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에 해당되는 글 58건

  1. 2021.08.24 바람의 시인에서 나무의 시인으로― 이태관 형님께
  2. 2021.07.31 [좌담] 언어를 두고 간 시인의 몫까지 읽기 ― 금은돌, 이윤설, 김희준 시인을 그리워하며
  3. 2021.04.11 이천만 원 농가주택의 꿈 1
  4. 2021.04.03 그때는 명왕성이 있었지
  5. 2019.02.18 책방별곡
  6. 2018.09.28 내 생애 마지막 음악이 기도라면
  7. 2018.09.28 어떤 하루 - 시인의 아케이드 1
  8. 2018.01.29 편지
  9. 2018.01.15 조정권 선생님 추모 산문
  10. 2017.09.12 스무 살이 되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11. 2017.07.18 서툰 사랑 1
  12. 2015.05.12 저 멀리 있는 시에 관한 짤막한 단상들
  13. 2015.01.29 바람의 계곡 라다크 투르툭에서의 이틀
  14. 2014.12.27 고독한 원시의 시간, 라다크(Ladakh)
  15. 2014.09.30 자전 에세이_ 내가 꾼 꿈은 사실 꿈이 아니었네
  16. 2014.02.13 꿈처럼 오련하게 사레들리네
  17. 2013.12.11 한 글자 사전 - 잎
  18. 2013.07.16 나를 치유한 나의 시_ 이재훈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19. 2013.03.20 사막과 구름을 오고간 시인_ 김충규 유고시집 발문
  20. 2013.03.13 황하에서 돌까지
  21. 2013.02.20 뜨거운 삶의 상징이자 존재의 이유, 어머니
  22. 2013.01.30 설문
  23. 2013.01.02 문복주 시집 <철학자 산들이> 표4글
  24. 2012.12.07 대선과 크리스마스
  25. 2012.11.16 <시사사> 신인상 심사평
  26. 2012.09.26 문화예술위 <문학나눔> 패러디백일장 심사평
  27. 2012.09.23 소리없이 쌓이는 행복이라는 말
  28. 2012.09.05 행복한 문학편지_ 나 명왕성 되었어(이 땅의 소외된 이들에게)
  29. 2012.07.05 명왕성 리얼리티
  30. 2012.03.23 故 김충규 시인을 떠나보내며...

이재훈

 

 

태관 형님. 요즘 노성은 어떤가요. 꽃들이 활짝 펴서 지천이 꽃밭이겠네요.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서성이는 산성 근처를 매일 오고가시겠지요. 요즘은 노성산에 둘레길도 잘 조성해 놓았다고 들었어요. ‘형수님과 손잡고 자주 거닐고 계시지요? 여름이 오기 전에 또 콧바람 쐬러 갈게요.

제가 등단 초기에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은 형님을 알게 된 게 아닐까요. 논산이라는 시골에서 시인을 만난다는 게 어려울 때였어요. 1998년이었을 겁니다. 문학평론가 이형권 선생님이 논산 계실 때 저를 불러내었죠. 좋은 시인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시며 소주 한 잔 하자고요. 그렇게 우리 셋은 식당에서 소주와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물론 형님은 막걸리를 드셨겠지요. 저는 이것저것 먹었을 거예요. 술도 약하니까요. 그러다 이형권 선생님 댁으로 가서 두 분은 바둑을 두시고, 저는 문학평론가의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구경했어요. 무엇이든 닥치고 읽었던 시절이라 책 구경이 제일 좋았거든요. 아주 잠시 나도 바둑을 둘 줄 알았더라면 생각했지만 멋진 서가를 보는 순간 마음을 곧 빼앗겼어요.

누가 바둑에서 이겼는지는 생각이 안 나요. 진 사람이 술을 내기로 한 것은 맞겠지요. 우린 곧바로 포장마차로 갔으니까요. 그때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한 안주를 먹었지요. 살아서 펄떡펄떡 뛰는 빙어를 씹어 먹는 안주였어요. 대접에 빙어가 열댓 마리 놀고 있었고 그중 한 마리를 집어 들고 초장에 찍어 먹는 안주였어요. 저는 비위가 안 맞아 도저히 못 먹겠더라고요. 빙어가 너무 파닥대면 초장이 옷에 튀니 먼저 빙어대가리를 초장에 푹 넣어 기절시킨 다음 먹는 거라고 친절히 설명도 해주었지요. 시인 선배의 월권으로 이건 먹어야한다고 하여 눈 딱 감고 입에 넣고 무조건 씹었죠. 아 예상대로 별로였어요. 너무 비렸거든요. 그런데 형님은 아예 안 드시는 거예요. 알고 보니 형님도 비위가 안 맞아 안 드셨던 거죠. 뭔가 당한 느낌이랄까. 내가 산 빙어 먹는 모습을 보며 너무 좋아하시는 것 같아 불안했는데. 갓 등단한 어린 시인을 놀려주려는 맘도 있었겠지요. 그 시절부터 제가 형님을 따라다녔던 것 같습니다. 저는 대학원 진학으로 서울로 가고 이형권 선생님은 충남대로 직장을 옮겨 가셨고 모두 논산을 떠날 때도 형님은 논산을 지키셨어요.

논산 노성면 윤증고택에서 찻집을 하실 때가 너무나 선명히 떠올라요. 그때는 제가 대학원을 마치고 건양대에 출강을 할 때인데요. 강의를 마치면 자주 노성을 찾았습니다. 찻집 창문을 열고 달빛에 바라본 하얀 구절초밭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어요. 지금도 그런 황홀한 꽃밭은 본 적이 없어요. 그때 형님은 막걸리를 치고 노래를 불렀지요.

. 막걸리. 형님하면 자연스레 막걸리가 떠오릅니다. 세상에서 막걸리를 가장 좋아하는 시인. 술은 오로지 막걸리만 먹는 시인. 저도 형님 따라 막걸리를 좋아하게 되었고요. 노성에 있는 가내술도가에서 받아먹는 막걸리는 정말 최고였어요. 말통에 술을 받아서 노성산에 가서 먹었던 날도 있었어요. 제가 그랬지요? 아니 어떻게 사람이 이걸 다 먹을 수 있냐고요. 제가 조금 거들긴 했지만 형님은 그걸 해내셨어요.

제가 형님께 받은 유산이 있다면 시인으로서의 자존 아닐까요. 형님은 시인들과 잘 섞이는 거 같지만(술을 드실 때는 가장 유쾌한 사람이죠), 어딘가에 섞이지 않고 늘 외따로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실제로 그렇게 사셨죠. 시인의 이름으로 굽신거리거나 손을 비벼본 적이 없죠. 그저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시를 쓰고, 시를 쓰는 사람들의 마음을 함께 읽어주었죠. 그래서 시인들이 형님 주변으로 모이나 봐요. 시인의 태도, 시인의 삶, 남편과 아빠로서의 삶까지도 많은 얘기를 해주셨지요. 제게는 정말 살아가면서 큰 힘이 되었어요.

형님은 늘 바람처럼 사신 거 같아요. 출판사도 운영해보고 시도 가르쳐보고 전기일도 해보고 황태도 다듬어보고. 모교인 충남대학교의 출판과장도 하셨지요. 전국 대학출판과장 모임에서 폭발적인 인기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죠. 그렇게 여러 일들을 했지만 늘 시를 놓거나 등한시한 적이 없었어요. 시를 삶의 가장 중심에 놓았어요. 일은 시를 위한 여러 호구지책들인 거죠. 자주 창작 레지던스에 입주하여 지냈으니까요.

 

사랑을 하라

하나뿐인 목숨으로

이 겨울

떨어진 잎이 나무의 뿌리를 덮듯

사랑을 하라

그 사랑이

모과향처럼 단단히 무르익었을 때

사랑한다는 말을

딱 열 번만 거푸 가슴으로 삼켜보라

그러고 나서

그 떨림을 시로 써라

그래도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술이 술독을 박차고 나오듯

시가 솟구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세상 누구도, 아니

당신 자신조차도 사랑할 자격이 없다

이태관, 떡갈나무 아래서의 시론전문(숲에 세 들어 살다, 달아실)

 

저리도 붉은 기억은 늘 형님의 삶과 사유의 사이에서 서성이이다가 시로 툭 떨어졌어요. 그땐 강과 길이 사유의 실마리를 주었는데. ‘나라는 타자를 만나면서 바람이 온몸을 관통하는 시를 보여주었고요. 최근 시집 숲에 세 들어 살다에서는 나무와 열애중이지요. 숲과 나무와 대화를 하다보면 떡갈나무 사랑학을 덧댄 시론이 탄생하는 것인가요.

요즘도 저는 서울에서 논산을 오가며 지나가는 풍경들을 유심히 보는데요. 더 정겹고 애잔하네요. 시간은 풍경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나 봐요. 풍경도 오래두면 익나 봐요. 저는 언제 숲에 세 들어 살까요. 일찌감치 숲과 나무와 열애중인 형님에게 비밀을 엿들어야겠어요. 그럼 다음 주에 찾아 뵐 테니 기다리고 계세요.

출전 : <시와경계>, 2021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

이재훈(사회), 이성혁, 윤석정, 서윤후

 

1. 들어가면서

 

이재훈 : 안녕하세요. 시사사 좌담 사회를 맡은 이재훈입니다. 이번 계절에는 얼마 전 작고하신 세 분의 시인을 추모하고 그리워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좀 무거운 자리가 될 수도 있겠는데요. 하지만 그들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이 남아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워하는 시인은 금은돌, 이윤설, 김희준 시인입니다. 여기에 모신 선생님들은 작고하신 시인과 오랫동안 교유하며 가깝게 지내온 분들입니다. 작고 시인을 기억하고 되새기는데 누구보다 잘 얘기해주실 것으로 생각하여 모시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성혁 : 안녕하세요. 저도 이재훈 시인, 윤석정 시인, 서윤후 시인과 오랜만에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금은돌 시인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이재훈 시인의 초대로 이 좌담에 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금은돌 시인과 함께 <사월> 동인이었기 때문에 초대하신 거겠죠. 초대를 받고 얼떨결에 응낙했는데 지금은 좀 후회하고 있습니다. 금은돌 시인과 저보다 더 깊은 친분을 맺은 분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좌담 초대를 거절하기엔 너무 늦었더군요. 금은돌 시인에 대한 심층적인 기억의 자리가 다른 곳에서 있으리라고 믿으면서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윤석정 : 안녕하세요. 이재훈 시인을 비롯해 이성혁 평론가, 서윤후 시인을 오랜만에 뵙게 되어 무척 반갑습니다. 이윤설 시인은 투병 끝에 20201010일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그가 떠난 지 어느덧 반년이 흘렀습니다. 아직도 시인이 이 세상 어딘가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고 시인들을 기억하고 삶과 시 세계를 조명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 계간 시사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시인의 생은 짧았지만 시의 생은 길 것이라 봅니다. 독자들이 시인을 기억하고 시를 아껴주신다면 시는 영원한 생명력을 가질 테니까요. 오늘 좌담을 통해 안타깝게 작고하신 시인들과 시들이 독자들에게 관심 받고 사랑 받길 희망합니다.

 

서윤후 : 안녕하세요. 이 자리를 마땅히 거절했어야 하지 않을까 좌담에 오면서도 계속 생각을 했습니다만, 김희준 시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누군가가 계속 기억하고 떠올려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임하게 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2. 각자의 근황

 

이재훈 : 먼저 들어가기에 앞서서 각자의 근황도 궁금합니다. 코로나 시국이 2년 넘게 지속되다 보니 시단의 선후배들과도 교유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고투를 벌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서윤후 : 코로나 시국에 맞게 적응하며, 나름대로 생활을 돌보는 데 애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곧 새 시집과 산문집 출간을 앞두고 있어서 무언가를 오래 들여다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출판사 아침달에서 일을 한 지 1년이 넘어가고 있고요. 이사까지 겹쳐서 무척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요. 몸과 마음이 느슨해지는 것이, 제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아서 분주한 시간을 찾아다니고 있는 듯합니다. 요즘에는 예전과 다른 풍경을 아쉬워하지 않고요. 예전과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어요.

 

윤석정 : 코로나19는 우리의 삶과 일상을 바꿔놓았습니다. 이제 코로나 이전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시단의 교유뿐만 아니라 시집 발간, 시상식 등의 축하 자리를 비롯해 애도의 자리마저 코로나에게 뺏긴 듯합니다. 가족들이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아들은 어린이집에 나갈 수 없을 때가 있고, 저는 재택근무해야 할 날이 늘어났습니다. 직장이 있는 빌딩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해 여러 번 코로나 검사를 받기도 했죠. 저절로 업무에 차질이 생겼고 직장에서 진행하는 규모 있는 사업들도 순탄치 않습니다. 코로나 시국에 모두들 피로감이 쌓였고 많이 지친 듯합니다. 하루빨리 코로나가 사라져 일상이 회복되고 어디든 맘 편히 여행을 떠나고 싶네요.

 

이성혁 : 저도 1년 반이 다 되어 가는 코로나 사태 속에서 삶의 변화를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처음 코로나 사태가 터졌을 때 이렇게 오래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사람들과의 만남이 줄어들고 조심스러워졌습니다. 강의도 언택트로 진행하니까 강사로서의 보람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요. 이런 언택트가 지속되면서 삶의 의욕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조금씩 우울에 삶이 갉아 먹히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집에 주로 있다고 책을 많이 읽거나 글을 많이 쓰게 되지도 않더군요. 멍하게 유투브 보면서 시간을 날릴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과의 대면적인 만남, 그 육체성이 얼마나 삶에 큰 의미를 갖는지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나날입니다.

 

3. 유고시집

 

이재훈 : 올해에도 시인들의 안타까운 작고 소식이 들려와 슬펐습니다. 김형영, 유병근, 최정례, 김점용, 김길녀 시인. 그리고 이 좌담을 끝내고 퇴고하는 과정에 시사사1호 등단 시인인 김명서 시인이 별세하셨습니다. 모두 너무 안타까운 소식이었습니다.

제가 오늘 추억하는 세 분의 시인을 요절시인으로 지칭한 이유가 있습니다. 나이를 떠나 세 시인 모두 첫 시집을 상재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김희준 시인은 작고한 이후 유고시집이 나온 상황이고요. 금은돌, 이윤설 시인의 유고시집은 현재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고한 이후 유고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해서도 고심을 하셨을 텐데요. 이와 관련해서 진행상황이라든가, 기타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먼저 서윤후 시인부터 얘기해 주세요.

 

서윤후 : 김희준 시인의 첫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은 지난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요. 시집 준비 과정에서 어머니인 강재남 시인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이 들고요. 시집 발간을 준비하고 진행하신 김민정 시인의 보살핌이 무척 컸던 시집이란 생각이 듭니다. 유고 시집은 응답해줄 수 있는 시인이 부재한 상황이기 때문에, 갈피를 못 잡거나 작업이 부연해질 수도 있는데, 그런 어려움을 서로 도와 지워가며 만들어진 시집들이기도 한 것 같아요.

 

윤석정 : 이윤설 시인은 1주기에 맞춰 문학동네에서 시집이 발간됩니다. 지난해 827, 저는 군포G샘병원 1113호실을 찾아갔어요. 중환자실에서 투병 중이었던 그는 마지막으로 시집을 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시 원고 정리와 시집 투고를 저에게 부탁했죠. 그는 병이 깊어 삐쩍 말라 있었고 간병인 없이는 거동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간병인에게 부탁해 화장(化粧)을 하고 저를 반겨줬어요. 아마 제게 초췌한 얼굴을 보이기 싫었던 것 같아요. 그는 혀가 굳어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는데 온 힘을 다해 말을 뱉어냈고 주변인들의 안부를 물었고 언제나 그랬듯 유쾌한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시인은 시집 원고에 대해 나희덕 시인과 의논하길 원했습니다. 저는 나희덕 시인에게 시집 원고를 전달했고 문학동네를 두드렸죠. 감사하게도 문학동네의 김민정 시인이 시집 발간을 서둘렀습니다. 시집 계약을 진행했고 추석 무렵 조판을 마쳤습니다. 그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제게 석정아, 시집 나왔어?”라고 물어봤어요. 그만큼 간절히 시집을 기다렸죠. 김민정 시인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시집을 발간하려고 했는데 시집이 그를 붙잡아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시집 원고에 포함되지 않은 시가, 시인이 문예지에 발표했던 시가 더 나올 수 있어 1주기에 맞춰 시집을 발간하기로 했답니다.

 

이성혁 : 사실 제가 시집 출간 문제에 대해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요. 금은돌 시인의 아들인 조원효 시인이 금은돌 시인의 시 원고를 수합하여 시집 출간을 위해 어느 정도 정리해 놓았다고 알고 있을 뿐이에요. 시집 원고는 조원효 시인에게 부탁하여 파일로 갖고 있기는 합니다. 아직 출판사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유고와 관련해서 제가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긴 합니다. 금은돌 시인은 시만 쓴 것이 아니라 평론도 많이 썼고 화가이기도 합니다. 금은돌 시인이 저 세상으로 가기 직전에 시와사람에 연재한 예술 에세이들을 묶어 김태형 시인이 운영하는 <청색종이> 출판사에서 출간하기로 계약을 맺었어요. 이 과정에 제가 다리를 놓은 일이 있어서 그나마 이 책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금은돌 시인은 이 책이 나오기 이전에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이 책은 󰡔금은돌의 예술 산책󰡕이라는 제목으로 작년 12월 말에 출간되었습니다. 책에 실린 이 글들은 잡지에 연재되었을 때 높은 평가를 받은 것들이에요. 아직 유고 시집이 출간되지 않은 상태이니, 금은돌 시인을 기억하고 싶으시면 일단 이 책을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시와 미술에 대해 금은돌 시인이 얼마나 애정과 열정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해박하고 깊은 인식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책입니다. 그리고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재밌게 읽힐 책이기도 하고요.

 

4. 시인과의 만남

 

이재훈 : 시인과 첫 만남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이 자리에서 시인의 시뿐만 아니라 삶까지도 추억해보려고 합니다. 삶의 이력과 시작활동을 자유롭게 얘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윤석정 : 이윤설 시인은 1969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어요. 숭의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를 거쳐 명지대 철학과,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이어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문학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공부에 대한 열정도 매우 컸어요. 저는 2003년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처음 그를 만났습니다. ‘포에티카시 연구 모임을 함께 했죠. 당시 그는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시 합평할 때마다 시를 보는 눈이 깊어 감탄했죠. 알고 보니 그는 십 년쯤 시를 썼다가 소설로 장르를 바꿨더라고요. 소설도 곧잘 써서 공모전 최종심에 여러 번 거론됐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시에 대한 어떠한 경외심이 있었고 시선이 매우 따뜻했습니다. 그는 시의 단점보다 장점을 발견해 주었고 시 창작자의 잠재된 가능성을 짚어냈어요. 저는 그의 따뜻한 시선과 마음 덕분에 주눅 들지 않았고 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 기간 등단에 목말라 있던 그가 처음 쓴 희곡을 2004동아일보신춘문예에 투고해 등단했을 때 놀라웠습니다. 제가 2005년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자 그해 그는 토지문학관에서 오래오래 마음에 내장된 시를 마구 꺼내기 시작했다고 했어요. 3개월 동안 시를 200편쯤 썼다고 했을 때 놀라웠습니다. 이듬해 조선일보세계일보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돼 더욱 놀라웠습니다. 사실 그의 문학적 재능과 피나는 노력을 지켜봤다면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성혁 : 금은돌 시인은 짧은 생을 살다갔지만 책을 적잖이 냈습니다. 시집은 생전에 출간하지 못했습니다만. 사실 그의 이력을 줄줄 제가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앞에서 말한 책에서 이력을 보고 말씀드려봅니다. 금은돌 시인은 1970년 안성에서 태어났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후 동대학원에서 󰡔기형도 문학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논문은 기형도에 대한 최초의 박사학위로 알고 있습니다. 2008년에 애지로 평론, 2013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올랐고요.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라는 연구서, 그리고 평론집 󰡔한 칸의 시선󰡕, 󰡔그는 왜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 눕혔을까󰡕를 펴냈고 앞에서 언급한 󰡔금은돌의 예술산책󰡕이 유고집의 하나로서 출간되었습니다. 특기할 만한 일은 1인 무크지 󰡔mook󰡕을 냈다는 점과 화가로도 활동했다는 점입니다. 금 시인이 󰡔mook󰡕 출간을 말해주었을 때 저는 무척 놀라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3호까지 갖고 있는데 더 출간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mook󰡕은 은돌 시인의 글과 그림, 디자인이 어우러진 독특한 형식의 잡지입니다.

, 제가 은돌 시인과 처음 만나게 된 건 <사월> 동인이 결성되면서였어요. <사월> 동인은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만들어진 동인입니다. 참사 이후 시인이자 평론가로서 무엇인가를 모색하자는 취지로 뜻 맞는 이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2014년 말에 동인이 결성되었는데 동인지는 현재 1호만 출간된 상태입니다.(제가 원고를 내지 않아서 2호 출간이 미뤄지고 있습니다. 2호가 출간된다면 금은돌 시인 추모호가 될 겁니다.) 김명철 시인, 방민호 평론가, 박현수 시인, 김선향 시인, 임지연 평론가, 금은돌 시인 그리고 제가 동인 멤버였고요. 동인이 구성되어 처음 중국집에서 모이게 되었고 이때 금은돌 시인을 처음 보게 되었어요. 첫 인상은 소년 같다고 할까, 열정과 순수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망울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지요.

 

서윤후 : 제가 시인동네편집장으로 일할 때, 김희준 시인이 등단하여 처음 알게 되었어요. 아주 어린 나이에 등단을 해서 제 일처럼 우려하고 걱정부터 앞섰던 기억이 납니다. 묵묵하게 주어진 것들을 해내고, 조급해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언어를 길어 올리던 착한 후배였어요. 태어나 자라온 곳에서 인정받고, 예쁨 받는 사람이었으니 희준의 성실함과 사람을 대하는 자세 같은 것이 어땠을지는 이루 말할 것이 없었으리라 생각해요.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시인을 보면서 저를 많이 돌이켜보게 되었던 것 같아요. 조급해 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묵묵하게 자기 언어를 쌓아 올리는 사람이었죠. 희준 시인의 낭독은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인데, 떨지도 않고 자신의 등단작을 또박또박 읽어가던 시인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무엇보다 사람에 대해 정이 많고, 친구들과 좋아하는 것들의 둘레를 넓혀가며 살아가던 맑은 사람이었습니다.

 

5. 시인과의 교유와 품성

 

이재훈 : 시인과 함께 교유하면서 생각나는 에피소드라든지, 시인의 성품을 느끼게 한 사건이라든지, 평소의 습관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궁금합니다.

 

서윤후 : 사실 희준 시인과 오랜 시간 알았거나, 각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이 어떤 우정을 설명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이 들어요. 시인이 시인을 생각한다는 것도 다 비슷한 것 같아요. 같은 일을 한다는 어떤 동료애와 존경의 마음 같은 것이 희준 시인에게 있었는데요. 2019년에 희준 시인의 초대로 통영에 특강을 간 적 있었어요. 그때 터미널에서 내리는 것부터 어떤 숙소에 지내는지 등 살뜰하게 챙겨주었던 기억이 나요. 특강 전날, 희준 시인의 차를 타고 아무도 없는 요트장에 가서 사진도 찍고 같이 무화과도 나눠 먹었던 기억도 나고요. 시원한 초가을 밤이었는데요, 희준 시인이 스마트폰 어플로 제 별자리를 비춰주었던 것도 생각납니다. 저도 그해 치앙마이 여행에서 사왔던 실크 스크린 그림 한 점을 희준에게 선물했었어요. 서로 주고받은 편지와 선물이 있었는데 어쩐지 제가 더 많이 받고 있다는 느낌, 부채감이 있어서 앞으로 함께 쓰는 과정에서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제 숙제가 더 커지게 되었지요.

 

윤석정 : “한 번 시인은 영원한 시인이다.” 이윤설 시인이 제게 했던 말입니다. 제가 생활에 치우쳐 시를 쓰지 못하는 고통을 토로했을 때 위로가 된 말이기도 합니다. 그는 시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시인의 마음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고, 희곡을 쓰고, 드라마를 썼던 것 같아요. 그를 참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어요. 제가 볼 땐 품이 넓은 사람이었죠. 그러나 그는 주변 사람들을 멀리하려고 했어요. 그는 가족을 족쇄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오로지 글을 쓰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나 싶어요. 오롯이 혼자만의 창작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외로운 고투라고 봐요. 십 년 전쯤 그는 글 쓰는 건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아이덴티티라고 말했죠. 그는 글을 쓰기 위해 자주 칩거했고 2008년 홀연히 호주로 떠나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16517, 그가 보낸 이메일을 다시 읽어보니 지금의 매일 매일의 인생을 벗과 더불어 가깝게, 즐거이, 보내고 싶다.”라고 했어요. 그는 늘 사람을 좋아했고 사람을 그리워했습니다.

 

이성혁 : 사실, 저도 은돌 시인과 각별한 사이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좌담에 다른 분이 나와야했다는 생각이 또 드네요. 동인 활동을 하면서 같이 술은 많이 마셨어요. 술자리에서 은돌 시인이 하는 말을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은돌 시인의 그림 작업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몰입하며 들었어요. 그의 성향이라든지 예술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폰에 저장되어 있는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림에 대해 잘 모르지만 휘몰아치는 마음의 정동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어요. 은돌 시인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사람들에게 곧잘 선물로 주곤 했어요. 저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이미지를 달팽이로 표현한 그림입니다. 저도 은돌 시인에게 받기만 했네요. 각별한 사이여서 은돌 시인이 제게 선물을 준 건 아니고요, 은돌 시인은 타인들에게 무언가 주기를 좋아했어요.

제게는 금은돌하면 떠올려지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마크 로스코 전이 열렸을 때 그 전시회에 저랑 같이 가기로 했어요. 제가 당일 약속을 펑크 내고 말았습니다. 그놈의 밀려버린 원고 때문이었죠. 그래서 은돌 시인 혼자 전시회에 갔다 왔습니다. 나중에 만났을 때 제가 전시회 어땠냐고 물으니까 로스코 그림 앞에서 펑펑 울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 은돌 시인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제게 은돌 시인은 커다란 로스코의 추상화 앞에서 펑펑 울고 있는 이미지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은돌 시인은 언제나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잔잔하게 대화를 하는 사람이지만, 제게는 휘몰아치는 열정을 마음속 깊이 품고 있는 사람, 폭풍을 머금은 구름 같은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6. 마지막 모습

 

이재훈 : 금은돌, 이윤설 시인은 투병을 하시다가 작고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시인의 마지막 바람이나 마지막 모습들이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이성혁 : 은돌 시인은 투병하다가 작고하지 않았습니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어요. 그것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날짜인 416일 하루 전인 415일에 말입니다. 심근경색으로 알고 있어요. 저도 비보를 듣고 너무 놀라서 믿기지 않았어요. 세상을 뜨기 얼마 전에도 통화한 일도 있고 해서요. 작고하기 얼마 전에 만났을 때도 새로운 작업을 계획하면서 들떠 있는 소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쓰고자 하는 시, 그리고자 하는 그림이 많았을 겁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와 만나면 예술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느껴져서 저까지도 뜨거워지게 하는 사람이었는데요. 너무 뜨겁게 살아서 일찍 세상을 뜨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한 팔십 평생 살면서 발산할 에너지를 은돌 시인은 짧은 생을 통해 그 몇 배나 발산하다가 쓰러진 건 아닐까 하고요.

 

윤석정 : 이윤설 시인은 영원한 시인으로 남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바라는 시인의 영원성은 시를 통해 가능할 것이고, 시집이라는 물성이 있어야 시가 남을 수 있으니 시집을 묶고 싶어했으리라 봐요. 제가 처음 병실에 찾아갔을 때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너처럼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면서 즐겁게 살고 싶었는데. 그게 가장 후회돼!” 앞서 말했듯 그는 과 더불어 인생을 보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죠.

 

이재훈 : 김희준 시인은 정말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교통사고로 세상과 작별하였습니다. 모두가 정말 놀라고 안타까움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는데요. 서윤후 시인은 어떠셨는지요?

 

서윤후 : 여름 장마로 며칠 거세게 비가 내리고는 거짓말처럼 맑고 화창한 여름이었어요. 회사 앞 테라스 스툴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을 때 전화 한 통을 받았어요. 정말 믿기지 않았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제가 서명이 바뀐 시집을 부쳐서, 그것을 일러주면서도 시집에 대한 감상을 곡진히 적어 보내주며 카톡을 주고받았었는데요. 이 갑작스러움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힘들었던 것 같아요. 희준을 보내주는 마음이라기보다는, 희준과 계속 만나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어요. 죽음을 실감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후로 김희준 시인의 낭독회 한 자리를 맡아 그의 시를 대신 낭독하기도 했고, 희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산문으로 발표하면서 제 나름대로 희준 시인을 사람들과 함께 계속 기억하려고 노력했어요. 그 마음으로 이 자리에 온 것이고요, 이제 안타까움 대신에 계속 그를 만날 수 있도록 생각하고 헤아리는 일이 우선이 된 것 같아요.

 

7. 기억해야 할 시세계

 

이재훈 : 시인의 시세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가까운 친구 혹은 독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시를 읽었는지 궁금합니다.

 

서윤후 : 김희준 시인의 시는 뭐랄까요, 물기가 많고 축축한 감각이 지배적이에요. 저는 그것이 김희준 시인이 세계를 태어나게 하는 문법이라고 읽었는데요. 울음과 태어남을 한 자리로 쓰면서 시인이 어떤 목소리를 터트리고 있는지 주목해보면 무척 흥미로운 듯해요. 전체적으로 목소리가 살아 있는 듯한 인상이 크고요. 잘 정제된 언어라기보다는, 어디선가 솟구쳐 오르는 언어라서 시를 읽는 내내 여러 모양의 에너지에 흠뻑 젖을 수 있는 시랄까요. 그래서 단숨에 의미를 읽어내기 어려운 시도 있고, 옆에서 말하듯이 가까운 시도 있어요. ‘들끓음에 대해 오래 생각해볼 수 있는 시집인 듯해요. 끓어오르는 것과 넘쳐흐르는 것, 시인이 품고 있는 세계의 문은 그렇게 열리는 것 같습니다.

 

윤석정 : 이윤설 시인은 발랄한 상상력을 가졌습니다. 그의 발랄함은 톡톡 튀는 시어와 유쾌한 어법에서 나온 리듬, 선명한 이미지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아마 등단 시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 불가리아 여인을 읽어보시면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 시집의 원고를 읽으며 마음속 깊이 가득찬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 슬픔은 지옥에서 출발할지라도 희망과 행복이 충만한 천국으로 가고 있습니다. 시인은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 지옥은 참 작기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저 세상이 가깝게보인다고도 합니다.(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만남과 이별이 등을 기대고 삶과 죽음이 서로 맞닿아 있듯 그가 감각하는 지옥과 천국은 어쩌면 같은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성혁 : 발랄한 상상력과 다양한 실험적인 시 쓰기. 금은돌 시인의 시를 읽으면 이런 생각이 먼저 듭니다. 어서 유고 시집이 나와 독자들이 은돌 시인의 시편들을 읽어볼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이번 좌담을 계기로 조원효 시인으로부터 유고 시집 원고를 받아 읽어보았어요. 은돌 시인의 다양한 시편들을 한꺼번에 읽기는 처음입니다. 그림을 직접 그리는 시인이어서 그런지 시 텍스트의 시각적인 실험들을 다양하게 시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돌 시인 시에는 아방가르드적인 측면이 있어요. 조원효 시인이 󰡔금은돌의 예술 산책󰡕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은돌 시인은 예술의 유희적 측면을 극대화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살면서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고통, 나아가 죽음을 깊이 있게 담아내고 있기도 합니다. 그의 시를 읽으면 마음이 묵직해집니다. 세상은 무심히 계속 돌아가고 있지만 그 속에는 얼마나 많은 폭력과 고통, 죽음이 은폐되어 있는지 그의 시를 읽으면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8. 독자들에게 소개할 시 한 편

 

이재훈 : 시인의 시 중에 가장 애정하는 시 한 편씩 독자들에게 소개해 주세요. 그리고 시를 고른 이유나 시에 대한 해설도 간략히 얘기해 주세요.

 

안녕, 낯선 사람

 

김희준

 

 

여긴 여름이야

거긴 어때?

 

여름을 잘 보내란 말은 이 여름

더 이상 만나주지 않겠다는 말

기대를 기대하는 마음과 다가올 계절에게

끝내 다가가고야 마는 감정은

어디서 태어나나요

 

밤이었어요 신열을 앓는 도시와 더위에 희석된 8월

열대야의 단면에선 약속들이 기척 없이 태어나고

나는 무의미한 약속에 의미를 부여하고야 마는

고약한 성질을 가졌지요

 

브로콜리 숲엔 죽지 않는 구관조가 산대요

갓 배운 건 말이 아니라 이름이었대요

날기 전에 태어나는 걸 배운 새처럼

손가락이 생기기 전에 먼저 잡은 손금은

쥘 때마다 운명이 바뀌기도 했대요

 

고가도로에 죽은 새는 누가 치울까

애매해질 바에 그냥 죽어버릴래

미안한데 빈칸 하나 없는 유서를 곧잘 썼거든요

당신을 만날까 했던 빈 마음과

내게만 바쁜 당신의 요일을

손가락 집어가며 헤아려보는 중이었어요

 

숲에는 초록으로 표백된 새들이

백야를 끊임없이 앓았고요

무해한 얼굴을 가진 나무의 표정을 읽느라

답장을 쓰지 못했어요

 

우리는 할 수 있는 착한 일을 모두 하고 나서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많은 약속이 있었지만 당신은 떠난 뒤었어요

나는 내가 누군인지

깨닫지 못한 순간을 보내고 있었지요

 

서윤후 : 김희준 시인과 여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 있었어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은 여름에게서 오는 것들이었고, 여름이 가져다주는 풍경이었거든요. 차에서 함께 들었던 백예린의 노래 같은 것도 있었지만요. 저는 이 시를 읽으면, 희준 시인이 우리에게 읽어주는 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희준이 누구였는지 우리는 깨닫는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반대편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한 순간을 보내고 있다는 시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들도 떠오르고요. 여름이라는 감각을 잘 펼친 작품이, 곧 시인이 살아 있음을 명백하게 느낀 작품이라고 여겨서 고민없이 이 작품을 골랐어요.

 

이 햇빛

 

이윤설

 

 

나에게 닿는 이 햇빛은 얼마나 멀리서 왔는가,

 

이 빛의 실마리 끝을 잡아 리본을 묶어서 다시 놓아 준다

 

햇빛은 처음 시작된 곳으로 되감아지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돌아가기까지 얼마나 먼 거리인가

 

나는 나의 자리가 없이 떠돌아다녀야했는데,

 

지구의 먼지조차 우주로부터 오는 중이다

 

나는 나의 돌아갈 길이 그렇게 먼 것이

 

그 선물이 무엇이었는지

 

두고 온 상자의 리본은 끌러보지도 못하였는데,

 

우리는 날아가며

 

내가 놓아준 빛을 우연히 조우할 지도 몰라서

 

저 태양에는 내 묶은 리본 하나가 아주 작게 있을까

 

순간이 걷히어가는 저 먼 거리까지

 

다시 묶어주고 작별인사를 하며

 

나는 가난한 나라의 아이가 보내 온 성탄엽서 한 장처럼

 

멀리 우주로 팔랑이며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윤석정 : 이 햇빛처럼 지금 이윤설 시인은 지구를 떠나 멀리 우주를 팔랑이며 돌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2018년 계간 시로 여는 세상봄호에 게재된 신작시입니다. 당시 계간지가 도착하자마자 목차를 봤는데 반가운 그의 이름이 아주 크게 보였어요. 그의 시 이 햇빛을 단숨에 읽었는데 그에게 받은 성탄엽서처럼 오래도록 제 마음에 남았어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금은돌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나는 비를 맞지 않는다 빗방울은 슈퍼마켓 진열대 위에 떨어지고 감자칩 비닐봉지가 나뒹군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그대가 우산을 펼친다 우산은 빗방울을 튕겨내고 그대는 우산 속에 몸을 숨긴다 튕겨나간 빗방울이 거리를 날아다닌다 그곳에서 펼쳐지는 그대 발자국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빗방울이 접혀지며 구두코에 달라붙는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그대는 커피숍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의자에 앉은 빗방울 의자는 물에 젖고 의자는 흘러내리고 의자는 유리창을 바라본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빗방울이 목덜미에 다가와 부딪친다 파고드는 송곳 빗방울은 살갗을 뚫고 핏줄을 베어낸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그대가 기침을 한다 손으로 입을 막고 스위치를 올린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나는 마스크를 쓰고 입을 조물거린다 숨을 덜 쉬며 좁은 방에서 날숨을 내뱉는다 김이 차올라 안경이 뿌옇다 제대로 뱉지 못했던 입김이 겨우, 새가 되어 날아간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물 없는 주전자가 끓어오른다 꿈은 잠을 자르고 큰 아이는 달을 찾겠다며 무작정 맨발로 뛰쳐나간다 그대는 오지 않고 나는 안전하다 마중 나가야 할 것인가? 뱃속 아이에게 물어본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다시마를 우린 물이 여전하다 태아의 발길질이 거세지고 배를 쓰다듬는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나는 하품을 한다 후쿠시마에 비가 내리고 아이가 녹아내린다

 

이성혁 : 금은돌 시인 1주기를 맞아 <수유너머104>에서 금은돌 추모 행사를 열었어요. 은돌 시인은 세상을 뜨기 전까지 연구 공동체 <수유너머104>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고맙게도 그곳에서 추모 행사를 열었던 것이지요. 위의 시는 이 행사에서 낭독된 시입니다. 낭독을 들으면서 강렬한 전율을 느꼈어요. 유고 시집 제목도 바로 이 시의 제목인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가 될 것 같더군요. 이를 보면 이 시에 전율을 느낀 사람이 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9. 유고시집의 의미

 

이재훈 : 장정일 시인은 그의 첫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첫 장에 세상의 시집은 모두 다 유고시집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요절한 시인들은 첫 번째 시집이 유고시집인 경우가 있습니다. 윤동주부터 시작하여 기형도, 진이정도 떠오릅니다. 첫 번째 시집은 아니지만 근래 작고한 박서영, 배영옥 시인의 유고시집도 참 좋은 시집이었습니다. 박서영, 배영옥 시인도 생전 어디에 눈치보지 않고 묵묵히 좋은 시를 썼던 귀한 시인이었습니다. 유고시집이 가진 정체성과 성과와 독자로서의 안타까움 등을 두서없이 말씀해 주세요.

 

이성혁 : 첫 시집을 유고 시집으로 남긴 시인들에게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는가. 말하기 조심스러워지기도 합니다. 첫 시집만 이 세상에 남겨놓았다는 것은, 시인 개인으로 보면 무엇에 비교할 수 없는 불행이겠지요. 한창 시를 써나가야 할 때 맞이하게 된 죽음은 어떤 불행과도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죠. 그러나 남겨 놓은 시집 덕분으로 우리는 요절한 시인을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시인은 언제나 젊은 시인으로 사람들 마음에 남아 있을 겁니다. 시의 세계에 처음 발을 디딘 시인의 초심이 담겨 있는 시편들만 이 세상에 남아 있기에 말입니다. 어쩌면 일찍 세상을 뜬 시인에게 어떤 보상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가 이 젊은 시인의 이미지로만 이 세상에 남을 수 있다는 것, 이로써 그의 삶 자체가 예술 작품처럼 남아 있게 된다는 것 아닐까 합니다.

 

서윤후 : 고등학교 때 인연이 되었던 트루베르의 고태관 형이 지난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문장이 기록되어 있는 롤링페이퍼를 다시 읽어보았어요. 어떤 언어를 품고 노래하며 시를 써왔을까, 그런 막연한 상상이 필요할 만큼 멀어진 사이였지만요. 그의 시집이 곧 나온다고 하여 기다리고 있어요. 죽음 앞에서 남겨진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도 남겨진 사람은 언어를 두고 간 사람의 몫까지 읽어야 할 것입니다. 쓰기도 할 것이고요. 때를 놓치지 않고 유고시집으로 독자의 기억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출판 현장에서 애써주시는 동료 문인들, 편집자들에게도 왠지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그러나 유고 시집을 부지런히 읽을 일은 없었으면 해요. 세상을 바쁘게 살면서도 준비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우리 곁에 있는 동안에는 살아 있다는 인기척을 마주하며, 그렇게 살아요.

 

윤석정 : 서윤후 시인도 언급했듯 작년에 세상을 떠난 고태관의 유고시집이 최근에 나왔습니다. 저는 고태관 시인 함께 2007년 트루베르를 결성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 시인(기형도, 신기섭, 이연주, 여림, 진이정)들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죽은 시인의 사회> 앨범을 제작했고 2013<봉도의 어느 날> 공연으로 선보였습니다. 시인은 세상을 떠났으나 시인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그 독자들의 기억 혹은 마음에서 살아있다고 생각했죠. 그 독자의 기억(마음)봉도로 비유된 거랍니다. 지금 고태관 시인은 봉도에 있으리라 봐요. 물론 이윤설 시인, 금은돌 시인, 김희준 시인도요.

 

이재훈 : 오늘 추억하는 세 시인 모두 봉도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시인은 떠나도 시인과 함께 나눈 작품과 숨결은 떠나지 않을 겁니다. 시인과의 기억들을 함께 나누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독자들에게도 하늘에 있는 시인들에게도 의미있는 좌담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출처 : <시사사> 2021년 여름호


이재훈 : 1998현대시로 등단.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벌레 신화. 본지 주간.

이성혁 : 1999문학과창작, 2003대한매일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저서 불꽃과 트임, 서정시와 실재, 미래의 시를 향하여, 사랑은 왜 가능한가,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본지 편집위원.

윤석정 : 2005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오페라 미용실, 누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

서윤후 : 2009현대시로 등단.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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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멍때린다는 시쳇말이 있다. 아무생각 없이 멍 하니 오래 있다는 말이다. 멍때리는 자를 나무랄 수는 없다. 누구나 멍을 때리니까. 멍때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마음이 허하든지, 배가 고파 허하든지, 무기력해서 허하든지. 고통이 극에 달해서 허하든지.

나도 자주 멍때리는 편이다. 깊은 밤 혼자 TV를 무심코 켰다가 멍때릴 때가 있다. 그 프로그램은 아무 때나 켜도 늘 방영된다. 아마 24시간 방영하는 것 같다. 멍때리고 싶을 때는 그 프로를 틀면 된다. 바로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 아마 나 같은 사람이 많기 때문에 장수하나 보다. 그 프로는 희한한 구석이 있다. 일단 보고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된다. 마치 아는 사람이 출연했어? 라고 옆에서 누군가가 물어보기라도 하듯이.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게 되는 것은 지금 이곳의 결핍 때문은 아닐까. 산골의 원시적인 삶이 채워주는 무언가가 있다. 어떤 사람은 고요를 채우고, 어떤 사람은 자유를 채운다. 어떤 사람은 싸움이 없어 좋고, 어떤 사람은 건강해져서 좋다. 나는 자연인들에게서 공통된 것을 발견했는데, 그건 바로 고통스러운 세속에서 벗어나 산골을 택했고 그곳에서 상처를 보듬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무욕이 가져다주는 미소가 깃들어 있다. 그것이 다분히 연출된 것이라 해도 도시에서의 파탄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아파본 사람, 망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삶의 중요한 목록이 있을 것이다. 그 목록이 세상과 절연한 자연인을 통해 투사되는 게 아닐까. 그 프로를 오래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자연인들의 사연은 늘 비슷비슷하다. 어쩌면 시청자들에게는 그들의 사연이 중요하지 않은지 모른다. 그들의 사연과는 무관하게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을 다른 곳에 둘 수 있으니까.

사람들은 늘 어딘가를 꿈꾼다. 꿈은 늘 이곳에 없는 공간을 이상향으로 만든다. 도시에 살면 시골을 꿈꾸고, 시골에 살면 도시를 꿈꾼다. 나도 어릴 적 시골에 살 때는 도시를 꿈꾸었다. 빌딩을 드나들고 지하철 타는 꿈을 꾸었다. 도시의 매연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무궁화호 기차가 서울의 한강철교를 넘어갈 때면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가 되었다. 아무도 없는 시골에서 살고 싶다. 꿈은 늘 지금 이곳의 결핍을 드러내준다.

꿈꾸는 유토피아가 문학에서는 아주 단순한 삶을 지향하는 것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 주는 기쁨을 자주 얘기한다. 하지만 자연인처럼 산속에서 혼자 사는 삶은 어떤 부분에서는 형벌에 가깝다. 도피나 유폐와 다름없는 고독한 삶이 행복할 리가 없다. 단순한 기쁨의 저자 아베 피에르 신부는 더불어 사는 삶을 강조한다. 피에르는 사실 우리는 모두가 같은 목표, 즉 행복을 추구한다. 모든 인간은 그가 어떤 시대, 어떤 조건, 어떤 문화 속에서 생활하건 두 가지 길 가운데 선택하게 마련이다. 타인들 없이 행복할 것인가 아니면 타인들과 더불어 행복할 것인가. 혼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타인과 공감할 것인가라고 질문했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구도가 아니라면 인간은 타인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행복하지 않을까. 타인들과 나누고 실천하는 삶이 인간답게 사는 맛이다. 결국 우리는 공동체를 통해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요즘 나는 농가주택을 소개하는 유튜브를 자주 본다. 세속에서 찾은 유토피아이다. 바닷가 앞에 마당 있는 주택을 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작은 산을 두르고 있는 시골의 작은 집을 보다가 흥분하기도 했다. 이천만 원짜리 농가주택도 있었다. 서울 아파트의 반 평도 안 되는 가격이다. 서울의 집은 못 사더라도 저 집은 살 수 있지 않을까. 과연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요원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이천만 원이라면 해볼 만한 도전이지 않을까.

출처 : www.pckworld.com/article.php?aid=8878899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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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명왕성 되다(plutoed)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음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시집 명왕성 되다(민음사, 2011) 중에서

 

2005년 결혼을 했다. 평생 혼자 살 것이라는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고 누구나 한다는 결혼을 했다. 시인에게 결혼은 누구나 하는 일이 아니다. 종교적 신념에 비례하는 순교자적 소명 없이는 결혼을 생각할 수 없다. 당시 서른 넷. 시를 쓰고 대학원 박사 과정이며 비상근 문예지 편집자였던 나도 평범하게 살아볼 요량으로 결혼을 했다. 예비 신랑신부의 자취방 보증금을 빼니 오천만원이 되었다. 이러저리 돈을 더 융통해서 육천오백만원짜리 방 두 칸이 있는 전셋집을 구했다. 집은 지하철 2호선 신림역 근처에 가까스로 구했다. 지하철도 있고, 시장도 있고, 먹자골목도 있고, 게다가 월세가 아닌 전세라니. 신림동은 시골에서 상경한 내 정서와 잘 맞는 동네였다. 서울 토박이보다 고향이 남쪽인 분들이 훨씬 많았다. 무엇보다 시장 물가가 저렴했고, 신림동 순대타운이나 고시촌으로 들어가면 값싸고 푸짐한 음식점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어느 동네든지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저녁약속이 있어서 저녁을 먹고 지하철 막차를 타고 신림역에 도착했다. 집에 가기 위해서는 역근처 유흥주점 골목을 지나가야 했다. 그때 어떤 청년이 내 손목을 잡았다.

형님. 놀다 가시죠?”

전 집이 여기 바로 앞이에요. 놀러 온 거 아니에요.”

에이. 왜 이러실까. 잘 해드릴게요.”

진짜 집이 요기 바로 앞이라니까. 자꾸 그러네.”

일명 삐끼라고 부르는 주점의 호객꾼이었다. 근처에 단란한 주점이 많았는데 당시에는 거의 호객꾼들을 두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호객꾼과의 실랑이가 꽤 오랜 시간 지속되곤 했다. 한 마디로 떼어내기가 정말 어려웠다. 화도 내보고, 무시하고 지나가 보기도 하고, 돈이 없다고 지갑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호객꾼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조금 늦은 시간이면 빙 에둘러서 집에 들어갔다.

또 하나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출근길의 고통이었다. 서울살이 직장인들의 출근길 노고를 고스란히 체득하게 되었다. 나는 며칠은 출판사로 며칠은 대학원으로 출근했다. 늘 지하철을 탔다. 출근길의 2호선은 지옥철이었다. 푸시맨이 있던 시절이었다. 차를 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으면 뒤에서 푸시맨이 밀어 넣었다. 매일 구겨져서 지하철에 실려 갔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앞사람의 눈과 마주하는 것이다. 애써 서로 눈동자를 아래로 깔거나 눈을 감는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고개를 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므로. 눈을 감는 대신 매일 온갖 인간 군상들의 냄새와 소리들을 섬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비누냄새, 목욕탕 스킨 냄새, 전날 숙취 냄새, 꼬락내, 방귀 냄새, 암내, 오래 묵은 곰팡내, 신음, 하품, 욕소리, 핸드폰 벨소리, 진동소리, 안내 방송, 밀지 마요, 죽겠네, 왜이래, 저기요, 여기요, 저 여기 내려요, 다음에 내리십니까, 내립시다, 내린다니까.

명왕성 되다(plutoed)라는 말은 2006년 미국 방언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단어였다. 명왕성(Pluto)이 태양계 행성 지위를 박탈당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지하철 무가지 신문에서 읽었다.요즘은 모두 스마트폰을 쳐다보지만 당시만 해도 대부분 지하철에 무료로 배포되는 타블로이드 신문을 보았다. 세상에나. 태양계의 별도 지위를 잃는다니. 이런 일도 있구나. 그 기사가 신기해서 신문을 찢어 주머니에 넣었다. 태양계에서 가장 먼 별 명왕성이 박탈당했다. 태양계에서 소외되었다. 누가 박탈했나.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그랬단다. 나사에게 그런 자격을 누가 주었나. 아무도 모른다. 우리에게 말도 없이 왜 명왕성을 없앤다고 난리인가. 마치 꿈을 빼앗는 것처럼 이상했다.

매일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매일 박탈당하는 꿈을 꾸며 지하철 2호선을 돌고 도는 건 아닌가. 나는 완전히 소외될 때까지 2호선을 돌고 돌 것이다. 지하철에서 눈을 감으면 너는 명왕성 되었어 라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너는 박탈당하고, 소외당했단다 하는 중얼거림이 들렸다. 첩자처럼 도시를 배회했다. 허무의 그림자만 잔뜩 거느린 채 혼자 있고 싶은 곳을 찾아 다녔다. 그 시간들이 빚어낸 시가 바로 명왕성 되다이다.

내게 지하철 2호선은 삼십대를 통과했던 서울의 상징과도 같다. 명왕성 되다는 신림에서 합정을, 합정에서 증산을 오갔던 날들의 기록이다. 또한 두 번째 시집의 표제시가 되었다. 이 시집에 수록된 남자의 일생, 매일 출근하는 폐인, 신림동, 귀신과 도둑등도 모두 신림동과 지하철 2호선을 배경으로 쓴 시편들이다. 어쩌면 그 시절 가장 많은 시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평범하게 살려고 결혼을 했지만, 다른 사람 살 듯 평범하게 사는 게 비범하게 사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간들도, 가장 바쁘고 처참했던 시간들도 그 시절이었다. 신림동에서 2년을 살고 그곳을 떠나왔다.

ㅡ <시인시대>,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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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별곡

산문 2019. 2. 18. 17:10

책방별곡

 

이재훈

(시인, 청색종이 상주작가)

 

 

 

솔직히 예전에는 책방이 뭐 별 거 있나 라고 생각했다. 서점은 좀 큰 느낌이고 책방은 좀 작고 아늑한 사랑방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고매한 분들의 문화적 욕구에 의해 마련된 살롱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들어가 보기엔 뭔가 부끄럽고 어색한 그런 공간이었다고 할까. 많은 책을 구경하기에도, 술이나 차를 마시기에도 애매한 공간이었다고 할까. 시간이 남을 때 길거리 어디에나 있어서 들어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지도앱을 켜고 찾아들어가야 하는 모험적 자세가 있어야 출입할 수 있는 불편도 있었다고 할까.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작은 책방은 내게 잡지에서나 가끔씩 구경하며 궁금해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책방은 너무나 소중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책방이 소중한 공간뿐 아니라, 꼭 있어야 하는 공간이라는 당위적 사명을 스스로 운위하며 사방팔방에 떠들며 다니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서점에 대해서라면 추억도 많고 할 말도 많고, 만화방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추억도 많고 할 말도 많다. 그곳엔 어설픈 비행(非行)이 있었고, 애매한 연모가 있었으며, 불가능에 가까운 문학적 대의가 숨어 있기도 했다. ‘종로서적이 사라졌을 때 느꼈던 허탈과 속절없는 기대 때문에 한동안 힘들어했던 적도 있지 않았나. 이제는, 다만 이제는 책방에 대해서도 추억과 할 말이 하나씩 쌓여가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내 문화적 품위는 아직도 근대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자위한 터였다. 내게는 깨끗하고 근사한 카페보다는 김수영이나 박인환이 들렀을 법한 막걸리집에서의 문학적 결기가 더 편하고 좋은 공간이었다. 이제 내가 애정하는 그 목록에 작은 책방이 들어섰다고 하면 가장 적절한 표현인 듯 싶다.

가까운 시인인 김태형형이 문래동에서 책방 <청색종이>를 한다고 했을 때 의아했다. 아니 무슨 용기로 책장사를 한다는 말인가. 시인이지 않은가. 장사를 해본 분이 아니지 않은가. 차라리 책을 훔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다. 잔소리도 몇 번 한 것 같은데, 김태형 시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뚝심있게 책방을 꾸려나갔다. 책방을 창업하고 지금까지 여러 곡절도 있었겠지만 지금도 책방은 문래동의 인문학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어 책방을 한다는 시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유희경 시인의 <위트앤시니컬>, 지현아 시인의 <북스피리언스>, 김이듬 시인의 <책방 이듬> 등을 가끔씩 드나들었다. 동료 시인들이 운영하고 있었기에 작은 책방들은 내겐 더더욱 소중한 의미의 공간들이 되어 갔다. 그들도 아마 운영면에 있어서는 독립운동을 한다는 심정으로 시집을 매만지고, 책을 매만지고, 손님을 받고, 작은 행사들을 치를 것이다. 힘들지라도 행복하다는 마음이 가득할 것이다.

운명의 장난인지 필연의 결과인지 모를 일이 작은 책방을 통해 하나씩 내게 전달되었다. 작년부터 내가 운영하는 시창작반 상상스콜라의 강의를 <청색종이>에서 하고 있다. 나는 청색종이의 무급 홍보이사를 할 테니 저렴한 공간임대료 책정을 해주십사 제안했고, 시인 책방 대표님은 같은 시인의 마음을 널리 헤아려 주어 지금도 잘 운영해나가고 있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고 한국작가회의가 주최하는 ‘2018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청색종이에 3개월간 상주작가로 활동하며 무려 4대보험에 가입되며 작은서점에서 암약하는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물론 이제 3개월간의 상주작가가 20191월로 끝이나 실업급여를 신청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긴 했다. 이곳에서 동네 네마실이라는 프로그램을 걸고, 영화도 보고 시도 읽고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문래동 골목에서 영화 패터슨’, ‘조용한 열정’, ‘토탈 이클립스’, ‘실비아등을 보고, 카를로스 윌리엄스, 에밀리 디킨슨, 랭보, 실비아 플라스의 시를 읽었다. 너무 근사하고 행복하지 않은가. 또한 두 군데의 작은 책방인 <책방 이듬><곁애 책방>의 활동을 지켜보며 교유를 이어나갔다.

책방은 동네의 문화 사랑방이다. 사람들이 모여 시를 읽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며 마음을 나누는 곳이다. 큰 서점에서는 할 수 없는 따뜻한 열정과 마음들을 직접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작은 책방에 들르는 분들은 커피도 사들고 오고, 과일이나 과자도 사들고 오고, 심지어 김치도 가져온다. 모두 나누고 싶은 마음들 때문이다. 또한 책방은 인문학의 지식발전소이다. 철학을 읽고, 신화를 읽고, 역사와 문명사를 읽는 독서모임과 시와 책을 읽는 낭독회는 작은 책방에서 연일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책방은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위로를 받는 곳이기도 하다. 책방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면 이런 생각이 자주 든다. 세상 밖에서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앞으로 동네마다 작은 책방들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작은 책방에서 시 읽는 소리가 들리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고, 영화보며 웃는 소리로 넘쳐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행복했으면 좋겠다.

 

- <한국작가회의 회보>, 2018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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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마지막 음악이 기도라면

 

이재훈

 

 

우울한 음악을 좋아했다. 한때는 병적으로 좋아했다. 남들은 사춘기에 겪는 우울을 늦게서야 앓기 시작했다. 까닭 모를 우울을 친구로 삼았다. 늘 땅만 보며 걸었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용인하지 못했다.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우울한 곡들이 되레 위로가 되던 시절이었다. 요절한 유재하를 그리워했고, 김현식이 사망한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이었다. 나중 김광석이 자살하리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우울하고 거칠고 처절한 곡들만 탐하면서 스스로 유폐된 채 말도 안 되는 문학의 성채를 쌓아가던 때, 여러 음악들을 만났다.

<글루미 선데이>는 위험한 곡이라고 했다. 이 곡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자살했다고 한다. 음악이 가지는 전설이나 풍문은 자주 김을 빼게 만든다. 막연한 기대는 막연한 느낌만을 남기고, 우월한 기대는 부정적인 느낌을 만들기 마련이다. 글루미 선데이가 내겐 그랬다. 너무 대단한 곡이었지만, 죽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곡이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조금 우울했고, 조금은 편안했다. 빌리 홀리데이가 부르는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좋아서 미치겠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레이 찰스가 부르는 글루미 선데이는 낭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 노래 때문에 일요일이 조금 우울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렇게 우울해지지는 않았다. 일요일은 원래 그런 날이니까.

사랑은 내 생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누가 이 우울하고 폐쇄적이고 백수인 스무 살의 청년을 좋아할 것인가. 하지만 우울한 백수 청년에게 감지되는 모성적 연민을 사랑의 느낌으로 착각하는 친구들도 간혹 있었다. 잠깐씩 연애도 아닌 연애 비슷한 것을 하기도 했다. 손을 잡았던가. 눈빛을 마주 했던가. 입을 맞추기에는 내가 너무 초라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연애를 하며 우울한 음악을 많이 들려주었던 기억이 난다. 우울한 음악을 들으며 세상의 모든 우울이 나라는 필터를 통해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영혼의 기품으로 변화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사랑이라는 마음을 건드릴 수도 있을까 바랐다. 참으로 치기어린 마음이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위로였다. 음악이 나를 위로할 때, 한없이 자유로운 공기를 느꼈다.

무슨 음악들이 있었을까. 개빈 브라이어스의 <Jesus'Blood Never Failed Me Yet>. 나중 탐 웨이츠도 불렀다. 음악이 너무 길었지만, 긴 음악이 가지는 오기가 느껴져서 좋았다. 약물과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싱어송라이터 엘리엇 스미스의 <Between The Bars><Miss Misery>는 한때 어둠이 밀려올 때마다 듣고 싶었던 곡이었다. 존 서먼의 바리톤 섹소폰은 압권이다. 존 서먼의 <Private City> 앨범을 틀어놓으면 시가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내게 가장 처절하고 우울한 곡은 마우로 펠로시였다. 마우로 펠로시의 <suicidio><Al Mercato Degli Uomini Piccoli>는 한없이 가라앉고 끝도 없이 침울해진다. 매번 술을 마시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였다.

우울한 음악들을 예전처럼 많이 듣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경쾌함보다는 우울함 쪽이 훨씬 좋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우울한 음악들을 통해 더 우울해지려는 것보다는 그 우울함을 즐기며 견디려했던 것 같다. 음악이 주는 덕목 중에 성찰이 있다면, 우울한 음악은 그 덕목을 가장 잘 실천할 수 있는 경우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죽기 전이라면? 아무리 우울해도 죽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죽음은 용기와 태도와 실존의 자긍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므로.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면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옆에 함께 있었던 강도의 심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영혼의 구원과 용서와 감사와 회개가 점철된 가장 나약한 자의 고백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문득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자주 내 입에서 흥얼대는 노래다. <Amazing grace>. 우리나라에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가로 번안되어 있다. 마할리아 잭슨이 불렀던 Amazing grace, 사랑과평화가 불렀던 Amazing grace, 윤복희와 인순이가 불렀던 Amazing grace, 박정현이나 소향이 불렀던 Amazing grace. 그 모든 Amazing grace가 내게는 모두 뜨거운 벅참이다. 전주 부분에 파이프 오르간이 깔리는 마할리아 잭슨의 곡이라면 더욱 좋겠다.

- <더 멀리> 마지막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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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하루

 

이재훈

 

하루

 

<멋진 하루>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은 하정우와 전도연. 둘은 연인이었다가 1년 전에 헤어진 관계이다. 전도연은 하정우를 일 년 만에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 빌려준 돈은 350만원. 헤어진 사이에 좀 야박하다 싶지만 사정을 들어보면 둘 다 딱하다. 지금 이들은 자신의 찌질하고 쪼잔함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돈이 급하니까. 이후 영화는 빌려준 돈을 받으려는 전도연이 돈을 갚는다는 하정우를 따라다니는 과정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특별히 기억나는 어떤 하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우리에겐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온다. 결혼도 사업도 실패하고 경마장이나 전전하는 하정우를 따라다니다 보니 그렇게 밉지만은 않은 것이다. 일상 속에 존재하는 미묘한 감정선이 아주 섬세하게 그려진다.

<멋진 하루>는 일상의 힘이 가진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인간의 일상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어떤 나름의 이유와 변명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이유와 변명들이 하찮거나 심오하거나 하는 문제는 개인이 바라보는 입장차이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공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은 고백에 가깝다. 고백은 늘 부끄러운 것이다. 자랑스러운 고백은 그다지 재미가 없다. 늘 반복되는 일상. 그 일상의 몇 순간을 고백하려고 한다.

 

빈 강의실

 

나는 강의를 한다. 구체적으로는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강의하고, 내가 운영하는 창작반에서 시창작을 강의한다. 일주일에 하루는 잡지사로 출근해 일을 본다. 강의를 한 지는 15년 정도 되었다. 가능하다면 한국의 마지막 시간강사가 되고 싶다. 그만큼 끝까지 하고 싶다는 말이다.

나는 강의가 끝나고 난 후, 강의실에서의 텅 빈 침묵을 좋아한다. 모두 떠나고 아무도 없는 빈 강의실에서 몇 분 동안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있다. 빈 강의실에는 알 수 없는 흔적들이 존재한다. 파장 이후에 오는 쓸쓸함과 안도감, 그리고 허전함이 빈 강의실에는 존재한다.

학교 다닐 때에도 빈 강의실을 주로 애용했다. 도서관보다 빈 강의실을 찾아다니며 공부하면 집중이 더 잘 되었다. 비밀이지만 빈 강의실에서 밀애를 즐기기도 했다. 빈 강의실에 슬그머니 들어오는 햇살을 마주하면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다. 그 햇살에 자꾸 손을 갖다 대보는 것이다.

 

버스

 

일 때문에 일주일에 몇 번은 버스를 탄다. 내가 사는 곳은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꼭 마을버스를 타야 한다. 마을버스는 대개 거칠다. 작은 버스이지만 만만히 보면 안 된다. 손잡이를 꼭 잡고 타야 한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면 잠시 버스에서는 낭만을 즐길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시간이 자주 오지는 않는다. 버스에서 나는 주로 팟캐스트를 듣거나 시집을 읽는다.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에는 시집을 읽고, 서서 갈 때에는 팟캐스트를 듣는다.

일주일에 한번은 고속버스를 탄다. 지방강의 때문이다.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지방행 고속버스를 탄다. 두 시간 정도 걸린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 버스에서는 주로 잠을 잔다. 어떤 음악이 내 잠에 도움을 줄까를 고민하며 버스에 오른다. 잠을 자다가 깨기도 하고, 잠을 자다가 차창 밖을 구경하기도 한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에서도 잠을 잔다. 어떤 날은 음악을 듣기도 하고, 어떤 날은 영화를 보기도 한다. 어떤 날은 책을 읽기도 한다. 그리고 간혹 어떤 날은 시를 쓰기도 한다. 버스에서 쓴 시는 내게 몇 안 되는 생활시이기도 하다. 아래는 최근 발표한 버스에서 쓴 시.

 

차창 밖으로 비가 내린다.

버스를 타기 전에는 맑았던 하늘인데

집으로 가는 길에 비가 내린다.

지방 소도시의 대학에서 시간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갈 때면 늘 가혹하게 막힌다.

모두 저마다 집으로 가거나

외로움을 달랠 사람들을 찾아가거나

저녁 일터로 가는 길일 것이다.

휑한 마음 한구석에 빗방울이 또르륵 떨어진다.

매일 보따리를 들고 어딘가로 나서는

장돌뱅이의 저녁이 궁금하다.

언제쯤 집으로 당도할까.

쉬어야 할 집은 멀고

목은 더 컬컬해진다.

버스 뒷자리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연유인지 생각하다

뒤로 가서 가녀린 등을 토닥거려주고 싶지만

모른 척 그냥 눈을 감는다.

도착할 집은 멀고 잠은 오지 않는다.

버스가 도착할 무렵이면

가까운 막걸리집부터 찾을 것이다.

컬컬한 목이 바짝 마른다.

― 「귀가전문

 

프로야구

 

매일 하는 일상 중 하나는 프로야구 하이라이트를 보는 일이다. 전 구단의 하이라이트 및 경기 영상을 다 본다. 시간이 있는 날은 야구중계를 저녁 내내 본다. 함께 사는 가족들의 원성을 들으면서 꿋꿋하게 본다. 가끔씩 MLBPARKSTATIZFoulball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눈팅을 하곤 한다. 일면에 몇 번씩 경기장을 찾기도 한다. 그런 날은 맥주를 마시다가 경기에 집중을 못하지만. 나는 한화 이글스 팬이다. 요즘 야구보는 게 많이 즐겁다. 그 이유는 야구를 좋아하는 분들은 모두 알 것이다.

 

카프카독서실

 

책은 늘 읽는 것이므로. 늘 일주일에 몇 권의 시집을 읽는다. 그리고 다른 책들도 읽는다. 누워서 읽거나 기대어서 읽는다. 요즘 읽던 그 책이 어디 갔는지를 자주 찾아다닌다.

카프카독서실에 관한 얘기는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내 방이 카프카독서실이다. 하지만 지금 내 방을 초등학교 2학년 아들에게 빼앗길 위험에 처해 있다.

지금 내 책상에 쌓여져 있는 책들은 다음과 같다. 십여 권의 문예지. 최근 배달된 십여 권의 시집. 무라카미 하루키의 <버스데이 걸>, 기욤 뮈소의 <파리의 아파트>, 헤르만 헤세의 <최초의 모험>, 김은상 시인이 쓴 소설 <빨강 모자를 쓴 아이들>, 박영규의 <조선전쟁실록>.

지금 이 글을 쓰는 일요일 오후. 읽던 책을 덮고 프로야구 중계를 본다. 읽던 책을 덮고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일상이다.

 

- <시현실> 201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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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1.

내가 편지를 처음 쓰기 시작한 때는 중학교 1학년 즈음이다. 나는 낯설고 먼 동네에서 전학온 이방인이었다. 당시에는 전학온 학생이 드문 시절이었다. 친구들은 타향에서 온 얼굴이 희고 키가 작은 전학생을 놀려주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이상한 별명을 만들어 내어 놀려대곤 했다. 짓궂은 친구들은 뒤에서 돌을 던지고 도망가기도 했다. 누가 별명을 지어냈으며 누가 돌을 던졌고 누가 그러지 말라고 말렸는지 모두 알 수 있는 작은 동네였다. 학교에서부터 집까지 논둑길을 걸으며 한없이 외로워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엄마가 사서 입혀준 멜빵바지가 창피했다. 친구들처럼 털털하게 아무 거나 입고 함께 풀피리를 불며 소 풀뜯기러 가고 싶었다. 뚝방에서는 늘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피어올랐다. 집에 가다 말고 뚝방에 앉아 소를 몰고 다니는 친구들을 오래도록 보는 날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얘기지만 당시엔 또래집단에 편입되지 못한 외로움 때문에 너무나도 힘들었다. 나는 편지를 썼다. 떠나온 곳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혹시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나처럼 너희들도 전학간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동갑내기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던 교회 누나에게도 편지를 썼다. 어쩌면 그 편지들이 내 문학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애들은 시간이 지나면 친해지게 마련이다. 나를 놀려대던 친구들은 친해지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친해지고 싶었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놀려댔던 것이다. 나를 괴롭히는 줄로만 알았던 게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였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무장해제되었다. 몇 달 동안 외로움에 지쳐있던 나에게 친구들은 샘물처럼 달았다. 친구들과 개울가에서 미역을 감았고 함께 소 풀을 뜯겼다. 저녁나절엔 친구집 사랑방 아궁이에서 쇠죽이 끓는 구수한 냄새를 오래도록 맡았다. 억센 경상도 욕을 배웠고 친구들처럼 아무 옷이나 입고 동네를 쏘다녔다. 때론 범죄에 가까운 대량 서리를 하러 다니기도 하였다. 편지는 더 이상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사춘기가 찾아왔다. 밤늦게까지 라디오를 켜놓고 멍하게 있는 날이 많았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유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잡히지 않는 방송이었다. 나는 김희애의 인기가요를 들었다. 늦은 밤에는 팝음악 방송을 들었다. 공테이프를 걸어 놓고 좋은 음악이 나오면 녹음을 했다. 그리고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번엔 방송국에 편지를 썼다. 다시 불을 지피기 시작한 내 그리움은 대상이 없는 막연한 것이었다. 방송국은 그런 내 그리움을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편지지에 썼고, 노트에 썼고, 엽서에 썼고, 은행잎에 썼고, 티슈에 썼다. 내 그리움을 전할 수 있는 모든 사물이 나의 편지지였다. 펜이 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글씨체를 실험하며 썼다. 어쩌면 그 편지들이 내 문학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나는 또다시 전학을 갔다. 그리고 또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 편지는 그리움뿐만 아니라 존재의 궁금증에 대한 갈망을 담은 것이었다. 친구들은 답장을 쓰느라 곤혹을 치렀을 것이다. 밑도 끝도 없는 허황된 질문들과 존재론적 고민들에 대해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망설였을 것이다. 대답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편지를 쓰는 게 중요했다. 어쩌면 그 편지들이 내 문학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편지를 쓰는 일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되었다. 아마 이십대까지는 계속 편지를 썼을 것이다. 그 편지들은 몇 개의 상자 속에 오래도록 보관되어 있었다. 시골집 책상 아래 깊숙이 보관되어 있었다. 가끔씩 시골집에 들르면 그 편지들을 꺼내 보곤 했다. 아직 설익은 감정을 어찌할 바 몰라 서성대는 문장들이, 열망에 차서 흥분된 문장들이, 열등감에 휩싸여 자책하는 불안한 문장들이, 구원을 꿈꾸는 불가해한 내면의 문장들이 스멀스멀 기어다니고 있었다. 어쩌면 그 편지를 꺼내 읽는 일들이 내 문학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2.

 

스물 하고도 몇 해가 넘어갔다. 문학을 한다고 폼을 잡으며 허둥대던 시절이었다. 문학 쫌 할 것 같은 친구들이나 여학생들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 시를 썼고 시가 어떻냐고 물었다. 편지에 치기어린 문학론을 펼쳤고 문학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객기를 부렸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등단을 했다. 등단을 했다고 편지를 썼으며, 등단을 하니 더 괴롭다고 편지를 썼다. 시가 내 미래를 무엇 하나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시에 투정을 부렸다. 시 때문에 내가 이꼴이 되었다는 투정을 편지에 썼다. 어쩌면 괜찮다는 위로의 대답을 듣기 위해 투정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보관한 편지상자가 불태워진 것은 이십대의 마지막이 끝나가고 있을 때였다. 명절에도 들르지 않았던 시골집에 오랜만에 들렀다. 그런데 편지상자가 없어졌다. 늘 책상 밑 깊숙이 놓여 있던 편지상자가 없어졌다.

엄마. 내 편지상자 못 봤어요?”

그거 다 태워버렸다.”

뭐라고요? 아니. 그걸. 제게 말도 안하시고 태우다니요.”

. 너무 오래 돼서. 필요 없는 건줄 알고 태워버렸지. 중요한 건지 몰랐구나.”

어머니는 그 편지들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내 일기까지도 훔쳐보시는 분인데 그 편지를 안 읽었을 리가 없었다. 아마 과거의 일들에 목매인 나의 모습이 보기 싫었으리라. 옛 추억에 젖어 찔끔거리는 아들의 모습이 안타까우셨으리라. 그리고 어머니의 병적일 만큼 깔끔한 성격도 한몫 했다. 누렇게 바랜 종이상자를 빨리 치워버리고 싶으셨을 것이다. 아무튼 편지를 잃어버린 그날의 사건은 꽤 오랫동안 나를 옥죄었다. 내 추억의 대부분이 뭉텅 잘려나간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편지를 계속 썼다. 아직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고, 편지를 쓰는 사람들이 꽤 남아 있었다.

 

내 스무 살은 노래였다. 거리에서 배운 노래가 목청으로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그것을 먼 이방의 방언이라 여겼다. 천둥소리는 더 크게 들렸고, 몸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단 하나의 권능도 없이 숨소리 없는 거리에 서 있었다. 나는, 가볍게 다른 문을 열 수 있을까. 꿈도 없는 잠을 매일 잘 수 있을까. 내 손가락들이 들러붙어 물갈퀴가 되고 이빨은 사자처럼 송곳니만 사납게 솟아난다. 성 꼭대기에 올라 어둠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새의 등에 올라타고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으며 나스카 평원에 새겨넣은 의 형상을 한눈으로 보고 싶었다. 나는, 어떤 법을 배웠던가. 노래하는 법 말고는 배운 것이 없다. 눈 먼 한 마리의 새가 내 머리칼 속에서 둥지를 틀고 있었다. 새의 전생은 자유였다고 평원을 돌보던 파수꾼이었다고, 그 새가 법을 배웠다.

 

법을 배우는 순간, 나는 풀이 되었다.
  
하늘을 날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는
 
,

나는 오래 전 풀의 고독을 기억하고 있다.

이재훈, 나스카 평원을 떠난 새에 관한 이야기부분(<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나의 노래는 편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성전에서 배운 노래를 편지에 옮겨 적었고, 거리에서 배운 노래를 편지에 옮겨 적었다. 내 존재의 고민과 환상의 빛깔과 삶의 고통들을 편지에 옮겨 적었다.

서른이 넘어가면서 편지 쓰는 일이 뜸해졌다. 이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성탄절 카드도 신년 카드도 서서히 사라졌다. 이제 편지는 내 스무 살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지금은 사라진 어떤 흔적이 편지의 기억을 통해 내 청춘을 증언해주는 것만 같다. 편지로 주고받았던 오랜 기다림과 떨림은 이제 없을 것이다. 봄날 비가 오는 밤이 되면 정말 오랜만에 손편지를 써봐야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끄러워 부치지 못할 정념의 말들을 맘껏 써봐야겠다. 펜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부끄러운 문장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 기다림의 문장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빗소리를 들어야겠다.

출처 : <문학사상>, 2016년 4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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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묘지(山頂墓地) 1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 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물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을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 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 명령을 내리라.

좀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에 뿌려진 생목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

  조정권 선생님은 내게 그 무엇보다 산정묘지의 시인이다. 시가 거느린 본질과 이상에의 갈망이 가장 고독한 절연의 풍경으로 보여주는 시적세계는 단연 눈에 띄었다. 산정을 이리저리 오가며 탄성과 다짐과 고백의 말들을 얼음처럼 쏟아낼 때 느껴지는 전율은 오래 내 감각에 남았다. 그 후로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에 신기해했고, <하늘이불>에 눈이 반짝했으며, <신성한 숲>을 가로질러 <떠도는 몸들>에 이르러 우수어린 도시산책자의 본면을 바라보다 <고요로의 초대>에서 위안을 얻었다.

평단에 선생의 시세계를 지칭하는 정신주의라는 개념은 조정권의 시를 위해 만들어진 개념과도 같았다. 정신주의를 대변할만한 시가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저 물음이 나에겐 큰 도전처럼 느껴졌다. 빽빽한 나무숲 사이에서 아주 좁고 희미한 길 하나가 슬쩍 보이는 기분이었다. 때론 나는 정신주의가 될 것이다라는 다소 거칠고 객기어린 말을 노트에 적어 넣기도 했다. 하지만 내겐 선생과 같은 염결이 없다. 선생과 같은 시적 인내가 없으며, 철학도 사상도 미비하고, 미적인 것에 대한 심미안도 부족하다. 그렇기에 선생의 시는 내게 늘 위안이었다.

나는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를 묶으면서 조정권 선생님의 의견에 많이 의지했음을 고백해야 한다. 첫 시집을 묶어놓고 조정권 선생님과 김혜순 선생님께 추천글을 부탁드렸다. 두 분 선생님 모두 큰 인연은 없지만 추천글을 받고 싶은 선생님이었다. 조정권 선생님께 무작정 원고를 보내놓고 알아서 책임지시라는 생각으로 판단만을 기다렸다. 시집을 읽고 쓸 만하면 써주시고 그렇지 않다면 하등의 부담도 하지마시고 거절해주십사는 말을 첨언한 터였다. 며칠 후 선생께서는 친히 전화를 주셨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내 첫 시집의 세계와 가능성에 대해 오랫동안 말씀해주셨다.

그때의 전화 통화는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덧붙여 이런 말씀도 해주셨다. “이 시인. 시집 제목을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로 하는 게 어때요? 길다고? 좀 길면 어때. 이 시 제목이 이 시인의 첫 시집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제목인데. 내 첫 시집도 제목이 엄청 길다고.” 그렇게 하여 내 첫 시집 제목은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 저 제목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저 제목이어서 참 다행이다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나는 그 후로 선생의 곁에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이제 영면하셨다. 나는 지금도 시가 안 풀릴 때마다 선생의 시를 읽는다. 그러면 뜨겁고 강한 시적 에너지가 전해지기도 하고, 고요하게 침잠하기도 한다. 의미 사이의 긴장을 숨찰 정도로 멋들어지고 단호하게 읽다가 어느 순간에 다시 고요해진다. 특히 산정묘지는 소리 내어 읽어야 하는 시다.

가을밤이던가. 문학행사를 마치고 선생과 집이 같은 방향이라 택시를 함께 탔다. 선생은 이 시인. 맥주나 한잔 더 하고 갈까고 넌지시 물으셨다.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월곡역에서 내려 새벽까지 선생과 통음을 했다. 그때 무슨 얘기를 했던가. 오로지 시 얘기였다. 시 하나로 오롯하여, 모든 예술과 철학의 사유가 시를 위한 말들이었다. 은둔은 도시 속에서 하는 게 가장 처절하고 적절하다고 말씀하셨던가. 오로지 시로 만난 선생님이 보고 싶은 그런 날이다. 첫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_ <현대시학>, 2017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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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이 되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재훈

 

우리는 그때 김광석을 광석이형이라고 불렀다. 스무 살이 되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짐을 싸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갈 데가 없었다. 친구의 자취방에 얹혀살았다. 나와 처지가 비슷한 친구들도 몇 있었다.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자취방에 모여 술이나 마시며 시간을 축내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에는 무협지나 비디오를 빌려보는 게 최고의 재미였다. 자취방에는 비디오기기가 없었기에 비디오테이프를 플레이할 수 있는 비디오기기까지 빌려주던 시절이었다. 하루 이틀 동안 열편이 넘는 비디오를 보고나면 머리가 아팠다. 대부분 홍콩영화나 헐리우드 액션영화였는데 줄거리나 영화 제목이 겹쳐서 무엇을 보았는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러다 할 일이 없으면 음악을 들었다. 우리에게 김광석의 음악은 마치 우리의 삶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김광석을 듣고 있으면 그때의 일들이 떠올려진다.

배가 고팠던 시절이었다. 라면만 먹어 자주 설사를 했다. 밥은 먹어야 했기에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저마다 학원으로 업소로 공장으로 식당으로 나다녔다. 밤이 되면 두더지처럼 한 사람씩 자취방의 소굴로 기어들어왔다. 모두 지쳐있었다. 아무런 기술도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외로웠다. 그 외로움은 혼자라는 외로움이 아니라 삶의 고단함 속에서 나오는 외로움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복잡한 심사가 서로 얽혀 마음을 힘들게 했다. 아무런 낙관도 없는 미래의 일들이 눈앞에 뻔히 보였다. 친구들끼리 점점 말수가 줄었다. 무협지를 읽는 일도 비디오를 보는 일도 심드렁해졌다. 그러다 밤이 깊어지면 술을 찾았다. 스무 살은 누구나 술을 물처럼 마실 나이였다. 항상 술이 부족했던 나이였다. 안주는 새우깡이나 생라면 몇 개면 그만이었다. 술을 마시면 김광석을 들었다. 왜 김광석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누구도 김광석의 노래를 바꾸라고 한 일은 없었다. 술을 마실 때는 무조건 김광석이어야만 했다. 누구라도 김광석을 틀어놓는 것에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김광석을 들으며 옛 애인을 생각했다. 무료한 날들을 생각했고, 댓가없는 날들을 생각했으며, 사람은 왜 이렇게 외롭게 살아야하는가를 생각했다. 김광석을 들으며 노래가 주는 쓸쓸함을 사랑하게 되었다. 김광석의 노래가 왜 쓸쓸하게 들리는지에 대해서는 서로의 의견들이 달랐다. 그의 목소리 때문이라는 친구도 있었고 그의 노랫말 때문이라는 친구도 있었다. 어떤 친구는 그의 포크적인 음악성향 때문이라고도 했다. 어느 이유에서건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술을 찾게 되고 쓸쓸해지게 된다는 사실에서는 모두 수긍했다.

나는 김광석의 노래 중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특히 좋아했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는 그 노랫말이 꼭 내 얘기 같았다. 실제로 유리창에 이별한 애인의 이름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술을 마시면 꼭 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진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울고 싶을 때 듣는 노래이다. 살다 보면 이유 없이 울고 싶을 때가 많다. 남자라는 무의식적 관행 때문에 울음을 많이 참는다. 혼자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세상 모든 일들을 다 이해할 것만 같다. 또한 세상 모든 일들이 애처롭고 고맙고 미안해지게 되는 노래이다. 김광석은 김목경의 이 노래를 버스에서 듣다가 그 자리에서 울고 말았다고 한다. 내가 60대가 되더라도 아직 철이 들지 못한 늙은 어린애일 테지만 이 노래만큼은 아는 척하며 꼰대짓을 하고 싶어진다.

<마루>는 어머니와 슬픔에 관한 시이다. 이 시는 그 시절을 통과해 쓴 시이다. 어쩌면 김광석과 함께한 깊은 밤의 수많은 술추렴이 이 시를 도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루


이재훈


이별은 순간이다
그 순간을 이겨낸 자만이
슬픔을 바닥에 깔고 앉을 수 있다
나는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생을 버텨왔다 그러나
멀리서 새벽 종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어머니가 마루에 앉아 뜨개질을 하신다
엉덩이 밑에서 건져 올린 슬픔을
한 올 한 올 뜨고 계신다

 

_ 출처 : <이럴 땐 쓸쓸해도 돼>(천년의 상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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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사랑

산문 2017. 7. 18. 17:38

서툰 사랑

 

이재훈

 

 

나는 사랑에 대해 서툴다. 사랑하는 데에는 자격이 없다. 누구든지 사랑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사랑에 서툴고, 힘들다. 매번 도망다니다가 끝나버린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에게 사랑은 형벌에 가깝다. 그들에게 사랑은 감정적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 전해주는 감정적 격동을 이겨내지 못한다. 쉽게 아파하고 쉽게 의심하며 쉽게 좌절하고 쉽게 파탄난다. 사랑이 주는 기쁨과 행복은 짧지만 사랑이 주는 고통은 길다. 긴 고통과 짧은 행복을 맞바꾸어야 하는 사랑의 운명 앞에서 늘 울부짖는 일. 사랑은 그런 일이다. 사랑하는 자는 늘 울부짖는다. 저녁의 쓸쓸함을 아침의 허망함을 오후의 무력함을 모두 사랑의 일로 여긴다. 그런 사랑에 대해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내게 있는가. 관념적인 사랑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한데 사랑의 실상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여전히 나는 사랑에 대해서 서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사랑에 서툴지 않는 사람이 있기라도 한 걸까.

소년의 사랑이라고 말할까. 그녀는 동갑내기 친구였다. 옆집에 살았다. 게다가 같은 교회에 다녔다. 그녀가 아침에 밥 먹는 소리까지 들렸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인사도 들을 수 있었다. 저녁이 되면 자연스레 우리는 교회에 모였다. 당시 교회는 공식적인 남녀 모임의 장소였다. 그곳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곳이었다. 교회가 아니라면 어디서 여학생들을 볼 수 있었을까. 빵집은 너무 닭살 돋았고, 롤라장은 너무 번잡했으며, 뒷동산은 너무 위태로웠다. 예배당 옆에 지어진 작은 집이 있었다. 누구나 그 집을 교육실이라 불렀다. 실제 많은 교육이 이루어졌다. 교육실에서 돌려가며 기타를 치고, 이문세나 김현식을 들었다. 때론 015B나 푸른하늘, 봄여름가을겨울을 듣기도 했다. 물론 <실로암>과 같은 복음성가도 불렀다. 교회는 인기가 많았다. 절에 다니는 애들도 교회에 왔다. 싸움하는 애들도 교회에 왔다. 노는 여자애들도 노는 남자애들도 왔고, 공부만하는 애들도 왔으며, 대체로 놀다가 간혹 공부도 하는 숨은 날라리들도 왔다.

그곳에서 그녀는 어린 주모의 역할을 했다. 우는 애들을 달랬고, 보채는 애들을 혼냈으며 까부는 애들을 조용히 시켰다. 우리는 늘 진지했다. 세상에 버려진 십대들의 청춘을 낭만적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매년 교회에서 열리는 문학의 밤은 낭만의 하이라이트였다. 교복에 넥타이를 매고 주찬양과 홍삼트리오를 부를 때면 모든 여학생들이 우리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 즈음부터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옆집 친구인 그녀가 옆집 여인으로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라고 해야겠다. 한밤중이 되면 김희애의 인기가요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 놓고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때론 그녀와 손을 잡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내 키가 십 센치만 더 컸더라면 하는 생각도 했다. 그녀는 나보다 키가 컸다. 그녀 옆에 서면 늘 까치발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편지를 쓴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들은 모두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우리들 중 거의 대부분이 그녀에게 답장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어느 누구도 그녀의 손을 잡아본 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털어놓는 게 우정의 일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편지는 늘 편안했다. 나는 늘 편지에 대고 하소연했다. 십대의 불안함과 고독함과 원인을 알 수 없는 무기력함에 대해. 그리고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그녀의 고마움에 대해.

그녀와의 편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계속 이어졌다. 물론 나만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은 게 아니었다. 내 옆의 친구도 또다른 친구도 그녀와 가끔씩 편지를 주고받았다. 때론 서로 편지의 내용에 대해 캐묻기도 했다.

어느 날. 그녀가 대학에 들어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 중 누구도 그녀의 애인은 아니었으니까. 우리들 중 누구도 그녀에게 고백한 적은 없었으니까. 고백으로 인해 점점 복잡해지는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해 우리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어쩌면 아무도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애인을 만든 것일 지도 모른다. 그녀는 우리들 중 어느 한 사람의 고백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마음에 품고 있었던 그 한 사람이 바로 나라고 모두 같은 생각을 했던 시간들.

그녀는 스무 살이 넘고 스물한 살이 되는 1월의 추운 겨울날, 이 세상을 떠났다. 교통사고였다. 마치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일처럼. 애인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 변사를 당했다고 한다. 우리는 태어나 처음으로 맞이하는 죽음의 일 앞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허둥지둥 그녀와 제대로 작별하지 못한 채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다. 아무도 마음속에서 그녀를 보내주지 않았다. 한동안 서로 연락을 안했으며 그렇게 또 시간은 흘러갔다.

그때 무언가 선뜻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사랑할 자격이 없는 거라고. 어쩌면 그게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에 대해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막연하지만 무언가 알 것도 같은 그런 어렴풋한 사랑이 잠시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_ <시와 표현>, 2016년 11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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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있는 시에 관한 짤막한 단상들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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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쓸 것인가 라는 질문은 시가 늘 거느리고 있어야 하는 화두와도 같다. 내가 쓰고 싶은 시는 영성, 숭고, 신화, 악마와 천사, 선과 악, 광기, 공동체, 도시, 문명, 미디어, 돌과 같은 주제나 소재의 것들이다. 이런 주제는 지금의 생각이지 내일이 되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때론 다른 주제어가 속속들이 추가될 것이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미래에 씌여질 내 시는 어떤 내용과 스타일일지는 나도 궁금하다. 시는 마치 운명처럼 태어나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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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와 대장장이는 ‘불의 지배자’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어떤 물질을 다른 물질로 변화시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은 ‘불’에 의해서 가능하다. 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연금술사의 능력이다. 어떤 온도에서 어떤 시간을 통해 다른 물질을 만들어내느냐가 연금술사와 대장장이의 가장 큰 관심일 것이다. 그들은 불을 잘 만지기 위해 샤먼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때론 스스로 샤먼이 되기도 한다. 불을 지배한다는 것은 영혼을 지배한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시도 연금술사가 이르려고 하는 샤먼의 지위에까지 다다르려는 욕망을 간직하고 있다. 대체 좋은 시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읽고 평가하는 시가 좋은 시일까. 좋은 시란 불가능한 가치이다. 다른 시가 있을 뿐이다. 어쩌면 시인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시인은 한 편의 시를 만들기 위해, 전혀 다른 인식의 물질을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골몰한다. 마치 불을 만지는 것처럼 언어의 온도와 시간과 기다림과 섞음과 난데없음을 오랜 경험치를 통해 실험해보는 것이다. 좋은 시인지 아닌 시인지는 시인의 몸이 즉각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시 한 편으로 뜨거워지는 몸이 된다면 시인은 벅찰 것이다. 시 한 편으로 뜨거운 몸을 갖고 싶다. 이런 시라면 매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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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돌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상상하던 때가 있었다. 가끔씩 하늘에서 돌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의 운석을 그리 생각했던 것이다. 돌은 인간과 가장 가까이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가장 오래된 물질이다. 많은 신화에서는 최초의 인간이 돌에서 나왔다고 한다. 돌이 간직한 원시의 시간성은 지금 현재에까지도 그 실물로 남아 있다. 돌에 비하면 인간의 시간은 너무나 짧다. 그렇기 때문인가. 인간은 돌에게 절을 하고, 돌로 신의 형상을 만든다. 이 돌의 상상력은 한동안 계속 내 시의 언저리를 떠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생각들이 다음과 같은 졸시를 낳기도 했다.

 

돌은 투명하다.
그 몸에는 연혁이 없다.
돌 위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돌을 욕되게 하는 것.
돌은 인간 이전의 사물.
기원을 알 수 없는 시간이다.
돌에 절을 하는 사람들.
돌 속에 병(病)의 영혼과 천사의 영혼이 깃든다 했다.
가끔씩 하늘에서 돌이 떨어졌다.
외계의 시간까지도 이승의 시간과 섞이는
무한의 돌.
그 돌로 촉(鏃)을 만들고 도끼를 만들었다.
동물을 죽여 몸을 취했고
같은 종족을 죽여 또 다른 몸을 취했다.
어머니의 뼈를 땅속에 묻고
뼈가 돌이 되어 땅 위에 솟았다.
처음은 모르나 몇 천 년이 지나면
모든 존재는 돌에서 태어난다.
돌을 던지면 울음이 들린다.
돌이 땅에 던져지면 마치 아기처럼
온몸이 땅속에 안긴다.
돌을 깨고 나온 사람들.
돌로 된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돌을 하늘에 던지면 그저
별이 된다.

 

- 졸시 「돌의 시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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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과 ‘호빗’ 시리즈는 결국 선과 악의 싸움이다. 선악의 구도에서 악한은 오로지 악한일 뿐이다. 선인의 그룹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우정’이다. 우정은 공동의 싸움에서 더욱 빛을 발하며 역경과 고난을 통해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가치는 우정인 셈이다. ‘우정’의 시가 있다면 나는 ‘우정의 시’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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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핀처 감독의 <나를 찾아줘, Gone Girl>는 사라진 아내를 찾아나서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 아내 에이미(로자먼드 파이크)는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소름 돋는 악녀이다. 에이미의 허영과 사회적 욕망과 대중에게 비치는 미디어적 욕망과 끊임없이 자기를 봐달라는 대중 노출증과 통제하지 못하는 감정선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뜨겁게 다가왔다. 소름 돋는 악녀를 이해하고 싶었다.

어쩌면 시인들은 이런 복잡하고 미련하고 위태로운 내면을 모두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 속에는 이런 복잡하고 미련하고 위태로운 것들이 다 들어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욕망과 허영과 부질없음의 극단에 내 시의 감수성이 슬쩍 가닿는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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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술자리. 삶의 변화가 없다면 시의 변화도 없다는 말을 들었다. 시의 변화를 위해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 하지만 삶의 변화를 실행해본 시인들은 모두 말린다. 자칫 삶이 시를 초라하고 궁색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인으로서의 자존을 지킬 수 있는 삶의 자리는 누구에게나 제각각 있을 것이다. 자기가 아는 그 자리를 찾으면 된다.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자리에서 매일 노을을 맞으며 시를 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내가 있어야 할 시의 자리. 시인으로서 자존을 지킬 수 있는 삶의 자리. 그 자리를 찾아 지금도 방황하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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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극찬을 믿지 못한다. 글쟁이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독약은 극찬이다. 특히 시인에게 극찬은 친분의 또다른 말일 뿐이다. 저마다 자기 언어가 살 가장 알맞은 집을 짓고 있을 뿐이다. 겸손과 열등감을 자만과 자존을 구분하지 못하고 늘 괴로워하는 정신 파탄자들. 나또한 그 파탄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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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성으로는 그 무엇도 설명할 수 없다. 지금의 이런 축축한 마음도. 마른 하늘에 눈이 내리는 이 기막힌 풍경도. 시가 무엇을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지금 이 기막힌 시간을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러기에 내 언어는 너무도 짧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내 시에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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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시라. 당신의 신발은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 그리고 당신의 펜은 모든 거짓을 알고 있다. 완벽하게 진실한 글은 이 세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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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인은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었다. 이게 모두 페이스북과 트위터 때문이다. 누구나 자발적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누구도 훔쳐보는 말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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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부과된 권리는 외로울 권리이다. 외로움을 즐기며 청승떨 권리가 시인에게는 있다. 이 권리를 오로지 지켜내고, 그 권리를 옹호할 시를 써야겠다. 외로울 권리에 대한 장전은 시에 빼곡히 들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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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노래가 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 마시라. 랩도 처음에는 노래가 아니었다. 나는 노래를 하는 것일까. 앞으로 노래가 될 말을 하는 것일까. 어떤 방식이든지 노래가 된다면 행복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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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얼거림, 짜깁기, 단상의 나열, 긴장 없는 토로, 현학적 자랑, 철학 베끼기, 상투적인 감상성 등을 시라고, 더군다나 훌륭한 시라고 말하는데 동의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아무리 유행 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라지만. 가급적 유행과는 저 먼 곳에서 이상하지만 전혀 촌스럽지 않은 옷을 입고 싶다. 그 옷을 좋아해주는 마니아들이 있다면 더욱 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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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적으로 언어에 대한 순결함을 가진 시인들을 보면 결국 오래오래 시를 쓴다. 시의 언어에 대해서는 병이 들어야 한다. 병든 시, 순결한 언어는 한낱 이상일 뿐이겠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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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앙상한 나뭇가지는 비바람과 눈보라를 기다린다. 비바람에 온몸이 흔들리고 물기를 가득 머금은 나무는 생기가 돈다. 눈보라에 휘날리고 눈을 맞아 눈꽃을 피운 나무는 아름답다. 아름다움을 시로 쓸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까지 너무 추한 것만을 찾아 다녔다. 추한 몸들만 느끼고 좋아했다. 아름다움을 느낄 나이가 된다면 시도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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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시를 쓴지 이십년이 넘어서야 겨우 김소월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내가 너무 오만했던 것일까. 평소에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김소월이 가끔씩 머릿속에서 튀어나올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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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도 근육이 있다면 그것은 어조일 것이다. 어조의 힘으로 끌고나가는 시가 있다. 유치환과 김수영이 그렇다. 어조의 힘. 힘의 어조. 배는 자꾸 나오고 근육은 자꾸 느슨해진다. 이렇게 나이 먹지는 말자. 차라리 나온 배에라도 근육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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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이 스타일을 만들 수 있을까. 반복은 주술의 힘이 아니라면 지겨울 뿐이거나 노래의 후렴일 뿐이다. 스타일은 반복을 지탱하는 질서에서 나온다. 질서가 바탕에 있어야 반복이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훈은 몇 안 되는 진정한 스타일리스트이다. 스타일리스트가 되려면 얼마나 지독해야 할까. 더 지독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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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주체에 대해서 자꾸 골몰하면 길을 잘못 들 수 있다. 주체가 목소리의 내면이라고 한다면 대부분 시인의 장난에 말려든다. 주체는 어쩔 수 없이 택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라고 치부해야 한다. 참여시나 노동시에서는 주체를 잘 얘기하지 않는다. 사회적 자아를 배면에 내세우니까. 하지만 이런 시들의 주체는 모두 제각각 다른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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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을 떠나 시를 읽기란 쉽지 않다. 시를 읽으면 자연스레 그 시인의 얼굴이 떠올려진다. 혹은 그 시인이라서 그 시를 읽을 때도 많다. 그 시인이 싫어서 시가 싫거나, 아예 시를 폄하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결국 읽어야 할 시는 읽게 되고 남을 시는 남게 된다. 누군가가 내 시를 읽었을 때 내 얼굴이 떠올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얼굴을 떠올리며 시를 읽는다 생각하면 도저히 시를 쓸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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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원 더 싼 곳을 찾기 위해 인터넷의 바다를 몇 시간 동안 헤맨다. 결제하고 나니 더 싼 곳이 보인다. 그러한 허망함. 더 싼 곳을 찾기 위해 벌이는 바보 같은 사투. 욕망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아주 저렴한 나를 발견했을 때. 꼭 그런 저렴한 시를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시가 이런 것까지 허락할까. 500원 할인을 위해 충혈된 눈이 부끄러워 시를 쳐다볼 수 없을 때가 있다. 시를 읽다가 눈이 충혈된 때가 언제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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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늘 가능성을 염두하기보다는 이상을 꿈꾸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가능성에 대한 책임은 그 누구도 지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문학은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가능성 없는 자에게 하는 덕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로 인해 당신은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시의 이상도 그럴 것이다. 문학적 가능성에 가장 적절하면서도 무책임한 답변일 것이다. 스스로 자꾸 되뇌인다. 내 시는 가능성이 있다고. 그리고 시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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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그리고 싶다. 숲을 말하고 싶다. 꽃과 열매가 가득한 숲. 밤마다 땅 밑의 전설이 얘기되는 곳. 숲의 상상이 우주를 가로질러 또다른 세상에까지 가닿는 순간을 체험하는 곳. 도란도란 사랑의 밀어가 뜨겁게 속삭이는 곳. 이 도시가 숲이 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의 공동체는 어떤 숲을 조성하고 있을까. 시는 이 지구의 숲속에서 어떤 말들을 뱉어내고 있을까. 밤이 깊다. 고민하는 밤이 깊다. 쓰는 밤이 깊다. 쓰고 싶은 말들이 허공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밤이 깊다.

 

- <시와 표현>, 2015년 5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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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계곡 라다크 투르툭에서의 이틀

 

 

 

이재훈

 

 

 

 

 

인도의 라다크는 내게 늘 관념 속에서만 머물렀던 정신적 공간이었다. 헬레나가 <오래된 미래>를 통해 소개한 공동체 낙원 라다크. 문명이 서서히 들어와 변질되어가는 히말라야 고원의 라다크. 하지만 라다크의 실체는 사회학자들이 얘기했던 현상을 느낄 수 없을 만큼 태고의 원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열흘 동안 나는 태초의 신비를 탐했다. 숨 쉬기 힘들었고,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으며, 전기는 자주 끊겼다. 많은 것들이 불편했지만 마음만은 평화로웠다. 내 마음에도 평화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곳이 라다크이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알 수 없는 평화로움이 물밀듯 밀려와서 잠깐 난감하였으나 곧 그 평화로움을 누리게 되었다.

라다크에서의 열흘 동안 가장 평화로웠던 시간은 아마도 투르툭(Turtuk) 마을에서 지냈던 이틀일 것이다. 여행의 마지막 이틀을 투르툭에서 소요하며 보냈다. 투르툭은 라다크의 주도인 레(Leh)에서 10시간 정도 걸리는 마을이다. 우리 일행은 레에서 누브라 밸리로 갔고 누브라의 훈다르 마을에서 하룻밤 캠핑을 하고 투르툭 마을로 이동했다. 투르툭 마을은 파키스탄의 국경과 마주한 지역이다. 이전에는 개방이 되지 않았던 곳인데 2010년 인도 정부가 여행 제한을 풀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 신비하고 더 원초적인 곳이었을까.

투르툭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황토물이 산처럼 굽이치는 강을 만났고, 흙과 돌로만 쌓아올려진 누런 민둥산을 끝없이 오르내렸다. 때론 작은 초원이 있는 마을을 지났고, 마을에서 밀을 수확하는 여인들과 만나기도 했다. 어딘가를 가는 길은 늘 닿는 시간보다 가는 시간이 즐겁다. 투르툭으로 가는 길에는 욕망이나 격정보다는 광막한 막막함이 더 자주 다가왔다. 그 막막함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이 막막한 풍경 속에서 시간도 잊은 채 나른하게 취하고 싶었다. 늘 취하고 싶었으나 취할 수 없는 긴장의 시간을 즐긴 것이라고 말할까.

투르툭에 도착하자 이곳은 한없이 게으를 수 있고 한없이 상상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멍 하니 바라보거나 멍 하니 앉아 있으면 되었다. 특별한 일정이나 계획 없이 이틀을 꼬박 빈둥거리며 지냈다. 투르툭은 어렸을 적 자주 갔던 외가의 마을과 닮아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는 오래된 돌계단이 있었고 돌담이 둘러쳐 있었다. 마을 전체에 키 높이의 돌담이 있었고 돌담 사이로 작은 골목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나는 그 골목길에서 자주 서성였다.

마을의 골목길 중간중간 아주 오래된 살구나무들이 많았다. 투르툭은 살구나무의 마을이었다. 작은 도랑이 흘렀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그러다 투르툭의 아이들을 만났다.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아이들은 천진난만했고 이 세상을 다 가진듯한 밝은 표정이었다. 아이들은 쓰러진 나무 기둥에 모여 앉아 낯선 외국인을 구경했다. 특히 아이들은 디지털 카메라에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다.

몇 백년이 되었을지 모르는 돌담길을 따라가다 보면 마을 아이들을 위해 만든 수영장도 있다. 물을 가두어 만든 수영장에서 수십 명의 사내 아이들이 벌거벗고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인도의 다른 지역과 다르게 이슬람 교도들이 대부분이다. 여인들은 히잡을 쓰고 다닌다. 또한 낯선 남자들에게 경계심이 강하다. 그리고 이곳 여인들은 농사일을 도맡아 한다.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짚단을 지게에 짊어지고 다니는 여인들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아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는 아주 작은 사원이 있었다. 사원을 올랐다. 돌담길을 지나 너른 흙길을 지나 나무들이 숨을 뿜어내는 작은 숲길을 지나 언덕으로 오르는 돌밭을 지나 마을의 꼭대기까지 올랐다. 돌계단을 오르고 올라 가쁜 숨을 몰아쉰 후 언덕의 꼭대기에 오르니 원시의 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쪽 너머의 산으로 강은 굽이치고 있었고 여러 겹의 산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나무들과 작은 초원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언덕 위에 앉아 한참동안 풍경에 취해 있었다. 작은 사원 안에는 명상을 하는 서양인들이 몇몇 있었다. 여행객이 아니라 구도자에 가까운 파란 눈동자의 젊은 명상가들에게서 무엇인지 모르는 자유가 느껴졌다. 자유는 자신의 외적인 모습에 신경쓰지 않는 태도에서 풍겨나오는 것임을 알았다. 나도 저런 삶을 바랐었는데 어쩌다 지금 이렇게 살고 있을까.

라다크는 바람의 계곡이다. 우리도 바람을 만났다. 작은 마을에 갑자기 불어닥치는 바람에 몸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아이들은 바람을 맞으며 바람놀이를 하고 있었다. 바람 때문에 잠시 무서웠다. 그러나 곧 평온해졌다. 도둑처럼 들이닥치는 이곳의 바람은 늘 이런 식인가보다. 골짜기에 숨어 있는 마을은 바다의 외딴 섬처럼 존재해 있다. 하지만 이런 바람을 맞아들이는 마을이다. 투르툭은 바람을 맞아들이며 스스로 가쁜 숨을 뿜어낸다. 그러다 때론 침묵한다. 마을의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보면 조잘조잘 수런거린다. 그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음악을 며칠 동안 한없이 들었다.

나는 게으름을 좋아한다. 게으름이 여행의 본질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게으름에도 격이 있다면 이곳에서의 게으름은 그럴 듯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색에도 쾌락이 있다면, 사색을 유희할 수 있다면 트르툭에서는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도시에서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허무의 관념들이 이곳에서는 한 번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 나는 며칠만 머무른 나그네일 뿐이다. 길손이 되어 그들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간 존재일 뿐이다.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 여행객은 그들의 모습과 풍경 속에서 많은 것을 담아간다. 그들은 나를 통해 무얼 생각했을까. 트루툭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 삶의 속도대로 산다. 그렇게 오래오래 그들의 속도대로 천천히 소요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쏟아질 듯한 별을 보며 누워 있던 트루툭의 밤이 아련하게 그립다.

_ <대전평생교육>, 2015년 1~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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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원시의 시간, 라다크(Ladakh)

 

 

 

이재훈

 

 

 

 

 

모르는 시간

 

풍경은 시간을 앞선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풍경은 이전의 기억을 지워버린다. 마치 구름처럼 하늘과 지상의 일을 슬쩍 가리고 무감하게 한다. 내게는 라다크로 가는 하늘 위가 그랬다.

값싼 여행을 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비행기를 갈아타는 것이다. 우리는 배고픈 여행객들이었다. 서울에서 홍콩으로, 홍콩에서 델리로, 델리에서 다시 라다크의 주도인 레(Leh)로 이동하는 경로였다. 하지만 델리에서 이미 지쳐있었다. 비행기를 타는 시간만큼 환승 시간도 길었다. 인천공항에서부터 꼬박 하루를 견뎠다. 델리에서 라다크로 가는 비행기를 탄 시간은 다음날 아침이 밝기 전이었다.





라다크로 가는 하늘 위에서 여명이 밝아 왔다. 피곤에 지쳐 눈꺼풀이 반쯤 감겨 있을 때였다. 그날의 첫 햇살이 눈가를 살살 간질였다. 눈을 뜨니 저 멀리 구름에 살짝 걸린 햇귀가 보였다. “죽인다.” 그 말밖에는 할 수 없는 일출 장면이었다. 노랗게 익은 햇살이었다. 햇살 아래로 양털 구름이 양탄자처럼 깔려 있었다. 하늘과 구름이 풍경의 전부였다. 그러다 이내 강렬한 빛이 창안으로 쏘아들었다. 창밖을 볼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이었다. 온 얼굴이 아침햇살로 뜨끈했다. 기내식 커피를 한 잔 하고 나니 햇살은 수그러들었다. 구름과 파란 하늘만이 모든 풍경을 감쌌다. 햇살은 어느새 저 하늘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아침이 찬란하게 푸르렀다. 도시에서 보았던 수직과 직선의 완고함이 이 높은 하늘에서는 무력했다. 선이 아닌 면으로 뒤덮인 구름과 하늘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러다 비행기가 낮게 깔리며 내려갔다. 산맥이 나타났다. 눈을 이고 있는 산봉우리가 서로를 맞잡고 있었다. 저 밑이 바로 히말라야다. 낮게 비행하며 바라보는 산맥은 장관이었다.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키를 재듯 머리를 내밀었다. 산맥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다른 산맥의 몸에 길게 드리워졌다. 그런 그림자들은 서로의 산맥에 검은 덧칠을 하며 묘한 명암을 만들어냈다. 힘차면서 부드럽게 감싸는 그림자가 긴장하듯 햇살의 몸에 담겨 있었다. 원시의 경이가 있다면 이런 순간일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가 저 밑의 산맥을 달리고 휘돌아가면서 울렁울렁했다는 것을. 저 원시의 시간들. 내가 모르는 시간들 앞에 설 생각에 마음이 달떴다. 자꾸만 숨이 가빠왔다.



 

오래된 사원


라다크에서 가장 먼저 둘러본 곳은 레 근처에 있는 사원들이었다. 헤미스(Hemis), 틱세(Thiksey), 쉐이(Shey), 스톡(Stock) 사원들을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라다크는 티벳 불교를 믿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인도의 힌두인들과 다르게 라다크는 대부분 불교인들이다. 라다크의 곰파들은 모두 몇 천 년 전의 건물처럼 오래돼 보였다. 돌을 쌓고 진흙을 비비고 발라 만든 사원들은 히말라야의 고원에서도 몇 백 년을 견뎠다. 대부분의 곰파는 그 지역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졌다. 그렇기에 곰파에 가기 위해서는 늘 올라야 한다. 마치 하늘 위로 오르는 것처럼. 모든 계단과 길들이 하늘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사원의 곳곳에는 낮잠을 자는 개들이 유독 많았다. 이곳에서 개는 아무도 소유하려 하지 않는 가장 미천한 동물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향불을 피우고 식사를 준비하는 어린 스님들의 모습은 진지하면서도 천진했다.





석양이 지는 어스름. 사원으로 전해지는 사양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저물어간다는 것은 쓸쓸하거나 때론 아름다운 일인데, 이곳에서는 성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저물어가는 사양은 대지와 숲이 아니어도 근원을 향할 수 있었다. 사원으로 오르느라 지친 얼굴에 저문 햇살의 감촉이 다가왔다. 서서히 누그러지고 넘어져가는 석양을 마음에 담느라 일행들은 모두 저마다의 시간 속에 홀로 서 있었다. 햇살이 수직에서 사선으로 제 몸을 허물다가 스스로 스러지는 일. 매일 가장 꼭대기에서부터 가장 아래로의 소멸을 겪는 일. 우리는 스러질 때에야 비로소 평온해진다. 스러지고 소멸될 즈음에야 평온해진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실로 오랜만에 저물어가는 일의 감동과 흐뭇함을 천천히 음미했다. 이곳에서의 모든 소멸에게 온 맘으로 경이를 보내고 싶었다.

나는 어쩌면 몇 천 년 전의 사람들과 만나고 온 것인지도 모른다. 먼 기억을 소환하는 공간에 열흘 동안 있다 온 셈이다. 작은 도랑물 소리. 바람이 발바닥을 간질이는 나긋함. 마당을 쓰는 빗질 소리. 멀리서 들리는 야크의 울음. 옆 호텔에서 두런거리는 이방의 방언들. 나는 먼 기억으로부터 왔다. 저 우주의 행성에서 지구의 어느 땅을 밟는다면 가장 먼저 이곳을 밟으리라.

 




느림

 

레에 도착해 우리는 숙소에서 하루를 온전히 쉬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거나 소요했다. 고산증 때문이다. 어지러웠고 메스꺼웠고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렇기에 느릴 수밖에 없다. 방심하여 조금이라도 뛰면 곧바로 머리가 아프고 뒷목이 당기고 어지럽고 숨이 가빴다. 느리게 걷고 느리게 말하고 느리게 움직이기. 그것이 라다크에 적응하는 첫 번째 일이다. 세수를 할 때도 느릿하게 얼굴 한 번 문지르고 숨 한 번 쉬어야 한다. 몸을 씻을 때도 느릿하게 물 한 번 끼얹고 숨 한 번 크게 쉬고 비누칠 한 번 하고 숨 한 번 쉬어야 한다. 말도 천천히, 걷는 것도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것도 천천히. 천천히 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온몸으로 느꼈다. 마치 슬로우비디오를 찍는 것처럼. 생각해보면 내 말과 움직임이 그동안 얼마나 빨랐던 것일까. 빠르게 움직이는 몸의 감각들을 느린 감각으로 되돌려놓기. 그 느림의 시간들이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라다크에서는 이렇게 오래도록 생각할 수 있는 몸을 저절로 만들게 된다. 밤에는 옥상에 올라 오래도록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최초의 시간

 

판공초(Pangong Tso)는 해발 4,350미터에 위치한 가장 높은 소금호수이다. 판공초는 마법의 호수라는 뜻이다. 이 높은 곳에 염호가 있다는 사실은 믿기지 않는다. 판공초는 빙하기 시대 대륙의 판들이 솟아오르고 히말라야가 융기하면서 바닷물이 높은 곳에 고여 그대로 호수가 되었다. 소금호수이기 때문에 이곳에는 갈매기가 날아다닌다. 판공초는 인도와 티벳에 걸쳐져 130km나 뻗어 있는 어마하게 큰 호수이다. 우리가 본 곳은 그 일부분일 뿐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도 영화 <세 얼간이>의 끝부분에 판공초가 배경이 되기도 한다. 보통은 기대를 많이 하면 실망을 하기 마련인데, 판공초는 기대 이상이었다.





레에서 판공초로 가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고개 창 라(Chang La)를 넘어야 한다. 창 라는 5,360미터이다. 레에서 점심 도시락을 싸들고 온종일 히말라야의 가장 높은 곳을 넘고 북쪽으로 달려야 닿는 곳이 판공초이다.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물은 얼음처럼 차갑고 공기는 더욱 희박해져 갔다. 빙하가 흘러내리는 물에 잠시 발을 담그고 저 먼 시간의 흔적을 생각하기도 했다.

판공초의 끝 언저리에 닿자 긴장했던 모든 마음이 허물어지고 에머랄드빛 호수의 색깔에 눈이 멀어 버렸다. 그저 마음을 풀어 놓고 누워 있고 싶었다. 저 호수 가까이에 가서 바람을 맘껏 쐬고 싶었다. 멍하니 넋 놓고 한참 앉아보고 싶은 곳. 내게는 그러한 장소가 또하나 생긴 것이다.





원하는 마음이 아무 것도 들지 않는 곳이었다. 혹시라도 소리 지르면 죄를 짓는 것 같은 곳이었다. 그립다는 말이 소용없는 곳이었으며 자꾸만 침묵 속으로 잦아들어가는 곳이었다. 나도 모르게 원시의 기억을 하나씩 헤집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각자 물과 바람과 시간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 시간이 무엇을 주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오래도록 그 시간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어둠이 깔리자 추위가 몰려들었다. 해발 4천 미터가 넘는 곳의 호수바람은 매서운 겨울바람보다 더 사나웠다. 8월의 여름이었지만 판공초의 밤은 겨울이었다. 준비해간 겨울점퍼를 입고 달을 보았고, 장작불을 피웠다. 이전의 기억은 자꾸만 스러져갔고 추위는 점점 더 몰려왔다. 어쩌면 이곳에서 만나 함께 불을 쬐고 있는 록산과 우리는 몇 천 년 전 이곳에서 만났을 지도 모른다.

 

 

동지들

 

생각하면 열흘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먼저 동행했던 여행 동지들. 어쩌다 저쩌다 이러다 저러다 만나게 되었다. 세상에 계획된 일은 늘 계획과는 무관하게 흘러가게 되며 우연한 인연이 동지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세상에 천재시인은 많지만 그중 천재시인이자 여행전문작가인 김선생. 혼자 떠나는 여행의 달인이며 외국인들의 이성적 로망인 신시인. 늘 감동할 줄 아는 화가이자 시적 감성이 넘쳐흐르는 송작가. 인도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믿기지 않았지만 이십대 꽃청춘이었던 현지 라다키 가이드 록산. 이들은 모두 지극했다. 김선생은 피곤에 쩐 몸을 일으켜 매일 짜이를 타주며 일행의 정신적 위로자가 되어주었다. 신시인은 말할 줄 모르는 동지를 위해 통역을 도맡아 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할애했다. 신시인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행 고아가 됐을지도 모른다. 송작가는 우리에게 꾸밈없는 웃음을 주었다. 순간순간 많이도 웃었다. 송작가는 카메라 없이 여행지를 모두 그림으로 담는 예술혼을 보여주었다. 록산은 잘 생기고 건실하고 순수한 청년이었다. 록산의 희망은 한국을 여행하는 것이라 했다. 꼭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나의 별칭은 ‘동바’였다. 동네바보라는 뜻이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실실 웃으며 때론 투정도 하며 따라다니는 동바로 살았다.





라다크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 라다키인들과 인도인들과 때때로 만난 서양인들. 곰파에서 만나 우리를 거처로까지 초대했던 노스님과 어린 승려들. 누브라계곡의 훈더르, 투르툭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에 대해 어떻다고 말할 처지는 아니다. 잠시 여행지에서 스쳤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시 스친 인연이지만 그들의 웃음과 표정과 냄새와 그 배경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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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

 

니체는 알프스 산맥 깊숙이 있는 호숫가에서 영겁회귀의 사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때 쓴 문장은 한 줄이었다. “사람과 시간의 저쪽 6천 피트”. 이 한 줄의 문장이 영원회귀의 철학을 낳았던 것이다. 시간은 어떤 풍경과 만나 철학으로 남고, 때로는 한 편의 시로 남는다.

모든 기억은 허전함만을 남긴다. 라다크에서의 열흘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기억이 어떤 형상으로 남을까. 지금 여기에서 보면 그 형상이 다소 비현실적인 환상과도 같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들의 진실은 고이 박제될 것이다. 나는 어떤 한 줄의 문장을 쓰고 왔을까. 어떤 한 편의 시를 쓰고 왔을까. 아직 모르겠다. 앞으로 열흘 동안의 라다크를 좀 더 생각한 후에 단 한 줄의 문장이 나올 것이다. 좀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한 편의 시가 써질 지도 모르겠다.


_ <시인동네>, 2014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

자전 에세이

 

 

 

내가 꾼 꿈은 사실 꿈이 아니었네

 

 

 

이재훈

 

 

 

 

 

 

범꿈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내 태몽은 호랑이 꿈이었다. 어머니는 가끔씩 고개를 갸우뚱거리시며 지금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내 태몽을 얘기하셨다. 정말 생생하게 꾸었어. 지금도 호랑이가 내 앞에 떡 하고 서 있는 것 같아. 바늘처럼 꼿꼿하게 선 황금빛 털. 온 땅이 울리는 듯한 숨소리. 아직도 생생해. 꿈속의 어머니는 밭을 매고 계셨다. 신혼의 새댁이라 알록달록하게 수놓은 화려한 한복을 입고 계셨다. 그런데 갑자기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며 내려오더니 어머니 앞에 떡 하고 나타났다. 어머니는 놀라서 허겁지겁 도망을 쳤지만 금세 호랑이는 어머니 얼굴 앞에 다시 섰다. 그러곤 어머니 치맛자락을 물고는 놔주지 않는 것이다. 호랑이는 고깔밑까지 얼굴을 파묻고 어머니를 떠나지 않았다. 잠이 깬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태몽인 걸 아셨다. 어머니는 그전에 유산한 경험이 있었다. 이번에는 아기가 뱃속에서 떨어지지 않고 잘 들어서겠구나고 생각하셨다.

나를 잉태하고 실제로 어머니는 호랑이를 만났다고 했다. 믿기 힘든 얘기다. 하지만 어머니는 정말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부재중이셨다. 아버지께서 확신하신 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잠시 가족을 떠나 있었다. 강원도 산골은 긴 겨울밤을 홀로 보내기엔 너무 적막한 공간이었다.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시다가 까무룩 잠이 드셨을 것이다. 자정 무렵.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방문 앞에서 멈추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문을 꼭 잠갔다. 두려웠다. 만삭의 배를 한 번 더 쓸어보고는 두 손으로 꼭 안으셨다. 날이 이슥하도록 호랑이는 집을 뱅뱅 돌았다. 온 대지가 밤새 울렸다. 그때 어머니는 보았다. 방문 틈으로 숨죽여 밖을 살펴보았을 때. 호랑이의 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무섭게 빛났다. 더 오래 볼 수 없어서 이내 방문을 닫고 밤새 호랑이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해가 밝았다. 호랑이는 가버렸다. 집 주위엔 호랑이가 남긴 발자국이 가득했다. 발자국 하나가 사람 얼굴 만 하다고 했다.

다소 과장이 섞인 이야기겠지만 어머니는 겨울밤에 만났던 그 짐승이 호랑이라고 굳게 믿고 계셨다. 담이 없는 산 밑의 외딴 시골집에는 짐승들이 자주 출몰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호랑이가 가끔씩 출몰한다는 소문도 수근거렸으리라. 1972년의 일이다.

이것은 어떤 사건일까. 운명이라고 하기엔 호랑이가 내 형상이나 기질과 맞지 않고, 우연이라고 하기엔 마치 신탁처럼 너무 생생하다.

나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주문리(일명 모운동)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하동면이 김삿갓면으로 개명되었다. 내 태어난 곳 근처에 김삿갓의 무덤이 있다. 지명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모운동’은 구름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이다. ‘모운동’은 구름처럼 떠돌며 살다간 김삿갓(난고 김병연)을 이곳으로 다시 오게 했다. 한때는 산속의 석탄을 캐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던 곳이다. 지금은 노인들만 남아 있는 고요한 마을이 되었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운명인 걸까. 나 또한 이십대까지 구름처럼 전국을 떠돌며 살았고, 김삿갓처럼 시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김삿갓의 혼이 담긴 곳과 가장 가까이에서 태어난 시인인 셈이다.

 

 

겨울

 

내 유년의 겨울은 유독 길었다. 강원도를 두루 다니며 살았던 덕이다. 나는 겨울에 태어난 겨울 아이다. 내 감각이 가장 예민하게 기억하는 계절 또한 겨울이다. 찬바람이 불어야 비로소 나는 모든 것들이 예민하게 감각된다. 찬바람이 콧속으로 들어와 온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이 들 때야 비로소 나를 느낀다. 늦가을부터 시작되는 찬기와의 만남은 날 설레게 한다.

강원도의 산골은 일 년의 반이 겨울이나 다름없다. 여름이 지나면 곧바로 김장이 시작된다. 그리곤 긴 겨울이 시작된다. 어느 겨울엔 자고 일어나니 온 세계가 전부 눈으로 덮인 날도 있었다. 방문을 여니 흰 눈이 너무 눈부셔 눈을 뜰 수 없었다. 내가 디딤돌을 밟고 올라타야 오를 수 있는 마루에까지 눈은 차올라 있었다. 어느 곳이 마루이고 마당이고 대문인지, 어느 곳이 길이고 도랑이고 담벼락인지 모를 정도로 온 세상이 눈으로 가득했다.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다. 자동으로 방학이 되어 그날부터 학교엔 가지 못했다.

군인들은 그날부터 마을로 모두 나와 눈을 치웠다. 우리 꼬맹이들은 터널을 만들고 이글루를 만들어 놀았다. 손과 발에 동상이 걸리도록 놀았다. 그때 우리들은 누구나 동상 한번쯤은 걸렸다. 저녁나절엔 친구의 아버지가 우리집에 고기를 가져다 주셨다. 친구의 아버지는 육군 중사였다. 그 고기는 오늘 잡은 멧돼지라고 했다. 나는 멧돼지 고기를 그날 처음 먹어 보았다. 아, 멧돼지, 토끼, 꿩, 사슴, 개구리, 그리고 온갖 민물고기 등을 그때 다 먹었었다. 아쉽게도 그 맛을 지금 다 기억하지 못한다.

잊지 못할 유년의 죽음이 있었다. 당시 내가 사랑했던 강아지의 죽음이다. 강아지의 이름은 물론 메리였다. 강아지라면 누구나 이름이 메리였던 시절이었다. 메리는 한겨울에 얼어 죽었다. 그것이 병인지 동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에 일어나 메리집으로 가보니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 내가 부엌으로 옮겨놨어야 했는데 하는 심한 죄책감이 일었다.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한겨울에 내복만 입고 개집 주위를 한참이나 서성였다. 나중 아버지와 함께 파묻어 주었다. 우리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강아지의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강아지의 주검은 옷으로 잘 감싸서 땅을 파고 묻었다. 작은 봉분도 만들었고 그 위에 십자가도 세워주었다. 이 절차는 모두 내가 집행했다. 아버지는 묵묵히 지켜보고만 계셨다. 내가 다른 영혼을 위해 가장 간절히 기도할 수 있다는 걸 아마 그때 깨닫지 않았을까. 이별의 아픔은 다른 사랑으로 회복되듯이 곧 나는 다른 강아지를 들여 그 아픔을 회복하였다. 강아지와 함께 골목에서 골목으로 마을 어귀에서부터 강가에 이르기까지 뛰어다니면 행복했다.

 

 

편식

 

언제부터인가 편식이 시작되었다. 우유도 맛이 없었고 고기도, 멸치도, 콩도, 달걀도. 세상에 어린이들에게 몸에 좋다는 음식은 모두 맛이 없었다. 그때 맛있었던 음식은 라면과 김 정도. 우유나 삶은 달걀 흰자를 먹다 토하기도 했다. 돼지고기는 입안에 넣자마자 몰래 뱉어내었다. 우유와 달걀에 대한 거부감은 거의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 밥도 맛이 없어서 라면 스프나 설탕에 비벼먹기도 했다. 어떤 날은 밥을 남기면 혼날까봐 엄마 몰래 땅속에 밥을 파묻기도 했다.

친구들은 냇가에서 피라미를 잡아 그 자리에서 배를 따고 씹어 먹었다. 어른들 흉내를 내느라 된장을 가져와 피라미와 마늘쫑을 함께 찍어 먹기도 했다. 나도 따라 했다. 아무리 맛이 없어도 친구들이 하는 건 따라 했다. 동산에 가서 오디를 따먹기도 했다. 혓바닥과 이빨이 새까매지도록 오디를 따먹고 주전자에 한 가득씩 담아 왔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어린 시절 먹었던 대부분은 가장 천연의 자연식인 것이다. 아직 오염되지 않은 강원도 산골에서 냇물과 공기와 자연의 모든 것들을 먹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편식 때문에 키가 크지 않고 점점 말라갔다.

 

 

편지

 

이사를 자주 다녔다. 전학을 가면 낯선 환경과 친구들과 적응을 해야 했다. 친구들이 못살게 굴기도 하고 놀리기도 했다. 나는 얼굴이 하얀 편이어서 대부분의 친구들이 도시에서 전학을 온 것으로 오해했다. 전학 오는 학생이 흔치 않은 때였다. 한 학년에 한 반이거나 두 반이 전부였던 학교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전학생을 구경하러 왔다. 전학 선물로 받아온 내 자석필통이나 샤프펜슬, 공책을 구경하기도 했다. 엄마가 입혀주신 새 옷에 흙을 칠하거나 운동화를 밟기도 했다.

전학을 자주 다니니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나는 그곳의 친구들과는 다르고 영원히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이방인이라는 경계 위에서 위태롭게 관계를 유지하다가 마음에 맞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이상하게 그런 복은 있는 것이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보지는 못했지만 늘 친구들은 내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친구들이 생겨서 친해지고 서로 손을 맞잡으며 어깨를 부딪칠 무렵 또 전학을 가야 했다.

편지를 썼다. 이곳에 오면 저곳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며 그리워하는 것이 취미가 되어 버렸다. 편지쓰기는 고등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종이에도 쓰고, 화장지에도 쓰고, 잘 말린 은행잎에도 썼다. 사진도 보내고, 낙엽도 보내고, 그림도 그려 보내고,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도 보냈다. 어쩌면 내 문학의 출발은 편지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대학 때까지 주고받았던 그 수많던 편지들은 나중 어머니에 의해 불에 태워져 없어진다. 그 사실을 나중에 안 나는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며칠 동안 잠이 안 올 정도였다.

 

 

서재

 

초등학교때 나는 <새벗>이라는 잡지를 정기구독 했다. 아버지는 월부 책장사들에게 최우수 고객이었다. 아버지는 책에서만큼은 금방 현혹되어 신청서에 사인을 하셨다. 어머니는 무척 스트레스를 받으셨다. 빠듯한 살림 때문에 월부책을 더 이상 들여 놓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새벗>보다는 <어깨동무>나 <새소년>을 더 좋아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어깨동무>나 <새소년>에는 만화가 있었으니까. 송년호나 신년호 잡지는 그야말로 놓칠 수 없었다. 만화만 있는 특별호가 따로 나왔으며 각종 선물이 즐비했다. 내 생일이나 성탄절 선물은 물론 <어깨동무>나 <새소년>이었다. <어깨동무>의 발행인이 육영수 여사였으며 육영수가 죽자 박근혜와 육영재단이 발행인이었다는 것은 아주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신학책들과 각종 월부책들로 가득했다. 나는 가끔씩 그 서재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퀴퀴한 곰팡내가 나는 시골집 한 켠의 서재. 이 서재만 없었다면 이 방은 내 방이 되거나 우리 형제들의 방이 되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의미도 내용도 모르는 서적들을 암호 해독하듯 읽었다. 어린이 동화전집은 읽지 않았다. 재미가 없었다. 기억나는 책들로는 삼성출판사간 한국현대문학전집, 까뮈 문학전집, 보들레르 시집 등이었다. 70권짜리 세로쓰기판 한국현대문학전집은 내가 한동안 가지고 있다가 최근 동생네 집으로 분양되었다.

 

 

데미안

 

중학교 때까지 교회와 집과 학교가 내 세계의 전부였다. 집에서는 비교적 말 잘 듣는 장남이었고 교회에서는 신실한 배냇교인이었다. 학교에서도 말썽 안 부리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또래보다 조숙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 학생이기도 했다. 하지만 교회와 집 이외의 다른 세계를 경험한 친구들의 사정에 둔감했으며, 그곳의 일들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사춘기가 늦게 찾아 왔다. 남들보다 늦은 사춘기 때문에 당황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실존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신앙에 대한 회의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내 인식을 뒤덮었다. 태어나서 내 스스로 선택한 길은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의 아들로 태어나 누군가의 아들로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길을 찾고 싶었다.

부모님은 다시 먼 곳으로의 이주를 결정하셨다. 이번에는 충청도였다. 나는 혼자 남겠다고 선언하듯 얘기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나는 혼자 남게 되었다. 남아 있는 고등학교 생활 동안 자취를 했다. 그때부터 내 인생은 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학교와 교회를 벗어난 경계 바깥의 학생으로 조금씩 변해갔다. 이탈된 자가 되어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고 산 자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 세상엔 피 묻은 상처를 어쩌지 못해 들고 다니는 이탈자들과 나처럼 스스로 선택한 이탈자들이 많았다. 개중엔 간혹 건강한 이탈자들도 있었다. 나는 다른 세계의 이곳저곳을 엿보았고, 때론 함께 살았다. 함께 산다는 것의 즐거움과 어려움을 느꼈으며, 성숙하지 못한 다짐의 결말을 많이 맛보았다.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너무 놀랐다. 소설 속의 싱클레어가 바로 나였으니까. 그리고 머지않아 소설 속의 데미안도 나였으니까.

선언하듯 대학을 포기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친구들은 대학으로, 업소로, 재수학원으로 도피하듯 들어갔다. 그때 내 눈에는 명문대에 입학한 친구들도 꼭 도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갖은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마음이 동하면 그날로 처음 가보는 남쪽행 기차를 탔다. 사람살이의 모든 게 우스웠다. 그런 시절이었다. 그만큼 꽤나 지쳐 있었다.

나를 위로한 것은 예상치 않게도 문학이었다. 갑자기 내 삶에 문학이 확 끼어들었다. 일이 없는 날은 용산도서관을 매일 들락거렸다. 주로 소설과 사상서, 문예지를 읽었다. 헤르만 헤세와 프란츠 카프카를 신봉하게 되었다. 앙드레 지드는 취향은 아니었지만 매력적이었고, 보들레르나 랭보를 읽으며 미친 인간들의 미학을 엿보았다. 손창섭과 이승우에 감복했다. 이승우는 지금도 내가 최고로 치는 한국작가이다. 그 외 셀 수 없이 많은 작가들, 시인들, 사상가들과 만났다. 만났다 헤어지고, 잊히다 다시 만났다. 그때부터 돈이 생기면 각 출판사의 시인선을 모으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시인선의 시집들을 구하게 되었다. 순례하듯 헌책방을 다니며 모았고, 읽었다.

 

 

시인

 

부모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뒤늦은 나이에 대학을 가게 되었다. 간신히 턱걸이로 부모님이 계시는 지방에 신설된 대학에 입학했다. 국문학을 전공했다. 1학년 때에는 적응을 못해 학교에 결석하다시피 했다. 학교보다 서울을 더 자주 들락거렸다. 다행히 교양과목이 많아 학번 동기들이 대리출석을 해주었다. 새로 생긴 대학이라 교수님들의 열정이 대단했다. 1학년을 마치고 도피하듯 군대에 방위병으로 입대했다.

입소하기 이틀 전, 소꿉친구의 부고가 날라왔다. 예기치 않은 일이었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자동차가 눈길에 미끄러진 교통사고였다. 그 친구는 우리들이 모두 위로받고자 하는 만인의 여자친구였다. 힘들 때 늘 누나처럼 위로하였으며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다. 도저히 친구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 마음을 고스란히 안은 채 군대에 입소했다.

군대 복무를 마친 후 복학했다. 누구나 그렇듯 나의 짧은 군대이야기는 장편소설로 써도 모자랄 것이므로 넘어가기로 한다.

뒤늦게 열병을 앓듯 시를 썼다. 다행히 문학이 전공이었으므로 재미있었다. <시심문학회>의 회장이 되었다. 여러 곳을 오가며 시 쓰는 티를 냈고, 시 앞에서만큼은 수줍은 성격이 열정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각종 신춘문예와 문예지에 응모를 했다. 어쩌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시밖에 없었던 시절. 연애하면서 당신은 시가 좋아요? 내가 좋아요? 라는 질문을 받던 시절.

운이 좋았을 것이다. 대학 4학년이 시작되기 전 겨울방학. <현대시>에서 당선 통보가 날라 왔다. 친구의 자취방에서 며칠을 묵었던 탓에 내게 연락이 안 되었다고 한다. 잡지사 편집자는 하소연을 했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었느냐고. 죄송합니다. 삐삐의 배터리가 다 달아서요. 당시 내 무선호출기 번호는 012-405-4329였다. 당선작은 「수선화」 외 4편.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시인이 되었다. 이건 허구가 아니다.

 

 

시의 삶

 

대학 졸업 후 다시 서울로 상경하여 대학원에 입학했다. 시의 삶을 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더 하기로 했다. 또다시 고달픈 사람살이의 연속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견딜 만했다. 시의 삶이며 시인의 삶이니까.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다들 아시는 바와 같다. 내 연보에 대충 나오는 얘기들이니까. 시와 함께 하는 고통스러운 행복을 지금까지도 누리고 있다.


_ <현대시>, 2014년 5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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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처럼 오련하게 사레들리네

 

 

 

이재훈

 

 

 

 

정말 오랜만에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닌 줄 알면서도 이 어쩔 수 없음이 제 마음을 다시 붙잡습니다. 늘 당신에게 나는 막무가내의 고집쟁이로 비춰졌겠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당신이 나를 만난 이후로 활짝 웃는 날보다 우울했던 날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저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기보다는 늘 각을 세우고 칼 같은 말들을 내뱉던 시절 말입니다. 문학을 한다는 이유로 한없이 유치하고 철없이 굴었던 시간들이었죠. 하지만 그때도 알고 있었어요. 당신과 내가 얼마 후면 이별할 수도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마 당신이 아니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시작하기도 전에 다 보일 때가 있습니다. 다 보인다고 믿고 있는 자신의 마음처럼 서글픈 일은 없죠. 사랑은 제게 화두와 같은 것입니다. 다른 관념의 외피를 입을 때조차도, 사랑의 일을 돌보는 것은 제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어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럴 때 내 영혼의 한계를 발견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게 사랑의 일이라지만, 너무 어렵고 힘이 듭니다.

쓸쓸함을 사랑하는 건 나 자신을 사랑하려고 하는 노력의 하나입니다. 쓸쓸함도 지금 내 모습의 일부이니까. 그때 나는 어떤 꿈이 있었을까요.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막무가내로 바랐던 꿈이었습니다. 당신은 내게 이런 말도 했었죠. “시가 좋아요? 내가 좋아요?” 그건 범주가 다른 문제라고 말했지만, 당신이 내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어쩌면 사랑을 잘 몰랐던 겁니다. 에릭 프롬이나 구약의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만이 사랑인 줄 알았던 겁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며, 살아가는 일이며, 함께 옆에서 호흡하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거죠. 내 꿈이 시인이었기에, 자주 시의 동력을 얻기 위해 숨어버렸습니다. 사람살이가 모두 달라서 달팽이의 칩거가 꿈인 자도 있죠. 나는 그때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그때 바라보려 하지 않고 숨어버리려고 했으니까요. 마음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과 같아서, 파릇파릇 당신이 지금 돋아납니다.

아무 것도 몰랐던 시절이라고 하겠습니다. 늘 변죽만 울리다가, 자기비하에 빠지는 편지만 썼던 시절입니다.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은 꼭꼭 숨겨두었던 시절입니다. 그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촌스러운 거라고 생각한 내가 참 한심합니다. 참 소심했습니다. 자꾸만 삶이 어떤 힘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에 대해 두려웠습니다. 일반의 구속과 다른 사랑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빨리 늙고 싶었던 듯도 합니다. 내 마음의 원함이 늘 그런 식이었습니다.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내게 당신은 위로였습니다. 늘 가장 먼저인 시간에 당신이 있었습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로 아플 때도 먼저 당신이 떠올랐습니다. 바깥의 바람을 맞고 들어와 헝클어진 머리와 차가워진 몸을 당신의 기억으로 덥혔습니다. 날 방치하고, 몰아세우고, 핍박하던 시간들. 당신을 만난 것은 작은 우연으로 시작되었지만, 당신을 만난 게 우연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 이후로 꽤 오랫동안 궁핍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기도 했죠. 순정이란 것을 당신으로 인해 알았습니다. 늘 수동적이었던 나. 사람의 이성과 감정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일 때 비로소 제 것이 된다는 걸 왜 몰랐을까요. 당신을 통해 어떤 의미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바퀴의 절망과 환희를 돌아 결국 제자리에 서 있을 때, 언제부터 혼자 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누군가 기댈 어깨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언젠가부터 혼자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아마, 당신을 시작으로 천천히 성숙되어갔나 봅니다.

당신이 나를 만나 큰 것들을 버렸다고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그때 당신은 용기를 가진 자였습니다. 나는 무엇을 버렸을까요. 늘 망설였던 것 같아요. 이건 모두 당신을 실패할까봐 두려워서겠죠. 당신을 오래오래 봐야겠다는 설익은 마음으로 그랬을지도. 늘 말줄임표로 끝이 나는 당신에 대한 생각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잊으려했네, 내 가슴에 철쭉마냥 흐드러진 분홍빛 시간을, 저어기 삶의 저쪽에 띄우려했네, 흘러가면 그만이겠지, 한 세월 넘어 河口에 닿으면 분홍으로 물든 물빛, 그 빛깔 기억하면 되겠지, 그의 집 앞, 옷가슴, 덕적덕적 낀 욕망을, 백수광부처럼 노래하며 떠나 보내려했네, 그러나, 내 가슴 아직 고여 있네, 썩으면 어떡하나, 물가로만 빙빙 도는, 내 속 수면 위에 떠서 자맥질하는······ 그 철쭉 그만 삼켜버렸네, 어떡하나 내 사랑, 도근도근 내 사랑, 나 몰랐네, 빛 좋은 철쭉, 먹으면 죽는다는 전설을, 아아 사레들리네, 꿈처럼 오련하게, 사레들리네

― 「강」 전문

 

나에게 사랑시는 없습니다. 사랑으로 가는 길목의 지난함만이 있을 뿐. 사랑이라고, 첫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사레들릴 것 같습니다. 철쭉은 아름다운 꽃이지만 먹어서는 안 되는 꽃입니다. 철쭉의 운명과 분홍 빛깔의 아름다움이 내 사랑의 이미지입니다. 먹으면 죽는다는 전설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사랑을 꿈꾸었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네요. 다만 당신의 빛깔과 생각하면 떠오르는 맛과 자꾸 사레들어 고개를 돌려야했던 풍경만이 선명합니다.

사실 내게는 당신이 참 낯선 경우였습니다. 애매함의 경계 위에서 위태위태하게 걷고 있는 시간들이. 터무니없이 허둥댔던 그 긴 밤의 시간들이. 바보처럼, 답답하게, 깊은 망설임의 안개 속에서 앞을 못보고 발걸음치던 시간들이. 다만, 조금 늦거나, 조금 빨랐을 뿐이라고 자위했습니다. 당신 눈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보였다고 했죠. 당신을 보면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한 아련함과 불편함 때문에 복잡한 심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내게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이었죠. 그런 게 바보 같았나요? 지금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요.

당신을 만나겠다는 미련한 생각은 안하기로 했습니다. 이제 당신을 볼 수 없지만, 그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봄철 아지랑이 올라오는 긴 흙길을 함께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란히 걷지 못하고, 손 잡아주지 못하고 자꾸 뒤만 돌아보았던 그때. 그 시간이 있음으로 사랑을 조금 엿보았던 것 같습니다. 부디, 행복하기만을 기도하겠습니다.

재훈

 

_ 출처 바로가기 : <어쩌다 당신이 좋아서 - 내 생애 최고의 '사랑 고백'을 꿈꾸는 그대에게>, 곰, 2013, 14,000원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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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 사전 - 잎

산문 2013. 12. 11. 13:10

 

 

 

이재훈

 

 

 

 

버려진 것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쓸쓸한 존재들이 스멀스멀 꿈틀거린다. 허물어지고 홀로된 존재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서럽게 아름답다. 이런 아름다움은 사람에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잎은 아름답다. 잎이 더 아름다우려면 버려져야 한다. 버려진 것들의 아름다움을 잎이 가장 완벽하게 증거한다.

잎은 꽃과 나무에 떨어질 듯 들러붙어 한 계절을 난다. 초록의 빛깔로 자신의 청춘을 온힘으로 뒤흔든다. 초록의 몸이었을 때 사람들은 그 몸의 숨을 마신다. 청춘의 숨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청춘의 숨처럼 온몸을 차오르게 하는 게 있을까.

잎은 소멸을 증언한다. 소멸의 순간이 아름답다는 역설을 증언한다. 스러져가는 존재에 환호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아직 내 차례는 아니라는 안도감이겠지. 모든 젊음은 시든 운명을 타고 태어난 것. 모든 청춘은 지는 운명을 지닌다. 잎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잎은 저마다 아름답게 늙는 법을 안다. 붉게 늙고 노랗게 늙고 적갈색으로 늙는다. 사람들은 몸에 붙어 있을 때보다 제 몸으로부터 떨어진 잎에 관심을 갖는다. 이탈된 존재에 대한 관심은 본능적인 것일까. 이탈된 나를 본다. 이탈된 우리를 본다. 이탈된 가방. 이탈된 책. 이탈된 영혼. 이탈된 사랑. 주변엔 모두 이탈자들뿐이다. 국적 없는 자들은 고독하고 쓸쓸하겠지만, 그들에겐 소용 있는 고독이 있지 않은가. 아무것에도 소속되지 않고 유일하게 혼자이고 싶다는 철없는 객기가 순간순간 불쑥 일어난다.

쓸려 어딘가로 버려지기 전. 잎은 노쇠해져가는 자신의 미학을 가장 완벽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 소멸의 말로는 잔인하게 버려지는 것이다. 빗자루로 포대자루로 리어카로 트럭으로 쓸리고 실려 버려진다. 태워지고 분해되고 땅속으로 파묻힌다. 마치 아우슈비츠처럼. 마치 신자유주의 시민들처럼.

그러나 잎을 찬양하지 말 것. 소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말 것. 찬양받고 감탄되는 것들은 모두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저 내가 좋고 네가 좋으면 그뿐인 것이다.

 

파편

 

파편의 아름다움은 아마 모여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에서 시작할 것이다. 잎은 저 홀로 있을 때 빛나지만, 모여 있을 때는 거리의 색채가 보여줄 수 있는 충일감 때문에 황홀하다. 초록의 시절. 잎은 서로 손을 잡고 제 어미의 몸을 간절히 부여잡는다. 세상에 간절한 것만큼 마음 아리는 게 있을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잎은 절대로 그 손을 놓지 않는다. 간절한 마음이 잎의 몸을 초록으로 물들게 했을 것이다. 목에 굵은 힘줄이 불거져 초록으로 온몸을 새겼을 것이다.

간절함과는 상관없이 잎이 제 어미와 떨어져야 할 때. 잎은 제 몸을 바람에 내맡긴다. 제 터전이 아닌 어딘가로 잎은 날아간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미지를 향해 잎은 제 몸을 맡긴다. 헤어지고 떨어지고 슬퍼하는 게 추앙받는 계절. 온몸과 마음이 파편으로 남아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계절. 붙들었던 것을 놓을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을 배우는 계절. 가을은 잎의 계절이다. 잎은 가을에 완성된다.

 

기다림

 

벤치에 떨어진 잎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 아마 생의 마지막 기다림이겠지. 어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손을 잡고 벤치에 앉을 때, 그 잎은 치워질 것이다. 기다림은 그런 것이겠지. 바깥으로 치워질지 알면서도 설레는 시간이 기다림이겠지.

잎 하나 책갈피에 꽂아 넣고 짧은 기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본다. 꽃잎은 맑은 물에 띄워 차로 마시기도 한다. 잎은 제 몸이 바짝 말려진 뒤에도 기다림의 시간을 견딘다. 화석조차도, 말려진 몸조차도 쓸모 있는 잎의 오지랖. 말린 잎의 몸에선 향기가 난다. 스스로 욕망하지 못하고 순응적으로 호흡하며 살아온 향. 물과 공기만으로 제 몸을 삼투한 향. 기다림에도 향기가 있다면 이런 내음이 아닐까.

 

태초

 

동물의 노쇠는 누추한데 왜 식물들의 노쇠는 찬란할까. 가장 성실한 생명의 열매였던 잎은 다시 땅의 입으로 들어간다. 마치 그곳이 잎의 기원이라는 듯이. 시(詩)는 잎을 기록하지 않는다. 잎의 운명과 함께하는 것뿐이다.

 

 

_ <문예중앙>, 2013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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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이재훈

 

 

산책길엔 언덕이 있다.

그날은 이상했다.

오르고 올라도 닿지 않는 거리를 헤맸다.

혼을 빼앗긴 것처럼.

늪에 빠진 것처럼.

뒷덜미를 놓아주지 않는 불빛이 있었다.

사위가 어둠에 둘러싸이면서

상점엔 불이 하나씩 켜졌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어둠이 안겨주는 거대한 정적을,

위대한 침묵을

나는 알지 못했다.

상처받은 한 친구를 생각했고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생각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바쁜 거리의 일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산책길엔 언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길목과 길목이 혀를 내밀어

내 몸을 떠받치고 있을 뿐.

타인의 인격을 규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은,

그 짧은 시간만큼은 황홀하겠지.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

달빛이 있는 골짜기다.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그 햇살의 순간처럼.

 

- 시집 <명왕성 되다>(민음사, 2011) 중에서

 

 


 

골목길 산책자

 

 

 

이재훈

 

 

 

장 그르니에는 산책자의 위의(威儀)를 가장 매력적으로 드러낸 이다. 우리에게 산책이란 그저 평범한 시간을 가장 평온하게 보낼 수 있는 생활의 한 장면이다. 하지만 그르니에에게 산책은 여러 가지 철학적 의미를 담은 고귀한 행위였다. 심지어 그는 산책의 정의와 좌표들을 설정하고 산책의 시간과 산책하는 자의 진귀한 내면을 파헤쳤다.(「산책」, <일상적 삶>, 장 그르니에(권오룡역), 청하, 1988) 즉 산책에도 여러 가지 성격의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강제에 의한 산책, 이성에 의한 산책, 사회성에 의한 산책, 철학적인 산책, 자연과의 융합수단으로서의 산책, 완성된 산책 등이 그것이다.

저 유명한 칸트의 저녁산책은 정기적인 휴식의 산책이다. 그에게 산책은 자신의 작업으로부터 벗어난 유일한 휴식의 시간이었다. 이에 반해 니체의 산책은 자신의 작품을 구상할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의 연속이었다. 루소의 산책은 몽상과 명상을 장려한 산책이었다고 한다. 장 그르니에는 루소의 산책은 타인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도망가게 해주는 산책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대부분 이런 산책을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으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기 위한 산책.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산책했을 당시의 모든 장소를 아주 상세하게 묘사해주는 방식을 택했다. 즉 가시적이고 관조적인 산책의 즐거움을 일깨운 것이다. 하지만 열자(列子)는 산책에서 관찰하는 기쁨을 찾지 않고 명상하는 기쁨을 찾았다고 한다. 이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기쁨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산책이라고 말한다. 열자의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산책하되 완전하게 하라. 완전한 산책자는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걸으며, 그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바라본다…… 나는 네게 어떠한 산책도 금하지 않지만, 완전한 산책을 할 것을 충고한다”고.

한동안 나도 산책을 했다. 아니, 산책을 한다는 자의식 없이 그냥 걸었다. 내려야 할 지하철 한 두역 전에 내려 걸었다. 내가 주로 걸었던 길은 집 주변의 골목길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골목길을 걸으며 내가 욕망하는 것, 놓고 싶은 것, 바라보고 싶은 것, 듣기 싫은 것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런 즈음에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라는 시를 쓰게 되었다. 골목길을 걸으며 나는 언젠가 읽었던 장 그르니에의 산책을 떠올렸다. 그의 책 <지중해의 영감>(청하, 1988)은 내 감성의 세포들을 흔들어 놓았다. 물론 그의 산책과 나의 산책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골목길이 내 삶의 길이 아니라 지중해 도시의 어느 신비한 골목길이길 바랐다. 어떻게 보면 위의 시는 내 산책의 비망록과 같은 시이다. 산책을 통해, 산책을 통한 시를 통해 나는 조금 위로받았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그러다 그렇게 골목길을 걷는 것도 조금 뜸해졌다. 이제는 골목길을 걸으면 가끔씩 눈물이 난다. 한없이 작고 아기자기하고 예쁜 길, 담쟁이와 붉고 노란 꽃들이 담벼락을 타고 넘는 길, 욕망과 욕정이 자욱한 길, 더럽고 추하고 가난한 길, 시끄럽고 위험하고 울퉁불퉁한 길, 소년소녀들이 욕하고 침을 뱉고 담배를 피우는 길, 취객들과 노인들과 부부들의 싸움소리가 새어 나오는 길, 이 모두가 공존하는 길. 그 골목길이 내 삶이기 때문이다.

다시 장 그르니에로 돌아가 보자. 그는 알제리의 오랑에 있는 산타크루즈에서 산책을 한다. 태양의 발자취가 언덕을 휘감는 아름답고 신비한 풍경을 기적이라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을 직시한다. 산책 속에서 만나는 거대한 풍경으로 삶과 존재의 비밀을 언뜻 알게 된다. 이 모든 순간들이 우리를 채워주기 보다는 비워버린다는 깨달음까지도. 그의 일상은 고귀한 산책의 시간을 누리는 것이었다. 여전히 그의 산책은 가장 멋있다. 나의 골목길 산책도 어떻게 변할 지 기대된다.

 

_ <시평>, 2013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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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과 구름을 오고간 시인

 

 

이재훈

(시인)

 

 

 

김충규 시인은 2012년 봄 「잠이 참 많은 당신이지」를 발표하고 마치, 오래도록 잠을 자려고 작정한 것처럼 이승의 옷을 서둘러 벗었다. 정말 ‘아무 망설임 없이’ 훌쩍, 잠들어버려 남아 있는 많은 이들을 애통하게 했다. 우리는 어느 지방 행사에 축시를 낭송하러 함께 간 인연으로 친해졌다. 처음엔 지방행사 귀퉁이에서 홀대받아 서러운 마음을 서로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너무나 빤히 들여다보이는 서로의 속마음에 헛헛한 웃음만 지었다. 저녁이 되자 너나없이 속엣 것을 다 풀어헤치며 시인으로서의 삶과 시 쓰기의 지난함을 고해성사하듯 한풀이했다. 그날 우리는 서울로 올라오지 못했다. 통음을 하며 비슷한 족속들끼리 주고받는 쓴웃음을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구겨넣으려 했다. 그 후로 나는 과분하게 충규형의 사랑을 많이 받는 동생이자 시의 동력자로 마음을 나누게 되었다.

김충규의 시는 사막에서 일구어낸 뜨거운 통증이었다. 마치 마음이 데일 것처럼 뜨거운 그의 통각과 허무는 시간성이 탈각된 언어 이전의 어떤 느낌이었다. 사막을 홀로 터덕터덕 걷는 낙타의 상징을 온몸에 분칠한 채 시에 온 생을 밀어 넣는 모습에서 시인의 가장 매력있는 순간을 언뜻 보기도 했다. 김충규의 시는 사막에서 혼자만 울부짖은 건 아니었다. 사막은 시인이 가장 빠르게 혹은 무모하게 먼저 택한 공간일 뿐이다. 그 길고 긴 사막을 빠져나와 물을 찾고 물속의 사원을 찾았다. 그러면서 시인에게 투영된 통증의 그림자를 수도자의 모습으로 변화하는데 시간을 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충규의 시는 늘 남과는 다른 강력한 고통의 자양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또 김충규만의, 김충규에게 가장 적절한 언어의 옷이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그는 행복을,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않았다. 아름답게 그려냈지만 종내에 남는 것은 아픈 말들이었다.

김충규의 시가 사막에서 물을 찾아 나서고, 그것도 모자라 공중을 배회하다가 몽상의 숲에까지 기웃거리는 모습을 보며 머리를 몇 번이나 끄덕였는지 모른다. 완전하고 완벽한 시는 이 세상에 없을 테지만, 완전한 시를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는 김충규의 뒷모습을 보며 또한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김충규는 나중 ‘구름’에 제 존재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어둡고 축축한 비극이 구름으로 치환되는 찰나가 참 멋있었다. 그의 유고시집이 나온다니 그 구름 한가운데 “공중의 화원에서 수확한 빛”을 “몰래 당신의 침대 머리맡에 놓아주”고 싶은 날이다. 김충규 시인이 제 “심장을 꺼내 먹여” “숨을 얻고 허공을 헤엄친” 수많은 독자들을 향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한 날이다. 그 흔한 그립다는 말이 너무 모자란 날이다.

 

_ 김충규 유고시집,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문학동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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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에서 돌까지

산문 2013. 3. 13. 10:20

황하에서 돌까지

 

 

 

이재훈

 

 

 

 

 

요즘 돌에 대한 시를 쓰고 있다. 왜 돌인가 라는 질문에는 여러 가지 할 말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돌이 어떤 계시나 운명처럼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렇듯 시적 만남은 늘 벼락처럼 찾아온다. 세계는 모두 이런 우연한 만남의 반복 과정 속에서 지탱된다. 이런 우연한 만남을 필연이라고 의미부여하고, 나름의 연관성을 찾고, 게다가 가장 고귀한 사건으로 미화시키는 경우도 자주 발견하곤 한다.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에 실린 대황하 연작시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시와세계>, 2008년 가을호) 황하의 상징은 물에 대한 상징이고, 이 상징을 통해 나는 정신의 극점을 향하는 길목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리고 황하는 내 존재가 걸어가다 만나는 수많은 풍경 중의 하나이며 앞으로 만나게 될 풍경이 또 어떤 풍경이 될지는 모른다고 적었다.

돌에 관해서라면 옥타비오 파스를 얘기하고 싶다. 물로 시작한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 속에서 나는 물을 거쳐 돌로 가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던 것이다.

 

땅속 깊은 곳의 물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파도가 해변을 덮는 것처럼, 현존은 표면으로 떠오른다. 모든 것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고동친다. 존재와 겉모습은 하나이며 동일하다. 숨겨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은 자신으로 충만해져서 빛을 발하며 자신을 나타낸다. 존재의 조수. 존재의 물질에 이끌려서 나는 너에게로 다가가서, 너의 가슴을 만지고, 너의 피부를 쓰다듬고, 네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세계는 사라진다. 이제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없다. 사물과 사물의 이름, 숫자, 기호는 우리 발밑에 떨어진다. 이제 우리는 말을 벗어 던졌다. 우리 이름을 잊어버리고 대명사들은 서로 혼동되고 얽힌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우리는 위를 향해 솟구쳐 오른다. 이름과 형태가 흘러가며 소실되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얽매여 추락한다.

― 옥타비오 파스, 「시적 계시」, <활과 리라> 중에서

 

물의 솟아오름은 존재의 지평을 확산시킨다. 우리 존재는 이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세계는 사라지고, 내 존재는 사라져도 내가 명명했던 이름들과 그 이름들을 지켜보던 돌은 남아 있을 것이다.

파스는 「태양의 돌」이라는 장시를 썼다. ‘태양의 돌’은 고대 아즈텍 문명의 우주관을 기록한 거대한 원형의 돌이다. 일명 ‘아즈텍의 역’이라고도 불린다. 그 돌의 중앙에는 태양신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과거에 멸망한 4개의 시대를 상징하는 신의 그림이 있다. 또 바깥쪽에는 아즈텍 역의 날짜를 나타내는 20의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돌은 오래된 시간이다. 시간의 표상이며,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물질이다. 아마 이 우주가 탄생하기 시작할 때부터 함께 했을 것이다. 돌로 시작된 우주. 돌로 시작된 수많은 별.

 

부러진 돌부리에 채인다

굴러다니는 돌이 아니라

올곧게 서 있다가, 부러진 돌

창과 칼 혹은 바람이

돌의 몸을 반 동강 냈을 것이다

사방이 어둠이었고

나를 길에 내던졌던 사람들의 눈빛만

어둠 속에서 반짝하던 밤들이었을 때

발바닥 돌덩이가 내 존재를 떠받칠 때가 있다

돌이 내 집을 떠받치고,

아버지의 약속을 떠받칠 때

돌 위에 피의 흔적이 있다

돌은 깨져도 죽지 않는다

돌은 썩어갈 육체를 갖고 있지 않아

언제나 채이고 밟히고 놀아난다

돌에 의해 소멸한 것과 태어난 자리가 한 몸이 되는

이 모든 찰나를 지켜본 돌

어둠 속에서 세상이 어지럽게 돌기 시작하면

나는 흔들거리는 운명을 본다

흔적 없이 왔다간

당신의 영혼에 몰래 깃들고 마는 돌

부처의 얼굴도 만들고, 예수의, 마리아의 몸도 만드는

성육신인 돌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

돌로 만들어진 뭇사람 하나

그 무성한 골짜기의 돌

― 졸시, 「돌의 환(幻)」 전문

 

위의 시처럼 돌을 만났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에 채인 돌을 만났다. 그 누구도 지금 내가 만난 돌의 기원을 알 수 없다는 미지의 생각이 날 미혹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돌과 꽤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누구도 돌이라는 물질에 대해서는 그런 친연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 ‘환(幻)’인가 하면 돌의 실체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정신의 지평으로 다시 환의 지평으로까지 몰고갈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그 가능성의 시작을 알리는 시였기 때문이다. 성육신의 돌을 넘어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과 오래도록 만날 것 같은 느낌이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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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아프셨다. 허리가 너무 아파 걷지도 못하겠다고 했다. 수화기 너머로 울먹거리는 어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오죽 아프셨으면 아들에게까지 하소연하실까. 당장 서울로 모셨다. 큰 대학병원 통증클리닉을 찾았다. 치료를 받기 위해 전국에서 환자들이 모인다 했다. MRI 촬영을 했다. 통증클리닉에서는 척추 부근 MRI 사진에 이상한 게 발견된다고 했다. 정형외과의 진단확인서를 가져와야 치료를 해줄 수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혹시 암이 아닐까 걱정하셨다. 이제야 살만한데. 혹시 암이면 어떡하니. 아예 암이라고 단정짓듯 말씀하셨다. 어머니, 괜찮아요. 걱정마세요. 암은 아닐 거예요. 그렇게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마음 한 구석의 불안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한 시간이라도 빨리 확정 진단을 받기 위해 서울의 여러 병원을 돌아다녔다. 걷기도 힘든 어머니를 들쳐 업고 제발, 어머니 힘을 내세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마음속으로 크게 외치며 기도를 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암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다. 서울에 머물며 한 달간 치료를 했다. 드디어 어머니는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웃음을 되찾았다. 감사함이 물밀듯 가슴을 휩쓸었다. 어머니께 너무 고마웠다.

우리 세대의 어머니들 대부분이 그래왔듯 내 어머니도 고생 꽤나 하셨다. 아버지는 만학의 뜻을 두고 가족들을 남겨둔 채 서울로 상경하셨다. 어머니는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삼남매를 혼자 키우셨다.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을 오르셨고, 돼지를 키우기도 했다. 충북 영동의 부잣집에서 태어나신 어머니는 험한 일을 해보신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결혼을 한 후, 온갖 험한 일을 많이 하셨다. 첫째인 나를 임신했을 때 어머니는 먹을 게 없어 썩은 사과를 한 자루 얻어와 한 달 내내 드셨다. 그 이유 때문인지 나는 어릴 적부터 사과를 유난히도 좋아했다. 둘째 여동생을 낳았을 때는 젖이 돌지 않아, 술지개미를 먹였다. 여동생은 아직도 많이 마르고 작다. 또한 집착적으로 고기를 탐한다. 어머니는 그때 못 먹여서 그런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씀을 하시곤 했다. 셋째인 막내 남동생은 소아마비라는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막내의 장애 때문에 어머니의 고생은 더 깊은 골짝으로 빠져들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막내를 업어 등하교시켰다. 막내는 다혈질적인 타고난 성격 때문에 싸움도 많이 했다. 장애인이라는 열등감과 너무나 완강한 자존심으로 인해 늘 막내는 사고뭉치였다. 막내의 사고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계속 이어져 어머니의 슬픔은 끊이지 않았다. 중학교 때 싸움으로 인해 앞니 3개가 부러졌을 때 어머니는 참 많이도 우셨다. 어떤 험한 일이 벌어져도 어머니는 무릎을 꿇으셨다. 자존심밖에 남지 않았던 어머니는 그렇게 무릎을 꿇고 또 꿇었다. 어느 날에는 동생을 얼싸안고 같이 죽자고 하셨던 적도 있었다.

어머니의 희생 덕분인지 우리 삼남매는 그런대로 잘 컸다. 속을 많이 썩혀드렸지만 성인이 되고, 자신의 앞가림을 하기 시작한 때부터는 어머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막내는 이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 어머니가 아파 몸져누우실 때가 오면 자신이 모든 걸 그만두고 병간호를 할테니, 그 누구도 막지 말아 달라고 한다. 나는 어머니께 늘 고만고만한 아들이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어머니의 위로가 되는 아들이었다. 첫째 장남이었기 때문인지 당신의 어려운 속내를 내게 많이도 말씀하셨다.

공부를 마치고, 밥벌이를 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면서 나는 어머니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자식이 시인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때로는 창피할 정도로 동네에 자랑을 하고 다니실 때도 있었다. 그런 어머니에 대한 시를 나는 단 한편도 쓰지 못했다.

어머니는 내 삶의 가장 뜨거운 상징이었다. 또한 내가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신봉하는 공통의 종교는 바로 ‘어머니’라는 종교이다. 우리는 어머니를 통해 기쁨을 얻고 슬픔을 얻고 위안을 받는다. 어머니는 내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고 신봉할 수 있는 믿음이다. 조금 더 나이가 들 때쯤, 간신히 어머니에 대한 시를 쓸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 모든 인생의 슬픔을 감싸 안고 함께 사셨다. 인고(忍苦)의 세월이라고, 신산(辛酸)한 세월이었다고 다들 말하지만, 어머니는 너희들이 있어 행복하다고 늘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아직도 허리가 아프시다. 수술을 해서도 완치되지 않기에 평생 통증을 함께 안고 가야 한다. 어머니, 유독 꽃을 좋아하시는 어머니. 이 봄날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벚꽃놀이라도 가야겠다.

이재훈(시인)

 

_ <연꽃마을신문>, 2011년 04월 15일, 2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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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

산문 2013. 1. 30. 23:09

옛 화일들을 뒤지다가 우연히 설문에 응답한 내 글을 찾았다.

<현대시> 2002년 2월호에 발표한 '동인특집' 설문에 대한 나의 답변내용이다.

'천몽'과 '시원'을 한국 시단의 젊은 시동인으로 초대하여 특집을 했었다.

나는 '시원' 동인의 자격으로 참여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뭐가 달라졌을까.

뭐가 달라졌을까. 뭐든 달라졌겠지.

 


 

1) 2000년대에 들어 동인활동이 급격히 위축되었다. 지금 현시대에 있어 동인활동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지난 연대의 동인 목적이 실천적 행위, 사상적 기치, 담론의 생성이라고 거칠게 말해본다면 이는 모두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의도적 혹은 자생적 발로였다. 그 당시는 하나의 문학적 사실이 공동의 목소리와 친밀히 협력되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다름은 여기에 있다. 지금의 동인은 바깥을 향하지 않고 안으로 향해 있다. 하나의 문학적 사실이 각 개인의 내적인 동인(動因)에 의해서 미학적으로 규정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것 또한 필요라면 필요이고 자발적 발로라면 발로다.

 

2) 자신이 속한 동인이 한국시에 어떤 새로움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동인이라는 이름으로서의 새로움보다 동인에 속한 각 시인의 이름에 새로움이라는 꼬리표가 붙여지기를 원한다.

 

3) 무성한 시의 위기론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젊은 시인으로서 시의 미래를 점쳐본다면?

 

시의 위기론은 문학을 보는 편협한 잣대에 의해서 유포된 말이라고 생각한다. 시가 경제적 논리로 환원될 때는 그 질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되고 사회적 효용가치로 매김될 때 그 자리가 좁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현재엔 이러한 시의 경제적, 정치적 측면은 배후에 있다. 근대문학이 한 세기를 넘어가는 시점에서 아직도 같은 맥락의 준거틀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향수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도 여전히 근대를 통과한 새로운 자아와의 싸움을 시인들은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4) 일각에선 시의 위기가 아니라 시비평의 위기라는 지적도 있다. 시비평에 문제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겠는가.

 

문학적 안목과 열의가 부족한 상태에서 비평이 학문 성과의 수단으로 역할을 한다면 문제가 되겠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에 대한 애정이다. 텍스트 자체에 대한 애정없이 출발한 비평은 곡해되기 마련이다. 애정을 갖고 텍스트와 같이 산다면 창조적 비평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5) 인터넷을 비롯한 사이버 공간이 자신의 문학활동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사이버 공간이 시쓰고 생각하는 시간을 빼앗는다는 점에선 큰 영향을 끼친다. 사이버 공간은 많은 일상 중에서 하나의 일상일 뿐이다. 영향이라면 현실 공간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라고 할까. 그러나 이 공간이 내 시쓰기 자체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아직까지는 소통과 정보창고의 역할이 큰 것 같다. 가상공간이 창작자들에게 절실히 체감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사이버 공간이 문학자체의 질을 변화시킨다는 예단은 아직 시기상조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6)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 시단(문학 출판사, 문예지 등)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하는가.

 

앞으로 시의 가장 큰 문제는 젊은이들이 시단으로 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시를 쓰고 시인을 꿈꾸었던 젊은 인재들이 영상매체나 광고, 대중매체 쪽에 몸을 헌신하고 있다.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살려고 하는 자들은 소수이다. 신인등용문의 응모자가 많다해도 대부분 고령화되어 있고 젊은 응모자 중에도 대다수가 고학력 문학전공자들이다. 등단했다해도 얼마 못가서 시단을 떠나버린다. 점점 시인은 자유로운 예술가가 아니고 촉망받는 문학전공자들이 갖는 자격증처럼 돼버렸다. 시가 다양화되지 못하고 유행에 맞춰 획일화되는 것은 이런 연유가 아닐까. 기성의 눈치를 보지 않는, 젊고 패기있는 신인들의 발굴과 육성에 모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국 시단(문학출판사, 문예지 등)의 문제 중에 두 가지만 말하고 싶다. 하나는 가난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연중심주의라는 점이다. 사실 가난한 것은 문제라기보다는 이 시대에서 문학하기의 어려움이다. 가난이라는 이름으로 문학의 상품화, 부적절한 문예지 운영 등이 발생한다. 이것은 시인들의 제살 깎아먹기다. 또한 인연 중심주의(학연, 지연, 잡지) 때문에 에콜의 문제가 대두되고 정실비평을 주고받고, 시인과 비평가들이 주변의 눈치를 본다. 시단이 가난하지 않으려면 정부의 문예정책에 호소해 지원을 받거나 환금성을 가질 수 있는 문학아이템을 개발하는 일밖에 없다. 제대로 시를 쓰면서 먹고 살기가 무엇보다도 어려운 시대다. 이를 위해 원로부터 신진 시인들에 이르기까지 머리를 맞대고 협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시단이 인연중심주의에서 벗어나려면 문학인들이 순수해져야 한다. 문학의 인연을 통해 과대평가를 하거나 받거나 하는 등등의 일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스스로 깨치는 수밖에 없다.

 

_ <현대시> 200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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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복주의 시에는 해학이 있고 철학자의 사유가 깃들어 있다. 개라는 비극적 운명을 똥개의 습벽(習癖)과 퉁치고, 이를 다시 지혜의 말로 뱉어 놓는다. 시인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개의 말은 세속의 말인 동시에 스승의 말이다. 시에 등장하는 개들은 일상적인 개짓을 하기도 하지만 발레를 추거나 명상을 하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부조리한 풍경들이 우리 인간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대변해준다. 시인이 풍자를 넘어 또다른 사유의 품을 보여주기까지에는 여러 정신적 굴곡이 있었던 듯 싶다. 속리(俗離)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서기까지의 도정을 시집에서는 파란(波瀾)과 만장(萬丈)의 언어로 보여준다. 신산(辛酸)한 삶의 내력과 새로운 고향이 된 함양(咸陽)의 공간들은 시인에게 ‘야생의 정신사’를 쓸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산속의 개 산들이와 순일(純一)한 무아지경을 누리는 시인. 앞으로 우리는 지리산의 시인이 된 문복주가 펼치는 유곡의 사유를 오래도록 지켜볼 것이다.

 

_ 이재훈 (시인)

 

시집 정보 : http://blog.naver.com/mhjd2003?Redirect=Log&logNo=80177424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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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과 크리스마스

산문 2012. 12. 7. 10:28

대선과 크리스마스

 

   

이재훈 (시인) 

 

 

 

 

 

내가 처음 대선을 치른 것은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서였다. 당시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이라는 양김의 시대가 마지막으로 시대를 호령하는 때였다. 영원한 라이벌로 불리우는 정치스타 김대중과 김영삼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정치계의 화두이며 핵심이었다. 김영삼 후보는 민정당의 노태우와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과 합당, 적들과의 동침을 자행하며 민자당을 출범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14대 대선에서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문민정부에 이어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에 이르기까지의 대선 여정들은 내 청춘의 정점을 수놓은 추억들과 함께 했다.

14대 대선 때 나는 재수생이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은 배부른 사치처럼 느껴졌고, 사회에 대한 불만과 자신에 대한 열등감은 극도로 높아져 있었다. 대학생들의 시위와 시민들의 공분과 가열차게 돌아가는 대선 정국은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들처럼 여겨졌다. 혼자만의 내면에 파묻혀 세상을 바라볼 때였다. 가끔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무정부주의자를 꿈꾸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대학생이 되었고, 졸업을 하였고, 힘들게 공부를 하였으며 결혼을 했고 자녀를 키우고 있다. 지금은 비정규직의 삶을 살며 도시인으로서의 명분을 합리화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나이가 들고 삶의 규모가 조금씩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지금은 여러 열린 창을 통해 정치에 대해 일거수 일투족을 관람하고 얘기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은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염원이 피로 승화된 우리 시대의 아픈 역사이자 상징이다. 5.18의 뜨거운 피와 가슴과 열망과 눈물이 없었다면 민주화의 정치사는 아마 한참 뒤늦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나는 중학교 시절 성당 지하실 사진전에서 본 광주 민주화운동의 처참한 모습들을 잊을 수 없다.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우리의 역사이며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도저히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주위를 돌아보면 별달리 달라진 게 없는 듯하다. 공권력에 의해 인권은 유린되고 있으며 가난하고 낮은 자들에게는 이전보다 더한 모욕을 안기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예의도 상식도 배려도 없이 오로지 개인의 이기심만 팽배한 사회에서 오로지 돈만이 모든 삶의 지표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각박한 현실, 신자유주의로 치장한 지금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더 나아졌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려본다. 지금이야말로 5.18의 희생과 민주화를 향한 뜨거운 열정과 숭고한 피의 의미를 생각할 때 아닌가.

정치는 우리 삶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정책 하나 하나가 직접적으로 우리 삶과 밀착되어 있다. 삼포세대(취업 포기, 결혼 포기, 출산 포기)라 불리는 청년들의 미래, 사교육과 등록금으로 인해 자녀들을 교육하기 어려운 환경, 명예 퇴직이나 조기 퇴직으로 인한 50대 이상의 실업문제, 노인층의 증가로 인한 복지 문제 등등이 지금 우리 사회가 풀어가야 할 난제들 중 하나이다. 정책 하나가 달라진다는 의미는 이런 문제들이 하나씩 풀어질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기존 청치에 대해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는 투표를 하는 행위이다. 투표행위를 통해 위정자들에게 국민들의 뜻을 강하게 전달할 수 있다. 찍을 사람 없고, 좋아하는 후보자가 없다고 해서 투표권을 포기한다면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 아닐까. 의무를 다했을 때에야 정치권에 불만을 제기할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찾을 수 있다. 얼마나 더 위정자들에게 당해야 할지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뜩하기만 하다.

역대 대선 투표율은 14대 81.9%, 15대 80.7%, 16대 70.8%, 17대 63%로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다. 투표율이 더 이상 낮아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정치권에서는 투표시간 연장안을 놓고 갑론을박하고 있다. 투표시간 연장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들어보면 투표율을 높이자는 취지에 대한 반론이 빈약하기 그지없다. 이번 대선에서는 후보자들의 토론회도 찾아볼 수 없다. 15대 대선에서는 54회, 16대에서는 27회, 17대에서는 11회의 대선 후보자 TV토론회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18대 대선에서는 투표일이 한 달 남은 지금까지 단 한 차례의 토론회도 열리지 않았다. 국민들에게 무엇을 보고, 듣고, 판단하라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올바른 판단과 투표행위를 통해 5.18의 정신은 올곧게 이어질 것이다. 국민들의 참정권 행사가 없이는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 바꾸고 싶으면 행동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 첫걸음이 투표행위가 아닐까. 13대 직선제 때부터 대선일은 늘 12월 중순이었다. 12월에는 크리스마스가 있다. 축제의 마지막 달이다. 대선 또한 우리에게 축제이고 싶다. 벌써부터 12월의 그날이 기다려진다.

 

_ 5.18기념재단 계간지 <주먹밥> 2012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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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우의 시는 자연을 매개로 자신의 정서를 이리저리 감각적으로 궁굴린다. 대상을 어떻게 선취하고 이를 시적 감각으로 형상화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적 대상을 자신의 정서와 같은 맥락으로 드러냄으로써 결국 ‘지금 여기’의 ‘나’를 보여주는 데 기여하고 있다. 당선작인 「하늘은 도대체 몇 개의 물뿌리개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는 모든 자연의 대상물이 의인화되어 시인의 감각 속에서 춤을 춘다. ‘구름’과 ‘바람’이 지휘를 하고, 음악 소리가 총 소리와 겹치면서 다양한 감각의 일탈을 보여준다. 시인이 더듬어내는 감각의 촉수는 ‘된장 끓는 냄새’와 ‘물먹는 하마’와 벤치에 있는 ‘츄리닝아저씨’까지 다다른다. 이런 장면들 속에서 시적 자아는 ‘아가미 없는 나’로 자신의 존재증명을 하고 있다. 서연우의 화자는 늘 자신의 존재증명에 시달린다. “나는, 두렵고 위험한 존재”(「슬픔증」)이며 “나는 치명적이”(「마음이 푸른 모든 이의 달」)라고 말한다. 서연우의 시는 ‘땅의 숨소리’를 그리워하고 ‘근원 모를 불안’과 매트릭스의 혼돈 속에서 ‘꿈꾸다 깬 사실조차 꿈’일 수밖에 없는 언어의 틈바구니를 이리저리 헤집고 있다. 앞으로 더 활달하게 펼쳐질 언어의 유랑이 기다려진다. (이재훈)

 

_ <시사사>, 2012년 11~1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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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패러디 백일장

 

출처 : http://www.for-munhak.or.kr/idx.html?Qy=play_parody&nid=632&page=1



[심사평]


             제5회 문학나눔 패러디 백일장 심사평 발표

 

 

글/이재훈(시인)

 

이번 백일장에서는 응모작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의 삶이 힘든 모양이다. 응모작들을 한 편씩 읽으면서 각박한 삶의 세목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때론 히죽히죽 웃음을 지었고 때론 공감했으며 때론 가슴이 먹먹하기도 했다.

<남자의 일생>은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한 평범한 남자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애벌레의 느리고 질기고 고통스러운 시간은 우리네 삶의 형편과 많이 닮아 있다. 응모작들 중 많은 수의 작품들이 각자의 위치 속에서 이런 고통스럽고 힘든 삶을 잘 표현해 주었다.

패러디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위트와 풍자가 담긴 수사법이다. 원작을 변용시킬 때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위트가 살아 있는가,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전달해 줄 수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살폈다.

Red S님의 <개똥의 일생>은 위트와 해학이 넘쳤다. 한참 웃게 만드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미지가 살아 있으면서 개똥이 거름이 되어 새로운 열매를 맺는다는 생명 순환의 의미도 담겨 있다.

토머스님의 <노숙인의 하루>는 관찰자의 시선이 눈길을 끌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노숙인의 일상을 유심히 관찰하여, 노숙인이 가진 허기가 육체적 허기만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신혁님의 <지아의 일생>은 미소를 짓게 만드는 작품이다. 신지아에게 온 생은 목을 가누고 몸을 뒤집는 시간일 것이다. 아기의 일상을 몸소 체험하여 아기의 세상을 이해하게 한다. 지아에게 작은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수상으로 선정한 미립님의 <김씨의 일생>은 죽음의 순간을 사실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평생 농사일만 하다가 쓰러진 김씨는 자식들 잘되는 것을 위해 온 생을 바쳤다. 우리 부모님들은 대개 이런 분들이다. 보편적인 공감을 얻어내기에 충분한 작품이고 표현도 깔끔하다. 특히 마지막 연에 모처럼 단잠이 든다는 구절이 시를 더욱 의미있는 작품으로 만들고 있다.

이번 백일장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우리의 일생이 어떤 문장을 남기게 될까 궁금해지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우수상 : <김씨의 일생>(미립)

장려상 : <개똥의 일생>(Red S), <노숙인의 하루>(토머스), <지아의 일생>(신혁)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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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인의 이야기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는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유학까지 다녀온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습니다. 수의학을 전공한 농촌운동가였으며 가난한 아이들의 선생님으로 봉사하던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전신 3도 화상을 입게 됩니다. 얼굴은 모두 문드러지고 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으며, 손과 팔은 휘어지고, 한쪽 눈은 시력을 잃었고 남은 눈마저도 시력이 1미터에 불과했습니다. 눈물샘마저 타버려 울 수가 없었습니다. 6개월 동안 스물일곱 번의 수술을 받은 그는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 몸이 말야, 이래뵈도 무지 비싼거야. 수십명이 달려들어 만든 걸작품이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람 손 안 간 데가 없단 말야.” 그리고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의 모태가 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운동을 시작하고, 1986년에는 경기 가평의 두밀리에서 ‘두밀리자연학교’라는 대안학교를 설립합니다. 그의 별명은 ET 할아버지. 주말마다 전국에서 모여든 아이들은 그를 이티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습니다. ‘이티 할아버지’는 ‘이미 타버린 할아버지’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바로 사회사업가이자 교육운동가인 채규철(1937~2006) 할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이티할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

 

현실과 마주한 희망이라는 끈

 

이제 제법 찬바람이 옷깃 속을 파고듭니다. 몸을 움츠리게 되고 더불어 우리의 마음도 서글퍼질 때가 많습니다. 출퇴근 시 교통체증은 짜증나기만 합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겨울 난방 걱정과 치솟는 집값 걱정이 커져만 갑니다. 김장도 해야 되는데 물가는 연일 치솟습니다. 갑자기 추워진 차가운 밤바람이 가슴을 더 서늘하게 합니다. 눈이라도 내리면 더 걱정이 많아지겠지요. 뉴스에서는 정치인들이 나와 연일 서민복지를 부르짖지만, 실제 우리 몸에 와닿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십억이니 백억이니 하는 말들은 그저 뉴스에나 등장하는 허황된 단어들에 불과합니다. 은행잎과 단풍잎들은 아름답게 물들어 가는데 우리의 현실은 어두운 먹구름으로 가득합니다. 도무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여기저기 들립니다.

하지만, 언제나 늘 그렇듯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옵니다. 가랑잎들은 땅에 떨어져 서로 모여 있습니다. 서로 속삭입니다. 모이고 속삭이고 웅성이다 보면 어느새 땅속에 스미고, 새로운 싹을 틔웁니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우주의 질서는 세상일들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정직하게 운행합니다. 그 시간들 속에서 우리들은 서로 아웅다웅하며, 눈을 흘기며 때론 자신을 미워합니다. 이 속에서 서로 용서와 희망을 말들을 속삭이고 나누면서 함께 모여 있다면 어떨까요.

어떤 사람은 그 시간들 속에서 감사하기도 바쁘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감사한 일들이 지천입니다. 유명한 화가 르느아르는 퇴행성 류머티즘으로 몸이 마비됐고, 전쟁 중 아들 둘이 부상을 당하는 불운에 아내까지 잃었습니다. 하지만 마비된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워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르느아르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주변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르느아르가 자신이 불행하다고 자책하며 절망했다면 그 위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요. 불행은 불행을 느끼는 자에게 돌아갑니다. 행복은 행복을 느끼는 자에게만 돌아갑니다.

 

행복이라는 토씨 찾기

 

행복의 반대말은 뭘까요? 불행일까요? 행복의 반대말은 외우지도 입에 올리지도 않는 게 상책입니다. 불행의 반대말을 외워야 할 때입니다. 용서하고 아끼고 이겨내고 참아내는 말들을 가슴에 품고 읊조리면 가슴이 따뜻해 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늘 소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당신은 행복과 희망이라는 말을 하루에 몇 번씩 말하며 살고 있나요. 당신에게, 참 좋은 당신에게, 행복하다고 그래서 희망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저는 매번 이번 가을은 참 특별한 가을이 될거야 라고 혼잣말을 합니다. 이런 말들이 널리널리 퍼져간다면 지금의 현실보다는 훨씬 나은 현실이 오겠죠. 이번 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가을이 되겠죠.

 

 

_ 중앙대학병원 사보 <참좋은 중앙>, 2011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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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for-munhak.or.kr/idx.html?Qy=letter&nid=484&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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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왕성 리얼리티

산문 2012. 7. 5. 17:55

명왕성 리얼리티

 

 

이재훈

 

 

 

1.
이 짧은 글은 시에 대한 해설보다는 시 속에 내재된 내 삶의 몇 가지 편린들이다.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에는 삶의 여러 사연들이 녹아 있는 시편들이 많다.

 

 

파릇파릇한 우주에
내 몸을 던지고 싶다.
성난 가시와 붉은 피부를 가진
장미로 태어나고 싶다.
- <비비디 바비디 부> 부분

 

 

늘 이런 식이다. 거대한 우주와 싸우고 싶은 객기. 언제부터 나는 우주의 변신술을 탐했을까. 아마도 이 땅을 너무 사랑해서가 아닐까. “누구의 소유도 아닌 몸”(<비상>)을 일찍부터 알았기 때문일까. 시인이라는 자의식 때문에 괴로웠다. 어디를 가든 ‘나는 시인이지’라는 다소 과장된 자만이 날 옭아맸다. 내 삶은 그저 그런, 퍽퍽한 일상을 겨우 살아내는 시간들에 지나지 않았다. “시인이었다가 일용근로자였다가 백수건달이었다가 독학자”(<비상>)가 되는 일상이었다. 그러한 일상을 하나씩 꺼내어 들여다보는 밤의 시간들을 즐겼다. 나는 밤을 사랑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 공중이 없는 하늘을 준 밤, 사방이 꽃천지를 만들어 준 밤. 불면의 밤들. 숙취의 밤들.
그런 일상 가운데 한 줌 먼지로 돌아갈 내 영혼의 지난함을 생각했다. 오죽하면 “소멸이 내 먹는 밥”이라고 했을까.(<연금술사의 꿈>)

 

 

나는 육십억 분의 일일 뿐.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맥주 캔. 먹다 남긴 컵라면. 참기 힘든 소음. 역겨운 화장 냄새와 비둘기 똥 냄새로부터.

계곡의 하얀 물보라를 헤치고, 난파된 얼음 위에 올라서 저물어 가는 사람들의 삶을 감상하고 싶다. 그러면 아주 쓸쓸하겠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아무도 없이 고독하겠다.
- <매일 출근하는 폐인> 부분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매일 출근을 했다. 2호선은 순환선이었다. 끝없이 돌고 도는 내 삶의 주기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지옥철’ 2호선에서 더 절실한 존재의 간절함을 보았다. “아름다운 눈을 가진 인간들”(<미궁의 열두 번째 통로>)이라는 싯귀는 지하철에서 건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전철이 한강 위를 지날 때면 강을 바라본다. 지하에서 강물 위로 나와 하늘을 볼 수 있는 공간. 그 공간을 보는 눈들은 모두 아름다웠다.
매일 출근하는 폐인으로 살면서, 2호선의 전기문명적 실존을 겪으면서 지하철 무가지 신문에서 ‘명왕성 되다’라는 단어를 만났다. 기사를 찢어 주머니에 넣고, 혼자 중얼거리며 흐뭇해하던 생각이 난다. 명왕성 되다, 명왕성 되다. 참 멋진 말이야. ‘명왕성 되다’는 알려진대로 태양계 행성 지위 박탈을 계기로 ‘격하하다’ ‘추락하다’라는 의미가 추가된 단어 ‘pluto’의 과거분사형 ‘Plutoed’이다. 나는 스스로 명왕성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애걸복걸 자본문명에 의탁하거나, 모른체하면서 생뚱맞게 살아가거나 모두 명왕성 될 테니까.
나의 변신술은 더 남달라졌다. “때론 동물이었다가 때론 식물이고/ 때론 명징했다가 때론 무질서합니다./ 나 또한 상징에 불과합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시간들이었다. 인간에게 욕망은 살아가게끔 하는 동력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무기력에 빠져 지내면서, 제발 내게 찾아와라, 그 어떤 욕망이여, 라고 되뇌었다. 원초적 욕망 이외의 것들이 내겐 필요했다. 그러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한 친구가 이 세상을 등졌다.

 

 

강에 뼛가루를 뿌렸다지. 하얀색 행사용 면장갑을 끼고 만졌지. 뜨거운 그대의 뼛가루. 숨소리가 들린다지. 뼛가루끼리 서로 얽혀 스삭스삭 소리 들린다지. 형, 형아. 아직 따뜻한 형. 그대의 동생이 울다가 나를 보며 웃는다지. 형님, 만져보세요. 아직 형이 따뜻해요. 마지막은 흔적이 이유라지. 귀에 그대의 목소리가 흘러내린다지. 그대 안에 잠든 열망을 찢기로 했다지. 아아 우리는 정탐꾼이었지. 세상을 향해 깃발을 들기로 했는데. 이 애매한 고통이 무언가를 이제 알겠는데. 비가 많이 내린 날. 어머니의 물에서 나온 그대. 비와 함께 물로 가다, 물속에 묻혔다지. 그 물길이 통하는 곳에 햇살이 슬쩍 몸을 뉘였다지.
- <대황하 4> 전문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생각했다. 물에서 나와 물로 간 친구를 생각했다. 십년 전 들었던 쿠스코의 음악을 우연히 다시 들었고, 대황화라는 곡을 다시 들었다. 그때부터 물에 대한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꿈틀댔다. 대황하 연작은 그때부터 10편 이상이 씌어졌다. 누런 황톳물을 통해 나는 무엇을 간절히 바랐던 것일까. 물과 어머니, 시간, 존재, 구원, 그리고 비상. 물의 이미지를 통해 오를 수 있는 상징의 첨탑까지 오르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 나는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다니던 “소음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땅”(<新林洞>) 신림에서 월곡으로 이사왔다. 이제는 6호선을 타고 다닌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어둠이 안겨주는 거대한 정적을,
위대한 침묵을
나는 알지 못했다.
상처받은 한 친구를 생각했고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생각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바쁜 거리의 일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산책길엔 언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길목과 길목이 혀를 내밀어
내 몸을 떠받치고 있을 뿐.
타인의 인격을 규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은,
그 짧은 시간만큼은 황홀하겠지.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
달빛이 있는 골짜기다.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그 햇살의 순간처럼.
-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부분

 

 

월곡으로 이사온 뒤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월곡은 번화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네온사인도 호객꾼도 없었다. 내게 월곡은 장 그르니에가 오르던 아프리카의 산타쿠르즈 언덕과도 같다. 언덕을 오르고, 또 언덕을 오르면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에 당도한다. 그토록 원망했던 “나의 메디나,/ 시인들의 공화국” 서울. 이제 이 땅과 명왕성의 그 긴 침묵을 깨트려야 할 때이다.
아직 십 분의 일도 말을 못했는데. 명왕성 리얼리티는 아직 멀었는데, 원고량은 이미 넘쳐버렸다. 늘 이런 식이다. 아껴두련다. 다음 회 이어지는 리얼리티를 위해.

 

_ <시에>, 2011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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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弔詞)


낙타의 시인 김충규.
당신은 낙타의 짐을 홀로 지고 몽상의 숲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순백의 시인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모두 당신의 고통과 삶의 무게와 슬픔에 적잖이 놀랐고, 그 모든 통각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당신의 시를 보며, 뛰어난 시인이 출현했다고 귓속말을 했습니다. 그제서야 시 밑에 적혀 있는 당신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우리들 모두 당신보다 당신의 시를 먼저 만났을 겁니다.
당신은 태어나자마자 얻은 흉터와 같은 언어로 뜨거운 마음을 잠시 식혔겠지만, 당신이 시단에 제출한 언어는 저 막막한 사막을 홀로 걸어가는 고독한 단독자의 발자국 같았습니다.
당신이 온몸으로 발열하여 새긴 오감의 언어들을 이제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안타깝고, 너무도 원통하고, 너무도 화가 났습니다. 더 오래오래 계셔야 할 분인데, 왜 이리 서둘러 저 먼 길을 가셨냐고 따지고 싶었습니다. 남아 있는 가족들의 슬픔을 생각하니 이 참담한 울분을 이루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마지막까지 오로지 시였으며, 시인이었고, 시인으로 남았습니다.
몽상의 숲에서 거둬들인 당신의 마지막 말들은 온통 시 얘기뿐이었습니다. 완전한 시, 완벽한 시라는 불가능을 향해 늘 온몸을 불살랐던 당신의 열정을 우리는 오래오래 기억할 겁니다. 당신의 뜨거운 말이 우리의 가슴으로 밀려들면 축축한 물의 언어가 된다는 신기한 체험을 자꾸만 곱씹어봅니다. 잊지 않으렵니다. 당신의 시와 살냄새 풀풀 풍기는 당신의 문장들을.
당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늘 자상하고, 따뜻한 시인이었습니다. 늘 아내와 자식들을 걱정했던 성실한 가장이었으며, 친구들에게는 의리있는 사내였고, 자신의 시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엄격한 시인이었습니다.
남아 있는 저희들이 부끄러운 밤입니다.
남아 있는 저희들이 서러운 밤입니다.
당신은 끝내 시인이었다는, 아름답고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가장 소중한 추억을 남긴 채
저 먼 나라로 몸을 뉘이셨습니다.
이제 행복한 시만 쓰며
부디, 편안한 곳에서 영면하소서.

남아 있는 시인들의 말을 대신 받아
이재훈 올림.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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