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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8.09.28 어떤 하루 - 시인의 아케이드 1

내 생애 마지막 음악이 기도라면

 

이재훈

 

 

우울한 음악을 좋아했다. 한때는 병적으로 좋아했다. 남들은 사춘기에 겪는 우울을 늦게서야 앓기 시작했다. 까닭 모를 우울을 친구로 삼았다. 늘 땅만 보며 걸었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용인하지 못했다.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우울한 곡들이 되레 위로가 되던 시절이었다. 요절한 유재하를 그리워했고, 김현식이 사망한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이었다. 나중 김광석이 자살하리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우울하고 거칠고 처절한 곡들만 탐하면서 스스로 유폐된 채 말도 안 되는 문학의 성채를 쌓아가던 때, 여러 음악들을 만났다.

<글루미 선데이>는 위험한 곡이라고 했다. 이 곡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자살했다고 한다. 음악이 가지는 전설이나 풍문은 자주 김을 빼게 만든다. 막연한 기대는 막연한 느낌만을 남기고, 우월한 기대는 부정적인 느낌을 만들기 마련이다. 글루미 선데이가 내겐 그랬다. 너무 대단한 곡이었지만, 죽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곡이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조금 우울했고, 조금은 편안했다. 빌리 홀리데이가 부르는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좋아서 미치겠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레이 찰스가 부르는 글루미 선데이는 낭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 노래 때문에 일요일이 조금 우울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렇게 우울해지지는 않았다. 일요일은 원래 그런 날이니까.

사랑은 내 생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누가 이 우울하고 폐쇄적이고 백수인 스무 살의 청년을 좋아할 것인가. 하지만 우울한 백수 청년에게 감지되는 모성적 연민을 사랑의 느낌으로 착각하는 친구들도 간혹 있었다. 잠깐씩 연애도 아닌 연애 비슷한 것을 하기도 했다. 손을 잡았던가. 눈빛을 마주 했던가. 입을 맞추기에는 내가 너무 초라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연애를 하며 우울한 음악을 많이 들려주었던 기억이 난다. 우울한 음악을 들으며 세상의 모든 우울이 나라는 필터를 통해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영혼의 기품으로 변화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사랑이라는 마음을 건드릴 수도 있을까 바랐다. 참으로 치기어린 마음이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위로였다. 음악이 나를 위로할 때, 한없이 자유로운 공기를 느꼈다.

무슨 음악들이 있었을까. 개빈 브라이어스의 <Jesus'Blood Never Failed Me Yet>. 나중 탐 웨이츠도 불렀다. 음악이 너무 길었지만, 긴 음악이 가지는 오기가 느껴져서 좋았다. 약물과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싱어송라이터 엘리엇 스미스의 <Between The Bars><Miss Misery>는 한때 어둠이 밀려올 때마다 듣고 싶었던 곡이었다. 존 서먼의 바리톤 섹소폰은 압권이다. 존 서먼의 <Private City> 앨범을 틀어놓으면 시가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내게 가장 처절하고 우울한 곡은 마우로 펠로시였다. 마우로 펠로시의 <suicidio><Al Mercato Degli Uomini Piccoli>는 한없이 가라앉고 끝도 없이 침울해진다. 매번 술을 마시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였다.

우울한 음악들을 예전처럼 많이 듣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경쾌함보다는 우울함 쪽이 훨씬 좋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우울한 음악들을 통해 더 우울해지려는 것보다는 그 우울함을 즐기며 견디려했던 것 같다. 음악이 주는 덕목 중에 성찰이 있다면, 우울한 음악은 그 덕목을 가장 잘 실천할 수 있는 경우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죽기 전이라면? 아무리 우울해도 죽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죽음은 용기와 태도와 실존의 자긍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므로.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면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옆에 함께 있었던 강도의 심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영혼의 구원과 용서와 감사와 회개가 점철된 가장 나약한 자의 고백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문득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자주 내 입에서 흥얼대는 노래다. <Amazing grace>. 우리나라에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가로 번안되어 있다. 마할리아 잭슨이 불렀던 Amazing grace, 사랑과평화가 불렀던 Amazing grace, 윤복희와 인순이가 불렀던 Amazing grace, 박정현이나 소향이 불렀던 Amazing grace. 그 모든 Amazing grace가 내게는 모두 뜨거운 벅참이다. 전주 부분에 파이프 오르간이 깔리는 마할리아 잭슨의 곡이라면 더욱 좋겠다.

- <더 멀리> 마지막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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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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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하루

 

이재훈

 

하루

 

<멋진 하루>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은 하정우와 전도연. 둘은 연인이었다가 1년 전에 헤어진 관계이다. 전도연은 하정우를 일 년 만에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 빌려준 돈은 350만원. 헤어진 사이에 좀 야박하다 싶지만 사정을 들어보면 둘 다 딱하다. 지금 이들은 자신의 찌질하고 쪼잔함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돈이 급하니까. 이후 영화는 빌려준 돈을 받으려는 전도연이 돈을 갚는다는 하정우를 따라다니는 과정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특별히 기억나는 어떤 하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우리에겐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온다. 결혼도 사업도 실패하고 경마장이나 전전하는 하정우를 따라다니다 보니 그렇게 밉지만은 않은 것이다. 일상 속에 존재하는 미묘한 감정선이 아주 섬세하게 그려진다.

<멋진 하루>는 일상의 힘이 가진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인간의 일상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어떤 나름의 이유와 변명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이유와 변명들이 하찮거나 심오하거나 하는 문제는 개인이 바라보는 입장차이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공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은 고백에 가깝다. 고백은 늘 부끄러운 것이다. 자랑스러운 고백은 그다지 재미가 없다. 늘 반복되는 일상. 그 일상의 몇 순간을 고백하려고 한다.

 

빈 강의실

 

나는 강의를 한다. 구체적으로는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강의하고, 내가 운영하는 창작반에서 시창작을 강의한다. 일주일에 하루는 잡지사로 출근해 일을 본다. 강의를 한 지는 15년 정도 되었다. 가능하다면 한국의 마지막 시간강사가 되고 싶다. 그만큼 끝까지 하고 싶다는 말이다.

나는 강의가 끝나고 난 후, 강의실에서의 텅 빈 침묵을 좋아한다. 모두 떠나고 아무도 없는 빈 강의실에서 몇 분 동안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있다. 빈 강의실에는 알 수 없는 흔적들이 존재한다. 파장 이후에 오는 쓸쓸함과 안도감, 그리고 허전함이 빈 강의실에는 존재한다.

학교 다닐 때에도 빈 강의실을 주로 애용했다. 도서관보다 빈 강의실을 찾아다니며 공부하면 집중이 더 잘 되었다. 비밀이지만 빈 강의실에서 밀애를 즐기기도 했다. 빈 강의실에 슬그머니 들어오는 햇살을 마주하면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다. 그 햇살에 자꾸 손을 갖다 대보는 것이다.

 

버스

 

일 때문에 일주일에 몇 번은 버스를 탄다. 내가 사는 곳은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꼭 마을버스를 타야 한다. 마을버스는 대개 거칠다. 작은 버스이지만 만만히 보면 안 된다. 손잡이를 꼭 잡고 타야 한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면 잠시 버스에서는 낭만을 즐길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시간이 자주 오지는 않는다. 버스에서 나는 주로 팟캐스트를 듣거나 시집을 읽는다.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에는 시집을 읽고, 서서 갈 때에는 팟캐스트를 듣는다.

일주일에 한번은 고속버스를 탄다. 지방강의 때문이다.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지방행 고속버스를 탄다. 두 시간 정도 걸린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 버스에서는 주로 잠을 잔다. 어떤 음악이 내 잠에 도움을 줄까를 고민하며 버스에 오른다. 잠을 자다가 깨기도 하고, 잠을 자다가 차창 밖을 구경하기도 한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에서도 잠을 잔다. 어떤 날은 음악을 듣기도 하고, 어떤 날은 영화를 보기도 한다. 어떤 날은 책을 읽기도 한다. 그리고 간혹 어떤 날은 시를 쓰기도 한다. 버스에서 쓴 시는 내게 몇 안 되는 생활시이기도 하다. 아래는 최근 발표한 버스에서 쓴 시.

 

차창 밖으로 비가 내린다.

버스를 타기 전에는 맑았던 하늘인데

집으로 가는 길에 비가 내린다.

지방 소도시의 대학에서 시간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갈 때면 늘 가혹하게 막힌다.

모두 저마다 집으로 가거나

외로움을 달랠 사람들을 찾아가거나

저녁 일터로 가는 길일 것이다.

휑한 마음 한구석에 빗방울이 또르륵 떨어진다.

매일 보따리를 들고 어딘가로 나서는

장돌뱅이의 저녁이 궁금하다.

언제쯤 집으로 당도할까.

쉬어야 할 집은 멀고

목은 더 컬컬해진다.

버스 뒷자리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연유인지 생각하다

뒤로 가서 가녀린 등을 토닥거려주고 싶지만

모른 척 그냥 눈을 감는다.

도착할 집은 멀고 잠은 오지 않는다.

버스가 도착할 무렵이면

가까운 막걸리집부터 찾을 것이다.

컬컬한 목이 바짝 마른다.

― 「귀가전문

 

프로야구

 

매일 하는 일상 중 하나는 프로야구 하이라이트를 보는 일이다. 전 구단의 하이라이트 및 경기 영상을 다 본다. 시간이 있는 날은 야구중계를 저녁 내내 본다. 함께 사는 가족들의 원성을 들으면서 꿋꿋하게 본다. 가끔씩 MLBPARKSTATIZFoulball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눈팅을 하곤 한다. 일면에 몇 번씩 경기장을 찾기도 한다. 그런 날은 맥주를 마시다가 경기에 집중을 못하지만. 나는 한화 이글스 팬이다. 요즘 야구보는 게 많이 즐겁다. 그 이유는 야구를 좋아하는 분들은 모두 알 것이다.

 

카프카독서실

 

책은 늘 읽는 것이므로. 늘 일주일에 몇 권의 시집을 읽는다. 그리고 다른 책들도 읽는다. 누워서 읽거나 기대어서 읽는다. 요즘 읽던 그 책이 어디 갔는지를 자주 찾아다닌다.

카프카독서실에 관한 얘기는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내 방이 카프카독서실이다. 하지만 지금 내 방을 초등학교 2학년 아들에게 빼앗길 위험에 처해 있다.

지금 내 책상에 쌓여져 있는 책들은 다음과 같다. 십여 권의 문예지. 최근 배달된 십여 권의 시집. 무라카미 하루키의 <버스데이 걸>, 기욤 뮈소의 <파리의 아파트>, 헤르만 헤세의 <최초의 모험>, 김은상 시인이 쓴 소설 <빨강 모자를 쓴 아이들>, 박영규의 <조선전쟁실록>.

지금 이 글을 쓰는 일요일 오후. 읽던 책을 덮고 프로야구 중계를 본다. 읽던 책을 덮고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일상이다.

 

- <시현실> 201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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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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