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점에 들렀습니다. 종로에서 친구와 약속이 있었는데, 그만 약속시간이 늦춰지게 되어 어디 시간 보낼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서점에 하루가 멀다하고 드나들었습니다. 책을 좋아해 이런저런 책을 구경하고, 심지어 자리를 깔고 책을 읽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는 게 바쁘다보니 예전처럼 책을 많이 읽지 못합니다. 일과 관계된 문학서적만 읽는 편식독서로 바뀐 것이지요. 또한 책을 구입해도 인터넷을 통해 구입하는 경우가 많아 서점은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서점으로 들어갔습니다.
서점의 풍경 중에 놀란 것은 아직도 많은 어린이들이 서가 사이사이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겁니다. 저도 어린 시절 책을 읽던 기억이 났습니다.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서점은 읍내에나 나가야 있었습니다. 대신 아버지의 서재에서 어른들이 읽는 책이나 월부로 구입한 동화책을 읽었지요. 곰팡내가 나는 어두컴컴한 서재 방바닥에 앉아 읽었습니다. 겨울엔 서재에 난방을 하지 않아 늘 추웠습니다. 그래도 저는 책을 읽는다는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차가운 방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책을 읽곤 했습니다. 계몽사판 소년소녀명작동화나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읽었던 세로쓰기판의 카뮈전집,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한국현대문학전집 등을 갉아먹듯이 읽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지금도 책을 열심히 읽는 어린이들이 많다는 걸 보고 내심 흐뭇했습니다.
그러다 한 어머니의 말을 엿듣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할까말까 정도의 아들을 데리고 온 어머니는 서가의 한 귀퉁이에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점은 지혜의 냉장고야. 아무 때나 필요한 것,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서점에 와서 꺼내 먹으면 돼.”
저는 속으로 옳구나, 저렇게 멋진 말을 하는 어머니. 정말 자식을 잘 키우겠다는 확신을 스스로 했습니다.
책은 지혜의 창고입니다. 인류의 오랜 지식과 지혜는 모두 책에 담겨 있습니다. 책을 통해 우리는 태초의 일들을 생각하고 옛 선조들을 생각하며 현재와 미래를 생각합니다.
예로부터 통치자가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옳은 일을 한 자에게는 상을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일을 한 자에게는 벌을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에게 그 옳은 방향이 어떤 것인지 지침을 마련하고 못 배운 사람은 그것을 잘 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는 대부분 잘 배운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많이 배운 사람들이기에 옳은 일은 무엇인지 누구나가 잘 알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전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게 마땅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가요. 소위 명문대 출신들, 좋은 집안 출신들이 부모를 죽이고 사기를 치고 불법행위를 합니다. 위정자들이 법망을 피해 개인의 사리사욕만 채우는 데 급급합니다. 이러한 이유는 바로 제도적인 교육만 잘 받았기 때문입니다. 학교 교과서만으로는 인간의 복잡한 정신세계를 완벽하게 지탱하지 못합니다. 교과서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독서체험이 어릴 때부터 선행되어야 바른 인간형으로 자라납니다.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를 가리켜 흔히들 ‘각박한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각박하다는 걸까요. 회사에서는 조기퇴직을 당하고, 자식들은 말을 안 듣고, 빚은 잔뜩 쌓였고, 이제 인생 볼 거 없다는 생각 속에 사는 현재의 시간들이 그러하겠지요. 세상의 질서는 돈에 의해서만 운영되지 않습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있다는 걸 하나씩 알아가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입니다. 그 소중한 것들, 귀한 인생의 깨달음들을 아는 마음의 그릇을 만드는 가장 쉬운 노력이 바로 독서입니다. 어떤 이는 건강을 잃고, 어떤 이는 돈과 명예를 잃고 인생을 알아갑니다. 그러나 독서는 그런 것을 잃지 않고도 우리의 삶과 생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다른 이들보다 훨씬 나은 삶을 운영하는 특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04년도 문화관광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난 3개월간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비율이 무려 61.7%나 되었습니다.(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천 명 대상) 그리고 읽는 책들도 거의 경제 경영서 같은 직종에 관계되어 어쩔 수 없이 읽는 책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왜 책을 안 읽을까에 대한 대답은 일이 빠쁘고, 습관이 되지 않고, TV나 인터넷을 하느라 시간이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또한 책을 읽은 사람들 중에서도 대부분이 베스트셀러를 읽었습니다. 획일적으로 독서를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 모든 통계들이 지금 우리의 독서습관을 말해 줍니다.
컴퓨터바이러스를 만든 안철수연구소 안철수 사장도 독서광입니다. 심지어 외국도서를 먼저 읽고 우리나라 출판사들에게 번역을 빨리 해줄 것을 의뢰하기도 한답니다. 효성의 조석래 사장이나 태평양의 서경배 사장 등의 CEO들도 독서광들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독서광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다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미국 전 대통령인 빌 클린턴은 재임시절 년간 60-100여권의 책을 읽었으며 이외의 시기에는 년간 200-300권의 책을 읽는다고 합니다. 한국출판연구소가 올초 발표한 자료에 한국 성인들의 1인당 연간 독서량은 11권이라는 점에 비교한다면 놀라운 양입니다. 클린턴은 책이 자신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고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 지침서 역할을 하며 자신을 단단하게 다지는 버팀목 역할도 책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영재학교에 입학한 어린이들도 대부분 독서의 힘으로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독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서의 중요성은 우리가 몸으로 체득할 때 그 중요성을 압니다. 금방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위대함을 우리는 모르고 삽니다. 독서의 중요성을 아는 자에게만 그 달콤한 삶의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흔히 ‘가을을 탄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평소와 다르게 조금 우울해지거나 이유없이 슬픔에 젖을 때 말입니다. 저도 가을을 많이 타는 편입니다. 슬슬 찬바람이 불어 옷깃을 여미게 될 때. 푸른 낙엽이 노란 옷을 갈아입을 채비를 할 때. 하나둘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며 가슴이 물컹 내려앉을 때, 책 한권을 손에 들고 벤치에 앉아 보세요. 정말 근사한 시간이지 않을까요?
현대 모비스 사보_2006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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