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사랑

산문 2017. 7. 18. 17:38

서툰 사랑

 

이재훈

 

 

나는 사랑에 대해 서툴다. 사랑하는 데에는 자격이 없다. 누구든지 사랑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사랑에 서툴고, 힘들다. 매번 도망다니다가 끝나버린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에게 사랑은 형벌에 가깝다. 그들에게 사랑은 감정적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 전해주는 감정적 격동을 이겨내지 못한다. 쉽게 아파하고 쉽게 의심하며 쉽게 좌절하고 쉽게 파탄난다. 사랑이 주는 기쁨과 행복은 짧지만 사랑이 주는 고통은 길다. 긴 고통과 짧은 행복을 맞바꾸어야 하는 사랑의 운명 앞에서 늘 울부짖는 일. 사랑은 그런 일이다. 사랑하는 자는 늘 울부짖는다. 저녁의 쓸쓸함을 아침의 허망함을 오후의 무력함을 모두 사랑의 일로 여긴다. 그런 사랑에 대해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내게 있는가. 관념적인 사랑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한데 사랑의 실상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여전히 나는 사랑에 대해서 서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사랑에 서툴지 않는 사람이 있기라도 한 걸까.

소년의 사랑이라고 말할까. 그녀는 동갑내기 친구였다. 옆집에 살았다. 게다가 같은 교회에 다녔다. 그녀가 아침에 밥 먹는 소리까지 들렸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인사도 들을 수 있었다. 저녁이 되면 자연스레 우리는 교회에 모였다. 당시 교회는 공식적인 남녀 모임의 장소였다. 그곳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곳이었다. 교회가 아니라면 어디서 여학생들을 볼 수 있었을까. 빵집은 너무 닭살 돋았고, 롤라장은 너무 번잡했으며, 뒷동산은 너무 위태로웠다. 예배당 옆에 지어진 작은 집이 있었다. 누구나 그 집을 교육실이라 불렀다. 실제 많은 교육이 이루어졌다. 교육실에서 돌려가며 기타를 치고, 이문세나 김현식을 들었다. 때론 015B나 푸른하늘, 봄여름가을겨울을 듣기도 했다. 물론 <실로암>과 같은 복음성가도 불렀다. 교회는 인기가 많았다. 절에 다니는 애들도 교회에 왔다. 싸움하는 애들도 교회에 왔다. 노는 여자애들도 노는 남자애들도 왔고, 공부만하는 애들도 왔으며, 대체로 놀다가 간혹 공부도 하는 숨은 날라리들도 왔다.

그곳에서 그녀는 어린 주모의 역할을 했다. 우는 애들을 달랬고, 보채는 애들을 혼냈으며 까부는 애들을 조용히 시켰다. 우리는 늘 진지했다. 세상에 버려진 십대들의 청춘을 낭만적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매년 교회에서 열리는 문학의 밤은 낭만의 하이라이트였다. 교복에 넥타이를 매고 주찬양과 홍삼트리오를 부를 때면 모든 여학생들이 우리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 즈음부터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옆집 친구인 그녀가 옆집 여인으로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라고 해야겠다. 한밤중이 되면 김희애의 인기가요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 놓고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때론 그녀와 손을 잡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내 키가 십 센치만 더 컸더라면 하는 생각도 했다. 그녀는 나보다 키가 컸다. 그녀 옆에 서면 늘 까치발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편지를 쓴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들은 모두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우리들 중 거의 대부분이 그녀에게 답장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어느 누구도 그녀의 손을 잡아본 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털어놓는 게 우정의 일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편지는 늘 편안했다. 나는 늘 편지에 대고 하소연했다. 십대의 불안함과 고독함과 원인을 알 수 없는 무기력함에 대해. 그리고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그녀의 고마움에 대해.

그녀와의 편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계속 이어졌다. 물론 나만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은 게 아니었다. 내 옆의 친구도 또다른 친구도 그녀와 가끔씩 편지를 주고받았다. 때론 서로 편지의 내용에 대해 캐묻기도 했다.

어느 날. 그녀가 대학에 들어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 중 누구도 그녀의 애인은 아니었으니까. 우리들 중 누구도 그녀에게 고백한 적은 없었으니까. 고백으로 인해 점점 복잡해지는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해 우리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어쩌면 아무도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애인을 만든 것일 지도 모른다. 그녀는 우리들 중 어느 한 사람의 고백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마음에 품고 있었던 그 한 사람이 바로 나라고 모두 같은 생각을 했던 시간들.

그녀는 스무 살이 넘고 스물한 살이 되는 1월의 추운 겨울날, 이 세상을 떠났다. 교통사고였다. 마치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일처럼. 애인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 변사를 당했다고 한다. 우리는 태어나 처음으로 맞이하는 죽음의 일 앞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허둥지둥 그녀와 제대로 작별하지 못한 채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다. 아무도 마음속에서 그녀를 보내주지 않았다. 한동안 서로 연락을 안했으며 그렇게 또 시간은 흘러갔다.

그때 무언가 선뜻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사랑할 자격이 없는 거라고. 어쩌면 그게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에 대해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막연하지만 무언가 알 것도 같은 그런 어렴풋한 사랑이 잠시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_ <시와 표현>, 2016년 11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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