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의 현황과 미래

 

이재훈
(시인, <현대시> 부주간)

 

 

이천 년대 이후 더욱 가속화된 문예지의 창간은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오랫동안 문예지 편집자로서 일을 해온 필자가 보더라도 현재의 문예지 수는 창작의 양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지금의 상황은 창간한 지 오래된 전통있는 문예지와 대형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종합문예지들을 빼면 가히 문예지들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만하다.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발행하는 <문예연감>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잡지협회와 국립중앙도서관에 납본되는 문학잡지의 수는 289종에 이른다. 물론 납본되지 않는 문예지들도 있으며, 문학에 국한되지 않는 종합지 성격을 가지면서 주요 문학작품의 발표장이 되는 잡지들까지 합친다면 그 수는 더 많아질 것이다. 이를 권수로 따져보면 문예지는 한 해에 1,100권 이상 발행되는 셈이다. 한 권의 잡지에 대략 30~40편의 문학작품이 실린다고 가정하면 1년에 4만 편 가량의 문학작품이 발표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문예지는 가히 대단한 창작품 발표의 마당이라고 할 수 있다.
문예지의 지역편중화 현상도 여전한데 전체 289종 가운데 서울에서 발행되는 것이 무려 181종이며 경기도의 23종까지 합치면 서울 경기권에서 발행되는 문예지가 전체의 70%에 이른다. 그 외에 부산에서 발행되는 24종을 제하면 나머지 지역은 2%대의 미미한 형편이다.
또한 2011년에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우수문예지 발간사업으로 지원하는 잡지의 수는 총 37종이다.(PEN문학, 진보생활문예, 월간문학, 한국소설, 한국수필, 한국희곡, 청소년문학, 작가세계, 청소년 문학잡지 풋(20호를 끝으로 폐간), 실천문학, 시작, 아시아, 다층, 문학과사회, 문학들, 문학사상, 세계의문학, 서정시학, 시로여는세상, 시안, 시와동화, 시와반시, 시와사상, 시와세계, 시조시학, 아동문학평론, 어린이책이야기, 오늘의문예비평, 문예중앙, 창작과비평, 한국문학, 한국문학평론, 솟대문학, 미스터리, 현대문학, 현대시, 현대시학.) 이 37개 잡지는 문화예술위원회에서 발간지원을 받아 전국 국공립 도서관에 배포한다. 말하자면 발간 배포지원이다. 이중에서 기관에서 발행하는 기관지가 10종이며, 아동 청소년 잡지가 5종, 나머지 22종은 종합문예지와 시전문지이다. 이들 문예지들을 통해 한국문단에 새로운 담론과 창작품과 평론들이 발표된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보면 문예지의 출간은 손해보는 장사다. 현장에서 체감되는 문예지의 손익분기점은 월간지의 경우 정기구독자가 3,000명 이상, 계간지는 5,000명 이상이 되어야 겨우 도달한다. 물론 이는 제작비와 인건비를 최저로 산출했을 때의 가능성이며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비용이 발생한다. 지금 상황에서 적자를 보지 않는 문예지는 몇 종을 빼고는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예지들이 꾸준히 발간되는 것은 문예지들마다 각각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대형 문학출판사에서 발행되는 종합문예지들의 경우는 가장 큰 손해를 보며 문예지들을 출간한다. 하지만 장기적인 입장에서 보면 문예지는 안정적인 작가를 확보하기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한다. 문학의 경우, 작가를 확보하기 위해 출판사들마다 경쟁하고 있는 구도다. 이런 경쟁 구도 속에서 출판사가 발행하는 문예지는 작가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예지는 작가에게 작품발표와 연재 등으로 안정적인 원고료 수입을 제공하고, 문예지 발표 이후 출판사는 작가의 단행본 출간을 맡게 된다. 대부분 문예지를 통해 발표한 작품은 그 발행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게 된다. 출판사는 문예지를 통해 작가를 확보하고, 미리 독자들에게 작품을 홍보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대형 문학출판사를 제외한 문예지들의 재정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문예지들이 꾸준히 창간되는 것은 예전에 비해 책 만들기가 경제적, 기술적으로 쉬워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창작자들이 서로 십시일반하여 문예지를 발간하는 경우가 많다. 문예지 발간에 참여한 창작자들은 문예지를 통한 작품발표의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시전문지들의 경우가 그러한데 이런 경우 발행인과 문학동료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희생이 없이는 발간되기 힘들다. 그나마 몇몇 전통 있는 문예지들은 창작자들의 도움과 독자들의 호응을 바탕으로 꾸준히 발행되고 있다. 창작자들은 한국문학에 큰 역할을 한 오래된 문예지들에 적은 고료를 받더라도 양질의 작품을 제공한다. 독자들도 전통있는 문예지의 발행이유와 정당성을 충분히 공감하고 이를 응원한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의 문예지들은 전국의 익명 독자들을 대상으로 발행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안을 들여다보면 문학단체나 문학동인 중심의 차원에서 잡지가 소화되고 있다. 문예지의 특성상 오랫동안 문학현장의 중심에서 역할을 해온 문예지에 대한 독자들의 충성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러므로 새롭게 시작하는 문예지가 문단의 중심에 서서 독자들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많은 문예지들은 소수의 독자층을 미리 마련해두고 동인지 형태의 발간을 한다.
한국의 문예지 역사는 한국 문학의 역사라고 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근대 잡지는 문예지의 창간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근대문학은 문예지를 통해 이루어졌다. 최초의 근대 잡지는 1908년에 최남선이 창간한 <소년(少年)>이다. 이로부터 시작해 본격적인 문예지의 성격을 띤 <조선문단(朝鮮文壇)>(1924)은 현재 문예지의 형태를 그대로 반영한 잡지였다. 대중들의 문예부흥을 주도했으며, 문예지를 통해 120편의 소설과 8백여 편의 시를 발표한 창작의 장이었다. 또한 최서해, 채만식, 박화성, 안수길 등을 신인으로 배출하면서 새로운 문학가를 배출하는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동인지 형태로 발간된 <창조(創造)>, <백조(白潮)>, <폐허(廢墟)>, <장미촌(薔薇村)>, <금성(金星)>, <시인부락(詩人部落)> 등의 문예지는 한국 근대문학의 우물 역할을 하면서 많은 작품과 작가를 배출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문예지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5년 창간되어 오늘날까지 발행되고 있는 <현대문학>은 가장 전통있는 잡지로 한국문학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66년에 창간된 <창작과비평>은 새로운 문예지의 역할을 수행한 잡지였다. 현실참여와 새로운 문학담론을 창출하면서, 한국 지성계에 진보적인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1970년에 창간된 <문학과지성>은 문학의 순수와 자유를 옹호하는 문학성을 강조했다. 이후 두 잡지는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을 대변하는 입장에 서서 한국문학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이뿐 아니라, 1969년에 창간된 <현대시학>, 1972년에 창간된 <문학사상>, 1976년에 창간된 <세계의문학>, 1978년에 창간된 <문예중앙>, 1980년에 창간된 <실천문학>, 1989년에 창간된 <작가세계>, 1990년에 창간된 <현대시>, 1994년에 창간된 <문학동네> 등의 잡지는 한국문학 담론을 생산하고 새로운 문학인을 발굴하여 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친 잡지들이다.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주요 잡지들이 폐간되면서 잠시 문예지들이 주춤거렸지만 동인지와 무크지를 통해 이를 극복하였고, 대부분의 잡지가 다시 복간하여 현재에까지 이른다.
순수 시문예지들이 많아지는 것은 창작하는 입장에서 보면 분명 반겨야 할 상황이지만 곰곰이 따지고 보면 딱히 그렇지도 못하다. 문학의 활성화라는 명분에서는 더 할 말이 없겠지만, 이러한 현상이 오히려 문학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지는 깊이 숙고해봐야 한다. 문예지의 창간이 계속 이어지는 저간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가 어찌 되었든 문예지의 양적 팽창으로 인한 문제점 또한 여기저기 불거져 나오고 있다. 문예지를 감당하는 수요층이 어느 정도 한계에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제 살 갉아먹기식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잡지의 수를 놓고 보더라도, 또 하나의 잡지가 창간되면 또 그렇고 그런 잡지가 하나 더 보태진다는 회의적인 시각으로 비춰질 공산이 크다.
현재 문예지의 팽창으로 인한 여러 문제점들 중에 세 가지 정도만 꼽아 볼 수 있겠다. 먼저 지면확대로 인한 작품의 하향평준화이다. 잡지의 양적 팽창으로 문학인들은 발표할 지면이 많아졌고, 이로 인해 아직 발표할만한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발표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발생한다. 또한 작품을 발표하는 창작자들도 몇 인기있는 문인들로 집중되기 때문에 창작자들의 빈익빈부익부가 더욱 가속화되어 또다른 소외를 낳게 한다. 이것은 출판사, 잡지 편집자, 창작자들간의 인간관계도 큰 이유의 하나라고 봐야 한다. 둘째로, 비슷한 기획의 반복과 재생산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문예지들이 엇비슷한 기획을 반복해서 내보내고 있다. 이러한 점은 담론을 창출하는 잡지 본연의 역할보다는 구색맞추기 식의 지면채우기로 비춰질 공산이 크다. 마지막으로 편집권의 남용이다. 편집권은 권력이 아니라 좋은 필자를 모시기 위해 발로 뛰는 봉사자이다. 잡지를 만들어 또다른 편집권의 위용을 창작자들에게 내보이려는 처사는 심히 딱하기만 하다.
문예지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다. 현재까지 한국문학뿐 아니라 한국의 인문학적 지식을 공유하고 이끌어간 매체가 바로 문예지이다.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 줄어들어 대중들의 관심이 조금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문학의 산파구실을 하는 문예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든 분야가 상업적으로 변질되고, 환금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떠받드는 이 시대에 아무런 댓가도 바라지 않고 묵묵히 문학현장을 책임지는 문예지의 존재는 크기만 하다. 요즘 기업이나 돈 있는 개인들은 메세나(Mecenat) 활동을 한다. 메세나의 대상에 문예지들도 포함된다면 좋겠다. 한 기업이 한 문예지를 후원한다면, 그 후원을 통해 이루어지는 문화적 가치는 상당히 클 것이다. 문학의 가치는 시대가 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올곧게 남아 있을테니 말이다. 한 문예지 후원을 통해 창작자, 작품, 독자 모두를 만족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한국문학을 활성화시키며,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고,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마당이 바로 문예지이다. 국가의 문예지 발간 지원과 발행인들의 새로운 각성, 창작자들의 열의가 더한다면 앞으로 한국문학은 더욱 발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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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 시인. 1972년 강원 영월 출생.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저서로 <현대시와 허무의식>, <딜레마의 시학>, 인터뷰집 <나는 시인이다>가 있다. 현재 몇몇 대학에서 글쓰기와 문학을 강의하며, <현대시> 부주간으로 일하고 있다.

_ <기획회의>, 307호, 2011.11.05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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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추면 우리는 날겠지
― 김참 시인께

 

이재훈

 

 

참 형, 오랜만이네. 지난 8월 부산 광안리에서 허만하 선생님을 함께 뵌 후 아직 보지 못했네. 그날 바다 위를 흐르는 검은 구름은 정말 내 취향이었는데. 나는 비오기 전의 그런 하늘과 구름이 좋네. 날씨는 꾸물꾸물했지만, 함께한 사람들과 축축한 바다 내음으로 인해 가슴이 따스해지는 날이었네. 그날도 집에 간다는 형을 붙잡고 덕천동까지 갔더랬지. 그러고 보니 올해는 두 번 만났네. 올 2월에는 정재학, 오은 시인과 부산과 김해로 놀러갔었지. 그때 형의 보금자리가 있는 김해로 가서 뒷고기를 참 맛있게 먹었네. 뒷고기란 말은 정육업자들이 맛있고 희귀한 부위의 고기를 뒤로 숨겨놓았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형이 말해줬지. 형의 작은 아파트에는 책들로 빼곡하고, 침실에는 LP를 틀 수 있는 전축이 있었네. 늦은 밤까지 LP를 맘껏 들을 수 있어 귀가 호강했지. 그때 들었던 산울림과 정난이, 김지연과 리바이벌크로스는 아직도 귀에 쟁쟁해. 또 다음날에는 계획에도 없었던 거제도로 달려가 해변가 돌멩이를 주웠지.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난蘭을 캐러 다니는 일도, 물고기를 키우는 일도 형에게 모두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네. 참!, 형에겐 음악이 있었지. 아트록의 마니아인 형의 음악취향에 한때 나도 따라간 적이 있었는데 기억나나?
지난호 정재학 시인의 편지를 받고 여러 상념들이 떠올랐네. 뭐랄까, 우정이란 게 어떤 걸까 하는 생각. 이런 친구들이 있어 행복하단 생각이 들기도 했네. 참형과 나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보는 사이지만, 늘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그걸 문학적 동지의식이라고 해둘까. 형의 시를 처음 읽은 건 내가 습작하던 시절이었지. 가장 처음 읽었던 것은 <문학사상>에 발표한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기억은 확실치 않네. 가장 확실한 기억은 <문학지평>이라는 부산에서 발간하던 잡지였네. 정확히 <문학지평> 1997년 가을호(통권 10호). 발행인은 이상개 시인, 편집장은 김형술 시인. 당시에는 열렬한 문청이어서 한국에서 발간하던 모든 문예지들을 다 읽어치울 때였지. 대학시절, 우연히 교수님 방에 들렀다가 구해가지고 온 잡지에서 형의 시를 읽었지. 신작소시집이라는 지면에 「굴뚝」 외 7편의 시가 게재되어 있었네. 그 지면에는 「굴뚝」, 「간빙기의 추억」, 「그렇다」, 「사차원 지구」, 「독버섯 요리」, 「늑대 인간」 등 첫 시집에 수록된 많은 시들이 발표되었지. 그중 나는 「독버섯 요리」라는 작품을 좋아했는데 시를 프린트해 문학동아리에 나눠주며 마구 떠들던 생각이 나네. “시끄러운 비둘기를 마구 두들겨 주었다 비둘기들이 축 늘어졌다 비둘기들을 마당에 집어던졌다 굶주린 개들이 달려들었다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서 내려와 파란 버섯 두 개를 쇠솥에 집어넣으며 노란 버섯 한 조각을 씹어먹었다 머리 속에서 댕댕댕 종소리가 울려퍼졌다”(「독버섯 요리」 부분). 친구들은 쟤가 왜 저래? 하는 표정이었지. 그날 머리 속에서 댕댕댕 종소리가 울리도록 술을 먹었지. 벌써 한참이나 멀찍이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 젊은 시인을 보며 질투라도 났던 걸까. 그 뒤로 나는 형의 애독자였는데, 드디어 등단 이후 형을 만나게 되었지.
1999년 5월 <현대시>가 주최한 대구세미나. 둘째날 오후, 일행은 세미나를 마치고 대구 두류산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지. 형은 부산에서 김경수, 노혜경 시인 등과 함께 행사에 참석했더랬지. 그때 현대시 편집위원이었던 김정란 선생님께서 내 손을 잡아끌고 김참 시인에게 데리고 갔지. 이재훈과 김참이 서로 또래이고 시적으로 통하는 점이 많을 테니 친하게 지내보라는 말씀. 그때는 데면데면하게 인사한 기억이 나네. 나는 쑥스러워 마음속의 반가움을 제대로 표현 못했었지.
곧이어 1999년 6월쯤에 형이 <현대시동인상>을 받았는데, 형은 시단의 가장 촉망받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었지. 소위 모던한 풍을 가지고 있었던 시인들은 모두 김참이라는 젊은 시인의 시를 얘기했으니까. 첫 시집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1999)를 출간하고 이어 <미로여행>(2002), <그림자들>(2006)까지 형은 누구보다 성실히 자기만의 세계를 확장하며 시를 써왔네. 특히 이미지를 통한 시공간의 이동과 역전하는 서사의 구축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시적 방법론은 탁월했지.

네가 잠을 자기 위해 거울로 된 방바닥에 드러누우면 거울 안 깊고 깊은 곳에 있는 그들이 낮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일년이 지나자 달에서 날아온 비행접시들이 쉴새없이 지붕들 위를 날아다녔고 불길한 검은 새들이 들판을 가득 메웠다. 너는 거울 속에 있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바깥에서는 하얀 밤은 계속되었다. 하얀 밤 하얀 밤 하얀 밤들이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좀처럼 잠들 수 없었고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하지만 너는 거울 속에 있는 그들을 하나씩 잡아먹었다. 나는 이빨을 딱딱거렸다. 너에게 잡아먹히는 것이 두려웠다. 마침내 너는 거울의 방에서 걸어나왔다. 그러나 나는 어두운 골방에 틀어박혀 흑백영화를 보며 시간을 죽였다. 그건 길고도 지루한 일이었다. 나는 더 이상 볼 영화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하얀 밤에 자막이 내려왔다. 사람들과 동물들, 나무들과 물고기들의 길고 긴 이름이 천천히 내려왔다.
― 「거울 속으로 들어가다」 부분

우리는 거울 속의 일들이 저 먼 꿈속의 일이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극적인 실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체득했을까. 형을 십년 넘게 보면서 점점 신뢰가 더 쌓여간다는 느낌이 들어. 그건 인간적이며 문학적인 게 모두 교차된 지점에서의 신뢰이겠지. 눈치보지 말고 혼자 가버리라는 말. 우리에겐 그런 것밖에 없잖아. 형은 현재에도 열심히 읽고 쓰고 듣고 생각하겠지. 2002년 <현대시동인상> 시상식 후 새벽 예닐곱 명이 여인숙에 모여 팬티바람으로 무슨 말들을 그리 많이 했을까. 다들 제각각 독고다이 스타일의 시인들이 2004년 청주에 모여 하룻밤을 지내면서 어떤 열정의 잔해들이 재처럼 마음에 남았을까. 그때도 지금 아니면 우리가 언제 또 모이겠어, 하는 말을 했었지. 조금은 게으르고, 무심하고, 데면데면한 우리지만 서로 지켜봐주며 함께 길을 간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날이네.
날씨가 춥네. 참 형, 이 겨울이 가기 전 한번 모이자구. 지금 아니면 또 언제 모이겠어.

_ <현대시>, 2011년 1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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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날의 기록들
― 이재훈 시인께

 

정재학

 

 

자주 그리운 재훈 형,
편지 자체를 정말 오랜만에 써보네. 정보화시대 자체가 편지 쓰기를 방해하고 있으니 나도 그 영향을 받나봐. 나는 스마트폰을 쓰지도 않고 016 구형 핸드폰을 쓰는 사람이지만 말이야. 사람들끼리 접촉은 많아지지만 깊은 교류는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 그래서 형이 나의 깊은 친구라는 것이 항상 든든하고 고마워.

난 모든 것은 결국 ‘우연’의 산물이라고 생각해서 ‘운명’이라든지 ‘필연’이라는 것은 별로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형과의 만남은 ‘좋은 우연’을 넘어 ‘필연’이라는 말을 붙여도 좋을 것 같아. 우리는 드물게, 처음 본 이후 바로 특별한 친구가 되었으니까.
2001년 봄이었지. <현대시> 원고 마감을 넘겨 보내게 되어 미안한 마음으로 형에게 메일로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형의 아름다운 등단작 「수선화」를 비롯해서 발표작들을 감명 깊게 읽었던 터라 형을 보고 싶었어. 찾아보니 그때 내가 보낸 메일은 지워졌는데 형의 답장은 남아 있더군. 우리는 지금도 변함없이 그때와 같은 메일 주소를 가지고 있지. ‘나는 시인이다’와 같은 자부심이 느껴지는 아이디 ipoet, 블루스 기타리스트 ‘로이 뷰캐넌’의 buchanan. 내가 최초로 받은 형의 메일에 “저도 꼭 뵙고 싶군요./ 정 시인의 시를 인상 깊게 읽고 있어서…/ 연락드릴게요” 하고 적힌 것을 보니 10년 전의 봄기운이 느껴지는 듯 해. 메일을 나눈 이후에 약속을 잡고 우리는 종로 대폿집에서 밤늦게까지 정종을 마셨어. 그 이후 나의 20대 후반과 30대는 형 없이는 얘기 할 수 없는 시절이 되었어. 평생 마실 술을 그 시절에 다 마셔버리고 평생 피울 담배도 그때 다 태워버린 것 같아. 2004년 여름밤 종로 어디에선가 막걸리와 파전을 먹고 내가 요즘 너무 무기력하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지. 그때 나는 왜 그렇게 무기력했을까. 실험적인 시에 대한 고민이었을까. 사는 것 자체가 버거웠을까. 복합적이었겠지만 그 말을 했던 순간은 또렷이 기억에 남아. 다시 그 술집에 가도 그때 우리가 마셨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쓸쓸한 날의 기록
― 정재학에게


무기력하다 했던가
마지막 술잔을 남겨놓고
우리가 귀가하는 순간
하늘 아래 어디쯤에선 꽃이 피었을 거다
꽃을 보고도 그걸 표현할 방법을 몰라
그렇게 헤매었던가 우리 한낱
일렉기타의 음률과 철 지난 유행가에
더 감상적이었잖은가
네게도 말했지만
나는 백 년의 무명을 견딜 것이다
그렇게 철없이 살리라
 
더 이상 만질 것도, 들을 것도, 말할 것도 없는 어둠
소주 몇 병 먹고 어둠과 말할 수도 있지만
그만한 자족으로 그 어둠 속
텅 빈 공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옥상 위에 올라가 날아보자
네 몸이 땅에 떨어져 옆구리가 찢어지고
사람들의 입가에 오르내린다 해도
내가 믿는 예수처럼
그 옆구리를 기억할 수 있을까
어느 요절한 시인처럼
흉흉한 소문 속에 네 아픔이 기억될 수 있을까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서정시인이 되고 싶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실패한 서정시인
서럽고 아름다운 자연은 이미 다 해먹고
남은 상상으로 목울대를 울리는,
이제 우리의 가난도 팔지 못하는,
 
거울 속에서 내 눈을 보았다
무얼 견디는지도 모르는
몽롱한 얼굴이 날 바라보고 있다

메타시로도 읽을 수 있는 아름다운 시야. 형이 발표하기 전에 나에게 며칠 전 쓴 시가 있다며 전화로 들려주었는데 그때의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서럽고 아름다운 자연은 이미 다 해먹고/ 남은 상상으로 목울대를 울리는”, 이 구절은 마치 우리 세대의 시인들을 대변하는 것 같아. 무기력했지만 우리의 몸짓과 말이 시가 되는 아름다운 시절이었지. 형의 시만큼 좋은 시는 아니지만 나도 답시를 썼지. 그러고 보니 편지였어.

편지, 영월에서
― 이재훈 兄의 「쓸쓸한 날의 기록」에 부쳐


그때 우리가 있었던 곳은 형의 고향 강원도 영월이었습니다. 형은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더듬거리며 태어난 동네를 찾고 있었어요. 눈 덮인 들판에서 전화도 했었죠. “엄마, 내가 태어난 곳이 어디에요?” 나는 하필 바람과 다투며 지도를 쫓아 들판을 뛰어다녔습니다. 지도가 얼마나 뒹굴었을까. 그때 하늘에서는 새 한 마리 날고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바람이 멀리 데려간 지도를 한참 만에 잡을 수 있었지요. 형이 태어난 곳은 이미 지도상에는 없는 마을이었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폐광촌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름이 없다고 그곳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형은 저에게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서정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물론입니다. 형은 시를 썼을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서정시인입니다. 저에게 ‘서정시’는 늘 이상한 개념입니다. 시 자체가 서정인데 마치 그 말은 동어반복처럼 느껴집니다.
…(하략)…

형이 어머님께 전화를 하는 동안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서, 들고 있던 지도가 날아가서 한참을 지도를 잡으러 뛰어다녔던 기억이 생생해. 형은 고향에 갔지만 고향을 만날 수 없었지. 지도는 그저 현재의 지리적 기록일 뿐 형의 역사를 담을 수는 없어. 시적인 순간을 그대로 옮긴 편지였어. 갑자기 형의 두 번째 시집 중 한 구절이 생각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통각이 없는 시간들./ 모든 사물은 그저 멀리 있는 상징일 뿐입니다.// 요즘은 하루에도 수백 번씩 제 존재가 바뀝니다./ 때론 동물이었다가 때론 식물이고/ 때론 명징했다가 때론 무질서합니다./ 나 또한 상징에 불과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 스스로에게 바라는 것인데, 머리가 맑았으면 좋겠어. 왜 이리 내 머리 속은 항상 구름이 껴 있는지……. 언제 우리 머리가 시리도록 찬바람 부는 산이나 겨울바다로 떠나보자. 우리가 맑아지지 않더라도 우리의 몽롱한 눈동자라도 만나러.

_ <현대시>, 201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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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이재훈
(시인, 현대시 부주간)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말이 있다. 사회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울수록 상식을 지키라는 말이 더 횡행한다. 그러면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상식이란 무엇일까.

상식이 지식의 양을 가리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취업 준비할 때 공부하는 상식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서 얘기하는 상식은 다른 의미이다. 최고 학부를 나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업했다고 해서 상식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공동체 내에서 서로 용인하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와 원칙을 지키라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상식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을까. 위정자들은 각종 비리에 연루되어 신문지면을 장식하고 있으며, 반인륜적인 범죄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사회의 전부면에는 집단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으며, 노사는 갈등하고 싸운다. 놀이동산이나 공원에 가면 가족 이기주의로 몸살을 앓고, 연이은 자살 소식은 우리 모두를 우울하게 만든다. 초등학생 때부터 경쟁의 시장에 몰려나와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으며, 88만원 세대로 대표되는 청년들은 희망 없는 미래를 간신히 부여잡고 살아간다. 이러한 사회의 모습을 보며 우리가 최소한의 원칙을 잘 지키는 상식 있는 사회라고 말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비전 있는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최소한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두 가지의 상식을 말하고 싶다. 먼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부끄러움’을 중시해 왔다. 우리 가족이나 집안은 타인들이 보았을 때 부끄러움이 없는 구성원이 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행위 속에서 타인들을 이해하고 서로 도와주며,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부끄러움을 안다면 공중예절을 지키고 타인들을 배려하며, 남을 먼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위정자들은 자신이 저지른 비리와 잘못에 대해 뼈아픈 참회를 할 것이며, 욕망이 점철된 사회의 모든 공간에서 원칙과 도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 다.

또 하나는 저항할 줄 아는 청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항은 청년의 특권이며, 이 사회를 견제할 수 있는 중요한 사회적 에너지이다. 문제는 그 저항이 ‘객관적 분노’여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대부분이 이해하고 긍정하는 차원에서의 분노여야 한다. 얼마전 많은 대학생들이 등록금 인하 문제로 거리에 나왔다. 등록금 문제는 학교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렇기에 많은 시민들이 등록금 문제로 목소리를 부르짖는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비단 등록금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생각한다면 더욱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다.

늘 얘기하듯 젊음의 특권은 누리는 자만이 갖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특권을 누릴만한 토대를 기성세대가 마련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장 등록금과 취업 문제로 막막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렇다고 대학생들이 현실에 매몰되거나 패배적인 생각으로 힘들게 시간을 보낸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당당하게 기성세대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지 않을까. 왜 우리를 이렇게 막다른 곳으로 내몰았냐고. 우리 세대들도 정말 잘 할 수 있다고 말이다. 또한 이럴 때일수록 더욱 근본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말이 선거 때에만 공약으로 유행되는 것이 아니라, 늘 최소한의 원칙과 도리가 통하는 사회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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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후감

산문 2010. 10. 11. 14:52

|선후감選後感|

2010년 신인추천작품상 하반기에는 약 150여명 정도가 응모해 왔다. 눈에 띄는 것은 응모 작품의 편수가 이전에 비해 상당 부분 줄었다는 점이다. 응모 작품의 수가 줄어든 이유가 무엇인지 여러 각도를 통해 진단해 보았다. 먼저, 그동안 투고해 왔던 당선권 내의 응모자들이 이미 당선되었을 경우이다. 예비 시인의 인프라가 예전에 비해 얇아졌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시 잡지의 증가로 등단 경로가 훨씬 넓어졌다는 점이다. 몇 잡지에 집중적으로 응모가 되었던 것과는 달리 응모자들이 분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가장 문제시되는 것은 젊은 응모자들의 수가 줄었으며, 시적 역량 또한 부족하다는 점이다. 젊은 세대의 응모자들은 문창과나 국문과 출신의 학부와 대학원생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창작 교육을 통한 ‘잘 만들어진 시’라는 한계점을 노출하고 있다.

이번 심사에서는 응모 작품의 편수뿐 아니라 작품 수준도 예년에 비해 낮았다. 자기만의 개성과 언어감각을 지닌 응모자들이 적었으며, 새로운 시적 인식과 타고난 시인의 감수성을 가진 응모자들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편집부에서는 본심에 올릴만한 작품으로 김혜숙, 남궁선, 서종현, 이서영의 작품을 주목했다. 이들 중에 우리는 특히 남궁선 씨의 작품에 주목했다. 「오랫동안 자라나는 아이들」 외 9편을 응모한 남씨의 시는 참신한 이미지가 돋보였다. 또한 시적 대상과 시적 자아와의 관계에 묘한 긴장이 생성되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시 「가을의 탄생」과 같은 이미지와 시적 인식의 조화는 눈여겨 볼만 했다. 문제는 남궁선의 시가 가진 세계관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모호했으며, 시의 군데군데에서 발견되는 시적 언어의 습관화와 기성 시들의 답습, 인유의 식상함 등이 눈에 띄었다.

결론 지어 말하자면, 이들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간다 하더라도 당선권에 들 만한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오랜 논의 끝에 이번 심사에서는 본심을 따로 열지 않고, 당선자를 배출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상반기 심사에서도 당선자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오랜 고민을 하였으나, 그것과 달리 좋은 신인을 뽑자는 취지 하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 했다.

본지 신인추천작품상에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당선자를 찾지 못했다는 죄송한 말씀과 함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_ 현대시, 201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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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후감

산문 2010. 10. 11. 14:51

선후감

투고된 작품의 수는 많지 않았다. 그 중에서 우리는 이난희, 김대성 씨의 작품들에 주목했다.

이난희 씨는 다양한 성격의 시편들을 보여주었다. 풍경을 꼼꼼히 묘사하는 시에서부터 세태 풍자의 시까지 다양한 시를 응모해 왔다. 그중에서 풍경을 묘사하는 시편들이 가장 눈에 띄었다. 어떤 시의 언어는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작위적이었으며 젊은 시인들의 언어를 따라하려는 인상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시를 조형하는 능력과 말을 사용하는 감각은 충분히 오랜 숙련을 겪은 듯 보였다. 특히 시 「얼음호수」는 하나의 풍경이 한 편의 훌륭한 시가 되는 사례를 보여준다. 시에서는 풍경을 묘사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풍경 속에서 “단단히 영근 물집 하나를 기어이 톡, 터트리”는 시적 순간을 감지하고, 이것을 풍경 속에서 사건화 한다. 시에서 모든 대상물들이 서로 관계를 가지며 의미를 찾다가 시적 순간을 발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난희 씨가 자신과 잘 맞는 언어와 시적 세계를 만나 올곧게 걸어간다면 충분히 좋은 시인이 되리라 믿는다.

_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10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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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에서의 하룻밤



이재훈

헤아려보니 내가 운전을 시작한 지도 8년이 넘어 간다. 그러고 보면 난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다. 8년의 시간 동안 큰 교통사고 한번 나지 않고 별탈없이 지냈으니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참 감사하다. 운전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고 운전을 하면서도 사고 한번 나지 않고 무고한 것 또한 감사하다.
아마 지금까지 차 때문에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을 꼽으라면 단연 주차문제일 것이다. 서울살이를 시작할 무렵, 당시 별도로 주차공간이 없었던 집에 세를 들어 살았다. 그러다보니 저녁마다 주차로 인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동네를 몇 바퀴 돌다가 다행히 자리를 찾아 주차를 하고 들어오면 여지없이 전화가 온다. “차 좀 빼주세요.” 그러면 하던 일을 멈추고 나가야 했다. 전화라도 받지 못한 날에는 갖은 욕설과 원망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내가 집을 옮긴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주차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차로 인해 생긴 몇 가지 추억할만한 사건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자동차가 내게 귀중한 잠자리 역할을 해준 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일이다. 대부분 차를 잠자리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장기 운전을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예를 들면 트럭 기사나 택시 기사들이 그러하다. 자동차에서 자는 잠은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 허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다리도 불편하다.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잠자리가 없었을 때 차안은 그야말로 따뜻한 보금자리 역할을 한다.
대학시절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충남 대천해수욕장에 바다를 보러 갔었다. 때가 겨울이었는데 당시 문학동아리를 같이 하던 친구들은 모두 겨울바다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넷이서  한 차에 타고 들뜬 기분으로 대천으로 향했다. 바닷가에 가서 차가운 바람과 무섭게 넘실대는 겨울바다를 마음껏 느끼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되돌아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문제는 시작되었다. 자동차에 휘발유가 부족했던 것이다. 우리에겐 돈이 없었고 시간은 이미 자정을 지나 있었다. 자동차에 연료부족을 알리는 경고등이 계속 켜지고 이 상태로 집까지 가기에는 무리였다. 우리는 고심한 끝에 직불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은행부스 앞에서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아침 8시가 되면 직불카드를 사용할 수 있어서 연료를 보충하고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 안에서의 하룻밤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더불어 우리의 고통도 시작되었다. 히터를 틀어서 추위는 면할 수 있었지만 넷이 차 안에서 밤을 새우는 건 고통이었다. 잠은 오지 않고 다리와 허리는 불편했다. 한 겨울 밖은 그야말로 매서운 추위로 창문조차 열 수 없었다. 밤을 지새우는 동안 우리는 라디오를 듣다가 얘기도 했다가 시간을 보냈다.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느끼며 우리는 설핏 잠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붉게 충혈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한없이 웃었다.
그렇게 차 안에서의 하룻밤은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중 생각하니 차가 없었다면 그 매서운 겨울밤을 어떻게 보냈을까 싶다. 또한 그 사건 이후로 친구들과 더 깊이 든 정(情)은 하룻밤 고통의 기억을 한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_ <자동차생활>, 200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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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후감

 

투고된 작품들 중에서 최종심에 오른 이들은 모두 다섯 분이었다. 박병수, 이일옥, 정운희, 예외석, 하미애 제씨들이다. 다섯 분의 작품을 놓고 논의한 결과 비교적 쉽게 당선자를 선할 수 있었다. 예외석과 하미애 씨는 신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새로움과 시적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먼저 제외되었다. 정운희 씨는 기존의 시적 관습에서 일탈하여 새로운 시적 문법을 보여주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그러나 시가 전체적으로 정제되지 않고 풀어져 있었다. 요즘 긴 산문시가 가지고 있는 단점들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어서 선뜻 선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수사력은 만만치 않아 앞으로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선자로 선정된 박병수, 이일옥 씨는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자기만의 시적 세계를 가지고 있는 시인들이었다.

박병수 씨는 선 굵은 진술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상상력의 시공이 크고 행간을 성큼성큼 뛰어넘는 언어의 보폭이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월식의 일종인 반영월식은 달이 빛을 잃어 어두우면서도 부드럽게 보이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짐승”에서 “별들”로, 다시 “물고기”에서 “날아가는 새”로, 또다시 “천사”에서 “새들의 조상”으로 시적 대상을 이동하면서 사유의 폭넓음을 보여준다. 결국 화자의 시선은 “남자”로 시적대상이 이동하면서 자아의 내면을 응시하고, 마지막에 월식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박병수 씨는 시 속에서 언어를 배치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달콤한 칩거」에서 보듯 적재적소에 아포리즘과 감각이 지나간다. 시인의 일상 속으로 “낙타들”과 “악어떼”를 끌어들여 시적 자아와 함께 방목하는 상상력, 「알키투더스 추모기」에서 보이는 우화적 상상력 또한 시인을 신뢰하게 할 만하였다.

이일옥 씨는 사물을 관찰하는 능력이 인상적이었다. 「수화」에서 볼 수 있듯이 모녀가 손짓으로 주고받는 수화를 “손가락으로 말을 뜨고 있다”고 표현하면서 그 이미지를 끝까지 시에서 살려내고 있다. 또한 수화의 이미지를 ‘소통’과 ‘상실’이라는 주제로까지 결합하는 능력은 눈여겨볼 만 했다. 「검은 방문」에서 “수백 마리의 까마귀 떼,/ 검고 앙상한 군집들은 저녁 무렵 죽음을 발라내듯/ 노을 몇 줌 서쪽 허공에 게워내곤 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결코 흔치 않은 이미지이다. ‘흉’의 상징인 까마귀를 묘사하는 게 상투적일 수 있는데 그러한 점을 잘 극복해나가고 있다. 「도둑이 사는 집」에서도 술 취한 한 사내가 골목 입구로 들어가는 이미지를 “어둠의 내부를 따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일옥 씨는 오랜 동안 회화의 영역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표현해왔다. 시인은 이런 점을 잘 진화시켜 자기만의 개성적인 언어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당선자들껜 축하의 말씀을 드리며, 그렇지 못하신 분들껜 다음을 기약하며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본심 심사위원 : 이수익, 원구식, 이재훈(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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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의 나날

어머니
저는 당신 물속에서
가득 충전되어
이 세상에 나왔는데
이곳은 너무 건조하군요

어머니
이제 방전된 제 몸에
스위치를 올리렵니다
딸깍 딸깍

들리세요?
제 몸에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하며
날이 갑니다
참, 많이 아픕니다


나는 밤이 없다고 했다
밤이 없으므로 당신을 한 번도 뉘인적 없다고도 했다
어느 날 백야처럼 쉼없는 날들이라며
당신은 내게 밤을 주셨다
오로지 나의 안락으로 밤은 하나씩 채워졌다
내 청춘이 지던 때
당신은 그때 기적을 보여주셨다

헤진 모자를 쓴 당신
내게 밤이라는 단어를 주셨다
눈물이 흐르는 걸 잘 가릴 수 있게
작은 흐느낌도 잘 들을 수 있게

밥이란다
먹고 사는 일이란다
눈물이란다
이젠 어느 입에도 들어갈 수 없는
숟가락들이 모여 등을 맞대고 있다
한때는 수많은 입을 받아냈던 몸
기(氣)만 남아 반짝 빛난다

생각해보면 차갑고 완고했다.
무엇을 물고 늘어지기 위해 온몸은 잔뜩 긴장돼 있었다.
예민하고 민첩한 이성은 없었다.
타인의 무게에 반항했다.
언젠가는 악물었던 입의 힘을 빼야 한다.
모든 것을 풀어놓고 바닥에 몸을 눕힌 사람들.
그 바닥에는 타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상처의 흔적들만 가득하다.


_ 글. 사진 : 이재훈
_ 장소 : DOP 조형예술연구소(조각가 도일 작업장)

_ 출처 : <시와반시>, 200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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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를 둘러싼 풍경들


이재훈




강을 바랐다.

 

황하. 오래된 동양 문명의 강. 역사의 강. 어머니의 강. 황색의 강. 왜 황하인가. 헤르만 헤세의 <짤막한 자서전>을 읽고 감동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가 <싯다르타>를 썼듯이, 인도를 수행하듯 떠돌았듯이. 황하를 시적인 공간으로 옮겨오고 싶었다. 그렇지만 황하에 가 본 일은 없다. 가보지 않은 공간이지만 가본 공간이며, 경험하지 않은 시간이지만 경험한 시간 속에 ‘황하’가 있었다. 헤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자연의 순수함과 무한함을 찬미하고 싶었으며, 자연이 그칠 줄 모르는 고뇌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와 상극을 이루는 정신에게로 향할 때까지 그 과정을 묘사하고자 했다. 그리고 자연과 정신이라는 양극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삶의 모습은 생생한 무지개처럼 경쾌하고 유희적이며 완벽하게 묘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오페라를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물론, 내 사전에 완성이란 단어는 없다. 완성으로 이르는 과정과 길목만 있을 뿐.

 

누웠다. 스민다. 쏟아지는 모든 것들이 스민다.

 

아마도 스물 살 무렵부터 황하를 상상했을 것이다. 한 평의 고시원에 누워 황하를 떠올렸을 것이다. 용이 하늘로 올라가듯 누렇게 굽이치는 큰 물길을 올려다보고 싶었다. 쿠스코(CUSCO)의 곡 중에 ‘대황하’라는 곡이 있었다. <Apurimac>이란 앨범은 우리나라에서도 꽤 알려졌는데 특이하게 고대 잉카를 테마로 한 Apuricmac으로 시작하여 마야-아즈텍(ApurimacⅡ), 미국인디언(ApurimacⅢ)을 주제로 한 Apurimac 시리즈를 내놓은 연주 밴드이다. 아무튼, 경음악으로 알려져 있는 쿠스코를 지겹도록 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팬플룻과 신디사이저와 타악기의 반복적인 소리는 의외로 주술적이어서 다음날까지 귓가에 맴돌았다. 암스트롱처럼 유유히 우주를 걸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인도의 어느 한적한 지역에서 맨몸으로 고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스무 살 무렵이 어떤 면에서는 내 인생의 절정기였다. 늦은 밤, 친구들과 낯선 곳에 대한 막연한 상상을 하다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즉흥적으로 밤기차를 타고 며칠씩 돌아다녔다. 돈이 떨어지면 잡일을 해서 돈을 모으고, 또 놀았다. 2년 동안 도시의 유목민으로 지냈다. 고시원이나 쪽방에서 기거했다. 몸을 뒤척일 수도 없는, 한 평도 안 되는 고시원. 의자를 책상 위에 올리고 누우면 미이라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미이라가 되어 쿠스코의 음악을 들으면, 황하의 거친 강물 위에 나는 떠있었다. ‘황하’는 그 당시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역동적인 공간이었다.

 

강에 뼛가루를 뿌렸다지.

 

얼마 전 스물 살 무렵 만나 지금까지 늘 곁에 있었던 친구를 물에 묻고 왔다. 서른여섯 해의 생일을 오일 남겨둔 채, 그는 이 세상에 잠시 머물렀다 저 편안한 곳으로 갔다. 함께 있을 땐 그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는 걸 몰랐다. 무엇이라고 규정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아도 되었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친구였기 때문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친구가 마지막 숨을 쉰 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어머니의 물속에서 이 땅에 나와, 비와 함께 물을 따라 가고, 마지막으로 물속에 묻힌 친구. 제 슬픔까지 물처럼 흘려버릴 줄 알았던 친구. 그가 따라간 물길은 하늘로 통하는 비밀계단일 것이다.

 

긴 시간의 강을 젓는 내 굵은 힘줄을 생각한다.

 

황하는 내 존재가 걸어가다 만나는 수많은 풍경 중의 하나이다. 내가 앞으로 만나게 될 풍경이 또 어떤 풍경이 될 지는 아직 나도 모른다.


_ <시와세계>, 200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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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말


탈장르, 탈문법의 새로운 시적 전망



이재훈




최근 우리 시는 전망의 부재에 시달리고 있다. 시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담론은 물론이거니와, 문학 내부가 공동으로 용인하는 시적 지향점도 아득하기만 하다. 시의 위기나 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이제 지지부진한 구태의 선정적인 담론이라고 누구든 말하지만, 문학 외부에서 바라보는 완고한 시선에는 아직도 자유로울 수 없다. 비교적 내외적 자본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시 장르의 경우, 일반 독자층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가장 풍요로운 담론의 장을 형성해 왔다. 담론의 역할을 풍성하게 채워줄 작품 또한 활발하게 생산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담론과 함께 시 또한 정체되어 있다는 감응을 지울 수 없다. 많은 문예지들의 기획은 새로운 것보다 이미 했던 것의 다른 제목일 뿐이며, 최근 시단을 풍요롭게 했던 ‘미래파’의 논제들도 더 나가야 할 지점을 찾지 못하고 발목이 묶여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동안 시단에서 제기되어 왔던 시 장르의 외연 확장에 대한 평자들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현재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작품은 기존의 전통적인 시 장르의 문법을 전복하는 언어를 보여주고 있다. 산문과 시의 경계를 아슬하게 넘나드는 시 언어의 생산은 이미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가장 최근 등단하는 시인들의 언어가 대개 이러한 시적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을 보면 더욱 확연하다. 이번 기획에서는 새로운 시 문법의 생산을 평가가 민첩하게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앞으로 탈장르, 탈문법의 시적 언어가 어떠한 전망을 갖게 될 것인지를 살펴본다. 평자들의 진단과 전망에 대한 사유를 통해 시의 언어가 가야 할 또다른 자리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유성호는 최근 우리 시의 지형에 대한 진단과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우리 시가 새롭게 구축해가야 할 시적 논리(logic)”로 “반항구적인 생명력을 갖춘 기율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라 말하면서 이를 ‘비극성’과 ‘전망’의 범주로 풀어내고 있다.

이형권은 시의 탈장르, 탈문법 현상에 관해 꼼꼼한 분석을 하고 있다. 그는 “원심적 진화, 즉 요즈음의 젊은 시인들이 외계적 언어를 활용하여 기이한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언어적 징후들”을 포착해 내어 이들의 언어와 상상력에 대한 미래적 가치를 사유하고 있다. 시가 가진 전위의 정신이 시의 궁극인 시성의 회복과 맞물린 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진단하고 있다.

우리는 이 기획이 단발성의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활발한 담론의 장이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_ <현대시>, 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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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이를 보내고 왔습니다.

서른여섯 해의 생일을 오일 남겨둔 채,

가족과 친구들과 동학들의 슬픔을 뒤로 한 채

편안한 곳으로 가는 인이를 배웅하고 왔습니다.

채 식지 않아 뜨거운 인이의 뼛가루를 바다에 뿌리고 왔습니다.

그의 육신의 흔적이 마지막으로 바다에 뿌려질 때,

참고 참았던 슬픔과 울분이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그냥 먼 바다만 바라봤습니다.

너무 가까운 곳에 그의 마지막을 보내고 온 건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다시 찾아오고 싶어지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울분으로 서러워지지는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왜, 라고 따져 묻지도 않기로 했습니다.

인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함께 있을 땐 그가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인이는 그냥 우리의 친구였기 때문이지요.

무엇이라고 규정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아도 되었던,

가장 가까운 곳에 항상 있었던 우리의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었기에

우리는 그를 멀리 보내지 못하겠지요.

가슴에 남아 문득문득, 우리에게 말을 걸겠지요.

히죽히죽 웃으며, 투정부리고 응석부리며, 옆구리를 쿡쿡 찌르겠지요.

오래도록 우리의 가슴에 남아 있겠지요.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보다, 훌륭한 업적을 남기는 것보다, 많은 재산을 남기는 것보다,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는 것이

더 크고 값진 사람이라는 걸 살아가면서 깨닫습니다.

인이는 누구에게나 아름다웠던 사람으로 기억되는

우리들의 소망을 실천하고 갔습니다.

인이와 함께 나눈 수많았던 추억들.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어요. 모두 가슴에 깊이깊이 안고 있겠지요.

울분과 슬픔과 안타까움도 잊고 다시 가슴에다 종알거리며

인과 얘기할 수 있겠지요.

요즘 노자의 도덕경에 있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을 많이 생각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은 것.

인이가 이 세상에 마지막 숨을 쉰 날은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어머니의 물속에서 이 땅에 나왔으니, 비와 함께 물을 따라 가고,

또한 물속에 묻혔습니다.

너무 편안하여 물 같았던 우리의 친구.

제 슬픔까지 물처럼 흘려버릴 줄 알았던 친구.

인이가 따라간 물길은 하늘로 통하는 비밀계단입니다.

그 마음속 계단을 통해 자주 인이를 불러보겠지요.

인이를 보내고 이틀 동안 깊은 잠을 잤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존재와 슬픔의 의미에 대해, 친구에 대해,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 인이에게

평소에 잘 하지 못했던 말, 고맙단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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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소통을 주제로 한 네 번째의 기획으로 한국시의 틈새 읽기를 마련하였다. 푸코의 말을 빌리면 어떤 사회에서든 담론의 생산을 통제하고, 선별하고, 조직화하고 나아가 재분배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존재한다. 이런 과정은 문학사를 기술하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니체는 계보학자들은 넓은 영역을 개척해야 하며, 자유정신의 용기와 혹독한 박학 그리고 현미경과 같은 섬세한 정신의 소유자여야 한다고 말한다. 사물의 온갖 가치판단을 해명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계보학은 기원이 아니라 사건들에 대한 탐색 곧 그것의 특이성singularity을 기록하는 것이다. ‘틈새’를 읽는 것은 보편화된 주류의 틈 속에서 숨 쉬는 섬세한 감성을 찾는 일이다. 작금에 쓰여지고 있는 문학사를 보면 니체의 계보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문학사는 여전히 소수의 문학인만을 종횡으로 줄 세우는 ‘그들만의 잔치’이기 때문이다.

많은 시인들은 여전히 작은 틈 속에서 치열한 정신으로 뛰어난 작품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그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않고, 그 어떤 계보에서도 제외되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묵묵히 만들어나가는 시인들이 있다. 이미 우리 시단은 너무 많은 문예지와 시들의 범람으로 인해 소수의 평론가들이 시를 제대로 읽어내고 평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대학의 제도와 평가가 명민한 평론가들을 현장에서 이탈하도록 만들고 있다. 고집스럽게 평론의 길을 가고 있는 필자들은 많은 청탁 원고에 파묻혀 힘들어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시인들이 서로의 작품을 찾아 읽고 그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미 시인들의 시 보는 눈이 얼마나 밝은 지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시인, 숨어 있는 시 중에서 좋은 시를 찾아 읽기로 하였다.

선정 텍스트는 한국시로 한정하였고, 선정한 시에 대한 소개와 사연, 감상평을 자유롭게 집필하도록 하였다. 이번 기획의 청탁 대상은 최근 본지에 작품이나 글을 발표한 시인들은 가급적 제외하였고, 1980년대 시인부터 2000년대 시인까지 활발한 시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인들로 선정했음을 밝힌다.

이사라는 반칠환의 시 <웃음의 힘>을 읽었다. 다변가가 아니면서 은유의 힘을 믿는 시인, 여운을 남길 줄 아는 시인,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 시인, 진짜가 무엇인지 아는 시인, 엄살하지 않는 시인, 성숙한 시인, 그의 시는 그런 시인에게서 나온 소금 같은 시라고 말한다.

양애경은 이기와의 시 <순댓집―영자야 23>을 읽었다. 이기와 시인이 경험한 삶의 사연들을 눈여겨 본다. “안해 본 일 없이 밑바닥 인생을 전전한 이력이 그녀의 시의 원천인 동시에 굴레인 때문일까”라고 물어보는 시가 ‘영자야’ 연작시들이다.

이승하는 작고 시인 이경록의 시 <길>을 읽었다. 이경록 시인은 1977년 나이 서른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천재성은 시인 이상李箱에 못지 않지만 지금까지 큰 조명을 못 받고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길>은 언어를 선별하여 배치하는 시인 본연의 연금술사적인 재능이 탁월한 작품이라고 평한다.

정일근은 윤효의 <못>을 읽었다. 윤효는 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여 25년의 시력에 <물결>(2001, 다층), <얼음새꽃>(2005, 시학)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다. 짧은 시를 주로 쓰는 윤효 시인은 서정춘, 유재영, 이시영 선생을 전범으로 삼는 시인이라 말한다.

강성철은 이관묵의 시 <나무의 시간>을 읽었다. 일면식도 없었던 이관묵의 시를 통해 “세상과 동떨어진 외딴 곳에서 칩거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때로는 삭히며 무섭게 자신을 채찍질하며 끊임없이 마음의 각을 세워가는, 다시 말해 무서운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했다.

정숙자는 김윤배의 시 <조선족의 노래>를 읽었다. 28행으로 구성된 시는 역사성과 비극미를 통해 죽은 자의 절규를 들려준다. 시인은 시를 통해 “쏟아진 한마디 한마디는 개인의 심중에 맺힌 천둥일 뿐 아니라 전 조선족의 가슴에 흐르는 피눈물”이라고 말한다.

홍일표는 199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임찬일 시인을 주목한다. 임찬일 시인은 2001년 작고했는데, 투병 중에도 문학의 끈을 놓지 않고 좋은 작품들을 열정적으로 쏟아낸 시인이라고 전한다. 문단의 냉대와 외면 속에 많이 외로웠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시인이다.

김유석은 오늘의 <둥근 나라의 앨리스>를 소개한다. 자신의 시적 취향을 “나와 유전자가 닮은 시편들에서부터 최근의 낯선 상상들에 이르기까지 고루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지만 그 중에서도 보다 각별히 주목하는 것이라면 그 사이쯤에 위치해 있는 글들”이라고 말하면서 오늘 시인의 작품을 선정했다.

최준은 문근식의 <비밀의 방>을 읽었다. 문근식은 충북 음성군청 환경보호과에 재직하고 있는 공무원 시인이다. 지방 시인인 그는 소위 말하는 문단 정치를 모르면서 정직한 시쓰기에 몰두하는 시인이다. 부부얘기를 진솔하게 시로 형상화한 <비밀의 방>을 소개하고 있다.

박현수는 재미시인 신지혜의 <아득한 골목 저편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네>를 읽었다. 시인은 “현관문을 열면 그 문에 밀려 아득한 골목이 아코디언처럼 접혀진다는 이 기막힌 상상력은 우리 시에 낯설면서도 가치 있는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김경수는 박강우의 <동물 해방운동>을 읽었다. 박강우의 시는 “발상이 신선하고 선언문의 형식을 빌은 표현 방법도 재미가 있다. 가상의 세계를 표현하는 톡톡 튀는 상상력을 포함하여 현대 사회에 대한 새로운 형식의 비판 정신”을 가진 시라고 말한다.

권현형은 김정희의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를 읽었다. 김정희는 2000년 <문학과의식>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김정희 시인의 시를 “그녀는 문학의 흉곽 안에 속한 사람. 그녀는 흉곽 안쪽에서 좁은 흉곽을 더 좁게 만드는, 더 높게 만드는 화사한 밖의 눈부심을 기록한다”고 전한다.

김참은 서대경의 시 <집결>을 읽었다. 김참은 서대경의 시는 독특하며 최근에 등장한 젊은 시인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시인이라고 말한다. 또한 “서대경 시의 뛰어난 점은 자유분방한 상상력에 있다. 그는 시를 써야 한다는 고정관념이나, 시라는 장르의 족쇄에서 비교적 자유롭”다고 이유를 전하고 있다.

박남희는 정용화의 <테라 아우스트랄리스 인코니타>를 읽었다. 시에서는 방, 자궁, 달의 상상력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생명성과 모성성과 문학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의 척박한 삶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정용화 시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말한다.

김종태는 작고 시인 김구용의 시 <반수신半獸身의 독백>을 읽었다. 김구용은 사후에도 크게 평가받지 못한 시인이다. 김구용의 시가 저평가된 사정과 <반수신의 독백>이 김구용 초기 산문시 중 한 편으로 육체와 정신,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의 갈등을 형상화하는 독특한 작품이라는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조영순은 김상헌의 <포스트 잇>을 읽었다. 시를 통해 “훗날 낡은 수첩을 정리하며 우연히 만나게 될지라도 새롭게 옷 벗는, 그런 무언가를 남기자고 한다. 그런 약속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분리되지 않는다”고 평한다.

김미정은 우진용의 <이진법에 대하여>를 읽었다. 우진용은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한 시인이다. 이 시는 그의 등단작이며, 1992년 퓰리처 특별상을 받은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소설인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를 읽고 창작한 작품이다. 따뜻한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냉철한 이성적 시각이 돋보이는 시라고 평하고 있다.

고영은 김정미의 <지뢰밭>을 읽었다. 고영은 시를 읽은 체험을 전하고 있다. 여성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지뢰밭의 긴장감을 너무도 생생하게 펼쳐놓았으며, 마치 내가 비무장지대의 지뢰밭을 걷고 있는 듯한 아찔한 전율이 온몸을 휘감고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박후기는 김원경의 <소라껍데기>를 읽었다. 현란한 수사에 크게 기대지 않으면서도 조금은 낯선 방식으로 현실을 드러낼 줄 아는 시인이 김원경이라고 말한다. ‘소라껍데기’는 흔히 놓치기 쉬운 리듬이라든가 압축의 묘미들을 살리면서, 이 한 대목을 위해 시어들이 제목을 가만히 추수追隨하게 만든다고 평한다.

우진용은 정낙추의 <동행>을 읽었다. 정낙추 시인은 태안의 모항에서 농사에 매달려 사는 시인이다. 우진용은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풍경에서 모든 존재의 여일함을 담담히 보여준다”고 시를 평한다. 또한 “보여주는 것은 사소하지만 그 울림은 삶 전체를 흔들어 놓는다”고 말한다.

정겸은 한혜영의 <뱀 잡는 여자>를 읽었다. 한혜영의 시를 가리켜 ”우리나라의 중년 여성이 흔히 느낄 수 있는 감성이며 일상의 체험을 시로써 승화시킨 체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를 감상하다보면 가정을 위해서는 어느 무엇이라도 싫어하지 않는 희생적 정서를 느끼게 한다“고 말한다.

김휴는 이영수의 <몽유병자들은 결코 달을 보지 않는다>를 읽었다. 시인은 “정말 우연히 이 시를 만났고 그리고 이 시인의 시세계를 헤집고 돌아다닌 며칠 동안 시인의 상상력을 몹시 괴로워했고, 그리고 며칠 뒤에는 그 상상력을 그리워했었다”고 시를 만난 때를 고백하고 있다.

한국시의 틈새 읽기는 시인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다. 틈새 속에서 열정적으로 창작에 임하고 있는 시인들을 보면서 창작자로서의 직무유기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번 기획을 통해 더 치열한 창작 의욕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_ 현대시, 200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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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된 애정의 독법

산문 2008. 1. 10. 10:32

이재훈



오늘의 한국시는 이분법적 틀로 거칠게 재단하거나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시의 경향과 세대, 방법론, 지향점 등을 반으로 양분하여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놓고 작품을 평가한다. 많은 시인의 경우, 딱히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는 게 부적절하다. 양극화된 사회를 반영한 탓인지, 이분법적인 잣대로 인해 시의 고유한 개성을 상실한 채 두루뭉술한 평가에 묻혀 있는 시인들 또한 많이 있다. 사실 이원적 대립으로 현상을 보는 인식은 오래되고 본질적인 방법이다. 기호의 본질은 다른 기호와의 차이와 구별에 의해 그 의미가 인식된다. 그러나 탈구조주의 사회에서는 차이를 벗어나거나 없애는 것을 지향한다.

시창작의 현장에서 많은 시인들은 자신의 경향과 다른 시편들을 좋아한다. 사적인 자리에서 고백하는 서로 다른 시에 대한 애정은 평단의 평가와는 다르게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이번 기획은 시인들이 서로의 시에 대한 따뜻한 애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자신이 쓰는 시와 가장 멀리 떨어진 시, 자신의 태도와 경향과 가장 먼 시를 따뜻한 시선으로 읽어보자는 기획이다. 많은 시인들은 자신의 경향과 먼 시를 선정함으로써 역으로 자신의 경향이 드러남에 대해 고심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시인들이 기꺼이 성실한 시읽기로 참여해 주었다. 이번 기획의 청탁 대상은 최근 본지에 작품이나 글을 발표한 시인들은 가급적 제외하였고, 1980년대 시인부터 2000년대 시인까지 활발한 시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인들로 선정했음을 밝힌다.

김백겸은 젊은 시인 김경인의 「네 눈동자」를 읽었다. 김경인의 시는 밤을 사유와 신화의 그물에 가두어 해석하는 자신과 다르게 풍경의 이미지만 가지고 내면의 상상을 드러내고 있다고 전한다.

조원규는 브레히트의 시 「바퀴 갈아 끼우기」를 선정했다. 조원규는 브레히트의 시에서 도발적인 사유가 빚어내는 아이러니의 대담함과 유머를 읽는다. 그것은 시인이 갖지 못한 문학적 자질들이다.

정한용은 박상순의 「나는 시간을 만든다」을 읽고 있다. 정한용은 “박상순의 시는 상상에서만 가능한 세계, 즉 우리의 일상과는 거리가 먼 세계를 그리고 있다”고 한다. 결국 “박상순을 기존의 어떤 범주에 집어넣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최영철은 김언희의 「일식」을 읽었다. 시인은 “나와 비슷한 경로를 밟아 완성된 시보다 나와는 다른, 그래서 좀 낯설게 여겨지는 시들을 좋아하는 편이다”고 말한다. 헛된 기대와 막연한 몽상을 박살내며 세계를 박살내고 체면을 집어던지고 웃통을 벗어던지고 속 시원히 세계와 맞서는 시로 김언희를 꼽고 있다.

성선경 또한 김언희의 「출가」를 꼽았다. 김언희 시인의 시에서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자해적이고 위악적인 시어들, 안일한 사유에 갇혀 있는 기성의 시단을 흔들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한다.

이경림은 강은교의 「자전自轉」을 읽었다. 시인은 강은교의 시에서 그 이전의 여성시에서는 좀체 볼 수 없었던 대담하고 광활한 우주적 질서를 보았고 그 속에서 하릴 없이 스러져 가는 모래보다 작은 존재들의 슬픈 운명을 보았다고 전한다.

서안나는 김행숙의 「이별의 능력」을 읽었다. 그는 “김행숙 시의 특성은 우연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건의 진술들이 겹쳐지고 있다. 이때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을 통한 내밀한 독백에서 탈주하여 객관화된 주관적 경험들은 각기 특이한 목소리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맹문재는 신달자의 「저 산의 녹음」을 읽었다. 맹문재 시인은 지금까지 성을 다룬 시를 발표한 적이 없고 페미니즘을 다룬 논문을 여러 편 썼지만, 창작을 통해 추구한 적은 없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여성들의 주체성을 적극적으로 나타낸 신달자의 시를 선정했다.

김태형은 송찬호의 「기록」을 읽었다. 니체와 달리, 시인의 펜이 찍어 쓸 잉크는 피가 아니라 이 도시 밑을 흐르는 썩은 폐수이며 그 결과물이 바로 「기록」이라고 전한다. “‘코끼리’는 문명의 온갖 더러운 폐수와 거품처럼 실체도 없이 무한히 확대 재생산되는 자본의 음흉한 거짓 기호, 텅 비어 있는 시뮬라크르 속에서 탄생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이원은 조용미의 시를 읽으면 슬프고 내장이 꿈틀거리듯 아프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울 수 없고, 울지 못하게 하는 시가 조용미의 시라고 한다. 조용미 시의 지독한 견딤의 언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주종환은 생명의 숭고와 깊이에 깊이 천착해온 시인이 김지하 시인이라고 말한다. 김지하는 여전히 은산철벽 앞에 딱 한 걸음이 유예된 삶, 언제 떨어져 내릴지 모르는 매화 같은 추위와 고독의 삶, 그러한 삶의 궁극 속에 “세 거룩한 빛과 일곱별, 풍류가 살풋 숨어” 있다고 넌지시 알려준다.

유종인은 이하의 「大堤曲」을 읽었다. 유종인은 “이하라는 사내는 저마다 다르게 품고 있는 허무의 사랑, 사랑의 허무로 오늘 우리들 가슴 속에 스며 있다. 그 체위를 달리하는 눈길만이 다를 뿐이요, 그리하여 가장 비천하고 비천한 신분과 가장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사물과의 연대를 마다하지 않았던 사내의 죽음은 그 몸뚱이만을 버렸을 따름이다”고 얘기한다.

김점용은 김소월의 「먼후일」을 읽었다. 김점용은 “소월의 시는 대책이 없어서 좋다. 그냥 처연하고 안쓰럽다. 거기에는 어떤 비극적인 운명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다. 시적 언어의 운명이 체계와의 싸움이라면 소월의 체계는 운명 그 자체이다”라고 말한다.

김언은 최영철의 「토마토」를 읽었다. 최영철의 시를 두고 “이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이야기. 이것은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을 키워주면서 부풀리는 이야기. 거기서 우리는 삶의 한 정점을 보고 죽음의 반대편에서 빛나는 눈부심을 보고 잠시 웃는다. 아주 잠시 죽음을 잊게 하는 이 시를 두고 내가 써왔던 유령의 시들이 언짢아해 할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이영광은 조연호의 시를 읽었다. 그는 조연호의 시를 가리켜 시는 어렵지만 읽히는 시라고 말한다. 또한 조연호는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 아는 바를, 특이한 수사학적 긴장을 통해, 섬세하게 조절하면서 쓰는 시인이라고 말한다.

조정인은 서정춘의 시를 읽었다. 조정인은 시 쓰기에도 각자 구별되는 엄연한 패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택한 것이 서정춘 시인이다. 시인은 “자신이 레이어드룩을 즐긴다면 서정춘의 패션은 간명한 절대 미감만을 추구한다”고 한다.

박상수는 송경동의 「잃어버린 안경」을 읽었다. 일하면서 시를 써보려고 했던 시인의 체험이 고스란히 소개되어 있다. 작업장에서의 체험을 시로 쓸 때, 무엇보다도 그때처럼 은유와 상징이란 것이 위선적으로 보일 때가 없다는 것을 시인은 체험한다. 시인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자신이 어쩌면 뼛속까지 ‘쁘띠 부르주아’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이지는 최금진의 「웃는 사람들」을 읽었다. 최금진의 가난에 대한 이야기들에서 참혹하고, 애써 삶을 아름답게 포장하려 하지 않고, 세상과 끝없이 불화를 일으키고, 화해도 없음을 엿본다. 또한 자기염오를 통절하게 드러내는 최금진의 시를 ‘계통’의 문제와 결부되면서 그만의 독창적인 육성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을 읽는다.

고현정은 신용목의 「틈」을 읽었다. 시인은 마음의 금에 주목한다고 한다. 신용목의 “시가 반짝이는 소중한 영역. 그리고 그 주변. 시인은 현학적인 표현에서 물러날 줄도 안다. 나를 화나게 하고 그를 애처롭게 한다. 이건 순전히 내 마음대로의 시 읽기 방법이다”고 말하고 있다.

김경인은 김남주의 시 「자유」를 읽었다. 김남주의 시에서 “역사와 함께 하는 삶이 있다. 시를 무기로 삼는 전사의 촌스러움이 있고, 시 아니면 안 되는 절실함이 있다. 시 이전에 삶이 있고,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운동성이 있다” 말한다.

박진성은 김언의 「유령-되기」를 읽었다. 그의 시를 “오래 듣는 일에 골몰해 있던 사람이 해주는 나지막하지만 의미심장한 전언”으로 말한다. 거기에서 “유령은 실체가 없으므로 보이지는 않지만 잠행의 형식으로 ‘모든-사람이-되는-것’(들뢰즈)을 수행하는 존재”라는 점을 인식한다.

임현정은 나희덕의 「저 숲에 누가 있다」를 읽었다. 자신의 시가 “고무공처럼 튀어서 어두운 도시 막다른 곳에 다다른다면 그녀의 시는 느린 걸음으로 와서 나를 깊은 숲으로 데려가거나 때론 불이 꺼진 방으로 데려간다”고 말한다.

장석원은 정지용의 「비」를 읽었다. 장석원은 정지용 시의 고요가 좋다고 한다. 또한 “정지용이 건설한 이 종교적 침묵의 사원이 날 맑게 한다. 나는 극단적 침묵의 세계를 가득 채운 팽팽한 긴장에서 정지용의 힘을 느낀다”고 전한다.

김성규는 진은영의 「유괴」를 읽었다. 김성규는 “진은영의 시는 하나의 관점으로는 온전히 파악되지 않는 면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는 발랄하면서도 어둡고, 환상적이면서도 사실적이다”고 말한다.

김안은 이시영의 「네슬레」를 읽었다. 이시영의 시편들에서 “죽은 자들의 생생한 육성을” 듣는다. 또한 “이 육성은 산문의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시를 시이게 하는 근원적 힘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정한아는 박인환의 「무도회」를 읽었다. 시인에게 박인환은 “최초로 문고리를 잡고 들어갔던 집”이다. 그에게 박인환의 기억은 “지금 다른 어느 집보다 시공간적으로 멀지만, 심리적으로는 가장 가깝다. 애증이 그만 왈칵 사무친다.”고 말한다.

이현호는 김영승의 「반성 21」을 읽었다. 그는 “「반성 21」은 그나마 그런 위악마저도 보이지 않고, 평이한 진술에 머물러 있었다. 한데 그 시가 이상하게 마음을 적시고 여운을 남겼다. 비시적非詩的인 것이 가장 시적인 이 역설.”이라고 이 시에 대해 말한다.

주영중은 진이정의 「생각에 대하여」를 읽고 있다. 그는 “진이정 시는 과잉의 언어를 추구한다. 구심력을 위한 말보다는 원심력을 위한 말들이 많다. 원심력으로 인해 튕겨나가려 하는 말들, 아니 그 힘이 미치는 자장 너머에서 또 다른 힘으로 작용한다”고 전한다.

다른 경향의 시는 자신이 쓸 수 없는 시이기도 하고, 자신이 놓쳤던 세계이기도 하다. 또한 다른 시들을 애정으로 읽어보면서 자신의 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도 마련하였다. 앞으로 경향이 다른 시편들에게도 애정을 갖는 기회가 더욱 많아지길 바란다.

_ 현대시, 2008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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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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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戊子)년 쥐띠해입니다.
매년 다가오는 새해라고 별다를 건 없지요.
2007년은 제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던 해입니다.
그러나 사람살이라는 게 그렇듯,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게 남은 것은,
어느 시인께서 제게 한 말씀처럼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홀로 가는 것입니다.
아니, 애초부터 없었던 허공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이 설령, 제가 이 세상을 등질 때까지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이 제 길이라면 가야겠지요.
마치 고통처럼, 신께서도
참을만한 고독을 주실 겁니다.
그리고 쥐띠로 태어난 제게,
동물 중에서도 쥐를 가장 징그러워하는 제게,
한겨울 풀숲에서 태어난 제게,
쥐띠해가 왔습니다.
어두운 밤,
외줄을 지켜줄 달빛 하나면 족합니다.
달빛이라면, 그의 곁에서 부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자고 나면 아무도 모르게 하얗게 내려와 앉은 흰 눈처럼
그런 겨울을 나고 봄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긴 긴 겨울밤을 오래도록 울고 싶습니다.

이재훈.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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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문학마당」이 창간되었을 때 나는 무척 반갑고 기뻤다. 충남 논산에 본가가 있고 대학을 충남에서 나왔으며, 20여년을 살아온 곳이 대전 ․ 충남지역이기 때문에 이곳은 나의 또다른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대전 ․ 충남 지역에 변변찮은 문예지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문학마당」의 출현이 반가웠을 것이다. 이후로 「문학마당」에 시도 발표하고 평론도 발표했으며 큰 관심으로 잡지를 읽는 독자였다. 「문학마당」의 편집자들 또한 평소에 좋아하는 선생님들이었기 때문에 신뢰감이 갔다.

「문학마당」의 창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창간 5주년이라고 한다. 나는 월간 시전문지 실무자로 오랫동안 일을 해왔기 때문에 문예지의 발간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인지 잘 안다. 적은 독자층과 취약한 재정기반을 안고 있는 것이 대부분 문예지의 현황이다. 또한 지역에서 문예지를 발간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문학마당의 창간 5주년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새로운 잡지가 창간되면 독자들은 그 잡지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에 대해 골몰하게 된다. 잡지가 창간되어야 하는 명분과 이유에 대해 이것저것 타진해 보는 것이다. 문학잡지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문예지는 창간 명분과 이유가 더 중요시된다. 현재 발간되고 있는 문학잡지의 수는 228종(2006년 문예연감 자료)이다. 이중에서도 서울에서 발간되고 있는 잡지의 수는 158종, 지방에서 발간되는 잡지는 70종이다. 잡지의 수를 놓고 보더라도, 또하나의 잡지가 창간되면 또 그렇고 그런 잡지가 하나 더 보태진다는 회의적인 시각으로 비춰질 공산이 크다. 또한 문예지의 양적인 팽창으로 전체 문예지의 하향평준화 현상이나, 무분별한 신인들의 발굴, 또다른 측면에서의 문단권력 생산 등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예지의 창간은 창간의도와 명분, 당위성이 갖춰진다면 반가울 수밖에 없다. 「문학마당」은 명확한 명분과 당위성을 가지고 있는 잡지 중의 하나이다. 먼저 대전 ․ 충남지역을 대표하는 문학지로서의 역할이다. 지금 대전 ․ 충남 지역의 대표적인 문예지는 「애지」, 「시와정신」과 함께 「문학마당」이라는 사실은 문단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타지역에서도 지역을 대표하는 문예지가 발간되어 오고 있다. 대구의 「시와반시」, 부산의 「시와사상」 ․ 「신생」 ․ 「오늘의문예비평」, 광주의 「시와사람」 ․ 「문학들」, 강원의 「시와세계」, 전주의 「문예연구」, 제주의 「다층」 등등. 대전 ․ 충남 지역은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문학마당」의 창간으로 지역문단이 더욱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문학마당」은 지역문예지로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종합문예지이다.

문학마당은 창간 이래 기억에 남는 특집을 계속해서 해왔다. 문학과 종교, 문학과 문화산업, 문학과 지역문학, 문학과 도시, 문학과 성, 문학과 시간, 문학과 영화, 문학과 역사, 문학과 언어철학, 문학과 정치, 문학과 디아스포라 등등 문학과 관련된 담론들을 기획해 왔다. 앞으로도 더 인문학적인 기획특집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젊은 시인들을 조명하는 특집이 생겼으면 하는 점이다. 젊은 문인들이 애정을 가진 잡지가 더욱 오래 남는 잡지가 되리라는 개인적인 생각에서이다.

마당은 다함께 거닐고 놀 수 있는 공간이다. 문학을 하는 창작자나 연구자, 독자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마당의 역할을 오래도록 하기를 기대한다.

_ <문학마당>, 2007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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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키워드를 한 단어로 요약하기에는 난감하다. 그것은 평가에 대한 곤궁함 때문인데, 늘 시 쓰는 창작주체들은 자신의 평가에 대해 수긍하고 싶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모든 시각에는 이분법적인 잣대가 배면에 깔려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이 달콤하다고 말하면 쓴맛이 없는 것 같고, 쓰다고 하면 달콤한 맛이 없는 것 같아서 늘 평가에 대해서는 허기가 진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한 마디로 말해야 하는 억압 때문에 일어난 작은 해프닝과 같은 것이다. 진정한 창작자라면 평가와 같은 줄넘기에는 관심없는 단독자여야 한다.

별, 최초의 말, 미아

첫 시집을 낸 이후, 세간의 평가는 대충 이런 말들이었다. 광활한 시공, 시원에 대한 신비한 상상력, 유목민의 후예, 야생과 원시를 향한 주술의 언어, 기원에 대한 탐구, 그노시스의 열망, 낭만적 정신의 고투 등등.

나는 별을 꿈꾸었다. 별 속에서 게으른 발길질을 하고 있는 가녀린 영혼에 대해 생각했다. 그 영혼의 호흡이 공기가 아니라 물속의 부력으로 버텨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배꼽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했다.

제단은 육신을 밥으로 삼지만, 제단은 영혼이 본질이며 주인이다. 별 속에서 가르랑거리는 작은 목소리, 그 최초의 말에 대해, 최초의 말이 뛰어노는 이 땅에 대해, 이 땅에 거북이처럼 엎드려 살아도 자꾸 병들어가는 미아에 대해, 이 모든 것과 결별할 수 없는 땅의 작은 경이로움에 대해, 까닭을 알 수 없는 분노와 서글픔과 이 땅의 모든 슬픈 사랑에 대해.

숭고, 비의적 진리, 연금술, 서울, 골목길

아직도 나의 순례는 끝나지 않았다. 순례의 길목만이 다를 뿐이다. 예전엔 올라갈 먼 곳만 바라보며 올랐다. 목이 아팠다. 지금은 여유를 생각할 때다. 길목을 떠나면서 만나는 작은 풀꽃과 주위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때로는 쉬어가며 길을 간다. 머나먼 길을 오래 걸으려면 쉽게 지쳐서는 안된다. 소요하며 걷는 곳에 때론 숭고미(崇高美)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장엄한 풍경들을 만난다. 여전히 나는 그노시스의 이교도 중 하나이다. 파스칼의 비의적 신념과 니체의 고된 말 사이를 오가며 걷는다. 킬리만자로의 설산이 예전 같지만 못하다는 소식과 명왕성이 태양계의 지위를 박탈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 킬리만자로와 명왕성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 더불어 서울이라는 이 도시도 늘 여전하다. 나는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골목길을 오르내리고 술집을 드나든다. 지금 내 삶에 가장 오랫동안 몸 누일 이 땅이 또한 시가 만들어지는 땅이다. 떠날 수 없다면, 사랑하라.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을 억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일이다.

_ 시와반시, 2007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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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묘지山頂墓地 1

조정권


겨울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뭍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 밑에서 들려주리.

여름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치라.
나의 발 끝에서 머리 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바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산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에 뿌려진 생목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 숲속을 거니는 새벽의 아들

겨울산을 자주 오른 적이 있었다. 그해 겨울 관촉사灌燭寺 반야산般若山을 자주 오르며 무언가 규정할 수 없는 정열과 싸웠던 때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灌燭寺’란 이름처럼 나의 내면을 조용히 밝히는 일이었던 것 같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막연한 정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마치 신열身熱이 난 것처럼 영혼이 아팠기 때문이다. 겨울 산비탈에 얇게 쌓인 눈을 밟으며 혼미하고 어지러운 정신을 가다듬을 때쯤 조정권의 시편들을 만났다. 그 이후로 조정권의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와 [산정묘지], [신성한 숲] 등은 두고두고 읽어가던 내 시집 목록이 되었다. 이 세계에 대한 막연한 저주와 의미없는 자학이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을 배우는 도정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숲속을 거니는 새벽의 아들, 빛의 신랑”은 조정권의 말이다. 그의 시는 새벽 동살을 기다리며 비밀의 숲을 소요하는 단독자單獨者의 언어이다. 고요한 성찰 가운데에 매운 채찍을 휘갈기는 언어이다.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에 서는 것”으로 잠든 정신을 채찍질했고, 방황 속에서 치렀던 긴 망상의 언어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었다. 스스로 도취하지 않기 위해,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지치고 지친 불면의 밤과 나날의 어둠 속에서 영혼의 향기를 느끼기 위해 이 시를 읽었다. 관념이 수사의 치장이 아니라 내면의 고귀한 고백이며, 절박한 물음이며 또한 고통임을 이 시를 통해 희미하게 보였다.
조정권은 얼음 속에 핀 꽃잎의 산책자이다. 그의 정열은 차가운 이성 속에서 시원始原과 본질을 탐하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내게 남아 있다.

- 현대시, 2007년 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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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말

매혹적인 시의 근원을 찾아서


이 재 훈


지난 호에 이어 소통을 주제로 한 두 번째 기획을 준비했다. 지난 호의 기획 의도는 2000년대 전후의 젊은 시인들을 둘러싼 논쟁을 중진 시인들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는지 살펴보는 것이었는데, 이번 기획은 그 역으로 진행되었다. 즉 젊은 시인들이 어떠한 양상으로 중진 시인들의 시를 바라보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오늘의 한국시가 시와 독자와의 소통, 시인들과의 소통, 세대 간의 소통이 잘 안 되고 있다는 지적은 이미 본지 지난 호와 다른 지면들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이러한 소통의 정체는 각 세대가 가진 사회적 경험과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은 자명한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문학 세대들은 이전 세대들의 문학적 성취를 섭렵하고 그 토대 위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젊은 시인들은 매혹적으로 읽은 중진 시인들의 시를 자신의 문학적 자양분으로 삼았으며 그 밑거름이 새로운 언어를 꿈꾸게 하는 힘이 되었다.

이번 기획은 세대 간 소통이 서로의 시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새로운 활로를 열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기획의 방식은 지난 호와 마찬가지로 진행되었다. 먼저 대표적인 젊은 시인들에게 인상깊게 읽은 중진 시인들의 시 한 편을 추천하고, 그 시에 대한 짧은 감상과 함께 다음과 같은 설문을 부탁했다.

1. 젊은 시인들의 시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젊은 시인들의 시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 추천할 만한 중진 시인들의 시집이나 시가 있다면 써주시고, 그 이유를 간단히 써주십시오.
4. 현 한국 시단에는 세대 간 시적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앞으로 중진 시인들과 젊은 시인들 간의 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는 방법이나 의견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써 주십시오.

젊은 시인은 등단 10년 미만, 70년대 이후에 태어난 시인들로 한정지었다. 또한 본지에 최근 작품을 발표했거나 조명을 한 시인들은 필자의 중복으로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그렇게 우리가 청탁한 31명의 시인은 아래와 같으며 원고를 보내온 시인은 16명이다.

김근, 문혜진, 이재훈, 김민정, 류외향, 진은영, 이영주, 최치언, 박성우, 이승원, 이창수, 장이지, 정영, 길상호, 박진성, 신동옥, 신혜정, 안현미, 유형진, 윤성택, 임현정, 오은, 조동범, 최승철, 한용국, 김안, 김경주, 박상수, 박판식, 송승환, 윤석정

당분간 산문청탁을 보류해 달라고 개인적인 부탁을 한 몇 시인들은 청탁목록에서 제외하였다. 원고청탁은 먼저 이메일로 청탁서를 보낸 후 집필여부를 이메일과 전화로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최종으로 전화를 통해 집필여부를 확인하였다. 이렇게 메일을 통해 청탁한 이유는 집필에 대해서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한 원고 집필을 하겠다고 밝힌 몇 시인들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집필을 포기하였다.

원고청탁에 응하지 못한 시인들은 외국에 체류해 있거나 국내 여행 중인 시인들이 많았다. 또한 지난 호에서처럼 산문에 대한 부담감, 다른 지면과의 겹치기 청탁 등으로 집필이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지난 호에서처럼 시인을 선정하는 과정에 대한 부담감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번 기획의 열여섯 시인들의 글을 통해 지금의 한국시가 존재하는 기원을 한 단면으로나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시인들은 중진 시인들의 시를 문학의 교과서로 삼아 읽고 감동하였으며 전파했다. 그 시적 편력과 사연들을 통해 새로움의 원형들을 한 번 예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혜진은 최승호의 「뭉게구름」을 통해 사물의 유연함을 말한다. 구름의 운명과 먹구름처럼 드리워진 인간사의 고통, 생의 덧없음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시를 존재의 자기변신술이라 칭하며 꼼꼼히 읽고 있다. 이재훈은 조정권의 「산정묘지」를 읽었다. 「산정묘지」 연작은 존재의 본질을 상징과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한 시이다. 조정권의 시를 새벽 동살을 기다리며 비밀의 숲을 소요하는 단독자單獨者의 언어이며 고요한 성찰 가운데에 매운 채찍을 휘갈기는 언어라고 말한다. 이승원은 오규원의 「빈약한 상상력 속에서」를 통해 문화적으로 빈약한 상상력에 대해 말한다. 맹물 사랑을 신봉하는 존재들은 자신의 구린내를 대면하고 직관하는 일을 회피한다. 대부분의 미망과 비극은 비좁은 사유가 부른 그릇된 가치부여와 믿음에서 기인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창수는 오탁번의 시 「마늘」을 감상하면서 자기를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방법은 매운 맛을 잃어버린 시인 자신을 비판하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살아오면서 점점 본래의 모습에서 퇴화되거나 변절해 버리는 현대인들을 마늘을 통해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장이지는 귀찮음의 미학을 얘기하고 있다. 김사인의 시 「장마」는 세공의 흔적이 역력해서 거기다가 미학이라는 수식을 더해주고 싶은 귀찮음의 미학을 보여주는 시라 말한다. 속도의 시대 속에서 매력을 찾을 수 있는 시이다. 길상호는 이재무의 「국수」를 읽으며 어린 시절 국수에 대한 기억들을 떠올린다. 길상호는 서민적이고 소박한 음식에 사로 잡히는 것처럼 시 또한 흔하고 일상적인 제재를 통해 깨달음을 주는 시를 좋아한다고 한다. 시인은 이재무의 시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통해 가족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박진성은 송찬호의 찔레꽃에 대한 추억이 있다. 시에 대한 얘기로 통음을 했으며 필사를 했고 눈물을 자아냈던 시가 박진성에게는 송찬호의 시다. 한 개인의 연애담이 찔레꽃과 눈썹과 사기와 뱀을 거쳐 野史로 태어나는 광경을 다시 한 번 시인을 통해 감상해 본다. 박판식은 이문재의 「판화」를 중심으로 80년대 시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특히 강창민의 「아름다운 노래」, 배진성의 「길이 있는 풍경」, 장경린의 「허리 운동」 세 편의 시에 대한 감상을 함께 하며 저물녘의 황혼을 떠올리고 있다.

유형진은 송재학의 「하루 종일」을 읽는다. 시를 읽으며 뿌리째 뽑힌 은행나무 대신으로 벌을 서는 시인을 상상해 본다. 또한 나무의 눈을 빌려 살아 왔던 시인의 마음나무의 눈을 가진 채 짐승의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 와야 했던 시간들을 생각해보고 있다. 윤성택은 김광규의 「좀팽이」를 읽으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 콧물이 된 표정을 애써 감추듯 이렇게 우리는 좀팽이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얘기한다. 그에게는 좋은 시는 시대가 변해도 그 의미와 깊이가 달라지지 않는다. 1980년대의 현실이 2007년에 와서도 뜨겁게 읽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는 말로 이 시의 매력을 표현하고 있다. 임현정은 이하석의 「밥상」을 읽었는데, 이 시를 읽을 때 따뜻한 밥김이 나를 에워싸는 것 같다고 한다. 이하석의 시를 통해 인간에 대한 시인의 따뜻한 시선과 삶을 표현하는 묘사의 힘을 느꼈다고 전한다. 이하석의 시는 임현정에게 한때 치기로 썼던 자신의 시들이 부끄러워지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최승철은 이승훈의 「그녀의 방」에 대한 시적 체험을 전하고 있다. 활발한 시행 전환, 거침없는 시상 전개, 단순한 듯하면서도 복잡한 알레고리 등이 좋아하는 이유의 목록이다. 또한 화려한 단어를 동반하지 않아도 화려해지는 이승훈의 시적 방법론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특히 「그녀의 방」은 이승훈의 시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시라고 한다.

송승환은 이성복의 시를 통해 부정 정신과 산문의 리듬을 말하고 있다. 송승환은 이성복의 시를 처음 읽었던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아버지에게 개새끼 건방진 자식,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라고 말하는 것도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권력에 대한 부정의 정신은 시를 노래로 규정지으려는 전통적 태도를 부정하고 산문이 구가할 수 있는 시적 리듬의 절정을 시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확립한다고 한다. 한용국은 황지우를 통해 재래적인 서정시의 문법이 파편화된 현실에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한 권의 시집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문제적인 시인이라고 말하는 황지우 시인의 시를 통해 존재의 가려움을 해소할 수 있다고 한다. 김안은 장정일의 「삼중당 문고」를 읽으며 스무 살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장정일의 시집을 만나면서 동질감을 느꼈고 당시 많은 양의 시집을 읽었던 추억을 떠올린다. 그 당시 읽었던 시집들이 공룡같이 기괴하고/우주같이 신비로웠고, 시인들의 관, 무덤과 같이 느껴졌다는 장정일의 말처럼 읽는 이들에게 평안한 무덤이 되는 시의 거처가 삼중당 문고라고 전한다. 윤석정은 정양의 「어금니」를 읽는다. 시인은 치통으로 고생했던 기억과 미당 선생께서 돌아가신 날의 사연을 통해 험한 세상을 견디는 쓸쓸한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을 통해 삶에 밀착된 언어, 언어에 밀착된 삶을 살아가는 시인은 삶을 시처럼, 시도 삶시인의 올곧은 시 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이번 기획에 옥고를 보내주신 젊은 시인들께 감사의 말을 드린다.

- 현대시 2007년 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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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 위쪽 나무들이 고개를 숙여 만들어낸 그늘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오른편에 언덕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있다. 그 길이 바로 그 유명한 할머니 동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할머니 동산, 이라고 가만히 입술을 열어 보면 그날의 풍경과 그날의 목소리와 그날의 어지러움이 함께 떠오른다.

이른 봄날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찬바람이 마지막까지 제 존재를 증명하려는 듯 옷깃으로 파고들었다. 겨울을 무기력하게 보냈고 봄이 오면 새로운 다짐을 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날의 햇살은 더 남다른 데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강의실 창가에까지 보드라운 몸을 기대는 햇살의 감촉을 참을 수 없었다. 세상의 가식된 거짓에서 벗어나라는 진리의 새가 어깨 위로 포르르 날아와 앉는 느낌이었다. 함께 강의를 듣던 친구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자고, 그래 그러자고 합의를 하고 교수님을 졸랐다.

우리는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는 야구부원들의 역동적인 몸놀림을 바라보며 뒷길을 걸었다. 봄날의 햇살 때문인지 모든 풍경이 새롭게 꿈틀거리는 듯 보였다. 친구들 몇은 막걸리를 준비했다. 할머니 동산으로 오르는 길은 소박했고 편안했다. 마치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느낌처럼. 할머니 동산은 작은 정원이었다. 이쪽 저쪽 꽃몽오리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제 곧 꽃이 될 붉고 노란 얼굴들이 동산에 가득했다. 꽃향기를 맡으며 술향기를 맡는 이 신선함. 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준비해온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판이 벌어지면서 자연스레 노래판도 벌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쑥스러움은 쉽게 노래의 열정으로 빠져들지 못했다. 술이 몇 순배 더 돌고나서 한 친구가 노래를 불렀다. 그 친구는 원우들 중에서도 가장 낯을 가리고 수줍음 많은 친구였다. “사랑함에 세심했던 나의 마음은 그렇게도 그대에게 구속이었소. 믿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헤어지는 이유가 됐소……” 구창모의 희나리였다. 나는 그날의 그 노래를 잊지 못한다. 좀 처연하긴 하지만, 할머니의 품에서 위로받으려는 듯 다짐하려는 듯 끊어질 듯 이어지며 불렀던 노래. 희나리는 덜 마른 장작을 말한다. 그때도,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덜 마른 장작이었다. 덜 마른 장작이 내뿜는 매캐한 연기가 할머니 동산에 가득했다. 나는 그 이후로 구창모의 희나리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공간은 안과 밖의 변증법으로 인해 의미를 갖는다. 어디로 도망할 것이며 어디로 피할 것인가. 안은 어디이며 밖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시절. 결국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지만. 할머니 동산은 이곳이 아닌 저 너머의 곳이었다. 도망도 피할 곳도 아닌 위로를 준 동산이었다.

그 뒤로 몇 번을 그 동산에 올랐던가. 가슴이 울렁거릴 것만 같은 그 동산. 내겐 비밀의 화원이었던 그 동산. 할머니의 치마폭처럼 알 수 없는 울분과 고민을 감싸 안아 주었던 그 동산을 다시 한번 오르고 싶다.

(중대대학원신문, 2006, 7.)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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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마을은 적요했다. 해남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땅끝마을로 오면서 평원의 등 너머로 온 시야 가득 퍼져 있는 노을을 보았다. 해지는 광경도 장관이었지만 해가 넘어가면서 나의 마음도 새로운 세계에 닿는 듯한 느낌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땅끝마을은 서서히 어둠을 드리우고 등을 하나씩 켜고 있었다. 우중전야(雨中前夜)라 그런지 어떤 축축한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그 쓸쓸함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편안한 감정이었다. 그런 묘한 낭만을 느끼면서 땅끝에서 여행의 첫날밤을 보냈다.

그해 가을. 약 1주일의 시간을 보길도에서 보냈다. 혼자만의 여행에 바쳐진 보길도. 그곳을 찾은 것은 딱히 어떤 이유에서라기보다 먼 동경의 갈급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막연하게 갈 수 있는 먼 곳을 머릿속에 그리다가 해남에서도 1시간을 더 가야 하는 보길도를 생각해낸 것이다. 또한 그곳은 시인 윤선도의 얼이 남아 있는 곳이 아니던가.


도시생활이 갖게 하는 무기력한 일상의 순환이 목까지 차올랐을 때 난 무엇을 간절히 그리워했을까. 대개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어딘가로 떠나 새로운 풍경을 만나는 것으로 그런 답답함을 해소하곤 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정작 풍경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어느 순간 나를 마주하고 마는 것인데, 우리는 그 풍경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가끔씩 무작정 떠나는 것으로 새로운 충전의 시간을 얻곤 한다. 다만 보길도 여행이 다른여행과 다르게 각별히 기억나는 것은 내 배낭에 이우환의 『시간의 여울』(디자인하우스)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길도에 들어가면서 나는 이미 자연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있었다. 내가 일찍 죽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런 자연을 보는 기쁨일 것이다. 돌담이 둘러져 있고, 창호지 여닫이문과 돌쩌귀가 아직도 그대로 있는 민박집에 방을 얻었다. 민박집 방문을 열고 바다를 바라보며 이우환의 글을 음미하듯 읽었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드디어 바람 한 점 없는 우주의 일순이 들이마신 숨결과 딱 겹친다. 무언가가 땀과 함께, 일제히 뿜어 나온다. 몸이, 침대가, 방째로 끝없이 녹아 나가, 이윽고 모든 것이 먼 바다가 되었다.

묵었던 민박집

이우환은 일본 모노파(物派)를 창시한 현대미술의 거장이다. 그는 1936년 경남에서 태어나 유년기 때 시, 서, 화를 배우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56년 일본으로 건너가 가장 성공한 예술가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언젠가 그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여백이 넓은 그의 그림은 글과도 많이 닮아 있다.

보길도는 마음에 평온을 주는 바다였다. 비가 올 듯 말 듯하여 날씨는 우중충했지만 그런 하늘이 더욱 여행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깊은 밤, 갯돌이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내는 자갈 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있을 때는 자연의 감동이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우환은 또 이렇게 쓴다. '자연을 이야기하고 자연을 아낀다고는 말해도, 그것은 자신의 이미지를 부풀리고 거기에 형색을 갖추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라고. 나는 과연 그런 것일까. 우문의 자문자답을 하며 모든 것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이미지에 덧칠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내가 갖고 싶은 이미지의 자연. 그 차이 속에서 숨쉬는 모든 사물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듯했다.

이우환은 결락(缺落)의 세계를 좋아한다고 했다. 시간적인 것이든 공간적인 것이든, 그가 좋아하는 결락의 세계에 나도 동참해 보고 싶었다. 그는 그것은 먼 완성을 향해 만들어가는 여정의 세계이기도 하고, 하염없는 소멸을 향해 무너져가는 과정의 세계라고도 했다. 이러저러한 생각들 속에 지내다가 이틀을 바닷가 근처에서 소요했다.

역동성이 없는 자연 속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금세 지치게 마련일까. 이틀이 지나니 조금 무료해졌다. 다행히 민박집 주인아저씨의 낚싯배를 얻어 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낚싯배를 타고 근해로 나가 난생 처음으로 바다낚시를 해 보았다. 내가 잡은 것은 노래미라는 작은 물고기였다. 파닥거리는 물고기의 역동적인 힘을 느끼는 낚시의 재미에 온종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내가 잡은 물고기를 회를 떠서 맛있게 먹고 또 밤을 맞았다. 그리곤 손끝에 느껴지던 낚시의 손맛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물고기의 가장 마지막 힘을, 자신의 목숨을 다한 힘을 내가 즐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우환의 말처럼 그것도 소멸을 향해 무너져가는 과정일까.

그 후로 민박집에 며칠을 더 머물며 보길도의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중리와 통리의 해변과 고산 윤선도의 세연정, 부용동정원을 돌아보며 풍경의 호흡을 한 숨이라도 더 들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어느덧 지겹던 일상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일상을 피해, 일상을 잊기 위해 떠났던 여행에서 나는 일상의 소중함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우환의 글이 가지고 있는 힘이기도 하다.

그의 글은 이 하찮고 천박한 일상이 얼마나 의미 있고 근사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 준다. 거대한 일상의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었던 일상의 여백을 생각하게 한다. 그의 말대로 '예술가는 공간을 만들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無)의 영역이니까. 공간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우환은 우리가 모르는 눈뜬 공간, 일상의 공간을 점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여는 길을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 날 민박집 들마루에 누워 낮잠을 잤다. 낮잠을 깨고 이우환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꼭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기록해 둔 글처럼 나는 무(無)의 바다에 그렇게 오래도록 가만히 있었다.

눈을 감으면 뭔가가 사라져가는 기척이 있다. 재빠른 풍화의 소리다. 철판이 사각사각 삭아 앉고, 돌이 바삭바삭 증발을 서두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돌도 철판도 그리고 마당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언제쯤인지 눈을 떴을 때에는, 나는 무의 바다 속에 있다.

_ 북새통 2006년11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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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未知


김수영은 <詩人의 精神은 未知>라는 글에서 “그의 모든 관심은 내일의 시에 있다. 그런데 이 내일의 시는 未知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정신은 언제나 미지다. 고기가 물에 들어가야지만 살 수 있듯이 시인의 미지는 시인의 바다다. 그가 속세에서 愚人視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기정사실은 그의 적이다. 기정사실의 정리도 그의 적이다.”라고 했다. 김수영이 말한 적(敵)은 기존에 있어 왔던 것, 기존에 있어 왔던 것의 정리다. 그러나 김수영도 기존의 것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자신의 시에 대해서 규정하고 정리할 필요가 없다 했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시와 당대의 문학적 정체성과의 싸움을 벌였다. 그의 글은 독설이지만 또한 결벽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가. “시인은 영원한 배반자다. 寸秒의 배반자다.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

2. 寸秒의 배반자

시를 생각할 때는 시소를 타고 있는 느낌이다. 때론 방법이 내용을 올라탔다가 내용이 방법을 올라타기도 한다. 방법 때문에 내용이 가벼워지기도 하고 내용 때문에 방법이 가벼워지기도 한다. 방법과 내용이 수평을 유지하는 팽팽한 긴장감은 쓰면 쓸수록 어렵다. 그래서 때론 내용이 있다 하여 낡은 방법을 슬쩍 숨기기도 하고, 방법이 있다 하여 빈한 내용을 숨기기도 한다. 김소월이, 로버트 번즈가 위대한 이유는 이런 긴장감과 다름 아니다.
언어가 형식 속에 스며들어 세계를 지배할 때 한 편의 시는 언어를 뛰어 넘는 그 무엇이 된다. 이런 느낌은 시를 쓸 때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뮤즈가 찾아와 내 오감을 건드려 주술의 언어가 토해지는 시는 이제 아주 가끔이다. 이때 형식과 내용은 이미 시인의 손끝을 떠나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 이후는 무엇인가. 바로 ‘寸秒의 배반자’ 역할을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내 방법을 배반하고 내 세계를 배반하고 지루하다 못해 그 모든 걸 배반한다. 엘리엇이 말한 ‘감수성의 통일’은 이 모든 것을 용광로에 밀어 넣을 때 가능한 일인가.
이럴 때 문득 쓸쓸해진다. 하지만 그 쓸쓸함을 시로 선뜻 옮기지 못한다. 쓸쓸함이 내 삶의 사연보다 못하며 거리의 감동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백지 위에 몇 마디를 긁적이다 그냥 변죽을 울리고 말 뿐이다. 그리고 나는 목적없이 거리를 걷는다.

3. 아주 사소한 거리

요즘 나는 거리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아니 목격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얼마 전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보았다. 샛노란 은행잎이 거리에 흩날렸다. 비둘기들이 간신히 은행잎들을 피해 날아다닐 정도였다. 그 광경은 마치 황혼녘에 결투를 벌이는 서부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장감마저 주었다.
그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모두 쓸쓸한 뒷모습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쓸쓸한 어깨들의 부딪힘과 서늘하게 부는 바람. 그 배경에 눈부실 정도로 노란 은행잎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쓸쓸함의 풍경은 아주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쓸쓸함이 아름다움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4. 가면

대체로 쓸쓸함은 상투적인 가면을 쓰고 찾아온다. 무언가 정확히 말할 수 없는 내면의 결핍이나 부재를 우리는 쓸쓸하다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쓸쓸함’은 뭉뚱그려진 정서이다. 쓸쓸함은 외로움과 적적함의 일상어이다. 그러기에 가장 가까이에서 우리의 정서를 대변해주는 언어이다.
누군가가 ‘쓸쓸하다’고 했을 때 우리에게 가장 먼저 보여지는 건 상투적인 가면이다. 말하는 자도 알고 그것을 듣는 자도 안다. 상투적이란 말 속엔 습관성이란 긴 골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쓸쓸하다’고 습관적으로 얘기한다. 이 습관이 ‘쓸쓸함’이란 말을 상투적인 골 속에 가두어 놓는다.
나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이 쓸쓸함과 직접 만나는 느낌이다. 찬바람이 내 폐부를 훑고 지나가면 내 존재의 밑바닥에 달라붙어 있던, 그동안 모르고 지내왔던 마음들이 떨어져 보풀처럼 흩날리는 것 같다. 입김을 불면 빠져나가는 불편한 관념 덩어리들. 그제서야 나는 차갑고 텅빈 사물이 된다.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
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품어 준다.

그리고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내 손끝에서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보내고 만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아름다운 영원을
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도 없는 나의 손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나의 시와 함께.
― 김현승, <절대고독>

5. 쓸쓸함을 사랑하기까지

날이 추워지면서 잠도 많아진다. 바쁜 일상이 잠을 더 재촉한다. 때론 내 코고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온 몸으로, 온힘을 다해 내뱉는 나의 숨소리를. 내가 살아 있음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표현한 적이 그동안 있었을까.
김현은 “정말 무서운 욕망이란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왜 그런 욕망이 생겨나는가까지 밝히기를 바라는 욕망”이라고 했다. 이 갈급한 ‘채움’의 욕망의 배면에 ‘성찰’과 ‘반성’의 욕망이 숨어서 날 또렷이 쳐다보고 있다. 이 쓸쓸함이라는 관념덩어리가 뜨거운 시로 태어나지 않을 때, 나는 또 가면을 쓴다. ‘유쾌함’이라는 가면을 쓴다. 거리를 걸으며 그 유쾌한 보폭을 따라가다가 어느덧 쓸쓸함을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_시와정신, 2002.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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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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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점에 들렀습니다. 종로에서 친구와 약속이 있었는데, 그만 약속시간이 늦춰지게 되어 어디 시간 보낼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서점에 하루가 멀다하고 드나들었습니다. 책을 좋아해 이런저런 책을 구경하고, 심지어 자리를 깔고 책을 읽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는 게 바쁘다보니 예전처럼 책을 많이 읽지 못합니다. 일과 관계된 문학서적만 읽는 편식독서로 바뀐 것이지요. 또한 책을 구입해도 인터넷을 통해 구입하는 경우가 많아 서점은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서점으로 들어갔습니다.
서점의 풍경 중에 놀란 것은 아직도 많은 어린이들이 서가 사이사이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겁니다. 저도 어린 시절 책을 읽던 기억이 났습니다.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서점은 읍내에나 나가야 있었습니다. 대신 아버지의 서재에서 어른들이 읽는 책이나 월부로 구입한 동화책을 읽었지요. 곰팡내가 나는 어두컴컴한 서재 방바닥에 앉아 읽었습니다. 겨울엔 서재에 난방을 하지 않아 늘 추웠습니다. 그래도 저는 책을 읽는다는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차가운 방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책을 읽곤 했습니다. 계몽사판 소년소녀명작동화나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읽었던 세로쓰기판의 카뮈전집,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한국현대문학전집 등을 갉아먹듯이 읽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지금도 책을 열심히 읽는 어린이들이 많다는 걸 보고 내심 흐뭇했습니다.
그러다 한 어머니의 말을 엿듣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할까말까 정도의 아들을 데리고 온 어머니는 서가의 한 귀퉁이에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점은 지혜의 냉장고야. 아무 때나 필요한 것,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서점에 와서 꺼내 먹으면 돼.”
저는 속으로 옳구나, 저렇게 멋진 말을 하는 어머니. 정말 자식을 잘 키우겠다는 확신을 스스로 했습니다.


책은 지혜의 창고입니다. 인류의 오랜 지식과 지혜는 모두 책에 담겨 있습니다. 책을 통해 우리는 태초의 일들을 생각하고 옛 선조들을 생각하며 현재와 미래를 생각합니다.
예로부터 통치자가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옳은 일을 한 자에게는 상을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일을 한 자에게는 벌을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에게 그 옳은 방향이 어떤 것인지 지침을 마련하고 못 배운 사람은 그것을 잘 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는 대부분 잘 배운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많이 배운 사람들이기에 옳은 일은 무엇인지 누구나가 잘 알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전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게 마땅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가요. 소위 명문대 출신들, 좋은 집안 출신들이 부모를 죽이고 사기를 치고 불법행위를 합니다. 위정자들이 법망을 피해 개인의 사리사욕만 채우는 데 급급합니다. 이러한 이유는 바로 제도적인 교육만 잘 받았기 때문입니다. 학교 교과서만으로는 인간의 복잡한 정신세계를 완벽하게 지탱하지 못합니다. 교과서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독서체험이 어릴 때부터 선행되어야 바른 인간형으로 자라납니다.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를 가리켜 흔히들 ‘각박한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각박하다는 걸까요. 회사에서는 조기퇴직을 당하고, 자식들은 말을 안 듣고, 빚은 잔뜩 쌓였고, 이제 인생 볼 거 없다는 생각 속에 사는 현재의 시간들이 그러하겠지요. 세상의 질서는 돈에 의해서만 운영되지 않습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있다는 걸 하나씩 알아가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입니다. 그 소중한 것들, 귀한 인생의 깨달음들을 아는 마음의 그릇을 만드는 가장 쉬운 노력이 바로 독서입니다. 어떤 이는 건강을 잃고, 어떤 이는 돈과 명예를 잃고 인생을 알아갑니다. 그러나 독서는 그런 것을 잃지 않고도 우리의 삶과 생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다른 이들보다 훨씬 나은 삶을 운영하는 특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04년도 문화관광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난 3개월간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비율이 무려 61.7%나 되었습니다.(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천 명 대상) 그리고 읽는 책들도 거의 경제 경영서 같은 직종에 관계되어 어쩔 수 없이 읽는 책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왜 책을 안 읽을까에 대한 대답은 일이 빠쁘고, 습관이 되지 않고, TV나 인터넷을 하느라 시간이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또한 책을 읽은 사람들 중에서도 대부분이 베스트셀러를 읽었습니다. 획일적으로 독서를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 모든 통계들이 지금 우리의 독서습관을 말해 줍니다.
컴퓨터바이러스를 만든 안철수연구소 안철수 사장도 독서광입니다. 심지어 외국도서를 먼저 읽고 우리나라 출판사들에게 번역을 빨리 해줄 것을 의뢰하기도 한답니다. 효성의 조석래 사장이나 태평양의 서경배 사장 등의 CEO들도 독서광들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독서광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다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미국 전 대통령인 빌 클린턴은 재임시절 년간 60-100여권의 책을 읽었으며 이외의 시기에는 년간 200-300권의 책을 읽는다고 합니다. 한국출판연구소가 올초 발표한 자료에 한국 성인들의 1인당 연간 독서량은 11권이라는 점에 비교한다면 놀라운 양입니다. 클린턴은 책이 자신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고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 지침서 역할을 하며 자신을 단단하게 다지는 버팀목 역할도 책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영재학교에 입학한 어린이들도 대부분 독서의 힘으로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독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서의 중요성은 우리가 몸으로 체득할 때 그 중요성을 압니다. 금방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위대함을 우리는 모르고 삽니다. 독서의 중요성을 아는 자에게만 그 달콤한 삶의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흔히 ‘가을을 탄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평소와 다르게 조금 우울해지거나 이유없이 슬픔에 젖을 때 말입니다. 저도 가을을 많이 타는 편입니다. 슬슬 찬바람이 불어 옷깃을 여미게 될 때. 푸른 낙엽이 노란 옷을 갈아입을 채비를 할 때. 하나둘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며 가슴이 물컹 내려앉을 때, 책 한권을 손에 들고 벤치에 앉아 보세요. 정말 근사한 시간이지 않을까요?

글. 이재훈
현대 모비스 사보_2006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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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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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부는 계절입니다.
스산한 저녁 공원을 걷다 보면
서서히 옷을 벗는 나무도, 점점 작아지는 풀벌레 소리도
조금은 안타깝고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그럴 땐 옷깃을 올리고 따뜻한 마음들을 떠올립니다.
찬바람이 불면 모든 존재들이 서로 가까워집니다.
오른손과 왼손이 서로 만나 몸을 부비지요.
모닥불을 가운데에 놓고 사람과 사람이 모여듭니다.
그동안 너무 바쁘게만 살았습니다.
시간을 내어 사랑하는 사람과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습니다.
몸이 따뜻해지면 마음도 따뜻해져
어렵고 불쌍한 이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서로를 가깝게 합니다.
누군가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몸을 더 움직여 보세요.
그것이 추위를 이겨내는 생명의 몸짓입니다.
이제 곧
얼음이 모여 사는 곳, 겨울나라입니다.


                                                                             글,글씨 | 이재훈 | 이롬 2006.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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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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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늘

산문 2006. 11. 5. 23:44

동부그룹 웹진_2006.11
_http://www.dongbu.co.kr/dongbu_web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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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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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에 이끌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무 잎사귀가 더욱 짙어져
제 스스로 지상에 몸을 내립니다.
사람들은 낙엽 지는 모습에 감동합니다.
그 감동은 잎과 나무의 결별이 이루어낸
새로운 만남 때문입니다.
나도 그들처럼 결별의 축복을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 축복이 이루어낸 새로운 만남을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내 맑은 영혼이 그리움에 가 닿을 것 같습니다.

편지지를 사서 가슴에 고인 말들을
한 칸 씩 적어 그대에게 띄우겠습니다.
그대의 품 안쪽까지 배달될 사랑의 말들을 전하겠습니다.
몇 번의 누름으로 전하는 이메일이 아니라
직접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치겠습니다.
흰 구름의 봉투에 푸른 하늘빛과 분홍 마음을 함께 담겠습니다.
그대와 함께 얘기했던 나뭇잎을 우표로 붙이고
우체국 앞 벤치에 오래도록 앉아 있을 겁니다.
내 가슴이 풍요로운 가을의 수확처럼 차오르는 계절입니다.
내 그리움을 배달할 가을 바람이 산들산들 붑니다.

글,글씨 | 이재훈| 이롬 200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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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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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감자바위세요?

산문 2006. 7. 16. 02:40
 

강원도가 고향이세요? 아, 감자바위시네요. 하하.

서로 고향 얘기를 주고 받을 때 흔히 듣는 말이다. 그리곤 강원도 어디어디를 얘기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대부분 놀러다녀 온 이야기다. 설악산이 어떻고 경포대가 어떻고 속초를 위시한 동해안 일대 등의 얘기가 오가면 강원도 얘기를 거의 다 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강원도 사람들을 ‘감자바위’라고 부르는 데에는 ‘촌스러움’이라는 지역적 선입견이 포함되어 있다. 이 촌스러움 때문에 강원도는 관광지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자본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천혜의 산수자연은 도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유혹적인 안식처인가. 그러니까 사람들은 강원도의 촌스러움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도시 사람들이 강원도를 철저하게 소비의 방식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제 내린천이나 영월 동강의 변해가는 모습은 이를 증명해 주는 일들이다. 이제 우리는 강원도의 겉모습이 아니라 강원도의 깊은 마음을 이해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강원도 사람들은 경상도나 전라도, 충청도 사람들처럼 지역적 냄새가 많이 풍기지 않는다.어딜가나 경상도나 전라도 사람들은 금방 표시나는 데 반해 강원도 사람들은 여간해선 잘 알 수가 없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겉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속으로 표현하는 데 익숙한 성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속내 깊은 은근함은 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추암해수욕장 일출전야(2003)


강원도 ‘감자바위’들은 이름처럼 순박하다. 요즘은 순박하다, 착하다 라는 말이 좋은 말로 들리지 않게 돼버렸지만 강원도 사람들을 표현할 때 가장 적당한 표현이 순박하다는 말일 것이다. 대개 순박한 사람들은 자기표현에 서툴다. 그것은 타인과 자연스럽게 자기 감정을 표현할 일이 적음에서 생기는 쑥스러움 때문이다. 강원도를 다녀온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으로 강원도 사람들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감정표현이 익숙치 않아서 생기는 오해이다.

감정표현이 서툰 것에는 지리적 특색이 큰 요인 중의 하나이다. 강원도의 북쪽은 함경도와 황해도, 서쪽은 경기도, 남쪽은 충청북도, 경상북도와 접하고 있다. 또한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동서로 양분되고 산악이 많은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지세 탓에 지역 간 교통이 빈번하지 않았다.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설악산과 치악산 오대산 등의 험준한 산령이 남북을 길게 막아놓고 있고 이 산맥들이 쳐놓은 가지들 또한 작은 혈관처럼 넓게 뻗쳐 있다. 그래서 강원도 지역은 거의가 산악지형이다. 감자와 옥수수가 많이 나고 고랭지 농작물이 많이 생산되는 것 또한 이런 경우이다.

이러한 지형은 강원도 사람들을 진취적이지 못하고 고여있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미 자연을 정복하지 않고 자연과 순응하며 그 질서대로 사는 것이 생활 습관이 되었기에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크게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강원도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고립되어 있고 고립된 만큼 폐쇄적이다. 또한 바깥의 문화를 흡수하는 데도 늦고 타지역에 대해 먼저 경계심부터 발동한다. 좋게 말하면 지역적인 고유의 색채가 아주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강원도 사람들의 무뚝뚝함은 특유의 사투리 때문에 더 딱딱하게 다가온다. 강원도 사투리는 다른 지역 사투리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 강원도 사투리를 쓰는 영동지역은 서울로의 이주가 잦지 않고 또한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상경하기 때문에 사투리의 원형이 잘 유포되지 않았던 것 같다.

강원도의 사투리는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영동지역과 영서지역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영서지역은 오히려 서울의 문화권과 가깝기 때문에 표준어에 가까운 말씨를 쓴다. 그러나 영동지역은 옛부터 태백산맥의 영향으로 중앙과의 교류가 없었으므로 독특한 사투리가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강원도 북부지역이 함경남도와 인접해 있으므로 이쪽의 말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우리가 강원도 토박이 사투리를 북한말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강원도 사투리로 웃음을 선보인 개그맨 심원철이나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선생 김봉두>는 강원도 사투리를 전국적으로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이제 강원도 사투리가 전국적인 문화코드가 될 수 있을 날도 멀지 않았다.

감정표현이 서툰 대신 한번 정주면 끝까지 가는 성미가 강원도 사람들이다. 그네들의 정은 타지역 사람들의 정붙임에 비해 유달리 질긴 편이다. 흔히 말하는 남자들의 의리나 여자들의 살가움에 비해 강원도 사람들의 정붙임은 진득한 데가 있다. 한번 정을 붙이면 쉽사리 떨어질 줄 모른다. 그래서 강원도 사람들은 일단 친해지면 뚝배기처럼 은근하고 오래간다. 또한 감정 표현이 서툰 반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신의 감정을 다독일 줄 안다. 그 다독인 감정을 소중하게 아끼고 보살필 줄 안다. 강원도 사람들 사이에 큰 싸움이 없는 것 또한 이런 이유이다.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느림의 미학이 속도의 시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전부면에 걸쳐 떠오르는 시대다. 강원도 사람들의 은근함과 포근함이 이제 빛을 발할 때가 아닌가. 주변에 강원도 사람들이 있다면 한번 말을 걸어 보면 어떨까. “아, 감자바위세요?”


글 : 이재훈
출처 : WELL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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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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