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습니다 | 시인 이재훈

이별은 순간이다
그 순간을 이겨낸 자만이
슬픔을 바닥에 깔고 앉을 수 있다
나는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생을 버텨왔다 그러나
멀리서 새벽 종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어머니가 마루에 앉아 뜨개질을 하신다
엉덩이 밑에서 건져 올린 슬픔을
한 올 한 올 뜨고 계신다

이재훈의 시 ‘마루’ 전문


마치 얼굴로 시를 쓰는 듯한 따뜻한 미소의 이재훈 시인

다시 한 해가 저문다…

세월로 치자면 저문다는 것은 일어선다는 말의 프롤로그 정도 될 것이다. 한 해가 가면 예기치 못하는 새해가 다가서므로. 그러나 마치 세월을 역행하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월간 문예지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 가는데 옛 모습 그대로 문학의 텐트 속에서 라면을 끊이는 사람들이다. 문예지를 만드는 사람들 중에서 시 전문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더욱 고전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월간 ‘현대시학’과 ‘현대시’의 존재는 가련하면서도 경이롭다. 월간 ‘현대시’를 방문 하려면 이재훈이라는 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 이재훈 시인이 줄곧 수문장과 공장장 노릇을 하다가 첫 시집을 상재했다.

ㅂ ㅊ

반갑습니다.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를 잘 읽었습니다. 우선 첫 시집을 낸 소감을 한 번 듣고 싶군요.

ㅇㅈㅎ

반갑습니다. 저 또한 선생님 시의 애독자인데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시집 출간을 계획한 지 몇 년이 지나서야 첫 시집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먼저 부끄러움이 앞서 앞으로는 어떤 시를 써야 하나, 또 시집을 낼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이면에 이제 시집이 한 권 있는 시인이 되었구나, 하는 스스로의 위안도 함께 있었지요.

ㅂ ㅊ

강원도 영월 생인데 언제까지 살았으며 어떤 청소년기를 보냈습니까?

ㅇㅈㅎ

강원도 영월에서는 초등학교 입학 즈음까지만 살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제천, 횡성, 인제 등 강원도 일대를 옮겨 다니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영월군 하동면 주문리인데 구름이 모이는 동네라 하여 ‘모운동’이라고 불리워졌습니다. 해발 800미터 가까이 되는 하늘 아래 첫 동네입니다. 원래 화전민들이 살고 있다가 탄광이 개발되면서 탄광촌으로 바뀐 동네였습니다. 부친께서는 그곳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지요. 지금은 폐광된 지 오래되었고, 인적이 드문 고요하고 깊은 산중 동네로 바뀌었습니다. 초등학교 이후로 문경새재를 넘어 경북으로 이사를 왔는데, 아무튼 제 청소년기는 잦은 이사로 늘 낯선 풍경과 사람들과의 만남과 이별로 보냈던 것 같습니다.

ㅂ ㅊ

왜, 어쩌다가 이 자본주의 시대에 시인이 되었습니까?

ㅇㅈㅎ

만약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무엇이 되어 있을까. 좀 끔찍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마 생리적으로 맞기 때문일 거에요. 시를 쓴다는 것이 자본주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겠지요. 독자와의 소통은 자본주의가 매개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반대로 자본주의의 원리에서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글이 시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ㅂ ㅊ

이번 시집에 도시를 배경으로 한 글이 많이 보입니다. 이시인의 시 속에 나오는 도시와 종교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요.

ㅇㅈㅎ

도시생활은 이십대가 되어 처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줄곧 읍면 단위의 시골에서만 자랐으니까요. 도시에서의 생활은 제 이십대에 상당한 활력을 주었지만 또한 너무나 고통스러운 기억을 준 것도 사실입니다. 여전히 도시는 낯선 곳이고, 그러면서 이제 도시가 아니면 불편해하는 제 모습이 여러 가지 시적 감성을 갖게 만드는 겁니다. 종교는 제가 운명적으로 지고가야 하는 십자가 같은 것입니다. 저는 엄격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모태신앙이지요. 그러니 그냥 자연스럽게 제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ㅂ ㅊ

월간 “현대시”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지요. 이재훈 시인하면 현대시를 떠올릴 정도로 밀착되어 있습니다. 시의 범람 속에 묻혀있다고도 볼 수 있을 텐데요. 또 상식적인 질문이지만 이시인의 창작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ㅇㅈㅎ

문예지에 근무하고 있으니 문학 활동하는 데 많은 제도적인 도움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잡지에 있다보니 저보다는 다른 시인을 먼저 챙겨야 하고, 잡지에 있다는 이유가 오히려 이러저러한 시선들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문학잡지 편집자로서 남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시인’으로 남고 싶다는 것입니다. 시 속에 살고 있어서 때로는 시에서 벗어나고도 싶습니다. 너무 오래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시 속에 있어서 시를 바라보는 눈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ㅂ ㅊ

약력을 보니 두 대학에서 강의를 하더군요. 이 자리야 이 시인을 만나는 자리지만 이 시인이 놓인 특별한 위치를 감안해 특별한 것을 좀 물어보지요. 독자들을 위해 한국 시인들의 관심사를 개괄적으로라도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가령 어떤 연령층은 어떤 문제에 관심이 크고 어떤 부류는 어떻게 쓴다 등 말이지요. 아니면 전혀 그런 변별성이 보이지 않던지...

ㅇㅈㅎ

간단히 얘기하기엔 어려움이 있는 질문인데요. 최근 들어 전 세대와 달라진 시적 경향이 뚜렷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세대론적인 문제이기보다는 취향의 문제인 것 같은데, 우선 대중문화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중요한 기표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념 시대를 넘어 탈근대를 살고 있는 지금, 시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관심사를 말하기엔 무리입니다. 굳이 세대별로 따진다면 전통의 고양과 새로운 감수성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전통적인 시적 덕목과 가치관을 더 깊이 이어나가려는 관심과, 자본주의의 극점에서 느끼는 정신적 공황을 새로운 자아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말해 볼 수 있습니다.

ㅂ ㅊ

오랜 얘기지만 문학이 독자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큽니다. 대부분이 미디어와 영상물의 탓으로 돌리는데 문학 내부의 문제는 없을까요.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입장에서 보다 실감나게 느끼는 원인이 있지 않을까요.

ㅇㅈㅎ

문학 독자층이 감소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현 출판계의 상황이 이를 가장 잘 말해줍니다. 저는 멀티미디어의 시대에서 본격 문학의 독자수가 줄어드는 건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내의 시간들을 견뎌야만 얻을 수 있는 독서의 경험들을 재밌고 환상적인 멀티미디어가 대체하기 때문이지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오히려 문학이 문학 본연의 모습을 가질 때 더 오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구 사회를 보면 억압 없는 민주사회에서 문학의 모습은 더 진지하게 오리지널리티를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중요한 것은 문학 자체의 형질변화가 아니라 문학을 재가공해서 독자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인프라와 기술의 개발일 것입니다.

ㅂ ㅊ

문단 교유의 폭이 넓겠어요. 주로 어울리는 선배 동료들이 누구인지요. 만나면 뭐 합니까? 이시인 주변의 문화풍토가 궁금하군요.

ㅇㅈㅎ

아무래도 그런 편이겠지요. 지속적으로 어울리는 문인들은 비슷한 또래의 시 쓰는 친구들입니다. 만나면 대개 술 마십니다. 시인 축구단도 있고 하지만 운동도 좋아하지 않고 해서요. 참 요즘은 산엘 자주 다니려고 노력합니다.

ㅂ ㅊ

앞으로 계획이나 가고자 하는 길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ㅇㅈㅎ

계획이 있다면 시를 좀 열심히 쓰고 싶다는 것과 예전엔 다른 장르의 글쓰기에도 열심이었는데 시간을 핑계 삼아 게을렀습니다. 좀 열심히 써보고 싶습니다.

ㅂ ㅊ

마지막으로 근간 감명 깊게 읽은 책이나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으면 두 세권 말씀해 주시지요.

ㅇㅈㅎ시는 여전히 읽고 있고요. 최근에 읽은 소설은 프랑스 작가 미쉘 우엘벡의 [소립자]이구요. 요즘은 신간보다는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강석경, 이승우 등의 작가들과 비교신화학자 조셉 캠벨 등등.

앞글에 문예지 만드는 사람들을 가련하다고 했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들은 하나의 권력이다. 지면이 점점 줄어들면서 권력은 속성을 알게 될 것이다. 내노라 하는 시인들을 상대하면서 터수를 자랑하고 목에 힘을 줄만도 한데 이재훈 시인은 늘 겸손하다. 점잖다. 그의 벗들과 허물없이 지낼 때는 어떨지 모르지만 이방인에게는 항상 따듯한 미소를 보낸다. 마치 얼굴로 시를 쓰는 사람 같다. 이 세상에 그런 시만 나돌아 다닌다면 얼마나 따뜻할까. 돌아서기 전 나눈 악수의 온기가 좀처럼 가시지 않는 초겨울이다.


작가 박철
- 60년 서울 출생. 단국대 국문과 졸업.
- 87년 『창작과 비평』에 시 <김포> 외 15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 시집으로 [김포행 막차] [밤거리의 갑과을] [새의 全部]
[너무 멀리 걸어왔다]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등이 있다.
- 97년 『현대문학』에 단편 <조국에 드리는 탑>이 추천되어
소설가로 등단했다.

|출처|
http://www.booxen.com/book_readers_view.asp?sabo_ho=81&part=3&subpart=1&page=1&seq_no=791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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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의 아들’을 위한 바람의 계보



김태형



첫 시집을 낸 이재훈 시인을 나는 어디엔가 “영원한 꿈의 시민(市民)”이라고 적어놓았다. “불을 타고 오르거나 허공에 발을 내미는”(「공중정원3」) 새로운 공중의 시민이라 했다. 그를 불러 ‘바빌로니아의 후예’라고 한 것은 혼돈의 어원, 저 바벨(Babel)의 도시로부터 그의 언어들이 이제 막 태어나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시의 음울한 리듬을 빌어 꿈꾸는 것들은 모두가 그 기원에 도달하려는 슬픈 몸짓이었다.

이십대 후반에 등단한 이후 이재훈 시인은 그 누구보다도 활발하게 그만의 푸른 언어의 휘장을 펼치고 있었다. 그와 나는 거의 나이 차이가 나지 않지만, 그의 언어들은 나에게도 예외 없이 낯선 것이었다. 간혹 나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고는 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거처했던 집들을 매번 찾아다녔다. 그와 알게 된 이후 그는 세 번 거처를 옮겼다. 그때마다 나는 그의 방을 찾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한 번도 혼자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인지, 그의 삶을 부러워했다. 나는 그의 방이 점차 커지고, 책이 늘어나는 현장을 지켜보았다. 그의 방은 책으로 가득 쌓여 비좁을 수밖에 없었다. 밤늦게 찾은 손님은 겹겹이 쌓아놓은 책들을 칸막이 삼아 새벽녘 잠시 잠이 들었다가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문 밖을 조금 나서면 대도시의 빌딩숲마다 휘황찬란한 불빛이 가득했지만 그의 방은 늘 7,80년대쯤의 고전적인 향기가 배어 있었다.

연희동의 자취방으로 늦은 시간 술병을 싸들고 찾아가거나, 꽤 늦은 시간에도 밖으로 불러내어 그와 만났다. 그는 매번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나를 만나러 왔고, 그럴 때면 늘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매캐한 담배 연기 속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는 사이 그도 나처럼 이십대를 건너왔다.

언젠가 평론을 하는 오형엽 선생과 함께 한 자리였는데, 그때 “이재훈 시인은 위아래 20년은 거뜬히 커버한다”는 말씀을 하신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무릎을 쳤다. 이재훈 시인은 그만큼 삶의 폭이 넓고 깊다. 넓고 깊은 자는 또한 고요하고 느리다. 느리고 기다릴 줄 알면서도 늘 바삐 걸음을 옮긴다. 그와 만나면서 알게 된 일이지만, 그는 꽤 많은 곳을 옮겨가며 살아 왔다.

언젠가 정재학 시인이 쓴 시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형은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더듬거리며 태어난 동네를 찾고 있었어요. 눈덮인 들판에서 전화도 했었죠. “엄마, 내가 태어난 곳이 어디에요?” 나는 하필 바람과 다투며 지도를 쫓아 들판을 뛰어다녔습니다.”(「편지, 영월에서」) 이 시를 읽으며, 역시 내가 알던 이재훈이구나 생각했었다. 삼각지의 어느 뒷골목 술집에서 지면에 실린 이 시를 함께 읽은 적이 있었다. 그 순간만큼 시가 살아 꿈틀거리는 때가 어디 또 있을까.

나는 나 자신을 늘 ‘언덕의 아들’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이재훈 시인 역시 이 ‘언덕의 아들’ 계보에 넣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실은 누구나 ‘언덕의 아들’이지만 모두가 이 언덕을 떠나고 없다. ‘언덕의 아들’은 이미 언덕을 잃어버린 아들이지만, 언제나 언덕으로 가고자 하는 아들이다. 이들은 지금 언덕이 사라진 “눈덮인 들판”에 서 있는 자이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바람을 느낄 줄 안다. 늘 바람을 맞고 살기 때문이다. 이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고개를 들어 올리지 않아도 이미 잘 알고 있다. 모두가 바람이 어디로 불어 가는지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동안 이들은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묵묵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나에게 이재훈 시인을 만나는 일은 어느덧 지극한 시간이 되었다. 그를 안지도 꽤 오래 되었지만 늘 만날 때마다 새롭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참된 사람이다. 그의 시가 그렇고, 그의 삶이 그렇다. 나는 여간해서 옆자리를 잘 안 내주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의 성품 앞에서는 언제나 흔쾌히 열려 있는 사람이 되고는 한다.

그가 찾는 바빌로니아의 언덕은 어디에 있는가. 바람에 날리는 지도를 바라보던 그때도 이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람 속에 지도가 날려간 것이 아니라 정작 그 바람이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아마도 지금쯤 또 다른 바람을 따라가려 할지 모른다. 가던 길을 돌려 어느덧 푸른 지평선을 건너려 할지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가던 길을 조금만 더 가보자고 그의 손을 잡는 일뿐이다.



김태형
1970년 서울 출생.
1992년 『현대시세계』 가을호로 등단.
시집 『로큰롤 헤븐』『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출처 : 계간 [시와세계] 2006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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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광화문 350D 테스트샷 중, 잃어버린 조약돌 Noh가 찍어줌]

새로운 시작은 늘 설레임을 줍니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늘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생각없이 가다 보면
나는 왜 여기 서 있는가
정말 아무 것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긴 숨을 쉬고
잠시 지나온 것들을 되돌아 봅니다.
그리고 먼 곳에 그리운 게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내가 그리워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잠시 뜨거워질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때 잠시 쉬어 가겠습니다.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내 맘대로
구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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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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