. 이들은 모두 지극했다. 김선생은 피곤에 쩐 몸을 일으켜 매일 짜이를 타주며 일행의 정신적 위로자가 되어주었다. 신시인은 말할 줄 모르는 동지를 위해 통역을 도맡아 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할애했다. 신시인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행 고아가 됐을지도 모른다. 송작가는 우리에게 꾸밈없는 웃음을 주었다. 순간순간 많이도 웃었다. 송작가는 카메라 없이 여행지를 모두 그림으로 담는 예술혼을 보여주었다. 록산은 잘 생기고 건실하고 순수한 청년이었다. 록산의 희망은 한국을 여행하는 것이라 했다. 꼭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나의 별칭은 ‘동바’였다. 동네바보라는 뜻이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실실 웃으며 때론 투정도 하며 따라다니는 동바로 살았다.





라다크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 라다키인들과 인도인들과 때때로 만난 서양인들. 곰파에서 만나 우리를 거처로까지 초대했던 노스님과 어린 승려들. 누브라계곡의 훈더르, 투르툭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에 대해 어떻다고 말할 처지는 아니다. 잠시 여행지에서 스쳤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시 스친 인연이지만 그들의 웃음과 표정과 냄새와 그 배경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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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

 

니체는 알프스 산맥 깊숙이 있는 호숫가에서 영겁회귀의 사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때 쓴 문장은 한 줄이었다. “사람과 시간의 저쪽 6천 피트”. 이 한 줄의 문장이 영원회귀의 철학을 낳았던 것이다. 시간은 어떤 풍경과 만나 철학으로 남고, 때로는 한 편의 시로 남는다.

모든 기억은 허전함만을 남긴다. 라다크에서의 열흘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기억이 어떤 형상으로 남을까. 지금 여기에서 보면 그 형상이 다소 비현실적인 환상과도 같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들의 진실은 고이 박제될 것이다. 나는 어떤 한 줄의 문장을 쓰고 왔을까. 어떤 한 편의 시를 쓰고 왔을까. 아직 모르겠다. 앞으로 열흘 동안의 라다크를 좀 더 생각한 후에 단 한 줄의 문장이 나올 것이다. 좀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한 편의 시가 써질 지도 모르겠다.


_ <시인동네>, 2014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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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 심사평

 

 

실재계의 목소리

 

원구식

 

 

 

지난해 한국시는 우리의 경제사정만큼이나 피폐하였다. 시인은 이미 호모사케르인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맑스가 세상에 나왔듯이, 오늘의 정보혁명은 또 다른 맑스의 출현을 예감케 한다. 한국이 세계에서 자살률이 1위인 까닭은 세계에서 정보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기술혁명은 고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절망을 넘어선 청년들의 실업은 구조화가 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실패한 시장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는 이미 오래 전에 버려졌다. 그런 와중에 나는 이번 심사에서 김안, 박진성, 이재훈, 이현승, 최금진 시인을 추천하였다. 모두 지친 삶을 꾸려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한국 시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우리들의 전사이다. 어느 시인이 수상하여도 본상의 명예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번에 수상자로 선정된 이재훈 시인은 수도원에서 거리로 나온 실재계의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구도를 열망하는 나르치스의 언어와 세속에 빠진 골드문트의 언어가 혼재되어 있다. 이 두 목소리가 길항하며 부딪칠 때 이재훈의 시는 묘한 빛을 발한다. 그것은 마치 실재계가 상징계로 침입하는 것과 같다. 실재계는 언어에 의해 포착되지 않은 세계이다. 기표도 기의도 없는 삶의 영역, 그래서 시인은 “날 구원해주는 것은 언어가 없는 원시의 감각”(「나르치스」)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감각을 소유한 시인은 “전투력을 가진 말들이” 서로 왕 노릇을 하려고 뽐을 내는 길거리에서 “이 세계에 없는 언어를 찾아나”선다.(「거리의 왕 노릇」) 그리하여 그가 평원에서 “아무 언어도 없이 심연에 잠길” 때, “저 우주에 몸을 눕히고 별들을 덮을” 때(「평원의 밤」), 혼잡한 지하철에서 눈을 감고 퇴출한 명왕성으로 사라질 때, 상징계의 꼭두각시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문득 우리의 맨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수상을 축하한다.

 


제15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 심사평

 

 

영혼의 전인적 복기 의지

 

박주택

 

 

 

수상작을 선정한다는 것은 작품의 우수성뿐만 아니라 시인이 그간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작품을 써왔는지도 중요한 가치 평가로 작용한다. 상호연관성 속에서 관계 짓는 이 잣대는 이런 의미에서 전체적이고 통일적이다. 시가 시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전인적 삶으로부터 현시된다. 시가 역사이고 정신인 것은 시간과 함께 지속적으로 삶 속에 자신을 투여할 때 가능하다. 따라서 한 편의 시에는 미적 체험으로서의 선명한 자기 인식이 녹아 있다.

이번 수상자인 이재훈 시인은 그간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2005)와 <명왕성 되다>(2011)를 상재하며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해온 시인이다. 그의 시편들은 동시대의 현실을 가장 새로운 묵시의 형식으로 시화하면서, 동시에 난파된 젊음에 대한 우수와 자긍을 겹쳐놓은 독특한 현실 환기의 세계다라는 평가(유성호)와 함께, 유한한 것들을 무한에 대고자 하는 상상적 결단이라는 평가(조강석)를 받아왔다.

수상작인 「거리의 왕 노릇」은 속도와 비생명적 일상 속에서 전투와 명령만 있는 세상에 대해 신랄하게 풍자하며 통박한다. 일찍이 벤야민이 도시 산책자의 시선으로 생명을 억압하는 기제들에 대해 신령상실을 탄식한 것처럼 이재훈은 영혼과 말의 부재를 공간의 부재로 대체하며 배설과 오물의 길에 서성인다. 대지에 서 있지만 대지에서 유폐된 채 서로 왕 노릇하려고 생명과 죽음을 능가하려는 부끄러움이 없는 영혼들을 조롱하고 야유한다. 십자가 없는 어두움과 허공 속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조용한 잠이 없는 모퉁이 속에서 쭈글해진 어머니 배에 귀를 갖다 대며(「사수자리」) 신의 안부에 고통스럽게 침묵하는 이교도처럼(「빌딩나무 숲」) 처형의 시간을 고통스럽게 바라본다.(「연옥의 산」)

이재훈의 시는 그간 도시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영혼 없는 형식의 세계를 개성적인 시각으로 묘파해왔다. 일관되게 자신의 시적 세계를 밀고 나가는 그의 추동력은 존재의 시원을 상기시키며 성소로서의 낙원 의지를 복기해 왔다. 이번 수상으로 그의 시가 우리시의 부족한 부면을 더욱 광활하게 개척하기를 고대하며 현대시 작품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제15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 심사평

 

 

존재론적 시원始原을 추구하는 순례자의 언어

 

오형엽

 

 

 

나는 예심을 거쳐 올라온 본심 대상 시인들 중에서 1차로 김중일, 박진성, 심보선, 윤의섭, 이재훈 시인을 추천했다. 1차 투표 결과 이재훈 시인이 3표, 박진성, 이현승, 최금진 시인이 각각 2표를 얻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네 시인이 작년 한 해 동안 발표한 시들을 놓고 작품성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다각도의 논의가 진행된 후 심사위원들은 이재훈 시인을 수상자로 결정하는 데 합의했다. 이재훈의 시는 세속도시의 일상을 지배하는 자본과 마케팅 문화의 힘에 맞서 존재론적 시원始原을 추구하면서 천상의 언어를 회복하려 한다. 수상작인 「거리의 왕 노릇」은 최근 이재훈 시의 특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문명의 한 구석에 제 이름을 새기려는 영혼들”과 “서로 왕 노릇하려고/생명을 능가하고, 죽음을 능가하는 이웃들”이 발설하는 “왕의 언어”, “법의 언어”, “왕을 심판하는 언어”에 저항하는 시인의 언어는 “이 세계에 없던 언어”이다. “문득 신들이 사는 세계를 구경하고 싶었”다는 진술이 드러내듯, 이재훈의 최근 시는 신학과 문학이 만나는 사제적 언술로 우리의 현실을 질타한다. 이처럼 이재훈의 시는 신학적 상상력에 근거하지만, “아름다운 운율은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처럼 거리의 소음과 노동과 사랑을 시적 시선에서 놓치지 않는다. 군중과 농부와 회사원으로 구성되는 일상의 현실을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체험에 공감하고 동참함으로써 이들의 목소리를 한데 모아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구성한다. 그래서 이재훈 시의 화자가 드러내는 목소리는 군중과 농부와 회사원의 언어를 종합하고 그것을 순례자의 언어로 승화시켜 얻어진 것이다. 우리 시단에서 무의식적 욕망의 언어 및 사회적 윤리의 언어와 더불어 존재론적 시원을 추구하는 순례자의 언어를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재훈 시인의 현대시작품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제15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 심사평

 

 

마음의 한 세기를 다루는 시인

 

조강석

 

 

 

2014년 현대시작품상을 이재훈 시인이 수상하는 것에는 문학 내적인 필연과 문학 외적인 우연이 결부되어 있다. 부차적인 우연에 대해서 가장 간명한 형식으로 먼저 얘기하는 게 좋겠다. 현대시작품상은 지난 한 해 동안 쓰인 가장 좋은 작품에 주어진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 중에서 이재훈의 작품이 마음을 가장 오래 붙잡았다. 그리고 이재훈 시인은 우연히도 시상 주체와 관련된 불필요하고 근거 없는 오해와 결부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작품의 수월성에 대한 고민은 짧았지만 혹시라도 수월성과 우연의 성근 인과관계를 유독 필연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을까봐 고민하는 시간이 몇 배 길었다. 그러나 필연은 필연이고 우연은 우연이다.

이제 필연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이 글을 쓰는 이나 읽는 이나 한 시대의 얼굴을 오래 지켜보고 있다. 하나의 시대가 어떻게 자신을 구조적으로 체계화하며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감산하는지를 제법 오래 우리는 지켜보고 있다. 자본이 국경 없는 제국의 섭생을 관장하고 다수결이 소수에 의해 입안된 구체적 이익을 출납하고 덧셈 뺄셈처럼 명료해 보이는 외설적 욕망과 전횡도 모두 각자도생의 이전투구처럼 비치게 하는 나팔수가 24시간 활약하는 시대에 출근하고 카드 긁고 퇴근하고 정산하는 삶을 부정할 수 없는 우리는, 생활하며, 그러나, 마음의 한 세기도 경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훈은 바로 그 마음의 한 세기가 어떻게 운용되는지, 통치와 경영과 합리화와 욕망의 구조 속에서 그래도 하루를 살아야 하는 우리가 마음의 한 세기를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를 가장 진솔하게 보여주는 작품을 쓰고 있다. 시가 내감의 외화만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사유의 귀결이기도 하다면 마음의 한 세기를 다루는 이 시인의 운산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표상에 대한 내밀한 사유와 적실한 이해로부터 비로소 우리는 폐기할 것들의 숙주로 살고 있는 이의 곤혹스러운 윤리가 모든 끝의 시작임을 배운다. 드물고 귀한 시선을 이제 우리시는 지녔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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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다시 별들의 방언을 찾아

 

 

 

감사합니다. 그저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말밖에 떠오르질 않습니다. 늦은 밤. 홀로 창밖을 보다가 문득 별을 발견했습니다. 예전 서울에 올라와 옥탑방에 살 때는 별이 참 많았습니다. 지금이라고 그 별이 줄어들지는 않았겠지요. 당시엔 자주 하늘을 올려다 볼 때였습니다. 문학을 하고 있고, 시를 쓰고 있는 제 자신이 안쓰럽기도 하고 간혹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무릎 꿇고 살더라도 시를 쓸 수만 있다면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니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변해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혹시 시인의 자존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교만하지는 않았는지, 시를 제 목숨보다 앞에 놓고 사는 시인들의 작품을 함부로 폄훼하지는 않았는지 곱씹어 보았습니다.

면구쩍어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이 세계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는 별이 제게 자꾸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별의 소식을 잘 받아 적었느냐고. 많이 바쁘지 않았느냐고. 시가 네게 어떤 의미가 되었느냐고.

시는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언이었습니다. 훈육된 제 언어는 너무 짧고 황망하여 이리저리 변죽만 울리다가 이내 사그라들기만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제가 찾은 유일한 언어였습니다. 운명적으로 만난 제 존재와 저를 둘러싼 환각의 관계들을 밤새도록 되작이며 중얼거려도 헛헛하지 않았습니다. 내게도 예술적 파토스가 있다면 이 방언을 잊지 않고 목이 쉬도록 불렀다는 것이겠지요. 신과 마주하는 기도와 시와 마주하는 방언 사이에서 늘 헤매었던 것 같습니다. 때때로 그 자발적인 영혼의 방랑이 변덕을 많이 부렸습니다. 지치기도 하고 도망치고 싶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 상은 그런 제 마음을 다시 붙잡아 놓으려는 신호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가볍고 산뜻하게 시를 쓰고 싶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칭얼대기도 싫고 노인네처럼 훈계하기도 싫습니다. 늘 새로운 것만 요구되는 시대에 저 먼 시간의 강을 헤엄치려 합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들을 탐하며 이 세계 이전의 존재들을 그리워하겠습니다. 최초의 말을 만나기 위해 방황하겠습니다.

제 육체는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 영혼 또한 영원히 완성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전언으로 삼고 있는 헤세의 말처럼 “너는 완벽한 교훈을 동경하지 말고 너 자신의 완성을 동경하라”는 말을 가슴에 얹을 것입니다.

어짊으로 이 자리를 마련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이 큰 빚을 언제 갚을까요. 이제 별의 신호에 따라 다시 외계의 방언을 받으러 가야겠습니다.

 

_ <현대시>, 2014년 5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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