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未知
김수영은 <詩人의 精神은 未知>라는 글에서 “그의 모든 관심은 내일의 시에 있다. 그런데 이 내일의 시는 未知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정신은 언제나 미지다. 고기가 물에 들어가야지만 살 수 있듯이 시인의 미지는 시인의 바다다. 그가 속세에서 愚人視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기정사실은 그의 적이다. 기정사실의 정리도 그의 적이다.”라고 했다. 김수영이 말한 적(敵)은 기존에 있어 왔던 것, 기존에 있어 왔던 것의 정리다. 그러나 김수영도 기존의 것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자신의 시에 대해서 규정하고 정리할 필요가 없다 했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시와 당대의 문학적 정체성과의 싸움을 벌였다. 그의 글은 독설이지만 또한 결벽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가. “시인은 영원한 배반자다. 寸秒의 배반자다.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
2. 寸秒의 배반자
시를 생각할 때는 시소를 타고 있는 느낌이다. 때론 방법이 내용을 올라탔다가 내용이 방법을 올라타기도 한다. 방법 때문에 내용이 가벼워지기도 하고 내용 때문에 방법이 가벼워지기도 한다. 방법과 내용이 수평을 유지하는 팽팽한 긴장감은 쓰면 쓸수록 어렵다. 그래서 때론 내용이 있다 하여 낡은 방법을 슬쩍 숨기기도 하고, 방법이 있다 하여 빈한 내용을 숨기기도 한다. 김소월이, 로버트 번즈가 위대한 이유는 이런 긴장감과 다름 아니다.
언어가 형식 속에 스며들어 세계를 지배할 때 한 편의 시는 언어를 뛰어 넘는 그 무엇이 된다. 이런 느낌은 시를 쓸 때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뮤즈가 찾아와 내 오감을 건드려 주술의 언어가 토해지는 시는 이제 아주 가끔이다. 이때 형식과 내용은 이미 시인의 손끝을 떠나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 이후는 무엇인가. 바로 ‘寸秒의 배반자’ 역할을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내 방법을 배반하고 내 세계를 배반하고 지루하다 못해 그 모든 걸 배반한다. 엘리엇이 말한 ‘감수성의 통일’은 이 모든 것을 용광로에 밀어 넣을 때 가능한 일인가.
이럴 때 문득 쓸쓸해진다. 하지만 그 쓸쓸함을 시로 선뜻 옮기지 못한다. 쓸쓸함이 내 삶의 사연보다 못하며 거리의 감동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백지 위에 몇 마디를 긁적이다 그냥 변죽을 울리고 말 뿐이다. 그리고 나는 목적없이 거리를 걷는다.
3. 아주 사소한 거리
요즘 나는 거리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아니 목격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얼마 전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보았다. 샛노란 은행잎이 거리에 흩날렸다. 비둘기들이 간신히 은행잎들을 피해 날아다닐 정도였다. 그 광경은 마치 황혼녘에 결투를 벌이는 서부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장감마저 주었다.
그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모두 쓸쓸한 뒷모습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쓸쓸한 어깨들의 부딪힘과 서늘하게 부는 바람. 그 배경에 눈부실 정도로 노란 은행잎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쓸쓸함의 풍경은 아주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쓸쓸함이 아름다움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4. 가면
대체로 쓸쓸함은 상투적인 가면을 쓰고 찾아온다. 무언가 정확히 말할 수 없는 내면의 결핍이나 부재를 우리는 쓸쓸하다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쓸쓸함’은 뭉뚱그려진 정서이다. 쓸쓸함은 외로움과 적적함의 일상어이다. 그러기에 가장 가까이에서 우리의 정서를 대변해주는 언어이다.
누군가가 ‘쓸쓸하다’고 했을 때 우리에게 가장 먼저 보여지는 건 상투적인 가면이다. 말하는 자도 알고 그것을 듣는 자도 안다. 상투적이란 말 속엔 습관성이란 긴 골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쓸쓸하다’고 습관적으로 얘기한다. 이 습관이 ‘쓸쓸함’이란 말을 상투적인 골 속에 가두어 놓는다.
나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이 쓸쓸함과 직접 만나는 느낌이다. 찬바람이 내 폐부를 훑고 지나가면 내 존재의 밑바닥에 달라붙어 있던, 그동안 모르고 지내왔던 마음들이 떨어져 보풀처럼 흩날리는 것 같다. 입김을 불면 빠져나가는 불편한 관념 덩어리들. 그제서야 나는 차갑고 텅빈 사물이 된다.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
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품어 준다.그리고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내 손끝에서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보내고 만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아름다운 영원을
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도 없는 나의 손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나의 시와 함께.
― 김현승, <절대고독>
5. 쓸쓸함을 사랑하기까지
날이 추워지면서 잠도 많아진다. 바쁜 일상이 잠을 더 재촉한다. 때론 내 코고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온 몸으로, 온힘을 다해 내뱉는 나의 숨소리를. 내가 살아 있음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표현한 적이 그동안 있었을까.
김현은 “정말 무서운 욕망이란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왜 그런 욕망이 생겨나는가까지 밝히기를 바라는 욕망”이라고 했다. 이 갈급한 ‘채움’의 욕망의 배면에 ‘성찰’과 ‘반성’의 욕망이 숨어서 날 또렷이 쳐다보고 있다. 이 쓸쓸함이라는 관념덩어리가 뜨거운 시로 태어나지 않을 때, 나는 또 가면을 쓴다. ‘유쾌함’이라는 가면을 쓴다. 거리를 걸으며 그 유쾌한 보폭을 따라가다가 어느덧 쓸쓸함을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_시와정신, 2002.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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