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이재훈
산책길엔 언덕이 있다.
그날은 이상했다.
오르고 올라도 닿지 않는 거리를 헤맸다.
혼을 빼앗긴 것처럼.
늪에 빠진 것처럼.
뒷덜미를 놓아주지 않는 불빛이 있었다.
사위가 어둠에 둘러싸이면서
상점엔 불이 하나씩 켜졌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어둠이 안겨주는 거대한 정적을,
위대한 침묵을
나는 알지 못했다.
상처받은 한 친구를 생각했고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생각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바쁜 거리의 일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산책길엔 언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길목과 길목이 혀를 내밀어
내 몸을 떠받치고 있을 뿐.
타인의 인격을 규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은,
그 짧은 시간만큼은 황홀하겠지.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
달빛이 있는 골짜기다.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그 햇살의 순간처럼.
- 시집 <명왕성 되다>(민음사, 2011) 중에서
골목길 산책자
이재훈
장 그르니에는 산책자의 위의(威儀)를 가장 매력적으로 드러낸 이다. 우리에게 산책이란 그저 평범한 시간을 가장 평온하게 보낼 수 있는 생활의 한 장면이다. 하지만 그르니에에게 산책은 여러 가지 철학적 의미를 담은 고귀한 행위였다. 심지어 그는 산책의 정의와 좌표들을 설정하고 산책의 시간과 산책하는 자의 진귀한 내면을 파헤쳤다.(「산책」, <일상적 삶>, 장 그르니에(권오룡역), 청하, 1988) 즉 산책에도 여러 가지 성격의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강제에 의한 산책, 이성에 의한 산책, 사회성에 의한 산책, 철학적인 산책, 자연과의 융합수단으로서의 산책, 완성된 산책 등이 그것이다.
저 유명한 칸트의 저녁산책은 정기적인 휴식의 산책이다. 그에게 산책은 자신의 작업으로부터 벗어난 유일한 휴식의 시간이었다. 이에 반해 니체의 산책은 자신의 작품을 구상할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의 연속이었다. 루소의 산책은 몽상과 명상을 장려한 산책이었다고 한다. 장 그르니에는 루소의 산책은 타인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도망가게 해주는 산책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대부분 이런 산책을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으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기 위한 산책.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산책했을 당시의 모든 장소를 아주 상세하게 묘사해주는 방식을 택했다. 즉 가시적이고 관조적인 산책의 즐거움을 일깨운 것이다. 하지만 열자(列子)는 산책에서 관찰하는 기쁨을 찾지 않고 명상하는 기쁨을 찾았다고 한다. 이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기쁨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산책이라고 말한다. 열자의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산책하되 완전하게 하라. 완전한 산책자는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걸으며, 그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바라본다…… 나는 네게 어떠한 산책도 금하지 않지만, 완전한 산책을 할 것을 충고한다”고.
한동안 나도 산책을 했다. 아니, 산책을 한다는 자의식 없이 그냥 걸었다. 내려야 할 지하철 한 두역 전에 내려 걸었다. 내가 주로 걸었던 길은 집 주변의 골목길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골목길을 걸으며 내가 욕망하는 것, 놓고 싶은 것, 바라보고 싶은 것, 듣기 싫은 것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런 즈음에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라는 시를 쓰게 되었다. 골목길을 걸으며 나는 언젠가 읽었던 장 그르니에의 산책을 떠올렸다. 그의 책 <지중해의 영감>(청하, 1988)은 내 감성의 세포들을 흔들어 놓았다. 물론 그의 산책과 나의 산책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골목길이 내 삶의 길이 아니라 지중해 도시의 어느 신비한 골목길이길 바랐다. 어떻게 보면 위의 시는 내 산책의 비망록과 같은 시이다. 산책을 통해, 산책을 통한 시를 통해 나는 조금 위로받았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그러다 그렇게 골목길을 걷는 것도 조금 뜸해졌다. 이제는 골목길을 걸으면 가끔씩 눈물이 난다. 한없이 작고 아기자기하고 예쁜 길, 담쟁이와 붉고 노란 꽃들이 담벼락을 타고 넘는 길, 욕망과 욕정이 자욱한 길, 더럽고 추하고 가난한 길, 시끄럽고 위험하고 울퉁불퉁한 길, 소년소녀들이 욕하고 침을 뱉고 담배를 피우는 길, 취객들과 노인들과 부부들의 싸움소리가 새어 나오는 길, 이 모두가 공존하는 길. 그 골목길이 내 삶이기 때문이다.
다시 장 그르니에로 돌아가 보자. 그는 알제리의 오랑에 있는 산타크루즈에서 산책을 한다. 태양의 발자취가 언덕을 휘감는 아름답고 신비한 풍경을 기적이라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을 직시한다. 산책 속에서 만나는 거대한 풍경으로 삶과 존재의 비밀을 언뜻 알게 된다. 이 모든 순간들이 우리를 채워주기 보다는 비워버린다는 깨달음까지도. 그의 일상은 고귀한 산책의 시간을 누리는 것이었다. 여전히 그의 산책은 가장 멋있다. 나의 골목길 산책도 어떻게 변할 지 기대된다.
_ <시평>, 201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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