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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2.11 보길도에서 만난 시간의 여울

땅끝마을은 적요했다. 해남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땅끝마을로 오면서 평원의 등 너머로 온 시야 가득 퍼져 있는 노을을 보았다. 해지는 광경도 장관이었지만 해가 넘어가면서 나의 마음도 새로운 세계에 닿는 듯한 느낌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땅끝마을은 서서히 어둠을 드리우고 등을 하나씩 켜고 있었다. 우중전야(雨中前夜)라 그런지 어떤 축축한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그 쓸쓸함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편안한 감정이었다. 그런 묘한 낭만을 느끼면서 땅끝에서 여행의 첫날밤을 보냈다.

그해 가을. 약 1주일의 시간을 보길도에서 보냈다. 혼자만의 여행에 바쳐진 보길도. 그곳을 찾은 것은 딱히 어떤 이유에서라기보다 먼 동경의 갈급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막연하게 갈 수 있는 먼 곳을 머릿속에 그리다가 해남에서도 1시간을 더 가야 하는 보길도를 생각해낸 것이다. 또한 그곳은 시인 윤선도의 얼이 남아 있는 곳이 아니던가.


도시생활이 갖게 하는 무기력한 일상의 순환이 목까지 차올랐을 때 난 무엇을 간절히 그리워했을까. 대개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어딘가로 떠나 새로운 풍경을 만나는 것으로 그런 답답함을 해소하곤 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정작 풍경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어느 순간 나를 마주하고 마는 것인데, 우리는 그 풍경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가끔씩 무작정 떠나는 것으로 새로운 충전의 시간을 얻곤 한다. 다만 보길도 여행이 다른여행과 다르게 각별히 기억나는 것은 내 배낭에 이우환의 『시간의 여울』(디자인하우스)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길도에 들어가면서 나는 이미 자연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있었다. 내가 일찍 죽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런 자연을 보는 기쁨일 것이다. 돌담이 둘러져 있고, 창호지 여닫이문과 돌쩌귀가 아직도 그대로 있는 민박집에 방을 얻었다. 민박집 방문을 열고 바다를 바라보며 이우환의 글을 음미하듯 읽었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드디어 바람 한 점 없는 우주의 일순이 들이마신 숨결과 딱 겹친다. 무언가가 땀과 함께, 일제히 뿜어 나온다. 몸이, 침대가, 방째로 끝없이 녹아 나가, 이윽고 모든 것이 먼 바다가 되었다.

묵었던 민박집

이우환은 일본 모노파(物派)를 창시한 현대미술의 거장이다. 그는 1936년 경남에서 태어나 유년기 때 시, 서, 화를 배우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56년 일본으로 건너가 가장 성공한 예술가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언젠가 그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여백이 넓은 그의 그림은 글과도 많이 닮아 있다.

보길도는 마음에 평온을 주는 바다였다. 비가 올 듯 말 듯하여 날씨는 우중충했지만 그런 하늘이 더욱 여행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깊은 밤, 갯돌이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내는 자갈 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있을 때는 자연의 감동이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우환은 또 이렇게 쓴다. '자연을 이야기하고 자연을 아낀다고는 말해도, 그것은 자신의 이미지를 부풀리고 거기에 형색을 갖추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라고. 나는 과연 그런 것일까. 우문의 자문자답을 하며 모든 것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이미지에 덧칠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내가 갖고 싶은 이미지의 자연. 그 차이 속에서 숨쉬는 모든 사물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듯했다.

이우환은 결락(缺落)의 세계를 좋아한다고 했다. 시간적인 것이든 공간적인 것이든, 그가 좋아하는 결락의 세계에 나도 동참해 보고 싶었다. 그는 그것은 먼 완성을 향해 만들어가는 여정의 세계이기도 하고, 하염없는 소멸을 향해 무너져가는 과정의 세계라고도 했다. 이러저러한 생각들 속에 지내다가 이틀을 바닷가 근처에서 소요했다.

역동성이 없는 자연 속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금세 지치게 마련일까. 이틀이 지나니 조금 무료해졌다. 다행히 민박집 주인아저씨의 낚싯배를 얻어 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낚싯배를 타고 근해로 나가 난생 처음으로 바다낚시를 해 보았다. 내가 잡은 것은 노래미라는 작은 물고기였다. 파닥거리는 물고기의 역동적인 힘을 느끼는 낚시의 재미에 온종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내가 잡은 물고기를 회를 떠서 맛있게 먹고 또 밤을 맞았다. 그리곤 손끝에 느껴지던 낚시의 손맛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물고기의 가장 마지막 힘을, 자신의 목숨을 다한 힘을 내가 즐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우환의 말처럼 그것도 소멸을 향해 무너져가는 과정일까.

그 후로 민박집에 며칠을 더 머물며 보길도의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중리와 통리의 해변과 고산 윤선도의 세연정, 부용동정원을 돌아보며 풍경의 호흡을 한 숨이라도 더 들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어느덧 지겹던 일상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일상을 피해, 일상을 잊기 위해 떠났던 여행에서 나는 일상의 소중함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우환의 글이 가지고 있는 힘이기도 하다.

그의 글은 이 하찮고 천박한 일상이 얼마나 의미 있고 근사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 준다. 거대한 일상의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었던 일상의 여백을 생각하게 한다. 그의 말대로 '예술가는 공간을 만들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無)의 영역이니까. 공간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우환은 우리가 모르는 눈뜬 공간, 일상의 공간을 점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여는 길을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 날 민박집 들마루에 누워 낮잠을 잤다. 낮잠을 깨고 이우환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꼭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기록해 둔 글처럼 나는 무(無)의 바다에 그렇게 오래도록 가만히 있었다.

눈을 감으면 뭔가가 사라져가는 기척이 있다. 재빠른 풍화의 소리다. 철판이 사각사각 삭아 앉고, 돌이 바삭바삭 증발을 서두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돌도 철판도 그리고 마당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언제쯤인지 눈을 떴을 때에는, 나는 무의 바다 속에 있다.

_ 북새통 2006년11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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