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1.04.03 그때는 명왕성이 있었지
  2. 2006.12.03 쓸쓸한 시인을 위하여

이재훈

 

명왕성 되다(plutoed)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음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시집 명왕성 되다(민음사, 2011) 중에서

 

2005년 결혼을 했다. 평생 혼자 살 것이라는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고 누구나 한다는 결혼을 했다. 시인에게 결혼은 누구나 하는 일이 아니다. 종교적 신념에 비례하는 순교자적 소명 없이는 결혼을 생각할 수 없다. 당시 서른 넷. 시를 쓰고 대학원 박사 과정이며 비상근 문예지 편집자였던 나도 평범하게 살아볼 요량으로 결혼을 했다. 예비 신랑신부의 자취방 보증금을 빼니 오천만원이 되었다. 이러저리 돈을 더 융통해서 육천오백만원짜리 방 두 칸이 있는 전셋집을 구했다. 집은 지하철 2호선 신림역 근처에 가까스로 구했다. 지하철도 있고, 시장도 있고, 먹자골목도 있고, 게다가 월세가 아닌 전세라니. 신림동은 시골에서 상경한 내 정서와 잘 맞는 동네였다. 서울 토박이보다 고향이 남쪽인 분들이 훨씬 많았다. 무엇보다 시장 물가가 저렴했고, 신림동 순대타운이나 고시촌으로 들어가면 값싸고 푸짐한 음식점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어느 동네든지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저녁약속이 있어서 저녁을 먹고 지하철 막차를 타고 신림역에 도착했다. 집에 가기 위해서는 역근처 유흥주점 골목을 지나가야 했다. 그때 어떤 청년이 내 손목을 잡았다.

형님. 놀다 가시죠?”

전 집이 여기 바로 앞이에요. 놀러 온 거 아니에요.”

에이. 왜 이러실까. 잘 해드릴게요.”

진짜 집이 요기 바로 앞이라니까. 자꾸 그러네.”

일명 삐끼라고 부르는 주점의 호객꾼이었다. 근처에 단란한 주점이 많았는데 당시에는 거의 호객꾼들을 두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호객꾼과의 실랑이가 꽤 오랜 시간 지속되곤 했다. 한 마디로 떼어내기가 정말 어려웠다. 화도 내보고, 무시하고 지나가 보기도 하고, 돈이 없다고 지갑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호객꾼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조금 늦은 시간이면 빙 에둘러서 집에 들어갔다.

또 하나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출근길의 고통이었다. 서울살이 직장인들의 출근길 노고를 고스란히 체득하게 되었다. 나는 며칠은 출판사로 며칠은 대학원으로 출근했다. 늘 지하철을 탔다. 출근길의 2호선은 지옥철이었다. 푸시맨이 있던 시절이었다. 차를 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으면 뒤에서 푸시맨이 밀어 넣었다. 매일 구겨져서 지하철에 실려 갔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앞사람의 눈과 마주하는 것이다. 애써 서로 눈동자를 아래로 깔거나 눈을 감는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고개를 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므로. 눈을 감는 대신 매일 온갖 인간 군상들의 냄새와 소리들을 섬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비누냄새, 목욕탕 스킨 냄새, 전날 숙취 냄새, 꼬락내, 방귀 냄새, 암내, 오래 묵은 곰팡내, 신음, 하품, 욕소리, 핸드폰 벨소리, 진동소리, 안내 방송, 밀지 마요, 죽겠네, 왜이래, 저기요, 여기요, 저 여기 내려요, 다음에 내리십니까, 내립시다, 내린다니까.

명왕성 되다(plutoed)라는 말은 2006년 미국 방언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단어였다. 명왕성(Pluto)이 태양계 행성 지위를 박탈당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지하철 무가지 신문에서 읽었다.요즘은 모두 스마트폰을 쳐다보지만 당시만 해도 대부분 지하철에 무료로 배포되는 타블로이드 신문을 보았다. 세상에나. 태양계의 별도 지위를 잃는다니. 이런 일도 있구나. 그 기사가 신기해서 신문을 찢어 주머니에 넣었다. 태양계에서 가장 먼 별 명왕성이 박탈당했다. 태양계에서 소외되었다. 누가 박탈했나.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그랬단다. 나사에게 그런 자격을 누가 주었나. 아무도 모른다. 우리에게 말도 없이 왜 명왕성을 없앤다고 난리인가. 마치 꿈을 빼앗는 것처럼 이상했다.

매일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매일 박탈당하는 꿈을 꾸며 지하철 2호선을 돌고 도는 건 아닌가. 나는 완전히 소외될 때까지 2호선을 돌고 돌 것이다. 지하철에서 눈을 감으면 너는 명왕성 되었어 라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너는 박탈당하고, 소외당했단다 하는 중얼거림이 들렸다. 첩자처럼 도시를 배회했다. 허무의 그림자만 잔뜩 거느린 채 혼자 있고 싶은 곳을 찾아 다녔다. 그 시간들이 빚어낸 시가 바로 명왕성 되다이다.

내게 지하철 2호선은 삼십대를 통과했던 서울의 상징과도 같다. 명왕성 되다는 신림에서 합정을, 합정에서 증산을 오갔던 날들의 기록이다. 또한 두 번째 시집의 표제시가 되었다. 이 시집에 수록된 남자의 일생, 매일 출근하는 폐인, 신림동, 귀신과 도둑등도 모두 신림동과 지하철 2호선을 배경으로 쓴 시편들이다. 어쩌면 그 시절 가장 많은 시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평범하게 살려고 결혼을 했지만, 다른 사람 살 듯 평범하게 사는 게 비범하게 사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간들도, 가장 바쁘고 처참했던 시간들도 그 시절이었다. 신림동에서 2년을 살고 그곳을 떠나왔다.

ㅡ <시인시대>, 2021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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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未知


김수영은 <詩人의 精神은 未知>라는 글에서 “그의 모든 관심은 내일의 시에 있다. 그런데 이 내일의 시는 未知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정신은 언제나 미지다. 고기가 물에 들어가야지만 살 수 있듯이 시인의 미지는 시인의 바다다. 그가 속세에서 愚人視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기정사실은 그의 적이다. 기정사실의 정리도 그의 적이다.”라고 했다. 김수영이 말한 적(敵)은 기존에 있어 왔던 것, 기존에 있어 왔던 것의 정리다. 그러나 김수영도 기존의 것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자신의 시에 대해서 규정하고 정리할 필요가 없다 했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시와 당대의 문학적 정체성과의 싸움을 벌였다. 그의 글은 독설이지만 또한 결벽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가. “시인은 영원한 배반자다. 寸秒의 배반자다.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

2. 寸秒의 배반자

시를 생각할 때는 시소를 타고 있는 느낌이다. 때론 방법이 내용을 올라탔다가 내용이 방법을 올라타기도 한다. 방법 때문에 내용이 가벼워지기도 하고 내용 때문에 방법이 가벼워지기도 한다. 방법과 내용이 수평을 유지하는 팽팽한 긴장감은 쓰면 쓸수록 어렵다. 그래서 때론 내용이 있다 하여 낡은 방법을 슬쩍 숨기기도 하고, 방법이 있다 하여 빈한 내용을 숨기기도 한다. 김소월이, 로버트 번즈가 위대한 이유는 이런 긴장감과 다름 아니다.
언어가 형식 속에 스며들어 세계를 지배할 때 한 편의 시는 언어를 뛰어 넘는 그 무엇이 된다. 이런 느낌은 시를 쓸 때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뮤즈가 찾아와 내 오감을 건드려 주술의 언어가 토해지는 시는 이제 아주 가끔이다. 이때 형식과 내용은 이미 시인의 손끝을 떠나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 이후는 무엇인가. 바로 ‘寸秒의 배반자’ 역할을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내 방법을 배반하고 내 세계를 배반하고 지루하다 못해 그 모든 걸 배반한다. 엘리엇이 말한 ‘감수성의 통일’은 이 모든 것을 용광로에 밀어 넣을 때 가능한 일인가.
이럴 때 문득 쓸쓸해진다. 하지만 그 쓸쓸함을 시로 선뜻 옮기지 못한다. 쓸쓸함이 내 삶의 사연보다 못하며 거리의 감동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백지 위에 몇 마디를 긁적이다 그냥 변죽을 울리고 말 뿐이다. 그리고 나는 목적없이 거리를 걷는다.

3. 아주 사소한 거리

요즘 나는 거리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아니 목격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얼마 전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보았다. 샛노란 은행잎이 거리에 흩날렸다. 비둘기들이 간신히 은행잎들을 피해 날아다닐 정도였다. 그 광경은 마치 황혼녘에 결투를 벌이는 서부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장감마저 주었다.
그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모두 쓸쓸한 뒷모습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쓸쓸한 어깨들의 부딪힘과 서늘하게 부는 바람. 그 배경에 눈부실 정도로 노란 은행잎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쓸쓸함의 풍경은 아주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쓸쓸함이 아름다움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4. 가면

대체로 쓸쓸함은 상투적인 가면을 쓰고 찾아온다. 무언가 정확히 말할 수 없는 내면의 결핍이나 부재를 우리는 쓸쓸하다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쓸쓸함’은 뭉뚱그려진 정서이다. 쓸쓸함은 외로움과 적적함의 일상어이다. 그러기에 가장 가까이에서 우리의 정서를 대변해주는 언어이다.
누군가가 ‘쓸쓸하다’고 했을 때 우리에게 가장 먼저 보여지는 건 상투적인 가면이다. 말하는 자도 알고 그것을 듣는 자도 안다. 상투적이란 말 속엔 습관성이란 긴 골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쓸쓸하다’고 습관적으로 얘기한다. 이 습관이 ‘쓸쓸함’이란 말을 상투적인 골 속에 가두어 놓는다.
나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이 쓸쓸함과 직접 만나는 느낌이다. 찬바람이 내 폐부를 훑고 지나가면 내 존재의 밑바닥에 달라붙어 있던, 그동안 모르고 지내왔던 마음들이 떨어져 보풀처럼 흩날리는 것 같다. 입김을 불면 빠져나가는 불편한 관념 덩어리들. 그제서야 나는 차갑고 텅빈 사물이 된다.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
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품어 준다.

그리고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내 손끝에서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보내고 만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아름다운 영원을
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도 없는 나의 손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나의 시와 함께.
― 김현승, <절대고독>

5. 쓸쓸함을 사랑하기까지

날이 추워지면서 잠도 많아진다. 바쁜 일상이 잠을 더 재촉한다. 때론 내 코고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온 몸으로, 온힘을 다해 내뱉는 나의 숨소리를. 내가 살아 있음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표현한 적이 그동안 있었을까.
김현은 “정말 무서운 욕망이란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왜 그런 욕망이 생겨나는가까지 밝히기를 바라는 욕망”이라고 했다. 이 갈급한 ‘채움’의 욕망의 배면에 ‘성찰’과 ‘반성’의 욕망이 숨어서 날 또렷이 쳐다보고 있다. 이 쓸쓸함이라는 관념덩어리가 뜨거운 시로 태어나지 않을 때, 나는 또 가면을 쓴다. ‘유쾌함’이라는 가면을 쓴다. 거리를 걸으며 그 유쾌한 보폭을 따라가다가 어느덧 쓸쓸함을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_시와정신, 2002.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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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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