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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 사전 - 잎

산문 2013. 12. 11. 13:10

 

 

 

이재훈

 

 

 

 

버려진 것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쓸쓸한 존재들이 스멀스멀 꿈틀거린다. 허물어지고 홀로된 존재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서럽게 아름답다. 이런 아름다움은 사람에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잎은 아름답다. 잎이 더 아름다우려면 버려져야 한다. 버려진 것들의 아름다움을 잎이 가장 완벽하게 증거한다.

잎은 꽃과 나무에 떨어질 듯 들러붙어 한 계절을 난다. 초록의 빛깔로 자신의 청춘을 온힘으로 뒤흔든다. 초록의 몸이었을 때 사람들은 그 몸의 숨을 마신다. 청춘의 숨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청춘의 숨처럼 온몸을 차오르게 하는 게 있을까.

잎은 소멸을 증언한다. 소멸의 순간이 아름답다는 역설을 증언한다. 스러져가는 존재에 환호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아직 내 차례는 아니라는 안도감이겠지. 모든 젊음은 시든 운명을 타고 태어난 것. 모든 청춘은 지는 운명을 지닌다. 잎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잎은 저마다 아름답게 늙는 법을 안다. 붉게 늙고 노랗게 늙고 적갈색으로 늙는다. 사람들은 몸에 붙어 있을 때보다 제 몸으로부터 떨어진 잎에 관심을 갖는다. 이탈된 존재에 대한 관심은 본능적인 것일까. 이탈된 나를 본다. 이탈된 우리를 본다. 이탈된 가방. 이탈된 책. 이탈된 영혼. 이탈된 사랑. 주변엔 모두 이탈자들뿐이다. 국적 없는 자들은 고독하고 쓸쓸하겠지만, 그들에겐 소용 있는 고독이 있지 않은가. 아무것에도 소속되지 않고 유일하게 혼자이고 싶다는 철없는 객기가 순간순간 불쑥 일어난다.

쓸려 어딘가로 버려지기 전. 잎은 노쇠해져가는 자신의 미학을 가장 완벽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 소멸의 말로는 잔인하게 버려지는 것이다. 빗자루로 포대자루로 리어카로 트럭으로 쓸리고 실려 버려진다. 태워지고 분해되고 땅속으로 파묻힌다. 마치 아우슈비츠처럼. 마치 신자유주의 시민들처럼.

그러나 잎을 찬양하지 말 것. 소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말 것. 찬양받고 감탄되는 것들은 모두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저 내가 좋고 네가 좋으면 그뿐인 것이다.

 

파편

 

파편의 아름다움은 아마 모여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에서 시작할 것이다. 잎은 저 홀로 있을 때 빛나지만, 모여 있을 때는 거리의 색채가 보여줄 수 있는 충일감 때문에 황홀하다. 초록의 시절. 잎은 서로 손을 잡고 제 어미의 몸을 간절히 부여잡는다. 세상에 간절한 것만큼 마음 아리는 게 있을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잎은 절대로 그 손을 놓지 않는다. 간절한 마음이 잎의 몸을 초록으로 물들게 했을 것이다. 목에 굵은 힘줄이 불거져 초록으로 온몸을 새겼을 것이다.

간절함과는 상관없이 잎이 제 어미와 떨어져야 할 때. 잎은 제 몸을 바람에 내맡긴다. 제 터전이 아닌 어딘가로 잎은 날아간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미지를 향해 잎은 제 몸을 맡긴다. 헤어지고 떨어지고 슬퍼하는 게 추앙받는 계절. 온몸과 마음이 파편으로 남아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계절. 붙들었던 것을 놓을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을 배우는 계절. 가을은 잎의 계절이다. 잎은 가을에 완성된다.

 

기다림

 

벤치에 떨어진 잎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 아마 생의 마지막 기다림이겠지. 어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손을 잡고 벤치에 앉을 때, 그 잎은 치워질 것이다. 기다림은 그런 것이겠지. 바깥으로 치워질지 알면서도 설레는 시간이 기다림이겠지.

잎 하나 책갈피에 꽂아 넣고 짧은 기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본다. 꽃잎은 맑은 물에 띄워 차로 마시기도 한다. 잎은 제 몸이 바짝 말려진 뒤에도 기다림의 시간을 견딘다. 화석조차도, 말려진 몸조차도 쓸모 있는 잎의 오지랖. 말린 잎의 몸에선 향기가 난다. 스스로 욕망하지 못하고 순응적으로 호흡하며 살아온 향. 물과 공기만으로 제 몸을 삼투한 향. 기다림에도 향기가 있다면 이런 내음이 아닐까.

 

태초

 

동물의 노쇠는 누추한데 왜 식물들의 노쇠는 찬란할까. 가장 성실한 생명의 열매였던 잎은 다시 땅의 입으로 들어간다. 마치 그곳이 잎의 기원이라는 듯이. 시(詩)는 잎을 기록하지 않는다. 잎의 운명과 함께하는 것뿐이다.

 

 

_ <문예중앙>, 2013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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