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하루
이재훈
하루
<멋진 하루>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은 하정우와 전도연. 둘은 연인이었다가 1년 전에 헤어진 관계이다. 전도연은 하정우를 일 년 만에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 빌려준 돈은 350만원. 헤어진 사이에 좀 야박하다 싶지만 사정을 들어보면 둘 다 딱하다. 지금 이들은 자신의 찌질하고 쪼잔함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돈이 급하니까. 이후 영화는 빌려준 돈을 받으려는 전도연이 돈을 갚는다는 하정우를 따라다니는 과정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특별히 기억나는 어떤 하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우리에겐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온다. 결혼도 사업도 실패하고 경마장이나 전전하는 하정우를 따라다니다 보니 그렇게 밉지만은 않은 것이다. 일상 속에 존재하는 미묘한 감정선이 아주 섬세하게 그려진다.
<멋진 하루>는 일상의 힘이 가진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인간의 일상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어떤 나름의 이유와 변명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이유와 변명들이 하찮거나 심오하거나 하는 문제는 개인이 바라보는 입장차이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공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은 고백에 가깝다. 고백은 늘 부끄러운 것이다. 자랑스러운 고백은 그다지 재미가 없다. 늘 반복되는 일상. 그 일상의 몇 순간을 고백하려고 한다.
빈 강의실
나는 강의를 한다. 구체적으로는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강의하고, 내가 운영하는 창작반에서 시창작을 강의한다. 일주일에 하루는 잡지사로 출근해 일을 본다. 강의를 한 지는 15년 정도 되었다. 가능하다면 한국의 마지막 시간강사가 되고 싶다. 그만큼 끝까지 하고 싶다는 말이다.
나는 강의가 끝나고 난 후, 강의실에서의 텅 빈 침묵을 좋아한다. 모두 떠나고 아무도 없는 빈 강의실에서 몇 분 동안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있다. 빈 강의실에는 알 수 없는 흔적들이 존재한다. 파장 이후에 오는 쓸쓸함과 안도감, 그리고 허전함이 빈 강의실에는 존재한다.
학교 다닐 때에도 빈 강의실을 주로 애용했다. 도서관보다 빈 강의실을 찾아다니며 공부하면 집중이 더 잘 되었다. 비밀이지만 빈 강의실에서 밀애를 즐기기도 했다. 빈 강의실에 슬그머니 들어오는 햇살을 마주하면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다. 그 햇살에 자꾸 손을 갖다 대보는 것이다.
버스
일 때문에 일주일에 몇 번은 버스를 탄다. 내가 사는 곳은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꼭 마을버스를 타야 한다. 마을버스는 대개 거칠다. 작은 버스이지만 만만히 보면 안 된다. 손잡이를 꼭 잡고 타야 한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면 잠시 버스에서는 낭만을 즐길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시간이 자주 오지는 않는다. 버스에서 나는 주로 팟캐스트를 듣거나 시집을 읽는다.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에는 시집을 읽고, 서서 갈 때에는 팟캐스트를 듣는다.
일주일에 한번은 고속버스를 탄다. 지방강의 때문이다.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지방행 고속버스를 탄다. 두 시간 정도 걸린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 버스에서는 주로 잠을 잔다. 어떤 음악이 내 잠에 도움을 줄까를 고민하며 버스에 오른다. 잠을 자다가 깨기도 하고, 잠을 자다가 차창 밖을 구경하기도 한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에서도 잠을 잔다. 어떤 날은 음악을 듣기도 하고, 어떤 날은 영화를 보기도 한다. 어떤 날은 책을 읽기도 한다. 그리고 간혹 어떤 날은 시를 쓰기도 한다. 버스에서 쓴 시는 내게 몇 안 되는 생활시이기도 하다. 아래는 최근 발표한 버스에서 쓴 시.
차창 밖으로 비가 내린다.
버스를 타기 전에는 맑았던 하늘인데
집으로 가는 길에 비가 내린다.
지방 소도시의 대학에서 시간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갈 때면 늘 가혹하게 막힌다.
모두 저마다 집으로 가거나
외로움을 달랠 사람들을 찾아가거나
저녁 일터로 가는 길일 것이다.
휑한 마음 한구석에 빗방울이 또르륵 떨어진다.
매일 보따리를 들고 어딘가로 나서는
장돌뱅이의 저녁이 궁금하다.
언제쯤 집으로 당도할까.
쉬어야 할 집은 멀고
목은 더 컬컬해진다.
버스 뒷자리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연유인지 생각하다
뒤로 가서 가녀린 등을 토닥거려주고 싶지만
모른 척 그냥 눈을 감는다.
도착할 집은 멀고 잠은 오지 않는다.
버스가 도착할 무렵이면
가까운 막걸리집부터 찾을 것이다.
컬컬한 목이 바짝 마른다.
― 「귀가」 전문
프로야구
매일 하는 일상 중 하나는 프로야구 하이라이트를 보는 일이다. 전 구단의 하이라이트 및 경기 영상을 다 본다. 시간이 있는 날은 야구중계를 저녁 내내 본다. 함께 사는 가족들의 원성을 들으면서 꿋꿋하게 본다. 가끔씩 MLBPARK나 STATIZ나 Foulball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눈팅을 하곤 한다. 일면에 몇 번씩 경기장을 찾기도 한다. 그런 날은 맥주를 마시다가 경기에 집중을 못하지만. 나는 한화 이글스 팬이다. 요즘 야구보는 게 많이 즐겁다. 그 이유는 야구를 좋아하는 분들은 모두 알 것이다.
카프카독서실
책은 늘 읽는 것이므로. 늘 일주일에 몇 권의 시집을 읽는다. 그리고 다른 책들도 읽는다. 누워서 읽거나 기대어서 읽는다. 요즘 읽던 그 책이 어디 갔는지를 자주 찾아다닌다.
카프카독서실에 관한 얘기는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내 방이 카프카독서실이다. 하지만 지금 내 방을 초등학교 2학년 아들에게 빼앗길 위험에 처해 있다.
지금 내 책상에 쌓여져 있는 책들은 다음과 같다. 십여 권의 문예지. 최근 배달된 십여 권의 시집. 무라카미 하루키의 <버스데이 걸>, 기욤 뮈소의 <파리의 아파트>, 헤르만 헤세의 <최초의 모험>, 김은상 시인이 쓴 소설 <빨강 모자를 쓴 아이들>, 박영규의 <조선전쟁실록>.
지금 이 글을 쓰는 일요일 오후. 읽던 책을 덮고 프로야구 중계를 본다. 읽던 책을 덮고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일상이다.
- <시현실> 201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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